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능 (陵) - 3
(4) 제13대 명종(明宗, 1534-1567) _ 강릉 康陵
왕릉은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들의 무덤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왕릉은 42기 (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기,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園)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墓)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기(능40, 원14, 묘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능3, 원4, 묘5)입니다
사후에 왕(王)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기(基)
폐위(廢位)된 묘(墓) 2기(基)
황제릉(皇帝陵) 2기(基)
왕릉 35기
1. 추존이라는 미명으로, 역사세우기
추존(追尊)왕 ‘함길도 8릉’
2. 왕조, 문을 열다
제1대 태조 (太祖, 1335-1408) _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 정릉 貞陵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제2대 정종 (定宗, 1357-1419) _ 후릉 厚陵
제3대 태종 (太宗, 1367-1422) _ 헌릉 獻陵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제4대 세종 (世宗, 1397-1450) _ 영릉 英陵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제5대 문종 (文宗, 1414-1452) _ 현릉 顯陵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제6대 단종 (端宗, 1441-1457) _ 장릉莊陵, 사릉思陵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제7대 세조 (世祖, 1417-1468) _ 광릉 光陵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추존(追尊)왕 덕종 (德宗, 1438-1457) _ 경릉 敬陵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제8대 예종 (睿宗, 1450-1469) _ 창릉昌陵, 공릉恭陵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제9대 성종 (成宗, 1457-1494) _ 선릉宣陵, 순릉順陵, 회묘 懷墓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3. 왕조, 산을 넘다
제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_ 연산군묘 燕山君墓
제11대 중종(中宗, 1488-1544) _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 泰陵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제12대 인종 (仁宗, 1515-1545) _ 효릉 孝陵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제13대 명종(明宗, 1534-1567) _ 강릉 康陵, 순창원 順昌園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제14대 선조 (宣祖, 1552-1608) _ 목릉 穆陵, 성묘 成墓, 순강원 順康園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4. 조선, 또 다시 위기를 맞다
제15대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_ 광해군묘 光海君墓
추존(追尊)왕 원종 (元宗, 1580-1619) _ 장릉 章陵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5. 왕조, 반석을 다지다
제16대 인조 (仁祖, 1595-1649) _ 장릉 長陵, 휘릉 徽陵, 소경원 昭慶園, 영회원 永懷園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6. 조선, 당쟁에 휩싸이다
제17대 효종 (孝宗, 1619-1659) _ 영릉 寧陵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제18대 현종 (顯宗, 1641-1674) _ 숭릉 崇陵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7. 환국정치로 왕권을 다지다
제19대 숙종 (肅宗, 1661-1720) _ 명릉明陵, 익릉 翼陵, 대빈묘大嬪墓, 소령원昭寧園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제20대 경종 (景宗, 1688-1724) _ 의릉懿陵, 혜릉惠陵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8. 조선, 르네상스를 맞다
제21대 영조 (英祖, 1694-1776) _ 원릉元陵, 홍릉弘陵, 수경원綏慶園, 수길원 綏吉園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추존(追尊)왕 진종(眞宗) _ 영릉永陵
추존(追尊)왕 장조(사도세자 莊祖) _ 융릉隆陵, 의령원 懿寧園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제22대 정조(正祖, 1752-1800) _ 건릉健陵, 휘경원徽慶園, 효창원 孝昌園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9. 조선, 세도정치에 휘둘리다
제23대 순조 (純祖, 1790-1834) _ 인릉仁陵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추존(追尊)왕 익종 (翼宗, 문조 文祖) _ 수릉綏陵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제24대 헌종 (憲宗, 1827-1849) _ 경릉景陵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제25대 철종 (哲宗, 1831-1863) _ 예릉睿陵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10. 오백 년 왕조, 문을 닫다
제26대 고종황제 (高宗, 1852-1919) _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 흥원 興園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제27대 순종황제 (純宗, 1874-1926) _ 유릉裕陵, 영원英園, 숭인원 崇仁園, 회인원 懷仁園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4) 제13대 명종(明宗, 1534-1567) _ 강릉 康陵
살아서도 죽어서도 치마폭에서 헤어날 길 없어
강릉 康陵
명종 (明宗, 1534-1567), 인순왕후 심씨 (仁順王后 沈氏; 1532-1575),
1567년, 서울 노원구 201호, 태강릉
明宗(이환; 1534-1567, 재위 22년)과 비(妃)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 沈氏; 1532-1575)의 강릉은 현재 원형보존을 위해 비공개 능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명종의 생모 문정왕후(文定王后;중종의 제2계비)의 태릉(泰陵)과 함께 능 위치나 의미에 많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능이라면 태릉 입구에라도 강릉(康陵)에 대한 보다 자세한 안내나 설명이 아쉽습니다.
