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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밭 大田와 철도, 대전광역시 大田廣域市

草霧 2013. 12. 18. 00:00

 

 

 

 

한밭 大田와 철도

 

대전광역시 大田廣域市

    

 

 

 

Daejeon Metropolitan City

 

 

 

대한민국의 중앙부에 있는 광역시

동쪽은 충청북도 옥천군, 서쪽은 충청남도 공주시, 남쪽은 논산시·금산군, 북쪽은 연기군 및 충청북도 청원군에 접하고 있다. 서해안개발시대를 맞아 중부권의 중추기능을 담당하는 성장거점도시로 발전시킨다는 취지에서 1989년 직할시로 승격했으며, 이와 함께 유성구·대덕구를 신설하는 등 행정구역이 늘어나게 되었다. 1994년 광역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경부선·호남선, 경부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의 분기점이 되는 교통의 요지로서 지금까지는 소비도시적인 성격이 강했으나, 대덕연구단지 조성, 1993년 대전세계박람회 개최, 3군사령부 이전 등을 계기로 행정·과학 중심도시, 국토종합개발계획의 중핵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경부선과 호남선 철도가 분기하고,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 중부고속도로 등 주요 고속도로가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도시이다. 서북쪽으로 세종특별자치시, 서쪽으로 충청남도 공주시, 서남쪽으로 논산시·계룡시, 남쪽으로 금산군, 동북쪽으로 충청북도 청원군, 동쪽으로 옥천군·보은군과 인접한다. 관세청, 통계청, 특허청, 중소기업청, 조달청, 문화재청, 산림청, 병무청, 국가기록원 등 정부청사와 정부통합전산센터, 특허법원이 위치한 행정도시이다. KT&G와 한국철도공사, 한국수자원공사, 한국조폐공사, 한국가스기술공사, 한전원자력연료,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 등 공기업 본사가 소재하고 있다.

 

대덕연구개발특구가 조성되어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한국전자통신연구원, 한국기계연구원, 한국항공우주연구원, 한국지질자원연구원, 한국원자력연구원, 한국생명공학연구원, 한국화학연구원,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한국표준과학연구원, 한국천문연구원, 한국한의학연구원, 기초과학연구원,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한국연구재단 등 정부출연연구기관과 한국전력공사 전력연구원 등 공기업 연구소 및 삼성중공업, KT, LG화학, GS칼텍스, 한화케미칼, SK이노베이션, 한국타이어, 롯데케미칼 등 대기업 연구소, 벤처기업 등이 밀집한 첨단 과학기술의 도시이다. 1993년 세계 박람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과학도시로서 위상을 확립하였다. 2002FIFA 월드컵, 2009년 국제우주대회, 2010년 국제통화기금 컨퍼런스, 국제원자력기구 핵융합에너지 컨퍼런스, 2012년 세계조리사대회 등을 개최했고, 2016년 로봇 분야 세계 최대 국제행사인 IEEE 세계지능형로봇시스템총회를 유치하였다. 국제협회연합(UIA)이 발표한 2012년 국제회의 개최 순위에서 세계 47위의 국제도시로 급상승했다.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거점도시로 확정되었다.

 

 

산이 밝고 물이 고우니 용이 서리고 봉황이 춤추는 듯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생겨난 대전은 자그마한 한밭, 즉 대전이라는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1914년에 호남선이 개통되고 1970년에 경부고속도로가, 1973년에 호남고속도로가 뚫리면서 대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교통의 요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한편, 천안은 예로부터 영남대로와 삼남대로가 갈라지는 곳이다. 근현대에 접어들어서는 경부선, 장항선, 안성선 등의 철도와 경부고속철도가 지나게 되면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옛지명

 

삼국시대 : 진현현(眞峴縣), 정현(貞峴), 우술현(雨述縣), 후천(朽淺)

통일신라시대 : 진령현(鎭嶺縣), 비풍군(比豊郡)

고려시대 : 진잠현(鎭岑縣), 회덕현(懷德縣)

조선시대 : 진잠현(鎭岑縣), 회덕현(懷德縣)

대한제국 : 진잠군(鎭岑郡), 회덕군(懷德郡)

1945: 대전부(大田府)

 

 

 

 

 

 

 

 

원래 조선 시대의 공주목 유성현 · 회덕현 · 진잠현에 속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공주)"대전천은 유성현 동쪽 25리에 있으니 전라도 금산군 경계에서 나왔다."는 기록에서 '대전(大田)'이라는 지명이 처음 확인된다. 그러나 이 기록의 대전은 대전천이라는 자연 지명의 일부였을 뿐 취락 명칭은 아니었다. 대전지명지에는 우암 송시열의 장례에 관한 일기인 초산일기의 내용 중 "상여를 메는 등의 인부는 주산 · 마산 · 사현 · 와지 등 4개 부락과 배달촌 · 대전 · 사오 · 초동의 사창계(社倉契)에서 차출한다."는 기록을 인용하면서 취락으로서의 대전이라는 지명이 1600년대 말의 자료에서 처음 확인된다고 하였다. 조선 시대 이 지역에 거주하던 충주 박씨의 별급문서내용 중 '산내면 대전 구포평(大田九浦坪)'이라는 기록과 임원경제지"대전장(大田場)은 산내면 '대전'에서 2일과 7일에 선다."라는 기록, 그리고 1872년지방지도(공주)의 주기(註記) 등을 통해서 볼 때, 취락 명칭으로서의 대전이라는 지명은 적어도 17세기부터 존속하였음을 볼 수 있다. 다만 18세기에 간행된 여지도서와 공주의 읍지인 공산지(1859) 18~19세기 국가 행정 자료에는 대전이라는 취락명이 확인되지 않는 것을 보면, 당시까지의 대전은 행정리가 아닌 자연 마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지명이 수록된 지리지가 편찬되었으며, 특히 조선 시대 들어서는 왕권 확립과 국가 통치를 위하여 지리서 편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지리지가 역사서에 포함되어 편찬되었던 종래 관행에서 벗어나 경상도지리지(1425), 양성지의 팔도지리지(1479), 동국여지승람(1486) 등 지리서에는 상세한 지명이 소개되어 있다. 특히 동국여지승람은 조선 전기 지리지의 집성편이다.

