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빙고(西氷庫地), 한강진 나루터(漢江鎭地)
용산구 龍山區
Yongsan-gu (Yongsan)
서울특별시의 중부에 있는 구. 원래는 한성부의 용산방에 속했으며, 1911년에 경성부 용산면에 속하게 되었다. 1913년 경성부 용산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43년 구제의 실시로 용산구역소로 개칭되었다가, 1946년 용산구가 되었다.
명칭의 기원은 『증보문헌비고』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두 가지에 나와 있지만 내용이 각기 다르다. 『증보문헌비고』에는 '용이 나타났고 해서 용산(龍山)이라 했다'라고 되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양화나루 동쪽 언덕의 산형이 용이 있는 형국이라 생긴 이름'이라고 되어 있다.
시의 중남부에 위치한 구. 구청 소재지는 원효로1가이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의 용산방(龍山坊) 1911년 고양군 용산·한지면(漢芝面)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성부 용산출장소 관할 1943년 구제(區制) 실시에 따라 용산구 신설
초기 백제로 부터 시작된 역사의 도시 용산 우리 역사에서 용산지역을 포함한 한강 유역에 최초로 정치 세력이 등장한 것은 초기 백제였으며 마한을 정복하고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초기 고대 국가로 발전하는 역사의 흐름속에 용산 지역도 자연적으로 백제의 정치권에 포함되었습니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백제는 한강유역을 고구려에 내주고 웅진으로 천도하게 되어 용산지역도 77년간 고구려에 편입되었습니다. 이후 삼국이 통일되어 통일신라시대로 이어지면서 용산지역은 한산주, 한양군 등으로 관할을 바꾸게 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국초부터 정종때까지 양주, 문종 이후 충열왕까지는 남경, 충선왕 이후 고려말까지 한양부로 불리었습니다.
조선시대 용산지역은 초기는 한성부에 속했으며 후기에는 용산방 지역이 되었습니다. 용산구는 1896년 4월 한성부 용산방으로 시작하여 1910년 10월 조선총독부에 의해 한성부가 경성부로 개칭되면서 경기도에 편입되었습니다. 다음해인 1911년 4월 경성부내에 5부 8면제를 실시하면서 용산방이 용산면이 되었습니다. 그 후 경성부의 인구가 100만명에 이르고 주거지역이 급속히 팽창하면서 경성부 본청 행정만으로는 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1943년 6월 '구제'를 실시, 행정기관으로 용산구역소를 설치하고 '구장'이 관할하게 되었습니다.
광복 후 1945년 10월 용산구역소의 명칭이 용산구로 개칭되고 1946년 10월 18일부터 '서울특별시 용산구'가 되었으며 당시에는 35개 법정동을 관할했습니다. 그 후 경제발전과 인구변동 등으로 인해 여러차례 관할 구역의 조정을 거치다가 1995년 7월 1일 민선 제1기 출범을 계기로 본격적인 지방자치시대로 접어들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위성도시 조선시대부터 용산은 한강을 끼고 있다는 지리학적인 이점으로 전국의 조운선(화물선 일종)이 몰려드는 포구로 발전하였으며 한강에서 활약하는 대규모 경강상인의 본거지가 됨으로써 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의 시발지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위성도시로 발전했습니다.
용산은 1884년 10월(고종 21년)외국인의 거주와 통상을 허용하는 개시장(開市場)으로 지정된 후 1887년 선교의 자유가 인정되자 원효로를 중심으로 프랑스인, 중국인, 일본인 등이 들어와 종교활동과 상업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888년 8월 한강에 증기선이 운항되고 1891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이자 양옥건물인 '용산신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00년 1월 서계동~청파동~원효로4가에 이르는 전차가 개통되는 등 개항기를 맞은 용산에도 근대화의 물결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1905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제는 용산 일대에 군사기지와 철도기지를 세워 한반도 통치와 대륙침략의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근대의 용산 교통의 요지, 한양의 관문이라는 지정학적 이점은 근대에 들어서 오히려 용산 발전을 저해하는 군사지역, 그중에서도 외국군주둔지라는 멍에가 되었습니다.
용산이 본격적인 외국군의 주둔지가 된 것은 구한말 일제가 식민통치를 위한 군사기지로 용산을 정하면서부터입니다. 도심과 곧바로 이어진데다가 한강의 물길을 이용할 수 있고 항구인 인천과 철도를 잇기에 유리하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일본군이 주둔했던 자리에는 자연스레 한국군과 미국군의 사령부가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용산구는 뛰어난 입지사의 여건에도 불구하고 약 1백년 동안 외국군이 주둔해왔고, 철도청 부지까지 구의 중심을 차지하는 등 여러가지 저해요인으로 인해 우리 근대사에서 개발의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용산지역에 대한 개발 잠재력에 주위의 시선이 집중되면서 의욕적인 지역 개발 사업이 활기를 띠고 있습니다.
