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국민의 의무는 재미다.

친일파로 전락한 어용화사, 이당 김은호(金殷鎬)

草霧 2013. 12. 4. 11:55

 

 

 

음악 · 미술

 

 

이당 김은호(金殷鎬, 창씨명 鶴山殷鎬, 18921979)

  

 

 

친일파로 전락한 어용화사(御用畵師)

   

 

5만원권 속 신사임당 조선風 초상화로 바꿔라

 

5만원권 지폐 견본의 신사임당 초상화를 두고 말이 많다. 기생, 주모, 늙은 무당처럼 보인다는 의견이 잇따른다. 이것을 그린 이종상 화백은 예술을 몰라서 하는 소리일 뿐 세계 최고 수준의 예술적 가치가 있다고 반박했다. 국민 세금으로 만드는 지폐이기에 모두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우리는 신사임당의 얼굴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신문 지상에 공개된 원화(原畵·아래 왼쪽)와 화폐의 초상화를 보면 여러 의문이 생긴다. 더구나 공개 절차를 통해 작가를 선정한 것이 아니라는 문제도 있다. 신사임당의 국가 표준영정은 이당 김은호 화백이 1960년대에 그린 것이다. 한국은행은 이당의 친일 경력과 왜색 화풍 논란 때문에 새 초상화를 제작하기로 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이당의 제자인 이종상 화백이 선정되면서 자체 모순에 빠졌다. 이당이 그린 표준영정을 참고했다는 이 화백은 “선생을 초혼(招魂)하며 그렸다”고 말했다. 이당의 표준영정을 배제한다는 취지에 어긋난 현실이 발생한 것이다. 이 초상화는 김은호 화백이 1965년에 그렸고, 1986년 표준 영정으로 지정되었습니다. 표준 영정은 민족적으로 추앙받는 위인들의 영정들이 난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에서 지정하는 것입니다. 1973년 충무공 이순신의 표준 영정을 지정한 이후 2005년 12월까지 총 77명의 선현에 대한 표준 영정을 지정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표준 영정은 역사상 위인의 실제 얼굴과는 상관없고 다만 한 인물에 대해 서로 다른 초상들이 전해짐으로써 발생하는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지정하는 것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국가 표준 영정의 3분의 1 이상이 친일 혐의를 받고 있는 친일 미술인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왜적에 맞서 자신을 희생했던 진주의 논개 표준 영정도 김은호 화백이 그렸고,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옥중에서 순국한 유관순의 표준 영정도 김은호 화백의 제자로서 역시 친일 미술가로 알려진 장우성 화백이 그렸다고 합니다. 최근 친일 화가들이 그린 표준 영정들 일부가 교체되는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충남 천안시 병천면의 유관순 열사 추모각에 모셔져 있던 장우성 화백의 그림은 2007년 3월 1일 새롭게 지정된 표준 영정으로 교체됐습니다. 또 2008년 5월 진주시에서는 의기사에 모셔져 있던 김은호 화백의 그림을 떼고 현상 공모를 통해 선정한 논개의 새 표준 영정을 봉안하는 행사를 거행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김은호 화백이 그린 신사임당 표준 영정도 교체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몇 해 전에 신사임당 표준 영정도 김은호 화백의 친일 행적 때문에 교체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습니다. 강릉시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문화관광부에서 신사임당 표준 영정 교체를 심사했는데, 그때 잠깐 교체 이야기가 나오다가 없던 일이 됐다고 합니다.

1892년 경기도 인천 출생

1912년 조선왕실 역대황제 어진 5위 제작

1915년 경성 서화 미술학교 회화과 졸업

1917년 이후 선전에 입선 특선 15

19193·1운동 참가, 등사판 `독립신문` 배포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5개월간 복역

1923년 고려미술원 (高麗美術院) 설립

1924년 동경미술학교 3년 수학

1925년 동경제국미술원 제8회 입선

1927년 광풍회전 입상

1928년 창덕궁 선원전에 봉안된 순종어진(純宗御眞)과 태조·세조의 어진을 봉사(奉寫).

1930년 조선미술원 (朝鮮美術院)설립

1933년 서화협회 간사

1936년 후소회 설립

1937년 이후 '선전' 참여 작가, 조선미술전람회 초대작가

1941년 조선미술가협회 일본화부 평의원

1955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심사위원.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 명예교수

1956년 국전심사위원 역임

1961년 대한미술전람회 고문 역임

19625월 문예상 심사위원 역임

19653·1문화상 수상

1966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68년 제13회 예술원상 수상

1970년 회고전, 신세계화랑

1973년 하와이 방문

1974년 한국 현역 원로작가 회고전 출품

197927일 별세

제자 운보 김기창

 

저서(작품) 백학도?춘향상?해학?백모란?순종어진?이충무공상?의기논개상?서화백년,<백학도>(1920) <춘향상>(1960년 재제작) <해학(海鶴)>(1965) <백모란(白牡丹)>(1968) <승무(僧舞)> <간성(看星)> <향로> <군리도(群鯉圖)> <춘향초상> <충무공 이순신 초상>

  • 1 생애
  • 2 작품 및 화풍
  • 3 항일과 친일 논란
  • 4 학력
  • 5 주석
  • 6 같이 보기
  • 7 바깥 고리
  • 8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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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호(金殷鎬, 일본식 이름: 鶴山殷鎬 쓰루야마 마사시노기, 1892년 6월 24일 ~ 1979년 2월 7일)는 대한민국동양화가, 한국화가이다. 아명(兒名)은 김양은(金良殷)이며 아호는 ‘이당(以堂)’이다. 뛰어난 인물 묘사 실력으로 송병준, 대한제국 순종 등의 얼굴을 그리면서 점차 이름을 얻게 되었다. 한국 화가로는 드문 북종화 계통의 화가로서 채화(彩畵)를 통하여 한국의 풍속화를 새로운 경지로 끌어갔으며, 중국 명대(明代)의 구영(仇英)이나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와도 비견할 사녀도(仕女圖) 형식의 한국적 화풍을 수립한 화가로 평가된다. 그외 채색화로서 산수·인물·화조 등 다양한 작품세계를 전개시켰고 재래 도화서풍의 초상화도 많이 남겼다. 작품으로 〈향로(香爐)〉 등이 있다.

     

    1919년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된 적도 있으나, 1920년대 후반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식 채색화 기법을 익히면서 친일본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즐겨 그린 그림은 〈승무도〉 연작으로 대표되는 미인도와 신선도, 화조도 등이다.

     

    일 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애국금차회의 활동 모습을 담은 〈금차봉납도〉를 제작하여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에게 증정[2] 하는 등 태평양전쟁 기간 중 미술계에서 적극적인 친일파로 활동했다. 조선미술가협회의 일본화부에 참가하여 전쟁 지원을 위한 친일 미술 작품을 심사하거나 전시하는데에도 여러 차례 참여했다.

     

    광복 후에는 뚜렷한 친일 경력 때문에 대부분의 미술인들이 망라된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제외되었으나, 이후 다시 미술계의 중심에 복귀했다. 김은호는 일찍부터 후진 양성에 관심을 보이고 후소회를 통해 제자를 많이 배출하여 동양화단에서 단단한 인맥을 갖고 있었다. 운보 김기창이 대표적인 김은호의 제자이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미술 부문에 선정되었다. 문화예술계 인사를 많이 선정하지 않은 2002년 발표 친일파 708인 명단에도 미술 분야에 심형구와 함께 포함되어 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두드러진 친일 이력과 일본풍으로 의심받는 화풍과 관련하여, 김은호가 그린 논개춘향의 영정을 철거하자는 주장과 논란이 있었다.

