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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朝鮮王陵] 능(陵) - 6 (2) 제18대 현종 (顯宗) _ 숭릉 崇陵

草霧 2013. 8. 9. 17:37

 

 

조선왕릉[朝鮮王陵] 능(陵) - 6

 

 

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 - 6

 

 

 

 (2) 제18대 현종 (顯宗, 1641-1674) _ 숭릉 崇陵

 

 

파일:DSCF4465.JPG

 

 

왕릉은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들의 무덤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왕릉은 42(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40, 14, 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3, 4, 5)입니다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폐위(廢位)된 묘() 2()

황제릉(皇帝陵) 2()

왕릉 35

 

 

 

 

 

1. 추존이라는 미명으로, 역사세우기

 

추존(追尊)함길도 8

 

2. 왕조, 문을 열다

 

1대 태조 (太祖, 1335-1408) _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 정릉 貞陵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2대 정종 (定宗, 1357-1419) _ 후릉 厚陵

 

3대 태종 (太宗, 1367-1422) _ 헌릉 獻陵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4대 세종 (世宗, 1397-1450) _ 영릉 英陵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5대 문종 (文宗, 1414-1452) _ 현릉 顯陵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6대 단종 (端宗, 1441-1457) _ 장릉莊陵, 사릉思陵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7대 세조 (世祖, 1417-1468) _ 광릉 光陵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추존(追尊)왕 덕종 (德宗, 1438-1457) _ 경릉 敬陵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8대 예종 (睿宗, 1450-1469) _ 창릉昌陵, 공릉恭陵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9대 성종 (成宗, 1457-1494) _ 선릉宣陵, 순릉順陵, 회묘 懷墓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3. 왕조, 산을 넘다

 

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_ 연산군묘 燕山君墓

 

11대 중종(中宗, 1488-1544) _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 泰陵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12대 인종 (仁宗, 1515-1545) _ 효릉 孝陵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13대 명종(明宗, 1534-1567) _ 강릉 康陵, 순창원 順昌園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14대 선조 (宣祖, 1552-1608) _ 목릉 穆陵, 성묘 成墓, 순강원 順康園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4. 조선, 또 다시 위기를 맞다

 

15대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_ 광해군묘 光海君墓

 

추존(追尊)왕 원종 (元宗, 1580-1619) _ 장릉 章陵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5. 왕조, 반석을 다지다

 

16대 인조 (仁祖, 1595-1649) _ 장릉 長陵, 휘릉 徽陵, 소경원 昭慶園, 영회원 永懷園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6. 조선, 당쟁에 휩싸이다

 

17대 효종 (孝宗, 1619-1659) _ 영릉 寧陵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18대 현종 (顯宗, 1641-1674) _ 숭릉 崇陵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7. 환국정치로 왕권을 다지다

 

19대 숙종 (肅宗, 1661-1720) _ 명릉明陵, 익릉 翼陵, 대빈묘大嬪墓, 소령원昭寧園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20대 경종 (景宗, 1688-1724) _ 의릉懿陵, 혜릉惠陵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8. 조선, 르네상스를 맞다

 

21대 영조 (英祖, 1694-1776) _ 원릉元陵, 홍릉弘陵, 수경원綏慶園, 수길원 綏吉園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추존(追尊)왕 진종(眞宗) _ 영릉永陵

 

추존(追尊)왕 장조(사도세자 莊祖) _ 융릉隆陵, 의령원 懿寧園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22대 정조(正祖, 1752-1800) _ 건릉健陵, 휘경원徽慶園, 효창원 孝昌園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9. 조선, 세도정치에 휘둘리다

 

23대 순조 (純祖, 1790-1834) _ 인릉仁陵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추존(追尊)왕 익종 (翼宗, 문조 文祖) _ 수릉綏陵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24대 헌종 (憲宗, 1827-1849) _ 경릉景陵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25대 철종 (哲宗, 1831-1863) _ 예릉睿陵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10. 오백 년 왕조, 문을 닫다

 

26대 고종황제 (高宗, 1852-1919) _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 흥원 興園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27대 순종황제 (純宗, 1874-1926) _ 유릉裕陵, 영원英園, 숭인원 崇仁園, 회인원 懷仁園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2) 제18대 현종 (顯宗, 1641-1674) _ 숭릉 崇陵

 

 

 

극심한 당쟁에 휘말려 무력한 임금으로 추락하니

 

숭릉 崇陵

 

파일:DSCF4465.JPG 

 

현종(顯宗, 이연, 1641-1674, 재위 15), 명성왕후 김씨 (明聖王后 金氏, 1642-1683),

1674, 경기 구리 193, 동구릉(東九陵)

 

18대 현종(顯宗) 숭릉 큰이미지

 

 

18대 현종(顯宗) 숭릉 첫번째 작은이미지18대 현종(顯宗) 숭릉 두번째 작은이미지18대 현종(顯宗) 숭릉 세번째 작은이미지

 

 

 

동구릉 목록 顯宗{이연; 1641-1674, 재위 15}과 비()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金氏; 1642-1683)의 숭릉은 위치가 동구릉의 가장 남쪽으로 현재 경종(景宗) 비 단의왕후(端懿王后)의 혜릉(惠陵)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왕릉제도에 따라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조성되었습니다. 두 봉분이 병풍석(屛風石) 없이 난간석(欄干石)으로 연결되어 있고, 각 봉분 앞에는 각각 상석(床石)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능원 아래 정자각(丁字閣)의 정면 지붕이 일반적인 여타 능의 지붕처럼 지붕의 양 옆면이 막 잘려진 '맞배지붕' 양식이 아니라, 위 절반은 박공지붕{건물의 두 옆쪽에 ''꼴로 붙여 놓은 두꺼운 널빤지인 박공널을 대어 추녀가 없이 용마루까지 올라간 지붕}꼴이고 아래 절반은 네모꼴로 된 '합각지붕{혹은 팔작지붕}'의 양식으로 만들어져 있는 점입니다.

 

왕과 왕비를 하나의 곡장 안에 모셔 봉분이 나란히 2기로 조성된 능을 쌍릉이라고 한다. 높지 않은 언덕 위에 쌍릉으로 조영된 숭릉은 왕릉과 왕비릉 모두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으로 연결되었고, 능침 앞에 혼유석이 하나씩 놓여 있다. 곡장 안의 석양과 석호 각 2쌍과 망주석 1쌍이 초계를 이루었고, 중계에는 장명등, 문석인 1쌍과 석마 1쌍이 배치되었으며, 하계에는 무석인 1쌍과 석마 1쌍이 배치되었다.

 

봉분 앞의 장명등과 망주석에는 인조의 장릉처럼 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망주석 위쪽에 세호라고 불리우는 작은 동물 조각이 뚜렷하게 조각되어 눈길을 끈다. 문석인은 미소를 머금고 온화한 모습이고 무석인은 입을 굳게 다물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 절도 있는 모습이다.

 

현종은 1674(숙종 즉위) 81834세로 창덕궁 대조전 양심각에서 승하하였다. 그 해 8도의 승군 2,650명을 징발하여 숭릉을 조영하였다. 1211일에 발인하여, 13일 건원릉 남서쪽 별도의 산줄기에 봉릉하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684(숙종 10)에는 현종의 비 명성왕후 청풍 김씨의 능을 조영하였다. 명성왕후는 1683(숙종 9) 125일 창경궁 저승전 서별당에서 42세에 승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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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일에 소렴하고, 129일에 대렴하였으며, 168443일에 발인하여 45일에 봉릉하였다. 숭릉의 혈을 파기 위해 겉흙을 걷어냈을 때 부도를 세우려 했던 흔적이 나왔으나, 깊이가 3척밖에 되지 않아 지맥을 손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한 광중 밖이기 때문에 그대로 진행했다.

