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국민의 의무는 재미다.

미당의 친일 시 ‘마쓰이 오장(伍長)’, 서정주 (徐廷柱)

草霧 2013. 11. 29. 11:18

 

 

 

문학

 

서정주 (徐廷柱,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 1915~2000)

        

 

 

미당의 친일 시와 해방 이후의 활동

   

 

 

 

 

전라북도 부안 줄포보통학교 졸업

경성 중앙고등보통학교 수료

전라북도 고창고등보통학교 중퇴

경성 중앙불교전문학교 중퇴

숙명여자대학교 명예 문학박사

1946 청문협 시분과 회장

1948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

1961 시집<신라초>5.16문예상 수상

1966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1977 한국문인협회 회장

1984 범세계한국인예술기회의 회장

2000 사망

화사집, (1941)

귀촉도, (1946)

시선, (1955)

신라초, (1960)

동천, (1968)

질마재 신화, (1975)

늙은 떠돌이의 시, (1993)

번역 시집 만해한용운한시선역, (예지각, 1983) : 한용운의 한시를 가려 뽑아 번역한 시집

 

서정주(徐廷柱, 1915년 5월 18일 ~ 2000년 12월 24일)는 토속적, 불교적 내용을 주제로 한 시를 많이 쓴 한국의 이른바 생명파 시인이다. 본관은 달성(達城)이며, 호는 미당(未堂), 궁발(窮髮)이다.

  • 1 생애
  • 2 논란과 의혹
  • 3 학력
  • 4 작품성
  • 5 시집
  • 6 일화
  • 7 기타
  • 8 주석
  • 9 참고 자료
  • 10 바깥 고리
  •  

     

    원적지는 전라북도 고창이다. 전라북도 고창에서 출생하였고 전라북도 부안에서 성장하였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주장이 있으나, 그의 아버지는 고등교육을 마친 지식인이었으며 따라서 미당도 상당히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으로 보여진다. 1933년 겨울, 개운사 대원암에서 영호당 박한영 스님 밑에서 수학했다. 1936년 경성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중퇴하고, 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1936년김광균·김동리·오장환 등과 함께 잡지 《시인부락》을 창간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전시 체제 때 다쓰시로 시즈오(達城靜雄)로 창씨개명을 하고 일제 강점기 말기에 태평양 전쟁을 찬양해 당시, 조선인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시와 글을 통해 친일 행위를 하였다. 훗날 그는 자서전에서 그의 친일 행위에 대해여 “일본이 그렇게 쉽게 질 줄 몰랐다.”라는 고백을 한 바 있다.[1]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었다. 2002년 공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도 들어 있으며, 당시 총 11편의 친일 작품명이 공개되었다.[2]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해방 후에는 당시 문학계를 풍미하던 좌익 계열의 문학적 흐름에 반대하여, 이른바 순수 문학의 기치를 내걸고 우익 성향의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여 좌익 계열의 조선문학가동맹과 대결하였다. 서라벌예술대학동국대학교 등에서 오랫동안 교수를 역임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고, 다수의 문학 단체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줄곧 한국 문학계에서 독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일제 강점기뿐만 아니라, 군부 독재와 유신독재 치하에서의 처신 등으로 시인으로서의 자질과 문학적 명성과는 별도로 그 역사적 평가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미당 시의 특징은 바로 우리말을 다루는 그의 천부적인 감각이다. 그의 고향 전라도의 사투리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미당의 시 언어는 민족어의 가능성을 한껏 키운 것으로 평가된다. 서정주는 말년에 기억력 감퇴를 막기 위해 아침마다 세계의 1,625개와 각 나라의 수도 이름을 외웠다고 한다. 시〈자화상〉에서 “자신을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다”라고 고백하였고, 이 구절은 그의 삶을 거론할 때 자주 인용된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는 유복한 성장기를 보냈다. 그의 시 중 하나인 <푸르른 날> (1968년 간행된 시집 <동천>에 수록됨)은 가수 송창식에 의하여 곡이 붙여져 노래로 불리기도 했다.

     

    친일행적

    서정주는 일제 말기, 일제에 대한 찬양과 황국신민화 정책의 선전에 그의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는데 열과 성을 다하였으며 목숨을 걸고 일제와 항쟁하며 고난찬 가시밭길 속에서 산화했던 여러 의사들과 열사, 지사들과는 달리, 개인의 영달과 출세를 위해 조국을 배신하고 민족을 파는 친일.매국행위를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는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을 위한 전쟁에 나가서 싸우다 죽는 것은 일본 천왕이 반도인에게 부여한 크나큰 영광이라고 참전을 강권하고, 일본군의 종군 기사를 쓰는 일을 무척이나 영광스럽게 생각했던 인물이란 비판을 받고 있다. 해방 이후, 민족반역자 처벌보다 그들을 비호하고 자신의 정치기반 확대에 이용코자 민족반역자들의 대부노릇을 한 이승만에 의하여 일제잔당 세력들은 민족반역행위에 대한 처벌대신 면죄부를 받음과 동시에 일제강점시 쌓아올린 지위와 재력을 이용, 더 높은 직책과 더 큰 명예와 더 많은 부를 얻게 되었음은 역사적 사실이며 미당 서정주 또한 그러한 부류중 하나로 반공을 국시로 했던 이승만정권과 유착, 남한문학계에서 그 지위를 공고히 하고 그를 기반으로 문하에 수많은 후배와 제자를 거느린 거목으로 자리 잡았다는 주장이 그의 문학적 성과 이면에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아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그의 친일행적에 대한 시비는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던 문제로 당시를 살아왔던 모든 지식인의 친일부역 또는 협조가 시대상황의 불가피성이란 항변에도 불구하고 자의건 타의건 앞장섰건 이용당했건 그 강도와 형태에 관계없이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며 그 죄과가 명확히 밝혀지고 본인들의 사죄와 가시적인 반성의 결과물로서 구체적 행동이 선행돼야 한다는 당위적 도덕적 주장과 시대상황이 부여한 선택의 한계와 생존이란 문제에 직면한 현실속 인간에게 있어 적용되는 보편적 불가피성이 참작되어야만 한다는 옹호론이 오늘날에도 모든 분야 모든 지식인들의 친일행적에 대한 비판에 있어 첨예한 대립구도를 형성하고 있으며 대상자의 친일행적이 진정 강요에 의한 절대불명의 상황속에서 이루어진 친일이었나 아니면 자신의 영달을 위한 자발적인 행위였나하는 평가에 대한 시각차가 논쟁의 핵심 쟁점으로 남아 있다. 미당은 1992년 월간 ‘시와 시학’에서 자신의 친일행적 시비와 관련, "국민총동원령의 강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일문학을 썼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민족앞에 정식으로 사죄하고 자신의 입장을 변론한 바 있다. 아래는 그의 말대로 자신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쓴 그의 '친일문학'작품중 일부 내용이다.

     

    친군부,정부 행적

     

     

    ▲ 친일 문학으로 분류되는 시편들. 모윤숙 노천명 서정주 김동환(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이 일제 말기에 발표한 작품들이다.

     

     

     

     

     

     

     

     

     

    서울 관악구 고택이 남아 있으나 폐가로 방치되어 있다. 2000년 12월 24일 사망했다. 향년 86세.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중 한명으로 탐미적인 경향이 보인다. 심지어 진보 문학가 중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미당의 영향을 받았는데, 고은이 대표적이다.

     

     

    미당 서정주의 동생 우하 서정태 시인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

     

    처음으로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잘 사는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
    1986년을 흑자원년으로 만드셨나니
    안으로는 한결 더 국방을 튼튼히 하시고
    밖으로는 외교와 교역의 순치를 온 세계에 넓히어
    이 나라의 국위를 모든 나라에 드날리셨나니
    이 나라 젊은이들의 체력을 길러서는
    86아세안 게임을 열어 일본도 이기게 하고
    또 88서울올림픽을 향해 늘 꾸준히 달리게 하시고
    우리 좋은 문화능력은 옛것이건 새것이건
    이 나라와 세계에 떨치게 하시어
    이 겨레와 인류의 박수를 받고 있나니
    이렇게 두루두루 나타나는 힘이여
    이 힘으로 남북대결에서 우리는 주도권을 가지고
    자유 민주 통일의 앞날을 믿게 되었고
    1986년 가을 남북을 두루 살리기 위한
    평화의 댐 건설을 발의하시어서는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육천만 동포의 지지를 받고 있나니
    이 나라가 통일하여 홍기할 발판을 이루시고
    쉬임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
    이 민족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서정주는 일제 말기, 일제에 대한 찬양과 황국신민화 정책의 선전에 그의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는데 열과 성을 다하였으며 목숨을 걸고 일제와 항쟁하며 고난찬 가시밭길 속에서 산화했던 여러 의사들과 열사, 지사들과는 달리, 개인의 영달과 출세를 위해 조국을 배신하고 민족을 파는 친일.매국행위를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는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을 위한 전쟁에 나가서 싸우다 죽는 것은 일본 천왕이 반도인에게 부여한 크나큰 영광이라 강권하고, 일본 군대를 따라 종군 기사를 쓰는 일을 무척이나 영광스럽게 생각했던 인물이란 비판을 받고 있다.

