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계
송금선(宋今璇, 福澤玲子, 1905∼1987)
반도 지식여성들 군국어머니로 힘쓰자
동아일보(1935.3.25일자)-여자상식강좌 박스기사 중에서 (왼쪽 위부터 이영준, 김병노, 설의식, 이여성, 서항석. 오른쪽 위부터 이종우, 박길용, 송금선, 박경호, 김영연)이고 오른쪽은 신가정 주최를 알리는 사고 기사.
1905년 경기도 출생
<채권가두유격대>
송금선(宋今璇, 일본식 이름: 福澤玲子(후쿠자와 레이코), 1905년 1월 15일 ~ 1987년 10월 24일, 한성부 출생)은 덕성여자대학교 초대 학장을 지낸 한국의 교육자이다. 아호는 남해(南海).
1919년 숙명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했다.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모교와 진주일신여자고등보학교,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를 거쳐 1934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1937년 조선부인문제연구회에 가입하여 순회 강연을 다니면서부터 친일 활동을 시작했다. 그해 조선총독부의 방송선전협의회에서 친일 강좌를 맡았고, 조선귀족 부인들과 여성계 친일 인사들이 공동 조직한 애국금차회에도 가담했다.
전시체제 하에서 송금선의 친일 행적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활동하고 친일 잡지 《신시대》에 기고하는 등으로 계속된다. 친일 단체의 총본산격인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에 가입하였고, 학병으로 지원할 것을 독력하는 연설 활동에도 적극 참가했다. 종전 직전 패전이 가시화되자 본토에서 최후의 1인까지 싸울 것을 독려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언론보국회 평의원이 되기도 했다.
1940년 총독부의 지지 하에 차미리사의 뒤를 이어 덕성여자실업학교(현 덕성여자고등학교의 전신) 교장이 되었고, 1950년에는 현 덕성여대의 전신인 덕성여자초급대학을 세우고 초대 학장에 취임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도 선정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덕성여대 이사장을 지낸 박원국이 송금선의 아들이다.
운현궁 양관-일본인 설계 시공,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의 저택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 의친왕의 차남인 이우의 소유였다가 해방 후 1946년 학교법인 덕성학원(덕성여중고대학교)(친일매국노 "송금선")이 소유하게되면서 현재 덕성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 사무처 로 사용중이다.
참된 기억을 찾아서 지금 덕성여대에서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강요된 하나의 기억, 덕성여대의 설립자이자 민족·여성교육의 선구자라는 송금선에 대한 기억을 거부하고, 덕성학원의 뿌리를 다시 찾아 새로운 기억을 만들려는 싸움이 바로 그것이다.
어쩌면 망각의 저편으로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었던 역사의 진실을 다시 기억의 이편으로 되살리는 이 작업이 많은 사람들에겐 고통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근대 이후 단 한번도 자신의 불행한 역사에 대해 진지한 반성과 청산을 하지 못한 결과, 정체성과 지표(텍스트)를 상실한 채 오직 강자만이 정의라는 잘못된 세계 속에 살아가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있다.
김활란상이니 이승만흉상이니 박정희기념관이 하는 따위가 바로 그런 결과들이다. 지금 '송금선을 둘러싼 기억투쟁'은 바로 이런 잘못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한 것이다.
잘못된 신화와 왜곡된 기억을 깨뜨리고 덕성학원의 올바른 뿌리를 찾고자 하는 대토론회에 이 발제문이 조그마한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주요 친일단체와 송금선 1936년 8월 제7대 총독으로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부임하면서 식민지 조선은 급격한 체제개편이 시작된다.
'전시총동원정책'으로 요약되는 이 시기의 식민지배정책은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인적, 물적 손실을 식민지 조선에서 최대한 보충하고, 이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시키기 위해 이른바 '황국신민화정책'을 강행하였다.
즉 식민지 조선의 군·관·민이 일체가 되어 일제의 침략전쟁에 총동원되기 위해서는 "일본은 萬世一系의 천황이 다스리는 神國이니 이러한 國體를 인식함으로써 제국의 신민된 본분에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는 천황제파시즘사상이 식민지에서 뿌리를 내려야 했다.
이에 따라 일제는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면서 갖가지 교화정책(황국신민화)을 강제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신사참배, 황거요배(아침마다 일황이 사는 동쪽을 향해 절하는 것), 경축일마다 일장기 게양과 집회시 '기미가요' 제창, '고꾸고'(國語)인 일어보급운동,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 등이다.
이를 위해 조선총독부는 학무국 안에 사회교육과를 새로 만들고, 각종 친일단체를 조직하여 이른바 조선인의 자발성(?)을 강요하였다.
