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능 (陵) - 3
(5) 제14대 선조 (宣祖, 1552 ~ 1608) _ 목릉 穆陵, 성묘 成墓
왕릉은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들의 무덤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왕릉은 42기 (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기,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園)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墓)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기(능40, 원14, 묘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능3, 원4, 묘5)입니다 .
사후에 왕(王)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기(基)
폐위(廢位)된 묘(墓) 2기(基)
황제릉(皇帝陵) 2기(基)
왕릉 35기
1. 추존이라는 미명으로, 역사세우기
추존(追尊)왕 ‘함길도 8릉’
2. 왕조, 문을 열다
제1대 태조 (太祖, 1335-1408) _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 정릉 貞陵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제2대 정종 (定宗, 1357-1419) _ 후릉 厚陵
제3대 태종 (太宗, 1367-1422) _ 헌릉 獻陵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제4대 세종 (世宗, 1397-1450) _ 영릉 英陵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제5대 문종 (文宗, 1414-1452) _ 현릉 顯陵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제6대 단종 (端宗, 1441-1457) _ 장릉莊陵, 사릉思陵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제7대 세조 (世祖, 1417-1468) _ 광릉 光陵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추존(追尊)왕 덕종 (德宗, 1438-1457) _ 경릉 敬陵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제8대 예종 (睿宗, 1450-1469) _ 창릉昌陵, 공릉恭陵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제9대 성종 (成宗, 1457-1494) _ 선릉宣陵, 순릉順陵, 회묘 懷墓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3. 왕조, 산을 넘다
제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_ 연산군묘 燕山君墓
제11대 중종(中宗, 1488-1544) _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 泰陵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제12대 인종 (仁宗, 1515-1545) _ 효릉 孝陵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제13대 명종(明宗, 1534-1567) _ 강릉 康陵, 순창원 順昌園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제14대 선조 (宣祖, 1552-1608) _ 목릉 穆陵, 성묘 成墓, 순강원 順康園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4. 조선, 또 다시 위기를 맞다
제15대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_ 광해군묘 光海君墓
추존(追尊)왕 원종 (元宗, 1580-1619) _ 장릉 章陵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5. 왕조, 반석을 다지다
제16대 인조 (仁祖, 1595-1649) _ 장릉 長陵, 휘릉 徽陵, 소경원 昭慶園, 영회원 永懷園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6. 조선, 당쟁에 휩싸이다
제17대 효종 (孝宗, 1619-1659) _ 영릉 寧陵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제18대 현종 (顯宗, 1641-1674) _ 숭릉 崇陵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7. 환국정치로 왕권을 다지다
제19대 숙종 (肅宗, 1661-1720) _ 명릉明陵, 익릉 翼陵, 대빈묘大嬪墓, 소령원昭寧園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제20대 경종 (景宗, 1688-1724) _ 의릉懿陵, 혜릉惠陵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8. 조선, 르네상스를 맞다
제21대 영조 (英祖, 1694-1776) _ 원릉元陵, 홍릉弘陵, 수경원綏慶園, 수길원 綏吉園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추존(追尊)왕 진종(眞宗) _ 영릉永陵
추존(追尊)왕 장조(사도세자 莊祖) _ 융릉隆陵, 의령원 懿寧園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제22대 정조(正祖, 1752-1800) _ 건릉健陵, 휘경원徽慶園, 효창원 孝昌園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9. 조선, 세도정치에 휘둘리다
제23대 순조 (純祖, 1790-1834) _ 인릉仁陵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추존(追尊)왕 익종 (翼宗, 문조 文祖) _ 수릉綏陵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제24대 헌종 (憲宗, 1827-1849) _ 경릉景陵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제25대 철종 (哲宗, 1831-1863) _ 예릉睿陵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10. 오백 년 왕조, 문을 닫다
제26대 고종황제 (高宗, 1852-1919) _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 흥원 興園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제27대 순종황제 (純宗, 1874-1926) _ 유릉裕陵, 영원英園, 숭인원 崇仁園, 회인원 懷仁園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5) 제14대 선조 (宣祖, 1552 ~ 1608) _ 목릉 穆陵, 성묘 成墓
말 한마디로 천하를 얻었으나 왕에게도 열등감이 있었으니
목릉 穆陵
선조 (宣祖, 1552 ~ 1608), 의인왕후 박씨(懿仁王后 朴氏, 1555 ~ 1600),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 金氏, 1584 ~ 1632), 1608년, 경기 구리 193호, 동구릉(東九陵)
宣祖(이균; 1552-1608, 재위 41년)와 비(妃) 의인왕후 박씨(懿仁王后 朴氏; 1555-1600), 계비(繼妃)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金氏; 1584-1632)의 목릉은 세 개의 능이 왼쪽부터 선조, 의인왕후, 인목왕후의 순으로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식에서 변형된 형태로 조성되었고, 동구릉(東九陵)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아쉽게도 현재 수목보호를 위해 관람을 제한해서 공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선조의 능은 봉분(封墳)에 구름 문양[운채(雲彩)]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조각된 병풍석(屛風石)이 설치되어 있고 난간석(欄干石)과 기타 석물(石物)들이 전통의 양식으로 조성되어 있으나, 전란(戰亂)의 폐해(弊害) 후에 제작되어서 그런지 조형미(造形美)는 떨어지고 있습니다.
처음 선조의 목릉은 건원릉 서쪽 산기슭에 정해졌는데, 불길(不吉)하고 습기가 있다는 원주목사(原州牧使)의 상소로 위치를 이동해 현 위치에 의인왕후릉과 함께 자리잡습니다.
