근현대사 역사탐방 34탄
온 누리에 햇볕이 반짝 빤짝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081 12.12사태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13 5.17쿠데타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19 6.29선언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89 초원복집사건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23 3당 합당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25 문민정부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60 IMF 구제금융 공식 요청
http://cafe.daum.net/cultureSpice/LnIy/107 IMF 외환위기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39 진보정권 10년 1-1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40 진보정권 10년 1-2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98 미선. 효순 사건
http://blog.daum.net/allspices/429 노벨상 수상
김대중 (金大中, 약칭 DJ, 1924년 ~ 2009년 8월 18일)
출처 : 연합뉴스
일관된 정책실천
1998년 2월 25일 취임사를 통해 화해와 협력, 평화정착에 토대를 둔 남북관계의 개선을 천명하면서 대북정책 추진원칙으로 3대 원칙과 함께 남북기본합의서의 이행을 위한 특사교환 및 정상회담 개최용의를 표명, 100대 국정과제에서 평화통일기반조성을 위한 7개 목표 제시했다. 이 같은 새 정부의 대북정책은 이전 정부가 추진해 왔던 정책들과 큰 차이는 없으나 일관되게 실천으로 옮겨졌다는데 큰 차이점이 있다. 안보위협이 계속됐지만 정부의 대북포용정책기조는 흔들림이 없었다.
대북정책의 특징은 한마디로 대북포용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했다는 데 있다. 국내의 일부 보수계층과 북한으로부터는 ‘일방적인 짝사랑’, ‘뒤집어놓은 반북대결정책’으로 협공을 받았지만 국민의 정부는 흔들림없이 포용정책을 추진했다.
금강산 관광과 소떼 북송은 대북화해ㆍ협력정책의 뚜렷한 성과로서 선명하게 각인되고 있다. 북측으로부터도 적극적인 호응이 없는 상황에서 미국과 일본 등 주변국들의 대북 경제제재 조치에 반하면서까지 금강산 관광을 추진, 기어코 성사시킨 것은 남북 관계 50년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획기적 조치였다.
1998년 4월11∼17일 중국 베이징에서 ‘국민의 정부’ 출범이후 처음으로 남북 당국대표회담 ‘비료회담’이 열렸다.
1998년 8ㆍ15 경축사에서 밝힌 남북 장ㆍ차관급 상설대화기구 제의와 특사파견 용의표명
민간급 교류의 확대
당국간 교류
남북관계 전기
1998년 6월 16일 정주영 명예회장의 판문점 통과 500마리 소떼 북행 ‘세계적 이벤트’를 연출
1998년 10월27일 소 501마리와 승용차 20대 재방북과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 면담
통일소 폐사 논란
현대그룹의 금강산관광사업 성사
1998년 11월4일 북측 ‘금강산 관광세칙’
햇볕정책에 강한 거부감 표출
‘냉온탕을 오간 대북정책’이라는 비판
북한 미사일 시험발사
금창리 지하핵의혹 문제
대북 포괄적 접근 구상과 윌리엄 페리
북한 잠수정 침투
북한군 13명 군사분계선 월경
묵호 무장간첩 침투
대포동1호 실험발사
강화도 간첩선침투
남해안 반잠수정 침투
미국의 대북경제제재
대북정책조정감독그룹
TCOG(대북정책조정감독그룹)
3월 16일 북ㆍ미 금창리 협상 타결
9월 12일 북한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
페리보고서 공개
북ㆍ일 수교교섭 본회담 개최에 합의
남북정상회담
김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물꼬터진 남북한 교류
현대사태
주한미국 관련 사건 및 SOFA
2000년 외교정책 방향
베를린선언
다자외교장의 남북관계 개선지지
성공적인 ASEM서울회의 개최
외교부 인사개혁
매향리 사태
6.25 50주년 기념사업
주한미군 독극물 방류사건
노근리 진상조사
경기도 연천 땅굴사건
북한 ‘5개섬 통항질서’ 선포
남북 국방장관 회담
경의선ㆍ도로 연결사업
남북 군사실무회담
미군 전투기 2대 월경
남북 경협
남북 정상회담과 남북경협
북한문학 소개 활발
한층 가까워진 북한미술
영화인 분단후 첫 단체 방북
활발해진 남북 종교교류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남북한 올림픽 동시입장
북ㆍ미관계 화해무드
미국 대통령 선거
국가미사일방위(NMD) 체제 논란
핵볕정책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대한민국의 대외 정책으로, 북한에 협력과 지원을 함으로써 평화적인 통일을 목적으로 하는 정책이다. 햇볕정책은 비유법으로 사용된 상징어로 대북포용정책 또는 포용정책으로도 불리고, 공식적인 명칭은 대북화해협력정책이다. 화해협력정책의 공식 영어 명칭은 'Engagement Policy'이나 'Sunshine policy'라는 명칭이 더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고, 단절을 극복하고 개방하며, 대결하지 않고 협력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많은 면에서 1970년대 서독의 동방 정책에 기초했다. '햇볕'이라는 이름은 바람이 벗기지 못한 사람의 외투를 따스함으로 벗긴 태양에 관한 아이소포스의 우화에서 비롯되었다.