2001년 확정된 서울시 지구단위 개발 계획에 따라 서울역에서 한강대교에 이르는 100만평의 개발이 추진되고 있는 가운데 용산역이 경부고속철도 중앙역사와 신공항철도 출발역으로 선정되어 이 지역에 대한 개발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용산역일대 철도정비창을 포함한 21만여 평이 쾌적한 환경과 업무의 편리성을 도모하고 민간 설계 공모와 외자 유치를 통해 첨단 국제 업무 단지로 조성될 계획입니다
또 한강로 일대에 최첨단 업무시설과 컨벤션센터, 외국인전용 주거시설, 공원 녹지시설등을 2011년까지 체계적으로 개발하고 주한미군이 반환하는 아리랑택시부지와 삼각지 인근 캠프킴부지를 매입하여 아리랑택시 부지에는 관광·문화관련 시설을, 캠프킴 부지에는 종합행정타운을 건립하는 등 우리용산구가 명실상부한 서울의 부도심으로 자리잡게 될 전망입니다.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 근대 이후 경제 및 교통 문화의 중심지로서의 역할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용산구는 경제 및 교통 문화의 중심지로서 중산층이 다수 거주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남쪽으로 한강을, 북쪽으로 남산을 경계로 6개 자치구와 접하고 있으며 한강을 잇는 대교들 중 6개의 한강대교와 경부철도가 용산을 지나고 있어 서울 도심을 잇는 관문이며 교통의 요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북쪽은 남산(262m) 줄기로 가로막혀 있으며, 동쪽에는 응봉(175m)이 솟아 있다. 한강이 동쪽 경계를 따라 곡류한다. 도심지와 가깝고, 대체로 전망이 좋을 뿐만 아니라 한강수운을 이용한 인천과의 교통이 편리하여 일찍부터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다.
8·15해방 후에는 한국과 미국의 주요 군사기지가 주둔하여 주한 외국인과 그들을 대상으로 한 상업이 발달하여 이색적인 도시경관을 이루었다. 그러나 미군기지와 육군본부가 모두 이전하고, 그 자리에 도시공원과 전쟁기념관이 조성되고 있다.
구의 서부는 원효로를 경계로 구용산과 신용산으로 구분되는데, 구용산에 해당하는 원효로 서쪽의 청파동·효창동·용문동 등지에는 지금까지도 곳곳에 일본식 가옥이 남아 있다. 원효로 동쪽의 신용산은 교통의 요지이며, 한강변을 따라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남산의 남쪽 사면에 위치해 있으며, 서쪽으로 안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용산 줄기를 경계로 마포구와 접해 있고, 동쪽은 남산의 부어티고개에서 한강으로 뻗은 종남산 한줄기를 경계로 성동구와 접해 있다. 남쪽으로 한강이 흐르고 둔지산과 남산에서 동쪽으로 뻗은 산줄기 사이에 낮은 평지가 발달되어 주거지와 도로망을 형성하고 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와 같이 제방이 없던 시절에는 한강이 신계동과 삼각지까지 범람하였다. 따라서 이촌동 지역은 넓은 범람원이 퇴적되어 한강백사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갈수기에는 노들섬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
원효로 방면을 구용산, 한강로변을 신용산이라 부르는데, 구용산은 조선 말 청나라와 일본의 세력다툼의 무대였고, 특히 일본인 거류지로 조성되어 지금도 효창·청파동과 원효로 등지에는 일본식 목조의 낡은 가옥이 남아 있다. 서울역에서 한강철교에 이르는 신용산 지역은 일제가 군사기지로 삼았으며, 해방 후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미군이 주둔하여 오늘에 이르며, 2006년에 들어 용산기지 반환과 더불어 용산민족공원 조성에 여론이 모아지고 있다.
삼국시대에 이미 수륙교통의 요충지로서 세력 확장의 쟁탈지였으며, 고려시대 임금의 유락공간이 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용산을 중심으로 물산이 모아지는 길목으로 한강 상류나 삼남지방을 서울의 도심과 연결시키는 하항의 관문 구실을 하였다. 특히 1900년 이후 철도가 개통되면서 철도교통의 중심으로서 일제의 대륙침략의 발판이 되기도 하였다.
용산은 1900년 한강철교가 준공되어 경인선의 전 구간이 개통되고 용산역이 설치된 이후 철도교통의 중심지가 되어 왔다. 용산시외버스터미널이 강남으로 이전한 후에도 지하철 1·4·6호선이 통과하여 교통이 매우 편리하며, 한강대교·한강철교를 비롯해 반포대교·한남대교·동작대교 등의 교량이 걸쳐 있어 강남과 연계되어 도심의 관문으로서의 구실을 하고 있다.
서울 도심을 잇는 관문이며 교통의 요충 용산구에는 효창공원, 용산가족공원, 전쟁기념관, 한강시민공원 등 도심공원이 많아 주민들이 쾌적한 환경을 누릴 수 있는 자연 휴식 공간이 많습니다. 또한 관내에 미 8군 기지를 비롯하여 많은 외국 공관저와 문화원, 이태원관광특구 등이 있어 타 지역에 비해 특히 외국인 거주자가 많은 지역이기도 합니다.