     

    해방 이후, 민족반역자 처벌보다 그들을 비호하고 자신의 정치기반 확대에 이용코자 민족반역자들의 대부노릇을 한 이승만에 의하여 일제잔당 세력들은 민족반역행위에 대한 처벌대신 면죄부를 받음과 동시에 일제강점시 닦은 지위와 재력을 이용, 더 높은 직책과 더 큰 명예와 더 많은 부를 얻게 되었음은 역사적 사실이며 미당 서정주 또한 그러한 부류중 하나로 반공을 국시로 했던 이승만정권과 유착, 남한문학계에서 그 지위를 공고히 하고 그를 기반으로 문하에 수많은 후배와 제자를 거느린 거목으로 자리 잡았다는 주장이 그의 문학적 성과 이면에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아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그의 친일행적에 대한 시비는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던 문제로 당시를 살아왔던 모든 지식인의 친일부역 또는 협조가 시대상황의 불가피성이란 항변에도 불구하고 자의건 타의건 앞장섰건 이용당했건 그 강도와 형태에 관계없이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며 그 죄과가 명확히 밝혀지고 본인들의 사죄와 가시적인 반성의 결과물로서의 구체적 행동이 선행되야 한다는 당위적 도덕적 주장과 시대상황이 부여한 선택의 한계와 생존이란 문제에 직면한 현실속 인간에게 있어 적용되는 보편적 불가피성이 참작되어야만 한다는 옹호론이 오늘날 에도 모든 분야 모든 지식인들의 친일행적에 대한 비판에 있어 첨예한 대립구조를 형성하고 있으며 대상자의 친일행적이 진정 강요에의한 절대불명의 상황속에서 이루어진 친일이었나 아니면 자신의 영달을 위한 자발적인 행위였나하는 평가에 대한 시각차가 논쟁의 핵심 쟁점으로 남아 있다.

     

    미당은 1992년 월간 ‘시와 시학’에 서 자신의 친일행적 시비와 관련, “국민총동원령의 강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일문학을 썼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민족앞에 정식으로 사죄하고 자신의 입장을 변론한 바 있다. 아래는 그의 말대로 자신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쓴 그의 '친일문학'작품중 일부 내용이다.

     

    일장기 앞에서
    이날은 대성전기념일도 축제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받은 깃대에 국기를 한번 꽂아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오히려 땀까지 흘려가며 벽장 속에서 국기를 꺼내어 그 깃대에 매었다. 탄탄한 깃대에 비해서는 벌써 장만한지 해가 겹친 국기의 깃폭은 낡아 보였다. 나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왜 뒷집에서 깃대를 주려고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 나는 거기에 맞추어야 할 새 로운 깃폭을 준비할 생각은 하지 못하였던 것인가. 나는 깃대에 꽂힌 국기를 방 아랫목에 세워두고 한참동안 합장을 하고 있었다.

     

     

     

     

     

     

    1945년 대한민국과 프랑스는 해방·광복(liberation)의 기쁨 속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게 됐다. 프랑스의 ‘철저한 과거 청산’이 하나의 모범으로 종종 우리에게 제시됐다. 역사적 배경이 다른 사례를 우리에게 적용하는 것도 문제지만 프랑스의 과거 청산 과정 자체에도 많은 문제점이 있다.

     

    사법부·경찰 내부의 수많은 나치스 협력자들이 현직에서 살아남았다. 모리스 파퐁(1910~2007)은 나치스 협력 전력에도 불구하고 예산부 장관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샤를 드골은 파퐁의 과거 전력을 알고 있었으나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에 대처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는 증언이 있다.

     

    문학·지성계의 과거 청산에도 굴곡이 있었다. 종신형을 받은 대문호 찰스 모라스(1868~1952)의 경우, 아카데미프랑세즈는 그의 자리를 공석으로 두고 후임을 그의 사망까지 선출하지 않았다. 프랑스 문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문체를 구사한 루이페르디낭 셀린(1894~1961)은 망명·사면 후 귀국했다. 작가·언론인인 뤼시앙 르바테(1903~1972)는 사형에서 강제노동으로 감형되고 1952년 석방돼 53년부터는 언론인 생활을 재개했다. 이들을 뺀 프랑스 지성·문학사를 쓸 수 없기에 이들의 공과(功過)는 별도로 평가된다.

     

    우리 논란의 중심에는 미당 서정주(1915~2000)가 있다. 그는 20세기 한국 최고 시인이다. 미당은 1941년 『화사집(花蛇集)』(사진)으로 악마적 관능의 세계를 파고든 ‘한국의 보들레르’라는 평가를 받았다. 미당은 노장철학·유교·불교·토속신앙을 넘나들며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뽐냈다.

     

    그러나 많은 이는 그를 생명파 시인이 아니라 친일파 시인으로 기억한다. 1930년 광주학생운동 1주년 기념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퇴학당했던 미당은 전향해 11편의 친일작품을 남겼다. 미당의 시는 교과서에서 삭제됐다. 그의 이름은 8일에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으며, 최근 그의 사진이 동국대 2010학년도 대학원생 모집광고에 사용된 것도 도마에 올랐다.

     

    미당이 남긴 공과의 냉정한 평가가 시작됐다. 전북 고창군에 있는 미당시문학관에는 11편에 달하는 미당의 친일 작품 중 일부가 전시되고 있다. 판단을 독자에게 맡기는 것이다. 12월 23일에는 미당기념사업회가 발족된다.

     

    미당은 고은 등 수많은 진보 시인·문학가의 스승이다. 친일문학작품 목록을 발표한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을 지낸 민중시인 신경림은 미당이 “친일의 흠결을 덮고도 남을 만큼 좋은 시를 남겼다”고 최근 평가했다.

     

    친일인명사전은 편파성 등 많은 논란을 낳았다. 개정판엔 민주적으로 진행되는 사회적 토론의 결과가 반영돼야 할 것이다. 일각에선 ‘좌익인물사전’의 편찬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이 모든 과정에 광복이 안겨다 준 자유·민주주의와 더불어 폭력의 배제, 사실에 입각한 평가가 엄격히 적용돼야 할 것이다.

     

     

     

    서정주의 마쓰이 오장(伍長)’은 죽지 않았다

    친일시인 미당 서정주의 송정오장(松井伍長) 송가(頌歌)’로 세간에 알려진 마쓰이(松井) 오장(伍長)’.

     

    그는 일제 말기 조선인 가미카제 청년의 일본식 이름입니다. 그의 계급 오장(伍長)’은 우리말로 하면 줄반장입니다.

     

    과거에 학급에서는 분단장, 군에서는 하사를 이렇게 불렀습니다. 일제 때 중사는 군조(軍曹)’, 상사는 '조장(曹長)'이라고 불렀죠.

     

    마쓰이 오장의 본명은 인재웅(印在雄), 창씨개명한 이름은 마쓰이 히데오(松井秀雄)입니다.

     

    1924년 개성에서 출생한 그는 당시 서울 서대문구 수색동에 있던 공업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비행사가 되기 위해 소년 비행병 제13기로 입대하였습니다.

        

    그 후 특공대원으로 선발돼 야스쿠니(靖國)부대 소속 오장(하사관)으로 복무 중 19441129일 필리핀 네그로스섬 시라이 기지에서 출격하여 레이테만()에서 미국 군함에 돌진한 후 전사하였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꽃다운 20세였으며, 전사 후 그는 2계급 특진하여 일본군 의 소위가 되었습니다.

     

    마쓰이 오장(본명 인재웅)

     

    마쓰이 오장은 조선인 출신 특공돌격대원(가미카제) 가운데 첫 전사자였습니다. 그의 전사 소식이 알려지자 <매일신보> 등 조선총독부 기관지를 비롯해 친일잡지들은 그를 군신(軍神)’으로 추앙하며 그의 애국충혼을 선전하는 데 열을 올렸습니다.

     

    첫 주자는 대표적 여류 친일시인 노천명. 노천명은 그해 12월호 <매일신보 사진판>군신송(軍神頌)’이라는 시를 통해 그를 군신(軍神)’으로 추앙했습니다.

     

    이에 앞서 <매일신보> 126일자에 실린 신익(神翼)-송정오장 영전에에서는 그의 죽음을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靑磁(청자)빛 하늘가에

    보이지 않는 神翼(신익) 소리를 들으며

    이천만 동포의 피가 沸騰(비등)한다

     

    우리 지금 물끓 듯 감격함은

    松井伍長(송정오장)()하고 ()한 죽음이어라

    1129!

    우리 松井伍長(송정오장)

    거룩한 죽음을 □□한 이날

    해와 달이 무심했으랴

     

    레이테()□□()

    魚雷(어뢰)를 안고

    몸소 艦艇(함정)에 부딪쳐

    그대 □□처럼 떨어지다

    ― □□□□□□

    그 용감한 ()□□

    조선의 청소년들아 뒤를 잇자...

     

    소위 가미카제(神風)’으로 불린 이들은 일제가 미국의 군함에 육탄 돌격으로 맞선 자살공격부대를 일컫습니다. 일설에는 출격하는 그들에게 귀환용 휘발유를 아예 공급하지 않아 백이면 백 모두 죽음을 강요당했다고도 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마쓰이 오장처럼 일본식 이름을 단 조선인 청년들도 더러 포함돼 있었는데 그들은 출격에 앞서 마지막으로 덴노 헤이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를 외쳤다고 합니다.

     

    나라가 망한 백성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은 단순히 폭력과 차별만이 아닙니다. 앞날이 창창한 청춘들이 채 피어보지도 못한 채 전장에서 총알받이가 되거나 아니면 마쓰이 오장처럼 이역만리 바다에 수장돼 고혼(孤魂)으로 떠돌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두고 노천명은 마치 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몸을 불사른 충혼이라도 되는 양 물끓 듯 감격’ ‘()하고 ()한 죽음운운하고 있습니다. 민족혼을 상실한 친일시인의 모습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노천명의 시가 실린 지 3일 뒤인 129일자 <매일신보>에는 한국 현대시의 최고봉으로 불리는 미당 서정주의 마쓰이 오장 찬양시가 실렸습니다. 제목은 송정오장(松井伍長) 송가(頌歌)’. 먼저 미당의 시 일부를 소개하겠습니다.

