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서울역사문화탐방 제10회차 (12월 2일) [답사]
북촌문화센터 - 계동길 - 중앙고등학교 -
가을동화 촬영지 - 계동 11번지 -가회로 -
가회동 31번지 - 전, 이명박 전세집 - 가회동 33번지 -
정독도서관 - 삼청동 35번지 - 현대미술관 서울관
주 제 : '북촌골목과 길을 걸으며 느끼는 서울 한옥의 공간적 변화와 그 속의 삶'
강 사 : 김영수(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연구교수)
일 시 : 2013. 12. 02(월) 14:00~17:00
준 비 물 : 신분증, 필기도구, 음료수
장 소 : 북촌문화센터 (안국역 3번 출구)
주 의 사 항
- 무선수신기 수량은 교육생 수로 제한되어 있어, 청강생에게는 충분한 양이 지급되지 않습니다. (등록마감 시간인 14:00에 교육생용 수신기 잔여분을 청강생에게 제공)
- 무선수신기 제공 및 탐방지 입장료면제와 관련하여 사전 연락없는 청강생의 참여는 불허합니다.
- 집결지 이외에서의 합류는 불가하오니, 반드시 명시된 집결지로 14:00 까지 늦지 않도록참석 하시기 바랍니다.
- 사전 연락없이 무단 결석의 경우, 차후 동일프로그램 참여에 제한됩니다.
- 청강생은 금주 금요일부터 전화로 접수하셔야합니다.
기타 문의는 02-724-0258 또는 02-724-0197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전통한옥이 밀집되어 있는 서울의 대표적인 전통 주거지역이다. 그리고 많은 사적들과 문화재, 민속자료가 있어 도심 속의 거리 박물관이라 불리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이름에서 '북촌(North Village)'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진 이곳은, 이름도 정겨운 가회동과 송현동, 안국동 그리고 삼청동이 있다. 사간동, 계동과 소격동 그리고 재동에는 역사의 흔적이 동네이름으로 남아 수백년을 지켜온 곳이기도 하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사회, 경제상의 이유로 대규모의 토지가 소규모의 택지로 분할되었으며, 지금 볼 수 있는 어깨를 맞댄 한옥은 1930년도를 전후하여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한옥형식의 변화는 도심으로 밀려드는 인구들로 인해 고밀도화 되어가는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조선시대로부터 근대까지 이어지는 유적과 문화재들은 이 지역을 찾는 이들에게 이 지역의 역사를 이야기해주고 있다.
북촌지역의 가장 큰 특성은 지형과 물길이라 할 수 있다. 북촌의 지형은 남쪽이 낮고 북쪽으로 갈수록 경사가 심해지면 네 곳의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다. 물길은 계곡을 따라 흐르며 길들은 물길과 나란히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길의 형태는 물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남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북촌의 주요 남북가로를 이루고 있는 삼청동길, 가회로, 계동길, 원서동길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양의 중심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자리잡고 있고 북악과 응봉을 잇는 산줄기의 남사면에 위치하고 있어 지리적으로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는 북촌은 예로부터 권문세가들의 주거지로 자리매김 해왔다. 1906년 호적자료에 따르면 북촌 전체인구 10,241명(1,932호) 중 호주의 신분에 따른 구분에서 양반과 관료가 43.6%를 차지하고 있어 권문세가들의 주거지로 양반들의 주택들과 관료들의 집들이 중심을 이루는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권문세가들의 주거지로서의 북촌의 위상은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이어져 박영효와 김옥균 등 개화파들과 민대식(민영휘의 아들) 등 여흥민씨 세력들이 북촌에 많이 거주하였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거주지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때 도시로의 인구집중 현상은 서울의 주택난을 가중시켰고 이러한 주택난에 따라 민간에 의해 진행되는 구획형 개발이 나타났다. 주택의 매매를 통해 이윤을 얻고자 하는 주택경영회사들이 등장하면서 1912년 이후 주택난으로 인해 중대형 필지의 분할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한옥들이 급속하게 건설되었다. 현재 북촌의 대표적 한옥밀집지역인 가회동 31번지, 11번지, 삼청동 35번지 일대 등도 모두 이때 주택경영회사에 의해 집단적으로 건설된 한옥주거지들로서 대규모로 건설된 후 분양되는 방식으로 공급되었다. 이 시기 건설된 한옥들에는 유리와 타일 등 이전에 쓰이지 않던 새로운 재료가 사용되었고 평면이 일정부분 표준화되었으며 가로체계 등과 함께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이전의 한옥과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한옥 주거지는 해방이후 1960년대 초반까지 지속적으로 건설되어 학교 및 공공시설로 남은 몇 개의 대형부지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지역이 한옥들로 채워졌다.
