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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朝鮮王陵] 능(陵) - 10 (2)제27대 순종황제(純宗) _ 유릉裕陵, 영원英園, 숭인원崇仁園, 회인원懷仁園

草霧 2013. 8. 19. 19:00

 

 

 

조선왕릉[朝鮮王陵] 능(陵) - 10

 

 

 

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 - 10

 

    

(2) 제27대 순종황제 (純宗, 1874-1926)

 

 

유릉20091129-2.JPG

 

_ 유릉裕陵, 영원英園, 숭인원崇仁園, 회인원懷仁園

 

왕릉은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들의 무덤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왕릉은 42(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40, 14, 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3, 4, 5)입니다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폐위(廢位)된 묘() 2()

황제릉(皇帝陵) 2()

왕릉 35

 

 

 

 

 

 

1. 추존이라는 미명으로, 역사세우기

 

추존(追尊)함길도 8

 

 

2. 왕조, 문을 열다

 

1대 태조 (太祖, 1335-1408) _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 정릉 貞陵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2대 정종 (定宗, 1357-1419) _ 후릉 厚陵

 

3대 태종 (太宗, 1367-1422) _ 헌릉 獻陵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4대 세종 (世宗, 1397-1450) _ 영릉 英陵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5대 문종 (文宗, 1414-1452) _ 현릉 顯陵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6대 단종 (端宗, 1441-1457) _ 장릉莊陵, 사릉思陵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7대 세조 (世祖, 1417-1468) _ 광릉 光陵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추존(追尊)왕 덕종 (德宗, 1438-1457) _ 경릉 敬陵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8대 예종 (睿宗, 1450-1469) _ 창릉昌陵, 공릉恭陵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9대 성종 (成宗, 1457-1494) _ 선릉宣陵, 순릉順陵, 회묘 懷墓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3. 왕조, 산을 넘다

 

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_ 연산군묘 燕山君墓

 

11대 중종(中宗, 1488-1544) _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 泰陵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12대 인종 (仁宗, 1515-1545) _ 효릉 孝陵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13대 명종(明宗, 1534-1567) _ 강릉 康陵, 순창원 順昌園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14대 선조 (宣祖, 1552-1608) _ 목릉 穆陵, 성묘 成墓, 순강원 順康園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4. 조선, 또 다시 위기를 맞다

 

15대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_ 광해군묘 光海君墓

 

추존(追尊)왕 원종 (元宗, 1580-1619) _ 장릉 章陵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5. 왕조, 반석을 다지다

 

16대 인조 (仁祖, 1595-1649) _ 장릉 長陵, 휘릉 徽陵, 소경원 昭慶園, 영회원 永懷園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6. 조선, 당쟁에 휩싸이다

 

17대 효종 (孝宗, 1619-1659) _ 영릉 寧陵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18대 현종 (顯宗, 1641-1674) _ 숭릉 崇陵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7. 환국정치로 왕권을 다지다

 

19대 숙종 (肅宗, 1661-1720) _ 명릉明陵, 익릉 翼陵, 대빈묘大嬪墓, 소령원昭寧園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20대 경종 (景宗, 1688-1724) _ 의릉懿陵, 혜릉惠陵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8. 조선, 르네상스를 맞다

 

21대 영조 (英祖, 1694-1776) _ 원릉元陵, 홍릉弘陵, 수경원綏慶園, 수길원 綏吉園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추존(追尊)왕 진종(眞宗) _ 영릉永陵

 

추존(追尊)왕 장조(사도세자 莊祖) _ 융릉隆陵, 의령원 懿寧園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22대 정조(正祖, 1752-1800) _ 건릉健陵, 휘경원徽慶園, 효창원 孝昌園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9. 조선, 세도정치에 휘둘리다

 

23대 순조 (純祖, 1790-1834) _ 인릉仁陵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추존(追尊)왕 익종 (翼宗, 문조 文祖) _ 수릉綏陵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24대 헌종 (憲宗, 1827-1849) _ 경릉景陵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25대 철종 (哲宗, 1831-1863) _ 예릉睿陵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10. 오백 년 왕조, 문을 닫다

 

26대 고종황제 (高宗, 1852-1919) _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 흥원 興園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27대 순종황제 (純宗, 1874-1926) _ 유릉裕陵, 영원英園, 숭인원 崇仁園, 회인원 懷仁園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2) 제27대 순종황제 (純宗, 1874-1926)

 

 

_ 유릉裕陵, 영원英園, 숭인원崇仁園, 회인원懷仁園

 

 

경술국치로 나라 잃고 망국왕 신세가 되다

 

유릉 裕陵

 

유릉20091129-2.JPG

 

 

순종 (純宗, 이척, 1874-1926, 재위 4), 황후(皇后) 순명효황후, 계후(繼后) 순정효황후,

1926, 경기 남양주 207, 홍유릉( 洪裕陵)

 

 

27대 순종(純宗) 유릉 첫번째 작은이미지27대 순종(純宗) 유릉 두번째 작은이미지27대 순종(純宗) 유릉 세번째 작은이미지

 

 

 

 

26대 고종(高宗) 홍릉 유릉은 조선 제27대 순종황제와 비 순명(純明)황후 민씨와 계비 순정(純貞)황후 윤씨의 동릉삼실(同陵三室)의 능이다. 능제는 홍릉과 같이 황제릉의 제도로 조영(造營)하였다. 유릉은 홍릉의 청룡애에 있으며 묘입수묘좌의 십자통기형(十字通氣形)을 이루고 있다.이 능은 당시의 지관이덩 전기응씨가 주가되어 선정한 것이다. 전씨가 친히 말한 바처럼 십자통기혀은 지맥이 팔자형을 하여 내려다 보이는 것과 반대로 아래에서 역으로 팔자형을 이루어 거팔내팔(去八來八)이 서로 교차하는 양측에 하나씩 솟아오른 언덕이 있다. 이것이 좌우종사이며 거팔내팔과 서로 응해서 십자형을 이루는 중심에 분묘를 정한 것이다.

 

조선 제27대 국왕이자 마지막 임금이며 황제인 純宗(이척 : 1874-1926, 재위 4)과 황후(皇后) 순명효황후 민씨(純明孝皇后閔氏 : 1872-1904)와 계후(繼后) 순정효황후 윤씨(純貞孝皇后尹氏 : 1894-1966)를 모두 함께 합장(合葬)한 유릉(裕陵)은 역시 고종의 홍릉과 함께 황제릉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유릉의 조성 시기는 처음 순명황후가 순종 즉위 전인 1904년에 황태자빈으로 승하해 서울 뚝섬 근처에 유릉으로 장사를 지냈는데, 순종이 승하한 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합장을 했고 그 뒤 계후인 순정황후가 1966년에 승하하고 유릉에 함께 합장을 해서 지금까지 오고 있습니다.

 

27대 순종(純宗) 유릉 큰이미지능의 제도는 홍릉과 마찬가지로 종래의 정자각(丁字閣) 대신 정면 5, 측면 4칸의 침전(寢殿)을 세웠고 그 앞에 양쪽으로 문무석(文武石)을 세우고, 홍살문까지 기린, 코끼리, 해태, 사자, 낙타, 말 두 마리의 순으로 석수(石獸)를 세워놓았습니다. 역시 문인석은 금관을 쓰고 있는데, 석물들이 보다 사실적인 모습을 하고 있고 봉분에도 홍릉과 같이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고 있습니다.

 

유릉은 조선의 마지막 왕릉이며, 조선 왕릉 중 한 능침에 세 명의 수장자를 합장한 유일한 동봉삼실형이다. 겉으로 보기엔 봉분이 하나여서 단릉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 순종과 그의 두 왕비가 잠들어 있다. 홍릉과 같은 황제릉 양식으로 조성하여 정자각 대신 침전이 자리하고, 기린, 낙타, 코끼리 등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다양한 형태의 석물이 있다.

 

홍릉에 비해 능역 규모가 다소 좁긴 하지만, 문무석인을 비롯하여 전체 석물의 조각은 홍릉의 것보다 사실적이면서 뛰어난 수법이 보인다. 특히 문석인은 특정인을 모델로 한 것처럼 사실적인 조각 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홍릉의 문석인과 같이 머리에 금관을 쓰고 있다. 능침 주변에는 화문을 새긴 병풍석과 난간석이 둘러져 있고, 가운데 혼유석과 사각 장명등이, 양 옆에는 망주석이 새워져 있다. 홍살문과 침전의 바깥 공간에는 어정(御井)이란 이름의 우물터가 남아 있다.

 

순명효황후는 순종이 즉위하기 전인 1904(광무 8) 115일 경운궁에서 세자빈의 신분으로 춘추 33세에 승하하였다. 오늘날의 성동구 능동에 있는 어린이대공원인 양주땅 용마산 기슭의 유릉에 같은 달 29일 안장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1926425일 순종이 53세로 승하하자 그 해 611일 순종을 홍릉 왼쪽 산줄기 언덕에 장사지내면서 순명효황후의 능을 천장해 와 합장하였다. 순종의 인산일인 610일에는 일반 백성들에 의한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966년에는 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가 113일 춘추 71세로 창덕궁 낙선재에서 승하하여 유릉에 함께 안장하였다.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1874(고종 11) 28일 창덕궁에서 고종(高宗)과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68년에 후궁인 영보당(永保堂) 이씨가 아들(완친왕)을 낳았었으나 적손이 아니었고, 형은 태어 난지 4일 만에 죽어 순종이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897(고종 34) 918일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하고, 임금을 황제(皇帝)로 칭한다는 선포에 따라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일본의 강압에 의해 고종이 물러나고, 순종이 610일부터 대리청정을 하다가 719일에 덕수궁에서 즉위하였다.

 

순종 비 민씨는 여은부원군 민태호(閔台鎬)의 딸로 1872(고종 9) 1020일 출생하여, 1882219일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며, 1897919일에 황태자비로 책봉되었으나 1904(고종 41) 928일에 덕수궁에서 33세에 승하하였다.

