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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朝鮮王陵] 능(陵) - 9 (4) 제25대 철종 (哲宗) _ 예릉 睿陵

草霧 2013. 8. 16. 14:15

 

 

 

조선왕릉[朝鮮王陵] 능(陵) - 9

 

 

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 - 9

 

 

 

(4) 25대 철종 (哲宗, 1831 - 1863) _ 예릉 睿陵

 

 

    예릉(철종)20090922-11.JPG 

 

왕릉은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들의 무덤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왕릉은 42(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40, 14, 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3, 4, 5)입니다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폐위(廢位)된 묘() 2()

황제릉(皇帝陵) 2()

왕릉 35

 

 

 

 

 

 

1. 추존이라는 미명으로, 역사세우기

 

추존(追尊)함길도 8

 

2. 왕조, 문을 열다

 

1대 태조 (太祖, 1335-1408) _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 정릉 貞陵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2대 정종 (定宗, 1357-1419) _ 후릉 厚陵

 

3대 태종 (太宗, 1367-1422) _ 헌릉 獻陵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4대 세종 (世宗, 1397-1450) _ 영릉 英陵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5대 문종 (文宗, 1414-1452) _ 현릉 顯陵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6대 단종 (端宗, 1441-1457) _ 장릉莊陵, 사릉思陵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7대 세조 (世祖, 1417-1468) _ 광릉 光陵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추존(追尊)왕 덕종 (德宗, 1438-1457) _ 경릉 敬陵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8대 예종 (睿宗, 1450-1469) _ 창릉昌陵, 공릉恭陵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9대 성종 (成宗, 1457-1494) _ 선릉宣陵, 순릉順陵, 회묘 懷墓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3. 왕조, 산을 넘다

 

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_ 연산군묘 燕山君墓

 

11대 중종(中宗, 1488-1544) _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 泰陵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12대 인종 (仁宗, 1515-1545) _ 효릉 孝陵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13대 명종(明宗, 1534-1567) _ 강릉 康陵, 순창원 順昌園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14대 선조 (宣祖, 1552-1608) _ 목릉 穆陵, 성묘 成墓, 순강원 順康園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4. 조선, 또 다시 위기를 맞다

 

15대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_ 광해군묘 光海君墓

 

추존(追尊)왕 원종 (元宗, 1580-1619) _ 장릉 章陵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5. 왕조, 반석을 다지다

 

16대 인조 (仁祖, 1595-1649) _ 장릉 長陵, 휘릉 徽陵, 소경원 昭慶園, 영회원 永懷園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6. 조선, 당쟁에 휩싸이다

 

17대 효종 (孝宗, 1619-1659) _ 영릉 寧陵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18대 현종 (顯宗, 1641-1674) _ 숭릉 崇陵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7. 환국정치로 왕권을 다지다

 

19대 숙종 (肅宗, 1661-1720) _ 명릉明陵, 익릉 翼陵, 대빈묘大嬪墓, 소령원昭寧園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20대 경종 (景宗, 1688-1724) _ 의릉懿陵, 혜릉惠陵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8. 조선, 르네상스를 맞다

 

21대 영조 (英祖, 1694-1776) _ 원릉元陵, 홍릉弘陵, 수경원綏慶園, 수길원 綏吉園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추존(追尊)왕 진종(眞宗) _ 영릉永陵

 

추존(追尊)왕 장조(사도세자 莊祖) _ 융릉隆陵, 의령원 懿寧園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22대 정조(正祖, 1752-1800) _ 건릉健陵, 휘경원徽慶園, 효창원 孝昌園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9. 조선, 세도정치에 휘둘리다

 

23대 순조 (純祖, 1790-1834) _ 인릉仁陵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추존(追尊)왕 익종 (翼宗, 문조 文祖) _ 수릉綏陵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24대 헌종 (憲宗, 1827-1849) _ 경릉景陵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25대 철종 (哲宗, 1831-1863) _ 예릉睿陵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10. 오백 년 왕조, 문을 닫다

 

26대 고종황제 (高宗, 1852-1919) _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 흥원 興園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27대 순종황제 (純宗, 1874-1926) _ 유릉裕陵, 영원英園, 숭인원 崇仁園, 회인원 懷仁園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4) 25대 철종 (哲宗, 1831 - 1863) _ 예릉 睿陵

 

  

무지렁이 강화도령 하루아침에 지존에 오르다

 

예릉 睿陵

 

 예릉(철종)20090922-11.JPG

 

철종(哲宗, 이변, 1831 - 1863, 재위 14), () 철인왕후 김씨(哲仁王后 金氏, 1837 1878),

1863, 경기 고양 200, 서삼릉(西三陵)

 

 

25대 철종(哲宗) 예릉 첫번째 작은이미지25대 철종(哲宗) 예릉 두번째 작은이미지25대 철종(哲宗) 예릉 세번째 작은이미지

 

 

 

 

8대 예종(睿宗) 창릉 조선조 제25哲宗(이변, 속명 이원범, 1831 - 1863, 재위 14)과 비 철인왕후 김씨(哲仁王后 金氏, 1837 - 1878)의 예릉은 서삼릉(西三陵)의 세 번째 능으로 쌍릉(雙陵)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다음 대인 고종(高宗)과 순종(純宗)이 황제릉(皇帝凌)의 형식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예릉(睿陵)은 조선조 왕릉(王陵) 형식의 마지막 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릉의 상설(常設)제도를 보면 왕과 왕비릉의 봉분(封墳)은 난간석(欄干石)으로 연결되어 있고, 병풍석(屛風石)은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장명등(長明燈)의 위치가 상석(床石)과 많이 떨어져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형적인 왕릉(王陵)의 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예릉은 조선 25대 임금 철종과 비 철인왕후의 능이다. 조선시대 국조오례의, 국조속오례의,국조상례보편에 의거한 상설제도로서는 마지막 능이다. 봉분은 병풍석을 세우지 않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이는 쌍릉으로 연결되어 있다. 난간석의 석주에는 음각 세로선과 원문을 새기고 원문 안에 방위를 나타내는 문자인 십이간지를 새겨 넣었다.