용산지역은 도심과 인접한 주거지역으로 발전한 곳이었으나, 근래 도시기능의 확산으로 종합시설물과 편의·위락시설이 이전됨에 따라 도심과 직결되는 간선도로변에는 상업기능이 많이 들어서고 있다. 남영동을 중심으로 서울역에서 삼각지에 이르는 도로변에는 인근의 여러 학교와 학원의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상가가 형성되었고, 서울의 이방지대라 불리는 이태원 상가는 외국인 관광객뿐 아니라 내국인까지 유인하는 새로운 상업지역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이태원과 한남동 일대에는 대형 호텔과 각국의 대사관 들이 자리하고 있어 국제도시의 모습을 띠고 있다.
한강로3가에 있던 용산청과물시장이 가락동농수산물도매시장으로 이전되고 그 자리에는 용산전자상가단지가 들어섰다. 용산동2가의 흔히 해방촌이라 부르는 곳은 월남한 이북사람들이 만든 마을로, 대부분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억척스럽고 부지런한 생활을 한 곳이었다. 반면 최근에 재벌들의 주택이 자리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주택지로 주목되고 있다.
최근 용산구는 경부고속철도의 중앙역사로서의 기능을 담당할 용산역과 첨단전자산업의 중심인 용산전자상가 및 시청사 용산이전, 한강로 일대 100여만 평에 대한 국제정보·행정업무 중심지구로의 개발을 본격 추진 있다.
효창공원 용산가족공원 한강시민공원 용산문화원 숙명여대박물관 남산도서관 용산도서관 이태원의 거리 남산의 절경을 한눈에 N서울타워 청계천 극장용 삼각지화가거리 글로벌빌리지센터 한마음축제 이태원 주말문화축제 이태원 지구촌축제 남이장군대제
유적으로 용산신학교와 원효로성당(사적 제255호)이 있다. 이 지역에는 많은 유물·유적이 남아 있는데, 조선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묘원인 효창원(孝昌園) 터에는 효창공원과 김구선생묘역 및 삼의사묘가 있다. 조선 말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많은 천주교도가 처형된 이촌동의 새남터와 용산신학교 및 원효로성당 등이 있다. 또한 구용산수위관측소, 서빙고부군당, 김유신장군당 등의 동제당이 남아 있으며, 원효로의 백송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주요 시설로서 효창공원과 효창운동장이 있으며, 그 밖에 남산도서관·철도도서관·회교성당(回敎聖堂) 등이 있다. 특히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세종로에서 용산가족공원 서쪽으로 이전 개관하여 종합사회문화교육의 장으로 자리하고 있다.
서빙고동 부군당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2호 서울성곽 용산신학교와 원효로 성당 사적 제255호 효창공원 (사적 제330호 ) 중앙박물관 남이 1441-1468 김창집 1648~1722 이건명 1663~1722 이이명 1658~1722 조태채 1660~1772 박명룡 김대건 1822~1846 안중근 1879~1910 윤봉길 1908~1932 이봉창 1908~1932 백정기 1896~1936 이동녕 1869~1940 차이석 1881~1945 김구 1876~1949 조성환 1875~1948 장형 1889~1964 박목월 1916~1977 함석헌 1901~1989 효창공원 (사적제330호, 1989, 9. 2 지정) 서울 용산신학교 (사적 제520호, 2012년 6월 20일 지정) 서울 원효로 예수성심성당 (사적 제521호, 2012년 6월 20일 지정) 서빙고부군당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2호 1973.1.26.지정) 구용산수위관측소 (서울시 기념물 제 18호 2002.2.5.지정) 남이장군사당 김유신장군사당 이태원 부군당 동빙고 부군당 산천동 부군당 한남 제1부군당 한남동 제2부군당 보광동 무후묘 군자감 강감 터(軍資監江監地) 독서당 터(讀書堂地) 만리창 터(萬里倉地) 새남터(沙南基) 서빙고 나루터(西氷庫地) 서빙고 터(西氷庫地) 수표 터(水標地) 영성단 터(靈星檀地) 와서 터(瓦署地) 이봉창(李奉昌) 의사 생가 터 이태원 터(梨泰院地) 전생서 터(典牲署地) 제천정 터(濟川亭地) 장회정 터(蒼檜亭地) 천일정 터(天一亭地) 청파배다리 터 한강진 나루터(漢江鎭地)
법정동 36개동 기준, 행정동 기준 16개 원효로1가(元曉路一街)·2가·3가·4가·후암(厚巖)·신창(新倉)·용산동1가(龍山洞1街)·2가·3가·4가·5가·6가·갈월(葛月)·남영(南營)·동자(東子)·서계(西界)·청파동1가(靑坡洞一街)·2가·3가·청암(淸巖)·산천(山泉)·효창(孝昌)·용문(龍門)·도원(桃園)·신계(新契)·문배(文培)·한강로1가(漢江路一街)·2가·3가·이촌(二村)·이태원(梨泰院)·한남(漢南)·서빙고(西氷庫)·동빙고(東氷庫)·주성(鑄城)·보광(普光)
후암동 厚岩洞 남산 정상의 서울성곽을 따라 중구와 경계를 이루며, 동쪽과 남쪽은 용산동2가, 서쪽은 동자동· 갈월동과 접해 있습니다. 동 이름은 마을에 두텁바위, 즉 둥글고 두터운 큰 바위가 있었던 데서 유래합니다. 이 바위에는 인근에서 자손이 귀한 사람들이 찾아와 자손 얻기를 빌던 곳입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 지역이었고, 1751년(영조 27)에 한성부 남부 둔지방 (屯芝坊) 전생서(典牲署) 내계(內契)와 외계(外契)에 속하였습니다. 1914년 경성부 서부에 편입되면서 삼판통(三坂通)으로 되었고, 1943년 용산구에 편입되어 1946년 후암동으로 바뀌었다. 법정동과 행정동명이 같습니다.