 

이역(異域) 땅 청()나라 심양(瀋陽)에서 볼모생활을 하던 봉림대군(鳳林大君; 孝宗)의 아들로 태어난 현종(顯宗)은 귀국{1645} 후에 아버지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자 세자(世子)에 책봉되었고, 1659년에 효종을 이어 조선조 18대 왕위에 등극(登極)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현종은 아버지 효종의 유업(遺業)인 북벌(北伐) 계획을 성취하려 했으나 역시 이루지 못하고 대명숭향(大明崇向)의 경향만 현저하게 되었고, 34{1674}의 젊은 나이에 15년의 왕위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217-14국내 정세에서도 즉위 초부터 조대비(趙大妃; 인조(仁祖)의 계비(繼妃) 자의대비(慈懿大妃), 장렬왕후 조씨(莊烈王后趙氏))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인해 남인(南人)과 서인(西人)2차에 걸친 당쟁(黨爭)의 결과 많은 유신(儒臣)들을 희생시키게 됩니다. 재위 기간의 내치(內治)로는 호남지방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했고, 1668년에 동철(銅鐵)활자 10만여자를 주조했으며, 송시열(宋時烈)의 건의로 동성통혼(同姓通婚)을 금지시켰습니다.

 

아울러 현종의 뒤를 이었던 숙종대(肅宗代)에 편찬된 <현종실록(顯宗實錄)>은 남인(南人) 집권기의 1차 실록을 1683년 서인(西人) 집권기 때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으로 다시 편찬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불안한 당시의 정치 상황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료(史料)이기도 합니다.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는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딸로 태어나 1651{효종 2}에 세자빈에 책봉되어 궁궐로 들어옵니다. 슬하에 숙종(肅宗)과 세 명의 공주(公主; 명선(明善), 명혜(明惠), 명안(明安))을 두었는데, 42{1683년 숙종 9)의 나이에 창경궁에서 승하했습니다

 

    숭릉20100622-6.JPG

 

현종(顯宗)은 1637년(인조 15) 1월에 일어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던 봉림대군(鳳林大君, 孝宗)과 장씨(張氏, 仁宣王后) 사이에서 1641년(인조 19) 2월 4일 청나라 심양(瀋陽)에서 태어났다. 네 살이 되던 해인 1644년에 아버지 봉림대군 보다 먼저 본국으로 돌아왔다. 1645년(인조 23) 봄에는 큰아버지인 소현세자가 돌아왔으나 갑자기 승하하자 봉림대군이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후에 현종은 왕세손으로 책봉되었다. 봉림대군이 조선 17대왕으로 즉위하자 현종은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효종의 뒤를 이어 1659년 창덕궁(昌德宮)에서 18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 하자마자 아버지가 차자(次子)라는 이유로 인조계비 장열왕후(莊烈王后)가 입어야 할 복제기간에 대한 예송(禮訟) 문제가 제기되어 인선왕후 장례 때까지도 논란이 이어졌다가 많은 사람의 희생을 가져온 뒤에 매듭 되었다. 재위기간 대부분을 당파 싸움만 지켜보다가 1674년 8월 18일 창덕궁 양심각(養心閣)에서 34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장지(葬地)를 찾아 나선 산릉도감제조 민정중(閔鼎重)이 추천한 후보지 다섯 곳 중에서 숙종(肅宗)은 건원릉(健元陵) 안의 혈처를 선호하였다. 허적(許積)의 요청으로 후보지를 다시 살펴보도록 하였으나, 결국은 숙종과 현종 비 명성왕후(明聖王后)의 뜻이 반영되어 건원릉 안으로 장지를 결정하였다.

 

숭릉의 봄
숭릉의 봄
동구릉 숭릉 설경
동구릉 숭릉 설경
조개나물
조개나물

 

 

숭릉 (2007. 02)

숭릉 (2007. 02)

 

휘릉과 숭릉~

휘릉과 숭릉~

숭릉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

숭릉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

숭릉 연못

숭릉 연못

숭릉가는 길

숭릉가는 길

 

장지는 명성왕후 사후에 쌍릉(雙陵)으로 조성될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하되, 현종의 무덤을 정혈(正穴)에 쓰고 남은 공간이 부족하면 보토(補土)를 하여 조성을 하도록 하였다. 또 명성왕후는 고갈된 국고와 민력(民力)을 염려하여 구 영릉(寧陵)에 묻힌 석물(石物)을 새 능(陵)에 쓰도록 하였다. 구 영릉이란 1659년에 조성되었던 효종의 무덤(현재 영조의 무덤인 원릉(元陵)의 자리)이 채 1년도 되기 전에 지대석(地臺石)을 비롯한 석물에 틈이 생기기 시작하여 여러 차례 보수를 하였지만 문제가 계속 반복되자 영림부령 이익수(李翼秀)가 이장(移葬)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상소문을 올려 1673년(현종 14)에 현재의 위치인 여주로 이장을 하였다. 이 때 석물은 옮겨가지 않고 주변에 묻어 두었는데 이 석물을 현종의 무덤에 재활용하도록 한 것이다. 또 숙종은 장지에 도착된 현종의 관(棺)을 장사를 지낼 때 까지 정자각(丁字閣)에 모셔두고, 관을 임시로 보관하는 영악전(靈幄殿)을 짓지 못하도록 하였다. 석물의 재활용과 정자각을 임시 영악전으로 사용하도록 하는 파격적인 장례절차를 거쳐 그 해 12월 13일 건원릉 우측 능선 끝 부근에 동향(酉坐卯向)으로 장사를 지내고, 능호를 숭릉(崇陵)이라 하였다.

 

 

 

명성왕후는 영돈녕부사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과 은진송씨(恩津宋氏) 사이에서 1642년(인조 20) 5월 17일에 태어났다. 송부인(宋夫人)이 어떤 새가 옥(玉)을 물고 날아와 침방(寢房)을 지나다가 떨어뜨리는 꿈을 꾼 다음 날 명성왕후가 출생을 하자 어진 사람이 될 조짐이라고 좋아했는데, 1651년(효종 2)에 세자빈으로 1659년에 왕비로 책봉되는 좋은 일이 일어났다. ‘초상(初喪)에서부터 발인(發靷)하여 현궁(玄宮)에 관을 내리고 반우(返虞, 장사를 지낸 후에 신주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하는 데 이르기까지 사용되는 여러 기구(器具)중 옛 것을 그 대로 쓸 만한 것이 있다면 다시 만들지 말고 재활용 하도록 하라.’는 유서를 남기고 1683년(숙종 9) 12월 5일 창경궁 저승전(儲承殿)에서 42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현종을 장사 지낼 때 그 왼쪽을 비워 두었는데 그 곳에 다음 해 4월 5일에 장사를 지냈다.

