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金性洙, 1891~1955)
언론. 교육. 산업 보국의 정신에서 부일협력의 길로
▲ 1943년 4월 2일, <매일신보>에 실린 김성수의 철문 헌납 기사. ⓒ조세열
1891 - 전라북도 고창 출생
김성수(金性洙, 1891년 10월 11일 ~ 1955년 2월 18일)는 일제 강점기의 교육인 겸 언론인·기업인·민족운동가[주해 1]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 언론인, 교육인, 서예가이다. 전라북도 고창 출생으로, 부안 줄포에서 자랐다. 자는 판석(判錫), 아호는 인촌(仁村), 본관은 울산이다.[1]
1914년 와세다 대학교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1915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학교장을 지내는 등 교육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 운동 준비에 참여하여 자신의 집을 회합 장소로 제공하였다. 1919년 10월 경성방직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경성방직은 초기에 경영 상황이 어려웠으나 1926년 이후 성장하였다. 김성수는 경성방직을 운영하며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였고, 1920년에는 양기탁, 유근, 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였다. 1932년 오늘날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였다. 1930년대 김성수는 실력양성론에 따라 자치운동을 지지하였다.
일제 강점기 동안 김성수는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받았고, 동아일보는 수시로 폐간을 당하여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1930년대 후기부터 친일 행적을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김성수는 학병을 모집하는 연설을 하는 한편, 전쟁물자 지원에도 앞장서는 등 친일 활동을 하였다.
8·15 광복 이후에는 한국민주당 조직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운동 등에 참여한 뒤 김구, 조소앙 등과 함께 신탁통치반대운동를 주관하였다. 1947년부터 한국민주당의 당수를 지내기도 했고 1947년 3월부터 정부 수립 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지냈다. 그 뒤 5.10 단독 총선거에 찬성하였다. 1949년 민주국민당의 최고위원이 되었고, 한국 전쟁 기간인 1951년 5월부터 1952년 8월까지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부산 정치 파동으로 헌법을 개정하여 재선을 추진하자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1954년 이승만의 장기 집권에 반대하는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여 통합 야당인 민주당의 창립 준비에 관여하였고, 1955년 2월 18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임종 직전 천주교의 세례와 종부성사를 받았다.
사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한편, 2002년 2월 28일 대한민국 국회의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언론계 친일파로 수록되었다.
언론. 교육. 산업 보국의 활발한 할동 전라북도 고창 출생. 호남의 거부였던 김경중의 4남으로, 3세에 큰아버지인 김기중의 양자가 되 었으며. 1906년 전남 창평에서 송진우와 영어공부를 하고, 1908년 군산의 금호학교에 다녔다.
이해에 송진우와 일본 도쿄로 건너가 세이소쿠(正理)영어학교와 긴 조(錦城)중학교를 거쳐 1910년 와세다 대학에 입학, 1914년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1915년 4월 중앙학교를 인수, 1917년 3월 교장이 되었으며, 같은 해 경성직뉴주식회사를 맡아 경영하고, 1919년 1월부터 송진우.현상윤 등과 중앙학교 숙직실을 본거로 독립운동을 펼 방책을 꾸며서, 3.1운동으로 결실되었다.
그 해 1O월 경성방직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20년 4월 동아일보를 창립하였다. 1922년 동아일보를 통해 물산장려운동을 폈으며, l923년 민립 대학설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32년 3월 보성전문학교를 맡아 경영하여 교장에 취임하였다. 보성전문학교는 고려대학교의 전신이다.
중일전쟁 이후 부일협력의 길로
김성수는 언론.교육.산업 보국의 정신에서 일탈하여 중일전쟁후 부일협력의 길을 걸었다. 1939년 9월 서울시의 라디오 강연에 출연하여 일제의 전시동원을 호소하였으며 1938년 6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의 발기인 및 이사로 참석하고, 연맹 산하 비상시생활개선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39년 7월에는 이른바 황국신민화를 도모하기 위하여 일본 내에 조직되었던 협화회의 재경성유지간담회에 참석, 발언 한 바 있다.
1940년 결성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로 참여하고, 1943년 이 단체의 총무위원으로 활동 하였으며 1941 년 8월 일제의 전쟁동원에 협력하는 흥아보국단의 결성에 준비위원으로 참여하고, 10월 임전보국단의 감사로 활동하였다.
