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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朝鮮王陵] 능(陵) - 6 (1)제17대 효종 (孝宗) _ 영릉 寧陵

草霧 2013. 8. 9. 15:18

 

 

 

 

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 - 6

 

 

6. 조선, 당쟁에 휩싸이다

  

효종20081009-13.JPG  

 

(1) 제17대 효종 (孝宗, 1619-1659) _ 영릉 寧陵

 

 

 

 

왕릉은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들의 무덤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왕릉은 42(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40, 14, 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3, 4, 5)입니다 .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폐위(廢位)된 묘() 2()

황제릉(皇帝陵) 2()

왕릉 35

 

 

    

 

 

 

 

1. 추존이라는 미명으로, 역사세우기

 

추존(追尊)함길도 8

 

2. 왕조, 문을 열다

 

1대 태조 (太祖, 1335-1408) _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 정릉 貞陵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2대 정종 (定宗, 1357-1419) _ 후릉 厚陵

 

3대 태종 (太宗, 1367-1422) _ 헌릉 獻陵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4대 세종 (世宗, 1397-1450) _ 영릉 英陵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5대 문종 (文宗, 1414-1452) _ 현릉 顯陵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6대 단종 (端宗, 1441-1457) _ 장릉莊陵, 사릉思陵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7대 세조 (世祖, 1417-1468) _ 광릉 光陵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추존(追尊)왕 덕종 (德宗, 1438-1457) _ 경릉 敬陵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8대 예종 (睿宗, 1450-1469) _ 창릉昌陵, 공릉恭陵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9대 성종 (成宗, 1457-1494) _ 선릉宣陵, 순릉順陵, 회묘 懷墓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3. 왕조, 산을 넘다

 

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_ 연산군묘 燕山君墓

 

11대 중종(中宗, 1488-1544) _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 泰陵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12대 인종 (仁宗, 1515-1545) _ 효릉 孝陵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13대 명종(明宗, 1534-1567) _ 강릉 康陵, 순창원 順昌園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14대 선조 (宣祖, 1552-1608) _ 목릉 穆陵, 성묘 成墓, 순강원 順康園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4. 조선, 또 다시 위기를 맞다

 

15대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_ 광해군묘 光海君墓

 

추존(追尊)왕 원종 (元宗, 1580-1619) _ 장릉 章陵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5. 왕조, 반석을 다지다

 

16대 인조 (仁祖, 1595-1649) _ 장릉 長陵, 휘릉 徽陵, 소경원 昭慶園, 영회원 永懷園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6. 조선, 당쟁에 휩싸이다

 

17대 효종 (孝宗, 1619-1659) _ 영릉 寧陵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18대 현종 (顯宗, 1641-1674) _ 숭릉 崇陵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7. 환국정치로 왕권을 다지다

 

19대 숙종 (肅宗, 1661-1720) _ 명릉明陵, 익릉 翼陵, 대빈묘大嬪墓, 소령원昭寧園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20대 경종 (景宗, 1688-1724) _ 의릉懿陵, 혜릉惠陵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8. 조선, 르네상스를 맞다

 

21대 영조 (英祖, 1694-1776) _ 원릉元陵, 홍릉弘陵, 수경원綏慶園, 수길원 綏吉園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추존(追尊)왕 진종(眞宗) _ 영릉永陵

 

추존(追尊)왕 장조(사도세자 莊祖) _ 융릉隆陵, 의령원 懿寧園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22대 정조(正祖, 1752-1800) _ 건릉健陵, 휘경원徽慶園, 효창원 孝昌園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9. 조선, 세도정치에 휘둘리다

 

23대 순조 (純祖, 1790-1834) _ 인릉仁陵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추존(追尊)왕 익종 (翼宗, 문조 文祖) _ 수릉綏陵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24대 헌종 (憲宗, 1827-1849) _ 경릉景陵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25대 철종 (哲宗, 1831-1863) _ 예릉睿陵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10. 오백 년 왕조, 문을 닫다

 

26대 고종황제 (高宗, 1852-1919) _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 흥원 興園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27대 순종황제 (純宗, 1874-1926) _ 유릉裕陵, 영원英園, 숭인원 崇仁園, 회인원 懷仁園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6. 조선, 당쟁에 휩싸이다