서울역이 인근에 있고, 후암동길이 동의 남북으로 지나며, 남산순환로인 소월(素月)길이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지납니다. 소월길은 시인 김정식(金廷湜)의 호를 따서 1984년 제정한 길이름입니다. 소월길 북쪽에는 시립남산도서관과 남산식물원이 있으며, 도서관 앞에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동상이 있습니다. 남산도서관 남쪽에는 용산도서관, 그 동쪽에는 후암초등학교와 독일문화원이 있습니다. 후암동길 서쪽에는 병무청과 서울지방병무청이 있는데, 옛날에는 그 자리에 국방부가 있었습니다.
도동(桃洞)은 이 마을 부근에 복숭아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복숭아골로 불리다가 붙은 이름으로 도동 2가 지역은 1985년 후암동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옛 지명으로 정성세가 있는데, 조선 초기부터 전생서(典牲署)라는 관청이 있어 붙은 이름입니다. 전생서는 국가 제사용 소·돼지·양 등을 기르던 관청입니다. 도동2가와 동자동의 경계 지역을 송경재 또는 쇠경재라고 하는데, 조선 중기의 문신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 부근에 살면서 경전(經典)을 낭송한 데서 유래합니다.
용산동 龍山洞 용산 2가동은 행정구역상 법정동인 용산동 2가와 4가를 관할구역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남산의 연맥이 뻗어 내려간 구릉지대로 조선말까지도 수목이 울창하여 인가가 희소한 곳이었습니다. 용산동의 동명은 용산이란 지명에서 비롯되었는데 용산이란 글자 그대로 용같은 형체의 산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남영동 南營洞 『한강로』를 따라서 직사각형의 지형을 가진 남영동은 서울 남쪽에 군영이 있었던 것에서 그 지명이 유래하였습니다. 현재 남영동 남쪽에는 주한미8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해방전 일본군 주둔지를 그대로 사용한 것입니다.
갈월동(葛月洞)은 『한강로』를 끼고 좌우에 걸쳐있는 갈월동은 옛날 이 일대에 칡이 많이 자랐기 때문에 유래되었다고 하며, 갈월도사라는 사람이 살았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갈월동의 옛명칭은 『불룩배기』였으며 최근 새주소부여사업에 따라 일부 길이 『불룩배기길』로 명명되기도 했습니다.
동자동(東子洞)은 서울역의 남쪽과 한강로 동쪽에 걸쳐있으며 동명의 유래는 확실치 않습니다. 다만 서계동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동자동이라 불리우게 된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청파동 靑坡洞 청파동1가, 청파(靑坡)란 이름은 한자의 뜻대로 해석하면 ````푸른언덕````인데, 이 동이 연화봉(蓮花峰)이라는 푸른 야산에 위치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과 조선 세종대왕 때 명인인 청파 기건이 살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청파동1가는 현재는 모두 주택가로 변했지만 과거에는 연화봉 동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연화봉은 산 모습이 연꽃 봉우리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며 이곳에는 목동산(牧童山)과 옻나무가 많아 생긴 옻나무골도 있었습니다. 서울역 남쪽의 역촌인 청파는 수륙교통의 연계소인 용산의 배후 취락이자 내륙으로 이어지는 교통 상 요지였으며, "청파삼대불문지례"란 속설이 있을 정도로 역졸들이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서계동은 서울역 뒤쪽 만리동고개(조선 세종 때의 문신이자 학자인 최만리가 살았다하여 붙여진 이름) 일대에 위치한 서계동은 조선시대 작작굴, 배다리로 불리던 곳인데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서계정(町)으로 칭하던 것이 광복 후 서계동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작작굴이라는 명칭은 용산강에서 욱천(旭川)을 거슬러온 볏집,뗄감이 집하되어 薪炭市場이 형성되었으며 이곳에 참새떼가 많이 모여들었다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되며, 배다리골은 욱천에 놓였던 다리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으며 이 다리는 남대문을 나와 남쪽으로 가는 주요 길목이었다고 합니다.