이전에는 북한과의 관계는 형식적이고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군사적 대치관계에 놓여있었으나, '선평화 후통일'을 통일의 기본원칙을 계승해 국민의 정부에 들어서 교류를 기반으로 한 화해, 협력 등을 강조한 포용정책으로 전환되었다. 현대아산을 비롯한 중소기업들이 참여하여 금강산 관광과 이산가족 상봉, 개성공단 조성 등 성과를 이뤘다. 그러나, '쌀 퍼주기' 군량미로 비축 전향으로 비판을 받는다.
80년대 이후, 북한의 핵개발 의혹은 한반도 안보의 핵심 문제가 되었다. 1994년 북한이 미국과 제네바 합의를 체결한 이후, 북핵 문제는 일단 해결되는 것처럼 보였다. 1999년 미국 클린턴 정부의 페리 국방장관은 페리보고서에서 북한이 기본 합의를 지킬 것이며 북한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한미간 갈등을 일으켰던 김영삼 정부와 달리,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은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대북 문제에 대해 클린턴 정부와 비슷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 초기에는 북한과의 대화에 소극적이였지만 2000년 3월 10일 ‘베를린 선언’이 나오면서 화해 협력 분위기가 싹텄다. 2000년 6월 13일에서 6월 15일까지 최초로 남북한의 지도자인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1998년 11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한 사람들은 금강산 관광에 나서게 되었으며 정부 출범 이후 2000년 5월 말까지 1만 667명이 북한을 방문했는데, 이는 1989년 방북 허용 이후 전체 방북 인원의 80.5%에 해당된다. 남북의 연간 교역 규모도 3억 달러를 넘어섰다. 정부 차원의 인도적 지원으로 북한에 2,753억원 비료를 무상으로 지원, 10년 거치 20년 분할 상환, 연이율 1% 조건으로 식량차관 2,567억원을 북한 제공했다. 또 정경분리 원칙에 따른 경제 교류를 활성화했고, 인도적 차원의 대북 식량 지원과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주력했다.
3원칙과 정경 분리
첫번째, 북측의 무력 도발을 허용하지 않는다.
두번째, 남측은 흡수 통일을 시도하지 않는다.
세번째, 남측은 화해와 협력을 추진한다.
대북 포용정책인 이른바 햇볕정책도 정부 출범 직후부터 추진되었다. 1998년 6월 북한과 금강산 관광, 개발 사업에 합의, 단독 사업자로 선정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경유해 방북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 경제협력에 대해 회의를 벌였다. 11월 첫 금강산 관광선인 금강호가 출항, 1999년 대북 사업을 위해 현대아산 설립, 평양 체육관 건설하는 등 대북 협력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러한 노력은 해외에서도 인정받아 1999년 5월 홍콩의 시사주간 아시아위크가 선정한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올랐다. 2000년 6월 15일 남북 정상 회담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이는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으로, 이 자리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골자의 통일 방향에 합의한 6·15 남북 공동선언 발표, 개성공단 설립에 합의한다. 그리고 햇볕정책을 통해 남북간의 관계를 진전시키고, 독재 정권 시절 한국의 인권에 헌신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2000년 2월 8일 일본 TBS 지쿠시 데쓰야 NEWS23 특별 회견 "김정일 총비서는 지도자로서의 판단력과 식견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라는 발언으로 한나라당에게 색깔론 공세를 받게된다. 여기에 대북 불법 송금 사건이 터지면서 햇볕정책은 본격적 비판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이 있기 전인 2000년 6월 12일 5억 달러를 현대그룹을 통해 북한에 송금한 이 사건은, 2003년 특검으로 현대상선, 현대전자, 현대건설 등이 5억 달러의 비밀 자금을 마련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특검 도중인 2003년 8월,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 자살 파문이 일었다. 여기에 측근인 박지원은 SK등 대기업 자금 1억원 수수 및 대북 불법 송금 혐의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으며 특검은 종결되었다. 한편, 퇴임 후 2004년 파이낸셜 타임스 인터뷰에서 "북한에 1억 달러를 지원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라고 대북 불법 송금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북한은 1999년 제1연평해전, 2002년 제2연평해전 등 두차례 도발을 감행했으며 2003년엔 미국과의 대화가 진행되지 않을시 핵실험을 강행선언으로 제2차 북핵 위기가 왔다.