 

 

조선 후기에는 지리지 편찬에 큰 변화가 있었다.

16-17세기 임진왜란을 전후로 사찬 읍지들이 편찬되었으며, 18세기에 들어서는 사회가 급격히 변화하면서 이전 지리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동국여지승람의 개정 작업이 시도되기도 하였다. 이 작업은 완결되지 못하였으나, 18세기 중반 여지도서의 편찬으로 이어졌다. 이 지리서는 지방 통치에 필요한 행정적, 실용적 측면을 추구한 것 외에 채색 군현지도를 수록하고 있어 지명의 상세한 위치 정보를 알 수 있게 하였다. 읍지 앞에 지도를 채택하는 형식으로 가장 초기의 것으로 이후의 읍지도 이 원칙을 따르고 있다.

 

조선의 국토와 가치를 재발견하려는 움직임은 실증적인 학풍의 영향을 받았다. 조선의 지리와 영토를 다룬 한백겸의 동국지리지, 유형원의 동국여지지, 신경준의 강계고, 산수고, 홍양호의 백두산고, 해로고등이 저술되었다. 또한, 상업 경제의 활성화로 지역간 유통이 활발해지고, 여행기와 답사기들이 많이 저술되었으며, 이중환은 택리지를 편찬하였다. 19세기 들어 각 고을의 지리적인 내용을 상세히 담은 읍지에는 지명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대전이 자연 마을을 벗어나 국가 통계의 기초 단위로서 등장한 것은 1895(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회덕군 산내면 대전리'라는 행정리로의 개편 때가 처음이다. 1905년 경부선 대전역과 호남선 서대전역이 개통되면서 교통 중심 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1914년에는 회덕군과 진잠군을 통합하여 대전군을 신설하였고, 이 때 행정 군청이 회덕(현 읍내동)으로부터 대전군 대전면(현 동구 원동)으로 이전하였다. 1926년에는 대전도시계획사업이 처음 실시되면서 급성장을 이루기 시작했고, 1931년에는 대전면이 대전읍으로, 1935년에는 다시 대전부로 격상되었다. 광복 이후 1948년에는 대전시로, 1989년에는 대전직할시로 승격되었다. 그 사이에 1983년에는 유성읍을, 그리고 1989년에는 신탄진읍을 비롯한 대덕군 전역을 관할구역으로 편입시켰다. 1995년 행정구역 명칭 개편에 따라 대전광역시로 개칭되었다.

 

 

대전광역시의 자연지명은 다음과 같다.

갑하산, 견두산, 계족산, 고봉산, 구봉산, 금병산, 꽃봉산, 당산, 도솔산, 만인산, 매방산, 보문산, 불무산, 빈계산, 산장산, 수도산, 식장산, 안평산, 연자산, 오봉산, 위왕산, 응봉산, 지봉산, 함각산, 해태산, 금수봉, 우산봉, 조중봉

 

거칠메기고개, 곤룡재, 다롱고개, 다름고개, 닭재, 덕고개, 마달령, 명마고개, 모정고개, 바람실고개, 부처당고개, 불티고개, 비파치, 사직고개, 새고개, 새터고개, 선골고개, 안영고개, 오물고개, 장고개, 장동고개, 장바구니고개, 절고개, 질치, 참배재, 태봉재, 테미고개, 학고개

 

가새바위, 각시바위, 곽바위, 관바위, 괴바위, 금바위, 남성바위, 노적바위, 덕바위, 도선암, 마상바위, 말바위, 몽선대, 미역바위, 번들바위, 범바위, 병풍바위, 부엉바위, 부용바위, 선바위, 신선바위, 아갈바위, 아들바위, 애바위, 옥녀바위, 용바위, 용왕바위, 장군바위, 장대바위, 치마바위

 

가양천, 갑천, 과례천, 관평천, 구완천, 금곡천, 금동천, 대동천, 대사천, 대전천, 덕진천, 매노천, 반석천, 법동천, 산곡천, 성전천, 세동천, 신동천, 안산천, 오정천, 용호천, 유등천, 유성천, 작동천, 정생천, 주원천, 진잠천, 탄동천, 화산천

 

 

사통팔달의 고장 대전, 교통의 요지 대전

대전의 본래 이름은 우술군(雨述郡)이다. 일명 후천(朽淺)이라 불렸고, 고려 초부터는 회덕현(懷德縣)이라 하였다. 회덕의 진산은 계족산이다. 대전에는 동국여지승람세상에 전하기를 날이 가물 때 산이 울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한다라고 기록된 계족산 외에도 식장산, 보문산 등의 산이 있고 시 외곽에는 서대전평야, 삼천동평야 등 비옥한 평야가 펼쳐져 있다. 산이 밝고 물이 고우니, 용이 서리고 봉황이 춤추는 듯한 모습이다. 그런 까닭에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강산은 동쪽과 이어지며 남쪽을 진정시키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한다.

 

 

 

 

 

 

 

 

계족산

대전광역시 동쪽에 있으며, 산줄기가 닭발처럼 퍼져 나갔다 하여 이름 붙은 산이다. 정상에 팔각정인 봉황정과 전망대가 있다.

 

여지도서』 「진잠현(鎭岑縣), 형승조에 실린 글이다.

