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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유역을 중심으로 6000년 역사와 문화의 발원지, 강동구 江東區

草霧 2013. 11. 16. 14:01

 

빗살무늬토기와 암사동 선사주거지, 구암서원(龜巖書院)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6000년 역사와 문화의 발원지

 

 

강동구 江東區

   

 

 

Gangdong-gu

 

 

 

서울특별시의 동부 외곽지역에 있는 구

암사동선사주거지에서 보듯 선사시대부터 생활의 터전이고 백제의 위례성이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대부분이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龜川面, 1907년에 九川面) 지역으로 한적한 농촌이었다.

 

원래는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에 속했으나 1963년 서울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성동구 관할하에 있다가 1975년 성동구에서 강남구가 분구되면서 이에 속하게 되었다. 1979년 강동구로 분리·신설되었으며, 1988년 송파구가 분구되었다. 구청 소재지는 성내동이다.

 

강동구 일대는 선조 10(1577) 광주부로 승격된다. 이후 현종 8(1667) 현재의 암사동 일대에 구암서원(龜巖書院)이 건립되는데, 이 서원은 숙종 23(1697)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어 크게 성장하나 고종 8(1871)에 실시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허가 되었다.

 

 

 

 

이후 이 서원이 있었던 자리 인근에 서원마을이라는 자연부락이 들어섰고, 2003년부터 시작된 구암서원 복원공사는 2010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강의 남동쪽에 위치해서 강동이란 이름을 얻었다.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에서 발원한 성내천(城內川고덕천(高德川) 등이 한강으로 합류되며, 그 연안에 넓은 충적지를 이루어 땅이 비옥해 밭농사·논농사 지역으로 이용되어 왔다.

 

조선시대 때 광주군 구천면 지역엔 굽은다리,벽동말,차재말,뱀성말,당말,은호말 등이 존재했다. 특히 암사동은 점촌(店村)이라 하여 도자기 생산지로 유명했는데, 1925년 홍수 때는 옹기를 굽는 이 일대가 모두 물속에 잠겼던 일도 있었다.

 

광복을 전후해서는 성내동을 중심으로 벽돌·옹기·기와·토관·화분 등을 만드는 대규모의 연와공장이 자리 잡기도 하였다.

 

 

암사동의 점촌은 백제시대 궁궐에서 쓰일 그릇을 구워냈던 곳으로 유명

북쪽으로는 한강을 경계로 하여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 동쪽으로는 경기도 하남시, 서쪽으로는 송파구, 강남구와 이웃하고 있다.

 

한강으로 북류하는 고덕천 연안에 넓은 충적지가 발달하여 예로부터 벼농사와 근교농업이 발달했다. 또한 흙을 이용한 산업이 일찍부터 발달해 암사동의 점촌은 백제시대 궁궐에서 쓰일 그릇을 구워냈던 곳으로 유명하다.

 

8·15해방을 전후하여 성내동을 중심으로 제일연와공장·광성요업사·한일연와공장 등이 옹기·기와·토관·화분 등을 만들면서 1970년대 초반까지 호황을 누렸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준공업지역이었던 성내동에 강동구청·강동경찰서 등 공공시설이 들어서면서 업무 및 주택 지역으로 바뀌었다.

 

 

 

 

1972년에 천호토지구획정리사업(천호동·길동·성내동·둔촌동·명일동 일부)을 필두로 하여 1976~80년에 암사지구, 1981~84년에 강동구청 주변정비, 1982~85년에 고덕지구에서 실시되었다. 광진교는 심한 파손으로 1996년 철거, 1976년 천호대교 특히 천호대로·풍납로(風納路선사로(先史路)의 교차 사거리인 천호동 4거리는 천호대로·선사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일자산 허브 천문 공원

길동자연생태공원

천호동(해공)공원

일자산해맞이 광장

강동예찬시비

빗살무늬토기형조명탑

 

 

 

 

빗살무늬토기와 암사동 선사주거지, 구암서원(龜巖書院)

강동구에는 조선시대에 건립된 신도비(죽은 사람의 일생을 기록한 비석) 가 많이 남아 있는데, 대표적으로 연산군 2(1496) 3월에 건립된 광릉부원군 이극배의 익평공신도비, 헌종 12(1846) 건립된 옥천부원군 유창의 유창신도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96) 등이 있다.