     

(1) 제17대 효종 (孝宗, 1619-1659) _ 영릉 寧陵, 소경원昭慶園

 

   

 

(2) 제18대 현종 (顯宗, 1641-1674) _ 숭릉 崇陵

 

 

 

  

(1) 제17대 효종 (孝宗, 1619-1659, 제위 10) _ 영릉 寧陵

 

    

 

볼모의 한이 사무치나 북벌의 꿈은 이루지 못하고

 

영릉 寧陵

 

효종20081009-13.JPG   

 

효종 (孝宗, 이호, 1619-1659, 제위 10),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 張氏, 1618-1674),

1673, 경기 여주 195, 영녕릉(英寧陵)

   

17대 효종(孝宗) 영릉 유적 큰이미지

 

      조선세종 영릉       조선효종 영릉                

17대 효종(孝宗) 영릉 유적 세번째 작은이미지17대 효종(孝宗) 영릉 유적 첫번째 작은이미지17대 효종(孝宗) 영릉 유적 두번째 작은이미지

 

 

 

17대 효종(孝宗) 영릉 유적孝宗(이호 ; 1619-1659, 제위 10)과 비()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張氏 ; 1618-1674)寧陵은 바로 근처에 세종(世宗)과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沈氏)의 영릉(英陵)을 이웃하고 있어 위치가 서울로부터 다소 떨어져 있어도 세종, 효종과의 200여년간의 시공(時空)을 넘나들 수 있는 유익한 기회를 제공해 주는 곳으로 삼을 수 있어 좋습니다.

 

석물(石物)들을 별도로 제작한 쌍릉(雙陵)의 형식을 하고 있는 영릉은 조금 특이한 위치를 하고 있는데, 두 릉의 위치가 좌우로 나란하게 조성된 것이 아니라 앞{인선왕후릉}{효종릉}로 비스듬하게 위치하고 있는 점입니다.

 

그 연유는 본래 영릉(寧陵)은 효종 승하후 현 위치가 아닌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東九陵) 소재의 태조(太祖) 건원릉(建元陵) 서쪽의 위치에 조성했는데, 석물(石物)에 틈이 생겨 누수의 염려가 있다고 하여 여주 세종의 영릉(英陵) 곁으로 천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봉분의 위치가 특이한 것은 풍수설(風水說)로 볼 때 왕성한 산 혈맥의 생기를 모두 받게 하려다 보니 현재와 같은 특이한 위치 조성이 되었다고 합니다.

 

    세종대왕유적관리소-세종대왕유적 관리소 홈페이지를 찾아주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효종(孝宗)의 릉에만 곡장(曲墻)이 설치되어 있어 쌍릉(雙陵)의 형식임을 알 수 있지만, 기타 나머지 석물(石物)은 모두 각각 별도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두 봉분(封墳) 모두 병풍석(屛風石)은 없이 난간석(欄干石)만으로 호위하고 있습니다.

 

영릉은 조선 제17대 임금 효종과 비 인선왕후의 쌍릉이다. 왕릉과 왕비릉이 한 언덕에 같이 있는 경우 대개는 봉분을 나란히 두는 쌍릉의 형식을 택하는데, 영릉은 특이하게도 왕릉과 왕비릉이 상하로 조영되어 있다. 이는 풍수지리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놓을 경우 생기가 왕성한 정혈을 비켜가야 하기 때문에 좌우 쌍릉을 쓰지 않고 상하혈 자리에 왕릉과 왕비릉을 조성한 것이다. 이러한 배치를 동원상하릉이라고 하는데 동원상하릉 중에서는 영릉이 조선 최초이다.

   

효종대왕릉 능침
효종대왕릉 능침
효종대왕릉
효종대왕릉
효종대왕릉
효종대왕릉
효종대왕릉 재실
효종대왕릉 재실
효종대왕릉 재실
효종대왕릉 재실
효종대왕릉재실
효종대왕릉재실

 

효종대왕릉
효종대왕릉
효종대왕릉
효종대왕릉
효종대왕릉 재실
효종대왕릉 재실
효종대왕릉 재실
효종대왕릉 재실

 

 

왕릉의 봉분 주위로는 곡담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왕비의 능에는 곡담이 없어 두 능이 한 영역 안에 있음을 드러내주고 있다. 왕릉과 왕비릉 모두 병풍석이 없으며 난간석의 기둥에 방위를 표시하는 십이지를 문자로 새겨 놓았다. 이는 간소화된 능제로서, 세조 광릉 이후 사라졌던 조선 초기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풍석이 성종의 선릉에서 다시 나타났다가, 이곳 효종의 영릉에서부터 없어진 것이다.

