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국민의 의무는 재미다.

민족 개조 부르짖은 변절 지식인의 대명사, 이광수 (李光洙)

草霧 2013. 11. 29. 11:21

 

 

 

문학

 

이광수 (李光洙, 창씨명 香山光郞, 1892∼1950)

 

 

 

민족 개조 부르짖은 변절 지식인의 대명사

 

 

 

1922년 <개벽>지에 [민족개조론] 발표

1939년 조선문인협회 회장

1942년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 참석

이광수(李光洙, 일본식 이름: 香山光郞 가야마 미쓰로[*],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 ~ 1950년 10월 25일)는 일제 강점기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소설가이자 작가, 시인, 문학평론가, 페미니즘 운동가, 언론인이었으며, 사상가, 기자, 번역가, 자유주의 운동가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에 참여, 신한청년당,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임정 사료편찬위원회와 독립신문 등을 맡기도 했었다. 유교적 봉건 도덕, 윤리관을 비판하였고, 여성 해방자유 연애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언론 활동으로는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또한 번역가로도 활동하여 영미권의 작품을 한글로 번안하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1909년 첫 작품 사랑인가를 발표한 이후 일본 유학 중에 소설과 시, 논설 등을 발표하였고,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망명, 1919년 도쿄(東京)의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을 주도했으며, 2·8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후 3·1 운동 전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독립신문을 발행했다. 1921년 귀국 후에는 동아일보조선일보 등의 언론에 칼럼과 장·단편 소설, 시 등을 발표하였다.

 

안창호, 윤치호, 김성수 등의 감화를 받아 민족 개조론과 실력 양성론을 제창하였으며, 1922년 흥사단의 전위조직인 수양동맹회를 조직하고, 안창호를 도와 흥사단 국내 조직과 수양동우회에 적극 참여하였다. 수양동우회 사건을 계기로 변절한 이후에는 대표적인 친일파로 규탄받았다. 일제 강점기 후반에는 민족성, 인간성의 개조를 주장하였고 한때 나치즘 등에도 공감하기도 했다. 그는 안창호, 윤치호의 사상적 계승자이기도 했다.

 

1939년 12월 이후에는 자발적으로 창씨개명에 동참할 것을 권고하여 지탄을 받기도 했다. 해방 이후 백범일지의 교정, 윤문과 안창호의 일대기 집필을 주관하였다. 1949년 반민특위에 기소되었으나 석방되었고, 1950년 6월 한국 전쟁서울에 있다가 북한 인민군에게 납북되었다. 순한글체 소설을 쓰는 등 소설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였다. 소설가로는 구한 말과 일제 강점기 시대 동안 '만인의 연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청소년 남녀의 우상이었고, 최남선,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다. 자는 보경(寶鏡), 호는 춘원(春園)·고주(孤舟)·외배·올보리·장백산인(長白山人)이며, 필명으로 춘원생, 경서학인(京西學人), 노아자닷뫼당백, Y생, 장백, 장백산인 등을 썼다. 본관은 전주이다.

  • 1.1 생애 초반
  • 1.1.1 출생과 가계
  • 1.2 청소년기
  • 1.3 일본 유학 시절
  • 1.4 귀국과 망명
  • 1.5 독립 운동과 사회계몽 활동
  • 1.6 전향과 친일 행적
  • 1.7 광복 이후
  • 1.8 사후
  • 2 작품
  • 3 문학 세계
  • 4 사상과 신념
  • 5 논란과 의혹
  • 6 가족 관계
  • 7 평가와 비판
  • 8 다른 작가와의 비교
  • 9 기타
  • 10 주석
  • 11 같이 보기
  • 12 이광수를 연기한 배우
  • 13 참고 자료
  • 14 관련 서적
  • 15 외부 링크
  • 천도교, 일진회  105인 사건, 오산학교 자유 연애론, 무정 발표, 가부장제, 결혼, 동거혼, 여성주의, 민족자결주의, 신한청년당, 2·8 독립 선언 , 신한청년당, 2·8 독립 선언, 3·1 만세 운동  상하이 임시정부, 독립신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운동에 대한 회의론, 동성애 허용론 논란, 민족개조론, 민족개량주의 사회 변화론 설파 계몽론에 대한 비판, 수양 동우회 조직, 흥사단, 신간회, 수양동우회, 수양동우회 사건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 단종애사 발표, 문맹퇴치 운동, 브나로드 운동, 미스코리아 심사 위원, 이순신전 집필과 대중화,  조선일보 부사장, 수양동우회 사건, 사회 계몽론, 수양동우회 사건 이상주의에서 현실주의로 변화, 재판과 좌절, 전향, 창씨개명, 내선일체, 총독부 정책에 협력 문제, 자치권 획득 노력, 백범일지, 반민특위 구속까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이 애정도피 사건으로 그는 교사라는 사람이 조강지처를 버리고 타락, 음란,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세간의 질타,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중매로 만난 본부인 백혜순과는 사랑없는 결혼 생활에 회의감을 겪고 이혼을 결심, 합의하에 이혼하였지만 그에게 가해진 것은 조강지처를 버린 인간, 타락한 인간, 향락과 음란의 상징이라는 꼬리표였다. 또한 결혼할 자유가 있고, 이혼할 자유도 있다는 그의 견해와 그가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점 등을 들어 그를 멸시하였다. 그리고 이광수의 생모 충주 김씨가 세번째 부인(3취 부인)이라는 점을 들어 그는 서자로 취급당하고 무시당했다. 또한 1919년 1월부터 국내의 지식인들과 민중들에게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적극 호소했지만 이 역시 무시되었다. 어려서부터 폐렴결핵, 손발 동상 등의 질병을 앓았는데 치료시기를 놓쳐 평생 고생하였다. 후처가 된 허영숙의 극진한 간호로 위기를 여러번 모면하였다. 그러나 동료 문인들이나 독립운동가들은 허영숙이 그를 타락시켰다며 못마땅하게 여겼다. 춘원은 허영숙과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다. 대부분 요절하였고 아들 이영근, 딸 이정화 등만이 살아남았다.  1922년 1월 9일 박종화, 현진건, 이상화 등과 함께 잡지 《백조 (白潮)》지의 필진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경 아내 허영숙이 상하이에 이광수를 찾아왔을 때 아내와 함께 돌아오다가[32](일설에는 홀로 돌아왔다고도 한다.[1]) 선천(宣川)에서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다가 불기소처분으로 풀려난 뒤에는 변절자로 비난받았다.[32][1] 이에 대해 이광수가 상하이에 가기 전부터 총독부와 모종의 합의가 있었다는 의견과 이광수와 상해 임시정부를 이간질하려는 총독부의 책략이라는 의견이 있다. 이 글을 통해서 이광수는 '삼일운동이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난 이후, 우리 민족이 추구해야 할 방도는 일제에 대항하는 독립투쟁이 아니고 독립을 쟁취하고 유지할 만한 실력을 먼저 기르는 민족개조운동, 자치운동론'이라고 주장했다.

     

    8월 15일 김동인과 함께 광복 소식을 접하게 된다.“1945년 8월 보름날 정오에 일본천황 유인이 울음 섞인 소리로 온 일본인에게 부득이 항복한다는 포고를 할 때, 라디오 앞에 외배(이광수)도 울면서 그 방송을 들었다. (김동인의 증언)[92]”그는 일제 식민지가 오래갈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갑자기 찾아온 광복은 그에게 충격이 되었다.

     

    1949년 1월부터 이광수는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게 되었고[38] 반민특위의 2차 검거(문화계)가 시작된 첫날인 1949년 2월 7일에 전격 구속되어 서대문 형무소로 수감되었다. 1차 심문이 끝난 후 조사관에게 약속한 대로 친일에 대한 고백서를 썼다. 같은 날 같은 죄목으로 검거된 최남선이 "민족의 일원으로서 반민족의 지목을 받음은 종세에 씻기 어려운 대치욕"이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른바 「자열서」를 쓴 반면, 이광수는 시종 「나의 고백」에서 보인 자세를 그대로 견지했다. 한편 이광수의 셋째 아들 이영근(당시 중앙중학 6학년)이 반민특위 위원장에게 "아비는 폐병 3기, 신장결핵 등으로 사선(死線)에서 방황한 적이 있습니다."라며 아버지에 대한 보석 신청과 함께 자신을 대신 수감해 달라는 내용의 혈서를 투서하였고[99] 이광수는 1949년 3월 4일 '고혈압증' 등의 사유로 특별히 병보석으로 출감되었고[99] 석방 이후 다시 봉선사로 돌아와 틈틈이 글을 쓰며 생활하였다.

     

     당시 미군 극동군사령부는 당시 그를 조선의 유력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평하였다. 미군정은 조선인 지도자들에 대한 보고서에 그에 대한 평을 남겼다.

    교육을 잘 받았다. 한국의 대표적 작가이자 언론인의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안창호와 긴밀한 관계다. 조선문인협회 회장이며, 소년회 활동에 적극적이다. 1930년대 붙잡혀 투옥된 바 있으며, 일제에 의해 고문을 당했다. 석방된 후 일제에 협력했다는 비판을 받게 되며, 이로 인해 이전까지 쌓아 왔던 영향력을 잃게 됐다.