 

 

 

서울 암사동 유적 (岩寺洞 遺蹟)(http://sunsa.gangdong.go.kr) - 사적 제267

광주이씨광릉부원군파묘역 (廣州李氏廣陵府院君派墓域)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0

문희공유창묘역(文僖公 劉敞 墓域)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6

해공 신익희 선생 동상

도미부인상

바위절터

구암서원터

바위절마을 호상놀이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10

나전칠장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1

 

 

강동구 암사동 산1-1번지에 위치한 바위절터

 

 

 

 

현재 하남시 미사동에서 천호대교로 오는 올림픽대로변 암사수원지 취수장 서쪽의 언덕위에 있다. 이곳에 1989년 서울시가 바위절 터라는 표석을 세우고 삼국시대에 세워졌다고 전하는 바위절 터라고 새겨 놓았다. 이 절이 강변 바위에 위치했으므로 바윗절이라고도 불렀는데 조선초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 에 보면 백중사(伯仲寺)는 하진참(下津站) 동쪽에 있다고 했으므로 백제시대 백중사였음을 알 수 있다. 바위절은 어느 때 훼손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에 구암서원(龜巖書院)이 세워졌다. 백중사(伯仲寺)에 대하여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시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해지고 있다.

 

 

강동구 암사동 산 1-1번지에 위치한 구암서원

 

 

 

 

조선 중기 현종8(1667)에 건립된 구천면 최초의 사원이다. 이 지역의 유생들은 여기에서 유교적인 학식과 교양을 쌓아 과거에 응시하여 관료로 입신 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배출된 구천면 유생들은 둔촌 이 집(李集)을 향사하고 숙종 때 구암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이집(1314~1387)·이양중·어윤겸(1559~1625) · 임숙영(1576~1623) · 정선근(?~1504) 등이 배향되고 노론의 색목이 강하였다. 유생들은 구암서원 건립을 중심으로 하여 향약을 조직, 유교적 마을 공동체를 조직하였다. 하지만 구암서원은 1871년 고종 때 전국의 서원철폐와 함께 사라지고, 1898년 이를 기념하기 위한 유허비가 남아 있을 뿐이다. 원래 구암서원은 삼국시대 바위절터 위에 조성된 것이며, 오늘날 구암정을 건립하여 이를 기념하고 있다

 

 

 

 

 

 

해공 신익희선생 海公 신익희 (1894~1956)

자는 여구(汝耉), 호는 해공(海公). 1908년 한성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1910년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政經學部)에 입학했다. 재학 중 한국 유학생들과 학우회를 조직해 총무·평의회장(評議會長회장 등을 지내면서 학생운동을 벌이고, 기관지로학지광 學之光>을 발간했다. 1913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하여 고향에 동명강습소를 열었으며, 이후 서울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7년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수로 취임했고, 1918년말 부터 최린 · 송진우 등과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했으며, 3·1운동 당시에는 해외와의 연락 임무를 맡았다.

 

1919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해 임시정부 수립과 동시에 내무차장·외무차장·국무원비서장·법무총장·외무총장·문교부장 등을 지냈다. 내무부장 재임중 8·15해방을 맞이해 귀국했으며, 귀국 후에는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는 노선을 달리했으며, 정치공작대· 정치위원회 등을 조직하여 정치활동을 했다. 19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자유신문사 사장, 국민대학 초대 학장 등을 지냈으며,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의장이 되었으며, 지청천(池靑天)의 대동청년단과 합작, 대한국민당을 결성하고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부의장이 되었다가 같은 해 8월 의장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자 의장으로 피선되었다.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과 멀어지기 시작한 한국민주당의 김성수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9년 민주국민당을 결성하고 당 위원장에 취임했다. 1950년 제2대 민의원에 당선되었고, 다시 국회의장에 피선되었다. 이어 제3대 민의원에도 당선되었으며, 1955년 민주국민당을 민주당으로 확대, 발전시킴과 아울러 당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56년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 자유당의 이승만과 맞서 호남지방으로 유세하러 가던 도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2001년 천호동 448-49 마을마당에 강동구청 주관으로 해공신익희선생 동상을 건립하였다.