1970년대 : 학교이전과 북촌경관의 변화
1960년대 후반기부터 1970년대 전반기에 걸쳐서 시행된 영동지구 개발사업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강남개발이 이루어짐에 따라 강북지역의 인구가 강남으로 대거 이동하면서 강북지역의 학교들도 강남지역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1976년 경기고가 이전하자 그 건물은 정독도서관으로 이용되었고, 1978년 휘문고가 이전하면서 1983년 그 자리에 15층의 현대건설사옥이 신축되었으며, 창덕여고가 1989년 이전한 뒤에는 헌법재판소가 들어섰다. 학교가 이전하면서 신축된 대규모 시설들은 북촌지역의 경관을 크게 바꾸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1980년대 : 경직된 한옥보존, 북촌길 개설
학교 이전지 개발에 따른 변화가 확산되면서 한옥의 보존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76년 민속경관지역 지정 논의 이후 1983년 제4종미관지구 지정으로 본격적인 한옥보존정책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한옥보존정책은 주민들과의 논의나 합의없이 행정주도로 시행된 것이며, 한옥을 문화재와 같이 엄격하게 규제하는 방식이었고, 또한 북촌길을 확폭하면서 많은 한옥들을 철거하는 등 이중적인 행정운영으로 주민들의 불만을 가져왔다.
1990년대 : 한옥멸실 및 다세대 건축 확산
주민들의 계속되는 건축기준 완화요구에 따라 서울시는 1991년 5월 주택의 경우 1층으로 규제하던 건물높이를 10미터 이하(또는 3층 이하)로 완화하였는데, 이를계기로 다세대 주택의 신축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후 1994년에는 경복궁 주변의 10미터 고도제한을 16미터로 완화하고 최대 5층까지 건축을 허용하면서 원서동을 비롯한 북촌 전역에서 한옥철거 후 다세대 주택건설이 확산되어 북촌경관이 급속히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2000년대 : 북촌 가꾸기를 위한 새로운 시도
급속도로 진행되는 한옥멸실과 다세대주택의 신축 등으로 북촌경관이 변해가고 주거환경도 악화되어가자 1999년 주민조직인 '(사)종로북촌가꾸기회'의 요구로 서울시정개발연구원에서는 주민들과 전문가, 서울시와 더불어 새로운 북촌 가꾸기 정책을 수립하였다. 북촌의 보전과 관리를 위해 기존의 일방적 규제와는 달리 주민들의 자발적 의사에 기초하는 한옥등록제를 근간으로하고, 현대적 생활요구를 수용하면서도 한옥 고유의 아름다움이 유지되도록 한옥수선을 유도, 지원하고 관리하고자 하였다. 또한 주민들의 적극적 참여와 활동으로 마을의 환경을 개선해가고, 거주지로서의 매력을 증진시켜가는 과정을 통해 북촌을 가꾸어 가고자 하는 것으로 2001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촌은 백악과 응봉을 연결하는 산줄기의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어 예로부터 풍수지리적으로 가장 좋은 곳이었다. 그리고 북쪽으로 삼청공원과 백악산이 펼쳐져 있어 도심에서는 보기 드문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북촌은 북쪽이 남쪽보다 높아 겨울에 따뜻하고 배수가 잘 될 뿐만 아니라 남쪽은 넓게 트여 있어 남산이 보이는 좋은 전망을 갖추고 있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계곡의 깊이가 깊어지고, 남쪽은 북쪽보다는 비교적 완만한 지형을 유지하고 있다.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의 율곡로와 삼청공원으로 둘러싸인 가회동, 계동, 삼청동, 원서동, 재동, 팔판동 일대(1,076,302㎡)를 말하며 현재 역사문화미관지구로서 제1종 일반주거지역 도시계획을 수립 중에 있다.
북촌주변은 후면에 해발 463미터의 백악산과 삼청공원이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에는 조선시대 정궁인 경복궁(사적 제117호)이 있고 동쪽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창덕궁(사적 제122호)이 있다.
북촌 지역이 모두 한옥으로 이루어져 있던 1960년대와 달리, 1990년대 이후 급속하게 들어선 다세대가구 주택 때문에 많은 수의 한옥이 사라졌지만, 일부지역은 양호한 한옥들이 군집을 이룬 채 많이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가회동 31번지와, 33번지 일대 그리고 가회동 11번지 일대는 대표적인 한옥밀집지역이다.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위치한 조선시대 양반들의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었던 유서 깊은 지역이다.
북촌지역의 역사적 자료는 사적5곳, 서울시 민속자료 4곳, 유형문화재 3곳, 문화재자료 1곳 이외에 계동길, 석정보름우물과 광혜원터 등이 있고 우리나라 최초의 목욕탕인 중앙탕 등 흥미로운 장소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부터 형성되었던 옛길과 물길의 흔적이 남아 있고, 1900년 이후부터 급속하게 형성된 한옥군 등 많은 자원들이 분포되어 있다.
