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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를 정신대로 보낸 여성 교육자, 황신덕(黃信德)

草霧 2013. 11. 29. 11:25

 

 

여성계

 

황신덕(黃信德, 1889∼1983)

 

 

 

제자를 정신대로 보낸 여성 교육자

 

 

 

 

 

 

 

친일 성향 강했던 중앙여고 교장

1940년경성가정의숙 교직원 사진 (앞줄 오른쪽 두 번째가 황신덕)

 

'일장기 머리띠를 두른 제복의 여학생이 선생님들과 함께 찍은 한 장의 기념 사진'. 이 사진은 1943년 한 여학생이 정신대로 차출되어 가기 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찍은 것으로 사진속의 교장은 황신덕, 부교장은 박순천이다.

 

이 사진의 주인공 '김금진 할머니'는 자신이 당시 정신대에 가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황신덕 교장이 하루는 ㄷ여고, ㅇ여고 같은 다른 학교 학생들도 정신대에 지원하고 있는데 우리 학교에 그런 용기있는 학생이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라며 눈물을 흘렸어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교장 선생님이 저렇게 눈물로 호소하는데, 내 한몸 희생해 학교를 구하자는 결심이 솟구치더군요." 그리고는 교장실을 찾아갔고 바로 기념사진 찍고 정신대로 끌려갔다고 했다.

 

 그 후 김금진 할머니는 후지코시의 총알 만드는 군수공장에서 일하다 해방되어 귀국했다. 1970년 어느해 황교장의 병환 소식을 듣고 찾아가 "선생님, 그 때 절 정신대 보내신 것 너무하셨어요. 선생님 가슴 아프라고 하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 때 왜 그렇게 하셨어요"라고 하였더니 선생님께선 "그래. 네 말이 맞다. 나도 그 일을 후회하고 있네"라고 처음으로 사과의 말씀을 하시더군요"라고 증언하고 있다({뉴스메이커}, 1992. 6. 5).

 

이 사진 이야기는 {중앙여고 30년}에도 '근로봉사와 정신대'라는 항목하에 공식적 기록으로 실려 있다. 즉, "학교마다 2명의 정신대를 보내라는 명령이 나왔다. 만일에 정신대원을 보내지 않으면 학교를 폐쇄시키겠다는 것이다.

 

그 때 김금진이란 학생이 교장실로 찾아왔고, 결국 김금진의 희생으로 학교는 폐교를 면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동아일보 1935년 7월 6일자 4면, 1937년 7월 9일자 3면, 1938년 10월 7일자 4면

 

 

그러나 교육부 자료 등 다른 어떤 자료에도 일제 말기 당시 정신대 문제 하나 때문에 폐교당한 학교는 없었다.

 

강제적으로 끌고 가다시피 한 국민학생 정신대와는 달리 여고의 경우, 친일 성향의 교장이 일제에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감언이설로 학생을 설득해 자원케 했다고 한다.

 

그러면 당시 '황신덕 교장 선생님'은 과연 친일 성향의 인사였는가?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황신덕은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며, 탁월한 여성교육자이다.

 

'일제하의 압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민족의 자긍을 지키며, 정부수립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황신덕', '여성문제의 해결과 그 입지를 구축하는 일에 앞장 서 온 황신덕은 민족사의 산 증인으로 우리 민족의 수난사와 동시에 그 안에서 얼마나 꿋꿋하게 설 수 있는가에 대한 민족자존의 표상으로 현대 한국인에게 삶의 한 좌표를 제시하고 있다' 등이 황신덕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이다.

 

* ‘여기자 좌담회’, 신동아 1932년 5월호 87~95쪽

 

 

또한 추계학원 중앙여자중고등학교 간행사는 "일제치하 암흑기에 창립자 추계 황신덕 선생은 오로지 구국의 일념으로 서대문구 충정로 일각에서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37명의 신입생과 더불어 개교하였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이승만 과도임시정부 입법위원으로 정부에 들어가 관선대변인을 맡으며 초기 국정에 참여하기도 한 '민족운동에 앞장 서 온 여성지도자'라는 평가도 있다.