 

17대 효종(孝宗) 영릉 유적 두번째 작은이미지17대 효종(孝宗) 영릉 유적 세번째 작은이미지17대 효종(孝宗) 영릉 유적 두번째 작은이미지효종이 1659(효종 10) 54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자, 이 해 1029일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런데 1673(현종 14) 병풍석에 틈이 생겨 광중에 빗물이 스며들었을 우려가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능을 옮겨야 한다는 천장론이 불거졌다. 따라서 현재의 위치인 세종의 왕릉 영릉 동쪽으로 입지를 정하고 능을 열어보았는데, 그동안의 우려가 무색하게 물이 들어온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영릉은 천장하였으나 이에 연루된 자들은 면직을 당해야 했다. 영릉 천장 다음 해에 인선왕후가 승하하여 효종 왕릉 아래에 인선왕후의 능을 조영하였다.

 

인조(仁祖)의 둘째{봉림대군}로 태어나 8년간의 청나라 볼모생활을 보낸 효종은 귀국 후 형 소현세자(昭顯世子)죽음으로 세자에 책봉되고 인조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효종은 청나라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으로 굴욕을 씻고자 북벌(北伐)의 계획을 세워 군비를 정비하고 군정(軍政)에 힘썼으나 끝내 북벌을 감행하지 못하고 승하해 버렸던 안타까운 인물이기도 합니다.

 

효종 재위 시절에는 전라도 지역에 대동법을 시행하여 성과를 올렸고, 청나라에서 들여온 역법(曆法)으로 새로운 시헌력(時憲曆)을 시행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으나, 숙원이었던 북벌의 한을 풀지 못한 안타까운 생을 보냈습니다.

    

 

 

청나라의 힐책(詰責)으로 북벌 의지를 잠시 접어두면서도 러시아의 남하(南下)에 청()의 요청을 받아들여 나선(羅禪)정벌에 참여한 것을 보면 북벌(北伐)의 의지는 효종의 지상목표이자 국가 숙원사업이었던 것입니다.

 

관련사진효종(孝宗)은 1619년(광해군 11) 5월 22일 인조(仁祖)와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1626년(인조 4)에 봉림대군(鳳林大君)으로 봉해졌고, 1631년(인조 9)에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난 이듬해인 1637년(인조 15) 2월에 형(兄)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청나라 심양(瀋陽)에 볼모로 끌려갔다.

 

소현세자가 1645년 2월 18일에 돌아왔으나 그 해 4월 26일 갑자기 승하하자 대신들은 원손(元孫)을 세자로 책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차자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지목하여 관철시키고, 그해 5월 14일 심양에서 돌아온 봉림대군과 장씨(張氏)를 9월 27일 창경궁에서 세자와 세자빈으로 책봉하였다. 인조가 1649년 5월 8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자 같은 달 13일 봉림대군은 왕으로 즉위하였다.

 

관련사진즉위한지 10년만인 1659년 5월 4일 종기가 악화되어 침(針)을 맞았다가 잘못하여 혈관을 찔리는 바람에 지혈(止血)이 되지 않아 그토록 꿈꾸어 왔던 북벌정책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41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산릉의 일을 총괄지휘 할 총호사(摠護使)로 임명된 심지원(沈之源)은 효종의 사부(師傅)였던 윤선도(尹善道)와 함께 능지(陵地)를 찾아 나섰다.

 

총호사 일행은 현재 영릉(寧陵)의 자리인 홍제동(弘濟洞)과 융릉(隆陵)이 있는 수원의 산을 쓸 만한 곳으로 추천을 하였다. 윤선도는 “수원의 산은 눈에 번쩍 뜨일 정도로 상격(上格)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내룡(來龍)이 세종의 무덤(英陵)에 비해 조금 못하지만 진정 천리(千里)를 가도 그러한 곳은 없고 천 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곳으로, 비록 도선(道詵)이나 무학(無學)이 다시 살아난다고 하여도 다른 말이 없을 곳이다.”라고 밝히면서 수원의 산을 능지로 강력하게 추천을 하였다.

