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국민의 의무는 재미다.

민족음악 개량 운동에서 친일음악 운동으로, 홍난파(洪蘭坡)

草霧 2013. 11. 29. 11:19

 

 

 

음악·미술

 

홍난파(洪蘭坡, 창씨명 森川潤, 18981941)

     

 

민족음악 개량 운동에서 친일음악 운동으로

 

 

 1. 밤이 새엇다 희망의 아츰 동편 하늘에 솟는 햇발은
다들 받으라 듬뿍 받아서 소리소리 높여서 만세 불러라
2. 이러 나거라 우리 임금의 분부를 받자와 일억일심(一億一心)히
넓은 천지에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새론 세계를 일욱하라고
3. 대륙 이만리 대양 십만리 대아세아의 대공책국(大共策國)의
우리 일장기 날리는 곧이 자자손손 만대의 복누릴 국토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41년 조선음악협회 평의원

조선동요 100곡집

음악산문집, 음악만필》

1912YMCA 중학부를 졸업

1915년 조선 정악 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 양악부(洋樂部)를 수료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우에노 음악 학교[東京上野音樂學校]에서 2년 간 수업,

귀국 후 1920년에 봉선화(鳳仙花)를 작곡,

1922년 연악회(研學會)를 창설,

1925년 제1회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다.

 

홍난파(洪蘭坡, 일본식 이름: 森川潤 모리카와 쥰[*], 1898년 4월 10일; 음력 3월 19일 ~ 1941년 8월 30일)는 한국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로 활동하였는데 본명은 홍영후(洪永厚)이지만 홍난파로 더 알려져 있다. 한동안 음악평론가로 활동하면서 한국의 슈베르트라고 불리기도 하였다.[1] 작품 중 〈봉선화〉. 〈고향의 봄〉.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고향 생각〉등 십 여곡의 가곡과 〈오빠생각〉. 〈나뭇잎〉. 〈개구리〉 등 111개의 동요를 작곡하여 천재 작곡가로 알려졌다. 아호는 난파(蘭坡)이다.

 

 

  • 1.1 생애 초기
  • 1.2 청년기
  • 1.3 음악 활동
  • 1.4 죽음
  • 2 작품
  • 3 사후
  • 4 저서
  • 5 가족
  • 6 일화
  • 7 미디어
  • 8 함께 보기
  • 9 참고 자료
  • 10 주석
  • 11 바깥 고리
  • 경성보육 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때의 제자인 이대형과 결혼하였으나 슬하에 자녀는 없었다.

    • 아버지 : 홍준 [ ? ~ 1917년 59세로 사망]
    • 어머니 : 전주이씨
      • 맏형 : 홍석후(洪錫厚, 호는 금파(錦坡), 의사)
      • 맏형수 : 김은배(1881년 - ?)
    • 계모 : 밀양박씨[14]
    • 처 : 이대형(李大亨)
      • 홍정임 : 홍난파의 딸[10]
      • 양자 : 홍지유, 맏형 홍석후의 넷째 아들

    1926년 홍영후는 <세계명작가곡선집>을 편찬하였는데 그의 작품 <봉선화>가 여기에 수록되었다. 이듬해 라디오 방송을 통해 봉선화 곡이 소개되었다. 이 노래를 최초로 부르고 널리 퍼지게 한 당시 소프라노 김천애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봉선화라는 소재를 선택한 것이 작사자인 김형준(피아니스트 김원복의 선친)의 영향으로, 김형준이 살던 집 울 안에 봉선화 꽃이 가득했고, 또 김형준씨는 생전의 홍난파와 이웃해 살면서 교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덧붙여 김형준은 봉선화를 보면 곧잘 '우리 신세가 저 봉선화꽃 같다'는 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노래가 정작 널리 퍼져 모든 사람의 가슴을 울리게 된 것은 1940년대였다. 1942년 봄 히바야 공회당에서 열린 신인 음악회에서 김천애가 <봉선화>를 부른 것이 시초였고, 귀국 후 서울 부민관, 하세가와 공회당, 평양 키네마 등 여러 곳에서 독창회를 가지면서 <봉선화>를 불러 청중들의 눈물을 글썽이게 했다. <봉선화>는 빅터와 콜롬비아 두 레코드 회사에 취입되면서 더욱 크게 히트하였다. 이는 주권을 일본에 침탈당한 국민의 아픔을 달래는 노래였기에 엄청난 인기를 모으게 되었으나, 일본 경찰 당국은 이를 문제 삼아 이 노래를 못 부르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천애는 무대에 설 때마다 이 노래를 불러 여러 차례나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봉선화>의 1절이 아름답게 꽃피우던 성하에의 애절함이라면, 2절은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낙화에의 조사를 뜻하는데, 이어지는 3절이 애절한 민족의 염원을 담고 있다. 곧, 애수 어린 가곡에서 민족의 노래로 승화시키는 모티브 역할을 한다.

     

    1931년 그는 조선 음악가 협회 창립 총회에서 상무 이사로 선임되어 활동을 하였다.[4] 그는 더 많은 것을 배우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해 7월에 성가대를 사임하고 미국의 셔우드 음악학교(Sherwood Conservatory of Music)를 2년간 다녔다. 사실 이 때의 유학길은 미국으로 간 애인을 따라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을한이 지은 《그리운 사람들》(삼중당, 1991)에 따르면 홍영후가 서울에서 음악 활돌을 하던 무렵에 K라는 애인이 있었는데, 그녀의 수양어머니가 홍난파의 애주를 문제 삼아 결혼을 매우 반대하였고, 그예 미국으로 모녀가 함께 돌아가자 그 뒤를 좇아 급하게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고 한다.

     

    이 기간 동안 홍영후는 도산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에 가입하게 되는데, 이 당시 흥사단은 미국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 단체였고, 미국에 있는 조선인의 가입을 이끌며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홍영후의 미국 생활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수업을 받으며 내야 하는 납부금을 제 때에 내지 못해 분납을 하며 생활해야 했고, 뜻하지 않은 교통 사고를 당하며 늑골을 다치고 말았다. 이 교통 사고의 후유증으로 늑막염에 시달려야 했고 귀국 후에도 잦은 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야 할 정도로 그의 건강이 나빠지게 되었다. 이때 흥사단은 그가 셔우드 음악학교를 수료할 때 그를 축하해 주었고, 홍영후 또한 교통 사고를 당한 이후 "격려를 보낸 것에 대해 감사 드리며 변호사에게 사건을 위임하여 손해금을 받아 볼까 교섭중이다"는 편지로 화답하였다. 마침내 홍영후는 1932년 12월 8일 흥사단에 단우 번호 266번으로 가입하게 된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그는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교회에서 바이올린 연주회를 열었고, 지방 흥사단 대회에도 참가한 후 귀국하였다. 1931년 그는 일본 빅터레코드사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국내에 돌아와 그는 경성보육학교 주임교수를 맡았고, 193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학 강사로도 출강하였다. 1933년 <조선동요백곡집> 하편, <조선가요작곡집>을 발매하였다. 그리고 그 해 최초의 실내 악단이자 바이올린 3중주 악단인 난파 트리오를 결성하였다. 난파 트리오는 홍영후와 그의 조카인 홍성유, 이영세로 구성되어 진고개(현재의 충무로)에 있는 메이지제과홀에서 첫 발표회를 가졌다.[3] 그러나 조카 홍성유가 1936년 8월 병으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난파트리오는 해체되었다.

     

    그는 1934년에는 일본 빅터레코드사 경성지점 음악 주임으로 근무하기도 하고, 현제명과 함께 작곡 발표회를 하는 등 다시 국내에서의 활동을 왕성하게 하였다. 그 해에는 김대형과 재혼하였고, 많은 영화 음악이나 신민요, 가요 등에 관여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나소운(羅素雲)이라 적었다. 그 밖에 이화여전 강사를 지냈고, 경성중앙방송국 양악부 책임자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관현악단인 경성방송 관현악단을 조직, 지휘자로 활동하였다. 1938년에는 <음악만필>을 발간하였다.

