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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朝鮮王陵] 능(陵) - 3 (2) 제11대 중종(中宗) _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泰陵

草霧 2013. 8. 6. 15:57

 

 

 

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 - 3

 

 

 

 

(2) 제11대 중종(中宗, 1488-1544)

 

_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泰陵

 

11.중종 - 정릉(靖陵)

중종비 단경왕후 - 온릉(溫陵)

중종 계비 장경왕후 - 희릉(禧陵)

    중종 2계비 문정왕후 - 태릉(泰陵)

 

왕릉은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들의 무덤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왕릉은 42(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40, 14, 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3, 4, 5)입니다 .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폐위(廢位)된 묘() 2()

황제릉(皇帝陵) 2()

왕릉 35

 

 

 

 

 

1. 추존이라는 미명으로, 역사세우기

 

추존(追尊)함길도 8

 

 

2. 왕조, 문을 열다

 

1대 태조 (太祖, 1335-1408) _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 정릉 貞陵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2대 정종 (定宗, 1357-1419) _ 후릉 厚陵

 

3대 태종 (太宗, 1367-1422) _ 헌릉 獻陵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4대 세종 (世宗, 1397-1450) _ 영릉 英陵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5대 문종 (文宗, 1414-1452) _ 현릉 顯陵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6대 단종 (端宗, 1441-1457) _ 장릉莊陵, 사릉思陵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7대 세조 (世祖, 1417-1468) _ 광릉 光陵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추존(追尊)왕 덕종 (德宗, 1438-1457) _ 경릉 敬陵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8대 예종 (睿宗, 1450-1469) _ 창릉昌陵, 공릉恭陵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9대 성종 (成宗, 1457-1494) _ 선릉宣陵, 순릉順陵, 회묘 懷墓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3. 왕조, 산을 넘다

 

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_ 연산군묘 燕山君墓

 

11대 중종(中宗, 1488-1544) _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 泰陵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12대 인종 (仁宗, 1515-1545) _ 효릉 孝陵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13대 명종(明宗, 1534-1567) _ 강릉 康陵, 순창원 順昌園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14대 선조 (宣祖, 1552-1608) _ 목릉 穆陵, 성묘 成墓, 순강원 順康園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4. 조선, 또 다시 위기를 맞다

 

15대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_ 광해군묘 光海君墓

 

추존(追尊)왕 원종 (元宗, 1580-1619) _ 장릉 章陵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5. 왕조, 반석을 다지다

 

16대 인조 (仁祖, 1595-1649) _ 장릉 長陵, 휘릉 徽陵, 소경원 昭慶園, 영회원 永懷園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6. 조선, 당쟁에 휩싸이다

 

17대 효종 (孝宗, 1619-1659) _ 영릉 寧陵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18대 현종 (顯宗, 1641-1674) _ 숭릉 崇陵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7. 환국정치로 왕권을 다지다

 

19대 숙종 (肅宗, 1661-1720) _ 명릉明陵, 익릉 翼陵, 대빈묘大嬪墓, 소령원昭寧園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20대 경종 (景宗, 1688-1724) _ 의릉懿陵, 혜릉惠陵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8. 조선, 르네상스를 맞다

 

21대 영조 (英祖, 1694-1776) _ 원릉元陵, 홍릉弘陵, 수경원綏慶園, 수길원 綏吉園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추존(追尊)왕 진종(眞宗) _ 영릉永陵

 

추존(追尊)왕 장조(사도세자 莊祖) _ 융릉隆陵, 의령원 懿寧園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22대 정조(正祖, 1752-1800) _ 건릉健陵, 휘경원徽慶園, 효창원 孝昌園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9. 조선, 세도정치에 휘둘리다

 

23대 순조 (純祖, 1790-1834) _ 인릉仁陵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추존(追尊)왕 익종 (翼宗, 문조 文祖) _ 수릉綏陵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24대 헌종 (憲宗, 1827-1849) _ 경릉景陵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25대 철종 (哲宗, 1831-1863) _ 예릉睿陵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10. 오백 년 왕조, 문을 닫다

 

26대 고종황제 (高宗, 1852-1919) _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 흥원 興園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27대 순종황제 (純宗, 1874-1926) _ 유릉裕陵, 영원英園, 숭인원 崇仁園, 회인원 懷仁園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2) 제11대 중종(中宗, 1488-1544)

 

 

_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泰陵

 

원치 않는 자리에 올라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해

 

    중종20090815-6.JPG 

 

정릉靖陵

 

11.중종 - 정릉(靖陵) 

 

중종(中宗, 1488-1544), 1544, 서울 강남구 199, 선정릉(宣靖陵)

 

11대 중종(中宗) 정릉 큰이미지

      조선성종 선릉     

   정현왕후릉        조선중종 정릉            

11대 중종(中宗) 정릉 첫번째 작은이미지11대 중종(中宗) 정릉 두번째 작은이미지11대 중종(中宗) 정릉 세번째 작은이미지

 

 

정현왕후릉 조선성종선릉 조선중종정릉의 위치가 있는 지도맵이미지중종(이역;1488-1544, 재위39)의 정릉이 현 위치인 성종(成宗)의 선릉(宣陵)에 인접한 곳에 위치하기 까지는 많은 우여곡절(迂餘曲折)이 있었습니다. 또한 왕비(王妃)3명이나 되었으면서도 같은 곳에 능이 조성되지 못했는데, 그것은 세 번째 왕비였던 명종(明宗)의 생모(生母)인 제2 계비(繼妃) 문정왕후(文定王后) 때문입니다.

 

처음 중종 승하 후 제1계비였던 장경왕후(章敬王后) 능인 희릉(禧陵;서삼릉 소재) 옆에 조성되었으나, 1562[명종 17]에 당시 권력을 움직였던 문정왕후에 의해 현 위치로 옮겨진 것입니다. 겉으로는 풍수지리(風水地理)를 따라 옮겼다고 했지만, 오히려 지대가 낮아 자주 침수(沈水)되었기에 결국 중종의 옆에 같이 잠들고 싶었던 문정왕후는 자신의 능을 다른 곳{태릉}으로 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중종의 정릉(靖陵)을 잘못 옮김으로 인해 그 다음 해에 명종(明宗)의 세자인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서거하고, 2년 뒤에는 문정왕후 자신, 2년 뒤에는 명종(明宗)이 승하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결국 임진왜란 당시에 왜적(倭賊)에게 도굴까지 당하게 되는 비운의 능이 됩니다.

    

 

능역의 양식은 함께 있는 성종의 선릉(宣陵) 양식을 따라 웅장하게 조성되어 봉분의 병풍석(屛風石)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과 구름 문양까지 조각했습니다.

