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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永登浦, 여의도汝矣島, 밤섬 栗島, 영등포구 永登浦區

草霧 2013. 12. 6. 13:56

 

 

 

영등포永登浦, 여의도汝矣島, 밤섬 栗島

    

 

영등포구 永登浦區

  

 

 

Yeongdeungpo-gu (Yongdengpu)

 

 

 

서울특별시의 서남부에 있는 구.

원래는 경기도 시흥군 영등포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31년 영등포읍으로 승격했고, 1936년 경성부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시흥군 북면·동면의 일부지역과 함께 편입되어 영등포출장소 관할하에 있었다. 1946년 영등포구로 개칭되었고, 1963년 서울시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시흥군·부천군·김포군의 일부지역이 편입되었으나 1973년에 관악구가, 1977년에 강서구가, 1980년에 동작구와 구로구가 각각 분구되었다.

 

 

 

 

 

 

시의 남서부에 위치한 구. 구청 소재지는 당산동이다.

조선시대 경기도 시흥군 영등포면

1931년 영등포읍으로 승격

1936년 경성부의 구역확장 때 시흥군 북·동면의 일부지역과 함께 편입

1943년 구제(區制) 실시로 영등포구

1949년과 1963년에 시흥군 및 김포군의 일부가 편입

1973년관악구, 1977년강서구, 1980년동작구와 구로구 등이 차례로 분구

 

 

 

현재의 영등포구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주로 경기도 시응현 하북면(영등포동, 신길동), 상북면(당산동, 도림동, 문래동, 양평동, 대림동), 남산면(양화동)에 속하였다. 그러나 여의동은 한성부 연희방에 소속되었으며, 목마장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구한말 경인, 경부철도의 부설과 융의 4(1910)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면서 [도의위치 및 관할구역]을 새로 제정 시행하였는데, 이때 경기도 시흥군의 군청위치를 하북면 영등포리로 이전하면서 한촌인 영등포리가 교통, 상업의 중심지로 급속도로 성장발전하여 1920년에는 면으로 승격하여 영등포리, 당산리, 양평리를 관할하였다.

 

19364월 일제는 당시 경성부의 구역을 크게 확장하였으며 동부, 서부, 영등포의 3개 출장소를 설치하였다. 이때 현재 영등포지역은 경성부 영등포 출장소 영등포정, 여의도정, 당산정, 도림정, 양평정, 양화정, 실길정으로 재편성되었다. 단 대림정은 경기도 시흥군 동면에 속해 있었다.

 

1943610일 출장소를 영등포 구역소로 개칭하였다가 1945년 해방을 맞이하여 시장이 관할하는 서울시 영등포구가 되었으며, 1946년에 종래의 일본식 동명인 []을 우리말 동명인 []으로 변경 통일하였다. 그 후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급속도로 성장발전하여 197371일 관악구 197791일 강서구 198041일 구로구가 분구되어 경기도 지방과 경계가 아닌 새로 분구된 구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영등포(永登浦)

기록상으로는 1789년 조선 정조 13호구총수라는 통계자료가 경기도 금천현조에서 최초로 발견되었는데, 영등포란 나루터는 지금의 한강성심병원 건너편 여의도샛강변에서 여의도의 사라진 옛 양말산을 오가며, 한강밤섬과 마포를 연결하는 소규모 나루터이었다.

 

당시의 지도상으로는 거의 영등포의 글자가 길 영()이 아닌 꽃뿌리 영()로 표기되어 영등포지역이 예전에 풍경이 아름답고 문화의 향기가 그윽한 풍류(風流)의 고장이라는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던 곳으로 추측된다. 현재의 영등포란 명칭의 유래로는 음력 2월 초하루를 영등일(靈登日)로 하여, 보름까지 여의도샛강변에서 성행된 영등굿과 관계되어 변형표기된 것으로 추정되는 "永登(영등)"과 물가에 있는 마을을 뜻하는 "()"를 합친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보고 있다. 또 다른 견해에 의하면 지금의 영등포역 주변으로 추측되는 소머리제(牛頭峴(우두현))가 있어,멀리 동쪽으로 왕성(王城)을 바라볼 수 있어 궁궐을 사모하는 사람이 의례히 이 재에 오른다에서 영등포(永登浦)가 연유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조선시대 태종 14(1412)에 이르러 금주는 다시 금주현 ,금과현, 금천현(1414)으로 바뀌었다가 정조 19(1795)에 이르러 시흥헌으로 개명되었으며, 1895년 다시 경기도 시흥군으로 편입되엇는데, 현재의 영등포구 지역은 조선시대의 시흥헌 하북면(영등포동, 신길동), 상부면(당산동, 문래동, 양평동, 대림동), 양천현 남산면(양화동)에 속하였으며 이때 여의도는 한성부 연희방에 속했습니다.

