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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대한민국 고도성장개발의 결정체, 강남구 江南區

草霧 2013. 11. 15. 20:23

 

 

 

 

말죽거리, 역촌, 학탄(鶴灘), 영동(永東), 압구정 狎鷗亭

 

 

 

 

1970년대 대한민국 고도성장개발의 결정체

 

 

 

강남구 江南區

 

 

 

 

 

Gangnam-gu (Gangnam Gu)

 

  

 

서울특별시의 동남부에 있는 구

원래는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大旺面언주면(彦州面)에 속했던 지역으로 1963년 서울시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서울시에 편입되어 성동구 관할하에 있다가 1975년 성동구로부터 분리·신설되었으며, 1979년에 강동구가, 1988년에 서초구가 분구되어 나갔다.

 

1970년대에는 영등포(永登浦)의 동쪽()에 위치해서 영동(永東)이라고 불렸었다. 구청 소재지는 삼성동이다. 동쪽으로는 송파구와 강동구, 서쪽으로는 서초구와 관악구, 남쪽으로는 경기도 성남시, 북쪽으로는 용산구와 성동구와 접해 있다. 한강 이남에 위치해서 강남이란 이름이 붙었다.

 

 

 

 

랜드마크(landmark, 境界標, 마루지)

이 지역의 대부분은 한강의 침식을 받아 저기복의 구릉지를 이루며, 북쪽의 한강 연안에는 충적층이 발달하고 있다.

 

동쪽의 탄천은 하안공사가 이루어지고 제방도로가 가설된 상황에서 강 복판으로 자유곡류하며 하구에서 양재천을 만나 한강으로 유입된다.

 

남쪽에는 대모산(大母山, 293m)·구룡산(九龍山, 283m)이 솟아 있고, 탄천(炭川)과 양재천(良才川)이 대치동에서 합류하여 한강에 유입한다.

 

 

1960년대 말부터 영동개발 붐

 

 

1960년대까지는 한남동나루와 뚝섬나루

 

 

 

 

한남대교·영동대교·성수대교·동호대교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기 이전까지 신사동을 중심으로 양잠이 성했고, 채소 및 화훼 재배가 활발한 서울 근교농업의 중심지였으나 1968년부터 실시된 토지구획정리사업에 따라 도시개발이 시작되었다.

 

1971년 논현동에 공무원 아파트가 건립된 이래 1976년 강남단지가 조성되었고, 1976년 이후 개포동·압구정동·청담동·도곡동에 수많은 현대식 아파트가 들어섰다.

 

1969년 한남대교와 1970년에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이래 영동대교·성수대교·동호대교가 건설되어 강남과 강북을 연결하며, 남부순환도로, 올림픽대로와 강남대로·영동대로·선릉로 등의 주요간선도로가 있다.

 

 

강남역

국기원

도산공원(島山公園)

봉은사(奉恩寺)

선정릉(宣靖陵)

양재천(良才川)

한국종합전시관(COEX)

가로수길

논현동 가구거리

메타세쿼이아 거리(양재천로)

압구정동

테헤란로

청담동 패션거리

 

 

 

 

궁마을, 대청마을(大淸里), 마고개, 한여울(盤谷)

싸리고개, 말죽거리·역촌·방아다리, 옥골(玉谷), 학여울(鶴灘), 학동, 용오봉(龍搖峯)

 

삼성동에 선정릉(宣靖陵사적 제199)

수서동에 광평대군묘역(廣平大君墓域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8)

삼성동 봉은사(奉恩寺) 내에 선불당(選佛堂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4)

역삼동에 무문토기주거지(無紋土器住居址)

역삼동 청동기시대주거지

백제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삼성동토성,

마을의 안위를 비는 동제당들이 역삼동

 

 

 

서울 선릉과 정릉 - 사적 제199,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전주이씨광평대군파묘역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8

봉은사선불당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4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9

일원동불국사석불좌상 -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36

불교제중원오층석탑및표석,석등 -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42

서울 안창호 묘소 - 등록문화재 제517

광평대군묘역 일원

봉은사 선불당

홍무25년 장흥사 명동종

봉은사 김정희 서 판전 현판

대방광불화엄경 소수연의 초판

선릉과 정릉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모신 선릉

정현왕후 소생 중종 모신 정릉

봉은사

불국사

압구정 狎鷗亭

도산공원의 안창호

봉은사가 배출한 명승 보우큰스님

서산대사 휴정

사명대사 유정

주지 청호

광평대군 묘역의 조선왕손

압구정자를 세운 한명회

저자도 최후의 주인 박영효

숙몽정의 전설 홍석보

자곡동 묘의 주인공 이후원

청담동 출신의 통역관 홍순언

수서동 전통가옥의 첫주인 이유

선정릉의 주인공

저자도

사평원과 사평장터

승과평

오공신회맹축

우암 송시열 초구 일령

궁마을

대청마을(大淸里)

