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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문화가 있는 송파나루터, 송파장, 송파산대놀이, 송파구 松坡區

草霧 2013. 12. 5. 16:04

 

 

 

 

백제 문화가 있는 송파나루터, 송파장, 송파산대놀이

 

 

송파구 松坡區

    

 

Songpa-gu (Songpo)

 

 

서울특별시의 동남부에 있는 구.

원래는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63년 서울시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편입되어 성동구 관할하에 있다가, 1975년에 신설된 강남구에 속하게 되었고, 1979년에는 신설된 강동구에 속해 있다가 1988년 분리·신설되었다.

 

 

 

 

 

 

 

 

 

 

시의 동남부에 위치한 구. 구청 소재지는 신천동이다.

 

조선시대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中垈面)

1963년 서울특별시에 성동구에 편입

1975년 성동구에서 분리된 강남구

1979년 강남구에서 분리된 강동구

1988년 송파구로 분리, 신설

 

 

 

 

 

 

 

 

 

 

송파라는 지명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소나무가 많은 언덕이라고 해서 송파(松坡)라 불리웠다. 우리 송파지역은 한강연안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하여 선사시대부터 신석기인들이 거주하였던 곳으로 고대국가성립과 함께 고조선의 생활무대가 되기도 하였고, 백제의 시조 온조왕부터 21대 개로왕까지 약 493년간 백제의 수도였던 곳으로, 4세기 후반에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7세기 후반까지 한강유역은 백제(하남위례성 및 한성), 고구려(남평양성), 신라(한산주--남한산주--한주)의 세력다툼이 치열하였던 지역이다.

 

잠실은 조선왕조 초기 세종때 왕명으로 지금의 잠실지역에 뽕나무를 심고 동잠실이라 불리였다. 지금의 석촌호수에 있던 송파나룻터는 고려와 조선왕조에 이르는 1천년 동안 한성, 충청도, 경상도로 이어지는 중요한 상업의 교통로였으며, 송파장은 전국 각 지방의 산물이 집산되는 중심지로 5일장이 아닌 상설점포가 일찍부터 형성되었으며, 조선시대 15대 장터중의 하나였다.

   

 

 

 

 

 

돌거북과 비석

송파동 가까이 흐르는 내 옆에 돌로 된 거북 두 개와 비석 한 개가 있다. 이 돌거북과 비석은 모두 중국에서 가져다 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 거북과 비석을 가져올 때는 각각 두 개씩 배에 싣고 오다가 비석 한 개는 바다에 빠뜨려서 비석 한 개와 거북 두 개를 가져오게 되었다고 한다. 한 거북 위에는 비석을 세웠는데 다른 하나는 비석이 세워져 있지 않았다. 거북과 비석이 있는 곳에는 마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우고 사람을 두어서 지키게 하였다.

 

그런데 비석이 세워져 있지 않은 거북이는 밤이나 비가오면 슬프게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당지기는 이곳에 제물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주었다. 그 뒤부터 거북이는 울지 않았다고 한다. 세상이 바뀌자 사당지기도 두지 않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그 뒤부터 큰 홍수가 나면 제방이 무너지고 냇물은 거북이 있는 쪽으로 가까이 흐르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거북이가 물속으로 파묻히게 되면 이 세상은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다 없어지게 된다고 보고 있다

 

 

매바위와 쌈설여울

지금부터 3백 수십년전 조선 인조때 경기도 광주 유수 이서는 남한산성의 축성공사를 둘로 나누어 남쪽을 부하 이회에게, 북쪽을 중() 벽암에게 각각 분담시켰다. 이회는 그날부터 낮과 밤, 일심단성으로 오로지 충성에만 노력하여 돌 하나, 흙 한줌에도 정성을 들여 침식을 잊다시피 몰두하였었다. 그러는 중에 축성자금이 부족하였으므로 마침내 자기 사재까지 전부 던지었다. 그렇게 해도 공사를 준공하기에는 자금이 부족하여 하루 이틀 공사는 늦어만 가고 있었다.

 

그 반면 벽암의 공사는 착착 진행되어서 기일안에 준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가에서 받은 공사비 중에서 남는 금액까지도 관가에 반납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정직한 이회는 점점 의심을 받게되었다. '이회가 사리사욕을 탐하고 주색에 빠져서 공사를 게을리 한다' 는 벽암의 터무니없는 모함에 의하여 관가에서는 벽암의 말만 믿고 이회를 서장대에서 참수형을 시켰다.

 

형을 집행하기 전에 그는 조금도 슬픈 기색이 없이신이 죽기는 합니다만 죽은 순간 한 마리의 매가 날아올 것이나 매가 날아오지 않으면 신의 죄는 죽어 마땅하되 매가 날아오면 죄가 없는 줄 아십시오라고 말 하였으나 윗자리에 앉은 이서는 이 말을 들은 척도 않고 빨리 처형하라고 명을 내렸다. 곧 이어 번쩍이는 칼날에 비참하게도 이회의 목은 땅에 떨어졌다.

 

그때 피흐르는 목위로 한 마리의 매가 날아 와서 이회의 시체를 맴돌고 수어장대 근처 바위 위에 앉아 무서운 눈초리로 군중을 흘겨보고 있다가 갑자기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것을 본 군중들은 이상히 여겨 그 매가 앉아있던 바위를 쫓아가 보니 매는 없고 다만 발자국만 남아 있었다. 이 뒤부터 이 바위를 매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관가에서는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실지조사를 해본 결과 벽암이 쌓은 성은 한 곳도 정성들인 곳이 없이 허술하였으나 이회가 쌓은 성은 금성철벽같이 견고하였다고 한다. 이를 알게된 관가에서는 많은 돈을 하사하여 서장대 근처에 사당을 세워 청량당이라 하고 그의 영혼을 위로하였다.

 

한편 이회의 부인 송씨는 남편이 축성비가 부족해서 고심하는 것을 보고 하루는 그가 남편에게 제가 돌아다니며 기부금을 받아 축성비에 보태겠습니다하고는 집을 나간지 여러 달만에 많은 양의 기부금을 얻어서 배에 싣고 세밭나루(三田渡)에 다다랐을때 뜻밖에도 남편이 참형을 당했다는 슬픈 소식을 듣자 통분하여 싣고 온 쌀을 모두 강물에 던져버리고 자신도 한강에 몸을 던져 남편의 뒤를 따랐다. 이 뒤부터 이 강을 쌀섬여울(米石灘)이라 불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송씨가 강에 뛰어들어 죽은 뒤부터 안개가 낀 날이나 어둑컴컴해질 무렵에 배를 타고 이 쌀여울을 지날때는 머리를 풀어헤친 여인의 모습과 곡성이 들리곤 하였다. 사공들이 여인의 모습에 홀려 배를 몰다보면 삼성동 앞 어린애같이 생긴 무동도에 부딪혀 파선하여 익사하곤 하였다. 그래서 삼전리 사람들은 이같은 불행한 일이 자주 발생하는 것은 송씨 부인의 원혼 때문이라고 판단하여 상의끝에 쌀섬여울에서 100m 동쪽 강변에 부군당을 세워놓고 송씨부인을 제사 지내기로 하였다. 그 뒤부터 배가 파선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관가에서는 그 부인의 충의를 가상히 여겨 강가 언덕위에 사당(하주당)을 세워 영을 위로하였다고 한다.

 

 

무문비석

이동 서남쪽 고개에 10여년 전까지도 상여막이 있었고 그 옆에 글씨가 보이지 않는 무문비석이 있었다. 이 상여막에는 장정 30여명이 메어야 하는 큰 상여가 있었다. 이 부근에 무문비가 세워져 있었는데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옛날 이 마을에 신혼부부가 살았는데 어느날 신랑이 사업을 하기 위해 먼 곳으로 떠났으나 오래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다. 이에 새댁은 날마다 동구 밖에 나가 신랑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것이 몇 년이 흘렀다.

 

이처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단념하지 않고 기다리던 새댁은 기어코 이곳에서 지쳐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러자 이를 측은히 생각하고 일변 갸륵하게 생각한 동민들이 장례를 정성껏 치러준 뒤 새댁의 정절을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 이곳에 비석을 세웠다. 이러한 애절한 사연이 깃든 이 비석은 오랜 세월동안 풍우에 씻겨 비문조차 보이지 않게 되자 무문비라고 불렸다.

 

 

서혼남의 곤룡포

지금부터 약 3백여년전 병자년 난리 때 인조 임금은 근신 몇 사람과 함께 서울을 빠져나와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산기슭까지 오르자 몸에 피로가 쌓여 잘 걷지 못하였다. 마침 근처에서 나무를 하고 있던 서흔남이라는 한 나뭇꾼이 이 광경을 보고 곧장 달려와 인조 임금을 등에 업고 성안으로 올라갔다. 인조임금은 서흔남이라는 그 나뭇꾼의 공을 가상히 여기시고 네가 소망하는 것을 들어주겠으니 말하라하였다. 무지한 그는 왕이 입고 계시는 금빛 찬란한 곤룡포가 귀하게 보였다. 그래서 그 옷을 소망한다고 아뢰었다. 인조임금은 곤룡포를 하사하였다. 그 뒤 서흔남이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곤룡포를 시체와 함께 병풍산에 묻었는데, 그 공으로 해서 별군관이란 벼슬을 얻게 되었다. 그 후 대소 관원들이 그 무덤 앞을 지날 때에는 곤룡포가 묻혀 있기 때문에 반드시 말에서 내렸다고 전한다.

