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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朝鮮王陵] 능(陵) - 10 (1) 제26대 고종황제 (高宗) _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 흥원 興園

草霧 2013. 8. 19. 17:29

 

 

 

조선왕릉[朝鮮王陵] 능(陵) - 10

 

 

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 - 10 

 

 

 

 

 

 

10. 오백 년 왕조, 문을 닫다

 

26대 고종황제 (高宗, 1852-1919)

 

홍릉20091129-11.JPG 

 

 _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 흥원興園

 

 

왕릉은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들의 무덤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왕릉은 42(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40, 14, 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3, 4, 5)입니다 .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폐위(廢位)된 묘() 2()

황제릉(皇帝陵) 2()

왕릉 35

 

 

 

 

1. 추존이라는 미명으로, 역사세우기

 

추존(追尊)함길도 8

 

 

2. 왕조, 문을 열다

 

1대 태조 (太祖, 1335-1408) _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 정릉 貞陵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2대 정종 (定宗, 1357-1419) _ 후릉 厚陵

 

3대 태종 (太宗, 1367-1422) _ 헌릉 獻陵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4대 세종 (世宗, 1397-1450) _ 영릉 英陵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5대 문종 (文宗, 1414-1452) _ 현릉 顯陵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6대 단종 (端宗, 1441-1457) _ 장릉莊陵, 사릉思陵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7대 세조 (世祖, 1417-1468) _ 광릉 光陵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추존(追尊)왕 덕종 (德宗, 1438-1457) _ 경릉 敬陵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8대 예종 (睿宗, 1450-1469) _ 창릉昌陵, 공릉恭陵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9대 성종 (成宗, 1457-1494) _ 선릉宣陵, 순릉順陵, 회묘 懷墓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3. 왕조, 산을 넘다

 

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_ 연산군묘 燕山君墓

 

11대 중종(中宗, 1488-1544) _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 泰陵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12대 인종 (仁宗, 1515-1545) _ 효릉 孝陵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13대 명종(明宗, 1534-1567) _ 강릉 康陵, 순창원 順昌園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14대 선조 (宣祖, 1552-1608) _ 목릉 穆陵, 성묘 成墓, 순강원 順康園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4. 조선, 또 다시 위기를 맞다

 

15대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_ 광해군묘 光海君墓

 

추존(追尊)왕 원종 (元宗, 1580-1619) _ 장릉 章陵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5. 왕조, 반석을 다지다

 

16대 인조 (仁祖, 1595-1649) _ 장릉 長陵, 휘릉 徽陵, 소경원 昭慶園, 영회원 永懷園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6. 조선, 당쟁에 휩싸이다

 

17대 효종 (孝宗, 1619-1659) _ 영릉 寧陵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18대 현종 (顯宗, 1641-1674) _ 숭릉 崇陵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7. 환국정치로 왕권을 다지다

 

19대 숙종 (肅宗, 1661-1720) _ 명릉明陵, 익릉 翼陵, 대빈묘大嬪墓, 소령원昭寧園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20대 경종 (景宗, 1688-1724) _ 의릉懿陵, 혜릉惠陵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8. 조선, 르네상스를 맞다

 

21대 영조 (英祖, 1694-1776) _ 원릉元陵, 홍릉弘陵, 수경원綏慶園, 수길원 綏吉園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추존(追尊)왕 진종(眞宗) _ 영릉永陵

 

추존(追尊)왕 장조(사도세자 莊祖) _ 융릉隆陵, 의령원 懿寧園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22대 정조(正祖, 1752-1800) _ 건릉健陵, 휘경원徽慶園, 효창원 孝昌園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9. 조선, 세도정치에 휘둘리다

 

23대 순조 (純祖, 1790-1834) _ 인릉仁陵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추존(追尊)왕 익종 (翼宗, 문조 文祖) _ 수릉綏陵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24대 헌종 (憲宗, 1827-1849) _ 경릉景陵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25대 철종 (哲宗, 1831-1863) _ 예릉睿陵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10. 오백 년 왕조, 문을 닫다

 

26대 고종황제 (高宗, 1852-1919) _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 흥원 興園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27대 순종황제 (純宗, 1874-1926) _ 유릉裕陵, 영원英園, 숭인원 崇仁園, 회인원 懷仁園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10. 오백 년 왕조, 문을 닫다

 

(1) 26대 고종황제 (高宗, 1852-1919) _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 흥원興園

(2) 27대 순종황제 (純宗, 1874-1926) _ 유릉裕陵, 영원英園, 숭인원崇仁園, 회인원懷仁園

 

  

(1) 제26대 고종황제 (高宗, 1852-1919)

 

 

 

_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 흥원興園

   

 

 

 

망국의 폐주 신세로 5백 년 조선의 패망을 눈뜨고 지켜보니

 

홍릉 洪陵

 

홍릉20091129-11.JPG  

 

고종(高宗, 이재황(李載晃), 1852-1919, 재위 44),

황후(皇后)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 1851-1895),

1919, 경기 남양주 207, 홍유릉(洪裕陵)

 

 

26대 고종(高宗) 홍릉 큰이미지 두번째 작은이미지26대 고종(高宗) 홍릉 큰이미지 첫번째 작은이미지26대 고종(高宗) 홍릉 큰이미지 세번째 작은이미지

 

 

 

 

26대 고종(高宗) 홍릉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홍릉과 순종황제와 순명황후, 계후 순정황후의 유릉을 합칭하여 홍유릉이라고 한다. 이 능은 우리나라 역사상 마지막으로 조영된 왕릉인 것이다. 망우리 고개를 넘어 경춘가도를 달리다보면 남양주시()를 벗어나기 전에 홍유릉 표지판을 발견할 수 있다. 표지판에 씌어 있는 대로 화살표를 따라 오른쪽으로 차를 돌리면 금방 능 입구가 보인다.

 

고종과 명성왕후가 잠들어 있는 홍릉은 지금까지 돌아보던 여느 왕릉들과 그 모습이나 형식이 많이 다르다. 1897년에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 왕을 "황제"라 일컬었던 만큼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따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홍유릉은 왕릉이 아니라 황제의 능인 셈이다.

 

26대 고종(高宗) 홍릉 큰이미지조선의 제26대 국왕(國王)이자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초대 황제(皇帝)이기도 했던 고종(이재황(李載晃) : 1852-1919, 재위 44)과 황후(皇后)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 1851-1895)의 홍릉(洪陵)은 같은 능역(陵域)에 있는 고종의 아들 순종(純宗)과 황후(皇后), 계후(繼后)를 모신 유릉(裕陵)과 함께 새로운 양식의 능 제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능역 조성은 처음 명성황후가 1895년에 시해(弑害)된 뒤 우여곡절을 겪고 동구릉 내에 숙릉(肅陵)으로 조성했다가, 대한제국 수립과 함께 서울 청량리로 옮겨 홍릉(洪陵)으로 조성합니다. 그 후 1919년에 고종이 승하(昇遐)하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천장(遷葬)해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홍릉의 능제는 유릉(裕陵)과 함께 이전의 조선 왕릉 제도와 많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皇帝)로 승하했기 때문에 명()나라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떠 황제릉(皇帝陵)으로 조성된 것입니다. , 종래의 능원 앞의 정자각(丁字閣)을 대신해서 정면 5, 측면 4칸의 침전(寢殿)을 세웠고 봉분(封墳) 주위에 있던 석인(石人: ,무인석)과 석수(石獸)들이 아래로 내려와 침전 앞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거대한 크기의 석인(石人)이 좌우로 도열해 있는데, 문인석(文人石)이 금관(金冠)을 쓰고 있는 모습이 특이하고 대체로 조선왕릉 석인(石人)의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아래 양쪽의 석수(石獸)들 역시 종래의 석인(石人) 뒤에 석마(石馬)만 세웠던 것과 달리 좌우의 문무인석과 같은 열로 홍살문(--)까지 기린, 코끼리, 해태, 사자, 낙타, 말 두 마리의 순서로 세워놓았습니다. 봉분(封墳)에는 화려한 병풍석(屛風石)을 감싸 장조(莊祖)의 융릉(隆陵)과 같은 연화(蓮花)와 모란무늬를 조각했고 난간석(欄干石)으로 둘레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상석(床石) 앞의 장명등(長明燈)은 사각(四角) 형식은 동일하나, 대석(臺石)이 기존 방식과 다른 변화된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홍릉(洪陵)의 새로운 능제는 조선(朝鮮)이 망한 이후에 조성되어 종래의 왕릉 제도가 발전된 모습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를 것입니다.