두 번째 의인왕후릉은 병풍석(屛風石)은 없이 난간석(欄干石)만이 설치되었고 특이한 점은 장명등(長明燈)과 망주석(望柱石)의 줄기에 꽃무늬[화문(花紋)]가 처음으로 새겨져 있는데, 이후 후대(後代)의 능까지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의인왕후릉 역시 처음에는 경기도 포천 지역에 유릉(裕陵)이라 묘호를 정해 조성했다가, 선조의 능과 함께 현 위치로 옮겨와 모시게 됩니다.
세 번째 인목왕후능은 앞의 두 능에 비해 조금 뒤에 조성되어서 그런지 어느 정도 조형미를 갖추고 있습니다. 봉분(封墳)에는 역시 병풍석(屛風石)은 생략되었고 난간석(欄干石)만을 설치하고 있습니다.
동구릉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목릉에는 14대 선조와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 세 사람이 잠들어 있다. 같은 능역 안의 각각 다른 언덕에 왕릉과 왕비릉을 조성한 동원이강릉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제일 왼쪽에 보이는 것이 선조의 능이고, 가운데가 의인왕후, 오른쪽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선조의 능에는 3면의 곡장이 둘러져 있고,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과 구름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여기에 난간석과 혼유석, 망주석 1쌍과 석양, 석호 2쌍이 배치되어 전형적인 상설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의인왕후릉은 병풍석이 생략된 채 난간석만 둘러져 있다. 임진왜란을 치른 후 능을 조성했기 때문에 석물들의 크기만 클 뿐 사실적이지도 입체적이지도 못하다. 그러나 망주석과 장명등 대석에 새겨진 꽃무늬는 처음 선보인 양식으로 인조 장릉의 병풍석에까지 새겨지는 등 조선 왕릉 조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인목왕후릉 역시 의인왕후릉과 같은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좀 더 생동감이 있어 보인다.
목릉의 능역은 원래 1600년(선조 33) 의인왕후 박씨가 승하하자 왕비릉인 유릉(裕陵)의 터로 정해진 곳이다. 1608년(광해군 즉위) 선조 승하 후 선조의 능인 목릉은 원래 건원릉의 서편에 조영되었는데, 물기가 차고 터가 좋지 않다는 심명세(沈命世)의 상소에 따라 1630년(인조 8) 현 위치로 천장되고 유릉과 목릉의 능호를 합칭하여 목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1632년(인조 10)에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계비의 능을 왕릉의 동편 언덕에 조영하게 되어 오늘날의 세 능을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정자각도 세 능이 들어설 때마다 자리를 바꾸게 되었다. 원래는 동편의 의인왕후릉 앞에 있었던 것이 후에 왕릉이 천장되면서 왕릉 앞에 정자각이 서고 왕비릉의 정자각은 헐리게 되었다. 여기에 계비 인목왕후의 능이 들어서자 한때 왕릉 쪽으로 치우친 정자각을 다시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전이 번거롭다 하여 왕비릉은 신로만 정자각에 접하도록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따라서 현재 목릉의 정자각은 왕릉을 향하여 서 있으면서 신로는 세 능으로 모두 뻗어 있다.
선조(宣祖)는 중종(中宗)의 후궁 창빈(昌嬪) 안씨(安氏)의 아들인 덕흥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명종(明宗)의 사랑을 받다가 명종 승하후 후사(後嗣)가 없어 명종비(明宗妃)인 인순왕후(仁順王后)에 의해 1567년 조선(朝鮮) 제14대 왕으로 즉위(卽位)했습니다.
즉위 초에 이황(李滉), 이이(李珥) 등 인재를 등용하고 유학(儒學)을 장려하였으나, 조선 최대의 전란(戰亂)인 7년간의 임진(壬辰). 정유(丁酉) 왜란(倭亂)을 겪고 국토가 유린(蹂躪)되고 문화재(文化財)가 소실(燒失)되는 피해를 입어 복구작업에 많은 힘을 기울였지만 큰 성과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선조대(宣祖代)는 조선 중기의 정치 개념을 대변하는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시작된 시기입니다. 일제(日帝)의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의해 패배주의적 민족성(民族性)을 날조한 당파싸움으로 잘못 평가되어온 붕당정치는 동인(東人)과 서인(西人) 그리고 남인(南人)과 북인(北人) 또한 노론(老論)과 소론(小論) 등으로 붕당이 나뉘지만, 이는 네 차례의 사화(士禍)을 겪은 후에 재야(在野)에서 서원(書院) 건립 등으로 세력을 확대한 사림(士林)들이 중앙에 진출하면서 새로운 이념으로 조선 정치의 구심(求心)을 잡게 되었고 중앙과 지방이 혼합된 형태의 정치 구조가 완성된 것입니다. 이는 결국 정치의 기반이 지방 중소지주층(中小地主層)까지 확대된 형태이기에 이러한 세력들이 서로 견제하면서 발전해 나간 오히려 일당(一黨)의 독재(獨裁)가 아닌 붕당(朋黨)의 민주적인(?) 정치형태로의 진보였던 것으로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1592년(선조 28) 2월 명종(明宗)의 세자빈 덕빈윤씨(德嬪尹氏)가 창경궁에서 승하하여 순회세자(順懷世子) 무덤에 합장으로 장사를 지내려고 준비를 하던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선조 는 피난을 떠난 지 며칠 후에서야 유도대장 이양원(李陽元)을 시켜 창경궁 뒤뜰에 윤씨를 임시로 매장하라고 지시를 하였다. 환궁하여 윤씨의 유골을 찾아보았으나 끝내 확인을 하지를 못했다. 1600년(선조 33) 6월 27일 신시(申時)에는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가 승하하였는데, 선조는 장지선정 문제를 매듭짓지 못하고 5개월 25일을 끌다가 12월 22일에서야 겨우 장사를 지내게 된다.