 

『삼강행실도』에 실린 효자도 문충정성 그림, 효자 문충이 일을 마친 뒤 먼길을 걸어 어머니를 문안하러 온다는 이야기이다.권력의 암투에 의해 임금의 능력이 시험대에 오른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중종대 역시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말았던 안타까운 시대라 할 것입니다. 중종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 슬하에서 태어나 자신의 이복(異服) 형이었던 연산군(燕山君)을 폐위했고, 자신의 부인{단경왕후}까지 폐위시킨 장본인 이었기에 처음부터 당대의 국왕의 힘은 필연적 한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조광조(趙光祖)의 이상적 정치의 실현이 좌초되었을 때{기묘사화(己卯士禍-1519)} 불안한 정국은 사회발전을 지체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발전한다는 진리처럼 권력 내부의 혼미는 외부의 결속을 가속화시키는 기반으로 작용했고 훈구세력의 몰락의 길이 열리기 시작한 시기도 또한 이때입니다.

 

정릉은 조선 11대 왕 중종의 능이다. 중종에게는 3명의 왕후와 7명의 후궁이 있었으나 사후에는 어느 왕비와도 함께 있지 못하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능인 선릉 옆에 홀로 묻혀, 조선시대의 몇 안되는 단릉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관련사진

 

정릉의 상설은 성종의 선릉과 같이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석양과 석호의 전체적인 자세는 선릉과 비슷하면서도 세부적인 표현에 있어서는 조금 더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반면 전체적으로 형식화된 경향이 있다. 문무석인은 높이가 3m가 넘을 정도로 큰 편이다. 문무석인 얼굴의 퉁방울눈이 특이하며 코 부분이 훼손되고 검게 그을려 있어 정릉의 수난을 상기시켜 준다. 석호의 익살스러운 입 모양은 보는 사람을 흐뭇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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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의 원찰인 봉은사는 보우가 주지로 있던 사찰로, 794년 연회국사가 견성사(見性寺)란 이름으로 창건한 이후 1498(연산군 4)에 중창하면서 봉은사로 개칭하였다.

 

(우편번호 135-090) 서울특별시 강남구 선릉로동 47길 5. 2호선 선릉역 8번출구로 나와서 도보로 5분거리에 있습니다.인종은 1545(인종 1) 15일 중종을 고양에 예장하고 능호를 희릉(禧陵)이라 하였다. 그리고 약 한 달 후, 고양시의 현재 서삼릉 능역 내에 있는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능 오른쪽 언덕에 능을 새로 조영하고, 능호를 정릉으로 고쳤다. 그로부터 17년 후인 1562(명종 17) 에 두 번째 계비 문정왕후에 의해서 중종의 아버지 성종과 어머니 정현왕후의 능이 있는 현재의 강남구 삼성동으로 옮겨졌다.

 

문정왕후가 봉은사 주지 보우와 의논하고, 그곳은 풍수지리가 좋지 않으며 선릉의 동쪽이 풍수상 길지라 하여 옮긴 곳이었으나 지세가 낮아 여름철 홍수 때면 재실과 홍살문이 침수되는 피해를 자주 입었다. 결국 중종과 함께 안장되기를 바랐던 계비 문정왕후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현재 태릉(泰陵)에 단릉(單陵)으로 안장되어 있다. 문정왕후의 바람으로 인해 천장된 현재의 정릉은 임진왜란 때 선릉과 함께 왜구에 의해 능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태워지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평화로운 선릉의 전경

 

중종(中宗)은 성종(成宗)과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 사이에서 성종 19년(1488) 3월 5일에 태어나 진성대군(晉城大君)으로 봉해졌다가 지중추부사 박원종(朴元宗), 전 참판 성희안(成希顔), 이조판서 유순정(柳順汀)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1506년 9월 2일 조선(朝鮮) 11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연산군(燕山君)으로 봉해진 이융(李㦕)은 성종과 계비 숙의윤씨(淑儀尹氏) 사이에서 태어난 성종의 장남으로 중종의 이복형(異腹兄)이다.

 

 

 

중종과 그 왕비의 능은 총 4기로 조선시대 27명의 왕 중에서 제일 많다. 왕후로 책봉된 3명의 부인과 중종의 무덤이 각기 다른 장소에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중종의 무덤 정릉(靖陵), 1499년 신수근(愼守勤)의 딸과 결혼을 하여 즉위 초기에 왕후로 책봉되었다가 후환이 두려운 대신들의 건의로 폐출된 단경왕후(端敬王后)의 무덤인 온릉(溫陵), 단경왕후를 폐하고 왕후로 책봉한 영돈녕부사 윤여필(尹汝弼)의 딸인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무덤 희릉(禧陵), 인종(仁宗)을 낳고 산후병으로 승하한 장경왕후의 뒤를 이어 1517년(중종 12)에 왕후로 책봉된 영돈녕부사 윤지임(尹之任)의 딸인 명종(明宗)의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무덤 태릉(泰陵) 등이다.

 

 

 

인자하고 유순한 면은 있었으나 결단성이 부족하여 좋아하고 싫어함이 분명하지 않아 어진 사람과 간사한 사람을 뒤섞어 등용하는 바람에 재위 38년 동안 정치적으로 혼란한 때가 더 많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중종이 1544년 11월 15일 유시(酉時)에 창경궁 환경전(歡慶殿)에서 승하였다. 당시에 중종의 국장(國葬)때 3가지 논란이 있었다. 첫째는 문정왕후가 대신들과 의논을 하지 않고 빈전(殯殿)의 설치장소를 일방적으로 결정을 한데 있었고, 둘째는 장지(葬地) 문제였다. 이미 결정된 장지를 두고 다른 곳을 찾아보라는 인종의 지시로 논란이 있었다. 총호사(摠護使) 윤인경(尹仁鏡)이 양주(楊州)·광주(廣州)·고양(高陽)에 있는 장지를 둘러보고 희릉(禧陵) 근처에 쓸 만한 땅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 곳이 바로 중종이 생전에 보아 두었던 곳으로 인종도 그 일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윤인경이 대동하였던 윤림(尹霖)이 처음과는 달리 말을 바꾸는 바람에 다른 장소를 찾아보도록 지시를 하였던 것이다. 세 번째는 묘호(廟號)를 중종으로 정하였으나, 중종은 공(功)과 덕(德)을 모두 갖추었는데 특히 덕보다는 공이 크니 종호(宗號)보다는 조호(祖號)로 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인종의 지시 때문이었다. 결국은 논란 끝에 처음에 결정된 대로 묘호는 중종으로, 장지는 희릉의 오른쪽으로 결정이 되어 이듬해 2월 9일에 장사를 지내고 능호(陵號)를 정릉(靖陵)이라 하였다.