1750년 도성도, 1892년 수전전도, 1927년 경성시가도, 그리고 2000년 이후인 현재 지도까지를 살펴보면 계동길, 가회로, 삼청동길, 창덕궁길 등이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많은 역사유적들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자원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외에도 경복궁과 마주하고 있는 삼청동길 주변에는 많은 갤러리가 늘어서 있고, 화동길과 더불어 각종 먹거리 자원과 특색 있는 카페가 자리잡고 있으며, 원서동에는 전통 기능의 보유자 및 예술인들이 모여 살고 있다. 최근에는 건축가, 미술가들이 북촌의 역사성 속에 함께 하고자 북촌 내부에 작업실과 사무실 등을 개설하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들은 북촌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와 내용을 발전시키는 하나의 현상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의 상류주거지에서 1930년대 한옥주거지, 그리고 1980년대까지의 한옥보존지구를 거쳐 2000년대 북촌은 현대와 전통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발전하고 있다.
기존의 전통한옥 공간에 현대적인 건축요소를 가미하여 모던한 세련미를 살리는 한편, 한식집, 한복집, 전통공방 등 기존의 정형화된 내용을 벗어나 카페, 레스토랑, 부티크, 갤러리 등이 한옥의 껍질을 입고 들어서기 시작했다.
삼청동을 중심으로 시작된 이 변화의 물결은 점차 북촌 전체로 퍼지고 있다. 북촌 특유의 고즈넉한 공간에 스틸과 유리 등을 이용하여 재해석된 전통한옥 등과 초현대적인 미니멀 건물들이 미묘한 긴장을 이루며 서울의 가장 앞서가는 문화 공간 중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한옥레스토랑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 커플, 아기자기한 한옥카페와 액세서리 상점을 담기 위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젊은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의 모습은 이제 북촌에서 낯선 풍경이 아니다.
조선시대 조성된 상류층 주거지로서 1920년대까지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던 북촌은 1930년대에 서울의 행정경계가 확장되고, 도시구조도 근대적으로 변형되게 된다. 주택경영회사들은 북촌의 대형 필지와 임야를 매입하여, 그 자리에 중소규모의 한옥들을 집단적으로 건설하였는데, 현재 한옥들이 밀집되어있는 가회동 11번지와 31, 33번지, 삼청동35번지, 계동135번지의 한옥주거지들은 모두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대청에 유리문을 달고, 처마에 잇대어 함석 챙을 다는 등, 새로운 재료를 사용한 북촌의 한옥은 전통적인 한옥이 갖고 있는 유형적 성격을 잃지 않으면서, 근대적인 도시조직에 적응하여 새로운 도시주택유형으로 진화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북촌의 한옥은 한옥을 대량으로 건설해야 하기 때문에 목재소에서 공급되는 표준화된 목재를 효율적으로 사용하였으며, 전체적으로 전통한옥의 특성을 유지하고 있으면서, 새로운 조건에 적응하며 새로운 도시주택유형으로 정착되었다.
북촌 한옥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는데, '진화된 구법'과 '장식화 경향'이 그것이다. 낮은 지붕물매, 굴도리, 겹처마, 좁은 주간에 많은 칸수 등 전통한옥과 비교할 때 비록 온전히 품격을 갖추지 못했지만, 북촌한옥에는 한옥의 구성과 아름다움이 응축되어 있다. 당시의 한옥 분양광고에서 볼 수 있듯, 밀도와 익명성에 대한 도시주택으로서의 요구를 반영하며 북촌의 한옥은 당시의 새로운 도시주택유형으로 정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물길 따라 이루어진 북촌
과거 북촌에는 북쪽의 능선에서 남쪽으로 전개되는 구릉지를 따라 몇 줄기 물길이 흐르고 있었다. 이 남북방향의 물길들은 서울의 주요 젖줄 중의 하나로 잿골, 맹현골, 재생원골, 원골 등과 같은 옛 지명에서 보듯, 각 동네는 물길과 물길 사이의 능선을 경계로 좁고 길게 형성되었다.
경복궁 동쪽 담장을 따라 흐르고 있는 제법 큰 하천인 중학천의 좌우로 삼청동, 사간동, 소격동이 있다.
다시 그 동쪽에 작은 두 물길 주변으로 화동과 안국동 송현동이 있다. 가회동에서 운현궁 앞으로 흐르는 가회동 물길 역시 제법 수량이 풍부한 하천이었다.
가회동 물길과 나란히 계동 물길, 원서동 물길이 흐르고 있는데, 원서동 신선원전에서 시작해서 창덕궁 담장을 따라 흐르다가 창덕궁 내부를 지나 와룡동으로 흘러들어가는 물길 역시 중요한 하천중의 하나였다.
이들 북촌의 물길들은 마을의 인구가 늘어나고 도시가 현대적으로 개발됨에 따라 메워져 도로로 바뀌었지만, 물길의 기억은 여전히 마을의 옛 이름으로 남아있다.