마고개

한여울(盤谷)

싸리고개

역촌의 세 마을-말죽거리·역촌·방아다리

옥골(玉谷)

학여울(鶴灘)

학동과 용오봉(龍搖峯)

압구정 도당

매봉산 동제당(洞祭堂)

삼성동 충열화주당과 느티나무

도곡동 느티나무 당제

대치동 은행나무와 영산단

역삼동의 방아다리 제당

조운흘의 졸기(卒記)

양녕대군의 일화들

 

 

 

 

 

법정동 기준 14, 행정동 기준 22

역삼(驛三신사(新沙논현(論峴압구정(狎鷗亭청담(淸潭삼성(三成대치(大峙개포(開浦일원(逸院율현(栗峴자곡(紫谷도곡(道谷수서(水西세곡(細谷포이(浦二)

 

 

 

 

 

 

신사동

이 지역 한강변에 있던 부락 새말과 사평리등으로 불리던 지역으로, 조선 시대 신사동의 자연 부락에 대한 상고에 의하면 이곳에 사평원이라는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또 이곳에는 시장이 형성되어 조선 후기에는 송파시장을 중심으로 이곳에도 그 영향이 미쳐 성행하였다. 또 인조는 이괄의 난을 피하여 이른 새벽에 도성을 빠져 나와 이곳 사평원에 머물러 의의죽으로 요기한 일도 있었다 한다. 1925년에는 을축년 대홍수로 인하여 주민은 모두 이주하였고, 모래벌만이 남아 있었다. 새말은 한강 동쪽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불리어진 이름으로 일명 신촌이라 불렀으며 새말나루터가 새말에서 한남동으로 건너가는 길목, 즉 한남대교 주위에 있었으며 신사도선장이라고도 하였다.

 

 

논현동 

논고개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고개는 지금의 논현성당 근처이며 특히 강남우체국 위에서 반포아파트까지의 산골짜기 좌우 벌판이 논, 밭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논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논현동의 연혁은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논현동이었고 자연부락이었던 언구비(비말)절골, 부처말 등을 병합하여 논고개의 이름을 따서 논현리라 하였다.

 

학동의 유래를 살펴보면, 마을 모양이 학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학실, 학리, 학곡 등으로 지칭되었다. 또 논현동은 노고개, 부처말, 비말, 절골, 언금이부락, 안금이부락, 정상이부락 등으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부처말은 지금의 학동파출소 주위의 마을로 월봉암이라는 절이 있었던데서 붙여진 이름이며, 비말은 일명 언구비라고도 불렀는데 옛날 광주유수가 진터를 개간하여 동민의 생계를 열어준 은혜를 기리기 위하여 그곳에 공덕비를 세우고 언구비라 한데서 나온 것이며, 절골은 지금 논현동사무소 주위의 마을로 옛날에 이곳에 절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사동이라 부르기도 하였고 안금이 부락은 삼정호텔에서 시영5단지 사이에 있었으며 정상이 부락은 논현동 125번지 일대 지금의 논현1동사무소 맞은편 영동시장 쪽 가구점 뒷 편 부근에, 언금이 부락은 영동시장 부근에 몇가호씩의 자연 부락으로 형성되고 있었다고 한다.

  

압구정동

조선 세조 때 권신 한명회(1415~1487)가 지은 압구정이라는 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압구정이 있던 자리는 북쪽의 옥수동과 금호동의 동호 일대와, 지금은 없어졌지만 조선시대 닥나무가 무성했던 저자도가 그림처럼 펼쳐졌으며, 멀리는 북한산의 여러 봉우리까지 시야에 들어와 절경을 이루었다 한다. 압구정이라는 정자가 언제 자취를 감추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철종의 딸인 영혜옹주와 결혼한 박영효에게 저자도와 함께 하사되었고 고종 21(1884) 10월 갑신정변을 일으켜 그가 역적으로 몰려 전 재산이 몰수될 때 압구정도 몰수되어 고종 말년에 다시 찾았으나 언제 없어졌는지는 확실하지가 않고 다만 현대아파트 72동과 74동 사이에 압구정 터임을 알리는 바위돌만이 우뚝 서 있다. 조선시대 압구정동의 자연 부락은 뒤주니, 먼오금, 옥골, 장자말 등이 있었다. 뒤주니는 압구정 밑에 있는 마을로 압구정을 뒤지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먼오금은 압구정구내에 있던 마을이었고, 옥골은 한강물이 마을 앞에 흐르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옥골 뒷산에서는 석기시대 돌도끼가 출토되기도 했었고, 장자말은 옛날 큰 부자가 살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장자울이라고도 불렀고 기와집이 많았다고 한다.