 

25대 철종(哲宗) 예릉 큰이미지일반적으로 조선의 능침은 상중하계의 3단으로 되어 있는데 영조의 원릉부터는 중계, 하계의 구분을 두지 않고 문무석인을 같은 단에 배치하였다. 특히 예릉은 하계 앞 강()이 길며 장명등을 중계가 아닌 하계의 끝에 배치한 것이 특이하다. 이는 조선시대 유일한 배치방법이다. 장명등은 다리가 길어졌으며 지붕 위에는 둥근 파문이 몇 겹 겹쳐 있다. 가운데에는 원형 틀 안에 꽃문양을 새기고 있어 전체적인 느낌이 이국적이다.

 

무석인은 갑옷으로 층이 나 있고 문석인은 효릉에서 약간 보이기 시작하던 소매 주름의 반전이 역력히 보이고 있다. 홀은 턱 아래에 붙여서 큰 머리를 받치고 있는 듯하다. 맞배지붕의 정자각은 다른 능에 비해 웅장하고 크며 처마마루의 잡상도 기존의 3개에서 5개로 많다. 참도 역시 기존의 향도와 어도의 2단에서 3단으로 되는 변화를 볼 수 있다. 이는 이후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에서 3단으로 이어진다. 정자각을 보고 섰을 때 오른쪽에 비각이 있고 그 아래에 복원되지 않은 초석들이 수복방의 자리이다.

 

철종은 재위 146개월 만인 186333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고종은 철종의 능을 거창하고 웅장하게 꾸며 왕실의 오랜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므로 예릉의 석물과 부속 건축물들은 웅장한 규모로 조영되었다. 평소 부덕이 높았던 철종의 비 철인왕후가 1878(고종 15)42세로 승하하면서 이곳에 함께 안장하여 쌍릉을 이루었다. 1908(융희 2) 730일 철종장황제와 철인장황후로 각각 추존되었다.

 

 

 

 

 

 강화도령, 속명 이원범

  

철종(哲宗, 이변, 속명 이원범, 1831 - 1863, 재위 14)

서삼릉 - 철종 예릉후사(後嗣)가 없이 승하(昇遐)한 헌종(憲宗)의 뒤를 이어 즉위(卽位)하게된 철종(哲宗)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안동김씨(安東金氏) 세도정권(勢道政權)의 집권(執權) 연장책(延長策)으로 그들에 의해 선택된 국왕(國王)이었습니다. , 철종은 영조(英祖)의 아들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 은언군(恩彦君) 이인의 손자(孫子)이고, 아버지는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이광입니다.

 

그런데 조부(祖父)인 은언군은 영조대에 상인(商人)들과의 빚 문제가 발각되어 제주도로 귀양을 갔다가 강화도에 안치(安置)되고, 1801년 순조(純祖) 원년 신유사옥(辛酉邪獄) 때 천주교도(天主敎徒)였던 그의 처와 며느리로 인하여 함께 처형(處刑)을 당합니다. 또한 헌종(憲宗) 10[1844]에 철종의 형이었던 회평군(懷平君)이 반역(叛逆)에 연루(連累)되어 처형당하고 이때 어렸던 철종 역시 강화도로 유배(流配)되어 농사일로 지내게 되어 흔히 철종을 '강화 도령'이라 불리게 됩니다.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길(원당동) 산 37-1184919세의 나이로 당시 대왕대비(大王大妃)인 순조(純祖)의 비 순원왕후(純元王后)에 의해 왕위에 오른 철종은 권력에서 소외(疎外)되는 국왕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나 철옹성(鐵甕城)과도 같았던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이 그 절정에서 서서히 말기적(末期的)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가 또한 철종 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도 정권이 지닌 모순(矛盾)들이 그대로 노출되기 시작한 증거로 철종로 말기의 전국적인 민란(民亂)을 들 수 있습니다.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의 수탈(收奪)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의 반란은 결국 안동 김씨 세도 권력을 몰락시키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 것입니다.

 

아울러 더욱 가속화되었던 서양(西洋) 제국주의(帝國主義) 열강(列强)들의 통상(通商) 요구나 계속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급격한 확산을 가져온 천주교(天主敎) 세력 등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세도 정권이 야기(惹起)시킨 필연적인 결과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권력에 의한 미봉(彌縫)적 대처와 함께 민족 내부적으로 발생한 민족적(民族的) 종교(宗敎)인 동학(東學)의 창도(創道)는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국내외(國內外)의 혼란한 정세는 안동 김씨 세도 권력의 종말(終末)을 고하고 마는데, 33세의 나이로 승하한 철종(哲宗) 역시 영혜옹주(永惠翁主) 외에 후사(後嗣)가 없어 다음 대의 국왕을 물색하던 중 풍양조씨(豊陽趙氏) 가문이었던 추존왕(追尊王) 익종(翼宗)의 비인 왕대비(王大妃) 신정왕후(神貞王后)가 이하응(李昰應)과 손잡고 그의 아들을 즉위시켜 고종(高宗)을 삼아 흥선대원군(興善大院君)의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25대 왕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이자 정조의 아우 은언군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은언군의 3남인 전계대원군이며 용성부대부인과의 사이에 3남이다. 일명 강화도령으로 알려져 있다.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19세에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다가 갑자기 순조의 비 순원왕후 김씨에 의해 왕위에 오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철종은 이때부터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으며 조정을 다스리게 된다. 하지만 안동 김씨 세도의 농간과 삼정(三政 : 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이 극에 달해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철종은 삼정이정청(三政釐政廳)이라는 특별 기구를 설립하여 삼정의 문란을 수습하기 위한 정책을 시행하게 하는 등 민란의 수습에 진력했다. 1863(철종 14) 128일 창덕궁에서 승하하였다.