 

 

영등포100년사 http://www.ydp.go.kr/main/page.do?mCode=F020050000

영등포구사(區史) http://www.ydp.go.kr/main/page.do?mCode=F020100000

 

 

서초구 · 동작구 · 관악구 · 강서구 · 양천구 · 구로구 · 금천구 7개구의 모체로서, 해방후 서울에서 지역분할이 가장 많았던 구

서울특별시 한강 이남 서부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으로 동작구, 서쪽으로 양천구, 남쪽으로는 구로구, 북쪽으로는 관할인 여의도를 사이에 두고 마포구, 용산구와 마주하고 있다.

 

서쪽은 안양천으로 강서구와 양천구와 접해있으며, 도림천으로 구로구와 접해있다. 남쪽으로는 금천구와 접하고, 동쪽으로는 동작구와 접해있다. 한강과 안양천 그리고 안양천과 도림천, 대방천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대부분의 지역이 낮은 평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한강과 그 지류인 안양천에 인접해 발달한 충적평야지대로, 대체로 해발 10m 내외의 낮고 평탄한 지역을 이룬다. 이러한 특징은 특히 경부선의 서부에서 안양천에 이르는 양평·당산·문래동 일대에 뚜렷하며, 제방이 갖추어지기 전에는 많은 범람이 있었다. 그리고 동쪽의 동작구와 인접한 지역은 낮은 구릉을 이루고 있어 여의도 샛강 사이에 포구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북쪽으로 한강의 하중도인 여의도를 지나 마포구와 경계를 이루며 남쪽으로는 구로구·금천구와 접해 있다.

 

면적은 24.56(2004)으로 서울시 면적의 약 4%이다. 여의도동이 가장 넓으며, 전체 영등포구 면적의 34%를 차지한다. 16만 세대가 살고 있으며 7105,131반으로 구성(2006)되어 있다.

    

 

서울 서남권(영등포 권역)의 중심지로서,

서울과 수원, 안양, 부천 등 수도권 서남부 지역을 연결하는 수도권 서남부 최대 거점도시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영등포역은 도심과 외곽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하고 있다.

 

1900년대 초기까지 영등포구의 취락발달은 극히 미약했으나, 철도의 개통과 공업지역의 건설로 이 지역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일제 식민지정책에 의해 영등포·양평·당산·문래동에 집중적으로 건설된 공장지역, 영등포시장을 중심으로 한 상업지역과 그 밖의 지역에 산재한 주택지 등으로 시가지가 확충되어 왔으며, 서울의 부도심으로 발달해 왔다. 이러한 공업도시로서의 면모는 지금도 그 전통이 계승되고 있는데, 현재의 공업 특징은 섬유·식품·음료공업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의 노동집약적 공업이 특색이고, 기계·화학 등의 공업은 규모가 작은 편이다. 일찍부터 근대공업이 발달해 도시화의 추진력이 되어 왔고, 이에 따른 인구증가, 주택지 확장과 상업지역 및 기타 업무기능지역의 발달을 가져왔다. 특히 최근 들어 영등포민자역사에 고층의 백화점이 들어서고, 역 앞 일대에 새로운 대형백화점들이 건설되어 유통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구축하고 있다.

 

그리고 영등포의 위상은 여의도의 개발과 이에 따른 교량건설로 더욱 높아졌다. 1970년대 초기부터 개발되기 시작한 여의도는 고도로 발달한 금융·방송 등 4차 산업의 업무기능들이 집중됨으로써 서울의 또 하나의 경제중심부를 이루고 었고, 국회의사당이 옮겨옴으로써 정치적 위상도 높아졌다. 마포대교·원효대교·서강대교의 가설로 도심부와의 접근성이 더욱 좋아진 영등포 지역에 국회의사당·증권거래소·KBS·MBC·SBS·전경련회관·노동청·원호청·대한결핵협회·대한치과의사협회·금융기관 등이 들어서 주요 기관이 밀집해 어우러져 상호 시너지 효과를 가지며 다양한 업무를 펼치고 있다.