비판
1999년 6월 서해 연평도 인근에서 북한 경비정의 NLL 침범으로 인한 제1연평해전이 발발하여 햇볕정책의 평화에 대한 실질적 성과에 대한 논란이 생겼다. 이에 보수세력은 포용정책의 폐기론을 주장했다. 포용정책을 포기하거나 적어도 전술적 수정을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결과적으로는 일부 북한 당국에 믿음을 주는 효과를 거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햇볕정책의 투명성에 대한 의혹으로 대북송금특검(2003년)이 실시되어, 특검은 대북 송금 된 1억달러가 "정상회담과 관련돼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햇볕정책은 주로 한나라당, 보수언론 등의 보수진영이 실패작으로 평가한다. 현재 햇볕정책을 실패작이라고 비판하는 한나라당도 2007년 7월 햇볕정책을 부분적으로 동의하는 입장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당내 비판여론이 비등했고, 2009년 북한의 핵실험을 계기로, 한나라당을 비롯한 일부 보수 단체에서는 이른바 "햇볕정책 책임론"이 본격 거론되기 시작했다. 2009년 6월 15일, 한나라당 북핵특위는 "북한 핵 문제는 애초부터 북이 핵을 포기할 것이며, 협상으로 그렇게 유도할 수 있다고 믿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판단 착오"라고 말했다. 협상 의지가 없는 북한을 상대로 협상을 시도한 것 자체가 북한에 핵개발에 필요한 시간과 돈을 벌어준 셈이란 것이다. 이와 별도로, 진보진영에서는 햇볕정책에 대한 평가를 높게 세우지만 일각에선 수정론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고있다. 실제 북한의 2006년 핵실험으로 햇볕정책을 추진하던 참여정부의 지지도가 크게 손상되었으며 이는 보수정권이 재집권하는데 일조하였다.
햇볕정책과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대북 원조는 1999년 제1연평해전, 2002년 제2연평해전 발발로 인해 실효성이 떨어진다. 또한 북측에 5억달러가 송금된 대북 송금 사건에 대해서도 현대의 대북 7대 사업권 구입을 위한 송금액 중 일부가 정상 회담의 대가로 북측에 현금이 건네진 것으로 밝혀져 햇볕정책에 투명성이 부족, 6월 29일 발발한 제2연평 해전 시 유가족과 생존자들은 제2연평해전을 ‘잊혀진 전쟁’으로 부르며 당시 김대중 정권의에 대한 처우도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 늦장 대응, 국군수도병원에 박지원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만 방문, 합동영결식에 정부 인사들마저 참석하지 않았다. 이러한 행보에 대해선 당시 남북관계의 원만한 유지를 위해서 였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1969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추진한 과거 중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화해정책으로 폴란드에 대한 사죄, 동독과의 교류 등의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독일이 전쟁을 도발하여 다른 나라에 큰 상처와 피해를 준 국가라는 인식을 불식시키는 데 기여한 것과 같이 여러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더 나아가 강경책과 대화 거부가 분단을 심화시킨다는 빌리 브란트 수상의 지론에 따라 실천된 정책이기 때문에 냉전 극복을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다.