왕과 왕비의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조성되었고, 두 능의 봉분에는 모두 병풍석(屛風石)을 두르고 난간석(欄干石)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좌우측 무인석(武人石)의 외형이 서로 다르게 생긴 것입니다.
사료(史料)에 의하면 선조 4년[1571년]에 강릉(康陵)의 정자각(丁字閣)에 화재가 나자 임금과 세자가 의복을 갈아입고 풍악(風樂)을 금하며 반찬 수를 줄이는 등 근신(謹愼)의 예를 다했다고 합니다.
강릉은 조선 13대 임금인 명종과 왕비 인순왕후 심씨의 능이다. 한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마련하여 쌍릉으로 조영하였다, 태릉과 마찬가지로 병풍석을 두르고 12칸의 난간석으로 연결되어 있다.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으며, 만석에 다시 십이간지를 문자로 새겼다.
진입공간에 금천교가 남아 있으며 정자각 왼편 계류에는 보면 둥근 어정(御井)이 있다. 어정이란 왕이 왕래할 때 마실 물을 마시거나 제례시를 위해 판 우물을 말한다. 광릉, 숭릉 등지에서도 이를 볼 수 있으나 강릉의 것이 원형에 가깝다.
강릉의 문석인은 신체 대비 머리의 비례가 크고, 목이 짧게 조각되었다. 복두를 쓰고 관복을 걸친 관료의 차림을 하고 있다. 무석인은 왼편과 오른편의 조각이 조금씩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오른쪽은 투구가 작고 가슴 전면에 파도 문양이 조각된 반면, 왼쪽 무석인은 팔꿈치에 구름 문양, 등 위와 무릎 부분에 비늘 문양을 새기고 있다.
명종은 유일한 아들이었던 순회세자를 이른 나이에 잃고, 2년 후에는 어머니인 문정왕후를 여의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 워낙 병약했던 명종은 세자와 모후를 잃은 허탈감에 마음의 병까지 더하여 34세의 나이로 1567년(선조 즉위) 6월 28일 경복궁 양심당에서 승하하였다. 묘호를 명종, 능호를 강릉으로 정한 후 같은 해 9월 22일 태릉 동쪽 언덕에 안장되었다.
그로부터 다시 8년 후인 1575년(선조 8) 1월 2일 44세를 맞은 명종의 비 인순왕후가 승하하였다. 선조는 시호와 존호를 올리고 그 해 4월 28일 명종 왕릉인 강릉에 쌍릉으로 왕비릉을 조성하였다.
명종(明宗) 이환(李峘)은 중종(中宗)과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 사이에서 1534년(중종 29) 5월 22일에 태어났다. 처음에 경원대군(慶原大君)으로 봉해졌다가 장경왕후(章敬王后)가 낳은 이복형 인종(仁宗)이 왕위에 올랐으나 7개월여 만인 1545년 7월 1일에 승하하자 7월 3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조선 13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당시에 명종의 나이 12살이니 생모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되었는데,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시작하자마자 자신보다 먼저 중종의 계비로 있었던 장경왕후 윤씨의 친정 형제를 중심으로 한 일파인 대윤(大尹)을 제거하는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켰다. 수렴청정이 끝난 뒤에도 중종의 무덤을 성종(成宗)의 무덤 옆으로 억지로 이장(移葬)을 하는 일도 저질렀다. 이장을 한 이듬해인 1565년에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죽었는데, 명종은 문정왕후 사후(死後)에서야 중종의 무덤을 좋지 않은 곳으로 옮기는 바람에 세자가 죽게 되는 변이 일어났다고 한탄을 하였다.