 

당시에 장지선정에 참여한 상지관 9명 모두가 용마산(龍馬山) 아래 장지(현 서울어린이대공원)에 대한 흠을 누구도 언급을 하지 않았다. 상지관들이 보고한 내용을 보면 내룡은 변화가 있어 살아 움직이고, 혈은 모양이 확실하여 기운이 응집되어 있고, 청룡과 백호는 연꽃잎처럼 겹겹이 혈을 감싸고 있으며, 혈 주변을 흐르는 명당수도 혈을 감싸 돌 뿐더러, 혈 앞의 공간은 평평하면서도 반듯하고, 앞에 있는 산들은 혈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다소곳하고, 혈토는 오색 빛깔을 띠며 윤기가 난다.”고 평가 하였다.

 

    홍유릉-홍유릉 홈페이지를 찾아주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고종은 그 자리에 황태자비를 19041129일 장사(卯坐酉向)지내고, 원호를 유강원(裕康園)이라 내렸다가 후에 유릉(裕陵)이라 올렸다. 1910725일 한일병합조약으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던 순종황제가 1926314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53세의 일기로 승하하자 장지를 금곡(金谷) 홍릉(洪陵)국내 왼쪽 언덕에 조성하고, 순명황후를 그 해 425일 용마산에서 옮겨와 먼저 장사(卯坐酉向)를 지냈다.

 

2009년 8월 15일 의친왕 기신제
2009년 8월 15일 의친왕 기신제
고종황제 기신제
고종황제 기신제
2008년도 의친왕 기제향 사진과 황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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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의친왕 기제향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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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22일 덕혜옹주 기제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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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의친왕 이강 전하 기제향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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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유릉에 사는 두꺼비
홍유릉에 사는 두꺼비
영원 산책로
영원 산책로

 

 

다음 달 2일에 순종을 순명황후 오른쪽에 합장으로 장사지내고, 순명황후 능호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계후 순정황후(純貞皇后) 윤씨는 해풍부원군 윤택영(尹澤榮)의 딸로 1894(고종 31) 820일에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19061211일에 황태자비로 책봉되었다가 1907719일에 민씨와 함께 황후로 책봉되었고, 19651222일 창덕궁 낙선재에서 승하하여 유릉에 합장하였다.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272유릉은 산의 끝 부근이 아닌 산줄기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주산에서 내려오던 산줄기가 왼쪽으로 방향을 돌리면서 생긴 약간 두툼한 곳을 혈장이라고 판단하여 능을 조성한 것이다. 조선시대 잡과 지리학(地理學) 고시과목이었던 진나라 곽박(郭璞)이 쓴 장서(葬書)에 보면 독산(獨山, 다른 산에서 갈라져 나오지 않고 홀로 생긴 산), 동산(童山, 풀과 나무가 자라지 않은 벌거벗은 산), 석산(石山, 바위 산), 단산(斷山, 산줄기가 끊긴 산), 과산(過山, 산의 기운이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가는 산)”에는 장사를 지낼 수 없다하여 5대 불가장지(五代不可葬地)라고 말하고 있다. 유릉은 산줄기가 재실의 뒤를 지나 주차장까지 흘러나가 5대 불가장지의 하나인 과산이다.

    

그나마도 혈장보다 앞이 높은 역룡(逆龍)의 기운까지 더하고 있어 아주 좋지 않은 땅에 조성되어 있는 것이다. 과산은 주산에서 내려오는 좋은 기운이 유골에 전해지지 못하고 앞으로 흘러내려가며, 주산에서 내려오는 강하고 딱딱하고 거친 기운의 영향만 미친다는 불가장지다. 또 유릉은 고종황제의 능인 홍릉과 더불어 유골이 도망간다는 도시혈(逃屍穴)로 의심을 받는다. 이 말은 아마도 토질이 단단하지 못하여 소나무들이 능침을 향하여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생긴 오해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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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소나무가 능침을 향하여 기울어져 있을 뿐 끝이 다시 하늘로 향하여 자라지 않은 것으로 보아 도시혈은 아니다. 즉 햇볕이 많이 드는 능 쪽으로 가지가 무성하게 자라 무게중심의 영향으로 소나무가 능 쪽으로 기울었을 뿐이다. 뿌리가 흘러가 기울어졌다면 기울어진 반대방향으로 나무는 일어서면서 다시 자라기 마련이다. 그러나 토질이 단단하지 못하고 무른 땅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순종의 장례를 주관한 이왕직 장관 민영기 (閔泳綺, 1858~1927)

 

순종의 옥체를 모시고 궁을 떠나 능으로 가는 행렬이다. 일본군이 호위하고 있다. (사진제공:국립고궁박물관 자문위원 이혜원)

 

 

순종실록부록192655일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본직(本職)장관(長官) 남작(男爵) 민영기(閔泳綺)가 오늘 인산 및 천릉(遷陵)할 때에 각 항의 길일을 회의하여 택일하였는데, 유릉(裕陵)에 풀을 베고 흙을 파헤치는 일을 처음 시작할 날을 57일 오후 2시로 하고, 개금정(開金井)518일 오전 10시로 하고, 발인(發靷)610일 오전 8시로, 임금의 하현궁(下玄宮)611일 오후 10시로, 천릉하였다고 구릉(舊陵)에 계()를 올리는 것은 521일 오전 8시로, 발인은 64일 오전 6시로, 하현궁은 65일 오전 6시로 한다고 입계(入啓)하였다.

 

순종의 옥체를 모시고 궁을 떠나 능으로 가는 행렬이다. 일본군이 호위하고 있다. 선왕이 승하하면 국장 절차 중 하나로 세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즉위식이 치러지며, 새로운 왕은 선왕의 장례 일체에 관한 사항을 지시하고 결정한다. 그러나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승하하자, 조선 왕실 관련 업무를 맡기기 위해 개설한 관청 이왕직의 장관 민영기가 순종의 장례를 주관하였다.

 

민영기(閔泳綺, 1858~1927)

한말의 척신이다. 1879년(고종 16) 무과에 급제, 1883년 운봉현감을 거쳐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892년 충주목사, 이듬해 상주목사를 지내고, 갑오개혁 뒤 일본에 신사유람단 일원으로 파견되었다. 1898년 군부대신에 올라 수구파(守舊派)의 거물로서 황국협회를 조직, 보부상을 동원하여 독립협회를 탄압하였다. 1899년 농상공부대신이 되고, 안경수사건(安?壽事件)으로 고군산(古群山)에 유배되었다. 1902년 특별 방면 되고, 1905년(광무 9) 탁지부대신으로 을사조약에 반대하였다. 국권피탈 뒤 일본 정부의 남작(男爵)이 되고, 동양척식회사 부총재, 이왕직장관을 지냈다. 

 

왕릉과 황제릉의 차이

 

    흥릉의 참도 왼쪽으로 석물들이 줄지어 서있다. 코끼리, 해태등 다른 조선 왕릉에서 보지 못한 생소한 동물들이다.

 

1. 조선 왕릉의 변천사

조선 왕릉 석물의 배치와 구조는 기본적으로 큰 변화 없이 오랜 기간 반복되었지만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나 당대 왕의 의지에 따라 약간씩의 변화가 있어 왔다. 1기는 태조의 건원릉(1408)에서부터 문종 현릉(1452)으로 조선 왕릉의 기본형식을 갖춘 시기이다. 2기는 세조의 광릉(1468)에서부터 숙종 익릉(1681)까지로 석물의 전반적인 배치나 표현상에서 조선 왕릉 특유의 조각 양식이 확립된 시기이다. 3기는 인조의 장릉(1731)에서부터 철종의 예릉(1864)까지이며 병풍석이나 장명등의 형태에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고 조각의 비례가 바뀐다. 4기는 황제릉이 조성된 시기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라 칭하면서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이 황제릉의 형식을 취하였다. 이에 더하여 유릉의 석물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2. 왕릉과 황제릉의 차이

홍릉과 유릉은 조선의 국명을 대한제국으로 바꾸면서 황제라 칭한 고종과 순종의 능이다. 황제릉으로 조선 왕릉과 몇 가지 차이가 있다. 첫째는 신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어도가 설치되어 참도가 3개의 단으로 되어있는 것이다. 둘째는 조선 왕릉의 정자각에서 월대로 올라가는 계단이 정자각의 좌우에 설치되어 있는 것과 달리 정자각을 대신하는 침전(寢殿)의 정면에 설치되어 있어 홍살문과 직선축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능상구역의 봉분 앞에 위치하던 석물이 참도에서 침전 사이로 배치되어 있으며 이것은 중국 황제릉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넷째는 말기에 보인 비각의 위치인데, 홍릉 역시 비각이 정자각과 수평을 이루고 있다.

 

3. 정자각이 침전으로

홍릉과 유릉에서는 정자각이 ()’자의 평면 형태에서 ()’자형으로 변화되었고, 그 이름 또한 침전으로 변경되었다. 침전이라는 용어는 궁궐건축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임금의 숙소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지붕형식 또한 맞배지붕에서 팔작지붕으로 변경되었으며, 정면 5, 측면 4칸으로 건설되었다. 월대의 형태는 건물의 영향을 받아 자형에서 자형으로 바뀌었고, 화강석의 장대석으로 기단이 축조되었다. 바닥의 마감도 전돌로 되어 있고, 월대의 계단위치 및 개수가 이전의 정자각과 다르게 침전의 좌우로 각각 2, 전면으로 3개가 배치되었다. 또한 전면의 계단이 생김으로 해서 침전에서 홍살문까지 참도가 직선으로 설치되었다.