덕성여대 분규역사는 '한국 근현대사의 축소판' 덕성여대의 시작과 오늘날까지의 역사를 훓다보면 한국의 근현대사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세상의 권력과 결탁하고, 정의의 이름으로 비판을 하면 군사독재시절 처럼 강압적으로 탄압하는 모습니 작은 한국 근현사다. 동토의 왕국, 덕성여대의 시작점 덕성여대를 관리하는 재단, 덕성학원이 본격적으로 개인의 것이 되기 시작한 것은 1952년 부터였다. 순회강연과 교육기금 모금을 통해 근화여학교를 세워, 여성교육에 힘썼던 독립운동가 차미리사 여사(사진 왼쪽)가 건강상의 이유로, 1952년 덕성여대 이사장 자리를 사임한 것이다. 차미리사 여사가 이사장직을 사임한 이후 그 뒤를 이어 이사장이 된 것은 송금선씨의 부친, 송우영씨였다. 송우영씨 다음으로 이사장직에 오른 것은 송금선씨의 남편, 박준섭씨였으며, 그가 사임하고 난 후에는 송금선씨 본인이 이사장이 되었다. 덕성학원이 완전히 송금선 일가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덕성학원을 장악한 송금선 일가가 한 일 중 하나는, 덕성여대에 남은 차미리사 여사의 흔적을 지우는 일이었는데, 이는 송금선씨가 1940년에 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덕성여자실업(근화여학교)교장이 되어, 학도병 모집글을 쓰고 창씨개명을 하는 등 친일에 힘썼던 부끄러운 과거를 왜곡, 미화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덕성여대의 뿌리를 왜곡하고 재단을 사유화하는데 힘썼던 송금선씨 일가는 이사장직을 아들인 박원국씨에게 넘겼다. 어머니로부터 덕성여대 이사장직을 넘겨 받은 박원국씨는 재임 20년 동안 각종 비리를 저질렀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횡포를 막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동토의 왕국은 지속되었다.
교수님을 교단으로 돌려달라! - 1990년, 기나긴 싸움의 시작
차미리사 (1940년경)
온갖 사학비리를 저지르며 재단을 자기 것으로 여긴 박원국 이사장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한 것은 1990년, 성낙돈 교수가 부당하게 재임용에서 탈락되고 만 것이다.
재단측은 성낙돈 교수가 근무성적이 불량하기 때문에 재임용하지 않았다고 밝혔지만, 그 이유는 사실이 아니었다. 성낙돈 교수가 재임용에서 탈락한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성낙돈 교수가 교수협의회를 결성하여 재단과 학교에 대해 비판적인 행동을 했으며, 개정사립학교법에 반대하여 재개정 운동을 펼쳤기 때문이다. 당시 개정된 사립학교법은 '개정'이 아닌 '개악'을 했다는 비판을 들을 정도로 재단의 이익만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졌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총장 권한이던 교수 임면권을 이사회로 이관한 것으로, 박원국 이사장과 재단은 이 사립학교법을 이용하여 재단에 비판적이었던 성낙돈 교수를 탈락시킨 것이다. 성낙돈 교수를 시작으로 비리사학재단들은 개정된 사립학교법을 이용하여, 자신들에게 비판적이라고 생각되는 교수들에게 재임용 탈락이라는 칼을 마구잡이로 휘둘러 댔다. 이런 상황에서 성낙돈 교수가 부당하게 재임용 탈락이 되는 것을 본 학생들과 교수들은, 성낙돈 교수의 복직을 요구하며 오랜 기간 동안, 수업거부와 항의농성, 단식투쟁을 벌였다. 2000년 초반까지 계속 되는 덕성여대 학내분규의 시작이었다. 학생들과 교수들의 복직투쟁에도 불구하고 성낙돈 교수는 아주 오랫동안 학교에 돌아오지 못했다. 성낙돈 교수는 재임용에서 탈락된지 10년째 되는 1999년에서야 겨우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97년, 학내분규와 교육부 특별감사 1990년, 성낙돈 교수가 부당하게 재임용 탈락된 것에 이어 1997년 2월에는 사학과 한상권 교수가 재임용에서 탈락되고 말았다. 1991년 한상권 교수가 교내 질서를 문란케하여 3개월 정직의 중징계를 받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성의 기미가 없다는 것이 재임용 탈락 이유였다. 이 때 재단측이 한상권 교수가 교내 질서를 문란하게 만들었다며 근거로 든 것은 다름 아닌 1991년 성낙돈 교수 복직 투쟁이었다. 성낙돈 교수 복직 투쟁을 재단측은 교내질서 문란행위라고 여겼던 것이다. 또한 재단은 한 교수가 학내 행사 참여 및 학생지도에 성의를 보이지 않는 등 근무 평가가 좋지 않았다며, 그 또한 재임용 탈락 이유 중 하나라고 밝혔다. 하지만 재단측의 주장과는 달리, 한상권 교수는 1996년 1학기 강의평가 평점 5점 만점에 4.05를 받았으며, 학계에 많은 논문을 발표했기 때문에 학생들과 학계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성낙돈 교수에 이어 한상권 교수가 부당하게 재임용에서 탈락하게 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학내구성원들은 학생총회를 열었다. 학생총회에 참석한 학생들의 수는 3,500여명, 전체 5,000여 명의 학생들 중 과반수 이상이 학생총회에 참석한 것이다. 