또한 후세 사람들이 문정왕후를 일러 킹메이커라고 지칭할 정도로 명종을 왕으로 만드는 데 공헌했음을 인정은 하였으나, 지나치게 왕권에 간섭을 하여 백성이 편안하지를 못하였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만도 참 다행이다.”라고 사관(史官)들이 당시를 평가를 할 정도였다. 이처럼 명종은 자신이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가 어머니와 외가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등 그야말로 왕권이 뭇 사람들에 의해 짓밟히고, 죄 없는 신하들이 유배되거나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문정왕후 사후에서야 비로소 명종은 소윤(小尹)의 실세인 외삼촌 윤원형(尹元衡)을 내치면서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뜻을 채 이루기도 전인 1567년(명종 22) 6월 28일 경복궁 양심당(養心堂)에서 명종은 심열병(心熱病)으로 승하를 하였다. 같은 해 9월 22일에 현재 서울 노원구 공릉2동에 있는 문정왕후의 무덤인 태릉(泰陵) 왼쪽 언덕에 남동향(亥坐巳向)으로 장사를 지내고 능호를 강릉(康陵)이라 하였다.
태릉은 조선 제11대 중종(재위 1506∼1544)의 두번째 부인인 문정왕후 윤씨(1501∼1565)의 무덤이다.
강릉은 조선 제13대 명종(재위 1545∼1567)과 그의 부인인 인순왕후 심씨(1532∼1575)의 무덤이다.
왕비가 죽은 후 왕의 옆에 무덤을 쓴 쌍릉의 형태를 하고있다.
태릉과 같은 병풍석이 둘러져 있으며 돌로된 등인 장명등은 16세기 복고풍의 특색을 보여준다.
명종은 외아들인 순회세자를 잃어 후사가 끊기자 자신의 사후에 덕흥군(德興君)의 3남 이균(李鈞)을 후사로 삼겠다는 글을 1565년에 남겼었다. 이 일을 인순왕후(仁順王后)가 전하고, 대신들도 이미 알고 있어 이균이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선조(宣祖) 임금이다. 선조의 아버지 덕흥군은 중종의 후궁인 창빈안씨(昌嬪安氏)가 낳은 둘째 아들이었다. 한편 선조의 나이가 어리니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인순왕후는 1532년(중종 27) 돈녕부사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鋼)의 딸로 태어나 1545년에 명종비로 책봉되었었다. 1575년(선조 8) 1월 2일 창경궁 통명전(通明殿)에서 승하하자 같은 해 4월 28일 명종의 무덤 왼쪽에 장사를 지냈다. 이 때 사헌부 지평 민순(閔純)이 졸곡제(卒哭祭)를 지낸 후에는 흰 옷, 흰 모자, 흰 요대, 흰 신발 차림으로 정사를 볼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것은 송(宋)나라 효종(孝宗)의 예에 따른 것이다. 그 동안에는 흰 옷에 검은 모자와 검은 요대 차림으로 정사를 보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제도라는 민순의 지적으로 인순왕후 때부터 고쳐 시행하게 되었다.
명종과 인순왕후의 무덤인 강릉은 주산에서부터 내려오는 생기(生氣)를 혈(穴)까지 전달해주는 내룡(來龍)이 혈 직전에서 심하게 굽었는데, 이것은 바로 자신의 뜻보다는 문정왕후에 의해 억지로 의사를 결정하였던 시절을 느끼게 해주는 형국이다. 또 신하를 상징하는 안산(案山)이 여러 개의 봉우리로 나뉘어 졌으니 이 또한 명종 자신의 주관 보다는 외가를 중심으로 한 소윤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던 자신의 정치 역경을 말해 주고 있다. 청룡과 백호는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양 팔처럼 포근하게 혈을 감싸주어야 제격이나 높이가 다소 낮아 어머니 품에서 언제 떨어질지 몰라 불안해하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토질만은 밝고 단단해서 임금을 따르는 신하와 백성들이 자신의 뜻을 받들고 있으니 명종 임금은 그나마 다행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조선 제11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 윤씨를 모신 태릉과 그분들의 아들과 며느리가 되는 명종과 그의 비 인순왕후 심씨를 모신 강릉을 합하여 태강릉이라고 한다.