진잠현의 동남쪽 5리에 봉우리가 아홉 개인 구봉산이 있고, 그 근처에 계룡산이 펼쳐져 있으며 물은 갑천이 되어 흐른다. 계룡산 동쪽에 있었던 진잠현은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현이었다. 진잠현의 풍속을 두고 두메산골의 순박한 풍속을 지니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문인 이승소가 높은 고개 넘어서니 큰 들판 시원한데, 한 촌락 뽕나무 숲이 시내 굽이굽이 보네. 수목은 늙고 돌은 단단하니 고을이 옛 된 줄 알겠고, 관청 뜰이 비고 인기척 고요하니 관원 살이 차구나라는 시를 지었고, 남지가 그의 시에서 관청 뜰 비어 있으니 송사가 적음을 알겠고, 습속이 후하니 민풍을 알겠도다라고 노래할 만큼 대전은 평화롭고 고요한 고을이었다.

 

그러나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는 새벽 열차 대전발 050이라는 대중가요 노랫말 속에 아스라하게 남아 있는 대전은, 한 세기도 안 되는 세월 동안 몰라보게 변신을 거듭하여 이미 그 옛날의 대전이 아니다. 아파트로 둘러싸인 진잠향교는 그렇다 치고 교통의 요지로 급부상한 회덕은 말해 더 무엇하랴.

 

1905년 서울에서 부산까지 이어지는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생겨난 대전은 자그마한 한밭, 즉 대전(大田)이라는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곧바로 1914년에 호남선이 개통되어 교통의 요지가 되면서 1932년에는 공주에 있던 도청소재지가 대전으로 옮겨졌고, 1931년에 대전읍, 1935년에는 오늘날의 시 단위인 대전부가 되었으며, 1948년 대전시로 개편되었다. 그 뒤 1970년에 경부고속도로가 뚫리고 1973년에 호남고속도로가 뚫리면서 대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교통의 요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1984년에 유성진잠회덕 일부가 편입되었고, 198911일 행정구역 개편과 서해안 개발 시대를 맞아 성장 거점 도시로서의 구실을 담당하기 위해 대전광역시로 개편되었다. 그때 대전은 몰라도 신탄진은 안다라고 할 정도였던 신탄진 역시 대전으로 편입되었다. 1995년 대전광역시로 승격되면서 정부 제2청사가 옮겨왔고, 급기야 행정복합도시가 대전에서 가까운 연기와 공주 일대에 터를 잡았다.

 

 

신탄진

신탄진대전은 몰라도 신탄진은 안다라고 할 정도로 번화한 곳이었던 신탄진은 1989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며 대전으로 편입되었다.

 

각시바위 [Gaksibawi]

아들바위 [Adeulbawi]

진잠 [鎭岑]

회덕 [懷德]

병풍바위 [Byeongpungbawi]

금바위 [Geumbawi]

애바위 [Aebawi]

용왕바위 [Yongwangbawi]

신선바위 [神仙-, Sinseonbawi]

장대바위 [Jangdaebawi]

가새바위 [Gasaebawi]

덕진포 [德津浦]

치마바위 [Chimabawi]

옥녀바위 [Ongnyeobawi]

몽선대 [夢仙台, Mongseondae]

미역바위 [Miyeokbawi]

아들바위 [Adeulbawi]

부엉바위 [Bueongbawi]

남성바위 [Namseongbawi]

덕바위 [Deokbawi]

선바위 [Seonbawi]

덕진 [德津]

도선암 [道詵岩, Doseonam]

아갈바위 [Agalbawi]

곽바위 [Gwakbawi]

번들바위 [Beondeulbawi]

범바위 [Beombawi]

관바위 [Gwanbawi]

괴바위 [Goebawi]

노적바위 [Nojeokbawi]

마상바위 [Masangbawi]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기원전 3세기 ~ 4세기 삼한시대 대전은 마한의 영역에 속하였고, 계산동·학하동 일대에는 부족국가인 신흔국이 자리잡았다. 삼국시대 대전은 백제의 우술군에 속하였다. 문주왕 때 백제가 수도를 웅진성(공주)으로 옮긴 후 백제의 수도권역에 속하였고, 신라와의 경계에 위치하여 교류의 통로 역할을 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대전 동쪽에 신라가 축조한 계족산성이 남아 있다. 신라가 통일한 후에는 비풍군으로 개편되었고, 영현인 노사지현은 유성현, 소비포현은 덕진현으로 개칭하였다.

 

 

 

 

 

 

고려시대 / 조선시대

고려 초기에 비풍군을 회덕군으로 개명하였다. 고려시대 대전은 공주목에 영속된 군현으로 회덕현, 진잠현, 유성현이 통일신라 때의 행정구역을 그대로 이어왔고, 덕진현은 현종 9년에 폐현되어 공주목에 속했다. 1172(명종 2) 회덕현은 감무를 두게 되면서 주현으로 승격하였다. 대전 근교의 계룡산 일대는 풍수지리적으로 명당로 여겨져 왔으며,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서울 무악산과 함께 새 왕조의 유력한 도읍지 후보로 물망에 올랐다. <동국여지승람>에 태조 이성계가 조선의 도읍지를 물색하기 위해 계룡산 신도안으로 가던 중에 유성에서 쉬어갔다는 기록과 태종이 유성에서 목욕을 즐겼다는 기록이 전한다. 왕실에서 온천을 이용한 것은 유성온천이 처음이었다.

 

조선 태종 13(1413) 전국의 군현제도를 새롭게 개편했을 때, 대전은 고려 후기의 군현이 그대로 존속되어 공주목의 임내(任內)였던 유성현과 덕진현은 폐현되어 공주목에 속하게 되었고, 회덕현과 진잠현은 공주목의 영현이 되어 태전(太田: 한밭)으로 불렸다. 1598(선조 31)에 충청도 감영이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된다. 16세기 후반 조선 성리학의 전성기에 기호학파와 영남학파 양대 산맥이 형성되었고, 대전 일대에서 박팽년(朴彭年), 송준길(宋浚吉), 송시열(宋時烈), 권시(權諰), 윤휴(尹鑴) 등이 활동하면서 17세기 이후 기호학파는 정치의 주도권을 차지한다. 189523부제가 실시되었을 때 공주부에 속하였고, 1896(건양(建陽) 원년)13도제가 시행되면서 충청도가 동서로 분리되어 충청남도에 속하였다.