 

 

 

숭릉은 동구릉으로 진입을 하다보면 왼쪽 끝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선조의 무덤인 목릉(穆陵)과 같이 상당히 외진 곳에 위치한 연유로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못하는 비공개 능이다. 정자각이 팔작지붕으로 만들어져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고, 현종의 무덤에 사용된 석물이 효종의 옛 무덤인 구 영릉의 석물이었다는 것을 알고 답사를 하면 더욱 흥미롭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예종논쟁으로 지쳐버린 현종

 

숭릉 -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쌍릉

 

현종 (顯宗, 이연, 1641-1674, 재위 15)

 

현종은 효종과 인선왕후의 아들로, 효종이 세자의 몸으로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1641(인조 19) 24일 그곳에서 태어났다. 조선 역대 왕 중에 유일하게 외국에서 출생한 왕이다. 1649(인조 27) 소현세자가 급작스럽게 승하하자 효종이 세자에 책봉되는 동시에 현종도 함께 세손을 책봉되었고, 그 해 5월에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왕위를 잇자 세자 자리에 올랐다.

 

1651(효종 2) 11세의 나이로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딸과 가례를 올렸고, 1659(현종 즉위) 5월 효종이 승하하자 19세의 나이로 창덕궁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 현종은 함경도 산악지대를 개척하고,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된 북벌정책을 중단시켰으며, 호남 지방에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동철활자 10만 자를 주조시켰으며, 천문 관측과 역법 연구를 위하여 혼천의를 다시 제작하게 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효종의 상에 자의대비 조씨가 어떠한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에 대한 서인과 남인의 계속된 논쟁으로 말미암아 국력이 쇠퇴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현종은 1674(현종 15) 81834세의 나이로 창덕궁에서 승하했다. 재위 기간은 15년이었다.

 

현종은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하고 사려가 깊었다. 청나라 심양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보다 먼저 본국으로 먼저 돌아왔는데,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볼 때마다 하루 빨리 아버지인 효종이 돌아오기를 기도하였다. 새로 맛있는 음식을 대할 때, 효종이 있는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이면 바로 보내게 하고 나서야 맛을 볼 정도로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컸다고 한다.

어린 현종이 어진 인정을 베푸는 대상은 부모 뿐만이 아니었다. 한번은 그의 할아버지인 인조가 방물(方物)을 받다가 표범 가죽의 품질이 나빠서 되돌려 보내려고 하였다. 이 때 현종의 나이 7세였는데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표범 한 마리를 잡으려면 아마도 사람이 많이 다칠 듯합니다.”하니, 인조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돌려보내지 말라고 명하였다.

 

하루는 궁중에서 나오다가 추위에 얼고 굶주린 궐문 밖 군졸을 보고는, 탄식하며 옷과 식량을 제대할 때까지 제공해주라고 명령하고서야 자리를 떴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어린 현종의 이러한 효성과 자애로움은 할아버지인 인조에게 큰 신임을 안겨주었다.

 

숭릉으로 가는 숲길과 정자각  

숭릉으로 가는 숲길과 정자각

 

난데없는 팔작 정자각

장명등은 왕릉 풍수인테리어다

장풍

망주석의 세호

현종 이야기

세호의 정체는?

뜻밖의 반응

숙종의 왕비들

세호하행 시작

장희빈 사건

세호풍수

()과 조()의 실상

왕이 예론에 병들다

예론논쟁 한가운데 선 여인

살인현행범을 풀어준 조선의 법

온양 행로가 다시 열리다

숭릉 치적 쌓을 틈도 없이 예송논쟁에 시달린 왕 노릇 15

 

연도

재위

사  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1660

1년

3월, 남인 서인간의 예론(禮論)이 벌어짐

1667

8년

1월, 왕세자{숙종} 책봉

5월, 왕 기년{만1년} 복제를 정함

1668

9년

8월, 동철(銅鐵)로 실록자(實錄字) 주조함

1661

2년

7월, 왕비 김씨 책봉. <효종실록> 편찬

1669

10년

1월, 송시열 건의로 동성결혼 금함

1663

4년

3월, 전국적으로 유행성 열병 만연

1670

11년

10월, 고려 태조릉 개수하고 수직군 둠

1665

6년

4월, 왕 온양온천(溫陽溫泉) 감

1674

15년

2월, 왕대비{효종 비} 장씨 승하{1618 - }

1666

7년

3월, 경상도 유생 송시열 복제반대 상소

8월, 왕 승하{1641 - }. 왕세자 즉위

 

남인과 서인의 예론정쟁

효종이 죽자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장렬왕후 조씨)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 는가 하는 문제가 정쟁화되었다. 이무렵 조선 조정은 인조반정으로 정 권을 장악한 서인 세력과 인조의 중립에 정책으로 기용된 남인 세력으 로 양분 되어 있었다. 인조, 효종 대에 남인은 주로 영남학파의 주리 론을 주장하고 서인은 기호학파의 주기론을 주장하는 학 문적인 대립 을 벌였으나, 현종 대에 와서는 본격적인 정치 논쟁을 일삼곤 했다. 예론 역시 처음에는 학문적인 대립 에서 시작되었지만 나중에는 정쟁 으로 확대된 사건이었다. 당시 조선의 일반 사회에서는 주자의 '가 례'에 의한 사례의 준칙이 지켜지고 있었지만 왕가에서는 성종 때 제 도화 된 '오례의'를 따르고 있었다.

 

 

 

 

그런 데 '오례의'에는 효종과 자의대비의 관계와 같은 사례가 없었다. 효종 인 인조의 맏아들로 왕위에 있었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가 차남 이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의 상중에 자의대비가 맏아들에게 행하 는 예로써 3년상을 치렀기 때문에 다시 효종의 상을 당하여서는 몇 년 상을 해야하는가가 문제가 되었다. 이 문제에 직면하자 서인의 송 시열과 송준길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당연히 기년상(1년상)이어야 한다 고 주장했다. 하지만 남인의 허목과 윤휴는 효종이 비록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남과 다름없기에 3년상이어야 한다고 반론 을 제기했다. 서인과 남인의 이 복상 논쟁은 극단적인 감정 싸움으로 치달았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정쟁으로 확대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정쟁은 지방으로 확대되어 재야 선비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쟁점으 로 부각되었다. 결국 효종의 상중에 일어난 이 논쟁에서 서인의 기년 상이 채택됨으로써 남인의 기세는 크게 꺾였다. 그럼에도 남인 의 반 발이 심상치 않자 1666년 현종은 기년상을 확정지으며 더 이상 그 문 제를 거론하지 말 것을 엄명했고, 만약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자 는 엄벌에 처하겠다는 포고문을 내렸다.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 숭릉의 문인석과 무인석  

[왼쪽/오른쪽]현종과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 / 숭릉의 문인석과 무인석

 

그러나 복상 문제는 1673년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자 다시 쟁점으로 부각되었 다. 이번에도 서인측은 효종이 차남이 라는 점을 강조하며 대공설(9개 월)을 내세웠고, 남인측은 그녀가 비록 자의대비의 둘째 며느리이긴 하나 중전을 지 냈으므로 큰 며느리나 다름없다면서 기년설(1년)을 내 세웠다. 현종은 이 때 장인 김우명과 그의 조카 김석주의 의견에 따 라 남인측의 기년설을 받아들여 자의대비로 하여금 기년 복상을 하도 록 했다. 이 때문에 서인은 실각하였고 현종 초년에 벌어진 예론도 수 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1674년 8월 현종이 죽자 송시열은 다 시 예론을 거론하며 자신의 종래 주장이 옳았음을 피력하다가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되었고, 이 후 서인 세력이 정계에서 밀려나고 남인 이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이 예론 정쟁의 파 장은 '현종실록'에까지 영향을 미쳐 숙종 대의 경신대출척(1680년)이후 다시 집권한 서인에 의해 실록이 개수되는 일이 벌어지기까지 한다.