    조선미술가협회

  • 김은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은호, 《브리태니커백과》
  • 박종찬. ““붓으로 화폭으로 진충보국하라”- ‘식민지 조선과 전쟁미술전’…미술계 거목들의 친일대표작 한자리에”, 《한겨레>
  • 임형두. “운보 김기창 화백 별세
  • 김수현. “친일화가 춘향영전 파문

     

     


    △ 민족문제연구소가 1일 서울 서대문형무소 기념관에서 개최한 ‘식민지 조선과 전쟁미술전’에서 한 어린이가 친일 전시 작품을 가리키며 질문하고 있다. 박종찬 기자

     

     

    △ (사진 왼쪽부터)김종찬 ‘진중의 A병단장’, 김기창 ‘적진육박’, 윤효중 ‘현명(弦鳴)’

     

     

    김은호 <금차봉납도>

    이당 김은호는 한국 미술사에 후소회라는 유파를 탄생시킨 거물 화가로, <미인도>가 대표작이다. 김은호가 1937년 그린 <금차봉납도>는 전시 총동원체제기에 접어들면서 조선인 화가들이 친일작품을 생산하는 데 물꼬를 튼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김은호는 전시체제 당시 1942년 11월 조선미술가협회가 주최한 ‘반도총후미술전’(전쟁을 독려하는 대표적인 시국 전람회. 조선 후방에서도 미술로 보국하자는 취지로 개최한 것)에 첫 작품을 출품하고 나중에 심사위원을 지냈다. 또 조선미술가협회 평의원을 맡기도 했다. 그의 <금차봉납도>는 친일 여성단체인 ‘애국금차회’가 금비녀(금차) 11개, 금반지와 금귀이개 2개, 은비녀 1개, 현금 889원 등을 모아 일제의 성전승리를 위한 국방헌금으로 납부한 것을 감격스레 그리고 있다.

     

     

     

     

     

    친일 여성단체가 패물을 모아 일제의 승리를 위한 국방헌금을 납부하는 장면을 그린 '금차봉납도'./진주신문 , 친일여성단체가 미나미 조선총독에게 금비녀(금차)를 바치는 모습을 담았다.이당 김은호의 <금차봉납도(金釵奉納圖)>(1937).

     

    논개영정을 그린 친일화가 김은호 "미술로 일본에 보국하자" 절개 없는 미인도로 그려, <금차봉납도>를 그린 것을 시작으로 김은호는 본격적인 친일활동에 나서게 된다. 일제가 만주 침략에 이어 대동아 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며 경제수탈과 침략전쟁에 광분해 있을 때, 그는 조선인의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 창씨개명에 동조하며 군국주의에 영합했다. '쓰루야마'라는 일본식 성으로 창씨개명을 한 그는 화가로서 일본 천황에게 화필보국과 회화봉공의 충성을 맹세하며 친일 대열의 선두에 섰다. …그의 친일 행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총독부와 아사이 신문이 후원한 일만화 연합 남종화 전람회를 비롯해 조선남화 연맹전, 애국백인일수 전람회 등 전쟁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각종 전시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책속에서

     

    김은호가 그렸다는 <금차봉납도>는 1937년 8월 20일에 결성된 '애국금차회'에서 있었던 일을 그린 것이다. 이 애국금차회는 순종의 외척인 윤덕영의 처 김봉완이 회장인 애국부인회로 우리에게는 국방헌금조달과 황군원호에 앞장섰던 단체로 유명하다.

     

    "결성식에 모인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금비녀 11점과 금반지와 금귀걸이 각 2점, 은비녀 1점, 그리고 헌금 889원 60전을 모아 일제의 성전 승리를 위한 국방헌금으로 냈다."

     

    1937년 8월 21일자 <매일신보>는  김은호의 <금차봉납도>의 바탕이 되는 '애국금차회'의 일을 이렇게다시 화단의 총수로 떠올랐다. 그 후 그는 대한미술협회와 국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며, 제자들과 함께 미술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문화 권력으로 떠오르게 된다. -책속에서

     

    김은호는〈신사임당>·〈이이〉·〈이순신〉·〈논개〉등의 공인 영정과 인도 간디 수상의 초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최근 몇 년 김은호의 친일행각 때문에 그가 그린 이 그림들도 불명예의 논란에 휩싸이며 논개 영정이 논개사당에서 떼어지기도 했다.

     

     보도하고 있는데, 그는 그림 왼편에는 모아진 금붙이를 증정하는 회장 김봉완과 한복 차림의 부인들을, 오른쪽에는 이를 증정 받는 미나미 총독과 일본 고위관리들의 모습을 그린 이 영광스런(?) 그림을 같은 해 11월 미나미 총독에게 증정했다고 한다.

     

    1941년에는 '경성미술가협회'에 창립회원으로 참여한다. '미술가 일동도 궐기해 서로 단결을 굳게 하고 조선총력연맹에 협력해 직역봉공을 다하자는 목적으로 발기'된, 즉 일제에 충성을 다하고자 결성된 일종의 관변단체로, 총독부 학무과장이 회장으로 조선인 화가들과 조선에 와 있던 일본 화가들이 회원인 친일 미술인 총 집합체였다.

     

    1943년, '경성미술가협회'는 다른 예술 단체들과 함께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에 배치되어 국방기금마련을 위한 전시회를 여는 등 전시체제 유지에 협조를 다한다. 이때 중추적인 역할을 한 김은호는 총독부로부터 그 적극적인 공을 인정받아 총독부 정보과가 후원하는 '반도총후 미술전'의 일본화부 심사원으로 선정되는 권력과 명예(?)를 거머쥔다.

     

    반도총후 미술전은 일제의 군국주의 찬양과 황국신민화의 영광을 고무시키고자 만든 전람회였다. 그는 이렇게 얻은 권력과 부로 당시 가장 권위 있는 미술 공모전인 '선전'에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특선의 영광을 남발, 독식하는 등의 영향력으로 이후 우리 화단을 좌지우지한다.

     

    이런 일련의 경력 때문에 김은호는 화단에 친일파 화가들을 대량으로 배출시킨 장본인, 인맥에 의한 파벌 조성과 일본풍의 채색화가 풍미하게 된 요인을 제공한 화가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황국신민의 영광을 안고 열과 성을 다해 작품 활동과 후진양성에 힘썼던 김은호는 일제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해방 후 결성된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제외 당했다. 이때 제외자 명단에는 그와 함께 김기창, 이상범, 김인승, 심형구 등도 포함되었다. 하지만 이런 시련도 잠시, 김은호는 미군정 이후 친일파의 재기용 붐에 편승해 자신이 키운 제자들의 비호를 받으며 다시 화단의 총수로 떠올랐다. 그 후 그는 대한미술협회와 국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며, 제자들과 함께 미술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문화 권력으로 떠오르게 된다. -책속에서

     

    ▲ 이당 김은호가 어진을 그리는 모습(좌). 창덕궁에서 이당이 전통적 복장으로 순종 어진을 그리고 있다(우).(이당 김은호 작품집 발췌)

     

    김은호는〈신사임당>·〈이이〉·〈이순신〉·〈논개〉등의 공인 영정과 인도 간디 수상의 초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최근 몇 년 김은호의 친일행각 때문에 그가 그린 이 그림들도 불명예의 논란에 휩싸이며 논개 영정이 논개사당에서 떼어지기도 했다.