 

4. 양과 호랑이 대신 들어선 기린과 코끼리

흥릉의 참도 왼쪽으로 석물들이 줄지어 서있다. 코끼리, 해태등 다른 조선 왕릉에서 보지 못한 생소한 동물들이다. 황제릉인 홍릉과 유릉의 또 하나의 큰 특징은 석물이 능하 구역으로 내려온 점이다. 능원의 기본 석물인 문무석인과 동물상이 침전 앞 신도로 내려오면서 석호와 석양이 사라졌고 대신에 중국 명나라 황제릉에 보이는 다양한 동물상이 등장한다. 우선 문석인과 무석인이 차례로 마주보고 서고, 그 뒤로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이 순서대로 신도의 양쪽으로 정렬하고 있다. 이러한 상설이 유릉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데, 단 유릉의 경우는 서양식 조각수법이 더욱 많이 반영되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 이야기

 

마지막 황실의 일원들.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 순명황태후, 덕혜옹주

 

 

1. 대한제국의 탄생

1863(철종 14) 12월 조선 25대 왕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가 바로 고종이다.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고종은 대비의 수렴청정과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지휘 아래 10년의 세월을 보냈다. 1873(고종 10)에는 마침내 친정을 선포하지만, 아버지와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외척인 민씨 일가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하여 고종의 입지는 굳건하지 못하였다.

 

2. 마지막 황실의 일원들.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 순명황태후, 덕혜옹주

이러한 와중에 나라는 안팎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나라의 곤궁과 개방의 압력 속에 지배층은 개화파와 수구파로 나뉘었고,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혁명 등이 잇따라 일어났다. 조선의 왕실은 이에 속수무책이었으며, 사건들을 수습하기 위해서 일본, 러시아, 청나라 등의 열강의 힘을 빌어야 했다. 고종은 쇄신의 의미에서 18971012일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위에 올랐으며, 연호를 광무라고 하였다.

 

3. 현대사를 함께한 마지막 황실의 일원들

한일합병조약의 체결 후 순종은 황제위에서 이왕(李王)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거처하다가 1926년 승하하였다. 홀로 남겨진 순종의 부인 순정효황후는 창덕궁 낙선재에서 일제 강점기과 1945년의 광복, 다시 5년 후의 6.25 전쟁 등 한국 현대사의 슬픈 나날을 지켜보다가 19667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자 순종의 이복동생인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일제 강점기 당시의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하여 11세 때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인 마사코(이방자)와 결혼하였고, 1970년에 세상을 떠났다. 영친왕과 마사코 사이에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는 생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고 둘째 아들 이구는 멸망한 황실의 마지막 황세손으로서 극적인 삶을 살다가 200574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창덕궁 낙선재에 빈청을 마련하였으며, 영친왕이 잠들어있는 영원에 안장되었다.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

 

 

  

순종 (純宗, 이척, 1874-1926, 재위 4)

고종(高宗)과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슬하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순종(純宗)1875[고종 12]에 세자(世子)가 되었으며 1897년에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황태자(皇太子)로 책봉됩니다. 1907년에 일본의 압력과 이완용(李完用) 등의 강요로 헤이그 밀사사건의 책임을 지고 고종이 양위(讓位)하자 황제(皇帝)로 즉위해 연호(年號)를 융희(隆熙)로 삼습니다.

 

하지만 외교권을 박탈당해 독립국의 실권을 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망국의 길을 걷고 있었던 대한제국은 순종 즉위년에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을 체결하였고, 이에 따라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어 내정감독권마저 일본으로 넘어갑니다. 그해 8월에는 한국군을 해산하였으며, 12월에는 순종의 동생이었던 황태자 영친왕(英親王)이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볼모로 잡혀갔고, 1908년에는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의 설립을 허가하여 경제침탈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 후 일본의 노골적인 야욕은 더욱 심해져 1909년에 군부(軍部)와 법부(法部)를 각각 폐지하여 정치조직을 통감부 기능 속에 흡수시키고, 통감(統監)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서 소네 아라스케[曾荒助]를 거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후임으로 오게 되는데, 이에 대한 우리 민족의 저항은 통탄과 비난을 넘어 암살을 기도하기까지 합니다. 동년 10월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고 12월에는 이완용(李完用)을 습격하기 했지만 일제의 야욕을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1910829일에 합방의 조인서에 옥새가 찍혀 국권을 강제로 빼앗기는 경술국치를 당해 조선왕조는 27519년만에 망하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후 일본은 순종을 창덕궁(昌德宮)에 있게 하고, 이왕(李王)이라 불렀는데, 순종은 망국의 한을 삼키고 1926425일 창덕궁에서 53세로 승하합니다.

 

순종은 1874(고종 11) 28일 창덕궁 관물헌에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다음해인 1875218일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882(고종 19) 여흥부원군 민태호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했으며, 1897(광무 1) 대한제국의 수립과 함께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904년에 세자빈으로 맞이했던 순명효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딸을 황태자비로 맞이했다. 그리고 1907719일 일본의 협박과 친일파 대신들의 강요로 황위에서 물러나게 된 고종의 양위를 받아 황제로 즉위했고, 연호를 융희로 고쳤으며, 동생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순종 즉위 직후인 1907(융희 1) 724일 일본은 한국을 병합하기 위한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을 강제로 체결하고, 1910(융희 4) 822일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했다. 조선 왕조는 27519년만에 멸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순종은 황제위에서 이왕(李王)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거처하며 망국의 한을 달래다가 192642553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구차히 산 지 17, 2천만 생민(生民 : 국민)의 죄인이 되었으니 잠시도 이를 잊을 수 없다. 지금의 병이 위중하니 한 마디 말을 않고 죽으면 짐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이 조칙을 중외에 선포하여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을 백성들이 분명히 알게 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과 양국의 조칙은 스스로 파기에 돌아가고 말 것이리라. 백성들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어둠 속에서 여러분을 도우리라.

 

1926425일 새벽 615, 평소 병약했던 조선 27대 임금 순종이 53세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위와 같은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신문에는 '5백 년 종사의 마지막 황상(皇上) 승하'라는 제목의 기사가 전면을 장식하였다. 그 해 610일 발인하였는데, 순종의 발인 행렬이 유릉을 향하여 창덕궁 돈화문을 나서 단성사 앞을 지날 때였다. 황제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러 나온 수많은 군중 속에서 수천 장의 격문이 날아오르며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마지막 황제의 인산일을 기하여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순종의 마지막 유언을 백성들이 알 리 만무하였으나, 마지막 국왕의 죽음은 백성들의 독립에 대한 욕망을 더욱 고조시키게 된 것이다.

 

 

 

 

일본의 침략이론 동양평화론에 대한 조선인의 이해

마지막 황제의 선물, 6·10만세운동

망국의 황제

조선의 멸망

조선 멸망후의 순종, 이왕

이 해 6 10일 그의 국장이 치 러지게 되는데 과거 고종 인산날에 일어났던 3.1 만세운동에 이어 6.10 만세운동이 일어난다

 

 

 

 

 

 

 

 

 

 

 

황후(皇后) 순명효황후 민씨 (純明孝皇后 閔氏, 1872-1904)

순명효황후는 여흥(驪興) 민씨(閔氏) 여은부원군(驪恩府院君) 민태호(閔台鎬)의 딸로 1872[고종 9]에 태어나 11세 때에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순종(純宗)이 즉위하기 전인 1904[광무 8]33세로 승하해 지금의 뚝섬 앞 용마산 기슭에 유릉(裕陵, 유강원(裕康園))으로 조성했다가 순종 승하 후에 지금의 위치로 천장(遷葬)해 합장(合葬)합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

    

 

계후(繼后) 순정효황후 윤씨 (純貞孝皇后 尹氏, 1894-1966)

1894[고종 31]에 해평 윤씨(海平尹氏)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 윤택영(尹澤榮)의 딸로 태어난 순정효황후는 13세 때인 1906년에 황태자의 계비(繼妃)로 책봉되어 다음해 순종이 즉위하자 황후(皇后)가 됩니다. 일설에 순정효황후는 이완용이 한일합방(韓日合邦)의 조인서에 옥새(玉璽)의 날인을 시도하자 옥새를 치마 속에 감추고 버티다가 숙부이기도 했던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겼다고 일화가 전합니다. 슬하에 후사 없이 창덕궁내 낙선재(樂善齋)에서 말년을 보내면서 불교(佛敎)에 귀의하기도 했는데, 1966년에 72세로 승하해 조선의 마지막 황후로 운명을 다합니다.

 

 

 

 

 

 

 

 

격랑의 한일근세사를 살아온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전하!

 

영원 英園

  

 

 

의민태자 영친왕 이은 (懿愍太子 英親王 李垠, 1897~1970),

부인 의민태자비 이방자(李方子, 1901~1989),

1970, 경기 남양주 207, 홍유릉(洪裕陵), 비공개지역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英親王, 1897~1970)과 방자비의 합장묘이다. 영친왕의 이름은 은()이며 고종의 일곱째 아들로, 어머니는 귀비 엄씨이다. 순종과는 이복형제간이다. 1900(광무 4) 영왕(英王), 1907(융희 1)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1907년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다.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의해 강탈되면서 융희황제(순종)가 이왕(李王)으로 폐위되자, 그도 황태자에서 왕세제가 되었다. 1920년 일본의 정책에 따라 일본 왕족 나시모토 마사코(方子)와 정략결혼을 했다. 1921년 얻은 아들 진()은 다음해 한국 첫 방문길에 잃고, 1931년 둘째 아들 구()를 얻었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형식상 왕위계승자가 되어 이왕으로 불렸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귀국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 1963년 국적을 회복하고 방자비와 함께 귀국했다. 영원은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 내에 있다.