2000년 부터 한국이 북한에 제공한 약 1조원 상당의 식량차관이다. 1995년 김영삼 정부는 북한에 쌀 15만톤을 증여하였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증여 계약의 형식이 아니라 이자부 소비대차 계약의 형식으로 식량을 "빌려" 주었다. 보통 김대중 정부가 햇볕정책으로 북한에 "퍼주기"를 했다고 하나, 증여가 아니라 소비대차이다. 매년 각각 별도의 계약으로 차관이 제공되었으며,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에는 더이상 계약이 체결되지 않았다. 이자를 포함하면 대략 1조원의 차관이다. 2012년 5월 4일, 한국의 이명박 정부는 북한의 김정은 정부에 2000년 차관에 대한 첫만기가 6월 7일 도래한다며, 원리금 583만 달러를 갚으라고 통지했다. 한국수출입은행이 조선무역은행 총재에게 고지하는 방식이었다.
http://media.daum.net/politics/dipdefen/view.html?cateid=1068&newsid=20100815181818253&p=yonhap
http://www.ytn.co.kr/_ln/0101_200911241430186068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2&aid=0001956606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06&aid=0000004407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79&aid=0002083675
http://www.unikorea.go.kr/CmsWeb/viewPage.req?idx=PG0000000351
남북정상회담(2000년)
‘국민의 정부’가 일관된 대북 포용정책을 추진해온 이래 2000년 6월 13일 분단 사상 첫 남북 정상회담으로 분수령을 맞이한 한반도는 50년 동안의 상호 반목과 대립 구도를 깨고 화해ㆍ협력구도가 자리잡아간다. 남북관계가 외형적 변화뿐만 아니라 실질적 협력관계로 나아감에 따라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변 4강도 한국과의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대북 관계강화를 꾀하는 등 새로 형성되는 국제질서에 궤(軌)를 맞추고 있다. 김 대통령의 일관된 대북화해협력정책 추진과 사상 첫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와 국제정세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변화의 소용돌이 그 자체였다.
남북은 첫 정상회담에서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의 공통성에 기초한 통일지향,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과 미전향 장기수송환, 경제 등 제반 분야의 교류ㆍ협력 등에 합의한, 6.15 공동선언 발표한다. 이로써, 분야별로 통일염원의 실현을 실감케 하는 가시적인 성과들을 이뤄냈다. 또한 한ㆍ미ㆍ일 대북정책 공조를 강화, 중ㆍ러ㆍ유럽연합(EU) 등 국제사회의 지지를 등에 업고 한반도의 평화를 돌이킬 수 없는 대세로 만들어왔다. 이런 노력들은 남북한과 4강 관계를 ‘제로섬(zero-sum) 게임’이 아니라 ‘윈-윈(win-win)의 선순환’으로 만들기 위한 정부의 의지를 반영한 것으로 평가된다.
2001년 상반기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 예정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의 2차 정상회담 예정
평양 정상회담 이후 남북은 적십자회담, 장관급회담 등 후속회담 개최
이산가족의 생사ㆍ주소확인을 비롯한 인도적 사업
경협의 제도적 장치 마련
김정일도 남북 정상회담을 전환점으로 국제무대 진출의 길을 모색
클린턴 미행정부 시절 특사파견으로 ‘조ㆍ미 공동코뮈니케’ 합의
남북한 당사자 해결 논리
4자 회담의 재개
남북한이 대화를 통해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문제 논의
4강 외교
북ㆍ미, 북ㆍ일 수교교섭을 장려
북한이 중국 및 러시아, 그리고 세계은행(IBRD) 등 국제 금융기구와 관계를 강화할 수 있도록 지원
남북한이 주체가 되고 미국과 중국이 보증하는 ‘2+2’ 방식의 평화체제가 실현을 강조
공식발표
김 대통령이 베를린 선언
4월 1일자 김 대통령의 ‘북한특수’
4월 9일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의 공식 발표 ‘남북관계 중대발표’
4월 10일 공동발표 합의
남북정상회담 발표는 4.13 총선을 사흘 남겨둔 시점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야당측의 ‘선거용’ 비판에 직면했다. 선거를 앞두고 정부ㆍ여당이 대북정책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 야당 측의 주장이었다.