   

 

 

홍릉은 조선시대 말기에 조성된 능역으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황제릉의 양식을 따라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떠 조영하였다. 능침의 삼계를 없애고 석물을 배전의 앞으로 배치하고, 정자각 대신 일자형 건물의 배전을 세웠다. 능침 주위에 배치되었던 석수들은 배전 앞, 참도의 좌우에 그 종류를 더하여 나란히 세워져 있다.

 

능침은 병풍석으로 하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능침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는 세우지 않고 혼유석1, 그 양 옆으로 망주석 1쌍을 세우고 그 앞으로 사각장명등을 설치하였다. 석물의 배치는 홍전문과 배전 사이에 문석인, 무석인,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의 순으로 대칭 되어 있다. 참도는 어도와 신도의 두 단으로 구분되어 있던 기존의 것에 비해 가운데가 높고 양 옆이 한 단 낮은 삼단으로 되어 있다. 이밖에 수복방, 수라간, 비각, 소전대, 어정 등이 배치되어 있다.금천교 안쪽 좌측에 일반 재실보다 규모가 큰 재궁이 매우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진입부의 낮은 지역에 원형의 연못에 원형의 섬이 있고 식재 되어 있다.

 

   

 

1895(고종 32) 일본 정부의 사주로 낭인에 의해 경복궁 옥호루에서 시해당한 명성황후는 궁궐 밖에서 시신이 소각되었다.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같은 해 복호되고, 1897(광무 1)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당초 동구릉의 숭릉 오른쪽 언덕에 숙릉을 조성하다 국장이 중단된 후 그해 189711월 청량리 천장산아래 새장지를 정하고 국장을 치르게 되니 홍릉이란 능호가 시작되었다. 1919121일 덕수궁에서 춘추 67세로 고종이 승하하자 그해 34일 현재의 위치에 조성하면서 천장론이 일던 명성황후의 릉도 옮겨와 합장으로 예장하였다.

 

철종(哲宗) 임금이 후사가 없이 승하하자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차단하려는 조대비(趙大妃, 神貞王后)와 아들을 왕으로 만들려는 흥선군(興宣君)의 생각이 맞아 떨어져, 하응(昰應)의 둘째 아들을 데려다 작호를 익성군(翼成君)으로 내리고 자신의 아들로 삼은 조대비는 그를 조선 26대 왕위에 오르게 한 후 수렴청정을 하였다. 왕으로 즉위한 고종(高宗)은 인조(仁祖)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麟坪大君)8세손으로 할아버지는 남연군(南延君) ()이다. 남연군은 1815년도에 순조(純祖)의 지시로 사도세자의 아들인 은신군의 후사로 들어가 작호를 받았다.

 

남연군의 넷째 아들 흥선군은 2대에 걸쳐 왕이 나올 자리라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가야산 자락으로 남연군의 무덤을 경기도 연천에서 1846년도에 이장을 하였다. 1868년도에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도굴을 시도했던 바로 그 묘다. 그로부터 6년 후인 1852725일 흥선군과 여흥민씨(驪興閔氏)의 둘째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 아들이 18631213일에 왕위에 등극한 것이다. 한편 1600년에 선조 비 의인왕후 박씨가 승하하자 장지를 경기도 포천 신평에 정하여 조성이 끝나갈 무렵 전 참봉 박자우의 상소로 오랫동안 논란을 벌이다가 의인왕후는 건원릉 왼쪽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오랫동안 비어있던 신평 땅에는 1658년에 인평대군이 묻히게 되었는데, 고종과 순종이 인평대군의 후손이다.

 

   

 

민비(閔妃)는 여성부원군 민치록(閔致祿)과 한창부부인 이씨(李氏) 사이에서 1851(철종 2) 925일 경기도 여주에서 출생하여, 1866(고종 3) 36일 고종 비로 간택된 후 320일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895820일 경복궁에서 일본인에 의해 시해되었는데, 1015일에서야 왕후의 소재를 알지 못하였으나, 날이 점차 오래되니 그 날에 세상을 떠난 증거가 정확하였다.”라며 왕후가 승하하였음을 반포하였다. 민비의 승하여부를 판단했던 일 못지않게 장지 문제도 혼란을 거듭하였다. 장지를 처음에는 숭릉(崇陵,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 무덤) 오른쪽에 정하여 석물과 목재, 기와까지 준비가 다된 상태에서 다른 장지를 찾게 된다.

 

관련사진27곳의 후보지 중에서 7곳으로 압축하여 간산까지 마친 상태였으나 이번에는 7곳 모두가 연운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곳을 살피게 되었다. 동구릉과 거리가 비교적 멀지 않아 행차에 편리하겠다는 생각이 작용한 고종은 청량리 천장산(天藏山)자락에 장지를 최종적으로 정하고, 18971028일 남동향(艮坐坤向)으로 장사를 지냈다. 1897(고종 34) 918일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하고, 임금을 황제로 칭한다고 선포를 하였기 때문에 민비의 시호를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정하고, 능호는 홍릉(洪陵)이라 하였다. 1900525일에 왕실에 관한 일을 담당하던 특진관 이재순(李載純)지금의 홍릉은 아마도 완전무결한 좋은 자리가 아닌 듯합니다.”라는 상소문을 올리자 대신과 상지관을 시켜 간산을 해본 결과 왼쪽 산줄기가 멋없이 뻗었고, 무덤 자리가 휑하니 비어 있다.”라고 보고하자 고종은 천장을 결정한다.

 

이번에는 천장 후보지를 5곳으로 압축하여 살펴 금곡 묘적산(妙積山) 아래 언덕으로 정하고, 주산인 묘적산의 이름도 천수산(天秀山)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천장지를 두고 연운이 맞지 않다는 문제 등으로 또다시 혼란이 일어 천장지를 군장리로 변경하였다가 다시 금곡으로 정하는 등 갈팡질팡하다 급기야는 천장을 철회하도록 지시를 한다. 철회 지시 후에 다시 용마산(龍馬山)으로 정하였으나 끝내 천장을 하지 못하였다.

 

1907719일 황태자에게 황제의 자리를 넘겨 준 고종은 19181220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하였다. 장지는 명성황후의 천장지로 거론되었던 금곡 묘적산(천수산) 아래 언덕에 정하여 명성황후를 먼저 1919116일에 옮겨 모시고, 그 오른쪽에 고종을 장사(乙坐辛向) 지냈다. 홍릉은 황제의 무덤 양식으로 다른 왕릉과는 사뭇 다르다. 정자각(丁字閣) 대신 침전이 있고, 석물은 침전 앞에 설치되어 있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홍살문 안으로 마주보이는 건물은 침전, 고종황제 신위를 봉안한 제전이다. 다른 능에서 보던 것들과는 달리 정자 모양의 정자각 대신 정면 5, 측면 4간의 일자형 건물인 침전을 세웠다. 침전보다 더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홍살문에서 침전까지 참도(參道)의 좌우에 나란히 선 석물들이다. 침전에서 가까운 것부터의 석물을 보면, 침전 앞에 문.무석을 세우고 이어 홍살문까지 기린, 코끼리, 해태, 사자, 낙타, 말의 순으로 석수(石獸)를 세웠다. 코끼리는 분명하게 알아보겠고 낙타도 등에 달린 혹으로 그럭저럭 구분되나 사자와 해태는 비슷하다.

 

문무석도 다른 능들과는 좀 다르게 생겼다. 문인석은 금관을 쓰고 있으며, 키가 385cm나 돼 왕릉 중에는 가장 크고, 문무석과 석수들은 모두 침전 앞으로 나가 봉분 주위는 침전의 웅장함에 비해 단촐해 보인다. 현종 이후 보이지 않던 병풍석이 화려하게 등장해 봉분을 감싸고 있으며, 그 주위에 화문으로 장식한 난간석이 둘려져 있고 봉분 앞에는 고석으로 괸 상석과 양쪽 옆에 망주석 , 앞쪽에 사각의 장명등만 서 있다. 명성황후의 능은 처음에 청량리 홍릉에 장사하였다가 고종 승하 때, 이곳으로 모셔와 191934일 서향언덕에 합장하여 장사지냈다.