입구에는 제실이 있으며, 묘역에는 나지막한 담장을 두르고 그 안에 봉분과 석물을 조성하였다. 제실은 정면 6, 측면 2칸의 일자형 팔작지붕 건물로 다른 곳에 비해 아담한 편이다. 봉분은 둘레돌 대신 연꽃 문양을 조각한 난간석을 둘렀고, 봉분 앞으로 석양(石羊상석(床石망주석(望柱石장대석(長臺石문인석(文人石무인석(武人石마석(馬石장명등(長明燈)을 두었다. 상석은 4개의 북석으로 받치고 있는데 북석에는 귀신을 쫓아 준다는 귀면(鬼面)무늬가 새겨져 있다. 또 망주석의 받침돌은 팔각형으로 그 위에 안상(眼象)문양과 꽃잎이 위로 향한 꽃문양, 그리고 청설모를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문인석으로 금관조복형(金冠朝服形)이며, 장명등은 사각형의 받침대 모양으로 사방에 꽃문양을 새기고 그 위에 불창을 만들었다. 묘역은 해방 이후에 조성되었지만, 그 형태나 조각이 홍릉·유릉의 영향을 많이 받아 양식이 비슷하다.

 

 

 

 

이 외에 홍유릉 능역 안에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며 고종의 후궁 귀인 장씨의 소생인 의친왕(義親王, 1877~1955)의 묘, 고종의 후궁인 광화당(光華堂, 1887~1970) 이씨의 묘, 고종의 후궁인 삼축당(三祝堂, 1890~1972) 김씨의 묘, 고종과 후궁 귀인 양씨의 딸인 덕혜옹주(1912~89)의 묘, 그리고 의친왕 계비인 수인당 묘가 있으며, 영친왕의 아들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 이구의 회인원이 최근 2005년 조성되어 있다.

 

어쨌든 홍유릉은 황제의 능이다. 일제의 입김에 의해 다소 요상하게 조성되긴 했지만 황제의 능이다. 홍유릉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30~ 40분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면 오솔길이 끝나는 부분에 작은 무덤이 보인다. 규모는 작으나 홍살문, 참도, 정자각, 비각 등을 갖췄다. 영친왕과 비 이방자 여사가 잠들어 있는 영원(英園)이다. 홍유릉에서 함께 관리한다. 비공개이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李垠). 고종의 넷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귀비 엄씨(貴妃嚴氏)이다. 순종과는 이복형제간이다. 1900(광무 4) 8월 영왕(英王), 1907(융희 1) 황태자에 책봉됐다. 190712월 이토 히로부미 통감에 의해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다. 1910년 국권이 일제의 의해 강탈되면서 융희황제(隆熙皇帝 : 뒤의 순종)가 이왕으로 폐위되자, 그도 황태제에서 왕세제(王世弟)가 됐다. 1920년 일본의 흡수정책에 따라 일본 왕족 나시모토노미야의 딸 마사코와 정략결혼을 했다.

 

1926년 순종이 죽자 형식상으로 왕위계승자가 돼 이왕이라고 불렀다. 일본에 억류돼 있는 동안, 일본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을 거쳐 육군중장을 지냈다. 물론 허울뿐인 계급이다. 일제가 그에게 사단장, 군단장 등의 지휘관 직책을 부여 할 리 만무하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귀국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그 뒤 1963년까지 일본에 머물렀다. 1963년 국적을 회복하고 귀국하려고 했으나 귀국 당시 이미 뇌혈전증으로 인한 실어증에 걸려 있는 상태였다. 영친왕으로 불러야 하나? 영왕으로 불러야 하냐는 논란도 있다. 이은씨는 대한제국이 수립된 뒤에 태어났기에 처음부터 신분이 '황제의 아들'이었고 1900년에 '영친왕(英親王)'에 책봉됐다. 왕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 '황제의 아들로 태어난 왕' 에게는 친왕(親王) 이라는 호칭을 쓴다. 이은씨는 친왕이었고, 왕호에 붙여준 이름이 '()'이라서 '영친왕(英親王)'이 된 것이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고종황제가 내린 조서나 각종 제도 등에 모두 '영친왕'이린 왕호를 쓴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가 1907년 친왕보다 격이 높은 황태자로 책봉되자 영친왕이란 왕호가 공식 폐지됐다 (순종실록 순종 1824일조 참조).

 

그런데도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측은 "이은씨는 '영왕'으로 책봉됐으며 영친왕이란 표현은 일본 황실이 예우의 명목으로 붙인 것" 이라는 주장을 하며 '영왕 이은'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도 바르게 고쳐야 한다. 종약원 측 주장의 근거는 이렇다. 천황 정비에게서 난 아들(황자)과 그런 아들이 정식 아내에게서 낳은 아들(황손) 외에 천황의 형제가 친왕이 된다. 따라서 이런 일본 황실 전범 규정을 고려할 때 이왕에 대한 친왕 책봉은 특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일본이 조선왕실을 포섭하려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라는 것이다.

 

 

 

 

영친왕은 1907년 황태자에 책봉됨과 동시에 그해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11세 나이로 일본 유학을 가게 된다. 이때 고종과 엄황귀비가 황태자가 방학 때 마다 본국을 방문할 것을 조건으로 유학을 허락하지반, 영친왕은 이후 엄황귀비가 사망하는 1911년까지 귀국하지 못했다. 1910년 일본과 대한제국이 강제 합병되면서 왕세자 이은으로 강등됐고, 1926년 이복형 순종이 사망하자 조선 이왕으로 불리게 됐다. 고종은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립되기 전에 민갑완(1897~1967)이란 소녀를 영친왕의 반려로 내정해 이미 약혼예물까지 교환했지만, 일본정부는 조선왕세자의 부인을 일본 여인으로 앉히려 그 약혼을 강제로 파기하고 일본황족인 나시모토궁 수정왕의 맏딸 마사코(이방자)를 영친왕의 약혼녀로 공개했다(1916). 고종은 이에 대단히 분개하며,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역정을 냈지만 무력한 분노에 불과했다. 1919년 영친왕과 마사코의 결혼식이 예정된 그해에 고종은 돌연 사망하게 돼 다음해인 1920년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그 다음해인 1912년 첫 아들 진을 낳지만, 1922년 마사코비가 생전 처음 방문한 조선에서 아들 진을 잃었다. 그리고 1931년 둘째 아들 구(1931~2005)를 낳았다.

 

영친왕은 조선왕실의 재산과 일본정부가 지급하는 연금으로 당시 일본 왕족 중에서는 가장 부유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이 독립하게 되면서 영친왕과 마사코비 모두에게 일본왕족의 자격이 박탈돼 재산을 몰수당했다. 영친왕은 해방된 조국에 돌아오고 싶어 했지만, 이승만 정부는 영친왕의 귀국을 거부했다. 그렇게 고국을 그리다가 196311월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의 주선으로 국적을 회복하고 이방자 여사와 함께 귀국했다. 그러나 그는 두 다리로 한국땅을 밟지 못하고 이동 침대에 누워 겨우 입국할 수 있었다. 그리고 7년 동안 투병 후 197074세 를 일기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비, 이방자 여사는 1989430, 창덕궁 내 낙선재(樂善齋)에서, 8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녀의 죽음은, 파란 많았던 조선왕조 500년 역사의 증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왕녀로 태어나, 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로 세상을 떠난 그녀의 88년 일생은 이여사가 평소 즐겨 쓰던 문구처럼 '대공무아(大公無我)' 한 것이었다. 1901, 일본 동경에서 메이지 가문의 장녀로 태어난 그는, 19세 되던 해, 일본 왕실의 내선일체(內鮮一體) 융합 정책에 따라, 일본에 볼모로 잡혀 온 고종의 아들 이은 왕세자와 정략결혼을 했다. 광복 전에는 망국의 한을 되씹는 남편의 동반자로, 광복 후에는 패망한 일본이 남긴 무국적자로, 격랑의 한일 국제사를 헤쳐 나와야 했다. 광복이 되자, 국적도, 왕실의 특권도 상실한 채, 곤궁한 생활을 해 오던 영친왕 부부는 1947년 미 군정하에서 '재일 한국인' 이라는 평민 신분으로 격하돼 생활고를 겪었다. 1963년 영친왕과 함께 환국했으나, 1970년 영친왕마저 세상을 떠나자, 홀로 창덕궁 낙선재를 지키며 사망할 때까지 약 20여 년간을 장애자 봉사 활동에 전념했다. 귀국 후 전부터 구상해 왔던 장애인 사업을 추진해 1963년부터 1982년까지 신체장애자재활협의회 부회장직을 맡았다. 19661월 사단법인 자행회(慈行會)를 설립해 정신박약아를 위한 복지사업에 헌신했다.

 

196711월에는 YMCA에서 빈민돕기사업을 하던 재단법인 보린원(保麟園)을 인수해 농아와 소아마비아를 위한 명휘원(明暉園)을 설립했는데, '명휘(明暉)'는 영왕의 아호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명휘원의 교육기관으로 1978년 명휘회관을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에 세웠다. 이곳에서 교육받는 불우한 이들의 자립을 위해 일본에서 배웠던 칠보를 만들어 파는 등 헌신했다. 1971년 경기도 수원시 탑동에 자혜학교(慈惠學校)를 설립해 갈 곳이 없는 정박아들을 교육시켰으며, 1973년 자혜학교 여자기숙사도 설립했다. 같은 해 그의 숙원사업이던 영왕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켜 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영왕과 왕가의 유물들을 보전하는 데 마지막 사명을 다했다. 이후에도 자행회와 명휘원의 총재직을 계속 맡아 활동했다. 직장암으로 수술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아들 구와 지내다가 1989년 귀국했으나, 이 해 430일 낙선재에서 죽었다. 이들 부부의 죽음에는 '승하'라는 이름을 붙이지 못한다. 왕조가 없는 왕, 왕비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평생을 '내 조국도, 내가 묻힐 곳도 한국' 이라는 신념으로 봉사한 마지막 조선인이었다. 그의 아들 구씨는 부모님 묘에서 20m 떨어진 곳에 묻혔다.

