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국민의 의무는 재미다.

조선 제일의 친일 포교사, 김태흡 (金泰洽, 1899∼1989)

草霧 2013. 11. 28. 15:43

 

 

 

 

종교

 

 

김태흡 (金泰洽, 창씨명 金山泰洽, 18991989)

  

 

 

조선 제일의 친일 포교사

 

 

 

대은(大隱). 김화산인(金華山人)

1935{불교시보} 발행인

1937년 이후 친일포교사로 맹활약

 

김태흡(金泰洽, 일본식 이름: 金山泰洽, 1899년 4월 4일 ~ 1989년 4월 13일)은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한 한국불교 인물로, 본명은 김용업(金龍業), 호는 소하(素荷)이며 본적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영천동이다. 김대은(金大隱) 혹은 석대은(釋大隱), 김화산인(金華山人)으로도 불린다.

 

김태흡은 1905년 심원사에서 출가했고, 1918년 법주사 대교과를 졸업했다. 같은 해 일본에 유학하여 인도철학과 종교학을 장기간 공부했으며, 1922년 일본에서 열린 조선 순회 불교강연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1926년 니혼 대학 종교과를 졸업했고, 1928년 니혼 대학 고등사범부 국한과를 졸업했다. 조선으로 귀국한 뒤부터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서 포교사로 일했다.

 

불교계 인물로는 처음으로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였다. 1929년 1월과 10월에 각각 ‘소크라테스의 윤리철학과 불교의 실천도덕’과 ‘가정평화의 묘체’란 제목으로 방송을 한 것이다. 한편, 그는 설법과 강연 외에도, 포교 현대화의 일환으로 불교합창단과 극단을 조직하였으며, 많은 찬불가와 희곡 작품을 창작하고 직접 연극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1935년 8월 5일부터 1944년 4월 15일까지 《불교시보》를 발행하는 동안 친일 활동에 적극 앞장섰다. 불교시보는 조선총독부의 황민화 정책의 일환인 심전개발 운동을 적극 홍보하고 보도하였으며, 김태흡은 심전개발과 관련된 강연 활동에도 참가하여 전국을 다니며 많은 강연을 하였다.

 

특히 중일 전쟁태평양 전쟁 기간에는 일본의 침략 전쟁을 옹호하는 기사와 사설을 불교시보에 다수 실었고, 시국 강연을 병행하며 전쟁 지원에 앞장섰다. 특히, 스스로 창씨개명을 한 뒤 창씨개명 홍보와 이를 뒷받침하는 논리 개발에 적극 나섰다. 이런 활동으로 인해 "조선 제일의 친일 포교사"였다는 평가도 있다. 광복 후에는 팔만대장경의 한글 번역에 종사하는 등 저술 활동을 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불교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불교시보사

 

스님 불교학자. 법명은 대은(大隱). 경기 강화에서 출생. 일본대학 사범과 및 종교학과 졸업. 일제시대에 불교 중앙전문학교 교수와 불교 시보사 사장을 역임했다. 일제말기 불교시보사 사장으로 있을 때 소태산 대종사를 만나고 이 때부터 소태산 대종사를 깊이 숭배하게 되었다. 일제의 탄압에서 원불교 교단을 적극 옹호해 주었고, 불교정전도 그의 이름을 빌려서 조선 총독부 당국의 허가를 얻어 발행하게 되었다. 소태산 대종사 열반 발인식 때에는 주례를 맡아 주기도 했다. 8·15 광복 이후에 대승사·법주사·화운사 조실을 역임했고, 대한불교달마회 지도법사, 동국 역경원 역경위원도 역임했다.

 

 

 

불교시보창간호(19358)

  

 

한국불교의 최초신문 불교시보 창간호(맨왼쪽)와 일본내각의 발표문을 실은 37(가운데).

그리고 발행인 김태흡(오른쪽).

  

 

193581일 김태흡이 창간한 불교시보

우리나라에서는 18831030일 창간, 10일에 한번씩 순간으로 발행된 한성순보가 최초의 신문이다. 그러나 이미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기 시작한 개화기에 선보인 한성순보는 수구파들에 의해 188412월 폐간되면서 단명하고 말았다.

 

한성순보로 시작된 신문의 역사는 처음부터 거대한 세력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었고, 호시탐탐 조선침략을 노리던 제국주의 세력들은 온갖 방법으로 정확한 보도를 통제하기 위해 애를 썼다. 때문에 독립신문, 제국신문, 황성신문으로 이어지는 신문들은 일제의 언론통제에 맞서 끊임없이 투쟁해야 하는 고난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든 신문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기업의 이익이나 개인의 영달을 위해 일제에 영합하는 신문도 적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종교계도 언론의 기능을 갖춘 신문 발행에 참여했고, 원종을 시작으로 조선불교월보, 해동불보, 불교, 유심등의 잡지를 발행해온 불교계에서도 1935년 드디어 첫 번째 신문을 발행했다.

 

일본 유학파인 대승사 김태흡(金泰洽)이 주도해 설립한 불교시보사 (佛敎時報社)에서 193581일 월간 신문 불교시보(佛敎時報)창간호를 발행한 것이다. 타블로이드 8면으로 발행된 불교시보1944415일 발간된 제105호까지 단 한번도 거르지 않고 매월 1회씩 발간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불교시보는 발행인 김태흡의 친일행각으로 인해 창간부터 종간까지 친일언론의 모습으로 일관했다.

 

불교시보가 창간된 배경에는 일제의 심전개발운동에 동조하는 불교계 정서가 자리했다. 1933년부터 시행한 심전개발운동은 나라를 빼앗긴 백성들에게 국체 관념을 명확하게 할 것을 비롯해 경신숭조의 사상 및 신앙심을 함양하는 한편 보은·감사·자립의 정신을 양성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불교계는 일제의 이러한 주장과 관련해 간담회를 여는 등 적극 동조하고 나섰다.

 

당시 불교계 인사들 중 일제의 심전개발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며 앞장선 인물이 바로 김태흡과 권상로였다. 특히 김태흡은 불교시보창간사에서 심전개발운동의 한 팔이 되고, 한 다리가 되어서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노골적으로 심전개발운동 홍보에 나섰다. , 불교시보를 통해 일제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겠다는 다짐을 한 셈이다.

 

김태흡은 또 불교시보심전개발과 교화운동이라는 논문을 게재하면서 적극적인 심전개발운동의 첨병 역할을 자임했다. 이에 따라 불교 최초의 신문인 불교시보는 발행인 김태흡의 친일행각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그의 글을 지속적으로 게재하면서 친일 언론의 행보를 보이게 됐다.

 

불교시보를 창간한 김태흡은 법주사 강원 대교과를 이수하고 10년 동안 독학으로 일본 도쿄에서 인도철학과 종교학을 공부한 엘리트 승려로 처음부터 친일행보를 보인 것은 아니다. 김대은(金大隱) 혹은 석대은(釋大隱)으로 알려져 있는 김태흡은 일본 유학중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수만 명이 살육되는 재난 속에서 겨우 살아나는 체험을 한 후 192751일자 불교(35)임진병란과 조선승병의 활약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때 글의 내용이 반일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로 일부분이 삭제되기도 했었다. 따라서 이 일은 그가 처음부터 친일 행각을 벌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는 셈이다. 그러나 1928년 귀국 후 조선불교 중앙 교문원 초대 중앙포교사로 활동하다가 19358불교시보를 창간하면서 급격하게 친일파로 전락했다.

 

따라서 제6대 조선총독 우가키가 주창한 심전개발운동의 팔과 다리가 될 것을 자청하며 창간한 불교시보는 이후 쉼 없이 스스로 자청한 역할을 해내는데 충실했다. 발행인 김태흡은 중앙교무원 서무이사 김정해가 쓴 심전개발의 3대 원칙에 취하여를 비롯한 심전개발의 목적과 실행사항 등을 자세하게 보도해 일제의 조선민족 동화에 적극 협력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발행인 김태흡과 불교시보는 시대상황에 재빠르게 영합하며 매월 1회 발간하는 신문을 심전개발운동 관련 기사로 가득 채워 나갔다. 일례로 불교시보는 본산 주지들의 심전개발사업을 비롯해 김천·동래·군위·임실·전주군의 각 군청과 사찰에서 행하는 심전개발운동을 자세하게 보도했고, 경성방송국에서 시행한 불교 측 심전개발강화에 대한 내용 역시 세세하게 빠짐없이 게재하는 열성을 보였다.

 

이 같은 내용은 19351015일자 7면에 불교 측의 이지광, 박성권(각황사 포교사), 김경주(불교전문학교 학감), 박윤진(불교전문학교 강사, 불교시보 직원), 김태흡(불교시보 주간 및 발행인), 권상로(불교전문학교 교수) 등이 193547일부터 917일까지 16회에 걸쳐 행한 심전개발 방송에 대해 방송날짜와 연설제목 및 연사를 자세히 게재한데서 잘 나타난다.

 

이어 193821일자로 발행한 제19호에서는 미나미 총독의 내선일체 선만일여 정책에 호응하는 선만일여의 대정책과 불교도의 각성이라는 제목을 붙여 노골적인 친일 시사문을 게재했다.

 

그리고 중일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1937101일자(27)연전연승 함락의 축하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고, ‘애국사상과 경신숭불이란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일본에 애국해 서구의 백인들과 야합하는 중국인을 응징하는 일본과 일본군대인 황군에게 충성과 지원을 하자 고 역설했다.

 

뿐만 아니라 다음호인 제28호에서는 비상시국과 신앙생활이란 제목의 친일 시사문을 통해 국민이 정신적으로 총동원하야 절실한 신앙생활에 들 것 같으면 무력으로 경제로 사상으로 온갖 방면으로 통하야, 위대한 힘을 발휘하야 국력을 충실하게 되는 것이라, 진호국가와 황운부익의 대사를 무난히 성취하리라고 믿는다면서 일본의 전쟁 승리를 기원하는 신앙생활을 이어갈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또한 여기에 더해 호국불교를 빙자해 승려지원병으로 전쟁에 나갈 것을 촉구하는 권상로의 글이나, 직지사가 보국탁발로 국방헌금을 냈다는 등의 미담 기사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싣기도 했다. 44년 종간 할 때까지 친일로 일관 그뿐만이 아니다.