원효로동 元曉路洞 1946년 10월 일제명칭인 원정 1정목을 신라의 고승인 원효대사의 이름을 붙여 원효로라 부르고, 이후 다시 원효로 1가, 원효로2가, 원효로3가, 원효로4가로 나뉘어졌습니다. 원효로의 명소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는 원효로4가 87번지 2호에 임진왜란 때 명·일 강화회담을 했던 심원정 터가 있다. 이 곳에서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 정월, 권율 장군과 명나라의 이여송, 일본의 소서행장 등이 화의를 맺고 기념식수를 하였다고 합니다. 현재 정자는 남아 있지 않으나, 그 때 심었다는 수령 500년 쯤으로 보이는 배송은 천연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었으며 강화비에는 「왜명강화지처」라고 음각되어 있습니다.
원효로제2동은 원효로3·4가, 산천동, 청암동, 신창동의 5개 법정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원효로3가는 용호로를 끼고 원효로 좌,우에 위치하며 구용산이라고 칭하는 지역으로 일제 초기에는 원효로2가와 동일하며 1914. 4.1 (경기도고시 제7호)일 원정 3정목으로 칭하며 1926. 10. 1일 원정 2정목 대신 원효로2가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렀으며, 정보통신공무원 교육원, 전기통신공사 연구소 및 품질보증단과 원효로3가 남쪽을 지나는 용호로변은 용산전자상가가 형성되어 차량과 인파로 붐비고 있습니다.
원효로4가는 옛날에는 용산항으로 유명하였고, 조선초에는 한성부 성저십리, 영조27년에는 서부 용산방 등의 일부지역 이였으나, 일제가 1911. 4.1 (경기도령 제3호)일 경성부 용산명이라 하고 1914. 10. 1일 원효로4가로 고쳐 현재에 이르렀으며 문화유산으로 심원정과, 600년이상의 느티나무 보호수등8주, 성심여고안에 있는 함벽정 등이 있는곳입니다.
산천동은 일제때 산수정을 광복후에 개정하면서 제정한 곳으로 명칭의 유래 미상으로 영조 27년에 원효로4가와 같이 한성부 서부 용산방의 지역였으나 한.일 합방후 1911. 4. 1일(경기도령 제3호)에는 경성부 용산면이 되었고 이어서 1914. 4. 1일 (경기도고시 제7호) 에 경성부 산수정을 1943. 6. 10일(칙령 제485호)에 용산구에 속하고 광복직후 1946. 10. 1일 산수정을 1943. 6. 1일 산수정을 산천동으로 개칭 현재에 이름이 되었습니다.
청암동은 일제때 암근정을 광복후 개칭한 곳으로 그 명칭의 유래는 미상으로 조선초 한성부 성저십리에 속하였으며, 영조27년에는 한성부 서부 용산방 도화동계로 칭하다가 갑오개혁을 거쳐 한.일 합방후 일제는 1911. 4. 일(경기도령 제3호)에 경성부 용산면으로 1943. 6. 10일(칙령 제 485호)에는 용산구로 광복직후 1946. 10. 1일 암근정이라는 일제식 명칭을 청암동으로 개칭 하였으며 문화유적으로는 조선시대 독서당이 있고 광복후 이승만 대통령 별장인 마포장이 있었으나 현재는 현대식 빌라가 들어섰습니다.
신창동은 조선시대 신창이 있었기 때문에 신창이라고도 하였으며, 조선초 한성부의 성저십리에 속하였다가 영조 27년 한성부 서부 용산방 등으로 불리다가 갑오개혁을 거쳐 한일하방으로 일제가 자의로 1911. 4. 1(경기도령제3호) 경성부 용산면으로 칭하고,이어서 1914. 4. 1일(경기도 고시 제7호) 경성부 청수정으로 1943. 6. 10일(칙령 제 485호) 용산구에 속하다가 광복직후인 1946. 10 . 1일 일제식 동명인 청수정을 신창동으로 고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효창동 孝昌洞 효창공원과 효창운동장이 자리잡고 있는 효창동은 조선시대 왕실의 묘역인 효창원이있던 곳입니다. 그런 까닭에 조선시대에는 이 부근에서 말을 타고 지나갈 수 없도록 하마비가 효창동 6번지 49호에 있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 이곳 마을 이름이 하마비계로 불린 적도 있습니다. 동네 명칭이 된 효창원은 정조의 장남 뮨효세자의 묘원으로 5세때 이곳에 효창묘, 또는 애기능으로 칭하다가 고종 7년에 효창원을 승격시켰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효창원은 청파동 1가에 마포구 공덕동 5거리 부근에 이르는 넓은 지역으로 숲이 우거져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었다고 합니다.
용문동 龍門洞 용문동은 광복 후 용산의 <龍>자와 동문외계의 <門>자를 각각 따서 제정된 것입니다. 용문동 106번지 언덕에는 남이장군 사당이 있는데 이 동네에서는 매년 음력 4월과 7월, 초하루에 제향을 올리는데 매 3년마다 4월 1일은 특히 대규모의 대제 치성을 올려왔으나 최근에는 구민의 날 전날인 매년 10월 17일 대제와 장군 출전 행사를 대대적으로 치루고 있습니다. 용문동 10번지 길가에는 물맛이 달라고 하여 단우물이 있고, 용문시장근처 용문동 79번지에는 짠우물이 있는데 위쪽의 단우물에 비해서 물맛이 짜다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얼만전까지도 단우물은 식수로 사용되었고 짠우물은 세척용으로만 사용되었습니다.