 

현종은 부왕(父王)인 효종이 홍제동 산을 멀어서 싫어했던 점을 감안하여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수원의 산을 장지로 정하도록 하여 능지 조성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판중추부사 송시열(宋時烈)이 극렬하게 반대를 하자 그 주변 인물들이 합세를 하여 논란이 벌어졌다. 한편 홍제동 산에 대해 예조판서 윤강(尹絳)은 “혈(穴)이 제대로 맺히지 않은 가화(假花)이고, 영릉(英陵)을 만들고 난 나머지 기운이 만든 곁가지에 불과하여 능을 조성할 만한 자리가 아니다.”라고 평하였었다. 결국 효종이 승하한지 2개월 8일이 지난 7월 11일에서야 능지를 건원릉 오른쪽 곧 현재의 원릉(元陵, 英祖 무덤)의 자리로 결정하여 그 해 10월 29일에 남동향(乾坐)으로 장사를 지내니 그 곳이 영릉(寧陵)이었다.

 

관련사진장사 지낸지 채 1년도 되기 전에 지대석(地臺石)을 비롯한 석물에 틈이 생기기 시작하여 여러 차례 보수를 한 끝에 영림부령(靈林副令) 이익수(李翼秀)의 상소로 천릉(遷陵)을 하기에 이른다. 홍제동 산이 천릉지로 결정이 되었고, 능을 쌍분(雙墳)으로 조성할 경우 정혈(正穴)인 중앙을 비워두게 될까봐 위아래에 조성하기로 하였다.

 

산 윗부분에 남향(子坐午向)으로 1673년(현종 14) 10월 7일에 효종을 옮겨 모시고 능호는 종전과 같이 영릉(寧陵)이라 하였다. 그로부터 5개월여 만인 1674년(현종 15) 2월 23일에 경희궁 회상전(會祥殿)에서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승하하자 능지를 효종의 아래로 결정하였다.

 

이조판서 이상진(李尙眞)은 능을 위아래로 조성을 할 경우 위의 땅을 파면 그 아래는 맥(脈)이 끊기는 법이라 하여 위아래로 능을 조성하는 것을 반대를 하였지만 현종은 당초의 계획대로 인선왕후를 아래의 자리에 모시도록 지시를 하였다. 인선왕후의 상여는 1백50척의 배와 3천6백90명의 인원이 수로(水路)로 운반하여 같은 해 6월 4일 효종 아래에 장사를 지냈는데, 이와 같은 형식을 동원상하봉릉(同原上下封陵)이라 한다. 영릉(寧陵)은 1469년(예종 1)에 세종 능을 천장하면서 청룡자락 북쪽에 있던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李仁孫)의 묏자리를 옮기도록 하였는데 영릉(寧陵)이 바로 그 자리로 추정된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북벌을 꿈꾼 효종

 

영릉 - 효종과 인선왕후

 

효종 (孝宗, 이호, 1619-1659, 제위 10)

 

효종은 16대 인조와 인렬왕후의 차남이다. 1626(인조 4) 봉림대군에 봉해지고, 1636년의 병자호란으로 이듬해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8년 간 머물렀다. 귀국 후인 1645(인조 23) 소현세자가 급작스런 죽음을 맞은 후 세자에 책봉되어 1649년 즉위하였다. 즉위 후에는 군제의 개편, 군사훈련 강화 등에 힘쓰며 청나라를 향한 북벌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국세가 더욱 일어나 북벌의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1654년 러시아 ·청나라의 충돌사건이 일어나자 청나라의 강요로 오히려 그들을 도와 러시아 정벌에 출정하였다.