     

    이당 김은호는 <논개> <미인도> 등의 작품으로 한국근현대 미술을 설명하는 데 빠지지 않는 인물이지만 대표적인 친일 미술가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에는 일제의 화풍이 강하게 배어있을뿐더러 그는 작품을 통해 친일성향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김은호는 1942년 11월 조선미술가협회가 주최한 '반도총후미술전'(전쟁을 독려하는 시국 전람회)에 첫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고 나중에 심사위원을 지내는 등 친일미술조직 활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가 1937년에 그린 <금차봉납도>는 친일 여성단체인 '애국금차회'가 금차(금비녀) 11개, 금반지와 금귀이개 2개, 은비녀 1개, 현금 889원 등을 모아 미나미 총독에게 일제의 성전 승리를 위한 국방헌금으로 납부한 것을 성스럽게 묘사하고 있다. <금차봉납도>는 군국주의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최초의 친일작품으로 화단의 친일활동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받는다.

     

     

     

     

    [금차봉납도] (金釵奉納圖) 를 미나미(南次郞) 총독에게 증정

    김은호는 이 땅이 일제식민지로 전락한 직후 순종의 초상화를 두 차례 그린 어용화가이다. 또 봉건 왕조의 마지막 어용화사(御用畵師)로 출발하여 맨 먼저 일제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내용의 [금차봉납도](金釵奉納圖)를 그린 친일파 화가이기도 하다.

     

    그는 순종의 어진 제작 경력과 빼어난 인물묘사 솜씨로 윤택영, 윤덕영*, 민병석* 등 친일 매판귀족이나 일본인 고관들의 초상화 주문에 응하면서 화단의 총아로 부상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후원에 힘입어 조선인 화가로서는 처음으로 '선전' (朝鮮美術展覽會)16(1937) 때부터 심사위원격인 '참여'작가로 발탁되었다. 선전은 식민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가 1922년부터 주최한 관제 공모전이다.

     

    193711월에 그린 [금차봉납도]는 제작 시기로 보아 참여 작가의 '영광'에 대한 보답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이 그림의 주제는 1937820일 결성된 '애국금차회'의 일화를 담은 것이다.

     

    순종의 외척인 윤덕영의 처 김복완(金福緩)이 회장으로, 이윤용·민병석 등 매판귀족의 처와 김활란* 등이 간사로 참여한 애국금차회는 국방헌금 조달과 황군원호에 앞장 선 여성부인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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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국금차회는 결성식 때 즉석에서 금비녀 11, 금반지와 금귀지개 각각 2, 은비녀 1, 현금 88990전을 모아 일제의 '성전'(聖戰) 승리를 위한 국방헌금으로 냈는데({매일신보}, 1937. 8. 21), 김은호는 이 '감격스러운' 광경을 담은 [금차봉납도]를 미나미(南次郞) 총독에게 증정하였던 것이다.({매일신보}, 1937. 11. 20)

     

    왼편에 금비녀(金釵) 따위를 증정하는 회장 김복완과 한복차림의 부인들을, 오른편에 그것을 받는 미나미 총독과 총독부 고위관료들을 정밀한 초상화법으로 그린 이 [금차봉납도]는 김복완의 남편 윤덕영과 김은호의 친분 관계 속에서 그들의 부탁으로 제작된 것이다.

     

    특히 김은호의 초기 화단활동은 윤덕영의 후원에 힘입은 바 컸는데, 김은호가 어용화사로 발탁되었을 때 윤덕영의 옷을 빌려 입고 궁중에 출입할 정도였다. 윤덕영은 김은호가 어려웠던 청년시절 가장 큰 도움을 준 보호자 겸 은인이었다.

     

    김은호의 [금차봉납도]는 개인적 출세욕에 눈먼 미술인들의 친일화를 부추기고 그 길로 인도하는 데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 군국주의 경향성의 첫 작품이고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에 대하여 김은호는 윤덕영과의 교분 상 어쩔 수 없이 그린 것이라고 하지만 당치 않는 변명에 불과하다. 김은호는 이 작품을 계기로 친일활동을 본격화하였기 때문이다.

     

    1930년대 만주침략(1931)에 이어 대동아전쟁을 선포(1939)하고 태평양전쟁(1941)을 일으킨 일제가 경제수탈과 침략전쟁에 광분해 있는 가운데 그는 조선인의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 창씨개명에 동조하고 군국주의에 야합한 가장 '모범적'인 예술인이었다. 창씨개명에 적극 동조하여 그는 쓰루야마 (鶴山殷鎬)라고 성을 바꿀 정도였다.

     

    전시에 후방에서 화가로서 일본 '천황'을 위해 '화필보국 '(畵筆報國) '회화봉공' (繪畵奉公)하고자 한 조선미술가협회 (1941년 결성)에 김은호는 이상범, 이영일, 이한복과 함께 일본화부 평의원으로 참여하였다. 일본화부는 내선일체에 동조하여 동양화부의 이름을 바꾼 것이었다.

     

    조선미술가협회는 총독부 학무국장이 회장인 관변단체로서 조선에 와 있던 일본인 화가들이 포함된 친일 미술인의 총력 협의체였는데, 19431월 다른 예술단체와 함께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에 배치되어 국방기금마련을 위한 전람회 개최 등 전시체제에 열렬히 협조하였다.

     

    이어 김은호는 이상범과 함께 친일미술전람회의 총화격인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의 일본화부 심사위원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194244). '선전'보다 한술 더 떠 총독부 정보과가 후원한 총후미술전은 조선인에게 일제 군국주의 찬양과 황국신민화의 '영광'을 고무시키기 위한 공모전 형태의 전람회였다.

     

    그와 함께 김은호는 '조선남화연맹전'(1940. 10), '애국백인일수(愛國百人一首)전람회'(1943. 1), 총독부와 {아사히신문}이 후원한 '일만화(日滿華)연합 남종화전람회'(1943. 7) '성전' 승리를 위한 국방기금 마련전에 열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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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호 - 금차봉납도 ⓒ민족문제연구소  [인터넷 도록] 친일 미술인과 작품

     

    김인승=조선미술가협회발기인, 평의원. 반도총후미술전초대작가, 결전미술전 심사위원. 구신회, 단광회 회원. 조선미전 창덕궁상. 국전 심사위원, 예술원 회원, 한국미협이사장, 이화여대 교수. 3.1 문화상, 문화훈장 동백장.

    김경승= 조선미술가협회 평의원. 조선미전 총독상, 추천작가. 결전미술전 심사위원. 해방 후 안중근 김구 안창호 이상재 등 조각상 제작. 국전심사위원, 예술원회원, 홍익대 교수. 3.1문화상, 문화훈장