        

     

    '마쓰이 오장'의 생환 소식을 보도한 <서울신문> 기사 (1946. 1. 10)

     

    마쓰이 오장은 우리의 자랑이요, 그의 죽음은 장하다고 노래했군요.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깨뜨린그의 죽음으로 인해 조선의 땅은 향기로운 삼천리 강산이 되었으며, 조선의 하늘은 한결 더 짙푸르른 하늘이 되었다며 그 감격을 주체하질 못하고 있습니다. 노천명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아 보입니다. 생전에 한국 문단의 대표적 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불린 서정주의 실체는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1915~2000)에 문학사적, 역사적 평가는 다양하며 때론 극단으로 치닫기도 합니다. 우리 문화의 토속적 서정성을 가장 잘 승화시킨 천재시인이라는 극찬이 그 하나라면, 일제하에서는 친일, 독재 권력자 앞에서는 교언영색으로 일관한 대세순응주의자라는 혹평도 없지 않습니다. 이같은 극단적 평가는 전부 그의 삶에서 비롯한 것으로, 후자와 같은 혹평도 그가 남긴 작품들을 살펴보면 결코 과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일전에 해방 직후의 <서울신문> 기사를 하나 확인하기 위해 <서울신문> 자료실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리더기에 마이크로필름을 걸어 기사를 검색하던 중 저는 뜻밖에 놀라운 기사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옛날 신문을 보다가 더러 이런 경험을 하기도 하지만 이 기사는 너무도 놀랍고 충격적이어서 제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론을 앞세우면 노천명과 서정주가 군신으로 추앙하며 온갖 요설을 늘어놨던 그 마쓰이 오장이 죽지 않고 해방 후에 살아서 귀환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문제의 기사는 해방 이듬해인 1946110일자 <서울신문>에 실린 송정오장(松井伍長) 생환(生還)”이라는 2단짜리 기사였는데, 이 기사에는 마쓰이 오장의 사진과 그의 부모 인터뷰도 실려 있었습니다. 차마 믿기 어려운 이 기사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작년(재작년/필자) 1124(29/필자) 소위 특별공격대원으로서 전사하였다는 송정오장(松井伍長=본명 印任雄, 23) (‘印任雄印在雄의 오기임/필자)이 생존하여 방금 인천 월미도에 머무르고 있는데 금 10일 아침 미국 포로수송선으로 수송되어 인천에 상륙하게 되었다. 버젓이 살아 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허위보도 하여 세인의 이목을 속인 것만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제국주의 일본의 천박한 선전정책이 얼마나 가증한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동 군의 양친은 반가운 아들을 만나고자 방금 인천 율목동 34번지에 체류하고 있는데 부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사하였다는 통지가 와서 장례까지 지냈는데 일본 육군성에서 채권으로 35백원을 보내고 기타 향전(부의금/필자)으로 약 2만원이 모여서 정말 죽은 줄 알았더니 하와이에서 포로가 되어 미국 군함을 타고 인천에 입항한다는 소식이 있어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사진은 송정오장)”

     

    레이테만에서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몸뚱이로 내리쳐 깨뜨리고는 장렬하게 전사했다던 사람이 살아 돌아왔다니, 대체 이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결과적으로 보면, 마쓰이 오장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고, 미군의 포로가 됐다가 일제 패망과 함께 고향땅으로 살아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실지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인데, 세상에는 그런 일이 더러 있기도 하지요. 전쟁터에 끌려가 죽은 줄 알았던 아들(혹은 남편)이 몇 년 뒤에 살아서 돌아왔다는 설화(說話) 같은 얘기 말입니다. 그런데 마쓰이 오장은 설화가 아닌 실화(實話)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필리핀 레이테만에서 적함에 부딪혀 전사한 마쓰이 오장은 며칠 뒤 전사통지서와 함께 유품이나 유골도 없는 빈 상자로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당시 시국상황으로 볼 때 대놓고는 못했겠지만 그의 가족들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서 함께 오열했을 것입니다. 갓 스물의 아들이 시신조차 찾을 길 없이 이역의 망망대해에서 고기밥이 되었을 것을 생각하면 나라고 뭐고 할 것 없이 눈물과 통곡이 먼저 터져 나왔을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런 죽음은 비단 마쓰이 오장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친일잡지 <신시대> 194412월호 등에 실린 '마쓰이 오장' 찬양글들

        

    그러나 일제 군국주의 세력과 이에 빌붙은 친일세력들은 그의 죽음을 미화하고 선전하는 데 급급했습니다. 당시 발행된 친일잡지 <신시대> 12월호에 따르면, 개성이 있던 마쓰이 오장 집 근처에는 신취송정가(神鷲松井家) 남쪽 50미터’ ‘신취송정가(神鷲松井家) 입구등과 같은 팻말이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집을 찾았다는 얘깁니다. 또 앞의 <서울신문> 기사에 따르면, 그의 장례식 때 일본 육군성에서 채권으로 35백원을 보내고 또 부의금으로 2만원이 모였다고 하니 당시로선 대단한 장례식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마쓰이 오장의 전사는 결국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의 전사가 일제의 조작에서 비롯한 것인지, 아니면 일제조차도 그가 귀환할 때까지는 죽은 걸로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가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옴으로써 적어도 세 사람 (* 춘원 이광수도 <신시대> 12월호에 신병(神兵) 송정오장(松井伍長)을 노래함이라는 시를 실음)에게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줬습니다. 죽지도 않은 사람을 죽었다고 하고, '군신(軍神)' ‘신익(神翼)’ ‘거룩한 죽음운운하며 온갖 요설(妖說)을 늘어놓았기 때문입니다. 마쓰이 오장 신화에는 이제 거짓의 역사까지 보태져야 할 것입니다.

     

     

    : <항공일에>(1943) <헌시(獻詩)>(1943) <보도행>(1943) <오장 마쓰이 송가>(1944) <무제>(1944)

    단편소설 : <최체부의 군속 지망>(1943)

    수필 :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1943) <인보(隣保)의 정신>(1943) <스무 살 된 벗에게>(1943)

    평론 : <시의 이야기-주로 국민 시가에 대하여>(1942)

    르포 : <경성사단 대연습 종군기>(1943.춘추)

     

     

    미당의 친일 문학

    미당 서정주는 한국 최대 최고의 시인이다. 시인 고은(高銀)이 아직 미당의 시 그늘에 푹 파뭋혀 있을 때 그를 가리켜서 말한 '그는 또 하나의 정부(政府)'라는 수식어가 크게 과장된 말이 아닐 정도로, 미당의 시인된 이력과 그의 작품은 이미 하나의 '고전'이자 살아 있는 '문학사'가 된 지 오래다.

     

    그러나 그의 시 <국화 옆에서>는 줄줄 외면서도,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팔 할이 바람'이라는 <자화상>의 첫 구절은 곧잘 인용하면서도, 그가 일제 말기에 그 눈부신 시적 재능을 일제에 대한 찬양과 황국신민화 정책의 선전에 기꺼이 쏟아부었던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또한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을 위한 전쟁에 나가서 싸우다 죽을 것을 강권하고, 일본 군대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종군기사를 썼던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더러 있었다고 해도, 해방 이후에 일제 잔재 청산 작업이 한 번도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고, 또 미당이 지금 누리고 있는 문단적 지위와 업적의 광휘, 그리고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수많은 후배와 제자들의 엄호에 가리어 미처 제대로 드러날 기회가 없었다.

     

     

     

    서정주의 <오장(伍長) 마쓰이 송가(頌歌)>부분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伍長)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귀국대원

     

    귀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에게로 왔느니

    우리 숨 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느니...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벌이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아아 레이테만은 어데런가

    멫 천 길의 바다런가 ...

     

     

     

    이 시는 미당이 194412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발표한 그의 대표적인 친일시다. 이른바 '자살 특공대'로 알려진 ---일제는 그것에다가 옥쇄(玉碎:공명, 충절을 위해 깨끗이 죽음) 라는 이름을 붙여 미화했지만---무모하기 짝이 없는 자살 놀음을 숭고한 애국행위로 한껏 찬양하고 있는 시다.

     

    미당은 1933년 시<그 어머니의 부탁>[동아일보]에 발표하면서 시인의 길에 들어섰다. 다 알다시피 그는 등단 초기에 <자화상><화사><문둥이>같은 개성 있는 시들을 발표해 문단 일각의 주목을 받기도 하고, 동인지 '시인부락' {동인으로 김동리(金東里), 김달진(金達鎭), 오장환(吳章煥) 등이 참가}을 주재하는 등 비교적 활발한 시단 활동을 펼치게 된다.

     

    그러던 그가 친일 문학 작품을 쓰기 시작하는 것은 19427월 평론 [시의 이야기-주로 국민 시가에 대하여]'다츠시로 시즈오'이라는 창씨 명으로 [매일신보]에 발표하게 되면서 부터이다.

     

    그는 최재서(崔載瑞)의 주선으로 '인문사'에 입사해 친일 어용 문학지인 [국민문학][국민시가]의 편집 일을 맡게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친일 작품들을 양산하기 시작한다. 1942년부터 1944년 사이에 그가 집중적으로 발표한 친일 작품의 목록을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시의 이야기-국민 시가에 대하여(1942,평론)><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1943,평론)><인보(隣保)의 정신(1943,수필)><스무 살 된 벗에게(1943,수필)><항공일에 (1943,일본어시)><최체부의 군속 지망(1943,소설)><헌시(獻詩1943,)><보도행(1943,수필)><무제(1944,)><오장 마쓰이 송가(1944,)> , 미당의 당시 문단 지위나 연배로 보아 이것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상당히 많은 양이다.

     

    이 가운데 수필인<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스무 살 된 벗에게>, 그리고 단편 소설인 <최체부의 군속 지망>, <헌시>등은 학병 지원을 권유하거나 징병의 정당화 내지는 신성화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친일 작품들이고, 그 외의 작품들도 대개 일제의 군국주의 파시즘의 정책에 동조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거나 태평양전쟁을 일본인들의 표현대로 성전(聖戰)으로 미화한 작품들이다.

     

    미당은 또 19431018일부터 엿새 동안 일본군 경성사단이 김제 평야에서 벌이는 추계 훈련에 평론가 최재서, 일본인 히라누마 등과 함께 종군해 그 훈련 참관기를 쓴 [보도행]이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훈련 마지막 날, 이 훈련을 견학하기 위해 나온 (입영을 앞둔) 조선의 스무 살짜리 청년 수십 명과 미당 일행이 벌이는 수작은 차라리 서글픈 심정이 들 만큼 한심한 장면이다. 특히 미당의 몇 가지 미덕 가운데 그래도 높이 사주고 싶은, 우리 토박이말을 빼어난 시어(詩語)로 빚어 내는 그 재주를 떠올리면 그 서글픔은 더욱 배가된다.