 

한편 이 시기에 제주도에 표류해 압류되어 있 던 하멜 등 8명의 네덜란드인이 전라도 좌수영을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가 14년간의 억류 생활을 서술한 '하멜 표류기'와 부록인 '조선국 기'를 발간해 조선이 유럽에 알려지는 계기가되기도 했다. 

 

 

 

 

 

오만한 西人에 분노한 임금, 정권 바꾸려다 의문의 죽음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에 있는 효종 부부의 영릉(寧陵).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죽음은 1, 2차 예송논쟁을 각각 촉발했다.

1차 예송논쟁에서 승리한 서인은 2차 예송논쟁으로 몰락했다

 

국가 통치이념이 현실에서 벗어나 사변(思辨)으로 흐르면 이미 사회 통합과 선도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예송논쟁은 일본인 학자들의 주장처럼 무의미한 논쟁은 아니었으나 경신 대기근을 겪은 나라가 걸어야 할 길은 아니었다.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식량이었으나 집권 서인은 겉과 속이 다른 예론에 집착했다. 예론은 자신들의 당파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외피에 불과했다.

三宗의 혈맥 현종,  34세에 요절하다
현종은 재위 기간 내내 대기근과 왕권 약화에 시달렸다. 조선의 약한 왕권은 청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대기근에 시달리던 현종 12년(1671:신해년) 2월 북경에 갔던 동지사 복선군(福善君) 이남(李<67DF>)은 “청나라 황제가 ‘너희 나라 백성이 빈궁하여 살아갈 길이 없이 다 굶어 죽게 되었는데 이것은 신하가 강하기 때문(臣强)이라고 한다. 돌아가 이 말을 국왕에게 전하라’고 말했다(『현종실록』 12년 2월 20일)”고 산해관(山海關)에서 보고했다. 현종의 사촌인 복선군이 “어찌 신하가 강해 백성이 이렇게 굶주릴 이치가 있겠습니까?”라고 반박하자 강희제(康熙帝)는 “정사(正使)가 국왕의 가까운 친척이므로 말한 것이다”라고 답했다. 청에서 보기에 국왕이 승하했는데 신하들이 3년복이니 1년복이니 논쟁하는 것 자체가 이상현상이었다.

 

그런데 기해년(현종 즉위년:1659)의 1차 예송논쟁 15년 후인 갑인년(현종 15년:1674) 2월 23일 왕대비 인선왕후 장씨가 승하하면서 이상현상이 재발할 조짐이 보였다. 기해 예송 때 송시열을 필두로 한 서인은 효종을 둘째 아들로 보아 기년복(1년복)으로 의정했으나 겉으로는 ‘장자·차자 구별 없이 기년복으로 규정되어 있는 국제(國制:경국대전)를 쓴 것’이라고 내세웠다. 그래서 현종은 국제에 따라 기년복으로 의정한 것으로 믿었다. 『경국대전』 ‘오복(五服)’조는 아들이 먼저 죽었을 때 장·차자의 구별 없이 부모는 1년복을 입게 되어 있었으나 맏며느리인 장자처(長子妻)의 경우는 1년, 기타 며느리인 중자처(衆子妻)는 대공복(大功服:9개월복)을 입는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인선왕후 장씨가 승하했을 당초 예조판서 조형(趙珩) 등은 기년복으로 의정해 올렸다.

 


숭릉은 동구릉 제일 왼편 깊숙한 곳에 있는 비공개릉이다


그러나 2월 27일에는 기년복이 잘못이라며 대공복으로 바꾸겠다고 수정했다. 남인이 편찬한 『현종실록』은 이에 대해 “송시열의 당(黨) 사람들이 송시열의 의논과 다른 것을 미워해 옥당(玉堂:홍문관)에 편지를 보내니 예조판서 조형 등이 시의(時議)에 죄를 얻을까 두려워 대공복으로 고쳤다”고 적고 있다. 대공복은 왕비를 기타 며느리로 대접하는 것이었으므로 문제가 있었으나 1차 예송 때 윤선도가 삼수로 귀양 간 전례가 있었으므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구 유생 도신징(都愼徵)이 칠순의 노구를 끌고 서울로 올라와 대궐 문 앞에 꿇어앉아 상소문을 봉입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승정원은 “예송은 금지되어 있다”면서 반 달 이상 상소문 자체를 받아주지 않았다. 상소문은 현종 15년(1674) 7월 6일 현종의 손에 들어가는데 조부 김육(金堉)의 장례 문제로 송시열과 싸운 좌부승지 김석주(金錫胄)가 전달했을 것이다.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숭릉만 팔작지붕으로 조성된 속사정은 무엇일까 ?

 

사대모화, 성리학이 절정을 이루던 시대이니 전래의 단아하고 검약한 이미지의 맛배지붕이 아닌 중국양식을 흉내낸 것이다.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숭릉의 정자각만 팔작지붕으로 조성되어 화려한 정자각으로 손꼽힌다.

 

 

 

 

 

“대왕대비의 복제를 처음에는 기년복으로 정했다가 대공복으로 고친 것은 어떤 전례를 따른 것입니까?…기해년 국상 때 대왕대비는 ‘국전(國典:경국대전)에 따라 기년복으로 거행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의 대공복은 국제 밖에서 나온 것이니 왜 이렇게 전후가 다르단 말입니까.(『현종실록』 15년 7월 6일)”

기해년 국상 때 근거로 썼던 경국대전에 따르면 대비의 복제는 기년복이어야 하는데 왜 대공복이냐는 항의였다. 도신징은 “안으로는 울분을 품고도 겉으로는 서로 경계하고 조심하면서 아직 한 사람도 전하를 위해 입을 열어 말하는 자가 없으니 어찌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탄했다. 실제로 도신징으로서는 목숨을 건 상소였다. 도신징의 상소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현종은 일주일 후인 7월 13일 대신들을 불렀다. 그 사이 자신의 견해를 정립했던 것이다.

합각지붕 정자각 숭릉의 정자각   중종비 단경왕후 온릉의 정자각 맞배지붕 정자각


현종은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에게 “15년 전의 일을 다 기억은 못 하지만 고례(古禮:고대 중국의 예)가 아닌 국제를 써 1년복으로 정했다고 기억한다”면서 “오늘의 대공복 또한 국제에 따라 정한 것인가?”라고 물었다. 대답이 궁색해진 송시열의 제자 김수흥은 고례와 국제를 뒤섞어 설명했다. 그러자 현종은 “이번 국상에 고례를 쓰면 대왕대비의 복제는 무엇이 되겠는가?”라고 물었고 김수흥은 ‘대공복’이라고 대답했다. 현종은 “기해년에는 시왕의 제도(時王之制:조선의 제도)를 사용하고 지금은 고례를 사용하니 어찌 앞뒤가 서로 다른가?”라고 재차 물었다. 갑작스러운 부왕의 급서에 허둥대던 18세 청년이 아니었다. 현종은 다시 “이번 복제를 국제대로 하면 어떻게 되는가?”라고 묻자 김수흥은 “기년복”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현종은 “그렇다면 오늘의 복제는 국제와 어떤 관계가 있단 말인가? 해괴한 일이다”라고 되물었다. 김수흥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기해년에 고례로 결정했으므로 다투는 사람이 저렇게 많았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스스로 함정에 빠진 격이었다. 현종이 “고례대로 한다면 장자의 복은 어떠한가?”라고 묻자 김수흥은 “참최 3년복입니다”라고 답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현종은 도신징의 상소를 김수흥에게 건네주면서 “기해년에 과연 차장자(둘째)로 의정한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그때 좌부승지 김석주가 “송시열의 수의(收議)에 ‘효종대왕은 인조대왕의 서자로 보아도 괜찮다’고 하였습니다”라고 송시열이 효종을 둘째로 봤다고 보고했다.