 

 

중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인종이 채 1년도 되기 전에 승하하자 명종은 문정왕후의 지시로 중종의 무덤을 1562년 9월 4일에 선릉(宣陵)의 왼쪽 언덕에 남동향(乾坐巽向)으로 이장을 하였다. 문정왕후는 중종이 장경왕후와 나란히 있음을 시기하고, 사후에 자신이 중종의 옆에 묻히고 싶은 계략으로 이장을 하도록 하였다. 봉은사(奉恩寺) 주지 보우(普雨)가 밖에서 조종하고, 안에서는 문정왕후의 뜻을 받들어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킨 친정아우 윤원형(尹元衡)이 이장을 도왔다. 그러나 정릉을 옮긴 이듬해에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죽는 등 큰 변고가 잇따랐고, 문정왕후의 광중에서 돌이 나와 장지를 태릉(泰陵)으로 옮겨 장사지내니 중종의 옆에 묻히고 싶은 문정왕후는 그 뜻을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한편 장마 때마다 한강물이 불어나 홍살문까지 범람하여 제사 음식을 배(舟)로 옮겨야 하는 등 피해가 잇따랐고, 급기야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적군들이 능을 파헤치고 광중에 불을 지르는 일이 발생하였다. 대신들이 정릉을 이장한 뒤에 흉한 일이 많으니 희릉 옆으로 다시 옮기자는 상언을 하여 이장(移葬) 논의가 있었으나 끝내 이루지는 못하였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중종20090815-6.JPG 

 

왜적과 결탁하여 왕릉을 훼손한 백운기

 

백운기를 벌하라는 상소가 기록된 『선조실록』사진, 1593년(선조 26년) 11월 2일자의 기사.선조실록1593(선조 26) 112일자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실려 있다. 위관(委官) 유성룡이 아뢰기를, 백운기(白雲起)가 왜적과 서로 결탁하여 선릉(宣陵), 태릉(泰陵) 두 능을 파헤친 죄상을 이미 모두 승복했습니다. 큰 죄를 범한 사람이라서 잠시도 용납해 둘 수 없으니 결안 취초(決案取招)로 조율하여 시행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선릉과 정릉은 이와 같이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왕릉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태워지는 수모를 겪었다. 위의 기록은 백운기라는 자가 왜적의 앞잡이가 되어 능의 훼손에 일조를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에는 왕릉 능원 내의 나무 한 그루만 뽑아도 나라 밖으로 추방시키는 엄한 벌을 주었는데, 하물며 봉분과 재궁을 무참히 훼손하는데 가담하였으니, 백운기라는 자의 죄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철저한 유교주의자

 

   

 

중종(이역, 1488-1544, 재위39)

중종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 사이의 아들이자 10대 왕이었던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1488(성종 19) 35일 태어났다. 1494(성종 25) 진성대군(晋城大君)에 봉해졌다가 1506년에 연산군의 계속된 폭정을 바로잡기 위해 박원종, 성희안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에 의해 조선 11대 왕으로 추대되었다.

 

중종은 연산군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1515(중종 10) 이후에는 철인 군주정치를 표방한 조광조를 내세워, 훈구파를 견제하고 사림파를 등용하였으나, 위훈삭제 등 조광조 등의 과격한 개혁정책이 큰 반발을 불러와 기묘사화가 일어나는 등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그의 재위 중에 향약이 전국적으로 실시되어 유교적 향촌질서가 자리를 잡았으며, 인쇄술의 발달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많은 서적이 편찬되었다. 경제적으로도 동전의 사용을 적극 장려하고 도량형의 통일을 꾀하였으며, 사치를 금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연산군 축출에 반대한 아버지로 인해 폐위당한 단경왕후, 그 뒤를 이어 왕비가 되어 인종을 낳은 장경왕후, 또 그 뒤를 이어 왕비가 되어 명종을 낳은 문정왕후등 3명의 왕비가 있다. 1544(중종 39) 1115일 창경궁 환경전에서 57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1506(연산군 12) 중추부지사 박원종이 이조참판을 지낸 성희안, 이조판서 유순정, 군자부정 신윤무 등과 함께 연산군의 폭정에 반기를 들어 반정을 일으켰다. 그들은 밀약 후 왕이 장단 석벽에 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하기로 계획을 꾸몄다.

 

150691, 박원종, 성희안, 신윤무 등은 훈련원에 무사들을 집결시켰다. 훈련원을 출발한 반정세력은 창덕궁 어귀의 하마비동에서 영의정 유순, 우의정 김수동 등을 만나 함께 진을 치고 경복궁에 있는 대비(성종 계비 정현왕후)에게로 가서 거사의 사실을 알렸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대비는 신료들의 요청이 계속되자 연산군 폐위와 진성대군의 추대를 허락하는 교지를 내렸다. 교지를 받은 반정 주도세력들은 먼저 권신 임사홍, 신수근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인 다음 창덕궁을 에워싸고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하였다.

 

    관련사진

 

이튿날인 92일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텅 빈 창덕궁에 들어가서 연산군에게 옥새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사태가 기울었음을 안 연산군은 옥새를 내주었고, 반정군의 호위를 받으며 경복궁에 도착한 진성대군은 대비의 교지를 받들어 왕으로 등극하였으니, 그가 조선 11대 임금 중종이다.

 

연도

재위

사  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1506

1년

11월, 연산군 병으로 죽음{1476- }

1521

16년

6월, 노산군(魯山君) 부인 송씨(宋氏) {단종 비-정순왕후} 죽음{1440-}

1507

2년

6월, <연산군일기> 수찬 시작

1524

19년

11월, 김안로(金安老) 파직,유배됨

1509

4년

9월,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완성

1527

22년

3월, 동궁(東宮) 작서(灼鼠)의 변(變)

1510

5년

4월, 삼포왜란(三浦倭亂) 일어남

4월, 최세진 [훈몽자회(訓蒙字會)] 찬진

1513

9년

12월, 성균관 존경각(尊慶閣)서적 소실

1529

24년

5월, 김안로를 방면(放免)함 

1515

10년

2월, 원자(元子-仁宗) 출생

1531

26년

6월, 김안로 대호군(大護軍)이 됨 

8월, 박상(朴祥)등 단경왕후 복위 상소

1537

32년

1월, 모화관에 영조문(迎詔門) 세움

1517

12년

8월, 정몽주(鄭夢周)문묘(文廟)배향

8월, 희릉(禧陵)을 천장(遷葬)함 

1518

13년

9월, 소격서(昭格署)를 폐함

10월, 김안로 사사(賜死)하고 형제 유배

1519

14년

5월, 조광조(趙光祖) 대사헌 됨

1538

33년

11월, 성주사고(星州史庫) 전소(全燒)

12월, 조광조 사사(賜死)-기묘사화

1543

38년

10월, 주세붕(周世鵬) 백운동서원 세움 

1520

15년

11월, 골육상송(骨肉相訟)을 금함

1544

39년

11월, 왕 승하{1488- } 

 

관련사진새로운 인재등용제도

유학의 눈으로 본 불교

치민의 지혜

이혼과 재결합

궁궐은 얼마나 청결했나?

가요 금지 시대

단종의 후궁들

장녹수의 딸

왕자 사칭 사건

서점은 언제 설치되었나?