 

불교시보는 천왕부처의 사진이나 일본 궁성의 사진은 물론, ‘황국신민의 서사신앙보국 내선일체등의 광고문을 게재하기도 했다. 1940년 일본이 황기 2600년을 맞자 신년호인 제541면에 천왕부처의 사진을 상단에 게재하고, 즉위 15년을 맞은 40세의 일본천왕과 황후 및 황태자 그리고 제2황자 등 일본 황실 주요 인사들의 건강을 기원하는 친일 아부 기사를 게재했다.

 

그리고 19402월 총독부가 창씨개명을 실시하자 불교시보615일자 1면에 국민정신과 씨 창설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미나미 총독이 조선민사령을 개정해 내선 동포가 동일한 씨를 갖게 된 것은 가출한 자식이 집으로 돌아와 다시 상속받을 자격을 얻은 것과 같다며 창씨개명을 찬양하고 나섰다.

 

이어 194212월 제98호에서는 조선불교도는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황도의 은의 속에 살고 있으며 황도를 여의고는 잠시도 살 수 없건만 황도의 은총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일이 많다며 일본의 은혜에 깊이 감사할 것을 주문하는 등 친일행각에 더욱 열을 올렸다.

 

이처럼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친일기사를 쏟아낸 불교시보의 친일행적은 통권 105호 중 현존하는 95개호에서 잘 나타난다. 전체 94편의 사설 가운데 시국을 언급한 친일 사설이 모두 39편에 달했고, 무기명 친일 기사와 총독의 훈시 등이 30여 편이었다.

 

그리고 친일 기명 기사로는 발행인 김태흡이 가장 많은 19편을 썼고, 초대 종무총장을 지낸 이종욱이 4, 친일학승 권상로가 2편을 썼다. 또 김영수(불전교수), 김경주(불전 학감), 방한암(조계종 초대 종정) 12명이 각각 1편씩의 글을 기명으로 게재하기도 했다.

 

한국불교 최초의 신문이라는 영광을 친일로 먹칠한 불교시보는 마지막 호인 1944415일자에 김태흡의 기명으로 적국항복의 기도에 대하야라는 기사를 게재하면서 허울뿐인 한국불교 최초 신문의 생을 마감했다.

    

 

경북불교협의회에서 19367월 창간한 경북불교.

사진자료=한국불교 100

  

 

그러나 일제시대에 불교계 신문이 한국불교 최초 신문인 불교시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또 하나의 월간 신문으로 경북불교협회가 발간한 경북불교(慶北佛敎)가 있었다. 경북불교19367월 창간해 1941년 제48호로 종간됐으며 타블로이드판으로 발간됐다.

 

당시 경북불교의 편집 및 발행인은 강유문에 이어 김해윤으로 이어졌으며, 주로 경상북도 지방에서 활동하는 불교인들의 글과 동향을 게재했다. 경북불교는 초대 편집 및 발행인이었던 강유문의 인물 됨됨이에 비춰 그 성향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강유문은 고은사 출신 청년 승려로 호는 묵당이다. 또 중앙불전 출신으로 일본 대정대학 사학과를 졸업해 당시 엘리트 계층으로 분류된다. 그는 불교청년운동에 뛰어들어 조선불교청년동맹 준비위원, 총동맹 동경동맹 문교부장 및 집행위원장을 역임했다. 또한 일반 청년학생운동에도 관여하면서 조선학생회 집행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청년운동에 매진했고, 불교청년운동을 주도하면서 항일불교 단체인 만당의 당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경북불교협회 서무주임으로 지역에서 활동했던 강유문은 협회의 기관지 격인 경북불교의 초대 편집 및 발행인이 되어 신문을 발행했고, 1938년에는 포교법 개설을 펴내기도 했다. 그는 이 책에서 포교방식을 세부적으로 제시하면서 신문포교를 포교의 한 영역으로 구체화하기도 했다.

 

한편 일제시대 친일성향으로 일관한 한국불교 최초의 신문 불교시보를 비롯해 동시대에 발간됐던 경북불교가 불교계 신문의 효시가 된 이래 불교계 신문도 많은 성장을 했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1988년 창간해 2005년 불교계 최초의 독립 언론으로 새롭게 출범한 법보신문을 비롯해 조계, 태고, 천태, 진각종 등 주요 종단의 기관지 등이 불교계 안팎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총후보국지 {불교시보} 발행

불교도와 일반인들에게 김대은(金大隱) 혹은 석대은(釋大隱) 스님으로 알려져있는 김태흡은 법주사 강원 대교과를 이수하고 10년 동안 독학으로 일본 도쿄에서 인도 철학과 종교학을 공부한, 일제 시기의 대표적인 엘리트 승려였다.

 

김태흡은 일본 유학중 1923년의 관동 대지진 때 조선인 수만 명이 살육되는 재난 속에서 간신히 살아나는 체험을 하고, {불교} 35(1927. 5. 1)[임진병란과 조선승병의 활약]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일부가 삭제되는 등 반일성향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1928년 귀국 후 조선불교 중앙교무원 초대 중앙포교사로 활동하다가 19358월에 {불교시보}를 창간(19444월 종간)하면서 급격하게 친일파로 전락해 갔다.

 

{불교시보}가 창간된 시점은 제6대 조선총독 우가키(宇垣一成)가 주창한 심전개발운동(心田開發運動)의 전개와 맞물려 있었다. 따라서 김태흡은{불교시보}에 중앙교무원의 서무이사 김정해 (金晶海)가 쓴 [심전개발의 3대원칙에 취()하여]를 비롯한 심전개발의 목적과 실행사항 등을 자세하게 보도하여 일제의 조선민족 동화(同化), 즉 일본화와 순량화 (順良化) 정책의 실천에 적극 동조·협력하였다.

 

우가키 총독 시대에 진행된 심전개발은 주체관념의 명징 (일본식) 경신숭조(敬神崇祖)의 사상과 신앙심 함양 보은·감사·자립의 정신 양성 등을 목적으로 한 일제의 군국주의로의 변신을 반영한 식민통치의 이론적 집대성이었다. 김태흡의 {불교시보}에는 이러한 시대 상황에 재빠르게 영합하는 심전 개발운동에 관한 기사가 가득했다.

 

{불교시보}에는 본산주지들의 심전개발사업, 김천· 동래· 군위· 임실· 전주군의 각 군청과 사찰에서 행하는 심전개발운동에 대하여 자세하게 보도하였다.

 

또한 {불교시보}는 경성방송국에서 행한 불교측 심전개발강화(講話)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게재했다. , {불교시보} 3(1935. 10. 15, 7)에는 불교측의 이지광(李智光), 박성권(각황사 포교사), 김경주(金敬注:佛專, 즉 불교전문학교 學監), 박윤진(불전 강사, {불교시보} 직원), 김태흡(불전강사, 불교시보 주간·발행인), 권상로*(불전 교수) 등이 193547일부터 917일까지 16회에 걸쳐 행한 심전개발 방송에 대하여 방송날짜와 연제 및 연사에 관하여 게재한 것이다.

 

당시 김태흡은 {불교시보}의 발행인이자 봉은사의 상임포교사이며 불교 전문학교의 전임강사이기도 했는데, 그는 봉은사 주최의 심전개발 순회포교와 전등사, 개풍군, 강원도 등에서 개최한 심전개발 순회강연에도적극 참여하여 수많은 강연을 행하였다.

 

예를 들면 심전개발 제2기에 해당하는 1936년도에 김태흡은 412일부터 731일까지 세 차례 22회에 걸친 심전개발 강연을 하였다.({불교시보} 13,1936. 8. 1, 78).

 

조선총독부의 심전개발운동은 강원도만이 아니라 경상·전라·충청·함경도등 전국 각지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경쟁적으로 전개되었는데, 이에 관해{불교시보}는 미주알 고주알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자세하게 보도하여 일제의 조선민족 황민화 정책에 크게 일조하였던 것이다.

 

김태흡은 일본 유학시절 조선불교 일본유학생들이 발행한 잡지{금강저}(金剛杵)의 창간과 편집에 참여하여 모두 10편의 글을 이 잡지에 발표했다.

 

또한 그는 고학을 하면서 인력거 발판과 공원 벤치 등에서도 집필을 하고 귀국 후에도 열심히 글을 써서 {불교}가 창간(1924. 7)되어 종간(1933. 8)될 때까지 산문 88편과 운문 17, 희곡 11, 소설 7편 등의 방대한 양의 글을 {불교}지에 게재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일제시대 초기 이광수*와 김동인*2인 문단시대를 형성하였듯이 1920년대에서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조선불교계에는 김태흡과 권상로가 쌍두마차처럼 당대 불교 언론계를 주도하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작품의 양으로서도 그러했고 권상로가 {불교}의 통권 108호의 대부분을, 그리고 김태흡이 {불교시보}10년 동안 단 1호의 결호도 없이 통권 105호를 편집·발행한 업적 등에서도 쌍벽을 이루었다.

 

{불교시보}는 창간사에서 '심전개발운동의 한 팔이 되고 한 다리가 되어서'라는 말을 했듯이 출발부터 친일성향을 드러냈고, 중일전쟁 (1937. 7.7)과 태평양전쟁 (1941. 12. 8) 기간에는 열성적인 총후보국지(銃後報國誌)의역할을 하였다.

 

{불교시보} 통권 105호 중 현존하는 것이 95개호인데 이를 중심으로 친일성향의 행적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불교시보}에는 전94편 사설 중 시국을 언급한 친일 사설이 39, 무기명 친일 기사와 총독의 훈시 따위가 30여 편이었고, 기명 친일 기사로는 김태흡이 19, 이종욱*(31본사주지대표, 1941년 조계종 종무총장, 월정사주지)4, 권상로(불전 교수)2편이며, 김영수 (金映遂:불전 교수),김경주 (불전 학감), 방한암 (方漢岩:초대 조계종 종정) 12명이 각 1편씩의 글을 게재했다.