태릉은 태릉푸른동산과는 철조망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강릉은 이곳에서 동북방향으로 900미터 정도 떨어진 위치에 있으나 이 강릉은 현재 원형보존을 위해 비공개 능으로 지정되어 있다. 명종의 능인 강릉이 생모 문정왕후와 능의 위치에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능이라면, 비록 비 공개릉이라고는 하나 태릉 입구에라도 강릉(康陵)에 대한 보다 자세한 안내나 설명이 필요하리라 사료된다.
문정왕후의 능인 태릉은 단릉형식으로 조성되어 있고, 동북쪽에 있는 명종과 그의 비 인순왕후 심씨의 능은 동원이강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태릉과는 철조망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있는 이 곳은 들어가는 입구에 푸른동산과 태릉, 국제사격장이라는 푯말이 같이 있다. 입구에서 표를 끊고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푸른동산의 야외수영장과 관리사무소, 운영본부 건물이 보이고, 앞으로 서 있는 건물들이 사격장이다. 그리고 여기서 멋모르고 왼쪽으로 가면 모퉁이를 돌자마자 놀라게 된다. 덩치 좋은 군인들이 총을 들고 서 있다. 이 곳은 육군 체육부대, 당연히 민간인의 출입은 통제된다.
사격장 건물을 따라 오른쪽으로 가면 사격장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후문 방향과 클레이 사격장 방향으로 나뉜다. 후문은 대부분의 경우 굳게 닫혀 있으니 당연히 위로 발길을 돌리는데, 이곳의 백미(白眉)는 클레이 사격장까지 들어가는 500여 m의 길이다. 좌우로 나무들이 빽빽하고 도로는 한적하다. 길의 초입 부분에는 여러 종류의 새들과 원숭이 우리가 있어 아이들을 데리고 갈 때면 반드시 이 곳을 먼저 들러야 한다.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왼쪽으로 분위기 좋은 벤치가 군데군데 놓여 발길을 멈추게 한다. 이 곳에서 도시락을 까먹어도 좋고 한담을 나누며 데이트를 즐겨도 좋다.
길을 따라 어느 정도 오르다 보면 난데없는 총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데 놀라지 않아도 된다. 선수들이 연습하는 것이 분명하니까. 다 올라가면 클레이 사격장이 보이고 여기에 있는 식당에서 간단한 요기를 할 수도 있다. 이 곳에는 영화나 TV 속에서 보았던 사격장이 펼쳐져 있다. 만일 운이 좋다면 관중석에 느긋하게 앉아서 음료수를 마시며 선수들이 사격하는 모습을 즐길 수도 있다.
문정왕후의 태릉을 지나 삼육대학교로 가면 정문 앞 오른쪽에 철문이 숲으로 들어가는 길을 가로막고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철문 너머 오솔길 오른편의 안내판을 읽어보면 이곳이 비공개 왕릉인 강릉(康陵)의 입구임을 알 게 된다. 안내판에는 원형보존을 위해 능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안내문이 적혀있다. 안내판에서 홍살문이 있는 곳까지는 나무가 우거져서 대낮에도 어둑어둑하다. 홍살문에 이르면 비공개릉에 걸맞지 않게 큼지막한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을 앍어보면 강릉이 태릉의 동쪽 산기슭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좌향이 "해좌사향"(북북서에서 남남동 방향)인 명종(1534-1567, 재위 22년)과 비(妃)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 沈氏; 1532-1575)의 능은 현재 원형보존을 위해 비공개 능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명종의 생모 문정왕후(文定王后;중종의 제2계비)의 태릉(泰陵)과 함께 능 위치에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능이라면 태릉 입구에라도 강릉(康陵)에 대한 보다 자세한 안내나 설명이 있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왕과 왕비의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조성되었고, 두 능의 봉분에는 모두 병풍석(屛風石)을 두르고 난간석(欄干石)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특이한 점은 좌우측 무인석(武人石)의 외형이 서로 다르게 생긴 것이다.
사료(史料)에 의하면 선조 4년[1571년]에 강릉(康陵)의 정자각(丁字閣)에 화재가 나자 임금과 세자가 의복을 갈아입고 풍악(風樂)을 금하며 반찬 수를 줄이는 등 근신(謹愼)의 예를 다했다고 한다.