     

    최재서 씨가 먼저 우리들의 신분을 간단히 소개한 후에

    "이 중에 국어(일본어를 가리킴)를 모르는 이는 없겠지요?"

    하고 동석한 교관에게 물으니

     

    "없습니다."

    하는 교관의 대답이 떨어지기 전부터 그들은 연방 빙글빙글 합니다.

     

    지금 세상에 국어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하는 눈치입니다.

    "그래, 명년에는 여러분이 모두 다 병 대로서 입영을 하게 되는데 그 감상이나 희망을 말해 주시오 병정이 될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어떤지?"

     

    최씨가 이번엔 그들을 향해 물으니, 그 중에 한 소년은 참으로 유창한 국어로써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열다섯 살 때부터 용산의 어느 내지인 상점에서 일을 보고 있다가 금년 봄에사 고향으로 왔습니다. 용산에 내 일터가 있던 관계로 나는 늘 병정들이 오고가는 것을 보고는 참 씩씩하다,나도 한 번 저렇게 되어 봤으면 쓰겠다 하고 늘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러던 만큼 우리도 군인이 된다는 기별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너무 기뻐서 뛰었습니다. 지금의 감상은......감상은, 그저 하루라도 빨리 입영해서 나라를 위해 한몸을 바치고 싶은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 이것은 결코 제 문장이 아닙니다. 소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안정되어 있는 어조와 능란한 국어에는 뭐라고 한마디 물으려 했던 나 자신이 주저될 정도였습니다.

     

     {서정주'보도행','조광',1943,12월호(여기서는 실천문학사의 <친일문학작품선집>2에서 재인용함}

     

     

     

    이승만의 전기를 쓰다

    해방이 되자 미당은 문단에도 몰아닥친 이념과 정치적 선택의 기로에서 주저 없이 우익 쪽을 선택해 그것도 이승만 노선에 충실한 쪽으로 선회한다. 이미 해방 직후부터 활발한 조직 활동과 문예 운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던 좌익쪽에 비해 여러 가지로 열세에 놓여 있던 우익 문학 진영은, 그에 맞서기 위해 19464월 조직적 투쟁의 전위 부대로 '조선청년문학가협회(이하 청문협)'를 결성한다.

     

    미당은 이 조직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시분과 회장을 맡게 된다.'청문협'의 강연 중에 한 구절을 보면 '일체의 공식적 예속적 경향을 배격하고 진정한 문학 정신을 옹호함'이란 대목이 있지만, 실제로 이 무렵 '청문협'에 소속된 문인들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우익 진영의 각종 정치 단체와 사회단체, 문화 기구와 청년 단체들에 기반을 두고 활발한 정치 공작을 하고 있었다.

     

    '청문협'은 어떤 단체였는가. 그 간부 중의 한 사람이었던 곽종원 (郭鐘元)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청문협'은 발족한 지 불과 3년 반여 만에 발전적인 해산을 하고 말았지마는, 그 첫 출발부터 해산하는 그날까지, 순전히 투쟁 단체로 지속되고 있었다.

     

     

     

    공산주의 이론을 분쇄하고, 또 공산주의 문학 이론을 타도하는가 하면, 저들의 문학 단체를 격파하는 데 또한 과감했던 것이다. 지금 새삼스럽게 감개무량함을 느낄 따름이다.(<조선청년문학가협회>.[해방문학 20],145).

     

     

     

    미당은 이 '청문협'의 시분과 회장을 맞고 있다가 정부 수립과 함께, 이 단체가 확대 재편된 '한국 문학가 협회(1948)'에서도 시가 분과 위원장을 맡는다. 그가 이승만의 전기 집필을 담당하게 되는 것도 이러한 정치적 행보와 결코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미당은 1946년 최재서와 함께 부산의 '남조선대학교(지금의 동아대학교 전신)'에 강사로 내려가 있다가, 이듬해 [민중일보]사장이자 이승만 박사 기념 사업회 회장이던 윤보선의 주선으로 이승만의 전기 집필을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에 올라온다.

     

    당신 [민중일보]는 그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했던 김동리의 회고를 빌자면, 자신들 스스로 '돈암장 신문'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이승만 개인의 선전과 그를 위한 여론 형성의 창구 역할을 했던 신문 이었다 (돈암장은 당시 이승만이 묵고 있던 저택).

     

    당시 국내에서 활약하던 어느 정치가보다도 조직이나 정치적 배경에서 열세에 놓여 있던 이승만과 그의 추종 세력으로서는 이승만의 영향력을 더 널리 대중적으로 확산시킬 필요가 있었고, 전기 집필도 그런 작업의 일환이었음은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미당은 나중에 이때의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러나 그(이승만)와의 반해쯤의 접촉은 내게는 은근히 큰 힘이 되었다. 늘 짓눌리면서도 끈질기게 뚫고 나온 민족혼의 상징을 그에게서 가까이 느끼고, 일정 말기 한때의 엉터리였던 내 오판을 대조해 보고, 다시 살 미련과 용기를 내 속에 일으키는 데에 아주 큰 힘이 되었다. (서정주 문학전집 3,264).

     

     

     

    당초 [민중일보]에 연재하기로 했던 이 전기는 우여곡절 끝에 194910'삼팔사 (三八社)'에서 <이승만 박사전>이라는 제목의 전작으로 출간된다. 그런데 꼬박 2년의 공력을 들인 이 전기는 출간되자마자 이승만의 지시로 발매 금지 처분을 당한다.

     

    그 이유는, 책 속에 등장하는 이승만 집안의 어른들에게 경칭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사실 여부는 제쳐놓고라도, 이미 이 무렵에는 정부가 수립되어 확고한 정권을 쥐게 된 이승만으로서는, 그런 하찮은 이유 때문에 발매 금지 처분을 내릴 정도로 전기 출간이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었을 것이다.

     

    이 노회한 정치가를 향한 미당의 짝사랑은 그렇게 무너져 내린 셈인데, 이쯤 되면 정치가와의 신의나 관계를 심각하게 다시 생각해 볼 법도 한 일이건만, 미당은 그렇지를 못했다.

     

    특히 그가 5공화국 때 보여 준 여러 행적은 그를 따르던 문인들조차 등을 돌리게 만들 만큼 어설픈 것이었다. 정치가나 권력자에 대한 그의 친여성(親與性)은 딱히 시인된 천품으로서의 천진난만함으로 설명하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너무 많은 것이다.

     

    미당은 자신이 선택한 정치적 행보에 힘입어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문교부 예술과장 자리에 앉게 된다.

       

     

     

     

     

    민중 문학을 향한 비난과 매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미당은 문총 구국대 결성에 앞장서서 후방의 선무 활동에 박차를 가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예술원 회원,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한국문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관변 문화단체의 중핵 역할을 맡아 이른바 '순수문학'의 성곽을 철옹성처럼 지키는 역할에 주저함 없이 나선다.

     

    미당이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조선 백자니 학이니 구름이니 꽃을 벗 삼을 때는 그의 시적 미덕이 그런대로 지켜지지만, 이미 일제 말에 경험했던 그 정세에 대한 오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현실 문제에 달려들기만 하면 그는 거의 예외 없이 잘못을 저지른다.

     

    그리고 그는 문학가는 현실에 초연해 '영원성'을 지향해야 한다고 늘 강조하면서도, 민감한 문제가 있으면 언제나 정권의 편에 서서 충실히 그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어서, '영원성'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하게 만든다. 이런 일이 가장 극심하게 나타났던 경우가 바로 1980년대였다.

     

    1980년대는 그 초입에 '광주민중항쟁'이 있었고, 그 피어린 민중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18년간의 지긋지긋한 박정희 군사 독재에 이어 또다시 전두환 군부 독재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작가와 예술가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이러한 불의의 현실에 맞서 싸웠다.

     

    그 치열한 문학 운동이 이른바 '민중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세간에 퍼지게 되었던 것인데, 미당은 그 '민중 문학'의 영향력이 가장 강하게 대두되던 1986년에 [문학정신]이란 잡지를 만들어 그 발행인이 된다. 이 잡지가 창간된 자세한 배경과 연유는 알 길이 없으나, 당시 큰 힘을 지니고 뻗어나가던 민중 문학의 기세에 맞서 보수 우익 진영의 목소리를 회복하려는 일단의 시도임은 창간호부터 확연히 드러난다.

     

    [문학정신]은 그 창간호에 '문학자 50인의 목소리'라 하여 민중 문학을 일제히 비판하는 글을 특집으로 싣는가 하면, 이 잡지가 1989년 발행인이 바뀌고 잡지의 편집진과 그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기 전까지 줄곧 미당이 도맡아 쓰던 그 '권두언'속에서 민중 문학에 대한 형언키 어려운 비난과 험담을 늘어놓게 된다. 그 몇 구절을 옮겨 보자.

     

     

     

    민족이나 인류의 역사 진행 속에서 한 사람의 문학자가 어떤 사관(史觀)을 가지고 작품을 쓰고 비평을 해가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특히 오늘날의 우리 한국 문단의 현상 속에서는 중요한 일로만 보인다....사관의 유형가운데서 아무래도 재고삼고(再考三考)를 요하는 문젯거리는 그 사회혁명파적 사관이라고 보이는데, 이것이 점점 더 파급되어 그 수를 늘여갈 경우에 올 하기(下記)의 두 가지 효과에 대해 나는 문학 외적인 입장에서까지도 심한 우려를 여기 표명해 두지 않을 수 없다.

     

    그 두 가지 염려되는 효과의 첫째는 아직도 철이 덜 든 학생들이나 공장 근로자의 군중 심리를 선동하여 '민주 민족 민중은 아시안 게임도 망국 아시안 게임이라고 몰고 우방 미국까지도 따돌리고...때려 부수자. 돌이다.