골목길이 가지는 의미
북촌의 한옥 사이사이로 실핏줄처럼 얽혀 있는 골목길들은 한옥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성'이 담긴 생활공간이다. 한옥에서의 생활은 담장 안쪽에서 뿐만 아니라 담장 밖 골목에서도 여전히 일어난다. 골목은 빨래를 널고, 곡식이나 고추를 말리고, 아이들이 뛰노는 또 하나의 마당인 동시에, 이웃과의 담소가 오가고, 동네 노인들이 어울리는 마을 공유의 공간이다.
한편, 한옥동네를 방문하는 사람에게는 서울 시민이 함께 공유할 도시경관이 된다. 작은 한옥들이 군집하여 만들어 내는 골목의 풍경이 가지는 아름다움은 서울의 대표적인 역사경관으로서 가치를 가진다.
곳곳마다 마주치는 옛 기억, 북촌 골목길
조선시대 '화기도감터'와 '성삼문선생 살던 곳'이란 대리석 비문 두개를 확인하고 골목으로 들어서면 화동 골목길이 시작된다.
물이 흐르듯 가지에 가지를 친 미로와 같은 골목길, 마주 오는 두 사람의 어깨가 닿을 듯, 좁아지는가 하면 어느새 우마가 지나다닐 만큼 넓어진다. 차가 들어올 수 없어 온전히 사람이 주인인 이 골목길은 이제 흔치 않은 풍경에 대한 기대로 남아있다. 골목길, 경사진 계단 가에 내놓은 소박한 화분 두엇에 북촌 골목길의 정감이 느껴진다.
삼청동길과 사간동길
은행나무 그늘진 굽은 길을 따라 소복이 들어선 갤러리와 아트샵, 까페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고 있다.
복정길
방긋 웃고 있는 목욕탕의 굴뚝을 향해 올라가면, 빼곡한 한옥들의 지붕과 경복궁, 인왕산, 청와대의 조망이 펼쳐진다. 이 언덕길이 복정길인데, 복정(福井)은 예전에 이 곳에 있던 우물이다. 이 우물은 조선시대에 궁중에서만 사용했는데, 대보름에 이 물로 밥을 지어 먹으면 일년 내내 복이 따른다고 해서 일반인에게도 물을 길을 수 있게 했다고 한다.
감고당길
풍문여고에서 돌담을 따라 덕성여중고를 거쳐 정독도서관까지 이르는 길로, 길게 줄이 늘어선 분식점, 문방구 등이 교육길의 분위기를 더한다. 이곳은 우리나라 근대 역사의 긴장이 넘실대던 곳이다. 풍문여고에는 안동별궁이 있었으며, 이웃한 덕성여고에는 안동별궁에 불을 지르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서광범의 집이 있었다. 덕성여중은 3.1운동을 모의했던 천도교의 중앙 본부가 자리했던 터이다.
삼청공원
북악산과 이어지는 산속의 공원으로, 수백년 된 소나무의 울창한 숲,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과 약수터가 싱그럽다. 공원 안에는 서울의 옛 성곽과 성곽의 북문이었던 숙청문, 고려의 충신 정몽주와 그 어머니의 시조비 등이 남아 있어서, 자연과 더불어 역사의 정취를 함께 느낄 수 있다.
기기국 번사창 |시도 유형문화재 제51호, 삼청동 28-1 금융연수원 안
조선시대 말 근대식 무기를 제조하기 위해 설치한 건물이다. 벽돌조의 건물로 중국과 서양의 건축양식이 절충되어 있다. 번사(飜莎)란 폭발시킬 때, 천하가 진동하는 소리가 나고 대낮처럼 밝은 빛이 난다는 뜻이다.
정독도서관 | 화동 1
이 곳은 사육신의 대표격인 성삼문과 조선말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이 살았던 곳이다. 약 400년의 시차를 두고 조선정치사의 두 거목이 같은 장소에서 정치적인 포부를 키웠다. 그 후 이 자리에 경기중고교가 설립되었는데, 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지금의 정독도서관이 되었다.
경복궁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한 경복궁은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이다. 북으로 북악산을 기대어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넓은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가 펼쳐져 있어, 왕도인 한양 도시계획의 중심이 되었다.
가회동31번지
북촌에서 특히 뛰어난 한옥들이 잘 보존된 지역으로, 키 큰 회나무집을 돌아올라 가면 나타나는 골목길이 정겹다. 이 길에서 한옥 지붕 사이로 펼쳐지는 서울 시내의 풍경은 단연 북촌 산책의 백미이다.
가회동11번지
한옥의 내부를 감상할 수 있는 개방형 한옥이 많은 지역이다. 가회 민화공방, 동림매듭공방, 한상수자수공방 등에서 한옥과 함께 살아 숨 쉬는 북촌문화의 현장을 만날 수 있다.