 

24대 임금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였을 때,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왕실 직계 후손으로는 철종이 유일하였다. 철종은 정조의 아우 은언군의 손자인데, 은언군은 상인들에게 진 빚이 많다는 이유로 할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제주도로 귀양을 갔고, 역모 사건에 휘말려 강화도에 유배보내졌다. 이에 더하여 그의 아내와 며느리가 천주교 신자였던 관계로 1801(순조 1) 신유박해 때 사사되었다. 철종의 형이자 은원군의 또 다른 손자인 이원경도 역모에 휘말려 1844(헌종 10) 처형되었으며, 그의 가족이 모두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몰락한 왕족으로서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던 강화도령 원범은 유일한 왕실의 직계후손이라는 이유로 왕이 되기 위한 교육도 전혀 받지 못한 채 왕이 되었다. 철종실록1849(철종 즉위) 69일자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대왕대비의 하교가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망극한 일을 당한 속에서도 5백 년 종사를 부탁할 사람을 얻게 되어 다행스럽소. 주상은 영조(英祖)의 혈손으로서 지난날 어려움도 많았고 오랫동안 시골에서 살아왔으나, 옛날의 제왕(帝王) 중에도 민간에서 생장한 이가 있었는데 백성들의 괴로움을 빠짐없이 알고 백성 위주의 정책을 펼쳐 끝내 훌륭한 군주가 되었소. 지금의 주상도 이를 본받아 애민(愛民)’ 두 글자를 잊지 마오. 지난날의 공부가 어떠한 지는 비록 알 수 없지만 사람이 배우지 아니하면 옛일에 어둡고 나라를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니, 수시로 유신(儒臣)을 접견하고 경사(經史)를 토론하여 성현의 심법(心法)과 제왕의 치모(治謨)를 점차 익힌 연후에라야 처사가 올바르게 되는 것이오. 정성을 기울여 잘 듣고 마음속에 새겨두기 바라오.

 

연도

재위

사  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1850

1년

7월, 황해도 가작(加作)의 폐 금함

1858

9년

2월, 금,은,동의 채굴을 금지함

1851

2년

7월, 김정희 북청으로 유배

10월, 원자(元子) 탄생{익년 사망}

10월, <헌종실록(憲宗實錄)> 간행

1860

11년

7월, 경희궁(慶熙宮)을 수리함

12월, 왕 친정(親政)을 시작함

9월, 최재우 동학(東學) 창시

1852

3년

4월, 삼남(三南)의 방곡(防穀) 금함

1861

12년

11월, 김정호 대동여지도 간행

1853

4년

9월, 소나무를 벌목하지 못하게 함

1862

13년

2월, 진주 민란(民亂) 일어남

1854

5년

4월, 러시아배 함경도에서 백성 살상

3-10월, 전국 각지에서 민란 발생

1856

7년

10월, 김정희(金正喜)죽음{1786 -}

1863

14년

11월, 동학교주 최재우 체포

1857

8년

8월, 대왕대비 김씨{순원왕후}죽음

12월, 왕 승하,  흥선군 차남 즉위{고종}

순종(純宗)의 묘호를 순조(純祖)로 변경

대왕대비 조씨 수렴청정

 

기로과란 무엇인가?

실록에도 거짓말이 있다

암행어사를 자주 오래 파견하자

원님 미친놈 만들기

허수아비 왕의 사랑과 비극

 

안동김씨 세력연장을 위 한 철종의 즉위 배경

안동 김씨가 계속 실권을 잡게 되는 배경에는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순조의 비인 순원 왕후는 손자 인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조대비의 척족인 풍양 조씨 일파가 왕위를 세울 것을 염려하여 재빨리 손을 썼다. 그도 그럴것이 헌종의 6촌 이 내에 드는 왕족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7촌 이상의 왕족은 몇 명 있 었다. 후대의 왕은 본래 항렬로 따져 동생이나 조카벌이 되는 자로 왕 통을 잇게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왜냐하면 종묘에 서 선왕에게 제사 를 올릴 때 항렬이 높은 이가 항렬이 낮은 이에게 제사를 올리게 해서 는 안된다는 법도 때문이었 다. 그러나 안동 김씨 척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헌종의 7촌 아저 씨벌 이 되는 강화도령 원범이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했다. 이렇듯 안 동 김씨 척족들은 기왕에 잡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 하여 왕가의 법도 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전횡을 저지른다.


민진용의 옥

대민 노력

삼정의 문란

진주민란

동학의 탄생, 동학의 초대교주 최제우

 

   

 

 

 

강화도령 철종의 생가 - 용흥궁

 

 

강화도령 철종의 잠저 용흥궁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41 번지에 있다. 강화경찰서 왼쪽 담옆 길을 따라 70m 정도 서쪽으로 들어가면 오른편으로 보이는 기와집으로 강화도령 철종(1831-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 19세 까지 살던 곳(잠저)이다. 원래는 초가였으나, 철종 4년(1853)에 강화유수 정기세가 현재와 같은 기와집을 세우고 용흥궁이라 하였다. 고종 광무 7년(1903년)에 청안군(淸安君) 이재순이 중건하였다. 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20호 이다.