 

효종은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인한 사회의 혼란을 바로 잡기 위하여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였으며,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을 시켜 서양식 무기를 제조하게 하기도 하였다. 1659(효종 10) 41세의 나이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1636(인조 14) 청나라는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입하여 불과 며칠 만에 강화도까지 점령하였다. 이 전쟁을 병자호란이라고 하는데, 봉림대군(훗날 효종)과 소현세자의 아버지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있다가 청나라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세 번 찧는 굴욕을 당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두 아들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게 되었다. 그러나 청나라에서 두 사람의 삶은 매우 달랐다. 봉림대군은 청나라의 군대를 의지와 상관없이 큰 고생을 해가며 따라다녀야 했다. 게다가 조선과 우호적이었던 명나라가 점령당하는 것을 목격하여 청나라에 원한을 품게 되었다. 반면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문물을 수용하고, 조선의 외교관 역할을 하며 국제 감각을 키웠다.

 

1645(인조 23) 소현세자는 귀국 후 급서하였으며,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등극하였다. 왕위에 오른 후에는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 청나라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가진 자들을 중용하여 은밀히 북벌 계획을 수립하였다.

 

효종대왕릉 재실놀지 않는 왕

효종의 손가락은 다섯 개다

일본 동물원에 조선 동물을 보내다

경세를 보는 안목

유생의 동맹 휴학 : 권당

북벌의 영웅인가, 순진한 몽상가인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볼 모생활에서의 차이

관련사진소현세자는 서양 신부 아담 샬과 사귀면서 천주교를 알았 고, 또한 서양의 과학 문명에 눈을 떴다. 아담 샬은 그에 게 천주상 과 서양의 역서 및 과학서들을 선물로 주었고, 그 덕택으로 소현세자 는 서양의 역법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는 동양과 서양의 역법이 큰 차 이가 있음을 깨닫는 한편 조선의 천문학이 초보 단계에 있음을 알았 다. 소현세자와 마찬가지로 봉림대군 역시 청에서 많은 서양 문물들 을 대하고 있었지만 소현세자만큼 깊이 심취하거나 경탄하지는 않았 다. 그보다 그는 형 소현세자를 적극 보호하고 청의 내부 사정을 파악 하여 본국에 전해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청의 대명 전 쟁에 직접 참여하여 명이 멸망하는 과정을 목격하기도 했고, 한편으로 는 패 전국의 왕자라는 이유로 청나라 관리들로부터 멸시를 받기도 했 다. 그의 이같은 경험들은 반청 사상을 더욱 강하게 불러일으키는 원 인이 되었다.

 

인조가 소현세자를 미워하 게된 원인

인조가 소현세자를 미워한 것은 반청 감정 때문이었다. 원 래 인조의 정치적 기반은 대명 사대주의였다. 반정을 일으 켜 광해군 을 몰아낸 명분도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사대모화 사상은 병 자호란을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왕인 자신이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해야 하는 치욕까지 겪게 했으며 자식들을 볼모로 보내야 했다. 그 때문에 인조의 반청 감정은 그 어떤 실리주의 노선으로도 무마시킬 수 없을 만큼 극단적으로 고조되어 있었다. 그러나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 는 청나라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항상 타협점을 모색하고 있었 다. 그 때문에 청나라에서는 인조보다도 소현세자를 더 신뢰하였던 것 이다. 인조는 이같은 소현세자의 행동을 용서할 수 없었다. 소현세자 의 행동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뒤흔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 를 기만하는 행위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현세자의 독살 의문성

 