학생총회에 모인 학생들은 부당하게 해임당한 교수들이 복직할 때까지 무기한 수업거부를 할 것을 결의했다. 본격적인 학내분규가 시작된 것이다. 학생들은 65일간 수업을 거부했으며 260여일간 총장실을 점거했다. 중앙운영위원회는 단식농성을 할 것을 결의했고, 20여일간 단식농성을 벌였다. 이런 학생들의 투쟁에 교직원과 노동조합도 함께하기로 했고, 그 결과 교직원노조, 조교협의회, 노동조합이 파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학생들과 교수들, 노동조합 등 학내구성원이 모두 뭉쳐 학내분규를 진행한 결과, 1997년 여름 교육부는 덕성여자대학교에 대해 특별감사를 벌였으며 박원국 이사장과 재단의 비리를 밝혀냈다. 교육부 감사기간 동안 밝혀진 이사장과 재단의 비리는 모두 146건으로, 그 당시 대한민국 곳곳에서 벌어진 사학비리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라고 할 수 있다. 교육부는 146건의 비리를 밝혀내고 다음과 같은 사항을 지적하였다. 이렇게 교육부 특별감사에 의해, 그동안 저지른 비리가 밝혀진 박원국 이사장은 결국 해임조치를 받고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1997년의 학내분규는 학내구성원의 승리로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1999년 교육부의 중재로 이문영 이사장을 비롯해 4명의 이사진이 파견되었고, 해임되었던 성낙돈, 한상권교수가 복직하게 되었다. 이로써 덕성여대 학내분규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2001년 학내분규는 다시 시작되었다. 2001년, 사학비리가 다시 돌아오다 1999년, 교육부의 이사진 파견으로 학내분규는 잠잠해질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해임되었던 두 교수도 복직하게 되어, 이제 민주적인 학교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재단의 뿌리는 건재했다. 파견된 이사진이 남아있던 구재단측 이사들의 횡포로 인해 3년만에 이사직을 내놓게 된 것이다. 이로써 박원국 전 이사장이 학교에 복귀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2001년 대법원은 박원국 전 이사장 해임절차에 문제가 있다며 교육부의 해임결정을 취소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박원국 전 이사장이 다시 학교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학교로 돌아온 박원국 이사장이 맨처음으로 한 일은 눈엣가시 같은 교수들을 해직하는 일이었다.
교수협의회 소속이었던 중문과 김정남 교수, 남동신 교수 등 4명의 신임교수를 포함하여 5명을 해직했다. 그리고 이들 해직교수들이 담당했던 과목을 일방적으로 폐강시켰다. 5명의 해직교수들 중 남동신 교수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해직되고 말았다. 남동신 교수는 덕성여대 설립자인 차미리사 여사의 초상화 봉정식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총장의 경고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경고를 받은 것이 해임의 중요 사유가 되어 해직되었기 때문이다.
복귀한 박원국 이사장(사진 왼쪽)의 횡포를 인정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도 박원국 이사장의 복귀를 인정할 수 없었기에
2001년, 학내구성원은 다시 하나로 뭉치게 되었다. 학생들은 4월부터 또다시 무기한 수업거부에 돌입했다. 학생들과 교수들은 교육부 앞에서 일인 시위를 하고 집회를 열었다. 교수협의회 소속 교수들은 릴레이로 철야 단식농성을 했으며 10월에는 학생대표자들과 교수협의회장도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일반 학생들도 단식에 참여했다. 같은 달 10월에 100인의 단식단을 발족하여 대규모 단식농성을 시작한 것이다. 노동조합도 학생, 교수와 뜻을 같이하여 10월부터 파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25명의 학내구성원들은 집단 삭발식을 했다. 언론들은 2001년 덕성여대 학내분규에 대해 대대적인 보도를 했고, 덕성여대 분규는 많은 국민들의 관심을 받았다. 학내분규가 계속되던 2001년 10월 25일 박원국 이사장은 임기 만료를 이유로 이사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그 후 교육부는 4명의 관선이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1년, 관선이사도 임기만료로 물러나게 되었고 여전히 갈등의 불씨는 남아있다. - 출처 : 민중의 소리
송금선의 친일행위는 바로 이와 궤를 같이 하면서 전개되었다. 1. 조선부인문제연구회(朝鮮婦人問題硏究會) 조선부인문제연구회는 1937년 1월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알선으로 이른바 신여성을 동원하여 생활개선, 부인교양 등을 연구·실천하기 위해 조직된 친일 여성단체로 김활란이 상무이사였으며, 송금선은 이사로 취임하였다.