    김은호=조선미전 참여작가. 조선미술가협회 평의원. 반도총후미술전 심사위원. 국전 심사위원, 예술원 회원. 문화훈장, 3.1문화상, 5.16민족문화상. 논개 안중근 서재필 이승만 영정 제작.
    김기창=조선미전 총독상, 추천작가. 반도총후미술전 초대작가. 결전미술전 조선군보도부장상. 세종대왕 을지문덕 등 영정제작. 수도여사대 교수. 3.1문화상, 은관문화훈장, 국민훈장 모란장, 5.16민족상.
    구본웅=조선미전 특선, 목일회 회원, 종합예술잡지 '청색지'발행. 1030년대 말부터 미술평론을 통해 내선일체와 황도선양 주창. 미 군정청 문교부 편수국 근무.
    노수현=동연사 회원. 동아일보에서 삽화 만화 도안 담당. 조선미전 3등상, 조선남화연맹 참여. 서울대 교수, 예술원회원, 국전 심사위원. 예술원상, 문화훈장
    배운성=베를린 국립미술대학 졸업. 바르샤바 국제목판화전 1등상, 파리 프 살롱 특별회원, 조선미술가협회 평의원, 친일 무용극 '부여회상곡'무대미술 제작. 국전 심사위원, 홍익대 미술과 초대학과장. 6.25당시 월북, 평양미술대학교원.
    윤효중=조선미전 총독상. 대화숙 미술부 지도, 결전미술전 심사위원, 국전 심사위원. 홍익대 교수, 대한미협 부위원장, 예술원 회원. 이순신 민영환 이승만 세종대왕 조각상.
    심형구=조선미전 총독상, 추천작가, 심사위원. 조선미술가협회 발기인, 이사, 간사, 평의원, 서양화분과 상임. 황도학회 회원,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위원. 구신회, 단광회 회원. 반도총후미술전 초대작가, 결전미술전 심사위원. 이화여대 교수.
    이상범=조선미전 추천작가.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위원. 조선미술가협회 발기인, 평의원, 역원. 반도총후미술전, 결전 미술전 심사위원. 국전심사위원, 예술원 회원. 문화훈장 대통령상, 3.1문화상.

    이건영=조선미전 출품, 조선남화연맹전 참여. 반도총후미술전, 결전미술전 출품. 조선총력연맹, 증산총력 위문 선발 파견. 6.25때 월북
    장우성=조선미전 총독상, 추천작가. 반도총후미술전, 결전미술전 출품. 국전 심사위원. 서울대 교수, 예술원 회원. 예술원상, 금관문화훈장. 이순신 윤봉길 사명대사 유관순 영정 제작.
    안석주(좌)=고려화회, 서화협회 회원.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 중앙위원. 황도학회 결성발기인. 임전보국단 발기인. 만화, 삽화, 영화, 비평 분야에서 친일 활동. 대한영화사 이사장.
    박득순=조선미전 특선. 국전 초대작가. 한국미협초대 이사장, 서울대 영남대 교수.
    정현웅=조선미전 특선. 소국민, 반도의 빛, 신시대 등 친일잡이 표지화와 삽화를 전담. 조선미술건설본부 서기장. 신천지 발행인. 6.25때 월북, 물질문화보존연구회 제작부장. 미술가동맹 출판분과 위원장.
    정종여=조선미전 창덕궁상. 결전미술전 출품. 대동아전쟁 출정자와 입영자에게 '수호관음불상'헌납. 6.25때 월북, 평양미술대학 교원.
    현재덕=조선미전 출품. 서울 신세계출판사에서 삽화 그림. 신시대 등 잡지에 삽화와 마노하 기고. 6.25때 월북, 조선미술가동맹 아동미술분과 지도원.

    김종찬=일본군 종군화가이다. 일본육군미술협회가 발행한 화집 '성전미술'에 김종찬의 창씨명 금원찬 작으로 소개되고 잇다. 그는 1939년 일본의 이과전에도 '산서오지야전병원'같은 시국색이 짙은 작품을 출품했다. 김종찬은 해방 뒤에도 군도를 차고 다니는 등 정신이상으로 방황하다 일본에서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병약한 체력에 섬약한 성격 탓이라곤 하더라고 일제가 조선미술계에 끼친 악영향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알려주는 비극적인 인물이다.

    송종훈=일본군 종군화가이다.

     

     

     

     

    파벌조성과 왜색풍을 물들이는데 앞장 서

    김은호는 친일활동의 명성에 걸맞게 한국 근현대 채색화에 왜색풍을 수용하여 유포시켰고 제자 양성에도 적극적이었다.

     

    친일파로서 김은호 개인의 이력은 물론이려니와 폭 넓은 일본 채색화풍 수용과 제자 배출은 우리 현대회화의 정상적인 발전에 큰 장애물이 되었고, 아직까지도 극복되지 못한 식민잔재로 남아 있는 형편이다.

     

    김은호는 인천의 부농 집안 출신으로 구한말 인천관립일어학교(190607)를 다녔다. 일본 물결이 유입되는 세상의 변화를 그 누구보다 빨리 읽은 것이다. 집안이 몰락하자 인흥(仁興)학교 측량과를 마쳤고(1908),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서울로 옮겼다. 그는 측량기사의 조수로 혹은 도장포와 인쇄소 등을 전전하다가 영풍서관에서 고서를 베끼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 곳에서 김은호는 어려서부터 보여 온 그림에 대한 능력과 남다른 손재주를 인정받아 이왕가가 후원하는 근대적 화가 양성기관인 '서화 미술회'에 제2기생으로 편입하였고, 화과(畵科)와 서과(書科) 과정을 마쳤다(191217).

     

    그의 입학은 영풍서관에서 만난 서예가 현채와 중추원 참의 김교성의 소개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안중식, 조석진, 정대유, 강진희, 김응원 등에게서 전통서화를 익혔고, 안중식으로부터 '이당'(以堂)이라는 아호를 받았다. ''()는 주역의 24괘 중 첫 자를 딴 것으로 김은호는 그 아호처럼 모든 면에서 으뜸이었다.

        

     

     

    김은호는 서화미술회에 입학하자마자 빼어난 묘사 솜씨로 친일세도가인 송병준*의 초상화를 그린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순종 초상을 제작하는 어용화사로 발탁되었다(1915, 1928).

     

    초상화가로 유명해지자 당대의 상류층인 친일 귀족, 자본가, 관료 등의 초상화를 맡게 되고, 그들과 교분이 두터워지면서 부와 명성을 동시에 얻는다. 이 경력은 김은호가 친일파 화가로 전락하는 서막인 셈이다.

     

    서화미술회 졸업 후 김은호는 민족미술에의 의지를 표방하며 결성된 '조선서화협회'(1918년 발족, 1921년에 첫 협회전 가짐)전에 참여하였고, 19193·1 운동 때에는 독립신문을 배포하다 체포되어 옥고까지 당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후 화가로서 그림에만 전념하는데, 특히 일본식 채색화 기교에 치중하면서 그나마 지녔던 민족의식은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1922년 이후의 작품 경향과 '선전' 참여 활동이 그것을 잘 말해 준다.

     

    1920년대 후반 대부호 김용문의 도움으로 다녀온 3년여의 일본 유학(192528)은 자신의 전통적 기법에 기초한 화풍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일본식 채색화 기법을 정식으로 습득한 것이다.

     

    그는 3년 동안 도쿄미술학교 일본화과의 청강생으로 일본화과 교수인 유키 소메이(結城素明)에게 사사받았다. 유키 소메이는 서양화의 사생기법과 접목시켜 자연사생 중심의 새로운 일본 풍경화풍을 일으킨 화가이다. 김은호가 귀국하여 제7'선전'(1928)에 출품한 [늦은 봄의 아침](暮春) 이후 섬세한 채색화에는 그의 영향이 뚜렷이 나타난다.

     

    사실 김은호는 인물화나 화조화에서 그 이전부터 이미 장식적인 일본 채색화풍에 물들어 있었다. 선전에 입상하기 위해서는 일본인 심사위원의 구미에 맞는 형식을 구사해야 했기 때문인데, 김은호는 1'선전'[미인승무]4등상, 3회 때 [부활 후]3등상, 7회 때 [북경소견]으로 특선을 수상하였다.

     

    도쿄에 머물면서 일본의 권위 있는 공모전인 '제전'(제국미술원전람회)의 일본화부에 입선하기도 하였고 '동양회화전'에서는 [단풍]으로 1등상을 받았다(1928). 이들은 대부분 당시 일본에서 유행한 새로운 감각의 채색화풍을 따른 것이다.