 

 

송파의 오봉산

오봉산은 송파에서 조금 떨어진 동네에 있었습니다. 오봉산은 어떻게 해서 오봉산이라고 하는고 하니 그 몽고 사람이 조선을 빼앗아가지고 조선의 임금한테 항복을 받아야 할 텐데, 조선의 임금님이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가고 없으니까 몽고 사람들이 여기 송파강에서 남한산성을 향해 포를 쏘는데, 남한산성 안에 있는 임금님과 백성들이 다 죽으라고 포를 쏘았나봐요.

 

그리고 한강 물줄기를 산성을 향해 돌렸는데 물이 개울로 흘러 나가지 산성안에 물이 차겠어요? 나중에 남한산성에 먹을 것이 없어서 임금님이 내려와 항복을 하는데, 몽고인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오봉산이 있는 곳으로 가서 항복을 받아라.”그 오봉산에서 항복을 받으려고 오봉산을 찾으니까 이 바닥에는 오봉산이 없거든요. 저 과천 쪽에 오봉산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과천지역에서도 오봉산을 못찾자 도로 여기로 와서 항복을 받으려고, 그 오봉산을 쌓았대요. 그때 쌓은 오봉산은 석촌호수 건너 백제초기 적석총 고분 지역에 있었대요. 지금 사람들은 그 오봉산이 옛날 고분이라고들 하지요.

 

 

이서의 숭열전

광주 일장산(남한산) 중턱에 백제시조 온조왕을 치제하는 제전이 있는데 이것은 조선후기 인조 16년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백제 시조 묘()에 조선왕조의 신하가 배위 된데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어느날 밤 인조 임금이 꿈을 꾸었는데 온조왕이 찾아와서 조를 세워 주신데 대해 참으로 기쁘게 생각하오먼저 감사의 뜻을 말한 다음 나만이 이 조에 있는 것은 좀 적적하니 청컨대 당신의 신하 이서를 나에게 주실 수 없습니까?하였다. 인조왕은 그것은 쉬운 일이오하고 쾌히 승낙하자 깨어보니 꿈이었다. 인조 임금이 이튿날 아침에 침전에서 일어나자 광주유수 이서가 어젯밤 별세하였다고 신하가 아뢰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인조 임금은 이서는 온조왕이 데리고 간 것이 틀림이 없다하고 온조왕의 배위로 종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임경업장군

현재 프라자아파트가 들어선 곳은 거여동 산 2번지 지역이지만 전일에는 오금동 지역으로 임경업 장군 증조부의 묘소가 있었으나 5.16 이후 이장되었다. 이 묘소는 매화낙지형명당이기 때문에 이로 인해 임경업 장군이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부터 약 5백년전, 서울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지내는 한 총각이 있었다. 그는 가세가 빈한하고 글을 배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다만 임도령이라 불렀다.

 

어느 해 이른 봄날이었다. 임도령은 끼니를 이을 길이 없어 생각다 못해 광주에 산다는 친척집으로 식량을 구하러 떠났다. 그렇다고 친척집을 잘 아는 것도 아니요 다만 어머니 말씀만 듣고 어림짐작으로 길을 떠난 것이다. 그는 광나루에서 한강을 나룻배로 건너 남한산 쪽을 향하여 걸었다. 들판을 지나고 언덕을 넘어 여기저기서 길을 물어가며 남한산 기슭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산중에서 길을 찾다보니 이 골짜기도 그 골짜기 같고 그 골짜기도 이 골짜기 같아 지친 몸에 방향을 잘 알 수 없게 되었다.

 

해는 지고 길은 희미한데 하늘에서 먹구름이 일어나더니 비바람마저 몰아쳤다. 임도령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날은 어둡고 길은 험하고 몸은 지칠대로 지쳤다. 다시 왔던 길을 찾아 내려가려 하였지만 그것도 어디가 어디인지를 알수 없었으니 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저만큼 불빛이 반짝거리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임도령은 일말의 희망을 그 불빛에 걸고 거의 기다시피 하여 찾아가니 거기에는 자그마한 집 한 채가 있었다. 주위는 조용하고 인기척이 없었다. 임도령은 마음 한 구석에 의심이 나기도 하였지만 용기를 내어 주인을 불렀다.

 

그런데 방문을 열고 나타나는 사람은 뜻밖에 아리따운 묘령의 처녀가 아닌가? 이같이 깊은 산중에 처녀 혼자만이 살고 있다는 것도 괴이한 일인데 그 처녀는 뛰어난 미모에 음성도 고운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처녀는 밤이 깊고 날씨가 궂은데 어떻게 찾아왔느냐고 묻자 임도령은 자기의 신분과 길을 잃은 사연을 말하니 처녀는 자기 이름은 용녀라고 말하고 이곳에 혼자 산다고 하면서 들어오기를 권하는 것이었다. 깊은 산중에서 길을 잃은 임도령은 용녀의 인도로 방안에 들어갔는데 방안이 예사 촌가 같지 않고 자개가구와 꽃병풍등 화려한 장식이 한층 정신을 황홀하게 하였다.

 

그러나 임도령은 주인 처녀의 안내대로 방안으로 들어가 수건으로 비에 젖은 몸을 닦고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처녀는 태연하고 다정한 음성으로 오늘밤의 만남이 모두 옥황상제께서 점지하여 주신 인연이라고 하며 은근하게 대하자 임도령은 의외의 일에 정신이 황홀하였다. 용녀는 밖으로 나가더니 진수성찬을 차려가지고 들어와서 음식을 권하며 손수 술을 따라 주기도 하였다. 임도령은 의심스러운 점도 없지 않았지만 처녀의 친절과 아름다운 용모에 끌려 술과 음식을 들게 되었다. 밥상을 물리고 두 사람은 원앙금침 위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임도령에게는 참으로 뜻밖에 얻은 행복이요 호사가 아닐 수 없었다.

 

미모의 용녀와 하룻밤을 지낸 임도령은 이튿날 그대로 길을 떠나야만 했다. 그러나 그 처녀를 혼자두고 떠나가는 마음이 아쉽기 이를 데 없었다. 임도령은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다시 지난밤을 지내던 곳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집도 용녀도 간 곳이 없고 다만 한 그루의 고목이 비스듬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머리를 풀어헤친 한 여인이 서 있는데 그녀는 곧 자기와 어젯밤을 지냈던 아리따운 처녀였다. 그러나 그 여인은 쌀쌀하고 냉혹한 태도로 임도령을 노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어 이젠 사정을 다 말하겠소. 나는 5백년 묵은 암구렁이요 세상의 남자인 당신의 힘으로 이제 나는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으니 이 모든 것이 당신의 덕입니다. 아무쪼록 평안히 계시오.하고는 무엇에 빨리듯 하늘로 올라갔다. 점점 작아져 가는 용녀를 임도령은 미친듯이 불렀다. 그러나 용녀는 하늘높이 사라져만 가는 것이었다.

 

이때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렸다. 서방님, 잠시 후에는 제가 올라간 자리에 비늘 세 개가 떨어질 것입니다. 그 비늘이 떨어진 자리에 서방님댁 묘자리를 쓰십시오. 그러면 서방님 자손에 유명한 장수가 꼭 나올 것입니다. 서방님-.용녀의 모습은 영원히 사라지고 하늘에서 비늘 세 개가 떨어지더니 매화나무 세 그루로 변했다.

 

임도령으로서는 희한한 일이요 또 그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집에 돌아가 어머니에게 말씀드리고 아버지의 산소를 그 매화나무가 있는 자리로 이장하니 이것이 매화낙지형 명당이다. 병자호란때의 명장 임경업장군이 이 매화낙지형 명당의 발복으로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근처에는 매화낙지형 명당의 발복으로 태어난 임경업장군이 투구를 썼다는 투구봉, 농을 열고 갑옷을 꺼내 입었다는 개농리, 용마를 얻어 탔다는 마산 등의 지명이 전해온다.

 

 

도미나루

송파동에는 백제초에 금슬 좋은 부부인 도미와 아랑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지금부터 약 1800년전 삼국시대 초기 백제의 제4대 개루왕(128~165) 때 백제의 서울 위례성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에 신혼의 도미부부가 살고 있었다. 남편 도미는 목수로서 비록 지체는 보잘것 없지만 사람됨이 준수하고 의리를 알았으며 아내 아랑은 용모가 아름답고 언행에 품위가 있으니 두 사람은 의좋은 부부로 품행있는 젊은 남녀로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행복한 그들 부부에게 뜻밖의 불행이 닥쳐왔다.

 

, 아랑의 뛰어난 미모가 백제 온 나라 안에 퍼져 모르는 이가 없게 되니 이 소문이 여색을 좋아하는 개루왕의 귀에까지 들렸다. 개루왕은 아랑을 보고자 그녀를 부르게 했다. 그러나 아랑은 왕이 보낸 사자에게 벼루에 먹을 갈아 왕에게 올리는 글을 썼다.

 

왕은 백성의 부모라 어찌 부르시는 명을 거역하오리까마는 소첩은 남편이 있는 몸이라 남편의 허락이 없이는 부르시는 왕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초조하게 기다리던 개루왕은 아랑의 편지를 읽고 더욱 그녀를 자기 손아귀에 넣고 싶었다.

 

그러나 연약한 여인을 군사를 시켜 잡아오라고 하기에는 왕의 위신이 있는데다가 또 백성들의 웃음을 사기 쉬우므로 개루왕은 고심했다. 개루왕은 궁리끝에 궁궐을 짓고 있는 아랑의 남편 도미를 불러 들이기로 했다. 개루왕은 도미를 불러 놓고네 아내가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미인이라지하는 이 말에 도미의 가슴은 섬뜩했다.

