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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은방(延恩坊)과 상평방(常平坊), 은평구 恩平區

草霧 2013. 12. 6. 20:06

 

 

 

 

 

연은방(延恩坊)과 상평방(常平坊)

 

 

은평구 恩平區

 

 

 

 

Eunpyeong-gu (Enbing)

 

 

 

서울특별시의 서북부에 있는 구.

원래는 한성부의 연은방과 상평방에 속했으며, 1914년 경기도 고양군에 편입되면서 은평면이 되었다.

 

은평구의 명칭은 은평면(恩平面)에서 따왔다. 조선 시대 이 지역의 명칭인 연은방(延恩坊)과 상평방(常平坊)에서 각각 글자를 따왔다.

 

 

 

 

 

 

 

 

시의 북서부에 위치한 구. 구청 소재지는 녹번동이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의 연은방과 상평방 지역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1949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편입

1973년 고양군 신도면(神道面)의 구파발리(舊把撥里진관내리(津寬內里진관외리(津寬外里)이 편입

1979년 서대문구 분리 신설

 

 

 

서울시역의 확대로 1949년 서울시에 편입되어 서대문구의 은평출장소가 되었고, 1979년 서대문구에서 분리되어 은평구로 독립·승격되었다. 면적은 2012년말을 기준으로 서울 전체 면적은 4.91%이며, 29.69에 달한다. 동별 면적은 진관동이 전체의 38.79%를 차지하며, 불광1동이 그 뒤를 이어 10.54%를 차지한다.

 

은평구에는 석기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은평구 지역은 일부 지역에서 혈연을 같이하는 씨족끼리 취락을 이루어 집단생활을 하였으며, 움집 같은 곳에 기거하면서 농경과 수렵, 어로활동을 통하여 음식물을 구하고 원시적인 방직술을 습득하여 간단한 천(직물)을 짜 입기도 하였다.

 

삼국시대인 백제 때에는 위례성, 신라시대에는 신주, 통일신라시대에는 한산주로 부르다가 757년 경덕왕 7년에 한주로 고쳤습니다. 그리고 서울 지방에는 한양군을 설치했는데 서울이라는 이름의 하나인 한양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한양군양주라 고치고 1087년 문종 21년에 양주남경으로 승격시켜 서경’(평양), ‘동경’(경주)과 더불어 3소경이 되어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후 1308년 충렬왕 34년에 한양부로 개칭하였다.

 

1394년 조선 태조 3년에 한양부로 도읍을 천도하면서 한성부로 이름을 바꿨으며, 서울 지역은 552방으로 개편했는데, 지금의 구()에 해당하는 5(, , , , ) 중 은평구 지역은 북부의 성외인 연은방, 상평방 지역에 해당되었으며 은평이라는 말은 이 두 지명(연은방+상평방)에서 유래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 연은방 지역이었다. 1914,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녹번리였다. 1950년 동 이름 개정 때 녹번동으로 바뀌었다.

 

석기시대부터 일부 지역에서 혈연을 같이 하는 씨족끼리 집단을 이루어 취락생활을 했던 은평구 지역은 서울의 일부로써 백제 때에는 위례성, 신라시대에는 신주, 통일신라시대에는 한산주로 부르다가 경덕왕 7(757)에 한주로 고쳤습니다. 그리고 서울 지방에는 한양군을 설치했는데 서울이라는 이름의 하나인 한양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고려시대에는 한양군을 양주라 고치고 문종 21(1087)에 양주를 남경으로 승격시켜 서경(평양), 동경(경주)과 더불어 3소경이 되어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습니다. 이후 충렬왕 34(1308)에 한양부로 개칭하였습니다.

 

조선 태조 3(1394)에 한양부로 도읍, 한성부로 고치고 서울지역은 552방으로 개편했는데, 지금의 구()에 해당하는 5(, , , , )중 은평구 지역은 북부의 성외인 연은방, 상평방 지역에 해당되었으며 은평은 이 두 지명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한일합방이후 한성부가 경성부로 바뀌고 성안()과 밖()을 구분, 5358면제(191141일 경기도령 제3)로 만들었으며, 191312월 총독부령 제111호로 각 도의 위치 및 관할지역과 부(), ()의 명칭이 결정되고 이듬해 4월부터 실시되었는데 연은방 상평방 지역에 은평면(36개 동, 리 관할)이 설치(경기도령 3)되었습니다. 이때 경성부의 관할지역이 대폭 축소되어 은평면 지역이 경기도 고양군으로 떨어져나갔고, 서울시로 편입된 것은 해방 이후인 1949813(대통령령 제159)에야 이루어졌습니다.

 

그간의 서울지방의 행정구역 변천을 보면 1936214일 조선 총독부령 제8호로 경성부의 구역을 확장, 변경했는데 은평면의 일부인 5개리(홍제외리, 홍제내리, 부암리, 홍지리, 신영리)가 설치되고 이어 19407월에는 서부출장소를 신설,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9436월 경성부령 제163호로 출장소를 폐지, ()제를 실시했는데 용산출장소를 용산구, 동부출장소를 동대문구와 성동구로, 서부출장소를 서대문구로, 영등포출장소를 영등포구로 하고 4대문안에 종로구와 중구가 설치되어 7구제가 시행된 다음에 10월에는 연희면의 일부를 경성부로 편입하면서 서대문구, 용산구의 일부를 분할, 마포구가 신설되어 8개구로 관할하게 되었습니다.

 

해방후 19469월에 경성부가 서울시로 되었고 경기도 관할에서 분리, 서울특별시로 승격(서울특별시 군정법령 제 106)되었으며 19498월 고양군 은평면 11개리, 연희면 7개리가 서대문구에 편입, 이 구역을 관할할 은평출장소를 설치(1949813일 대통령령 제161)하면서 비로소 은평구 지역이 서울시로 편입되었습니다.

