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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朝鮮王陵] 능(陵) - 7 (1) 제19대 숙종 (肅宗)_ 명릉明陵, 익릉 翼陵, 대빈묘大嬪墓, 소령원昭寧園

草霧 2013. 8. 9. 21:43

 

 

 

조선왕릉[朝鮮王陵] 능(陵) - 7

 

 

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 - 7

 

 

7. 환국정치로 왕권을 다지다

 

(1) 제19대 숙종 (肅宗, 1661-1720)

 

_ 명릉明陵, 익릉 翼陵, 대빈묘大嬪墓, 소령원昭寧園

 

명릉20090814-5.JPG

인경왕후20090814-7.JPG

기사 관련 사진

 

 

왕릉은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들의 무덤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왕릉은 42(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40, 14, 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3, 4, 5)입니다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폐위(廢位)된 묘() 2()

황제릉(皇帝陵) 2()

왕릉 35

 

 

 

 

 

 

1. 추존이라는 미명으로, 역사세우기

 

추존(追尊)함길도 8

 

2. 왕조, 문을 열다

 

1대 태조 (太祖, 1335-1408) _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 정릉 貞陵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2대 정종 (定宗, 1357-1419) _ 후릉 厚陵

 

3대 태종 (太宗, 1367-1422) _ 헌릉 獻陵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4대 세종 (世宗, 1397-1450) _ 영릉 英陵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5대 문종 (文宗, 1414-1452) _ 현릉 顯陵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6대 단종 (端宗, 1441-1457) _ 장릉莊陵, 사릉思陵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7대 세조 (世祖, 1417-1468) _ 광릉 光陵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추존(追尊)왕 덕종 (德宗, 1438-1457) _ 경릉 敬陵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8대 예종 (睿宗, 1450-1469) _ 창릉昌陵, 공릉恭陵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9대 성종 (成宗, 1457-1494) _ 선릉宣陵, 순릉順陵, 회묘 懷墓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3. 왕조, 산을 넘다

 

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_ 연산군묘 燕山君墓

 

11대 중종(中宗, 1488-1544) _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 泰陵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12대 인종 (仁宗, 1515-1545) _ 효릉 孝陵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13대 명종(明宗, 1534-1567) _ 강릉 康陵, 순창원 順昌園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14대 선조 (宣祖, 1552-1608) _ 목릉 穆陵, 성묘 成墓, 순강원 順康園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4. 조선, 또 다시 위기를 맞다

 

15대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_ 광해군묘 光海君墓

 

추존(追尊)왕 원종 (元宗, 1580-1619) _ 장릉 章陵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5. 왕조, 반석을 다지다

 

16대 인조 (仁祖, 1595-1649) _ 장릉 長陵, 휘릉 徽陵, 소경원 昭慶園, 영회원 永懷園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6. 조선, 당쟁에 휩싸이다

 

17대 효종 (孝宗, 1619-1659) _ 영릉 寧陵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18대 현종 (顯宗, 1641-1674) _ 숭릉 崇陵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7. 환국정치로 왕권을 다지다

 

19대 숙종 (肅宗, 1661-1720) _ 명릉明陵, 익릉 翼陵, 대빈묘大嬪墓, 소령원昭寧園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20대 경종 (景宗, 1688-1724) _ 의릉懿陵, 혜릉惠陵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8. 조선, 르네상스를 맞다

 

21대 영조 (英祖, 1694-1776) _ 원릉元陵, 홍릉弘陵, 수경원綏慶園, 수길원 綏吉園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추존(追尊)왕 진종(眞宗) _ 영릉永陵

 

추존(追尊)왕 장조(사도세자 莊祖) _ 융릉隆陵, 의령원 懿寧園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22대 정조(正祖, 1752-1800) _ 건릉健陵, 휘경원徽慶園, 효창원 孝昌園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9. 조선, 세도정치에 휘둘리다

 

23대 순조 (純祖, 1790-1834) _ 인릉仁陵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추존(追尊)왕 익종 (翼宗, 문조 文祖) _ 수릉綏陵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24대 헌종 (憲宗, 1827-1849) _ 경릉景陵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25대 철종 (哲宗, 1831-1863) _ 예릉睿陵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10. 오백 년 왕조, 문을 닫다

 

26대 고종황제 (高宗, 1852-1919) _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 흥원 興園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27대 순종황제 (純宗, 1874-1926) _ 유릉裕陵, 영원英園, 숭인원 崇仁園, 회인원 懷仁園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7. 환국정치로 왕권을 다지다

 

19대 숙종 (肅宗, 1661-1720)

_ 명릉明陵, 익릉 翼陵, 대빈묘大嬪墓, 소령원昭寧園

 

 

20대 경종 (景宗, 1688-1724) _ 의릉懿陵, 혜릉惠陵

 

 

    

 

(1) 제19대 숙종 (肅宗, 1661-1720)

 

 

_ 명릉明陵, 익릉翼陵, 대빈묘大嬪墓, 소령원昭寧園

 

 

절대군주로 군림하였으나 내명부의 피바람은 잘 날 없어

 

 

 

 

명릉明陵

 

 명릉20090814-5.JPG

 

숙종(肅宗, 이순, 1661-1720, 재위46), 계비(繼妃) 인현왕후 민씨 (仁顯王后 閔氏, 1667-1701),

계비(繼妃) 인원왕후 김씨 (仁元王后 金氏, 1687-1757), 1701, 경기 고양 198, 서오릉(西五陵)

 

19대 숙종(肅宗) 명릉 큰이미지

 

 

19대 숙종(肅宗) 명릉 첫번째 작은이미지19대 숙종(肅宗) 명릉 두번째 작은이미지19대 숙종(肅宗) 명릉 세번째 작은이미지

 

 

 

 

8대 예종(睿宗) 창릉 肅宗{이순; 1661-1720, 재위46}과 계비(繼妃)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 1667-1701), 2계비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 1687-1757)의 명릉은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식으로 정자각(丁字閣)에서 바라보면 왼쪽에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雙陵)이 있고, 오른쪽에 인원왕후의 단릉(單陵)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조성된 순서는 인현왕후가 처음 이 위치에 조성되었고, 다음 숙종이 그 옆에 쌍릉(雙陵)으로 조성된 후 인원왕후릉이 오른쪽 언덕에 자리잡게 됩니다. 숙종 6{1680}에 승하(昇遐)한 숙종의 정비(正妃)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金氏)의 익릉(翼陵)이 또한 같은 서오릉(西五陵) 내에 조성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숙종은 사후(死後)에도 자신의 세 왕비를 모두 가까이 두게 된 것입니다. 11대 중종(中宗) 역시 세 명의 왕비를 두었지만 모두 다른 위치에 조성된 것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인원왕후릉명릉의 특이한 점은 석물(石物)들이 왜소하다는 것입니다. 숙종이 재위(在位) 시절 복위된 단종(端宗)과 그 비() 정순왕후(定順王后)의 능인 장릉(莊陵)과 사릉(思陵)을 조성하면서 검소하고 간촐하게 조성할 것을 명하고 자신 역시 간소하게 조성하면서 석물(石物)들도 거의 실물의 크기와 비슷하게 다소 작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아울러 부장(副藏) 명물(明物)도 간촐하게 줄였다고 합니다. 또한 새로운 양식으로는 능 앞의 장명등(長明燈)의 지붕이 팔각(八角)이 아닌 사각(四角)의 모양을 하게 된 것도 명릉부터 볼 수 있습니다.

 

명릉은 19대 숙종과 그의 첫 번째 계비인 인현왕후, 두 번째 계비인 인원왕후 세 사람을 모신 능이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 쌍릉으로 나란히 조영되고, 인원왕후의 능은 다른편 언덕에 단릉 형식으로 모셔져 동원이강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보통 우상좌하의 원칙에 따라 동원이강릉의 오른쪽 언덕을 왕이 차지하는 일반적인 왕릉과 달리 명릉에서 가장 낮은 서열의 인원왕후의 능이 가장 높은 자리인 오른쪽 언덕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명릉은 숙종의 명에 의해 능역에 드는 인력과 경비를 절감하여 부장품을 줄이고 석물 치수도 실물 크기에 가깝게 하는 등 간소한 제도로 조영하였는데, 이는 조선 능제의 분수령을 이루게 되었다. 8각 장명등도 4각으로 바뀌었으며, 능침에는 병풍석을 두르지 않았다.

 

    서오릉-서오릉 홈페이지를 찾아주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숙종의 계비였던 인현왕후가 1701(숙종 27) 승하하자 숙종은 능호를 명릉이라 하여 현재의 위치에 능을 조영하였다. 조영 당시 능의 오른쪽을 비워두라는 우허제(右虛制)를 전교하였다. 1720(숙종 46) 60세의 나이로 승하한 숙종은 생전에 바라던 대로 인현왕후의 오른쪽 빈자리에 잠들게 되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명릉길(용두동) 475-95한편 인현왕후 승하 후 두 번째 계비로 들어왔던 인원왕후는 사후 부군인 숙종의 곁에 묻히기를 소원하여 인현왕후와 숙종이 잠든 명릉에서 약 400보 떨어진 언덕에 자신의 능지를 미리 잡아두었다.