 

잘못 전해진 이야기로 알고 있습니다.」「범절이 바르고 지조가 굳다지」「…」「여인은 정절이 으뜸가는 것이 미덕이지만 나는 절개가 굳은 여자는 한번도 본 적이 없어. 더우기 미인일 수록 유혹에 빠지지 않는 여인이 없으니 네 아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하고 개루왕은 빙글빙글 웃으며 도미를 내려다 보았다.

이에 젊은 도미는 왕의 모욕적인 말에 당황하고 흥분했다.

 

왕보다 더 깨끗한 아랑에 대해 애매한 누명을 씌우는 것이 분했다. 사람들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소인의 아내같은 사람은 죽어도 두 마음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는 도미가 평소 아내를 믿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신있게 말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도미의 아내에 대한 자신있는 말은 도리어 왕의 불순한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개루왕은 도미의 아내가 얼마나 아름답고 청결한지를 실제로 시험해 보고 싶었다. 도미에게는 궁중의 일을 맡겨 머물게 한 다음, 사람을 시켜 도미의 집에 왕이 거동한다고 알리고 군신을 시켜 왕의 용표를 입게하여 도미의 집으로 보냈다. 그리고 아랑의 정조를 시험하게 하였다.

 

드디어 왕의 위의를 갖춘 가짜왕이 밤에 도미의 집에 도착하여 그 아내를 불러 내가 너의 아름다운 모습을 전해듣고 그리워한지 오래 되었다. 오늘 내가 도미와 내기장기를 두어서 내가 이겼기 때문에 내일 너를 궁중으로 데려가게 되었다. 지금부터 너는 내 여자이니 나를 따라야 하느니라하면서 동침을 강요하였다. 도미의 아내 아랑은 의외의 일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곧 마음을 가라 앉히고 임금님께서는 거짓말이 없는 일입니다. 제가 어찌 따르지 않겠읍니까?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먼저 방안으로 들어가소서. 제가 의복을 갈아입고 들어가겠습니다.하면서 가짜왕을 방안으로 안내한 다음 한 여종에게 옷을 단장하여 입혀 들여보내서 하룻밤을 지내게 하였다. 슬기있는 아랑은 기지를 써서 위기를 모면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이튿날 이 사실이 알려지자 개루왕은 크게 노하여 도미에게 죄를 씌워 그 벌로 두 눈을 빼고 송파강으로 끌고 나가 작은 배에 실어 홍상으로 띄어 보냈다. 한편 아랑은 여종을 방에 들여 보낸 후 바로 집을 나와 남의 처마 밑에서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날이 밝자 궁궐을 짓고 있던 도편수에게 남편의 안부를 알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궁중에 들어갔다 나온 도편수는 하늘이 무너지는듯한 소식을 들려 주었다. 아랑은 이 말을 듣고 실신했다. 다시 정신이 들자 아랑은 도미를 찾아 송파나루로 쫓아갔다. 그러나 도미의 소식을 묻는 바람에 아랑은 개루왕이 배치해 놓은 군사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끌려온 아랑을 보고 개루왕은 네가 네 죄를 알겠느냐?언성을 높이면서 도미가 중죄로 처벌된 사실을 알리고 아랑에게 궁중에 들어와서 궁인이 될 것을 명했다. 아랑은 참으로 눈앞이 캄캄하고 정신이 아찔할 뿐이었다. 아랑은 개루왕에게 왕명을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 더구나 지금은 주인 잃은 몸이 의지할 곳이 없으니 어찌 혼자 살아가겠습니까? 대왕께서는 염려하지 마소서. 다만 지금은 몸이 깨끗하지 못한 때이오니 며칠만 기다려 주시면 몸단장하여 들어오겠습니다.라고 말하니 왕은 의심없이 내보냈다. 아랑은 자기의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면서 송파강가로 나가 호천통곡하였다.

 

그러나 홍강에는 물결이 일렁일 뿐 남편은 없었다. 이때 배 한 척이 상류에서 떠 내려와 그녀가 서 있는 언덕아래 머물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랑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그 배위에 올라탔다. 아랑이 배에 오르자 배는 강을 따라 흘러 내려갔다. 배가 닿은 것은 천성도라는 섬이었다. 지친 몸으로 섬에 발을 딛었을때 푸른 언덕위에 남편 도미가 있었다. 서로 알아본 두 사람은 얼싸안고 울었다. 다시 배를 타고 내려가서 고구려 땅 산산(蒜山)아래 이르러 여생을 단란하게 보냈다.

 

 

진텃벌

현재 석촌동 고분이 있는 지역 일대를 진텃벌(陣墟坪)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병자호란때 청군이 남한산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진을 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진텃벌에는 이 당시에 있었던 애절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청의 침입이 임박하여 전운이 감돌고 있을때, 당시 이참판 부인의 생일을 맞아 고관 부인들이 모여 생일축하를 하고 있었다. 생일축하연의 화제는 청국과의 전쟁 이야기였다. , 청나라 되놈들이 정묘호란 때처럼 다시 쳐들어 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고 한쪽은 백마산성에서 임경업장군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데 쉽게 쳐들어 오지 못할 것이라고들 하였다.

 

금수같은 놈들이 서울까지 쳐들어와 사람들을 죽이고 끌고 갈 것을 생각하니 통 잠이 오지 않아요이때 조용히 듣고 있던 이참판 부인이만약에 되놈들에게 잡혀서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결해 버리지요하고 말하자 모든 부인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정절을 위해서는 목숨을 불사하겠다고 큰 소리쳤다.

 

그러자 오직 김류의 부인 유씨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를 괴이하게 여긴 이참판 부인은 부인은 만약 되놈들에게 잡히면 어떻게 할 작정이지요하고 묻자 유씨 부인은그 때 가봐야 알겠지요라고 태연히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유씨 부인의 말을 듣고 이참판 부인은 그녀를 부정한 여자라고 크게 꾸짖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염려했던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청군은 임경업 장군이 지키는 백마산성을 우회하여 서울로 침입하였고 인조 임금은 강화도로 피신하려다가 청군이 양천강을 차단하였다는 보고를 듣고 어가를 돌려 광희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한편 도성에 침입한 청군은 갖은 약탈을 자행하였다.

 

특히 젊은 여인이 눈에 뜨이면 무조건 잡아갔다. 그리하여 어미는 잡아가도 어린이들은 버려두었으므로 굶고 얼어 죽은 어린이가 많았다. 이참판 부인과 유씨부인도 피난가지 못하고 청군에 사로잡혀 진텃벌에 끌려왔다. 이때 이참판 부인은 의외로 청군의 위협과 회유에 굴복하여 정절을 꺾었으나 유씨부인은 끝끝내 정절을 지키다가 이곳 진텃벌에서 무참히 화를 당했다고 한다.

 

 

삼학사의 사당

남한산성에 가면 삼학사(三學士)의 정문(旌門)인 조그마한 집이 있어요. 그 삼학사가 누구냐 하면, 윤집, 홍익한, 오달제죠. 이 삼학사가 그러니까 만주로 두 왕자가 볼모로 잡혀 가는데, 조정에서는 두 왕자를 잘 보호하라는 의미에서 담력 있고 지혜 있고 기지있는 사람들을 골라서 보냈던 거 같애요. 그때 만주에 가서 볼모 생활을 하는데, 거기 얽혀진 얘기입니다.

 

그 볼모로 잡혀간 왕자중에서 한명이 죽은 이유는 청나라에서 조선왕조의 대를 못 잇도록 씨를 없애야 되겠는데, 자식을 못 낳도록 하는 방법으로는 병에 걸린 여자랑 같이 자게 해 가지고 자식을 못낳도록 했던거 같애요. 그래서 효종의 형은 국내에 돌아오자마자 죽게 되었죠.

 

그리고 그 죽은 세자 동생이 나중에 효종이 되겠습니다마는, 그 분은 강화조약을 맺은 다음에야 풀려나서 돌아왔지만 삼학사 세사람은 청나라에 굴복하지 않는 까닭에 한 상자 속에다 넣어 놓고 위에서 큰 톱으로 켜서 죽이는데 세 사람 이마 한 가운데로, 동시에 큰 톱날이 들어오는 거죠.

 

그때 오달제가 키가 제일 작았던 거 같애요. 윤집이가 키가 컸던지, 키가 큰사람이 먼저 당할 꺼 아닙니까? 이마에 피가 흐르기 시작하자, 얼굴을 찌프리니까 오달제가 , 나라에 충성하기 위해서 죽는데, 뭐가 두려워서 찌프리느냐? 떳떳하게 죽어라.”하고 소리를 쳤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차차 앉은 키대로 톱날에 죽는데 오달제가 제일 나중에 톱날이 닿는데 자기도 얼굴에 피가 흐르니까 찡그리더라 하는 얘긴데, 그렇게해서 세 사람이 죽었다는 거죠.

 

봉림대군이 나중에 효종이 되어 만주에서 풀려나 돌아올때 세사람의 충정이 가상해서 거기 윤집이 있느냐?” 하자 공중에서, “. 신 여기 받들고 따라갑니다.” 하고 달제 있는냐?” 하니까는 . 소신도 따라갑니다.”해서, 그 서울 도성문을 들어서면서 또 부르니까는, “. 소신들은 여기까지 잘 받들어 모시고 따라 왔습니다. 이제 소신들은 정처없는 곳으로 사라져 가겠습니다. 국태민안(國泰民安) 하시기를 비옵니다.”하고서는, 그 다음부터 소리가 없더라는 거야.