 

 

1934년 12월 14일자 4면, 1935년 1월 1일자 2면


각종 친일단체의 간부와 중책을 맡으며 시국강연 연사로 활약

그에 대한 이러한 공식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일제하의 그의 경력과 족적은 '일제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의 자긍을 지킨 사람'이 아니라 '친일 성향이 강한 교장 선생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초기에는 애국계몽적 여성운동을 이끌어 온 황신덕은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좌우세력이 협력하여 건설한 '근우회' 활동을 그만둔 이후부터는 적극적 친일파 여류인사 중의 한 사람으로 되었다. 각종 중요 친일단체의 간부와 중책을 맡았음은 물론이고 여성들을 대상으로 '황국신민'이 될 것을 호소하는 시국강연의 연사로도 크게 활약한 사람이었다.

 

기자 출신인 황신덕이 본격적인 친일의 길로 접어 든 것은 신문기고 논설들을 통해 전시를 맞이한 여성들의 국가관을 설득하는 한편, 전국 순회강연반으로 참석하면서부터이다.

 

1929년 1월 1일자 부록 1면

1938년 6월 24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부인들을 대상으로 보국을 주제로 한 시국강연회를 개최하고 국방헌금을 모금하였는데, 그 자리에 황신덕은 연사로 참석하여 '비상시국과 가정경제'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1941년 9월 16일자 {매일신보}에 따르면 황신덕은 오늘날 비상시국에 처해 있는 국가를 위해 [폐품을 재생산하여 국가에 필요하게 쓰자]라는 제목으로 논설을 싣고 있다.

 

폐품을 재활용하고 물자를 절약하는 근검정신을 고취시키는 것이 나쁠 것은 없지만 그가 주장하는 것은 생활의 절약정신이 아니라 가뜩이나 굶주리고 피폐해진 민중들을 쥐어짜서 일제의 전시물품을 동원하자는 취지였다.

 

[전시생활과 부인도덕]이라는 주제의 좌담이 {매일신보} 1942년 1월 3∼10일자에 5회에 걸쳐 연재되었는데, 황신덕은 김봉희(金鳳姬), 임효정(林孝貞), 아라이(新井昌子) 등 6명과 함께 참석하였다. 

 

좌담 참석자들은 '새시대의 도덕은 개인에서 공중도덕으로', '소극적인 것을 버리고 정(靜)에서 동(動)의 도덕으로' 등을 논하고 있으나 중심내용은 전시에 국가를 위하여 여성들이 적극 호응하고 나서자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역시 동일한 맥락에서 {매일신보} 1941년 12월 25일자에는 [정전(征戰)을 뒤에 지키는 맹서----근로의 정신]이라는 제목으로 근로 정신의 신명을 갖고 책임을 다하자는 취지의 글을 실었다.

 

또 [어머니의 책임이 중대]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해군지원병제도를 실시한 우리는 구군신(九軍神)과 같이 한번 나라를 위해 죽을진대 '죽음'을 생각지 않는다는 그러한 위대함을 길러내는 어머니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강변하고 있으며, '전위여성격려대'로 청주, 충주, 영동지방을 순회하며 강연한 기록들도 볼 수 있다.

 

1929년 1월 2일자 13면, 1929년 1월 3일자 9면

 

그는 글이나 강연을 통한 활동뿐만 아니라 각종 친일단체의 간부, 임원직을 맡아 활동하였다. 황신덕은 1940년 10월에 결성된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부위원직을 맡았으며, '아등(我等)은 황국신민으로서 황도정신을 선양하고 사상통일을 기하며, 아등은 전시체제에 즉하고 국민생활의 쇄신을 기한다'는 강령을 내세우고 1941년 10월 22일에 친일세력을 총망라하여 조직된 '조선임전보국단'에도 몇 안 되는 여성 평의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또 1942년 1월 5일에는 조선임전보국단 산하기관으로 총후부인 진영을 망라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가 발족되었는데 황신덕은 그 단체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단체의 활동 중의 하나로 근로봉사운동을 전개하여, 각 정(町), 애국반원, 부내 실천회원들로서 군복 수리 작업을 시작해서 같은 해 12월경까지 연중무휴로 이 작업을 계속한 바 있었다.