남북정상회담 일지
3. 9=김대중 대통령, 베를린선언
3.17=중국 상하이 정상회담 위한 남북특사 접촉(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송호경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 부위원장)
3.22=중국 베이징 남북특사 비공개 접촉
4. 7=북한, 특사교환 접촉
4. 8=남북 특사, 베이징서 정상회담 개최에 관한 합의서 서명
4.10=남북, 6.12~14일 평양 정상회담 개최합의 발표
4.14=정부,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회 및 준비기획단 구성
4.18=남한, 남북정상회담 위한 22일 판문점 준비접촉 제의
4.19=북한, 전화통지문 통해 남측 준비접촉 제의 수용
4.22=남북, 판문점 남측지역 ‘평화의 집’에서 1차 준비접촉(양영식 통일부 차관-김령성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참사)
4.27=남북, 판문점 ‘통일각’에서 2차 준비접촉
5. 3=남북, 평화의 집에서 3차 준비접촉
5. 8=남북, 통일각에서 4차 준비접촉
5.12=남한, 판문점 연락관 접촉통해 분야별 실무자접촉 제의
5.13=제1차 통신ㆍ보도분야 실무자접촉
5.16=경호ㆍ의전분야 실무자접촉
5.17=제2차 통신ㆍ보도분야 실무자접촉
5.18=남북 5차 준비접촉, 실무절차합의서 타결
5.27=남측 선발대 30명 명단통보
5.31=선발대 30명 방북, 현장 답사 및 분야별 세부사항 실무협의
6.4~5=2차 선발대 20명 방북
6. 5=남측 대표단 180명 명단 통보/북, 남측 대표단 체류 일정 통보
6. 7=3차 선발대 20명 방북
6. 9=북측 홍성남 내각총리 명의의 신변안전보장각서 전달
6.11=남북정상회담 13일로 연기
6.13=김대통령 등 남측 대표단 항공편으로 방북
김 대통령-김 국방위원장, 백화원영빈관에서 1차 정상회담
6.14=김 대통령-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만수대의사당서 공식면담
김 대통령-김 국방위원장, 백화원영빈관에서 2차 정상회담 및 남북공동선언 서명
6.15=남북 공동선언 발표
정상회담 준비
연쇄 정상회담, 미국, 일본와 ‘갈등설’ 해소 특히, 3국 정상은 북ㆍ미, 북ㆍ일 관계개선도 남북 대화와 병행 논의
김저일의 중국 방문
클린턴 대통령과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의 한반도 문제 논의
미ㆍ러 정상회담
클린턴 대통령도 “남북 정상회담이 동북아 지역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역사적 사건”
평양방문 연기
북한의 정상회담 연기 요청
13~15일까지 2박3일
북측의 ‘안전문제’
김대통령 평양도착
평양 순안공항
오전 9시 45분
10시20분 도착
“여러분이 보고 싶어 이곳에 왔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남녘 동포의 뜻에 따라 민족의 평화, 협력, 통일에 앞장서고자 평양에 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주도한 파격
인민군 의장대를 사열
백화원 영빈관까지 같은 차량 동석
남북정상회담 추진일지
1981.01.12. 김일성 국가주석 초청 및 방북 용의 제의
1981.01.19 1ㆍ12 제의를 거부
1981.06.05 ‘남북한 당국 최고책임자간 직접회담’ 제의
1981.07.01 6ㆍ5제의를 거부
1983.01.18 남북 고위급대표회담 제의
1983.01.18 1ㆍ18 제의 거부
1993.02.25 김일성 북한 주석과의 정상회담 추진의지 제의
1993.05.25 북한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특사교환 역제의
1994.02.25 김일성 북한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 제의
1994.06.17. 김일성,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의 평양 회담에서 남북정상회담에 동의
1994.06.18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정상회담 개최 전달
1994.06.20 남북정상회담 부총리급 예비접촉 제의
1994.06.22 남북정상회담 예비회담 개최 동의
1994.06.28 부총리급 비공개 예비접촉에서 실무절차합의서 채택
1994.07.01.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실무대표 접촉(판문점)
1994.07.07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통신실무자 접촉
1994.07.08 정상회담을 위한 경호실무자 접촉
1994.07.09 김일성 사망(7.8) 공식 발표(남북정상회담 무산)
1998.02.25 김대중 대통령, 취임사에서 남북 최고당국자간 회담개최 제의
1998.03.01 김대통령 3ㆍ1절 기념사에서 필요성 강조
1998.08.15 김대중 대통령 : 광복절 경축사에서 남북특사교환 거듭 제의
2000.01.05. 남북정상회담개최제의 거부
2000.01.20 김대중 대통령 남북정상회담 제의방침 표명
2000.03.09. 김대중 대통령 베를린선언을 통해 수락을 촉구
2000.03.17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첫 남북특사 중국 상하이 접촉
2000.03.22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와 송호경 북한 아ㆍ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과 베이징에서 비공개 접촉
2000.04.07 북한 베이징에서 특사교환접촉 제의
2000.04.08 남북특사 베이징 접촉에서 정상회담 개최 합의서 서명
2000.04.10 남북정상회담을 6월 12-14일 평양서 개최 합의 발표
2000년 남북 정상 회담(二千年南北頂上會談) 은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평양에서 2000년 6월 13일에서 6월 15일까지 진행한 회담이다. 회담 결과로 6·15 남북 공동선언이 발표됐다.