 

1973312일 법률 제2569호로 그해 71일을 기하여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관내 구파발리와 진관내, 외리를 서울시로 편입하여 현재의 은평구 지역으로 관할하게 되었으며 1979101일 대통령령 제9630호로 서대문구에서 분구되어 출장소를 폐지하고 은평구(15개동 : 녹번, 불광1, 불광2, 갈현, 구산, 대조, 응암1, 응암2, 응암3, 역촌, 신사, 증산, 수색, 진관내, 진관외)로 되었습니다. 198991일 이후 행정동 16개동, 법정동 13개동으로 늘어났다가 2007813일 법정동인 구파발동, 진관내·외동이 하나의 진관동으로 통합되면서 법정동 11개동, 행정동 16개동으로 되었습니다.

 

 

 

 

 

불광동 독박골 원두표 장군 이야기

은평구 불광동 독박골에는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당시 큰 공을 세운 원두표 장군과 관련된 옛 이야기가 전해진다. 인조반정 직전 이 바위굴 근처에서 낯선 젊은이가 자주 배회하였다. 나무하러 간 동네 사람들이 이 모습을 당신은 무엇하러 온 사람이오?” 하고 묻자, 그 젊은이는 나는 염병이 걸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병을 고치러 왔소하는 것이었다. 이에 사람들이 염병이 옮을까 염려하여 이 근처에 얼씬거리지 않게 되었다.

 

사실 이 젊은이가 바로 원두표 장군이었으며, 반정을 모의하였던 사람들이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염병이 걸렸다고 둘러댄 것이었다. 이에 당시 인조반정 모의에 참가한 사람들이 이를 모방하여 이제 병 고치러 가세.”라는 말로 거사의 암호를 대신하였다고 한다.

 

진관동 대장간 이야기

진관동(()구파발동)은 옛 파발역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구파발은 중국으로 향하는 연경로(燕京路)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였다. 당시 교통은 주로 말을 이용하였으므로, 이 지역에는 말의 편자 등을 손질하기 위해 대장간이 많이 위치하였는데, 이들 구파발 대장간들이 임진왜란 당시 평양으로 피난하던 선조를 위기에서 구하였던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군의 연이은 패배 끝에 선조가 평양으로 피난가던 때였다. 임금의 행렬이 왜군의 추격을 받아 다급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왕을 모시고 피난가던 한 병사가 당시 구파발에 있던 여러 대장간에 급히 부탁하여 무거운 쇳덩어리를 많이 제작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그 쇳덩어리를 긴 자루에 끼워서 왜군이 멀리서 쫓아오는 구파발 길목 곳곳에 일부러 놓아두게 하고 비슷한 모양의 가짜 쇳덩어를 만들게 하였는데, 솜뭉치를 천으로 써서 검청칠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 가짜 쇳덩어리를 우리 군사 어깨에 메게 하여 쫓아오는 왜군들에게 그 모습을 보이게 하였다.

 

아주 가까이까지 뒤쫓아온 왜군 병사들이 땅에 떨어져 있는 이 쇠덩어리를 보고 들어보려고 하였으나, 너무 무거워 세 사람이 힘을 합해도 들을 수가 없었다. 이에 왜군들은 모두 조선 임금의 호위병들은 천하장사들이다.”라고 하며 무서운 생각이 들어 추격의 속도를 늦추었다고 한다.

 

진관동 여기소 이야기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을 쌓을 때 이야기이다. 전국에서 많은 청년들이 노역(勞役)에 동원되었다. 이 공사에 동원된 한 관리를 만나기 위해 시골에 사는 한 기생이 남장까지 하고서 삼각산까지 찾아와서 공사 감독에게 면회를 간청하였다. 하지만 옛날 관습에 나라의 큰 공사에 남녀가 만나는 것은 부정이 든다고 하여 이를 엄격히 금지하였기 때문에 공사 감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그 기생은 객지에서 혼자 남아 그리운 님을 기다렸으나, 몇 달을 기다려도 아무런 소식이 없고 남자는 오지 않았다. 그러던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느 가을날 아침 기생은 애통함을 참지 못하고 근처에 있는 연못속으로 스스로 몸을 던져 버렸다.

 

공사가 모두 끝난 후 기생이 찾던 관리는 자기를 찾아온 기생이 연못에 빠져 죽은 것을 뒤늦게 알고 그 연못에 찾아가 조금만 더 기다리지 참지 못하고 여기서 죽었단 말이오하면서 통곡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후 이곳을 너 여(), 여기 기(), 못 소()'의 뜻이 담긴 여기소(汝其沼)'라고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달구질소리

달구질소리는 시신을 땅에 묻고 달구지꾼들이 흙과 회를 다질 때, 선창자가 북을 치면서 선창하면 달구질하는 사람들은 달굿대로 묘를 다지면서 후렴을 부른다. 달구질하는 동안 망인(亡人)의 사위나 친척 등을 불러내어 봉분에 절을 시키고 술값을 내게도 한다.

 

불광동 연신내 산림감수 이야기

지금으로부터 약 60여년전 연신내에 고씨(高氏)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악의없는 거짓말을 잘하여 동리 사람들을 웃기거나 골탕을 먹이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효경동 양모래(梁墓川)에서 박석고개까지의 큰 들 가운데 개천이 하나 있었는데, 개천 둑 높이가 논에서 전봇대의 높이만큼 높았다. 어느 해 봄 논에 모내기 위해 가장 바쁜 어느 날, 점심때가 되어 모내던 사람들이 개천 둑으로 모두 기어 올라와서 막 점심식사를 하려고 할 때였다. 마침 고씨가 개천 둑길을 혼자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점심식사를 하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여보게 고씨! 거짓말이나 한 마디 하고 가게나.” 하고 청했다. 고씨는 나 오늘만큼은 거짓말 안 하기로 했네.” 하면서 그냥 지나가려고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길을 막고서는 그러지 말고 거짓말 한마디 하고 목도 컬컬한데 술도 한잔 자시고 가게.” 하면서 계속 청했다. 그러자 고씨는 나 오늘은 솔직히 거짓말 안 하겠다고 생각하였는데, 자꾸 한마디 하라니까. 하겠소. 사실 내가 지금 구파발 대장간에 볼 일이 있어 갔다오는 길인데, 구파발은 온 동리가 지금 야단법석이 났소.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에서 산림감수가 나왔다고 하지 않겠소. 나도 이렇게 한가히 이야기할 때가 아니야.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지하고는 총총히 사라져 버렸다.