명종(明宗)은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것은 자신이 권력을 움직일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곧 생모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섭정(攝政)은 외척(外戚)의 전횡(專橫)이라는 비리를 양산하게 되고 국정의 혼란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명종대의 권력의 문란함은 내외의 혼란을 야기시켜 밖으로는 '을묘왜변(乙卯倭變)', 안으로는 임꺽정(林巨正) 같은 군도(群盜)의 만연 등 국가의 기강이 흔들리는 사건들이 이어지게 된다.
귀 여린 왕
명종 (明宗,이환; 1534-1567, 재위 22년))
명종(明宗)은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이 권력을 움직일 수 없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곧 생모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섭정(攝政)은 외척(外戚)의 전횡(專橫)이라는 비리를 양산하게 되고 국정의 혼란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복형제(異服兄弟)의 왕위 계승이 이어진 것도 권력 암투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명종대의 권력의 문란함은 내외의 혼란을 야기시켜 밖으로는 '을묘왜변(乙卯倭變)', 안으로는 임꺽정(林巨正) 같은 군도(群盜)의 만연 등 국가의 기강이 흔들리는 사건들이 이어지게 됩니다.
명종은 중종의 둘째 아들로 1534년(중종 29) 5월 22일 태어났다. 1539년(중종 34) 12월 21일 경원대군에 봉해졌으며, 1542년(중종 37) 11월 심강의 딸과 결혼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545년 7월 6일 인종의 뒤를 이어 경복궁 근정전에서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탓에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을사사화, 양재역 벽서 사건 등을 계기로 윤원형을 비롯한 외척과 소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왕권은 실추되고 외척 일족의 수탈로 민생이 피폐하여 사회가 불안하였으며, 거듭되는 흉년으로 민심이 흉흉해졌다.
명종이 20세가 되던 해인 1553년(명종 8)에는 문정왕후가 8년 간의 수렴청정을 거두고 친정을 하게 되었다. 명종은 외척을 견제하고 고른 인재 등용을 하려 했으나, 당쟁과 파당의 문란한 정치를 막을 길이 없었다. 게다가 친정이라고 해도, 큰 일은 일일이 문정왕후의 지시를 받아 처리해야 했으므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 와중에 양주 출신 백정 임꺽정이 의적 행각을 벌였는데, 『명종실록』의 사신은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라고 평할 만큼 조정은 어지러운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명종은 이러한 가운데 1567년(명종 14) 6월 28일 경복궁 양심당에서 34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이익은 자신의 저서 『성호사설』에서 조선의 3대 도둑을 홍길동, 장길산 그리고 임꺽정으로 꼽았다. 이 중 임꺽정은 16세기 중반 명종 재위 시에 함경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도둑으로 양주의 백정 출신이다. 자신의 천한 신분에 대한 불만을 품고 무리를 지어 다니며 도둑질을 일삼다가 훔친 곡식 등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줘 의적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명종 대에 정치적인 혼란과 흉년이 이어지는데다, 관리들의 타락과 부패가 심해져 민심이 흉흉하자, 세력을 모아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곡식들을 빈민에게 나눠주며 의적 행각을 벌였다. 1559년(명종 14)에는 개성까지 쳐들어가 도둑질을 하는 등 과감하게 행동 반경을 넓혔다가 참모와 가족들이 체포되면서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임꺽정 일당에 대한 다음과 같은 사신의 평이 『명종실록』에 실려 있다. 국가에 선정(善政)이 없고 교화가 밝혀지지 않아 재상들의 횡포와 수령들의 포학이 백성들의 살과 뼈를 깎고 기름과 피를 말려 손발을 둘 곳이 없고 호소할 곳도 없으며 기한(飢寒)이 절박하여 하루도 살기가 어려워 잠시라도 연명(延命)하려고 도적이 되었다면, 도적이 된 원인은 정치를 잘못하였기 때문이요 그들의 죄가 아니다. 어찌 불쌍하지 않은가.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1546 | 1년 | 7월, 서경덕(徐敬德) 사망{1489- } | 1555 | 10년 | 5월, 이윤경 왜적 대파 {을묘왜변} |
1548 | 3년 | 10월, 이황(李滉) 풍기군수(豊基郡守)됨 | 1556 | 11년 | 2월, 왜구 대비로 무과(武科) 실시 |
1550 | 5년 | 10월, <중종실록><인종실록> 완성 | 1557 | 12년 | 8월, 세자 책봉례(世子冊封禮) 행함 |
12월, 선(禪)교(敎)양종(兩宗)을 다시 둠 | 12월, 폐비 신씨{단경왕후}죽음{1487- } |
1551 | 6년 | 6월, 보우(普雨) 봉은사 주지 됨 | 1559 | 14년 | 3월, 황해도 의적(義賊)임꺽정 횡행 |
1552 | 7년 | 4월, 선과를 둠 | 1563 | 18년 | 9월, 왕세자 죽음 |
1553 | 8년 | 7월, 대왕대비 정치(政治) 왕에게 넘김 | 1565 | 20년 | 4월, 대왕대비{문정왕후} 승하{1501- } |
1554 | 9년 | 9월, 경복궁 중건 및 동궁(東宮)조성 | 6월, 제주목사(牧使) 보우 장살(杖殺) |
1555 | 10년 | 5월 전라도 달량포에 왜변(倭變) | 1567 | 22년 | 6월, 왕 승하-하성군 전위-왕대비 섭정 |
수차의 전래
다산정책
군주의 성심론
기청제란 무엇인가?