은으로 본 조선·일본·중국 관계

지붕 위 징소리

양아들의 법적 권리

11대 중종 정릉

칼이 없는 권력은 힘이 없다

 

 

 

 

 

 

생이별 최단명 왕비되어 잊혀진 여인으로 한평생 보내니

   

단경왕후20090814-11.JPG

              

온릉溫陵

 

 

    

중종비 단경왕후 - 온릉(溫陵)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 1487-1557), 1557, 경기 양주 210, 서오릉

 

중종의 정비(正妃)인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1487-1557)의 온릉은 왕비 책봉 1주일 만에 폐위되는 불우한 신씨의 일생을 대변하듯 조촐하게 조성되어, 현재 비공개 능으로 남아 있습니다. 단경왕후는 중종반정(中宗反政)에 반대했던 아버지{신수근}로 인해 폐위되어 1557[명종 12] 71세의 나이로 사저에서 승하한 뒤 본가 선영에 묻혔다가 1739[영조 15]에 복위(復位)되어 단경(端敬)의 시호와 온릉(溫陵)의 능호를 받고, 뒤에 추복된 단종(端宗)의 장릉(莊陵) 양식을 따라 능역이 조성되었습니다.

    

온릉은 폐비의 신분으로 승하한 단경왕후의 능이다. 따라서 능을 조영할 당시에는 왕릉의 상설을 갖추지 못하였으나 1739(영조 15) 복위되어 시호를 단경이라 하였으며 능호를 온릉으로 추복하고, 왕비의 능으로서 새롭게 조영하게 되었다. 병풍석과 난간석은 모두 생략하고 나머지 상설제도는 그대로 따른 형식이다. 곡장 내에는 석양과 석호 1쌍이 봉분을 수호하고 있으며, 무석인은 생략되었고, 문석인만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공개는 하지 않았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명릉길(용두동) 475-95폐비 신씨는 1557(명종 12) 127일 사저에서 71세의 나이로 후사없이 세상을 떠나 친정의 묘역에 안장되었으며, 1739(영조 15)에 복위되었다. 이 해 328일 영조는 폐비 신씨의 시호를 단경으로 올리고, 능호를 온릉으로 추복했으며, 4월에는 온릉의 상설을 새로 설치하면서 단종의 능인 장릉을 봉릉한 예를 따르도록 하되, 정릉과 사릉의 상설을 따르도록 했다.

 

중종(中宗)의 원비 단경왕후(端敬王后)는 1487년(성종 18) 1월 14일에 좌의정을 지낸 신수근(愼守勤)의 딸로 태어나 1499년(연산군 5년)에 성종(成宗)과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아들인 진성대군(晉城大君)과 결혼을 하였다. 1506년 9월 2일 지중추부사 박원종(朴元宗), 전 참판 성희안(成希顔), 이조판서 유순정(柳順汀)이 주동이 된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났다. 주동자들은 연산군(燕山君)의 처남(妻男)이며 진성대군의 장인인 신수근에게 “왕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자.”는 요청을 하였으나 거절당하자 그의 동생 신수영(愼守英)과 신수겸(愼守謙) 그리고 임사홍(任士洪)을 격살하였다.

 

 

이들을 제거한 박원종 등은 진성대군의 집에 사람을 보내어 거사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신변보호 조치를 내렸다. 같은 시간에 윤형로(尹衡老) 등은 경복궁에서 정현왕후를 만나 거사 내용을 설명하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합의를 이끌어 내고 있었다. 이쯤에서 주동자들은 진성대군을 사저에서 맞이해와 경복궁 사정전(思政殿)에 들게 한 후, 좌승지 한순(韓恂)과 내관 서경생(徐敬生)을 창덕궁으로 보내 왕에게 “인심이 모두 진성대군에게 돌아갔으니 옥새를 내주고 궁궐을 비워 달라.”고 하였다. 이때 왕은 “내 죄가 중대하여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말하고 옥새를 내 주었다. 그날 오후(未時)에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정현왕후가 “왕을 폐하여 연산군으로 삼아 강화도로 유배시키고, 진성대군 이역(李懌)을 새 왕으로 추대한다.”는 교지를 반포하였다.

 

단경왕후20090814-11.JPG

              

조선의 11대 왕으로 추대된 중종이 모든 신하와 백성의 하례를 받을 때 단경왕후도 왕비의 자리에 앉아 하례를 받았다. 그러나 신수근 형제와 임사홍을 제거한 박원종 등은 단경왕후가 왕비로 있으면 자신들의 뒷날이 불안함을 느껴 왕비를 폐출하도록 중종을 압박하였다. 그 때 중종은 조강지처(糟糠之妻) 임을 생각하여 머뭇거리다가 하는 수 없이 같은 달 9일에 왕비를 사저로 내 보냈다.

 

 

 

그 후 정현왕후는 후궁을 들여 행실을 관찰하다가 장경왕후(章敬王后)를 왕비로 간택을 하였다. 중종 10년(1515) 장경왕후가 인종(仁宗)을 낳고 7일 만에 산후병으로 승하하여 중전(中殿)의 자리가 비게 되자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순창군수 김정(金淨)이 “중종반정 당시에 후환이 두려운 박원종 일파가 죄 없는 왕비를 폐출하도록 하였으니 그 들의 관작을 추탈하여 큰 분수를 절대로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중전의 자리에 단경왕후를 다시 앉혀야 한다.”는 상언을 하였다.

 

 

 

 

이 상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국 단경왕후는 사저에서 명종 12년(1557) 12월 7일에 승하하였다. 폐출 당한 것이 그의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장례의 절차를 후하게 갖추지 아니 하여 많은 사람들이 슬퍼한 가운데 친정 조카인 신사원(愼思遠)이 상주(喪主)가 되어 장사를 지냈다. 장지는 신수근의 무덤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양주군 장흥면 수회동(水回洞) 남동향(亥坐巳向) 언덕이다. 현종(顯宗)과 숙종(肅宗) 때에 복위문제가 거론 되었으나 이루지 못하다가 영조 15년(1739) 5월에 시호를 단경왕후라 올리고, 신주를 고쳐 모시고, 능호를 온릉(溫陵)으로 올려 비로소 복위되었다.

 

석물(석인,석수)배치상태

석물(석인,석수)배치상태 온릉은 한북정맥 한강봉에서 분기된 산줄기가 챌봉을 지나 일영봉을 만든 다음 작은 봉우리를 일으켜 세워 온릉으로 맥(脈)을 연결해 주었다. 홍살문에서 능(陵)을 바라보면 더없이 아름답고 편안해 보이고, 청룡은 앞산까지 연결되어 능을 잘 감싸주고 있다. 살아서 남편으로부터 보호를 받아보지 못한 한을 죽어서야 이룬 분위기다. 그러나 앞산 뒤에서는 흉한 산 3개가 넘겨다보고 있는데 풍수에서는 이러한 산을 도적봉(窺峰)이라 한다. 오싹한 느낌이 드는 이 봉우리들이 마치 자신을 궁궐에서 내치도록 압박을 하였던 중종반정의 주동자들로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앞에서 이를 잘 막아주는 듬직한 신하(朱雀)가 있으니 그나마 위안이 된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7일간 왕비 자리에 있다가 쫓겨난 비운의 여인

 

    능비

 

중종(中宗) 원비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 1487-1557)

온릉전경

온릉전경 단경왕후 신씨는 연산군(燕山君)대 좌의정 신수근(愼守勤)의 딸로 태어나 1499[연산군 5] 13세 때에 당시 진성대군(晉城大君;中宗)과 혼인을 맺었으나, 몇 년 뒤 중종반정(中宗反政)은 온 집안의 몰락을 가져옵니다.