 

구의 북쪽과 서쪽으로는 한강과 안양천이 흘러 저평한 범람원과 여의도, 2중지도 등 하천퇴적지형을 발달시켰으며, 동남쪽으로는 해발고도 60m 미만의 낮은 구릉을 이루고 있다. 대한제국 말기에 부설된 경인선과 경부선이 구를 통과하면서 영등포역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1912년 조선피혁주식회사의 공장이 설립된 이래 일본 자본에 의한 맥주·피혁·방직·주정(酒精) 공장들이 들어서 서울의 공업지대로 발전했다.

 

특히 1928년 영등포동·도림동·양평동·당산동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 공업지대로 지정되었고, 1931년 이후 기계·제련·염색 등 중화학계열의 공장이 증가되면서 영등포지역은 공장과 함께 군소상점가와 근로자의 주거지역으로 발전했다. 오늘날에는 섬유·식품·음료 공장 등 노동집약적인 공업이 입지해 있다. 한강의 하중도인 여의도는 환상(環狀)의 제방 내에 주택과 채소밭이 있었으나 1970년대 초반부터 개발이 실시되어 대규모의 아파트 단지와 신흥 업무지구로 변모했다.

 

뿐만 아니라 교통의 편리함을 이용한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주거공간으로서도 각광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개통된 경인선, 뒤이어 개통된 경부선과 이에 따른 영등포역의 설치 및 호남선의 개통, 이에 더해 1917년 한강인도교(현 한강대교)의 준공으로 한강 남부지역과 서울 중심부를 잇는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또 지하철 2호선이 남북으로 관통하고 지하철 5호선이 동서로 지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그리고 성산로·선유로·당산로·양평로·제물포길·여의대로·대방로·도신로 등이 구의 남북을 관통하고, 올림픽대로·노량진길·경인로·영등포로 등이 동서로 관통하여 인천지역과 남쪽지역으로 이어지며 성산대교·양화대교·당산철교·서강대교·마포대교·용호대교 등으로 한강을 건너 강북과 이어져 있다.

 

 

도심과 외곽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

영등포구는 북쪽으로 한강을 경계로 마포구와 마주하고 있고 남쪽으로 관악산을 비롯한 호암산, 독산연봉등의 산악을 먼 발치에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특히 여의도는 오랫동안 군사기지인 비행장으로 사용되어 온 모래밭으로 별 이용가치가 없었는데, 1970년 여의도 개발 사업이 준공되면서 새도시 여의도로 변모하게 되었으며 국회의사당, KBS, MBC, SBS, 동아일보사, 전화국 등의 공공기관과 63빌딩, LG 빌딩, 전경련회관, 증권거래소와 증권회사들이 들어서 금융의 중심지로 탈바꿈하여 서울의 맨하탄으로 불리우고 있다. 그 중에서도 19869월 한강 종합개발사업의 완공으로 여의도 부근을 중심으로 강변에는 체육공원, 낚시터, 유람선이 생기고 여의도공원이 있어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여의도 내에는 국회의사당·한국방송공사(KBS)·문화방송(MBC)·서울방송(SBS)·대한결핵협회·증권거래소 등 주요기관이 밀집해 있다. 과거 신길동에서 샛강을 지나 마포로 건너던 방학호진(放鶴湖津방아곶이나루)1900년 한강철교가 가설됨에 따라 그 기능을 마감했고, 그후 한강인도교·양화대교·마포대교·원효대교가 차례로 가설되어 강북과의 연결이 원활해졌다. 시흥대로·노량진로·경인로·영등포로·당산로·양평로·신길로·의사당길·여의서로·여의동로 등의 도로가 연계되어 있다.