 

 

일제 강제점령기

1905년 경부선 대전역 개통과 함께 일본인들이 대전천과 대동천의 합류 지점에 거주하면서 근대 도시로서 발전을 시작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조선총독부는 대덕구 읍내동에 있던 회덕군청을 산내면 대전리로 이전하고 1913년에 호남선 철도가 완공되면서 교통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회덕군·공주군·진잠군 3개 군의 일부를 통폐합해 대전군을 신설하고 군청을 원동에 두었다. 이 시기에 대전천 부근에 천동, 효동, 삼성동을 중심으로 정미, 제사, 방적, 피혁 공업 등 경공업이 발전하였다. 1910년에는 7개 정도의 공장이 있었으나 1920년에는 대전피혁주식회사 등 30개가 넘는 공장이 들어섰다. 1931년 대전 중심가에 상수도와 가로등이 설치되었다.

 

191936일 인동시장에서 양정길은 김로원과 함께 3·1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이때 용두동에 있던 일본 헌병대와 문화동에 있던 보병대가 출동하여 무차별로 사격을 가했다. 이로 인하여 사상자가 나타나자 군중은 해산되었다. 대전의 3·1만세운동은 그 뒤에도 인동시장을 비롯하여 가수원, 유성 등지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후로도 대전 출신의 신채호 등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충청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하여 충청남도 행정의 중심이 되었고, 도시가 목척교를 건너 용두동 구릉지대까지 확대되었으며, 일본인이 정착한 대전읍이 확장되어 각종 산업시설이 들어섰다. 19156,061명이던 인구가 도청 이전 당시에는 6배로 늘어서 33,843명에 달하였다. 1936년 서대전역이 개설되면서 서쪽으로 개발이 확대되었다. 1935년 대전읍은 대전부로 승격했으며, 대전군은 대덕군으로 개칭하였다. 1940년 도시가 확장되어 대덕군 외남면, 유천면, 산내면 일부를 대전시에 편입하고 32개 동을 관할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시대

일본의 2차세계대전 항복 선언 후, 1945107일 미군이 대전에 진주하였다. 미군정하의 초대 도지사는 카프 대령이었으며 일본군에 대한 무장해제와 함께 박재홍 도지사로부터 업무인계를 받았다. 광복 후 1949년 대전부에서 대전시로 개칭하였고, 해외동포가 돌아와 대전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인구는 126,704명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서울에서 피난 온 대한민국 정부가 대전에 잠시 머무르면서 임시 수도로서 역할을 하였다.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대전 전투가 벌어지고 대전은 6·25 전란으로 거의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이북 5도와 경기도의 피난민이 대전에 정착하고 곧 전후의 복구사업으로 전국에서 대전으로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었다. 1960년대 이후 급격한 도시화에 따라 충청도를 비롯한 전국 각지의 농촌 인구가 유입되어 인구가 급증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역은 계속 넓어져서 1963년 대덕군 유천면 전역과 회덕면, 산내면이 대전시로 편입되었다.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대전은 출신 지역이 다양한 사람들이 골고루 모인 새로운 도시로 크게 발전하였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가 개통되어 교통 물류의 중심도시로 성장

1973년 대덕연구단지가 개발되어 서울의 한국과학기술원 이전, 정부출연연구기관과 기업 연구소

1973년 대덕군 북면이 신탄진읍으로, 유성면이 유성읍으로 승격

19804대강 유역 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금강 유역에 대청댐이 완공

1983년 도시화가 진행된 대덕군 유성읍, 회덕면 전역과 탄동면(도룡·신성·가정·하기·장동·내동·화암·덕진리), 구즉면(문지·전민·용산·원촌리), 진잠면(교촌·대정·용계·내동·학하리), 기성면(도안·관저·가수원리)을 시에 편입

1989년 중부권의 중추기능을 수행하는 성장거점도시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 위하여 대전직할시로 승격

대덕군 일원을 편입, 유성구대덕구 등 5개 자치구를 설치, 75개 행정동을 관할하게 되었다.

1993년 대한민국 최초의 국제박람회기구 공인 엑스포인 대전 세계박람회를 성공적 개최

1995년 대전직할시에서 대전광역시로 명칭이 변경

1998년 대전광역시가 주도하여 국제협력기구인 세계과학도시연합(WTA)을 창설

1985년 대규모 국책 계획도시로서 둔산 신도시 개발 시작

1999년 시청이 중구 원도심에서 둔산 신도심으로 이전

1997년 대전 둔산동에 정부청사가 설립, 중앙행정기관이 대전으로 대거 이전

2000년 특허법원이 이전

2002FIFA 월드컵 개최 도시 중 하나로서, 유성구 노은동 대전 월드컵 경기장에서 개최

2004년 고속철도(KTX)가 개통

2006년 대전 지하철 1호선 개통

2009년 대전 동구에 한국철도공사(Korail) 본사 신사옥 완공

2009년 대전당진고속도로가 개통

2011년 대덕연구개발특구가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거점지구로 확정

2012년 세종특별자치시 출범

 

 