     

    그런데 제8'선전'(1929) 때 출품작이 입선에 그치자 출품을 중단하였고, 한때 발길을 끊었던 서화협회전에 다시 참여하였다. 이 행동은 이익을 따라 움직이는 철새 같은 미술인의 전형으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 이후는 허백련과 2인전을 갖거나 김용문의 도움으로 중국여행을 통하여 견문을 넓혔고, 특히 후진양성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다가 8년 만인 제16'선전'(1937) 때부터 '참여'작가로 선정되는데, 바로 그 해 가을 앞서 설명한 [금차봉납도]를 그린 것이다.

     

    이처럼 김은호는 자신의 출세욕에 따라 왕성한 활동을 통하여 화단의 자리를 굳혔다. 그러니 주변에는 자연히 많은 사회 저명인사 애호가와 화가 지망생들이 모이게 되었다.

     

     

     

     

    김은호 자신도 후배양성에 관심이 많았고, 한편 '인정미 넘치는 예술가'(이규일, 1992)로 지칭되듯이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던 것 같다.

     

    1920년대 후반부터 그의 화실 낙청헌(絡靑軒)에 몰려든 사람들과 함께 '이묵회'(以墨會)라는 서화연구회를 꾸렸고, 이들 중 백윤문, 김기창*, 장우성, 조중현, 이유태 등은 따로이 '후소회'(後素會)를 결성하여 1936년부터 정기전을 갖기 시작하였다. 또한 1937년에는 박광진, 김복진과 함께 체계적인 미술교육기관으로 '조선미술원'을 개설하였으나 시도로 그쳤다.

     

    '후소회'는 김은호의 장식적이고 정밀한 필치의 섬약한 일본식 채색화풍을 전수한 모임으로서 일본 남화풍이 가미된 산수계열의 이상범 문하 '청전화숙', 전통적 남종화풍을 고수한 허백련의 광주 '연진회'와 더불어 당시 동양화 분야의 3대 후진양성 통로였다.

     

    이러한 세 유형의 화가 모임 가운데 특히 '후소회'의 활동이 가장 돋보여 해방 후 국전 운영과 화단까지 주도하는 정치력을 갖게 된다. 여섯 번의 정기전(193643) 외에도 후소회원들은 '선전'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었다.

     

    1934년부터 김은호가 지도한 백윤문, 한유동, 장운봉(장덕), 김기창, 장우성 등이 입선과 특선을 차지하였고, 21'선전'(1942) 때에는 동양화부 입선작 60점 가운데 21점이 회원작품이었으며, 2점이 특선하여 세상의 관심을 끈 바도 있다({매일신보}, 1942. 5). 뿐만 아니라 회원의 주축을 이룬 백윤문, 김기창, 장우성, 이유태, 조중현 등은 최고상과 특선 등을 독식하다시피 하였다.

     

    그런 가운데 주변의 시샘과 방해공작도 있었던 모양이다. 김기창이 16회부터 19회까지(193740) 연속 4회 특선으로 김은호의 제자 중 첫 추천작가로 선정되는데, 19회 특선 때의 일화가 그 한 사례이다.

     

    심사 중 특선후보 작품 속에서 일인 심사위원이 김기창 작품을 치워 놓자 안면 있는 다른 심사 위원에게 간청하여 재심을 받게 했다는 것이다. 결국 그 심사위원이 김은호의 제자사랑에 감복하여 무감사 특선으로 밀어 주었다고 하며, 김은호는 답례로 자신이 아끼던 고려청자를 선물하였다고 한다.

     

    청각장애자인 제자를 생각하는 김은호의 '인정미'와 심사원 자격으로 '참여'한 정치력을 한껏 과시한 것이다. 이 일화는 이후 화단에 친일파 화가의 대량배출, 인맥에 의한 파벌 조성과 왜색조의 채색화풍을 풍미하게 한 요인이 되었음을 적절히 시사해 준다.

     

    이런 현상은 당대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기득권을 강화하며 해방 후 화단에까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관변을 맴돌며 친일행각은 철저히 감춰지고

    황국신민의 '영광'을 안고 열과 성을 다해 작품 활동과 후진양성에 전념해 온 김은호는 일제에 부역한 탓에 결국 해방 직후 결성된 '조선미술 건설본부'에서 이상범, 김기창, 김인승*, 심형구*, 김경승, 윤효중 등과 함께 제외 당했다.

     

    그러나 김은호는 미군정 이후 친일파의 재기용 내지 득세에 편승, '인정미'로 기른 제자들의 옹호 속에서 다시금 화단의 총수로 떠오르게 된다.

     

    '미협'(대한미술협회)'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주도적 참여를 시작으로 제자들과 함께 제도권 미술계의 가장 거대한 파벌로서 일제 강점기에 이어 지속적으로 정치력을 키워 갔다. 해방 후에도 김은호는 여전히 정심한 필치와 채색의 인물화 분야의 일인자였다.

     

    그래서 이승만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 아래서 관변의 요청으로 많은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이순신, 정몽주, 신사임당, 논개, 성춘향, 안중근, 서재필, 이승만 등은 물론 미국 대통령 윌슨,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주한미국 대사 무초 등의 초상화는 화풍도 그러하려니와 일제 때 어용화사에서 시작되어 관변에서 맴돌며 살아간 흔적의 좋은 사례들이다.

     

    이에 힘입어 김은호는 군사정부 아래서 서울시 문화상, 5월 문예상 미술부문 심사위원과 8·15 해방 17주년 기념 문화훈장(이상 1962), 3·1 문화상 예술부문 본상(1965) 및 대한민국예술원회원(1966)과 예술원상(1968), 115·16 민족문화상 학예부문 본상(1976)을 받는 등 다른 친일인사와 마찬가지로 친일화가로서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그에 못지않게 김은호에 대한 인간적인 평가도 존경과 찬사로 일관된다. 이은상은 팔순기념으로 김은호를 다음과 같이 읊조린 바 있다.

     

    "솔거 가신 뒤에 천오백 년 긴세월을 동방화단에 누구누구 해옵던고, 화선을 만나려거든 이묵헌을 찾으시오 붓끝에 새가 울고 먹 뿌리면 꽃이 피고 산수 인물이 조화 속에 나타나고 담소로 팔십 평생에 늙을 줄을 모르네 빼어나 고운 모습 학수(鶴壽)를 사오리다 수정같이 맑으신 뜻 석수(石壽)를 사오리다 문생들 화통을 이어 백대장생 하오리다." (畵仙以堂頌, 1971. 8)

     

    또한 김은호에 대한 기존 미술계의 회화사적 평가 역시 마찬가지이다. '전통의 맥을 시대적으로 되살린 근대적 채색화의 개척자''근대·현대 한국화단에 새로운 채색화 계파를 형성시킨 유일한 존재' (이구열, 1990)라거나 '극채세화 (極彩細畵)의 화풍을 고수하면서 진실한 마음으로 제자를 기른 인정미 넘치는 예술가'(이규일, 1992)로 논평되고 있다.