 

 

 

철새도래지 밤섬

한강의 밤섬은 한자어 율도(栗島)로 표기되는 섬으로 섬의 모양새가 마치 밤알을 까놓은 것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가산(駕山)이라고도 불리며, 여의도의 별칭인 나의주(羅衣州)와 상응하여 율주(栗州)라고도 불리었습니다. 밤섬의 동부와 서부에 발달된 하식애(河蝕崖)는 소해금강이라고 불렸으며, 큰밤섬 아래는 한강의 퇴적으로 9개의 작은 하중도(河中島)가 연속되고 수십리의 백사장을 이루어, 일찍이 서울명소고적에서 서호팔경의 하나인 율도명사(栗島明沙)라 하였듯이 주변경관이 절경을 이루었다고 하며, 인접한 여의도가 점점 넓은 하중도로 발달해 예전에는 도선장(渡船場)으로서 홍수때를 제외하고 여의도 사이의 백사장을 건너 인천 등으로 가는 간로(間路)가 되었습니다.

 

한강의 밤섬은 동국여지비고에 의하면 고려때 귀양보내던 섬이었다하며, 1394년 조선의 서울 천도와 함께 배 만다는 기술자들이 주로 처음 정착해서, 백사장과 한강수운을 활용하여 6.25전쟁 이전까지 조선업과 뱃사공, 물산도선하역 등이 널리 성행되었으며, 용재총화문헌에 의하면 세종·성종시대에 뽕나무를 많이 심어서 나라의 뽕밭이라고 하면서 누에치기도 성행되었다고 합니다.

 

명조실록114월에 나타난 밤섬주민의 생활상을 보면 수도 서울에 있으면서도 이곳의 한강물이 워낙 깨끗하여 이주전까지 식수로 직접 마셨다고 하며, 외부로의 왕래가 뜸해 남의 이목을 덜 의식한 듯 섬주민의 생활방식이 대체로 자유분망하여, 남녀가 서로 업고 업히고 정답게 강을 건너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아 동성동본이고 반상이고 따지지 않고 의논 맞춰 살면서 조금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하며, 마씨, 인씨, 석씨, 선씨 등 희귀성을 가진 대가족들이 특히 많이 집단거주하면서 은행나무 고목(당산목)과 부군당이 있어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밤섬은 1968210일 여의도개발의 일환으로 폭파되어 당시 62가구 443명의 원주민은 마포구 창전동과 우산 산중턱으로 집단이주하였으며, 밤섬은 시간이 지나면서 한강에 의하여 퇴적물이 쌓이고 억새, 갯버들 등 친수식물이 자생하면서 1990년대에 들어 세계적으로 보기드문 도심속의 철새도래지로 부각되어 1999810일 서울시가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고시하여 특별 보전해오고 있습니다.

 

밤섬은 서강(西江)에 가까웠던 탓으로 정조 13(1789)에 발간된 호구총수에 한성부 서강방 율도계라는 이름으로 나와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밤섬은 여의도와 함께 고양군 용강면 여율리가 되었다.

 

[대동지지]에 의하면 서강 남쪽에 있는 한 섬으로 섬 전체가 수십리의 모래로 되어 있으며 거민들은 부유하고 매우 번창한 편이었다고 한다. 특히 경치가 아름다워 [서울명소고적]에서는 율도는 일찌기 마포팔경을 읊은글 가운데에서도 '율도명사(栗島明沙)'라 하였듯이 맑은 모래가 연달아 있어서 그야말로 한강 강색과 섬의 풍치는 묘하게 어울린다라고 하였다

 

밤섬(栗島)에 관한 조선시대 기록으로, 성현(成俔)[용재총화]에 의하면 율도(栗島)는 조선초기부터 뽕나무를 심어 잠업이 성행한 지역이었고, 서울장안에 뽕잎 값이 비쌌을 때 밤섬에서 뽕을 대기도 하였다. 밤섬에 관한 풍습은 명종실록 명종 114월 조()에 기록하고 있는데 섬 주민의 생활방식이 문란한 것으로 비쳐져있는데, 이는 외부와 교통이 제한되어 남의 이목을 덜 의식했기 때문이다. [동국여지비고]에서도 고려때는 귀양보내던 섬이었으며 도선(渡船)장으로 백사장을 건너 인천으로 가는 간로(間路)가 된다고 하였다.

 

이섬은 초기에는 고립된 섬이었으나 여의도가 점점 넓은 하중도(河中島)로 발달하게 되었고, 감수기에는 여의도에 연속하게 된다. 기반암은 단단한 바위층이고, 섬의 동부와 서부에 발달한 하식애(河蝕崖)는 작은 해금강이라 불렀고 절경을 이루었다.