가치 있는 삶의 모습
부마의 비위
겨울에 꽃 피우기
국왕 경호 능력은?
눈물의 제왕, 명종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윤원 형의 득세
소윤파의 대윤파 제거
윤원형의 악행
이량의 등장
사회의 혼란
문정왕후의 죽음및 평화회복
을사사화
양재역 벽서사건
을묘왜변
인순왕후 심씨
순회세자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 沈氏; 1532-1575)
인순왕후 심씨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鋼)의 딸로 태어나 명종과의 슬하에 순회세자(順懷世子)를 두었으나 세자가 어린 나이에 요절하게 되어 슬하의 자식으로 역시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명종(明宗) 승하 후 중종(中宗)의 일곱 번째 아들이었던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 아들{선조(宣祖)}이 14대 왕위에 즉위하게 됩니다.
인순왕후 심씨는 청릉부원군 심강의 딸로 1532년(중종 27) 태어났다. 1545년(인종 1) 명종이 즉위하면서 함께 왕비로 책봉되었다. 1551년(명종 6) 6월 5일에는 원자를 낳았고, 1557년(명종 12) 12월 8일 원자가 5세에 이르자 세자에 책봉되었다. 원자는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서 다섯 살인데도 영명하고 슬기로움이 이미 나타났으니 실로 종사의 한없는 경사라고 칭할 정도였다.
그러나 하나뿐인 아들이었던 순회세자는 1563년(명종 18) 9월 13세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하직하였다. 어린 아들을 떠나보낸지 4년 후에는 남편인 명종도 승하하였다. 인순왕후는 명종이 죽은 후 선조가 즉위하자 잠시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1568년(선조 1) 7월에 선조가 친정을 하도록 물러나 주었다. 1575년(선조 8) 1월 2일 44세의 나이로 창경궁 통명전에서 승하하였다.
왕이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미처 정하지 못하고 승하하면, 왕위를 누구에게 물려줄 것인가의 결정권은 형식적으로나마 대비에게로 이양된다. 대비는 사적으로는 새로 왕이 될 자의 어머니이며, 선왕의 부인이다. 비록 남편이 죽고 없지만 대비는 국모로서의 권한과 함께 왕실의 최고 어른이라는 지위를 갖는 것이다.