 

아버지의 반정(反政) 반대로 인한 죽음, 고모였던 연산군 부인 신씨(愼氏) 등의 폐위와 함께 1506년 왕비 책봉 7일만에 반정세력에 의해 폐위되는 운명을 맞습니다. 결국 슬하에 자식도 없이 권력의 암투 속에 희생양(犧牲羊)이 되고 말았던 안타까운 비운의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폐위 당시 20세였던 단경왕후는 155712771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대통을 이을 왕자를 낳고도 박복한 운명에 눈도 못 감아

 

희릉(장경왕후)20090922-8.JPG

 

희릉禧陵

 

중종 계비 장경왕후 - 희릉(禧陵)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1491-1515), 1562, 경기 고양 200, 서삼릉(西三陵)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 희릉 큰이미지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 희릉 첫번째 작은이미지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 희릉 두번째 작은이미지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 희릉 세번째 작은이미지

 

 

 

 

8대 예종(睿宗) 창릉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1491-1515)의 희릉은 중종의 정릉(靖陵)처럼 천장(遷葬)되어 현재의 서삼릉(西三陵) 능역 가운데에서 처음으로 조성된 능입니다. 원자{인종(仁宗)}를 낳고 151525세의 나이로 승하한 장경왕후는 처음 태종(太宗)의 헌릉(獻陵) 옆에 조성되었으나, 1537(중종 32)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습니다. 역시 중종의 부마(駙馬)였던 김안로(金安老)의 권력 암투가 희릉 천장(遷葬)의 사단(事端)이었습니다. 희릉은 봉분의 병풍석(屛風石) 없이 모든 양식을 조선 전기의 왕릉 양식에 따르는 전형적인 능역으로 조성되었습니다.

 

희릉은 조선 11대 임금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의 능이다. 병풍석 없이 난간만을 두른 단릉(單陵)으로 단아한 느낌이다. 배치나 수법은 조선 전기 양식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문석인과 무석인은 기둥 같은 몸체에 큰 머리를 올려놓았으며 목이 거의 없어 어깨가 약간 굽어보인다. 무석인은 큼직한 이목구비와 당당하고 위엄 있는 자세로 칼을 쥐고 있으나 그 갑옷의 조각 수법을 보면 작고 섬세한 문양들을 촘촘히 새기고 있다. 문석인 역시 큼직한 체구에 맞게 홀 역시 크게 묘사되어 있으며 두 손을 노출시켜 맞잡고 있다. 소매의 안쪽으로 작은 소매가 한 번 더 돌아가는 이중 소매를 보여 주고 있다. 측면의 소매 주름 또한 자연스럽게 흐르다가 끝부분에 가서 반전하는 곡선이 재미있다.

    

 

희릉은 처음에는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릉(獻陵)의 서쪽 언덕에 조성하였다, 그런데 중종의 부마가 된 김안로가 세자인 인종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자기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옥사를 일으켰다. 그 중 하나가 희릉 천릉사건이다. 이는 김안로가 희릉 밑에 큰 돌이 깔려 있어 불길하다 주장하여 1537(중종 32) 현재의 고양시 서삼릉으로 옮기고, 그와 동시에 당시 능을 조영하는데 관련되었던 자들을 처벌한 사건이다.

 

그 뒤 중종의 정릉이 희릉의 곁에 안장되면서 동원이강 형식의 능을 취하고 능호를 정릉으로 하였다. 1562(명종 17) 문정왕후에 의해 정릉은 현 강남구 삼성동의 선릉 곁으로 옮겨지고 장경 왕후의 능은 다시 희릉으로 부르게 되었다.

중종(中宗)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는 1491년 7월 6일 영돈녕부사 윤여필(尹汝弼)의 딸로 태어났다. 1506년 9월 2일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일으킨 주동자들은 왕을 폐하여 연산군(燕山君)으로 삼고,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한 일주일 만에 왕비 신씨(愼氏)를 폐출하였다. 대비 정현왕후(貞顯王后)에 의해 장경왕후는 숙의(淑儀)로 간택되어 궁중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듬해(1507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511년에 효혜공주(孝惠公主)를 낳고, 1515년(중종 10) 2월 25일에 인종(仁宗)을 낳은 지 일주일 만인 3월 2일 산후병으로 경복궁(景福宮)에서 승하하였다.

 

중종은 좌의정 정광필(鄭光弼)을 산릉의 일을 총괄하는 총호사(摠護使)로 임명하였다. 총호사는 장지(葬地)로 헌릉(獻陵, 태종의 무덤)과 경릉(敬陵, 의경세자의 무덤) 근처의 땅을 추천하면서 헌릉 옆은 산세가 장대하나 강을 건너는 불편함이 있고, 경릉 옆은 왕비를 모시기에 마땅하고 작업이 편리하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중종은 상지관(相地官) 조윤(趙倫)·황득정(黃得正)·송당(宋璫)·성담기(成聃紀) 등을 불러 쌍분을 조성할 수 있는 곳을 물은 뒤 헌릉 옆을 장지로 손수 선택하였다.

 

 

 

도승지 손중돈(孫仲暾)이 장지에서 돌아와 “땅을 1.5m 정도 파내려가니 큰 돌이 나와 그 바로 아래를 파보니 돌덩이가 있기는 하지만 파낼 수 있고, 산세(山勢)와 좌향(坐向)이 윗자리와 별반 다르지 않아 그 곳에 장사를 지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 보고하여 위치 변경에 대한 승낙을 받았다. 그해 윤 4월 4일에 장경왕후를 헌릉의 오른쪽 언덕에 남동향(乾坐巽向)으로 장사를 지내고 능호(陵號)를 희릉(禧陵)이라 하였다. 장경왕후를 장사 지낸지 22년이 지난 1537년(중종 32) 정광필을 모함하기 위한 김안로(金安老)를 중심으로 한 일파가 “희릉을 조성할 당시에 광중(壙中)에 돌이 있었음에도 이를 보고하지 않고, 그 돌을 쪼아내고 가린 뒤 무덤을 조성하였으니 현재는 광중에 물이 차있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희릉은 이장(移葬)을 하여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리자 군신(君臣)간에 논란이 벌어졌다. 중종은 “희릉은 22년여 동안 안온했는데, 광중에 돌이 있다고 의심하여 갑자기 능을 옮긴다면 후대의 사람들이 뭐라 하겠는 가? 일반 사람들도 장사하는 일은 신중하게 하는 법인데, 하물며 왕비의 무덤을 쉽게 옮길 수 있겠는 가? 그때의 일은 내가 이미 알고 있다. 희릉은 바로 내가 결정한 자리다.”라며, 이장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김안로 일파의 집요한 상언으로 결국은 희릉을 현재의 위치(艮坐坤向)로 1537년 9월 6일 이장을 하게 되었다. 파묘(破墓)를 하여 보니 광중에서 돌이 보이지 않자 이는 정광필 등을 제거하기 위한 모함이었음이 입증되어 김안로는 유배된 뒤 사사(賜死)되었다.