선조는 “내 성미는 산천이 깊고 경내가 그윽하며 겹겹이 둘러싸여 속세와 서로 멀리 떨어진 곳을 좋아한다. 만약 길가에 있는 산이라면 비록 아주 좋은 명당일지라도 나는 취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며,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산골 깊숙한 곳에서 장지를 찾도록 지시를 하였다. 그 후 포천 신평(新坪) 땅으로 장지가 정하여 졌는데, 전 참봉 박자우(朴子羽)가 “임좌병향(壬坐丙向)에 파구(破口, 물이 흘러나가는 방위)가 진(辰)이라, 호순신(胡舜申)의 풍수이론에 나오는 임(壬)은 화(火)이고, 진(辰)은 수(水)라 상극(水剋火)이 되어 장지로 불가하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 한 장이 매일 5천명을 동원하여 조성한 무덤자리를 버리게 했다. 내용도 호순신 이론과는 무관한 엉터리 논리였지만 무지한 대신들이 확인도 하지를 않았다.
이 상소문 때문에 버린 자리를 효종(孝宗)의 동생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이 차지를 하여 8세손인 고종(高宗)이 왕위에 오르니 사람들이 인평대군의 무덤자리 덕이라고 하였다. 선조실록에 신평의 장지 문제가 31번이나 기록될 만큼 논란이 많았으나 선조는 현장을 직접 확인하려 들지도 않으면서 오히려 중국인 풍수 섭정국(葉靖國)과 이문통(李文通)을 동원하여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결국 11월 9일에서야 장지를 건원릉의 좌측 옆 능선으로 결정하여 12월 22일에 장사를 지냈다. 박자우가 상소문에 언급한 호순신 이론은 1393년(태조 2) 12월 11일 계룡산 도읍지의 역사(役事)를 그만두게 한 경기도관찰사 하륜(河崙)의 상소문에 언급된 이기풍수론이다.
1608년(선조 41) 2월 1일에 선조 임금이 승하하자 건원릉 우측 능선에 장지를 정하여 6월 12일에 동향(酉坐卯向)으로 장사를 지냈다. 그런데 1630년(인조 8) 2월 4일 원주목사 심명세(沈命世)가 “무덤 속에 물이 있다.”는 상소문을 올려 그 해 11월 21일에 의인왕후 무덤 옆으로 이장을 하였다. 그러나 무덤에 이상이 없어 그 자리는 훗날 헌종(憲宗)의 무덤자리(景陵)가 되었다. 1632년(인조 10) 6월 28일 선조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승하하자 선조 무덤 좌측 3번째 능선에 장사를 지냈는데 이곳을 혜릉(惠陵), 선조임금의 무덤을 목릉(穆陵), 의인왕후 무덤을 유릉(裕陵)이라 하다가 그 후 이 세 능을 합하여 목릉이라고 고쳐 불렀다.
목릉의 입구를 들어서다 보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선조임금의 분위가 물씬 풍겨 이곳이 바로 선조가 묻힌 자리임을 알게 한다. 선조를 보지는 못했지만 그 분의 성격과 너무나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능이 밖에서는 보이지 않아 두 왕비를 거느리고 부부간에 오순도순 조용하게 지내기에 적합한 장소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경릉자리는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선조임금의 성격과는 맞지 않아서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목릉은 청룡과 백호가 감싸 돌아 밖에서 보이지 않을 것 같지만 의인왕후 무덤 뒤에서 수많은 군졸들이 넘겨다보고 있는 자리다. 바로 그 곳이 함몰되었기 때문인데 이런 곳을 일러 황천살(黃泉煞)이라 하여 풍수가들이 매우 꺼려하는 곳이다. 결국은 의인왕후 장지선정에 장고를 하였지만 현장 확인 한번하지 않고 정한 탓에 황천살이 있는 곳에 장사를 지내게 되었다. 또한 청룡 끝은 등을 돌려 달아나기 때문에 자신을 진심으로 끝까지 섬기는 신하 하나 없는 형국이라 아쉬움이 묻어나는 자리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동구릉 초입에서 유릉(순종), 현릉(문종), 건원릉(태조)을 지나 계속 들어가다 보면 동구릉의 가장 안쪽인 건원릉 동쪽언덕에 목릉이 보인다. 대개의 능은 홍살문 안쪽으로 바로 정자각이 들여다보이는데, 목릉은 홍살문을 지나 서쪽으로 꺾여진 참도를 따라 들어가야 비로소 장자각에 이른다. 하지만 정자각에도 가기 전에 정자각 뒤로 바로 보이는 무덤이 선조의 능이고, 가운데가 의인왕후 박씨, 오른쪽이 계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이다. 3능이 동역이강형식(同域異崗形式)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3릉 중에 의인왕후 박씨의 능이 첫번째로 안장되었습니다. 소생이 없이 선조 33년(1600년) 46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처음에는 포천에 능지를 정하고 역사를 진행했으나 박자동이 그곳은 불길하다고 상소하여, 왕이 건원릉 내로 택지를 정하라고 명해 다시 능지를 잡은 것이 현재의 장소이다.