호조판서 민유중이 의논할 시간을 달라고 건의하자 현종은 ‘반드시 오늘 안에 의논해 보고하라’고 재촉했다. 시간을 주면 송시열과 논의해 당론을 정한 다음 집단적으로 대처할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영의정 김수흥, 판중추부사 김수항(金壽恒), 이조판서 홍처량(洪處亮) 등의 대신들이 긴급히 회동한 후 계사를 올렸는데 기해년에 기년복으로 정한 근거만 장황하게 써 올렸다. 현종은 승전색(承傳色:왕명을 전하는 내시)을 시켜 “대왕대비께서 기년복을 입어야 하는지 대공복을 입어야 하는지 지적하여 결말지은 곳이 없다”고 지적하며 다시 의정하라고 명했다. 이때 대신들이 “국제에 따라 기년복을 입으셔야 합니다”라고 답했으면 예조의 몇몇 신하가 처벌받는 것으로 끝났을 문제였다. 현종이 여러 차례 ‘국제에 따르면 대왕대비의 복은 어떻게 되는가?’라고 물은 이유는 ‘기년복’이란 대답을 원한 것이었다.

그러나 서인에게 효종은 둘째 아들이었고, 인선왕후도 중자처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것이 당론이었으므로 김수흥은 ‘지금 예조가 대공복으로 의정해 올린 것이 맞는 것 같다’고 고수했다. 몇 차례나 기회를 주었음에도 서인이 계속 대공복을 고집하자 드디어 현종의 분노가 폭발했다.

“이 계사를 보고 나도 모르게 무상한 점에 대해 매우 놀랐다…경들은 모두 선왕의 은혜를 입은 자들인데…임금에게 이렇게 박하게 하면서 어느 곳(何地)에 후하게 하려는 것인가.(『현종실록』 15년 7월 15일)”


우암() 송시열 [宋時烈, 1607~1689] 
‘어느 곳’은 바로 송시열을 뜻하는 것이었다. 현종은 이것이 왕실과 서인 사대부의 싸움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서인 사대부는 왕실의 특수성을 부인하고 자신들과 같은 계급으로 보는 것이었다. 현종은 “당초 국전에 따라 정해진 자의대비 복제를 기년복으로 실행하라”고 단안을 내리고 예조판서 조형을 비롯한 예조 관료들을 투옥했다. 현종은 7월 16일에는 영의정 김수흥에 대해 “선왕의 은혜를 잊고 다른 의논에 빌붙은 죄를 결코 다스리지 아니할 수 없다”면서 춘천에 부처(付處)했다. ‘다른 의논’이란 물론 송시열의 설을 뜻한다. 그러자 승정원과 홍문관이 일제히 김수흥 구하기에 나섰다.

“내 심기가 매우 불편한데 대면을 청한 것은 무슨 일 때문인가. 대신을 위해서가 아닌가. 군신의 의리가 매우 엄한 것인데 너희는 전혀 생각도 안 한다는 말이냐?(『현종실록』 15년 7월 16일)”

승정원과 홍문관의 김수흥 구하기가 불발로 끝나자 이번에는 사헌부가 나섰다. 현종은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자를 살펴 탄핵하는 것이 대간(臺諫:사헌부)의 직책인데 오히려 남을 두둔하며 구하기에 급급했다’며 삭탈관작하고 도성에서 내쫓았다. 현종은 끝까지 효종을 둘째 아들로 취급하는 서인을 갈아치우기로 결심했다. 남인 장선징(張善<7013>)을 예조판서, 권대운(權大運)을 판의금, 이하진(李夏鎭)을 사간으로 삼고 7월 26일에는 남인 허적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그런데 정권을 남인으로 갈아치우기 시작한 직후부터 갑자기 현종은 뚜렷한 병명을 알 수 없는 병이 생겼다. 『현종실록』 8월 17일자는 ‘의관을 갖추어 입고 허적을 인견했다’고 적고 있으나 그 다음 날 세상을 떠났다. 34세, 재위 15년, 정권을 갈아치우던 와중의 의문의 죽음이었다. 각종 재해와 강한 당파에 시달렸던 유약했던 임금이 처음으로 칼을 뽑아 휘두르는 도중에 저세상으로 간 것이다. 그의 유일한 후사는 14세 숙종이었으므로 약체 왕실의 지속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였다.

 


 

현종(顯宗;1641-1674, 재위 15년)과 비(妃)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金氏; 1642-1683)의 숭릉은 위치가 동구릉의 가장 남쪽으로 현재 경종(景宗) 비 단의왕후(端懿王后)의 혜릉(惠陵)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왕릉제도에 따라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두 봉분이 병풍석(屛風石) 없이 난간석(欄干石)으로 연결되어 있고, 각 봉분 앞에는 각각 상석(床石)이 설치되어 있다. 특이한 점은 능원 아래 정자각(丁字閣)의 정면 지붕이 일반적인 여타 능의 지붕처럼 지붕의 양 옆면이 막 잘려진 '맞배지붕' 양식이 아니라, 위 절반은 박공지붕{건물의 두 옆쪽에 'ㅅ'꼴로 붙여 놓은 두꺼운 널빤지인 박공널을 대어 추녀가 없이 용마루까지 올라간 지붕}꼴이고 아래 절반은 네모꼴로 된 '합각지붕{혹은 팔작지붕}'의 양식으로 만들어져 있는 점이다.

 

 

 

 

 

명성왕후 김씨 (明聖王后 金氏, 1642-1683)

명성왕후는 1634(인조 12) 517일 돈령부영사 김우명의 딸로 서울 중부의 장통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651(효종 2)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어의동 본궁에서 가례를 올렸으며, 1659(현종 즉위) 59일 현종 즉위와 함께 왕비로 책봉되었다.

 

명성왕후는 지능이 뛰어나고 성격이 과격했다고 전해진다. 그 때문에 궁중의 일을 다스림에 있어서 거친 처사가 많았고 숙종 즉위 초에는 한 때 수렴청정을 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공공연히 조정의 정무에까지 간여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명성왕후는 현종 승하 9년 후인 1683(숙종 9) 125일 창경궁의 저승전에서 42세로 승하하여 현종의 숭릉에 나란히 안치되었다. 소생으로는 숙종과 명선 명혜, 명안공주가 있는데, 이 가운데 명선공주와 명혜공주는 출가 전에 일찍 죽었다.