이 의문 사에 대해 학자 이식은 소현세자 묘지문에 '환궁 이후 계속해서 한증 과 열기가 있었는데 의원의 시술이 잘못되어 끝내 죽음에 이르렀 다'고 기록하고 있고, 인조실록에는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 을 남기고 있다.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에 집을 지어 단청을 하 고 포로된 조선 사람들을 모아 밭을 일구어 곡식을 쌓아놓고 진기 한 물건들은 사들여 세자가 머무는 관소가 시장과 같았다. 임금이 이를 듣고 좋아하지 않았다. 임금이 총애하는 궁 녀 조소용(귀인 조씨)이 예전부터 세자와 세자빈을 미워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임금 앞에서 세자빈이 임금을 저주 했다거나 몹쓸 말을 했다는 따위로 헐뜯었다. 세자는 환국한 지 얼마 안돼 병을 얻었고, 병을 얻은지 며칠 만에 죽 었다. 시체는 온몸이 새까맣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 검은 천으 로 죽은 세자의 얼굴 반을 덮어서 옆에서 모시 던 사람도 알아보지 못 했다. 낯빛은 중독된 사람과 같았는데 외부의 사람은 아무도 아는 이 가 없었다. 임금도 이를 알지 못했다. 다만 그 때 종실인 진원군 이세 완이, 그의 아내가 인조의 전비인 인렬왕후의 동생인 관계로 염습에 참 여해 그 광경을 보고 나와서 남에게 말한 것이다." 이 기록 을 근거로 할 때 소현세자는 인조에 의해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같은 추론의 증거는 사건에 대한 사 후 처리와 소현세자의 장례식에서 잘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왕이나 왕자에게 의술을 잘 못 사용하면 의관 이 국문을 당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인조는 의관의 추고에 대한 논의 자체를 못하게 했다. 그래서 대사헌 김광현이 인조의 주치의 이형익 이 연일 세자에게 침을 놓은 잘못을 따져야 한다고 말하자 인조는 이 형익을 옹호하면서 김광현에게 몹시 화를 냈고, 나중에 그가 세자빈 강씨의 조카사위라는 이유로 좌천시켜버린다. 또 소현세자의 장례식 도 일반 평민의 장례에 준하는 절차를 밟았을 뿐만 아니라 기일을 단 축시켜 초상을 치르게 하 였고, 참관 인원을 일부 종실로 제한하기도 했다. 게다가 인조는 묘지를 홍제동으로 하자는 신하들의 중론을 무시 하 고 멀리 고양의 효릉 뒤쪽에 마련하라는 명을 내렸다. 더욱이 인조 는 소현세자가 죽은 지 3개월 후에 갑자기 대신들을 불러들여 자신은 병이 깊으니 새로운 세자를 책봉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신 하들은 소현세자의 첫 아들 석철로 하여금 왕위를 잇는 것이 마땅하다 고 했으나 인조 는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세손은 마땅하지 않다고 주장 하며 왕실의 관례를 어기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았다. 이 후 소현세 자의 주변 세력과 세자빈 강씨의 친정 오빠들을 모두 귀양보내고 마지 막 남은 세자빈마저 후원 별장 에 유폐시켰다가 결국 사약을 내려 죽 인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두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 죽게 하 고, 나머지 셋째 아들은 귀양지에서 겨우 목숨을 연명하게 한다. 이렇 게 함으로써 인조는 소현세자를 비롯해 그의 가족과 주변 세력을 모 두 제거해버렸다. 인조의 이같은 일련의 행 동들은 그가 소현세자를 독살했음을 반증하고 있다.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 된 이유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와 함께 8년여를 심양에 기거했지만, 소현세자가 거기에서 서양 문물을 배우고 실리 외교를 주 창했던 것과는 달리 오 히려 대명 사대주의에 더 집착하여 반청 사상을 한껏 고조시킨 인물이 었다. 그의 이같은 반청 감정은 인조를 흡족하게 하는 일이었다. 인조 는 봉림대군의 반청 감정이 자신의 대명 사대사상과 일치한다고 보았 고 그 때문에 큰 아들을 죽이고 차남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던 것이다. 봉림대군은 1649년 5월 인조가 죽자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가 바로 북 벌론을 내세우며 국력 강화에 전념했던 조선 제17대 왕 효종이다. 

 

연도

재위

사  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1650

1년

3월, 청 사신 종실(宗室)의 여자를 선출

1654

5년

7월, 변급 등 청과 함께 러시아군 격파

1651

2년

12월, 인조 후궁 귀인 조씨 사사(賜死)

1658

9년

6월, 이순신의 묘갈(墓碣)을 세우도록 함

1652

3년

9월, 홍만종 <시화총림(詩話叢林> 편찬

1659

10년

5월, 왕 승하{1519- }

1653

4년

7월, 인조실록(仁祖實錄) 완성

10월,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상(服喪) 기년제(朞年制)로 정함.