     

    이후 조선일보의 논설위원이 되어 칼럼을 송고하던 중 폐렴과 결핵 등의 악화로 양주군 진건면으로 내려와 요양하는 한편 칼럼, 강연 활동에 초빙되어 전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7월 30일 '민족진영강화위원회' 결성준비위원회(약칭 민강위)에 참석하고, 8월 20일에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위원으로 뽑혔다. 그는 여기서 김규식을 지지하였다. 1950년 1월 다시 장편소설 「서울」을 태양신문에 연재했으나 좌익에 대한 과도한 비판이 문제가 되어 감정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연재를 중단했다. 같은 해 3월에는 유작 「운명」을 집필했고, 5월에는 「사랑의 동명왕」이 한성도서에서 간행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기 사흘 전인 6월 22일, 자택에서 고혈압과 폐렴으로 쓰러졌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게 7월 5일에 효자동 집이 차압당하고, 6일에 내무서로 연행되었다. 7월 12일, 이광수는 김규식, 김동원, 안재홍, 방응모, 정인보 등과 함께 납북되었다. 평양에서 강계로 이동되던 도중 지병인 폐결핵에 동상까지 겹쳐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친구 홍명희가 김일성의 허락을 얻어 강계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자신의 숙소로 데려갔다가 인민군 병원으로, 다시 강계군 만포면 고개동의 큰 병원으로 옮겼지만 결국 이광수는 1950년 10월 25일 지병인 폐결핵의 악화로 승용차 안에서 향년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오랜 친구인 홍명희, 안재홍, 평소 그의 작품을 애독하던 김원봉 등에 의해 장례식을 치루고 자강도 강계군 만포면의 야산에 안장되었다. 6․25 전쟁 후 허영숙은 식솔들을 이끌고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하였다. 그가 일제 강점기에 총독부의 시책에 협조하는 글을 쓴 점을 두고 비판이 가해졌고, 그가 한국 전쟁 당시 납북된 것을 두고도 말이 많았다. 유교적인 가치관을 비판하고 여성 해방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퇴폐적이고 향락적이라는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또한 정치적으로 안창호, 김구, 김규식을 지지하여 오래도록 제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1950년대 후반부터 동료 문인들인 박종화, 이희승, 최현배, 최남선 등에 의해 복권이 시도되었고, 1957년 11월 23일 사상계사 주최로 '육당,춘원의 밤'이 개최되었다. 1959년 12월 '춘원선집'(광영사)가 발간되었다. 1963년 11월 '이광수전집'(삼중당)이 완간되어 13일에는 흥사단, 삼중당 주최로 '이광수전집 완간기념강연회'가 열렸다. 1970년대에 이르러 이광수의 작품과 활동에 대한 조명, 복권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71년 10월 신선 '이광수 전집'이 간행되었다. 북한에서도 1980년 이후 그에 대한 조명과 평가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그의 이름이 붙은 '평양 리광수고등중학교 [101]'가 개교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 그가 한국 전쟁 중에 사망했다는 소식이 소련미국 등의 교포를 통해 한국 내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한때 그가 1970년대까지 북한에 생존했다는 설이 제기되었으나 1991년에 그의 셋째 아들 이영근이 북한측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1950년에 사망한 것을 확인하였다.[102] 만포면의 야산에 안장된 이광수의 묘는 홍명희, 안재홍 등의 사후 버려졌다가, 1980년대 중반 주택 개발 문제로 그의 시신을 찾으라는 북한 당국의 지시로 인민군 병사들이 주택의 지반을 파헤친 끝에 시신을 찾아내 신미리 특설묘지로 이장하였다. 평양특별시 룡성구역 룡궁1동 산기슭의 특설묘역으로 다시 개장되었다.

     

     

     

    그가 머무르던 경기도 남양주시 봉선사에 그의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시랑리에는 그의 시비가 세워졌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에 있는 그의 자택은 2004년 9월 4일 등록문화재 제87호로 지정되었다.

    2005년 이광수의 무정 영문판이 그의 손녀 이성희에 의해 미국에서 출간되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어린 희생》
    소설 《무정》
    《재생》
    《소년의 비애》
    《개척자》
    《무명》
    《꿈》
    《나》
    《윤광호》
    소설 《흙》
    《마의태자
    《원효대사》
    《춘향》
    소설 《단종애사》(1929)
    소설 《유정》
    《사랑》(1938)
    소설 《세조대왕》
    《혁명가의 아내》
    《무명》
    《애욕의 피안》
    《할멈》
    《가실 (嘉實)》
    자서전 《나의 고백》
    기타 불교 소설로 《원효대사》, 《이차돈의 사》, 《마의태자》 등도 썼다.[104]
    《이순신》
    전기 《안창호》
    《사랑의 동명왕》 (1965)
    설산과 나
    춘원시가집 (春園詩歌集)
    금강산유기
    '오동'(1936)
    우덕송(牛德頌)
    돌베개
    《검둥이의 설움》 해리엇 비처 스토 원작
    《정육론 情育論》
    《신생활론》
    《자녀중심론》
    논설 《어린 벗에게》
    논설 《민족개조론 (民族改造論)》
    《민족적 경륜》
    사료취선 (史要聚選) 4권

    이순신관,  로맨스 작품의 시조, 민족 개조론, 실력 양성론, 여성 해방론, 자유주의론, 소 예찬론, 탈권위주의적 인간관, 자유 연애론, 문인 발굴, 육성, 청년들에게 영향, 국민성 비판과 자치론, 사후 영향력, 한국인 단일민족설, 문학 계몽론, 시대상의 반영, 현대미에 대한 관점, 근대화에 대한 관점, 등산 활동

     

    사후에도 그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승려 법정은 자신의 사촌 동생에게 이광수의 책들을 추천하였다. 사촌동생들에게 보낸 편지 중 하나에서 법정은“좋은 책을 많이 읽어라. 춘원(이광수)님 지은 것은 대개가 믿고 읽을 만하다. 내 책장에서 읽을 만한 것을 골라사 읽고 잘 보존하여라. 나플탈렌을 넣어두면 좀이 들지 않을 것이다.(1958년 5월 13일[132])”라고 하였다.

     

    대학 시절 이광수의 집에 드나든 문학청년이던 법철학자 이항녕은 후일 소설 '교육가족', '청산곡'과 수필 '객설록' 등의 작품을 썼다.[133] 기업인이자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은 그의 작품 을 읽고 변호사가 될 꿈을 품기도 했다.[56]

    후대의 작가인 양귀자 역시 그의 작품 유정을 보고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양귀자는 후일 '초등학생때 외삼촌 책꽂이에서 이광수 전집을 발견, '유정'을 읽고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흐느껴 울었다. 너무 좋아서 말이다. 이런 세계도 있구나, 소설만 있다면 이 괴로운 세상(학교 가기가 끔찍히 싫었단다)도 얼마든지 살아나갈수 있겠구나[134]'라고 했다 한다.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지낸 현재(鉉齋) 김흥호(金興浩)는 1948년 춘원 이광수의 소개로 다석 유영모(柳永模)를 만나고 6년간 사사하였다.

     

    소설 원효대사의 작품성 논란

    적극적 친일 문제

    친일 의혹에 대한 반론

    적극적 친일론에 대한 반론

    독립운동 연장선론과 그 반론

    허영숙에 의한 매수론

    위장 이혼 논란

    후일 대한민국국무총리국회의장을 지낸 백두진은 그의 두번째 부인 허영숙의 친정 조카사위였다.

    그는 한국 '현대소설의 아버지[153]'라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후반의 행적을 두고 논란의 여지가 존재한다. 일제 강점기 후반의 미군은 그의 교육을 잘 받았다는 점과 소년 활동에 적극적이다[154]는 점을 주목했다. 미군은 그에게 '교육을 잘 받았다. 한국의 대표적 작가이자 언론인의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안창호와 긴밀한 관계다. 조선문인협회 회장이며, 소년회 활동에 적극적이다. 1930년대 붙잡혀 투옥된 바 있으며, 일제에 의해 고문을 당했다. 석방된 후 일제에 협력했다는 비판을 받게 되며, 이로 인해 이전까지 쌓아 왔던 영향력을 잃게 됐다.[154]'고 평가하였다.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기타 시각

  • 김도연에 의하면 그는 몸이 병약했다고 한다.
  • 작가 홍사중이 최남선과 이광수의 지적 배신을 다룬 첫 저서를 냈을 때 홍사중의 아버지의 첫마디는 "사람은 남에 대해서는 쉽게 말을 잘하는 법이다"였다 한다.[168]
  • 이광수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고구마꽃을 가리켜 "백 년에 한 번 볼 수 있는 꽃"이라고 하였다.[169]
  • 그의 작품 꿈은 1955년 최은희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그의 작품들 중 일부는 1950년대 이후 영화화, 드라마화, 연극화 되기도 했다.
  • 그의 시 중 당달구야는 국악인 출신 가수 정수빈의 노래가 되기도 했다.[170] 또다른 그의 시 낙화암은 김대현이 곡을 붙여 사비수라는 곡으로 발표되었다.
  • 그는 백범일지의 윤문과 교정에 참여하였다. 해방정국기에 그는 백범일지를 다듬고 정리하여 1947년 말 초판이 발간하게 했다.
  •  

     

     

    "일어나라, 우리 소년 제군!"