가회동 이준구 가옥 | 서울시 문화재 자료 2호, 가회동 31-1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개화기 상류계층의 양옥으로 북촌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다. 개성 송악의 신돌인 화강암과 프랑스 기와를 사용한 건물로, 초록색의 박공지붕이 북촌의 풍경에 독특한 인상을 더한다.
가회동 김형태 가옥 | 민속자료 제30호, 가회동 16-8
김형태 가옥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세워진 건물로 추정된다. 안채, 사랑채,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 사랑채는 명성황후와 관련된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가회동 백인제 가옥 | 민속자료 제22호, 가회동 93-1
고종 11년, 한상룡이 세운 집으로 압록강 흑송을 가져다 지었다고 전한다. 크게 행랑채, 안채,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랑채와 안채는 일반적인 서울지방 상류주택들과 달리 한 동으로 이어져 있다. 조선 후기 주택으로 보존상태가 좋고 사랑마당으로 들어서는 대문과 안마당쪽 담의 꾸밈이 눈길을 끈다.
가회동 한씨가옥 | 민속자료 제14호, 가회동 178
조선 후기에서 일제시대 초기 사이에 지은 한옥으로, 행랑대문채와 본채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는 사랑채 부분과 건넌방 부분이 복도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 부분은 왼쪽에 현관과 홀을 내었고 서남쪽에 대청을 두어 정원을 내다볼 수 있게 하였다. 대청 왼쪽에는 온돌방을, 그 앞쪽에는 주인실을 배치하고 툇마루를 돌렸다. 서양과 일본풍의 현대식 생활기능을 도입하여 지은 건축물로 개화기 이후 문화주택의 초기 양식에 속한다.
안국동 윤보선가 | 사적 제 438호, 안국동 8-1
윤보선 전 대통령이 거주한 집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정당인 한국민주당의 산실일 뿐만 아니라, 대통령으로 재직할 당시의 집무실로서, 근대 정치의 중심지였다. 한옥의 양식과 생활의 편리함을 위한 서양식 생활가구와 세부장식이 절충되어 있어 근대 주택의 변천을 엿볼 수 있다.
계동길
현대사옥에서 시작해 중앙고등학교에서 끝을 맺는 소박한 길이다. 등교할 때나 하교할 때, 작은 길을 메우는 교복 입은 학생들의 풍경이 언제나 풋풋함을 더한다. 또한 이 길에는 수퍼마켓, 미용실, 목욕탕, 가게, 분식집 등 소규모의 근린상업 시설들이 즐비해 있어 주민들의 정다운 일상을 엿볼 수 있다.
계동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북촌문화센터를 비롯하여 다양한 박물관 표지와 마주하게 된다. 또한 학교근처의 문방구며 튀김집, 요즘 보기 힘들 옛날 목욕탕과 이발관들 사이로 작은 공방들이 하나둘 생겼다. 한옥을 이용한 게스트하우스들 역시 계동길 주변에 다수 들어서 있다.
계동길에서 한옥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골목은 계동길 안쪽에 있는 작은 골목들이다. 계동길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들어선 벽돌건물 뒤쪽으로 아직까지 많은 한옥들이 남아있다.
계동길에는 많은 역사적 장소가 숨어 있다.
계동 골목 끝에 있는 중앙고등학교는 198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일제 치하 당시 중앙고보 교사로 재직하던 송진우 현상윤 선생 등은 이 학교 숙직실에서 3.1운동을 위한 준비모임을 갖고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드라마 "겨울연가"의 촬영지로 많은 일본인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만해 한용운이 1918년 9월 월간지 유심을 창간했던 유심사터, 중앙고보의 주인이자 동아일보와 고려대학을 세운 인촌 김성수 부자가 살았던 대저택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김성수 옛집도 있다.
중앙고등학교 | 본관-사적 제281호, 서관-사적 제282호,
동관-사적 제283호, 계동 1번지
3.1운동의 거사 준비는 1919년 1월, 동경 유학생 송계백이 중앙고보(중앙고교) 숙직실로 교사 현상윤을 방문해, 교장 송진우와 함께 한 자리에서 동경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알리고 ‘2.8독립선언서’ 초안을 전달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학교의 앞마당에는 당시 모습대로 복원된 숙직실이 3.1운동이 배태된 장소로서 기념되고 있다.
석정보름우물터 | 계동 55번지 앞
돌로 되어 있는 이 우물은 15일 동안은 맑고, 15일 동안은 흐려지곤 해서 보름우물이라고 불려졌다. 외국인 최초의 선교사였던 주문모 신부는 계동에 숨어 살면서 선교를 할 당시 이 우물에서 길어낸 물로 영세를 주었다고 한다.