인순왕후는 명종이 임종을 맞을 당시 양심당의 소침 병풍 뒤에서 명종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다. 명종과 인순왕후 둘 사이에는 아들 순회세자가 요절한 탓에 명종의 뒤를 이을 자가 없었다. 그러나 생전에 명종은 자신의 이복형인 덕흥군(중종과 후궁 창빈 안씨 사이의 아들)의 아들 하성군을 의중에 두고 있었다. 이와 같은 명종의 의중을 알고 있었던 인순왕후는 당시 16세이던 하성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다. 그가 조선의 14대 왕 선조이다.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대, 517년, 1392 - 1910 ]
원(園) 13기(基)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호)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호)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호)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王)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기(基)
익종(翼宗) 一 수릉(綏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一 융릉(隆陵 : 사적 제206호)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一 영릉(永陵 : 사적 제205호)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一 장릉(章陵 : 사적 제202호)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一 경릉(敬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墓) 2기(基)
제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一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호)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제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一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호)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기(基)
제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一 유릉(裕陵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제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一 홍릉(洪陵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시
왕릉 35기
제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一 예릉(睿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一 경릉(景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제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一 인릉(仁陵 : 사적 제194호)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제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一 건릉(健陵 : 사적 제206호)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제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二 홍릉(弘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一 원릉(元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二 혜릉(惠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一 의릉(懿陵 : 사적 제204호)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三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二 익릉(翼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一 명릉(明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제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一 숭릉(崇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一 영릉(寧陵 : 사적 제195호)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제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二 휘릉(徽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一 장릉(長陵 : 사적 제203호)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제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二 성묘(成墓 : 사적 제365호)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제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一 목릉(穆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一 강릉(康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一 효릉(孝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洞)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四 태릉(泰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四 태릉(泰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三 희릉(禧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二 온릉(溫陵 : 사적 제210호)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一 정릉(靖陵 :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三 회묘(懷墓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二 순릉(順陵 : 사적 제205호)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一 선릉(宣陵 :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路)
제8대 예종(第八代 睿宗) 二 공릉(恭陵 : 사적 제205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제8대 예종(第八代 睿宗) 一 창릉(昌陵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7대 세조(第七代 世祖) 一 광릉(光陵 : 사적 제197호)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제6대 단종(第六代 端宗) 二 사릉(思陵 : 사적 제209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제6대 단종(第六代 端宗) 一 장릉(莊陵 : 사적 제196호)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제5대 문종(第五代 文宗) 一 현릉(顯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4대 세종(第四代 世宗)
제3대 태종(第三代 太宗)
제2대 정종(第二代 定宗)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三 정릉(貞陵 : 사적 제208호) : 서울 성북구 정릉2동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二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一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호)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목조-덕릉 효공왕후 이씨-안릉 익조-지릉 정숙왕후 최씨-숙릉 , 손씨 도조-의릉 경순왕후 박씨-순릉, 조씨 환조-정릉 의혜왕후 최씨-화릉, 이씨, 정빈 김씨 태조-건원릉 신의왕후 한씨-제릉 신덕왕후 강씨-정릉 정종-후릉 정안왕후 김씨-후릉 태종-헌릉 원경왕후 민씨-헌릉 세종-영릉 소헌왕후 심씨-영릉 문종-현릉 현덕왕후 권씨-현릉 단종-장릉 정순왕후 송씨-사릉 세조-광릉 정희왕후 윤씨-광릉 예종-창릉 장순왕후 한씨-공릉 안순왕후 한씨-창릉 성종-선릉 공혜왕후 한씨-순릉 폐비 윤씨-회묘 정현왕후 윤씨-선릉 연산군-연산군묘 폐비 신씨-연산군묘 중종-정릉 단경왕후 신씨-온릉 장경왕후 윤씨-희릉 문정왕후 윤씨-태릉 인종-효릉 인성왕후 박씨-효릉 명종-강릉 인순왕후 심씨-강릉 선조-목릉 의인왕후 박씨-목릉 인목왕후 김씨-목릉 광해군-광해군묘 폐비유씨-광해군묘 인조-장릉 인렬왕후 한씨-장릉 장렬왕후 조씨-휘릉 효종-영릉 인선왕후 장씨-영릉 현종-숭릉 명성왕후 김씨-숭릉 숙종-명릉 인경왕후 김씨-익릉 인현왕후 민씨-명릉 인원왕후 김씨-명릉 경종-의릉 단의왕후 심씨-혜릉 선의왕후 어씨-의릉 영조-원릉 정성왕후 서씨-홍릉 정순왕후 김씨-원릉 정조-건릉 효의왕후 김씨-건릉 순조-인릉 순원왕후 김씨-인릉 헌종-경릉 효현왕후 김씨-경릉 효정왕후 홍씨-경릉 철종-예릉 철인왕후 김씨-예릉 고종-홍릉 명성황후 민씨-홍릉 순종-유릉 순명효황후 민씨-유릉 순정효황후 윤씨-유릉 |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