1943년 8월부터 학병제,징병제를 찬양하는 글을 쓰고 연설을 하였다. 이해 8월 5일자 매일신보에 [문약의 기질을 버리고 상무의 정신을 찬양하라] 라는 논설을 쓴데 이어 11월 6일자에 [대의에 죽을때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라는 논설을 썼다. 이 밖에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라는 글과 담화를 발표하였다.
해방 후 활발한 정치활동 해방후 한국민주당. 민주국민당을 창당하였고 대한독립촉성회 부회장. 부통령 둥을 역임했다. 김성수는 이후 야당인 민주국민당 고문으로 활동하다 1955년에 사망했다.
평가와 비판
김성수는 국가가 인정한 친일파다. 그가 친일파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부터 그를 알고 지냈으며, 해방 후 대통령 권한대행과 국무총리를 지낸 허정(許政)은 '인촌은 이해로써 사람들을 조종하거나 감언이설로 현혹시키는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는 단지 굽힘 없이 주장하면서 이 정도로 실현할 방안을 제시하는 떳떳한 태도로 일관했다. 누구나 그의 사심없는 마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설득에는 남과는 다른 힘이 있었다. 덕망이 뒷받침하는 설득은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설득인 것이다.[108]'라고 평가했다. '그는 인간적으로도 매력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담백하고 때로는 천진난만하기조차 해서 그를 대하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놓이고 믿음이 앞섰다. 그러므로 마음을 활짝 열고 그와 의논을 하고 함께 일을 해 나갈수 있었다.[108]'고 평하였다.
허정은 '인촌에게는 개인적인 야심이 없었다. 그에게 명예나 권세를 추구할 야심만 있었다면, 그는 해방 후 자신의 야심을 손쉽게 달성할 많은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명예나 권세에는 조금도 뜻이 없었다. 어떤 곤경이나 위기를 맞아, 자칫하면 자신의 명성에 흠이 가지 않을까 해서 다른 사람들이 피하려고 하는 자리를, 맡아 위기를 수습하고는 조용히 뒤로 물러나곤 했다.[108]'는 것이다.
1916년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의 학생이자 대한민국의 한글학자였던 일석 이희승은 '자상하면서도 근엄하였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틈틈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주는 말씀을 들려주던 모습은 잊혀지지 않는다.'고 하였다.[26] 소설가 춘원 이광수는 1931년에 쓴 김성수의 인물평전인 <김성수론> 에서 그의 성공을 시세(時勢) 2 + 재력 3 + 인격 5 라고 평가하였다.
15대 대통령 김대중(金大中)은 그에 대해 비록 감옥에 가고 독립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어떠한 독립투쟁 못지않게 우리 민족에 공헌을 하였으며[50] 중앙고와 고려대를 운영해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일제 강점기를 극복하고 이 나라를 이끌 고급 인력을 배출, 우리 민족의 내실 역량을 키웠고, 근대적 산업규모의 경성방직을 만들어서 우리 민족도 능히 근대적 사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김대중은 그가 민족의 앞날을 이끈 탁월한 스승이자 지도자였다고도 평가하였다.[50]
추기경 김수환은 1991년 10월 11일 '인촌 탄생 100주년 추념사'에서 "인촌 선생은 한 시대를 이끌어 온 각계의 훌륭한 일꾼을 수없이 길러낸 ‘민족사의 산실’과 같은 존재"라고 하였고, 함께 민주당 창당활동을 하였던 조병옥은 1958년 출간한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를 "일제 암흑정치하에서도 민족의 실력 배양을 위해 교육기관 언론기관 산업기관 등을 창설해 우리 사회에 지대한 공헌을 한 민족의 위대한 선각자"였다고 평가하였다.[50]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시작해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이어져 가던 한반도 해방정국의 좌익적 급류를 대한민국의 건국이라는 방향으로 우선회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정치지도자들 중 '비정치적'인 정치지도자[42]라는 평가도 있다.
중앙중·고등학교에서 7년간 근무한 김형석은 '그와 함께 지내게 된 것을 평생의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다. 김성수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깨우침을 얻을 수 있었다. 그의 애국심과 대인관계의 지혜로움을 본받고 싶다'고 회상하였다. 김성수의 친일 의혹에 대해 김형석은 '과거사 재조명을 하면서 김성수를 친일분자로 몰고 가는 것을 보면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된다며 일제 강점기에 인촌 같은 이가 없었다면 과연 우리가 자주독립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흑백논리적 잣대로 역사인물을 평가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라 하였다.[출처 필요]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중석은 그의 저서 '조봉암과 1950년대(상)(역비한국학연구총서 15)'에서 김성수가 민주당 창당 전까지 살아 있었더라면 범야신당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99] 박태균은 김성수 자신이 앞에 나서려 하지 않던 점을 들어 "후계자를 양성하지 못하고 주도권 장악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한국현대 정치인들에게는 귀감"이 된다고 평가하였다.