 

그리고 때때로 그 대군이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삼학사들이 미리 나타나 예고해 주는 현몽(現夢)을 하는데 하루는 대군께서 너희들이 이렇게 공중에 떠다녀서는 안되겠다. 국기(國其) 곁의 사직단(社稷壇)에 받아 주랴 아니면 어찌하면 좋겠느냐?”“아니올시다. ()은 남한산성을 끝끝내 지키지 못한 것이 소신들의 한이올시다.”해서, 그 남한산성에다가 삼학사의 넋을 모시는 묘(), 사당을 세워주고 그 혼을 거기다가 모셨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잠실 탄천유래

강남구하고 송파를 가르는 개천이 바로 탄천(炭川)이야, 탄천은 우리 말로다가 숯내라는 뜻인데,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장장포니 검내니 험천이니 이렇게 부르고들 있어요. 이 개천은 경기도 용인군 부석면 중리 석행산에서 발원해서, 용인 서쪽에 이르러 장장포라고 부르고, 다시 광주산을 지나 꺾이면서 북쪽으로 흘러 광주군 남석면에 이르러 기우제를 지나는 하천을 검내, 또는 험천으로 불러요.

 

탄천, 또 검내 이렇게 부르게 된 연유가 다 있어요. 조선시대 강원도 등지에서 목재와 땔감을 한강을 통해 싣고 와가지고서 뚝섬에서 부려 놨는데, 이걸 가지고 숯을 만든 곳이 바로 탄천 부근이고 그래서 개천물이 검게 변했다고 하는 것이야.

 

그리고 또 탄천에는 이러한 재미있는 전설도 전해내려오고 있어요. . 그러니까 옛날에 염라대왕이 사자에게, “삼천갑자를 사는 동방삭을 잡아오너라라고 명을 내려 광주 땅으로 내려왔는데 동방삭을 찾을 길이 있나! 그래서 한가지 꾀를 생각해냈어요. 그것이 뭐냐하면 말야. 이 세상에서 아무도 하지 않는 짓을 하고 있으면은 그 소문을 듣고 호기심이 많고 객기 있는 동방삭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숯 몇 덩이를 들고 아침부터 숱내에 나가서 냇물에다가 숯을 씻기 시작했던 거야. 보는 사람들이 모두 그걸 보고 비웃었어요. 염라대왕이 보낸 사자는 비웃거나 말거나 매일같이 계속해서 똑같은 짓을 되풀이 하고 있었대요.

 

그런에 어느날 노인이 지나가다가 그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며 으응, 이 사람이 바로 숯을 냇물에 빨고 있는 그 미치광이로구만.”하면서 그 행동을 한참 동안 구경을 하다가는 발길을 돌리면서, “허허, 정말 별일 다봤다. 내가 삼천갑자를 살았어도 냇물에 숯을 빠는 놈은 처음봤다니까.”이러는거야. 그러니 이 염라대왕이 보낸 사자가, “옳거니. 임자가 바로 삼천갑자 동방삭이로구나.”하면서 동방삭의 소매를 꽉 잡아버렸대요. 그렇게 염라대왕의 사자가 삼천갑자 동방삭을 잡아갔다고 해서, 숯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하는거예요.

 

 

주억다리

인조(仁組) 14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청군(淸軍)의 공격을 피하여 인조대왕(仁組大王)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을 가던중 이곳에 도착하여 보니 작은 냇가가 있었다. 신하들은 임금을 섬겨야 한다는 충성된 마음으로 주억돌을 주어다 징검다리를 만들고 인조대왕(仁組大王)이 무사히 냇가를 건너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후부터 이다리는 주억돌을 주워다 놓았다고 하여 '주억다리'로 불리워졌다. 다리는 없어지고 그 유래만 전하여 지고 있었는데 송파구에서는 방이동 205-5(남부순환로변 시설녹지대)표석을 설치하였다.

 

 

귀신을 쫓기위한 송파산대놀이의 유래

어떻게 해서 송파산대가 생긴 것인고 하니 옛날에 수도가 개성에 있었대요. 너무 북쪽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한가운데인 한양으로 끌어냈대요. 지금의 서울로 말입니다. 한양으로 수도를 삼고 대궐을 짓고 성을 쌓고 임금님이 살아보려니까, 지금은 없지만 그때는 도깨비, 허깨비 뭐 별별 귀신이 많았었대요. 그래 밤이면 상감마마님께서도 잠을 잘 수 없어서 도로 개성으로 갈 까도 생각을 하다가 조선의 학자들을 모두 불러 모아놓고, “사실은 이렇게 돼서, 내가 도로 개성으로 가게 되었다.”하니까.

 

그 학자들이 모두 도깨비를 쫓기위해 문제를 낸 것이 어떻게 낸고 하니, “귀신을 어떻게 하면 쫓을까?”그래서, 무당이라는 것도 만들어 놓고 또 장님 경 읽는 것도 만들어 놓고 또 송파산대놀이 12마당을 만들어 귀신을 쫓는 거예요.

 

이 산대놀이의 첫마당에는 첫상좌 둘째상좌, 둘째마당에는 옴중, 세째마당에는 양반인 연닢과 눈끔쩍이,그러고 그렇게 해가지고 12마당을 만들어 놓은 거예요. 탈춤은 껑충껑충 뛰면서 춤을 많이 추는 것이고, 산대놀이는 여러 가지 재담이 많이 들어 있어요. 그전에 이 송파에는 큰 장이 섰는데 수만명씩 모였어요.

 

 

 

송파라는 명칭은 지역 중심지인 송파동(松坡洞)에서 유래했다.

송파동의 유래는 세가지가 전해진다. 조선 문종 때 연파곤(淵波昆)이라 불렸다가 이후 소파곤(疎波昆), 소파리(疎波里), 송파진(松坡津)이 되었다고 한다. 또 소나무()가 많은 언덕()이란 이름에서 유래했다고도 하며, 소나무()가 있던 언덕() 한 쪽이 파여 떨어지는 바람에 송파가 되었다고도 한다.

 

동으로는 남한산성을 배경으로 강동구와 경기도 하남시, 서로는 탄천을 경계로 강남구, 남으로는 경기도 성남시, 북으로는 한강을 경계로 광진구와 접하고 있다. 한강과 성내천, 탄천 등의 하천과 청량산이 에워싸고 있다.

    

 

백제가 한강유역에 도읍한 시기로 송파지역에서 고대국가로서의 기틀을 갖추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백제의 전기시대이다.(BC18~AD475)

역지도 광주군 주변이 자세하게 기록되어있으며 그당시 중대면에는 727호에 3,237(1,438, 1,799)이 살고 있었으며 송파는 도성으로부터 광주를 가는 길목에 서있음이 표시되어 있다.

 

잠실리의 마을 이름은 고양군 뚝도면에 속해 자마장(뚝섬)리의 남쪽에 있는데 섬은 두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북안에 연한 것은 신천리, 남안에 연한 것은 잠실리이다. 전에는 자마장리와 연속된 반도였으나 홍수로 인해 북안에 작은 지류가 생겨 섬이 되었다.

 

15대 향시중의 하나인 송파장이 있던 이것은 한강을 오르내리는 송파나루터의 남쪽 언덕에 있었으나 192579일 부터 17일 사이에 큰 비가 내려 송파마을과 장터는 유실되고 모래사장과 강줄기로 변해버렸다. 1930년대만해도 뽕나무가 무성했으나 1950년대 이후 주민들은 뽕나무를 뽑아내고 모래밭에 배추, 무우, 오이, 호박등의 채소와 꽃을 가꾸며 30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1977년대의 몽촌토성 외부에는 성내천을 중심으로 한 지역 일대가 경작지로 이용되고, 성의 동북쪽 외곽 사이에는 [잣나무골] 남문을 중심으로 한 동서 양쪽에는 [몽촌]으로 불리는 자연부락이 있었다.

 

192579일부터 12일까지 4일간 서울에 383.7의 큰비가 내려 많은 가옥이 침수되고 이재민 이 생겼다. 이 당시 비가 잠시 그쳐 사람들은 젖은 옷을 말리고 침수된 곳을 매만지고 복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사흘뒤인 715일저녁부터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개부심한다고 생각했으나 집중호우로 변하여 19일까지 5일간 365.2의 강우량을 나타냈다. 이른바 1,2차 홍수로 일컬어지는 을축년 대홍수로 한강인도교의 최고수위가 11.66를 기록했다.

 

풍납동은 한강과 상면하고 있어 항상 수재의 위험을 안고 있는 마을이다. 1925년과 1972년이래 최대의 물난리를 몰고 온때는 198491,2일이었다. 198491일 새벽, 상류의 화천, 의암, 춘천, 청평, 소양, 팔당 등 6개댐이 만수위에 육박하자 가두었던 물을 한꺼번에 방류하면서 부터 한강수위가 급격히 높아져 한강주변의 저지대는 물에 잠기기 시작했고, 배수지 범람등으로 침수되기 시작했다. 특히 이중 풍납, 성내, 망원동 등 150개지구, 20,962가구가 침수되었으며 수용 이재민도 85,000여명으로 집계되었다.