용산 기슭의 동쪽에 위치한 도원동은 일제 때 이 일대에 복숭아가 많아 도산이라 칭했던 것을 광복 후에 고친 것입니다. 옛날부터 이곳에는 밤나무가 무성했다 해서 밤굴재 마을이 있었고, 밤굴재에는 율곡정이라고 하는 활터가 있었다고 합니다.
한강로동 漢江路洞 한강로1가, 한강으로 나가는 주요한 길목으로 붙여진 이름이기는 하나 일제때 한강통을 광복 후 고친 명칭입니다. 한강로1가는 종로, 을지로, 충무로, 태평로 등과 같이 가로명이자 동명도 됩니다.
한강로2가, 한강으로 나가는 주요한 길목으로 붙여진 이름이기는 하나 일제때 한강통을 광복 후 고친 명칭입니다. 1914년 4월 4일부터 동명을 제정하였을 때, 이곳은 신초리, 신촌리와 함께 한강통의 일부가 되었고, 1941년 10월 1일에 한강통3정목으로 되었다가 1946년 10월 1일에 일제식 동명일소로 한강로3가로 되었습니다.
한강로3가, 한강으로 나가는 주요한 길목으로 붙여진 이름이기는 하나 일제때 한강통을 광복 후 고친 명칭입니다.
용산로 3가, 용산동의 동명은 龍山이란 지명에서 비롯되었는데 용산이란 글자 그대로 龍같은 형체의 산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용산로 5가, 용산동의 동명은 龍山이란 지명에서 비롯되었는데 용산이란 글자 그대로 龍같은 형체의 산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촌동 二村洞 한강대교 북쪽, 한강변 좌우에 위치한 이촌동은 조선말까지도 모래벌판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름에 큰 장마가 지면 강 가운에 섬을 이루고 살던 사람들이 홍수를 피 해 강변으로 옮겼던 관계로 동명도 移村洞으로 불려지다가 일제때, 二村洞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이촌동도 조선초에 한성부의 城저십리에 속했으나 영조27년(1751년)에 한성부 서부 용산방(성외) 사촌리계·신촌리계로 칭하다가 갑오개혁 때 서서 용산방(성외) 사촌리계의 사촌리, 신촌리계의 신촌동으로 되었습니다.
한일합방 후 1911. 1. 4일, 일제는 이촌동 지역 중에서 신초리를 경기도 경성부 한 지면으로 편입하고 나머지는 용산면에 소속시켰습니다. 이어서 1913.12.11일(부령 제11 호)에 경성부 서부에 편입하고, 1914. 4. 1일 (경기도 고시 제7호)에 경성부 이촌동 으로 하였습니다. 1936년에 이촌동은 이촌정으로 개칭되고 1943. 6.10 용산구에 속했다가 1946. 10. 1일 이촌동으로 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이촌동에서 양율으로 이어지는 한강대교 중간에는 노들섬(구 중지도)이 있습니다. 이 섬은 전에 납천정리라고 했는데, 이는 이 마을 물맛이 좋은 우물이 있어서 이 우물을 관중에 상납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마을은 한강대교가 가설되 면서 폐동되고 우물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현재 노들섬은 체육공원으로 가꾸어져 있고, 한강에서 낙하산 훈련중 동료를 구하고 추락사한 이원등 상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특히, 이촌1동은 한강로 동북지역에 이촌동의 행정을 담당하는 동장관할구역이었습니다. 일명 동부이촌동이라고 칭하는 이동은 일제때는 알수 없으나, 1947년말 당시에 한강로1가와 같이 이촌동의 전지역을 한강로1가동회에서 행정을 맡았습니다. 이어서 1955. 4. 18일(시조례 제66호)에 의해 한강로2가 일부, 용산동5가와 같이 한강로2 가 1동주민센터에서 행정을 담당하였습니다. 그 뒤 1970. 5. 18일(시조례 제613호)에 이촌동 301·303번지 일대를 이촌제1동으로 정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한강대교 북쪽, 한강변에 위치한 이촌동은 조선시대 말까지도 모래벌판이어서 여름에 장마가 지면 홍수를 피해 강변으로 옮겼던 관계로 이촌동(移村洞)으로 불리다가 일제때 이촌동(二村洞)으로 되었으며, 조선시대 초에는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理)가 영조27년(1751년)에는 한성부 서부 龍山坊(城外) 사촌리계ㆍ신촌리계 →갑오개혁때 서부 용산방 사촌리계의 사촌리(沙村里) 신촌리계 신촌리 →1914년 4월 1일 (경기도 고시 제 7호)에성부 이촌동 →1936년 이촌동(二村洞)은 이촌정(二村町)으로 개칭되고, 1943년 6월 10일 용산구에 편입되어 1946년 10월 1일 이촌동으로 되었습니다.