     

    1936년 그는 박영근, 이승연과 함께 <코리아음악연구소>를 창설하여 음악을 가르쳤고, <특선가요곡집>을 출간하였다. 이 해에 난파 트리오는 해체되었지만, 그는 다시 이흥렬, 김태연과 함께 성서 트리오를 결성하였다.[3]

     

    수양동우회 사건

    일제말기 전시체제(중일전쟁태평양전쟁)이후로 일제 총독부는 모든분야에 발악했었고, 당시 옥중에 갇혔던 정치범들이나 독립운동지사들은 석방할려면 전향서를 꼭 써야했다. 전향서를 안쓰면 절대 내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양 동우회 사건 이후 수 많은 독립운동지사들이 변절하거나 전향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났던 시기였다. 그의 딸인 홍정임 여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래와 같이 증언하고 있다.

     

     

    1938년 음악잡지「음악만필」을 발행하였다. 이는 한국 최초의 음악산문집이자 음악평론집이기도 했다.

     

    홍영후는 미국에서 당한 교통 사고의 후유증으로 늑막염을 앓고 있다가 회복되긴 했지만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된 후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재발하면서 크게 악화되었다. 그 상황에서 1941년에는 적십자병원, 경성요양원(지금의 삼육서울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았지만 그 해 8월 30일에 결핵균이 머리로 들어가게 되면서 뇌결핵으로 이어져 끝내 경성요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9]그는 유언으로 "내가 죽거든 꼭 연미복을 입혀서 화장(火葬)해 달라."는 말을 남겼다.

     

    23세 때 작곡한 〈봉선화〉와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고향의 봄〉, 〈고향 생각〉등 십 여곡의 가곡을 남겼고, 이 중 〈봉선화〉와 〈사공의 노래〉를 제외한 대부분의 가곡은 이은상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곡이다. 후세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친숙한 〈오빠생각〉, 〈나뭇잎〉, 〈개구리〉를 비롯하여 111개의 동요를 작곡하였고, 〈애수〉, 〈로망스〉 등 8개의 기악곡을 발표하였으며 여러 곡의 영화 음악을 작곡하는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였다. 저서에는 《세계의 음악》, 《조선 가요백곡집》과 단편 소설집 《처녀의 혼》, 《향일초》, 《폭풍우가 지난 후》 등

     

    1954년 난파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조선동요 100곡집'을 재간행하였다. 1965년 10월 25일 대한민국 정부는 홍난파에게 문화 훈장을 추서하였다. 1968년 수원 팔달산에 노래비가 세워졌고, 1969년 8월 30일 홍난파의 추모일을 맞아 예총 경기도지회가 ‘난파음악제’를 연 이래 해마다 계속되고 있다.[6] 또한 그가 살던 집(종로구 홍파동 소재)이 2004년 9월 4일 등록문화재 90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홍난파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집 앞에는 그의 흉상이 서있다.

     

    홍난파가 1898년 당시 수원(현재 화성시) 남양면 활초리에서 태어나 기념사업 권리문제로 논란을 빚었던 화성시는 이번에는 단국대학교와 유품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2006년부터 181억 5천만원을 들여 활초동 4만5천270㎡ 부지에 지하 1층, 지상2층 규모의 기념관, 야외음악당, 공원 등을 갖춘 홍난파 꽃동산 조성사업을 추진해왔는데 연고권을 들어 단국대학교 측에 유품을 넘겨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단국대 측은 "홍난파의 유품을 화성시에 넘겨줄 계획이 전혀 없다"고 했다. 단국대 관계자는 "2009년에 화성시가 한 차례 공문을 보내온 바 있지만 거절했다"며 "유품을 기증받아 지금까지 전시·보존을 해 왔고, 죽전캠퍼스에 박물관 증축이 끝나면 다시 정상적으로 전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는데 논란이 가중되자 단국대학교에서는 "기증받을 때 계셨던 학교 관계자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거나 학교에 남아있지 않기에 기증자 몇명이 언제 어떤 이유로 유품을 학교에 전달한 것인지 확인하기 어렵다"라고 밝히면서 유품들은 모두 학교 재산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못을 박고 어이없는 요구에 적극 대응할 의사를 밝혔다.

     

    난파삼중주단

     

    또한 1984년 단국대학교 한남동 캠퍼스내 난파기념 음악관에서 유품을 전시할 때 홍난파 선생의 따님도 참석했었다고 전하면서 유품은 2007년 8월 30일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에서 용인시로 이전되어 옮겨진 음악관이 확장되는대로 전시하기로 하였는데 단국대학교2013년 3월 13일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에 있는 신축한 캠퍼스에 전용 난파음악관을 마련하고 별실의 홍난파의 유품을 전시한 '난파 홍영후 전시실'을 개관했다. 유족으로 난파 선생의 조카인 홍건유 전 포스코 부회장, 외조카 홍익표 전 연성대학 부총장 등이 참석하였다.

     

    난파음악관의 전시실에는 2011년 문화재청으로부터 등록문화재 제 479호로 지정된 동판 동요악보원판 51개를 비롯, 난파가 생전에 사용하던 바이올린 등 그의 음악적 삶이 담긴 수필 등 약 420여 점이 상설 전시하게 된다.

     

    일화 하나, 계몽운동가 겸 교육자 윤치호는 그를 후원하던 후원자들 중의 한명이었다. 홍영후는 그의 형 홍석후를 통해 윤치호를 알게되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 1921년 2월 6일(일요일)에 쓴 윤치호의 일기내용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홍난파는 윤치호에게 계속 후원을 받았는데, 하루는 윤치호에게 바이올린을 살 비용을 달라고 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윤치호는 '남에게서 돈을 받아 공부하면서 생활비 전액을 대달라고 하는 것이나, 고학생이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갖고 싶어한다는 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발상'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자 홍영후는 윤치호에게 구두쇠의 죄악에 대한 설교를 하며 볼셰비키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정당한 약탈자들이라고 강변하고 부자들이 혼자서 자기 재산을 누릴 수 없는 때가 곧 올 거라고 주장했다. 분개한 윤치호는 홍영후를 가리켜 '조선 청년들의 수준과 은혜에 보답하는 그들의 마음이 어떤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녀석'이라고 혹평하였다

     

    그러나 홍영후는 이때 느꼈던 구두쇠의 죄악과 부자에게 제한적으로 받았던 감정을 잊지못해 훗날 유언까지 남겨 유족은 생전의 약속대로 연주하던 바이올린과 대표작들의 악보 등 총 116종 900여점의 유품을 단국대학교에 기증하였다. 홍난파의 유품 대부분은 단국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다.

     

    일화 둘, 홍난파가 경성중앙라디오방송국 양악부(洋樂部)의 총책임자로서 경성교향악단의 지휘자로 있을 때, 그는 <조선동요100곡집>이라는 악곡집을 만들면서 음악운동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1937년 흥사단 사건의 관련자로서 수감되고, 1941년에서야 비로소 꿈에 그리던 교향악단의 초연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초연 전 긴 옥살이와 병약한 심신에 건강이 나빠져 몸져 누워 숨을 거두기 직전 사경을 헤맬 때, 그는 자신의 부인에게 "얼른 연미복을 가져오라"고 했다고 한다. 결국 그 일이 무리임을 알자, "자신은 연미복을 입혀 화장하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아들이 없던 홍영후는 큰형 홍석후의 넷째 아들 홍지유(洪志裕)를 양자로 입양했다.[13]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나라 잃은 서러움과 아품을 작곡했던 1941년 42세의 나이로 요절한 난파 홍영후는 애주가이기도 했다. 1930년대 국내 악단을 이끈 대한민국 클래식 1세대의 인물이기도 한 홍난파는 저서 '음악만필'에 '기막힌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다. 난파는 "당시 한국사회에서는 정말 '기막힌 이야기'였을듯 합니다"라고 짧은 평을 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시대에서도 유모어를 잃지 않는 홍난파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글이다.