        

     

    ▲ 1936년 발족한 동양화 그룹인 ‘후소회’(後素會)의 창립전 기념사진(왼쪽). 이당 김은호의 문하생들이 주축이 돼 백윤문, 김기창, 장우성, 이유태, 조중현 등이 참여하면서 최근까지 전시를 이어 오고 있다.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그의 친일 협조에 따른 반민족 행위와 왜색 조에 물든 회화세계에 대하여는 '아쉽다'라거나 '어쩔 수 없었던 일'로 치부하면서, 그가 이룬 사실주의나 제자 육성의 공적에 비하면 크게 개의할 일이 아닌 것으로 넘어가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왜색풍은 마치 '엔가' 풍의 트롯트 뽕짝이 '전통가요'로 둔갑한 현실정서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 현대화단의 숙제로 남아 있는 일제잔재 청산은 여전히 김은호에 대한 바르고 엄정한 재평가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이태호(전남대 교수·미술사,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근현대 동양화단 채색화의 대가

     

    김은호(金殷鎬, 1892-1979, 鶴山殷鎬 쓰루야마 마사시노기)

    양은(良殷), 한국화가, 본관은 상산(商山). 초명은 양은(良殷), 호는 이당(以堂). 인천 구읍면 향교리(지금의 官校洞)에서 농가의 2대 독자로 태어났다.

     

    19128월 서울의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 화과(畵科)에 입학하여 조석진(趙錫晉안중식(安仲植)의 제자로 전통회화의 여러 기법을 배웠다. 1915년에 화과과정(畵科過程)을 졸업하고, 1917년에는 서과과정(書科過程)도 수료하였다. 그동안 창덕궁의 하명(下命)으로 순종의 반신상 어용(御容)을 그렸고, 시천교(侍天敎)측의 의뢰로 동학의 교조 최제우, 2세교주 최시형, 그리고 당시 시천교를 이끌던 김연국(金演局)의 전신좌상을 제작하였다. 1918년 서화협회가 창립되자 정회원이 되었으며, 19193·1운동에 가담, 등사판 독립신문을 배포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5개월간 복역하였다.

     

    1920년에는 창덕궁 대조전의 벽화 백학도 白鶴圖를 그렸다. 1921년 이후에는 서화협회전람회(약칭 協展)에 계속 출품하였으며, 조선미술전람회(약칭 鮮展) 동양화부에서 입상과 특선을 거듭하였다. 그의 작품은 새로운 표현감각의 세필채색화로 부드럽고 섬세한 필선과 맑고 우아한 채색의 사실적인 미인도(美人圖), , 새 등의 화제를 주로 다루었으나, 전통형식의 신선도 등에서도 독보적 경지를 펼쳤다.

     

    1924년부터 고려미술원(高麗美術院)에서 후진을 지도하다가 1925년 동경에 건너가 3년간 머물면서 자신의 예술기량을 더욱 연마하고 시야도 넓혔다. 동경에서는 당시 가장 권위있던 제국미술원전람회(약칭 帝展)에 입선하여 주목을 끌었다.

     

    1928년에는 창덕궁 선원전에 봉안된 순종어진(純宗御眞)과 태조·세조의 어진을 봉사(奉寫)하였다. 1933년에는 서화협회 간사가 되었고, 1936년에는 양화가 박광진(朴廣鎭), 조각가 김복진(金復鎭)과 힘을 합쳐 조선미술원(朝鮮美術院)을 설립하고, 한때 후진 양성을 도모하였다.

     

    그밖에도 1930년 이전부터 자신의 낙청헌(絡靑軒)화실에서 독자적으로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백윤문(白潤文김기창(金基昶장우성(張遇聖이유태(李惟台조중현(趙重顯김화경(金華慶안동숙(安東淑) 등이 그때 배운 제자들이다.

     

    1937년부터는 조선미술전람회 초대작가 위치에 올랐고, 1939년에는 남원의 춘향사(春香祠)를 위하여 춘향상을 그렸다(당시의 그림은 6·25사변중에 소실되었고, 현재 영정은 그뒤에 다시 그린 것이다.). 1945년 조국광복 이후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國展)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수도여자사범대학 명예교수 등을 역임했다.

     

    해방이 되자 친일화가로 따돌림을 받았으나 일제잔재가 청산되지 않은 채 1948년 남한정부가 수립되고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열리면서 추천작가 자격으로 출품했다. 그뒤 심사위원과 추천작가를 지내면서 국전출품작의 화풍과 내용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전체 화단에도 영향력을 키워갔다. 해방 후에는 역사인물의 초상화 제작에도 한 몫을 했다. 신사임당·이이·이순신·논개등의 공인 영정과 인도 간디 수상의 초상을 제작했다.

     

    1892(고종 29) 인천에서 출생하였다. 안중식, 조석진을 사사하고, 한말 최후의 어진화가를 지냈다.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 등에 출품하여 여러 차례 입상하며 등단하였다. 1920년 후반부터 화실을 개방하였고 동경 유학을 떠나 동경 미술학교를 3년 수학하고 한국에 돌아와 1936후소회라는 미술 단체를 창립하여 후진을 양성하며 한국 회화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1937년 친일 미술인 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 일본화부 평의원이 되어 같은 해 11월 일본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내용의 <금차봉납도(金釵奉納圖)>를 그리는 한편, 1942년부터 2년간 반도총후미술전 심사위원을 맡아 친일 활동을 하였다.

     

    광복 후에는 194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 추천작가, 1955년 국전 심사위원을 거쳐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학교) 명예교수를 역임했다. 1962년 서울특별시문화상, 19653·1문화상, 1968년 대한민국예술원상을 받았고, 1966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작품으로는 <승무(僧舞)>, <간성(看星)>, <향로>, <군리도(群鯉圖)>, <춘향초상>, <충무공 이순신 초상> 등이 있다.

     

    그의 작품세계는 인물·화조·산수 등 폭넓은 영역을 다루었으나 특히 인물화를 많이 남겼다. 선전 1회에 출품한 <미인승무도(美人僧舞圖)>를 비롯하여 주로 인물 소재를 다루면서, 종전 스타일과는 다르게 선묘를 억제하고 서양화법의 명암과 원근을 적용하였다. 전통 화법에 일본화의 사생주의(寫生主義)를 흡수하고, 또 양화풍의 화법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인물화 외에 수묵담채의 산수풍경, 문인화에서도 독특한 필력을 발휘하였다.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에게서 전통화법을 폭넓게 수학하여 일찍부터 특히 세필채색화에서 천부적 재능을 발휘했던 이당은 창덕궁 대조전 안의 동서 벽면에 백학도를 그린다. 이 그림은 전통적 수법과 고귀한 주제에 충실하며 특장의 채색화 기량을 최대한 발휘한 이 작품은 이당의 초기를 대표하는 역작이기도 하다.

     

    인물화를 특히 잘 그렸던 김은호는 궁중의 초상화를 비롯하여 많은 초상화를 그렸다. 초기에 그렸던 작품 <간성>1927년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작품으로, 시원한 방안에 앉아서 화투놀이를 하는 여인의 모습을 그렸다. 곱게 차리고 앉아 화투놀이를 하는 모습이나, 피우다 둔 담배 등으로 보아 여염집 여인의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여인의 무료함 만큼이나 시든 꽃, 생기 없는 댓잎, 새장에 갇힌 앵무새 등이 여인의 심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 그는 1925년 일본에 건너가 3년간 체류하면서 신일본화풍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영향으로 얼굴은 분을 바른 듯 희게 그리고 전체적으로 무척 화사한 느낌의 밝은 채색을 쓰고 있다.