김규식의 비서였던 송남헌은 후일 토론에서 그가 호헌동지회에 조봉암을 영입하려 한 것은 연구대상이라 하였다.[109] 그는 한민당의 창당 주역의 한사람이었던 점을 든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인품에 감화를 받아 일부 재력가들과 유지들은 교육사업과 방직회사 설립에 뛰어들기도 했다. 전 국회의원 김성곤은 평소 '인촌 김성수 선생님'을 가장 존경하였다고 하며, 그의 인품에 감화받아 김성수의 인격·사상 ·사업을 자신속에 구현하고자 하였다.[110] 김성곤은 인촌을 본받아 자신도 금성방직, 쌍용양회를 설립하고, 국민대학교를 지원하였고, 고향의 현풍학원을 인수 운영하였으며, 고려대학교 지원에 적극적이었다 한다.[110]
1920년대 초중반에 물산장려운동을 비롯한 실력양성운동이 지지부진하자, 자치운동쪽으로 기울어져 민족개량주의 노선을 걸었다는것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있다.[111]
중국에 사는 조선족들은 김성수, 김연수 형제가 만주에 설립한 남만방직주식회사에서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노동착취했다고 비판한다. 이들의 말에 의하면 "그때 사람들은 김성수의 돈 뭉치를 서울에서 만주 봉천까지 깔아도 못 다 깐다고 했다"며 생동한 비유를 했다. 이어서 이들은 이 공장의 생산품들은 모조리 일본군으로 납품했는데, 전쟁이 발발한 이후 노임을 주는 노동자들 보다 학생들을 상대로 의무노동을 강요했다고 비판한다.[112]
작가 정운현은 전국 각지에 김성수의 동상이 고려대 본관 앞 입상(1959년 5월 5일), 중앙고교 본관 앞 - 입상(1966년 6월 1일), 경성방직 내 - 좌상(1978년 10월 5일), 전북 고창읍 교촌리 새마을공원 내 - 좌상(1983년 8월 15일), 과천 서울대공원 - 좌상(1991년 11월 11일) 인촌 탄생100주년 기념 건립,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 로비 - 좌상(1994년 10월 11일), 인촌기념관 - 좌상(1994년 10월 11일), 동아일보 광화문 사옥 로비 - 좌상 등의 설립 등을 두고 우상화라고 비판하였다.[113]
1993년부터 그의 건국공로훈장을 치탈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이후 적극적 친일이냐, 소극적 친일이냐, 생존을 위한 호신책이냐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논란 끝에 1996년 국가보훈처는 가짜나 친일혐의가 있는 독립유공자 5명의 서훈취소에 김성수는 제외되었다[10] 이를 두고 당시 일부 시민단체는 보훈처가 동아 눈치를 본 결과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민족문제연구소 등에서는 "친일혐의가 분명한 인촌에게 주어진 건국훈장을 치탈해야한다"며 국가보훈처를 비판하기도 했다.[10]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고 만년에는 야당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음에도 사치하지 않았고, 전용차량 대신 인력거, 버스, 택시 등의 대중교통을 이용하였다. 메이지 대학 재학 당시 간디이즘에 감격한 그는 자신을 위한 소비를 줄이고 남은 것으로 타인을 돕는 것을 자신의 신념이자 의무로 여겼다. 기독교의 개화운동에 자극을 받아 민립대학기성회, 농촌계몽운동, 문맹자 퇴치운동 등에 뛰어들기도 했다.