이 단체는 1938년 9월 조선총독부가 내건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책'에 호응하여 '家庭報國 운동으로서의 국민생활의 기본 양식'이라는 것을 제정하고, 이것을 선전 계몽하기 위해 11명으로 된 순회강연반을 결성한 뒤 9월 12일부터 순회강연에 들어갔다. 이때 송금선은 高鳳京, 金活蘭, 徐恩淑 등과 함께 연사로 파견되어 활동했다.
당시 제정된 [가정보국운동으로서의 국민생활의 기본양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의례 (매월 1일 가정에서 황거요배, 축제일의 국기게양, 총독부 의례준칙의 준수, 혼상례의 간소화), 누습(陋習) 타파 (세찬(歲饌) 기타 증답(贈答), 푸닥거리, 필요 없는 잔치 등의 폐지, 매사의 시간엄수), 근로보국정신의 앙양 (집안 청소를 통한 근로정신 함양, 주부의 직접 시장 보기, 자녀의 근로정신 함양), 의식주 (색옷 입기, 환경청소, 국 한 그릇 찬 하나의 식사 간소화)
2. 방송선전협의회(放送宣傳協議會)
방송선전협의회는 1937년 1월 13일 조선총독부 사회교육과가 주동해서 조직한 친일기구로서 당시 제2 방송인 조선어 방송강좌를 통해서 조선 민중에게 황민화를 위한 교육강좌를 주관하고 있었다.
이 강좌는 일본의 국체(國體, 이른바 천황제국가)를 인식시킴으로써 신민된 자각을 갖게 하며, 일본국민으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 즉 내핍과 절약으로 전쟁을 이겨내고 신명을 천황께 바치도록 교육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날 조선호텔에서 제1차 협의회가 개최되었는데, 여기에는 조선총독부 관료, 방송관계자 및 총독부에서 위촉을 받은 강사들이 참여했다.
각 강좌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1) 수양강좌 : 權相老 외 5명. (2) 부인강좌 : 송금선 외 10명. (3) 상식강좌 : 姜元秀 외 11명 이다.
3.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
시국강연·좌담회 등을 통해 '국위선양'과 '필승체제'의 확립을 위한 내선일체로 총력을 결집할 것을 목적으로 한 황국신민화정책은 점차 '애국의 赤誠'인 국방헌금 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이러한 추세를 좇아 탄생한 친일 여성단체가 애국금차회였다.
애국금차회는 1937년 8월 20일 당시 일제로부터 귀족 칭호를 받은 자들의 부인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여성 친일단체로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필요한 전쟁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금비녀와 금가락지 등을 뽑아 헌납하자는 목적에서 조직되었다.
이 단체의 회장은 친일귀족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윤덕영(尹德榮)의 처 김복수가 회장이었고 송금선은 김활란 등과 함께 간사로 활동했다.
이 회는 이밖에 (1) 황군의 환송연 (2) 총후(銃後)가정의 위문격려 (3) 총후가정의 조문 (4) 일반 조선부인에 대한 황군원호의 강화 및 국방비의 헌납 등을 주요활동으로 삼았다. 4.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일제는 중일전쟁이 장기화하고 '애국운동'을 표방한 친일단체들이 난립하면서 이들을 하나로 규합하여 종으로는 각 종교단체와 사회교화단체, 횡으로는 조선인 전체를 연맹원으로 묶는 하나의 단체를 조직하기로 하고 당시 59개 친일단체 및 개인 56명을 발기인으로 1938년 7월 7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경성운동장에서 조직했다.
조선연맹은 1938년 7월 19일 중앙조직의 결성에 따른 지방 조직 즉 지방연맹 조직에 착수하여 크게는 道, 작게는 정(町)연맹과 최하단위인 애국반까지 조직하여 국체 협력을 선동하는 주동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국체 협력을 위한 이들의 활동은 지원병 독려, 창씨개명, 공출·국방헌금독려, 폐품수집, '고꾸고'(일어)강습회 등이었다.