   

유릉 침전
유릉 침전
홍릉 침전
홍릉 침전
유릉 석물
유릉 석물
홍릉 석물
홍릉 석물
유릉 봉분
유릉 봉분
홍릉 봉분
홍릉 봉분

 

홍유릉 단풍길
홍유릉 단풍길
홍유릉 단풍길
홍유릉 단풍길

 

 

유릉 전경
유릉 전경
홍릉 봉분
홍릉 봉분
유릉 봉분
유릉 봉분
홍릉 재실
홍릉 재실
홍릉 침전
홍릉 침전
홍릉 문, 무인석
홍릉 문, 무인석
홍릉 수라간
홍릉 수라간
홍릉 연지
홍릉 연지
홍릉 전경
홍릉 전경
유릉 전경
유릉 전경

 

이 능소는 고종 재세시(在世時)의 풍수사 제갈(諸葛), 주운한(朱雲漢), 김광석(金光石), 전기응(全基應)에게 명하여 선정한 곳이다. 그 규모와 기획은 중국 고식(古式)을 따른 것이다. 이 천마산하에 결혈된 능소의 내룡을 살펴보면, 광주산맥의 대성산대룡(大成山大龍)이 포천 광덕산(廣德山)을 거쳐 백운산하(白雲山下)에서 분형제(分兄弟)하여 국망봉(國望峰).도성고개.운악산(雲岳山).주금산(鑄錦山)을 거쳐 천마산(天摩山)이 되어 내진(來盡)하였으니 광주산맥의 한 대지(大枝)가 머물은 것이다.

 

관련사진대성산을 태조(太祖)로한 이 충천준립룡(沖天峻立龍)은 장차 행룡을 마치고, 여장(旅裝)을 풀고 머물고자 할제, 탁립운소(卓立雲)한 천마산이 웅진(雄鎭)하였으니 이는 파군대성(破軍大成:破軍今)이다. 이 대룡은 그 사이에 수단(數段)의 누전(樓殿)을 형성하였으며, 이 천마산에서 좌우로 크게 개장(開帳)하고 중심낙맥, 재개이중연후(再開二重然後) 대단과협(大斷過峽)하고 홀연 탁립백봉(卓立白峰)하였다.

 

이 백봉에서 서쪽방향으로 행룡하여 중중개장 사오중후(四五重後) 재락(再落)하여 결혈(結穴)하였으니 이곳이 즉 능소인 고종황제의 무덤이며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이다. 대성산 태조가 되고, 천마산 중조, 백봉이 소조산이 되었구나.

 

천마산을 중조으로 삼고 백봉을 주산(主山)으로 하며, 거기에서 흘러내린 맥이 동쪽인 묘()에서 입수(入首)하여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을 이루는 그 상부에 을좌신향(乙坐辛向)으로 봉분을 구축하였다. 청룡 백호는 내외로 첩첩환포하고 조산이 겹겹이며, 내외 팔자수(八字水)가 여러 갈래로 흘러 포장(包藏)이 극한 지형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272홍릉 터는 본래 장중응(張重應)씨의 선산(先山)이었으나 능터로 선정된 곳이다. 왕릉을 조영할 때 공사중 천광(穿壙)하던 광중(壙中)에서, "오백년 권조지지(五百年權措之地)"라고 새겨진 석각(石刻)이 출토되었다.

 

이것은 이조초기 왕사로 있던 무학대사가 5백년 후에 제왕의 능터가 될 것을 예언한 것이라 전하니, 즉 이 석각은 5백년이나 되는 옛날 이름난 명사(明師)인 무학이 왕터의 땅으로 보장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당시인들은 틀림없이 호적지(好適地)라 여겼을 것이다.

 

조선의 제26대 국왕(國王)이자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초대 황제(皇帝)이기도 했던 고종(1852-1919, 재위 44)과 황후(皇后)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 1851-1895)의 홍릉(洪陵)은 같은 능역(陵域)에 있는 고종의 아들 순종(純宗)과 황후(皇后), 계후(繼后)를 모신 유릉(裕陵)과 함께 새로운 양식의 능 제도로 이루어져 있다.

 

능역 조성은 처음 명성황후가 1895년에 시해(弑害)된 뒤 우여곡절을 겪고 동구릉 내에 숙릉(肅陵)으로 조성했다가, 대한제국 수립과 함께 서울 청량리로 옮겨 홍릉(洪陵)으로 조성한다. 그 후 1919년에 고종이 승하(昇遐)하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천장(遷葬)해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을 이루게 된 것이다.

 

   홍유릉-홍유릉 홈페이지를 찾아주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홍릉의 능제는 유릉(裕陵)과 함께 이전의 조선 왕릉 제도와 많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皇帝)로 승하했기 때문에 명()나라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떠 황제릉(皇帝陵)으로 조성된 것이다. , 종래의 능원 앞의 정자각(丁字閣)을 대신해서 정면 5, 측면 4칸의 침전(寢殿)을 세웠고 봉분(封墳) 주위에 있던 석인(石人)과 석수(石獸)들이 아래로 내려와 침전 앞에 놓이게 되었다. 거대한 크기의 석인(石人)이 좌우로 도열해 있는데, 문인석(文人石)이 금관(金冠)을 쓰고 있는 모습이 특이하고, 대체로 조선왕릉 석인(石人)의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들었다. 그 아래 양쪽의 석수(石獸)들 역시 종래의 석인(石人) 뒤에 석마(石馬)만 세웠던 것과 달리 좌우의 문무인석과 같은 열로 홍살문(--)까지 기린, 코끼리, 해태, 사자, 낙타, 말의 순서로 세워놓았다. 봉분(封墳)에는 화려한 병풍석(屛風石)을 감싸 연화(蓮花)와 모란무늬를 조각했고 난간석(欄干石)으로 둘레를 보호하고 있다. 상석(床石) 앞의 장명등(長明燈)은 사각(四角) 형식은 동일하나, 대석(臺石)이 기존 방식과 다른 변화된 형태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홍릉(洪陵)의 새로운 능제는 조선(朝鮮)이 망한 이후에 조성되어 종래의 왕릉 제도가 발전된 모습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를 것이다.

 

 

 

 

 

왕릉과 황제릉의 차이

 

마지막 황실의 일원들.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 순명황태후, 덕혜옹주

    홍유릉은 조선 26대 고종 부부와 27대 순종 부부가 잠들어있는 황제릉이다.

명나라 태조 효릉의 능 제도를 본떠 이전의 조선 왕릉과 형식과 상설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능 아래에는 정자각 대신 커다란 침전이 있으며, 기린, 코끼리, 사자 등의 석수가 늘어서 있다.

 

 

 

1. 조선 왕릉의 변천사

조선 왕릉 석물의 배치와 구조는 기본적으로 큰 변화 없이 오랜 기간 반복되었지만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나 당대 왕의 의지에 따라 약간씩의 변화가 있어 왔다. 1기는 태조의 건원릉(1408)에서부터 문종 현릉(1452)으로 조선 왕릉의 기본형식을 갖춘 시기이다. 2기는 세조의 광릉(1468)에서부터 숙종 익릉(1681)까지로 석물의 전반적인 배치나 표현상에서 조선 왕릉 특유의 조각 양식이 확립된 시기이다. 3기는 인조의 장릉(1731)에서부터 철종의 예릉(1864)까지이며 병풍석이나 장명등의 형태에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고 조각의 비례가 바뀐다. 4기는 황제릉이 조성된 시기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라 칭하면서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이 황제릉의 형식을 취하였다. 이에 더하여 유릉의 석물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홍릉
홍릉
유릉
유릉
영원 봉분
영원 봉분
유릉 봉분
유릉 봉분

 

홍릉 봉분
홍릉 봉분
유릉 재실
유릉 재실
유릉 침전
유릉 침전
홍릉 침전
홍릉 침전

 

 

2. 왕릉과 황제릉의 차이

홍릉과 유릉은 조선의 국명을 대한제국으로 바꾸면서 황제라 칭한 고종과 순종의 능이다. 황제릉으로 조선 왕릉과 몇 가지 차이가 있다. 첫째는 신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어도가 설치되어 참도가 3개의 단으로 되어있는 것이다. 둘째는 조선 왕릉의 정자각에서 월대로 올라가는 계단이 정자각의 좌우에 설치되어 있는 것과 달리 정자각을 대신하는 침전(寢殿)의 정면에 설치되어 있어 홍살문과 직선축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능상구역의 봉분 앞에 위치하던 석물이 참도에서 침전 사이로 배치되어 있으며 이것은 중국 황제릉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넷째는 말기에 보인 비각의 위치인데, 홍릉 역시 비각이 정자각과 수평을 이루고 있다.