 

 

 

 

 

북천마을 산다는 우리 낭군은      

어느댁 도령인지 알수 없지만      

밤에만 살짝이 찾아오셔서      

날울려 놓고 돌아가시는      

무정한 우리님은 알고보니

임금님이래요 임금님이래오

하늘같이 높으신 우리 낭군은

어느나라 임금인지 알수 없지만

벽오동 사이로 달걸어 놓고

님기다리는 애끓는 마음

무정한 우리님은 알고보니

임금님이래요 임금님이래요

 

위 노래는 이미자씨의 "임금님의 첫사랑"이라는 노래가사이다. 노래속의 임금님은 조선 25대왕인 철종(哲宗)이다.철종은 조선말의 행운아 이면서도 비운의 왕이다.강화도의 나뭇군에서 하루아침에 왕이 되었고, 어느것 하나 왕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정치현실의 벽을 느꼈고,첫사랑을 잊지못해서 결국 주색에 빠져살다 33살 젊은 나이에 죽었다. 철종이 왕이 되기전에 살던 집이 바로 용흥궁이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내전 1동, 외전 1동, 별전 1동, 잠저구기비각 1동 이다. 팔작지붕에 홑처마 주심포의 구조로, 내전은 앞면 7칸, 측면 5칸이며 건평은 90m2 이다. 별전은 앞면 6칸, 측면 2칸인 ㄱ자형 집으로 건평이 95m2 이다. 비각은 정방형으로 앞면과 측면이 각각 2.5m로 넓이가 약 6m2 이다. 내전의 오른쪽에 우물이 하나, 별전의 왼쪽에 우물이 하나가 있으나 사용할 수 없다.

 별전에는 마루 앞으로 작은 정원이 있고, 별전 오른쪽에는 조금 더 큰 규모의 정원이 있었으나 잘 가꾸지 않아서 인지 별전 오른쪽 정원에는 화초가 전혀 없다. 별전 주변에 큰 나무들이 있었으나, 1999년 5월 5일에 방문하였을 때 거의 베어져 밑둥만 남아있었다.

 

48번국도를 따라 강화읍에 들어선 후 계속 서쪽으로 직진하여 강화경찰서 입구 3거리를 지나 50m 정도 진행하면 고려궁지 가는 길 표시가 있는 삼거리(실제는 작은 4거리임)에서 고려궁지 쪽(북쪽)으로 약 50m 지점의 안내판을 따라 골목길로 약 70m 정도 들어가면 왼쪽으로 보이는 기와집이다. 용흥궁은 안내판이 있지만 "설마 그런 골목에 있을까?" 싶어 찾기가 수월치 않다. 고려궁지 가는 길 표시가 있는 삼거리에서 고려궁지 쪽(북쪽)으로 약 120m 진행하면 김상용순의비가 있는 비각이 보이고, 비각옆의 안내판을 따라 성공회강화성당을 먼저 들른 후에 성당 주차장에 주차하고(승합차 가능), 성공회강화성당 정문에서 내려다 보이는 기와집을 찾아가는 것이 쉽다. 강화경찰서 정문 왼쪽 담 옆 길을 따라 70m 정도 서쪽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보이는 기와집이기도 하다. 

 

철종 : 조선 25대 왕. 강화도에 유배되어 용흥궁 자리의 초가에서 살다가 즉위하였다.

철종실록 : 조선 제25대 왕 철종 재위 기간의 역사를 기술한 책.

철종 외가 : 철종의 외숙인 염보길이 살던 집. 지방문화재자료 제8호.

김상용순의비 : 강화읍 관청리, 병자호란 때 충신 김상용의 순의비.

성공회강화성당 : 대한성공회 최초의 성당, 한식 교회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 사적 제424호.

고려궁지 :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고려시대 궁궐 터. 사적 제133호.

관청리은행나무 :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수령 700년의 은행나무. 강화군 지정 보호수.

강화산성 북문 : 조선 숙종 때 건립한 강화산성의 북문. 사적 제132호.

오읍약수 : 강화읍 관청리 강화산성 북문 밖 동쪽 400보 지점에 있는 약수터.

외규장각 : 강화읍 관청리 고려궁지 오른쪽에 있었다고 한다. 터만 남아있다.

 

 

용흥궁은 강화읍 관청리 44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은 강화도령으로 불렸던 조선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14∼19살까지 살았던 곳이다. 원래는 초가집이었으나, 왕이 되어 떠난 후 강화유수 정기세가 현재와 같은 기와집을 세우고 용흥궁이라고 하였다. 1903년에는 청안군 이재순이 중건하였다."용이 일어난 궁"이라는 의미다. 현재의 건물은 내전 1동, 외전 1동, 별전 1동, 잠저구기비각(潛邸舊基碑閣) 1동 등이다. 내전은 팔작지붕에 홑처마 주심포의 구조로 앞면 7칸, 측면 5칸이며, 건평은 90㎡이다. 별전은 ㄱ자형 집으로 앞면 6칸, 측면 2칸으로 건평은 95㎡이다. 비각은 정방형으로 앞면과 측면이 각각 2.5m로 넓이가 6㎡이다. 비각에는 철종이 이곳에서 살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 있는데 ‘철종조잠저구기(哲宗朝潛邸舊基)’라고 쓰여 있다. 문 앞에는 송덕비 2기가 나란히 서 있는데, 하나는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새로 지은 강화유수 정기세의 것이고, 하나는 정기세의 아들 정원용(鄭元容)의 것이다. 정원용은 강화도령을 왕으로 모시는 봉영의식(奉迎儀式)을 맡았다.