 

영친왕과 영친왕비 이방자(1901~1989) 여사의 합장묘인 비공개 사적지 영원은 조선의 13개 원(왕세자·세자빈·왕의 부모가 묻힌 묘)중 마지막으로 조성됐다. 영원은 원임에도 무인석과 난간석을 조성해 왕의 예우를 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잘 생겼지만 하체가 도무지 비례가 너무 안 맞을 정도로 아주 짧다. 상체가 3분의2, 하체가 3분의1이다.

 

 

 

나라 잃고 일본에서 살다 간 비운의 마지막 황태자

  

 

  

의민태자 영친왕 이은 (懿愍太子 英親王 李垠, 1897~1970)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이며, 일본 제국의 군인, 일제 강점기의 이왕(1926~ 1945)으로 본관은 전주, 휘는 은(), 아명은 유길(酉吉)이다.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순헌황귀비 엄씨이다. 순종 및 의친왕과 덕혜옹주의 이복 형제이다. 의민태자는 사후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올린 시호로 정식 시호는 아니다. 흔히 영친왕(英親王)으로 지칭한다. 영친왕의 이름은 은(), 고종의 일곱째 아들로, 어머니는 귀비 엄씨이다. 순종과는 이복형제간이다. 1900(광무 4) 영왕(英王), 1907(융희 1)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1907년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다.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의해 강탈되면서 융희황제(순종)가 이왕(李王)으로 폐위되자, 그도 황태자에서 왕세제가 되었다. 1920년 일본의 정책에 따라 일본 왕족 나시모토 마사코(方子)와 정략결혼을 했다. 1921년 얻은 아들 진()은 다음해 한국 첫 방문길에 잃고, 1931년 둘째 아들 구()를 얻었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형식상 왕위계승자가 되어 이왕(李王)으로 불렸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귀국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63년 국적을 회복하고 방자비와 함께 귀국했다.

 

사후에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시호를 의민(懿愍)으로 올려 시호는 문인무장지효명휘의민황태자(文仁武莊至孝明暉懿愍皇太子)이나, 이는 정식 시호가 아닌 사시(私諡)에 속한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사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편이다. 실질적으로 한국을 통치한 적은 없으나 1926년 이복 형 순종의 사후 창덕궁에서 즉위 의식을 가졌다.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뒤에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변경)에 위치한 홍·유릉에 안장되었으며 원호(園號)는 영원(英園)이다. 위패는 종묘 영녕전 제16실에 모셔져 있다. 시호(諡號)는 의민(懿愍), 존호(尊號)는 문인무장지효명휘(文仁武莊至孝明暉)이나, 대한제국이 소멸된 상황에서 사단법인 전주이씨대동종약원주관하에 결정된 시호이므로 정식 시호라기보다 사시(私諡)에 가깝다. 그의 사후 미망인 방자(方子)는 창덕궁 낙선재(樂善齋)에서 생활하면서 명휘원(明暉園)을 운영하였다.

 

2005년 친일인명사전 명단 지정에서 제외되었고, 2008년의 친일인명사전에서도 제외되었다. 그러나 그가 일본군의 육군 중장까지 지낸 점과, 일본의 왕족으로 대우받은 점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부인 의민태자비 이방자(懿愍太子妃 李方子, 1901~1989)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 方子 なしもとのみや まさこ)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로 의민태자 이은(李垠)의 비이다. 대동종약원에서 올린 사시(私諡)는 현덕정목온정자행황태자비(顯德貞穆溫靖慈行皇太子妃)이다. 1916,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대한제국 황태자 이은과 약혼하였다. 1921, 장남 진()을 낳았다. 그러나 이듬해, 첫돌도 채 지나지 않은 진을 조선 방문 중에 잃는 슬픔을 경험했다. 1931, 둘째 구()를 낳고 다시 단란한 생활을 하였으나 1945, 일본의 패전 후 이왕가(李王家)가 폐지됨에 따라 신분이 강등되어 재산을 몰수당하고, 의민태자의 복권을 두려워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방해로 귀국마저 좌절되자 재일 한국인으로서 고된 삶을 살았다. 1960,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 새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초청으로 1963, 가족과 함께 귀국하여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창덕궁(昌德宮) 낙선재에 기거하였다.

 

1963, 신체장애자재활협의회 부회장에 취임하기도 하였으며 1966, 자행회(慈行會), 1967, 명휘원(明暉園)을 각각 설립, 1970, 자혜학교(慈惠學校)를 설립하였다. 1973, 숙원 사업이었던 영친왕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켰으며 1982년에는 광명시의 명혜학교(明惠學校) 이사장으로 재직하는 등, 한국 장애인들의 어머니로 존경받았다. 일본에서는 한국인들의 존경을 받은 일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1989430, 서울 창덕궁 낙선재에서 운명하였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에 추서되었다. 200611, 일본 후지TV에서 의민태자 부부의 사랑을 그린 드라마 "무지개를 이은 왕비(ける王妃)가 방영되어 논란이 되었다.

 

황태자비를 부르는 명칭은 영친왕비, 영왕비, 이방자 여사 등이다.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은의 영왕 칭호는 결혼 전에 폐지되었기 때문에 황태자비 또한 태자비(세자비)로서 혼인한 것이며, 친왕(왕자)과 황태자(왕세자)는 엄연히 다르기 때문에 영친왕비가 아닌 의민황태자비로 부르는 것이 옳다. 흔히 이방자 여사라고 부르는데, 이방자라는 이름 자체가 일본식으로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 方子)에서 신부의 성인 나시모토(梨本)를 떼고 신랑의 성인 이()를 붙여 이방자(李方子)로 칭하게 된 것이고 여사라는 명칭 또한 황태자비의 존칭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맏아들

 

숭인원 崇仁園

 

 

 

고종황제의 넷째 아들 의민황태자(영친왕)의 큰아들인 원손 이진(元孫 李晉, 1921 ~ 1922),

1922,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 361, 의릉(懿陵)

 

 

 

 

숭인원은 고종황제의 넷째 아들 의민황태자의 큰아들인 이진의 무덤이다. 병풍석 대신에 호석을 두른 무덤과 혼유석, 망주석 1, 장명등, 문석인 2, 석마, 석호, 석양이 각기 2구씩 갖추어져 있다. 순종황제는 이진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성인 왕족의 장례와 동일하게 후히 장례를 치르도록 분부하고 원호를 숭인원이라 하였으며, 이진의 조모 순헌귀비 엄씨의 무덤인 영휘원 남측 경내에 조성하였다.

 

 

26대 고종황제의 넷째 아들 의민황태자(영친왕)의 큰아들

   

 

'하정웅 기증전-순종 황제의 서북 순행과 영친왕, 영친왕비의 일생'에서 만나볼 수 있는 또 다른 유품. 왼쪽 사진은 큰아들을 안고 있는 영친왕 부부의 사진(1921). 오른쪽 사진은 영친왕비 일기(1919). 사진=문화재청 제공.

 

 

원손 이진(元孫 李晉, 1921 ~ 1922)

이진(李晉)은 대한제국의 황족으로 일제 강점기 이왕가의 원손이자 영친왕의 장남이며, 이구의 형이다. 큰아버지인 순종 임금의 생전에 출생한 왕세손이었으나 생후 1년도 안 되어 병으로 사망했다. 일본에서 1921818일에 태어나 의민황태자 내외와 함께 귀국하였으나 1922511일에 덕수궁 석조전에서 의문사하였다.

 

 

 

 

불행한 운명으로 태어나 마지막 황세손으로 살다

 

회인원 懷仁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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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은태손 이구(懷隱太孫 李玖, 1931~2005) 2005, 경기 남양주, 홍유릉(洪裕陵), 비공개지역

 

대한제국의 마지막 회은황세손 이구의 원()이며,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권역 내 영원 옆에 자리잡고 있다. 2005년 일본에서 훙서하자 일본에서 운구를 창덕궁 낙선재으로 안치하였다가 국장을 지내고, 이해 문화재청과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의 주최로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권역 내 영원 옆에 예장하였다.

 

 

 

 

조선왕조 마지막 황세손, 영친왕의 둘째 아들

 

 

 

회은태손 이구(懷隱太孫 李玖, 1931~2005)

대한제국의 황족이자 한국계 일본인으로 대한제국 황실 제3대 수장인 영친왕 이은의 둘째 아들이며, 대한민국의 건축가, 공학자, 교육자, 사업가이다. 일제 강점기의 이왕가의 이왕세자(李王世子)이기도 했다. 한때 대한민국에 귀국,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에 교수로 출강하기도 했다. 대한제국의 황족으로 일제 강점기의 두 번째 이왕(李王)인 의민태자 이은(李垠)과 비() 의민황태자비 이방자(李方子)의 아들로 도쿄에서 태어났다. 생전에 건축사와 대학교수 등으로 활동했고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총재, 종묘제례 봉행위원회 총재로도 활동하였다.

 

한때 귀국하려 하였으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자 먼 일족인 이승만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군사 정권 박정희 때에 일시적으로 귀국하였으나 사업실패 등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체류하다 사망했다. 1996년 영구 귀국하셔서 부암동에 거처를 정하기도 하였으며 2005716, 도쿄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의 한 객실에서 숨을 거두었다. 공교롭게도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 자리는 1931년에 그가 태어난 출생지이기도 했다.