    

 

 

몽촌(夢村)

고대 삼한때부터 이곳을 [곰말]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한자음으로 고쳐져 몽촌이 되었다는 것이다. 몽촌의 전이름은 고원강촌(古垣江村)이나 고원성의 고원, 옛날 흙으로 쌓은 담장이나 성루의 의미를 넘어서 곰말과도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곰말의 곰은 고어로 큰 것을 뜻하므로 큰마을이란 뜻이 되고, 또 큰마을이란 으뜸되는 마을이란 뜻도 되므로 고원(古垣)이란 한자이름도 뜻으로 새기면 옛 울이란 뜻이다. 참고로 백제 때의 위례성(慰禮城) 역시 울을 두른 성, 곧 서울이란 뜻으로 고원, 즉 옛 울, 옛 서울로도 풀이될 수 있어서 몽촌, 꿈말이나 곰말, 큰말, 고원, 고울, 옛 울 등의 이름을 옛 위례곧 옛 서울로 풀이해 볼 수 있다.

 

 

이동(二洞)

198591일자로 방이동에 통합되어 동명칭은 사라졌으나, 송파구의 옛지명으로 살펴보면, 이동이란 동명은 두개 마을을 병합하였으므로 이리(二里)라고 칭하던 것이 이동이 된 것이다. , 이곳에는 [몽촌],[일동네],[잦나무골], [큰말] 외에 [신촌], [웃말], [가운데말], [아랫말]등의 자연부락이 있어 한때 12리로 나누었다가 다시 병합하여 2개 마을을 병합했다 하여 2리라고 부른 것이다.

 

 

탄천(炭川)

남한산성에서 발원하여 송파구와 강남구 사이를 흐르는 탄천은 지금 성남시 탄리(炭里:숯골)에서 숯을 구워서 나라에 바쳤는데 당시 비만 오면 이 내로 시커먼 물이 흐른다 하여 숯내 라고 불렀으며 후일 이를 탄천(炭川)이라고 불렀다.

- 개부심 : 장마에 큰 물이 난뒤, 한동안 쉬었다가 몰아서 내리는 비가 명개를 부시어 냄

- 명개 : 갯가나 흙탕물이 지나간 자리에 앉은 검고 보드라운 흙

 

 

 

서울도심과 성남시가 연계되는 징검다리 부도심으로 발전

구의 북쪽에는 한강의 범람으로 형성된 충적층이 넓게 분포하며, 서쪽과 동쪽에는 탄천과 성내천이 각각 북류하여 한강에 유입한다. 서울시에 편입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서울의 교외지역으로 탄천 연안과 거여동 일대에서는 근교농업이 활발했다.

 

북쪽과 서쪽에는 한강과 탄천이 흐르며, 그 연안에 비교적 넓은 범람원이 발달해 있으며, 강남구와 경계를 이루로 동쪽은 성내천을 따라 난 강동대로와 풍납로를 경계로 강동구와 접해 있으며, 남동쪽으로 하남시·성남시와 경계를 이룬다. 그 사이 탄천과 성내천 사이에는 잠실과 그 배후지역이 연결되어 있고 작은 구릉지대에 주택지가 발달하였다.

 

1963년서울시에 편입되기 전까지는 한적한 농촌이었으나, 서울시의 폭발적인 인구증가로 발생한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잠실 일대에 아파트단지를 조성하여 서울도심과 성남시가 연계되는 징검다리 부도심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범람이 잦았던 한강 연안의 풍납동·신천동·잠실동 일대에서는 예로부터 논농사와 함께 원예농업이 성했고, 진흙으로 그릇과 벽돌을 굽는 일이 번성했다. 1960~70년대에 서울의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잠실 일대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를 조성함에 따라 변화되었다.

 

 

 

70년대 강남권 개발에 따른 가락·잠실지구 구획정리사업

1974~82년 잠실지구(잠실동·신천동·송파동)

1982년 가락지구(가락동·문정동·방이동·오금동·거여동·마천동·둔촌동·성내동)

1980년 지하철 2호선 개통

1985년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 롯데월드 등이 있어 동남권 사업유통의 중심지

1986년 아시안 게임 및 1988년 서울 하계 올림픽, 잠실종합운동장과 올림픽 공원

2009년 국제 연합 환경 계획(UNEP)이 공인하는 리브컴 어워드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뽑혔다.

2012년 서울시보 제3097호 관광특구 지정고시(2012-58)에 따라 앞으로 롯데월드와 석촌호수, 올림픽 공원을 아우르는 2.3지역이 관광특구로 지정

2012년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시 차오양 구와 관광홍보 협력 위한 MOU 체결

 

 

 

대한민국 최초로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1980년 지하철 2호선의 개통과 바둑판식의 넓은 도로망의 건설, 서울올림픽대회를 치른 잠실·방이동 일대의 경기장 시설, 1985년 가락동 농수산물종합도매시장의 건립과 또 계속되는 아파트단지의 건설 등으로 인구가 계속 증가하였다.

 

교통은 지하철 2호선과 더불어 강북지역을 잇는 잠실대교·잠실철교·올림픽대교·천호대교 등의 교량이 있어 서울도심과 원활한 교통망을 형성하며, 지하철 5·8호선이 계통되어 성남시와 직결되고 있다. 잠실대교, 잠실철교, 올림픽대교는 강북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수단이며, 올림픽대로, 올림픽로, 송파대로, 풍납로, 가락로 등이 연계되어 있다.

 

 

 

김구 1649(인조 27)~1704(숙종 30)

김상헌 1570(선조 3)~1652(효종 3)

서거정 1420(세종 210)~1488(성종 19)

어효첨 1405~1475

오달제 1609(광해군 1)~1637(인조 15

윤집 1606(선조 39)~1637(인조 15)

이집 1314(충숙왕 1)~1387(우왕 3)

조운휼 1332(충숙왕 복위 1)~1404(태종 4)

최명길 1586(선조 19)~1647(인조 25)

홍익한 1586(선조 19)~1637(인조 15)

 

 

 

 

   

 

또한 가락동 농수산물종합도매시장과 잠실의 대형 호텔·백화점·쇼핑센터 등의 건설은 대단위 유통단지를 이루었으며, 잠실역 일대는 체육·오락·업무·주거 단지가 집합된 쇼핑문화의 중심지 구실을 하고 있다. 서울올림픽대회가 개최된 잠실동의 종합운동장 시설과 방이동의 올림픽공원을 중심으로 올림픽경기장 일대는 새로운 관광지로 부각되고 있다. 그리고 한강 본류가 인공호수 모습으로 남아 있는 석촌호수 주변에는 서울놀이마당·롯데월드, 방이동 일대에는 사이클·역도·펜싱·체조 경기장과 올림픽공원이 1986년에 개장되어 새로운 관광명소로 부각되고 있다.

 

 

 

가든파이브

롯데월드

문정로데오거리

방이습지

석촌호수

성내천

성내천 물놀이장

올림픽 공원

잠실종합운동장

한성백제문화제

백제고분제

송파백중놀이

송파씨름

송파청춘극장

송파새싹극장

가락시장

오금공원

어린이공원 www.isafeschool.com

근린공원

한성백제박물관

몽촌토성역사관

서울올림픽기념관

롯데월드 민속박물관 http://www.lotteworld.com/Family_museum/main.asp

삼성어린이 박물관 http://www.samsungkids.org/

오카리나박물관 http://cafe.daum.net/OcarinaMuseum

한국광고박물관 http://admuseum.kobaco.co.kr/

미술관/전시실/갤러리

구립예송미술관

구립갤러리수

구청작은갤러리

올림픽공원내 소마미술관

한미사진미술관

아르스갤러리 http://www.arshall.co.kr/2009/main.html

황진현미술관

청아갤러리 http://www.gallerychunga.com

송파청춘극장

샤롯데시어터

서울놀이마당 전통문화예술공연

수요무대

석촌호수 수변무대 토요음악회

성내천 물빛음악회

올림픽공원 수변음악회

한성백제문화제

석촌호수 벚꽃대축제

송파어린이 문화회관

삼성어린이 박물관

마천시장

마천중앙시장

방이시장

석촌시장

새마을시장

풍납시장

문정로데오거리

 

 

 

 

송파명소

 

 

 

 

올림픽공원

몽촌토성지역을 중심으로 한 6개의 경기장으로 구성.몽촌토성과 주위 녹지를 조성하고, 1986년에 올림픽 회관과 5개의 경기장(체조.역도.펜싱.테니스.벨로드롬)을 건립한 후, 1988년 수영경기장·조각공원을 확충하여 서울 올림픽 대회를 개최했다. 체조.펜싱 경기장은 태양광선을 10까지 투과할 수 있는 특수 패브릭 천장과 채광 정도에 따라 조명을 자동 조절할 수 있고, 관람석의 규모도 조절할 수 있도록 특수설계가 되어 있다. 역도경기장 외벽은 반투명 파이버 글라스 패널을 사용하는 등 현대적 건축미가 돋보인다.서울 올림픽 공원은 백제 도읍의 고대유적지인 길이 2,285m에 이른 몽촌토성(사적 제297)을 발굴.복원해 조성했다. 공원 내에는 서울 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세계평화의 문', '서울의 만남', '영광의 벽'을 비롯해 초기 백제시대 유물이 전시된 몽촌역사관이 있으며, 66개국의 세계적인 현대조각·조형작가에 의해 제작된 200여 개의 조각이 전시되어 있다. 그밖에 19909월에 개관된 서울 올림픽 파크텔에는 제24회 서울 올림픽 대회의 이모저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서울 올림픽 기념관이 있다. 올림픽 공원은 역사.예술.문화.스포츠.레저를 함께 접할 수 있는 산 교육의 장으로 스포츠 교실 등 생활체육공간과 문화.예술 등의 공연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한성백제박물관 http://baekjemuseum.seoul.go.kr/

 

석촌호수 www.lotteworld.com

현재의 석촌호수 북쪽 잠실벌은 서호의 남쪽에 나룻터가 한강이었으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토사가 쌓여 인공섬이 생기면서 광진교밑에서부터 잠실야구장까지 지금의 석촌호수를 지나는 송파강과 신천강을 이루는 샛강이 생기게 되었다.1969년 한강본류의 하상 정비 개발에 착수하면서 이 강을 매립하였으나 일부는 남겨 놓았고, 1980년대초 이 호수를 정비하여 공원화하였다.송파나루공원은 송파대로가 개통하면서 동서로 같은 모양의 동호, 서호로 나누어져 있으며, 호수와 공원으로 조성된 이상적인 형태의 공원으로 조깅코스 및 산책로가 설치되어 있어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성내천

성내천은 마천동, 오금동, 풍납동을 관통하여 한강으로 흐르는 하천.