 

 희릉(장경왕후)20090922-8.JPG

 

장경왕후의 딸인 효혜공주는 김안로의 아들 김희(金禧)에게 출가하였다. 김희는 연성위(延城尉)에 봉해지고 중종의 총애를 받자 김안로가 이를 이용하여 권력을 남용하였다가 1524년(중종 19)에 영의정 남곤(南袞)·좌의정 심정(沈貞)·대사헌 이항(李沆) 등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다. 이에 불만을 가졌던 김안로는 아들 김희를 사주하여 불에 태운 쥐로 세자를 저주하는 ‘작서(灼鼠)의 변’을 일으켰다. 중종의 후궁인 경빈박씨(敬嬪朴氏)와 아들 복성군(福城君)이 범인으로 지목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된 뒤 사사(賜死)되었고, 심정도 경빈박씨와 복성군을 세자로 옹립하려고 모의하였다는 죄로 1531년에 사사되었다. 이 사건의 진범이 1532년에서야 김희라는 것이 밝혀졌다. 김희의 간청으로 1529년에 유배지에서 풀려난 김안로가 정광필을 죽이려 하고, 이미 1527년에 죽은 남곤에게 혹형(酷刑)을 가하려고 희릉 광중에 돌이 있었음에도 무덤을 조성하였다고 모함을 하였던 것이다.

 

1544년 11월 15일 중종이 승하하자 희릉의 오른쪽 언덕에 장사를 지내고 능호를 정릉(靖陵)이라 고쳤으나, 문정왕후의 모사로 중종의 무덤이 1562년(명종 17)에 선릉(宣陵)의 옆으로 옮겨지게 되어 장경왕후의 무덤은 다시 희릉으로 정해졌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권력 다툼에 무덤이 옮겨지고, 키워 준 이마저 농락거리로 만들다

    

 

중종(中宗) 1계비(繼妃)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1491-1515)

장경왕후는 1491(성종 22)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윤여필(尹汝弼)의 딸로 태어나 중종 원년(1506)에 궁궐에 들어와 숙의(淑儀)에 봉해졌다가 단경왕후가 폐위(1506)되자 다음해에 왕비에 책봉됩니다. 슬하에 효혜공주와 인종(仁宗)을 두었는데, 바로 인종 출산후에 산후병으로 승하한 것입니다.{중종 11}

 

희릉의 지문(誌文)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장경왕후를 기리고 있다. 왕후는 총혜자유한 천성을 타고 났고, 인효와 더불어 살고 예순과 함께 자라 났다. …… 이미 덕이 후하고 또 공경함을 독실히 하여 성왕의 중흥정치의 복조를 협찬하였는데, 거의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지만 시보할 것을 아끼어 세상에 계신 지 겨우 춘추 25세만에 돌아가셨으니 이 무슨 이치인가? 그것이 천명인지 아닌지 알지 못하겠다. 천명이 이렇게 가혹하고 잔인한가? , 애통하도다!

 

 

 

 

 

 

여인으로 천하를 호령해도 악한 왕후로 천하에 남아

 

 

 

 

 

 

 

 

 

 

 

 

 

    

 

태릉(문정왕후)20090922-8.JPG

 

 

태릉 泰陵

   

중종 2계비 문정왕후 - 태릉(泰陵)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 : 1501-1565), 1565, 서울 노원구 201, 태강릉(泰康陵)

 

  •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 태릉 큰이미지
  •      조선 중종왕비 태릉        조선 명종 강릉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 태릉 첫번째 작은이미지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 태릉 두번째 작은이미지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 태릉 세번째 작은이미지

     

     

     

     

    조선 태조왕비 태릉중종(中宗)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 : 1501-1565)의 태릉(泰陵)은 명종(明宗)의 강릉(康陵)과 함께 태강릉(泰康陵)으로 불리우면서 주변의 태릉 푸른동산, 태릉선수촌 등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입니다.

     

    재위 1년을 못넘긴 인종(仁宗)을 이어 13대 명종(明宗)이 즉위하면서 명종의 생모(生母)였던 문정왕후가 권력을 장악했었기 때문에 사후(死後)의 능역 조성 역시 웅장하고 화려하게 이루어 졌습니다. 유난하게 거대한 석인(石人)의 얼굴과 봉분의 병풍석(屛風石)에 구름 문양과 십이지신상(十二支身像) 등은 당대 권력의 힘을 느끼게 합니다.

     

    태릉은 11대 임금 중종의 제 2 계비인 문정왕후 윤씨의 능으로, 능침은 단릉 형식이다. 상설제도는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봉분 아래에는 구름과 십이지신을 의미하는 방위신이 새겨진 병풍석을 둘렀으며, 그 주위를 난간석으로 다시 보호하였다. 병풍석 위의 만석(滿石) 중앙에는 십이간지를 문자로 새겨놓았다. 원래 십이간지가 문자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병풍석을 없애고 신상을 대체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등장한 것인데, 여기에서는 신상과 문자가 함께 새겨져 있어 주목된다.

        

    문무석인은 목이 짧고 얼굴이 상대적으로 매우 큰 형태이다. 문석인은 높이가 260cm, 관복에 과거 급제자가 홍패를 받을 때 착용하는 복두(?)를 쓴 공복차림을 하고 있다. 두 손으로는 홀()을 공손히 맞잡고 있는데, 왼편의 문석인의 경우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반면 오른편의 문석인은 그 반대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좌우 문석인의 홀을 잡는 방법은 동일하나 이곳 태릉과 창릉(昌陵)의 경우만이 예외를 이룬다.

        

    무석인은 문석인과 비슷한 크기이며, 갑옷을 입고 머리에는 투구를 쓴 위용 넘치는 무장(武將)의 모습이다. 문무석인을 통틀어 얼굴과 몸통의 비례가 14 정도로 머리 부분이 거대하며, 안면 부분을 제외하고는 입체감이 결여되어 사각 기둥과 같은 형태이다. 한편 태릉에서는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한 금천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태릉은 왕이 아닌 왕비의 단릉(單陵)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웅장한 느낌을 준다. 이는 조성 당시 문정왕후의 세력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1565(명종 20) 47일 문정왕후가 창덕궁 소덕당에서 65세로 승하하자 412일 시호와 존호를 올리고 능호를 신정릉이라고 했다가 64일 태릉으로 고쳤다. 715일 현재의 위치에 예장했다.