 

고씨의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그만 먹던 밥 사발을 던져 버리고, 제각기 자기 집쪽으로 급히 돌아갔다. 당시에는 집안에서 쓰는 연료로는 집에서 가까운 산에 올라가서 땔감을 해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땔감속에는 물론 생나무 도 있게 마련인데, 이것이 산림감수에게 걸리는 날이면, 곤욕을 치르게 되기 때문이었다. 모내던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집에 돌아가서 생나무를 감추기 위해 법석을 떨은 후 산림감수가 오기를 기다렸으나, 저녁까지 산림감수가 나타나지 않자 그제서야 고씨에게 감쪽같이 속은 것을 알아차렸다. 한창 바쁜 모내기 철에 헛시간을 보낸 마을 사람들이, 그후 고씨를 만나자 모두 원망하였으나, 고씨는 내가 그러게 거짓말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 않았소. 그런데 당신들이 심심하니 거짓말 한마디 해달라고 해서 마지못해 말 한 것인데, 그게 내 잘못이오?”하고 말했다고 한다.

 

불광동 밥할머니 이야기

밥할머니는 불광리, 즉 연신내 사거리에서 동쪽으로 보이는 산밑 마을(지금의 수양관 아래쪽 마을) 부근에서 대대로 집성촌으로 살아온 해주오씨(海州吳氏)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앞을 내다보는 선견지명이 남달랐고, 생김새는 키가 호리호리하고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대단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큰 일을 할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 저 처녀는 큰 부잣집의 맏며느리감'이라는 소리를 자주 했다고 했는데, 과연 성장하여 인근에 있는 문씨(文氏)가문으로 시집을 갔다.

 

세월이 흘러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할머니는 1592(선조 25) 4월 왜군이 부산으로 침입한 후 파죽지세로 양산(梁山)을 거쳐 상주(尙州) 등으로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에 밥할머니는 단신으로 앞장서 인근 마을 사람들에게 이 강산을 내가 지키자라고 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섬거적과 새끼줄을 수없이 많이 만들게 하였다. 이것을 삼각산 노적봉으로 가지고 가서 노적봉을 둘러싸게 하였다. 멀리서 일본군이 볼 때 마치 쌀가마니를 쌓아둔 노적가리처럼 보이게 했던 것이다. 이 일을 마친 후 밥할머니는 사람들에게 여러분 조용히 하시오, 왜군들에게 이 노적봉을 꼭 한번 사용할 때가 올 것이요.”하고 하였다.

 

이후 조선은 명나라에게 원군을 요청하였고, 이여송(李如松)이 지휘하는 명나라 군대는 조선군과 연합하여 빼앗겼던 평양성을 탈환하고, 그 여세로 한양을 향해 진격하였다. 한양을 목전에 두고 1593(선조 26) 127일 양군 연합군은 고양 벽제관 해음령고개에서 매복한 왜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애석하게도 대패하였다. 이때 우리 군이 퇴패(退敗)한 고개라 하여 이 고개를 퇴패고개라고 하는데, 후일 와전되어 지금은 되박고개'라고 부르고 있다고 한다.

 

왜군이 이후 고양 창릉내에 진격하여 물을 마시려 하는데, 이상하게도 개울물이 희부연 색깔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왜군들이 물 마시기를 주저하고 있는데, 마침 창릉내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할머니를 발견하고는 물이 뿌연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벌떡 일어나 노적봉을 가리키며 지금 저 산에는 조선군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주둔해 있소. 저 군량미들을 쌓아놓은 것을 보시오. 아마 지금 저녁시간이라 쌀 씻은 뜨물이 흘러 이 냇물이 흐려진 것 같소라고 대답하고는 총총히 자리를 떠나 사라졌다. 왜군들은 이 이야기를 듣자 두려움에 떨면서도 목의 갈증이 심한지라 허겁지겁 개울물을 마셨고, 말에게도 마시게 하였다. 그런데 사실 그 개울물은 삼간산 밑 개천 상류쪽에서 생석회를 풀어 흘려 보낸 물이었다. 생석회물을 마신 왜군은 물론 기마병의 말까지 모두 회독(灰毒)으로 심한 복통을 일으켜 움직이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더군다나 노적봉에 있는 식량이 풍부한 조선의 대군(大軍)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 결국에는 퇴각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밥할머니는 권율장군의 행주대첩 때에는 인근 마을의 부녀자들을 이끌고 행주산성으로 들어가 치마 위에 덮치마를 만들어 두르고 주변의 돌들을 치마폭에 담아 날라 행주치마의 설화를 낳게 하기도 하였다. 이런 혼란한 전쟁의 와중에서도 밥할머니는 인근 동리의 부녀자들을 동원하여 아군들의 밥을 일일이 만들어 나눠주었고, 이런 연유로 오씨 할머니를 밥할머니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밥할머니는 이후 전멸 위기에 놓인 아군을 구출한 슬기로운 사람으로 여겨져 민간신앙에서 높이 추앙되었다. 본래 밥할머니의 석상(石像)은 삼각산 노적봉이 잘 보이는 창릉 모퉁이에 있었는데, 선조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밥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서 그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이곳에 석상을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시대 초기에 일본인들이 국도 길 옆에 서 있는 밥할머니 석상의 내력을 알고는 석상 머리 부분을 망치로 깨뜨려서 머리가 없는 불구의 모습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목을 잘라도 분이 안 풀린 이들은 석상을 땅속 깊숙이 묻어 버렸는데, 해방 직후 뜻 있는 사람들이 찾아 다시 세웠다. 지금은 고양시 삼송동 통일로 주변, 일명 숫돌고개 중턱의 도화공원 내로 1993년 옮겼다. 이 밥할머니의 실제 묘가 불광동 150번지에 최근까지 있었으나, 1976년 자손들에 의해 화장되었다고 한다. 밥할머니의 재실이 진관외동 186-2 폭포동 싱아굴에 있었는데, 1957년경 화재가 나서 전소되었다고 한다.