 

3. 정자각이 침전으로

홍릉과 유릉에서는 정자각이 ()’자의 평면 형태에서 ()’자형으로 변화되었고, 그 이름 또한 침전으로 변경되었다. 침전이라는 용어는 궁궐건축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임금의 숙소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지붕형식 또한 맞배지붕에서 팔작지붕으로 변경되었으며, 정면 5, 측면 4칸으로 건설되었다. 월대의 형태는 건물의 영향을 받아 자형에서 자형으로 바뀌었고, 화강석의 장대석으로 기단이 축조되었다. 바닥의 마감도 전돌로 되어 있고, 월대의 계단위치 및 개수가 이전의 정자각과 다르게 침전의 좌우로 각각 2, 전면으로 3개가 배치되었다. 또한 전면의 계단이 생김으로 해서 침전에서 홍살문까지 참도가 직선으로 설치되었다.

 

4. 양과 호랑이 대신 들어선 기린과 코끼리

 

흥릉의 참도 왼쪽으로 석물들이 줄지어 서있다. 코끼리, 해태등 다른 조선 왕릉에서 보지 못한 생소한 동물들이다.

 

흥릉의 참도 왼쪽으로 석물들이 줄지어 서있다. 코끼리, 해태등 다른 조선 왕릉에서 보지 못한 생소한 동물들이다. 황제릉인 홍릉과 유릉의 또 하나의 큰 특징은 석물이 능하 구역으로 내려온 점이다. 능원의 기본 석물인 문무석인과 동물상이 침전 앞 신도로 내려오면서 석호와 석양이 사라졌고 대신에 중국 명나라 황제릉에 보이는 다양한 동물상이 등장한다. 우선 문석인과 무석인이 차례로 마주보고 서고, 그 뒤로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이 순서대로 신도의 양쪽으로 정렬하고 있다. 이러한 상설이 유릉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데, 단 유릉의 경우는 서양식 조각수법이 더욱 많이 반영되었다.

 

 

 

황제의 나라를 선포한 고종

 

 

 

고종 (高宗, 이희(李熙), 이형(李?), 이재황(李載晃), 1852-1919, 재위 44)

고종은 영조(英祖)의 현손(玄孫)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철종(哲宗)이 후사(後嗣) 없이 승하[1863]하자 추존된 익종(翼宗)의 비()였던 당시 존장자(尊長者)인 조대비(趙大妃 : 신정왕후)의 전교(傳敎)로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는 것으로 지명해 12세의 나이에 즉위합니다. 처음에는 조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으나, 국정(國政)을 협찬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정권이 대원군에게 넘어가 이로부터 흥선대원군의 10년 집정시대가 열립니다.

 

대원군 집권 초기에는 세도정치와 붕당문벌(朋黨門閥)의 타파, 비변사(備邊司)의 폐지 및 삼군부(三軍府)의 설치, 한강 양화진(楊花津)의 포대(砲臺) 구축, 양반에게 신포징수(身布徵收) 등의 치적도 있었지만, 경복궁 중수(重修)나 당백전(當百錢) 발행에 따른 국가재정의 파탄, 천주교도 탄압, 병인양요(丙寅洋擾), 신미양요(辛未洋擾) 등 근세조선의 고난한 정치적 역정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1873[고종 10] 대원군이 섭정에서 물러나 고종이 친정(親政)에 들어갔는데, 이때부터 정권은 명성황후와 그 일족인 민씨 척족(戚族)의 세도정치가 다시 시작되어 고종은 왕비 민씨와 대원군의 세력다툼 와중에 놓이게 됩니다. 곧 고종은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을 계기로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을 맺어 쇄국정책(鎖國政策)을 무너뜨리고, 근대 제국주의(帝國主義) 국가들에 대한 문호 개방과 함께 새로운 문물에 접하게 됩니다. 이어 고종은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파견하고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였으나 이에 대한 반동으로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고 갑신정변(甲申政變)을 겪는 등 개화파와 수구파의 격돌은 가속화됩니다.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으로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유발되고, 일본이 승리하자 친일파는 대원군을 영입하고 김홍집(金弘集) 등의 개화파가 혁신내각을 조직하여 모든 제도를 바꾸는 갑오개혁(甲午改革)을 단행합니다. 하지만 이로부터 일본은 본격적으로 내정을 간섭하게 되었고, 이에 반발한 민씨 일파는 친러시아 내각을 구성했으나, 이에 맞서 일본공사 미우라고로[三浦梧樓]18958월 대원군을 받들고 일본인 자객(刺客)들을 앞세워 경복궁(景福宮)으로 들어가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자 고종은 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행합니다.

 

서양식 황제복 차림의 고종 이후 고종은 1897년 러시아와 일본의 협상에 따라 경운궁(慶運宮: 덕수궁)으로 환궁, 8월에 연호(年號)를 광무(光武)라 하고, 10월에는 국호(國號)를 대한(大韓), 왕을 황제(皇帝)라 하여 황제즉위식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1904[광무 8]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고문정치(顧問政治)를 위한 제1차 한일 협약을 체결하고, 다음 해[1905] 11월에는 제2차 한일 협약인 을사륵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빼앗고, 1906년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합니다. 이에 고종은 1907년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 이준(李儁) 등을 파견하여 국권회복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이 사건 때문에 일본의 협박으로 황태자[순종]에게 양위(讓位)하고 퇴위, 순종황제로부터 태황제(太皇帝)의 칭호를 받고 덕수궁에서 만년을 보내게 됩니다.

 

이와 같이 근세의 격동기에 국운(國運)과 함께 했던 고종은 양위 3년 뒤에 경복궁에 일장기(日章旗)가 걸리는 경술국치(庚戌國恥)의 비운을 맞이하고, 1919121일에 일본인에게 독살(毒殺) 당했다는 의혹이 있는 가운데 생을 마감합니다.

    

고종은 1852(철종 3) 725일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정선방의 사저에서 태어났다. 1863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왕위결정권을 쥐고 있던 신정왕후 조씨가 고종을 양자로 삼아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도록 지명하였으며, 그를 익성군에 봉하고 관례를 거행한 뒤 왕위에 오르게 했다. 새 왕의 나이가 어리므로 예에 따라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고,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높여 국정을 총람케 했다. 그로부터 10년간 흥선대원군의 치세 아래 있던 고종은 장성하면서 친정의 의욕을 내비쳐 아버지와 대립하다가 1873(고종 10) 친정을 선포하게 되었다. 동시에 외척인 민씨 일가의 권력이 강해졌고, 강화도조약을 맺어 문호를 개방하는 등 대외 개방정책을 취하였다.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으로 인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동학농민혁명, 을미사변 등 큰 사건들을 뒤로 하고 고종은 18971012일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위에 올랐으며, 연호를 광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압력이 심해지는 가운데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맺고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겼으며, 그들의 강요로 인해 그해 7월 양위조서를 내리고 순종에게 통치권을 물려주었다. 1919121일 덕수궁에서 춘추 67세로 승하하였으며, 이때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했다는 설이 유포되어 3.1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1896(건양 1) 211일 새벽, 고종과 왕세자(훗날의 순종)가 두 대의 가마에 앉아 궁궐을 몰래 빠져나와 황토재(지금의 광화문 사거리)를 지나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하였다.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러시아와 협의하여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친일파 대신들을 처형하도록 명하고, 이로 인해 을미사변과 맞물려 급진적 개혁으로 국민의 감정을 자극한 친일내각은 무너지고, 친러, 친미파 인사로 내각이 구성되었다. 일시에 지지기반을 상실한 일본 측은 독립국가의 체면을 내세워 국왕의 조속한 환궁을 요청하였으나 고종은 불안과 공포가 도사린 궁전보다는 노국공관의 일실이 안정하니 당분간 환궁할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의 긴 시간을 보냈으며, 이에 따라 러시아의 강한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1897225일 고종은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라는 내외의 압력에 따라 러시아 공관을 떠나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황제 즉위식을 하여 독립제국임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고종이 왕위에 오른 배경

고종이 왕위에 오를 당시 조정은 안동 김씨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들은 순조 이후 반세기 이상을 계속해서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헌종 의 어머니이자 효명세자(익종)의 부인인 신정왕후 조씨는 이같은 권 력 구도를 깨트 리기 위해 남연군의 아들 이하응과 결탁하여 그의 아 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게 된다. 둘째 아들 명복을 즉위시키기 위한 이 하응의 계략은 치밀했다. 안동 김씨 세력의 경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건달들 과 어울려 지내는가 하면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 을 하기도 했다. 이같은 호신책 덕분으로 목숨을 부지 한 그는 철종 의 죽음이 임박하자 익종비 조대비와 연줄을 맺어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려 한다. 조대 비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안동 김씨 의 세도에 짓눌려 지내던 처지였기에 이하응과 뜻을 같이하게 된다. 186312월 철종이 죽자 조대비는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을 양자 로 삼아 익종의 뒤를 잇게 하고 자신이 수렴청 정을 하였다. 그리고 이하응을 흥선대원군으로 봉하고 섭정의 대권을 그에게 위임시켰다. 이로써 고종을 대신한 흥 선대원군은 향후 10년 동안 권력을 쥐고 자 신의 의지대로 정사를 운영하게 된다.