     

  • 이흥렬
  • 현제명
  • 안익태
  • 윤치호
  • 윤석중
  • 홍난파는 1897년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에서 태어났다.16살 때 조선 정악전습소에 입학, 2년 후에 졸업하여 음악교사를 하다가 일본으로 가서 도쿄 우에노 음악학교에서 본격적인 수업을 했다. 그는 다시 미국으로 가서 셀우드 음악학교를 나왔다.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가곡이 된 <봉선화>외에 그는 <성불사의 밤>, <옛 동산에 올라>, <고향 생각>등 많은 뛰어난 가곡을 남겼고, 바이올린 곡으로 <로맨스>, <애수의 조건>등을 작곡했다.그는 1941년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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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난파의 ′유모어′

    1. 1인 2중주

    2. 기막힌 절평

    3. 구두시험

    4. 정차명령

    5. 기막힌 이야기

  • 홍난파의 집(등록문화재90호)
  • 팬카페:홍난파 연구모임
  • 한국음악협회 경기도지회(난파음악제)
  • 홍난파 - 역사광복운동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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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치호 일기의 원보(原譜). 1940년 8월 10일 일기의 일부다. photo 산처럼

    1921년 2월 6일 일요일

     홍영후의 편지를 읽고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작년 1~2월쯤 도쿄에 가서 음악을 공부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그가 간청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에게 100원을 주었다. 9월 언제쯤인가 또다시 수표로 100원을 주었다. 나중에 50원을 더 주어서, 유학비용으로 모두 250원을 대주었다.
       
       한 달 전 그가 다시 편지를 보내와 바이올린을 사게 250원을 보내달라고 청했다. 공부하는 중에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사는 건 내 아들이나 동생이라도 절대로 승낙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고 답장을 썼다. 남에게 돈을 받아 공부하면서 생활비 전액을 대달라고 하는 것이나, 고학생이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갖고 싶어 한다는 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다.
       
       그런데 오늘 배달된 편지에서, 그는 구두쇠의 죄악에 대해 내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는 조선의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자기 재능을 계발할 만한 아무런 수단이 없는 조선의 천재와 영웅들의 운명을 비관했다.…  “
    그는 왜 친일의 길을 걸었나(윤치호 일기로 본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내면)”, 《주간조선》

      

     

    希望(희망)의 아츰

     

    이광수 작사 / 홍난파 작곡

     

    씩씩하게

     

    1. 밤이 새엇다 희망의아 츰 ~하늘에 솟는햇발~

    2. 이러 나거라 우리임금 의 분부~ 받자와 一億一心~

    3. 大陸 二萬里 大洋十萬 里 大亞~細亞大共策國~

     

    다들 받~으라 듬뿍받아 서 소리소리 높여서 萬歲(만세)불러라

    넓은 ~(천지)八紘一宇 (팔굉일우)의 새~~세계를 일욱하랴고

    우리 ~章旗(일장기) 날리는 곧 이 子子孫孫 萬代의 복누릴國土

     

     위의 첫번째 노래는 일제 식민지 시절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이광수와 또 우리민족을 대표하는 음악가인

    홍난파가 만든 것입니다. 일본군대행진곡풍의 이 노래는 조선과 일본이 하나되어 일본왕을 받들고 아세아의 모든 땅위에 대대손손 일장기를 휘날리도록 하자는 노랫말로 되어있습니다.

     

    '희망의 아츰'은 1938년 조선방송협회가 펴낸 <가정가요> 1집에 실려 있는 행진곡 풍의 '국민가요'이다. 1절은 동터오는 아침햇살을 보면서 희망을 노래하는 내용이지만 2.3절을 보면 여기서 노래하는 희망이 무엇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의도가 바로 드러난다. 일본천황의 충실한 신민이 되어 대동아공영권을 확대하는데 앞장서라고 부추기면서, 식민지 지배체제의 영원무궁을 기원하고 찬양하고 있다.


    제국주의 침략세력과 그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자신의 부와 기득권을 유지확대하던 친일 자본가, 지주, 지식인들에게는 식민지 지배체제가 계속되는 것이 희망의 세상일지 모른다. 그러나 빼앗긴 나라의 노동자, 농민, 빈민들에게는 결코 희망일 수 없다. 더욱이 그런 세상을 희망이라고 믿는다면 민족해방과 노동해방의 의지를 가질 수도 실천할 수도 없다.

     

    항일·친일음악회1

    29일은 국치 102년째 되는 날이다. 이를 앞두고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와 광장음악회는 28일 오후 7시 광주지하철 1호선 금남로4가역 광장에서 '국치 102년 기억 항일·친일음악회를 열었다. 피오렌테 앙상블(Fiorente Ensemble)의 공연장면.ⓒ민중의소리


    일제시대만 그러한가. 1983년 '국민들에게 주인의식을 고취시키자'며 전두환 정권의 사회정화위원회가 주문하여 만든 '아 대한민국'도 '희망의 아침'에 버금가는 노래다. 큰 경기대회 때마다 '아 대한민국'을 악을 쓰며 불렀어도 자본과 권력의 노동자 민중탄압은 계속되었다. '아 대한민국'이 누구나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게 해준 것도 아니었다. 박준성 <사진속의 노동역사>

     

     

      

    한국 근대양악사의 대변자

    우리가 머리 속에 홍난파를 떠 올릴라치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짚히는 것이 있다. 어린 시절 누구나 불러 보았던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고향의 봄])이랄지, 우리네 누님들이 서럽게 부르며 길 게 늘어뜨린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봉선화]) 등의 작곡가라는 점이다.

     

     

     

     

     

    봉 선 화

       

    김형준 작사,홍난파 작곡/노래 김천애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어언간에 여름 가고 가을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이 노래가 처음 세상에 나오기는 3.1운동의 다음해인 1920년이다. 도쿄 우에노 음악학교에 다니던 홍난파는 이 해 일단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경성 악우회'라는 음악 단체를 조직, 음악 보급운동을 폈다.그는 소설 창작에도 손을 대어 그 해 4월 <처녀혼>이라는 단편집을 냈는데, 이 때 그 단편집 서장에 <애수>라는 제명의 곡보를 실었다. 뒤에 김형준(피아니스트 김원복씨의 선친)이 가사를 붙여 민족의 주제가가 된 <봉선화>가 탄생했다.

     

    이 노래를 먼저 부르고 또 널리 퍼지게 한 공로자 소프라노 김천애는 "페부를 찌르는 비원의 시구가 아니었더라면 <봉선화>의 가락은 영원히 사장되었을지도 모르지요..."라면서 김형준가 <봉선화>의 가사를 짓게 된 시대적 배경을 설명했다."김형준씨가 살던 집 울 안에 봉선화 꽃이 가득했고, 또 김형준씨는 생전의 홍난파와 이웃해 살면서 교분이 두터웠었죠. 또 김형준씨는 봉선화를 보면 곧잘 '우리 신세가 저 봉선화꽃 같다'는 얘기도 했대요."

     

    그러나 이 노래가 정작 널리 퍼져 모든 사람의 가슴을 울리게 되기는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40년대의 일이다. 김천애가 <봉선화>를 제일 처음 무대에서 부른 것은 1942년 봄 일본 동경 무사시노 음악학교를 졸업한 직후 그곳 히바야 공회당에서 열렸던 신인음악회서의 일이다.