    오늘은 부산진의 장날에서 많은 백의(白衣)의 우리나라 사람(國人)이 소를 찾아 모여든 걸 목격했소이다. 백의를 입고는 있었으나 마음은 희지 않은 듯 보였소이다. 또한 특별하다 느낀 것은 소와 우리나라 사람에 대해서외다. 다른 것이 아니라 소는 용케 그 나라 사람의 상태, 성질(모두 오늘날의)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외다. 바꿔 말하면 소는 우리나라 사람의 심볼이라고 생각되어 정이 떨어지는 (情なき) 차제이오. 오호라, 소의 심볼을 버리고 호랑이의 심볼을 얻음은 언제의 일이런가! 일어나라, 우리 소년 제군! 한산(韓山)은 늙어서 그 푸름이 황모(黃毛)로 바뀌고 황모마저도 벗겨져 얼마 남지 않았으니, 수천의 한산이 완전한 붉은 사막이 되어 버렸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소이다. 1910년 3월 24일 경부선 열차 안에서

     

    소년제군이여, 이것을 듣고 어떠한 느낌을 일어나느뇨. 천제(天帝)께서 인생(人生)을 만들 때에 동등하게 두 눈, 두 손, 두 다리를 내려 주신 것이 아닌가. 어떠한 부족함이 있어서 저들 왜국(倭國)에 의해 압제(壓制)를 받는 것인가. 이목구비를 갖춘 신한소년 제군은 이것을 생각하여 세월을 헛되이 하지 말고 자기의 목적과 자기의 천재를 발휘하여 그 목적지를 향해 서둘러라, 신한(新韓)을 어깨에 짊어질 대한 소년들이여

     


     2·8 독립 선언문
    1. 본단은 일한합병이 오족의 자유의사에 출치 아니하고 오족의 생존발전을 위협하고 동양의 평화를 요란케 하는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독립을 주장함.

    2. 본단은 일본의회 및 정부에 조선민족대회를 소집하야 대회의 결의로 오족의 운명을 결할 기회를 여하기를 요구함.

    3. 본단은 만국평화회의에 민족자결주의를 오족에게 적용하기를 요구함. 우 목적을 전달하기 위하야 일본에 주재한 각국대사에게 본단의 의사를 각해정부에 전달하기를 요구하고 동시에 위원 3인을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함. 우위원은 기히 파견된 오족의 위원과 일치행동을 취함.

    4. 전제항의 요구가 실패될 시에는 일본에 대하야 영원히 혈전을 선함. 차로써 발생하는 참화는 오족이 기책을 임치 아니함

     

    이광수·허영숙군을 방문하다. 2인이 같이 본국으로 갈 뜻을 말하는지라 내 이르기를 지금 압록강을 건너는 것은 적에게 항서(降書)를 제납(提納)함이니 절대 불까요 군(君) 등 양 개인의 앞길에 대화(大禍)를 만드는 것이라 속단적으로 행치 말고 냉정한 태도로 양심의 지배를 받아 행하라 하다. - 1921년 2월 13일자 안창호 일기

     

    허위되고 공상과 공론만 즐겨 나태하고 서로 신의와 충성이 없고, 일에 임하여 용기가 없고, 빈궁하고

     

    만천하가 열광적으로 환영 애독하든 ‘단종애사’는 끗을 막게 되엇습니다. 우리 춘원 리광수씨는 얼마 동안 휴양하야 다시 장편소설 ‘군상’을 쓰게 되엇습니다. 씨의 찬란한 필치와 웅대한 구상과 심각한 인생관이 다시 군상을 동하야 우리로하야금 생각케하고 웃게 하고 울게할 것입니다. 지면에 나타나는 그날을 기다립시다, — 동아일보 1929년 12월 17일자

     

    이때 이광수는 창씨개명 문제에 대해 명확한 견해를 피력했다.

    1.당국은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갖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우리가-우리들 대부분이-창씨개명하도록 조처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2.우리 어른들이야 창씨개명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입학과 취직시에 (각종) 차별대우를 받을 것입니다.
    3.9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조선인들에겐 지금과 같은 성이 없었습니다. 김씨, 이씨, 박씨, 기타 성씨는 다 중국에서 빌려온 것입니다

     

     

     

     

    香山光浪(가야마 미쓰로)이라는 창씨개명

    '내가 향산(香山)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개한 동기는 황송한 말슴이나 천황어명과 독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 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향산광랑(香山光浪)이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내선일체를 국가가 조선인에게 혀하였다. 이에 내선일체운동을 할 자는 기실 조선인이다. 조선인이 내지인과 차별 없이 될 것 밖에 바랄 것이 무엇이 있는가. 따라서 차별을 제거하기 위하여서 온갖 노력을 할 것밖에 더 중대하고 긴급한 일이 어디 또 있는가. 성명 3자를 고치는 것도 그 노력 중의 하나라면 아낄 것이 무엇인가. 기쁘게 할 것 아닌가. 나는 이러한 신념으로 향산이라는 씨를 창설했다.'

     

    "일제에 협력하면서 참정권과 평등권을 얻어 민족을 보존하면 독립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해방이 1년만 늦었어도 조선 사람들은 황국신민의 대우를 받았을 것입니다. 창씨개명 안한 사람, 신사참배 안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됩니까? 우리 국민은 문맹자도 많고, 경제자립도 어려워 일본과 싸워 이길 힘이 없습니다.",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소. 내가 걸은 길이 정경대로(正經大路)는 아니오마는 그런 길을 걸어 민족을 위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오."라고 변명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일본 관헌이 작성한 3만 8천 명의 조선 지식인 살생부와 자신을 바꾸려했다."

     