 

시국에 관한 전37편의 기명으로 {불교시보}에 발표된 글은거의 대부분이 적극적인 친일성향의 글들이었다. 특히 발행인 김태흡은 전체의 반을 상회하는 압도적인 양의 친일 일색의 글을 집필·게재함으로써 당시 유일했던 조선불교계의 신문으로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하였다.

 

그리고 {불교시보}'천황부처'의 사진이나 일본 궁성의 사진, [황국신민의 서사], '신앙보국 내선일체' 따위의 광고문 등 전적으로 친일적인 게재물도 다수 실었다.

    

 

 

 

 

조선 최고의 친일 연사 김태흡

김태흡은 {불교시보}를 계속 발간하는 한편, 봉은사의 순회포교사로서 각지에서 포교활동을 전개하였고, 총독부의 심전개발운동 순회강연도 촉탁연사로서 정력적으로 수행했다.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김태흡은 전쟁에 대한시국인식 친일 강연으로 더욱 바빠졌다.

 

그 첫번째 친일강연은 중일전쟁이 일어난 지 미처 한 달도 안 된 193786일에 이루어졌다. 김태흡은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에서 개최한 적극적 친일행사인 '대일본제국 무운장구 기원법요' '시국대응강연회'에서 일본국기요배와 의미심장한 이종욱의 개회사에 이어'입정안국'(立正安國)이라는 제목으로 중일전쟁에 따른 시국인식에 대해 열변을 토하여 2,300여 청중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다.

 

이렇게 시작된 김태흡의 친일 강연은 {불교시보}{신불교}가 종간되는1944년 말까지 끊임없이 지면을 메우게 되는데, 그의 친일 강연과 각종 친일시사문, 일본군 전사장병의 영령에 대한 독경소향 등 그의 친일행적은 다양하고 화려하기까지 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여 그의 친일강연 행적을 우선 중점적으로 점검하면서 그 내용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그는 19379월 말부터 경기도와 강원도를 시작으로 시국강연을 하였다. 11월에는 강원도청의 초청을 받아 평강(平康)과 이천(伊川)군에서'지나사변과 입신(立信)보국', '시국과 불교', '지나사변과 국민의 각오'등의 제목으로 8회에 걸쳐 2,160명의 청중에게 친일강연을 하였다.

 

그는 이어12월에도 강원도의 초빙으로 금화군, 철원군, 영월, 정선 등지에서 15회에걸쳐 3,730명의 청중에게 중일전쟁을 '성전'(聖戰)이라고 추켜세우며 조선인들에게 일제를 위하여 황국신민으로서의 사명을 다 하라고 부르짖었다.

 

김태흡의 강연이 일제의 침략전쟁을 합리화시키는 내용으로 일관하였음은 강연제목만 보더라도 충분히 그 의도를 알 수 있다.

 

'벽사항마와 영겁의 행복', '동양평화와 국민의 사명', '국방인식과 의용봉공(義勇奉公)', '시국과 반성', '성전과 각오', '시국인식과 지은보덕', '신애협력과 황도선양'…….

 

김태흡은 일제의 억지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여 일본군의 침략에 저항하는 중국인들을 '물리쳐야 하는 사악한 세력' 또는 '항복받아야 하는 악마들'로 지칭하고, 이들을 물리쳐야 일본인과 조선인들에게 영겁의 행복이 다가오고 동양평화가 달성된다고 역설한 것이다.

 

또한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국방에 대한 인식을 보다 철저히 하고 국가(일본)에 멸사봉공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일제의 황국신민화운동에 충실하여 황도(皇道)를 선양해야 한다고 외쳤던 것이다.

 

김태흡의 시국 강연은 1938년에도 계속되어 3월에는 울진, 삼척, 춘천, 양구,인제, 화천 등지에서 18, 4월에는 경기도 파주군에서 2, 6월에는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에서 3회 강연하였다.

 

그는 그 해 7월에는 만주 펑톈(奉天) 관음사의 주지 겸 포교사로 부임하였다. 또한 그는 자신이 발행하는{불교시보}(19, 1938. 2. 1)에 미나미 (南次郞) 총독의 내선일체·선만일여 (鮮滿一如) 정책에 호응하는 노골적인 친일 시사문 [선만일여의 대정책과 불교도의 각성]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김태흡의 친일 강연은 쉴 사이 없이 계속되어 1939, 1940년에도 이어졌는데, 1940년에만도 2월에는 평강군에서 '흥아성전 (興亞聖戰)과 정신총동원', 5월에는 경기도 광주면 (廣州面)에서 '불교와 정신총동원' 따위의 강연을 했다.

 

그의 수많은 강연을 모두 열거할 수는 없으므로 대표적이고 인상적인 것만을 언급한다면 194010월과 194211월 만주에서 행한 친일강연을 거론할 필요가 있다.

 

전자는 김태흡이 만선척식회사 (滿鮮拓植會社)의 촉탁을 받아 북만주의 선농개척민 (鮮農開拓民) 부락에 위문 겸 포교 차 '보은감사와 신앙생활','수신제가와 진충보국' 등의 제목으로 13회에 걸쳐 강연을 한 것이다.

 

후자는 김태흡이 만주 펑톈 관음사의 주지 자격으로 만주국 정부 민생부와 만주제국협화회 (滿州帝國協和會) 중앙본부의 초청을 받아서 19421126일부터 128일까지 기독교 목사 1인과 함께 짝을 지어 만주국의 종교교화 보국 강연반에 참가하여 순회 친일강연을 한 것이다.

 

그는 지린(吉林), 사평성, 펑톈성, 안둥(安東)성 등지에서 10회에 걸쳐 2,750명의청중에게 '종교보국과 황민화운동', '성전필승과 경신숭불(敬神崇佛)','시국인식과 국체명징', '정의필승과 황민화운동', '성전완수와 독경삼보(篤敬三寶)', '성전필승과 황민화운동', '국체본의 투철과 황도선양' 따위의 전적으로 친일적이며 일제의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총력전 체제에 적극 협력하는 내용으로 친일강연 하였다.

 

만주국 민생부와 만주제국 협화회에서 이 강연반을 조직한 것은 태평양전쟁 전시체제하에 시국인식, 국책협력, 증산출하 등의 3대 운동을 철저케 하기위한 것이었다.

 

, 종교 단체를 총동원시켜서 만주의 조선민중 (일본· 만주· 몽고· 러시아· 중국인 등을 포함하여)을 각성시켜서 측면적으로 효과를 거두기 위한 것이다. 만주국 민생부와 만주제국협화회는 만주국에 현존하는 불교, 기독교, 도교, 홍만자교 (紅卍字敎) 등의 대표자를 선발하여 8반으로 나누어 만주 전 지역에 파견하여 유세케 하였다.

 

여기에 조선족 측에서도 불교와 기독교의 대표자를 선발하여 4개 반으로 나누어서 만주 거주 조선인(150만 명)들에게 종교를 통하여 시국인식, 황민화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김태흡의 남만주 종교 교화보국 강연도 그 일환의 하나였던 것이다.

 

김태흡은 19411월에도 철원, 금화, 평강, 회양, 이천 등지와 전북지역에서 대동아공영권 건설과 고도국방체제 확립에 따른 국민총력운동을 선동하는 시국인식강연을 행하였다.

 

재단법인 조선불교협회라는 일제 어용단체에서도 태평양 전쟁 시국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19429월 일본승려와 조선승려가 21조가 되어 5개 반으로 나누어 전 조선 각 지역을 순회 강연하였는데 김태흡에 관한 부분만 언급하면 이러하다.

 

김태흡은 가네야마 (金山泰洽)라는 창씨명으로 조선에 있는 일본사찰 호국사의 일본승려 구로다 (黑田惠海)와 함께 92일부터 7일까지 이리, 전주, 남원,여수, 순천, 광주 등지에서 '불교에서 보는 대동아전쟁과 우리의 철원(哲願)'이라는 제목으로 '시국에 즉응(卽應)하야 황도불교'의 선양을 위해 '내선불교(內鮮佛敎)가 상호 제휴하여 대동아의 민중 속에 들어가서 황도정신(皇道精神)의 앙양에 기여하고자' 전라남북도 지역을 일본승려와 합동으로 시국강연을 한 것이다.

 

김태흡은 19433월에는 '종교보국·포교보국의 직역봉공 (職域奉公)의 임무를 가진 불교도로서……국체관념을 투철히 하여……황도불교를 선양'하고자 설립된 불교문화보급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태평양전쟁 제2차 연도인 194258일 일본 각의가 조선인들의 징병제실시를 공포하자 김태흡은 {불교시보}[광영의 징병제 실시]라는 친일 시사문을 게재하고, 경성의 근교 5개 사찰이 연합하여 봉행한 징병제실시감사법요식(1943. 8. 6)에서 조계종 종무총장 이종욱* 및 혜전(惠專)교수 권상로*와 함께 '생사초탈과 진충보국'이라는 제목으로 축하강연을 하였다.

 

김태흡이 쉴 새 없이 벌이던 친일 강연은 이것을 끝으로 {불교시보}{신불교}가 종간됨으로써 그 자취를 감추었다. 그의 왕성한 활동력으로 보아 친일강연이 이로써 멈춘 것은 아니겠으나 불교 언론이 전무하므로 다만 기록이 남겨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친일 불교 언론을 주도

김태흡은 수많은 친일강연 외에도 다수의 친일 논설 내지 친일 시사문들을 발표했다. {불교시보}18, {신불교}3, 총독부의 어용신문인 {매일신보}5, 강원도청에서 출판한 {심전개발병(??) 시국에 관한 순회강연집} 1(강원도, 1937)라는 단행본에 11편 등 도합 37편이 남아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태흡은 자신이 발행하는 {불교시보}[적군의 응징과 국민의 지구력](27, 1937. 10. 1), [연전연승 함락의 축하](28,1939. 11. 1) 따위의 사설(社說)을 통하여 친일활동을 본격화하고, 한편으로는 기명(記名)으로 중일전쟁에 관한 친일 시사문 내지 논설들을 발표하여 조선인과 조선불교도들에게 일본에 충성하고 애국할 것을부르짖었다.