 

그리고 징병, 학병, 해군지원병 제도가 잇따라 실시되던 1943년 무렵부터는 지원병과 학병으로 나갈 것을 강요하는 데도 앞장 섰다. 황신덕은 처음부터 친일적 여성은 아니었으며 적어도 1930년 중반까지는 애국계몽운동 계열의 여성운동 지도자였다. 

 

1889년 평양의 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평양 숭의여학교를 졸업하고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사회사업을 전공하였다. 숭의여학교 시절에는 황에스더와 함께 '송죽회'(松竹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일본어배격운동'을 벌인 적도 있었다.

 

일본에서의 수학을 마친 그는 1925년부터 기자생활을 하였으며 {시대일보}, {중외일보}를 거쳐 1934년부터 1940년에 중앙여고의 전신인 '경성가정의숙'을 설립하기 이전까지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였다.

 

1929년 4월 21일자 3면


 

'근우회'에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로

1927년 8월 27일자 3면

일제하 여성운동의 맥락은, 기독계 여성단체가 중심이 되어 선교활동과 함께 교육운동, 계몽운동, 문화운동 등을 전개한 흐름과 개인적 차원에서 봉건적 남녀차별에 저항하며 자유주의적 경향을 띠는 이른바 신여성운동그룹, 그리고 독립운동과 기층 여성의 생존권 투쟁운동을 결합시키는 사회주의적 여성운동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황신덕은 기자로 재직하면서 이러한 여성운동계열 중 애국계몽운동계열의 여성운동을 주도하였다. 1927년 여성운동과 항일운동의 일원화라는 목표 아래 이 세 계열의 여성운동계가 '근우회'를 창립하여 일제하 여성운동의 역량을 총결집하게 된다.

 

근우회 강령과 규약

 

이 근우회에서 황신덕은 21명의 중앙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중책을 맡게 되었으며, 중앙기구의 부서에서 교양교육부 상무직을 역임하게 되었다.

 

 

 

근우회 발회식 광경,

 

근우회 조직의 배경으로 민족유일당운동을 들 수 있다. 1920년대 사회주의사상의 유입으로 인하여 항일민족운동 노선이 좌·우로 분파 활동되어 자주독립국 재건의 역량이 약화되었었다. 이에 국내외에서 민족유일당운동이 일어나 점차 세력을 연합하였고, 마침내 1927년 2월에 민족유일당으로서 신간회를 조직하였다. 여성운동계도 민족유일당운동에 보조할 새로운 운동을 전개하였다. 분파 확대되어가던 사회주의 여성단체들이 점차 하나로 통합되었고,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던 유학생 출신 엘리트 여성들이 간친회라는 이름으로 세력을 규합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사회주의 여성운동계의 연합화였다.

 

사회주의계 여성운동의 분파적 확대는 조선여성동우회의 존재를 약세화하였다. 그런데 1926 봄, 동경에 유학하였던 정칠성·황신덕黃信德·이현경李賢卿 등이 귀국하면서 분파된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통합화와 조선여성동우회 활성화의 새로운 전기를 갖게 되었다.