 

진관동 금암 이야기

진관동 45-4에는 1781(정조 5)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금암(黔岩)에서 행한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데, 정조가 직접 글을 지었다고 한다.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가 임금이 되기 전인 1721(경종 1) 수행원과 함께 아버지 숙종의 탄신일을 맞아 명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다가 창릉천의 금암발참(黔岩撥站)에서 하루밤을 지내게 되었다. 이때 마을에서 어떤 사람이 소를 훔치다가 붙잡혔는데, 영조가 이를 안타깝게 여겨 참장(站長) 이성신(李聖臣)에게 이르기를, “저 소도둑은 흉년을 맞아 굶주림과 추위를 견대지 못하여 죄를 저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농부에게 소가 없으면 무엇으로 농사를 짓겠는 가? 참장이 비록 낮은 관직이나, 또한 직책을 맡은 것이니, 그대가 재량껏 처리하라하였다. 이에 참장이 소를 찾아 주인에게 돌려주고 도둑은 처벌하지 않았다. 다음날 영조가 한양에 도착하니, 이날 영조를 세제(世弟)로 책봉하였다는 것이다.

 

신사동 고택골 명당 이야기

한일합방이 되기 직전인 1910년경 이주경이라는 사람이 현재의 광화문 동아일보 뒤편에서 조그맣게 도장 파는 직업을 하며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극진히 모시던 부친이 갑자기 돌아가자, 그는 관을 구입할 돈이 없어 자기 아버지가 평소 덮고 자던 이불로 시신을 둘둘 말은 뒤, 지게에다 널빤지 한 장을 갈고서 그 위에 시신을 올려놓고 무악재를 넘었다고 한다.

 

무악재 고개를 넘어 이곳 고택굴 앞까지 온 그는 개천 둑에서 잠깐 쉬다가 그만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그런데 꿈속에서 하얀 도포를 입은 노인이 나타나 너의 아버지를 이 자리에 묻거라. 이곳에 시신을 묻으면 너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소리에 깜짝 놀라 잠이 깬 이주경은 노인 말대로 공동묘지까지 가지 않고 그곳에 부친의 시신을 안장하고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따라 자기 집 가게 앞에 손님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것이었다. 바로 그날이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토지에 대한 측량령을 내려 많은 사람들이 측량할 자기 땅문서에 찍을 도장을 만들려고 도장 가게 앞에 몰려든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이후 이주경은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진관동 금계수탉 이야기

현재 진관동 66-24번지 김기정의 집안 마당 한 구석에 상나무배기 우물이 하나 있는데, 이 우물 옆에는 수백 년 된 향()나무가 있다. 이 우물에는 물맛에 늘 향내가 듬뿍 배어 있고, 도술을 부리는 금계(金鷄)가 알을 낳는다고 해서 이 우물이 만병통치 약수라 하여 인근에 소문이 크게 났었다 한다. 옛날에는 인근 동리 사람들이 아침부터 와서 바가지로 떠 마시고, 통에 담아서 집으로 가지고 갔다고 한다. 이 향나무 우물이 있는 부근 동리를 상골이라 부르는데, 이는 우물 옆에 있는 향나무를 상나무라고 부르는 데서 연유한다고 한다.

 

상여소리

 

 

 

통일을 대비한 서울의 관문

구의 동쪽으로는 서대문구 및 종로구, 남쪽으로는 마포구, 북쪽과 서쪽으로는 경기도 고양시와 접한다. 서울특별시와 고양시 및 파주시를 연결하는 하는 수도권 서북부 교통의 요지이다.

 

서북쪽은 효경산 줄기와 창릉천과 삼각산 의상봉 능선을 경계로 고양시와 경계를 이루며, 동쪽은 비봉과 탕춘대능선을 따라 종로구와 경계를 이루고, 남쪽은 서대문구와 마포구와 접해있다. 그리고 연신내 일대는 불광천을 따라 얕은 충적지를 이룬다.

 

동경 126˚와 북위 37˚에 위치해 있다. 경기도 고양시와 접경을 이루고 있으며, 판문점과의 거리가 불과 40근거리로 통일을 대비한 서울의 관문으로 중요한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은 종로구, 남쪽은 서대문구, 마포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일산 신도시로 이어지는 지하철 3호선과 은평구 외곽까지 이어지는 지하철 6호선은 지역개발과 지역경제에 한층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지형은 대부분이 임야, 분지, 구릉지대로 되어 있으며, 백두대간에서 분기된 한 줄기가 멈춰선 북한산이 시가지 우측에 남북으로 접해 있고, 그 진산을 중심으로 높고 낮은 산들이 평지를 둘러싸고 있어 시가지 전체는 정사각형의 분지 형태를 이루고 있다. 북한산으로부터 남쪽의 한강을 향해 서서히 지세가 낮아지는 지역으로, 주위에는 북한산(836m)의 지봉인 남장대(715m)를 비롯한 비봉, 백련산 등의 봉우리가 있으며, 예로부터 농경생활의 이로움은 물론 군사적으로도 수도 서울의 외곽 요충지로써 고대로부터 나라에서도 중히 여겨왔던 천혜의 생활터전이다.