 

그는 1937101일자 {불교시보}에 실린 [애국사상과 경신숭불]에서는"서구의 백인들과 야합하는 중국인을 응징하는 일본과 일본군대인 황군에게 충성과 지원을 하자"고 역설하였다.

 

그는 이 글에서 "당국에서도 애국일을 별정(別定)하고……엄숙한 식전을행하여 애국심을 환기시키는 것"이라면서 일본신사에 안치된 아마데라쓰오미카이 (天照大神) 등의 여러 일본신(日本神)들을 열거하면서 "아국 영토내에 있는 자는 어떠한 종교·국체며 외국인이라도……신사참배를 불긍(不肯)하면 용서할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김태흡이 주장하는 애국사상은 일본에 대한 충성이었으며 그 사상의 기저는 천어중주신 (天御中主神) 따위의 일본건국신화에 바탕을 둔 신도(神道) 사상이었다.

 

그는 엄연한 조선승려이면서 일본의 성무천황 (聖武天皇)과 쇼도쿠 태자의 불교신앙을 통한 일본적인 불교사상과 애국 신조를 고취하는 반민족적인 작태를 서슴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애국적인 실천방안으로 신사참배를 적극 권장하고 일본인처럼 가정 안에 일본 신()들을 모시는 신단(神檀)과 불단(佛檀)을 설치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김태흡의 이와 같은 주장은 전시하의 애국운동, 내선일체, 총후보국 등 총력체제 비상시국 아래의 조선인들을 부일(附日) 내지 친일화로 내모는 것이었다. 서기 1940년은 일본에 있어서 황기(皇紀) 2600년이 되는 뜻 깊은 해였다.

 

김태흡은 이 해를 맞이하여 {불교시보} 신년호(54, 1940. 1. 1)에 일왕쇼와(昭和) 부처의 사진을 1면 상단에 게재하였다. [흥아성업(興亞聖業)건설의 신춘, 천은(天恩) 사해팔굉(四海八紘)에 보점(普霑)]이라는 글에서는 마침 '즉위 15년을 맞이한 40세의 일본천황과 황후 및 황태자, 2 황자 등 일본황실의 중요 인사들의 건강을 기원하며 축하를 드리고 일본제국의 대동아공영권 건설에도 서기(瑞氣)가 충만하다'는 아부를 하였다.

 

그는 이 기사의 말미에서 "장기건설인 흥아성업이 순조롭게 완수될 것을 확신무의(確信無疑)케 되니 차()는 오직 세계무비(世界無比) 만세일계(萬世一系)의 국체와 윤문윤무(允文允武)하옵신 금상 폐하의어능위(御稜威)에 기()한 바이라 사해팔굉에 보점(普霑)하는 천은을 첨암하매 일억적자(一億赤子) 너무도 감격하야 오로지 공구감읍(恐懼感泣)할뿐이라 신년을 당해서 삼가 황실의 어번영(御繁榮)을 축()하야 마지 않는바이다"라는 최상의 경어로 최고의 아첨을 서슴지 않고 있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이 기사 바로 아래의 연두사(年頭辭)를 통하여'신동아건설과 내선일체'에 대해 역시 노골적인 친일발언을 되풀이했으며, 또한 {불교시보} 19402월호(55. 1940. 2. 1)에 실린 [신생(新生)의도()]라는 글에서는 일제의 중국대륙 침략정책을 동조·찬양하였다.

   

 

 

 

창씨개명에도 앞장서다

19402월 총독부가 창씨개명을 실시하자 김태흡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에 동조하여 재빨리 가네야마(金山泰洽)로 이름을 갈아치웠다. 그의 창씨명이 처음 등장한 곳은 {불교시보} 58호인데 그 발행일이 194051일로 되어있는 만큼 원고 집필과 인쇄기간 등을 감안하면 김태흡은 19404월 혹은 그 이전에 창씨개명을 했음이 틀림없다.

 

그는 조선승려로서는 이렇듯 가장 먼저 일본식으로 창씨하는 모범(?)을 보였을 뿐 아니라 [국민정신과 씨창설(氏創設)]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창씨개명을 통한 황국 신민화정책에 적극 협력하였다({불교시보} 59,1940. 6. 15, 1).

 

그런데 그 내용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친일화되어 있어 경악을 금할 수없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러하다.

 

김태흡은 국민정신으로서 일본제국의 신민(臣民)임을 확실히 깨닫고 일본과 조선은 한몸이라는 신념을 가질 것이며(내선일체) 직업봉공에 충실하여 황도선양에 노력하는 것, 이 세 가지가 조선인들의 국민정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일제가 조선을 강제로 합병한 것을 "반도동포가 황은을 입은 지 30년이나 되었다"고 말하는가 하면 "태고의 역사를 살펴보면 일본과 조선은 이미 3000년 동안이나 한 집안이어서 2, 30년이라는 것은 우리가 내지(일본)를 떠나 있다가 다시 본집(?)으로 돌아온 연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해괴한 망발을 서슴지 않고 있다.

 

따라서 조선인들은 "새로이 황국신민이 된 것이 아니라 벌써부터 황국신민으로 있었다"고 김태흡은 억지주장을 하였다. 또 이러한 연고로 반도동포 (조선인)는 겨우 30년 전에 황국신민이 된 신부(新附)의 백성이나 가봉자, 서자(庶子), 계자(繼子)가아니라 일본의 적자(嫡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나미(南次郞) 총독이 조선 민사령을 개정하여 내선동포가 동일한씨()를 갖게 된 것은 가출한 자식이 집으로 돌아와 다시 상속받을 자격을 얻은 것과 같다고 김태흡은 강변하였다.

 

그는 한술 더 떠 창씨개명만으로 황국신민이 되기에는 부족하므로 일본식 씨창설과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정신을 단련하고 실질을 높여야 한다고 조선인들을 설득하였다.

 

그는 아울러 이러한 국민정신의 연마는 스스로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가슴 속에서 저절로 일본국가(國歌) 기미가요가 솟아나오고 일장기(日章旗)를 볼 때마다 감격한 생각이 일어나야 된다"는 황당한 궤변을 부끄러움도 없이 늘어 놓고 있다.

 

창씨개명에 앞장서고, 일제의 징병제도를 찬양하며, 황도불교 (皇道佛敎)를 주창하고, 적국항복의 기도를 역설하고, 총력결전체제에 앞장 서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는 등의 김태흡의 일련의 반민족적인 행위는 약관 20세에 전통적인 승가교육인 법주사 대교과를 이수한 조선승려의 행동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19458, 일본이 항복하자 김태흡은 경남 밀양의 무봉사 (舞鳳寺)로 잠시 피난을 하였다가 이내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일제시대의 그 광적인 친일행적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참회도 없이 대장경 번역위원이 되어 한글대장경 번역에 종사했다.

 

그리고 그가 끝내 자신의 열렬한 친일행위에 대해 아무런 참회의 고백도 없이 19894, 서울 상도동의 사자암에서 훌쩍 입적(入寂)하고 말았다는 것은 한국불교에 잔존하는 왜색불교가 청산될 또, 한번의 기회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쉬운 일이었다.

    

 

 

 

                                          임혜봉 (불교사연구가)

 

    

 

 

근대불교 최고의 포교사

  

  

 

 

김대은(金大隱, 金泰洽, 18891989) 혹은 석대은(釋大隱)으로도 불린다.

19893월에 입적했다. 세수 96, 법납 89. 대은소하(大隱素荷) 스님은 평생을 포교와 강의에 진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7살 때 철원 심원사에서 출가했으며 금강산 유점사와 문경 대승사, 보은 법주사 강원 등에서 공부했다. 또 유점사 선원을 비롯한 제방 선원에서 정진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한 한국의 불교 인물이다. 김태흡은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東京)에서 인도철학과 종교학을 장기간 공부한 뒤, 1928년 귀국하여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서 포교사로 일했다.

 

김태흡은 일본 유학중 1923년의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수만 명이 살육되는 재난 속에서 간신히 살아나는 체험을 하고, 불교35(1927. 5. 1)임진병란과 조선승병의 활약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일부가 삭제되는 등 반일성향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1928년 귀국 후 조선불교 중앙교무원 초대 중앙포교사로 활동하다가 19358월에불교시보를 창간(19444월 종간)하면서 급격하게 친일파로 변모해 갔다.

 

불교시보9년 동안 발행했는데, 이 기간 중 친일 활동에 앞장섰다.불교시보는 조선총독부의 황민화 정책의 일환인 심전개발 운동을 적극 홍보하고 보도하였으며, 김태흡은 심전개발과 관련하여 전국을 다니며 많은 강연을 하였다.

 

특히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전쟁 기간에는 일본의 침략 전쟁을 옹호하는 기사와 사설을불교시보에 다수 실었고, 시국 강연을 병행하며 전쟁 지원에 앞장섰다. 스스로 금산태흡(金山泰洽)으로 창씨개명을 한 뒤, 창씨개명 홍보와 이를 뒷받침하는 논리 개발에 적극 나섰다. 이런 활동으로 인해 조선 제일의 친일 포교사였다는 평도 있다.

 

대은 스님은 보은 법주사와 문경 대승사, 서산 개심사, 용인 화운사 등에서 강사로서 후학들을 가르쳤고 중앙불교전문학교와 혜화불교전문학교에서도 강의했다. 조선불교 교무원 중앙포교사, 대자유치원장 등을 역임했다. 서옹 스님이 출가하기 전에 처음 인연을 맺은 스님이 바로 대은 스님이었다고 한다. 대은 스님은 서옹 스님을 만암 스님 문하로 보내 출가하도록 했다.

 

광복 후에는팔만대장경의 한글 번역에 종사하는 등 저술 활동을 했으며, 101세까지 장수했다. 김태흡은 원불교의 초기경전인불교정전의 발간에 도움을 주었다. 일제 말 민족종교 및 관련단체에 대한 탄압과 감시가 극심해진 상황에서 인쇄 발간의 허가를 받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던 불법연구회에 발간의 기회를 주었다.