 

1927년 5월 11일자 3면

 

기생 출신의 정칠성은 일찍이 남녀평등 실현에 대한 꿈을 갖고 17세때 이미 여장부가 되고자 승마를 배운 여성이다. 註87) 3·1운동 뒤 홀연히 화류계를 떠나 사회주의 서적을 탐독·연구하였고 여성동우회 발기에 참여한 후 일본 동경기예학교에 유학, 삼월회를 조직·활약하였다. 그는 여기서 사회주의사상의 이론적 기반을 착실하게 쌓고 1926년 봄에 귀국하였다. 황신덕은 평양 숭의여학교 졸업후 동경 일본여자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사회주의사상에 흥미를 갖고 삼월회 등에 관련하였으며 1926년 봄 귀국 후 곧 조선여성동우회에 가입하였고, 『시대일보』 기자로 활약하였다. 이현경도 황신덕과 같이 일본여자대학 사회학과 출신으로 삼월회 조직 멤버였다. 귀국 후 역시 조선여성동우회에 가입·활약하였으며, 「경제상태의 변천과 여성의 지위」 註88)라는 방대한 양의 논문에서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이론과 그 사상을 제시하였다. 노령 출신 강아그니아도 일본에서 귀국하여 조선여성동우회에 가입, 남편 정필원鄭弼元과 함께 사회주의운동에 힘썼으며 일제에 의한 공산주의 일제 검거시에 피검·투옥 생활을 하였다.

 

1926년 11월 14일 註89)경성여자청년회에서 재경在京사회주의 여성운동자 간친회를 열고, 사회주의 여성운동 통합의 첫 문을 열었다. 당시 『조선일보』는 “막혔던 장벽을 트고 가렸던 흉금을 헤치고 지금까지의 여성운동의 소감을 말하여 종합한 결과 전 조선여성운동자의 통일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될 것을 깊이 느끼고 먼저 경성여자청년회와 경성여자청년동맹을 합동키로 결의하였다.” 고 보도하였다. 동 간친회에서 양 단체의 합동총회 개최를 위한 준비위원으로 조선여성동우회의 이현경·황신덕·

 

강아그니아 3인, 경성여자청년동맹의 조원숙·심은숙·김정은 3인 및 경성여자청년회의 박원희·김수준·신기숙 3인을 선출하였다. 이에 따라 동 20일에 경성여자청년동맹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주세죽을 임시의장으로 선출하여 두 단체의 합동에 대한 승인을 결정하였다.

 

합동총회는 동 12월 5일 오후 1시부터 천도교당에서 개최코자 했으나 당국의 간섭으로 인해 여성동우회관에서 개최되었다. 회원 50명과 다수 방청인 참석 아래 박원희를 임시의장으로 선출하여 총회를 집행하였다. 그 결과 두 단체의 간판을 불사르고 새로 중앙여자청년동맹을 발족시켰다. 동 회에서 집행위원으로 김수자·신기숙·심은숙·강아그니아·여영숙·박원희·곽형숙·노승준·김성인·김수준·조원숙을 선출하고 다음 사항들을 결의하였다. 결의사항에 나타나듯 양 단체의 통합은 조선 내 사회주의운동의 통일적 확대에 목적을 둔 것으로 생각된다.

 

청년여자에 대한 사회주의 의식 확대 교육을 위해 대중교양에 힘써 지방 여자청년회를 비롯한 국내 여성운동 세력을 사회주의 여성운동으로 흡수하려고 했다. 근우회가 조직되기 직전인 1927년 3월 8일에 조선여성동우회와 중앙여자청년동맹 연합으로 국제무산부인데이를 기념하는 대강연회 註92)를 YMCA 강당에서 7명의 연사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개최코자 하다가 당국의 금지로 중단된 바가 있는데, 그 강연회는 청년여자의 대중적 교양과 조직적 훈련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그 운동을 활성·확대함에 큰 걸림돌이었다. 그네의 운동 목적을 달하기 위해서는 지도층 여성으로부터 대중사회 여성까지를 아우르는 비교적 광범위하며 온건한 의식과 방법으로 여성운동을 전개하는 기독교 여성을 비롯한 민족 진영의 여성운동과의 연합이 불가피한 것이었다.