 

계곡으로부터 발원된 깨끗한 물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은평의 중심부인 불광천을 흘러 한강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시가지 지역이 분지형인 관계로 비교적 온난한 지역으로 녹번동 삼거리를 중심으로 인왕산, 북악산에 접한 비봉, 문주봉, 석가봉 그리고 멀리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등으로 연결되는 산악군이 대륙성 기후의 한냉한 기온을 순화시켜 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심지역과 구분되어 주택과 학교 등이 집중되어 깨끗하고 조용한 주거지역으로서 도시주변의 성격을 띤다. 산지의 대부분을 개발제한구역으로 설정해 주택지구의 기능이 강화되고 있으며, 공장 분포수가 적어 다른 구에 비해 환경오염의 요인이 적은 편이다. 특히 불광동 지역은 서울에서 가장 먼저 생긴 집단주택지역에 속한다. 1957년 재건주택, 기자촌이 개발, 2006년 진관내·외동과 구파발동 등이 은평뉴타운지역으로 개발되었다.

 

서남쪽을 제외한 대부분이 백련산(216m)·비봉(560m)·응봉(236m)과 북한산 줄기로 둘러싸인 분지를 이루고 있다. 북동부의 북한산 일대에서 발원한 창릉천과 불광천이 한강에 유입한다. 평지는 대부분 농경지로 이용되었으나, 1950년대 중반부터 불광동에 집단주택지역이 들어서면서 주거지로 변모했다. 특히 불광동·갈현동·역촌동 등은 깨끗하고 조용한 주거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지가가 비교적 저렴하고 주변에 녹지공간이 많아 은평화사원·희망소년원·선덕원 등과 같은 복지시설과 보건연구원·기독교수양관 등이 많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통일로(統一路)가 도심과 이어지는 거의에 유일한 길이었으나, 그 후 구기터널이 개통되어 진흥로를 통해서도 연결되었으며 가좌로·증산로·응암로·은평로·연서로·서오릉로 등의 여러 길로 각 지역이 연결되고 있다. 상업과 서비스 기능은 불광동·연신내 등의 전철역을 중심으로 발달했으며, 진관내동과 진관외동에서 행해지는 근교농업은 점차 그 면적이 줄어들고 있다.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도로가 정비되고 구기 터널과 지하철 3호선이 개통됨에 따라 도심지와의 교통이 편리해졌다.

 

 

 

 

 

 

은평 한옥마을

은평구민축제

물빛공원

북한산 국립공원

녹번 서근린공원

구파발인공폭포

봉산도시자연공원

서오릉도시자연공원

불광천

진관사

삼천사

수국사

용암사

새장골 도당제

역말 도당제

증산동 도당제

파발축제

 

 

 

 

  

신라시대에 창건된 백련사와 삼천사지마애여래입상이 있다.

역촌동과 구파발은 조선시대 역참이 있어 유래된 지명으로 이와 관련하여 인조별서유기비, 금암기적비와 하마비 등의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그 외에 북한산성, 삼천사지마애여래입과 진관사의 여러 불교유적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보물제657호 삼천사지마애여래입상(三千寺址磨崖如來立像)

보물제1462호인조별서유기비(仁祖別墅遺基碑)

보물제1580호 수국사목조아미타불좌상및복장유물(守國寺木造阿彌陀佛坐像 腹藏遺物)

중요민속문화재 제258호 금성당(錦城堂)

등록 등록문화재 제458호 진관사 소장 태극기 및 독립신문류 (津寬寺 所藏 太極旗 獨立新聞類)

서울시지정 유형문화재제38호 금암기적비(黔巖紀蹟碑)

유형문화재제133호 사현사 석불좌상(沙峴寺 石佛坐像)

유형문화재제143호 진관사 소 삼존불상(津寬寺 塑 三尊佛像(釋迦佛,文殊菩薩,普賢菩薩)

유형문화재제144호 진관사 소 십육나한상(津寬寺 塑 十六羅漢像)

유형문화재제145호 진관사 영산회상도(津寬寺 靈山會上圖)

유형문화재제146호 진관사 십육나한도(津寬寺 十六羅漢圖)

유형문화재제147호 진관사 칠성도(津寬寺 七星圖)

유형문화재제148호 진관사 명호스님 초상(津寬寺 명호僧 肖像)

유형문화제제149호 진관사 산신도(津寬寺 山神圖)

유형문화재제242호 수국사 아미타후불도(守國寺 阿彌陀後佛圖)

유형문화재제243호 수국사 십육나한도(守國寺 十六羅漢圖)

유형문화재제244호 수국사 극락구품도(守國寺 極樂九品圖)

유형문화재제245호 수국사 감로도(守國寺 甘露圖)

유형문화재제246호 수국사 신중도(守國寺 神衆圖)

유형문화재제247호 수국사 현왕도(守國寺 現王圖)

유형문화재제315호 진관동 석 보살입상(津寬洞 石 菩薩立像)

유형문화재제323 호 진관사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津寬寺 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

문화재자료제10호 진관사 석불좌상(津寬寺 石佛坐像)

문화재자료제11호 진관사 소 독성상(津寬寺 塑 獨星像)

문화재자료제12호 진관사 독성도(津寬寺 獨星圖)

문화재자료 제27호 사신당무신도 및 현판 일괄(使臣堂 巫神圖 懸板一括)

문화재자료제33호 진관사칠성각(津寬寺七星閣)

문화재자료제34호 진관사독성전(津寬寺獨聖殿)

문화재자료 제51호 진관동 석 아미타불좌상(津寬洞 石 阿彌陀佛坐像)

기념물제24호 화의군 이영묘역(和義君 李瓔墓域)

기념물제25호 숙용심씨묘표(淑容沈氏墓表)

기념물제26호 영산군 이전묘역(寧山君 李?墓域)

무형문화재제21호 휘모리잡가(박상옥)

무형문화재제35호 밤섬부군당도당굿(김춘강)

밤섬부군당도당굿(김찬섭)

 

 

현종(991(성종10)~1031(현종22))

화의군(1425(세종7)~?)