송파가 '물의 도시'로 거듭나게 된 데에는 성내천의 변화가 한몫을 했다. 2000년부터 시작한 복구작업으로 자연형 하천으로 서서히 탈바꿈하면서 벌과 나비가 돌아오고, 새들과 너구리가 찾아왔다. 또 맑은 물에서만 사는 다슬기가 서식하게 되자 성내천을 찾는 이들에게 자연을 관찰하는 즐거움을 주었다. 성내천에는 왜가리 등 36종의 조류, 참붕어 등 7종의 어류, 무당벌레 등 곤충 126종이 어우러져 살고 있다. 성내천은 아름다운 벽천 분수대와 항아리형 풀장이 조성되어 도심 속 피서지로서 한여름에는 1만여 명이 즐겨 찾는 명소로 2009년 국토교통부 주최 '한국의 아름다운 하천 100'에 선정되기도 한 명실공히 송파의 보물이다.

 

롯데월드 http://www.lotteworld.com/

면적 0.13, 연건평 0.58로 면적은 올림픽 메인스타디움의 2, 연건평은 장충체육관의 60배에 이른다. 호텔 롯데월드와 백화점을 비롯해서 쇼핑몰·패션가·재래식시장·수영장·아이스링크·체육센터·클리닉센터, 놀이공간인 롯데월드 어드벤처, 전통문화·역사공간인 민속관, 석촌호수에 떠 있는 놀이섬인 매직아일랜드, 예식장, 문화센터, 각종 식당가 등이 있다. 쇼핑에서부터 각종 오락과 레저·스포츠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의 서비스를 일시에 공급받을 수 있는 다목적형 종합생활공간

 

방이습지

 

잠실종합운동장 http://stadium.seoul.go.kr/reserve/reserve_01_00.html

지하철 2호선이 통과하고 있는 강남의 교통요지로서 총부지 402,816에 올림픽주경기장, 야구장, 1수영장, 2수영장, 실내체육관 등 대형경기장과 그 외 육상보조경기장을 비롯한 생활체육운영과, 서울시교육청에서 관리·운영하고 있는 학생실내체육관이 있으며, 야외예식을 할 수 있는 넓은 체육공원 등 다양한 경기장 시설이 있다. 경기장의 건설은 1977년부터 시공하여 19849월까지 완공되었으며, 총공사비는 1,025억원이 소요되었다. 특히 올림픽주경기장은 제10회 아시아 경기대회와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의 개·폐회식과 육상·축구 등을 치룬적 있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경기장으로서 외국의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는 관광명소가 되었으며, 최근에는 국제적인 축구경기는 물론, 각종 콘서트를 비롯한 대형경기 및 행사가 개최되고 있다.

가든5 www.garden5.com

가든파이브는 총 6천여개의 점포가 입점하는 초대형 쇼핑몰에 멀티플랙스영화관, 서점, 전시관, 스파시설은 물론 생산시설,기초산업용재판매시설,물류시설,지원시설 등이 총 망라되어 있는 원스톱 문화특구이다.

 

장지천

송파구 4면을 흐르는 성내천~한강~탄천~장치천으로 이어지는 물길 27km 송파워터웨이의 한축으로, 위치가 외지고 유량이 적어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하천을 자연생태하천으로 복원했다(서울외곽순환도로~탄천합류지점) 주변에는 송파명소인 가든파이브가 위치해있으며, 환경친화적인 태양광 가로등과 풍력가로등이 설치되어 있다. 하천둔치에는 붓꽃, 산철쭉 등 야생화와 주민들에게 헌수받은 왕벚나무를 심어 벚꽃놀이 명소로도 사랑받을 것으로 보인다.

 

    

 

몽촌토성와 풍납리토성, 송파산대놀이

문화유적으로 잠실지구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발굴 조사된 석촌동 백제초기적석총과 1976년에 발굴된 방이동백제고분군이 있어 한성백제의 유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2000년에 발굴된 풍납리토성 내부의 유구와 성벽 절단 발굴 조사를 통하여 한성백제의 궁궐 유구로 추정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몽촌토성 유적 또한 백제 초기의 왕성 유구로 추정되고 있다. 이 밖에 삼전도비, 거창신씨묘역, 문화유씨묘역, 충헌김공신도비 등이 있으며, 무형문화재로 송파산대놀이가 있다.

 

 

천호대교 동쪽에는 서울 풍납동 토성 사적 제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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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변에 위치한 초기 백제시기의 토축 성곽으로, 주로 풍납토성이라 불리며 현재의 명칭은 1963년 사적지적 당시 행정구역이 경기도 광주군 풍납리였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원래의 토성 형태는 남북으로 길게 타원형을 이루었으며, 주위는 3.5km, 남북 2km, 동서 1km에 이르렀으나, 한강 쪽의 서벽은 1925년의 홍수로 잘려나가 현재는 약 2.7km가량 남아있다.

 

성벽은 고운모래를 한층씩 다져 쌓은 폭40m, 높이 9~15m에 이르는 거대한 판축(板築)토성으로 동쪽에는 4곳에 출입문으로 여겨지는 흔적이 남아 있다.

 

풍납토성은 을축년(1925) 대홍수때 청동제초두, 과대금구 등 주요 유물이 출토되면서 일제시대부터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추정되는 등 주목을 받아 왔다. 해방이후 1966년 서울대학교가 처음으로 시굴조사하면서 백제시대의 생활면 2개층과 경질무문토기를 비롯한 기원전후~5세기대의 유물을 확인하였다. 이후 1997년 풍납토성의 성벽 실측조사를 실시하던 선문대학교에 의해 재건축공사현장에서 백제토기 등이 다수 출토된 사실이 알려져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긴급발굴조사를 하였다. 이후 3중의 환호유구와 평면형태 6각형에 20평 내외의 집자리 19, 토기가마 1기 및 다수의 수혈유구, 토기, 기와, 철기, ''자형의 대형 건물지인 44호 유구 및 大夫명 토기 등이 조사되어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풍납토성은 그 축조시기와 큰 강을 낀 입지적 조건, 그리고 주변에 고분군과 산성 등이 구축되어 있다는 점 등으로 보아 비슷한 시기의 고대 도성인 낙랑토성이나 고구려 국내성 등에 비견된다. 아울러 당시의 인구 규모나 사회조직, 권력구조 등을 고려해 볼때, 3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거대한 규모의 토성이 축조되었다는 점은 풍납토성이 백제초기 왕성이었을 가능성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백제시대 초기의 토성인 서울 몽촌토성 사적 제2971986년에 복원

서울 몽촌토성은 해발 45m 내외의 자연구릉을 이용하여 축조된 토성으로 경주의 월성(月城)이나 대구의 (達城)과 같은 초기 토성에 속한다. 성의 규모는 남북 730m, 동서 540m로 마름모꼴을 하고 있다. 성안은 다시 낮은 안부(鞍部)를 낀 구릉이 있어서 4개의 구역으로 구분되며 동북쪽으로 이어진 구릉에 작은 외성(外城)이 약 270m의 직선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성벽은 자연 구릉을 그대로 이용하여 일부는 삭토(削土)하거나 성토(盛土)하여 쌓았으며, 서북벽과 동북벽에는 바깥쪽에 1.8m 간격의 목책주혈(木柵柱穴)이 발견되었다. 성의 외곽에는 구릉 아래쪽을 따라 해자(垓字)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 해자는 자연하천을 이용하여 일부를 개착(開鑿)해서 만들었다.

 

성의 북동쪽은 성내천(城內川)이 휘감아 흘러 자연적인 방어선을 이루고 있다. 성안에서는 다양한 유구가 조사되었는데, 한성백제기의 시설물로는 지상건물지 1, 판축성토대지 1개소, 수혈주거지 9기와 저장구덩이 31.방형유구(方形遺構) 2, 적심유구 7, 연못지 2개소 등이 조사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이 3세기 중후반대에 출현하는 토기류이고, 수혈 주거지 일부에서 철도, 철촉 등의 철제 무기류가 소량 출토되었으며, 저장혈에서 뼈로 만든 갑옷 등이 출토되었다. 이 토성은 그 위치, 유물상(遺物狀) 등으로 보아 한성백제기에 군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요한 성곽으로 판단되고 있으며, 이웃한 풍납토성과 함께 백제초기의 왕도(王都)를 구성하는 성터의 하나로 추정되고 있다.