 

현종의 재위 기간 동안 일어난 당쟁의 여파로 숙종 재위 시의 조정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당시 명성왕후는 어린 숙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고 있었는데, 2차 예송논쟁에서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서인 김우명을 아버지로 둔 명성왕후 역시 수렴청정을 중단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의 세 아들 복창군, 복평군, 복선군이 남인과 가까이 지내자 서인들은 더욱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던 중 명성왕후와 그녀의 아버지 김우명은 복창군, 복평군, 복선군이 궁녀들과 불륜의 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하며 그들을 단죄해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하였다. 이 사건을 홍수(紅袖 : 궁녀)의 변이라고 한다. 이 주장에 놀란 숙종은 세 사람을 금부에 가두고 심문하였으나, 이들이 죄가 없다는 주장이 대세가 되고, 오히려 김우명에게 무고죄를 적용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졌다. 조정에서는 한밤중에 이 문제를 둘러싸고 회의가 열렸는데, 갑자기 정청에서 여인의 통곡 소리가 들렸다. 휘장 뒤에서 대비인 명성왕후가 우는 소리였다. “홍수의 변은 내간의 일이라 과인이 알 수 없다고 생각하여 어머니께서 복평 형제의 간통사건을 설명해주려고 나오신 것이오.”

 

숙종은 어머니인 명성왕후를 위해 둘러댔지만 수렴청정을 하지 않는 대비가 정청에 나타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로 인해 남인들의 상소가 빗발쳤으며, 명성왕후는 큰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그녀의 과격한 성격의 단면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붕당정치 (朋黨政治)

과거에 관료들이 서로 파벌을 이루어 정권을 다투던 일 로서, 당쟁(黨爭)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당대(唐代)에 우이당쟁(牛李黨爭)이 있었고, 송대(宋代)에는 신법(新法) ·구법(舊法) 양당의 큰 충돌이 있었다. 명(明)나라 때에는 유림(儒林) 출신인 동림파(東林派)와 환관(宦官)의 세력과 결탁한 비동림파 사이에 치열한 정치싸움이 벌어졌다. 한국에서는 지방별 이해관계, 학문의 계통에 따른 견해차, 연령 ·직위의 고하(高下)에 따른 시국관의 차이 등에서 서로 입장을 같이하는 인물들끼리 집단을 형성하여 그에 반대되는 집단과 대립 ·반목하기 시작한 것이 당쟁이다. 원래 유학(儒學)은 고려 말에 백이정(白燎正)이 원(元)나라로부터 주자학을 도입한 이후,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이 그 대종(大宗)을 이루어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김일손(金馹孫) ·조광조(趙光祖) 등에게 계승되었다. 따라서 이들 성리학도들은 조정의 신진세력으로 부각하게 되었고, 이미 육조(六曹)에 자리잡은 중앙의 귀족들과는 매사에 대립을 거듭하게 되었다. 이들은 사림파로 결집하여 적극적인 혁신의 뜻을 품고, 부패한 기성세력에 대하여 맹렬한 공격을 시작하자 이 공격에 대항할 만한 이론을 가지지 못한 훈구파(勳舊派)인 중앙귀족들은 국왕을 통하여 그들의 반대파를 탄압하였다. 이러한 대립현상은 곧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戊午士禍)로 나타나게 되었고, 이어서 갑자(甲子) ·기묘(己卯) ·을사사화(乙巳士禍) 등이 연쇄적으로 발생하였다.

 

사화의 원인과 사정은 각각 다르다 하여도 본질적으로 그것은 신 ·구세력 간의 대립이고, 진보와 보수세력 간의 투쟁이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사화의 타격 속에서도 성리학은 깊이 연구되었고, 서원(書院)의 발달과 함께 유명한 학자들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한편 문벌귀족의 과도한 권세에 불안을 느낀 국왕은 왕권의 신장을 위하여 점차 이학파(理學派), 즉 성리학도와 손을 잡게 되어, 선조 초기에는 마침내 정권이 사림파(士林派)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렇게 사림파가 훈구파의 탄압인 사화(士禍)를 극복하고 선조대(宣祖代)에 권력을 장악한 후에, 그들 사이에 붕당(朋黨)이 분기되어 자체 경쟁과 대립이 심화되었다. 사림파의 정계 장악으로 관직에 오를 자격자는 많아졌으나 관직은 한정되어 있어 필연적으로 당파의 분열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이익(李瀷)은 《곽우록(藿憂錄)》의 <붕당론(朋黨論)>에서 “이(利)가 하나이고 사람이 둘이면 곧 2개의 당(黨)을 이루고, 이가 하나이고 사람이 넷이면 4개의 당을 이룬다”고 하였다. 

 

숭릉 전경  

 보물로 지정된 정자각의 지붕 동구릉의 재실  

[왼쪽/오른쪽]보물로 지정된 정자각의 지붕 / 동구릉의 재실

 

붕당대립의 직접적인 발단은 1575년(선조 8) 이조전랑직(吏曹銓郞職)을 둘러싼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의 반목에서 비롯되었다. 전랑직은 그 직위는 낮으나(정5품) 인사권을 쥐는 직책으로, 판서(判書)나 국왕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고,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면 공의(公議)에 부쳐서 선출하였으므로 관료들 간의 집단적인 대립의 초점이 되었던 것이다.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동인(東人)은 허엽(許曄)이 영수(領袖)로 있었고,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서인(西人)은 박순(朴淳)이 영수가 되어 대립이 본격화되었다. 처음에는 동인이 우세하여 서인을 공격하였으나, 동인은 다시 서인에 대한 강온(强穩) 양론으로 갈라져 강경파인 북인(北人)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분파되어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서인 ·남인 ·북인의 삼색(三色)이 형성되었다. 남인은 우성전(禹性傳) ·유성룡(柳成龍)이 중심이 되었고, 북인은 이발(李潑) ·이산해(李山海) 등이 중심이 되었으나, 임진왜란 후에 남인 유성룡은 화의(和議)를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실각되자 북인 남이공(南以恭)이 정권을 잡게 되어 남인은 몰락하였다. 

득세한 북인은 다시 선조(宣祖)의 후사문제(後嗣問題)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갈라져 대립하다가, 대북파가 옹립하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정권을 장악하고, 소북파를 일소하기 위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모함 ·살해하는 한편, 외척인 김제남(金悌男)과 그 일족을 처형하였다. 광해군과 대북파의 이러한 폭정은 오랫동안 대북파에게 눌려 지내던 서인에게 집권할 기회를 주었으니, 곧 능양군(陵陽君:仁祖)을 왕으로 옹립한 인조반정(仁祖反正)이 바로 그것이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천하는 서인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며,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 수십 명이 처형되고, 수백 명이 유배되었다.

 

서인이 집권하는 동시에 남인 이원익(李元翼)이 입상(入相)하게 됨으로써 남인이 제2의 세력으로 등장하여 숙종 때까지 100여 년 동안 서인과 남인의 공존을 바탕으로 한 대립이 계속되었다. 즉, 효종이 즉위하자 서인 김자점(金自點)은 역모로 실각하였으나 같은 서인인 송시열파(宋時烈派)가 등장하여 서인의 집권은 현종(顯宗) 초까지 계속되다가 현종 즉위 후 효종의 모후(母后) 조대비(趙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를 놓고 서인의 주장인 기년설(朞年說:1주년설)과 남인의 주장인 3년설(2주년설)이 대립하는 이른바 기해복제문제(己亥服制問題)가 발생하였다. 처음에는 서인의 송시열과 남인의 윤휴(尹稶) 사이에 벌어진 예학논의(禮學論議)에 불과하던 것이 점차 당론으로 전환되면서 양파는 여기에 정치적 운명을 걸었고, 결국 서인의 주장이 채택됨으로써 정권에는 변동이 없었다.