이 3릉 중에 의인왕후 박씨의 능이 첫번째로 안장되었습니다. 소생이 없이 선조 33년(1600년) 46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처음에는 포천에 능지를 정하고 역사를 진행했으나 박자동이 그곳은 불길하다고 상소하여, 왕이 건원릉 내로 택지를 정하라고 명해 다시 능지를 잡은 것이 현재의 장소이다.
한편 선조의 목릉도 처음에는 건원릉 서쪽 산기슭에 있었는데, 불길(不吉)하고 물기가 있다는 원주목사 심명세(沈命世)의 상소에 따라 인조 8년( 1630 )에 현 위치로 이장해 의인왕후의 능 옆에 자리잡게 되었다. 구릉(구릉)을 파헤쳐 현실(현실)을 보니 물기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물기가 있다는 상소가 엉터리임을 알았으나 이미 천장(천장)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니, 그대로 실행하여 현재의 위치에 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선조의 능을 이장항 2년 후에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가 1632년(인조 10년) 48세(1632년;인조 10년) 의 나이로 승하하자 목릉(穆陵)의 세 번째 능으로 안장되었다.
왕능의 봉분은 십이지신상과 운채가 조각된 전통적인 병풍석을 두른 양식이며, 두 왕비릉은 난간만 두른 양식이다. 문무석(文武石)은 3m내외의 장신으로 만들어져 장대(長大)하기만 할 뿐 말뚝 같고, 상체와 하체와의 비율도 맞지 않고, 무인석은 얼굴이 너무 크고 양쪽 귀가 코끼리처럼 앞을 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전란과 관련이 깊다고 보겠다. 임진.정유의 양란을 겪으며, 인명피해가 커서 장인을 구하기 어려웠다는 기록이 전한다. 전후의 사정 때문인지 목릉의 석인(石人)은 열악(劣惡)하여 조선왕릉의 문무석(문무석) 중에서 가장 졸작(졸작)이라는 평이 있다.
두 번째 의인왕후릉은 병풍석(屛風石)은 없고, 난간석(欄干石)만 설치되어 있으나 특이한 점은 장명등(長明燈)과 망주석(望柱石) 등에 꽃무늬[화문(花紋)]가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이후 후대(後代)의 능까지 쓰여지며 병석문양(병석문양)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세 번째 인목왕후능도 역시 병풍석(屛風石)은 생략되었고 난간석(欄干石)만 설치되어 있다. 문무석은 허리 윗부분과 아래가 2:1 정도로 상.하체의 불균형이 심하다. 석마(석마)는 건원릉의 석마양식의 영향인지 4족(족)을 투각(투각)해 낸 고식(고식)을 따르고 있다.
선조(宣祖)는 중종(中宗)의 후궁 창빈(昌嬪) 안씨(安氏)의 아들인 덕흥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명종(明宗)의 사랑을 받다가 명종 승하후 후사(後嗣)가 없어 명종비(明宗妃)인 인순왕후(仁順王后)에 의해 1567년 조선(朝鮮) 제14대 왕으로 즉위(卽位)했다.
즉위 초에 이황(李滉). 이이(李珥).백인걸(백인걸) 등 많은 인재를 등용, 정치에 힘쓰는 한편 <유선록>, < 근사록>, <심경>, <삼강행실> 등의 책을 간행하여 널리 읽히도록 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당쟁으로 신하들 사이에 싸움이 확대되어 동서분당이 생겼다. 이이(李珥)의 조정책도 실패로 돌아가고, 마침내 당쟁 속에 정치기강이 문란한 틈을 타서 왜인들이 침입하였다. 결국 전후 7년간이나 왜군에 국토가 유린되어 문화재는 타버리고 국운은 더욱 피폐하게 되었다. 전후에도 당쟁은 그치지 않아 복구작업에 많은 힘을 기울였지만 큰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명종 부인, 인순왕후 심씨가 강력추천해서 얼떨결에 왕이 된 하성군
선조 (이균, 宣祖, 1552 ~ 1608, 재위 41년)
선조는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로, 1552년(명종 7) 11월 11일 한성 인달방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행동이 바르고 용모가 빼어나 순회세자를 잃고 후사가 없었던 선왕 명종의 사랑을 받았다. 처음에 하성군에 봉해졌다가, 1567년(명종 22) 명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그해 7월 3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에는 매일 경연에 나가 토론하고, 밤늦도록 독서에 열중하여 제자백가서를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선조는 훈구세력을 물리치고 이황, 이이 등 많은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다.『유선록』, 『근사록』, 『심경』, 『소학』, 『삼강행실』등을 편찬케 하여 유학을 장려하는 한편,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에게 증직하는 등 억울하게 화를 입은 사림들을 신원하고, 그들에게 화를 입힌 남곤 등의 관작을 추탈하여 민심을 수습했다.