     

    문정왕후는 사후에 중종 곁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었으므로 자신의 능과 함께 쓸 요량으로 봉은사 주지 보우와 상의하여 지금의 서삼릉에서 장경왕후릉 옆에 있던 중종 왕릉을 선릉 부근으로 천장하였다. 그러나 새로 옮긴 중종의 능은 지대가 낮아 홍수 피해가 자주 일어났으므로, 문정왕후는 그 자리에 함께 묻히지 못하고 현재의 위치에 예장되었다. 결국 중종과 함께 묻히고자 했던 소원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태릉의 정자각은 한국 전쟁 시 파손되어 석축과 초석만 남아 전하고 있던 것을 1994년에 복원한 것이다. 정면 3, 측면 2칸의 정전(正殿)과 그 앞의 배전(拜殿)으로 이루어져 있다.

     

    태릉(문정왕후)20090922-8.JPG

     

    문정왕후(文定王后)는 1501년 10월 22일 영돈녕부사 파산부원군(坡山府院君) 윤지임(尹之任)의 딸로 태어나 1517년(중종 12)에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의 뒤를 이어 중종(中宗)의 두 번째 계비가 되었다. 그는 글은 알았으나 천성이 강하였다. 인종(仁宗)이 세자로 있을 때 문정왕후와 그의 동생(尹元老, 尹元衡)들은 세자를 꺼려하여 장경왕후의 동생인 윤임(尹任)과 사이가 나빠졌고, 급기야는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으로 나뉘게 되었다. 인종이 즉위한지 7개월여 만에 승하하자 12살인 명종(明宗)이 왕위에 오르고 명종을 낳은 문정왕후는 8년 동안 수렴청정(垂簾聽政, 1545.7~1553.7)을 하게 되었다.

     

    (우139-240)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산223-19. 11호선(석계역), 6호선 (화랑대역), 7호선(태능입구역) 에서 버스로 환승로 하셔서 오실 수 있습니다.문정왕후의 권력을 등에 업은 윤원형의 일파는 명종의 입지를 확고히 해야 한다는 명분아래 1545년에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영의정 유관(柳灌), 형조판서 윤임,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 등을 제거하였다. 또 1562년(명종 17)에는 중종과 나란히 묻혀있는 장경왕후를 시기하고, 사후에 중종의 옆에 묻히고 싶은 문정왕후의 계략으로 중종의 무덤을 선릉(宣陵) 옆으로 억지로 이장을 하기도 하였다. 이장을 결행한 다음해 9월에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승하를 하자 사람들은 이장을 잘못한 결과라고 생각을 하였다.

     

     이장을 밖에서 도왔던 봉은사(奉恩寺) 주지 보우(普雨) 또한 문정왕후를 배후로 설치다가 급기야는 승직(僧職)을 삭탈당하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끝내는 사사(賜死)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문정왕후는 명종(明宗)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이 있다고 하여 “너는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었으랴.” 말하고,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꾸짖고 호통을 쳐서 마치 일반인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대하듯 하니 명종이 화병을 얻었을 정도였다.

     

    태릉관리소-태릉 관리소 홈페이지를 찾아주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명종실록에 “아들이 왕위에 오른 뒤 문정왕후는 그의 동생 윤원형과 함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니 나라의 정사가 어지러워지고, 올바른 다스림을 찾아보기 힘든 지경에 이르니 백성들은 나날이 궁핍해지고, 왕위를 이어갈 후사 또한 없어졌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일 뿐이다.”라고 평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의 다함이다.”라는

     

     

    왕의 잦은 능행에 따르는 백성들의 고달픔

     

    『광해군일기』 1611년(광해군 3) 8월 29일 조왕이 여러 능에 행차하는 것을 중지해달라는 사간원의 청이 기록되어 있다.광해군일기1611(광해군 3) 829일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올해의 풍(), (), () 세 가지 재해는 근고에 없던 바이므로, 비록 진대(賑貸)하고 무휼(撫恤)하더라도 민생을 보전하기 어려울까 걱정스러운 판국인데, 이미 성릉(成陵)의 행행을 겪은 데다 또 계속해서 건원릉(建元陵)의 친제가 있습니다.

     

    광해군일기1611(광해군 3) 829일 조왕이 여러 능에 행차하는 것을 중지해달라는 사간원의 청이 기록되어 있다.

     

    아무리 성상께서 돌아가신 선왕을 그리는 지극한 정에서 나온 일이기는 해도 바야흐로 수확하는 때에 기전의 민정(民丁)이 응역(應役)에 분주하고 각도의 인부와 말이 오랫동안 기다리고 서 있게 되면 원망하고 고달파하는 정상을 이루 형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강릉(康陵), 태릉(泰陵)에 친제를 하시겠다는 명이 또 오늘 내렸습니다. 백성들의 고달픔에 대해서는 고려할 것이 없다손치더라도, 옥체가 친히 안개와 이슬을 범하면서 한 달 사이에 세 번을 행행하는 것은 몹시 미안한 일입니다. 강릉, 태릉의 친제는 정지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능에 배알하는 일은 근대의 능침을 불가불 서둘러 전알(展謁)해야 되는 데다 도로 또한 멀지 않으니, 어찌 후일을 기다리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위의 기록에서 보는 바와 같이 왕릉의 조성, 관리, 왕의 능행에는 대대적인 인력이 동원되었다. 능 주변의 8km 둘레로는 능 바깥의 불길이 능으로 번지지 못하도록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게 하는 화소 구역을 만들었으며, 왕릉 인근 마을에 사는 사람들에게 부역의 의무를 지어 능 수호군의 역할을 하도록 했다. 대부분 이들에게는 보상이 따랐으나, 잦은 임금의 능행이나 막중한 능역 공사는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기도 하였다.

     

    문정왕후와 보우 이야기

     

    문정왕후가 잠든 태릉의 무석인 사진, 큰 귀와 도톰한 입술이 부처님을 연상케 한다. 

     

    1.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다?

    명종실록에는 함흥에서, 경기도 안성에서, 경상도 의성에서, 여러 지방에서 암탉이 수탉으로 변한다.”는 보고를 받은 내용이 여러 차례 올라와 있다. 이러한 재미있는 기록이 나타나는 시기는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통해 정권을 잡은 시기와 일치한다. 문정왕후 승하에 관한 명종실록의 기사에 사신은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서경(書經)목서(牧誓)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이 다함이다.”하였으니, 윤씨(尹氏 : 문정왕후)를 이르는 말이라 하겠다.

     

    2. 불교 중흥 정책을 편 문정왕후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물린 이후에도 명종의 뒤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조선의 측천무후, 철의 여인 등 현세에 와서 수많은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정계와 학계에서는 위 사신의 기록과 같이 문정왕후가 여인으로서 이렇게 조정을 쥐락펴락하며 권력을 휘두른 것에 대해 매우 불편한 심사를 드러냈다. 그들의 불만의 일부는 숭유억불의 시대에 그녀가 펼친 불교중흥정책을 향하고 있기도 하다. 문정왕후가 잠든 태릉의 무석인 사진, 큰 귀와 도톰한 입술이 부처님을 연상케 한다.