윤두수(1533(중종28)~1601(선조34))

덕양군(1525~1581)

정응두(1508(중종 3)~ 1572(선조 5))

한백겸(1552(명종 7)~1615(광해군 7))

인조(1595(선조 28)~ 1649(인조 27))

이서(1580(선조 13)~1637(인조 15))

원두표(1593(선조 26)~1664(현종 5)

희빈장씨(?~1701(숙종27))

은언군 (1755(영조51)~ 1801(순조 1))

한규설 (1848(헌종14)~1930))

 

 

 

 

 

 

 

 

 

 

 

 

 

 

 

 

 

 

 

 

 

 

 

 

 

법정동 11동 기준, 행정동 기준 16

녹번(碌磻불광(佛光갈현(葛峴구산(龜山대조(大棗응암(鷹巖역촌(驛村신사(新寺증산(繒山수색(水色진관(津寬)

 

 

 

 

 

 

 

녹번동 碌磻洞

녹번동이란 이름은 녹번현에서 연유되었으며 이는 무악재고개에 자연동(속칭 산골)이 나는데 이를 녹반이라한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이 지역은 194983일에 공포한 대통령령 제159호에 따라 동년 814일 해방 후, 그리고 정부가 수립된 후 처음으로 지방자치법 시행과 함께 서울에 편입된 지역 중의 하나이다. 녹번은 이때 편입된 소위 신편입 4개지구(숭인, 뚝도, 은평, 구로지구)중 은평지구에 속해 있었고, 당시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녹번리로서 은평면사무소 소재지이기도 하였다.

 

1949814일부터 서대문구 관내(은평출장소)의 녹번리로 된 이곳은 그뒤 1950315일 시조례 제10(서울특별시 동별 명칭 중 개정의건)에 의하여 리를 고쳐 녹번동으로 되었다. 인접지역은 동쪽에는서대문구 홍은동이 길게 자리잡고 있으며 남으로는 응암동이 접하고 서쪽으로는 역촌동과 대조동으로 경계를 삼고 있다. 그리고 북쪽에는 불광동과 대조동이 접하여 왔다.

 

1955418일 시조례 제66호에 의한 지방자치법에 의해 동제가 실시될 때에는 이웃 응암동, 역촌동, 신사동과 함께 4개 법정동이 합하여 행정관할동을 녹신동으로 하였으나 시민의 지역 혼동으로 불편이 많아1973년부터 동사무소의 명칭을 지명과 일치하여 녹번, 응암 제 1·2, 역촌동사무소로 분동되어 녹번동사무소로 독립되었던 것이다. 통일로를 중심으로 동쪽은 고지대 암반층, 서쪽은 비교적 평탄한 지형으로 중서민계층이 고루 분포되어 있으며 은평구 관문으로 5개 주요간선도로와 지하철 녹번역 및 관공서 밀집지역으로 교통과 행정의 중심지로 유동인구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불광동 佛光洞

불광동에는 오래전부터 옛날의 역참이 있었고 불광동에서부터 녹번동과 대조동의 사이를 따라 역촌동으로 흐르고 있는 연천(불광천 상류)이란 조그만 시내가 흐르고 있다. 여기에 지금도 불광동쪽의 상류에 연서시장이 있고 하류쪽에는 녹번동,대조동 등의 동명 대신에 연천에서 유래된 연신내로 통하고 있다. 인접지역으로는 동쪽에 종로와 구계를 이루면서 구기동과 접해 있으며 1980년 진흥로가 개통되어 종로 성북방향으로 가는 교통편이 좋아졌고, 한편 도심지로 집중하는 많은 교통량을 분산시키고 있으며, 남쪽에는 녹번동과 홍은동이 각각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서쪽에는 대조동과 갈현동이 통일로를 사이에 두고 길을 따라 길게 이웃해 있다. 여기의 길 동편은 불광동이고 길 서편은 대조,갈현동이다. 길을 경계로 지역이 구분된 것이며, 북쪽에 진관동이있다.

 

19731·2동으로 분리되고 1985년 불광2동이 불광2동과 불광3동으로 각각 분동되었다가 20086월 불광1·2·3동이 불광1·2동으로 합쳐져 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불광동 관내 옛 지명을 알아보면 독바위골, 수리봉, 돈노리, 연신내, 어수물터 (어수정), 이감수, 밥할머니묘소, 관터고개, 세뿔간, 새장골(사정동), 박석고개 등이 있다. 도시기반 시설취약으로 인한 재개발, 재건축, 주거환경 개선사업 등 불량주택 개량사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는 지역이며 대단위 아파트단지, 단독주택과 독박골등 고지대 주민은 근로자등 저소득 계층의 지역으로 분류할 수 있다. 수려한 주변환경으로 국립보건원,국립환경 연구원,한국보건사회 연구원등 국가기관이 산재해 있고 불광시장은 인근 대조시장과 더불어 불광전철역에 인접하여 은평구의 큰 상권을 이루고 있다.