김성수 옛집 | 계동 128-3
인촌 김성수는 중앙고보의 주인이자, 경성방직, 동아일보와 고려대학을 세운 민족 지도자였다. 김성수의 거처는 3.1운동을 위해 기독교, 천도교계, 불교계가 규합을 합의했던 역사적인 장소였다. 김성수 옛집에는 김성수 부자가 살았던 대저택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북촌문화센터 | 계동길 37(계동 105번지) , 02-3707-8270
서울시에서 운영하고 있는 북촌문화센터는 한옥의 멋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국악, 다례, 천연염색, 매듭공예 등 전통문화 강좌를 운영하고 있으며, 북촌 도보 관광지도 및 전통문화체험 등의 북촌관련 자료를 제공받을 수 있다.
창덕궁길
창덕궁 돌담을 따라 이어지는 이 길에는 각종 공방, 궁중음식연구원, 백홍범가 등 왕실의 일을 돌보며 살아가던 사람들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창덕궁 담장을 끼고 이어지는 창덕궁길은 처음 한옥보존지구가 해지되면서 지어진 다세대 건물들로 한옥골목으로서의 모습이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최근 한옥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전통공방 등의 형식으로 낡은 한옥이 고쳐지거나, 다세대 건물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한옥을 새로 짓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창덕궁길을 걷다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41년간 기거했다는 고희동가옥이 나타난다. 고희동이 직접 한옥의 밑그림을 그려 지은 것으로 알려진 이 집은 한때 철거 위기에 놓였으나, 현재는 서울시가 매입하여 복원이 논의 중에 있다(등록문화재 84호).
창덕궁길의 끝부분에 다다르면 갖가지 전통공방과 궁중음식연구원 등의 교육 및 전시공간들이 위치해 있다. 그리고 궁중음식연구원을 지나 창덕궁 서쪽 담 막다른 곳에 이르면 빨래터를 만나게 된다. 신선원전의 담장과 닿아 있는 이곳은 궁궐에서 나온 물을 이용해 빨래를 했다고 하는 옛날 민가 여인들의 세탁공간이자 놀이공간이었던 장소이다.
신선원전 | 창덕궁 안
신선원전은 조선시대에 역대 국왕의 어진(초상화)을 모셔 둔 궁전이다. 어진은 6.25 전쟁 때, 부산으로 옮겨졌었으나 화재로 인해 불타버려 지금은 볼 수 없게 되었다.
빨래터 | 신선원전 담 아래
창덕궁의 서쪽 담을 따라 걷다가 막다른 곳에 다다르면, 창덕궁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를 볼 수 있다. 궁궐에서 여인이 세수를 하거나 빨래를 할 때, 쌀겨나 조두 등을 사용해서 물이 뿌연 색을 띠었는데, 이런 물에서 빨래를 하면 때가 잘 진다고 해서 이곳이 빨래터가 되었다고 한다.
원서동 백홍범 가옥 | 서울시 민속자료 제 13호 , 원서동 9-5
원서동 언덕 막바지, 비원 담 밖에 있는 이 집은 흔히 ‘장희빈 집터’라고 불리던 곳으로서, 상궁이던 여성이 대궐을 나왔을 때, 기거하던 집이었다.
원서동 고희동 가옥 | 등록문화재 84호, 원서동 9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의 집으로, 그가 죽기 전 6년을 제외하고 41년간 기거한 곳이다. 이 집의 외부는 한옥의 모양이지만, 내부는 양식과 일본식이 적당히 섞여 있는데, 고희동이 직접 한옥의 밑그림을 그려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은덕문화원 | 원서동 129
원불교에서 마련한 이 공간은 북촌의 열린 공간으로서 사사로운 인정과 대화의 방에서 시작해, 생명과 사랑과 원불교의 정신을 잇겠다는 포부로 완성한 곳이다. 한편에 마련한 김지하 시인의 '싸롱 마고'는 차를 마시며 담론을 펼치는 문화사랑방으로 운영된다.
창덕궁
태종5년, 정궁인 경복궁의 이궁(離宮)으로 지은 궁궐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이웃한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이라 불렀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자 광해군 때에 다시 짓고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정궁 역할을 했다.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안국역 → 북촌문화센터 → 가회동 11번지 → 한상수자수공방 → 가회민화공방 → 북촌생활사박물관 '오래된 향기' → 안국동 윤보선가 → 안국역
가회동 31번지
가회동 31번지는 북촌에서 오래된 골목길 중의 하나이다. 1927년 대형 필지였던 것을 1936년 대창(大昌)생업주식회사에 의해 개발되면서 동네가 형성되었다. 지형과 주변상황에 맞춰 한옥이 지어진 동네로, 골목이 교차하는 지점은 +자형의 교차로보다는 삼거리가 주를 이루고 있다.
가회동길에서 돈미약국이 있는 골목으로 꺾어져 길을 따라 걷다보면, 남북으로 뚫린 세 개의 골목길이 가지처럼 뻗어 있는 31번지 골목길이 자리 잡고 있다. 북촌의 가장 대표적인 풍경을 보여주는 곳으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며, 각종 광고의 촬영이 이루어지기도 한 곳이다.