이태원동 梨泰院洞 梨泰院동은 남산의 남쪽에 위치한 동으로 조선시대 梨泰院이라는 역원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동명입니다. 역원으로서의 梨泰院은 오래전에 없어지고 그 명칭을 가진 동네가 용산구 동북쪽에 자리잡아 현재의 梨泰院동이 되었습니다. 梨泰院의 명칭은 옛 기록에 보면 여러 가지 명칭으로 다양하게 씌어졌으나 효종때 이 동네에 배나무가 많다고하여 梨泰院이라 칭했다 합니다. 조선시대에 이태원이란 驛院이 있었기 때문에 동명이 유래되었으며 옛 기록에는 李泰院ㆍ梨泰院ㆍ胎院 등의 異名이 있었습니다. 원래 이태원이란 동명은 孝宗 때 이곳에 배나무가 많아서 칭하였고, 또 일설에는 임진왜란 당시에 침입한 왜군들이 이 마을에 있었던 雲鍾寺에 머물면서 여승을 겁탈하여 애기를 잉태하였으므로 이 절을 異胎院이라고 속되게 불렀기 때문에 비롯된 이름입나다.
한남동 漢南洞 한남동의 위치는 동쪽으로는 중구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이태원동과 보광동을 접하며 서북쪽으로는 남산을 주산으로하는 매봉산과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쪽은 한강을 경계로 한 아름다운 강경을 바라볼 수 있고, 현 한남로는 한남동을 양분시키고 있고 이 길은 한남대교와 연결되어 남쪽의 고속도로로 달릴 수 있습니다.
한남동 726 번지 한남초등학교와 해병대 군악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을 예전에는(능터골)이라고 했는데 이곳은 조선시대때 능터로 미리 정해놓은 자리라 헤서 그렇게 불려졌다고 합니다.또 부근에는 남산밑에 살던 두 장사가 큰 바위돌을 들어다가 놓은(마습다리)라는 다리가 있었는데, 일제때 조계사에서 가져가 비석을 만드는 바람에 없어졌다고 합니다.
지금의 단국대학교 맞은편 산마루턱에 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이곳은 강변의 산으로(화경골 뒷산)이라고도 불렀습니다. (華鏡)이라는 말은 거울처럼 맑은 한강수를 비유한 뜻으로 불렀으니 달맑은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흐르는 한강수는 과연 신비경이었습니다.
지금의 북한남동 골짜기에는 옛날에 夢常寺라는 절이 있었고 이 골짜기를 (몽상사골)이라고 하였다.한남동에서 약수동으로 넘어가는 茶山路 고개를 (버티고개)라고 하는데 옛날에 순라군들이 야경을 돌면서 (번도)라 하며 도둑을 쫓았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이곳 길이 좁고 왕래하는 사람이 없어서 도둑이 들끊었으므로 얼굴 모양이 험악하고 마음씨가 곱지않은 사람을 보면 (밤중에 버티고개에 가서 앉을 놈)이라는 농담을 했다고 합니다. 예전에 한남동에서 용산쪽으로 가는 산부리에 있는 마을을 (용산부리)라고도 했는데 현재 북한남동에 해당합니다. 또한 한강 강변으로 나가면 느티나무 뒤 (언더우드)별장터가 있는데 洗心臺라고 했습니다.
서빙고동 西氷庫洞 반포대교 북단의 한강변에 위치한 서빙고동은 조선시대에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어 동명이 유래되었습니다. 서빙고(西氷庫)는 조선 태조5년(1396)에 예조에 소속된 얼음 창고로 둔지산 산기슭에 설치하여 겨울에 한강물이 4촌(寸)이상 얼었을 때 채취하여 저장하였습니다. 빙고의 얼음은 매년 음력 3월∼9월까지 궁중의 수라간에 바치거나 고위관리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곳에는 볏짚으로 지붕을 이은 움집의 빙고 8동(棟)이 있었는데 서빙고가 동빙고보다 휠씬 규모가 커서 4촌 이상의 얼음 저장할 수 있었고, 얼음을 저장할때나 개빙(開氷)할 때에는 빙신(氷神)인 현명(玄冥)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서빙고가 있었던 자리는 현재 서빙고초등학교에서 서빙고파출소가 위치한 일대이며 동·서의 두 빙고는 고종 31년(1894)까지 존속하였다가 폐지되었는데 광복 이후 6·25전쟁 전까지만 해도 옛 빙고를 변형시킨 민가의 `곳집` 형태가 눈에 띄었습니다. 서빙고동 강변에서 잠실리로 건너가던 서빙고나루터는 조선시대는 물론, 6.25전쟁 때도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서빙고동과 동빙고동 사이의 골짜기는 도성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어서 서울골짜기라고 불렀으며, 이 골짜기에는 열녀문(烈女門)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전 서빙고동주민센터(서빙고동 199-4) 부근에는 창회정(蒼檜亭)이 있었는데 조선초에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자주 놀러 다녔던 곳이며 한명회·권남을 만나 대사를 논의하였습니다. 현재 서빙고동 199번지에 있는 부군당은 이 곳에서 300m 떨어진 언덕에 있었으나 80여년 전에 일제가 군사훈련장으로 사용함에 따라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부군당은 조선 태조 내외분을 주신으로 모시고 있으며 서울시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부군당 내부에는 태조 내외분과 삼불제석(三弗帝釋)의 무신도가 있으며 5개의 현판이 있습니다.