 

밤섬(栗島)과 여의도의 주변에는 홍수때는 거의 침수 됐다가 끝나면 하상이 수면위에 노출되는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는데, 조선시대에는 대략 250300만평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밤섬은 서강쪽에 여의도는 영등포쪽에 가까웠는데, 여의도는 1916년부터 비행장으로 사용되었으며 광복후에도 1958년 김포 공항이 세워지기 전까지 민간 및 군용기지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홍수시에는 백사장이 침수되어 밤섬 고지대의 주민들의 교통이 차단되어 고립되곤 하였다. 이후 밤섬은 여의도가 개발되면서 한강하구의 확장으로 유수를 좋게하고, 여의도 제방의 축석에 필요한 잡석채취를 위해 19682월 폭파 해체된다.

 

현재의 윤중제인 여의도의 방축을 쌓을 때 114,000입방미터의 잡석과 147,500입방미터의 흙을 이용할 수 있었다. 폭파에 의하여 밤섬의 대부분은 없어지고 일부 10여개의 조그마만 섬의 형태로 남았다. 그리고 20여년동안 계속된 한강 퇴적물에 의하여 섬에는 나무와 풀이 우거지고 새들이 모이면서 도심속의 철새도래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80년대 한강종합개발시에는 철새도래지와 어류서식지로서 보존할 가치가 크기 때문에 현 상태로 존치하게 된 것이었다.

 

행정구역상 서울 마포구 서강동 15통으로 되어있는 밤섬은 500년전 조선의 서울 천도와 함께 배 만드는 기술자들이 처음 정착했다고 한다. 수도 서울에 있으면서도 지금껏 한강물을 식수로 마시며 거의 원시공동사회체제 속에서 살아온 이 섬에 마씨(), 인씨, 석씨, 선씨 등 희성(希性)이 많은 것이 가장 뚜렷한 특색의 하나다. 폭파 당시 밤섬에는 부군신, 삼불제석님, 군웅님의 3신을 모시는 사당을 만들어 17대를 살아온 62가구 443명이 살고 있었는데 대부분 어업과 도선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밤섬에 관한 풍습은 명종실록 명종 114월 조()에 기록하고 있는데 섬 주민의 생활방식이 문란한 것으로 비쳐져있는데, 이는 외부와 교통이 제한되어 남의 이목을 덜 의식했기 때문이다. 밤섬은 면적에 비하여 가구가 많고 농업생산은 별로 없으나, 섬사람들은 옛부터 한강 수운에 관련된 조선업, 뱃사공, 배에 물산을 실어 내리는 하역에 의존하였다. 암석으로 이루어진 큰 밤섬 아래에는 한강의 퇴적으로 작은 여러 개의 모래섬이 발달하였는데, 그 백사장은 좋은 조선장(造船場)이 되어서, 여러 백년 동안 조선업이 가장 중요한 직업이 되었다. 배만드는 기술자인 목수가 가장 큰배를 많이 제작하던 시기에는 54()였고, 일제시대에는 강제징용수첩을 받은 청년층 조선목수가 17명이었다고 한다. 조선업은 타지방의 주문을 받는 것과, 공임(工賃)을 받고 타지방에 고용되어 가는 경우가 있는데, 조선업이 번영하던 시절에는 경기가 좋았었다. 그러나 6·25의 피해를 겪은 이후 조선업은 완전히 쇠퇴하여 다른 직업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선유도공원

양화대교 중간에 위치한 선유도공원은 과거의 정수장 건축구조물을 재활용하여 국내 최초로 조성된 환경재생 생태공원이자 ()의 공원입니다. 선유도일대 114의 부지에 기존건물과 어우러진 수질정화원, 녹색기둥의정원, 수생식물원, 시간의정원 등 다양한 정원의 수생식물과 생태 숲을 감상 할 수 있고, 한강전시관과 선유정 등 다양한 볼거리와 휴식공간을 통해 생태교육과 자연체험의 장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양화 한강공원과 연결된 선유교, 안개분수, 월드컵분수 등 아름다운 한강을 조망할 수 있어 한강의 새로운 명소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산로 공공디자인거리

디자인서울거리

캔버스 디자인거리

우리동네디자인 프로젝트

국회의사당

여의도

여의도공원

63빌딩

영등포공원

한강여의도 봄꽃축제

서울세계불꽃축제

물레아트페스티벌

문래창작촌

정월대보름축제

여의도공원

타임스퀘어

LG사이언스홀

여의도샛강생태공원

영등포 재래시장

여의도한강공원

씨랄라

국회의사당

방송국(MBC)