철종의 이름은 변(?)이고, 초명은 원범(元範)이다. 자는 도승(道升), 호는 대용재(大勇齋)로 정조의 이복 동생 은언군(恩彦君) 인(?)의 손자이다. 은언군의 아들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과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 사이의 셋째아들이다. 철종의 할아버지인 은언군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할 때 강화로 쫓겨났으며, 1801년 신유박해 때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청나라 신부 주문모로부터 영세를 받은 사실이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철종은 1831년(순조 32) 오늘날 서울의 안국동인 경행방(慶幸坊)에서 태어났다. 철종의 아버지 전계군은 1844년(헌종 10) 철종의 큰형인 회평군(懷平君)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민진용(閔晋鏞)의 옥’에 연루되어 능지처참을 당했다. 이때 철종은 둘째 형과 강화로 유배되어 지난날 은언군이 살던 집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그의 나이 열네살이었다.

 

 철종은 5년 뒤인 1849년 19세의 나이에 순조의 비였던 순원왕후(順元王后)에 의해 왕으로 지목되었다. 사실 가계 상으로는 철종이 헌종의 아저씨뻘이었는데, 그렇게 되면 아저씨가 조카를 이은 셈이니 왕통에도 문제가 있는데다 풍양 조씨 신정왕후의 아들인 헌종을 잇는 것이 되어 풍양 조씨가 세력을 잡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안동 김씨인 순원왕후의 아들로 만들어 왕통을 잇게 한 것이다. 봉영의식을 행한 뒤 그해 6월 8일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이튿날인 6월 9일 창덕궁 희정단(熙政堂)에서 관례를 행한 뒤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1851년에는 대왕대비의 근친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맞았는데 이가 명순왕후(明純王后)이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직계후손이다. 사도세자는 왕위에 오른 정조를 제외하고 세아들을 더 두었다. 은언군과 은신군 은전군등 세명이다. 은언군은 슬하에 3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막내 이광이 철종의 아버지인 전계군이다. 전계군은 세아들을 두었는데 회평군 이원경,영평군 이 욱, 그리고 막내인 원범이었다. 은언군은 할아버지인 영조에게 별로 사랑을 받지 못했던 모양이다. 영조 재위 기간 중, 은언군이 상인들에게 빚을 진 사실이 3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기도 했다. 아마도 노론 세력과의 불엽화음을 일으키는 자식을 죽인 아버지의 입장에서 손자인 정조에게 안전하게 정권 이양을 함에 있어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될 수도 있는 싹을 미리 잘라두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추측할 뿐이다. 영조가 죽고 나서, 배다른 형제인 정조에 의해 흥록대부(興祿大夫)에 올랐다. 그러나 권력을 추구하는 자들은 은언군을 그냥 두지 않았다.

 

정조 재위 초기의 실권자였던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元嬪)으로 들였으나 후손을 보지 못하고 죽자,은언군의 큰아들인 담(湛)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왕위를 이으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정조 10년(1786)에 큰아들 담(湛)이 모반죄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이 때 은언군도 강화로 함께 귀양을 가게 되었다.철종이 강화도에 살게되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그 후, 정조가 죽고 영조의 후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되었는데,은언군의 처와 며느리가 가톨릭 신부로부터 영세 받은 일이 발각되어,신유박해 때 은언군은 결국 사약을 받고 죽게 되었다. 역모를 일으켰던 집안이라는 죄에 천주교 신자의 집안이라는 것이 가중되어,이 때부터는 더 이상 왕족이 아닌 평민만도 못한 생활을 하게 된 모양이었다.

 

훗날 철종이 된 은언군의 손자 원범(元範)이 글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하에서 헌종이 후사없이 죽자,자신들의 손바닥 위에 왕을 올려놓고 마음대로 정국을 주무를 수 있는 왕족을 고르게 되었는데,배움도 없고 정치에 문외한인 왕족이라는 이유로 원범이 왕위에 올랐으니, 바로 철종이다. 헌종이 죽을 당시 후사가 없었다. 게다가 당시는 왕권과 정권이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등 세도가에 의해 좌지우지 되던 시대인지라 세도가들의 정략에 의해 그들 안동김씨 입맛에 맞는 왕으로,영조의 핏줄 이래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아들 전계대원군의 아들인 이원범이 신하들에 의해 왕이 선택 되는 운명으로 국왕의 즉위 절차를 밟아 우선 덕완군에 군봉됐다가 임금이 되었다.

 

안동 김씨가 계속 실권을 잡게 되는 배경에는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는 손자인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조대비의 척족인 풍양 조씨 일파가 왕위를 세울 것을 염려하여 재빨리 손을 썼던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헌종의 6촌 이내에 드는 왕족이 없었다. 그러나 7촌 이상의 왕족은 몇명 있었는데 후대의 왕은 본래 항렬로 따져 동생이나 조카벌이 되는 자로 왕통을 잇게 하는것이 원칙 이었다. 왜냐하면 종묘에서 선왕에게 제사를 올릴때 항렬이 높은이가 항렬이 낮은 이에게 제사를 올리게 해서는 안된다는 법도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도 예전의 같은 이유의 왕들이 윗대왕의 양자로 입적되는과정도 없이 그야말로 권력유지를 위해 왕가의 법도를 철저하게 무시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왕을 세웠다. 철종의 출발은 권력의 꼭두가시로 시작되었고 결국 비극으로 막을 내리게 된 시작이기도 하다. 


