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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묘 그리고 물, 절,.... 서울의 허파, 강북구 江北區

草霧 2013. 11. 16. 15:34

 

 

 북한산, 삼각산 그리고 순국선열묘, 4·19국립묘지

 

 

 

 

산과 묘 그리고 물, ,.... 서울의 허파

 

 

강북구 江北區

    

 

 

Gangbuk-gu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북동부에 있는 구

그중 공원녹지 지역이 12.922로 구 전체면적의 54.8%를 차지한다. 구의 동쪽은 노원구와 도봉구, 서쪽은 경기도 고양시, 남쪽은 성북구, 북쪽은 도봉구 및 경기도 양주시와 경계를 이룬다.

 

원래 경기도 양주군 해등촌면에 속했다가 1924년 노원면과 병합되어 노해면이 되었다.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어 성북구 관할하에 있다가 1973년 도봉구로 분리·신설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수유동·미아동·번동·우이동과 쌍문동 일부지역이 강북구로 분리·신설되었다. 분구 직전의 행정 구역인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서 따온 숭인구, 북한산 인수봉과 인수동에서 따온 인수구와 경합한 결과 강북구로 결정되었다. 구청 소재지는 수유동이다.

 

 

한강 이북에 위치해서 강북이라고 했다.

13개 동 중에서 가장 큰 면적을 관할하는 동은 우이동으로 10.95(구 전체면적의 46.4%)이며 가장 작은 동은 번 제1동으로 면적은 0.55(구 전체면적의 1.3%)이다.

 

강북구는 서울특별시의 동북단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은 노원구, 도봉구, 서쪽은 경기도 고양시, 남쪽은 성북구, 북쪽은 경기도 양주시, 도봉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서울의 외곽 지역이다.

 

 

서울의 진산(鎭山)인 북한산이 감싸 안고, 우이천의 맑은 물이 흐르는 살기 좋은 동네

지형적으로 서부 산지와 중앙 저지, 동부 산지로 구분되는데, 서부 산지는 백두대간의 철령(鐵嶺) 부근에서 갈라져 서남쪽으로 달리는 한북정맥의 일부이다.

 

서울의 진산(鎭山)인 삼각산(837m)을 이루는 백운봉(白雲峰인수봉(仁壽峰만장봉(萬丈峰) 등의 암봉이 솟아 있다. 북동쪽으로 흐르는 우이천은 여러 물줄기를 합류하여 중랑천에 흘러든다.

 

산세를 이루고 있는 부분은 수도권개발지역·군사보호구역 등으로 남아 있어 비교적 자연이 잘 보호되고 있다.

 

특히 우이동계곡은 무더운 여름철에 서울시민의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일찍이 우이구곡(牛耳九曲)으로 아름다운 풍광이 유명하였다. 예전에는 중랑천·우이천 연안의 평야를 중심으로 벼농사를 짓고 채소·화훼·과수재배가 이루어졌으나 도시화에 따라 거의 사라졌다.

 

그리고 도심개발정책으로 미아동 지역에 저소득층 주민이 집단으로 이주하면서 잡화·의류·가발 등과 하청에 의한 기계·전자부품 생산 등의 가내공업이 한때 활발하였다.

 

수유삼거리와 미아삼거리는 상업중심지이다. 남북으로 뻗은 도봉로는 경원가도(京元街道)로서 구의 중심길이며, 길음동에서 우이동으로 연결되는 삼양로(三陽路)는 도봉로의 보조 간선으로 교통난 해소에 큰 역할을 한다.

 

그리고 최근 한천로(漢川路)가 개통되어 이 지역의 교통불편을 덜어 주고 있다. 수유동·우이동 일대는 고급 주택지로 알려져 있지만 서울에서 관악구와 함께 영세민이 많은 지역 중의 하나로 꼽힌다.

 

 

북한산국립공원, 4·19국립묘지와 선열묘소

우이동 일대에는 북한산국립공원이 위치하며, 노적봉(780m)·백운대(837m)·인수봉(811m) 등이 가깝다.