63시티

한강유람선

샛강다리

여의서로(윤중로)

영등포역한

국잡지정보관

KBS(KBS견학홀)

영등포단오한마당축제

하이서울 페스티벌

하자센터

 

 

 

 

 

 

 

문화재로는 조선이흠례묘지가 있으며, 선유봉과 당산동 일대에는 경승을 이루었고 부군당이 있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경성방직 사무동

경찰혼

() 박정희 대통령 흉상

귀신바위와 느티나무

당산동 부군당

당산은행나무

도당

둥근잎 느티나무

반공순국용사위령탑

방학곳지부군당

백자대호

상산전

숙종왕자 연령군 옛 묘역터

이탈리아 의무부대 6.25 참전기념비

조선이흠례 묘지

한강방어백골부대전적비

OB맥주 담금솥 견본

조선 후기 금천현의 관물(官物)

조선 후기 금천현의 군인수와 군기(軍器)

영등포가 속해 있던 금천현의 인구(人口)

이재의 삼유당기(三悠堂記)

허목(許穆)<삼현사기(三賢祠記)>

윤자의 <호암산설(虎巖山說)>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의총(疑塚)

금천현감의 봉름(俸廩)

갑오경장 이전 금천현의 물가(物價)

영등포가 속해 있던 금천의 풍속(風俗)

본관이 금주(衿州) 혹은 금천(衿川)인 성씨

영등포는 언제 서울이 되었나?

선유봉의 또 다른 이름 양화도산

선유도에 있었던 선유봉

인공폭포가 있는 양화동 쥐산

여의도에 있었던 양말산

금천현의 진산(鎭山) 검지산(黔芝山)

보라매공원의 호수 이름은 번당(樊塘)

번당리에 있었던 연령군묘(延齡君墓)

송씨(宋氏) 효자(孝子)들과 송가택(宋家澤)

검지산에 있는 농암(籠巖)과 난가대(爛柯臺)

효사정이 있었던 고사리(高寺里)

현재 안양사에 있는 귀부(龜趺)

삼막사(三藐寺)

영등포동 신길동은 원래 마포리(麻浦里)

양평동에 있던 원()집 양화도원(楊花渡院)

옛날 문래동에 사셨던 이숙(李淑)

100년전 달걀 150개 값이 한 냥()

호암(虎巖)이라는 산 이름의 유래

송가택(宋家澤)

효사정

취암정과 영호루

영등포라는 개의 위치

영등포의 중심(中心)에 대한 단상

도림천에 있던 우와피(牛臥陂)

영등포가 속해 있던 금천현감의 봉름(俸廩)

1800년대 말 양평동의 호구수(戶口數)

도림천의 옛 이름 마장천(馬場川)

영등포의 내력

도림동에 있는 모랫말 

 

     

 

법정동 34개 기준, 행정동 기준은 18

당산(堂山영등포(永登浦영등포동1(永登浦洞一街영등포동2·영등포동3·영등포동4·영등포동5·영등포동6·영등포동7·영등포동8·여의도(汝矣島당산동1(堂山洞一街당산동2·당산동3·당산동4·당산동5·당산동6·도림(道林문래동1(文來洞1문래동2·문래동3·문래동4·문래동5·문래동6·양평동1(楊平洞一街양평동2·양평동3·양평동4·양평동5·양평동6·양화(楊花신길(新吉대림(大林)

 

 

 

 

 

영등포동(永登浦洞 / Yeongdeungpo-dong)

영등포동은 영등포구의 근원지가 되는 동이며 영등포 1·2·33개의 행정동을 보유한 법정동으로서 이 동의 명칭유래는 확실치는 않으나, 일반적으로 영등(靈登)굿과 관계되어 변형표기된 영등(永登)과 물가를 뜻하는 포()가 합쳐진 명칭으로 보고있습니다.