철종후궁묘소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했는데 점차 나이도 들고 친정의 경험도 쌓이면서 1859년부터 관리들의 부정을 공격하는 등 비교적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했다. 1861년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훈련도감의 마보군(馬步軍)과 별기군(別技軍)의 군사를 이용하여 궁궐의 숙위를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봉건적인 통치기능이 무너지고 삼정(三政: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의 문란이 더욱 심해져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1862년 진주 단성지방을 시발로 하여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철종은 봉기 발생지역의 수령과 관속을 처벌하여 해이해진 봉건기강을 확립하는 한편, 농민의 요구조건을 일부 수렴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려고 했다.

 

농민봉기가 잠시 가라앉은 5월 이후에는 삼정(三政)이정청을 설립해 삼정의 개혁을 공포하고 재야 유생층과 관료들에게 개혁책을 모집했다. 이때 마련된 삼정이정책은 주로 삼정운영의 개선에 초점을 두었으며, 법정 세액 이외의 각종 부가세는 일체 혁파하고 도결(都結)이나 방결(防結)을 폐지하고 환곡의 경우 토지세로 전환시키는 등 조세개혁의 원칙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후속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가운데 지배층의 이해관계가 얽혀 삼정이정책은 시행되지 못했다.

 

 철종은  대왕대비의 친정인 김조순 가문이 경쟁세력을 도태시키면서 전보다 강화된 독점 권력을 누리는 시기에 재위하여 세도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기의 뜻을 펴 보지도 못하고 1863년 12월 8일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철종의 왕후는 다시 세도가인 안동김씨인 김문근의 딸인 철인왕후 김씨였는데 왕자를 낳았으나 얼마안가 죽었고, 그 후 7명의 부인으로부터 소생들이 있었으나 모두 일찍 죽고 딱한명 영혜옹주한명만이 후에 개혁파인 박영효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그도 후사없이 죽었다. 원래 농사꾼으로 강화도에서 살던 시절 양순이란 천민의 처녀와 혼약을 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었다고 한다.


철종이 헌종의 뒤를 이어 얼떨결에 상감마마가 되고 양순에 대한 상사병과 엄격한 궁중생활에 대한 스트레스로 시름시름 앓아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일이 잦아지자 헌종비 효현왕후와 익종비 신정왕후를 비롯한 왕가의 사람들은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양순을 독살시켰다고 한다.

 

 금지된 사랑

천민인 양순을 궁에 들일 수도 없고 천민으로 살았던 철종이 천민의 여자에게 정을 준다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고 천민으로 살던 시절의 것은 모두 잊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럼 후궁으로 들이면 되지 않겠느냐 하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천민은 원칙적으로 궁녀가 될 수 없었다. 고작해야 무수리가 된다면 모를까..

 

영조의 어머니가 무수리인 사실도 있지만 그일 자체는 조선왕실 사람들에게 상당한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고 그들은 그런 일의 반복을 다시는 원치 않았다. 차라리 죽게 되면 잊을 것이다 해서 사람을 보내 은밀히 죽였다고 한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철종은 비탄을 이기지 못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삼정의 문란과 국가의 잇다른 민란을 자초하게 되지만 그런 것을 어떻게 수습할 의욕도 가지지 못한 채 젊은 나이에 죽는다.


1849년 6월 철종을 서울로 모셔가기위해 강화도로 오는 관리들의 행렬을 그린 역사기록화.길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는 많은 사람들의 행렬과 당시 강화의 모습을 12폭 병풍에 그려놓은 것으로 위의 사진은 그 중 일부이다. 위엄있고 요란스러운 행렬을 화면 중심에 배치하면서 강화산성과 여러 건물, 구경하는 주민들의 모습 , 바닷가의 풍경 등을 섬세하게 그려 당시의 생생한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인물들이 비록 매우 작게 묘사되어 있기는 하지만 농민들, 어부들, 장사꾼들과 관료들, 양반사대부들, 승려들 그리고 노인과 아낙네들 어린이들에 이르기까지 각 계층 인물들이 모습이 비교적 생동력 있게 나타나 있다.

나뭇군으로 숨어 살던 순박하고 어리석은 원범이 이 어마어마한 행렬을 보고 어떠했을까?

철종의 조부 은언군은 동복형제(어머니가 같은 친형제)인 은신군과 함께 왕세손(정조)를 욕보였다는 이유로 귀양을 떠났다가 은신군은 그곳에서 죽고 은언군은 후일 강화도로 귀양지가 옮겨져 그곳에 정착하게 된다. 이곳에서 이광은 첫번째부인 최씨와 혼인하여 회평군 영경, 영평군 욱 2남을 얻고, 최씨부인이 죽고 두번째 부인을 들였는데 이 부인의 친정아버지가 염성화로 슬하에 막내 원범을 두었다. 전계대원군은 부친인 은언군과 형수 신씨부인, 어머니 송씨부인이 왕족으로써 천주학을 신봉한 죄를 입고 모두 사사된 탓에 죽을때까지 군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훗날 아들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전계군으로 책봉되었다가 대원군으로 추증되었으며 최씨부인은 완양부대부인, 염씨부인은 용성부대부인으로 추증되었다. 염씨부인의 아버지 염성화는 부대부인의 친정아버지라 해서 영의정의 관직을 추증받았습니다.