허정은 그에게 가해진 비판 중 업적을 남긴일이 없다는 비판에 대해 반론을 달았다. '만일 그가 고위 현직에 앉아 큰 업적을 남긴 일이 없다고 해서 인촌이 한 일이 무엇이냐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혹시라도 있다면, 그는 그야말로 '나무를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사람이다. 정치, 경제[108], 사회, 문화의 각 분야에서 그가 다음어 놓은 초석이 우리 문화의 발전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가는 아는 사람은 우리 현대사에 남긴 그의 업적을 소홀히 다루지 못할 것이다.[114]'는 것이다. 한편 불우이웃과 고학생을 소문없이 뒤에서 도우는 것, 등으로 인망을 얻어 호남의 어른, 고창의 어른, 전북의 어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해방 이후 줄곧 매년 1월 1일이면 이승만을 찾아 세배를 드렸고, 정치적으로 갈라선 뒤에도 병석에 눕기전까지 그를 찾아 세배를 드리곤 했다.
일화 이중재(李重載)의 회고에 의하면 '보전에 들어가려고 친구 들과 원서를 받으러 갔더니 허름한 영감이 정원을 가꾸고 있었다. 원서를 가지고 나오다 보니 잔디밭이 좋길래 들어가 앉아서 노닥거렸다. 그랬더니 그 영감이 와서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해서 나왔다. 그 후 보전 입학식에서 훈시하는 교장선생님을 보니 바로 그 영감님이었다' 한다.[122]
한만년(韓萬年)의 회고에 의하면 '선친(한기악)께서 중앙학교를 나오셨다. 내가 보통학교 3학년 봄에 우리는 중앙학교 교내로 이사를 가 살게 되었다. 저녁 때가 되면 한복을 입은 허술한 아저씨가 나와 운동장도 쓸고 잔디도 깎고 했다. 학교 수위 같았다. 그 해 여름이었는데 이사간 지도 얼마 안 되고 어린 데다가 친구도 없어서 저녁을 먹고 학교 구내에서 놀다가 김기중 선생 동상 밑에서 잠이 들었다.[122] 그때 누가 와서 깨웠는데 그 분은 바로 잔디 깎는 수위였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죄송하단 생각이 들었는데 그 어른은 꾸중을 안 하시고 찬 데다 뺨을 대고 자면 입이 비뚤어지는 법이다. 이런데서 자지 말고 집에 가서 자라고 타이르셨다. 그래서 어찌나 황송하고 미안했던지 지금도 그 일이 잊혀지지 않고 있다. 그 수위가 다름 아닌 仁村 선생이었다.' 한다.[122] 사진이 10년동안 그대로 사용하였다. 새로운 사진을 왜 장만하지 않느냐는 주변의 질문에 만날 그 모습이 그 모습인데 새로이 할 필요가 굳이 없지 않는가, 혹은 그런데 돈을 들이려거든 그보다 더 긴요한데 쓰는게 좋다고 대답하였다.
부통령 재임 시 '각하'라는 호칭을 폐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허정에 의하면 술이 거나해지면 천진난만한 주사도 심했다고 한다.[114] 한편 허정은 그의 인물평을 하면서도 스스로 '나는 그를 평가할 자리에 있지 않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 맡아야할 것이다.[114]'라고 하기도 했다. 허정에 의하면 그 평가가 어떻든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탁월한 인물 인촌에 대한 추모의 정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114]라는 것이다.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재직 중에도 그는 이희승, 한만년, 허정, 윤치영, 윤일선, 김원봉, 이현상 등 다양한 학생들과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검소하고 겸손한 태도로 대하여 학생들의 반발을 사지 않았다. 광복 이후 그는 1940년대 후반에 촬영한 사진을 줄곧 사용, 10년여 동안 같은 사진 한장으로 사용하였다. 지인이 그에게 '그때그때 사진 한장쯤 왜 장만하지 않느냐'며 묻자 그는 '일 그얼굴이 그얼굴일진대 새로이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며 응대하였다.
우익 정당 통합 운동김구는 우익 정당 통합 노력을 추진했고, 김성수는 김성수 대로 조소앙에게 우익 정당의 통합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조소앙은 범 우익 정당의 단결에는 원칙적으로 동조하였으나, 통합의 방법을 놓고 김성수와 대립하게 되었다. 1947년 12월의 장덕수 암살 사건으로 범우익 정당 통합 노력은 깨지고 말았다.
김성수는 송진우의 피살로 인해 부득이 한민당을 맡았으나, 정당의 당수를 안 하고 임정 요인들과 합쳐서 당의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구상을 세웠다.[123] 당시 우익 학생운동가였던 이철승(李哲承)은 김성수와 조소앙의 사이의 연결을 주선했다. 뒷날 이철승은 '제일 존경했던 조소앙 선생하고 또 한민당의 인촌 선생과 합작이 이뤄지길 기대하면서 학생의 신분이었지만, 두 분을 만나게 하는 역할을 했던 겁니다.[123]'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남북협상 뒤에도 일부 한민당원의 꾸준한 반대에도 김성수는 조소앙을 끌어들여야 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김성수는 조소앙이 남북협상의 실패를 인정하고 공산당의 프락치를 축출한 뒤에도 조소앙에게 여러 번 통합 제의를 했다.