     

    김천애는 "한복 차림으로 무대에 섰지요. 청중들의 앵콜로 <봉선화>를 불렀는데 청중들의 박수 갈채가 떠나갈 듯 했죠. 공연이 끝나자 청중 중의 교포들이 무대 뒤로 찾아와 나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요." 당시의 감회를 회상하듯 김천애는 눈물을 글썽인다.

     

    김천애는 그 해 가을 귀국해서도 서울 부민관, 하세가와 공회당, 평양 키네마 등 여러 곳에서 독창회를 가지면서 그때마다 소복 차림으로 <봉선화>를 불러 청중들의 눈물을 글썽이게 했다.<봉선화>는 빅터와 콜롬비아 두 레코드회사에 취입되면서 더욱 크게 히트, 붐을 일으켰다. 일본 경찰 당국은 드디어 나라를 잃은 슬픔을 봉선화에 비유한 이 노래의 가사를 문제 삼아 이 노래를 못 부르도록 했다.

     

    그러나 김천애는 그 후에도 무대에 설 때 마다 이 노래를 불러 여러 차례나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그러기에 <봉선화>하면 누구든 김천애를 연상하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봉선화>의 제 1절이 아름답게 꽃피우던 성하에의 애절함이라면, 제 2절은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낙화에의 조사이다.일제의 모진 침략으로 쓰라림을 당한 조국의 비운을 여름에 피었다가 가을에 지는 봉선화에 비하여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노래가 이 2절에서 멈추었다면 <봉선화>도 한낱 <아리랑>류의 만가에 그쳐 버렸을 것이라는 게 김천애의 얘기다.

     

    "1절과 2절은 마지막 3절을 도입하기 위한 서사에 지나지 않아요. 비록 모질고 찬바람에 형골마저 사라져 버렸을지언정 혼백은 길이 남아 찾아온 새봄에 다시 살아나기를 바란다는 그 애절한 민족의 염원이 <봉선화>를 단순한 애수 어린 가곡에서 민족의 노래로 승화시키는 모티브가 되는 거지요."라고 김천애는 3절 가사의 뜻을 강조했다.

     

    3절 가사는 <북풍 한설 찬 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 바람에 회생키를 바라노라>

     

     

     

     

     

    더욱이 [봉선화]는 담 밑에 저만치 외롭게 피어 있는 꽃과 같은 일제하 조국의 비운을 상징한다고 음악선생님에게 배운 바 있는 우리에게, 홍난파는 '민족적 수절을 지킨 음악가'처럼 여겨졌다.

     

    실제로 19422, 일본 도쿄에 있는 무사시노(武藏野)음악학교(1929년설립, 1949년부터 음악대학으로 직제개편)를 졸업한 소프라노 김천애(金天愛)가 같은 해 4월 도쿄 히비야(日比谷) 공회당에서 개최한 전 일본 신인음악회에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고 출연하여 [봉선화]를 열창함으로써 열렬한 환호와 벅찬 눈물로 감동을 가져온 바도 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부터 김천애는 귀국 활동을 통하여 [봉선화] (때로는 봉숭아로 알려졌다) 로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더욱이 1943년 경성 후생 실내악단 단원이었던 김천애가 경상남도 삼천포 공연에서도 이 노래를 부를 계획이었는데, 일제에 의하여 이 노래가 '금지된 노래'로 처분됨에 따라 '봉선화=홍난파=민족음악가'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홍난파는 우리나라 근대음악사 중에서 양악사의 가장 큰 산맥일 정도로 그가 우리 음악에 공헌한 것은 사실이다. 그의 전공은 바이올린이었지만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작곡가, 지휘자, 음악교육가, 음악평론가로서 큰 역할을 하였고, 때로는 출판 사업가와 작가로서 여러 단편을 발표한, 말 그대로 전천후 만능 음악가였다.

     

    그만큼 양악의 모든 분야에 우뚝 솟은 음악가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한국의 '근대' 양악사는 여명기나 다름없어서 매우 열악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 근대사의 인물이다. 1898410일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에서 태어나 1941830일 삶을 마감할 때까지 그의 44세의 삶과 예술이 바로 한국 근대 양악사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1912년에 황성기독교청년회 중학부를 졸업한 그는, 1913년부터 3년 동안 음악학교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과'에 다님으로써 바이올린 연주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21세가 되던 1918년에 일본 '도쿄음악학교'(흔히'우에노'로 줄여 말하는 학교)로 유학하였지만 그 다음해인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지하고 귀국하여 음악활동을 열정적으로 펼쳐나간다.

     

    바이올린 연주가, 작곡가, 평론가, 음악교육가, 지휘자, 작가로 활동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1926년에는 사립인 도쿄 고등 음악학원에 편입하여 1929년에 졸업하였고,19317월에는 미국 시카고 셔우드(Sherwood) 음악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경성악우회 주간(1919), 전문적인 음악연구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연악회(硏樂會) 창설(1922) 및 운영, 조선음악가협회 상무이사(1931), 이화여전 음악강사(1933), 난파 트리오 조직(1933) 및 활동, 경성방송국 양악부 책임자로서 경성방송 관현악단 조직 및 지휘(1936), 경성 음악전문학교 교수(1938) 등을 역임하면서 조선 악단 전면에 우뚝 솟았다.

        

    수양동우회 관계자 검거에 대한 일제 경찰문서

     

     

    민족음악 개량운동에서 친일 음악운동으로의 급격한 변모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 시행규칙에 따라 지정된 보호단체들

     

    그러나 홍난파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하의 민족 현실과 무관한 음악가였다. 그의 화려한 음악활동은 일제가 3·1 운동 후 내세운 이른바 '문화정치'에 상응하여 '서양음악으로 민족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입장 속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 민족 개량운동 쪽에서 펼친 음악활동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중일전쟁이 일어나는 19377월 이후부터는 지금까지 펼쳐져 왔던 그의 '민족음악 개량운동''친일음악운동'으로 급격하게 변모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변모는 두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 듯하다. 하나는'민족음악 개량운동'이 애초부터 식민지하에서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수양동우회' 사건이다.

     

    "조선음악 대부분이 극히 지완(遲緩)하여 (더디고 느려서- - -인용자) 해이하고 퇴영적인 (뒤로 물러나서 움직이지 않는- - -인용자) 기분에 쌓여 있지마는 서양의 음악은 특수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개 경쾌 장중하다"([동서양음악의 비교], 1936)라고 말할 정도로 조선음악을 비판하고 서양음악을 열정적으로 계몽·보급하려 한 그의 '민족음악개량운동'은 기실 조선음악의 역사인식이나 미학에 관하여 무지한 데서 비롯하였다.

     

    또한 이러한 서양음악 계몽운동이 식민지하의 민족현실과 정면에서 부딪치지 않아야만 가능하였기 때문에도 그의 '민족음악 개량운동'은 처음부터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의 탄압이 본격화 되자 쉽게 친일의 길을 걸어간다.

     

    홍난파는 19374월 총독부 학무국이 주도하고 일본과 조선의 문예가 30여명이 결성한 사회교화단체 '조선문예회'에 회원으로 가입한다. 조선 문예회는 작가들과 홍난파, 김영환, 박경호, 윤성덕, 이종태, 함화진, 현제명* 등의 음악가들로 구성된 친일단체였다.

     

    홍난파는 19376월에 안창호 등 수양동우회 회원 150여 명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피검되는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한동안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그 이후 그의 친일화는 본격화된다.

     

    1937915일 조선총독부와 조선문예회가 '시국인식을 철저히 하며 사기를 고취'하기 위한 '시국가요 발표회'를 이왕직 아악부에서 개최하자, 홍난파는 최남선* 작사의 [정의의 개가(凱歌)]에다 곡을 붙여 친일가요를 발표하였다.