    


<사진설명>1927년 3월 동경조선불교유학생 졸업생 송별 기념 사진. 앞줄 우측부터 이지영, 김신교, 조은택, 김창운, 서원출, 박창두, 뒷줄 우측부터 김태흡, 김동진, 강정룡, 장담현, 변설유, 김잉석이다. 사진=민족사 제공.

 

우리 교단이 일제하에서 존폐의 어려운 고비를 맞았을 때 우리 교단을 측면에서 도와준 사람들이 있었다. 한국 불교시보사 사장이었던 김태흡 스님, 일본 조동종의 상야 스님(박문사 주지), 임제종의 중촌 건태랑씨, 이리 경찰서 하촌 서장 등이다. 김태흡 스님은 <불교 정전>의 인쇄를 맡아 주어 드디어 우리 회상의 최초 교서 결집인 <불교정전>을 원기 二十八월에 출판되게 하였다. 그러나 참으로 애석하게도 대종사는 정전(正典) 출판 개월을 앞두고 열반에 드시었으니 제자들의 비감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대종사는 가시고 대종사의 말씀만 한 권의 책이 되어 제자들의 손에 남게 되었다.

 

    

 
▲ 청하원에서 소태산대종사와 김태흡·상야순영 스님.

 

 

팔만대장경 교역·관음경 강화·석가여래 일대기·석가여래약전, 암야의 등명, 신앙의 등불, 피안의 메아리, 삼세인과, 육조대사 고행록, 금강신앙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 수필, 산문 등을 남겼다. 2009년 대은 스님 열반 20주기를 맞아 문도회에서는 저서 등을 모아 대은 대종사 문집을 펴내기도 했다.

 

 

 

 

불교대중화에 생애를 헌신하다

 

근현대 불교인물 탐구 김태흡 (1899~1989)

  

 

1960년대 중반 스님들에게 법을 설하고 있는 대은스님.

사진제공=동주스님

  

 

1. 근대불교 최고의 포교사

대중불교또는 불교대중화는 한국 근대불교계에서 보편적으로 파급된 논리로, 대중불교운동의 전개는 근대 이전의 한국 불교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징 중의 하나로 지적할 수 있다. ‘대중불교산간에서 도시로, 승려에서 대중으로를 지향하고 실현하는 불교를 의미하고, ‘대중불교운동은 집단적·조직적 활동만이 아닌 대중불교를 구현하기 위해 시도된 일체의 행위를 가리킨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근대불교사 연구에서 불교대중화 내지 대중불교운동에 관한 논의는 그 중요성 및 필요성에 비해 활발하지 못한 형편이다. 불교개혁론에 대해 비교적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것과 달리, 불교학교·불교잡지·역경(譯經) 등 몇몇 분야에 관한 단편적인 논의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특히 대중불교운동의 이념적 지향과 성격, 개별적인 활동이 아닌 전반적인 흐름에 대한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이러한 연구의 부진은 대중불교운동을 주도한 당시의 불교 지성들이 실천적인 측면에 강조점을 두고 있어, 불교개혁론과 같은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대중불교론을 남기고 있지 않은 점에 기인한다.

 

여기에서, 김태흡(1899~1989)의 존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당시 불교계의 대표기관인 교무원의 중앙포교사로서, 대중불교운동의 이론적·실천적 측면에서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였기 때문이다. 김태흡은 중앙포교사로 재직한 7년이라는 기간 동안, 불교잡지를 중심으로 불교대중화의 이론과 방안에 관한 많은 논설을 발표하였다. 또한 각황교당의 토·일요일 설법, 경성방송국의 라디오방송, 전도대 조직을 통한 노상포교, 불교합창단과 불교 극단의 창단 등 다양하면서도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김태흡은 불교대중화를 위한 다양한 시도와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 대중불교운동의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김태흡과 그의 대중불교운동에 대한 불교학계의 연구는 전무한 실정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본격화된 그의 친일 행적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일면적 차원에서 그의 다른 업적까지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김태흡의 친일을 변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김태흡의 친일 행적은 이미 임혜봉의 친일불교론(1993),친일승려 108(2005)에서 자세히 다루어졌고,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2009)에도 등재되어 있으므로, 이 지면에서 반복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근대불교사 내지 근대불교문화사의 복원이라는 관점에서, 김태흡의 생애와 대중불교운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을 피하지 않을 것이다.

  

2. 생애와 저술

김태흡의 생애를 알 수 있는 자료로는 대은대종사 문집(2009)에 수록된 대은대종사 연보(1)대은당 소하대선사비(5), 그리고 그의 저서 신앙의 등불(1975)의 부록인 나의 개안(開眼)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자료는 출생 및 활동 시기의 연대 파악에서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예를 들면, 제자들에 의해 작성된 연보·비문은 김태흡의 출생연도를 189444일로 적고 있는 데 반해, 자서전적 성격의 글인 나의 개안에서는 1898년 기해(己亥) 415일로 되어 있다.

 

또한 전자에는 그의 나이 35세 때에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후자에서 김태흡은 내가 귀국한 것은 1930년 서른세 살 되던 해라고 적고 있다. 이렇듯 김태흡 자신과 그의 문도회에서 작성한 기록 모두 활동 연대는 신빙성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항목의 서술은 이들 자료의 내용을 참고하되, 그 구체적인 연도의 제시는 필자의 조사에 의한 것임을 밝힌다.

 

김태흡은 법명이 대은(大隱)이고 법호가 소하(素荷), 189944일 경기도 강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광현(金光賢), 어머니는 충주 지씨이다. 40세가 가깝도록 자식이 없던 양친이 마니산에 가서 3일간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드린 후에 그를 낳았다고 한다. 3세 때에 강화도를 떠나 서울로 이사했는데, 그해 군관이었던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어려서부터 몸이 병약했던 그는 1906년 비구니였던 외할머니의 권유로 철원 심원사에서 계암(桂庵) 스님을 은사, 청호(晴湖) 스님을 계사로 하여 출가하였다.

 

이듬해인 9세부터 13세까지 경기도 장단 화장사와 양주 보광사에서 응봉(應峰우운(雨雲) 스님에게 범패와 나비춤을 배웠으며, 두 스님을 따라 여러 사찰에 재()바지를 다녔다. 1912년 범패승 생활을 마감하고, 금강산 유점사에서 사미과를 배웠다.

 

이어서 건봉사·용주사·법주사·마곡사·대승사·화엄사 등을 다니면서 사집과(四集科사교과(四敎科대교과(大敎科)를 마쳤다. 1919년 그는 21세의 젊은 나이에 법주사 진하(震河) 스님으로부터 전강(傳講)을 받고 강사가 되었다. 법주사에서 1년을 지낸 뒤 이듬해 봄에 문경 대승사의 강주청장(講主請狀)을 받고 한 철 동안 학인들을 지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좀 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자각과, 그에 앞서 도쿄로 유학을 떠났던 친구 이영재(李英宰, 1900~1927)의 권유로 인해 1920년 가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도쿄에 있는 예비학교에 들어간 그는 중등과정을 속성으로 마치고, 도요(東洋)대학 인도철학과에 입학하여 2학년을 다니다가 중퇴하였다.

 

김태흡은 대부분의 일본 유학생들과 달리, 사찰의 도움 없이 신문배달원·인력거꾼을 비롯한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였다. 힘들고 바쁜 고학 생활 중에서도, 그는 19245월 이영재·최범술 등과 함께 재일불교청년회의 기관지인 금강저의 창간을 주도하였고, 7~15호의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았으며, 다수의 글을 발표하였다. 또한 방학 중에는 귀국하여 동료들과 함께 전국 각지를 돌며 불교강연회를 열기도 하였다.

 

 

동경의 조선불교유학생들의 모습(1926.3).

가운데줄 왼쪽 끝이 김태흡이고 중앙이 그에게 유학을 권했던 이영재다.

 

도요대학에 이어 니혼(日本)대학 종교학과에 입학한 그는 1925년에 졸업하였고, 이듬해 3월 같은 대학 종교연구과에서 종교와 사회사업발달사의 연구라는 논문으로 종교학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에 대해 당시 불교의 소식란에서는 우리 유학생으로서 문학사(文學士)가 되기는 군()이 효시이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니혼대학을 졸업한 뒤 귀국할 때까지 도쿄제국대학에서 사료편찬원으로 근무하면서, 같은 대학 사학과의 청강생으로 공부하였다.

 

9년 동안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김태흡은, 19285월 경성 각황교당의 초대 포교사로 임명되어 본격적인 포교활동을 전개한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각황사에서 토·일 설법을 시작하였는데, 포교사를 그만둔 1934년까지 토요일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설법을 진행하였고, 일요일은 청년신도를 대상으로 불교교리 및 사상에 대해 강연하였다.

 

그리고 그는 각황사의 청년신도들과 함께 시내를 돌면서 거리포교를 진행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깃발을 세워놓고 목탁을 치며, 행인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한 것이다. 거리포교는 서울 시내에서만 한 것이 아니라, 평양 일대에서도 행해졌고 그때마다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러한 적극적인 포교 방식으로 인해 김태흡은 이로부터 나에게는 포교 미치광이라는 별명이 붙었는가 하면, ‘포교왕 김아무개라는 평판도 듣게 되었습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또한 그는 불교계 인물로는 처음으로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였다. 19291월과 10월에 각각 소크라테스의 윤리철학과 불교의 실천도덕가정평화의 묘체란 제목으로 방송을 한 것이다. 한편, 그는 설법과 강연 외에도, 포교 현대화의 일환으로 불교합창단과 극단을 조직하였으며, 많은 찬불가와 희곡 작품을 창작하고 직접 연극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김태흡은 중앙포교사로 활동한 7년 동안 그 이전과는 다른 다양한 포교 방식을 시도하였고, 지속적으로 불교에 포교 관련 글들을 발표하였다. 바로 이 기간은 김태흡의 생애에서 가장 눈부신 시기이자, 근대 불교문화사를 풍성하게 만든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19358불교시보의 창간을 기점으로 불교대중화를 위한 그의 눈부신 활동은 그 빛을 잃어간다. 김태흡은 창간사에서 종교부활·정신작흥(精神作興신앙고취를 부르짖는 심전개발운동(心田開發運動)에 한 팔이 되고 한 다리가 되는 것불교시보의 사명이자 목적이라고 밝혔다. 심전개발운동은 1935년부터 1937년까지 총독부에 의해 시행된 것으로, 조선 민중의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를 목표로 하였다.