계동의 김성수의 집에서는 채식주의자였던 그의 입맛에 맞도록 인촌의 부인 이아주가 손수 음식을 장만하면서까지 두 차례나 만나게 되었는데[123], 이철승의 표현에 의하면 '애석하게도 인촌 선생의 한민당과 조소앙 선생의 사회당과의 합당은 성사되지 못했[123]'다고 회고하였다. 김성수와 조소앙 간의 회함에서 당의 명칭과 중앙위원들의 숫자는 합의됐지만, 토지 개혁정책 때문에 결국 그 합당문제가 실패하고 말았[123]다. 김구의 김성수 암살 기도 사건송진우, 장덕수 등의 암살 배후로 지목되었던 김구는 김성수 암살 미수의 배후로도 지목되었다. 미 군정의 보고서[124]에 의하면 김구는 김성수의 암살을 기도[82]해왔다 한다. 그는 한민당과 한독당의 통합에 찬성하였지만 김구측에 의한 김성수 암살 기도[82]가 미수로 끝나면서 한민당측은 임정을 노골적으로 증오하게 되었다. 김성수는 불쾌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내심 분개했고, 김구에 대한 한민당과 그 후신들의 시선 역시 곱지 않게 되었다.
정치인 이중재는 1952년 부산 피난시절 부통령인 그의 개인비서로 정계에 입문[130]하였다. 동상 수난 사태
1989년 3월 부정입학과 학내 등록금 인상 문제로 본관을 점거한 1천명의 고대생들이 인촌 김성수 동상을 검은 천으로 싸서 나일론 끈으로 묶은 채 며칠째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131] 그러나 곧 재단측의 퇴학 조치 압력으로 무산되었다.
1989년 4월 고려대학교 경내에 세워진 김성수 동상에 민족 해방 계열 학생들이 올라가 하얗고 굵은 광목 끈으로 칭칭 동여맸고, 100여 명의 학생들이 동상에 매단 줄을 잡아당겼다. 1980년대 이후 학생운동계에서 김성수의 친일행적 의혹이 제기되었고, 교내 운동권을 탄압하는 재단과의 물리적인 갈등의 성격이 있었다. 이전에도 김성수의 동상은 친일파라 하여 민족고대에 있으면 안 된다며 학생들이 쓰러뜨리려 시도했으나 재단과 일제 강점기에 졸업한 선배들의 제지로 실패하였다. 그 때마다 재단측이 창립자의 동상을 훼손하면 엄벌에 처하겠다고 하여 시도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1989년 4월 수백 명의 학생들이 교사 내외에서 현장을 목격하고 있었고, 100여 명의 학생들이 김성수의 동상을 끌어내리려 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졸업한 졸업생이 나타나 김성수를 변호했고, 일부 학생들은 그들의 견해에 동조하여 동상을 끌어내리려는 학생들과 논쟁이 벌어지면서 동상 수난 사태는 유야무야 종결되었다.
2002년 3월 신원미상의 한 사람이 인촌 동상에 빨간 페인트로 '김성수는 친일파'라고 써놓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이 해에 고대 사상 처음으로 <인촌동상철거위원회>가 꾸려지기도 했다.[131] 2005년 3월 9일에는 한승조 사태와 관련된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에서 한승조 교수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김성수의 동상에 대한 것이 언급되었다. 유병문 총학생회장은 "대표적 친일파인 인촌 김성수 동상이 학교 정문 앞에 여전히 서 있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며 "건립 1백주년을 맞은 올해 제대로 고대의 친일 문제를 정리하고 가야 한다"고 밝혔다.[132]
"문약의 기질을 버리고 상무의 정신을 찬양하라 " (1943년 8월 5일자 매일신보 ) 자(玆}에 조선 징병령 감사주간에 당하여 소감의 일단을 들어 삼 가 반도청년 제군의 일고 (一考)를 촉(促) 코자 한다. 작년 5월 8일 돌연히 발포된 조선에 징병령 실시의 쾌보는 실로 반도 2천5백만 동포의 일대 감격이며 일대 광영이라 당시 전역을 통하여 선풍같이 일어나는 환회야말로 무엇에 비유할 바가 없었으며 오등 반도청년을 상대로 교육에 종사하는 자로서는 특히 일단의 감회가 심절{深切)하였던 바이다.(중략}
그런데 이 징병제 실시로 인하여 우리가 이제야 명실상부한 황국신민의 자격을 얻게 된 것은 일방으로 전반도청년의 영예인 동시에 반천년 문약의 분위기 중에서 신음하던 상술한바 모든 병근(病根)을 일거에 쾌치(快治)하고 거일{去日) 생산할 제2의 양질(養質)을 얻은 것이다.