1938년 9월 22일 조선총독부와 협의하여 마련한 실천강령은 다음과 같다. (1) 황국정신의 함양 (2) 내선일체의 완성 (3) 비상시 국민생활의 혁신 (4) 전시 경제체제에 협력 (5) 근로보국 (6) 생업보국 (7) 총후 후원, 즉 군인원호 강화 (8) 방공(防空) 방첩 (9) 실천망의 조직과 지도의 철저
1939년 8월 5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은 8월과 9월에 걸쳐 각도에 강사를 파견하여 국민정신 선양에 관한 순회강연을 열기로 결정하였다.
남자 18명, 여성 8명으로 구성된 강연단은 '시국 진전에 대한 인식과 결심' '총동원 운동의 본위' '백억저축생활 쇄신' 등에 관한 주제로 강연하였다. 송금선은 이 여성강연단의 일원이었다. 5. 국민총력조선연맹 일제는 중일전쟁이 기대와는 달리 장기화하고 미국과의 전쟁 가능성까지 대두하면서 종래의 전시체제를 한층 강화한 결전체제로 끌어올리기 위해 '고도국방국가의 건설'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고도국방국가의 건설이란 첫째, 사상통일-일본정신의 앙양과 내선일체의 완성, 둘째, 국민총훈련-職域奉公 및 생활의 신체제 확립, 셋째 생산력 확충-전시 경제체제의 추진과 증산 등으로써 더욱 강화된 민족말살정책과 조선 전체를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전시총동원체제였다.
일제는 1940년 7천만 일본 국민을 하나로 묶기 위해 '천황의 성업'을 익찬(翼贊)하는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를 결성했는데, 조선총독부는 조선에서도 같은 성격의 단체를 조직하고자 1940년 10월 16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이를 더욱 강화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을 새로 결성하였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목적은 '국체의 본의에 基하여 내선일체의 實을 擧하고 각 그 職域에서 멸사봉공의 誠을 奉하며, 協心戮力하여 써 국방국가체제의 완성, 동아 신질서 건설에 매진할 것을 기함'이라는 강령에서 분명해진다.
즉 이 친일단체는 조선 전체를 전시체제에 총동원하기 위한 총력운동의 大宗이었다.
총력연맹의 조직을 보면, 조선총독부 안에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하는 지도위원회를 두고 연맹의 기본방침을 결정하였고 중앙조직은 조선의 전 단체와 개인으로 구성, 총재-부총재-고문-이사-참여-참사-평의원 등의 역원을 두고, 지방조직으로는 최 말단에 대략 10호를 단위로 하는 愛國班을 기본조직으로 하여 도-부-군-읍-면 단위로 조직되었다. 이밖에도 연맹은 국민총력00연맹 하는 식의 직능조직도 두었다.
총력연맹은 이러한 조직을 통해서 황민정신의 앙양, 징병·학병의 독려·후원 및 생산증산을 통한 증산보국 근로보국, 헌금과 공출, 군인원호 등 기타 전반의 총후운동 총력운동을 전개하였다.
한마디로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을 통해서 조선 전체를 자신들의 침략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전 조선을 대상으로 조직한 최고·최대의 친일단체였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은 1943년 1월 24일 역원을 개편하는데 송금선은 이때 연맹의 4개의 실행부서인 총무부위원·연성부위원·경제부위원·후생부위원 가운데 李淑鍾(宮村淑鍾)과 함께 연성부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무렵 송금선은 친일잡지 {신시대}(1943.6)에 [바른 식생활]이란 글을 게재하였다. 이 글은 국민총력조선연맹의 3대 강령 중 하나인 소비절약 운동에 대한 내용으로 일제의 침략 전쟁을 위해 조선 민족에게 극도의 내핍생활을 강요한 대표적인 친일 글 가운데 하나이다.
「바른 식생활」
새삼스럽게 절미(節米) 절식(絶食)이라니 시대에 뒤떨어진 듯한 느낌입니다마는, 금년이야말로 결전(決戰)의 해라, 다시 한 번 우리의 식생활을 반성해 보는 것도 전혀 무의미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대체로 우리 조선사람은 너무 덮어놓고 과식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쌀을 너무 먹어 왔어요. 아침이건 점심이건 저녁이건 저 오들오들한, 가장 소화하기 어려운 쌀의 찌거기인 백미만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침부터 눈이 퀭해서 잠이 오는 것도 당연하지요.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아슬아슬했다는 기분이 안 드는가요?