 

그러나 인원왕후가 1757(영조 33) 71세로 승하하였을 때, 영조는 미리 정해둔 자리를 두고 지금의 자리에 그녀를 모셨다. 인원왕후가 정해둔 자리에 능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넓은 소나무 숲을 벌채하는 등 막대한 인력과 국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연으로 인원왕후는 생전에 소원했던 것보다 숙종과 더 가까운 곳에 묻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숙종의 능보다 높은 자리인 오른쪽 언덕에 잠들게 되었다.

 

명릉(明陵)을 되돌아 바라보니 송백(松柏)이 처량합니다.” 김보택(金普澤, 1672~1717)의 상소

    

 

 

숙종실록1703(숙종 29) 52일자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김보택의 상소가 실려 있다. “전일 남구만(南九萬)의 죄를 이루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의 갑술년 거조(擧措 : 갑술환국에 대한 조치)는 실로 천재일우의 기회였는데 남구만은 전하를 믿지 않고 대륜(大倫)을 돌아보지 않으며 오직 일신의 이해화복만 헤아려서, 흰 머리의 나이와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맨 먼저 성모(聖母)를 배반하고, 법을 굽혀 흉역(凶逆)을 비호하여 희적(希賊 : 희빈 장씨의 오빠)으로 하여금 세상에 살아 있게 함으로써 그 요첩(妖妾)을 조종하여 그 전일에 모해(謀害)하던 남은 꾀를 행하게 하여 화변(禍變)이 반복되게 만들었는데, 요무(妖巫)와 흉비(凶婢)의 옥사가 중전께서 승하한 뒤에 비로소 발각되었으니, 온 나라 모든 생명이 속을 썩고 뼈아파 했습니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일화를 빗댄 김만중의 소설'사씨남정기'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일화를 빗댄 김만중의 소설'사씨남정기'

 

(중략) 전하께서는 역적을 비호한 대신에게 무엇을 취하는 것입니까? 신이 마음에 품은 바가 있으나 지금까지 침묵한 것은, 혹시 범한 허물을 돌이켜 반성하여 힘써 사양하고 스스로 처신하여 전하의 국사(國事)를 다시 그르치지 않을 것을 기대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호서에서 경기로, 경기에서 서울로 와서 처음에는 방황하는 것처럼 하다가 끝내는 뚫고 나아가 의기양양하게 나와서 숙배(肅拜)하니 돌아보거나 두려워하는 바가 없습니다. 국법은 무시할 수 없고 여러 사람의 분노는 범할 수 없음을 다시 알지 못하여 아울러 자기의 염치도 함께 허물어뜨리고 남김이 없으니, 이것은 그들에게는 다만 작은 허물일 뿐입니다. ! 명릉(明陵)을 되돌아 바라보니 송백(松柏)이 처량합니다. 성상의 생각이 이에 미치시면 반드시 신의 말을 망령되게 여기지 않으시고서 처치함이 있을 것입니다.”

 

위의 상소는, 정언 김보택이 인현왕후를 무고한 장희빈을 두둔한 소론의 남구만과 최석정에게 벌을 내릴 것을 청하는 내용이다. 폐위되었던 인현왕후가 복위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승하하였는데,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하던 것이 발각되는 사건이 있었다. 노론의 선봉이었던 김보택은 이러한 역적을 두둔한 소론의 무리를 강도 높게 비판하는 상소에서 인현왕후가 잠든 명릉의 소나무와 잣나무가 처연하다고 표현하였다.

 

김보택(金普澤, 1672~1717)

의금부판사 김진구의 아들로 숙종의 비 인경왕후의 조카이다. 1695년(숙종 2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 정언(正言) 등을 지냈다. 노론의 선봉으로 소론 남구만, 최석정 등의 호역죄(護逆罪), 윤증의 배사죄(背師罪) 등을 논핵하였다. 세자시강원의 문학(文學), 보덕(輔德) 등을 거쳐, 1715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문장, 글씨, 그림에 두루 조예가 깊었다.

 

    

여인천하 경연장의 외로운 감독, 숙종

 

 

 

숙종 (肅宗, 이순, 1661-1720, 재위46)

재위 46년간 내환(內患)과 사건이 많았던 숙종대는 경신년(庚申年)의 대출척(大黜陟), 기사환국(己巳換局), 갑술옥사(甲戌獄事) 등의 당쟁(黨爭)의 격화가 많았지만, 한편으로 조선 후기의 중흥기를 맞이하는 초석(礎石)을 다진 시기이기도 합니다. 곧 대동법(大同法)의 전국적 실시, 상평통보(常平通寶)의 주조, 군제 개편 등의 치적(治績)으로 왕권을 강화시키는 효과가 있었던 것입니다. 세 명의 왕비가 있었지만 슬하의 왕자(王子)가 모두 후궁들에게서 생산되었으니, 경종(景宗)은 희빈(禧嬪) 장씨(張氏), 영조(英祖)는 숙빈(淑嬪) 최씨(崔氏)가 생산합니다.

 

숙종은 1661815일 경덕궁 회상전에서 현종과 명성왕후의 원자로 태어났다. 1667(현종 8) 세자로 책봉되었고, 현종이 승하한 1674(현종 15)에 즉위하였다. 재위 기간은 46년이었다. 숙종 시대에는 당파 간의 정쟁이 극에 달하여, 붕당정치가 파경을 맞을 위기에 처했다. 숙종 즉위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남인은 1680(숙종 6) 경신환국을 통해 대거 실각하였고, 남인을 물리치고 실세를 얻은 서인은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숙종의 태를 보관한 태항아리, 외항아리와 내항아리로 구성되어 있다.이 때 숙종과 중전인 인현왕후 사이에는 아들이 없었는데, 숙종의 총애를 받던 소의 장씨가 아들을 낳았다. 남인은 이를 기회로 삼고자 소의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추대하였고, 이에 반대하는 노론의 무리들을 처결,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으니 이것이 기사환국이다. 숙종은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대동법을 전국에 확대 실시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였으며, 군사제도를 정비하는 등의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1720(숙종 46) 68일 경덕궁의 융복전에서 60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사료가 밝히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지만, 숙종과 인원왕후의 능이 이곳으로 정해진 연유와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숙종이 하루는 평상복을 입고 민심을 살피기 위해 궐을 벗어나 어느 냇가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 때 냇가에서 한 젊은이가 울고 있는 것이 보여 연유를 물으니, 갈처사라는 유명한 지관이 이곳에 무덤을 쓰면 좋다고 해서 땅을 파는데, 아무리 파도 물이 고이니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숙종은 그 지관이 장난을 쳤다고 여기고, 젊은이를 불쌍히 여겨 관청에 가서 쌀 300석을 받아올 수 있도록 적은 서신을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지관이 살고 있는 허름한 오두막집을 찾아가 청년의 일을 따져 물었다. 그러자 지관은 모르면 잠자코 계시오. 저 땅은 무덤자리로 들어가기도 전에 쌀 300석을 받고 명당자리로 들어가는 자리라오!”라며 따져 묻는 숙종에게 오히려 핀잔을 주었다. 그의 신통함에 놀라 자신이 국왕인 것을 밝히고, 훗날 숙종이 묻힐 묘자리를 골라달라고 부탁하였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지금의 명릉 자리가 바로 신통한 지관 갈처사가 택한 입지라고 한다.

 

연도

재위

사  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1676

2년

11월, 흰옷{白衣}의 착용을 금함

1698

24년

11월, 노산대군 단종(端宗)으로 복위

1677

3년

9월, <현종실록(顯宗實錄)> 이룩됨

1701

27년

8월, 인현왕후 죽음{1667- }

1680

6년

10월, 왕비{인경왕후}김씨 죽음{1661-}

10월, 빈어(嬪御)를 비(妃)에 못 오르게 함

1683

9년

3월, <개수현종실록(改修-)> 이룩됨

11월, 무고의 옥 일어남/장희빈 사사(賜死)

1688

14년

8월, 대왕대비{장렬왕후}죽음{1624-}

1704

30년

11월, 노산군일기 <단종실록>으로 고침

1689

15년

2월, 기사환국 일어남/ 장씨 희빈됨

12월, 명나라 신종의 대보단 이룩됨

7월, 인현왕후 폐함/송시열 사사(賜死)

1705

31년

3월, 왕 대보단(大報壇)에서 명 신종 제사

1690

16년

6월, 원자를 왕세자{경종}로 함

1707

33년

4월, 홍역 전국 만연, 사망자 속출

10월, 희빈 장씨(張氏) 왕비로 책봉

1712

38년

5월, 백두산 정계비(定界碑) 세움

1691

17년

12월, 성삼문 등사육신(死六臣)복위

1714

40년

1월, 전국에 지진(地震) 일어남

1694

20년

3월, 갑술옥사(甲戌獄事) 일어남

1717

43년

11월, 전국 호수 547,709호 인구 6,829,771명

4월, 폐비 민씨 복위/장 희빈 강등

1718

44년

4월, 소현세자빈 강씨 복위

9월, 숙의 최씨 왕자{영조} 생산

1720

45년

6월, 왕 승하{1661- }, 왕세자 즉위

 