어찌 반갑지 아니하며 어찌 감격치 아니 하리오. 하고{何故)오하면 상술한 문약의 고질 을 치료함에는 오직 상무(尙武}의 기풍을 조장함이 유일무이의 양약인 까닭이다. 그러나 여하한 능라주단이라도 차(此)를 재지봉지(裁之縫之)하여 의상을 만들어 착용치 아니하면 금수(錦繡)의 가치가 없을 것이요, 아무리 기효(奇效)를 주{奏)할 양약이라도 이를 전지환지(煎之丸之) 하여 복용치 아니하고는 필경 그 실효를 들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이 징병제 실시의 이 영예를 청년제군은 여하히 착용하며 이 양약을 여하히 복용하여 외관으로나 내용으로나 그 실효실예(實 效 實譽)를 완전히 현양(顯揚)하려는가.
무릇 의외(意外)의 영예가 돌아올 때에는 그 영예의 소종래(所從來)를 잘 생각하여 그것을 완전 향수할 준비가 없지 못할 것이며 양약이 입수(入 手}되었을 때에는 먼저 잘 조리복용하여 완전히 효험을 발휘케 할 연찬{硏讚)이 없지 못할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오인(吾入)은 금후 제군에게 일단의 인고와 일층의 단련을 요청하는 바이다.
그러면 이것을 실천할 첩경은 어디 있으며 비방은 무엇인가. 오인은 이제 새삼스럽게 제군에게 지교(指敎)할 것도 없이 4~5년 이래로 우리 일석제송(日夕齊誦)하는 황국 신민서사{皇國臣民誓辭)를 한번 다시 되풀이하고자 한다.
2. 아등 황국신민은 서로 신애협력(信愛協力)하여서 단결을 굳게 하자 이 일절이야말로 종래 우리 조선인의 정문(頂門)의 일침이다. 우리 종래의 모든 결점이 오로지 상호 신애협력을 못 하는 것과 그 결과로 10인(人) 10색(色). 100인(八) 100기(幾)로 단결이 되지 못하는 바 있던 것이다. 폐일언하고 인간은 일종의 집단동물이다.
집단의 위력을 발휘치 못한다면 그 실력이 저 봉의(峰蟻)에게도 멀리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 집단이 즉 단결이요, 단결이 되려면 그 분자 분자가 상호 신애협력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신애협력을 지분 절해( 肢分節解)하여 설명하려면 기천권 수신서(修身書)로써도 부족 할는지 모르나 간명적절(簡 明適切)히 말하라면 손쉬운 방법으로 우리 일상 경송(敬誦)하는 교육칙어(勅語)의 일절{一 節}을 봉서(奉書) 해보자.
'부모에게 효(孝)하고 형제에게 우(友}하고 부부상화{夫婦相和)하고 붕우상신(朋友相信)하라' 이 일절 중에 소위 신애협력의 전부가 포함된 것이다. 여기에 특히 '충군'의 2자는 표시되지 아니하였으나 기실 효도 충군의 일단이요, 우도 충군의 일단이요, 화신(和信)도 또한 그러하다.
신민(臣民) 이 모두 상호 신애협력하여 단결을 굳게 하였다가 일단 완급(緩急)이 있으면 의용봉공(義勇奉公)하는 것이 충군{忠君)의 지상방법(至上 方 法)이며 우리 생활의 의미가 전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즉 자(子)가 되어서는 자의 직 (職)을 다하고 형제간에는 형재의 책(責)을 다하고 부부.붕우가 각기 그 소처(所處)의 직책 을 다하는 것이 곧 신애협력 의 요체이다.
따라서 아무리 위 인성자의 소질이 있다 할지라도 인고단련이 없이 생지천성(生知天成)은 바라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일도 인고단련이요 이도 인고단련이다.