정상 회담 이후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북한의 남한 주최 스포츠 경기 행사 참가 등 민간 교류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남북 당국간 회담이 지속됐으며, 북한은 일본, 미국과도 화해 분위기를 유지하며 국교 정상화 교섭에 나섰다. 김정일의 조기 서울 방문도 예견됐으나 국제정세의 급변 등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1948년 한반도가 분단된 이후로, 두 당국의 대표가 처음으로 만난 회담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 정상회담과 햇볕정책을 통해 한반도 평화를 증진시킨 공로로 2000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는 과정에서 돈거래가 오고갔고 2004년 대북송금특검이 도입돼 수사를 했다.
김정일의 목적
북한은 김일성 사망 당시 경제 실패와 냉전에서 불리한 상황에서도 김정일은 1989년 ~ 1999년까지 사생활에 탕진해오다 정권유지에 대한 압박감과 미국을 의식하였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의 평양 방문과 빌 클린턴 친서
1980년대까지 남북한 정부는 양쪽 모두 정상회담의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때까지 북한의 기본적 통일노선은 사회주의 건설에 우선적 역점을 두는 '민주기지노선'과 '연방제안'으로 대표되는 평화통일노선이었다. 이때 북한은 연방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남한을 최소한의 민주주의 정권으로 규정함으로써 남한측을 대화주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남한정부도 '선 건설 후 통일론'과 '분단의 현상유지'를 통일정책의 기조로 삼음으로써 적극적 대화의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남북한 당국은 기존의 논리를 유지하면서도 실질적 대화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1981년 1월 12일 전두환 대통령은 "무조건 신뢰를 회복하고 통일의 역사적 계기를 마련하기 위하여 남북한 당국의 최고책임자가 번갈아 서로 방문할 것"을 제의했다. 이에 대해 북한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성명을 통하여 거부의사를 발표하고 전제조건으로 '현 남한정권의 퇴진' 등의 내용을 포함한 5개항을 요구했다. 이후 남한정부는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을 통하여 남북한 당국 최고책임자 회담을 재차 촉구했지만 북한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1988년을 기점으로 탈냉전의 국제정세와 국민들 사이에 다양하게 분출된 통일에 대한 관심 고조로 남북한은 보다 진전된 제안을 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1989년 김일성 주석이 신년사를 통하여 "남북 최고위급회담 실현의 조건과 분위기 마련을 위해 노력을 기울일 것"을 발표했고 남한정부도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을 통하여 "남북정상회담이 빨리 열릴 것을 희망한다"고 발표
이러한 움직임은 1990년 한·소 수교라는 동북아시아 정세 변화를 맞아 더욱 가속화되었다. 1994년에는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선언(1993)으로 비롯된 긴장의 와중에서도 김영삼 대통령과 북한 양측이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의지를 보여, 마침내 1994년 7월 25일 평양에서 1차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사망함으로써 정상회담이 무산되었다. 이후 남한에 김대중 정권이 등장해 남북 화해·협력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는 과정에서 남북정상회담은 현실화되었다. 2000년 6월 13~15일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열린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향후 남북관계의 초석이 될 6·15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두 번째 남북정상회담은 2007년 10월 2일부터 4일까지 평양에서 열렸다. 이때의 남북정상회담을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라고도 부르는데, 원래는 8월 말에 열릴 예정이었으나 북한 지역의 대규모 수해로 인해 10월로 연기되었다. 10월 2일 대한민국 국가 원수로는 처음으로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넘어 평양에 들어갔다.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6·15남북공동선언의 적극 구현, 한반도 핵 문제 해결을 위한 3자 또는 4자 정상회담 추진, 남북 경제협력사업의 적극 활성화, 이산가족 상봉 확대 등을 골자로 하는 2007남북정상선언문을 채택하였다.