지금의 대전은 조선시대의 충청도 회덕현 ·진잠현 일원, 그리고 공주목의 동남부지역에 해당한다. 1895년과 1896년의 지방제도 개정으로 각각 충청남도 회덕군·진잠군·공주군이 되었으며, 1906년 월경지 정리에 의해 공주의 두입지(斗入地)였던 구즉면·탄동면·천내면·유등천면·사내면과 청주의 비입지(飛入地)였던 주안면, 그리고 문의의 비입지인 지평촌면이 회덕으로 편입됨으로써 회덕군의 면적이 크게 확장되었다. 오늘날 대전의 서부지역은 과거 공주에 속했던 곳인데 이때 회덕에 소속되었다. 20세기초까지 한적했던 '한밭'[大田]마을이 커지게 된 것은 1905년 경부선의 통과역으로 결정되고, 1910년 회덕군청이 이곳으로 이전되었으며, 1913년에 대전을 출발점으로 하는 호남선이 개통되어 영호남을 연결하는 교통상의 요지로 대두되면서부터이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진잠군의 북면(일부서면(일부)을 진잠면으로, 상면·하면·동면(일부)을 기성면으로, 회덕군의 천내면(일부)과 유등천면을 유천면으로, 천내면(일부공주군 현내면을 유성면으로, 내남면·현내면(일부)을 내남면으로, 탄동면과 공주군 명탄면을 탄동면으로, 구즉면·서면(일부)을 구즉면으로, 외남면·산내면(일부)을 외남면으로, 산내면(일부)을 대전면과 산내면으로, 북면(일부일도면(일부)을 북면으로, 일도면(일부동면(일부주안면을 동면으로 통폐합하여 대전군을 신설했다. 1931년에 대전면이 읍으로 승격하고, 1932년에 충청남도 도청이 이곳으로 이전하자 신도시 대전은 더욱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1935년에 대전읍이 부()로 승격하면서 대전군은 대덕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49년 시제(市制) 실시에 따라 대전시로 바뀌고, 1963년 대덕군의 유천면 일원과 회덕면·산내면 일부가 대전시에 편입되었다. 1977년에 동구·중구 설치, 1983년에 유성읍과 회덕면을 편입, 1988년에 서구가 신설되었다. 1989년 대전이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대덕군 일원을 병합하여 유성구와 대덕구를 신설하고, 대덕군을 폐지했다. 1994년 대전직할시가 대전광역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대전광역시는 본래 침식분지인 대전분지에 발달한 도시이다.

대전의 동부와 남부는 비교적 고지대이며, 서부와 북부는 낮은 구릉지와 평야가 전개되어 저지대를 이룬다. 분지의 남동쪽에는 식장산(食藏山598m), 동쪽에는 고봉산(古鳳山390m), 북동쪽에는 계족산(鷄足山423m)·응봉산(鷹峰山320m)이 있으며, 남쪽에는 보문산(寶文山457m)이 솟아 있다. 서쪽에는 관암산(冠岩山526m)·우산봉(雨傘峰574m)·도덕봉(道德峰534m)이 솟아 있다. 그러나 현재는 시역이 분지 범위를 넘어 확장되어 동쪽의 경우 분지 바깥 쪽에 위치한 대청호(大淸湖)가 시의 경계부를 이룬다.

 

대전분지는 다시 기복이 적은 잔구성 구릉인 마봉(馬峰191m)·옥녀봉(玉女峰120m)·우성이산(179m)·매봉(140m) 등에 의해 남동부의 대전분지, 북부의 탄동분지(炭洞盆地), 중서부의 유성분지(儒城盆地)로 구분된다. 대전분지는 대전의 중심지를 이루며 유성분지에는 유성구가 자리잡고 있다. 식장산맥(食藏山脈)이 남북으로 뻗어 있는 동남부지역, 관암산·도덕봉이 솟아 있는 서부지역은 비교적 고지대이나 북부지역은 낮은 구릉지와 평야지대로서 저지대를 이룬다.

 

 

동북부지역을 흐르는 금강은 청원군과의 경계를 이룬다.

갑천(甲川대전천(大田川유등천(柳等川유성천(儒城川지족천(智足川대동천(大東川) 등과 금강수계의 여러 지류가 분지 사방에서 흘러 들어와 분지의 북부에서 합류한 뒤 좁은 하곡을 거쳐 북류하여 금강으로 유입된다. 이들 하천유역에는 서대전평야(西大田平野삼천동평야(三川洞平野) 등 비옥한 충적평야가 발달해 있어 농업·공업 지역과 거주지역으로 이용되고 있다. 금강 유역 주요 국가 하천인 갑천, 유등천, 대전천이 합류하여 북쪽의 금강으로 흘러 들어가며 그 강변으로 넓은 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대전의 동부 금강 유역에는 대한민국 3대 호수인 대청호가 있어서 수자원이 풍부하다.

 

 

갑천은

시의 남서부에서 흘러와 신흥동·갈마동·신대동 일대를 지나 북쪽으로 관류, 신구교(新九橋)를 지나 문평동 근처에서 금강으로 흘러든다. 대전천은 시의 남동쪽에서 흘러들어와 시의 중앙부를 동남에서 서북부로 관류하며, 석교동에 이르러서는 넓은 유역평야를 이룬다. 삼성동에서는 대동천과 합류하고 오정동 일대에서는 유등천과 만나 북류하다 대화동에서는 갑천으로 흘러들어간다.

 

 

식장산에서 발원한 대동천은

신흥동·신안동·소제동을 지나 삼선교 부근에서 대전천으로 유입한다. 금산군 복수면에서 흘러든 유등천은 서부 시가지를 북류하여 오정동 일대에서 대전천과 합류한 후 삼천동에서 갑천으로 유입한다. 유성천은 시의 서부 도덕봉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다 지족천과 만난 뒤 갑천으로 흘러든다. 시의 북동부지역에는 금강에 대청 댐을 막아 이루어진 대청호가 있다.

 

 

중도(中都)

대전은 대한민국의 중앙부에 위치하므로 중도(中都)라고도 일컬으며, 영남과 호남으로 통하는 삼남의 관문이다. 고속도로와 철도, 국도가 분기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시청을 기준으로 직선거리는 서울까지 139km, 부산까지 200km, 대구까지 121km, 광주까지 140km이다.