그러나 세자책봉 문제 등을 둘러싸고 정국을 주도하던 사림들 사이에 당쟁이 극심해졌으며, 국력이 쇠약해져 국방대책을 세우지 못하던 중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에 이어서는 정유재란이 일어나 두 차례에 걸친 7년 동아의 전쟁을 치르며 전 국토가 황폐화되었다. 선조는 전후 복구작업에 힘을 기울였으나 거듭된 흉년과 정치의 불안정으로 인해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선조는 선왕 명종의 조카이다. 명종은 어린 나이의 순회세자를 잃고 자식 잃은 슬픔을 달래려고 여러 왕손들을 궁궐에 자주 불러,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곤 했다. 그 중에서도 선조(당시 하성군)를 유난히 아껴 그를 따로 불러 학문을 시험해보기도 하고, 한윤명, 정지연 등을 따로 뽑아 그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하루는 명종이 여러 왕손들을 궁중에서 가르칠 때 익선관을 벗어 왕손들에게 주며 써보라고 하였다.“너희들의 머리가 큰가 작은가 알려고 한다.” 명종은 이렇게 말하며 여러 왕손들에게 익선관을 써보게 하였다. 다른 왕손들은 돌아가면서 익선관을 써보았지만, 제일 나이가 어린 선조는 머리를 숙여 사양하였다 “이것을 어찌 보통 사람이 쓸 수 있겠습니까?”
선조는 이렇게 아뢴 뒤 두 손으로 관을 받들어 어전에 도로 가져다 놓았다. 이를 본 명종은 매우 기특하게 여기며, 그에게 왕위를 전해줄 뜻을 정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1568 | 1년 | 12월, 이황 <성학십도(聖學十圖)> 올림 | 1592 | 25년 | 4월, 신립 충주 전사, 왕 서행(西行) |
1569 | 2년 | 8월, 이이<동호문답(東湖問答)>올림 | 5월, 한양 함락, 6월, 평양 함락 |
1570 | 3년 | 12월, 이황(李滉) 죽음{1501- } | 7월, 한산도(閑山島) 대첩(大捷) |
1571 | 4년 | 4월, <명종실록(明宗實錄)> 인쇄 | 1593 | 26년 | 2월, 권율 행주대첩(幸州大捷) |
1573 | 6년 | 12월, 교서관(校書館)에서 <향약(鄕約)>을 간행 | 8월,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 됨 |
1574 | 7년 | 7월, 김효원 이조전랑(吏曹銓郞) 됨 | 10월, 환도(還都)함 |
10월, 예안에 도산서원(陶山書院) 둠 | 1594 | 27년 | 2월, 훈련도감(訓鍊都鑑) 설치 |
1575 | 8년 | 1월, 명종비[인순왕후]승하{1532-} | 12월, 속오군(束五軍) 편성함 |
7월, 심의겸.김효원 파당으로 동서 당론이 분열됨 | 1597 | 30년 | 1월, 정유재란(丁酉再亂) 일어남 |
1577 | 10년 | 12월, 이이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지음 | 1월, 원균 경상우수사 겸 통제사 됨 |
1584 | 17년 | 1월, 이이(李珥) 죽음{1536- } | 1598 | 31년 | 11월, 노량에서 이순신 적의 수군을 대파하고 전사 |
1588 | 21년 | 12월, 일본 통신사(通信使)를 보낼 것 요구 | 11월, 왜군 총철퇴, 왜란 끝남 |
1589 | 22년 | 10월, 정여립 모반하여 자결함 | 1602 | 35년 | 7월, 문묘(文廟) 대성전(大成殿) 이룩 |
1591 | 24년 | 2년, 이순신 전라좌도수사(水使) 됨 | 1605 | 38년 | 3월, 홀란온 야인 동관(潼關)에 침입 |
1592 | 25년 |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 일어남 | 1608 | 41년 | 2월, 왕 승하{1552- }, 광해군 즉위 |
살맞은 왕릉
왕릉과 화소지역
국장이 시작되면
짝퉁풍수
역시나 왕릉
왕릉 배치
병풍석과 사대석
난간석의 정체
물줄기
선조 이야기
인조반정때문에 터진 정묘호란
왕릉때문에 터진 병자호란
서손에게 왕의 길이 열리다
서손 하성군이 보위에 오른 경위
국왕의 직무는 어려운 것
찹쌀밥을 먹다가 돌아가신 임금
귀고리 한 조선의 남성들
죄의 근원을 제거하시오
사람 잡는 헛소문
검술교관이 된 왜군 포로
성균관에서 소를 도살했다면 믿겠습니까?
먹을 수 없는 수박을 임금께 올리다니
제14대 선조와 의인왕후 및 계비 인목왕후 목릉
국난을 맞아 불교의 저력을 발휘하다
국난 극복을 위해 활약한 선조대의 고승들
즉위초의 평화
동인과 서인으로의 붕당
북인과 남인
북방의 변란과 임진왜란 의 발발
신권정치의 구현
붕당정치의 바른 이해
전쟁발발 이 전상황
전쟁의 발발
임진왜란이 삼국에 끼친영향
덕흥대원군 이초
의인왕후 박씨
인목왕후 김씨
영창대군
임해군
정원군
① 선조릉에는 3면의 곡장이 둘러져 있고, 십이지신상과 구름무늬가 조각된 병풍석이 있으며,
난간석과 혼유석 등 전형적인 상설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② 인목왕후릉에서 바라본 전경. 왼쪽이 선조릉, 오른쪽이 의인왕후릉이다.
의인왕후 박씨 (懿仁王后 朴氏, 1555 ~ 1600)
의인왕후는 반성부원군 박응순의 딸로 1569년(선조 2) 15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어 가례를 행하였다.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침착하고 자애로운 면모를 지녔다. 슬하에 자식이 없어 후궁의 자식들을 자기 자식처럼 보살폈다. 특히 공빈 김씨의 소생인 광해군을 남달리 총애하여 마치 자신이 낳은 친아들처럼 대해주었고, 훗날 그가 세자의 자리로 오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광해군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종결된 후에 정세는 안정을 찾아갔으나, 의인왕후는 피난길에서 얻은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46세의 일기로 황화방 별궁에서 승하하였다.