부식물이란 것은 단지 형식적으로만 먹어 왔어요. 그러고서도 모두들 영양불량·소화불량이 걸려서 죽어버리지 않은 것이 이상해서 못 견디겠어요. 이제야말로 정말로 우리들의 식생활은 바른 궤도로 들기 시작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제 한 발짝만 더 각자가 열심히 연구하면 훌륭한 성과가 얻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침은 가족 전체가 모두 죽으로 정해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 편이 건강에도, 두뇌활동에는 좋다는 것이 저 한사람의 경험은 아니겠지요. 세계에서 가장 요리법이 발달했다는 중국사람들 역시 아침은 죽을 마셔버리면 그만입니다. 점심인 도시락과 죽을 따로따로 만들면 품이 먹힌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런 걱정은 필요 없습니다. 지금까지 끓이던 나물국에 쌀을 넣어서 끓이면 훌륭한 야채 스프 겸 나물죽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반찬은 전부 필요 없어요. 이렇게 하면 별로 시간도 안 걸립니다. 물론 어른들은 아침을 걸러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루 세끼는 전혀 습관일 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이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이면 현재 있는 것으로 기쁘게 이용을 하는 습관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요즘처럼 비교적 야채가 풍부할 때는 야채만으로 때워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침 같으면 쌀은 전혀 없이, 야채만으로 된 스프 한 그릇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옛날의 우리들의 조반을 생각하면 허전할는지 모르지만, 바로 이런 점에서 전쟁하는 국민의 강한 의지와 예리한 이성과 끊임없는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쿵저러쿵 추억을 해도 소용이 없는, 낡은 것에의 미련을 깨끗이 끊어버리고 보다 건강한 지성(知性)으로써 힘차게 새로운 세대를 쌓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꿈에라도 지금은 전시니까 좀 참자라든가, 전쟁만 끝난다면 하는 생각을 갖는다면, 그건 아주 잘못 생각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식생활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잡혀지려 하는 것입니다. 이를 사려물고서라도 확고한 훈련을 해서 바른 식생활을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어야만 합니다. 절대로 아이들에게는 어른들인 우리의 나쁜 습관을 배우게 하거나 해서는 안됩니다. 그네들이야말로, 어떤 난관에 봉착하더라도 태연하게 야채면 야채만으로, 물이면 물만으로라도 영양불량에 안 걸릴 체질과 습관을 몸에 붙여주지 않으면 다음 세대를 짊어지고 나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야말로 전국민이 함께 바른 식생활의 연성(鍊成)에 매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6. 임전대책협의회(臨戰對策協議會)
1941년 8월 28일 {삼천리} 사장 김동환(金東煥)은 임전체제 하에서 자발적인 황민화운동을 실천하기 위한 방안의 일환으로 '우리는 황국신민으로서 一死報國의 誠을 맹서하여 臨戰對策에 전력을 다할 것을 결의'하면서 각계 유력자 198명으로 임전대책협의회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이를 위해 첫째, 물자·노무 공출의 철저 강화책, 둘째, 국민생활의 최저 표준화 운동 방책, 셋째 전시봉고의 義勇化 방책 등을 채택했다.
임전대책협의회는 1941년 9월 4일 부민관 대강당에서 임전대책연설회를 개최하는 한편, 9월 7일에는 일제가 전쟁 비용을 조달하려고 발행했던 1원짜리 꼬마채권을 소화시키기 위해 "총후봉공은 채권으로부터"라는 구호 아래 채권가두유격대를 조직, 화신 앞 등 서울 시내 11개소에서 행인에게 채권을 강매했다.
이때 송금선은 김사연 등 4명과 함께 '경성역대원'이 되어 서울역 앞에서 채권 판매에 참여하였다. 7.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1941년 8월 최린·김동환 계열이 임전대책협의회를 결성할 무렵, 윤치호 계열은 따로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를 소집하고 황국정신의 양양, 강력한 실천력의 발휘, 시국인식의 철저, 근로보국의 강행 등을 실천 강령으로 정하고 활동하였다.
같은 성격의 두 단체가 결성되자 국민총력 조선연맹의 사무국총장 기와기시(川岸文三郞)의 주선으로 두 단체의 통합이 본격 진행되어, 1941년 10월 22일 두 단체의 이름을 절충한 조선임전보국단이라는 친일단체를 출범시켰다.