 

 

갈현동 葛峴洞

갈현이라는 지명은 갈고개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동국여지비고나 육전조례 같은 고서에서도 북부성밖이었던 이 지역의 이름을 갈고개로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전하여 오는 말로는 이 일대는 칡뿌리가 많아서 갓을 만드는 원료가 되어왔기 때문에 칡고개 또는 칡넝쿨고개로 불리어 왔고 또 이 근처에는 박석고개라고 불리었던 곳도 있어서 구릉이 많았던 곳이다. 고양군 은평면 갈현리로 되었던 이 곳은 해방이후 1950년에는 동명을 현재의 갈현동으로 고치게 되었다. 앵봉산 기슭의 통일로와 연서로 인접지역인 갈현동은 동쪽은 박석고개를 사이에 두고 불광동과 접하여 있고, 남은 대조동, 역촌동, 구산동이 차례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경기도 고양시와 접해있고, 북쪽에는 진관동이 차지하고 있다. 1955년 행정동제가 실시될 때 갈현동은 이웃 불광동, 대조동, 구산동과 함께 대광동사무소 관내로 되었다가 수 차례 변경되었으며 이제는 갈현동사무소가 독립되어 관장하고 있다. 이 갈현동 지역은 봉산 구릉을 따라 대성중고교, 선일여중고, 선정여중고 등이 모여있어 좋은 교육여건을 반영하고 있는 전형적인 주거지역이다. 198961일 갈현동은 갈현1동과 갈현2동으로 분동되었다.관내 옛지명으로는 갈곡리, 온수리, 효경동, 좌월, 궁말, 버리고개(벌고개)등이 있다.

 

 

대조동 大棗洞

대조동이란 명칭은 옛날 서울 장안에서 부잣집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 큰 마을을 이루었다고 해서 대촌마을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하며 글자그대로 옛날의 [큰대추 나무골]에서 구전되어 오다 한역해서 대조동이라고도 한다. 대추나무골은 이제 고급주택이 즐비하게 들어서서 옛날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40여년전 리로 있을 당시만 해도 저좌현(불광리고개 속칭 돼지발톱 맞추는 고개),박석고개, 갈고개로 넘어가는 길목으로 숲고개를 이루었던 흔적이 있으나 지금은 신흥주택과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인접지역으로는 동쪽에 통일로를 사이에 두고 불광동과 마주하고 있으며 지하철 3호선, 6호선이 만나는 연신내역과 불광역이 넓게 차지하고 있으며 경기도 문산, 적성, 의정부로 가는 시외버스터미널이 자리잡고 있다. 남쪽으로는 녹번동과 역촌동이 이웃해 있고, 서쪽은 구산동사무소 관내로서 지역명칭은 갈현동이며 북쪽에서 연서로를 경계로 갈현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어 은평구와 중심지역이라 할 수 있다. 은평의 명동이라 할 수 있는 연신내는 패션거리로 탈바꿈해 유명의류 상설할인점이 밀집되어 있고 지역 전체가 상가가 많아 지역경기 활성화에 도움을 주고 유동 인구가 많아 인근 불광, 갈현동과 함께 은평구의 중심축으로 떠오르고 있다.

 

 

응암동 鷹岩洞

응암동은 마을 뒤 백련산 기슭에 있는 커다란 바위의 생김새가 마치 매가 앉아있는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매바위에서 유래되었으며, 1949년 서울시에 편입되었다. 1911년 포반동, 응암동, 거산동으로 되었고 1914년 고양군 관내로 편입되면서 3개 동리가 합하여 하나의 응암리로 개칭된 것이다. 지금은 대부분이 주택가로 형성되어 있는 이 곳의 인접지역을 보면 동쪽에 녹번동과 백련산 능선을 경계로 하여 홍은동이 접해 있고 남가좌동, 북가좌동, 증산동 순으로 가지런히 접하여 부도심권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서쪽은 증산동, 신사동이 각각 이웃해 있고 북쪽은 역촌동과 녹번동이 옛 연천을 따라 경계선을 그으면서 자리를 잡았다.

 

녹번삼거리부터 백련산 북쪽 줄기를 따라 서대문구 북가좌동까지 길면서도 넓게 차지하고 있는 웅암동은 응암오거리를 중심으로 대림 시장 상권 형성과 함께 먹자골목으로 서민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동네이다. 1988년 응암 2, 3동을 응암2, 3, 4동으로 각각 분동하였다가, 20086월 응암2,3,4동을 응암2,3동으로 통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응암동 관내 옛 지명을 알아보면 포수마을, 냉정골, 매바위, 눌뫼 동네 등이 있다

 

 

역촌동 驛村洞

역촌동은 조선조 신하들이 장거리 여행시 말이 쉬어 갈 수 있는 역이 있어 역말이라 불렀으며 여기서 동명이 유래되었고 행정동제가 실시될 때는 이웃의 녹번동, 응암동, 신사동과 함께 녹신동 관내로 되었었고, 그 후 녹신동에서 분리되어 신사동과 함께 새로이 역촌동사무소로, 75년에는 다시 신사동마저 독립되었기 때문에 역촌동사무소는 법정동계만이 관할하게 되었다.

 

인접지역을 보면 동쪽에 대조동과 녹번동, 응암동이 상호 접하여 있고 남으로는 신사동과 응암동이 각각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북으로는 구산동이 자리를 잡고 있다. 1970년대 구획정리사업 시행으로 조성된 일반주거지역으로 198591일 역촌 1, 역촌 2동으로 분동되었다가 200862일 역촌동으로 통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관내 옛 지명을 알아 보면 마방촌(역말), 토정리 등이 있다.

  

신사동 新寺洞

신사동은 한성부 북부 성밖이었던 연은방의 신사동계 신사동으로서 이것이 큰 변화없이 그대로 경성부 성외 8면의 하나인 은평면의 신사리로 되었다가 1950년 리까지 고쳐 신사동으로 되었다. 이처럼 신사동의 지명은 수없이 행정의 관할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으며 신사란 새절을 의미하는데 새절은 언제 어느 장소에 있었는지 알길이 없으나 새절이 있었으므로 해서 유래된 동명이다. 인접지역은 동쪽에 응암동이 길게 접하여 있고 남쪽으로는 증산동과 수색동이 각각 경계를 이루면서 이웃해 있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뒤쪽 산능선이 시계를 이루어 경기도 고양시와 접해 있으며 북쪽에는 역촌동이 자리를 잡았다.