 

 

 

동방열녀 최초의 표상 도미부인

 

 

 

 

"백제 사람 도미는 민간의 작은 백성이지만 그 아내는 용모가 아름답고 절개를 지키기로 이름이 높았다. 왕이 그 아내를 취하려 하자, 그녀는 계집종을 단장시켜 대신 왕을 모시게 했다. 노한 왕이 도미의 두 눈을 멀게 하고 작은 배에 태워 강물에 띄워 보냈다. 아내가 강으로 달아나 통곡하고 있을때 작은 배 한 척이 뭍에 닿았다. 천성도에 이르러 남편을 만나 고구려로 가 궁핍속에서도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았다.“ 초기 삼국시대의 사화 중에서 '도미 이야기'처럼 부부사이의 애틋한 정과 신의를 담은 이야기도 드물 것이다.

 

이 이야기의 원전은 전설집이 아니라 정식 역사서인 < 삼국사기 도미열전 > 이다. 도미의 아내를 취하려다가 실패한 백제의 제4대 개루왕은 서기 128년부터 166년까지 왕위에 있었으므로, 그 시대의 백제 도읍지가 위례성이었으니 오늘의 강동구와 송파구, 그리고 하남시 일원으로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강동구에서는 이 도미부인의 동상을 천일 어린이 공원에서 200911월 광진교 강동예찬시비 옆으로 옮겨 도미부인의 정절을 기렸다.

 

 

 

이집의 효도와 국청사(國淸寺)우물

옛날 경기도 광주(현 둔촌동)에 이집(李集)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집의 총각시절에 그의 아버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종기가 등에 나서 고생을 했다. 이집은 효성이 지극하여 가난한 살림에도 아버지의 병간호를 위해 정성을 다했다.

 

어느날 아버지 곁에서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에 신선이 나타나, 내일부터 목욕재계하고 국청사 가서 백일기도를 드리라고 하였다. 잠에서 깬 후 이집은 그 꿈이 예사롭지 않은 꿈임을 알고, 이튿날 새벽부터 목욕을 하고 절에 올라 백일기도를 드렸다.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를 드린 것이 거의 백날이 되어가던 어느날, 정에서 기도를 드리고 오는데 무심히 어떤 바위를 바라보니 바위틈에서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바위틈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기 위해 다가가 보니 바위틈 안의 샘에 금붕어 한 마리 있었다.

 

금붕어가 노는 모양을 한참동안 바라다 보다 노는 모양이 신기해서 금붕어를 집으로 가지고 와서 기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밤, 한밤중에 잠이 깬 이집의 아버지는 목이 말랐지만 곤히 자는 아들이 깨지 않도록 갈증을 참았다. 그러나 갈증을 참을 수 없게 되자 금붕어가 들어있는 물을 마셔 버렸다. 그러자 등에 난 종기가 터지면서 피고름이 나고 시원해졌다. 이집의 아버지는 아들을 깨워 금붕어가 들어 있었던 물을 마신 일과 병든 몸의 상태가 호전 되었음을 말했다. 이집의 꿈속에서 나타났던 신선의 말대로 백일기도 를 한 탓에 아버지의 병이 낫게 된 것이었다. 한편 금붕어가 들어있던 물을 아버지가 마신 탓에, 우물물을 재워 넣자 금붕어의 빛깔이 검어졌다.

 

그래서 날이 밝자 마자 원래 금붕어가 있었던 샘으로 거가 물을 떠다 붕어가 들어있는 그릇에 물을 채우니 이상하게도 붕어의 빛깔이 다시 황금색으로 변했다. 이에 금붕어가 들어 있었던 샘물의 영험을 알아보고 샘물을 아버지의 등에 바르자 상처가 서서히 아물기 시작했다. 영험이 있는 샘물로 인해 아버지의 병은 완전히 낳았다. 그 후 이 소문의 꼬리를 물고 널리 퍼지자 각처에서 피부병 환자가 다 몰려 들었다. 이 샘물은 근처에 국청사라는 절의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국청사 우물이라고 불렀다.