 

곧 이 운동은 조선 민중들을 천황에게 절대복종하는 충량한 신민으로 만들고, 농촌진흥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병참기지로서의 농가의 경제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김태흡은 자신이 천명한 대로 불교시보의 많은 지면을 심전개발운동에 관한 사설과 논설로 채웠으며, 직접 전국을 순회하며 심전개발운동을 선전·보급하기도 하였다.

 

19377월 중일전쟁이 시작된 이후 김태흡은 보다 노골적인 친일 활동을 전개한다. 불교시보》 《신불교에 일제의 침략전쟁을 합리화하고 내선일체’ ‘황도불교(皇道佛敎)’를 선양하는 많은 글을 발표하였다. 또한 전국 각지를 돌며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의의’ ‘황은 감격과 국민의 진로’ ‘국민총력운동과 승려의 각오등의 주제로 시국강연을 하였다.

 

19412월에는 라디오방송을 통해서도 시국강연을 하였는데, ‘감사봉공이라는 제목의 이 방송에서 그는 아침에는 황은에 감사하며, 낮에는 장병의 은혜를 감사하며 저녁에는 부처님의 은혜와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멸신봉공(滅身奉公)” 하자고 주장하였다.

 

한편, 김태흡은 이 기간 동안 잡지사이자 출판사였던 불교시보사를 경영하면서, 19387월 만주 봉천 관음사의 주지를 맡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그는 1945년 만주 지역의 사찰을 관리하는 개교감독(開敎監督)’에 임명되어, 만주 장춘의 화엄사 주지로 부임하던 도중에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직후 서울에 온 김태흡은 주지 싸움으로 공석이 된 봉은사의 주지가 되었는데, 194512월 전() 주지 홍태욱의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살인교사 죄목으로 8년형을 선고받고 5년 동안 복역했다. 자서전인 나의 개안에서 그는 자신의 친일활동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없지만, 이 사건에 대해서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사건의 경위와 당시의 심정을 자세히 술회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복역을 마친 직후에 진범이 잡혀서 자신의 억울한 누명이 벗겨졌다고 한다.

 

그 이후 김태흡은 자신의 표현대로 세상에 얼굴을 내밀지 않고후학 양성과 저술활동에만 전념하였다. 곧 전주 정혜사·서산 개심사·용인 화운사 등의 강원에서 학인들을 지도하였고, 팔만대장경 번역편찬위원(1961)과 동국대 역경원 한글대장경 번역위원(1968) 등을 역임하였다. 1989413일 김태흡은 부지런히 정진해서 요익중생(饒益衆生)하라는 당부를 남긴 채, 서울 상도동 사자암에서 세수 91, 법랍 84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김태흡은 권상로(1879~1965)와 함께 근대 불교계를 대표하는 문필가로, 신문·잡지 등에 수많은 글을 발표하였고, 20여 종의 단행본을 남겼다. 특히 불교불교시보에는 매 호마다 거의 빠짐없이 그의 글이 실려 있다. 김태흡의 저술은 최근에 간행된 대은대종사 문집(7)에 대부분 모여 있어,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

 

문집의 제1권은 석존의 생애 및 사상과 관련된 내용으로 단행본 석가여래약전(1932)석가여래일대기(1974) 등이 수록되어 있다. 2권은 피안의 메아리(1977) 신앙의 등불(1975) 삼세인과(1978) 금강신앙(1972) 등 기존 단행본의 집성이고, 3권은 관음신앙과 관련된 단행본과 잡지의 기고문을 수록한 것이다. 4~7권의 경우는 각각 경전 강의 및 교리 해설, 구도·신앙· 신행, 고승·선사상·종교, 불교사·불교문화·불교문학 관련 글들을 수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 그의 저술은 대부분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신앙 안내서와 불교의 교리 및 사상을 알기 쉽게 해설한 대중포교서에 해당한다. 쉬운 어휘와 간결한 문체로 된 김태흡의 대중포교서는 당시의 신도들에게 널리 읽혔는데, 특히 석가여래약전1932년에 처음 간행된 이래, 재판, 3, 4판을 거듭하여 1940년대까지 총 4만여 부가 팔릴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김태흡 저술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문학작품의 비중이 크다는 점과 당시의 승려로서는 유일하게 희곡을 창작했다는 점 등을 지적할 수 있다. 그는 동시대의 불교 지성과 달리, 자유시, 창가(찬불가), 시조, 소설, 희곡, 동화, 기행문, 수필 등 문학의 전 장르에 걸쳐 다수의 작품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조사된 김태흡의 문학작품은 자유시 7, 시조 5, 소설 8, 찬불가 9, 희곡 19, 동화 25편 등으로, 유학 시절에 창작한 일부 시()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교의 선전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승려이자 시조시인인 조종현(1906~1989)은 그의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이 작가의 작품은 오로지 불교 선전을 목적으로 하고 지은 것이요, 다른 것은 아니라고 단언하여도 무방하다. 기왕이면 민중불교의 실현에 적합한 작품을 발표하여 주시는데 예술적 가치를 존중해주기 바란다.” 곧 조종현은 김태흡 문학의 예술적 성취가 미흡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지만 작품의 문학적 성취와는 별개로, 대중이 흥미를 갖고 있는 문학이라는 매체를 통해 불교를 전파하고 있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불교대중화의 측면에서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특히 그의 찬불가와 희곡 작품은 백용성(1864~1940), 권상로, 조학유(1894~1932) 등의 찬불가와 함께, 근대 불교계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대중불교운동의 이념적 지향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3. 불교대중화의 이론과 실천

 

1) 불교 인식

김태흡이 불교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의 문제는 그가 불교의 대중화를 주장하고 실천한 근거이자, 자신이 전개한 대중불교운동의 최종 목표로도 볼 수 있다. 불교를 이지주의(理智主義이상주의·평등주의·인격주의의 종교로 규정하고 있다. ‘이지주의는 과학과 철학을 아우르는 불교의 성격을, ‘이상주의자각(自覺) 각타(覺他) 각만(覺滿)으로 세상을 구하고 중생을 제도함을 가리킨다. ‘평등주의인격주의는 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고, 초인간적인 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닌 누구든지 노력하면 불타가 될 수 있다는 인격향상주의를 의미한다.

 

그는 이러한 정의에 덧붙여, 이들 요소는 과거의 기성종교에서 찾을 수 없는 불교만의 특징이며, 바로 이 점으로 인해 불교는 현대 및 미래의 중심적인 종교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상주의는 한용운이 조선불교유신론(1913)에서 불교의 주의로 제시한 구세주의, 평등주의·인격주의는 평등주의에 해당한다. 평등주의와 구세주의가 불교유신을 위한 한용운의 전제라면, 김태흡에게는 불교대중화의 전제 내지 출발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김태흡은 불교의 본질과 관련하여 초기불교의 대승(大僧, Maha sangha)’을 주목하고 있다. 그는 여러 글에서 대승내지 승려의 의미를 반복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지금에 이르는 승려라는 말은 일부의 출가자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재가자까지 포함되어 있는 말이다. 승가(僧伽)라는 말을 번역하면 단체라는 뜻이니 쉽게 말하면 불교를 믿는 교단이라는 언급이 그것이다.

 

김태흡이 이렇게 승가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당시 불교계의 상황과 관련이 있는 동시에, 그가 전개한 대중불교운동의 근거 내지 기반이 되기 때문으로 보인다. 곧 승려 중심의 산중불교인 당시 한국불교계의 상황은 조선왕조 5백 년 동안의 억압 정책으로 인해 변질된 것으로, 본래의 불교는 대중적이고 사회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태흡에게 당시의 산중불교는 일시적인 기형에 지나지 않으며, ‘대중불교는 불교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된다.

 

그는 대승의 정의에서 더 나아가 불교의 본질을 대승의 사상과 동일시하고 있다. 사회적 직업을 존중하고 어떠한 사업이라도 진실하게 종사하는 것이 대승의 사상이자 불교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또한 불교의 생명은 사회의 생명에 있고 사회의 생명은 승가의 생명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대승의 의미를 망각한 채,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고 불교를 승려만의 소유로 고집하는 것은 불교 본연의 모습이 아니므로,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독선을 추구하는 산간불교에서 대중불교로 전환해야 함을 촉구하고 있다.