 

숙종의 보훈정책

어린 숙종의 법의식

세상에 이런 일이

화해와 용서의 정치

기강 확립

왕릉을 태운 방화범은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

조선의 침술이 중국 황실을 치료하다

숙종의 자연보호운동

환국정치로 왕권을 다진 숙종

남인중심으로의 변화

숙종의 남인견제

장희빈의 득세와 남인의 정권독점

장희빈의 강등과 갑술환국

무고의 옥과 노론의 대거진출

복제와 관련하여 송시열의 오 례 문제를 둘러싼 '고묘논 란', 김만기, 김석주, 민정중 등 외척 세력의 권력 장악과 정탐 정치 에 대한 유생들의 공 격에서 비롯된 송시열의 '임술삼고변' 공방, 존 명 의리와 북벌론의 허실을 둘러싼 명분 논쟁, 민비의 폐출에서 비롯 된 왕과 신하들간의 충돌, 그리고 노론의 송시열과 소론의 윤증 사이 에 벌어진 논쟁을 일컫는 '회니시비' 등 수많은 정쟁들로 조정이 조용 할 날이 없었다. 게다가 소론과 노론 사이에 왕세자(경종)와 왕자(영조)를 둘러싼 싸움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숙종의 용사출척권

명릉 - 숙종과 인현왕후릉숙종은 이른바 용사출척권(왕이 정계 를 대개편하는 권한)을 통한 환국 정치로 왕권을 강화시켰던 왕이다. 그는 정 국 전환을 뜻하는 '환국'이라는 방법으로 세 번에 걸쳐 정권 을 교체하면서 붕당 내의 대립을 촉발시켜 그 반대급부 로 군주에 대 한 충성을 강요하여 왕권을 강화시켜나갔다. 그가 이같은 환국 정치 를 구상하게 된 배경은 정확하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붕당 의 한계성을 정확하게 꿰 뚫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가 꿰뚫고 있던 붕 당의 한계성은 바로 군주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파당은 반드 시 몰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점을 시의적절하게 이용 하면서 특정 파당이 지나치게 힘이 강해지면 대출 척을 감행함으로써 정국의 전환을 꾀하곤 하였다. 그는 환국 정치를 이끌어가면서 허적, 윤휴, 이원정, 송시열, 김수항, 박태보 등 수많은 뛰어난 신하들을 희 생시켰 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자신의 부인인 인현왕후를 폐위시키 거나 세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를 죽이기까지 했다. 숙종의 이같은 환 국 정치에서 비롯된 사건들을 열거해보면, 남인이 대거 축출당하는 1680년의 경신환국, 왕자 균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다가 서인이 제거당 하고 남인이 다시 집권하게 되는 1689년의 기사환국, 인현왕후 복위운 동을 통 해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의 소론이 집권하게 되는 갑술환국, 그리고 이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1701년의 '무고 의 옥'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노론과 소론의 성립

인조반정을 계기로 정권을 장악한 서 인은 반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공신 세력과 이를 관망하던 세력으로 분리되었 다. 공신 세력을 공서 또는 훈서라고 했고 관망파를 청서라 고 했다. 그리고 당시 훈서파의 영수는 정사공신 김류였 으며 청서파 의 거두는 김상헌이었다. 훈서와 청서로 갈린 두 파는 다시 훈서는 노 서, 청서는 소서로 개편되었다. 이렇게 둘로 갈라진 서인 세력은 인 조 말에 이르러 훈서파는 원두표를 당수로 하는 원당과 김자점을 당수 로 하는 낙당으로 분파되고 청서파도 사림의 청의 를 주장하는 사류 (사림)들이 중심이 된 산당과 권력 지향적인 한당으로 분리되어 서인 은 사분되었다. 그러나 효종, 현종 대에는 송시열을 중심으로 서인이 다시 규합되어 서인 일당이 되었다. 하지만 서인은 숙종 대에 이르러 다시 둘로 갈라서고 말았는데 이것이 노론과 소론이다.

 

분당의 계기

1680년에 발생한 경신환국 때 남인 탄압에 대한 입장 차이였다. 남인의 영수 허적의 유악(기름 천막 )남 용 사건과 서인 김석주, 김익훈 등에 의하여 고변된 허적의 서자 허견 의 역모 사건(삼복의 변)으로 남인이 대거 숙청된 이른바 경신환국(경 신대출척) 이후 서인은 남인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놓고 일대 지도권 쟁탈전을 벌였던 것이다. 1683년 서인 노장파인 김익훈 등은 남인에 대한 강력한 탄압을 추진했는데, 한태동을 중심으로 한 소장파는 오히 려 김익훈을 탄핵했다. 그래서 송시열 등의 노장파는 이 탄핵 상소에 반박하며 소장파와 대립하였고 특히 송시열은 제 자 윤증과 사적인 감 정까지 좋지 않아 분파를 가속화시켰다. 결국 서인은 노장파 송시열 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과 소장파 한태동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으로 분 파되었다.

 

 

이리하여 조정은 남인, 북인과 함께 사색붕당이 성립되었다. 노, 소론에 속 하는 사람들은 원래 예악의 태두 김장생의 문인들로 구성되었고 한편 으로는 청의를 생명으로 하는 산 림 사림들의 정치 집단이었던 산당 에 속하였던 서인들이다. 노론의 대표적 인물은 송시열, 김만기, 김만 중, 김석주 김수항, 김수홍, 김익훈 등이었고 소론의 대표적인 인물로 는 남구만, 박세채, 박태보, 오도일, 윤증, 한태동 등이었다. 서인은 분파 이후 노론이 정권의 주도권을 쥐며 정국을 운영해가다가 1689년 노, 소론이 함께 희빈 장씨 소생 왕자 균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다가 대거 숙청되어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음으로써 실각하게 된다(기사환 국). 이 때 노론 의 송시열, 김수항 등이 유배당해 죽고 소론 인사들 도 대거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5년 후 갑술옥사로 남 인이 대거 쫓겨나자 서인의 소론이 정권을 앙악하게 된다. 하지만 희 빈 장씨와 관련하 여 1701년 무고의 옥이 일어나면서 소론이 밀려나 고 노론이 대거 등용되면서 노, 소론이 대등한 세력을 형성하며 정국 을 운영해나갔다. 그래서 경종, 영조 대에는 노, 소론의 당세가 정국 을 양분하는 형국이 되었다. 경종 대에는 주로 소론이 우세한 양 상 을 띠게 되는데 대표적인 4대신이 김창집, 이건명, 이이명, 조태채 등 이었다. 그리고 노론이 우세했던 영조 대의 4대신은 민진원, 이관명, 정호, 홍치중 등이었다.

 

하지만 영조 대 중반에 집권당이던 노론은 장헌세자의 폐위와 사사 사건으로 벽파와 시파로 나누어진다. 벽파는 영 조편에 서서 장헌세자의 죽음 을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한 무리였고 시파는 그의 불행한 죽음을 동정 하는 무리로 이루 어졌다. 이 때 세력이 약했던 소론은 시파에 가담했 다. 이들 시파와 벽파의 대립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는데, 영조 대에 는 벽파가 우세하였으나 정조 대에는 시파가 우세 했다. 그러나 순조 가 즉위한 뒤 벽파인 김한구의 딸 영조 계비 김씨가 섭정을 함에 따 라 다시 벽파가 정권을 잡는다 그리고 순조1년(1801년)에 일어나는 신 유사옥을 계기로 시파와 이에 동조했던 남인 세력이 대거 축출되어 노 론 독주시대가 전개된다.