 

 

쌀이 나오는 바위

아차산에 대승암이란 조그만 절이 있었다. 이 절의 옆에는 조그만 구멍이 뚫린 바위가 있었는데, 그 구멍에서 하루에 한 줌씩 쌀이 나왔다. 하루에 꼭 한 줌씩 만 쌀이 나왔으므로 죽을 끓여 한 사람이 겨우 연명할 정도였다. 재물에 욕심이 없던 주지스님은 하루에 한 줌씩 나오는 쌀만 가지고 부처님을 공양하며 살았다. 그러나 욕심이 없던 주지스님이 죽은 후 새로 들어온 스님은 하루에 한 줌씩 밖에 나오지 않는 바위가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어느 날 욕심많은 주지스님은 쌀이 더 많이 나오게 하기 위해 바위를 깨뜨려 구멍을 크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쌀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법정동 기준 9, 행정동 기준은 20

성내(城內하일(下一상일(上一명일(明逸고덕(高德암사(巖寺천호(千戶(둔촌(遁村강일(江一)

   

  

 

 

 

 

 

 

 

강일동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일부인데,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하일동이 되었다. 현재 강일동 지역은 1968년 창신동과 숭인동 하재민, 1976년 흥인동 · 서부 이촌동 철거민들이 이주하여 정착한 곳으로, 1971730일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되어 왔다. 서울에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동족 마을 가운데 하나인 강일동의 벌말(평촌)마을은 산신제의 전통을 이어가며 동족마을로 남아 있다.

 

가려울(가래여울, 추탄) : 한강 여울가에 있는 마을로, 가래여울이 있었으므로 가래여울 또는 가려울이라고 부르고, 한자명으로 추탄(楸灘)이라 하였다. 인조때 영의정 오윤겸이 이곳에 살면서 그 호를 추탄이라 하였다.

건너말 : 벌말 건너에 있는 마을

구석말 : 마을이 구석진 곳에 있다.

능골 : 능을 모실만한 곳이라 한다.

두정곡(말우물) : 네모가 져서 구식 말의 모양과 같이 된 우물이 있으므로, 말우물 또는 한자명으로 두정곡(斗井谷)이라 한다.

벌말(큰말) : 마을이 벌판에 있으므로 벌말이라 하며, 마을 중에 가장 크므로 큰말이다.

 

 

상일동

서울의 대표적인 외곽지대로, 전형적인 농촌지역이었다. 강동구 지역의 지질은 예부터 옹기나 벽돌이 만들기에 적당한 좋은 진흙이 많아 성내동을 중심으로 벽돌 · 옹기 · 기화 · 토관 · 화분들을 만드는 공장이 많이 있었다.

 

게내 : 게냇가에 있는 마을 이므로 게내 혹은 한자명으로 해천(蟹川). 게내는 금암산(金岩山)에서 발원하여 가려울로 들어가는 내인데, 게가 많이 있었으므로 게내라 불렀다. 이 게내는 현재 고덕천으로 불린다.

게내안말 : 게내안쪽에 있던 마을

동자골 : 명종때 승려 보우가 이곳에 절을 짓고 동자부처를 모셨다 하여 동자골 또는 동자곡이라 한다.

   

 

 

명일동

고려 성종 11(994)에 이곳에 공용으로 출장하는 관리들의 숙박소로서 명일원을 두어 여행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도와주었으므로 그 이름을 따서 명일원’ · ‘원터골이라 한데 비롯되다.