저 금옥이 열화중에 용해되며 철석 (鐵石)으로 조탁될 때에 그 고통이 여하하였으며 저 동량(棟梁)이 작지단지{斫之斷之) 준지부지(準之斧之)할 때에 또한 얼마나 고통을 받았으랴. 그 온갖 고통을 인내하였으므로 만인이 경앙하는 동량이 되며 진중(珍重}하는 금옥이 되지 않는가.
인간도 또한 절대적이므로 이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같이 인고단련을 쌓아 완전 위대한 신민이 되어서 황도를 양(揚)하는 것이 곧 오등의 최종 목적 에 도달하는 것이 다.
이상의 이론이야 누가 모르리요만 금후의 성과 는 오직 이상 서사{誓詞)의 심송체행{心 誦體行)에 달렸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여 자타의 경성(警醒)에 공(供)코자 한다.
"대의에 죽을 때, 황민의 책무는 크다 " (1943년 11월 6일자 매일신보 ) 내가 지금 새삼스레 여기서 더 말할 것도 없이 항상 교단에서 혹은 시시로 청년학도 제군에 게 늘 말하여 은 바이지만, 제군은 학창에서 지적 수련에 노력하는 한편 굳센 윤리적 연마에 힘써 왔다.
교육은 이 두가지 방면으로부러 제군을 완전한 인간으로 만들어 올리는 것이다. 더구나 현재와 같은 세계적 신질서가 건설되는 시대에 있어서는 윤리적 방면이 일충 더 고조되어야 할 것은 제군도 잘 알고 있올 것이다. 평소 부터 자주 제군에게 말하여 온 나의 생각을 제군의 출진(出陣)올 앞둔 오늘날 다시 말하고자 한다.
이를 한마디로 말하면 ' 의무를 다하라'는 데 그칠 것이다. 의무를 위하여는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 나는 늘 말하여 왔거니와, 지금이야말로 제군은 이 말을 현실에서 몸으로써 실행할 때가 온 것이다. 물론 제군은 말로 쉽사리 목숨을 바치라 운운하는 나나, 또는 다른 선배들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도 없는 심경에 있을 것을 나는 잘 안다.
어제 아침에도 제군을 모아놓고 교단 위에서 제군의 그 수많은 시선을 바라볼 때, 나는 다만 말로써는 표현키 어려운 엄숙한 감격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오랫동안 종사해 온 교육자의 양심에서 말한다. '제군아, 의무에 죽으라'고. 내가 이렇게 한마디 최후의 부탁을 제군에게 하더라도 물론 제군은 이 말을 아무런 회의도 반문(反問)도 없이 솔직하게 받아들이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제군은 일반 국민보다는 지적 수준이 높은만큼 어떠한 명제에 대하여서라도 일차 마음의 반문을 하는 것도 당연하다 더구나 오늘과 같이 제군이 대사일번(大死一番)의 판단을 즉석에서 내리지 않으면 안될 찰나에 있어서 제군에게 맹목적 추증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제군의 이와 같은 반문과 번민을 다른 부류에 속한 사람 보다 잘 알고 있음을 자부한다. 자부하는 만큼 제군의 번민을 일률적으 로 부정하는 태도에는 찬성치 않는다. 나는 차라리 제군이 이 번민을 뚫고 광명의 피안(彼岸)에 빛나는 목표를 꽉 파악할 때를 제군과 같이 기다리려 한다.
이러한 번민의 과정을 거쳐 파악된 대사일번(大死一番) 의 신념만이 다른 어떠한 결의보다도 요지부동의 것일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는 때문이다. 그러면 '의무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라' 하는 나의 말에 대하여 제군 은 당연히 어떠한 의무인가를 명시하라고 할 것이다. 나는 교육자의 한사람 으로서 소중한 제군을 제군의 부모로부터 훌륭한 완성된 인간으로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자로서 조금도 허위와 양심에 없는 말을 할 수는 없다.
이러한 중대 책임을 가진다는 이곳에 대담 솔직하게 말하려 한다. 현하 우리가 당면한 의무라고 하면 제군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새로운 여명을 맞이하여 인류 역사에 위대한 사업을 건설하려는 대동아 성전에 대한 제군과 우리 반도 동포가 가지고 있는 의무인 것이다. 제군은 이땅에 생을 받아 이때까지 그만한 인간으로서의 자질과 품격을 갖추기까지는 가지가지 은택을 입고 있다. 국가와 가정과 사회의 은택은 모두 이것이다.