 

 

  

 

 

숙종(肅宗)은 1661년(현종 2) 8월 15일 경덕궁의 회상전에서 현종(顯宗)과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 사이에서 태어나 1667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674년에 현종이 승하하자 조선의 19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숙종이 병을 앓은 지 10년만인 1720년 6월 8일 경덕궁 융복전에서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니 재위기간은 46년이었다.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가 연잉군(훗날 영조)을 시켜 “국상(國喪)의 모든 일을 인원왕후가 주관하라는 임금의 유교(遺敎)가 있었다. 그래서 유교에 따라 시행할 것이니, 대신들은 이 뜻을 알아야 할 것이다.”라고 전교하였다. 임금의 유교에 따라 장지는 1701년(숙종 27)에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를 장사지낼 때 우측을 비워두었었는데, 그 곳에 같은 해 10월 21일에 서향(甲坐庚向)으로 장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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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왕후는 영돈녕부사 여양부원군 민유중(閔維重)과 의정부좌참찬 송준길(宋浚吉)의 딸인 은성부부인 송씨(宋氏) 사이에서 1667년(현종 8년) 4월 23일에 태어났다. 1681년(숙종 7) 5월 2일에 왕비로 책봉되었는데, 숙종의 원비였던 인경왕후가 승하하여 왕비의 자리가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후궁이었던 희빈장씨(嬉嬪張氏)는 아들(경종)을 낳았으나 인현왕후는 후사가 없었다. 그런저런 연유로 숙종은 1689년(숙종 15) 5월 2일에 인현왕후를 사제로 물러나게 하고, 장씨를 왕비로 삼았다가 1694년 4월 12일 “내가 일찍이 공평한 마음으로 차근차근 따져보고 환히 깨닫게 되어 크게 회한을 느낀 나머지 몸을 뒤척이며 잠들지 못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고 자신이 하였던 일을 반성하고 후회하며 장씨를 폐하고 인현왕후를 다시 왕비로 복위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폐출 당시에 목숨을 걸고 반대하였던 오두인(吳斗寅)과 박태보(朴泰輔) 등에게는 관작(官爵)을 추증하였다. 인현왕후는 사제에 있을 때 항상 죄인으로 자처하여 아름다운 옷을 입지 않았고, 찬방에서 잠자기를 피하지 않았으며, 무더운 여름에도 점심을 먹지 않으며 지냈다. 다시 왕비의 자리로 돌아온 인현왕후가 1701년 8월 14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35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숙종은 원비 인경왕후를 장사지낼 때 보아두었던 경릉(敬陵) 왼쪽 ‘봉황이 날고 용이 오르는 형국’이라는 응봉(鷹峰) 기슭에 인현왕후의 장지를 정하고 능호를 명릉(明陵)이라 하였다. 같은 해 12월 9일에 장사를 지내면서 오른쪽 정혈 처는 비워두고, 곡장을 치우치지 않도록 쌓고, 정자각도 중간에 위치하도록 하여 인현왕후 옆 자리에 숙종 자신이 묻힐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해 두기도 하였다. 한편 장씨가 인현왕후를 심하게 질투하여 모해하려고 신당(神堂)을 궁궐의 안팎에 설치하고 밤낮으로 기도를 하며, 흉악하고 더러운 물건을 두 대궐에다 묻은 일들이 드러나자 국상 중임에도 제주도에 유배중인 희빈장씨의 오빠인 장희재는 처형하고, 장씨는 자진을 하도록 사약을 내렸다.

 

 

인현왕후의 뒤를 이어 왕비에 책봉된 인원왕후는 경은부원군 김주신(金柱臣)과 가림부부인 조씨(趙氏) 사이에서 태어났다가 후사가 없이 1757년(영조 33년) 3월 26일 창덕궁 영모당에서 71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인원왕후가 명릉 가까이에 묻히고 싶어 미리 남서향 언덕을 점지하여 산도(山圖)를 영조에게 맡겼었는데, 그 언덕은 명릉과의 거리가 4백여 보(步)나 되므로, 임금이 정자각을 따로 짓는 일과 소나무를 많이 베어야 할 것을 염려하여 명릉 곁의 오른쪽 산등성이에 새로운 자리를 정하였다. 새로 정한 자리(乙坐辛向)에 같은 해 7월 12일 인원왕후를 장사지내고 능호를 따로 정하지 않고 명릉이라 하였다. 인원왕후는 자신의 뜻보다 숙종의 무덤과 더 가까운 곳에서 잠들게 된 것이다. 응봉 아래에 자리 잡은 명릉에는 숙종과 인현왕후를 쌍릉으로 조성하고, 오른쪽 언덕에는 인원왕후가 동원이강릉 형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인원왕후의 오른쪽 능선 너머에는 숙종의 원비 무덤인 익릉이 있다. 한편 인현왕후 국상 중에 사약을 받은 희빈장씨는 경기도 광주 오포 땅에 묻혔으나 1969년에 명릉이 있는 서오릉 국내로 이장이 되어 숙종과 같은 지역에 잠들게 되었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계비(繼妃) 인현왕후 민씨 (仁顯王后 閔氏, 1667-1701)

 1667{현종 8} 여흥(驪興) 민씨 양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딸로 태어난 인현왕후는 1680년 숙종비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승하한 뒤 다음해에 가례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繼妃)가 됩니다.

 

궁중(宮中)의 염정애사(艶情哀史)로 알려진 내간체(內簡體) 소설(小說) <인현왕후전>으로 유명하듯이 희빈(禧嬪) 장씨(張氏)와의 애증(愛憎)이 교차하고, 기사환국(己巳換局)과 갑술옥사(甲戌獄事)의 와중에서 폐위(廢位)와 복위(復位)를 하는 등의 곡절을 겪고 35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夭折)합니다. 예의가 바르고 언행이 청초(淸楚)했지만 슬하에 소생은 없었습니다.

 

인현왕후는 1667(현종 8) 423일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딸로 태어났으며, 숙종의 원비인 인경왕후가 일찍 승하함에 따라 1681(숙종 7) 가례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당시 조정은 당파간의 분쟁이 한참이었는데, 왕의 여인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키우려는 암투마저 벌어졌고, 인현왕후는 한 때 이러한 싸움의 희생양이 되었다.

 

인현왕후와 숙종 사이에 아이가 없던 차에 숙종의 총애를 받던 소의 장씨(훗날 희빈 장씨)가 득남을 하였고, 당시 열세였던 남인 세력은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이에 반대하는 서인 세력들을 숙청하였다. 인현왕후는 이 때 함께 폐위당하여 궐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갑술환국을 통해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음과 동시에 복위되어 궐로 돌아왔다. 1700(숙종 26) 원인 모를 병에 걸려 35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는데, 승하 후 희빈 장씨의 거처 부근에서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한 신당이 발견되었다. 숙종은 이에 분노하여 총애하던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는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소설가인 김만중이 그의 말년에 유배지에서 쓴 한글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 사씨는 성품이 곱고 후덕한 인물이지만, 남편 유연수의 교활한 첩 교씨의 모함을 받아 결국 내쫓김을 당하게 된다. 유연수의 첩 교씨가 아들을 낳은 후 정실부인이 되기 위해 갖은 계략을 꾸미며 그녀를 몰아낸 것이다.

 

소설은 한림학사 유연수의 처 사씨의 바른 품행과 그녀를 시기하는 악한 첩 교씨가 그녀를 음해하기 위해 꾸미는 악행들, 그리고 소설 끝에 가서는 누명을 썼던 사씨가 귀양지에서 돌아오고 악행이 들통난 교씨는 처형당하는 권선징악 구조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는 숙종의 인현왕후 폐출 사건을 모델로 당대의 현실을 소설화한 것이다. 서인이었던 김만중은 이 소설로서 인현왕후를 폐비하는 것이 부당함을 밝히고, 스스로의 영화 역시 되찾길 바라던 것으로 여겨지나, 그는 끝내 인현왕후가 복위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유배지에서 세상과 하직하였다.

 

 예의가 바르고 덕성이 높아 국모로서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왕자를 낳 지 못하여 왕의 총애를 받지 못했으며 당시 소의였던 희빈 장씨가 왕 자 균을 출산하자 정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설움을 당해야 했다. 숙 종은 1689년 왕자 균을 세자로 책봉하였는데, 노론의 송시열 등이 이 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숙종의 진노를 사 서 사사되었다. 이른바 기 사환국으로 불리우는 이 사건에서 인현왕후 역시 왕의 미움을 받아 서 인으로 강등되어 폐 출된다. 이 후 그녀는 안국동 본가에서 지내게 되 었고, 희빈 장씨가 중전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 뒤 숙종이 인현 왕 후를 폐비한 것을 후회하고 있던 중에 1694년 소론파의 폐비 복위운동 으로 남인 세력이 실각하는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다시 복위되었다. 복 위 후 그녀는 다시 빈으로 강등된 희빈 장씨와 화합을 도모하며 지내 다가 병을 얻어 1701년 소생 없이 3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한 궁 녀가 그녀를 주인공으로 쓴 소설 '인현왕후전'이 전해지고 있다. 능호 는 명릉으로 현재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에 있다. 후에 숙종도 이 곳 에 함께 묻혔다.

 

   

 

숙종(肅宗; 1661-1720, 재위46년)과 계비(繼妃)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 1667-1701),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 1687-1757) 명릉은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식으로 정자각(丁字閣)에서 바라보면 왼쪽에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雙陵)이 있고, 오른쪽에 인원왕후의 단릉(單陵)이 조성되어 있다.