조선임전보국단의 강령은 다음과 같다. 1. 아등은 황국신민으로서 황도정신을 선양하고 사상통일을 기한다. 2. 아등은 전시체제에 즉하고 국민생활의 쇄신을 기한다. 3. 아등은 근로보국의 정신에 기해서 국민 皆勞의 實을 거두기를 기한다. 4. 아등은 국가 우선의 정신에 기해서 국채의 소화, 저축의 勵行, 물자의 공출, 생산의 확충에 매진하기를 기한다. 5. 아등은 국방사상의 보급을 하는 동시에 유사시에 의용 방위의 실을 거두기를 기한다.
조선임전보국단은 당시 국내의 전 친일파들이 망라되어 조직된 최대의 친일단체였다. 강령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단체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해,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인 황국신민회정책을 추진하고, 일제의 전쟁 승리를 위해 조선 동포를 대상으로 한 인적(근로보국·징병 등) 및 물적 자원(공출, 국방헌금 등)의 수탈에 앞장선 대표적 친일 단체였고, 1942년 10월 29일 국민총력조선연맹에 합류, 해산되었다.
임전보국단은 1941년 12월 4일 임전보국단 전선대회를 열고, 전시하 사상통일의 구체적 방침과 군수자재 헌납운동을 결의한 뒤 부민관에서 '미영타도 대강연회'를 열었다.
이어 1942년 1월 5일 산하기관으로 총후 여성진영을 총망라해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를 발족시켰다. 간사장 林孝貞을 비롯하여 당시 내노라 하는 친일여성들이 대거 참여하였는데, 송금선은 김활란, 박마리아 등과 함께 지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는 1942년 2월 3일부터 근로봉사운동을 전개, 그해 12월경까지 군복수리작업을 벌였다. 즉 근로보국이란 명목 하에 조선 여성을 동원한 강제적으로 여성 노동력을 징발했던 것이다.
한편, 이 시기 송금선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 1942년 5월 10일자에 덕성여자실업학교장 이름으로 '반도여성 책무도 크다'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이 글은 일제가 조선의 젊은이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동원하기 위해 '징병제' 실시를 결정했을 때 이를 환영한 글이다.
징병의 대상이 될 조선 젊은이의 어머니들에게 '천황의 자식으로서 조선의 젊은이에게도 전쟁에 참가할 자격을 준 천황에게 감사드리며 영광스럽게 내 아들, 내 남편을 전쟁터에 보내라고' 촉구한 송금선의 대표적인 친일 글이다. 그 전문을 소개한다.
軍國 어머니 半島女性 責務도 크다 -福澤玲子 女史- "정말이에요? 이렇게 반가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하면서 덕성여자실업학교 교장실에서 福澤玲子 씨는 기쁨에 못이기는 얼굴로 징병제도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직 감격이 가슴에 벅차서 말이 잘 아니 나옵니다. 오늘이야말로 반도 역사를 장식하는 가장 엄숙하고도 광영에 빛나는 날일 것입니다. 오랫동안 바라고 바랬던 것이 이제야 우리들에게 찾아왔으니, 그저 힘껏 외쳐서 이 기쁨과 감격을 2천 4백만이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제는 어디를 가든지 정말로 황국신민이 완전히 되었다는 자랑과 의무를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반도 민중의 시국에 대한 태도는 더욱 철저하여져서, 내 아들 내 동생을 나라에 바쳤다는 절실한 애국심이 북돋우어질 것임에 따라, 1천만 반도 여성들도 군국의 여성으로서 그 책임의 중대함을 더욱 굳세게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앞으로는 반도 지식여성들은 제1선에 서서 훌륭한 군국의 어머니가 되기 위하여 더욱 힘써야 하며 여학교의 생도들도 어디까지 군국의 어머니로서 교육하여야 될 것입니다."
8. 학병 지원 독려 1943년에 접어들면서 일제는 조선의 젊은이들을 침략전쟁에 동원하는데 혈안이 되었고, 여기에 친일파들이 "이로써 반도민중들도 전전으로 일본국민이 되는 것이니 한층 더 각오를 새롭게 하여" 내 아들을 징병에, 학병에 속히 지원할 것을 촉구하였다.
즉 일제는 1938년 2월 23일 공포, 4월 3일 시행인 육군특별지원병제, 1943년 5월 11일의 해군특별지원병제, 1943년 10월 1일 공포한 징병제 등을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기존의 친일 단체는 물론 새로운 친일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져 학병독려에 나섰다.
경성에서는 강창희 등이 1943년 11월 7일 '학도병 경성익찬위원회'을 결성하고 경성부 산하 6개 지역(종로·용산 등) 익찬위원회를 하위 조직으로 하여 학병지원 독려를 위한 전단배포·호별방문 등의 활동지침을 정한 후 11월 10일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호별방문대는 정회총대와 남자위원 2명, 부인위원 2명으로 구성되었다. 11월 13일, 종로익찬위원회는 관내 호별방문대를 조직하여 학병지원을 독려했는데, 이때 송금선은 부인위원으로서 노찬성 등 4명과 함께 '가회정' 방문대원으로 활동하였다.