 

대원군의 실정

우선 왕 의 위엄을 세우고자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원납전을 징수하고 문세를 거두는 것도 모자라서 소유자 의 허락 없이 전국에서 거석과 거목을 징발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또한 천주교도들에 대 한 지나친 박해로 인해 자신의 정치 생명에 타격을 입기도 했다.

    

고종이 왕이 된 사연

고종의 개화의지

신미양요 때 미국 장교가 조선 병사를 칭찬하다

고종의 근대화는 왜 성공하지 못했는가?

26대 고종과 명성황후 홍릉

대원군의 아들, 명성황후의 남편으로 부르지 말아 주시오

천인공노天人共怒란 말이 부족하다, 명성황후 시해弑害

흥선대원군묘

규정하기 어려운 인물, 흥선대원군

기울어가는 조선

병인박해

병인양요

셔먼호 사건

신미양요

개혁파와 위정척사파와의 격돌로 인한 자주권 손실

을미사변

고종의 퇴위와 헤이그 밀 사사건

조선의 실질적인 마지막 왕

영왕

의왕

영보당 귀인 이씨(永保堂 貴人 李氏, 1843 ~ 1928)

완친왕(完親王, 1868 ~ 1880)

귀인 장씨(貴人 張氏)

보현당 귀인 정씨(寶賢堂 貴人 鄭氏, 1882 ~ 1943)

복녕당 귀인 양씨(福寧堂 貴人 梁氏, 1882 - 1929)

내안당 귀인 이씨(萊安堂 貴人 李氏, 1847 ~ 1914)

정화당 김씨(貞和堂 金氏)

이원(李源, 1962)

 

 

 

   

 

 

 

 

 

 

 

 

황후(皇后)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 1851-1895)

명성황후 민씨는 본관 여흥(驪興)인 증() 영의정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로 태어났으나 9세 때 고아(孤兒)가 되어 본가에서 가난하게 자라다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부인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에 간택, 책봉됩니다. 경기도 여주군 출신이며, 여주 나들목 인근에 생가 공원이 있다.

 

명성황후는 역대 어느 왕비보다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삶을 살았던 여인인데, 특히 권력의 정상에 군림(君臨)하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유일하게 천수(天壽)를 다하지 못하고 타살(他殺)된 왕비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불만으로 반대파를 규합, 민씨 척족을 정부 요직에 앉히고 세력 기반을 다져 나가다가 결국 고종에게 친정(親政)을 선포하게 하여 민씨의 외척(外戚) 정권을 수립합니다. 또한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민씨 일족이 실각하자 청나라를 개입시켜 개화당(開化黨) 정권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일본세력에 의해 친일(親日) 내각이 득세하고, 1994년에 흥선대원군이 재 등장해 갑오경장(甲午更張)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러시아와 결탁하여 일본과 맞서기도 합니다.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전해왔으나, 근래 조선의 한 궁녀 사진으로 판명됨 하지만 일본은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조선의 존엄을 무참하게 깨뜨리고 맙니다. 1895820일에 깡패를 궁중에 침입시켜서 명성황후를 난자시해(亂刺弑害)하고 시신(屍身)은 궁궐 밖으로 운반 소각해 버립니다. 그 뒤 일제의 강압으로 폐위되어 서인(庶人)까지 되었다가 복호(復號)되었고, 1897[광무 1]에 명성(明成)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그 해 11월 국장(國葬)으로 청량리(淸凉里)에 홍릉(洪陵)으로 옮겨져 조성되었다가 후에 고종(高宗)과 함께 현 위치에 자리잡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당시 조선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최소한 그녀를 호칭할 때 민비(閔妃)가 아닌 정식 호칭인 명성황후(明成皇后)라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역사의 자존심을 지키는 최소한의 노력이 아닐까 합니다.

    

 

 

 

명성황후는 1851(철종 2) 925일 경기도 여주에서 증 영의정 민치록의 딸로 태어났다. 9세 때 부모님을 여의고 본가에서 가난하게 자라다가, 16세 되던 해인 1866(고종 3) 흥선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에 간택, 책봉되었다. 외척의 세도정치를 경계한 흥선대원군의 의지 때문에 권세가 없는 민씨 집안의 딸을 낙점한 것이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과 맞서 외척들을 정부 요직에 앉히고 세력 기반을 다졌으며, 고종에게 친정을 선포하게 하여 정권을 잡았다. 쇄국정책에 맞서 일본과 수교하고, 1882년에는 임오군란으로 신변이 위태롭자 궁궐을 탈출하여 피신생활을 하였는데, 청나라에 원조를 요청하여 군란을 진압하고 다시금 정권을 잡았다. 1884년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 때에도 청나라를 개입시켜 개화당 정권을 무너뜨렸으며, 1894년 일본정권을 등에 업은 흥선대원군이 갑오개혁을 시작하자, 이번에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일본공사가 1895108일 일본 낭인을 궁중에 잠입시켜 경복궁 옥호루에서 그녀를 난자, 시해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이 사건이 바로 을미사변이다. 일본의 강압에 못이긴 고종은 승하한 명성황후를 서인으로 폐위시켰다가 그 해 10월 복호시키고, 명성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쇄국정책을 펼쳤던 흥선대원군에 맞서 명성황후는 개방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일관성 없는 이른바 널뛰기 외교로, 일본, 청나라, 러시아 세력과 차례로 손잡으며 나라에 혼란을 초래했고, 결국 스스로의 명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894년 흥선대원군이 일본 세력을 등에 업고 갑오개혁을 주도하자, 그녀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를 사주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미우라는 1895102일 한성신보사에 있는 낭인을 이용하고자 사장 아다치를 공사관으로 불러 거액의 거사자금을 주고 왕비시해의 전위대로 삼아 흥선대원군을 궁중으로 호위하는 일을 담당시켰다. 그 외 일본군 수비대와 일본인 거류지 담당경찰관을 동원할 계획을 세웠다.

   

 

 

 

한편 정부에서는 일본 훈련대의 해산과 무장해제를 통고하고, 상황이 급변함을 직감한 일본은 명성황후의 시해 계획을 108일 새벽으로 정하였다. 일본인 자객들은 명성황후의 처소인 옥호루로 들이닥쳐 궁녀들 사이에서 명성황후를 찾아내 처참하게 살해하였다. 낭인들은 시신을 궁궐 밖으로 끌어내 불에 태웠으며, 그 후 일본은 고종에게 승하한 명성황후를 서인으로 폐위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이렇게 불운한 최후를 맞은 명성황후는 그 해 10월 복호되었고, 명성이라는 시호를 받고, 고종과 함께 지금의 홍릉에 묻히게 되었다.

 

 

   

 

 

 

 

26대 고종의 후궁, 영친왕의 생모, 근대여성 신교육의 설립

 

영휘원 永徽園

 

26대 고종의 후궁 순헌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 1854 1911),

1911,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 361, 의릉(懿陵)

 

 

조선경종 의릉영휘원은 26대 고종의 후궁 순헌귀비 엄씨의 능이다. 묘역에는 홍살문, 정자각과순헌엄비 영휘원이라 쓰인 비가 있는 비각이 있고, 병풍석 대신에 호석을 두른 무덤과 혼유석, 망주석 1, 장명등, 문석인 2, 석마, 석호, 석양이 각기 2구씩 갖추어져 있다. 순헌귀비가 1911년 세상을 떠나자 같은 해에 청량리에 능을 조영하였다.

 

영휘원의 규모는 55,015이다. 엄귀비는 185411월 증찬정(贈贊政) 엄진삼(嚴鎭三)의 장녀로 태어나 8세에 경복궁에 들어가 명성황후 민씨의 시위상궁(侍衛尙宮)이 되었다가,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아관파천 때 고종을 모시며 후궁(後宮)이 되어 1897년 영친왕 이은을 출산하였다.

 

귀인(貴人)에 봉해졌고, 1901년 비()에 진봉되고, 1903년에는 황비(皇妃)에 책봉되었다. 191172058세로 별세하여, 순헌(純獻)이라 시호를 올리고, 8월에 양주 천수산(天秀山)에 무덤을 만들고, 원호는 영휘라 하였다. 위패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 칠궁에 봉안되어 있다.