    1. 이동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 시사신보 게재
    2. 이동: 이광수 18살 때 쓴 미공개 여행기 찾았다 동아일보 2012.07.18
    3. 이동: 한국 근대 100년을 바라보는 시각들 조선일보 2009.02.26
    4. 이동: [만물상] 五山학교 100년 조선일보 2007.05.07
    5. 이동 송건호, 《송건호전집 12》 (한길사, 2002) 160페이지
    6. 이동: [일사일언] 슬프다, 光文會 조선일보 2004.09.05
    7. 이동: 악수 조선일보 2007.10.05
    8. 이동 신익희 그는 누구인가
    9. 이동 이우탁, 《김구, 장보고, 앙드레김》(동아시아 출판사, 2006) 125쪽.
    10. 이동 안중근 동생 안정근, 청산리전투서 맹활약
    11. 이동 이는 당시로 엄청났다. 당시 경성부는 1920년대 말에야 25만명의 인구였고, 거의 70~80% 이상이 문맹이었다. 즉 글을 읽을 줄 아는 5~8만 명 가운데 1만 부가 팔렸다는 얘기다.
    12. 이동: [유홍준의 국보순례] [145] 김관호의 해질녘 조선일보 2011.01.08
    13. 이동: [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89> 소설] 동아일보
    14. 이동: [만물상] 신문 연재소설 조선일보 2005.11.08
    15. 이동 푸른사상, '오늘의 한국문학' 전집 출간 조선일보 2011.08.01
    16. 이동 근대식 최초의 서점 회동서관 조선일보 2009.10.08
    17. 이동 [만물상] 결핵 조선일보 2005.03.24
    18. 이동: 송건호, 《송건호전집 12》 (한길사, 2002) 161페이지
    19. 이동 최태영 전학장의 "내가 살아온 20세기" 조선일보 1998.12.31
    20. 이동: [만물상] 김규식의 프랑스어 편지 조선일보 2011.12.11
    21. 이동: 2ㆍ8 독립선언(1919.2.8) 조선일보 2007.02.07
    22. 이동 [케이블TV] Q채널,특집다큐서 이광수 등 학적부 공개
    23. 이동 Q채널,특집다큐 이광수 등 학적부 공개 조선일보 2008.06.01
    24. 이동 1918년 ~: 이이화, 《한국사이야기21. 해방 그 날이 오면》(한길사, 2004) 23쪽.
    25. 이동: 이우탁, 《김구, 장보고, 앙드레김》(동아시아 출판사, 2006) 125~126쪽.
    26. 이동 <35 > 상하이에서
    27. 이동: 송건호, 《송건호전집 12》 (한길사, 2002) 162페이지
    28. 이동 이우탁, 《김구, 장보고, 앙드레김》(동아시아 출판사, 2006) 127쪽.
    29. 이동: "거짓말들아, '안창호'를 읽어라" 오마이뉴스 2004.10.27
    30. 이동: [만물상] 춘원의 손녀 조선일보 2005.06.17
    31. 이동: "어려울때 살아갈 힘 줘… 어머니 품 같은 분"
    32. 이동 이광수, 《무명 : 다시 읽는 이광수 11》(맑은소리(동반인), 1999) 연표편
    33. 이동: '문학사상' 2월호 출간 외 조선일보 2007.01.21
    34. 이동: [젊은날의 우상] 춘원 이광수 조선일보 1997.09.04
    35. 이동 친일과 애국 사이… 춘원의 두얼굴 조선일보 2000.01.10
    36. 이동 日帝치하 조선일보는 한국文壇의 산실이었다 조선일보 2004.12.22
    37. 이동 임종국 (1991년 2월 1일).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서울: 돌베개,
    38. 이동: 날카로운 필봉으로 일제-독재 이겨내 조선일보 2000.02.17
    39. 이동: 조선일보 사람들(3) 추계 최은희 조선일보 2005.01.16
    40. 이동 [동아일보를 통해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1부] <6> 시대를 앞서간 이들의 둥지 동아일보 2010.08.09
    41. 이동: 시대를 잘못 만난 건 사랑만이 아니었다 조선일보 2009.12.29
    42. 이동: [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 <32> 신춘문예-현상공모 동아일보 2009.11.18
    43. 이동 PC통신 원로방 /구수한 정담가득/"노인이면 다 컴맹 인가요" 조선일보 1994.04.21
    44. 이동 [언중언] 단종애사. 강원일보, 2008년 3월 14일자 기사.
    45. 이동: [만물상] 야사(野史)와 정사(正史) 조선일보 2012.07.25
    46. 이동 오늘의 소사-6월 26일, 대전일보, 2008년 6월 26일자 22면 기사.
    47. 이동 [김윤덕의 사람人] 이기옥 할머니의 '꿈꾸는 인생' 조선일보 2011.09.03
    48. 이동: '한국 경제의 거인' 기업인 故 정주영의 뜨거웠던 삶 조선일보 2012.01.07
    49. 이동: 글을 거의 발표하지 않았던 홍명희 '임꺽정' 연재하며 조선일보에 합류 조선일보 2010.01.12
    50. 이동: 21세기 한반도의 미래를 논하라, 그들처럼 조선일보 2011.10.22
    51. 이동: 합계 190세 '추억의 情談' 조선일보 2006.02.22
    52. 이동 채만식의 20년대 단편소설 4편 찾았다 조선일보 2002.05.21
    53. 이동 ‘수필문학의 거목’ 피천득씨 별세 조선일보 2007.05.26
    54. 이동: 민족을 깨운 신문… 미래를 여는 언론… 동아일보 2010.04.01
    55. 이동: 사진 심사로 뽑힌 한국 최초의 ‘미스 코리아’ 최정원 중앙일보 2010.11.11
    56. 이동: [O2/커버스토리]‘이순신 장군, 스스로 목숨 버렸나’ 400년 논란 추적한다 동아일보 2012.04.28
    57. 이동 [동아일보를 통해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1부] <3>민족혼을 고취시키다 동아일보 2010.07.19
    58. 이동: 출판가, 이순신 관련서 봇물 조선일보 2004.09.01
    59. 이동 금광왕, 조선일보를 인수하다 조선일보 2004.08.09
    60. 이동: 계초(방응모) 인수후 지면 혁신·문화사업… "조선일보는 文化신문" 조선일보 2010.01.21
    61. 이동 [격동의 역사와 함께한 조선일보 90년] [4] 이광수·현진건·염상섭·심훈… 조선일보서 '문인(文人) 기자'로 맹활약 조선일보
    62. 이동 뜨끈한 온돌서 조선문화가 태어났다 동아일보 2010.12.04
    63. 이동 '에로·그로·넌센스'의 1930년대 조선일보 2012.09.04
    64. 이동: [조선일보에 비친 ‘신문화의 탄생’ ] [10] 축음기와 레코드가 몰고 온 '유행가 범람시대' 조선일보
    65. 이동: 抗癌 할미꽃 조선일보 2002.08.25
    66. 이동: 총독부 요인 송별식 열려 조선일보 2001.03.26
    67. 이동 명월관 20년대 日서도 문열어 조선일보 2001.03.26
    68. 이동: 민족운동단체 '흥사단' 창립(1913.5.13) 조선일보 2003.05.12
    69. 이동 상투 튼 ‘잉글리시 티처’를 아십니까? 조선일보 2007.05.11
    70. 이동 [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 <19>청담 스님…“난 파계승이다. 정화 끝나면 처사로 살겠다” 동아일
    71. 이동: 일제때 산 사람은 다 친일파이고 '척결' 주장에 정치적 고려 있다고? - 오마이뉴스 2002년 05월 30일
    72. 이동: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451페이지
    73. 이동: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452페이지
    74. 이동: 만해(萬海)와 벽초(碧初) 조선일보 2004.07.22
    75. 이동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465페이지
    76. 이동: 친일과 애국 사이… 춘원의 두얼굴 조선일보 2000.01.10
    77. 이동: “춘원 창씨개명 ‘香山’은 묘향산 의미” 동아일보 2009.05.11
    78. 이동 [최보식이 만난 사람] "획일적인 '친일파' 기준… 역사 해석의 독점권을 가진 당신들은 누구냐?" 조선일
    79. 이동: 시인 황금찬, '나는 어느 호수…' 문단 이면사 엮어 조선일보 2004.05.31
    80. 이동 편집부 지음, 《이이화와 함께 한국사를 횡단하라》(한길사, 2004) 328페이지
    81. 이동: “화랑 사상 지금 부활해도 좋을듯…” 조선일보 2007.03.03
    82. 이동 광복 1년 전 미군(美軍) 정보당국이 작성한 '조선 지도자 5인(人)' 평가표
    83. 이동: [<nowiki>다이제스트<nowiki>] 동포에 고함 조선일보 1997.05.15
    84. 이동 '칼의 노래' 김훈씨에게 조선일보 2001.11.07
    85. 이동: http://san.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1/18/2007011878002.html
    86. 이동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45쪽.
    87. 이동 책, 그 시대의 거울 조선일보 2006.03.31
    88. 이동 [책과 길] 출간 60년된 백범일지 감춰진 얼굴, 쿠키뉴스, 2008년 7월 25일자 기사.
    89. 이동 [그때 오늘] 침략전쟁 참여 독려한 이광수 “민족을 위해 친일했다” 변명- 중앙일보 뉴스
    90. 이동 "해방이 1년만 늦었어도 황국신민 대우를..."
    91. 이동: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295쪽.
    92. 이동 이우탁, 《김구, 장보고, 앙드레김》(동아시아 출판사, 2006) 130쪽.
    93. 이동 북,청년들에 군입대 강력 호소 조선일보 1998.04.22
    94. 이동 이우탁, 《김구, 장보고, 앙드레김》(동아시아 출판사, 2006) 130쪽.
    95. 이동 춘원 이광수의 '무정' 영문판 출판 조선일보 2005.10.23
    96. 이동 '울진원전에서 불교와 문학 학술심포지엄'이 열리다, 연합뉴스, 2008년 6월 26일자 기사.
    97. 이동 [송영옥박사 기독문학세계] 이광수·김동인의 기독교 문학, 크리스천투데이, 2008년 7월 16일자 기사.
    98. 이동 [송영옥박사 기독문학세계] 춘원 작품의 기독성 : 독자의 감동을 통해 기독교적 사상을 깨닫게 했던 춘원,
    99. 이동: [새책]“일제 강점기, 그 때를 아십니까?”
    100. 이동 낙산사의 파랑새 조선일보 2005.04.07
    101. 이동 무용가 김복희 "40년 춤세계 보여드려요" 조선일보 2011.01.31
    102. 이동: 거창한 찬사를 벗겨낸 이순신의 인간적 맨얼굴 조선일보 2004.07.09
    103. 이동: 문화유산 디지털화, 국가가 나서야 동아일보 2011.09.15
    104. 이동: [고미숙이 말하는 몸과 우주] <13>멜로의 함정 동아일보 2012.04.05
    105. 이동: 끝나지 않은 이광수의 친일행적 논란 조선일보 2007.10.02
    106. 이동: 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305
    107. 이동 [김대중 칼럼] 해남·완도의 斷想 조선일보 2012.01.09
    108. 이동: 누구도 누구의 말을 듣지 않는다 조선일보 2009.06.21
    109. 이동 “문화중심 사회운동이 한국사회 바꿀 것”
    110. 이동 [만물상]주사(酒邪)파 척결 조선일보 2004.10.27
    111. 이동: “문화가 21세기 경쟁력… 90년간 문화주의 제창한 東亞정신 이어야” 동아일보 2010.10.13
    112. 이동 새해 조선일보 2008.12.31
    113. 이동 암소 꼬리 뻗쳐지면 '우박' 날씨 아는 소처럼 우리도…
    114. 이동: (김서령이 만난 명문가 사람들 l 영문학자 나영균) 고모 나혜석의 추억… 그 쓸쓸한 DNA 스민 듯
    115. 이동 소설가 이전에 시인이었던 구보 박태원 조선일보 2011.11.02
    116. 이동: 아십니까? 詩人 피천득을 조선일보 2010.04.02
    117. 이동 [작가탐험/피천득]아이눈으로 찾는 생의 '작은 기쁨들'
    118. 이동 모란의 시인 영랑을 추억하며 조선일보 2010.04.09
    119. 이동 [사람과 이야기] "아내 사진 볼 때마다 말 걸지요" 2010.01.09
    120. 이동: 김용준 명예교수의 '나의 젊은 시절' 전문 조선일보 2005.09.10
    121. 이동 일제의 수탈과 해방의 감격을 지켜본 산 증인 - 군산역 조선일보 2007.11.16
    122. 이동 "여성을 넘어 아낙의 너울을 벗고"
    123. 이동 최고령 독립유공자 구익균 옹의 ‘103년 나의 삶’
    124. 이동 청년 법정 스님을 만나다 조선일보 2011.04.21
    125. 이동 원로 법학자 이항녕 전(前) 홍익대 총장 별세 조선일보 2008.09.17
    126. 이동 [작가탐험/양귀자] `지금,이곳' 사람들 관심사에 촉각 조선일보 1999.04.20
    127. 이동 제자, 스승에게 길을 묻다 조선일보 2004.09.13
    128. 이동: '한국인 단일민족설'의 기원은? 조선일보 2010.05.26
    129. 이동 “일제시대는 ‘식민지적 근대화‘ 시기” 조선일보 2002.09.17
    130. 이동 [책마을] ‘20세기 한국문학’ 개인사적 재구성 조선일보 2001.09.14
    131. 이동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
    132. 이동 중고등학생이 꼭 알아야 할 교과서 단편소설 읽기 (상)
    133. 이동: "금시계·자개장 뽑자" 경품 행사장에 사람들 몰려 조선일보 2011.10.03
    134. 이동: [인문사회]‘미인 권하는 사회’… 몸에 집착하는 한국인 동아일보 2011.03.05
    135. 이동: [길 역사를 따라 문화를 따라] <10·끝>철도의 길 근대기 영욕의 흔적 동아일보 2010.03.03
    136. 이동: 1935년, 동계 백두산에 처음 오른 일본인들 이야기
    137. 이동: 내금강, 천하절경 짙고 푸르른 '천년의 숲' 비경 조선일보 2008.05.20
    138. 이동: 이광수ㆍ한승원 '원효'로 격돌 조선일보 2006.04.26
    139. 이동 김재용 (2002년 8월). 친일문학 작품목록. 《실천문학》 (67호): 123~148쪽.
    140. 이동 끝나지 않은 이광수의 친일행적 논란”, 《동아일보 (연합뉴스)》, 2007년 10월 2일 작성. .
    141. 이동 "춘원은 거짓 친일, 실제는 독립 염원"
    142. 이동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43. 이동 소설가 복거일씨 ‘친일개념’ 논란
    144. 이동 NHK 다큐멘터리
    145. 이동 문학 인물사 엮은 장석주 시인 조선일보 2009.09.08
    146. 이동: 광복 1년 전 미군(美軍) 정보당국이 작성한 '조선 지도자 5인(人)' 평가표 조선일보 2008.08.08
    147. 이동 구인환, 《Basic 고교생을 위한 문학 용어사전》 (신원문화사, 2006)
    148. 이동: ‘이광수 문학 사전’ 낸 한승옥 교수 조선일보 2002.06.25
    149. 이동 근대 명문 모은 '모던 수필' 나와 조선일보 2003.07.15
    150. 이동 비판적 지식인 김용준 교수 '춘원·육당·인촌' 회고 조선일보 2005.09.05
    151. 이동 춘원·육당·인촌을 위한 '옹호론(論)' 화제 조선일보 2005.09.09
    152. 이동 한승조 "소신에 의해 쓴 글…공론화 바란다" 동아일보 2005.03.04
    153. 이동 역사문제연구소 한국사교실 8일 개강 조선일보 1998.05.04
    154. 이동 위기마다 부활하는 역사인물 조선일보 2005.03.04
    155. 이동 "역사세우기가 역사 망칠 수도 있어" 조선일보 2006.08.23
    156. 이동 우리 삶에 뿌리내린 파시즘을 찾아 조선일보 2001.05.27
    157. 이동 '염상섭 학술대회' 22일 열린다 조선일보 1997.08.19
    158. 이동 [다이제스트] 동양정신과의 감각적 만남 조선일보 1997.07.03
    159. 이동 아들에게 전하는 `인생의 가치' 조선일보1998.12.09
    160. 이동 '백년손님' 고구마꽃을 보셨나요? 조선일보 2012.08.09
    161. 이동 국악인 얼짱가수 정수빈 신곡 '날 사랑해줘'로 본격 활동
    162. 이동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 (8)] 김구 그는 누구인가