 

 강화행렬도(江華行列圖)

 


▲철종을 왕으로 모시러 오는 왕실의 행렬을 그린 강화행렬도(江華行列圖) 규장각소장,

 

 

 

1849년 6월 6일 헌종(憲宗)이 후사가 없이 승하하자 순조 비 순원왕후(純元王后)는 영조(英祖)의 유일한 핏줄로 강화도에서 살고 있던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증손 이원범(李元範)을 데려다가 순조(純祖)의 후사로 삼아 덕완군(德完君)으로 봉하고, 사흘 후인 6월 9일에 창덕궁의 인정문에서 즉위식을 거행하니 그 가 조선의 25번째 왕 철종(哲宗)이다. 철종은 사도세자와 숙빈임씨(肅嬪林氏)의 아들 은언군(恩彦君)의 둘째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가 낳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3남으로, 용담염씨(龍潭廉氏)가 1831년(순조 31) 6월 17일에 낳았다. 큰아버지 상계군(常溪君, 진천송씨 아들)이 1786년(정조 10)에 꾀한 반역에 은언군이 연루되었으나, 정조(正祖)의 비호로 목숨을 부지한 채 은언군은 강화도로 가족과 함께 유배되었다.

 

그러나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은언군의 부인 진천송씨(鎭川宋氏)와 큰며느리 평산신씨(平山申氏)가 천주교 세례를 받아 죽임을 당하고 은언군은 끝내 사사되었다. 이렇게 철종의 가족들이 강화도와 첫 번째 인연을 맺은 뒤, 1844년(헌종 10)에는 이복 형 회평군(懷平君, 전주최씨 아들)이 반역에 연루되어 사사되는 바람에 강화도로 유배되어 농사를 지으면서 살던 철종이 순원왕후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순원왕후의 수렴청정 하에 있던 1851년 9월 25일에 안동김씨(安東金氏) 영돈녕부사 영은부원군 문근(汶根)의 딸을 왕비(哲仁王后)로 책봉하였다.

 

철종은 철인왕후 외에 후궁 4명과 궁인 3명 사이에서 5남 6녀를 두었으나 모두 요절하고, 숙의범씨(淑儀范氏)가 낳은 영혜옹주(永惠翁主)만 박영효(朴泳孝)에게 출가하였으나 역시 3개월 만에 죽어 후사는 없다. 철종은 재위기간 동안 헌종(景陵) 장례, 수릉(문조) 천장, 인릉(순조) 천장, 순원왕후(순조 비) 장례, 휘경원(수빈박씨) 2회 천장, 전계대원군과 큰어머니 완양부대부인(全州崔氏)의 무덤 천장 등 8번의 국장을 치렀다. 그러나 여러 번의 국장 때 현장을 직접 살펴 장지를 정하는데 관여하였지만, 정작 본인이 젊은 나이에 죽을 줄 몰랐기 때문에 자신이 묻힐 자리를 마련해 두지는 못한 채, 1863년 12월 8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33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시어머니(純元王后)와 며느리(孝顯王后) 그리고 철인왕후(철종 비)가 안동김씨 가문 출신으로 세도정치에 염증을 느낀 신정왕후(神貞王后, 趙大妃)는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을 데려다가 작호를 익성군(翼成君)으로 내리고, 자신의 아들로 삼아 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한 후 자신이 수렴청정을 하였다. 한편 신정왕후는 “주산에서 혈로 내려오는 산줄기와 혈 주변의 산들이 지극히 귀하여 아주 좋은 자리다.”라고 추천된 희릉(禧陵, 장경왕후 무덤)의 오른쪽 산등성이를 철종의 장지로 정하여, 이듬 해 4월 7일 남향(子坐午向)으로 장사를 지내고, 능호를 예릉(睿陵)이라 하였다.

 

장지가 중종(中宗)의 옛 무덤 자리인지라 광중에서 중종의 애책문(哀冊文) 옥 60편(片)과 증옥백(贈玉帛)이 나오자 정릉의 곡장 밖에 옮겨 묻게 하였다. 광중의 “흙 색깔이 누렇고 윤기가 있어서 아주 길하고, 산세가 수려하고 국면(局面)이 안온하여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도 모두 극히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참으로 아주 다행입니다.”라고 대신들이 말하니, 신정왕후는 매우 흡족해 했다. 한편 “예전의 석물을 갈아서 썼는데, 돌의 품질이 모두 너무나 좋습니다.”와 “문무석(文武石)이 근래의 제도에 비해 약간 컸다.”는 기록으로 보아 석물은 중종의 옛 무덤에 설치되었던 것을 발굴하여 다시 사용하였던 것 같다.

 

순원왕후가 간택하였던 자신의 친정 집안인 안동김씨 가문 출신 철인왕후가 1878년(고종 15) 5월 12일 창경궁 양화당에서 승하하였다. 고종의 지시로 예릉을 살펴보았던 대신과 상지관이 철종의 왼쪽에 쌍분으로 조성하는데 문제가 없음을 고하자 그 곳을 장지로 정하여 그 해 9월 18일에 장사를 지냈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 철인왕후 김씨(哲仁王后 金氏, 1837 - 1878)

철인왕후 김씨는 1837년 안동김씨(安東金氏) 집안인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 김문근(金汶根)의 딸로 태어나 철종 2[18 ]에 왕비(王妃)에 책봉(冊封)됩니다. 하지만 그녀의 왕비 책봉은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의 권력(權力) 유지(維持)를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기에, 철인왕후는 철종 승하(昇遐)후 흥선대원군(興善大院君)의 집권(執權) 아래에서 대비(大妃)로 여생을 보내다가 고종(高宗) 15[1878] 42세의 나이로 승하해 서삼릉(西三陵) 내 철종의 예릉(睿陵)에 안장(安葬)됩니다.