 

 

서울 석촌동 고분군 사적 제243

백제초기부터 475년 웅진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 형성된 백제전기 고분군으로 백제의 매장풍습과 정치.사회.문화 등에 관한 백제사의 여러 가지 내용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표고 20m 정도의 남북 방향의 얕은 뚝 모양의 대지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일제시대 당시만 해도 80기 이상의 고분이 남아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나, 74년 최초 발굴조사시에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3.4.5호 뿐이었다. 그러나 83년 이후 조사에서 여러 적석총(積石塚), 토광적석묘(土壙積石墓), 석곽묘(石槨墓), 옹관묘(甕棺墓), 토광묘(土壙墓) 등의 새로운 유구를 확인할 수 있었고, 그밖에 봉토분(封土墳)이나 즙석봉토분(葺石封土墳), 화장(火葬)유구 등이 발견되었다.적석총인 1호분은 남분과 북분이 결합된 쌍분으로서, 남분은 적석총이며 잔존 석축 내부에서 석곽 4기가 조사되었다.4호분 남쪽에 위치한 2호분은 석축을 축조하면서 점토를 채운 내부에서 목관 1기가 조사되었다.

 

1986년에는 3호분 동쪽 지구에 대한 조사가 실시되었는데, 상층의 토광묘.옹관묘들과 그 아래층에서 대형토광묘 등이 발굴되었다. 이 중 대형토광묘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는 형태의 무덤양식으로, 제일 아래층에 점토층을 파내고 그 안에 8기의 목관을 안치한 특이한 구조의 무덤이다.

 

각 목관에서는 붉은 색과 검은 색이 칠해진 칠기를 비롯하여 토기와 칠기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석촌동 적석총의 상한연대는 4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며, 백제가 공주로 도읍을 옮긴 이후 적석총은 더 이상 축조되지 않았다.구성하는 성터의 하나로 추정되고 있다.

 

 

서울 방이동 고분군 사적 제270

본래 농업에 종사하는 자연부락 뒤 야산에 드문드문 규모는 크나 거의 평평하게 뭉긋한 형태를 하고 있어서 간혹 말무덤이라고 전해 내려오기도 했다. 1975년과 1976년 현장확인 당시에도 민간인 무덤이 30여기나 뒤섞여 있고, 그 중에는 고려와 조선조의 묘지로 사용 돼 왔음을 알 수 있었다.

 

현재 확인된 8기를 중심으로 9천여평을 보호지역으로 공원화 하고, 내부를 복원해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는데, 자연석으로 벽면을 ?? 천정 또한 아취(arch)형으로 처리했으며, 벽화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부장품도 거의 없어졌다. 다만 기원전 5세기 부터 백제 말기 까지 계속되는 묘제를 따랐고 규모도 이쯤 크니 백제계의 왕이나 왕실에 가까운 상류층의 분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 일대에서 선사시대 주거지에서나 볼 수 있는 노지(爐地)가 나오고, 석상, 석검의 파편, 백제시대 토기등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오랜 동안 문화의 터전을 이루었을 것으로 짐작 된다. 황혈식 석실분인 제1호분은 백제중기의 도읍지였던 공주의 송산리 제5호분과 그 구조형식이 흡사하여 방이동 고분군의 구조형식이 공주고분으로 이어졌음을 추측하게 한다. 이 고분군은 가락동, 석촌동 고분과 함께 한성백제의 풍습을 알 수 있는 문화사적으로 큰 의의를 지닌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송파동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사적 제101)

삼전도비는 이곳 지명을 딴 것으로 원명은 대청황제공덕비이다. 이 비는 병자호란 3년 뒤인 인조 17(1639) 12월에 청나라의 강요에 따라 조선에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거짓표현을 써서 한강변 삼밭나루터, 항복 당했던 자리에 세워졌던 치욕의 비이다. 그후 청일전쟁후 고종 32(1895)에 이 비를 강물속에 쓰러뜨렸으나 일제 강점후(1913)에 일제가 우리민족이, 다른민족에게 예속되어 왔던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시 세워 놓았다. 19458월 광복이 되자 이 비를 지역주민들이 땅속에 매몰하였다. 1963년에 홍수로 그 모습이 드러나자, 문교부에서 원위치보다 조금 동남쪽인 석촌동으로 옮겼다. 1980년대 송파대로 확장 시 주택가내 공원(석촌동289-3)에 세워져 있던 비를 원 위치 고증을 하고 문화재청의 협의 및 승인하에 현재의 위치(잠실동 47)로 이설을 하였다. 삼전도비는 당초 한강변 나루터 인근에 세워졌으나 치욕의 역사물이란 이유로 수난과 수차례 이설을 거듭해 왔다. 이 비는 3개국 문자가 새겨진 유일한 것으로 전면 오른쪽에는 만주(여진) 글자로 20행이 새겨져 있고, 왼쪽에는 몽고문자 20행이 새겨져 있다. 뒷면은 한문으로 새겨져 있는데 비문은 칠분해서체이며, 이 비의 비문은 이경석이 지었고, 글씨는 당시 명필인 오준, 두전은 여이징이 썼다.

 

 

 

서울 풍납동 토성 사적 제11

서울 석촌동 고분군 사적 제243

서울 방이동 고분군 사적 제270

서울 몽촌토성 사적 제297

서울 삼전도비 사적 제101

충헌 김공(1649~1704)신도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9

거창 신씨 묘역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78

문화류씨모역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9

송파산대놀이 중요무형문화재 제49

송파다리밟기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3

청동기 시대 가락동 유물

민무늬토기 바리(無文土器鉢), 민무늬토기 항아리(無文土器鉢), 가락바퀴(紡錘車) (Spindle Whorl), 숫돌

초기백제 석촌동 유물

짧은목항아리 (短頸壺) 긴목항아리 (廣口長頸口形壺) 작은바리 (小刑鉢)깊은바리 (深鉢刑土器) () 금제달개 (金製瓔各) 옥을 갈던 돌 (玉刑石) 금제고리 (金製環) 철제낫 (鐵鎌) 투겁도끼 (鐵斧) 돌추 (石錘)

초기백제 가락동 유물

검은토기 (黑色土器短) 둥근밑항아리(圓低) 독널(甕棺)

초기백제 몽톤토성 유물

굽접시 (高杯) 세발토기 (三足器) 계란모양토기 (卯形土器) 둥근밑항아리 (圓球壺) 계란모양토기 (卯形土器) 원통형그릇받침 (圓筒形器臺) 굽단지 (臺附小壺) 뼈로 만든 비늘갑옷 (骨製甲) 중국서진회유전문도기조각 (中國西晋灰釉錢文陶器片) 중국청자 (中國靑磁)접시

비석거리(비선거리)

이건창 영세불망비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

몽촌유허비 부

리도기념비

송파 나루터비

한 유성비

 

 

 

풍납토성 ~ 몽촌토성 ~ 석촌동적석총 ~ 방이고분

올림픽공원 ~ 롯데월드 ~ 아시아공원

탄천 ~ 성내천 ~ 방이습지 ~ 석촌호수 ~ 한강

문정동 로데오거리~가락시장~방이맛골거리~잠실새내거리

한강 ~ 종합운동장~롯데월드~석촌호수~올림픽공원

   

 

 

송파소리길

 

석촌호수 동호(출발) 송파구청앞 평화의광장 성내천 얕은다리 성내8성내4마천동쉼터 성내4거여고가사거리 장지근린공원 장지택지개발지구(통과)장지천입구 탄천합수부 광평교하단 양재천합수부 청담교하단(한강입구) 잠실대교하단 잠실철교하단 성내천제방길 송파구여성축구장 올림픽공원 북2몽촌토성 곰말다리 올림픽회관 평화의광장 송파구청 광장(도착)

    

 

 

 

 

토성산성 어울길

송파자전거 외곽순환도로

마천동(성내 4)올림픽공원아산병원한강탄천훼미리 아파트문정동 가로공원마천동

성내하천길 성내천 자전거도로

성내4,송파소방서 올림픽공원 한강

자연과 어우러진 탄천 자전거 도로

광평교 성남시계, 삼성교 하단 탄천잠수3

낭만의 거리~! 위례성길 자전거도로

올림픽공원 하남시 경계선

도심속의 하이킹~! 석촌호수 자전거도로

   

 

 

 

법정동 기준 13개동, 행정동 기준 26

송파(松坡풍납(風納거여(巨餘마천(馬川방이(芳荑오금(梧琴석촌(石村삼전(三田가락(可樂문정(文井장지(長旨잠실(蠶室신천(新川)

 

 

 

 

 

 

가락동(可樂洞)

가락동의 유래는 확실치 않으나, 원래 가락골이 있은데서 붙여진 이름이라 추정된다. 또 일설에는 조선시대에 가락골을 중심으로 5, 6채씩 띄엄띄엄 마을이 있어 자연부락 이름으로 불리어 오다가 을축년(1925) 대홍수때 한강이 범람하여 송파동 일대가 침수되자, 그 곳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가히 살만한 땅] 즉 좋은 땅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 191431일 경기도 구역확정에 따라 홍이.넘어말.새터말.방죽말.방죽안말.솔모랭이등 자연부락을 합하여 광주군 중대면에 소속시켜 가락리라 하였다.

 

기와집마을 : 62번지 일대로 2호가 있었는데 일제때 문화재 보호에 힘을 기울인 전형필(全鎣弼)이 조부의 묘를 쓰고, 그 묘를 살피기 위해 기와집을 지은데서 붙여진 이름

새터말 : 새로 터를 잡아 집을 지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넘어마을 : 가락골 너머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외촌(外村)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방아골 : 옛날 물레방아가 있었던 마을로 산 70번지 일대로서 옛날 한 노파가 이곳에 살다가 어떻게 잘못되어 죽었는데 이 노파의 원혼이 밤만 되면 나타나 마을사람을 괴롭혔기 때문에 몇 해 가지못해 이곳에 살던 주민들이 모두 떠나 폐동이 되었다고 한다.