 

조성된 순서는 인현왕후가 처음 이 위치에 조성되었고, 다음 숙종이 그 옆에 쌍릉(雙陵)으로 조성된 후 인원왕후릉이 오른쪽 언덕에 자리잡게 된다. 숙종 6년{1680년}에 승하(昇遐)한 숙종의 정비(正妃)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金氏)의 익릉(翼陵)이 또한 같은 서오릉(西五陵) 내에 조성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숙종은 사후(死後)에도 자신의 세 왕비를 모두 가까이 두게 된 것이다. 11대 중종(中宗) 역시 세 명의 왕비를 두었지만 모두 다른 위치에 조성된 것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서오릉에 있는 명릉은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 비공개 왕릉이다. 관리사무소로 쓰고 있는 재실 오른쪽으로 난 작은 오솔길 숲으로 들어가 10여미터를 걸으면 바로 명릉의 홍살문이 나타나고, 홍살문 뒤로 참도가 반듯하게 나 있다.   명릉은 조선 제19대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의 쌍릉과 그 오른쪽 언덕에 있는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단릉을 함께 칭하는 말이다. 동원이강형식의 능이다. 비각 속에는 표석 두 개가 각각 문을 달리하여 나란히 서 있는데 왼쪽의 것은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의 비이고 오른쪽은 인원왕후 김씨의 비이다.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의 쌍릉은 석물의 크기가 실물크기와 비슷하다. 척수를 줄여 왜소한 문,무인석 각 1쌍. 석마 2쌍과 봉분을 둘러싼 석양, 석호 각 2쌍 봉분 중앙의 사각 장명등이 이채롭다.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둘러 두 봉분을 연결했다. 앞에서 보아 왼쪽이 숙종, 오른쪽이 인현왕후 민씨이다. 난간석에는 방위표시를 위한 문자를 음각으로 새겨넣었는데 풍화가 심하지 않아 문자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두 봉분 앞에는 상석이 각각 하나씩 있고, 망주석 1쌍이 좌우에 서 있으며, 3면의 곡장이 봉분을 에워싸고 있다.

 

인원왕후의 능도 마찬가지로 석물의 크기가 작다. 난간석의 무늬가 숙종릉의 난간석 무늬와 조금 다르고 상석이 한 개라는 점이 다를 뿐 나머지 상설(常設)은 같다. 영릉의 정자각에서 보면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이 왼쪽 갑좌경향(동쪽에서 서쪽방향)의 언덕에, 인헌왕후의 단릉이 오른쪽 을좌신향(동쪽에서 서쪽방향)의 언덕에 있다.

 

처음에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현 위치에 장사지내고 인조의 장릉의 예에 따라 우측을 비워 왕릉기(王陵基)로 표를 남겨두었다가, 이후 아들 경종이 즉위하여 숙종의 장례를 치루고 능호를 명릉으로 정했다고 한다. 그 뒤 영조 33년 인원왕후가 승하하자 그 오른쪽 언덕에 안장되어 숙종, 인현왕후의 쌍릉과 더불어 동원이강을 이루게 되었다.

 

 

명릉의 특이한 점은 석물(石物)들이 왜소하다는 것이다. 숙종이 재위(在位) 시절 복위된 단종(端宗)의 장릉(莊陵)과 단종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의 능인  사릉(思陵)을 조성할 때, 검소하고 간촐하게 조성할 것을 명하였고, 자신도 역시 간소하게 조성하여 석물(石物)들도 크기도 거의 실물과 비슷하게 다소 작게 만들어진 것이다.  아울러 부장(副藏) 명물(明物)도 간촐하게 줄였다고 한다. 또한 새로운 양식으로는 능 앞의 장명등(長明燈)의 지붕이 팔각(八角)이 아닌 사각(四角)의 모양을 하게 된 것도 명릉부터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명릉의 석물은 다른 능에 비해 작고 왜소하다. 숙종은 일찍이 단종과 그 비의 능인 장릉, 사릉을 조영할 때 간소하고 자그마한 후릉(정조릉)의 양식을 따를 것을 명했다. 그래서 인현왕후의 국상 때에도 석물제도 일체를 후릉을 쫒아 검소하게 할 것을 명하여 규범으로 삼게했다. 명릉도 이에 따라 모든 석물의 척수를 줄여 석인은 등신대, 석수는 실물대에 가깝게 왜소하게 했고 부장명기(무덤안에 넣는 기물)도 많이 감하고 있다.

            

특히 건원릉 이후의 팔각 장명등을 대신한 사각옥형개석의 장명등은 특기할 만하다. 숙종 24년에 장릉, 사릉에 사각지붕의 장명등을 세운 바가 있으나, 명릉에서 이것을 제도화함으로써, 조선후기 석물의 한 양식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1757년(영조 33년)에 세워진 인원왕후의 능은 정성왕후(영조의 원비)의 홍릉과 거의 동시에 조영됨으로써 난간 이외의 모든 석물양식은 18세기의 것과 거의 같다.

 

 

계비(繼妃) 인원왕후 김씨 (仁元王后 金氏, 1687-1757)

 1687{숙종 13} 경주(慶州) 김씨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딸로 태어난 인원왕후는 1701년 인현왕후 승하후 다음해{숙종 28}에 왕비로 책봉되고, 1713년에 혜순(惠順)이란 존호를 받습니다. 영조대(英祖代)까지 왕대비(王大妃)로 지내다가 1757{영조 33}71세의 나이로 슬하에 소생없이 승하합니다. 생전에 숙종의 곁에 묻히기를 원해 명릉에 함께 조성되었습니다.

 

숙종의 두 번째 계비 인원왕후는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딸로 1687(숙종 13) 태어났으며, 첫 번째 계비 인현왕후가 승하함에 따라 1702(숙종 28)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남편인 숙종이 먼저 승하한 후 1720(경종 즉위)에 대비가 되었고, 1724(영조 즉위)에 대왕대비가 되었다. 1757(영조 33) 71세의 나이로 승하하여 명릉의 오른쪽 언덕에 예장되었다.

 

20072월 숙종의 세 번째 부인이었던 인원왕후가 당시 궁중 생활을 기록하여 엮은 선군유사(先君遺事)선비유사(?遺事)가 세간에 소개되었다. 선군유사는 아버지에 관한 회상, 선비유사는 어머니에 관한 회상을 말한다. 선비유사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궁 안에 머무르시면 새벽에 일어나시어 문 밖에 오셔서 내가 잠에서 깨기를 기다리시고 내가 청하여 누운 자리에 들어오소서.” 하면 황송 하노라.” 사양하시고, 내가 청하여 자리를 한 가지로 하고자 하면 반드시 머뭇거려 사양하셨다.

 

명릉 - 인원왕후릉이 두 권의 기록에서 인원왕후는 궁에 들어와 부모님을 그리는 마음과, 중전으로서 부모님과 사사로운 정을 나눌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선군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보인다. 15세에 이르되 항상 무릎에 두시고 이마를 어루만져 잠깐도 버려두지 않으시더니 내가 이 지위에 오르자 …… 내가 그 좌석이 너무 멂이 민망하여 가까이 옮겨가고자 하면 아버지께서는 종종걸음으로 물러나 사양하셔서 내가 감히 사사로운 정을 펴지 못했다.

 

훗날 인원왕후는 이 기록을 친정으로 보내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이 두 권의 문집과 더불어 발견된 세 권의 문집은 인원왕후가 노년에 썼을 가능성이 높으며, 단아하고도 기품있는 글솜씨가 당시 그녀의 학문과 독서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애절한 청춘에 유명을 달리하니 왕의 바람기는 보지 않았으나

 

익릉 翼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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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원비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 金氏, 1661-1680), 1701, 경기 고양 198, 서오릉(西五陵)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 익릉 큰이미지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 익릉 첫번째 작은이미지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 익릉 두번째 작은이미지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 익릉 세번째 작은이미지

 

 

 

 

 숙종의 비()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金氏; 1661-1680)의 익릉은 숙종이 왕릉을 간소화하라는 명()을 내리기 이전에 조성된 능이었기에 웅장한 모습으로 서오릉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봉분(封墳)은 병풍석(屛風石)을 생략하고 난간석(欄干石)만으로 호위하고, 석물(石物)들의 크기도 명릉(明陵)에 비해 크고 장명등(長明燈) 역시 팔각지붕을 하고 있습니다.

   

 

 

익릉은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의 단릉이다. 봉분에는 병풍석은 생략하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다른 왕릉과는 조금 다르게 석주가 아닌 동자석 상단부에 십이간지를 글자로 새겨 놓았다. 문석인은 공복에 복두를 쓰고 있으며, 두 손으로 홀을 쥐고 있다. 뒷면의 관대에는 꽃문양이 보인다.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있어 표정이 살아 있다. 짧은 목에 얼굴을 앞으로 내밀어 턱을 홀 바로 위에 올려 놓은 형상이다. 무석인은 투구에 있는 상모를 뒤로 넘겼다. 갑옷의 어깨 부분에는 아주 작은 도깨비 문양을 넣었고, 소매는 활동하기에 편리하도록 터져 있다. 흉갑 부분은 구름으로 장식되어 있다. 대부분의 석물이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 왕릉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정자각은 능침 언덕 아래에 있다. 현종의 숭릉 정자각과 같이 당시 유행하던 익랑이 딸려 있는 것이 특이하다. 정자각과 홍살문 사이의 참도는 직선으로 경사가 졌으며, 참도 중간에 계단을 두어 지형에 따라 설치하였다.