     

    화염병이다. 막 던져라!'의 파괴의 편이 되어, 유사이래의 새 발전의 여러 계기들이 눈앞에 마련되어 와 있는 민족사적 호운(好運)의 이 시점을 위태롭게까지 하는 데 일조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그것이요, 그 둘째는 (이것이 더 큰 염려이지만) 그런 일조의 힘이라는 게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북한 김일성 일파의 한반도 적화 통일 야욕을 고무하여 제26.25의 참변을 이 민족에 다시 가져 오는 촉진제가 되면 어찌 하겠느냐 하는 것이 그것이다([문학자의 사관],[문학정신], 창간호, 권두언).

     

    먼저 문학인의 입장에서보다도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의 정치적 입장에서 근년 우리나라 문단 일각에서 문제되어 오고 있는 그 민중 문학이란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나 같은 연배의 사람의 사적 식견(史的 識見)으로는 이 민중이란 말은 말하자면 사회주의적 무산 계급 혁명을 이 나라에서 달성하여 공산주의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던 말로 알고 있는데 근년 우리나라 문단 일각에서 써오고 있는 이 말의 뜻이 그것과 다른 것이라면 여기에 대한 해명은 반드시 진실하고 구체적으로 있어야 할 것으로 안다.

     

    만일에 이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면 38선 이북에 김일성의 공산주의 체제의 딴전을 두고 있는 우리 자유 민주주의 국민들로서는 더 이상 좌시만 하고 있기는 불가능한 일이니 말이다([민중 문학 재고],[문학정신],19871월호, 권두언).

     

     

     

     

    위의 권두언의 내용은 시인의 말이라기보다는 공안 당국의 서슬 퍼른 검사의 엄포와 같은 인상을 풍긴다.

     

    '6월 항쟁'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우리 현대사 민주화 운동의 한 페이지를 찬란하게 수놓은 바 있는 1987년 초여름의 그 시점에, 한국문인협회는 전두환의 '4,13호헌조치'가 위대한 구국의 결단이라고 지지하는 성명을 내서 그 관제 어용 단체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어 양식 있는 국민들의 분노를 산바 있지만, 바로 그 초여름의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온 나라가 독재 정권의 음모에 저항해 싸울 때, 이 노시인은 다음과 같이 준엄하게 그것을 꾸짖고 있었다.

     

    우리 겨레의 이 역사적 현시점에서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노력해야 할 일은 각자 자기가 해온 전공의 일들을 각자가 놓인 그 자리에서 성실히 침묵 속에 꾸준히 이행하여 이 결과의 합계로서 이 민족의 흥융(興隆)을 가져오게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일은 접어 두고 전연 불필요한 자유 과잉의 풍조 속에 정권 탈취의 야망의 발산만 음으로 양으로 온갖 꾀와 폭력까지 다하여 전개하고 있는 식자라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으니 웃고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거슬리는 꼴이 아닐 수 없다.

     

     

     

     

     

    '이 사람들 속셈은 베트남의 말로와 같이 이 나라를 새빨갛게 하려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도 안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말씀이 아니라 누구나 이목구비와 건전한 마음 가진 사람은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뚜렷한 사실로, 우리나라는 지금 유사 이래 처음으로 세계 경제 속의 흑자 생산 제2연도를 통과하고 있고, 또 여러모로 일대 약진의 계기가 될 게 분명한 세계 올림픽 개최 1년 전의 바쁜 준비기에 처해 있다.

     

    전 국민의 획기적인 합심 노력만이 요청되는 이 중차대한 역사적인 시점에서 왜 무슨 바람으로 등 돌리고 뒤돌아서서 딴전을 보며 힐난과 불화 조성과 혼란과 파괴만 일삼고 있는지 참으로 이해해 줄 수 없는 일이다.

     

    문학자들이란 특히 민족과 인류의 사회 현상 속에 간절하게 살면서도 그것들이 주는 의미와 느낌을 선택하고 또 선택하여 여기 역사적 영원성의 가치까지를 부여해야 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라야 하는 것인데, 정말 신중해야 될 줄로 안다([문학자의 사관],[문학정신], 19877월호, 권두언).

     

     

     

    이 글에서, 저 일제 말기에, 천황폐하의 황은을 배신하고 대동아공영의 위업에 찬물을 끼얹으며, 조선 독립과 같은 가당찮은 꿈이나 꾼다고 동족을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매도하던 친일 인사의 논조와 목소리를 떠올리는 것이 필자 혼자만의 헛된 상상력의 발동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정말 신중해야 했던 것은 정작 그가 아니었을까.

     

     

     

     

     

    종천순일(從天順日)이라는 논리의 허구성

    미당은 다른 친일 문학자들과는 달리 자신의 친일 경력을 비교적 여러 차례에 걸쳐 밝혀온 바가 있다. 애써 감추고 숨기려는 친일 인사들이 훨씬 많은 사실에 견주어 그 솔직함만은 높이 사줄 만한 것이다.

     

    그는 1972년에 나온 <<서정주 문학전집>><부끄러운 이야기>에서 친일 경력을 밝혔으며, 19921월 잡지 [시와 시학]의 대담에서도 솔직히 털어 놓았고, 최근에는 [신동아] 19924월호에서 [일정 말기와 나의 친일시] 라는 글에서 당시에 시비가 일고 있던 그의 친일 경력을 또 한 번 시인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친일행위를 변명하기 위해 기묘한 상황론에 다가 죄 없는 조선 사람 전부를 공범(?)으로 옭아 넣어 얼토당토 않은 합리화를 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논리가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 자전적 담시집 <<팔 할이 바람>>속에 있는 <종천순일파?>라는 시에서다.

     

     

     

    그러나 이 무렵의 나를

    '친일파'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의가 있다.

    '친하다'는 것은

    사타구니와 사타구니가 서로 친하 듯하는

    뭐 그런 것도 있어야만 할 것인데

    내게는 그런 것은 전혀 없었으니 말씀이다.

    '부일파(附日派)'란 말도 있긴 하지만

    거기에도 나는 해당되지 않는 걸로 안다.

    일본에 바짝 다붙어 사는 걸로 이익을 노리자면

    끈적끈적 잘 다붙는 무얼 가졌어야 했을 것인데

    나는 내가 해준 일이 싼 월급을 받은 외에

    그런 끈끈한 걸로 다붙어 보려고 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때 그저 다만,

    좀 구식의 표현을 하자면----

    '이것은 하늘이 이 겨레에게 주는 팔자다'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익히며 살아가려 했던 것이니

    여기 적당한 말이려면

    '종천친일파(從天順日派)'같은 것이 괜찮을 듯하다.

    이때에 일본식으로 창씨개명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우리 다수 동포 속의 또 다수는

    아마도 나와 의견이 같으실 듯하다.

     

     

     

    친일하게 된 연유에 대해 '일본이 그렇게 쉽게 항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못가도 몇 백 년은 갈 줄 알았다'는 미당의 고백은 그 솔직함과, 또 솔직함 뒤에 놓인 그 우매함 덕에 이제 제법 많이 알려진 말이 되었다.

     

    그러나 이 말은 뒤집어 보면, 일제가 19458월에 패망하지 않았으면 그의 친일행위는 더 연장되었을 것이란 말과 똑같다.

     

    열 발짝을 양보해 그의 말을 다 받아들인다 해도, 그 일제 말의 참혹한 상황에서 설움을 곱씹으며 묵묵히 버텨낸 수많은 우리 민족의 선남선녀와, 징병 가라, 학병 지원해라, 당신 아들 지원병 보내라고 떠들고, 가미가제(특공대)의 자살 놀음을 숭고한 애국 행위로 본 받으라 소리 높여 노래하고, 혈서로 군속 지원을 하는 젊은이를 미화시키고, 일본 군대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종군 기사를 쓴 그가, 대체 어떻게 동일시 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 행위에 감히 '하늘 뜻에 따라(從天)'라는 변명이 붙을 수 있는가. 겉으로 드러난 말뜻의 꼬리를 잡아 시비를 따질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친일이 하늘 뜻에 따른 것이었다면 당시에 혹독한 탄압을 무릅쓰고 나라 안팎에서 항일 운동을 한 애국지사들은 '하늘 뜻을 거스른 사람'들이란 말인가.

     

    시대의 오욕을 참고 견뎌내는 일과, 자의든 타의든 불의의 압력에 굴복하는 일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친일행위에 대한 미당의 반성이 진정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일제의 존재가 불의인 줄 몰랐거나, 불의인 줄 알면서도 그 힘이 너무 강하고 오래 지속될 것 같아 굴복하고 말았던 사실, 그것 자체에 국한되었어야 한다.

     

    1980년대 중반에 미당이 민중 문학자들을 향해 그토록 강조했던 문학자가 지녀야 할 신중함과 글쓰기의 엄중함은, 거꾸로 그의 친일행위와 해방 이후에 그가 보여 준 체제 순응적이고 권력 지향적인 숱한 발언과 행적을 향한 경구(警句)가 되어야 도리에 옳을 것이다.

        

    미당은 여전히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대가급의 시인이며, 그애동시의 보유 숫자로도 으뜸가는 큰 시인이다. 이 점은 아무도 부인 할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의 언행과 정치적 행보는 그 큰 사랑에 견주면 실망스러운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물론 그의 친일과 해방 이후의 활동이 우리 시문학에 남긴 그의 큰 발자취와 성과를 완전히 부정하는 조건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의 영향력과 명성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과거의 잘못에 대한 용기있고 진실한 반성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이 글이 그의 진면목을 드러내 참된 미당의 시인됨을 밝히기에는 처음부터 '당랑거철(螳螂拒轍)'의 형국을 면하기 어려운 것이겠지만, 역사의 엄중함을 신뢰한다면, 그의 시와 시인됨이 온전히 하나로 묶여, 덜고 보탬이 없이 객관적으로 조명받을 때가 반드시 있으리라고 믿는다.