이러한 지나간 날의 은택이 제군에게 각자가 그 의무를 다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또 이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무거운 의무는 미래에 대한 의무일 것이다. 만일 제군이 금차(今次) 대동아 성전에 치참(馳參)치 못하고 대동아 신질서 건설이 우리의 참가 없이 완수된 날을 상상하여 보라.
우리는 대동아에서 생을 받았으면서 썩은 존재로서 이 역사적 시대에 영원히 그 존명(存命)을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제군은 비록 이 성전의 전열로부터 빠져나와 개인의 조그마한 생명을 보전하고 있을는지 모르겠으나, 제군의 뒤를 이어 이 땅에 생을 받은 제군의 동생과 누이들은 어떻지 될 것인가.
제군은 실로 반도의 미래에 대한 절대(絶大)한 의무를 지고 있다. 나는 생각하건대 제군의 번뇌가 현재 이 점에 부딪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순간은 제군의 그와 같은 번민과 반문을 무시하고 각 일각 추진되고 있다.
대동아의 건설은 제군의 사소한 존재를 돌아볼 사 이도 없이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매진 앞에 제군이 천재일우의 호기를 잃어버리고 그로 말미암아 반도가 이에 뒤떨어질때 우리는 대동아 건설의 1분자는 그만두고 황민으로서 훌륭히 제국(帝國)의 1분자가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제군이 위에 말한 의무를 다할 때에 비로소 제군은 제군이 이 땅에 살아 있을 것이고 제국(帝國)의 l분자로서 내지와 조금도 다름없는 빛나는 대우 즉 권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보통 의무와 권리를 논할때 서양사회에서는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의무를 지는 것이지만 동양에서는 고래로부터 의무를 다하는 데 필연적으로 권리가 생기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황민화를 고창(高唱}하여온 이래 제군이 자주 자신의 황민으로서의 권리를 일반 사회에 대하여 요구 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하면 일본은 3천년이라는 오래동안 금일의 제국(帝國)의 광영을 빛내는데 온갖 의무를 수행하여 왔다.
그러나 우리는 겨우 그동안 30년밖에 안된다. 5천 년과 30년의 차를 가지고 권리에 있어서 평둥을 요구할 수 있을까. 이것은 제군이 권리만을 주장하는 서양인의 학설에 현혹된 잘못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한 바가 있다. 의무의 수행에 있어 시간의 장단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의무의 대소는 시간의 축적(蓄積)에 있지 않고 의무 자체의 성질에 있다. 우리는 단시일 일지라도 위대한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내지인이 오랫동안 바쳐온 희생에 필적할 임무를 수행한 수 없을 까. 이 임무를 수행할 절호의 기회가 지금 이 순간에 우리 앞에 열려진 것이다.
제군의 희생 은 결코 가치 없는 희생이 아닐 것을 나는 제군에게 언명 한다. 제군이 생을 받은 이 반도 를 위하여 희생됨으로써 이 반도는 황국으로서의 자격을 완수하게 되는 것이며 반도의 미래는 오직 제군의 거취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
참고문헌
민족 지도자로 둔갑한 친일 자본가 지난 1일 새로 취임한 현승종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은 취임사에서 “인민재판 형식으로 인촌 김성수 선생을 친일파로 몰고 있다.”며 “인촌 김성수 선생은 일제의 혹독한 탄압을 뚫고 3·1운동의 산실인 보성전문학교(고려대 전신)를 설립했다. 또한 … 민족기업을 만들려고 애썼다”라고 말했다.
1936년 8월10일 손기정의 올림픽 제패를 계기로 8월25일 자 동아일보에 이른바 ‘일장기 말소사건’이 일어나자 당시 동아일보의 사주였던 인촌 김성수는 분개했다고 전해진다. "이 사실을 전화로 연락받은 인촌은 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급히 동아일보사로 오는 자동차 속에서 인촌은 히노마루(일장기) 말소는 몰지각한 소행이라고 생각하여 노여움과 개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리는 데서 오는 쾌(快)와 동아일보가 정간되거나 영영 문을 닫게 되는 데서 나는 실(失)을 생각하여 그 답은 분명했다…"(인촌 김성수전, 동아일보사,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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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 > 국민의 의무는 재미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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