 

익릉-인경왕후릉1680(숙종 6) 1026일 인경왕후가 승하하자 현재의 위치에 능호를 익릉이라 하여 조영하였다. 숙종 연간에는 왕릉의 능제를 단순화하고 석물을 간소하게 제작하도록 명하였으나, 그 이전에 조영된 능이므로 기본적으로는 국조오례의의 제도를 따르고 부분적으로는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숙종의 비(妃)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金氏; 1661-1680)의 익릉은 숙종이 왕릉을 간소화하라는 명(命)을 내리기 이전에 조성된 능이었기에 웅장한 모습으로 서오릉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봉분(封墳)은 병풍석(屛風石)을 생략하고 난간석(欄干石)만으로 호위하고, 석물(石物)들의 크기도 명릉(明陵)에 비해 크고 장명등(長明燈)도 역시 팔각지붕을 하고 있다.

 

 

이승에서는 박복했으나 유택은 웅장하네

 

숙종 원비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 金氏, 1661-1680)

1661{현종 2} 광주(光州) 김씨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딸로 태어난 인경왕후는 11세 때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었고,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진봉(進封)됩니다. 숙종과의 슬하에 두 공주(公主)를 두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고, 왕비 역시 20세의 나이에 천연두(天然痘) 증세로 요절(夭折)하고 맙니다.

 

인경왕후는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딸로 1661(현종 2) 93일 태어났으며, 10세 때인 1670(현종 11)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어의동 별궁에 들어갔고, 이듬해 4월에 가례를 올리고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1674년 현종이 승하하고 숙종이 조선 19대 왕으로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20세 때인 1680(숙종 6) 10월에 천연두 증세를 보이며 앓기 시작했다. 전염을 우려한 숙종은 경덕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하였으며, 인경왕후는 발병 8일 만에 경덕궁 회상전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슬하에 두 명의 공주가 있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는 왕비의 자리에 오르고 머지않아 짧은 생애를 마치게 된다. 그 이후 당파 싸움과 맞물려 숙종을 둘러싼 궁중여인들의 암투가 구중궁궐을 혼란에 빠지게 하는데, 이러한 현실을 소설화한 것이 사씨남정기이다. 사씨남정기의 저자는 당대 내로라하는 벼슬길에 오르다 남인의 탄핵으로 인해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 김만중이다. 관료이자 학자였던 그는 바로 인경왕후의 숙부이다.

 

김만중은 유배 생활 중에 사씨남정기이외에도 여러 편의 글을 저술하였는데, 그 중에는 자신의 어머니 윤씨 부인의 일대기를 그린 윤부인 행장도 포함되어 있다. 이 글에는 인경왕후가 어렸던 시절, 친할머니인 윤씨 부인의 손에서 길러졌는데, 그 행실을 반듯하게 가르친 덕에 세자빈에 간택되었을 때 주선하고 응대하는 것이 어른 같아 궁중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따랐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8대 예종(睿宗) 창릉숙종의 원비 인경왕후(仁敬王后)는 조선시대에 정승도 부럽지 않다는 대제학을 7명이나 배출한 광산김씨(光山金氏) 집안에서 태어났다. 벼슬의 꽃이라고 일컬어지는 대제학이란 관계와 학계를 대표하는 직위여서 학자 최고의 명예로 인정받는다. 광산김씨 족보에 수록되어 있는 “증 정경부인 양천허씨(陽川許氏) 약기”와 남원양씨(南原楊氏) 족보에 수록되어 있는 “열부 숙인 이씨 전”을 보면 양천허씨가 임신 중이던 17세 되던 해에 남편(金問)이 죽자 당시에 사회 풍습이었던 것처럼 허씨의 친정 부모님께서 재혼을 시키려고 하였다. 허씨는 이를 반대하여 비슷한 처지에 있던 남원양씨인 양수생(楊首生)의 처 이씨(李氏), 은진송씨인 송극기(宋克己)의 처 고흥류씨(高興柳氏)와 함께 개성을 탈출하였다. 류씨는 회덕에 자리를 잡았는데 우암 송시열 선생의 9대 조모이시며, 허씨는 논산에 자리를 잡았는데 사계 김장생 선생의 7대 조모이시고, 이씨는 순창에 자리를 잡았는데 함평현감 양사보(楊思輔) 선생의 어머니이시다. 양천허씨가 바로 인경왕후의 11대 조모이신데, 손자인 김국광(金國光)이 광산김씨 가문에서 처음으로 좌의정에 올라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아들 김극뉴(金克忸)는 대사간을 지냈는데 그 무덤이 조선의 8대 명당이라고 하는 순창군 인계면에 있는 말명당이다. 김극뉴의 증손 김계휘(金繼輝)는 대사헌을 지냈고, 그 아들 김장생(金長生)은 학문과 도덕으로써 세상의 유종(儒宗)이 되어 벼슬이 참판이었는데도 영의정에 추증되었는데 그분이 바로 인경왕후의 고조부이시다. 김장생의 아들 김반(金槃)은 일찍이 대사헌을 지냈고, 김반의 아들 김익겸(金益兼)은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구차하게 살아남기를 부끄럽게 생각하여 목숨을 버렸는데 이분이 김만기(金萬基)를 낳으셨다. 김만기는 일찍이 병조판서와 대제학이 되었고, 군수 한유량(韓有良)의 딸과 결혼을 하여 1661년(현종 2년) 9월 3일에 인경왕후를 낳으셨다. 인경왕후는 외가인 임실군 삼계면 어은리에서 태어났다는 말이 전해져 온다. 1671년(현종 12년) 4월 3일에 왕세자빈으로 간택되어 두 딸을 두었으나 두 딸 모두 일찍 죽었다. 1674년에 왕비에 올랐으나 천연두에 걸려 열흘만인 1680년(숙종 6) 10월 26일 경덕궁 회상전에서 승하하였다. 장지를 서오릉 국내 남서향(丑坐未向) 언덕에 정하여 이듬 해 2월 22일에 장사를 지내고 능호를 익릉(翼陵)이라 하였다.

 

 

 

인경왕후의 뒤를 이어 계비로 간택된 인현왕후(仁顯王后) 역시 후사가 없었는데 후궁인 희빈장씨(嬉嬪張氏)가 1688년(숙종 14)에 아들을 낳자 숙종은 오두인(吳斗寅)과 박태보(朴泰輔) 등이 목숨을 걸고 간언했지만 인현왕후를 1689년(숙종 15) 5월 2일 사가로 내 보냈다. 1694년 4월 12일에서야 인현왕후가 좋은 배필이었음을 깨닫고 장씨를 왕비에서 물어나게 하고 인현왕후를 왕비의 자리로 돌아오도록 하교하면서 후궁은 후비(后妃)에 오르지 못하도록 정하였다. 1701년(숙종 27)에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숙종은 “희빈장씨가 중전을 질투하고 원망하여 몰래 모해하려고 도모한 일이 모두 드러났으니, 신과 사람이 함께 분개하는 바이다. 이를 그대로 두어 후일에 뜻을 얻게 되었을 때 국가의 근심이 실로 형언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역사에 보더라도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 지금 나는 종사(宗社)를 위하고 세자를 위하여 이처럼 부득이한 일을 하니, 어찌 즐겨 하는 일이겠는가? 장씨는 전의 비망기(備忘記)에 의하여 하여금 자진(自盡)하게 하라. 아! 세자의 사정을 내가 어찌 생각하지 아니하였겠는가?”하였다. 이와 같은 일을 인현왕후가 베푼 은혜를 생각하여 연잉군(延礽君, 英祖)의 어머니인 숙빈최씨(淑嬪崔氏)가 통곡(痛哭)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숙종에게 몰래 고(告)하였다. 그 결과 제주도로 유배된 희빈장씨의 오빠 장희재는 처형당하고, 장씨는 사약을 받게 되었다.

 

인경왕후 무덤 뒤에는 기운이 강하게 뭉쳐있다는 바위가 있어 무엇인가 일을 낼 것 같은데, 부군인 숙종과 계비인 인현왕후와 인원왕후, 훨씬 뒤에 이곳으로 이장된 희빈장씨를 어떤 말로 위로하고 또한 나무랬는지 궁금하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희대의 악녀의 대명사

 

대빈묘(大嬪墓)

 

기사 관련 사진 

 

숙종(肅宗)의 후궁, 희빈(禧嬪) 장씨(?~1701), 1701, 경기 고양 198, 서오릉(西五陵)

    

희빈(禧嬪) 장씨 대빈묘 큰이미지

 

 

희빈(禧嬪) 장씨 대빈묘 첫번째 작은이미지희빈(禧嬪) 장씨 대빈묘 세번째 작은이미지희빈(禧嬪) 장씨 대빈묘 두번째 작은이미지

 

 

 

대빈묘는 19대 숙종의 후궁이자 경종의 어머니인 희빈 장씨의 묘이다. 곡담이 봉분 주위를 에워싸고 있고, 봉분 앞쪽으로는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다. 봉분의 양 옆으로는 문석인 한쌍이 마주보고 서 있다.