 

 

서울 영휘원 산사나무, 천연기념물 제506

 

정자각과 홍살문 사이의 사초지에 조성한 인공연못, 현재는 사초지로 복원되어 남아있지 않음

 

 

  영휘원은 원래 고종황제의 비인 명성왕후를 모신 홍릉이었으나 고종황제의 승하 후 1919년에 남양주군 금곡으로 옮겨졌는데 아직도 홍릉이라고 부르고 있다.


조선 제 26대 고종황제 후궁인 순헌귀비純獻貴妃 엄씨의 원園으로 왕의 사친 왕세자와 그 비의 무덤을 원이라고 한다. 순헝귀비(1854-1911)는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영왕英王)의 어머니로 명성왕후가 일본인에 의해 시해된 후 고종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조선총독 이등박문伊藤博文에 의해 황태자로 책봉된 영왕은 1907년에 교육이라는 명목하에 인질로 일본에 강제로 잡혀 갔다가 1963년 귀국하였으나 1970년 병으로 돌아가셨다. 신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귀비는 양정의숙養正義塾,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를 설립하였고, 숙명여학교淑明女學校의 설립에 기부하여 근대 사학私學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봉분에는 곡담曲담이 둘러지고, 석물은 석양石羊, 석호石虎, 상석床石(혼유석魂遊石)과 망주석望柱石, 장명등長明燈, 석마石馬 등이 배치되어 있다. 부속건물로는 정자각丁字閣과 홍살문紅살門 등이 있다.  

 

 

숭인원에는 채 한 살도 채우지 못한 의민황태자의 맏아들 이진이 묻혔다.

  • 고종의 후궁 순헌황귀비 엄씨의 묘소와 정자각

  • 영휘원과 숭인원 사이에 있는 제정(祭井)은 제사 때 사용할 물을 긷는 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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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휘원의 비각에 있는 순헌황귀비 엄씨의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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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숭인원 정자각 안의 모습
  • 홍창살 너머 숭인원의 전경은 영휘원과 그 모습이 흡사하다.

  • 홍창살 너머 정각과 영휘원 전경

    영휘원과 숭인원이 조선조 고종의 계보임을 설명하는 조선 왕계도

     

     

    영휘원과 홍릉 이야기

     

     

    1. 천장산 부근 조선 왕실의 능터

    홍릉 수목원 옆 자리 잡고 있는 순헌귀비의 원 영휘원. 의릉은 천장산의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서울의 주산인 북악산 줄기가 뻗어 내려오다가 천장산으로 이어지는 이 지대는 풍수지리적으로 뛰어난 길지로서 조선 왕실의 능터로 사용되었다. 이 주변으로는 26대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귀비의 묘인 영휘원과 조선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아들 이진의 묘인 숭인원이 자리 잡고 있다.

     

    2. 홍릉으로 오해받는 영휘원

    영휘원에 엉뚱하게도 이곳이 홍릉이 아니냐는 문의 전화가 심심치 않게 걸려온다. 뿐만 아니라 영휘원과 맞붙은 수목원은 홍릉 수목원이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홍릉(洪陵)이 있고,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에 영조의 비 정성왕후의 홍릉(弘陵)이 위치하지만, 이 근방에는 홍릉이 없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곳의 수목원을 홍릉수목원이라고 부르고, 영휘원을 홍릉으로 착각하게 되었을까?

     

    3. 명성황후의 홍릉이 있던 자리

    의릉과 영휘원이 있는 현재의 동대문구 청량리동 일대는 왕실의 능터이자 조선 왕실 소유의 국유림이었다. 1895(고종 32) 을미사변으로 인해 명성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의 능을 현재의 산림과학원 안에 쓰게 되면서 이곳이 홍릉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1919216일 명성황후를 모신 홍릉은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설이 거론되어, 현재의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옮겨졌고, 고종의 능과 합장을 하게 되었다. 명성황후의 능이었던 홍릉은 옮겨졌지만, 지명으로 여전히 남아 근방의 영휘원이 홍릉으로 종종 오해를 받게 된 것이다.

     

    4. 영휘원에 잠든 순헌귀비

     큰사진보기! 영휘원에 잠든 순헌귀비는 일반인에게 엄상궁으로 익숙하다. 50세 전후의 나이 많은 궁녀였던 그녀가 갑자기 고종의 승은을 입게 되어 후궁으로 발탁되었기 때문이다.

     

    명성황후는 자신의 슬하에 있던 늙고 못생긴 궁녀가 남편과 동침을 한 것에 자존심이 상하여, 화를 내며 그녀를 대궐 밖으로 내쫓았다. 그로부터 10년 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었고, 엄상궁은 다시 대궐에 들어와 고종의 수발을 들게 되었다.

     

    5. 여성의 신교육에 공헌한 순헌귀비

    순헌귀비는 고종의 승은을 입게 되었을 당시 늙고 못생긴 여인이라고 하여 주위의 미움을 사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공포 분위기가 짙게 깔린 대궐에서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대피시키는 등 왕의 부인으로서의 기품과 기지를 발휘하였다. 뿐만 아니라 생전에 모은 재산으로 진명여학교와 숙명여학교를 설립하는 등 여성들의 신교육을 위해 애썼으며, 나라를 짊어지고 나아갈 인재를 키우는 교육에 큰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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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일제 강점기 조선 왕실의 비극

    고종과의 사이에는 아들이 한 명 있었는데, 그가 바로 영친왕이다. 1911718일 순헌귀비는 대궐에서 고종과 함께 황태자인 아들이 힘들고 고된 훈련을 받으며 점심으로 주먹밥을 먹는 광경을 활동사진으로 보게 되었다. 순헌귀비는 이 영상에 충격을 받고 입에 물고 있던 떡에 급체하여 이틀 후인 1911720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이곳 영휘원에 잠들게 되었다.

     

    사적 제361호 영휘원은 청량리에 있으며 간혹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으로 알고 찾아오신 분들이 계시지만 홍릉은 경기도 남양주시로 천장되어 현재는 그 터만이 임업연구원 내에 남아 있습니다. 부근에 세종대왕기념관과 홍릉수목원이 위치하고 있어 학습교육장은 물론 가족들의 나들이 코스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우132-021) 서울시 동대문구 홍릉길 92. 1호선 청량리역 2번 출구, 6호선 고려대역 3번 출구에서 도보 약10분정도면 오실 수 있습니다.

     

     

       

     

    아관파천의 행동대장 엄귀비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 1854 - 1911)

    서울 영휘원과 숭인원 문화재 사진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 185411- 1911720)는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후궁이다. 대한제국 성립 이후 황비로 책봉되었다.

     

    8세에 입궐하여 을미사변 직후 고종의 시중을 들다 총애를 받아 영친왕 은을 출산하고 이후 상궁에서 귀인으로, 순빈을 거쳐 엄비가 되었다가 다시 황비가 되었다. 1911년에는 황귀비가 된다.

     

    1907년 영친왕은 11세에 일본 유학이라는 형식 하에 일본에 볼모로 잡혀갔고 1910년 한일합방이라는 경술국치의 변을 당했다.

     

    귀비 엄씨는 나라를 잃은 슬픔과 아들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쳐 지내다 191158세로 눈을 감아 청량리 영휘원에 안장되었고, 신위는 덕안궁에 모셨다가 1929년 육상궁(칠궁)에 모셔져 있다. 후에 그녀의 생전에 얼굴을 못본 장손 이진이 갑자기 독살당하면서 그녀의 묘소 건너편에 안장되었다.

     

    일설에는 계비란 말을 쓰기도 하는데 계비란 정식으로 책봉된 두 번째 정궁(正宮)를 가리키는 말이므로 황후가 아닌 황귀비에 책봉된 순헌황귀비에게는 옳지 않은 칭호이다. 본관은 영월이며 185415일 서울에서 증찬정(贈贊政) 엄진삼(嚴鎭三)의 맏딸로 태어났다. 1905년 양정의숙(현 양정고등학교), 1906년 명신여학교(현 숙명여자고등학교)와 진명여학교(현 진명여자고등학교)를 세웠다.