 

죽 마 루 :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건너편 영등포삼각지로 옛 영등포 역전마을과 영등포 시장 중간에 있는 마을로 중마루(中村)라고도 하는데, 이곳은 예전에 비가 오면 땅이 죽같이 질다고 하여 그렇게 불리어 왔음

옹 기 말 : 영등포7108, 109, 109, 110번지 고지대로 이 마을로 조선초부터 6.25사변까지 장독, 시루, 자배기, 김장독, 항아리, 물동이 등의 옹기를 구워 팔던 마을임

백간집터 : 지금의 신세계 건너편 영등포 삼각지내 옛 영등포경찰서 자리로 옛날 김희석이라는 사람이 지었던 99간자리 집터를 말함

연못자리 : 1960년대 서울역행 전차종점이 있엇던 영등포역 주변의 연못을 말함

 

 

여의도동(汝矣島洞 / Yeouido-dong)

여의동은 여의동이란 1개의 행정동을 보유한 동으로서, 잉화도(仍火島), 나의도(羅衣島), 나의주 (羅衣洲) 라고도 불렸던 동으로, 여의도가 홍수로 인하여 휩쓸릴 때도 제일 높은 곳인 지금의 국회의사당에 자리잡았던 양말산만은 물에 잠기지 않고 나타나 부근 사람들이 "나의 섬" 이니 "너의 섬" 이니 하고 지칭한 것중 "너의 섬" 을우리말 발음을 딴 이두어로 표기한 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양 말 산 : 지금의 국회자리로 엣날부터 말이나 양을 기르던 산으로, 말을 기르는 양마산(養馬山), 또는 양을 기르는 양마산(洋馬山)의 의미로 그렇게 불렸음

 

 

당산동(堂山洞 / Dangsna-dong)

당산동은 당산 1·22개동의 행정동을 보유한 법정동으로서, 옛날에 이곳에 해당화 나무가 많아 늦은 봄에 많이 피었다하여 당산동이라 하기도 하며, 또 하나는 당산동 110에 우뚝 솟은산이 있어 이를 단산(單山)이라 부르고 이곳에 부군당이 있어 당제(堂祭)를 지냈던 것에서 유래된 이름이라 합니다.

 

당산을 형성한 세군데 옛 자연부락 웃당산 : 수령 500여년 은행나무가 잇는 당산동 110버지 언덕일대

원당산 : 당산동4·5·6가 일대로 옛날 당()집이 있는 마을

벌당산 : 옛날 벌판이 있던 곳으로 안당산이라고도 하는 마을

샛 말 : 당산동과 양평동 사이에 잇는 마을

새 말 : 당산1동과 당산2동 사이예 있는 마을로 예전엔 갈대밭이 있었음

가락 마을 : 지금의 당산동 104번지에 벽돌공장이 있었던 마을임

불탄 자리 : 지금의 당산동 1256번지 일대 6.25사변때 폭격으로 불탄 자리임

 

 

도림동(道林洞 / Dorim-dong)

도림동은 도림 1·22개동의 행정동을 보유한 법정동으로서, 옛날에 이 마을의 산 행세가 마을뒤로 성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이 마을이 국도에서 돌아앉아 있다고 해서 도야미리(道也味里)가 도림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도림리 일대의 들판에 억새풀 종류의 새나무가 많았으며 특히 길 옆에 삿자리 일종의 숲을 이루었기 때문에 붙혀진 이름이라 전해 지기도 합니다.

 

고추말고개 : 고추말공원주변에서 영등포 1620번지로 넘어가는 고개로, 옛날 이 고개를 넘을 때 고추처럼 매운 바람이 불었다해서 불여진 이름입니다.

원지막거리 : 도림 151번지 일대로 과수원이 있어 붙혀진 이름임.

주 막 거 리 : 도림동 186~187번지 일대로 옛날 인천으로 가는 길목이름임.

돼 지 마 을 : 도림동 152번지 일대로 돼지(도야지)를 많이 사육하였기에 붙혀진 이름임.

모 랫 말 : 신도림역건너편 대방천 냇가에 있던 마을로 모래가 많았다 하여 붙혀진 이름으로 사천리(砂川里)고도 불렸음.

 

 

문래동(文來洞 / Mullae-dong)

문래동은 문래 1·22개동의 행정동을 보유한 법정동으로서, 1930년대 군소 방적공장이 들어서자 일본인들에게서 계옥정(系屋町) 이라 불리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광복후 우리식 이름으로 고칠때"물래"라는 방적기계의 발음을 살려 문래동으로 이름지어졌다는 설이 일반적입니다.