골목길의 양쪽은 모두 한옥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북방향의 골목길은 북사면으로 약간 가파르게 경사져 삼청동 가는 길로 이어진다.
가회동 11번지
'기쁘고 즐거운 모임'이라는 의미의 가회(嘉會)라는 이름처럼 가회동 11번지는 즐거움과 소박한 정취가 가득한 곳이다. 작고 아담한 한옥들이 서로 이야기하듯 마주 보고 있고, 골목길에 아담하게 놓여진 화분들과 담장 너머로 내려진 감나무는 이곳을 찾는 손님들에게 정겨움과 여유로움을 느끼게 해준다. 골목길의 옛 모습이 묻어있는 처마 사이를 걷다 보면 마치 산책하는 즐거움으로 발걸음 하나하나가 가볍기만 하다.
양호한 한옥 군을 이루는 서울의 대표적 한옥주거지인 가회동11번지에서는 또한 동림매듭공방과 가회민화공방. 한상수자수공방 등을 둘러보면서 한옥과 함께 소박함과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있는 그대로의 북촌 문화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삼청동길
산과 물, 인심이 맑고 좋아서 삼청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삼청동!
예로부터 삼청동은 궁궐 옆이라는 지리적 위치로 인해 궁의 꽃과 과일을 담당하던 장원서와 그림을 담당하던 도화서, 궁에 물을 대던 북정 우물터 등 궁과 관련된 중인들의 공간이었다. 세월이 지난 지금도 옛 것과 새 것이 나란히 존재하면서 자신만의 특유한 멋을 자랑하는 갤러리, 박물관, 카페 등이 즐비한 삼청동길은 서울 도심 속에서 매우 이색적인 매력을 풍기는 곳이다.
2차선의 좁다란 도로로 항상 차량의 행렬이 멈추지 않고 있는 삼청동길 이지만 양 옆 인도에 즐비한 이색적 공간들로 계절의 멋과 독특한 정취를 즐기기에 충분한 곳이다.
북촌한옥2길
이 지역은 옛 가회동 33번지 지역으로 1934년 건설업체 건양사에 의해 일시에 개발된 도시한옥주거지이다. 북촌한옥2길은 남북으로 긴 필지였던 이 지역에 많은 한옥을 짓기 위해서 U자형으로 낸 골목이다. 이렇게 길을 내고 길을 따라 좌우에 한옥을 지었다. 이 지역의 경사는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으면서 동시에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기 때문에 북촌한옥2길을 따라 걸으면 남북방향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면서 다양한 경관을 볼 수 있다.
이 길에는 31번지 일대를 한 눈에 조망해 볼 수 있는 북촌 4경이 숨어 있는데, 넘실거리는 한옥 기와지붕 사이로 초록색 박공지붕의 가회동 이준구 가옥이 더해져 독특한 풍경을 선사한다. 북촌한옥길에서 진입하면 왼쪽에는 높은 축대를 가진 집들이 있고, 오른쪽에는 나지막한 한옥들이 자리한다. 골목이 U자형으로 꺾이는 부분에는 계단을 두어 언덕 윗집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서쪽에서 돌아내려오는 길은 동쪽으로 올라온 길보다 높기 때문에 왼쪽으로 동네를 내려다볼 수 있다. 끝까지 나오면 가파른 경사의 화개3길과 만난다.
북촌한옥3길
이 지역은 1936년에서 1939년까지 당시 대표적인 건설업체였던 건양사에 의해 개발된 옛 가회동 31번지 지역이다. 거대한 필지였던 이곳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지형에 맞추어 길을 내고 판매를 위한 도시한옥이 건축되었다. 주요도로는 경사방향인 남북방향으로 나는데 이는 대문을 동쪽이나 서쪽에 두어서 남향한 대청과 마주보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또 길들이 만나는 곳은 서로 교차시키지 않아서 사거리가 없고 삼거리들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북촌한옥3길은 이와 같은 남북도로 중 서북쪽의 끝에 있는 길이다. 이 길을 걸어내려 가면서 볼만한 것은 건물이나 길의 형태가 정형적이지 못하고 상황에 맞추어 왼쪽으로 3번 꺾여있는 모습이다. 이런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생기게 된 까닭은 단지개발을 위해 구입한 땅의 가장자리 부분이기 때문이다. 또한, 길을 따라 가다 보면 북촌 7경을 만날 수 있는데, 이 곳에서는 한옥이 주는 고즈넉함과 작은 여유로움이 담긴 소박함을 느낄 수 있다. 골목의 끝에서 만나는 북촌한옥길은 긴 남북길을 따라 가지런히 정비된 도로이다.