동빙고동 "반포대로"의 동쪽, 한강변의 동빙고동은 조선시대에 얼음을 저장하던 창고 동쪽에 위치하여 유래된 동명입니다. 동빙고는 서빙고와 인접해 있었지만 원래는 성동구 옥수동에 있었다. 이 곳으로 이전된 까닭은 조선초 연산군 10년(1504) 10월에 연산군이 옥수동 일대를 사냥터로 정했으므로 동빙고를 옮겨오게 된 것입니다.
동빙고에 저장된 얼음은 국가의 여러 제사때 쓰여졌으며 그 규모는 서빙고 보다 작아서 얼음 10,244정을 보관하였습니다. 참고로 동빙고가 옥수동에 위치했을 때는 현재 옥수동 산 1번지에 얼음을 잘 얼게 해달라고 현명씨(玄冥氏)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한단(司寒檀)이 있었습니다.
동빙고동에는 말안물이란 우물과 복주물이라는 우물이 있었는데 그 물맛이 매우 좋았습니다. 전에는 동빙고동에서 주성동쪽으로 나루터가 있어서 한강을 건너 잠실리로 갔으며, 6.25전쟁 때만 해도 서울 시민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잠실리를 거쳐 광주방면으로 왕래하였습니다. 동빙고동에서 보광동으로 가는 중간지점에는 서낭당이 있었습니다.
주성동 "한강동에 작은마을인 주성동은 전에 쇠를 녹여서 무쇠솥 등을 제조하였던 데에서 동명이 유래되었습니다. 주성동은 전일에 점말(店洞)이라고 했으며 강변 마을이므로 동작동에서 도성으로 들어오는 배가 이 곳에 닿았기 때문에 선창머리라는 마을이름과 주막이 있었던 관계로 술청거리라는 이름이 남아있습니다.
용산동6가 용산구의 명칭이 되기도 한 서울의 용산은 도성 서쪽 무악의 남쪽으로 뻗어나간 산줄기가 약현과 만리현을 지나서 서쪽으로 한강변을 향하여 꾸불꾸불 나아간 모양이 마치 용이 든 것 같고, 또 한강변의 지금 용산구와 마포구의 경계에서는 머리를 든 것 같기도 한 것에서 얻어진 이름입니다.
"서빙고로"북쪽의 용산동 5가·6가는 6.25전쟁 후 오랫동안 미군 골프장으로 사용해 왔는데 1992년 하반기부터 미군기지 일부가 이전함에 따라 골프장으로 서울시에 반환되었습니다. 서울시는 75,900㎡나 되는 이 부지를 공원으로 조성, 가족공원이라 이름하여 널리 시민들이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또 가족공원의 일부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입지키로 되어 1997년 10월 31일에 착공되어 서울의 새로운 명소가 될 것입니다.
이 동의 동서로는 경원선 철로와 "서빙고로", "강변대로"가 평행으로 뻗어있고 강변대로 남쪽의 고수부지에는 정구장 등이 시설된 한강시민공원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서빙고로"와 `강변대로" 사이에는 1980년대 말까지 공영사와 쌍용시멘트 회사가 건축자재등을 생산하다가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 신동아 쇼핑센터가 세워졌습니다. 현재 동작대교가 놓여진 곳은 조선시대의 동재기나루가 있었습니다.
동재기나루는 서울 장안에서 과천으로 나가는 길목으로 조선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이용했는데 영조 4년 (1728) 李麟佐의 난을 계기로 나루의 관리를 철저히 하게 되면서 이 나루에 별장이 파견되고 영조 22년(1746)에는 노량진 나룻배 3척을 이관하여 나룻터의 면모를 갖추었습니다.
보광동 普光洞 한남대교와 반포대교 사이의 강변에 위치한 보광동은 신라 진흥왕때 보광국사가 세운절이 있었으므로 동명이 유래 되었습니다. 보광동은 면적이 0.73 ㎢로 용산구의 3.3%를 차지하고 인구는 약 19,000명(유동적)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웃당,아랫당이라는 부군당이 있는데 웃당은 오산학교 옆에 위치하며 김유신 장군을 모시고 있으며, 아랫당은 보광동주민센터에서 서쪽으로 50여m 떨어진 능선 위에 위치하며, 인근에는 현무문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이하게도 중국 촉한(蜀漢)의 숭상 제갈공명을 모시고 있습니다. 현재 보광시장 자리는 전에 시장 뒤쪽에 빨래터가 있어서 마전터라 했고 보광동에서 이태원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장문고개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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