     

     

    당랑거철(螳螂拒轍)

    사마귀가 수레를 막는다는 말로, 자기분수를 모르고 상대가 되지 않는 사람이나 사물과 대적한다는 뜻.   

                                           

     

    미당 서정주는 1933년 시 그 어머니의 부탁동아일보에 발표하면서 시인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등단 초기에 자화상〉 〈화사〉 〈문둥이같은 개성 있는 시들을 발표해 문단 일각의 주목을 받기도 하고, 동인지 시인부락(동인으로 김동리, 김달진, 오창환 등이 참가)을 주재하는 등 비교적 활발한 시단 활동을 펼치게 된다.

     

     

     

     

     

    한수영 (문학평론가)

       

     

    친일 논란에도 한국 최고 시인

     

     

     

     

    서정주 [徐廷柱, 1915~ 2000]

    1915년 전북 고창 출생

    1935년 중앙 불교 전문학교 입학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으로 당선 / <시인부락> 편집인 겸 발행인

    1939년 만주 양곡주식회사 경리사원으로 입사

    1941년 동대문여학교 교사 부임

    1946년 동아대학교 전임강사

    1948년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입사 후 문화부장으로 전임 /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

    1951년 전주 전시연합대학 강사 겸 전주고등학교 교사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분과 위원장 역임

    1954~1960년 서라벌예술대학 교수

    1960년 동국대학교 교수

    1977년 한국문인협회장 취임

    1983년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1984년 범세계한국예술인회의 이사장 취임

    1955년 아세아자유문학상

    19615·16문학상 - <신라초>

    1966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80년 문화대상본상 개인상(중앙일보사)

     

    호는 미당(未堂궁발(窮髮). 시세계의 폭넓음과 깊이로 해서 한국 현대시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손꼽힌다. 시인부락파, 생명파(인생파) 시인. 시문학파와 주지파의 경향에 불만을 품고 인간의 고뇌, 인생의 구경(究境) 등을 다루어 현대시의 의미를 더욱 심화시켰다.

     

    1<화사집>(1941) 시대 : 19세기 프랑스 보들레르의 원생주의, 악마주의적 절규에 심취하여 원색적인 시풍으로 당시 문단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토속적 이미지에 의해 원초적 원색감이 시적 주조를 이루며, 깊은 죄의식으로 운명적 업고를 부르짖고 있다.

     

    2<귀촉도>(1948) 시대 : 악마주의적인 초기의 경향에서 벗어나 동양적 사상에 접근하여 영겁사상을 읊은 생명파 시인으로 정신적 안정을 얻은 새로운 터전을 잡았다.

     

    3<신라초>(1961) 시대 : 불교정신을 바탕으로 한 영원주의와 신적 정서를 노래했다. 그의 동양 정신은 노장의 철학과 유선 사상에서 온 것이다.

     

    4<동천>(1968) 시대 : 불교 정신이 더욱 심화되어 불교적 특수한 은유법으로 신라와 불교의 선적(禪的) 세계에 더욱 깊이 파고드는 시기다.

     

    5<질마재 신화>(1975) 시대 : 원시적 샤마니즘의 진경을 보여 준다. 설화적 수법을 통해 언어의 새로운 가능성을 시험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1915. 5.18.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질마재 마을에서 출생. 호는 미당(未堂:아직 성숙하지 않았다. 아직 어른이 되지 않았다 는 뜻). 다츠시로 시즈오는 그의 창씨개명시 이름. 일제 시대 창씨개명 해 근대교육을 받은 아버지 덕분에 비교적 유복하게 학문에 정진할 수 있었다. 마을에서 한학을 배우다 줄포공립보통학교 진학 후 졸업,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보결로 입학한 후 2학년때 광주학생운동 1주년 기념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퇴학당하고 1930년 구속됐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기소유예 됨.

     

    편입한 고창고등보통학교에서도 권고 자퇴당하는 등 학교생활은 평탄치 못했음. 중앙불교전문학원(동국대 전신)수학(1935-1936). 젊은 시절 정신분열 증세를 보인 적도 있었으며, 자살 미수사건도 있었음. 1933[동아일보]에 시<그 어머니의 부탁>, [시건설(詩建設)] 7(1935.10)에 시 <자화상>을 발표하며 등단.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 당선(1936), 김광균, 김달진, 김동리, 오장환, 이용희, 함형수 등과 시전문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 주재. 해방 후 좌우익 대립의 혼란시에 순수문학 또는 순수시라는 개념을 내걸고 우익의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1946), 시분과위원장을 역임하며 당시 문단을 주도한 좌파의 계급문학 또는 경향문학에 반대하여 조선 문학가 동맹과 맞섬.

        

    남조선대(동아대) 창립 시 교수(1946), 동아일보 사회부장 및 문화부장, 정부 수립후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1948), 조선대 부교수, 서라벌예대(동국대와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의 전신)교수, 동국대 교수(1959-1979) 및 종신교수,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창립멤버로 시분과위원장, 1954년 예술원 창립과 함께 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추대되었고 한국문협 부이사장(1969-1972) 및이사장(1977), 한국현대시협회장(1970-1974) 역임. 아세아자유문학상(1955), 대한민국 예술원상(1966), 중앙일보 문화대상 본상(1980)수상. 한국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노벨 문학상 후보에 추천(5차례) .

     

    서정주 시전집(2. 민음사) 출간(1991). 부인 방옥숙 (方玉淑)씨 별세(2000.10) 이후 곡기를 끊고 맥주로 연명하다 2000.12.24. 13시 서울 강남 삼성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85). 재미 변호사와 재미 심장 전문의인 승해(升海)와 윤() 두 아들을 둠.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선영에 묻힘. 정부는 12.26 고인에게 금관 문화훈장을 추서함.

     

    미당 서정주의 초기시는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아 악마적이며 원색적인 시풍을 보여주고 있다. 첫 시집 <화사집>에서 잘 드러나듯이 토속적인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여 인간의 원죄의식과 원초적인 생명력을 읊는 것이다. 하지만, 해방이 되면서 인간의 운명적 업고(業苦)에 대한 인식은 동양적인 사상의 세례를 받아 영겁의 생명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 시기의 시집 <귀촉도>는 표제시에 있어서부터 동양적인 귀의를 시사해주는 것으로, 분열이 아니라 화해를 시적 주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전환은 갈등과 화해라는 심리적 리듬 이외에도 <국화 옆에서>, <밀어> 등의 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토착적인 정서와 고전적인 격조에의 지향이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956년에 간행된 <서정주시선>에서는 <풀리는 한강 가에서>, <상리과원> 등의 작품으로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한과 자연과의 화해를 읊었고, <>, <기도> 등의 작품에서 원숙한 자기 통찰과 달관을 보여주고 있다. 서정주의 시는 <신라초>에 이르면서 새로운 정신적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그의 초월적인 비전의 신화적인 거점이 되고 있는 신라는 역사적인 실체라기보다는 인간과 자연이 완전히 하나가 된 상상력의 고향과도 같다. 서정주는 <신라초>에서 불교사상에 기초를 둔 신라의 설화를 제재로 하여 영원회귀의 이념과 선()의 정서를 부활시켰고, 유치환과 더불어 생명파 시인으로 불려졌다. 그의 사상적 기조는 영원주의, 영생주의이며, 문화사조상의 배경은 주정적 낭만주의, 예술관은 심미주의적 입장이다.

     

    <신라초> 이후에 더욱 진경을 보인 작품 50여 편을 모아 1968년에 펴낸 시집 <동천>에서는 불교의 상징세계에 대한 관심이 엿보인다. 이처럼 서정주의 시세계는 전통적인 서정세계에 대한 관심에 바탕을 두고 토착적인 언어의 시적 세련을 달성하였다는 점, 시 형태의 균형과 질서가 내재된 율조로부터 자연스럽게 조성되고 있는 점 등이 커다란 성과로 평가된다.

     

    전북 고창에서 출생한 서정주는 마을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줄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앙고보·고창고보에서 수학하였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이 당선되고, 김동리·함형수 등과 함께 시전문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하면서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결혼 후 일제하의 암담한 현실에 떠밀려 서울을 중심으로 이곳저곳을 방랑하면서 기거했고, 한동안 만주에 가서 양곡주식회사 경리사원으로 일한 적도 있으며, 일제 말기에 귀국해 향리와 서울을 떠돌다가 광복을 맞이했다.

     

    해방 후에는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에 앞장서 시분과위원장을 맡았고, 정부수립과 함께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창립과 함께 시분과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54년에는 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추대되었다. 전주의 전시연합대 강사, 서라벌예대 교수, 동국대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작가의 말

    (……) 그래 내, 아니 만 18세쯤 됐을 무렵에는 나는 어느새 서구적인 의미의 한 유치한 휴매니스트가 되어 있었고, 특히 프리디리히 니이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의 일역본은 내게는 참 매력적인 것이 되었었다. (……) 이와 아울러서 나는 보오들레에르 이후의 프랑스 상징주의 시의 영향도 받었으니, 이 공부에서 내게 큰 보탬이 된 책은 일본의 이때의 대표적인 프랑스 시 번역자였던 호리구찌 다이가꾸의 방대한 역시집 <월하의 일군>이었다.

     

    초현실주의 시와의 교류에 대해서도 여기 한 말씀 해두는 게 적합하겠다. 이것은 이 무렵에 일본에서 발간한 <시와 시론>이라는 두두룩한 시잡지를 이어 읽으면서 읽힌 것이니, 그 흔적을 알고져 하는 이는 내 처녀시집 <화사집> 속의 <서풍부> 같은 작품을 다시 한번 읽어 주시기 바랜다. 여기에서도 상상의 신개지를 마련하려는 의도는 확실히 보이고 있지 않은가?