 

회은태손(懷隱太孫)으로도 불리며 사후 존호는 자인온유덕성순수회은황태손(慈仁溫裕德性純粹懷隱皇太孫)으로, 이는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추서한 사시(私諡)이다. 일각에서는 그를 황태손이라 부르나 그의 지위에 대한 것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묘의 이름은 회인원(懷仁園)이다. 따라서 회은태손, 회은황태손으로 부르나 대한민국의 사학계에서는 이구를 황태손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부인 줄리아 멀록(Julia Mullock, 이주아(李珠亞), 1923 ~ )과 이혼

일본인 무당 아리타 키누코(有田絹子, Arita Kinuko, 이견자(李絹子)과 동거

 

 

 

 

 

 

조선 왕조의 마침표, 비석조차 없는 의친왕의 무덤

 

의친왕 묘 義親王 墓

 

 

   

의친왕 이강 (義親王 李堈, 1877 1955), 1966, 경기 남양주, 홍유릉(洪裕陵), 비공개

  

영친왕이 묻힌 홍유릉 뒷편 한적한 끝자락에 위치한 의친왕과 왕비 김씨가 잠든 합장묘에는 비석도 안내판도 없다. 두 개의 망주석, 조그마한 혼유석, 장명등이 전부다. 1955, 의친왕은 한국전쟁의 참화 후유증으로 어수선한 중에 79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200여만 명이 죽은 난리를 겪은 후라 의친왕의 죽음을 챙겨 줄 세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유지에 가매장됐다가, 서삼릉 한 자락으로 옮겨져 방치됐다가, 왕비가 있는 이곳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뒷편으로 이장됐다. 의친왕의 5녀 이해경씨의 노력으로 1966년 부모를 한 곳에 합장했다. 왕조를 포기하고 독립을 위해 젊음을 불태운 왕조의 후예는 지금 세상의 관심에서 아득히 멀리 떨어져 누워 있다.

 

"하루는 부모님 묘소에 성묘를 하기 위해 사동궁의 다른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 의친왕이 잠들어 계신 서삼릉을 찾았다. 그러나 그때 나의 놀라움은 형용할 길이 없었다. 물론 추운 겨울 날씨 탓에 묘소의 주변이 삭막하게 느껴졌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서삼릉의 광경은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며 아프게 했다. 그 당시 묘소에는 봉분이 두 개가 나란히 있었는데 오른쪽은 아버지 의친왕의 묘였고, 왼쪽은 아버지를 낳으신 할머니 장귀인(張貴人)의 묘였다. 그리고 두분의 묘 가운데 '장귀인(張貴人)' 이라는 커다란 비석이 있었으며, 왼쪽 묘 앞에만 상석(床石)이 하나 있었고, 석등(錫燈)은 세 동강이로 부러져 땅에 뒹글고 있었다. 또한 아버지 묘에는 아무런 표식이 없었다. 그 묘가 바로 의친왕의 묘라고 설명을 듣지 않으면 도대체 누구의 묘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가매장(假埋藏)이라지만 모자(母子)를 부부(夫婦)처럼 같이 모시고 있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 나의 아버지 義親王 > 중에서 : 이해경 지음 1997620일 발행. 도서출판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영원, 의친왕묘, 3명의 후궁묘, 덕혜옹주묘)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후 중국에 망명한 지사들은 독립운동의 구심체로서 망명정부를 세울 궁리를 했다. 이상설, 신규식, 박은식 등은 신한혁명당을 만들고 민족 독립을 구심시키려면 고종황제를 망명시켜 받들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당의 외교부장 성낙형을 국내에 침투시켰으나 활동 중 발각되고 말았다. 하지만 고종이 아니더라도 왕족 중 누군가를 받들어 민족 구심체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1910년대 독립운동의 특색이었다. 그 두 번째 시도가 고종황제의 셋째 왕자요 순종황제의 아우인 의친왕 이강을 상해로 탈출시켜 옹립하려는 대동단 사건이다. 3.1운동이 일어났던 해인 19191110일 아침, 당시 조선총독부 고위경찰 지바가 조선 귀족 감시를 맡고 있는 사복경찰관들을 모아놓고 일장 훈시를 하고 있는데 제3부 경위반 주임이 다가와 귓속말로 정보를 전했다. 어젯밤 의친왕 이강 전하가 궁을 탈출한 혐의가 있다는 것이다. 10시쯤 전하가 살고 있는 저택의 후문 경계를 맡고 있는 시시라는 형사가 키가 큰 두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중 하나가 전하 같아서 미행을 했는데 명월관 근처에서 놓쳤다는 것이다. 지바는 경위 하나를 보내어 왕족 감시 담당관인 이왕직의 구로사끼 사무관에게 전하가 집에 계시는지 여부를 확인시켰다. 구로사끼는 직접 찾아가 왕비를 뵙고 물었더니 아무 일없이 계신다는 말을 들었다. 행여나 하여 내시를 시켜 결재서류를 들려 보냈더니 결재를 다음으로 미루셨다는 것이다. 결재를 미룬 것이 전하가 직접 나타나 한 말인가 누가 전한 말인가를 확인했더니 후자라는 것이다. 곧 전하를 직접 본 것은 아니었음을 확인했다. 전하가 상해로 탈출해 독립 세력에게 업힐 것이라는 정보가 있는지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하를 직접 뵙고 오라고 지시했다. 왕비를 만나 전하를 꼭 뵙게 해달라고 조르자 실토했다. '실은 어젯밤 전하는 집을 나가셨다', 중대사건이 벌어지고만 것이다. 즉시 경무국장으로 하여금 조선 전국은 물론 일본, 만주, 시베리아, 상해에까지 수배령을 내렸다.

 

탈출 당시상황을 회고하는 의친왕 비 김수덕 여사에 의하면, 당시 의친왕은 사동궁에 살았는데 사무관이 와 묻길레 낮 12시까지 낮잠 자고 계시다고 사무관을 속여 탈출을 공모했다고 한다. 이 와중에 명월관 지점 주인 황원균이라는 자가 경찰에 출두해, 기생들로부터 이강 전하의 행방을 찾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집히는 것이 있어 찾아왔다면서 어젯밤 전하는 명월관까지 왔다가 인력거를 타고 어디론가 갔다고 진술했다. 그 인력거 인부를 찾아 취조하니 공평동 빈집 앞에서 내려드렸다는 것이다. 그 빈집에 대한 숫사를 진행하고 있는 도중 만주 단동에서 경찰정보가 날아들었다. 전하를 단동역에서 발견해 모 숙소에 연금중이라는 것이다. 일본 경찰은 전하께서 전혀 탈출 의사가 없는 납치라는 쪽으로 몰아갔다. 전하가 돈에 궁한 것을 안 전라도의 한 부호가 남도에 있는 전하의 어장 어업권을 담보로 3만원을 빌려 드리겠다고 대리인이라는 이민하가 접근해 왔다. 이에 전하는 그 돈을 받으러 김삼복이라는 종 하나만을 데리고 명월관을 거쳐 약속 장소인 공평동 빈집으로 갔다. 그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민하는 가방을 열어 백 원 문치를 보여드린 다음 지금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가셔야 한다고 설득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돈뭉치는 백원짜리 한 장만을 위에 얹은 신문지 오린 쪽지로 판명됐다. 그 순간 빈 집에 숨어있던 5~6명의 청년이 권총을 들고 포위해 상해행을 강요했다는 것이다.

 

이상은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통치비화>중 당시 고위 수사 책임자들의 비화에서 추린 것이다. 실은 어장 담보를 구실로 접근해서 상해 탈출을 모의해 실천을 약속하는 날에 공평동 빈집에서 만나 5~6명의 단원의 경호 하에 세검정 고개를 넘어 수색역에서 만주행 기차를 탄 것이다. 이민하는 전하를 상해에 모셔다가 망명정부를 세우려던 대동단의 우두머리 전협이다. 사실대로 전하가 탈출을 시도한 것으로 수사가 진행되면 전하를 법정에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3.1운동으로 민심이 사나워져 있는 당시 정국을 악화시키는 악재로 작용할 것이 뻔하다. 거기에다 왕족을 모셔와

 

중국 땅에 망명정부수립 계획이 진행되고 있음을 국민이 알면 민심이 그리로 쏠릴 것이 자명한 일이기에 탈출이 아니라 납치 쪽으로 몰아갈 수 밖에 없었다. 강제 송환된 이강 전하를 여염의 살던 집에 두면 언제 탈출할지 모르는 일이라 연금시킬 궁리를 했다. 총독관저 구내에 녹천정이라는 작은 집이 있었다. 이또가 술잔치를 즐겨 벌였던 집으로 당시는 비어 있었다. 여기에 연금시켰다가 일본으로 이주시킬 작정으로 모든 공작을 진행했다. 하지만 전하가 끝내 거절해 일본행은 좌절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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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 전하의 생모인 장귀인은, 이은 전하의 생모인 엄귀인만큼 눈치가 빠르고 처신에 능하지 못했다. 두 분 다 귀인 시절에 고종의 사랑을 받고 민비의 질투를 받았는데 엄귀인은 그런 기미만 보이면 야음을 타고 아무도 모르는 여염에 숨어버렸다. 그러기를 10여 년 해 결국 을미사변으로 사랑을 쟁취하고 만다. 이에 비해 장귀인은 낳은 아들과 함께 궁밖에 쫓겨나 살다가 혹독한 린치 끝에 죽음을 당했다. 이강은 고아 신세가 돼 민비의 박해로 끊임없는 생명의 위협 속에 자랐다. 성장해서는 엄귀인과 그녀의 소생인 이복동생 이은에 치어 유학이라는 미명으로 일본이나 미국에 가 고독한 젊음을 보내야만 했다. 미국에 유학했던 190331일자 '뉴욕해럴드'지는 의친왕이 놀라운 성명을 냈다고 전제하고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이 조선의 왕자는 미국 시민의 자유와 독립심에 매료돼 그의 국내외에서의 자유롭고 독자적인 활동울 위해 왕국의 왕관 계승권과 왕좌에 관련된 어떤 권한도 포기한다' 고 이 신문 기사는 당시 의화군 곧 의친왕이 다니고 있던 대학의 여자학부의 활달한 학생 엔지 글라함양과 염문 때문에 왕권 계승 권리를 포기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나 이미 그때에는 엄비 소생의 영친왕 이은에게 왕위 계승권이 결정돼 있었다. 고종을 닮아 무척 성격이 유약했던 그는 이와 같은 고된 환경에 단련돼 성숙하질 못하고 주변 사람들을 원망하며 자포자기 끝에 주색에 깊이 빠져 방탕무뢰하다는 말도 무척 들었다.