정독도서관 화개1길
이 길은 금융연수원 남쪽에서 시작해서 정독도서관 서쪽까지 이어지는 삼청동에서 가장 긴 도로이다. 서쪽이 낮고 동쪽이 높은 경사지의 중턱을 따라 이어진다. 이 길의 서쪽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개발이 진행되었고, 동쪽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개발이 진행되었다. 북쪽에서 시작해서 자동차 2대 폭의 길을 따라 걷게 되면 오른쪽으로 넓게 트인 시야를 통해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다. 길 왼쪽으로는 규칙적으로 경사진 골목이 나온다. 처음으로 길이 꺾이는 곳에는 북촌생활사박물관이 있다. 길 끝부분에서 왼쪽에 갑자기 나타나는 거대한 축대는 정독도서관 담장이다.
화개4길
화개4길은 정독도서관 북쪽에서 남북으로 길게 뻗은 길로 중간에 길 3개가 교차해서 총 8개의 규칙적인 블록을 만든다. 이 지역은 옛 삼청동 35번지 지역으로 주변에서 가장 큰 필지였다. 급한 경사에 바위와 소나무가 절경을 이루던 곳으로 주거지가 들어서기에는 적절치 않은 곳이었지만,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통해 높은 축대를 쌓고 도시한옥주거지를 건설했다.
본격적으로 개발된 시기는 1935년부터 1942년 사이로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개발이 진행되었다. 남북방향으로는 약한 경사를 가지고 있지만 동서방향으로는 급경사이기 때문에 북쪽에서 걸어 내려오면서 볼 때 왼쪽의 건물은 축대 위에 올라서 있어서 계단을 통해 대문간으로 진입하고 오른쪽의 건물은 나지막한 처마선이 시야에 들어온다. 건물의 형태는 남쪽으로 트여있는 ㄷ자형이 제일 많다.
가회로6길
이 길은 차가 다닐 수 없는 매우 좁은 골목길로 북쪽이 낮고 남쪽이 약간 높은 경사를 따라 남북방향으로 나있다. 골목 폭은 자가용이 없던 시대 일반적인 골목 크기를 보여준다. 이 지역은 옛 가회동 26번지 지역으로 가회로 6길은 필지 전체를 관통하는 위치에 만들어졌다.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기 때문에 북쪽에서 남쪽으로 길을 따라 걷게 되면 왼쪽의 집들은 낮은 처마가 이어지고 오른쪽의 집들은 높은 축대 위에 올라서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왼쪽 집 대문은 길에 직접 면해 있지만, 오른쪽 집 대문은 계단으로 축대 높이만큼 올라가야 들어갈 수 있다.
감고당길
감고당길은 아트선재미술관 앞에서 율곡로까지 남북으로 난 길이다. 아트선재미술관에서 출발해서 남쪽으로 걸으면 처음에는 단층 상가지역이 나오고 아라리오 서울과 이화익 갤러리를 지나면서 두 학교를 가로지르는 길이 된다. 왼쪽은 덕성여자고등학교이고 오른쪽은 덕성여자중학교인데 두 학교를 연결하는 육교가 특색이다. 북쪽으로 일방통행인 차도 좌우에는 보도블록을 예쁘게 깔고 벤치를 마련하기도 했다. 학교 담장을 따라 심어진 나무가 가로수의 역할을 해서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도 운치를 더한다. 덕성여자고등학교 남쪽에는 풍문여자고등학교가 이어져있다. 풍문여자고등학교 담장은 사고석을 줄눈을 강조해서 쌓고 기와를 얹어서 맞은편에 자연석으로 쌓은 담장과 대비를 이룬다. 감고당길을 빠져나오면 안국동 사거리이다.
돌계단길
돌계단길이 있는 지역은 옛 삼청동 62번지 지역으로 매우 가파른 경사지에 주거단지를 건설하면서 골목길을 계단으로 만든 것이 특색이다. 이 지역은 1935년에 필지를 분할한 후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서쪽이 낮고 동쪽이 높은 경사에 맞추어 돌계단은 동서방향으로 시작한다. 돌계단길을 오르기 전 마지막 포토스팟인 북촌 8경을 만날 수 있는데, 커다란 하나의 암반을 통째로 조각해 놓은 돌계단 옆으로 아기자기한 화분이 놓인 북촌만의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좁은 계단으로 이루어진 돌계단길은 축대를 쌓고 올라선 집들의 외벽을 따라 굽어있고 계단에서 직접 대문으로 들어가는 부분이 절묘하다. 아래쪽 집들은 한옥의 형태가 개조되어 있고 위쪽은 나중에 지은 벽돌집이 들어서 있다. 이 지역은 높낮이가 매우 커서 동서방향의 계단으로는 윗길에 도달하지 못한다. 계단은 동쪽 축대 아래에서 왼쪽으로 꺾여 다시 축대를 따라 이어져 비로소 삼청동 언덕 중턱의 가장 긴 길인 화개1길과 만나게 된다. 위쪽 계단은 앞면에 푸른색 타일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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