선조 33년 6월 24일조의 실록에는 “별로 아픈 곳은 없으나 음식이 먹고 싶지 않고 밤엔 잠을 잘 수 없으며 온 몸이 나른하여 앉으나 누우나 편안하지 못하다. 음식을 대하면 구토부터 먼저 나고 숨이 가쁘며 목에서 가르릉 거리는 소리가 조금 나고 맥은 부하여 한 번 숨 쉬는 동안 7번이나 뛴다. 아마도 원기가 부족한 탓으로 비(脾), 폐(肺), 심(心) 세 기관이 병난 듯하다.”는 의인왕후의 병세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자식이 없던 그녀를 무시하던 선조는 “중전의 목숨을 이미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나는 실로 망극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겠다. 밖에서 속히 일을 준비하도록 하라.”라고 빈청의 대신들에게 전교하며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였다고 한다.
선조 때 유학자들의 글에는 “전국 방방곡곡에 왕비의 원찰 아닌 곳이 없다.”는 통탄의 목소리가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의인왕후가 이름 난 기도처마다 자신의 원찰을 설치하고, 아이를 낳기를 발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전국의 명산대찰에 원찰을 설치하고 부처님께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건봉사, 법주사 등 여러 사지(寺誌)에는 그녀가 보시한 기록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만큼 자식을 절실하게 바랬던 그녀는 불교에 의지하여 평생 불경과 염주를 가까이 하고 살았으며 궁중의 여인들은 그녀를 ‘살아있는 관세음보살’이라 불렀다.
의인왕후는 어린 나이에 어미를 잃은 임해군과 광해군을 친자식처럼 돌보았다. 선조실록에는 “의인왕후가 후궁들의 자식을 지나치게 예뻐하여 선조가 장난삼아 질책하면 아이들은 왕후에게로 도망가 숨곤 했는데, 이때마다 왕후는 곧 치마폭을 당겨 그들을 가려주곤 했다.”는 일화가 등장한다. 이는 의인왕후가 자신의 배로 나은 자식은 아니었을지언정 선조의 모든 자식들을 어머니의 마음으로 사랑해주었음을 알려준다.
1600년(선조 33년) 46세의 나이로 승하(昇遐)해, 처음에는 포천에 능지를 정하여 역사를 추진했으나 그곳이 불길하다는고 박자동의 상소에 따라, 왕이 건원릉 내로 택지를 정하라고 명해, 다시 능지를 잡은 것이 현재의 장소이다.건원릉(健元陵) 동쪽 산 기슭의 세 능 가운데 첫 번째로 안장된 능묘이다.
인목왕후 김씨 (仁穆王后 金氏, 1584 ~ 1632)
인목왕후는 선조의 계비로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딸이다. 1602년(선조 35) 19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606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다. 이때 광해군이 세자의 지위에 있었는데, 당시 실권자였던 유영경(柳永慶)은 적통론에 입각하여 적출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유영경 일파는 몰락하고 대북정권이 들어섰는데 이들은 왕통의 취약성을 은폐하기 위하여 선조의 첫째 왕자인 임해군(臨海君)을 제거하고 이어서 영창대군을 폐서인시킨 뒤 살해하고, 대군의 외조부 김제남을 사사시키고, 인목왕후를 폐비시킨 다음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이러한 패륜행위는 결국 정변의 구실을 주게 되어 인조반정이 일어났으며 이에 따라 인목왕후는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되었다. 인목왕후는 그 후 인조의 왕통을 승인한 왕실의 장(長)의 위치에 처하면서 국정에 관심을 표하여 한글로 하교를 내리기도 하였다. 금강산 유점사에 친필로 쓴 『보문경(普門經)』의 일부가 전하고, 인목왕후필적첩이 남아 있다.
1613년(광해군 5) 인목대비 폐비사건을 시작으로 인목왕후의 일대기를 그린 글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이 글을 『계축일기』라고 한다. 공빈 김씨의 소생인 광해군과 인목왕후의 소생인 영창대군을 둘러싼 당쟁을 사실적으로 서술하였다. 이 기사문은 인조반정 뒤 대비의 측근 나인이 썼다고 전해진다. 그 일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윗전(인목왕후)이 애통해하며 대군(영창대군)을 내보내지 못하고 시간을 끌자 금부 하인들이 밀고 들어와 대군을 업고 나갔다. 그 후 한 달 만에 대군 아기는 강화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런데 미리 알려 주지도 않고 늦도록 안부 전하는 사람도 찾아오지 않으므로 윗전께서는 수상히 여기시고 근심하시는 것이었다. "어째서 오늘은 여지껏 안부도 알려오지 않는고? 필시 무슨 까닭이 있도다. 아무든지 높은 데 올라가 궁 밖 길의 동정이나 살피고 오너라.“
명령을 받고 한 사람이 전에 침실로 썼던 다락 근처에 올라가 바라보니 사람들이 돈의문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성 위로 올라가 굽어보니 화살을 차고 창과 칼을 가진 사람이 수없이 많고 말을 탄 사람도 많았다. 이제 죽이려나 보다 하고 내려와 바깥사람들이 길 닦는 곳이 있기에 거기 가서 물어 보고서야 대군을 강화로 옮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관적 관점에서 쓰였으나, 조선 중기의 궁중에서 전개되는 풍속 및 생활상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당시 치열한 당쟁의 이면을 이해하는데 보조 자료가 된다.