 

근우회는 국내외에 걸쳐 60여 지회를 조직하였다. 지회 활동은 근우회의 조직 확대로서의 활동이므로 근우회의 성격을 보다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는 근우회의 지회활동을 중심으로 살펴야 한다. 각 지회의 중요 사업을 활동별로 분류하면 ① 여성의식향상을 위한 강연회와 토론회, ② 회원 모집 및 회원간 친목을 위한 야유회·체육대회 및 척사擲柶대회 등, ③ 여성의 기술교육을 위한 강습회, ④ 학교기부금이나 어려운 동포구제를 위한 음악회 등의 사업, ⑤ 문맹퇴치를 위한 부인야학 등이다.

 

근우회와 같은 목적, 같은 이념의 운동을 추진하는 신간회의 제반 움직임은 근우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었다. 신간회는 1931년 1월에 이미 이원지회에서 해소를 결의하였다. 신간회 해소는 다른 지회에 급속히 파급되어 갔다. ‘근우회의 해소론’은 단천·북청에서 처음으로 발생되었으나 동조는 약하였다. 이원지회도 1931년 4월 15일의 제2회 정기대회의 의안 토의사항에서 해소 문제가 처음으로 크게 논의되었으나 전국대회 때까지 보류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처럼 ‘근우회 해소론’은 처음에 지회에서 일어났다. 최초로 해소를 결의한 신의주지회는 1931년 3월 31일 제4회 정기대회에서 “기설 운동단체 해소문제로 근우운동도 조선 노력부인의 전적 해결을 주기에는 부적당하다.” 註104)는 이유로 해소를 결의하였다. 즉 근우회운동을 통해 계급투쟁적인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는 논리였다. 1928~30년에 걸친 근우회 연차 전국대회도 경찰의 탄압으로 한 번도 제대로 진행된 일이 없었다.

 

1930년 1월, 항일민족주의적 학생운동에 근우회 간부가 조직 지도에 관련되었다 하여 허정숙·정칠성·박호진·박차정朴次貞 등을 체포·구금하였으며, 강아그니아 등도 공산주의 재건운동에 관련되어 체포·구금되었다. 근우회운동에 대한 일제의 지속된 탄압은 사회주의 여성운동에 동조하지 않았던 지회운동까지도 힘을 잃고 소멸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여성운동이 근우회로 집중되었던 만큼 해소는 한국여성운동계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1930년대 여성운동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의 강력한 추진 속에서 여성의 자질을 향상시키고 진정한 여성해방을 추구하는 성격으로서 점차 존재하기 어렵게 되었다.

 

 

 

또 1928년 제1회 대회에서 지방과 해외지사의 대표가 추가되어 31명으로 중앙집행위원회가 구성될 때에도 황신덕은 다시 집행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근우회가 해체되고 나서 일제의 조선인 탄압정책이 더 혹독해지고 노골화되자 황신덕은 친일인사로 변모하게 된다. 한편, 그의 교육자로서의 길을 더듬어 보면 그 시작부터 민족주의적인 입지에서가 아니라 친일 행각의 일환으로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동아일보 1926년 11월 24일자 4면

1927년 2월 1일자 2면

 

중앙여고의 전신인 '경성가정의숙'은 이왕가(李王家)의 소유건물, 즉 초대 추계학원 이사장인 박찬주의 남편 이우공의 서재를 희사받아 1940년 10월 10일 신입생 37명으로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황신덕은 이 시절 이미 각종 친일단체에 깊이 관여하여 일제에 적극 협력하는 인사로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1921년 5월 2일자 3면
또한 당시 서울에서는 황족이나 친일 고관부인이 중심이 되어 여성의 민족의식을 약화시키고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한 준비로 여성교육에 관여하였던 경우가 많았다.

 

우리나라에 1895년 처음 여학교가 세워진 이래 이미 1910년만 하여도 전국에 세워진 여학교는 공식 집계만도 659개였다. 