 

그의 큰 아들 이건은 이렇게 아버지를 회고한다. "아버지는 생활이 문란하기는 했지만 암울한 천성은 아니였다. 일족 중에 머리는 명석한 편이었다. 만약 장귀인에게 엄귀인(엄비)만한 총명함이 있고 조부가 보다 강한 성격과 소신의 소유자였던들 아버지가 왕통의 계승자는 못되었더라도 꽤 다른 양상이 벌어졌을 것이다. 평생 주변에 대해 불평한 적이 없었으나 오로지 생모의 비참한 죽음에 대해서는 저녁 반주라도 할 적에는 심히 한탄하고 슬퍼했다."

 

광복 후에도 의친왕의 비극은 멋질 않았다. 왕정정복를 두려워한 이승만 대통령의 왕실 재산 국유화와 왕족을 천대하는 바람에 정부를 원망하며 등지고 살아야했고 1.4후퇴 때 부산에 내려가서는 돌봐주는 이가 없어 먹는 끼니보다 굶는 끼니가 많아 결국 그때 얻은 영양실조로 죽음을 맞았다. 망국의 황자로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다가 1955815, 서울 성북구의 별저 성락원(城樂苑)에서 79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능은 부황 고종황제의 능 홍유릉 내에 위치한 의왕묘(意王墓)이다.

 

고종과 순종, 의친왕, 영친왕 등 조선 황실의 마지막 가족사가 담긴 사진이 공개됐습니다. 고종의 둘째 아들인 의친왕의 11번째 아들이자 비둘기집을 부른 가수 이석씨가 소장해 온 사진은 1915년 창덕궁 인정전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되며, 이석씨는 이 사진이 영친왕이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다 귀국한 것을 기념해 찍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고종의 후궁, 귀인(貴人) 장씨의 아들이며, 조선왕실 내 유일한 독립운동가

 

 

   

의친왕 이강 (義親王 李堈, 1877 - 1955)

 

 

 

대한제국의 황자로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귀인 장씨(貴人 張氏)이다. 본관은 전주, 휘는 강(), 초명은 평길(平吉), 호는 만오(晩悟)이다. 1891년 의화군에 봉해졌으며 1894년에 대사로 일본에 다녀오고, 이듬해 6개국 특파 대사로 영국, 프랑스, 도이칠란트,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를 방문했다. 1899년 미국 유학하, 그 해 의친왕에 봉해졌으며, 1905년 귀국하여 육군 부장, 적십자사 총재 등을 지냈다. 한일 합방 이후 일제에 비타협하고 독립운동가들과 가까이하며, 1919년 대동단의 최익환 등과 연락, 상하이 임시 정부로 탈출하기 위하여 상복 차림으로 변복하고 만주 안동현에까지 갔으나, 일본군에 발각되어 강제 송환되었다. 191911월 상하이 망명을 도모하면서 임시정부에 밀서를 보냈다는 내용이 독립신문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 후 여러 차례 일본으로부터 건너올 것을 강요당하였으나 거절하고, 일본을 배척하는 정신을 지켰다. 이후 일제로부터 형식적인 공의 지위를 박탈당했다. 임종 직전 천주교에 귀의하였으며, 세례명은 비오이다. 황족들이 일제 강점기 당시 망국의 원흉으로 지탄받으면서 재조명의 기회가 없었다. 능은 부황인 고종황제의 능인 경기도 남양주군 미금읍(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 내에 위치한 의친왕묘(義親王墓)이다.

 

고종과 순헌 황귀비 엄씨 사이에 태어난 영친왕은, 순종이 등극하자 형 의친왕(1877~1955) 이강(李堈)이 있음에도 황태자로 책봉된다. 의친왕은 고종과 귀인 덕수 장씨 사이에서 고종의 3째 아들로 태어났다. 궁녀였던 장 귀인이 고종의 아들을 낳자 명성황후의 노여움을 사서 의친왕 모자는 궁궐 밖으로 쫓겨난다.

    

유일한 아들 순종이 병약해 후사를 걱정했던 명성황후가 1891년 의친왕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여 의화군에 봉했다. 궁에서 지내던 의화군은 17세이던 1893년 의친왕비 김수덕 여사와 결혼한다. 이듬 해 일본에 보빙대사(報聘大使)자격으로 파견되었고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난 달 특파대사 자격으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을 순방했다. 의화군은 조선의 왕자로 대외 특사 역할을 톡톡히 해냈으며 고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것을 알 수 있다.

 

1897년 고종은 황제로 등극했고 영친왕이 태어난다. 의친왕의 반일 감정을 잘 알고 있던 일제와 황제의 아들을 낳은 엄 귀비의 눈에 의친왕의 존재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영친왕이 태어나자 엄비의 획책에 밀려난 의친왕은 1899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지만 미국 여성과의 연애설 등 모략이 끊임없이 고종의 귀에 흘러들어갔다.

 

미국 유학 당시 의친왕은 독립운동가 김규식과 교류를 나누었고 도산 안창호를 만나 미국에 사는 조선인을 위해 써달라고 금일봉을 전해주기도 했다 한다. 1905년 귀국을 위해 일본 동경에 도착한 의친왕은 8개월이나 귀국을 하지 못하고 기다려야 했다. 귀국하라고 고종이 보낸 전보는 중간에 번번이 없어지곤 했다.

 

19064월 조선으로 돌아오지만 궁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수제일은행 근처 여관에서 머물렀는데 자객에게 살해당할 위기를 맞기도 한다. 의친왕이 암살당할 뻔한 일은 무려 14번이나 된다 한다. 누가 보낸 자객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제의 소행인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귀국한 직후 대한제국 육군부장으로 임명된 의친왕은 부황 고종을 만나고 온 날이면 피를 토하며 통곡을 했고 일제의 야욕에 근심하던 고종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의친왕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술 마시고 기생을 부르는 등 위장을 펴지만 그 호방한 기상은 여전히 일제의 감시의 고삐를 늦출 수 없었다. 의친왕이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잔치를 벌인다고 기생을 부르라 하면, 기생을 태우고 오는 인력거꾼은 독립군 밀사였고 의친왕과 밀사들은 골방에서 밀담을 나누곤 했다.

 

1907년 순종의 등극과 함께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되고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다. 한때 순종 대신 술주정뱅이로 소문난 의친왕을 즉위시키는 것이 거론됐지만 의친왕의 기상이 만만찮아 일 하기가 어렵다 해서 무산됐다.

 

그중 대표적인 예가 1909년 경남 거창군에 가서 의병을 양성할 계획을 세운 것과 1919년 상해로 탈출을 기도하다 일제에 검거돼 실패한 일이다. 의친왕은 거창군에서 정태균(鄭泰均)을 만난다. 정태균과 함께 지방의 뜻있는 청년들을 모집해 의병단을 양성하려고 북쪽 사선대 근처 땅을 사들이다가 탄로나 일본헌병에게 호송돼 서울로 돌아온다.

 

3·1운동이 일어나던 해인 19191110일 아침, 조선총독부는 발칵 뒤집힌다. 의친왕 이강전하가 궁을 탈출한 것 같다는 보고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사동궁(寺洞宮)에 살던 의친왕은 비밀리에 상해의 독립지사들과 접촉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으로 망명한 독립지사들은 망명정부를 세우려고 했고 민족의 일체감을 모으려는 역할로 의친왕을 옹립하려 한 것이다.

 

의친왕이 탈출에 성공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상제차림으로 변장을 하고 기차를 탔던 의친왕은 만주 안동(단동)에서 붙잡혔고 서울로 돌아와 총독관저 안에 감금된다. 제 아무리 일제라도 의친왕을 재판정에 세울 수는 없는 일. 황제를 잃은 조선 백성들에게 의친왕의 존재는 고종을 대신한 정신적인 지도자였다. 일명 '대동단(大同團) 사건'이라 하는 상해 탈출 사건은 일제에 의해 '의친왕 납치사건'으로 조작되고 말았다.

 

작년에 작고한 황세손 이우를 마지막으로 황태자 영친왕의 후손은 끊겼다. 현재 고종의 혈통은 의친왕 후손만 남아있다. 139녀를 둔 의친왕은 일본에 귀화한 맏아들 건()을 아들로 치지도 않았고 의친왕의 기개를 이어받은 아들이 둘째 우다.

 

얼짱 왕자로 화제를 모았던 우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비밀리에 독립자금을 지원했고 일본여자와 결혼시키려는 일제의 압력에도 끝내 거절하고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와 결혼한다. 일제가 망하기 바로 직전 일본에서 귀국한 우는, 일본으로 가라는 일제의 독촉에 딸에게 설사약을 먹여 병을 핑계대고 피하려 했으나 결국 일본으로 가게 된다. 일본으로 건너간 지 얼마되지 않은 194586일 히로시마 일본군 군대로 출근하다 원폭에 희생되고 만다.

 

영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의친왕과 의친왕비 김씨(1881~1964) 합장묘에는 비석도 안내판도 없다. 옆에 있는 덕혜옹주의 묘에는 비석이라도 있는데 이곳은 혼유석과 망주석 장명등만 서 있어 모르고 찾는다면 누구의 묘인지도 알 수 없다. 전쟁통에 먹을 것도 없이 고생하다 1955년 작고한 의친왕이 처음 묻혔던 곳은 이곳이 아니다. 전쟁 끝이라 사유지에 가매장되었던 의친왕은 서삼릉 한 자락 한양골프장 구석으로 옮겨져 묘비도 없이 방치되다가 의친왕비가 있던 현재의 금곡으로 이장된 것은 1996년이다. 이곳 금곡 홍유릉 경역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주인공이었던 고종과 순종, 영친왕, 의친왕, 황세손 이구, 고종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덕혜옹주까지 잠들고 있다.

 

의친왕 묘에서 돌아 나오는 길목에 영원 재실이 사라진 왕조의 묵은 때를 껴안고 조선의 마지막 그림자처럼 고즈넉하게 서 있었다. 영원 재실은 경종의 의릉 재실을 헐어내어 지은 것이다. 조선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대한제국 망국의 역사는 아직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지만 주인공들은 잠들었다.