 

북한산국립공원내에는 만경대·용암문·대동문·북한산장·우이동유원지 등이 있어 서울시민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수유동에는 4·19국립묘지와 선열묘소, 아카데미유스호스텔이 있으며, 화계사·청룡사·통천사·영락기도원 등이 있다.

 

 

거북 바위

현재 강북구 미아동 산 837-1040 지역으로 예로부터 이곳과 관련된 전설이 전한다. 오랜 옛날 아름다운 삼각산과 도봉산(道峰山)이 만들어 지고 많은 세월이 지났을 때 거북이가 황해(黃海)에서 한강(漢江)으로 올라와 그 큰 몸으로 한양(漢陽)을 엉금엉금 기어 다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에 놀란 시민들과 군사들이 동원되어 한강으로 쫓아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거북이는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인왕산(仁王山)을 거쳐 삼각산으로 기어 오르므로 아름다운 경관이 크게 훼손되었다. 이를 바라다 본 인왕산, 삼각산, 도봉산의 산신령들이 놀라 힘을 합쳐 노원구 상계동의 수락산(水落山) 쪽으로 쫓아 보내려고 하였으나 큰 거북이가 완강히 버티는 바람에 산신령들과 밀고 당기다가 끝내 미아동 산 837-1040번지에 와서는 서로 치고 받고 피를 흘리는 격심한 싸움으로 변했다.

    

이 싸움을 하늘에서 내려다 보던 하느님은 이를 보다 못해 난폭한 거북이는 커다란 바위로, 창피하게 싸움을 벌인 산신령들은 단풍나무 숲으로 만듦으로써 매년 가을 거북바위는 단풍 속에 둘러싸여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게 되었다. 이에 하늘의 신선도 아름다운 경치에 반하여 이곳에 내려와 장기를 두는 등 놀이터가 되었고, 그 후 많은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현재의 거북바위 주변에는 많은 가옥이 들어서서 주위의 단풍나무들이 자취를 감추고 거북바위는 여기저기 흉터가 나 옛날의 아름다운 모습을 찾을 수 없으며 미아지역 재개발 구역에 편입되어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으로 있어 유래를 아는 지역주민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삼각산 도당제

부족 국가 시대부터 행하여진 도당제는 그 부락의 수호신 또는 산신이 중심이 되어 대동단결과 화목을 강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자 방법이었다. 연희성이 짙은 가무로 부락민을 흥겹게 하고 마을의 안녕과 질서를 신에게 기구했던 산신제이며, 도당제라는 명칭을 붙인 것은 고려 충렬왕 때(1275~1308)로 추정된다. 일명 도당굿 또는 대동굿으로 불려지며 현재 삼각산 기슭 우이동에서 전승되고 있다.

 

 

 

 

보물 제 11-5호인 서울화계사 동종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2호인 봉황각, 34호인 도선사 마애불입상

문화유적으로 도선사(道詵寺) 마애관음석불, 화계사(華溪寺) 대웅전이 있다. 그리고 우이동 도선사 길 입구에는 3·1운동 때 민족대표 33명 중 한 사람인 손병희(孫秉熙)의 묘소와 봉황각(鳳凰閣)이 있다.

 

그 외 김창숙·이준·신익희·여운형·조병옥 등 근대 역사인물의 묘역이 있다.

 

특히 수유동에는 4·19혁명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민주학도 216명의 넋을 봉안한 4·19묘지가 있는데, 대대적으로 확장공사를 해 19954월 국립묘지로 승격되었다.

 

 

화계종 동종 

북한산성

삼각산

봉황각

도선사마애석불

화계사 대웅전

본원정사목조지장보살좌상

도선자 목 아미타불 대세지보살좌상

도선사 석 나반존자(독성)

도선사 청동 종 및 일괄유물

북한산 국립공원

북서울 꿈의숲

국립4·19민주묘지

봉황각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

도선사 마애불입상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4

화계사대웅전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5

도선사 석 독성상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2

서울 번동 창녕위궁재사 - 등록문화재 제40

서울 이준 묘소 - 등록문화재 제514

서울 손병희 묘소 - 등록문화재 제515

서울 이시영 묘소 - 등록문화재 제516

서울 김창숙 묘소 - 등록문화재 제518

서울 신익희 묘소 - 등록문화재 제520

서울 여운형 묘소 - 등록문화재 제530

도선사

화계사

보광사

삼성암

용덕사

백련사

본원정사

신검사

    