 

 

8월, 제주에 만선(蠻船:하멜 일행) 표착

 

 

 

 

김자점의 역모사건

효종의 북벌 강화정책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영릉 근처에는 조선 제17대 효종과 인선왕후의 영릉(寧陵)이 있어서 여주를 찾아온 관광객은 두 왕릉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다. 세종대왕 영릉에서 불과 700여미터 떨어진 곳이다. 영릉은 세종대왕의 능에서 왼편, 즉 외청룡쪽으로 한 언덕 너머에 있다. 세종대왕릉을 먼저 다녀오는 사람들은 입장권을 지니고 있으면 그냥 들어갈 수 있으므로 또 다시 구입을 하지않아도 된다. 효종왕의 능 입구에 들어서면  재실로 이어지는 곧은 길이 나오며, 재실에서 홍살문까지의 길도 잘 정리되어 있다. 묘내수는 능을 감싸며, 유정하게 흘러 내려와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의 참도 중간을 가로질러 .금천교 밑으로 흐르고 있다.

          

 

정자각 뒤의 두 봉분을 바라보면 장자각 가까이 바로 우측에 보이는 왕비릉은 곡장이 없고 그 뒤 왕릉에는 곡장이 있다. 쌍릉이면서도 서로 좌우로 이웃한 다른 능과는 달리 한 언덕위에 앞뒤로 엇비스듬하게 배치를 한 것이 특이 하다고 하겠다. 영릉이 현재와 같은 모습을 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내력이 있다. 원래 효종의 능은 건원릉 서쪽 산록에 병풍석을 갖춘 왕릉으로 조영되었다. 그후 15년 후인 1673년(현종14)에 석물에 틈이 생겨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 하여 천릉 계획을 짜고 여주 영릉곁에 천봉하기로 했다. 그러나 영릉을 열고 보니 깨끗하여 의론이 분분했고 이것이 당론으로까지 번져 시끄럽게 되어 전일의 영릉도감의 책임자들이 면직되었다. 현재의 자리로 천장한 다음해 왕비 인선왕후의 능이 동원에 택정되어, 왕릉 앞에 비릉을 써서 현재와 같이 앞뒤로 나란히 쌍릉을 이루게 되었다 한다.

 

영릉(寧陵)이 자좌오향(정북에서 정남방향)의 언덕에 앞뒤로 놓여 쌍릉을 이룬 것은 풍수지리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두능을 좌우로 나란히 놓을 경우 생기가 왕성한 정혈을 비켜야 하기 때문에 두 능 모두 정혈에 두고자 한데서 연유한다. 광중에는 석실을 쓰지 않고 회격으로 하여 그 바닥에 처음으로 지회를 사용하여 조선능제상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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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효종 영릉재실(驪州 孝宗 寧陵齋室)

원래의 효종의 능은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병풍석을 갖춘 왕릉으로 조성되었으나 석물에 틈이 생겨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하여 현종 14년(1673)에 여주 영릉(英陵 조선 4대 세종과 소헌왕후) 동쪽으로 옮겼습니다. 그 다음해에 인선왕후의 능이 동원에 택정되어 왕릉앞에 왕비능을 써서 앞뒤로 나란히 쌍릉을 이루었습니다. 풍수지리에 의한 이런 쌍릉 형식은 조선왕릉 중 최초의 형태이고, 경종의 무덤인 의릉이 이런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무덤 앞에는 상석·문인석·망주석 등의 석물이 있으며, 두능의 상설 제도는 같습니다. 무덤 아래에는 정자각과 비각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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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대동법을 실시해 백성의 조세 부담을 덜어주엇고 화폐 개혁을 단행하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 농업 생산을 높이는데 기여했습니다. 무엇보다 북벌 정책을 수립하였으나 북벌의 꿈은 이루지 못하고 41세의 나이로 승하했습니다. 녕릉 입구의 여주 효종 영릉재실(驪州 孝宗 寧陵齋室)은 보물  제1532호로 제관(祭官)의 휴식, 제수장만 및 제기 보관 등의 제사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능의 부속건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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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조선 왕릉 재실중 원형을 가장 잘 간직한 것으로 특히 공간구성과 배치가 뛰어나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재실 공간 내에 있는 회양목은 천연기념물  제459호입니다. 원래 회양목은 작고 낮게 자라는 나무인데 재실 내에 크게 자란 회양목은 가치가 높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향나무 느티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재실의 역사성을 한층 높여주고 있습니다.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 張氏, 1618-1674)

 

인선왕후 장씨의 능. 뒤로 보이는 능이 효종왕릉이다.