 

대전역 맞은편에 충청남도 도청이 있고 그 사이에 중앙로가 있는데, 바로 이 중앙로를 중심으로 대전 시가지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중앙로 중간쯤에는 대전천이 가로질러 흐르며 목척교가 있었던 이 교차지점을 중심으로 직교형 가로망이 형성, 대전의 중심시가지가 형성되었다. 그뒤 도시가 더욱 커지게 되자 도시발전축은 목척교에서 도청 쪽으로, 그리고 다시 도청을 거쳐 서대전 쪽으로 확장되어나갔다. 그리고 도청을 중심으로 하여 삼성로·우암로·계룡로·대흥로 등 4개의 간선도로가 형성되었고 이들 간선도로가 서로 교차되는 곳을 중심으로 현재의 대전 중심지가 형성되었다. 현재 대전 시가지는 동쪽으로는 경부고속도로 주변까지, 그리고 서쪽으로는 유등천을 건너 계속 확장되어 결국 대전천과 유등천이 도심을 관통하는 양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대전천은 동구와 중구, 유등천은 중구와 서구의 경계 역할을 하고 있다. 전반적으로는 주거지와 상업지구 및 공장들이 혼재하지만 특히 은행동·선화동·대흥동 일대는 대전시의 중심업무지구로 발전하여 대전시에서 지가가 가장 높은 곳이다. 유등천변의 유천동과 태평동 일대는 일제강점기에 피혁·직물 등 경공업이 시작된 지방공업의 발상지로서, 오늘날에는 농기계·제지·시멘트·슬레이트 공장 등이 들어서 있으나 공해문제를 안고 있다.

 

그밖에 호남고속도로 유성 인터체인지를 중심으로 한 유성구의 구암동 일대, 경부고속도로 신탄진 인터체인지를 중심으로 하는 대덕구의 석봉동 일대가 도시의 작은 핵을 이루고 있으며, 호남고속도로와 갑천 사이에 이루어진 유성구의 대덕연구단지, 서구 둔산동 일대에 건설되는 행정 타운 등이 새로운 특수기능의 도시핵으로 발달하고 있다.

 

해안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내륙분지에 위치하고 있어 한서의 차가 큰 전형적인 대륙성기후가 나타난다. 여름 8월 평균기온은 대구·부산·광주·서울보다 낮아 상대적으로 서늘하고, 겨울 1월 평균기온은 서울보다 높아 비교적 온화하다.

 

총인구 중 남녀의 비율은 거의 비슷하나 1995년 성비(性比)100.3으로 남자가 약간 많다. 가구당 인구수는 2.8명이다. 인구를 기준으로 서울, 부산, 인천, 대구에 이어 대한민국 5대 도시이다. 세대 당 인구는 2.63명이다. 성별 인구는 균형 성비에 가깝다. 인구증가율은 4.1%로 전국 평균 인구증가율인 2.8%보다 높은 수준이다. 자치구별로는 유성구가 31.8%가 늘어나 증가율이 가장 높다. 136만명의 고용효과가 예상되는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의 입지가 대전으로 확정되고, 대전 서남부권에 신도시가 개발됨에 따라 인구 유입이 증가할 전망이다.

 

대전시의 고령인구 비중은 8.8%로 전국 평균 11.3%에 비해 매우 낮다. 대전시민의 평균 연령은 36.1세로 전국에서 두 번째로 젊은 도시이다. 2011년 대전의 출생아수 증가율은 3.4%, 전국 평균(0.2%)을 크게 웃돌며 전국 최고를 기록했다. 2010년 다른 지역으로부터 대전으로 전입한 인구는 충남(21,341), 경기(16,368), 서울(13,819), 충북(8,853) 순으로 많다. 연령별로는 30대의 순유입이 가장 많다. 인구이동률은 전국 시·도 중 세번째로 활발하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0년 대전의 1인당 개인소득은 울산, 서울에 이어서 전국 3위이다.

자치구별로는 유성구의 소득이 가장 높다. 국세청이 근로소득 연말정산 신고현황을 토대로 분석한 근로자의 평균 연간 급여는 대전이 전국 3위이다. 대전의 등록 자동차는 20137월말 기준 602,791대이고, 한 가구 당 1.03대의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다.

 

2011년 대전의 주택보급률은 102.4%이고, 자가 비율은 50.8%로 서울(41.4%)보다 높다. 2011년 미국 아카마이(Akamai)의 인터넷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주요 도시별 인터넷 접속 속도 순위에서 대전은 57.6Mbps를 기록하여 세계 1위에 랭크되었다. 2011년 대검찰청이 발간한 범죄분석자료에 의하면 대전은 인구 10만명당 범죄 발생률 1367명으로 전국 평균 3750명에 비해 현저히 낮아, 전국 시·군 중에서 범죄 발생률이 가장 낮은 안전한 도시로 분석되었다.

 

특히 폭행, 절도, 성폭력, 방화, 아동성폭력, 교통사고 등 7개 범죄유형 발생률에서 최저를 기록하여, 대전은 전국에서 가장 안전하고 살기 좋은 도시 1위를 차지했다. 환경부가 7대 도시의 대기 환경을 분석한 결과, 대전은 미세먼지 농도 44/로 오염도가 가장 낮고 공기가 가장 깨끗한 도시로 조사되어 주거환경이 쾌적하다.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11년 지역건강통계에서 대전시민의 평균 건강수명은 72.85세로 전국 2위의 건강한 도시로 조사되었고, 흡연율(22.2%)은 가장 낮은 것으로 분석됐다.

 

2012년 현대경제연구원의 '대한민국 경제적 행복지수' 조사 결과, 대전에 사는 사람들의 경제적 행복감이 가장 높았다. 2013년 서울대학교 사회복지연구소와 세이브더칠드런이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어린이 행복종합지수 분석에서 대전이 행복지수 전국 1위로 평가되었다. 특히 경제여건, 생활안전, 주거환경, 학업 성적에서 서울(3)보다 높았다. 지방재정의 건전성을 보여 주는 재정자립도는 지방 광역시·도 중 높은 수준이다.