     

    1937930일에는 조선문예회가 신작발표회로서'황군위문조성- - -총후반도의 애국가요' 발표회 겸 '시국가요 피로의 밤'을 부민관 대강당에서 가질 때, 그는 [장성(長城)의 파수(把守)](최남선 작사)[공군의 노래](空軍:- - -彩本長夫 작사)라는 친일가요를 발표하였다.

     

    1937103일에는 경성 고등 음악학원이 주최하고 경성 군사 후원연맹이 후원하는, 부민관에서 열린 음악보국대 연주회에 출연하였다.

     

    19386월에는 앞서의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말미암아 전영택(田榮澤),현제명 등 18명의 동우회 회원이 친일단체인 대동민우회(大東民友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수양동우회 사건은 1941년 최종재판에서 그 동안의 친일 전력이 참작되어 전원 무죄판결이 날 때까지 계류되어 있었다.

        

     

     

     

    음악총력전의 기수

     

     

    그는 193879일에 경성방송국 제2방송 '동요와 합창' 시간(오후 6)에 경성방송 관현악단의 반주와 경보(京保)합창대·경성보육학교 생도합창대(지휘이흥렬)의 노래를 지휘하여 친일가요를 방송하였다.

     

    이때의 노래들 중 중일전쟁(1937. 7. 7)의 산물로 나온 [애국행진곡]은 일본인에 의해 작곡된 노래로서, '천황폐하의 신민으로 일본정신을 발양하고 약진하자'는 내용인데, 일본 전통의 전형적인 2박자풍 작품이고, 더욱이 '일본의 제2 국가(國歌)'로 알려진 작품이었다.

     

    19391059시부터는 경성방송국 제1방송을 통하여 홍난파가 지휘하는 경성방송 관현악단 공연이 방송되었다. 프로그램 제목은'애국 가곡집'이었는데, 이때의 '애국''일본천황국가에 대한애국'이었음은 물론이다.

     

    그 곡목이 이를 반증하고 있는데, [황국정신을되새기며](皇國精神にかへれ), [부인애국의 노래](婦人愛國), [애마진군가](愛馬進軍歌), [태평양행진곡](太平洋行進曲) 등이 그것이었다.

     

    [애마진군가]의 경우, 일제가 동남아시아에서 전쟁을 일으킨 후 그 전선에서 전쟁용 말()이 필요하게 되자, 조선과 일본 현지인들로 하여금 '애마사상'(愛馬思想)을 함양시키기 위해 일본 육군에서 가사와 곡을 공모한 작품이었다.

     

    그 음악적 특징에 있어서도 이 노래는 요나누키 음계에다 2박자라는 일본 민족의 전형적인 음악이었다. 19391월에는 6개에 이르는 일본의 레코드 회사가 이를 녹음하여 발매하기도 하였다.

     

    [태평양행진곡]1939720'바다의 기념일'(紀念日)을 제정한 직후 공모한 작품 중 제1위를 차지한 작품으로, '황국(皇國)의 생명선'인 태평양을 일본 영역화하자는 작품이었다.

     

    당시 이러한 노래들은 '국민가요'로 불려졌다. [애국행진곡], [애마진군가], [태평양행진곡], [흥아행진곡], [출정병사를 보내는 노래] 등은 태평양전쟁 직 후부터 국민총력 조선연맹이 음악총력전을 펼치며 이른바 '국민개창운동'{국민가집} 발행을 통하여 '중점적으로 불러야 할 노래'로 선정하면서 강압적인 학습노래가 되어 있었다.

     

    그 노래 내용은 어김없이 '일본국민가요'로서 '천황폐하 중심의 일본 정신과 정서'를 드러내고 있는 반민족적인 노래들이었다.

     

    이 노래들이 반민족적인 노래들이고 이 노래들을 전파하는 것 자체가 친일음악행위라는 것은, 그 노래들이 우리 민족의 정신과 정서를 일본정신과 일본정서로 바꿔 놓으려는 것이며, 결국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역사적으로 합의해 온 바 있는 민족정신과 민족정서를 '해체'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 이다.

     

    더욱이 홍난파는 친일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친일가요와 글을 계속하여 발표하였다. 연대 미상이지만 중일전쟁 이후에 발표한 친일가요 [희망의 아침]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고, 194077일자{매일신보}에 발표한 [지나사변과 음악]은 그의 대표적인 글이다.

     

    [희망의 아침]은 사단법인 조선방송협회가 펴낸 {가정가요} 1집에 발표한 노래로 가사는 춘원 이광수*가 지었다.

     

    가사에서 "일어나거라 우리 임금의 분부" 받아 "새로운 세계를 이룩"하고 "대아시아 대 공영권""우리 일장기 날리는 곳이 자자손손 복 누릴 국토"라는 것은 말할 나위 없이 '천황폐하에게 몸과 마음을 바쳐 대동아 공영권을 건설하자'는 일본정신, 곧 황국 정신의 구현이었다.

     

    음악 특징으로는 전형적인 일본 민족음계인 '도레미솔라'라는 요나누키 음계에다, 역시 일본 음악의 특징인 2박자 계통으로 작곡되었다.

     

    따라서 홍난파가 1930년대 벽두부터 주장한 순수 음악운동은 일제 식민지하에서 민족현실을 외면할 수 있었던 자기 도피와 자기기만의 음악운동이었다. 그가 조선 양악계의 대부라는 점에서도 그의 두 마음과 두정서는 일본 마음과 일본 정서가 중심이었다.

     

    한편, [지나사변과 음악]이라는 글에서 그는 더욱 분명하게 일본인이 되어 있었다. 성전(聖戰)도 이제는 제3계단에 들어가서 신동아(新東亞) 건설의 대업(大業)○○○ 더욱 견실하게 실현되어 가는 이때에 총후(銃後:후방- - -인용자)에 있는 여러 음악가와 종군(從軍)했던 악인(樂人)들의 뇌리에는 용용히 넘쳐흐르는 감격과 ○○적 감흥이 감발(感發)해 갈 것인즉, 이번의 성업(聖業)이 성사되어 국위를 천하에 선양할 때에 그 서곡으로, 그 전주적 교향악으로 '음악 일본'의 존재를 뚜렷이 나타날 날이 1일이라도 속히 오기를 충심으로 비는 바이며, 우리는 우리의 모든 힘과 기량을 기울여서 총후국민(銃後國民)으로서 음악보국운동에 용왕(勇往) 매진할 것을 자기(自期:마음속에 스스로 기약함- - -인용자)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이다.

     

    이 글을 보면 홍난파는 이미 제국주의를 펼치고 있는 일본 '천황'의 신민(臣民)이 되어 있었다. '음악 일본'이 하루라도 빨리 본 궤도에 올라 서있기를 바라는 그에게 '음악 조선'은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194091일자 {매일신보}에서 창씨개명한 이름 모리가와 준(森川潤)을 사용하고 있는데, 창씨 개명한 이름조차 성도 이름도 완전하게 일본식으로 바꾼 것이다. 같은 해 1016일에 홍난파는 국체본의에 바탕을 두고 내선일체를 획책하며 신동아 질서 건설에 매진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민총력 조선연맹의 문화위원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1941125일에는 '악단을 통하여 직역봉공을 하고 신체제 운동을하기 위해' 결성된 조선 최대의 친일음악단체 조선음악협회(회장은 조선총독부 학무국 학무국장 시오와라鹽原時三郞)23명의 평의원 가운데7명밖에 안 되는 조선음악인 평의원 중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1941년 홍난파는 악화된 늑막염으로 경성요양원에서 회한의 삶을 마감하였다.

    그의 죽음은 난파 개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죽음은 민족 현실 없는 순수 음악 운동이 왜 식민지하에서 허구이며 죽음인지를 드러내고 있으며, 우리가 그를 통하여 기대했던 희망이 좌절된 것을 의미한다.