1943년 11월 15일 조선교화단체연합회에서도 전국 39개 도시에 학병지원의 독력을 위해 부인계몽 독려반인 권설대를 조직하여 파견하였다. 송금선은 충남지역인 대전, 천안, 공주를 담당한 연사로 활동하였다.
9. 조선언론보국회 패전을 눈앞에 둔 1945년 6월 일제는 이른바 '본토결전'을 계획하고 최후 1인까지 죽창으로 싸우기 위해 6월 23일 의용병역법을 실시하고 이에 따라 7월 8일 국민의용대를 결성했다.
12∼65세의 모든 남자와 12∼45세의 모든 여자로서 조직된 국민의용대는 연합국의 본토 상륙에 대비한 최후의 육탄 방위조직이었다.
이러한 일제의 본토결전에 호응하여 친일파들은 1945년 6월 8일 조선언론보국회를 결성하였다. 첫째 조국의 대정신을 현양하고 성전 완수에 매진함, 둘째, 내선일체의 이상을 구현하고 대동아건설에 정진함, 셋째, 언론의 총력을 결집하고 사상전에 감투함 등을 강령을 정하였다.
최린이 회장인 언론보국회에서 송금선은 유진오 등 12명과 함께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0. 기타 - 1936.11.14 국민정신작흥강연 [생활개선에 대하야](매일신보) - 1936.12.21 조선총독부 사회교육과 주최 사회교화진흥간담회 참석(매일신보 27일자) - 1940.7.7 [一菜主義, 폐품헌납](매일신보) - 1940.8.6 [신체제와 여성의 미](매일신보) - 1941.9. 전위여성격려대원으로 1주일 동안 천안, 대전, 공주지역 순회 강연 [일본여성의 갈 길] - 1941.9. '戰時國民生活强調座談會' 참석({朝光} 1941년 9월호) - 1941.9.19 부인궐기 촉구 강연 경기도 강사, [戰局認識과 징병징용제의 철저] - 1941.12.9 친일지 {경성일보}에 [최저국민생활은?]이란 담화 발표. - 1942.1.7 7시 30분 경성중앙방송에 출연 [生活戰에도 이기자] 방송. - 1944.2.16 [내직(부업)으로 저축을](매일신보) - 1944.4.11 [물리칠 봄의 향락―마음 바루잡고 決戰場에](매일신보) - 1944.5.10 [구호와 간호쯤은 부인상식으로 아라둘 것](매일신보)
■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 참고문헌 {去華就實}(南海 宋今璇박사 회고록, 1978) {民族正氣의 審判}, 혁신출판사, 1949 고원섭 편, {反民者罪狀記}, 백엽문화사, 1949 민족정경문화연구소 편, {親日派群像}, 삼성문화사, 1948 임종국 지음, 반민족문제연구소 편, {실록 친일파}, 돌베개, 1991 송건호, {韓國現代史論}, 한국신학연구소, 1979 장하진, [여류명사들의 친일행적] {역사비평} 9호(1990년 여름호) {每日申報} {每日新報}(1939년 이후 改名) {조광} 기타 『동아연감』(동아일보사, 1988) 「친일파가 된 여성 교육선각자들」(조병래·임경구·전홍기혜, 『프레시안』, 2002.3.8) 친일파 죄상기, 김학민 정운현 엮음, (민족정기의 심판: 35, 54, 130p, 친일파 군상 : 391, 437, 450, 454p) 김삼웅 (1995년 2월 1일). 〈송금선 : "반도 지식여성들 군국어머니로 힘쓰자" (김민철)〉, 《친일파 100인 100문 - 친일의 궤변, 매국의 논리》.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704 조병래·임경구·전홍기혜 기자. “친일파 된 여성 교육선각자들 - <자료입수> 김활란 등 선각 여성 5인의 친일행적”, 《프레시안》, 2002년 3월 8일 작성. 2008년 2월 6일 확인.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이하 의원모임)이 28일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708명의 명단은 향후 선정의 공정성과 객관성, 심의의 적격성을 두고 논란이 치열할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공과(功過)에 대해 정파적 이해(利害)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데다 전문지식까지 결여한 국회의원들이 일도양단(一刀兩斷) 식으로 규정한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비판도 일고 있다. 공과 구분 없는 심사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황태훈 기자 yyc11@donga.com 동아일보 2002.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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