 

2011년 대전에서 투자되는 연구개발비는 68173억원이다. 2007년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대전의 연구개발비는 서울(17057억원), 경기(11096억원), 인천(3151억원) 등 수도권을 합한 것보다 많고, 수도권과 대전을 뺀 지방 전체의 연구비를 합한 것(21668억원)보다 많다. IT(정보기술), BT(생명공학기술), NT(나노기술), ST(우주항공기술), ET(환경·에너지기술), CT(문화기술) 등 미래유망 신기술 6T(6Technology)에 대한 연구비도 수도권과 12개 지자체를 합한 것보다 높은 수치이다.

 

중국 사회과학원과 미국 벅넬(Bucknell)대학교 등이 공동 작성한 ‘2008년 세계 도시경쟁력 보고서에서 대전은 대한민국 도시 중에는 서울(12), 울산(162)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203위를 기록했다. 대한민국 대도시 중에는 인천(221), 부산(242), 대구(287), 광주(295) 등 다른 광역시보다 높은 도시경쟁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삼성경제연구소(SERI)1997년 세계 주요 도시를 대상으로 도시경쟁력을 평가한 결과에서 대전은 서울(19)에 이어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세계 25위의 도시경쟁력을 차지했다. 2006년 산업정책연구원이 국내 75개 도시를 대상으로 도시 경쟁력을 평가한 결과, 대전이 서울(2)을 제치고 미래 경쟁력 1위 도시라는 평가를 얻었다.

 

 

호서 지방의 수부도시로서 대전·충청지역을 관할하는 사법·행정 기관들이 모여있다.

대전고등법원 (서구 둔산동)

대전지방법원 (서구 둔산동)

대전가정법원 (서구 둔산동)

대전고등검찰청 (서구 둔산동)

대전지방검찰청 (서구 둔산동)

대전지방국세청 (대덕구 법동)

대전세무서 (중구 선화동)

서대전세무서 (서구 둔산동)

북대전세무서 (유성구 2014년 신설)

정보화센터 (서구 둔산동)

대전지방국토관리청 (동구 용전동)

금강유역환경청 (유성구 구성동)

대전지방경찰청 (서구 둔산동)

대전둔산경찰서 (서구 둔산동)

대전중부경찰서 (중구 대흥동)

대전서부경찰서 (서구 복수동)

대전동부경찰서 (대덕구 법동)

대전대덕경찰서 (대덕구 문평동)

대전유성경찰서 (유성구 죽동)

충청지방통계청 (서구 월평동)

충청지방우정청 (서구 둔산동)

대전지방조달청 (서구 도마동)

대전지방기상청 (유성구 구성동)

대전지방보훈청 (서구 월평동)

대전지방고용노동청 (서구 둔산동)

대전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서구 둔산동)

대전충남지방중소기업청 (유성구 장동)

대전충남지방병무청 (중구 문화동)

대전지방교정청 (유성구 대정동)

대전전파관리소 (서구 갈마동)

대전출입국관리사무소 (중구 중촌동)

대전지방공정거래사무소 (서구 둔산동)

충남지방노동위원회 (서구 둔산동)

관세청 대전세관 (유성구 탑립동)

대전광역시 소방본부 (서구 둔산동)

대전중부소방서 (동구 삼성동)

대전서부소방서 (서구 갈마동)

대전동부소방서 (대덕구 법동)

대전남부소방서 (서구 복수동)

대전북부소방서 (유성구 도룡동)

대전광역시청 (서구 둔산동) 중구청 (대흥동), 서구청 (둔산동), 동구청 (가오동), 유성구청 (어은동), 대덕구청 (오정동)

관세청

특허청 특허심판원

문화재청

조달청

통계청

중소기업청

산림청

병무청

국가기록원

감사원 대전사무소

대전청사관리소

국립대전현충원대한민국 특허법원 (서구 둔산동)

정부통합전산센터 (유성구 화암동)

정보통신산업진흥원 (유성구 화암동)

철도특별사법경찰대 (동구 신안동 철도트윈타워)

국립중앙과학관

국립대전현충원 (유성구 갑동)

국립자연휴양림관리소 (서구 복수동)

위성항법중앙사무소 (유성구 갑동)

소상공인진흥원 (서구 둔산동)

시장경영진흥원 (중구 대흥동)

중소기업기술정보진흥원 (유성구 도롱동)

화학물질안전원 (유성구 장동)

효문화진흥원 (중구 안영동)

한국특허정보원

유네스코 아·태무형유산센터 (유성구 문지동)

 

정부대전청사

대전은 정부대전청사와 특허법원 등 국가 중앙행정기관이 입지해 있는 행정도시이다.

 

대덕연구개발특구

대전은 첨단 과학도시이다. 유성구 일대의 대덕연구단지는 한국 최고의 연구개발 고급인력을 보유하고 있는 곳으로서,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정보기술, 생명공학, 나노기술, 로봇, 우주공학 등 혁신산업에 집중하는 정부출연연구기관이 있다. 다양한 분야의 과학기술을 토대로 산학연간 융복합 공동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정부출연출연기관 31, 공공기관 11, 국공립기관 14, 기타비영리기관 33, 대학 5, 기업 1306개 등 모두 1400개 기관이 입주, 특허출원은 12814건이고, 해외특허가 29%를 차지한다.