     

     

     

     

     

     

     

     

     

     

    고종의 후궁, 공화당 이씨와 사랑과 우정

     

    삼축당 김씨 · 광화당 이씨 묘 三祝堂 金氏 · 華堂 李氏 墓

     

    삼축당 김씨는 고종의 가장 어린 후궁으로 고종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나 후사가 없으며 고종 사후 순종에 의해 삼축당이란 당호를 받았다. 또 다른 후궁 광화당 이씨의 묘와 위아래로 위치하고 있으며 두 사람은 살아 생전에서도 퍽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묘에는 석물도 비석도 없으며 광화당 이씨와 삼축당 김씨의 사랑과 우정은 회자되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삼축당 귀인 김씨(三祝堂 貴人 金氏, 1892 ~ 1970)

    본명은 김옥기(金玉基)로 양반 출신이던 김순옥(金順玉)22녀중 맏딸로 태어나, 8세에 나인으로 입궁하였으며 21세가 되던 해에 고종의 승은을 입고 8번째 후궁으로 책봉되었다. 가장 나이가 어린 후궁이었기 때문에 고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후사를 낳지 못해 특별상궁의 지위에 머무르다가 고종 사망 후 사간동 집에서 고종의 또다른 후궁인 광화당 이씨와 함께 살았다. 이 때 순종은 법도를 깨고 아이를 낳은 후궁에게만 내리는 당호(堂號)와 금반지를 내려 삼축당(三祝堂)이라 부르게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제정된 구황실재산법의 구황족 범위에 포함되어 매달 10만환을 지급받았다. 말년에는 불교에 귀의해 실상행(實相行)이라는 법명을 받았으며 1970923일 오후 2시경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사망했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의 홍유릉 안에 있다.

     

     

     

     

     

     

     

     

     

    광화당 귀인 이씨(光華堂 貴人 李氏, 1887~ 1970)

    본명은 이완흥(李完興)으로 유복한 중인계급 출생이며 13세에 고모의 소개로 경복궁 지밀에 세수간 나인으로 입궁했다. 덕수궁의 궁인이었던 1914년 고종의 승은을 입고 왕자를 낳아 광화당(光華堂)이라는 당호를 받았다. 그러나 왕자 이육(李堉)1916년에 죽었다. 이육 외에 어려서 죽은 딸이 하나 더 있었다고도 한다. 귀인 이씨는 고종이 죽고 난 후 같은 고종의 후궁이었던 삼축당 김씨와 함께 사간동 집에서 살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제정된 구황실재산법의 구황족 범위에 포함되어 매달 10만환을 지급받았다. 죽은 뒤에도 삼축당 김씨와 나란히 묻혔다.

     

     

     

        

      

     

    궁도령으로 스스로 몸을 낮추고 대리섭정으로 천하권력을 손에 쥐니

     

    흥원 興園

     

     

     

     

     

     

     

     

     

      

     

      

    헌의대원왕(흥선대원군 이하응, 李昰應, 1820 ~ 1898),

    순목대원비(여흥부대부인 민씨, 驪興府大夫人 閔氏, 1818 ~ 1898),

    1908, 경기 남양주 48

     

    1898(광무 2) 2월에 흥선대원군은 경기도 고양군 공덕리(현재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4)의 운현궁 별장 아소당에서 사망하였고, 유해는 흥선대원군이 생전에 직접 터를 잡아두었던 아소당 뒤뜰에 매장되었다. 1908(융희 2) 129(음력 19071229)에 경기도 파주 운천면 대덕동(현재 경기도 파주군 문산읍 운천리)으로 천봉(遷奉: 왕실의 묘를 이장하는 일)하면서 흥원(興園)으로 격상되었다. 천봉은 1907(융희 1) 1110일에 시작되어서 1908(융희 2) 21일에 마무리되었다. 1966년에 흥원 일대에 미군 군사시설이 조성되면서 현재의 위치인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로 다시 이장되었다.

     

     

     

     

    흥선대원군묘 바로 옆에는 납골묘 형태의 운현궁 가족 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묘역에는 흥선대원군의 증조부 낙천군 이온(洛川君 李縕, 1720~ 1737)과 부인 달성 서씨(達城 徐氏), 흥선대원군의 조부 은신군 이진(恩信君 李禛, 1755~ 1771)과 남양 홍씨(南陽 洪氏), 흥선대원군의 장남 흥친왕 이재면(興親王 李載冕, 1845~ 1912)과 부인 남양 홍씨(南陽 洪氏여주 이씨(驪州 李氏), 흥선대원군의 장손 영선군 이준용(永宣君 李埈鎔, 1870~ 1917)과 부인 남양 홍씨(南陽 洪氏광산 김씨(光山 金氏),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문용(사람 이름 문.jpg, 1882~ 1901), 흥선대원군의 증손 이우(李鍝, 1912~ 1945)와 부인 박찬주(朴贊珠), 흥선대원군의 고손 이종(李淙, 1940~ 1966)이 매장되어 있다.  

     

    흥선대원군의 묘는 고양군 공덕리에 모셨다가 1906년 파주군 대덕리로 옮겼으며 1966년 4월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겼다. 묘 주위에는 돌담이 둘러져 있고, 묘역은 2단으로 나누어 만들었다. 상단에는 둘레석을 두른 봉분과 제물을 올려 제사를 지내기 위한 상석이 있고, 하단에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 등의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대한제국의 고종황제의 부모, 세도정치 종착점 국태공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 ~ 1898)

     

     

     

    조선 말기의 왕족이자 정치가, 화가이며 대한제국의 황족, 추존왕이다. 이름은 이하응(李昰應)이다. 부인은 여흥부대부인 민씨이다. 남연군(원래는 인평대군의 6대손이나 후에 양자 입적)과 군부인 민씨의 넷째 아들이며, 고종 황제(高宗皇帝)의 친아버지이다. 1863년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이끌었으며, 안으로는 유교의 위민정치를 내세워 전제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정책을 과단성 있게 추진하였고, 밖으로는 개항을 요구하는 서구 열강의 침략적 자세에 대하여 척왜강경정책으로 대응하였다. 또한 서원을 철폐하여 양반·기득권 토호들의 민폐와 노론의 일당독재를 타도하고 남인과 북인을 채용하였으며, 동학과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18641월부터 187311월까지 조선의 국정을 이끌었다. 직접 며느리 명성황후를 간택[주해 1]하였으나, 도리어 명성황후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된다. 187311월 명성황후와 유학자 및 안동 김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 등에 의해 축출된 이후 명성황후와 권력투쟁을 벌였다. 일본인과 결탁하여 며느리 명성황후의 암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유길준에 따르면 대원군은 명성황후를 제거해 달라고 일본 공사관에 수시로 부탁했다고 한다.

     

    명성황후와 민씨 일족 및 고종을 폐출하고 흥친왕, 이재선 등을 조선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손자 영선군 이준용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여러 번 정변을 기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을미사변의 조선인 주요 협력자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쇄국정책과 천주교도 대량 학살, 무리한 경복궁 중건 과정, 일본에 명성황후의 제거를 청탁한 점 등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성 출신으로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해동거사(海東居士)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907101일 대원왕(大院王)으로 추봉되었고, 헌의(獻懿)를 시호로 받아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이 되었다.

     

    1895년말 대원군의 행동을 제약하는 법을 정하여 유폐생활을 강요당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대원군은 은퇴하여 다시 양주로 가서 은거하다가 18981월 부인 여흥부대부인의 죽음을 본 후, 2월 운현궁 별장 아소당에서 죽었다. 그의 장례식에 아들 고종은 불참하였다 한다. 사망 직후 '아소당' 뒤뜰에 묻혔으며, 묘호는 흥원(興園)이라 명명되었다. 만년에는 국태공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그가 죽자 한성부에서는 7일장을 했으나, 고종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순종 즉위 후 1907826일 장례원경(掌禮院卿) 이중하(李重夏)가 그를 대원왕으로 추존할 것을 건의하였고, 1907101일 대원왕(大院王)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헌의(獻懿)이다. 이에 따라 헌의대원왕(獻懿大院王)이라고도 부른다.