 

간낫골 : 원터 건너에 잇는 마을

염주골 : 염주사라는 절이 있었던 마을

명일리 : 원텃골

건너말 : 염주골 건너쪽에 있는 마을

샘말 : 원터골과 고덕리에 있는 마을

샛말 : 원터골과 염주골 사이에 있는 마을

큰골 : 큰 산 밑에 있는 마을

행길 : 큰 길가에 있는 마을

 

 

고덕동

본래 광주군 구천면의 일부로, 고려말에 형조참의 이양중의 행적과 관련하여 지명이 유래되었다. 이양중은 이태조의 혁명에 반대하여 이곳에 와서 숨어 지냈다. 태종이 옛 친구의 정을 생각하여 한성부윤을 시켜도 벼슬을 받지 않자 광주로 이양중을 찾아 왔다. 이양중이 평민의 복색으로 거문고를 가지고 와서 임금을 뵙고 술을 마시며 서로 즐겼다. 이에 태종이 이양중의 높은 덕을 생각하여 그의 아들 우생에게 벼슬을 내렸다. 이에 고덕리라 하였고, 또는 변하여 고더기라 하다가 191431일 경기도 구역획정에 따라 가재울, 비석말, 방축말과 동자골의 일부를 병합하여 고덕리의 이름을 그대로 따랐다.1963년 서울 특별시에 편입되어 고덕동이 되었다.

 

가재울(가재골) : 가재가 많아서 붙여진 마을로 가재울 또는 가재골이라 한다.

고더기 : 거덕리가 변하여 붙여진 마을

미역골 : 고덕동에 있는 마을

방죽말(방축종) : 방죽이 있는 마을

비석말 : 세조 때 이조판서 여효첨(魚孝瞻)의 신도비가 있었으므로, 비석말 또는 비석촌 이라 한다.

한우물 : 마을 가운데 있던 큰 우물이 있는 마을

   

 

 

암사동

23번지 일대에는 신라시대에 절이 9개나 있어,구암사라 하였고 속칭 바위절이라 하였으며 그 한자명으로 암사리라 한데서 연유되었다. 광주군 구천면의 일부로, 바위절이 있었으므로 바위절 혹은 암사리라 하였는데, 19143월 경기도 구역획정에 따라 참앞 · 우물골 · 점말 · 새능말 · 섬말 · 갯물 · 볕우물을 병합하여 암사리라 하였다. 현재 암사동의 선사유적지가 있는 강변에는 한강수로의 뱃길에서 배가 쉬어가거나 묵어가던 곳이었다. 당시 이 마을은 구천면내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마을로, 농사를 지었던 사람들도 많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직접 배를 부리거나 배를 부리는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제법 있어서 현금의 유통이 빨랐고 구천면내의 다른 마을에 비해 비교적 부요했다.

 

갯물(갯모루) : (한강) 모퉁이에 있는 마을이므로 갯모루 또는 갯물이라 한다.

넘말(새능말) : 산너머 있는 마을. 인조때 수찬 임숙영(任叔英)의 묘를 크게 썼다.

볕우물 : 백제 온조왕 36(18)에 토성을 쌓고, 볕우물토성이라 하였으므로 볕우물 또는 양정이라 한다.

복지말 : 1957년에 월남 피난민을 위하여 새로 농장을 만들고 복을 받은 마을. 1957년에 이석겸(李錫謙), 김재홍(金在弘) 두 사람이 월남 피난민들을 위하여 위하여 새로 농장을 만들고 복을 받는 마을이란 뜻으로 복지말이라 한다.

섬 말 : 예전에 마을 앞에 못을 파고 섬을 만들었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며, 한자명으로 도촌(島村)이라 한다.

점 말 : 도자기를 만드는 점()이 있었는데 백제시대 때부터 궁궐에 쓰일 그릇을 구워 냈던 곳으로 광주분원과 함께 도자기 생산으로 유명하다.

어묫골(우묵골, 우목골) : 성종 때 직제학 정성근(鄭誠謹)이 부모 묘소에다 여막을 짓고 6년을 시묘하다가, 성종이 죽자 3년을 더 있었으므로 여묫골이 함. 여묫골이 변하여 우 묵골 또는 우목골이라고도 한다.