 

1955년 이웃의 응암동, 역촌동, 녹번동과 함께 녹신동사무소를 신설하고 그 관할에 있었으나 73년도에 분동되어 역촌동 관할로 있다가 인구의 증가로 신사동으로 75년도에 분리되어 동명을 찾았으며 1989년에는 신사1, 신사2동으로 분동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역촌동과 함께 구획정리 사업으로 조성된 전형적인 주거지역이다. 옛 지명을 알아보면 풋나무골, 고태골 등이 있다. 1990430일 신축하였고 2001.64일 주민자치세터를 개관하여 현재 청사2층에 기초영어,등 주민을 위한 다양한 문화강좌 및 인터넷방 음악 감상실 주민 휴게실을 운영하고있습니다.

 

 

증산동 繒山洞

반홍산 남동향에 위치한 증산동은 시루뫼라는 옛지명에서 유래된 것으로 마을 뒷산 (반홍산)이 시루를 엎어놓은 모양 같다 하여 나온 지명입니다. 일설로는 증산동이 한강 하류에 위치하여 장마철만 되면 온마을이 범람하였는데 비만 그치면 마을에 가득 찬 물이 일시에 빠져나가 마치 시루를 연상하여 '시루뫼'라고 불리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증산의 ''자는 원래시루 증()’를 쓰다가 시루는 밑이 뚫려 있어 재물이 모이지 않는다 하여 토박이가 고종에게 상소하여 갑오경장 무렵부터 비단 증()’으로 바뀌었다고 전해집니다. 문헌상 증산동의 변천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 중종조 숙의 나씨묘 - "城西十里 佛光里 甑山"

육전조례 1867> - 한성부 북부 연희방 증산리계

1911. 4. 1 한성부 은평면 편제

1914. 4. 1 경기도 고양군 편제

1949. 8.14 서울시 서대문구 편입 은평출장소 설치

1950. 3.15 증산동 개칭

1955. 4.18 증가(繒加)동 개칭 (북가좌동, 남가좌동 포함)

1970. 5.18 북가좌동사무소에서 관할

1975.10. 1 증산동사무소 분동

1979.10. 1 서대문구에서 은평구 분구

1989. 9. 1 증산동 일부 관할이 신사2동으로 분동되었으며,

 

지하철 6호선이 지나가는 증산동은 증산역/수색전철역이 있으며, 강변북로/인천국제공항/자유로 등 주요간선도로가 접근이 용이한 지역입니다. 2000년도 부터 불광천을 정비하여 주민의 휴식 공간과 체련증진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증산로를중심으로 아파트, 다세대 등이 활발이 건축되고 있습니다.

 

 

수색동 水色洞

수색동은 1949년 경기도로부터 서울에 편입된 지역이다. 처음에 물과 깊은 인연을 맺고 지어졌지만 이제는 산상에까지 미치고 있으나 그것은 지역이 넓어졌기 때문이다. 지역적으로 한강하류에 위치한 수색동은 옛부터 물과 깊은 인연이 있던 곳으로 물치, 무르치라는 우리말에서 음이 변하고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수색, 수생리로 표기하였다.

 

수색로와 접하고 일산,행신 지구등 신도시의 관문에 위치하고 인접지역은 동북에 증산동이 위치해 있고 남쪽에는 상암동과 성산동 중동이 차례로 이어져 있다. 서쪽은 종래 경기도 고양시와 시계를 이루고 있었으나 지난 1975년 개편으로 교외선 철로를 따라 구분되었기 때문에 철로서쪽은 고양시와 시계를 이루고 있으며 동북쪽으로는 신사동이 접하여 있다. 여기서 교외로 나가는 경의선, 교외선 철도 정차역인 수색역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수색동 관내 옛 지명을 알아보면 까치고개가 있다.

 

 

진관동 津寬洞

진관동의 명칭은 진관사란 절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서울 서북단에 위치하여 경기도 고양시와 인접하였으며 전지역이 개발제한구역 및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북한산국립공원과 8개의 취락마을로 형성된 지역이다. ()진관내동은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진관내리로 되었다가 지난 73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은평출장소 관내로 편입되었으며, 79년 서대문구에서 분구될 때 은평구 관할로 되었다. 1973년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진관동을 두었으나 인구의 증가로 진관사를 중심으로 뒤쪽을 내동, 앞쪽을 외동이라 하였다.

 

인접지역은 남쪽에 갈현동과 불광동이 위치해 있고 그 지역 외에는 모두 경기도와 경계가 되어 있다. 북쪽 경계선 사이를 흐르고 있는 시내를 창릉천이라고 하는데 옛날은 덕수천이었고 하류로 한참 내려가면 서오릉의 하나인 창릉이 가까이에 있다. 그래서 근래에는 이 천을 창릉천이라 부르고 있다. 시내버스에 종착지로 표기되어 있는 기자촌은 말 그대로 기자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진관동 175번지 일대를 지칭하는 지명이다. 1969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기자들의 내집 마련을 위해 땅을 내주면서 기자촌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진관동은 진관내동과 진관외동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진관내동은 구파발을 관할하고 있었으나 2007813일 구파발동, 진관내외동이 하나의 진관동으로 통합되었다. 진관동 관내 옛지명을 알아보면 못자리골(못절터), 탑골, 삼천리골, 여기소, 마고정, 재각말, 잿말, 폭포동 등이 있다. 진관동 일대는 오는 2011년까지 주거생태가 어우러진 은평뉴타운이 조성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