    

 

 

희빈 장씨가 1701(숙종 27) 1010, 인현왕후를 무고하고 저주한 죄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나자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문형리에 장사지냈는데, 1969년 현재의 서오릉 지구로 옮겼다. 훗날 그녀의 아들인 경종이 즉위하여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에 추존하였다.

 

8대 예종(睿宗) 창릉 희빈 장씨는 조선 19대 숙종의 후궁이자 20대 경종의 어머니이다. 어린 시절 나인으로 궁에 들어가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1686(숙종 12) 숙원이 되었으며, 1688(숙종 14) 왕자 윤(훗날 경종)을 낳았다. 이듬해 숙종이 송시열 등 서인의 반대를 물리치고 윤을 원자로 책봉함에 따라 내명부 정1품 희빈에 올랐다. 그해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인현왕후가 폐위되었고 윤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희빈 장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애욕은 꽃밭에 숨은 독사와 같다

 

희빈(禧嬪) 장씨(?~1701)

 

 

 

1694(숙종 20) 서인들의 인현왕후 복위운동을 계기로 남인이 옥사를 일으켰으나 숙종이 오히려 남인을 제거하고 서인을 재집권시킨 갑술환국이 일어났다. 그해 인현왕후가 복위됨에 따라 다시 희빈으로 밀려났다. 1701(숙종 27) 민비가 병으로 죽자, 인현왕후를 무고했다는 서인의 탄핵을 받아 사약을 받았다.

 

이름은 옥정이며 역관 장현의 종질녀로만 알려져 있을 뿐 아버지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다. 한 때 그녀가 장렬왕 후의 동생 조사석의 딸이라는 소 문이 돌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어머니와 조사석이 내연의 관계였 다는 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녀는 조사석과 숙종의 종친인 동평군의 주선으로 궁녀가 되었으며, 장렬왕후의 시종으로 있다가 숙 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다. 1686년 숙원이 되고 1688년 소의로 승 격되었으며 이 때 왕자 균을 낳아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다. 숙 종이 왕자 균을 세자로 책봉하려 할 때 서인의 노, 소론 대신들은 왕 비 인현왕후 민씨의 나이가 많지 않다는 이 유로 반대 상소를 올려 후 일을 기다리자고 하였다. 하지만 숙종은 이 말을 듣지 않고 1689년 정 월에 균을 세자에 책 봉하고 장소의를 빈으로 승격시킨다.

 

기사환 국 이후 같은 해 5월에 숙종은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시키고 희빈 장씨 를 왕비에 책봉하려 하였다. 그러자 서 인 오두인, 박태보 등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참혹한 형벌을 받고 파직되었으며, 이 후 조정은 남인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이 사건 후 숙종은 민 비를 폐비한 것을 후회하였는데, 1694년 소론의 김춘택, 한중혁 등이 이를 눈치채고 폐비 복 위운동을 전개한다. 이에 남인의 영수 민암 등 이 이 문제를 기화로 조정에 남아 있던 서인 세력을 모두 제거하려고 김춘택을 비롯 수십 명의 서인을 감옥에 가두는 일대 옥사를 일으켰 다. 그러나 숙종은 민비를 폐위한 것을 후회하던 중이라 오히려 서인 들을 옥사로 다스리던 민암을 파직한 후 사사시켰 으며 권대운, 목내 선, 김덕원 등을 유배시키고 소론의 남구만, 박세채, 윤지환 등을 등 용했다. 그리고 중전으로 올 랐던 장씨를 다시 빈으로 강등시키고 폐 위되었던 민씨를 복위시켜 왕비에 앉혔는데 이 사건을 '갑술옥사'라 고 한다.

 

갑술옥 사 이후 숙종은 사사시켰던 송시열, 김수항 등을 복직시켰고 남인을 대거 정계에서 몰아냈다. 소론이 들어 서고 남인이 물러날 때 희빈 장 씨의 오빠 장희재가 희빈 장씨에게 보낸 서한의 내용 속에 폐비 민씨 와 관련된 문구 가 발견되어 논란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일부 신하들 은 장희재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소론의 남구만, 윤지 완 등은 세자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그를 용서하자고 하여 이 사건은 무마되었다. 1701년 왕비로 복위되었던 민씨가 병으로 죽은 뒤 희빈 장씨가 자신의 거처인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설치하고 민 비가 죽기 를 기원한 것이 발각되었다. 숙종은 이 일에 관련된 희빈 장씨와 그녀 의 오빠 장희재를 사사하고 궁인, 무녀 등도 함께 죽였다. 이 사건 을 '무고의 옥'이라고 한다. 이로써 궁녀에서 후궁생활을 거쳐 왕비 에 오르기까지 했던 희빈 장씨는 수많은 풍문과 일화를 남긴 채 43세 를 일 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숙종은 그녀의 처사에 분개한 나머지 이 후로는 빈이 후비로 승격하는 일을 법으로 금지해 버리기까지 했 다. 희빈 장씨가 죽자 그녀를 지지하던 남구만, 최석정, 유상운 등의 소론 세력이 몰락하고 다시 노론이 득세하게 된다. 희빈 장씨의 소생 으로는 경종과 옹주 하나가 있다. 무덤은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서오 릉에 있다.

 

 

 

 

<동이> 실제 주인공 최숙빈, 홀로 잠들다, 영조의 생모

  

소령원(昭寧園)

 

 

 

숙종(肅宗)의 후궁, 숙빈 최씨(淑嬪 崔氏, 1670 ~ 1718),

1753, 경기도 파주 358, 파주삼릉(坡州三陵), 비공개릉

 

영빈(暎嬪) 이씨 수경원 큰이미지

 

 

영빈(暎嬪) 이씨 수경원 첫번째 작은이미지영빈(暎嬪) 이씨 수경원 세번째 작은이미지영빈(暎嬪) 이씨 수경원 두번째 작은이미지

 

 

 

  숙빈 최씨의 장례에 대한 숙종의 처사는 실로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171839일 그녀가 연잉군 사제에서 병사하자 제수를 넉넉히 보내고 예장하라는 말만 있었을 뿐 하루 동안 정무를 정지하며 애도하지 않았다.(역대 임금들은 왕실 지친이나 오래도록 내명부의 후궁으로 있거나 총애가 깊은 후궁이 죽으면 하루동안 정무를 정지하며 애도를 했다) 또한 그녀의 장지로 거론된 곳이 공주들의 묘역 옆산이라는 이유로 감히 공주들의 묘역인 청룡의 터를 침범하려 했다며 그 말을 전한 내관을 파직할 정도로 화를 내었다. 이어 두번째로 거론된 장지에 대해서도 왕실 능 부근은 백성이 장사를 지낼 수 없는데 최씨를 그곳에 장사 지내면 공정하지 못하다고 말하며 왕자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후궁이었던 최씨를 일반인과 같은 취급을 하고 있는 실록 기록이 있다. 현재 숙빈의 묘역은 숙종이 정해준것이 아니라 영조(당시 연잉군)가 풍수지리에 밝은 지관 목호룡을 대동하고 둘이 직접 고른곳이다.

   

소령원 (육상궁 숙빈 최씨의 원)
소령원 (육상궁 숙빈 최씨의 원)

 

그녀의 아들 연잉군은 왕세제를 거쳐 마침내 왕으로 등극하니, 바로 조선의 제21대 왕 영조(英祖)이다. 그는 즉위 원년, 어머니 최씨의 사당을 지어 숙빈묘(淑嬪廟)라 하였고, 영조20(1744) 육상묘(毓祥廟)라고 올렸다가 다시 영조 29(1753) 육상궁(毓祥宮)으로 승격시켰다. 육상궁은 현재 칠궁에 합사되어 있다. 묘소 또한 영조 20년에 소령묘(昭寧墓)라고 올렸다가 29년에 소령원(昭寧園)으로 다시 승격시켰으며, 또한 사당과 무덤에 궁호와 원호를 올릴 때 함께 화경(和敬)의 시호를 올렸다. 후일에 여러 차례에 걸쳐 휘덕안순수복(徽德安純綏福)의 존호가 더 올려졌다. 영조는 자신의 어머니를 결국 왕후로 추존하는데에는 실패하였지만 이런 식으로 그녀에 대한 신분을 높이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하였다.

 

    파주삼릉-파주삼릉 홈페이지를 찾아주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동 에 있는 조선 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사친(私親)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묘로 사적 제358호 처음에는 소령묘(昭寧墓)로 불렀으나 영조의 사친이므로 1753(영조 29)6월 숙빈 최씨를 화경(和敬)이라 추시(追諡)하고, ()를 궁()으로,()를 원( )으로 승격시켰으며, 같은 해 9월에 이 사실을 태묘(太廟))에 고하고 진하반사(陳賀頒赦: 축하를 하고 널리 알림)하였다.