참 앞 : 하진참(下津站) 앞에 있는 마을이므로 참앞 또는 참전이라 함. ()이란 길을 가다 쉬는 곳으로, 하진참은 광나루에 있었던 뱃참이었다. 육상교통이 발달하기 전까지 서울로 들어오는 모든 물화의 운반이 한강을 통하여 다녔으므로, 이곳에 참을 대게 되었다.

 

 

천호동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곡교리의 일부로, 1936년 광진교를 놓을 때부터 마을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동명은 이곳이 인가 수천호가 살만한 지역이라는 풍수지리설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본래 천호동은 광나루로 인해 형성되기 시작한 도진촌락이다. 광나루는 신라시대부터 이미 북독이라 하여 중사를 행하였고, 고려시대에는 양진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하사로 받들었으며. 이때부터 광진이라 하였다. 광진은 서울에서 광주로 통하며, 뱃길로는 멀리 충주를 거쳐 동래도 또는 원주를 지나 동해안으로 가는 요충지였다. 1936년도에는 광진교가 놓임 또 한강의 범람으로 인한 질 좋은 진흙으로 만든 벽돌과 옹기, 곡식과 채소 또는 경기도 광주군지역에서 모여든 산물들이 날씨에 구애 없이 쉽사리 한강을 건널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천호시장 등 비롯하여 천호동에 자리잡은 여러 시장들은 이곳이 상업의 중심지적 역할을 보여준다.

 

곡교리(곡교, 곱은다리, 가운뎃말) : 마을 앞에 굽은 다리가 놓여 있으므로 굽은다리 또는 한자명으로 곡교라고 하였으며, 여러마을 중에 한 가운데에 있었으므로 가운데 마을이라고도 함

당 말 : 마을 뒤에 신당이 있었으므로 당말 또는 한자명으로 당촌이라고 한다.

벽동말 : 벽오동 나무가 있었으므로 벽동말이라 하였다.

 

 

성내동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의 일부로, 풍납토성 안쪽에 마을이 위치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성안말 · ‘안말또는 성내리등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광복 이전까지 성내동지역은 주로 농업과 옹기, 벽돌을 만들어 생활한 半農半工의 마을이었다. 그러나 광복 이후 한양대학교, 건국대학교, 수도여자대학(현 세종대학교) 등이 들어서자 강동구쪽의 도시화 영향이 광진교를 거쳐 성내동 근방까지 미쳤다. 특히 6.25 이재민들이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이 지역은 해방을 전후로 할 무렵에는 성내동을 중심으로 하여 옹기 · 벽돌 · 기와 · 토관 · 화분 등을 생산해내는 공장지대이기도 하였다.

 

별말 : 벌판에 있는 마을

골말 : 벌말 동쪽 골짜기에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

분토골 : 갈분처럼 흰 흙이 많이 있다는데서 붙여진 이름

성안말 : 성내동

 

 

길동

경기도 광주군 구천명의 기리울지역, 196311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길동이라 하였다. 마을로부터 강이 멀리 떨어져 있고 주위에 높은 산이 없기 때문에 물난리 또는 산사태 등의 천재지변의 없는 살기 좋은 곳이라 한데서 불려졌으며, 또한 길동의 모양이 나뭇가지처럼 길다하여 붙은 기리울이라는 마을 이름에서도 비롯되었다.

 

건너말 : 응달말 건너쪽에 있는 마을

골말 : 마을이 산골짜기에 있음

기리울(吉里) : 길동을 가리킴. 길동의 모양이 나뭇가지처럼 길다하여 붙여진 이름

선린촌 : 선린동

아랫말 : 골말 아랫쪽에 있는 마을

응달말 : 응달쪽에 있는 마을

   

 

 

둔촌동

경기도 공주군 구천면의 일부였던 곳으로, 1961년 서울 특별시에 편입되었다. 광주 이씨의 시조이며 문장과 절개로 유명한 이집이 잠시 거주한 사실이 있었으므로 그의 호를 따서 둔촌동이라 하였다.

 

밖둔굴 : 둔굴 바깥쪽에 있는 마을

아랫말 : 아래쪽에 있는 마을

안둔굴 : 둔굴 안쪽에 있는 마을

약수터 : 호초우물 가에 있는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