한국과학기술원한국과학기술원 (KAIST)

한국전자통신연구원 (ETRI)

한국화학연구원

한국기계연구원

한국원자력연구원

한국항공우주연구원

한국생명공학연구원

한국지질자원연구원

한국표준과학연구원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

한국한의학연구원

한국천문연구원

기초과학연구원

국방과학연구소

국가수리과학연구소

국가보안기술연구소

나노종합팹센터

국가핵융합연구소

국립문화재연구소

국가슈퍼컴퓨팅연구소

한국전력공사 전력연구원

한국전력기술 원자로설계사업본부

한국수자원공사 수자원연구원

한국수력원자력 중앙연구원

한국토지주택공사 국토도시연구원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중부분소

국제지식재산연수원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

연구개발인력교육원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안전성평가연구소

한국연구재단

대전철도트윈타워 (한국철도공사, 한국철도시설공단 본사)

철도 관련 공기업을 포함하여 여러 공기업의 본사가 대전에 있다.

한국철도공사 (Korail) (동구 소제동 철도트윈타워)

한국철도시설공단 (동구 신안동 철도트윈타워)

한국조폐공사 (유성구 가정동)

한국수자원공사 (대덕구 연축동)

한전원자력연료 (유성구 덕진동)

한국가스기술공사 (유성구 봉산동)

KT&G (한국담배인삼공사) (대덕구 평촌동)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거점지구 확정

2011년 대한민국 지방정부 최초로 대전광역시가 국제신용 평가기관인 무디스(Moody's)로부터 대한민국 국가 신용등급과 동일한 'A1등급'을 받아 외자차입 및 외국인투자기업 유치에 상당한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0년 대전의 1인당 개인소득은 울산, 서울에 이어서 전국 3위이다. 근로자의 평균 연간 급여도 대전이 울산, 서울에 이어 전국 3위이다.

 

2, 3차 산업의 발달과 함께 농업인구 비율은 계속 감소하는 추세이다. 1990년 농촌지역이었던 대덕군 등을 편입함으로써 경지면적이 증가했다. 최근에는 근교농업의 형태로 포도··사과 등의 과일과 채소 재배면적이 증가하고 있다.

 

대전광역시는 교통의 요지이며, 상권이 넓고 공업용수가 풍부하여 공업발전에 유리한 지역이다. 해방 전에는 제사·피혁·양조 공업이 발달했고, 해방 후에는 오류동에 대규모의 대전방적공장이 들어서면서 섬유공업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7년에 설립된 대전피혁은 이 지역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공장이다.

 

특히 대덕구 대화동에 대전공단이 들어서면서부터는 기계 및 화학 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대전공단은 대전시 최대 공업단지로서 제1단지와 제2단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밖에 대화동의 경부선 연변에 시멘트 공장의 하차장이 있고 곳곳에 크고 작은 공장들이 산재해 있다.

 

대전공단은 수도권 소재 공장의 지방분산과 대전시내 소재 공장의 정비를 위해 조성한 것으로 경부고속도로 회덕 인터체인지와 인접되어 있어 교통이 편리하고, 서쪽에 갑천과 대전천이 흐르고 있어 공업용수 또한 풍부하다. 뿐만 아니라 대전시의 풍부한 노동력과 시장조건 역시 공단 입지에 유리한 조건이 되고 있다.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이 많은 편이며 현재 섬유·기계·화학·식품 공업을 중심으로 중부공업지대의 주요 공업지역으로 발전하고 있다. 업종별로는 기계공업의 비중이 가장 크며 다음으로 섬유와 화학공업의 순이다. 현재 제3공단, 지방공업단지(4공단), 첨단산업기지를 조성예정이다.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국제 사이언스 센터

로봇 산업

항공우주 산업

 

 

사면팔방으로 통하는 광범위한 교통망을 가지고 있어 서비스업이 발달

지리적으로 남한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고 철도·도로 교통의 편리 등 상업활동에 매우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고 있어 오래 전부터 한국의 대표적인 상공업도시로 발달해왔다. 특히 이 지역의 상업발달에 큰 계기가 된 것은 6·25전쟁으로 인한 피난민의 유입이었다. 유입된 많은 인구는 대부분 상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전통적인 시장으로는 4일과 9일에 열리는 유성장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상설시장으로는 특히 1977년에는 대전천을 복개하여 상업활동이 더욱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는 대덕구 오정동에 대전농수산물도매시장이 건립되어 있다.

대전 은행동 으능정이거리

 

 

수도권과 충청·영남·호남을 연결하는 삼각유통의 중심지로 전국물류산업의 허브도시

경부선·호남선, 경부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의 분기점에 위치하고 있어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뿐만 아니라 서울-목포, 서울-부산, 대전-장항간 국도와 공주·논산·부여·전주·청주·조치원·무주 등을 연결하는 지방도가 통과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이 지역에 철도교통이 발달하기 전에는 육로(陸路)로서 천안에서 영남지방에 이르는 율봉로(栗峰路)가 있었으며, 회덕에서 옥천으로 지나는 도로가 있었다. 현재 고속전철이 개통되고 기존 고속도로에 동서고속도로가 연결 개통되면 대전은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교통의 핵심지가 될 것이다.

대전지방철도청

대전역에서는 경부선의 여객과 화물을,

서대전역에서는 호남선의 여객과 화물을

노은농수산물도매시장 (유성구 노은동)

오정농수산물도매시장 (대덕구 오정동)

대전 중앙시장중앙시장

도마시장, 대전에서 오래된 장터 중 하나

인동시장, 대전 최초의 5일장으로 1919년에는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

대전역, 교통량 1·2위인 경부선과 호남선이 분기하는 대한민국 철도 교통의 중심지

교통량 1·2위인 경부선과 호남선이 분기하는 대한민국 철도 교통의 중심지

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

남부순환고속도로

대전당진고속도로

대전복합터미널, 유성시외버스터미널, 유성고속버스터미널, 대전서부시외버스터미널, 대전청사버스정류장

대전에서 시외로 나가는 국도는 국도 제32호선, 국도 제4호선, 국도 제17호선, 국도 제1호선이 지나가며 지방도는 57번 지방도, 32호 지방도, 635호 지방도, 571호 지방도가 있다.

대전 도시철도 1호선

청주국제공항

시민 공용자전거 무인대여 시스템인 '타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