     

    (……) <귀촉도>는 해방 뒤 3년만의 1948년에야 내게 되었으니 여기에는 자연히 일정 말기에 쓴 것들과 해방 뒤에 쓴 것들을 함께 수록할 수밖에 없었다. (……) 내 인생관과 시정신에도 암암리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으니, 그 요점을 간단히 말하면 거북이처럼 끈질기고 유유하게 이 난세의 물결을 헤치고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 나의 이런 동양사상에의 회귀는 1945년의 해방 뒤에도 한동안 내 인생관과 시정신의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었으니, 가령 내가 1947년 가을에야 새로 쓴 <국화 옆에서> 같은 작품에서도 독자들은 그것을 알아차리기에 어려울 건 없을 것이다.

     

    다만 내가 내 어느 시집에도 넣지 않고 내던져버린 소위 친일적이라는 시 몇 편이 있지만, 그것은 내가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징용령에서 면제되는 잡지사였던 인문사에 편집기자로 있을 때 조선총독부의 또 하나의 새로 생긴 이름인 국민총동원연맹의 강제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쓴 것들이니, 이 점은 또 이만큼 이해해 주셨으면 고맙겠다.

     

    (……) 끝으로 말하려는 건 내 시의 표현의 문제인데, 나는 시를 제대로 하기 시작한 뒤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이, 내 인생 경험을 통해 실제로 감동한 내용 아니면 절대로 시로서 다루지 않은 그 전력을 앞으로도 꾸준히 지켜갈 것이다. 비록 그것이 독서의 내용에서 오는 것이라 할지라도 경우는 마찬가지였다. 시의 착상에서는 물론 그 표현에서도 남의 에피고넨이 된다는 것은 정말의 시인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첫째 이점에서부터 시인의 출발은 제대로 시작되어야겠다. 그래서 시인다운 시인이 그 표현에서 애써야 할 일은 세계의 시에 한 새로운 패턴을 마련해 보여주는 일이다.

    - ‘나의 문학인생 7’, 서정주, <시와 시학>, 1996년 가을호

    평론

    (……) 초기의 <화사집>에는 청년기 고유의 반항과 일탈 지향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귀촉도> 이후 미당은 세계와 우리의 어제 오늘에 대해서 너그러운 긍정의 관점을 견지해왔다고 할 수 있다. <질마재 신화>에 보이는 시골의 천치 같은 언동조차 포옹하며 거기서 숨은 뜻을 읽어내는 데 드러난 긍정의 정신이 미당 시의 구심점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 긍정의 정신은 미당의 현실주의에서 온다.

     

    <떠돌이의 시>를 이야기하면서 김우창 씨는 구부러짐의 형이상학과 그것이 기초해 있는 현실주의를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굽음의 이존책(以存策)은 절대권력의 세계에서 눌린 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기 위하여 가져야 했던 현실주의라고 부연하고 있다. 현실주의는 이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면서 이상의 실현을 기다리는 태도이기도 하다. 미당의 현실주의와 긍정의 정신은 역사와 역사 속의 인물을 다룬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속의 가령 <정암 조광조론>에 잘 나타나 있다. (……)

     

    미당은 청년기에 <시인부락>이란 동인지의 동인이었다고 한다. 반세기 후 그는 인용부호가 빠진 이 나라 시인부락의 족장이 되었다. 족장의 사상을 깊이 검토하는 일은 이 자리에서는 불가능하다. 이 족장에 대해서는 시인부락 쪽에서 이런저런 비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작품을 읽고 그 의미를 헤아리는 것은 그런 일과 분리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민중을 혐오하는 엘리트주의자라고 셰익스피어를 혹독하게 비판하는 급진파 비평가가 늘 셰익스피어를 읽고 논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어디서나 뛰어난 재능은 희귀하다. 20세기 한국과 같이 척박하고 풍파 많은 사회에 한길에 정진하여 전례 없는 성취를 보여준 재능은 존경받아야 하며, 그 성취는 널리 수용되고 음미되어야 한다. 진정한 의미의 살아 있는 고전이 영세한 우리 터전에서 전범이 될 만한 작품은 현대의 고전으로 숭상되어 마땅하다.

     

    에디슨이 없었더라도 라디오와 축음기는 결국 누군가의 손으로 발명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차르트가 없었다면 모차르트 음악 그 자체는 우리의 것이 못 되었을 것이다. 부족 방언의 요술사이자 시인부락 족장인 미당 시가 좀더 널리 향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쓴 이 글을 어디까지나 미당론의 일부임을 밝혀둔다. - ‘소리 지향과 산문 지향: 미당 시의 일면’, 유종호, <미당 연구>, 민음사, 1994

    서로간에 날카로운 갈등을 일으키는 경험의 여러 모순, 상반된 요소를 인정하지 않는, 직시초월의 전통이 한국 시인으로 하여금 오랫동안 자기 민족의 주관적인 세계에 가라앉아 있게 한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한다면, 박두진은 그의 기독교에 의하여 이 전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서구적인 사고에 힘입기는 했으나 기독교도는 아닌 서정주는 인간 상황의 분열된 현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 또 한 사람의 시인이다.

     

    그의 초기시, 특히 <화사집>을 특징짓는 것은 강렬한 관능이었다. 관능은 현대 한국시에서 반드시 새로운 것은 아니다. 서구의 퇴폐 시인들의 영향을 받은 몇몇 시인들이 그 이전에 이미 관능의 나른한 기쁨을 시험한 바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시는 어디까지나 모방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서정주는, 앞에 간 시인들에게 배우면서 동시에 그들이 얻지 못한 진정성을 얻는다.

     

    그는 경험의 몰입으로, 또 이해를 위한 탐구로 그를 끌어갈 수 있는 정열을 가졌다. 이러한 정열의 도움으로, 그는 관능의 표현을 스쳐가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도덕의 상태까지 끌어올렸다. 그리하여 그의 도덕적인 의식은 그를 다른 퇴폐......

     

    <화사집>(1941) <귀촉도>(1946) <서정주 시선>(1955) <신라초>(1960) <동천>(1968) <질마재 신화>(1975) <떠돌이의 시>(1976) <서으로 가는 달처럼>(1980) <학이 울고간 날들의 시>(1982) <안 잊히는 일들>(1983) <노래>(1984) <팔할이 바람>(1988) <산사>(1991) <늙은 떠돌이의 시>(1993) <견우의 노래>(1997) <민들레꽃>(1994) <시창작법>(1949) <시문학개론>(1959) <한국의 현대시>(1969) <떠돌며 머물며 무엇을 보려느뇨?>(1980) <육자배기 가락에 타는 진달래>(1985) <노자없는 나그네길>(1992) <문학을 공부하는 젊은 친구들에게>(1993) <미당의 세계 방랑기>(1994) <나의 시 나의 시쓰기>(1995) <서정주 세계민화집>(1991)

    <화사(花蛇)>(1936) <자화상>(1937) <국화 옆에서>(1947) <무등을 보며>(1954) <춘향유문>(1955) <꽃밭의 독백>(1958) <다시 밝은 날에>(1956) <추천사>(1956) <동천(冬天)>(1968)

     

    시집<화사집(花蛇集)>(1941.처녀시집.남만서고)<귀촉도(歸蜀途)>(1948.2시집.선문사)<흑산호(黑珊瑚)>(1953.우생출판) <신라초(新羅抄)>(1961.정음사) <동천(冬天)>(1968.민중서관) <질마재 신화>(1975.일지사) <국화 옆에서>(1975.삼중당) <떠돌이의 시>(1976)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1982.소설문학사) <안 잊히는 일들>(1983.현대문학사) <노래>(1984.정음문화사) <이런 나라를 아시나요>(1987.고려원) <팔할이 바람>(1988.혜원)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아>(1989.신원문화) <산시(山詩)>(1991) <늙은 떠돌이의 시>(1993)

     

    시선집<서정주시선>(1956.정음사) <서정주의 명시>(1979.한림출판) <미당 서정주시전집>(1983.민음사) <서정주시전집>(1991.2. 민음사)

     

    문집<서정주문학전집>(1973.5)

     

    저서<시 창작법>(1949.공저.선문사) <현대조선 명시선>(1950.운문사) <작고 시인선>(1950.정음사) <시 창작 교실>(1956.인간사) <시문학 개론>(1959.정음사) <시문학원론>(1969) <한국의 현대시>(1969) <나의 문학적 자서전>(1975.민음사) <한국의 명시선>(1977.현암사) <현대작가론>(1979.형성출판) <현대시인론>(1981.형성출판)

     

    선운산가비(禪雲山歌碑)

    전북 고창 선운산 도립공원 선운사 동구. 육필원고를 확대하여 '선운사동구' 새김

       

     

     

    서정주생가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질마재신화'의 현장, 현재 생가엔 미당의 아우이자 시인인 서정태가 살고 있음

     

     

     

     

     

     

    피 묻은 국화 옆에서 서정주를 생각한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국화(菊花) 옆에서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우리는 먼저 미당 서정주라는 한 자연인의 죽음에 애도의 뜻을 밝힌다. 그가 평생 일구어온 문학적 성과 또한 적지 않았기에 문학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서정주라는 '역사적 개인'이 살아온 오욕의 삶이 결코 그의 죽음으로 은폐되거나 미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확히 지적하고자 한다.

     

    특히 정부가 서정주의 문학적 업적을 기려 금관문화훈장을 수여하고, 언론이 다투어 그를 찬양하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 아닐 수 없다. 그의 현란한 친일 행적과 독재 찬양 행위를 단순히 "시인의 순진함"으로 치부하고 정부와 매스컴이 나서서 훈장을 주고 면죄부를 주려는 데에는 아연실색할 뿐이다.

     

    서정주는 일제가 민족말살에 광분하던 시기 조선인 가미가제 청년이 일본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실을 열렬히 찬양하며 조선인을 전쟁터에 내몬 '대동아성전'의 선전 대원이었다. 그의 친일 행위는 결코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인 것이었다.

     

    서정주는 1980년대 광주민중항쟁의 피무덤 위에 세워진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을 찬양하고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이들에 대해서는 원색적인 비난을 아끼지 않은 독재 찬양시인이기도 했다.

     

    일제시기에는 친일문학으로 1980년대에는 민주주의의 적으로서 일관한 그의 때묻은 삶을 어찌 문학적 공로를 내세워 '사소한 흠'으로 치부할 수 있단 말인가.