 

(우편번호 413-820)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삼릉로 89. 3호선 구파발역 하차 2번출구 9709, 9710, 909, 760, 30, 31 버스이용 파주삼릉입구 하차 후, 도보로 10분정도면 오실 수 있습니다.175711월 예조판서 이익정(李益柾)이 각 능의 예에 따라 소령원에도 동지제(冬至祭)를 지낼것을 주청하였으나 원묘(園墓)에는 정해진 예가 없다 하여 영조는 이를 반대하였다. 영조 만년에는 각 지역 유생(儒生)들이 원을 능()으로 승격시키자는 상소가 수년간 잇달았으나 시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능으로 승격시키자는 유생들의 속셈은 최씨가 영조의 생모라는 점을 들어 그러한 소를 올림으로써 조정에 관심을 끌어 벼슬자리라도 얻어보려는 의도적인 것이 강하였다. 영조는 이에 대해 처음에는 상소자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그 수가 증가되자 단호히 대처하였다.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장희빈이 같은 묘역인 서오릉(고양시 용두동) 안에 잠들어 있는 것에 반해, 최숙빈 홀로 이 먼 곳에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 더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현재 숙종과 인현왕후는 서오릉 안의 명릉에 함께 나란히 누워 있고, 장희빈은 명릉과는 좀 떨어진 반대편 구역에 작은 자리를 차지한 채 누워 있다. 명릉에 비하면 장희빈의 묘가 무척 초라해 보이기는 하지만, 평소 그의 묘를 찾는 사람이 많아 최숙빈의 묘처럼 쓸쓸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소령원은 공개 제한 구역으로 묶여 있다. 학술적인 목적 등 실제적인 사유가 없는 한, 공개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

    

 

 

육상궁 (毓祥宮)

 

 

 

 

무수리에서 왕의 여자, 왕의 어머니가 된 여인

 

 

 

숙빈 최씨(淑嬪 崔氏, 1670 ~ 1718)

소령원은 숙종의 후궁인 숙빈최씨가 1718(숙종44) 39(?19)49세로 별세하여 당시 양주땅 이었던 이곳에 장사를 지냈다. 숙빈 최씨는 숙종 비 인현왕후의 궁인이었다. 인현왕후가 폐비되어 사가에 나가 있을 때, 숙종이 우연히 밤에 후원을 거닐다가 밤중에 부엌에서 음식을 마련하는 최씨를 발견하였다. 이상하게 여긴 숙종이 물어서, 인현왕후의 궁녀라는 것과 내일이 인현왕후 생일이어서 아침밥 준비를 한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숙종이 인현왕후가 죄가 없느냐?”고 물었다. 이에 최씨는 죄의 유무를 어찌 알겠습니까마는 저를 따라오셔서 보시면 알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곧 숙종이 최씨를 따라 토굴 속을 들여다보니, 벽에 인현왕후의 화상을 붙이고 장희빈이 활로 쏘고 있었다.

 

그 길로 돌아와 숙종은 최씨에게 동침을 요구했다. 최씨가 옛 주인을 밖에 내보내 놓고 어찌 감히 임금을 모시겠습니까?” 하면서 거절했다. 그래서 숙종은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날 밤 동침했다. 하루는 숙종이 낮잠을 자는데 꿈에 황룡이 큰항아리 밑에 치어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꿈을 깬 숙종이 뒤뜰에 나가 보니 과연 큰항아리가 엎어져 있기에, 뒤집게 하니 최씨가 그 속에 갇혀 거의 기진한 상태였다. .

 

장희빈이 질투해 한 짓이었고, 이 때 최씨는 임신한 상태였다. 곧 침전에 데려다가 깨어나게 했고, 이듬해 1694년에 아들이 태어났다.(이 아이가 뒤에 영조 임금) 그리고 인현왕후가 복위되었다가 얼마 후 사망하고, 장희빈은 저주 사건이 탄로되어 사사(賜死)되었다. (김현룡, 한국문헌설화3, 건대출판부, 1998. 69-70.)

    

 

이와 같이 숙빈최씨는 의리와 책임을 다하는 성품으로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며 7세에 궁에 들어와서 궁녀로서의 최고의 지위인 숙빈까지 오르게 된 행운아로 요즈음 TV드라마에서 평범한 여자가 재벌가 아들의 애인이 되는 신분상승의 전형적인 모델이 된다.

 

     영조는 1694(숙종 20) 913일 창덕궁에서 숙빈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복 형인 경종(20대왕)이 병약하고 아들이 없어 세자로 책봉되어 연잉군이 되었고 숙빈최씨가 죽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한 효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자로 책봉된 연잉군은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위험을 느끼고 있어 시묘 살이를 이유로 소령원 깊은 산중으로 피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마을에 전하는 얘기로는 영조가 시묘 살이를 하는 중에도 자객의 기습이 몇 차례나 있었으나, 그때마다 동네 개들이 일제히 짖어 위험을 알렸고, 마을에 장사가 숨어 지내다 자객들을 물리치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영조는 이 마을 사람들을 매우 고맙게 생각했다고 한다.

 

영조대왕은 즉위하자 죽은 후에도 왕비가 될 수 없는 어머니를 위해 최초로 육상묘(毓祥廟)를 건립해(현재 서울 종로구 궁정동 1-1 칠궁(七宮)) 후궁으로 왕의 어머니가 된 신위를 모시는 곳을 만들었고, 소령원 묘소 동남편에 친필 비각을 4곳에다 세웠다고 하며 명복을 빌기 위하여 보광사를 중수하는 한편 어실각을 짓고 매년 백중날 절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 517, 1392 - 1910 ]

 

 

 

 

 

 

 

 

 

() 13()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익종(翼宗) 수릉(綏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융릉(隆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영릉(永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장릉(章陵 : 사적 제202)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경릉(敬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 2()

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

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유릉(裕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홍릉(洪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

왕릉 35

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예릉(睿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경릉(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인릉(仁陵 : 사적 제194)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건릉(健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홍릉(弘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원릉(元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혜릉(惠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의릉(懿陵 : 사적 제204)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익릉(翼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명릉(明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숭릉(崇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영릉(寧陵 : 사적 제195)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휘릉(徽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장릉(長陵 : 사적 제203)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성묘(成墓 : 사적 제365)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목릉(穆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강릉(康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효릉(孝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희릉(禧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온릉(溫陵 : 사적 제210)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정릉(靖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9대 성종(第九代 成宗) 회묘(懷墓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순릉(順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선릉(宣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

8대 예종(第八代 睿宗) 공릉(恭陵 : 사적 제205)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8대 예종(第八代 睿宗) 창릉(昌陵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7대 세조(第七代 世祖) 광릉(光陵 : 사적 제197)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사릉(思陵 : 사적 제209)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장릉(莊陵 : 사적 제196)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5대 문종(第五代 文宗) 현릉(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4대 세종(第四代 世宗)

3대 태종(第三代 太宗)

2대 정종(第二代 定宗)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정릉(貞陵 : 사적 제208) : 서울 성북구 정릉2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1대 태조(第一代 太祖)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목조-덕릉 효공왕후 이씨-안릉

익조-지릉 정숙왕후 최씨-숙릉 , 손씨

도조-의릉 경순왕후 박씨-순릉, 조씨

환조-정릉 의혜왕후 최씨-화릉, 이씨, 정빈 김씨

태조-건원릉 신의왕후 한씨-제릉 신덕왕후 강씨-정릉

정종-후릉 정안왕후 김씨-후릉

태종-헌릉 원경왕후 민씨-헌릉

세종-영릉 소헌왕후 심씨-영릉

문종-현릉 현덕왕후 권씨-현릉

단종-장릉 정순왕후 송씨-사릉

세조-광릉 정희왕후 윤씨-광릉

예종-창릉 장순왕후 한씨-공릉 안순왕후 한씨-창릉

성종-선릉 공혜왕후 한씨-순릉 폐비 윤씨-회묘 정현왕후 윤씨-선릉

연산군-연산군묘 폐비 신씨-연산군묘

중종-정릉 단경왕후 신씨-온릉 장경왕후 윤씨-희릉 문정왕후 윤씨-태릉

인종-효릉 인성왕후 박씨-효릉

명종-강릉 인순왕후 심씨-강릉

선조-목릉 의인왕후 박씨-목릉 인목왕후 김씨-목릉

광해군-광해군묘 폐비유씨-광해군묘

인조-장릉 인렬왕후 한씨-장릉 장렬왕후 조씨-휘릉

효종-영릉 인선왕후 장씨-영릉

현종-숭릉 명성왕후 김씨-숭릉

숙종-명릉 인경왕후 김씨-익릉 인현왕후 민씨-명릉 인원왕후 김씨-명릉

경종-의릉 단의왕후 심씨-혜릉 선의왕후 어씨-의릉

영조-원릉 정성왕후 서씨-홍릉 정순왕후 김씨-원릉

정조-건릉 효의왕후 김씨-건릉

순조-인릉 순원왕후 김씨-인릉

헌종-경릉 효현왕후 김씨-경릉 효정왕후 홍씨-경릉

철종-예릉 철인왕후 김씨-예릉

고종-홍릉 명성황후 민씨-홍릉

순종-유릉 순명효황후 민씨-유릉 순정효황후 윤씨-유릉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