 

오 백 채 : 지금의 문래동 4가 일대에 일본이 1940년쯤 도시게획의 일환으로 형성한 이 일대 대단위 영단주택인 집단기와집을 이렇게 불렀음.

긴 밭 : 문래동 4가의 5백채가 있는 공의 서쪽지점을 말함.

강 께 밭 : 오목내다리(현재의 오목교)근처의 문래 2동 밭 지대를 말함

 

 

양평동(楊坪洞 / Yangpyeong-dong)

양평동은 양평 1·22개동의 행정동을 보유한 법정동으로서, 한강 옛 나룻터의 하나인 양화도나루터 근처 벌판에 이루어진 마을이란 뜻으로 양화도의 ""자와 벌판의 ""을 따서 붙혀진 이름입니다.

 

벌 말 : 지금의 양평 2동주민센터 근처 벌녘(벌판)에 있었던 마을임.

오목내뚝 : 오목교주변 영등포지역 안양천 제방으로, 안양에서 흘러 내려오는 오목내 개천을 막은 뚝임.

뚝 밑 : 오목교주변의 양평 1동 안양 뚝방지역으로 광복후 이북 전재민 수용소가 있었던 마을임

 

 

양화동(楊花洞 / Yangphwa-dong)

양화동은 관할 행정동인 양평2동에 부속된 법정동으로서, 한강의 선유도에 인접하여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한강을 건너다니던 양화도나루터 주변지역인 이 일대에 옛부터 버드나무가 많아서 붙혀진 이름입니다.

 

나루께모래톱 : 선유도 동쪽 옛 양화도나루 근처의 톱발같이 생긴 모래밭을 말함.

벌 판 동 네 : 지금의 한강시민공원 양화지구사무소 주변으로 양화도나루터에 인접하여 형성된 마을을 말함.

 

 

신길동(新吉洞 / Singil-dong)

신길동은 신길 1·2·3·4·5·6·77개동의 행정동을 보유한 법정동으로서, 동유래가 명확하게 알려 있지는 않으나, 좋은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하는 뜻으로 붙혀진 신기리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가 마 골 : 신길 1144-147 대신시장옆 야산지대로 해방후 기와를 굽는 가마터가 있었다 하여 붙혀진 마을로, 예전에 강씨와 박씨가 많이 살았다 하여 강박골이라고도 하였음.

밤 동 산 : 신길 1동 철길 거너편 여의도방향 지역으로 옛날 이곳에 밤나무가 무성하여 지어진 마을임.

방 학 고 지 : 옛날에 방학호진나루터가 있었다던 지금의 귓바위 근처에 방학정(放鶴亭)이란 정자가 있었다 하여 방학고지라 한다 하나, 옛 지명인 상방하곶(上方下串)을 줄인 말인 듯 하며, 밤고지리라고도 함.

밤고지고개

신길동의 부락별 옛 별명 <> 신길동(新吉洞) : 분동후의 고유 신길동으로 지금의 신길 1동 지역임.

신광동(新光洞) : 신길동 95번지에서 우신초등학교를 잇는 길 이북의 지역을 관할하는 동으로 지 금의 신길 2동 지역임

신남동(新南洞) : <>신길동, 신광동, 신풍동을 제외한 지역으로 지금의 신길 4동 지역임.

지금의 신길 6동은 동작구의 대방 1,2동과 신대방 일부가 편입된 지역이며, 신길 6동에서 신길 7동이 분동되었음

 

 

대림동(大林洞 / Daerim-dong)

대림동은 1·2·3개동의 행정동을 보유한 법정동으로서, 안양천을 끼고서 1949년 지금의 신대방동과 신도림동 지역을 합쳐서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신대방동의 ""와 신도림동의""을 합하여 동 이름을 지었습니다.

 

원 지 막 : 지금의 대림 1824주변지역으로 예전에 이 일대에 과수원이 있었다 함.

통 멀 : 지금의 대림 1903-52~903-35주변으로 예전에 학형상을 한 대림동으 학머리지역으로 추정됨

시 내 길: 지금의 대림 2834-12-1033-2 주변으로 예전에 이 일대에 시냇물이 흘렀다 함.

은모래길 : 지금의 대림 3719-2~711주변의 길로 예전에 은빛 같은 모래가 많이 있었던 곳이었다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