흥이마을 : 가락동 40번지 일대로서 옛부터 전해오던 이름

 

거여동(巨餘洞)

거여동의 동명은 거암(巨岩)이란 사람이 살았으므로 거암리라 하던 것이 변하여 [김 리], [겜리]라 하였다. 그후 잔버드리, 개롱리, 뒷말을 병합하여 거여리라 하다가 196311일 서울시에 편입되어 거여동이 되었다.

 

마천동(馬川洞)

마천동의 동명은 이 지역에 있는 마산(馬山)의 이름을 따서 마천리라 하였던데서 비롯된다. 또 하나는 노인들 사이에 전해오는 조선조 임경업 장군이 백마를 얻어타고 마산을 지나다가 백마물이란 곳에서 물을 먹었는데 이 곳은 아무리 가뭄이 와도 물이 계속 나온다고 하여 마천동이라 하였다 한다.

 

문정동(文井洞)

문정동 동명 유래는 병자호란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 가다가 이곳에서 쉬면서 물을 마셨는데, 그 물맛이 매우 좋아 이 마을에 많이 사는 문씨(文氏)성을 따서 문정이라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일설에는 이 마을 지형이 연꽃처럼 생겼다하여 연화동(蓮花洞)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또한 문정동은 조선시대에는 문씨들이 문중을 형성하고 거주한 곳으로 주로 문씨가 많이 살던 제집마을(기와집 마을)과 김씨.이씨가 많이 살던 큰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문정동(文井洞)의 옛지역을 보면

 

두댐이마을 : 옛날 임경업 장군이 태어났다는 마을

헤경마을 : 약 백년전에 석씨(昔氏)라는 노인이 길가에 집을 짓고 낮이면 잡화를 팔고, 밤이면 비워두었다하여 [헛가게 머리]로 불리던 것이 차차 집이 들어서자 이말이 와전되어 헤경머리로 되었다.

 

방이동(芳荑洞)

조선조 12대 인조대왕 14(1636) 병자호란 당시 대왕께서는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가셨고, 청나라 군인들은 이 마을을 거쳐 남한산성으로 진격해 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 마을은 남..북이 산으로 둘러 쌓이고 삼태기안 같이 아늑하고 평화로운 마을이였으며, 마을을 지키는 병장(방이군)들이 있었다. 그래서 산을 기여 올라오는 청병들을 산위에서 활을 쏘고 돌을 마구 던져서 청나라 병장들이 못 올라오게 막어서 결국 다른 곳으로 돌아서 남한산성으로 갔다고 한다.

 

결국 마을의 자체 방이군들이 오랑캐 침범을 막았다. 물론 마을에 피해는 전혀없이 오랑캐들의 침범을 피한것이다. 그래서 그후부터 오랑캐를 막았다고하여 막을 방() 오랑캐 이() 자를 써서 방이골 이라고 불리어졌다. 그러다가 1914년경 마을 서당에 한학을 공부하신 학자분들이 모여서 마을 이름이 글자의 뜻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의논끝에 고쳐진것이 막을 방() 자는 꽃다울 방(), 오랑캐 이() 자는 흰비름 이()로 고쳐서 방이골이 되었다.그 후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방이리가 되었으며, 196311일 자로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성동구 방이동이 되었다.

 

삼전동(三田洞)

삼전동 동명 유래는 이 마을에 유일하게 밭이 셋 있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원래 이곳은 포구로서 서울근교의 5()중의 하나였는데 다른곳에는 조수가 올라왔으나, 이 세 곳에는 물이 밀리지 않아 밭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자연부락 이름은 삼밭게또는 三田渡라 불렸고, ()을 심었기 때문에 마전포(麻田浦)라고도 하였으며 또, 벌판에 옛날 장승을 세웠던 곳이라 하여 장승골 또는 장승벌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이 삼전도는 세종 21년에 신설되었는데 한강나루, 노들나루와 함께 경강삼진(京江三津)의 하나로 진부(津夫)10인이 배속되었으며 이후 삼전도(三田渡) 의 기능이 커지면서 삼전도승이 광진의 나루도 관장하였다.

 

석촌동(石村洞)

이곳에 돌이 많으므로 돌이 많은 마을 곧 [돌마리]라고 하던 것이 한자음으로 석촌동(石忖洞)이 되었다. 현재도 송파동, 삼전동, 방이동, 가락동 일대의 주민들은 석촌동을 [돌마리]라고 흔히 부른다. 돌이 많은 이유는 병자호란때 조선을 침입한 청군이 이곳에 돌을 옮겨다 진터를 만들었기 때문에 돌이 많게 되었다고 전한

 

진텃벌(陣攄坪) : 현재 석촌동 고분이 있는 일대를 말하며 병자호란때 청군이 남한산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진을 치면서 붙여진 이름이며 남한산성 밑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송파동(松坡洞)

송파동의 동명유래는 세가지로 추정된다. 첫째로, 문종 즉위년의 기록을 보면 삼전도보다 연파곤(淵波昆)이 물살이 빠르지 않으니 나루터로 하겠다는 경기관찰사의 요청이 있어, 이때의 연파곤이 [소파곤]으로 변음되었다가 소파리(疎波里)로 된것이 차츰 송파진으로 불리워진 것으로 볼수 있다. 둘째로, 옛날 한강변에 있던 이 마을의 언덕을 중심으로 소나무가 빽빽히 들어차 있어, 소나무언덕 즉, 송파(松坡)라고 칭했다고 한다. 셋째로, 옛날 이곳에 사는 어부가 매일 한강변에 나가 고기잡이를 했는데 하루는 잔잔한 물위에서 고깃배를 타고 낮잠을 자던 중 이곳의 소나무가 서있었던 언덕 한쪽이 패어 떨어지는 바람에 잠이 깨고난 뒤로 이곳을 송파라고 불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신천동(新川洞)

신천동의 동명은 북단에 흐르는 신천(新川)에서 전래된다. , 한강의 작은 줄기가 뚝섬쪽으로 흘러감으로 새내 또는 한자명으로 신천이라 한데서 붙여졌다. 1925년 대홍수로 말미암아 북안의 한지류인 신천이 새로 생김과 동시에 분리되어 섬을 이루었다. 이때 뚝섬과 신천동 사이에 새로 지류가 생겼는데 이를 새내강, 새내를 한자명으로 신천(新川), 신포(新浦)라 불렀다.

 

오금동(梧琴洞)

오금동명은 이곳에 오동나무가 많았고, 가야금 만드는 사람이 살았기 때문에 전래되었다는 설과 병자호란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가는 길에 이 지역의 백토고개에서 잠시 쉬면서 측근의 신하에게 무릎안쪽의 오금이 아프다고 말하자 그후부터 이곳을 오금골이라 부른데서 오금동 동명이 유래 되었다는 설이 있다. 옛부터 오금동지역에는 많는 자연부락이 있었는데 이들을 보면

 

개롱리 : 병자호란때 임경업 장군이 거여동의 투구봉에서 투구를 쓰고, 이곳에서 농을 열어 갑옷을 입고, 마산에서 말이 나와 타고 출전하였다 하여 그 이름이 유래된 마을

오금골 : 오금동으로 불리우는 곳으로 백토고개 앞에 있던 마을

건너말 : 오금골 건너편에 있는 마을

눈머리 : 누에머리로 불리는 마을로 뒷산모습이 마치 누에머리와 같으므로 불리워진 마을

신금리 : 새로 마을이 생겼으므로 오금리에 새로된 마을이란 뜻을 따서 불리였던 마을

아랫말 : 오금골 아래쪽에 있는 마을

안골 : 오금골 안쪽에 있는 마을

웃말 : 오금골 윗쪽에 있는 마을

백토고개 : 오금동사무소 동쪽에 위치, 고개의 흙이 논과 달리 흰 흙이라서 불려짐(이 고개는 깎여져서 평지가 되어 20m30m 도로가 지나가는 사거리가 되었으며 주변에 백토공원이 조성됨)

 

잠실동(蠶室洞)

잠실동은 조선초에 양잠을 장려하기 위하여 잠실도회(蠶室都會)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잠실이라 불리어졌다. 원래 잠실, 신천지역은 한강의 범람원으로 발달했던 부리도(浮里島)에 위치했었다는 설과 자양동과 이어진 반도였다는 설이 있다. 잠실섬은 1930년대만 해도 온 섬에 뽕나무가 무성했으며 1945년 이후 채소밭(땅콩, 우엉, 청참외)으로 변했다가 1971년 잠실섬이 하안남쪽에 연육(連陸)되는 물막이 공사로 인해 육지로 변했다.

 

장지동(長旨洞)

장지동의 유래는 마을이 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또는 잔버들이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자연부락의 명칭을 보면

 

안마을 : 큰 마을이라고도 하며, 장지동 68번지 일대로 약 60여호가 살았다.

뒷마을 : 장지동 104번지

주막거리 : 큰 길가에 주막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10여호가 살았다

잔버드리 : 버드나무가 많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

 

풍납동(風納洞)

풍납동은 이 마을에 바람드리성 즉, 풍납토성(風納土城)이 있으므로 바람드리 또는 풍납리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풍납동의 자연부락 명칭을 살펴보면

 

웃바람드리(上風納里) : 천호대로 주변 일대와 극동시티아파트가 있는 일대

아랫바람드리(下風納里) : 웃바람드리 아래쪽에 있는 마을

자벌말 : 말현재 풍납동 152-154 일대로 벌판에 있던 마을인데서 붙여진 이름, 낮은 산목에 있다하여 흐리목 또는 흘리향(屹里項)이라고 불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