     

    일제시기 친일문학의 맞은 편에는 이육사 등이 피로써 지키고 가꾸어 온 항일문학의 찬란한 전통이 있다. 만일 서정주가 문학적 공로가 커서 훈장을 수여한다면 그보다 문학사적 의의가 더 큰 이광수, 최남선 등 숱한 친일문학인 또한 이 정부가 훈장을 수여해야 할 것이다.

     

    우리 문학의 전통을 항일문학이 아닌 친일문학에서 찾으려는 이 정부는 또 하나의 친일정부가 아니고 무엇이랴. 1980년대 민족문학과 민중문학이 일궈낸 거대한 성과를 시샘하고 적대하던 서정주가 어찌 민족문학의 찬란한 금자탑으로 내세워질 수 있단 말인가.

     

    이미 서정주는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해 "미안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자신의 친일은 "하늘이 이 겨레에게 준 팔자"라고 하며 느닷없이 조선 민중 전체를 친일의 공범으로 밀어붙여 자신의 죄에 스스로 면죄부를 주는 파렴치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서정주가 국민시인으로 추앙되고 많은 사랑을 받은 만큼 그는 생전에 용기 있게 자신의 과오를 밝힘으로써 그 사랑에 보답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사죄나 반성 없이 국민들이 보내준 영광만을 고스란히 안고 가려 했다. 그가 시를 다듬는 과정의 십분의 일만이라도 자신의 삶에 대해 성찰하고 반성했더라면 결코 그러한 발언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그 시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옛말이 새삼스러울 뿐이다.

     

    정부와 언론의 무분별한 행동 또한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들은 서정주가 반민족적 반민주주의적 삶을 살았더라도 문학적 재능과 공로가 있으니 마땅히 훈장을 수여하고 찬양해야 한다는 식으로 여론을 몰아갔다.

     

    민족을 배신하고 일신의 영달을 추구해도 재주만 있으면 모든 것이 용서될 수 있다는 전무후무한 새로운 가치관을 보급하고 있는 것이다. 단 한 번도 반민족, 반민주 행위가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상태에서 혈연, 학연, 지연을 내세운 친일의 후예들은 박정희기념관 건립에 이어 서정주를 통해 또한번 자신을 민족사의 정통으로 분식하려 하고 있다. 이제 21세기는 친일파의 찬란한 영광을 기념하는 새 세기로 시작하고 있다.

     

     

     

    참고문헌

    김병걸.김규동 편,<친일문학작품선집>2,실천문학사, 1986

    임종국,<친일 문학론>,평화출판사, 1966

    서정주,<서정주문학전집>3,일지사,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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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 할이 바람>.혜원출판사, 1988

    ----,<일정 말기와 나의 친일시>,신동아,1992. 4.

    한국문인협회 편,<해방문학 20>,정음사, 1966

    조연현,<내가 살아온 한국문단>,<<조연현 문학전집>>1,어문각, 1977

    http://ko.wikipedia.org/wiki/%EC%84%9C%EC%A0%95%EC%A3%BC

    [임종국평전-21] 28명의 '작가론'에서 서정주가 빠진 까닭 (6) | 정운현

    http://cihi.com.ne.kr/%BC%AD%C1%A4%C1%D6.htm

    http://monthly.chosun.com/client/reporter/writerboardread.asp?idx=1161&cPage=1&wid=oblee

    <미당 시전집>, 서정주, 민음사, 1994

    <서정주의 화사집을 읽는다>, 이남호, 열림원, 2003

    <서정주 시의 시간과 미학>, 손진은, 새매, 2003

    <서정주: 영원주의와 떠돌이 의식>, 박호영, 건국대 출판부, 2003

    <미당과 목월의 시적 상상력>, 엄경희, 보고사, 2003

    <오봉옥의 서정주 다시 읽기>, 오봉옥, 박이정, 2003

    <미당의 어법과 김동리의 어법>, 김윤식, 서울대 출판부, 2002

    <서정주 시정신>, 김정신, 국학자료원, 2002

    <서정주 시와 영원지향성>, 김종호, 보고사, 2002

    <서정주 예술언어: 그의 삶과 문학, 그리고 대표작 해설>, 송하선, 국학자료원, 2000

    <미당 서정주>, 윤재웅, 태학사, 1998

    <서정주 시 연구>, 육근웅, 국학자료원, 1997

    <미당 자서전>, 서정주, 민음사, 1994

    <한국 현대시의 반복 기법과 언술 구조: 1930년대 후반기의 백석, 이용악, 서정주 시를 중심으로>, 이경수, 고려대 박사논문, 2003

    <서정주 시의 미의식 연구: ‘죽음 환상모성 환상을 중심으로>, 김점용, 서울시립대 박사논문, 2003

    <서정주와 영원성의 시학>, 최현식, 연세대 박사논문, 2003

    <한국 현대시의 민속 수용양상 연구: 백석, 서정주를 중심으로>, 최정숙, 경희대 박사논문, 2003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누리미디어, 2002

    <한국현대문학작은사전>, 가람기획편집부 편, 가람기획, 2000

    반민족문제연구소 (1994년 3월 1일). 〈서정주 : 미당의 친일시와 해방 이후의 활동 (한수영)〉, 《청산하지 못한 역사 2》. 서울: 청년사

      

     

     

     

     

    성 명 서

     

    친일시인, 민주화역행자 미당 서정주의 기념관 건립과 홍보관 전시를 반대하며

    전북지역의 문화계와 지역정치권의 방조아래 이루어지고 있는 미당 서정주 시인에 대한 고창군의 기념관 건립과 전주시의 시정홍보관 전시에 강력히 반대하고자 한다.

     

    미당 서정주 시인은 문학적인 업적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가 공개적으로 발표한 많은 글과 행적을 보면 사람들이 본받을 만한 인물인지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일제때 친일시 등 문학작품과 해방이후 보수우익 정치세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가 친일문학 작품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427월 평론 시의 이야기-국민 시가에 대하여'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이라는 창씨명으로 매일신보에 발표하게 되면서부터이다.

     

    1942년부터 1944년 사이에 그가 집중적으로 발표한 친일 작품의 목록을 보면, 시의 이야기-국민 시가에 대하여(1942, 평론)〉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1943, 수필)〉 〈인보의 정신(1943,수필)〉 〈스무 살 된 벗에게(1943, 수필)〉 〈항공일에(1943, 일본어시)〉 〈최체부의 군속 지망(1943, 소설)〉 〈헌시(1943, )〉 〈보도행(1943, 수필)〉〈무제(1944, )〉 〈오장 마쓰이 송가(1944, )이다.

     

    그동안 그가 누리고 있는 문단적 지위에 의해 서정주 시인은 올바르게 평가받지 못했다. 일제 말기에 이와 같이 그는 시적 재능을 일제에 대한 찬양과 황국신민화 정책의 선전에 쏟아 부었다. 즉 천황폐하의 황은을 배신하고 대동아공영에 반대하고 조선독립과 같은 가 찮은 꿈이나 꾼다고 동족을 '불령선인 (不逞鮮人)'으로 매도하였다.

     

    또한 조선청년들에게 일본을 위한 전쟁에 나가서 싸우다 죽을 것을 강권하고 일본군대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종군 기사를 쓰기도 하였다. 나중에 친일하게 된 연유에 대해 "일본이 그렇게 쉽게 항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못 가도 몇 백년은 갈 줄 알았다."고 하였다. 이 말은 일제가 패망하지 않았다면 그의 친일행위는 더 연장되었을 것이란 말과 똑같으며, 이외에도 얼토당토 않는 변병을 늘어놓고 있다.

     

    그리고 행방이 되자 미당은 친일파들이 그랬듯이 보수 우익 쪽을 선택하면서 국내에 정치적인 배경세력이 없었던 이승만을 적극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민중일보에서 기자로 활동하면서 이승만 개인의 선전과 그를 대중적으로 확산하기 위해 여론형성에 적극 나섰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가 있으면 언제나 정권의 편에 서서 충실히 그 입장을 대변하였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 이후 불의한 현실에 싸우기 위해 활동했던 "민중문학"의 기세에 맛서기 위해 1986문학정신을 만들어 사상논쟁을 일으키면서 보수우익세력을 대변하였다.

     

    지난 1981년에는 군사구테타를 일으킨 전두환 대통령 후보를 위한 텔레비젼 지원 연설을 하였다. 또한 민주화 운동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6월 항쟁"이 있었던 1987년 초여름에 그가 회장으로 있던 한국문인협회에서는 전두환의 '4.13 호언조치'를 위대한 구국의 결단이라고 지지하는 성명을 내서 국민들의 민주화의 열망에 찬물을 끼 얻었으며, 그 관제 어용 단체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어 양식 있는 국민들의 분노를 산 바 있다.

     

    한 인물의 업적과 명예를 대중들에게 알리기 위해 기념관과 홍보관을 건립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 대한 총체적인 분석과 평가아래서 많은 국민들의 지지아래 이루어져야 한다. 아무리 뛰어난 문학가라 할 지라도 우리 민족의 존립자체를 위태롭게 하고 일본 군국주의를 위해 많은 국민들의 희생을 강요한 점에서 볼 때 그는 오히려 민족의 반역자로 낙인찍어야 한다.

     

    평범한 개인이 아니라 국민들로부터 추앙받고 있던 인물이기에 역사를 바로세우고 민족정기를 올바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더욱 철저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반민족 행위자에 대해 역사의 이름으로 단죄하지 않고 오히려 칭송하고 본받게 하여 바로서는 역사가 되지 못하고 있다. 이같은 그릇된 역사를 반복하려 함인지, 고창군과 전주시에 묻고 싶다. 미당 서정주에 대한 기념관 건립과 홍보관 전시를 즉각 철회할 것을 간곡히 촉구하는 바이다.

        

     

    전북환경운동연합황토현문화연구소

     

    문의 : 주용기 전북환경운동연합 정책실장, 018-221-7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