 

 

청담동

지금의 청담동 105번지 일대에 옛날에 맑은 못이 있었으며, 134번지 일대 한강변의 물이 맑아 이 부락을 청숫골이라 하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성동

조선시대 말까지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봉은사 무동도 닥점 지역이었는데 일제 때인 191431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대치동, 청담동과 함께 수도동사무소에서 관장하였다. 수도동이라는 명칭은 봉은사가 있는 수도산에서 따온 것이다. 자연 부락은 닥점, 무동도, 학당동, 배곶이마을 등으로 형성되어 있었으며 닥점은 무동도 쪽에 있던 마을로 이 마을에는 닥나무(한지원료)를 파는 상점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대치동

원래 자연부락 7~8개 마을 중 큰 고개 밑에 있는 한티(또는 한터) 마을을 한자명으로 대치라 한데서 비롯되었다. 한티를 비롯해서 움말, 오달짝, 새말, 능안말, 중간말, 세촌, 아랫말 등의 8개 부락으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위치를 보면 움마을은 현재의 대치동 975번지 일대, 옹달짝은 980번지 일대, 새말은 915번지 일대, 능안말은 891번지 일대, 중간말은 910번지 일대, 세촌은 98번지 일대, 아랫말은 941번지 일대로 추정되어 비가 조금 많이 내리면 탄천과 양재천이 범람하여 농토가 물에 잠기어 별 쓸모가 없는데다가 또 저지대에는 갈대만 무성하여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옛날 주민들은 마을을 둘러싼 쪽박산이 없어져야 이 마을이 부자가 된다고 믿었다고 하며 이 마을에서는 80년대 초 까지도 용신제라는 우물제를 올려 마을의 풍요로움과 질병 퇴치를 기원하고자 길한 날짜를 받아 5개의 공동 우물 청소를 깨끗이 하고 흑돈의 머리와 과일을 놓고 정성을 들여 제를 올렸다고 하나 지금은 도시 개발에 밀려 우물이 모두 메워져 치제가 중단되었다.

 

 

역삼동

조선시대 역촌이었던 말죽거리, 웃방아다리, 아랫방아다리 세마을을 합쳐 역삼리라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웃방아다리라는 이름은 즉 방아다리의 웃마을로서 현 테헤란로 부근 국기원 근처 마을이었다. 아랫방아다리는 방아다리 아랫 마을로 현 833번지 일대 역삼초등학교 근방에 있던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옛부터 상부상조의 협동 정신이 강했으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효자, 열녀가 많았다 하며, 역삼동 산 211에서는 숭실대 사학과 유물 발굴단에 의하여 선사 시대의 유물이 다량으로 발굴되었다.

 

 

도곡동

이 마을 뒤의 매봉산과 물 아래쪽 산부리에 돌이 많이 박혀 있어 독부리라 하던 것이 독구리, 독골이 되었다가 도곡으로 변하였다 한다. 어떤 이는 동네 주변 밭에 그릇 깨진 것들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이 마을에 큰 도요(그릇 굽는 가마)가 있어서 흔히들 독골(, 옹기, 도자기를 굽는 가마가 있는 마을)로 불려 왔을 것으로 짐작하여 마을의 유래를 살려서 이름을 붙인다면 道谷洞이 아닌 陶谷洞으로 해야 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말죽거리 양재동과의 동명의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옛 이름 독골을 바탕삼아 도곡동으로 지정되었다. 자연 부락으로는 독수리, 독부리, 독골, 양재리가 합쳐 이룩된 마을이며 독구리 마을은 조선시대 한양으로 입성하는 중간에 있는 마을로 지금의 말죽거리와 매봉산의 중간에 오솔길이 있었는데 이 길을 왕래하는 사람들이 한양에 입성하기 전에 잠깐 쉬어 가거나 날이 저물면 하룻밤을 묵으면서 아침에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잠깐 쉬어가는 마을이었다 한다.

 

 

개포동

이 지역에 갯벌이 있다하여 "갯펄"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개패"또는 한자명으로 개포라 하였다. 이것은 개포동의 옛 마을 이름으로써 지금도 개패·개포의 옛 지명이 전하여지고 있다. 인접한 대모산은 표고 293m이며 산모양이 늙은 할미와 같다고 하여 옛날에는 할미산이라 부르다가 조선조 제3대 태종대왕의 헌릉을 모신 후 어명에 의하여 대모산으로 고쳤다 하며 서편 포이동 쪽으로 구룡산과 마주하고 있다. 현재 개포2동에 전하는 자연부락 이름으로 한여울이 있으며 이는 한강이 이곳에 이르러 여울이 거세어져 흐르고 마을이 갯바닥에 있는 데에서 반곡이라 하였다 한다. 개포동에서는 선사시대 유적으로 4개의 남방식지석묘(고인돌)가 조사 되었다.