     

    사랑의 도피 여행과 상하이 시절의 행각

    1920년 4월, "종달의 소리가 끝도 안 나서/ 청인의 집 낮닭이 운다./ 종달이 또 운다, 바람이 또 분다/ 동자군(童子軍)의 행군나팔이 들린다/ 아아 사람을 곤(困)케 하는 강남의 봄이여"(이광수, [강남의 봄])라는 구절처럼 남쪽 지방 상하이의 봄이 무르익어 갈 때 춘원은 이미 두 해째로 접어든 타국 생활과 끝이 안 보이는 독립운동에 조바심을 느끼게 된다.

     

    이미 장편소설 <무정>(1917)으로 전조선 여성의 연인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명성을 얻은 이 희대의 천재는 일본 유학중 19세 때 결혼한 아내 백혜순과 이혼한 후, 도쿄여의전을 졸업한 허영숙(창씨명 香山英子)과 베이징으로 석 달 가량 사랑의 도피 여행(1918)을 떠났다.

     

    어려서 천애고아로 자라온 춘원은 애정 결핍증 소년이 지닌 민감성으로,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을 주로 썼는데, 베이징에서 뜻밖에도 단재 신채호를 만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자신이 문제아로 화제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문제아'의 내용은 "젊은 여자와 함께 산다는 문제, M(매일)신문에 글을 쓴다는 문제, 일본 공사관에 다닌다는 문제"였다. 일본 공사관에 다닌다는 말은 춘원이 여행을 떠날 때 총독의 측근인 일인 언론계 거물급인 아베(阿部充家)의 소개장을 소지하고 와서 공사관의 도움을 받은 것을 뜻한다.

     

     

    을씨년스러운 베이징에서 춘원은 온갖 악조건 속에서 독립운동에 전념하는 민족적 분위기를 안은 채 귀국, 도일하여 이듬해에 '2·8 독립선언서'를 쓴다.

     

    그리고는 이를 외국으로 보내는 사명을 띠고 상하이에 도착한 것이 1919년 2월 5일이었다. 그러나 상하이에서의 독립운동의 속사정은 춘원 같은 천재의 눈으로 볼 때 근대화된 문명 국가인 일본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되었다.

     

     

     

     

    그의 조바심은 연인 허영숙에게 보낸 편지에 솔직히 나타난다. "나는 상하이에 온 후로 작년(1919) 9월부터 대단히 자포자기한 생활을 했습니다. 날마다 술을 먹고 기생집에도 다녔습니다."

     

    이 무렵 임시정부의 홍보로 <독립신문>을 펴내는 일을 맡았던 춘원은 도산 안창호와 긴밀한 사제적·동지적·육친적 관계를 맺게 되어 일생 동안 그의 이념 노선과 충고를 따랐다.

     

    그런데 춘원은 <독립신문> 일을 그만두고 귀국할 때만은 도산의 충고를 거슬렀다. 허영숙이 상하이로 춘원을 찾아간 것은 1921년 2월이었는데, 이 때 그는 아예 상하이에 남는 길, 도산의 권고대로 미국으로 가는 방안 등을 버린 채 그 해 3월 귀국 길에 올랐다.

     

     

    독립운동가를 숙청하라고 건의하다

    춘원은 여러 글에서 귀국하면 징역을 살 것처럼 썼으나, 실인즉 간단한 조사만 받고 풀려났을 뿐만 아니라 5월에 허영숙과 정식 결혼, 9월에 사이토(齊藤實) 총독과 면담 등등 화려하고 세속적인 출세가도의 길로 들어섰다.

     

    뿐만 아니라 아베를 통하여 사이토에게 보낸 건의서 [유랑 조선 청년 구제 선도의 건](1921. 4)은 이광수가 당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중등 이상의 교육을 받은 조선인 가운데 중국, 시베리아 등지의 2천여 유랑자들(실은 독립운동가들)이 지닌 위험성을 세 가지로 나눠서 경고한다면서, 첫째는 '독립운동을 표방해서 무기를 들고 조선 안에 몰래 들어오는 일'이며, 다음은 '과격파 러시아의 선전자가 되는 일'이고, 그 다음은 '사기꾼 또는 절도, 강도가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춘원은 이들이야말로 '수효에 있어 적은 것 같지만 그 실제로 일본의 국방 및 사회의 안녕에 대해 경시해서는 안 되는 관계'라고까지 강변한다.

     

    이런 충언을 해준 춘원을 총독부가 어떻게 대했을까에 대한 명확한 입증 자료는 없다. 그러나 아베가 총독에게 건의한 여러 글들로 미뤄볼 때 민족개량주의론을 선양시켜 독립운동의 이념을 누그러뜨리면서 문화운동을 유도하려 했던 점만은 분명하며, 그 주역으로 이광수, 최남선, 최린 세 사람에게 정책적인 배려를 베풀었다는 사실은 증명된다.

    상하이로부터의 귀국 자체를 총독부의 회유로 본 재일본 역사학자 강동진(姜東鎭)은 춘원이 1923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받았던 수당이 한 달에 300엔이었다고 밝혔다.

     

     

    1929년 무렵의 파격적인 부장대우가 100엔이었다니 그 위력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춘원은 그 보수에 합당하게 일본 제국을 위해 봉사했을까?

     

    월간 <개벽>지에 [민족개조론](1922)을, 이어 <동아일보>에 [민족적 경륜](1924)을 쓰자 당시 청년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그에 대한 비난과 욕설이 들끓었는데, 결국 그 압력으로 잠시 동아일보사를 그만둬야 할 지경이었다.

     

    이 두 글은 나라 잃은 원인을 국민성 자체의 약점으로 돌리는 한편, 문화운동으로 전환할 것과 자치제에 대한 강력한 희원의 의지를 담고 있다.

     

    이미 독립운동권으로부터는 따돌림을 받은 춘원은 도산의 의사에 따라 수양동우회 결성에 앞장 섰는데, 이 단체는 그의 신원보증인 역할을 했던 아베를 통하여 총독에게 사전에 규약을 보고한 뒤에 창립되었다.

     

    '조선 민족 개조의 대사업의 기초'를 다지기 위한 수양동우회는 그 뒤 비록 형사 처벌의 대상이 되었지만, 적어도 춘원이 초기에 창설했을 때의 기본 구도는 총독부의 정치적인 저의가 개입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춘원이 친일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행위를 시작한 시기는 이처럼 상하이로부터 귀국한 때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실인즉 그 기원은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즉, 춘원은 1916년 <매일신보>에 쓴 기행문 [대구에서]라는 글에서 "일찍 해외에 있어 격렬한 사상을 고취하던 자가 도쿄에 와서 2, 3년간 교육을 받노라면 번연 인구몽(引舊夢)을 버려 이전 동지에게 부패하였다는 조소까지 듣게 되는 것을 보아도 알지라. 신문과 잡지와 서적과 선량한 청년회 같은 사교 기관이 있어 기회를 따라 신지식을 주입하면 결코 여사한 무모를 행치 아니할 것이라"고 썼다.