 

 

 

 

법정동 4개 기준, 행정동 기준은 17

미아(彌阿(수유(水踰우이(牛耳) 4개동

삼각산동 · 삼양동 · 송중동 · 송천동 · 인수동

   

 

 

 

 

 

 

 

 

미아동(彌阿洞)

미아동이란 이름은 조선말 고종 2(1865)에 편찬한 [육전조례]에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 미아리계라고 공식기록에 처음 나타나는데 그 유래는 확실하지 않으며,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되너미고개(돈암현)을 일명 미아리고개라고 부르는 까닭에 고개이름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미아 7동에 있는 불당(佛當)골에서 미아사(彌阿寺)가 오랫동안 있었으므로 이 절 이름에서 동명이 유래 되었다는 설이 있다. 여하간 미아리라는 한자 뜻 그대로 언덕에서 쉬어간다는 마을 이름인 만큼 동명과 고개와는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하겠다.

 

 

수유동(水踰洞)

수유동이라는 이름은 조선 태조 5(1396)에 동부에 속했으며, 그뒤 영조 27(1751)에 간행된 수성책자 [도성삼군분계총록]에 동부 숭신방(성외) 가오리계, 수유촌계, 우이계로 되어 어영청 전영에 소속되어 도성 방어에 일익이 되기도 하였다. 삼각산 골짜기에서 물이 이 마을로 넘쳤기 때문에 물 수()자와 넘칠 유()자를 써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우리말로는 물이 넘친다 하여 '무너미'라고 부르게 되었다.

     

빨래골

수유동 486번지 일대의 이곳은 삼각산 골짜기에서 흘러 내리는 물의 양이 많아 '무너미'라고 부르게 되었다. 물이 많아 자연적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인근 주민들의 쉼터와 빨래터로 이용되었고, 당시 대궐의 궁중 무수리들이 빨래터와 휴식처로 이용하면서 빨래골이라는 명칭이 유래되었으며 지금도 널리 일반인에게 통용되는 지명이다.

 

가오리(加五里)

가오리는 현재 수유동 우이초등학교 등이 있는 곳으로 옛날 미아리 고개에서 장사를 지내는 소리가 임금에게까지 들리자 번잡스러우니 오리(五里)를 더 가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번동(樊洞)

번동이라는 이름은 18세기 중엽 정선이 그린 [도성대지도]와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에 벌리(罰里)로 표시되어 왔으며 갑오개혁때 동서숭신방(성외) 동소문외계번리로 되어 있다. 이때 벌리(伐里)가 번리(樊里)로 바뀐 것 같다. 번동이라는 동명의 유래를 살펴 보면 고려 시대에 씌여진 [운관비기]라는 책에 "李氏가 한양에 도읍하리라"는 비기설이 있는데, 고려 말기의 왕과 중신들이 이 설에 의거 경계를 하던 중, 한양 삼각산 아래 이곳에 오얏나무()가 무성하다는 말을 듣고 李氏가 흥할 징조라 여겨 오얏나무를 베기 위해 벌리사를 보냈는데 이로부터 이곳을 벌리(伐里)라 칭하다가 번리(樊里)가 되었다고 한다.

 

 

우이동(牛耳洞)

우이동이라는 동명의 유래는 동리 뒤에 있는 삼각산 봉우리 중에 소 귀 같이 보이는 봉우리가 있으므로 소귀봉 즉 우이봉 아래 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 전해진다. 우이동은 도성에서 꽤 먼 거리에 있지만 오래전부터 서울의 성외 지역의 한 마을로 되어 있었으며, 고종 4(1867)에 발간된 육전조례에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 우이동계가 있었고 또 갑오개혁 당시에 문서에 동서숭신방(성외) 동소문외계에 우이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