     

    1898516일 경기도 고양군 공덕리에 부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와 처음 묻혔다가 1908130일 경기도 파주군 운천면 대덕동으로 이장되었다. 1907년 왕의 예로써 다시 장례하라는 명이 내려진 이후 흥원의 천봉은 융희(隆熙) 원년(1907) 1110일에 시작돼 융희 2(1908) 21일에 마무리됐다. 1966616일 다시 경기도 남양주군으로 이장되었다,

     

    흥선대원군묘 (興宣大院君墓)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의 묘이다. 그는 철종이 후계자 없이 죽은 후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조대비와 힘을 합하여 자신의 둘째 아들인 명복(뒤의 고종)을 왕위에 올리고 대원군이 되어 직접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안으로 세도정치 근절, 서원철폐, 세제개혁, 법전정비 등을 통해 왕권을 강화했으며, 밖으로는 외세에 대적할 실력을 키워 조선을 중흥할 과감한 혁신정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서양세력의 접근에 대해서는 강력한 쇄국정책을 통해 통상요청을 거부하고 병인양요, 신미양요 때는 그들의 침략을 무력으로 저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리하게 경복궁을 중건하여 백성들의 생활고가 가중되고 쇄국정책을 고집하여 근대 문명의 수용이 늦어졌으며, 집권 후반기에는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와 대립하게 되어 정치에서 실권을 잃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묘는 고양군 공덕리에 모셨다가 1906년 파주군 대덕리로 옮겼으며 19664월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겼다. 묘 주위에는 돌담이 둘러져 있고, 묘역은 2단으로 나누어 만들었다. 상단에는 둘레석을 두른 봉분과 제물을 올려 제사를 지내기 위한 상석이 있고, 하단에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 등의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조선< 朝鮮 > 말기< 末期 >에 개혁 정치를 실시한 흥선대원군 이하응< 李昰應 >(18201898)의 묘이다. 그는 고종< 高宗 >황제< 皇帝 >의 생부< 生父 >로서 자< >는 시백< 時伯 >, < >는 석파< 石坡 >, 시호< 諡號 >는 헌의< 獻懿 >이다. 철종< 哲宗 >1863년에 승하< 昇遐 >하자 후사< 後嗣 >가 없었으므로 신정왕후< 神貞王后 > 조씨< 趙氏 >에 의해 그의 둘째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이 되어 섭정< 攝政 >을 하게 되었다. 그는 국내외가 복잡다단하던 때 과감한 서정개혁에 착수하였다.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외척 세도를 일소하였으며 서원을 철폐하여 당쟁의 폐를 없애는 데 노력하였다. 대전회통< 大典會通 >등 법전을 완비하여 중앙집권적 정치기강을 확립하고, 비변사< 備邊司 >를 폐지하여 의정부< 議政府 >의 기능을 부활시키고 삼군부< 三軍部 >를 두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분리시켰다. 세제를 개혁하여 국고를 충실히 하였고,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하였으며 경복궁< 景福宮 >을 중건하였다. 한편으로는 천주교를 탄압하였고, 서양세력의 침략에 대비하여 서양의 통상 요청을 거부하고 1866년에 프랑스군(병인양요< 丙寅洋擾 >), 1871년에 미군(신미양요< 辛未洋擾 >)이 각각 강화도< 江華島 >로 쳐들어오자 이를 격퇴시켰고, 일본의 국교 교섭 요구도 거부하는 강경한 대외정책을 폈다. 그는 집권 10년 만에 명성황후< 明成皇后 >와의 알력으로 1873년에 은퇴하였다. 그후 1882년 임오군란< 壬午軍亂 >이 일어나자 다시 집권하였으나, < >나라에 강제 납치되어 텐진< 天津 >4년간 갇혀 있기도 하였다. 묘는 1898년 고양군 공덕리에 모셨다가 1906년에 파주군 대덕리로 이장< 移葬 >되었으며, 1966년에 다시 현 위치로 옮겨졌다.

     

     

    남연군 이구(南延君 李球, 1788~ 1836)

    흥녕군 이창응(興寧君 李昌應, 1809- 1828)

    흥완군 이정응(興完君 李晸應, 1815- 1848)

    흥인군 이최응(興寅君 李最應, 1815- 1882)

    흥친왕 이재면(興親王 李載冕, 완흥군(完興君), 1845- 1912)

    영선군 이준용(永宣君 李埈鎔, 1870~ 1917)

    완영군 이재긍(完永君 李載兢, 1857- 1881)

    이문용(李鎔, 1882~ 1901)

    완은군 이재선(完恩君 李載先, ?~ 18811027)

    완림군 이재원(完林君 李載元, 1831- 1891)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 閔氏, 1818 ~ 1898)

    조선의 왕족, 조선 고종의 어머니. 민치구의 딸로, 흥선대원군과 혼인하여 21녀를 두었다. 며느리인 명성황후와는 12촌간이다. 186312월 둘째 아들 이명복의 즉위 이후 여흥부대부인으로 봉작되었다.

     

    모계로는 덕흥대원군가문의 외손이기도 하며, 인현왕후의 친정아버지 민유중의 6대손녀이기도 하다.

     

    흥선대원군에게 명성황후를 천거하여 며느리로 간택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한다. 또한 부대부인은 영세를 받은 천주교 신자이기도 했다.

     

    시호는 순목(純穆)으로, 1907년 왕비로 추증되어 순목대원비(純穆大院妃)로 추봉되었다. 따라서 순목대원왕비, 순목왕비 등으로 부른다.

        

     

     

     

    남연군묘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 517, 1392 - 1910 ]

     

     

     

    () 13()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익종(翼宗) 수릉(綏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융릉(隆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영릉(永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장릉(章陵 : 사적 제202)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경릉(敬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 2()

    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

    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유릉(裕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홍릉(洪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

    왕릉 35

    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예릉(睿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경릉(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인릉(仁陵 : 사적 제194)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건릉(健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홍릉(弘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원릉(元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혜릉(惠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의릉(懿陵 : 사적 제204)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익릉(翼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명릉(明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숭릉(崇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영릉(寧陵 : 사적 제195)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휘릉(徽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장릉(長陵 : 사적 제203)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성묘(成墓 : 사적 제365)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목릉(穆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강릉(康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효릉(孝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희릉(禧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온릉(溫陵 : 사적 제210)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정릉(靖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9대 성종(第九代 成宗) 회묘(懷墓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순릉(順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선릉(宣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

    8대 예종(第八代 睿宗) 공릉(恭陵 : 사적 제205)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8대 예종(第八代 睿宗) 창릉(昌陵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7대 세조(第七代 世祖) 광릉(光陵 : 사적 제197)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사릉(思陵 : 사적 제209)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장릉(莊陵 : 사적 제196)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5대 문종(第五代 文宗) 현릉(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4대 세종(第四代 世宗)

    3대 태종(第三代 太宗)

    2대 정종(第二代 定宗)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정릉(貞陵 : 사적 제208) : 서울 성북구 정릉2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1대 태조(第一代 太祖)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목조-덕릉 효공왕후 이씨-안릉

    익조-지릉 정숙왕후 최씨-숙릉 , 손씨

    도조-의릉 경순왕후 박씨-순릉, 조씨

    환조-정릉 의혜왕후 최씨-화릉, 이씨, 정빈 김씨

    태조-건원릉 신의왕후 한씨-제릉 신덕왕후 강씨-정릉

    정종-후릉 정안왕후 김씨-후릉

    태종-헌릉 원경왕후 민씨-헌릉

    세종-영릉 소헌왕후 심씨-영릉

    문종-현릉 현덕왕후 권씨-현릉

    단종-장릉 정순왕후 송씨-사릉

    세조-광릉 정희왕후 윤씨-광릉

    예종-창릉 장순왕후 한씨-공릉 안순왕후 한씨-창릉

    성종-선릉 공혜왕후 한씨-순릉 폐비 윤씨-회묘 정현왕후 윤씨-선릉

    연산군-연산군묘 폐비 신씨-연산군묘

    중종-정릉 단경왕후 신씨-온릉 장경왕후 윤씨-희릉 문정왕후 윤씨-태릉

    인종-효릉 인성왕후 박씨-효릉

    명종-강릉 인순왕후 심씨-강릉

    선조-목릉 의인왕후 박씨-목릉 인목왕후 김씨-목릉

    광해군-광해군묘 폐비유씨-광해군묘

    인조-장릉 인렬왕후 한씨-장릉 장렬왕후 조씨-휘릉

    효종-영릉 인선왕후 장씨-영릉

    현종-숭릉 명성왕후 김씨-숭릉

    숙종-명릉 인경왕후 김씨-익릉 인현왕후 민씨-명릉 인원왕후 김씨-명릉

    경종-의릉 단의왕후 심씨-혜릉 선의왕후 어씨-의릉

    영조-원릉 정성왕후 서씨-홍릉 정순왕후 김씨-원릉

    정조-건릉 효의왕후 김씨-건릉

    순조-인릉 순원왕후 김씨-인릉

    헌종-경릉 효현왕후 김씨-경릉 효정왕후 홍씨-경릉

    철종-예릉 철인왕후 김씨-예릉

    고종-홍릉 명성황후 민씨-홍릉

    순종-유릉 순명효황후 민씨-유릉 순정효황후 윤씨-유릉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