     

    이 말은 곧 독립운동가들의 부당성과 우매성을 지적한 대목으로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강한 친일 이념의 냄새를 풍긴다.

     

    더구나 이 글은 형식이 총독에게 건의하는 서간체적 기행문으로 되어 있어 그 뒤의 [유랑 조선청년 구제 선도의 건]과도 일맥 상통한다.

     

     

    일어로 된 처녀작 [사랑인가]와 친일 의식의 단초

    최근에 발표된 이광수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들은 그의 친일 의식의 단초를 [대구에서]보다도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그가 일본의 기독교 선교사계 교육 기관 메이지(明治) 학원에 다닐 때(18세인 1909년) 쓴 단편 [사랑인가]에서 찾고 있다.

     

    소설은 11세 때 고아가 된 조선인 유학생 문길이 고독과 번민 속에서 사랑을 찾다가 일인 소년 마사오에게서 그 감정을 느끼나 여전히 만족할 만한 애정은 얻지 못한 채 괴로워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는 마사오를 만나면 제왕의 앞에라도 선 것처럼 얼굴을 들 수가 없고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극히 냉담한 태도를 꾸미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는 또한 그 이유도 몰랐다. 그저 본능인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붓으로 입을 대신했다. 3일 전에 그는 손가락을 잘라서 혈서를 보냈다.

     

    바로 이 대목을 인용하면서 임종국은 이 동성애적인 사랑의 의미를 반민족적인 발상의 효시로 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광수의 친일 행위는 역사적으로 볼 때 일생에 걸친 것이었다. 즉, 1919년 2·8 독립선언에서부터 상하이에서 귀국하기까지의 기간 동안 했던 독립운동이 도리어 특이하게 보인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그의 일생은 시종 국가 권력에 대한 신뢰와 성취 욕구, 안일함에 대한 갈망이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민족 개량과 문화주의로 일관하던 춘원은 1937년 일제의 동우회(수양동우회가 1929년부터 동우회로 명칭이 바뀜)사건 구속에 걸려 옥고를 겪지만 이내 병보석으로 풀려나는 한편, 정신적인 지주 도산의 타계(1938)에 직면한다.

     

    이어 그는 1939년 중국의 일본군 위문을 위한 모임(북지황군위문작가단) 결성식의 사회를 맡게 되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제3단계의 친일 행위로 들어선다.

     

    즉, 춘원의 친일은 제1단계가 1919년 이전까지로 이 시기는 주로 통치권자에 대한 관념적인 협력 정신으로 볼 수 있고, 제2단계는 상하이로부터의 귀국 이후로 자신의 이상과 현실적인 욕구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이념 체계인 민족개량주의와 문화주의의 실현을 주장하던 때이며, 이어 제3단계는 1939년 이후로 이 때는 전시 협력 체제로 흔히들 친일이라고 하면 이 시기에 국한시키는 경향이 있으나 오히려 그 앞 시기가 더 중요한 역사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볼 수 있다.

    1939년같은 해 10월 29일 부민관에서 열린 총독부 지시의 조선문인협회 결성식은 박영희가 사회를 맡았는데 이광수가 회장으로 추대되어 만세삼창을 불렀다.

     

    그러나 동우회 사건이 재판에 계류 중이었던 그는 판사로부터 회장 사임 압력을 받아 12월에 그 직책에서 물러났다.

     

    물론 이내 발표된 창씨 개명령(1940. 2. 11부터 접수)에 따라 그는 발빠르게 고야마 미타로(香山光郞)로 이름을 바꾸고 그 자초지종을 이렇게 고백한다.

     

    '지금부터 2600년 전 신무(神武) 천황께옵서 어즉위(御卽位)'를 한 고큐산(香久山)에서 향산을 따오고, '광수'에서 '광'자는 그대로 쓰면서 '수'자는 일본 이름식으로 '랑'으로 바꿨다는 이 기발한 이름 풀이는 [지도적 제씨의 고심담], [창씨와 나] 등에서 춘원 자신이 남긴 것들이다. 이 글은 장황하지만 인용해 볼 필요가 있다.

    창씨의 동기, 내가 향산이라고 씨를 창설하고 광랑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개한 동기는 황송한 말씀이나 천황 어명과 독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 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향산광랑이 좀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정치적 영향, 금년 8월 10일까지 조선인의 창씨의 기한이 끝난다. 그날의 결과는 정치적 영향에 큰 관계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즉, 일본식 씨를 조선인 전부가 달았다고 하면 그것은 조선 2400만이 진실로 황민화할 각오에 철저하였다는 중대한 추리 자료가 될 것이다.

     

    만일 그에 반하여 일본식 씨를 창설한 자가 소수에 불과하면 그것은 불행한 편의 추리자료가 아닐 수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가 조선인을 신임하고 아니함이 조선 자신의 행·불행에 크게 관계가 있을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본적인 씨를 창설하는 것은 일종의 정치적 운동이라고 나는 믿는다.([창씨와 나], <매일신보>, 1940. 2. 20) 이후 고야마는 [의무 교육과 우리 각오]를 비롯한 많은 논설과 [조선의 학도여] 등의 시, [그들의 사랑] 등의 소설, [성전 3주년] 등의 수필, [반도 민중의 애국 운동] 등의 평론, [지원병 훈련소] 등의 방문기 등 글로 된 모든 장르를 동원하여 왕성하게 일제를 찬양한다.

     

    생활과 풍속의 원천적인 개조 주장

    고야마의 세계관은 일본이 서구 제국주의 열강과 대적할 수밖에 없다는 동서양의 대결 의식에서 비롯한다.

     

    그는 소박한 대동아공영권의 이상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것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조선인들에게 강요했던 총독부의 통치 이념과 일치한다.

     

    '영·미의 일본에 대한 태도'가 적대화할 가능성을 예견하면서 그렇게 되면 '조선인도 일어날 날이 온 것'이라고 단언하는 고야마는 전쟁에 조선인이 참여하는 것을 '성은에의 보답'으로 인식한다.

     

      이런 시국적인 인식을 국민들에게 널리 퍼뜨리는 데 가장 장애가 되는 세력으로 좌익 운동가들을 지목한 것이 당시 총독부 문헌이었는데, 고야마 역시 같은 입장을 나타냈다.

     

    그는 전향이라는 술어를 "진실로 국가에 대하여서 반의를 포회하였던 자가 새로이 애국심에 자각하는 것이 정당한 의미"라고 풀이하면서, 이를 각계의 지식인들에게 적극 권장할 뿐만 아니라 거짓 전향이나 전향 자체를 수치로 여기는 풍조에 대하여 강력히 비판한다.

     

    물론 여기서 전향이란 사상적인 면만이 아니라 민족주의에서 친일화에로의 변화까지도 포함시키는데, 그 충성도의 목표는 '임전 태세의 완료와 응소(應召)의 자세'임을 분명히 한다. 이를 위해서 그는 생활 혁신을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이 생활의 혁신은 생활의 황민화, 생활의 합리화, 그리고 생활의 임전화(臨戰化)의 3대 강령에 의하여서 하여야 할 것이다. 생활의 황민화라는 것은 사상, 감정, 풍습, 습관 중에 비일본적인 것을 제거하고 일본적인 것을 대입 순화하는 것이다.

     

    예하면 혼상의례의 일본화, 가족·친척 관념의 일본화, 경신숭조(敬神崇祖) 천황 중심의 생활의 신건설이다.([반도 민중의 애국 운동], <매일신보>, 1941. 9. 3)

     

    이 글은 고야마의 친일 이념을 총체적으로 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장하는 내용의 골격은 미나미(南次郞) 총독이 주장했던 전시 동원 체제의 지령과 전면 일치하며, 이것은 당시 녹기 연맹이 편찬한 <오늘의 조선 문제 강좌> 전6권과도 맞아떨어진다.

     

    이로 미뤄볼 때 아마 고야마(뿐만 아니라 당시의 친일파들)는 이념적인 동질성 확보를 위한 일정한 연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무력과 위협에 의한 친일이 아니라 확고부동한 신념에 따른 친일이었음을 나타내는 이런 '인간과 민족 개조를 통한 조선인의 일본화, 모든 풍속과 습관과 가치관의 일본화' 주장은 친일파 중에서도 고야마가 가장 열렬하게 내세운 사실들의 하나이다.

     

    생활과 풍속의 원천적인 개조를 위하여 그는 역사까지도 왜곡하였는데, 예를 들면 단편 [원술(元述)의 출정]에서는 장군의 딸 아좌와의 혼례를 앞두고 출전했다가 패전의 굴욕을 씻고자 태백산에 은거하던 원술을 등장시킨다.

     

    3년여의 은거중 약혼녀 아좌가 나타나 당나라의 침입을 알리자 원술은 출정을 하게 된다는 내용인데, 언뜻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는 옛 이야기 한 토막이지만 고야마다운 친일 사상의 역사성이 스며 있다.

     

    원술은 김유신의 둘째 아들이며, 이 소설은 역사적인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 소설은 곧 중일전쟁에 조선인이 나서야 할 필요성을 긴 역사를 통한 진실로 합리화하려는 의도이다.