1608년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광해군을폐하고 영창대군을 추대하려던 소북(소북) 유영경(유영경) 일파가 몰락하고, 대북(대북)의 정인홍(정인홍) 등이 득세하여 1612년 윤인(윤인) 등에 의해 살해될뻔 했으나 박승종(박승종)의 저지로 겨우 목숨을 보전했다.
1613(광해군5)년 대북파의 흉계로 친아들 영창대군이 강화로 쫒겨나고 친정 부친인 김제남이 사사(사사)된 뒤 1618년 인목대비 역시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계기로 복호(복호)되어 대왕대비가되어 인경궁 흠명전에서 기거했다.
그후 1632년(인조 10년) 48세의 나이로 승하해 목릉(穆陵)의 세 번째 능으로 안장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나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인목왕후의 친필인 [보문경(普門經)] 일부가 전한다.
광해군의 생모
성묘 成墓
선조(宣祖)의 후궁 공빈 김씨(恭嬪 金氏, 1553 ~ 1577), 경기도 남양주 365호
묘역시설로는 곡장(曲牆), 봉분 주위의 난간석(欄干石)ㆍ석호(石虎)ㆍ석양(石羊) 등이 있으며, 봉분 전면에는 혼유석(魂遊石)ㆍ장명등(長明燈)ㆍ망주석(望柱石)ㆍ문인석(文人石)ㆍ무인석(武人石)ㆍ석마(石馬) 등이 있다. 비석은 남아 있지 않다. 조선시대 릉자리가 결정되면 주변의 개인 묘지들은 이장을 하게 되는데 성릉(성묘)이 위치한 바로 앞에 풍양조씨시조묘가 옮겨지지 않은 것도 아이러니고, 후에 인조가 성릉을 성묘로 격하하면서 격에 맞지 않는 것은 다 허물라 명했는데 아직도 많은 릉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도 아이러니다.
광해군이 왕일 때는 성릉으로 격상되어 석물을 모두 왕릉의 수준으로 만들어 세웠지만 반정으로 인해 성묘로 격하되면서 능상 위에 있는 석물들만은 그대로 두어 일반 묘에는 없는 무인석이 있고 묘 뒤에 석양, 석호와 난간석이 있게 되었다. 반정 세력들도 묘의 석물을 함부로 건들면 뒷탈이 난다는 것은 알고 있었 던 듯 하다. 아마도 있었을 정자각이나 비각 등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또 한편으로는 앞쪽의 풍양 조씨 시조 묘가 있는데 그곳이 진혈이고 성묘는 허혈이어서 자식들이 잘 못되었다고 한다. 왕을 15년씩이나 했으니 전혀 허혈만은 아닐 진데 무조건 안좋다고 한다. 공빈김씨의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내 광해군과 임해군의 묘 인근에 자리하고 있다.
묘역은 작은 능선에 안치되어 있어 세밀하고 아름답게 조성되었는데 곡장안으로 서향한 봉분에는 8개의 사대석을 둘렀고, 그 주위에 12개의 기둥으로 된 난간석을 돌렸다. 특히 난간석은 그 중간에 문양을 조각하여 화려함을 더 하였다. 봉분 주위 양쪽으로 호석과 양석을 각각 2개식을 놓았으며 봉분 앞에는 거대한 상석을 배치하였고 좌우의 망주석은 팔각의 받침대에 2중으로 층을 만들었다. 상석 앞에는 장대석으로 놓아 층을 만들고 그 밑에 문인석, 말석, 장명등을 배치하였으며 다시 그아래 장대석으로 층을 만들고 그 밑에 문인석과 말석을 배치하였다.
송릉리
오늘날 '송릉리'라는 지명은 원래 '송정리'였는데 소나무가 많고 성릉이 있는 마을이라는 송릉리에서 유래돠었다고 한다.
공빈 김씨(恭嬪 金氏, 1553 ~ 1577, 공성왕후(恭聖王后)
사포(司圃)를 지내고 사후 증 의정부 영의정 해령 부원군(海寧府院君)에 추증된 김희철(金希哲)의 딸로, 궁인으로 입궐하여 선조의 승은을 입은 뒤 내명부 정3품 소용(昭容)이 되었다. 종2품 숙의(淑儀)로 있을 때에 선조의 장남인 임해군을 낳아 종1품 귀인(貴人)에 봉해졌고, 차남인 광해군을 낳자 마침내 정1품 빈(嬪)에 책봉되었다. 아버지 김희철은 후일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다가 전사하였다. 이때문에 광해군 형제의 주변에 힘이 되어줄만한 인물들이 없어 세자의 지위가 위태로웠다.
그녀는 선조의 사랑을 독차지하였고, 그 때문에 다른 후궁들은 선조에게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그녀는 자신의 목숨이 위독해지자 누군가 자신을 저주하고 있다며 이를 선조가 조사하지 않아 자신이 죽게되는 것이라는 말을 선조에게 아뢰었는데, 이 말을 듣고 난 후 선조는 다른 후궁들에게 더욱 모질게 대하였다. 그런 왕을 소용 김씨(훗날의 인빈 김씨)가 극진히 모셔 선조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인빈은 왕에게 공빈의 허물을 자주 들춰내었고, 이 때문에 선조는 공빈을 애도하는 마음이 점점 적어지게 되었다. 훗날 인빈에 대한 선조의 총애는 이전에 공빈에 대한 것보다 훨씬 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1572년(선조 5년)에 선조의 서장자인 임해군을 낳았으며, 서차자 광해군을 낳은 지 2년 만인 1577년(선조 10년) 음력 5월 27일에 산후병으로 죽었다. 임해군은 선조의 첫 아들이었으나 성격이 난폭하여 세자에 오르지 못하고 둘째 아들인 광해군이 세자가 된다.