남북 정상 회담(南北頂上會談)은 한반도의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상 사이의 회담이다. 두 국가로 분단된 1948년 이래 다음과 같이 두 차례의 남북 정상 회담이 열렸다.
한반도가 분단 후 두 정부의 대표가 처음으로 만났다.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남한의 대통령 김대중은 북조선의 국방위원장 김정일이 공항의 트랩 밑까지 직접 나와 마중하였고, 인민군 의장대의 사열과 분열까지 거행되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김대중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 김정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2000년 6월 13일 ~ 6월 15일
6.15 공동선언의 적극 구현, 한반도 핵문제 해결을 위한 3자 또는 4자 정상회담 추진, 남북 경제협력사업 적극 활성화 등 내용을 담은 2007 남북정상선언문이 채택되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노무현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 김정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2007년 10월 2일 ~ 10월 4일
2007 남북정상선언문 (10·4 남북정상선언)
대북송금 특검·정몽헌 회장 자살
http://terms.naver.com/entry.nhn?cid=830&docId=920672&categoryId=830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8/08/2007080800253.html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8/18/2007081800294.html
http://edition.cnn.com/2007/WORLD/asiapcf/10/01/koreas.summit/index.html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대한민국의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정상회담을 통해서 발표한 공동 선언이다. 남측의 연합 단계와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안이 공통점이 있다며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하기로 합의했다.
남북 공동선언문
남한 정부의 3단계 통일방안 중 1단계인 ‘남북연합’은 남과 북이 독립국가로서 협력기구를 제도화하는 것이 골자다. 남북연합 정상회의, 남북연합회의(국회), 남북연합 각료회의 등을 통해 교류를 넓혀 가는 단계를 말하며, 국방 및 외교권은 남북이 각각 소유하는 ‘1민족 2국가 2체제 2정부’를 뜻하는 것이다. 반면에 북조선은 ‘느슨한 연방제’를 주창하며 ‘완전한 고려연방제’달성 앞서서 잠정적으로 지역 정부에 국방과 외교권 등까지 부여하는 것으로 북한의 연방제는 ‘1민족 2체제 2정부’는 같으나 ‘1국가’를 표방하고 있다. 이 안은 남북한의 체제공존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북연합과 일정부분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한편, 북측에서는 이 선언을 10·4선언과 함께 대남공세에 하나의 무기로 쓰고 있다.
2000년 6월 15일 공식 발표되었다. 분단 55년 만에 처음 만난 남·북한의 두 정상이 백화원 영빈관에서 6월 14일 오후 3시부터 6시 50분까지 3시간 50분에 걸친 마라톤 정상 회담 끝에 합의한 5개항의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둘째, 1국가 2체제의 통일방안 협의, 셋째, 이산가족 문제의 조속한 해결, 넷째, 경제협력 등을 비롯한 남북간 교류의 활성화 등 두 정상 간에 합의된 사항이다. 또,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한 실무회담을 열 것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 등에 관한 합의사항도 포함하고 있다. 공동선언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숭고한 뜻에 따라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평양에서 역사적인 상봉을 하였으며 정상회담을 가졌다.
남북 정상들은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이번 상봉과 회담이 서로 이해를 증진시키고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며 평화통일을 실현하는데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3.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4.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문화·체육·보건·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5. 남과 북은 이상과 같은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빠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2007년 남북정상회담)
http://blog.hani.co.kr/wonkim/87774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rchcu&logNo=30149992126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그리고 특히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노력한 업적을 기려 2000년 노벨 평화상을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이 수십년간 권위주의의 통치하에 있을 때, 여러 차례의 생명에 대한 위협과 장기간의 망명생활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대통령은 점차적으로 한국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했다. 1997년 그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한국은 세계 민주주의 국가 대열에 확고히 자리잡았다. 대통령으로서 김대중씨는 확고한 민주 정부의 수립과 한국에서의 내부적 화합 증진을 추구해 왔다.
강력한 도덕적 힘을 바탕으로 김대통령은 인권을 제한하려는 시도들에 맞서 동아시아 인권수호자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미얀마(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동티모르의 인권 탄압에 반대하는 그의 헌신적 노력 역시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햇볕정책'을 통해 김대통령은 50년 이상 지속된 남북한간의 전쟁과 적대 관계의 해소에 노력해 왔다. 그의 북한 방문은 남북한간의 긴장을 완화하는 과정에 큰 동력이 되었다. 이제 한반도에 냉전이 종식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김대통령은 또한 인근 국가들, 특히 일본과의 화해를 위해 노력해 왔다. 노벨위원회는 한반도의 화해 진전과 통일을 위한 북한 및 다른 국가 지도자들의 기여를 인정하고자 한다.