 

2) 불교대중화 방안

그는 이러한 불교 인식을 바탕으로 산간불교에서 대중불교로 전환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곧 그는 불교 정신을 고취, 보급하기 위한 학교교육과 사회교육기관의 완비, 한글 단행본으로 된 불타 전기 및 교리서의 제작 배부, 불교회관의 건립과 여학교 경영 등 비교적 다양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포교 방식에서도, 김태흡은 사찰 중심의 산중과 포교당 중심의 도시로 구분한 뒤, 전자는 각 마을을 직접 찾아가는 순회설교를, 후자에서는 정기포교, 수양강화, 특별수양강연회 등을 실시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는 이를 통해 농촌과 도시에서 자연스럽게 불교의 존재를 알리고, 대중들의 존경 또한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김태흡의 불교대중화 방안은 불교포교에 대하여란 논설에서 집대성된다. 이 논설에서 그의 주장은 포교 공간, 포교 방식, 부속기관의 세 가지 문제로 집약된다. 전당식 포교당에서 회관식으로의 전환, 찬불가, 한글 경전 등 시대에 맞는 포교 방식의 도입, 그리고 유치원, 야학교 등의 부속기관 설치가 이에 해당한다. 그리고 포교 방식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1) 강설포교

조선어 성전에 의한 강화식 포교 통속교화강연 선문(禪門) 제창 특별경전강의(유마·원각·반야·능엄경 등)

(2) 문서포교

잡지 저서 번역 서간

(3) 의식포교

불전헌공(佛前獻供) 장례식 화혼식 추도식장엄의식 가찬의식(歌讚儀式)

(4) 특별포교

개인상대 가정방문 병자위문 신앙상담 불경교수

군중상대 학교 공장 감옥 노방전도 등

지방순회 도시 농촌 어촌 사원

특수강습(하기대학 불교강좌 그 외 불전강습회 등)

(5) 감화포교

아동 및 학동감화 유치원 일요학교 간이서당 야학강습회

불량아동감화 고아원 맹아원 감화원 탁아소

환자 및 불구자 위문

이재민 및 빈민구제

오락감화 종교성극 종교영화 종교음악

(6) 신앙본위단체조직

불교신우회 불교부인회 불교청년회 불교소년회 불교소녀회 불교친목회 등

   

 

그는 인용문에서 보듯, 포교 방식을 강설, 문서, 의식, 특별, 감화포교와 불교단체 조직 등의 여섯 가지 항목으로 나누고, 다시 각 항목에 대해 세부 항목을 설정하고 있다. 설정된 세부 항목으로 볼 때, 그는 특별포교와 감화포교에 보다 중점을 두고 있는데, 불교의 사회적인 역할과 활동을 강조했던 그의 불교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포교 방안은 근대불교계의 대표적인 의식집인 석문의범간례편(簡禮篇)에도 수록되어 있다. 석문의범이 한국 근대불교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한다면, 당시 불교계의 공인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그의 대중화 방안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임을 확인할 수 있고, 또한 그 의의 내지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3) ‘월인(月印)코러스룸비니(藍毘尼)드라마클럽

불교가 이렇게 예술의 종갓집임을 불구하고 불교음악으로 일부의 범패를 제하고는 서양음악에 조화될 만한 음악을 하나도 만든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을 좋아하는 청년남녀는 예수교회당으로 갈지언정 불교포교당에는 오지를 아니하며, 찬양대라든지 합창코러스라 하면 교회당의 전용물로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에 깊이 느낀 바가 있어서 우리 불교도 현대적으로 선전하자면, 아무리 하더라도 현대적 예술의 힘을 빌지 아니하면 아니 되리라 생각하고 기회를 바라고 있던 차에, 마침 이번 성도재일을 당하여 신앙 본위로 불타의 정신에 감격하고 모인 청년 남녀가 30여 명이나 되어서 거룩하게 성도가극(成道歌劇)을 연습하고 출연하여 마치었는고로, 이분네를 붙들고 영영(永永)한 음악대와 성극(聖劇隊)를 조직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음악과 성극을 출연하자고 상의하였더니 한 사람도 빠지지 아니하고 참가하여 주기로 되었다.

 

그래서 성도재 다음날 9일 밤에 대()의 이름을 짓고 발회식을 하게 되니, 음악부는 월인(月印)코러스라는 이름으로 얼굴을 들고 나오게 되고, 극부(劇部)룸비니(藍毘尼)드라마클럽이라는 하이카라모던식의 이름을 가지고 나오게 되었다.

 

장황하게 인용한 위의 글은 불교합창단 월인코러스와 불교극단 룸비니드라마클럽의 창단 경위를 밝힌 것이다. 인용문을 통해, 합창단과 극단은 19301월 성도기념식 때 공연되었던 성도가극의 성공에 자극받아 각황교당의 청년부를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또한 현대적 불교 선전곧 포교 현대화의 일환으로 기획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성도가극은 그의 첫 번째 희곡인 승리의 새벽을 가리킨다.

 

그가 조직한 극단과 합창단의 구체적인 활동이 이후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관련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불교잡지의 소식란을 통해 찬불가와 희곡이 공연된 사실은 확인된다. 희곡은 19편의 작품 중, 승리의 새벽〉 〈우주의 빗〉 〈〉 〈우란분〉 〈전화(錢禍)〉 〈불타의 감화〉 〈애욕의 말로〉 〈불타의 홍원〉 〈〉 〈입산10편이 석가탄신일, 성도일 등의 기념식에서 공연되었다.

 

찬불가의 경우는 종소리〉 〈월인천강곡찬불가〉 〈물독등이 합창단에 의해 불렸다. 이들 작품은 주로 사원, 포교당, 학교 등에서 공연되었지만, 희곡인 불타의 홍원우란분의 경우는 일반 극장인 부민관에서 공연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김태흡의 찬불가와 희곡작품은 일정한 내용적 경향성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먼저, 그의 찬불가는 동시대의 찬불가와 달리 독자에 대한 권계나 당부가 없다는 점과, 불전(佛傳) 및 경전의 내용을 노래하고 있다는 특징을 보인다. 고행가〉 〈룸비니원〉 〈오도가는 불전을, 물독목련의 지효는 각각 잡비유경의 비유담과 목련경의 내용을 요약하여 노래한 것이다. 그리고 불전이 소재인 찬불가는 신이성의 배제와 불타의 인간적 형상화라는 내용적 특징을 보여준다.

 

김태흡의 희곡은 대부분 불전, 경전, 불교설화 등을 각색한 것이고, 창작희곡은 애욕의 말로〉 〈전화〉 〈누구든지등의 3편뿐이다. 이들 작품 중, 불전의 내용을 각색한 몇몇 희곡에는 원전에 전혀 없는 내용이 보이고 있다. 그 예로 룸비니드라마클럽의 창단 계기가 된 승리의 새벽을 살펴보자.

 

이 작품은 불전의 팔상(八相) 가운데 수하항마(樹下降魔)’ 6년간의 고행을 마치고 수자타의 유미죽을 먹은 뒤, 보리수에 앉아 마왕을 항복시키고 성불하였다는 내용을 극화한 것이다. 불전에서는 일반적으로, 수자타가 수신(樹神)이나 범천(梵天)의 명령으로 태자에게 찾아가서 죽을 공양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수자타는 우연히 길을 가다가 강물에 떠내려갈 위기에 처해 있는 태자를 발견한 뒤, 시녀인 푼나와 함께 태자를 구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불전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찬불가와 마찬가지로 작자가 의도한 석존의 형상화와 관련이 있다. 곧 김태흡은 불전에서 신격화·신비화되어 있는 석존의 모습을 탈색하고, 육체적인 고통을 겪는 현실적인 인물로 형상화하기 위해 이 장면을 삽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만일 우리가 오지 않았더라면 어찌 될 뻔하였어라는 푼나의 대사와, “내가 이번에 꼭 죽게 되는 것인데, 너희 때문에 살아났구나.”라는 태자의 대사는 인간적 형상화를 더욱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김태흡의 희곡작품은 불타의 인간적 형상화외에 또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창작희곡인 애욕의 말로는 애욕에 눈이 멀어 자신의 처를 버리고 어머니에게 상해를 입힌 주인공이 걸승의 교화로 인해 뒤늦게 자신의 죄를 깨닫는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작품의 끝 부분에서 걸승은 참회한 주인공에게 마음이 어두우면 악귀로 변하고 마음이 밝으면 부처가 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지옥과 천당이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오직 마음 가운데 있는 거다. 그대가 아까까지도 지옥생활을 하더니, 이제부터는 천당으로 놓여나오는구나. 마음 한번 고치는 바람에.”라고 하여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수하항마의 각색인 항마의 밤에서 태자는 오직 마음이 굳세기로 유명한 자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렇듯 김태흡의 희곡에는 전 작품에 걸쳐 마음을 강조하는 등장인물의 대사가 빈번하게 나타나 있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마음 또는 자각의 강조는 불타의 인간적 형상화와 함께 그의 문학작품에 나타나는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불타마음의 강조는, 김태흡의 불교 인식이 사원·포교당·학교라는 대중불교의 현장에서 구체화된 것으로, 그가 전개한 대중불교운동의 이념적 지향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불타와 마음으로 불교를 단순 명료화하여 이를 노래와 연극을 통해 적극적으로 대중에게 확산시키고 있는 점은, ‘유불불이(儒佛不二)’라는 절충론으로 숭유억불에 대응했던 근대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하겠다.

 

4) 불교시보(佛敎時報)여성란아동란

김태흡이 발행한 불교시보19337월에 종간된 불교이후 교단의 기관지가 없는 상황에서 조선불교의 기관지를 자처하며 창간되었다. 그는 간행 목적으로 불교계 소식의 보도와 심전개발운동의 고취를 들고 있다. 잡지의 체재는 부인란’ ‘포교지도란’ ‘수양강화(修養講話)’ ‘아동란등의 고정란, 심전개발운동·황도불교에 관한 논설, 교리 해설, 불교계 소식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잡지는 일제의 심전개발운동과 군국주의 및 내선일체 정책을 선전하고 있다는 문제점을 보인다. 그렇지만 부인란’ ‘아동란등 고정란의 다양화와 지속성은 근대불교계에 존재했던 다른 잡지들과 구별되는 특징으로, 특히 부인란과 아동란의 상설화는 불교대중화의 측면에서 평가할 만하다.

 

근대 시기에 간행된 30여 종의 불교잡지 가운데, 여성독자를 위한 고정란을 마련한 잡지는 조선불교월보(1912. 2~1913. 8, 통권 19)해동불보(1913. 11~1914. 6), 불교시보외에는 없다. 불교계에서 차지하는 여성 신자의 비중을 생각한다면, 불교잡지의 여성에 대한 관심은 극히 적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불교잡지가 설정한 주요 독자층과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여성을 위한 언문부를 상설하고 있는 조선불교월보조차 그 독자층에서 여성을 제외하고 있다.