 

그러다가 1674년(현종 15) 효종의 비(妃)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喪)을 당하자 다시 복상문제가 터져 남인이 기년설을 주장하고 서인은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주장하여, 이번에는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었다. 이 때, 남인은 송시열 등에 대한 극형을 주장하는 과격파와 이에 반대하는 온건파로 갈리어 이들을 청남(淸南) ·탁남(濁南)이라 불렀다. 새로 정권을 잡은 남인은 그 전횡(專橫)이 심하여 집권한 지 몇 년 만에 쫓겨나서 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하였고(庚申大黜陟),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이 재등용되었다. 그러나 서인 사이에도 분열이 생겨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老論)과 윤증(尹拯)을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으로 갈리었다. 그러던 중 1689년(숙종 15) 서인이 물러나고, 송시열이 사사(賜死)되는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다시 등용되었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에는 왕에 의하여 남인이 다시 쫓겨나고 서인이 재등용되는 갑술환국(甲戌換局)이 벌어져, 남인은 재기불능의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후로는 노론 ·소론이 대립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그 후 숙종의 후사문제로 인한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 노론의 김창집(金昌集) ·이건명(李健命) 등은 대역죄로 몰려 죽게 되고, 노론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당쟁을 몸소 체험한 후 왕위에 오른 영조는 당쟁의 완화와 각 파에 걸친 공평한 인재등용에 힘쓰는 이른바 ‘탕평책(蕩平策)’을 내세워 재위 52년간에 정쟁이 크게 완화되었다. 그러나 이 탕평책의 반작용으로 대간(臺諫)의 기능은 크게 위축되고, 언로(言路)는 모든 시비와 공격이 당쟁완화라는 명분으로 억제되어, 앞 시기의 긴장과 혈기가 풀리는 반면 공리주의(功利主義) ·이기주의의 새로운 시대풍조를 조장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러한 탕평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권세는 주로 노론의 수중에 있었다.

 

영조 말년부터 싹트기 시작한 새로운 대립은 1762년(영조 38) 임오사건(壬午事件), 즉, 사도세자사건(思悼世子事件)을 둘러싸고, 세자를 동정하는 홍봉한(洪鳳漢) 중심의 시파(時派)와 세자의 실덕(失德)을 지적하고 영조의 처사를 옳다고 보는 김구주(金龜柱) 중심의 벽파(僻派)의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그 후 남인과 소론도 시 ·벽으로 분파되었다. 이 시 ·벽파의 대립은 사도세자의 문제를 분쟁의 표면구실로 삼아 대립하게 되었고, 또한 남인의 시 ·벽파는 당시 전래하기 시작한 가톨릭을 믿는 신서교파(信西敎派)와 반서교파로 분열되었다. 정조 때에는 지금까지 소외되었던 남인의 세력이 왕에 의하여 적극 옹호 ·신장되어 이가환(李家煥) ·정약용(丁若鏞)과 같은 남인 시파의 명사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순조(純祖)가 즉위하면서 노론의 벽파가 대거진출하여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을 일으켜 사학일소(邪學一掃)라는 명목 아래 많은 시파의 가톨릭교인이 변을 당함으로써 당쟁의 한 변형이 연출되었다. 

특히 시 ·벽의 대립으로 인한 가톨릭교의 박해는 서학도(西學徒) 내지는 실학자(實學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남인을 말살시켜 버린 결과를 가져왔다. 권력에서 밀려난 남인이 서학이나 실학에 전념하게 된 이유는 숙종 때의 갑술환국(甲戌換局) 이래 남인은 대개 폐족원국(廢族怨國; 죄를 짓고 죽어 그 자손이 벼슬을 할 수 없음)의 무리가 되어 과거(科擧)를 위한 유학(儒學)이란, 그들에게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조선 중 ·후기 정치의 큰 특징이 붕단간의 대립에 있었으므로 붕당정치는 그 시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이 된다. 그러나 더 나아가 국왕의 위상과 역할을 깊이 이해하려는 연구 흐름도 나타나고 있으며, 붕당정치 대신 ‘사림정치’라는 개념으로 조선 중 ·후기의 정치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이루어지고 있다.
 

동구릉 산책로 숭릉의 홍살문과 참도  

[왼쪽/오른쪽]동구릉 산책로 / 숭릉의 홍살문과 참도

송시열 예학(禮學)

조선 왕조 실록에 가장 많이 이름이 거론된 사람이 송시열로서 3000번 이상이라고 한다. 그만큼 송시열은 뜨거운 당쟁의 중심에서 철학논리를 주장하다가 간 사람이다. 송시열은 이론적인 의미에서 깊은 철학을 남긴 인물이라기 보다는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성리학을 계승하여 예학(禮學)을 발전시킨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 부자의 학문을 조선의 현실 정치에 실천한 사람이다.

 

 조선 건국 후 지식인들은 이론적으로 불교를 비판하며,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가꿔갔고, 또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던 불교의 풍속을 제거하고, 이를 유교적인 것으로 대체하기 위한 예에 관한 책들을 간행했다. 국초부터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등 예서가 일반에 보급되면서 일반인들의 관혼상제는 유교적으로 변해갔다. 주희가 성리학적 관점에서 예를 정리한 '주자가례(朱子家禮)'도 조선 선비들 사이에서 중요한 예서(禮書)가 됐다. 그러나 이에 만족치 못한 정구, 김장생 등 조선의 예학자들은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設分類)', '가례집람(家禮輯覽)', 등 우리의 시각에서 '예(禮)',를 정리해 냈다. 17세기 송시열의 시대에 예학은 일상으로 깊이 스며들었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당시 서인(西人)을 대표하던 송시열은 현종 즉위년(1659)의 제 1차 기해예송(己亥禮訟)과 숙종 즉위년(1674)의 제 2차 갑인예송(甲寅禮訟)을 통해 유휴, 허목 등 남인(南人)과 맞서며, 왕실의 상례(喪禮)도 일반인들의 예법과 같아야 함을 주장했다. 예송의 승패는 정권의 향배와 직결됐다.


예로부터 예는 '자연의 이치가 현상적으로 드러난 것(天理之節文)이라고 했다. 자연의 이치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인간사회에서 예를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를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것은 우주자연의 이치를 통찰하는 학덕(學德)을 가졌다는 것이고, 이런 능력을 가진 자는 군자로서 소인들을 교화하고, 통치할 자격을 갖는다.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추구했던 조선에서 "예"를 정확히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것은 정치 현실에서 정권을 획득할 조건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런 논리를 정치 현실에서 주도했던 것이 바로 이이-김장생-김집의 적통을 자부했던 송시열이었다.

 

  송시열은 함께 북벌을 꿈꿨던 효종이 죽자 화양구곡으로 물러나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중앙정계를 좌우하는 서인의 수장이었다. 그는 맑은 물가에 앉아 마음을 다스리며, 왕에게 상소문을 올렸고, 제자들을 통해 사림의 힘을 보여주었다. 그는 사대부들이 학문적 이념적 차이에 따른 집단을 형성해 정치에 참여하는 '붕당(朋黨)정치'에서 반대파의 입장도 함께 수용해야 한다는 이이의 온건론보다는 군자와 소인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김장생의 강경론을 따랐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딛고, 소중화(小中華)를 내세워서라도 청나라에 맞서며, 자존심을 회복하고, 내부 결속을 다지려했던 그로서는 이런 강경론을 취할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두 번의 예송을 통해 정권이 뒤바뀌면서 예송은 단순히 예에 대한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목숨을 건 정쟁으로 변해갔고, 1680년의 경신환국(庚申換局)과 1689년의 기사환국(己巳換局), 1694년의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이어졌다. 기사환국에서 집권한 남인은 끈질기게 송시열의 제거를 요구했고, 82세의 이 거인은 끝내 사약을 받고 만다. 그러나 '성스럽게 죽은 그는 갑술환국으로 복권되어 사람이 신화'가 됐다.