“이제 막 시작된 것에 불과한 화해의 절차를 위해 상을 수여하는 것이 시기상조가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어 왔으나 그에 대한 대답으로 김 대통령의 인권을 위한 그동안의 노력이 최근 남북관계의 진전과는 별도로 수상후보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또 “그러나 북한과의 화해를 위한 강력한 김 대통령의 다짐 및 이행과 특히 지난 1년 동안 이룩한 업적이 이번 수상에 새롭고 중요한 몫을 더한 것도 역시 명백하다”면서 “국제 평화노력의 역전가능성에 대해 인정하면서도 노벨상위원회는 ‘해보려고 애쓰는 시도가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는 원칙에 충실했다”
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김 대통령과 한국정부, 그리고 우리 국민 모두의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를 향한 노력에 대한 찬사이다. 노벨상 수상 당시 해외언론들은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에게 돌아간 노벨평화상은 끈질긴 암흑 속에서 한줄기 빛”(2000년 10월14일자, 영국 타임즈), 분단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긍지를 주는 것”(2000년 10월14일자, 일본 아사히신문)
끈질긴 암흑속의 한줄기 빛"
"전세계에 용기 준 김 대통령"
"냉전종식 화해의 노력 인정"
한국, 4자 평화회담 재개 원해"
"분단의 다리 건너갈 경의선"
"한반도 통일 새 불씨 지펴"
"캐나다, 북과 외교관계 준비"
베르게 위원장은 노르웨이 시인인 군나르 롤드크밤의 시 ‘마지막 한방울’을 인용
가수 조수미씨가 ‘일 바치오’, 그리그의 ‘이히 리베 디히’ 안정준의 ‘아리 아리랑’
김 대통령은 “노르웨이는 인권과 평화의 성지이며 노벨평화상은 세계 모든 인류에게 평화를 위해 헌신하도록 격려하는 숭고한 메시지”라면서 “저에게 오늘 주신 영예에 대해 다시없는 영광으로 생각하고 감사를 드린다”
‘노벨상 제정 100주년 기념전시회’
「노벨 평화상 기념관」건립 준공 , 목포 2011년
http://media.daum.net/press/newsview?newsid=20110902140935818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2741516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2&no=621764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22055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01&articleId=2631345
http://www.breaknews.com/new/sub_read.html?uid=81032§ion=section1
http://cafe.daum.net/cultureSpice
노벨상 로비설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 비서였던 최규선이 노벨상 수상을 위해 로비를 벌였다는 의혹이 뉴스위크 한국판에 보도되면서 ‘노벨상 로비설’이 제기되었다. 당시 국정원장을 지냈던 이종찬도 노벨상 수상 자체를 도우려는 생각이 있었던 것 자체는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노벨위원회의은 김대중 측이 아닌 오히려 김대중의 정치적 반대자 등으로부터 상을 주면 안된다는 로비가 있었으며, 반대자들의 편지가 왔다. “노벨상은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살 수 없다”고 로비설을 일축했다.
http://kookminnews.com/atc/view.asp?P_Index=4185
http://www.allinkorea.net/sub_read.html?uid=25738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210/h2012102321123286330.htm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8171936345&code=900308
http://www.youtube.com/watch?v=e_z814Ey-wA
http://www.tagstory.com/video/100067323
김정일(金正日, 1941년/1942년 2월 16일 ~ 2011년 12월 17일)
윌리엄 제퍼슨 "빌" 클린턴(William Jefferson "Bill" Clinton, 1946년 8월 19일 - )
김종필 (金鍾泌, 약칭 JP, 1926년 1월 7일 ~ )
박태준(朴泰俊, 1927년 ~ 2011년 12월 13일)
정주영(鄭周永, 1915년 11월 25일~2001년 3월 21일)
노무현(盧武鉉, 1946년 ~ 2009년 5월 23일)
김영삼 (金泳三, 약칭 YS, 1927년 12월 20일 ~ )
1.
김대중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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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대중 생가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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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대중 평화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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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햇볕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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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경제 관련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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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002 월드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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