이후 공빈 김씨의 아들인 광해군이 왕위에 올라, 그녀를 자숙단인공성왕후(慈淑端仁恭聖王后)로 추존하고 사당의 이름은 봉자(奉慈)라 하였으며, 능호는 성릉(成陵)이라 하였다. 1613년에는 사신을 파견하여 명나라로부터 책봉고명을 받아오기도 했다. 1616년(광해군 8년) 명헌의 존호가 더해졌다. 그러나 1623년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그녀의 위치도 원래대로 돌아갔고 그녀의 왕후로서의 시호와 왕릉도 모두 추탈되고 격하되었다. 다만 추숭 당시에 만들었던 석물들은 그대로 보존하였기 때문에 여느 왕릉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재 그녀의 묘인 성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에 있으며,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65호로 지정되었다.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대, 517년, 1392 - 1910 ]
원(園) 13기(基)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호)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호)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호)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王)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기(基)
익종(翼宗) 一 수릉(綏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一 융릉(隆陵 : 사적 제206호)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一 영릉(永陵 : 사적 제205호)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一 장릉(章陵 : 사적 제202호)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一 경릉(敬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墓) 2기(基)
제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一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호)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제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一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호)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기(基)
제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一 유릉(裕陵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제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一 홍릉(洪陵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시
왕릉 35기
제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一 예릉(睿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一 경릉(景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제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一 인릉(仁陵 : 사적 제194호)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제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一 건릉(健陵 : 사적 제206호)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제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二 홍릉(弘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一 원릉(元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二 혜릉(惠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一 의릉(懿陵 : 사적 제204호)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三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二 익릉(翼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一 명릉(明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제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一 숭릉(崇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一 영릉(寧陵 : 사적 제195호)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제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二 휘릉(徽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一 장릉(長陵 : 사적 제203호)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제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二 성묘(成墓 : 사적 제365호)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제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一 목릉(穆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一 강릉(康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一 효릉(孝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洞)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四 태릉(泰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四 태릉(泰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三 희릉(禧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二 온릉(溫陵 : 사적 제210호)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一 정릉(靖陵 :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三 회묘(懷墓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二 순릉(順陵 : 사적 제205호)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一 선릉(宣陵 :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路)
제8대 예종(第八代 睿宗) 二 공릉(恭陵 : 사적 제205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제8대 예종(第八代 睿宗) 一 창릉(昌陵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7대 세조(第七代 世祖) 一 광릉(光陵 : 사적 제197호)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제6대 단종(第六代 端宗) 二 사릉(思陵 : 사적 제209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제6대 단종(第六代 端宗) 一 장릉(莊陵 : 사적 제196호)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제5대 문종(第五代 文宗) 一 현릉(顯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4대 세종(第四代 世宗)
제3대 태종(第三代 太宗)
제2대 정종(第二代 定宗)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三 정릉(貞陵 : 사적 제208호) : 서울 성북구 정릉2동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二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一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호)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목조-덕릉 효공왕후 이씨-안릉 익조-지릉 정숙왕후 최씨-숙릉 , 손씨 도조-의릉 경순왕후 박씨-순릉, 조씨 환조-정릉 의혜왕후 최씨-화릉, 이씨, 정빈 김씨 태조-건원릉 신의왕후 한씨-제릉 신덕왕후 강씨-정릉 정종-후릉 정안왕후 김씨-후릉 태종-헌릉 원경왕후 민씨-헌릉 세종-영릉 소헌왕후 심씨-영릉 문종-현릉 현덕왕후 권씨-현릉 단종-장릉 정순왕후 송씨-사릉 세조-광릉 정희왕후 윤씨-광릉 예종-창릉 장순왕후 한씨-공릉 안순왕후 한씨-창릉 성종-선릉 공혜왕후 한씨-순릉 폐비 윤씨-회묘 정현왕후 윤씨-선릉 연산군-연산군묘 폐비 신씨-연산군묘 중종-정릉 단경왕후 신씨-온릉 장경왕후 윤씨-희릉 문정왕후 윤씨-태릉 인종-효릉 인성왕후 박씨-효릉 명종-강릉 인순왕후 심씨-강릉 선조-목릉 의인왕후 박씨-목릉 인목왕후 김씨-목릉 광해군-광해군묘 폐비유씨-광해군묘 인조-장릉 인렬왕후 한씨-장릉 장렬왕후 조씨-휘릉 효종-영릉 인선왕후 장씨-영릉 현종-숭릉 명성왕후 김씨-숭릉 숙종-명릉 인경왕후 김씨-익릉 인현왕후 민씨-명릉 인원왕후 김씨-명릉 경종-의릉 단의왕후 심씨-혜릉 선의왕후 어씨-의릉 영조-원릉 정성왕후 서씨-홍릉 정순왕후 김씨-원릉 정조-건릉 효의왕후 김씨-건릉 순조-인릉 순원왕후 김씨-인릉 헌종-경릉 효현왕후 김씨-경릉 효정왕후 홍씨-경릉 철종-예릉 철인왕후 김씨-예릉 고종-홍릉 명성황후 민씨-홍릉 순종-유릉 순명효황후 민씨-유릉 순정효황후 윤씨-유릉 |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