     

        

    이당 김은호 1949년작 이순신 영정   이당 김은호의 1962년작 이순신

     

     

    평론

    (……)김은호의 이러한 새로운 사실적 재현 기술인 사진회수법은 시각이미지의 정확한 묘사력 증진과 함께 근대적 보편성을 추구하는 과학적 리얼리티 확장에 기여하는 의의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그를 근대 전통 회화 최고의 명수로 이름을 날리게 했다. 1912년 서화미술회화과에 입학한 지 21일 만에 순종의 초상사진을 모사하고 인물 잘 그리는 천재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으며, ‘사진회수법을 깜짝 놀랄만큼 기묘절묘하게 구사하여 충격적인 사실감과 함께 장안의 화제가 되면서 30대에 이미 거장으로 호칭될 정도로 명성이 높아졌다.

     

    김은호는 이와 같은 초상 화가로서의 직인적 기량을 심화시키는 한편, 근대적 창작 미술의 공개 제도로 새롭게 유입된 전람회에 신작품을 출품하면서 신미한 경향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1922년 창설된 식민지 정부였던 총독부 주최의 관전인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부를 통해 메이지기의 미학적 이슈 또는 이상적 미의 추구와 결부되어 부각된 미인화와 화조화 분야를 전문적으로 다루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화목의 중앙화풍인 일본 관전의 신일본화풍을 수용......

    한편, 1950년에 제작한 이충무공상 李忠武公像의 모대본좌상(帽帶本坐像)은 순천 충무사(忠武祠), 갑주본입상(甲胄本立像)은 한산도 제승당(制勝堂)에 각각 봉안되었으며, 정부에 의해 공인영정(公認影幀)으로 인증되었다.

     

    그뒤 장수(長水)와 진주 촉석루(矗石樓)옆의 논개사당(論介祠堂)에 봉안된 의기논개상 義妓論介像, 강릉 오죽헌(烏竹軒)신사임당상 申師任堂像이이상 李珥像, 밀양 영남루(嶺南樓)아랑상 阿娘像, 그밖에 서울 안중근의사기념관의 영정과, 전주 이영남장군사당(李英男將軍祠堂)의 영정 등 역사상의 주요인물상을 무수히 제작하였다.

     

    미술창작과 후진양성에 끼친 공로로 1962년 문화훈장대통령장을 받았으며, 1965년에 3·1문화상, 1968년에 예술원상을 각각 수상하였다. 자서전적 저서로 서화백년이 있다. 대표작은 백학도(1920)·춘향상(1960년 재제작해학 海鶴(1965)·백모란 白牡丹(1968) 등이 있다.

     

    [대표적 작품]

     

     

     

    1950년에 제작한 이충무공상(李忠武公像)의 모대본좌상(帽帶本坐像: 사모와 각대를 착용한 관리의 정복(正服) 좌상)은 순천 충무사(忠武祠), 갑주본입상(甲胄本立像: 갑옷과 투구를 착용한 군복 입상)은 한산도 제승당(制勝堂)에 각각 봉안되었다. 이 작품은 정부에 의해 공인 영정(公認影幀)으로 인증되었다.

     

    그 뒤 장수(長水)와 진주촉석루(矗石樓) 옆의 논개사당(論介祠堂)에 봉안된 의기논개상(義妓論介像), 강릉오죽헌(烏竹軒)신사임당상(申師任堂像)이이상(李珥像), 밀양 영남루(嶺南樓)아랑상(阿娘像), 그밖에 서울 안중근의사기념관의 영정과, 전주 이영남장군사당(李英男將軍祠堂)의 영정 등 역사상의 주요 인물상을 무수히 제작하였다.

     

    대표작은 백학도(1920간성(看星)(1927춘향상(1960년 재제작해학(海鶴)(1965백모란(白牡丹)(1968) 등이 있다. 자서전적 저서로 서화백년이 있다. 주요 인물도는 <춘향영정>, <논개 영정>, <미인도>, <무희> 등이 있다. 화조화도 즐겨 그렸는데 문인화풍(文人畵風)의 전통적 묵매수법(墨梅手法)과 잘 조화되면서 전통계승의 독특한 형태를 이루어내고 있다.

     

     이당 김은호의 논개와 춘향

    (도판-상)중앙은 양귀비. 좌우측은 춘향과 논개로 안면만을 잘라 서로 비교하였다.

    특히 위의 논개와 양귀비의 안면이 판에 박은 듯 똑 같다.(작가- 이당 김은호)
    (도판-하)좌에서부터 양귀비, 춘향, 논개. (작가- 이당 김은호)

     

     

     

    참고문헌

    김은호, {書畵百年}, 中央日報社, 1977.

    이구열, [畵壇一境一以堂先生의 생애와 예술], 1968.

    한국근대미술연구소 편, 화집 {이당 김은호}, 국제문화사, 1978.

    화집 {이당 김은호}, 예경산업사, 1989.

    {한국근대회화선집} 한국화 3'김은호', 금성출판사, 1990.

    書畵百年(金殷鎬, 中央日報社, 1977)

    畵壇一境(李龜烈, 東洋出版社, 1968)

    以堂金殷鎬(한국근대미술연구소, 1978)

    近代韓國繪畵의 흐름(李龜烈, 미진사, 1983). 李龜烈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41). 김은호 : 친일파로 전락한 어용화사 (이태호), 친일파 993

    근대한국회화(近代韓國繪畵)의 흐름(이구열, 미진사, 1983)

    이당(以堂)김은호(金殷鎬)(한국근대미술연구소, 1978)

    서화백년(書畵百年)(김은호, 중앙일보사, 1977)

    화단일경(畵壇一境)(이구열, 동양출판사, 1968)

    서화미술회?조선미술전람회

    <이당 김은호의 삶과 예술>, 인천광역시립박물관, 2003

    <韓國近代繪畵選集 : 韓國畵>, 안중식, 금성출판사, 1990

    <이당 김은호>, 박용숙, 藝耕産業社, 1989

    <이당 김은호>, 이구열, 國際文化社, 1978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100인선집 김은호>, 문선호 편, 금성출판사, 1976

     

     

     

    조용만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122) 30년대의 문화계-이당 김은호

    이당은 타고난 성실과 근면으로 얼마 안 가 동양화단의 중진이되었고 인물화로서는 당대 제1인자가 되었다. 그는 화가로서 드물게 보는 사교가여서 그 당시의 왕가 족적들과 귀족층, 그리고 부유층에 많은 친지를 가지고 있었다. 고희동·이도영중심의 서화협회와도 잘 협조하여 협전에 매년 출품하였고, 총독부 미전에도 해마다 출품하였다.

     

    그후 서화계의 파트롱으로 유명한 단자 이용문의 후원으로 동경유학의 길을 떠난 것이 1925년이었다. 일본화단의 대가인 소실취운과 결성소명의 지도를 받아 제전에 입선하였고, 3년 만에 귀국하였다가 다시 중국 북경으로 떠났다. 이 역시 이용문의 후원이었다. 동경과 북경에서 수련을 거치고 귀국한 김은호는 권농동 자택의 사랑을 개방하여 서화 애호가의 구락부로 만들었다.

     

    권농동의 이 화실은 위창 오세창이낙청헌이라고 명명한 것인데, 청년 후진들과 깊은 관계를 맺으란 뜻이라고 하였다. 실업가·관리·서화 지망자들이 모여 사군자를 배우고 담소하고 놀았는데, 이당은 자주 놀러 오는 서화 애호가들과 의논하여 모임의 이름을 짓기로하고 이당의 자를 따서 이묵회라고 회 이름을 지었다.