 

철인왕후는 1837(헌종 3) 323일 영은부원군 김문근의 딸로 태어났다. 15세 때인 1851(철종 2)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858(철종 9) 10월 창덕궁 대조전에서 원자를 낳았으나 불행히도 1년을 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철종 승하 후 왕대비가 되었으며, 1878(고종 15) 51242세로 창경궁 양화당에서 승하하였다. 말수가 적고 슬프고 기쁜 감정을 두드러지게 나타내지 않는 온화하고 부덕한 성품을 갖추었다. 그러나 친정인 안동 김씨 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세력을 떨쳐 당대와 후대의 사회에 큰 물의를 빚었다.

 

철인왕후 자신은 말수가 적고 부덕하였으나, 딸을 왕후로 앉히고 외척이 된 안동 김씨 세력의 횡포는 당시의 사회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가문의 이익을 위한 정치가 횡행하였고, 관직을 사고 파는 매관매직이 성행하였다. 탐관오리들은 계속적으로 농민을 수탈하였다. 성인 남성에게만 물려야 하는 군포를 어린이나 죽은 자의 몫까지 계산하고, 터무니없는 세금을 만들어 백성들을 옥죄었다.

 

3대 국가 재정인 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이 계속되고, 고통스러운 삶을 영위하던 백성들 사이에서는 저항 의식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1862(철종 13)에는 마침내 진주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백낙신의 착취를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시위군을 형성하여 진주성을 점령하였고, 탐관오리들을 공격하였으며 부당한 환곡의 징수를 중지하겠다는 문서를 받아내었다. 이는 전국적인 농민 항쟁인 임술민란의 시발점이 되었다. 조선 후기 타락한 관리들의 지배 하에서 피폐한 삶을 살았던 백성들은 저항의식과 더불어 새 세상에 대한 염원을 갖게 되었으며 이는 새로운 종교인 동학의 창시라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 517, 1392 - 1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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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익종(翼宗) 수릉(綏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융릉(隆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영릉(永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장릉(章陵 : 사적 제202)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경릉(敬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 2()

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

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유릉(裕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홍릉(洪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

왕릉 35

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예릉(睿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경릉(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인릉(仁陵 : 사적 제194)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건릉(健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홍릉(弘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원릉(元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혜릉(惠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의릉(懿陵 : 사적 제204)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익릉(翼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명릉(明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숭릉(崇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영릉(寧陵 : 사적 제195)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휘릉(徽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장릉(長陵 : 사적 제203)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성묘(成墓 : 사적 제365)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목릉(穆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강릉(康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효릉(孝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희릉(禧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온릉(溫陵 : 사적 제210)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정릉(靖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9대 성종(第九代 成宗) 회묘(懷墓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순릉(順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선릉(宣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

8대 예종(第八代 睿宗) 공릉(恭陵 : 사적 제205)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8대 예종(第八代 睿宗) 창릉(昌陵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7대 세조(第七代 世祖) 광릉(光陵 : 사적 제197)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사릉(思陵 : 사적 제209)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장릉(莊陵 : 사적 제196)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5대 문종(第五代 文宗) 현릉(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4대 세종(第四代 世宗)

3대 태종(第三代 太宗)

2대 정종(第二代 定宗)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정릉(貞陵 : 사적 제208) : 서울 성북구 정릉2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1대 태조(第一代 太祖)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목조-덕릉 효공왕후 이씨-안릉

익조-지릉 정숙왕후 최씨-숙릉 , 손씨

도조-의릉 경순왕후 박씨-순릉, 조씨

환조-정릉 의혜왕후 최씨-화릉, 이씨, 정빈 김씨

태조-건원릉 신의왕후 한씨-제릉 신덕왕후 강씨-정릉

정종-후릉 정안왕후 김씨-후릉

태종-헌릉 원경왕후 민씨-헌릉

세종-영릉 소헌왕후 심씨-영릉

문종-현릉 현덕왕후 권씨-현릉

단종-장릉 정순왕후 송씨-사릉

세조-광릉 정희왕후 윤씨-광릉

예종-창릉 장순왕후 한씨-공릉 안순왕후 한씨-창릉

성종-선릉 공혜왕후 한씨-순릉 폐비 윤씨-회묘 정현왕후 윤씨-선릉

연산군-연산군묘 폐비 신씨-연산군묘

중종-정릉 단경왕후 신씨-온릉 장경왕후 윤씨-희릉 문정왕후 윤씨-태릉

인종-효릉 인성왕후 박씨-효릉

명종-강릉 인순왕후 심씨-강릉

선조-목릉 의인왕후 박씨-목릉 인목왕후 김씨-목릉

광해군-광해군묘 폐비유씨-광해군묘

인조-장릉 인렬왕후 한씨-장릉 장렬왕후 조씨-휘릉

효종-영릉 인선왕후 장씨-영릉

현종-숭릉 명성왕후 김씨-숭릉

숙종-명릉 인경왕후 김씨-익릉 인현왕후 민씨-명릉 인원왕후 김씨-명릉

경종-의릉 단의왕후 심씨-혜릉 선의왕후 어씨-의릉

영조-원릉 정성왕후 서씨-홍릉 정순왕후 김씨-원릉

정조-건릉 효의왕후 김씨-건릉

순조-인릉 순원왕후 김씨-인릉

헌종-경릉 효현왕후 김씨-경릉 효정왕후 홍씨-경릉

철종-예릉 철인왕후 김씨-예릉

고종-홍릉 명성황후 민씨-홍릉

순종-유릉 순명효황후 민씨-유릉 순정효황후 윤씨-유릉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