     

    그래서 고야마의 친일 사상은 당대적인 차원에 머문 것이 아니라 전민족사를 통틀어 이를 일본화시키려고 한 것이다

     

     

    "미국과 영국을 쳐라"

     

      하옵신 대조(大詔)를 내리시다
      십이월 팔일 해 뜰 때
      빛나는 소화 십육년

     

      하와이 진주만에
      적악(積惡)을 때리는 황군의 첫 벽력
      웨스트 버지니아와 오클라호마
      태평양 미함대 부서지다

     

      이어서 치는 남양의 해공륙
      프린스 업 웨일저 영함대기함
      앵글의 죄악과 운명을 안고
      구안탄 바다 깊이 스러져 버리다

     

      아시아의 성역은 원래
      천손 만족이 번영할 기업
      앵글의 발에 더립힌 지 2백 년
      우리 임금 이제 광복을 선(宣)하시다.

     

    ([선전대조](宣戰大詔), <신시대>, 1942. 1)

     

     

    "조선놈 이마에서 일본인 피가 나오도록"

    1942년 고야마는 일제 식민지 전지역을 망라하는 대동아 문학자대회 제1회 대회에 참석코자 도일하여 맹활약했다.

     

    대회는 11월 3∼10일에 열렸는데, 고야마는 토쿄 도착 즉시 니주바시(二重橋 : 궁성 입구)로 가서 궁성 요배를 올리면서 "미신(微臣) 고야마 미타로, 삼가 성수의 만세를 비옵니다"라고 아뢰며 충심으로 '천황'을 받들 각오가 되어 있음을 드러낸다.(이 대회 참가기인 [삼경(三京) 인상기])

     

    대동아 문학자 제2회 대회는 1943년 8월 25일부터 사흘간 열렸으나 고야마는 불참했고, 제3회 대회가 1944년 11월 난징(南京)에서 열렸을 때는 다시 참가했다.

     

    11월 12일부터 사흘간 개최된 이 대회에서도 고야마는 다른 식민지 작가에 뒤질세라 맹활약을 했는데, 정작 그 충성심을 보인 삽화는 동행했던 팔봉 김기진이 남겨준다.

    내용인즉, 고야마가 어느 글에서 "조선놈의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 피가 나올 만큼 조선인은 일본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쓴 것에 대하여 현상윤(玄相允)이 "여보게 춘원, 어떻게 조선놈의 이마에서 일본 피가 나오겠는가? 말이 안 되는 소리가 아닌가!"라고 조롱했다는 이야기를 김팔봉이 거론하며 그 사실 여부를 고야마에게 묻자, 고야마는 "그래, 그런 글을 내가 썼지. 그건 사실이야!"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김팔봉, [나의 회고록], <세대>, 1965. 12)

     

    이보다 앞선 1943년부터 고야마는 학병권유의 글과 연설을 번갈아 했는데, 특히 토쿄로 최남선과 함께 가서 한 권유 연설에 얽힌 뒷 이야기는 고야마의 신념에 찬 출정 의지를 말해준다.

     

    김붕구의 회상으로 전하는 바에 따르면 "차마 여기서 묘사할 수 없을 만큼 '황실'에 대한 경모와 신뢰, 무한의 경건한 태도로 민족의 구원을 설교하던 그 병고에 시달린 상기한 얼굴, 미열에 손발이 바르르 떨리는 듯하고 금시 쓰러질 듯이 숨가쁜 고행자의 자세, 일제가 그에게 모진 고문 끝에 무슨 혼을 빼는 주사라도 놓은 게 아닐까?"([한국인의 지식인상], <신동아>, 1967. 3)라고 느낄 만큼 고야마는 몸과 마음 전체를 쏟아넣고 있었던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고야마는 경기도 사능이라는 시골에 있으면서 그 이튿날에야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는다.

     

    춘원은 마을 사람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치며 잔치 분위기에 휩싸였으나 이내 서울로부터 친일파 처단이라는 '불길'한 소식이 전해온다.

     

    피신을 권유하는 허영숙의 말을 듣지 않은 채 시골에 그대로 머물며 그는 [나의 고백], [돌베개]를 비롯한 몇몇 글을 썼는데, 그 주조는 "나는 민족을 위하여 살고 민족을 위하다가 죽은 이광수가 되기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라는 것이었다.

     

    춘원이 반민특위에 체포당해 투옥된 것은 1949년 2월 7일 효자동 자택에서였다. 그러나 아들의 혈서가 담긴 탄원서와 건강의 악화로 그는 3월 4일 출옥하게 되고, 그의 작품은 조금의 훼손이나 비판 없이 그대로 분단 한국에서 전해지게 되었다.

     

    춘원은 1950년 7월 서울에서 북한 당국에 의하여 연행된 뒤 1950년 자강도 강계군 만포면 고개리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189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그는 고향 가까이에서 58세로 최후를 마쳤다.

     

     

    ■ 임헌영(문학평론가, 반민족문제연구소 지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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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6·25 납북인사 묘역 첫 공개 조선일보 2005.07.26
  • 남가주대, 이광수 `무정' 희귀 재판본 소장 확인
  • [임정 수립 90주년―3·1운동에서 임시정부까지] 임시정부, 왜 상하이인가 조선일보 2009.04.01
  • (케이블TV) Q채널,특집다큐서 이광수 등 학적부 공개 조선일보 1998.06.01
  • NHK 다큐멘터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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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 1944년 조선 유력인사 성향평가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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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원영, 《한국신문연재소설의 사적 연구》(도서출판 푸른사상, 2010)
  • 차유진, 《손녀딸의 부엌에서 글쓰기》 (모요사, 2009)
  • 김철, 《복화술사들》 (문학과 지성사, 2008)
  • 민족문학사연구소, 《제도로서의 한국 근대문학과 탈식민성》, (민족문학사연구소, 소명출판, 2008)
  • 박숙자, 《한국 문학과 개인성》 (소명출판, 2008)
  • 김선학, 《시에 잠긴 한국인 생각》 (국학자료원, 2007)
  • 안창남 외, 《잃어버린 풍경 1920~1940》 (이지누 엮음, 호미, 2005)
  • 이광수 외, 《멀리 간 동무》 (홍진P&M, 2006)
  • 송명희, 이광수, 《이광수의 민족주의와 페미니즘》 (국학자료원, 1997)
  • 이민희, 《마지막 서적중개상 송신용 연구》 (보고사, 2009)
  • 정찬주, 정찬주의 茶人기행 (열림원, 2006)
  • 이영아, 《예쁜 여자 만들기》 (푸른역사, 2011)
  • 박태원, 《구보가 아즉 박태원일 때》(깊은샘, 2005)
  • 서영채, 《사랑의 문법: 이광수, 염상섭, 이상》 (민음사, 2004)
  • 김종회, 《문학과 예술의 혼》 (문학의숲, 2007)
  • 상허학회, 《한국현대문학의 정치적 내면화》 (깊은샘, 2007)
  • 권보드래, 《연애의 시대》 (현실문화연구, 2006)
  • 사에구사 도시카쓰, 《이광수 작품선》 (이룸, 2003)
  • 김윤식, 《일제 말기 한국 작가의 일본어 글쓰기론》 (서울대출판부, 2003)
  • 이상진, 《한국 근대작가 12인의 초상》 (도서출판 옛오늘, 2004)
  • 방민호, 《모던 수필》 (향연, 2003)
  • 한승옥, 《이광수 문학사전》 (고려대학교출판부, 2002)
  • 최은희, 여성을 넘어 아낙의 너울을 벗고 (문이재, 2003)
  • 사에구사 도시카쓰, 《사에구사 교수의 한국문학 연구》 (베틀·북, 2000)
  • 김윤식ㆍ김재홍ㆍ정호웅ㆍ서경석 공저, 《우리문학 100년》 (현암사, 2001)
  • 김철 외, 《문학속의 파시즘》 (삼인, 2001)
  • 김성한, 《거인들의 시대》 (동아일보사, 2011)
  • 심원섭, 《한-일 문학의 관계론적 연구(국학자료원, 1999)
  • 이정화, 《그리운 아버님 춘원》, (도서출판 우신사, 1993)
  • 김윤식, 《이광수와 그의 시대 1~3》, (한길사, 1986)
  • 북한, 6·25 납북인사 묘역 첫 공개 조선일보 2005.07.26
  • [책마을] 친일과 애국 사이… 춘원의 두얼굴 조선일보 2000.01.10
  • 이광수 18살 때 쓴 미공개 여행기 찾았다 동아일보 2012.07.18
  • [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 근대적 욕망의 윤리적 파멸… 삼국유사와 조우하다 동아일보 2012.09.04
  • 이광수·김동인·주요한을 다시 본다 조선일보 2009.08.31
  • 이광수ㆍ한승원 원효로 격돌 조선일보 2006.04.26
  • 춘원 이광수의 `무정 영문판 출판 조선일보 2005.10.23
  • 춘원 이광수는 어떻게 친일로 변절했나 오마이뉴스 2005.09.18
  • "親日 해명할수 있다면" 조선일보 2000.05.10
  • 조선 유력인사 5명 美 인물평가 내용
  • 달맞이언덕 표석 이광수 시 철거논란 조선일보 2007.12.13
  • ‘이광수 문학 사전’ 낸 한승옥 교수 조선일보 2002.06.25
  • 춘원 이광수 미공개 詩·논설 발굴 조선일보 2003.08.27
  • 북한, 6·25 납북인사 묘역 첫 공개 조선일보 200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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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문학인

     