 

 좋게 말하면 조선의 예학은 송시열에 이르러서 정치 현실에서 실천으로 완성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예학이 현실정치와 결합하면서 그 폐단을 극적으로 드러낸 셈이다. 그가 '신화'로 부활한 후, 서인을 중심으로 한 사림의 위세는 왕실을 압도하며, 정권을 좌우했다.

 

 

 

 


17세기 서인-남인 예송 논쟁

 17세기 조선에서 서인과 남인 사이에 벌어진 예송논쟁(禮訟論爭)은 도덕적 이상국가를 지향했던 조선에서 학문이 정치와 결합하면서 일어난 독특한 현상이었다. 유학에 따르면 예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실천은 모든 공부의 기본이었고, 또한 모든 공부는 예의 실천을 통해서 삶 속에서 완성된다. 따라서 정계에서 벌어진 예송논쟁은 곧 누가 통치를 담당할 만한 자격이 있는가를 논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왕실의 상례(喪禮)를 둘러싸고 벌어진 1659년의 기해예송(己亥禮訟)과 1674년의 갑인예송(甲寅禮訟)은 성리학적 이상국가에서 본보기가 돼야할 왕실의 예법을 논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본래 유가에서 나라의 정치는 왕의 수신으로부터 비롯되고, 왕실은 온 천하의 모범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왕실의 예법은 곧 정치의 근간이라고 볼 수 있다.

 

 기해예송은 효종이 죽자, 효종의 계모였던 자의대비 조씨가 효종에 대한 상복을 몇 년간 입어야 하는가를 둘러싼 것이었다. 효종은 맏아들로서 왕위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요절한 형 소현세자와 조카를 대신해 세자로 책봉됐었기 때문에, 이는 효종의 정통성 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것이었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은 효종이 둘째 아들로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3년상이 아닌 1년상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미수(眉수) 허목(許穆)을 비롯한 남인은 여염집과 달리 왕실에서는 왕통을 계승했으면 적통으로 인정해야 한다며 3년상을 주장했다. 기해예송은 서인의 승리로 끝났다.

 

 갑인예송은 1674년 모후인 효종비 인선왕후 장씨가 사망하자 다시 조대비가 상복을 몇 년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일어난 것으로서, 그 결과는 남인의 승리였다.
 

이들의 논쟁은 17세기 전반 서인과 남인의 양대 학파에서 연구됐던 예학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서인은 대체로 주희의 '가례'에 입각했던 반면, 남인은 원시 유학인 육경(六經)의 '고례(古禮)'에 입각했다. 서인은 왕실이나 일반인 모두 같은 '예'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남인은 왕실과 일반 집안의 '예'는 같지 않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서인의 입장은 왕도 기본적으로는 선비와 다를 것이 없다는 진보적인 것이었으나, 서인이 집권하자 사림과 외척이 왕권을 농단하는 세도정치에 이르게 된다. 이에 비해 남인의 입장은 왕실과 일반인의 예를 차별화 함으로써 왕권의 강화를 지향한 보수적인 것이었으나, 후대의 정약용처럼 왕 중심의 강력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는 오히려 절실히 공감할 만한 것이었다.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 517, 1392 - 1910 ]

 

() 13()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익종(翼宗) 수릉(綏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융릉(隆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영릉(永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장릉(章陵 : 사적 제202)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경릉(敬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 2()

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

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유릉(裕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홍릉(洪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

왕릉 35

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예릉(睿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경릉(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인릉(仁陵 : 사적 제194)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건릉(健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홍릉(弘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원릉(元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혜릉(惠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의릉(懿陵 : 사적 제204)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익릉(翼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명릉(明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숭릉(崇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영릉(寧陵 : 사적 제195)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휘릉(徽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장릉(長陵 : 사적 제203)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성묘(成墓 : 사적 제365)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목릉(穆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강릉(康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효릉(孝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희릉(禧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온릉(溫陵 : 사적 제210)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정릉(靖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9대 성종(第九代 成宗) 회묘(懷墓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순릉(順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선릉(宣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

8대 예종(第八代 睿宗) 공릉(恭陵 : 사적 제205)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8대 예종(第八代 睿宗) 창릉(昌陵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7대 세조(第七代 世祖) 광릉(光陵 : 사적 제197)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사릉(思陵 : 사적 제209)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장릉(莊陵 : 사적 제196)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5대 문종(第五代 文宗) 현릉(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4대 세종(第四代 世宗)

3대 태종(第三代 太宗)

2대 정종(第二代 定宗)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정릉(貞陵 : 사적 제208) : 서울 성북구 정릉2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1대 태조(第一代 太祖)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목조-덕릉 효공왕후 이씨-안릉

익조-지릉 정숙왕후 최씨-숙릉 , 손씨

도조-의릉 경순왕후 박씨-순릉, 조씨

환조-정릉 의혜왕후 최씨-화릉, 이씨, 정빈 김씨

태조-건원릉 신의왕후 한씨-제릉 신덕왕후 강씨-정릉

정종-후릉 정안왕후 김씨-후릉

태종-헌릉 원경왕후 민씨-헌릉

세종-영릉 소헌왕후 심씨-영릉

문종-현릉 현덕왕후 권씨-현릉

단종-장릉 정순왕후 송씨-사릉

세조-광릉 정희왕후 윤씨-광릉

예종-창릉 장순왕후 한씨-공릉 안순왕후 한씨-창릉

성종-선릉 공혜왕후 한씨-순릉 폐비 윤씨-회묘 정현왕후 윤씨-선릉

연산군-연산군묘 폐비 신씨-연산군묘

중종-정릉 단경왕후 신씨-온릉 장경왕후 윤씨-희릉 문정왕후 윤씨-태릉

인종-효릉 인성왕후 박씨-효릉

명종-강릉 인순왕후 심씨-강릉

선조-목릉 의인왕후 박씨-목릉 인목왕후 김씨-목릉

광해군-광해군묘 폐비유씨-광해군묘

인조-장릉 인렬왕후 한씨-장릉 장렬왕후 조씨-휘릉

효종-영릉 인선왕후 장씨-영릉

현종-숭릉 명성왕후 김씨-숭릉

숙종-명릉 인경왕후 김씨-익릉 인현왕후 민씨-명릉 인원왕후 김씨-명릉

경종-의릉 단의왕후 심씨-혜릉 선의왕후 어씨-의릉

영조-원릉 정성왕후 서씨-홍릉 정순왕후 김씨-원릉

정조-건릉 효의왕후 김씨-건릉

순조-인릉 순원왕후 김씨-인릉

헌종-경릉 효현왕후 김씨-경릉 효정왕후 홍씨-경릉

철종-예릉 철인왕후 김씨-예릉

고종-홍릉 명성황후 민씨-홍릉

순종-유릉 순명효황후 민씨-유릉 순정효황후 윤씨-유릉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