     

    한국 근현대사의 음악 역사가 스스로 제기하고 있는 목숨 같은 질문, '음악과 음악을 다루는 사람은 이 땅에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가 부각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노동은(목원대 교수 · 음악학)

     

     

    홍난파 洪蘭坡 18971941

    본명: 永厚, 일본이름: 모리카와 준 森川潤, 예명: 羅素雲

    1898 화성 - 1941 서울

     

    작곡가·바이올리니스트·지휘자. 조선정악전습소 교사|경성방송 현악단 지휘자|빅터레코드 양악부장, 저서(작품) 봉선화|봄노래|음악만필 |조선음악백곡집 상하권 등, 작곡가|바이올리니스트|지휘자 본명은 영후(永厚)이다. 일제강점기에 널리 애창되었던 가곡 봉선화의 작곡자이기도 하며, 이 밖에 다양한 문예활동을 통하여 일제강점기의 한국문화계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주요 작품으로 바이올린 곡 애수의 조선·로만스·여름밤의 별들·라단조 가보테·동양풍 무곡, 가곡 성불사의 밤·사랑·금강에 살으리랐다, 동요 병아리·고향의 봄·개나리·할미꽃등이 있다. 또한 음악일화·동서음악의 비교·조선문화 20등의 평론과 서울 계신 K형께·첫 무대의 기억·악단의 뒤에서등의 수필, 최후의 악수·처녀혼등의 소설도 썼다.

     

    홍난파는 우리나라 서양 음악의 개화기에 가장 위대한 공헌을 세운 음악가로 일제의 압박으로 실의에 빠졌던 이 민족에게 음악을 통해 끊임 없는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준 선각자이다.

     

    예술 가곡의 금자탑이라 불리워지는 '봉선화'를 작곡하여 창가시대의 단순하고 유치한 반주 없는 노래에 종지부를 찍었을 뿐만 아니라 기악곡(器樂曲), 관현악조곡(管績梁組曲)을 작곡하여 우리나라 근데음악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바이올린 독주회를 개최하였으며 실내악단(室內梁嶽)을 조직하여 연주활동을 하였고, 관현악단을 처음으로 창단하고 지휘하여 우리나라 교향악 운동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홍난파는 또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 전문지인 '음악계'를 발간하여 본격적인 음악평론의 지평을 열었으며, 신문과 잡지 등에 연주평, 심사평을 써 음악에 대한 넓은 이해와 접근 방법에 커다란 공헌을 하기도 했다. 특히 홍난파는 '봉선화' 를 비롯해서 '봄처녀' , '고향생각' , '옛동산에올라', '성불사의 밤', '금강에 살으리랏다'와 같은 우리겨레의 정서가 담긴 가곡을 작곡하는 한편, 수많은 동요곡을 지어 내일의 주인공인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실어 주었다.

     

    또한 홍난파는 조선음악가협회를 조직하여 상임이사로 활동하면서 <음악만필(音梁漫筆)>, <세계의 악성> 등 음악에 관한 저서를 펴내는 편, 창작집으로 <처녀혼>(1920), <새벽종>(1921)등을 내놓아 문필가로서의 재능도 보여주었다. 이처럼 홍난파는 작곡, 연주, 평론, 출판 등 여러 분야에서 큰 발자취를 남긴 우리나라 근대음악의 선구자이다.

     

    경기도 화성군 남양읍 활초리에서 출생하여 5세 때 상경, 14세 되던 해인 1912YMCA 중학부에 들어가면서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913년 근대 이후에 설립된 최초의 전문음악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 서양악과에 입학하여 1년 동안 김인식(金仁湜)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졸업 후 조선정악전습소의 교사로 활동하던 중, 1917년동경음악학교(東京音樂學校)에 입학하여 음악·문학·미술 등 세 가지 분야에 걸쳐 잡지 발간 등의 문예활동에 주력하였다. 재일유학생들이 중심이 된 항일운동에 가담한 것이 원인이 되어 귀국한 뒤로는 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申報등의 기자로 활동하는 한편, 창작곡집 처녀혼을 출간하였다. 대표작 봉선화처녀혼의 첫머리에 애수 哀愁라는 곡명으로 발표된 것이다.

     

    1922년서울연악회(硏樂會)를 창설하고 교육 및 음악보급에도 진력하였다. 1925년 우리 나라 최초의 음악잡지 음악계 音樂界를 창간하였으며, 1926년에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신교향악단 단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한편 1925년에 편찬한 세계음악곡집봉선화등을 발표한 이래, 1929조선음악백곡집상하권, 1933조선가요창작곡집등을 세상에 내놓았고, 현제명(玄濟明)과 함께 합창곡 봄노래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 주요 작품으로는 바이올린독주곡 애수의 조선·동양풍의 무곡·로망스등이 있다. 한편, 관현악곡 즉흥곡·관현반주 붙은 즉흥곡, 기타 명작합창곡집·특선가요선집등을 출간하였다.

     

    그의 작곡 경향은 한국 선율의 요소를 반영시켜 서정적 분위기를 자아내고자 하는 데서 발견된다. 이 같은 그의 의도는 그가 남긴 평론에서도 잘 나타나며 바로 이런 점이 그를 1930년대 이후 한국 음악 창작의 패턴을 정립시킨 주요 작곡가로 평가하는 데 큰 몫을 한다.

     

    한편 1931년 바이올린 수업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셔우드(Sherwood)음악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에서 본격적인 독주회를 가지고 귀국하였는데, 그 뒤로는 연주활동 이외에 주로 경성보육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 등에서 가르쳤다.

     

    1936년 경성방송 현악단의 지휘자, 빅터레코드의 양악부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이영세(李永世) 등과 난파트리오를 조직하여 실내악 활동에 관심을 가졌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평론집 음악만필등을 통하여 음악문화의 계몽발전에 기여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내선일체를 획책하며 신동아질서 건설에 매진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위원으로 활동한 사실과 지나사변과 음악·희망의 아침등 친일 성향의 글과 작품을 발표한 사실이 최근에 밝혀져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1954년 난파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조선동요 100곡집을 재간행, 1968년 수원 팔달공원에 고향의 봄노래비 건립, 1969년 난파음악상이 제정되었다. 한때 홍난파가 흥사단가를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1996년 정부는 김세형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면서 그가 흥사단가를 작곡했다고 밝힘으로써 흥사단가의 작곡자는 홍난파가 아니라 김세형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홍난파의 대표곡인 봉선화를 비롯해 그가 작곡했다는 여러 곡들이 친일 행위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논란을 빚고 있어 그에 대한 평가는 아직까지 정립되지 않은 상태이다.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음악평론가, 수필가, 소설가, 번역가. 43세의 짧은 생애를 산 당시의 한국 음악인으로서는 대단히 다양한 예술활동을 벌였다. 그는 1898410일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에서 홍준()과 부인 이씨 사이에서 난 22녀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아버지는 국악에 조예가 깊어서 집안 식구들이 거문고, 양금, 퉁소 등을 연주했다. 난파는 그 중 양금을 연주했다.

     

    1899년 온 가족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사한다. 19109월 그는 중앙기독교청년회학관(YMCA) 중학부에 입학했고, 이 곳에서 김인식을 만나 바이올린에 접하게 된다. 1913년 조선정악전습소에 입학한다. 처음에는 국악을 배우러 들어갔으나, 곧 서양음악으로 방향을 바꾸어 1년을 다녀 성악과정을 마친 후 기악과에서 계속 공부한다. 1914년에 그는 이미 중앙기독교청년회 회관(YMCA) 중학부를 졸업했다. 1915년 그는 16세의 나이로 김상운(金祥雲 18981926)과 결혼한다. 1916년에는 조선정악정습소 서양악부 교사에 임명되어 2년간 근무한다.