 

 

홍유릉에는 2능, 2원, 7묘 가 있습니다. 조선왕조 왕실 구성원의 무덤은  피장자의 신분에 따라 그 호칭에 능(陵), 원(園), 묘(墓)로 구별됩니다. '능'은 국왕과 왕비의 무덤이며, 왕세자와 왕세자빈, 국왕의 사친(私親 왕의 자리에 오른 왕의 친부모)이나 추존된 국왕의 사친으로서 선왕의 후궁들의 무덤은 '원'이라 하고, 왕자와 공주, 옹주, 일반 후궁, 폐위된 왕들의 무덤을 이르는 용어로는 일반적 분묘와 마찬가지로 '묘'로 불립니다.

 능호(원,묘호)

위호           비고 
 홍릉 조선 제26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민씨           공개
 유릉 조선 제27대 순종황제와 정비 순명황후 민씨, 계비 순정황후 윤씨            공개
 영원 영친왕 이은(고종황제 3남)과 비 이방자             비공개
 회인원 황세손 이구(영친왕의 2남)             비공개
광화당 묘 조선 제26대 고종황제 후궁             비공개
 삼축당 묘  조선 제26대 고종황제 후궁             비공개
수인당 묘 의친왕 후비              비공개
의친왕 묘 의친왕과 의친왕 비               비공개
덕혜옹주 묘 

덕혜옹주

            비공개
수관당 묘

의친왕 후비

            비공개

 덕수 장씨 묘

제26대 고종황제 후궁

 비공개

 

 

비 김수덕 여사(덕인당 연안 김씨, 1881 1964 )

 

 

 

의친왕비 덕인당 김씨(본명 김수덕)는 본관이 연안인 김사준의 딸로 1881년에 탄생하여, 1893년에 의화군에게 출가한 후, 남편이 의친왕에 봉해지자 의친왕비에 봉해지셨습니다. 그 후, 광복과 한국전쟁을 겪으신 후 1964년에 84세로 별세하시어, 현재의 남양주시 금곡동 영원경내에 모셔지신 후, 1996년에 의친왕묘가 천장되자 합장으로 모셔지셨습니다.

 

 

 

귀인 장씨(貴人 張氏)

대한제국 고종의 후궁으로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고종의 5황자 의친왕의 어머니이다. 생몰년은 미상이다. 궁인(宮人)으로 있다가 아들 의친왕이 10세 되던 해에 사망하였다고 전해진다. 1900(광무 4) 917(양력) 숙원(淑媛)으로 증직되었고, 다시 1906(광무 10)에 귀인(貴人)으로 증직되었다. 초장지는 알 수 없으나 신해(辛亥) 1911106일 고양군 화양 모진 2리로 이장하였다가, 1965년에 도시개발로 인해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 권역 내로 이장하였다. 다시 20096월에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권역 내 후궁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공주

 

덕혜옹주 묘 德惠翁主 墓

 

 

 

1989, 경기 남양주, 홍유릉(洪裕陵), 비공개지역

 

 

    

  

의친왕묘 부근에는 덕혜옹주의 묘가 홀로 자리하고 있다. 봉분 옆으로 '대한 덕혜옹주지묘(大韓 德惠翁主之墓)'라고 새긴 묘비가 서 있다.

 

덕혜옹주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녀이다. 꽃으로 태어났지만 꽃으로 살지 못한 비운의 여인, 덕혜옹주의 묘소는 그러한 역사적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사실 숨기고 싶은 과거만큼이나 덕혜옹주의 삶은 역사서나 인문서로도 남아 있는 게 없었다. 2010년 전국 독서계를 강타한 권비영의 소설 덕혜옹주에 의해 비로소 그의 삶이 재조명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덕수궁의 꽃이라 불리며 가장 고귀한 신분을 지닌 채 태어났으면서도 가장 비참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의 운명에 대한 기록이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철저히 정치적 희생자로 살아야만 했던 시대 앞에서 베일에 가려지고 소외된 채 기억 너머로 잊혀져야만 했던 여인이 덕혜옹주였다.

 

    

 

고종의 후궁, 귀인 양씨의 황녀

 

 

 

덕혜옹주 (德惠翁主, 1912 ~ 1989, 이덕혜, 양덕혜, )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과 귀인 양씨의 황녀이다. 덕혜라는 호를 하사받기 전까지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고, 1962년에 이덕혜로 대한민국의 국적을 취득하였다. 고종이 나이 환갑에 귀인 양씨로부터 얻은 외동딸로서 왕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지냈다.

 

그러나 192512세에 동경유학을 빌미로 일본으로 끌려갔고 17세가 되던 1929년 어머니마져 돌아가시게 되자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병을 얻게 되었다.

 

병세가 호전되던 20세에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아들과 강제로 결혼하고, 결혼생활 3년만에 그동안의 시련으로 심한 우울증에 실어증까지 겹쳤다. 폐인이 된 몸으로 1962년에 환국하여 이방자여사와 창덕궁 낙선재에서 기거하며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421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덕혜라고 하지 않았다. 어머니 귀인 양씨의 성를 받아 양덕혜로 일본 호적을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조선 경성부 덕수궁에서 태어나 경성일출심상소학교에 재학중에 일본의 요구에 따라 유학을 명분으로 도쿄로 보내져 여자학습원에서 수학하였다. 1931년에 옛 쓰시마 번주 가문의 당주이자 백작 소 다케유키와 정략 결혼을 하여 1932년에 딸 소 마사에를 낳았다.

 

 1930년에 정신분열증 증세를 처음 보였으며 결혼 이후 병세가 악화되었다. 1946년부터 마쓰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였고, 1955년에 이혼하였다. 1962년에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여 창덕궁 낙선재 내의 수강재에서 거주하다가 1989년에 사망하였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 부속림에 안장되었다.

 

덕혜옹주의 불행한 삶이 알려지면서 1996MBC 광복절 특집 드라마 마지막 황녀 덕혜등에서 남편 소 다케유키는 꼽추나 포악한 인물로 묘사되거나 지참금을 노리고 결혼했다는 낭설이 유포되기도 하였다.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 517, 1392 - 1910 ]

 

() 13()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익종(翼宗) 수릉(綏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융릉(隆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영릉(永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장릉(章陵 : 사적 제202)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경릉(敬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 2()

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

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유릉(裕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홍릉(洪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

왕릉 35

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예릉(睿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경릉(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인릉(仁陵 : 사적 제194)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건릉(健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홍릉(弘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원릉(元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혜릉(惠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의릉(懿陵 : 사적 제204)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익릉(翼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명릉(明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숭릉(崇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영릉(寧陵 : 사적 제195)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휘릉(徽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장릉(長陵 : 사적 제203)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성묘(成墓 : 사적 제365)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목릉(穆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강릉(康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효릉(孝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희릉(禧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온릉(溫陵 : 사적 제210)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정릉(靖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9대 성종(第九代 成宗) 회묘(懷墓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순릉(順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선릉(宣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

8대 예종(第八代 睿宗) 공릉(恭陵 : 사적 제205)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8대 예종(第八代 睿宗) 창릉(昌陵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7대 세조(第七代 世祖) 광릉(光陵 : 사적 제197)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사릉(思陵 : 사적 제209)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장릉(莊陵 : 사적 제196)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5대 문종(第五代 文宗) 현릉(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4대 세종(第四代 世宗)

3대 태종(第三代 太宗)

2대 정종(第二代 定宗)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정릉(貞陵 : 사적 제208) : 서울 성북구 정릉2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1대 태조(第一代 太祖)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목조-덕릉 효공왕후 이씨-안릉

익조-지릉 정숙왕후 최씨-숙릉 , 손씨

도조-의릉 경순왕후 박씨-순릉, 조씨

환조-정릉 의혜왕후 최씨-화릉, 이씨, 정빈 김씨

태조-건원릉 신의왕후 한씨-제릉 신덕왕후 강씨-정릉

정종-후릉 정안왕후 김씨-후릉

태종-헌릉 원경왕후 민씨-헌릉

세종-영릉 소헌왕후 심씨-영릉

문종-현릉 현덕왕후 권씨-현릉

단종-장릉 정순왕후 송씨-사릉

세조-광릉 정희왕후 윤씨-광릉

예종-창릉 장순왕후 한씨-공릉 안순왕후 한씨-창릉

성종-선릉 공혜왕후 한씨-순릉 폐비 윤씨-회묘 정현왕후 윤씨-선릉

연산군-연산군묘 폐비 신씨-연산군묘

중종-정릉 단경왕후 신씨-온릉 장경왕후 윤씨-희릉 문정왕후 윤씨-태릉

인종-효릉 인성왕후 박씨-효릉

명종-강릉 인순왕후 심씨-강릉

선조-목릉 의인왕후 박씨-목릉 인목왕후 김씨-목릉

광해군-광해군묘 폐비유씨-광해군묘

인조-장릉 인렬왕후 한씨-장릉 장렬왕후 조씨-휘릉

효종-영릉 인선왕후 장씨-영릉

현종-숭릉 명성왕후 김씨-숭릉

숙종-명릉 인경왕후 김씨-익릉 인현왕후 민씨-명릉 인원왕후 김씨-명릉

경종-의릉 단의왕후 심씨-혜릉 선의왕후 어씨-의릉

영조-원릉 정성왕후 서씨-홍릉 정순왕후 김씨-원릉

정조-건릉 효의왕후 김씨-건릉

순조-인릉 순원왕후 김씨-인릉

헌종-경릉 효현왕후 김씨-경릉 효정왕후 홍씨-경릉

철종-예릉 철인왕후 김씨-예릉

고종-홍릉 명성황후 민씨-홍릉

순종-유릉 순명효황후 민씨-유릉 순정효황후 윤씨-유릉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