 

포이동

이 마을에 큰물이 지면 한강물이 들어와 갯펄이 되므로 그 뜻을 따서 포이리라 했던 데서 연유한다. 포이동, 개포동 일대에 걸쳐 있는 구룡산은 해발 283m로서 계곡이 9곳이 있는 산으로, 이 산 이름의 유래가 다음과 같이 전해져 온다. 옛날에 용 10마리가 승천하다가 임신한 여자를 보고 놀라서 그 중 한 마리가 양재천 연못에 빠져 죽고 9마리가 올라갔다고 하여 구룡산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일원동

옛날 이 마을에 일원이라는 서원(書院)이 있었으므로 일원 또는 일언이라 한데서 연유하고, 이 근처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므로 본동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일설에는 이 마을의 사방이 대모산에 가리워져 [숨어져 있는 마을]또는 [편안한 마을]이라 해서 일원동 이라고 불리워졌다고 한다. 일원동의 대모산 기슭에는 약사절이 있다. 이 절은 고려 공민왕 2(1353)에 진정국사가 창건하고 불국사라고 했는데 고종 17(1880)에 네번째로 이곳에 옮겨 지은 것이며 이 절에 약사전이 있으므로 약사절이라고도 한다. 일원동 410번지에는 수령 250,나무 높이 25m, 흉고 둘레 420cm, 수관 직경 1,5m인 느티나무가 있는데 이 느티나무를 주민들은 수호 나무로 삼고 매년 동제를 지냈다.

 

 

수서동

이 동리의 서쪽에 한강물이 흐른다 하여 수서라 하였다. 수서동은 옛부터 궁말 또는 궁촌 이라고도 불리었다. 그것은 이 마을에 조선 태조의 제7자 무안대군 방번 내외와 그 봉사손 광평대군 내외 및 그 자손들의 묘소가 있기 때문이다.

 

 

세곡동 

옛날의 자연 부락 명칭인 세천리와 은곡동의자와 자를 각각 따서 제정한 것이다. 현재 대왕국민학교가 있는 세곡동 로터리 부근에 가느다란 개울 세천이 있고, 이 개울가에 세천리 마을이 있다. 현재로 헌릉로에서 은곡동을 들어가려면 세천교를 건너야 하는데 이 다리는 19571월에 놓았으며, 이 세천리에는 술막이라는 술을 파는 곳이 있었다. 세천리와 함께 세곡동의 명칭이 있게 된 은곡동은 헌릉로 북쪽 대모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은곡동은 일명 망골, 막은골이라 칭한다. 막은골이란 이름은 나무를 심어서 마을 수구를 막았으므로 유래된 것이라 하며 은곡동에서 자곡동의 못골로 넘어가는 곳에 도당터가 있으므로 이 산을 도당뫼라고 부른다. 또한 이 부근 세곡동 362번지에는 수백년 된 느티나무가 있으며, 은곡동 서쪽의 들판을 용푼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용푼에는 굴이 있는데 기이하게도 이 굴에서 불을 때면 700m 떨어진 도당터 고목나무 줄기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는 것이다. 또 은곡동에서 못골로 넘어가는 고개를 마고개라고 칭하며, 이 마을의 뒷산인 대모산에는 북소리가 나는 바위가 있어서 못골 쪽 봉우리에 있는 이 바위를 두드리면 북소리가 난다고 한다. 비선거리는 세곡동 118번지, 즉 세곡동사무소가 위치한 부근의 마을로서 전일에 비석이 서 있었으므로 붙여진 명칭이다.

 

 

율현동

이 동에서 세곡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밤나무가 많이 있었으므로 밤고개, 또는 한자명으로 율현이라 한데서 연유

 

 

자곡동

이곳의 자연 부락명인 자양도의 자와 지곡동의 자를 따서 자곡리라 칭한 것이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자곡동이 된 것이다. 원래 이곳은 조선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의 자양골(또는 자양동, 쟁골), 못골(또는 목골, 지곡골)로 칭하던 것이다. 이 동에 있던 자연 부락으로서 못골은 자곡동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데 새로 개통된 도로를 따라 수서 입체 교차로를 가다가 율현동과의 경계가 되는 곳에 이르면 못골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오는데 못골을 일제 때 까지만 해도 광주군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못골에서 자양골로 넘어가는 고래를 서낭당고개라고 부르며 이 고개에는 서낭당이 있고 또한 못골에서 수서동과 일원동의 약사절로 넘어가는 고개를 대모산 절재고개라고 부른다. 한편 자양골은 못골의 북쪽인 양재대로 가까이에 있는데 자양골은 서쪽산을 등지고 동쪽을 향한 마을이므로 날이 밝으면 제일 먼저 돋는 해의 붉은 볕을 받으므로 자양골로 부르다가 변음되어 쟁골이라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