 

그 후에도 자립적으로 크고 작은 학교들이 많이 세워졌는데, 여학교 설립은 그를 후원하는 여성단체의 조직----주로 여성교육계몽단체----을 촉발시켰다. 그리고 이들 단체는 서울의 경우 황족, 친일고관 부인이 중심이 되었다.

 

동아일보 1920년 8월 7일자 4면

이들은 한편으로는 여성교육을 여성근대화로 위장시키면서 '문명에 점취하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여자교육을 시행하여 구습(舊習)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교육계몽을 내세우면서 친목·자선·봉사활동을 한다는 명분으로 조선 여성의 친일화, 식민화를 꾀하고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이미 적극적 친일인사로 전향해 있던 황신덕이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학교를 설립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그가 애국·애족정신의 함양을 교시로 개학식을 가졌다 하지만 그 때의 애국애족이 과연 민족주의적인 것이었는지 친일적인 것이었는지도 확실치 않은 것이다.

 

1940년 37명으로 세운 학교는 1945년 1월에 사립학교 규정에 의해 중앙여자상과학교로 인가를 받게 된다. 정신대와 관련해 양심고백을 한 일본인 교사 이케다 씨의 '정신대 모집이 많았던 학교의 교장은 영전했다'는 발언을 주목한다면 '황신덕 교장'이 제자를 정신대로 보내고 일제에 적극 협력한 대가로 경성가정의숙은 그 후로 정식 학교로 인가를 받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1983년 11월 22일 별세하기까지 황신덕은 추계학원 이사장으로 여성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수많은 여성단체에 관여하여 여성운동을 주도하였고, 3·1 여성동지회 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신가정 1936년 1월호 60~65쪽

노영희, 〈황신덕의 일본체험과 일본선각자들과의 지적교류〉동덕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 제8집:2002년 4월호》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3월 1일). 〈황신덕 : 제자를 정신대로 보낸 여성 교육자 (장하진)〉, 《친일파 99인 2》

친일파 된 여성 교육선각자들 - <자료입수> 김활란 등 선각 여성 5인의 친일행적”, 《프레시안》, 2002년 3월

추계 황신덕 여사 20주기 추모식 내일 열려 한국일보 2003

[데스크일기] 철거된 친일파들의 동상 오마이뉴스 2004

반민특위에 제1호로 검거된 '매판자본가' 오마이뉴스 2004.05.07

김정빈. “3.1절을 맞는 감회”, 《미주한국일보》, 2007년 3월

정옥희. “흙 다시 만져보자”, 《미주한국일보》, 2006년 8월

■ 장하진(충남대 교수·사회학)

 

 

황신덕

1898년∼1984년. 여성운동가·교육자.       

본관은 제안(濟安)이며 호는 추계(秋溪). 평양 출신. 석청(錫淸)의 딸이다. 평양에서 숭의여학교(崇義女學校)를 졸업한 뒤 1921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을 수료하고 1926년 일본여자대학 사회사업부를 졸업했다.

 

졸업 후 곧 귀국하여 『시대일보』·『중외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하였으며, 1934년부터 동아일보사의 신가정부(新家庭部) 기자로 일했다. 언론계 활동뿐만 아니라 여성운동에도 투신하여 활약하였다. 일제시대의 여성운동은 여성의 지위 향상, 여성 해방을 위한 여성운동의 측면뿐 아니라 민족운동 성격으로 전개된 양면성이 있었다. 이것은 곧 여성운동이 근대화운동인 동시에 민족자강운동 성격으로 전개되었음을 의미하는데, 특히 여성운동은 1920년대에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러한 배경 아래 그는 1926년여성동우회(女性同友會)에 가입하여 여성운동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여성동우회는 사회주의 계열의 단체였지만 이 단체를 통하여 민족운동과 여성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고, 그 뒤 1927년근우회(槿友會) 창립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대부터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민족운동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여성지도자 양성을 위하여 교육사업에 열중하였다. 그리하여 1940년에 경성가정여숙(京城家庭女塾)을 창립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이를 중앙여자중학교로 승격시켜 교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제자들을 정신대로 보내는 등 친일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1946년 12월 8일자 2면, 1948년 3월 27일자 1면