     

    한편으로 그는 중앙예배당 안의 영신학교 교실에 음악 강습소를 차려 악리, 음계 연습, 유행 창가 교습을 지도했다. 그는 이런 교육에 필요한 통속창가집(초판 1916. 10. 20)악전대요(같은 해 4. 10)를 출판한다. 당시의 음악활동으로는 1914년에 김인식이 세운 <경성찬양회>의 음악회에서 활약하였다. 1917년에는 김인식, 이상준, 김형준, 형 홍석후와 함께 새문안교회의 집사로 임명 받는다. 그는 새문안교회와 안동교회의 성가대 지휘자로 일한 경력이 있는데, 정확한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1924년경에 찍은 새문안 교회 성가대 사진에 그가 찍힌 것이 보인다.

     

    그 다음 해에 그는 2년 과정의 일본 동경음악학교 예과에 입학한다(1918-19). 그는 동경 YMCA를 중심으로 일어난 2.8운동(3·1 운동에 앞서간 사건)이 발생한 이후 한국으로 귀국한다. 귀국 후 그는 세계 문학 작품들을 읽는 일에 몰두한다. 그리고 1919년 그는 잡지 三光창간호 출판하였으나, 이는 4호를 내고 폐간된다.

     

    1920년 동경음악학교 본과 진학을 거절당해 다시 귀국했고, 미국 유학을 계획했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921년 그는 6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제1창작집 처녀혼을 출판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같은 해에 오늘날 쿠오 바디스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진 어데로 가나(센쿠위츠 작)를 번역하였고, 잡지 음악과 문학을 창간한다(황석우와 공동 편집).

     

    1922년에는 일종의 음악학원인 연악회를 창설했고 한편으로 독일 비자를 신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트루게네프 첫사랑을 번역하여 출판한다. 그리고 자신의 소설 최후의 악수, 虛榮을 출판한다. 1923년 그는 한편으로 음악활동을 하면서 계속적으로 번역서와 창작집을 출판한다: 매국노의 자(스델만 작), 2창작집 向日草, 청춘의 사랑(홍난파 저), 靑年立志論(스마일스 저), 3창작집 폭풍우 지난 뒤. 이러한 사실들을 살펴보면 그가 20-23년에 문학에 더 기울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24년을 기점으로 음악 쪽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119일 자신의 1회 바이올린 독주회를 열었는데, 연주곡목에는 그리그의 바이올린 소나타 2, 바하의 바이올린 콘체르토 11,2악장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해에 그는 연악회를 중심으로하는 음악활동에도 열심이었고, 음악회 평론도 시작하였다. 하지만 소설을 번역하는 일도 계속했다: 에밀 졸라의 나나. 1925년 역시 연악회를 중심으로 하는 음악활동이 이어진다. 그리고 생의 세 번째 잡지 음악계를 창간한다. 이 잡지 역시 4호를 끝으로 폐간된다. 그리고 그가 손수 골필로 악보를 그린 세계명작합창가집(등사본)을 출판한다.

     

    1926년에 거행된 연악회 주최 "그랜드 콘서트"(YMCA 강당)는 이제 제법 그럴듯한 음악가들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거기에는 성악의 김형준, 피아니스트 김원복, 박경호, 박인덕, 첼리스트 백명곤의 이름이 보인다. 5월에 그는 아내를 잃는다. 그는 다시 일본으로 가서 동경고등음악학원 본과에 입학하는 한편, 서울에서 다시 와서 중앙악우회(中央樂友會)를 만들고, 세계의 악성이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한다.

     

    1928년 그는 동경에 있는 신교향악단(新交響樂團)의 바이올린 주자로 입단했고, 그 다음 해인 1929년에는 동경고등음악원 본과를 졸업한다. 그 후 그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 연악회를 부활시키고 째즈 밴드(Korean Jazz Band)를 만들어 방송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해 9월에는 홍성유, 김원복과 함께 중앙보육학교 음악과 주임교수에 취임한다. 그리고 이 해에는 보육학교의 교육을 고려하여 조선동요백곡집(상편-25, 손수 그린 등사본, 1930년에는 인쇄본 나옴) 출판한다. 또한 세계명작가곡선집(등사본, 인쇄본은 1931년에 나옴)도 손수 악보를 그려서 출판한다.

     

    1930년 그는 기존에 같이 음악활동하던 사람들 외에도 안익태, 안기영, 현제명, 채동선, 김원복, 김영의, 독고선, 홍재유, 황재경 등과도 함께 연주활동을 한다. 1931년에는 여러 잡지와 신문에 기고를 하여 그의 이름이 많이 알려진다. 이 해에는 조선동요백곡집(하편 손수 그린 등사본, 인쇄본은 1933년에 나옴)과 작품집으로 바이올린 독주곡 로만스, 애수의 조선, 동양풍무곡, 夏夜星群이 출판된다. 이 해 730일 그는 미국유학을 떠난다. 그는 9월에 미국 시카고에 있는 셔우드(Sherwood) 음악학교 입학하여 바이올린과 작곡 이론을 배운다(바이올린 교수: Marinus Paulsen, 작곡이론 교수: W. Keller). 그의 미국 생활은 매우 혹독한 것이었다. 그는 납부금을 제 때에 내지 못하여 수차에 걸친 분납을 해야 했다. 그는 잘 먹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도 많이 하여 건강도 좋지 않았다. 거기다가 교통사고로 늑골을 다친 일도 있었다. 1932527일 그는 일년만에 학사학위를 받고 졸업한다. 그리고 19331월에 귀국한다.

     

    한국에 돌아와 그는 소속되어 있던 중앙보육학교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경성보육학교의 교수로 취임한다. 그는 귀국 독주회를 개최하고 조선가요작곡집 제1을 출판한다. 그러니까 그의 "가곡""가요"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홍성유, 이영세와 함께 난파 트리오를 조직하여 진고개(충무로)에 있던明治製菓에서 첫 발표회를 가졌다(난파트리오는 1936년 해체됨). 그리고 현제명과 함께 작곡 발표회를 갖기도 했다. 1934년 그는 일본 빅타(Victor) 축음기회사 경성지점 음악주임에 취임하고 그 해 12월에는 김대형(李大亨)과 결혼한다. 그는 음반 만드는 일에 참여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문과 잡지에 음악에 관한 글들을 끊임없이 발표한다. 음반회사와 관계하면서 그는 영화음악이나 신민요 그리고 가요에도 관여하였다. 이런 부분과 관련될 경우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나소운(羅素雲)이라고 적었다.

        

     

     

     

     

    1936년에는 박영근, 이승연과 함께코리아음악연구소창설하여 성악·바이올린·피아노·악리과 설치하여 음악을 가르쳤다. 그리고 특선가요곡집을 출판하였다. 1937년 그는 빅타 축음기회사와 경성보육학교를 거의 동시에 사임하고 석달후 경성 중앙방송국 양악 책임자 겸 방송관현악단 지휘자에 취임한다. 그리고 이흥렬, 김태연(金泰淵)과 함게 성서(城西) 트리오를 조직한다.

     

    1937년 이후 일제의 성격은 더욱 흉포화한다. 이 해에 그는 조선총독부가 조종하는 조선문예회에 가입하면서부터는 그는 총독부의 정책을 지지하는 방향에 서고 만다. 1938년에는 수필집 음악만필(音樂漫筆) 출판을 출판한다. 그리고 1939년에는 JODK(경성방송국) 2방송을 통해 모차르트의 주피터 심포니를 연주하여 방송한다.

     

    1940년대에는 모든 것이 전쟁에 맞추어 생각되었고, 거기에 따라 사람들이 동원되었다. 그는 총독부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위원에 임명되어 일제를 위한 대동아 전쟁의 선전원이 되고 말았다. 그는 그 다음해인 1941년에 세상을 뜬다.