     

    이묵회란 새 이름이 생기자 회원이 자꾸 늘어 이것이 은연중에 춘곡의 서화협회와 대립하는 서화단체가 되었다. 이묵회와 동시에 후소회도 생겼는데, 후소회란 이당의 젊은 제자들의 회합이었다. 낙청헌에는 젊은 그림 학도가 많이 모여 이당에게 그림을 배웠는데 백윤문·김기창·장우성·이유태·조중현·한유동 등이 중요한 멤버였다. 이들 중 김기창·장우성·이유태는 지금은 당당한 대가가 되어 이름을 날리고 있지만 그때는 미미한 화학도였다.

     

    이들이 동문전을 열고 싶다고 해서 우선 회명을 지어 달라고 스승 이당한데 청하였다. 낙청헌에는 이묵회 회원 이외에 당대의 명사들도 많이 들렀는데 육당, 위당 정인보, 만해 한룡운, 고지 최린등이 자주 들렀다. 그래서 이당이 어느날 나온 위당한테 청해 지은 것이 후소회였다. 공자의 말에회사후소란 어구가 있어 거기서 딴 것이었다.

     

    이 후소회의 이름을 가지고 1936년 가을 제1회 동문전을 개최하였다. 그때 신문에서는 후소회는 이당 김은호 화백의 문제중 이미 일가를 이룬 신진들의 화회로서 조선미술의 부흥을위하여 동문전을 개최한 것이라고 칭찬해 주었다.

     

    이당의 사업으로 또 하나 1936년에 동양화의 허백련·김은호, 서양화의 박광진, 조각의 김복진등 네 사람이 중학동에다 조선미술원을 창설하고 1937년에 전 화단을 망라한 성대한 낙성기념전을 개최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이당의 업적은 이묵회를 조직하고 이묵회전을 개최하여 서화 애호가의 폭을 넓펴 놓은 것과 후소회를 조직하고 많은 훌륭한 후배 양성에 힘쓴 것, 두가지로 요약할수 있다.

     

    그는 해방을 전후하여 화필이 무르녹아 춘향의 초상을 그리고 이충무공의 영정도 그려 인물화의 최고봉임을 과시하였다. 세상에서는 그가 주초와 여색을 모르는 무풍류한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부산 피난 중에 영도에있는 어느 요정에서 이당이유산가를 비롯한 노랫가락과 유행가를 못하는 것 없이 부르는 것과 옛날이야기를 어떻게 구수하게 잘 하는지 모두들 혀를 차고 탄복하는 것을 보았다. 이당 혼자서 온 밤을 노래와 이야기로 새우고 새벽녘에야 헤어졌는데, 이당이 작고하기 얼마 전 종로에 있는 태을 다방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깔깔 웃은 것이 그와 만난 최후였다.

        

     

    1931년 제작된 최초 춘향과 이당 김은호가 1939년에 그린 춘향
    그리고 춘향 초상을 그리기 위해 모델로 삼은 조선권번 어린 기생 김명애와 1960년에 다시 제작된 춘향영정  

     

    [조용만, <30년대의 문화계-이당 김은호, 중앙일보, 1984. 12. 11~13. 11]

     

    30년대의 문화계(124)-이당과 묵로

    이당과 묵노는 어떻게 된 까닭인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당은 술도 안 마시지만 신문사 망년회 같은 데 다른 화가들은 다 나오는데 그는 한번도 나온 일이 없었다. 그럴 때면 묵노는 여러 사람 있는 데서 이당을 터놓고 욕하였다. 이당, 제가 무어야. 일본놈 식의 미인도나 그리면서 잘난체 한단말야!

     

    그러면 이런 소리가 이당의 귀에 안 들어갈 리가 없었다. 점잖은 이당도 지지 않고, , 묵노놈 보게나. 내가 처음 서화미술회에 들어갔을 때 보니까 열대여섯 살짜리 애송이 녀석이 개구멍바지를 겨우 면한 누비바지를 입고 마룻바닥에 엎드려 먹장난만 치던 놈이 무엇이 어쨌다는 거야!하면서 문제도 안 된다는 말투로 응수하는 것이었다.

     

    묵노는 늘 말이, 저는 오원 장승업이라고 하면서 이당의 세필파는 반대로 종이 위에 먹물이 뚝둑 떨어지는 생동감 있는 그림이 참 그림이지, 이당의 그림이 그게 그림이냐고 하였다. 이런 묵노의 그림을 보고 과연 금세 오원이로군!하고 육당 최남선이 칭찬한 일이 있어서 묵노는 육당선생은 그림을 볼 줄 아신단말야!하고 탄복한 일이 있었다.

     

    어느해 정월에 우리들이 육당 댁으로 세배 갔을 때 일이다. 월탄집 가는 길인 효제동에 있는 육당집은 옛날 술도가로 광이 많았다. 이 많은 광은 술독을 넣어 두는 창고였는데 육당은 거기다가 책을 넣어 두었다. 육당은 넓은 안방을 서재 겸 응접실로 쓰고 있어서 그 방에서 원고를 쓰고 손님을 접대하고 있었다. 육당은 묵로가 조르는 바람에 겸재의 산수화, 혜원의 풍속화, 그리고 우봉 조희룡의 매화 그림을 내보였다 묵로는 열심히 그 그림들을 보고 있더니 별안간 무슨 생각을 했던지 선생님, 저기다가 제가 매화를 그리겠읍니다. 괜찮죠?하고 육당이 앉아있는 등뒤의 다락문을 가리켰다.

     

    다락문은 네 쪽의 기다란 문으로 되었는데, 아무 것도 그린 것이 없는 흰종이 문짝이었다. 이 네개의 문짝에다 매화 그림을 그리겠다는 것이었다. 좋아, 그려보시오. 어디 묵노 솜씨를 봅시다.

     

    이래서 벼루··붓 준비를 해가지고 묵노는 웃통을 벗고 약간 상기된 얼굴로 큰 붓에 먹을 꾹꾹 찍어 날 듯이 일필휘지로 늙은 매화나무를 그려 갔다. 머리 속에서 미리 구상된 것 같이 거침없이 붓을 놀려가는데 우리들은 놀라움으로 묵노의 이 무엇에 씐 것 같은 운필을 바라보았다.

     

    얼마 안 가 늙은 매화나무에 송이송이 매화꽃이 핀 그림이 완성되어 네 쪽의 문짝을 채우고 넓은 방안을 환히 빛나게 만들었다. 묵로는 앞에서, 또 뒤로 물러나 그림을 보면서 몇 군데 붓을 대더니 마침내 붓을 놓고 다 되었읍니다하고 육당한테 꾸벅 절을 하였다.

     

    육당은 앞으로 와서 한참 매화 그림을 바라보더니 무릎읕 탁 치면서허허, 묵로는 금세 오원이로군!하고 최대급의 찬사를 발하였다. 신운이 도는데! 놀라운 재기야!하면서 육당은 연거푸 칭찬하였다.

     

    노는 이 일이 있은 뒤 술자리에서 금세 오원! 그렇지. 나로 말하면 오늘날의 오원 장승업이란 말야! 안목이 높으신 육당께서 그렇게 지어 주셨으니 누가 뭐라해도 나는 당대의 오원이거든!이 일이 있은 뒤 묵로는 술이 들어가면 기고만장으로 금세 오원을 내세웠다. 묵노는 이런 친진난만한 점도 있는 사랑스런 장난꾼 이었다.

     

     

    한국 화단의 거목 이당 김은호 선생의 제자들 모임에서 출발, 국내 최고의 미술 동인 그룹으로 발전한 ‘후소회’가 1995년 10월 6일 서울 중구 정동 조선일보미술관에서 회원전 개막식을 가졌다. 왼쪽부터 이당의 부인 원봉순씨, 안동숙 회원, 김기창 회장, 한유동 회원, 김학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