 

인선왕후 장씨(張氏)는 우의정(右議政)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의 딸로 광해군 10(1618)에 태어나 14세에 봉림대군과 가례를 올렸고,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 심양에 8년간 있으면서 현종(顯宗)을 생산하고 내조를 하다가 효종 즉위와 함께 왕비에 책봉되었습니다. 효종 승하후 왕대비로 지내다가 57세의 나이로 현종(顯宗) 15(1674)에 승하했습니다. 슬하에 현종과 다섯 공주를 두었습니다.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 517, 1392 - 1910 ]

 

   

 

 

() 13()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익종(翼宗) 수릉(綏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융릉(隆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영릉(永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장릉(章陵 : 사적 제202)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경릉(敬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 2()

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

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유릉(裕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홍릉(洪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

왕릉 35

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예릉(睿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경릉(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인릉(仁陵 : 사적 제194)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건릉(健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홍릉(弘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원릉(元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혜릉(惠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의릉(懿陵 : 사적 제204)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익릉(翼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명릉(明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숭릉(崇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영릉(寧陵 : 사적 제195)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휘릉(徽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장릉(長陵 : 사적 제203)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성묘(成墓 : 사적 제365)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목릉(穆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강릉(康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효릉(孝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희릉(禧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온릉(溫陵 : 사적 제210)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정릉(靖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9대 성종(第九代 成宗) 회묘(懷墓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순릉(順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선릉(宣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

8대 예종(第八代 睿宗) 공릉(恭陵 : 사적 제205)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8대 예종(第八代 睿宗) 창릉(昌陵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7대 세조(第七代 世祖) 광릉(光陵 : 사적 제197)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사릉(思陵 : 사적 제209)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장릉(莊陵 : 사적 제196)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5대 문종(第五代 文宗) 현릉(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4대 세종(第四代 世宗)

3대 태종(第三代 太宗)

2대 정종(第二代 定宗)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정릉(貞陵 : 사적 제208) : 서울 성북구 정릉2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1대 태조(第一代 太祖)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목조-덕릉 효공왕후 이씨-안릉

익조-지릉 정숙왕후 최씨-숙릉 , 손씨

도조-의릉 경순왕후 박씨-순릉, 조씨

환조-정릉 의혜왕후 최씨-화릉, 이씨, 정빈 김씨

태조-건원릉 신의왕후 한씨-제릉 신덕왕후 강씨-정릉

정종-후릉 정안왕후 김씨-후릉

태종-헌릉 원경왕후 민씨-헌릉

세종-영릉 소헌왕후 심씨-영릉

문종-현릉 현덕왕후 권씨-현릉

단종-장릉 정순왕후 송씨-사릉

세조-광릉 정희왕후 윤씨-광릉

예종-창릉 장순왕후 한씨-공릉 안순왕후 한씨-창릉

성종-선릉 공혜왕후 한씨-순릉 폐비 윤씨-회묘 정현왕후 윤씨-선릉

연산군-연산군묘 폐비 신씨-연산군묘

중종-정릉 단경왕후 신씨-온릉 장경왕후 윤씨-희릉 문정왕후 윤씨-태릉

인종-효릉 인성왕후 박씨-효릉

명종-강릉 인순왕후 심씨-강릉

선조-목릉 의인왕후 박씨-목릉 인목왕후 김씨-목릉

광해군-광해군묘 폐비유씨-광해군묘

인조-장릉 인렬왕후 한씨-장릉 장렬왕후 조씨-휘릉

효종-영릉 인선왕후 장씨-영릉

현종-숭릉 명성왕후 김씨-숭릉

숙종-명릉 인경왕후 김씨-익릉 인현왕후 민씨-명릉 인원왕후 김씨-명릉

경종-의릉 단의왕후 심씨-혜릉 선의왕후 어씨-의릉

영조-원릉 정성왕후 서씨-홍릉 정순왕후 김씨-원릉

정조-건릉 효의왕후 김씨-건릉

순조-인릉 순원왕후 김씨-인릉

헌종-경릉 효현왕후 김씨-경릉 효정왕후 홍씨-경릉

철종-예릉 철인왕후 김씨-예릉

고종-홍릉 명성황후 민씨-홍릉

순종-유릉 순명효황후 민씨-유릉 순정효황후 윤씨-유릉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