 

불교시보불교부인란은 창간호부터 87(1942.10)까지의 8년 동안 거의 빠짐없이 실려 있는데, 주로 불교 교리의 해설, 여성불자의 역할에 관한 논설, 신앙체험담, 불전설화(佛典說話) 등을 수록하고 있다. 김태흡이 대부분의 글을 담당했고, 신앙체험담의 경우는 간혹 여성 필자의 글이 실리기도 하였다. ‘불교부인란은 내선일체와 총후보국과 관련된 몇몇 기사를 제외하면, 대체로 기복적·미신적 신앙을 버리고 경전과 염불을 통해 올바른 믿음을 가질 것을 당부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아동을 위한 고정란 역시 불교(28~36, 1926.10~1927.6)를 제외하고는 다른 불교잡지에서는 시도되지 않은 것이다. 불교시보아동란’(10~57)은 불전동화, 전래동화, 창작동화 등의 동화가 내용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34편의 동화 중 16편이 불전동화에 해당하고, 잡보장경》 《법구비유경》 《백유경등의 출전이 밝혀져 있다. 아동란에 수록된 동화작품들은 그 끝 부분에 화자의 논평 내지 의미부여가 제시된 특징이 있다.

 

음악으로 성공한 소년(15)무슨 재주든지 이 소년처럼 정성스럽게만 하면 성공되지 않는 일이 없는 것이다.”, 노루의 보은(55)우리도 무슨 짐승이든지 살리기를 좋아하는 생각으로 지내며 죽이지 말기를 끝으로 바라는 바입니다.”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렇듯 불교시보부인란아동란이 그동안의 불교 잡지에서 소외되었던 여성과 어린이로 독자층을 확대하고, 흥미있는 이야기를 통해 불교정신 또는 불교적 덕목의 학습을 시도했다는 점은 불교대중화의 측면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4. 불교대중화운동의 의의와 한계

개항 이래 한국불교는 근대적 전환이라는 과제와 직면하였다. 그러나 한국사회가 근대 국민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 시도한 일련의 사회개혁이 실패로 돌아가고 식민체제에 편입되면서, 한국불교는 외래종교인 기독교의 교세 확장과 일제 침략의 선봉을 자처했던 일본불교의 침투에 맞서야 하는 절박한 현실에 놓인다.

 

곧 근대 시기의 한국불교계는 기독교와는 다른 종교로서 불교의 정체성과, 일본불교와 구별되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정립해야 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불교대중화를 실현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에 직면한 것이다. 이에 대한 불교계의 구체적인 대응으로는 근대적 교육기관 및 포교당의 설립, 유학승의 파견, 역경 및 출판사업, 불교잡지의 발간 등을 들 수 있고, 이러한 움직임들은 대중불교운동이란 이름으로 포괄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대중불교운동의 중심에 김태흡이 있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김태흡은 거리포교, 불교잡지의 편집과 발행, 대중포교서의 저술 및 간행, 찬불가·희곡 창작을 통한 예술 공연 등의 대중불교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중화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동시대의 불교 지성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으로, 그 가치와 의의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의 대중불교운동에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는 불교대중화에 대한 당위성만 내세울 뿐, 왜 불교를 대중화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불교대중화인가에 대해서는 성찰이 부족했던 것이다.

 

렇기 때문에 심전개발운동의 본질을 망각하고 마음이라는 공통분모에만 집중하여 일제의 정책에 협력한 것이고, 더 나아가 불교 정신에 배치되는 침략전쟁을 옹호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근대불교 연구의 영역 확대와 활성화를 위해서는, 여전히 김태흡과 그의 대중불교운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식민지 시기 친일 승려들의 친일 논리를 규명하기 위해서도 김태흡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김기종 불교평론(http://www.budreview.com)

 

 

 

 

참고문헌

{佛敎時報}

{新佛敎}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 김태흡, 조선 제일의 친일 포교사 (임혜봉), 친일파 993. 서울 돌베개.

임혜봉 (2005). 김태흡 불교시보발행인, 조선 최고의 친일 포교사, 친일 승려 108. 서울 청년사.

http://www.wth.or.kr/dictionary/dic_view.asp?n=712&p=134&ok=1&om=0&sk=0&st=&lm=key

http://m.hyunbulnews.com/articleView.html?idxno=276095&menu=3

김태흡[金泰洽]씨의 순회강연 일정(춘천)http://ffr.krm.or.kr/base/td002/view.html?newsid=332800

http://encykorea.aks.ac.kr/Contents/Contents?contents_id=E0000209

세종대왕의 신불(信佛)과 월인천강곡(月印千江曲)

교단수난장(敎團受難章) http://blog.daum.net/manicom/15714962

http://blog.daum.net/loveisspacefill/15715320

망우리공원 http://blog.daum.net/kcyun3/18279085

http://earticle.net/article.aspx?sn=147145 심전개발운동과 불교

http://bookapp.mk.co.kr/newbook_sub1_view.php?isbn=9788997735242

http://e-gonghun.mpva.go.kr/portal/web/book/book_xml_view_detail.jsp?book_code=B003&his_code=PV_DJ&item_code=003.003.006.000 사회 운동의 상황[1934.1~1937.12]

http://www.bulgyofocus.net/news/articleView.html?idxno=66952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2254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1152

http://cafe.daum.net/43sudawon/5bdv/51?docid=1DCxn5bdv5120091006170835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2817

http://www.w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3386

http://www.buddhatv.com/bbs/board_view.asp?pk_idx=359&b_budle=news&page=1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F0OL&articleno=12026575&_bloghome_menu=recenttext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발표

 

 

 

 

불교계 친일인사, 이회광 등 57명 포함돼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이하 편찬위)<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될 예정자 3090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이 가운데는 조계사 창건 및 종단 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이종욱 등이 포함돼 있어 불교계의 반응이 주목된다. 13개 분야로 나뉘어 명단이 발표된 가운데, 이회광·권상로·이종욱 등 불교계 인사 57명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불교계 경우 조선불교단(1925)· 조선불교중앙교무원(1937.1 이후총본산건설위원회(1937)· 조선불교총본사설립위원회(1940)· 조선불교조계종총본사(1941) 등의 핵심간부와 일본불교시찰단(1918.8~9)· 복지황군위문단(1937.12~1938.1) 참여자와 친일논설발표자, 부일협력 강연회나 좌담회 참여자들 주로 포함됐다.

 

불교곽법경 郭法鏡권상로 權相老김경림 金敬林김경주 金敬注김구하 金九河김동화 金東華김법룡 金法龍김보련 金寶蓮김삼도 金三道김상호 金尙昊김설암 金雪岩김송월 金松月김영수 金映遂김영호 金泳鎬김용곡 金龍谷김재홍 金在弘김정섭 金正燮김정해 金晶海김지순 金之淳김진월 金振月김청암 金靑庵김탄월 金坦月김태흡 金泰洽김한송 金漢松박대륜 朴大輪박도수 朴度洙박병운 朴秉蕓박영희 朴暎熙박원찬 朴圓讚박윤진 朴允進박찬범 朴贊範변설호 卞雪醐손계조 孫啓照심보연 沈寶淵유재환 柳在煥윤상범 尹相範이덕진 李德珍이동석 李東碩이명교 李明敎이병호 李炳浩이보담 李寶潭이석두 李石竇이종욱 李鍾郁이철허 李徹虛이태준 李泰俊이혼성 李混惺이회광 李晦光임석진 林錫珍장도환 張道煥정병헌 鄭秉憲정창윤 鄭昌允정충의 鄭忠宜최상문 崔翔文최취허 崔就墟홍태욱 洪泰旭황금봉 黃金峯황벽응 黃碧應 (이상 57)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은 일제 강점기 친일 반민족 행위자 708명의 명단과 구체적인 친일 행적을 공개했다. 이날 발표된 708명의 명단 중, 추가된 집중 심의 대상에 포함된 불교계 인사로는 권상로(18791965)가 들어 있고, 이미 선정된 692명 중 불교계 인사는 이회광(18621933)· 이종욱(18841969)· 김태흡(대은, 1899~1989)· 허영호(19001950년 납북) 등 네 명이다.

 

일제하 최고의 학승 권상로

동국대학교가 종합대학이 되면서 초대 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193786일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에서 주최한 강연회에서 선각자로서라는 제목으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할 것을 역설했고, ‘승려 지원병에 대하야라는 글(불교시보 제57, 1940. 4. 1)을 통해 승려들의 지원병을 권유하기도 했다. 특히 불상의 장행’(신불교 제48, 1943. 5)이라는 글에서는 전승을 위하여 교주의 성상(聖像)까지 내어 바치는 것은 불교가 아니면 없을 일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범해가 편찬한 <동사열전>에 기록된 조선왕조 마지막 대강백이었던 이회광 스님

그 명성을 지키지 못하고 불교계의 이완용이라는 오명을 남기고 말았다. 한일합방조약의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인 1910106일 조선의 원종(圓宗)과 일본 조동종과의 연합을 획책함으로써 종단을 팔고 조상을 바꾸어 버린 것다.

 

건국국민훈장을 추서(1977) 받기도 한 이종욱

1919년의 3·1만세 운동에 참가한 뒤 매국 역적을 제거하는 일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훗날 31본산 주지회의의 의장이 되는 등 골수 친일파로 전락하였다.

일제강점기의 대표적 엘리트 승려였던 김태흡 (대은)

일본유학 중 맞은 관동대지진 때의 경험으로 한때 반일 성향을 드러내기도 했으나 19358불교시보를 창간하면서부터 노골적으로 일본을 찬양하는 친일파로 전락해 갔다.

 

3·1운동에 참가하여 징역형을 받기도 한 허영호

신불교지의 편집 겸 발행인이 되면서부터 황실의 번영을 축함이라는 등의 친일 시사문을 발표했고 1941년 새로 출범한 조선불교 조계종의 종정사서가 됨으로써 본격적인 친일파로 전락했다.

 

박윤진 (대우)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대정대학에서 유학했다. 일본 유학 시절 조선불교청년총동맹 위원장을 역임했고 귀국 후에는 황군위문단의 단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중인 일본군을 위문하기도 했다. 중앙불교전문학교의 교수 등을 지내면서 친일 시국 강연을 행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언론에 공개된 불교계 친일 인사는 박윤진을 포함하여 모두 6명밖에 되지 않는다. 31본사 주지를 역임한 승려와 중앙교무원 그리고 불교시보등의 언론 매체를 통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일제에 협력한 인사들은 친일 인사로 분류되어야 한다.

지족암 주지, <친일불교론>저자< © 현대불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