    이인직 친일문학의 선구자

    이광수 민족개조 부르짖은 변절 지식인의 대명사

    김동인 예술지상주의의 파탄과 친일문학가로의 전락

    주요한 대동아공영의 꿈 읊조린 어릿광대

    김동환 각종 친일단체의 핵심으로 맹활약한 친일시인

    모윤숙 여성 교화사업의 첨병

    유치진 친일 국민연극 주도한 근대연극사의 거두

    최재서 서구적 지성론자에서 천황숭배론자로

    백 철 인간탐구론자에서 국민문학론자로

    김기진 황국문학의 품으로 투항한 계급문학의 전사

    박영희 카프문학의 맹장에서 친일문학의 선봉으로

    서정주 미당의 친일시와 광복 이후의 활동

    분류

    이름

    한자

    중복분야

    10-1.문학곽종원郭鍾元 
    10-1.문학김기진金基鎭 
    10-1.문학김동인金東仁 
    10-1.문학김동환金東煥전쟁협력, 친일단체
    10-1.문학김문집金文輯전쟁협력
    10-1.문학김상용金尙鎔 
    10-1.문학김소운金素雲 
    10-1.문학김안서金岸曙 
    10-1.문학김용제金龍濟 
    10-1.문학김종한金鍾漢 
    10-1.문학김해강金海剛 
    10-1.문학노천명盧天命 
    10-1.문학모윤숙毛允淑전쟁협력
    10-1.문학박영희朴英熙친일단체
    10-1.문학박태원朴泰遠 
    10-1.문학백철白鐵친일단체
    10-1.문학서정주徐廷柱 
    10-1.문학유진오兪鎭午전쟁협력
    10-1.문학이광수李光洙전쟁협력, 친일단체
    10-1.문학이무영李無影 
    10-1.문학이석훈李石薰친일단체
    10-1.문학이찬李燦 
    10-1.문학이헌구李軒求전쟁협력
    10-1.문학임학수林學洙 
    10-1.문학장혁주張赫宙친일단체
    10-1.문학정비석鄭飛石친일단체
    10-1.문학정인섭鄭寅燮전쟁협력, 친일단체
    10-1.문학정인택鄭人澤친일단체
    10-1.문학조연현趙演鉉 
    10-1.문학조용만趙容萬 
    10-1.문학주요한朱耀翰전쟁협력, 친일단체
    10-1.문학채만식蔡萬植친일단체
    10-1.문학최재서崔載瑞전쟁협력, 친일단체
    10-1.문학최정희崔貞熙전쟁협력
    10-1.문학홍효민洪曉民친일단체
     소계35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지은 친일파 99인에서

     

    민족문학작가회의 등 대표적 문학인들이 공개한 친일작가와 작품


    문학에 새긴 친일의 흔적 , 한겨레,2002.8.21

    “오늘 우리들은 제 아비를 고발하는 심정으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지난 8월14일 국회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는 현기영·조정래·정희성씨 등 한국의 대표적 원로작가들이 선배작가들의 과오를 사죄하기 위해 국민 앞에 나섰다. 문학인들의 최대규모 단체인 민족문학작가회의와 민족문제연구소, 실천문학, 나라와문화를생각하는국회의원모임, 민족정기를세우는국회의원모임 등은 광복절 57주년을 하루 앞두고 ‘친일문학에 대한 자성’이라는 주제로 문학인 공개 기자회견을 열었다. 서정주·이광수 등 친일작가에 대한 평론가와 작가들의 비판과 논쟁은 산발적으로 있어왔지만 문학인들의 입장을 정리해 친일작가와 작품목록을 선정·발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중일전쟁 이후 세 작품 이상 발표 기준으로

     


    사진/ 문학인 공개 기자회견에서 친일작가로 지목된 사람들. 서정주, 최남선, 채만식, 최정희

     

    “역사는 지난 시대의 진실을 유보하거나 우회해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광복 57주년을 맞아 우리 문학인들은 제 아비를 고발하는 심정으로 일제 식민지 시대의 친일문학 작품목록을 공개하고 민족과 모국어 앞에 머리 숙여 사죄코자 한다.” ‘모국어를 위한 참회’라는 제목의 문학인 선언으로 시작한 이 행사는 명단 발표와 선정기준과 배경 설명으로 이어졌다. 이날 발표의 의미는 지금까지 정리되지 못했던 친일문학의 개념을 제시하고 친일작가 규정에 대한 합리적 기준을 마련했다는 데 있다.

     

    중앙대 임헌영 교수가 설명한 선정기준 가운데 맨 앞에 나오는 것은 작가들의 작품발표 시기를 중일전쟁(1937) 이후로 국한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쓰지 말라’가 아니라 ‘이런 것을 쓰라’는 일제의 강요가 전면화된 상황에서 작가들이 겪어야 했던 현실적 압박을 염두에 둔 구분이다. 또한 이는 식민통치자들의 강압에 의한 부득이한 결과라는 상황윤리론과 작가의 자발적 타협에 대해 좀더 엄밀한 잣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작가들이 참여한 단체나 사용언어보다는 발표한 작품을 대상으로 최소한 세 작품 이상 발표한 작가에 국한했다는 기준 역시 친일의 적극성 여부를 구분하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성향이 모호한 작품을 한편 발표했던 정지용이나 김정한은 이 목록에서 제외됐다. 임 교수는 “정지용의 경우 단 한편의 약간 의아한 내용의 시를 쓰고는 이내 침묵했는데, 이를 친일시로 몰아대는 논리는 친일문학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방해할 우려가 있다”고 부연했다.

     

    그동안 전혀 거론되거나 고려되지 않았던 납·월북 문학인도 선정 대상으로 삼아 친일문학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추가했다는 사실도 이날 발표가 가진 중요한 성과다. 북한에서도 친일논의에서 예외가 됐던 납·월북 소설가 박태원·송영, 시인 이찬·임학수 등이 이날 목록에 추가됐다.

     

    기자회견 뒤 열린 학술 심포지엄 ‘강요된 부역인가, 내재된 신념인가-문화예술계의 친일논의와 성격’에서 문학 부분을 발표한 원광대 김재용 교수는 친일문학에 대한 성격규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 교수는 언어민족주의나 일제 말 사회단체 참여 여부, 창씨개명 등의 기준으로 규정하는 태도의 함정과 편협함을 비판하고 친일문학의 두 가지 내적 논리인 ‘내선일체 황국신민화론’과 ‘대동아공영권 전쟁동원론’에 더 천착해 친일문학을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발표된 작가와 해당작품 목록은 계간 <실천문학> 가을호에서 독자들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민족문학작가회의는 “앞으로 계속적인 자료발굴을 통해 새로운 작가 명단을 추가시켜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친일문인 42명 명단>
    시- 김동환, 김상용, 김안서, 김종학, 김해강, 노천명, 모윤숙, 서정주, 이찬, 임학수, 주요한,최남선.
    소설·수필·희곡- 김동인, 김소운, 박영호, 박태원, 송영, 유진오, 유치진, 이광수, 이무영, 이서구,이석훈, 장혁주, 정비석, 정인택, 조용만, 채만식, 최정희, 함대훈, 함세덕.
    평론- 곽종원, 김기진, 김문집, 김용제, 박영희, 백철, 이헌구, 정인섭, 조연현, 최재서, 홍효민.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제연구소, 계간 실천문학, 나라와 문화를 생각하는 국회의원 모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 등은 14일 친일문학인 42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김동인 이광수 서정주 등   
    이중 이광수는 1939년 2월 「동양지광」에 발표한 시 '가끔씩 부른 노래'를 시작으로 '내선일체와 조선문학'(1940.4, 조선) '지원병 훈련소의 하루'(1940.11, 국민총력) '대동아 일주년을 맞는 나의 결의'(1942.12, 국민문학) '폐하의 성업에'(1943.2, 춘추) '모든 것을 바치리'(1945.1.18, 매일신보) 등 103편의 시, 소설, 논설등을 태평양전쟁 막바지까지 매체에 기고했다.

     

    편수를 기준으로 보면 이광수에 이어 주요한(43) 최재서(26) 김용제(25) 김동환(23) 김종한(22) 이석훈(19) 박영희(18) 김기진(17) 노천명(14) 백철(14) 최정희(14) 정인택(13) 채만식(13) 모윤숙(12) 유치진(12) 서정주(11) 정인섭(11) 함대훈(11) 박영호(10) 등이 적극적이었다. 이번 친일문학 명단에는 월북했거나 사회주의 계열의 문학활동을 펼쳤던 박영희, 박태원, 이찬 등도 포함돼 있다.

     

    선정작업에 참여한 문학평론가 임헌영씨는 "친일 여부의 판단기준은 식민주의와파시즘의 옹호 여부로 삼았으며, 일본어로 작품활동을 했거나 친일단체 참여, 창씨개명 등은 참고만 했다"고 밝혔다.이같은 기준에 따라 일본어로 작품을 썼으나 항일의식을 드러낸 김사량, 일제의 폭악성을 고려해 한 두 편의 글을 남긴 정지용과 김정한은 친일작가 목록에서 뺐다. 이날 발표된 친일문인 명단과 작품목록은 이달 중순 발간될 계간 「실천문학」가을호에 게재되며 친일문인의 명단과 전력, 선정근거 등은 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 (www.historyfund.com) 를 통해서도 일반에 공개된다.

     

    한편 이날 오후 2시부터는 같은 장소에서 '강요된 부역인가 내재된 신념인가'를 주제로 한 학술심포지엄이 열려 친일문학의 자발성과 일제하 문화예술계의 친일논리의 성격을 규명하는 토론을 벌였다.

    -<한겨레신문 2002.08.14(수) 1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