     

    홍난파는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음악가이다. 이는 한국 역사상 한 음악가에 부여된 명성으로는 가장 큰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음악에 서려있는 "애수"를 사람들은 즐겨 "민족의 애수"로 받아들였다. 이런 면은 홍난파의 발언으로 뒷받침되지 않음에도 그러했다. 물론 그가 총독부의 일을 즐겨했다는 흔적은 없다. 그가 총독부 일을 부담스러워했다는 친지의 증언은 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지울 수 없는 친일의 글을 남기고 있다. 그를 위해 애석한 일이다.

        

    홍난파의 일생은 식민지 시기 내에 한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식민지 시기가 끝나면서 더욱 크게 부각되었다. 그는 봉선화, 금강에 살어리랏다, 봄처녀,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와 같은 "가요"달마중, 낮에 나온 반달, 퐁당퐁당, 고향의 봄과 같은 동요를 통해 해방 직후의 음악 교과서를 통해 한국인에게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봉선화고향의 봄과 같은 노래는 이미 그 이전부터 민요보다 더 광범위하게 불리는 것이었다. 해방 이후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교과서에서 보는 그의 독과점적인 위치는 그를 거의 한국의 대표 음악가처럼 알려지게 한다. 이는 교과서에 실리는 일제시기에 창작된 문학 작품들의 경우도 홍난파와 유사한 대우를 받기는 하지만 문학에서는 홍난파와 같은 독과점 상태를 성취한 경우는 없었다. 그 이전의 음악가로는 김인식, 이상준, 김형준 등의 음악가가 있었으나 그와는 전혀 비교될 수 없는 인물들이었다. 그보다 조금 늦은 현제명, 박경호, 박태준 역시 그의 음악에 비해 질적으로 양적으로 비교될 수 없는 경우였다.

     

    홍난파는 몇 편의 기악곡을 남겼다고는 하나 그 곡들은 본격적으로 기악적인 상태에는 이르지 못한 것들이다. 즉 홍난파의 기악곡들은 "노래"의 상태를 겨우 벗어나는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음악적 성취는 성악 분야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한국어와 이제 막 익힌 서양식 음악을 전혀 어색하지 않게 결합시킨 것은 홍난파 이외에는 없었다.

    교회음악의 선구자 홍난파

    그는 기존의 한국 노래(민요)들이 장단의 틀 속에 선율을 집어넣어 그 속에서 선율이 밀리기도 당기기도 하는 반면에, 그의 노래는 가사의 음절 수에 따라 같은 리듬이 자꾸 반복되는 모습을 갖는다. 예를 들어 봉선화는 처음 네 음(또는 네 음절)의 리듬이 12번 반복되면서 한 곡을 이룬다. 물론 그의 모든 노래가 정확히 똑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약간 변하는 경우도 많다. 그대로든지 변하든지 간에 이런 반복적 리듬의 경향은 그의 음악에서 보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는 찬송가의 리듬 구성과 흡사하다. 하지만 그는 선율 면에서 찬송가와 비슷한 음악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일반인이 부를 있는 한 옥타브를 약간 벗어나는 음역의 선율만을 사용한다. 즉 그의 노래는 리듬적으로 선율적으로 대단히 쉽게 배울 수 있는 성격의 것이었다. 그는 못갖춘 마디의 음악을 많이 썼는데, 이상하게 들리는 일이 없었다. 이런 경우 아직도 어색하게 한국어와 결합시키는 작곡가들이 많다. 그는 작은 음악(노래)의 대가였던 것이다. 후에 윤이상이 그의 동요들이 "주옥과 같다"고 말한 것은 일리가 있다.

     

    홍난파는 자신의 음악으로 대단한 것을 성취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의 음악적 능력에 대해서도 스스로 회의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잘 해낸 사람이었고, 당대에 필요한 것을 제공한 작곡가였다.

     

    홍파동 홍난파 가옥(紅把洞 洪蘭坡 家屋)  

     

    홍파동 홍난파 가옥은 1930년대 독일 선교사가 지은 벽돌조 서양식 건물을 작곡가 홍난파 선생이 인수하여 살던 곳이다. 홍난파 선생의 대표곡들이 작곡된 곳이고, 1930년대 서양식 주택 특성이 잘 보존되어 있어 가치가 있다.

     

    난파 홍난파(洪蘭坡) 생가(生家)

     

     

    경기 화성시 활초동 283번지 (京畿 華城市 活草洞)

     

    봉선화 (김형준 작사) 봄 처녀 (이은상 작사) 고향생각 (이은상 작사) 옛 동산에 올라 (이은상 작사) 성불사의 밤 (이은상 작사) 장안사 (이은상 작사) 금강에 살으리랏다 (이은상 작사) 사공의 노래 (함호영 작사) 그리움 (이은상 작사), 1) 달마중 (윤석중 작사) 2) 종이배 (김광윤 작사) 3) 엄마 생각 (윤석중 작사) 4) 오빠 생각 (최순애 작사) 5) 고향의 봄 (이원수 작사) 6) 낮에 나온 반달 (윤석중 작사) 7) 퐁당퐁당 (윤석중 작사) 8) 햇빛은 쨍쨍 (최옥란 작사) 9) 꼬부랑 할머니 (최옥란 작사) 10) 고드름 (유지영 작사)

     

     

     

     

     

     

     

    봄 처녀

     

       이은상 시/홍난파 곡

     

     

    대표적인 친일파 (이은상, 홍난파) 노래다. 대표적인 친일작가로 낙양의 지가를 올린 가고파의 노산 이은상. 43년 노산이 친일언론사인 만선학해사가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특집으로 펴낸 반도사화(半島史話)와 낙토만주(樂土滿洲)라는 책에 전 조선일보사 조광 주간이름으로 논문 이언(俚諺)의 전와(轉訛)에 대한 일고(一考)를 게재하고 일본을 찬양한 인물이다.

     

    해방을 맞자, 완전 돌변하여 60년 마산 315의거 직전 대통령 후보 이승만을 '성웅 이순신'에 비유하며 전국 유세를 하고 다니기도 했다. 이승만 독재정권의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일어난 마산 315의거에 대해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 '불합리와 불법이 빚어낸 불상사' '이적행위'라는 말로 민주화를 열망하는 마산시민을 모독한 인물이다. 또 이은상은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를 찬양하며 곡학아세를 일삼던 희대의 기회주의자였다.

     

        

     

     

    참고문헌

    홍난파, [지나사변과 죽음], {매일신보}, 1940. 7. 7

    [희망의 아침], {가정가요} 1, 조선방송협회

    한국예술지(예술원, 1958)

    한국음악연감(음악년감사, 1967)

    문예총감(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79)

    한국양악백년사(洋樂百年史)(이유선, 음악춘추사, 1985)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4월 1일). 〈홍난파 : 민족음악개량운동에서 친일음악운동으로 (노동은)〉

  • 韓國藝術志(藝術院, 1958)
  • 韓國音樂年鑑(音樂年鑑社, 1967)
  • 文藝總鑑(韓國文化藝術振興院, 1979)
  • 韓國洋樂百年史(李宥善, 音樂春秋社, 1985). 〈李相萬〉
  • 『나라 사랑 난파 홍영후 특집호』(외솔회, 정음문화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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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미술

    • 홍난파 민족음악개량운동에서 친일음악운동으로
    • 현제명 일제말 친일음악계의 대부
    • 김은호 친일파로 전락한 어용화사(御用畵師)
    • 김기창 스승에게 물려받은 친일화가의 길
    • 심형구 친일파 미술계를 주도한 선봉장
    • 김인승 도쿄미술학교 우등생이 친일에도 우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