 

1961년에는 학교법인 추계학원 이사장에 취임하였고, 추계국민학교·추계유치원도 설립하였다. 한편 여성 해방운동에도 계속 심혈을 기울여 1952년에 여성문제연구회를 창립하였고, 1956년에 가정법률상담소를 창설하였다. 1970년 3·1 여성동지회 부회장에 취임하고, 1971년 범태평양 동남아여성협회 회원이 되어 교육사업과 여성운동 분야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1962년에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편저〈한국여성독립운동사〉

 

동아일보 회의실서 결혼식 올린 황신덕(黃信德, 1898~1983)

-1889년 평양 생
  -숭의여학교졸업
  -1921년 일본와세다대학 수료
  -1926년 귀국 후 시대일보, 중외일보기자
  -1927년 근우회 창립회원으로서 활동
  -1934~40년 동아일보 신가정부 기자
  -1938년 5월 24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여성단체연합 시국강연을 한때 '비상시국과 부인보국'이란 연재로 강
  -1940년 경성가정여숙을 창립, 해방 후에 중앙여자중학교로 승격시켜 교장에 취임
  -1940년 10월 16일 발족된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부 후생위원
  -1941년 9월 15일 내지 1주일 예정으로 여류 지명인 총동원 하는 전위 여성 격려대를 전선 각지로 파견하여 강연회 혹은 좌담회, 일반부인층과 여학교생도들을 모아놓고 '일본여성의 갈길'로 강연 또는 좌담을 한때 청주, 충주, 영동지역 연사로 활동
  -1941년 9월 16일 매일신보에 '폐품을 재생산하여 국가에 필요하게 쓰자'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
  -1941년 10월 22일 부민관에서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1941년 12월 20일 2시 동양극장에서 시국부인대강연회 연사
  -1941년 12월 22일 6시 영등포연예관에서 열린 시국부인 대강연회 연사
  -1942년 1월 5일 발족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1943년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위원
  -1948년 과도정부 입법위원에 선임 됨
  -1952년 여성문제 연구회 창립회장
  -1956년 가정법률상담소 창설이사장
  -1961년 학교법인 추계학원 이사장
  -1962년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받음
  -1970년 3.1절 여성동지회 부회장에 취임
  -1971년 범태평양 동남아 여성협회 회원으로 활동
  -1983년 사망

 

 

 

 

■ 참고문헌

[좌담회: 전시생활과 부인도덕], {매일신보}, 1942. 1. 3∼10. 황신덕,

[폐품을 재생산하야], {매일신보}, 1941. 9. 16.

{중앙 30년}, 1970.

『조국(祖國)을 찾기까지』(최은희, 탐구당, 1973)

『우리 황신덕선생(黃信德先生)』(중앙여자고등학교, 1971)

『중앙(中央)30년사(年史)』(중앙여자고등학교, 1971)

  • 황신덕, 《무너지지 않는 집을 : 황신덕 선생 유고집》 (추계황신덕선생기념사업회, 1984)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996)
  • 송남헌, 《한국현대정치사 (하)》 (한국사료연구소, 1980)
  • 전봉관, 《경성 자살 클럽》 (살림, 2008)
  • 중앙여자고등학교, 《우리 황신덕 선생》 (중앙여자고등학교, 1971)
  • 중앙여자고등학교, 『중앙 30년사』 (중앙여자고등학교, 1971)
  • 김학진, 《나라사랑의 일생 황신덕 여사》 (선일문화사, 1974)
  • 최은희, 『조국을 찾기까지』 (탐구당, 1973)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정당연구자료 제1집》 (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65)
  • 반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 99인 2》 (돌베개, 1993)
  •  친일파 죄상기, 김학민 정운현 엮음(민족정기의 심판 : 39, 54p)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25,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찬(48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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