     

    3. 보우와 부활하는 불교

    문정왕후는 독실한 불교신자로 도첩제를 실시하여 승려를 뽑고 전국 300여 개의 절을 공인하는 등 당시의 유교지향정책을 무시하고 불교 중흥을 도모하였다. 양주 회암사에 있던 승려 보우를 맞아들여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임명하고 훗날 중종과 함께 묻힐 요량으로 봉은사 근처(정릉)에 중종의 능을 천장하기도 하였다. 폐지되었던 승과를 부활시켰으며, 이러한 노력으로 불교 교단은 활기를 띠고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4. 산 속으로 숨어버린 조선의 불교

    관련사진유생들은 문정왕후의 불교 중흥 노력에 심한 반발을 시작했다. 각지에서 보우를 타도하라는 상소와 종단 및 승과 폐지의 상소가 빗발쳤다. 요승 보우를 죽여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다 못해 성균관 유생들이 성균관을 비우는 집단 시위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문정왕후는 불교 중흥 정책을 그만두지 않았으며, 그녀의 지원을 받은 보우는 도대선사가 되었다. 그러나 1565(명종 20)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성난 유생들은 회암사로 몰려가 불상의 목을 자르고 절을 불질러 버렸다. 명종 역시 문정왕후의 불교를 중흥하라는 유언을 무시하고 깊은 산 절로 도망친 보우를 체포하였다. 전국에서 보우를 처형하라는 여론이 빗발치기 시작하였고, 율곡 이이 등이 이를 만류하였으나, 명종은 보우를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보우는 이곳에서 험악한 여론을 살피던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결국 살해당했다.

     

    봉은사 이야기

     

    봉은사 대웅전의 전경1. 도심 속에 연등을 밝히는 봉은사

    매년 음력 48, 도심 한복판인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에는 형형색색의 연등이 내걸려 장관을 연출한다. 이는 삼성동에 위치한 사찰 봉은사에서 석가탄신일을 축하하기 위해 성대하게 여는 연등 축제의 한 장면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옛 사찰들은 모두 백두대간에서 뻗어나간 깊은 산줄기에 위치한다. 게다가 조선 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 근처에는 남아있는 사찰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런데 봉은사는 어떻게 이렇게 도성 가까이에서 여전히 번창하고 있는 것일까?

     

    2. 신라 왕실의 원찰이었던 봉은사

    봉은사는 794(신라 원성왕 10) 연회국사가 왕실의 원찰로 창건하였으며 원래의 이름은 견성사(見性寺)라고 하였다. 삼국사기38 잡지의 기록에 의하면 이곳은 사천왕사, 봉선사, 감은사 등과 더불어 성전사원에 해당하는 일곱 사찰 가운데 하나였다. 성전사원이란 왕실에서 건립한 사찰의 조성과 운영을 위해 설치한 일종의 관부를 포함하는 사찰을 뜻하는 것으로, 당시 신라 사회에서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3. 조선 성종 선릉의 원찰이 된 봉은사

    오랜 역사를 지닌 왕실의 원찰 견성사는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봉은사로 개칭하게 되었다. 1498(연산군 4)에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가 성종이 잠들어 있는 선릉을 위하여 사찰을 중창하고 봉은사라 이름 붙인 것이다. 그 후 1562(명종 17)에는 그 위치를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게 되었다.

     

    4. 문정왕후와 보우

    관련사진조선 13대 왕인 명종의 재위 시, 스스로를 조선의 여주(女主)로 칭할 만큼 대단한 권력을 행사했던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에 의해 봉은사는 더욱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문정왕후는 조선왕실의 숭유억불 정책을 따르지 않고, 불교의 중흥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승려 보우(普愚)를 만나 봉은사의 주지로 임명하고, 봉은사를 조선 불교 중흥의 장으로 삼았다. 폐지되었던 승과시(僧科試 : 승려들에게 실시하는 과거시험)가 부활하여 이곳 봉은사에서 치러졌으며,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바로 이곳에서 등과하였다.

     

    5. 꾸준히 이어온 봉은사의 명맥

    봉은사를 중심으로 한 문정왕후와 보우의 불교 중흥책에는 조정과 유생의 반발이 컸다.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유생들의 빗발치는 항의에 의해 봉은사 주지인 보우는 제주도로 유배당하여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고, 문정왕후의 불교를 중흥하라는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봉은사는 병자호란 때 불탔으나 숙종 때에 중건하고 1825(순조 25)에 다시 중수하여 여전히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태릉에서 문정왕후와 보우

     

        관련사진

     

    중종(中宗) 2계비(繼妃)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 : 1501-1565)

    관련사진문정왕후 윤씨는 1501(연산군 7)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윤지임(尹之任)의 딸로 태어나 17{중종 12}에 왕비에 책봉되었고, 중종(中宗)과의 슬하에 명종(明宗)과 네 공주를 두었습니다.

     

    문정왕후는 일생이 아주 화려해서 자신이 왕비(王妃)에 오른 것도 중종의 제1계비(繼妃)였던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가 인종(仁宗) 출산 후 승하해서 이루어졌고, 아들 명종(明宗) 역시 인종(仁宗)의 요절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천운(天運)이 작용한 것 같다는 속설(俗說) 전해오는데, 더욱이 12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명종(明宗)을 대신해 8년간이나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기에 권력의 정상에 오른 것입니다.

     

    인종(仁宗)의 외척 세력을 제거했던 을사사화(乙巳士禍;1545) 이후 권력의 정상에 군림했던 문정왕후가 생애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은 바로 중종(中宗)의 옆에 묻히지 못한 것입니다. 중종과 능역을 함께 하기 위해 현재 서삼릉(西三陵)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옆에 조성했던 중종의 정릉(靖陵)을 성종(成宗)의 선릉(宣陵) 가까이 있는 봉은사(奉恩寺) 곁으로 옮겨 놓았지만 낮은 지대로 인해 자주 침수되어 문정왕후 자신은 결국 그곳에 묻히지 못하고 현 위치로 정해진 것입니다.

     

    또한 문정왕후는 불교(佛敎)에 심취하여 봉은사에 보우(普雨)를 주지(住持)로 두고 왕실에서의 불교 부흥에 많은 작업을 했지만, 문정왕후 사후(死後) 보우는 유배지에서 죽고 불교는 다시 배척당하게 됩니다.

     

    문정왕후는 1501(연산군 7) 1022일 파산부원군 윤지임의 딸로 태어났다.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가 1515(중종 10) 인종을 낳은 뒤 산후병으로 7일 만에 승하하자, 2년 뒤인 17세 때 왕비로 책봉되었다. 당시 인종이 세자로 책봉된 가운데, 문정왕후가 경원대군(훗날 명종)을 낳자, 기존의 세자를 폐하고 경원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소윤(小尹)과 기존의 세자를 지키려는 대윤(大尹) 간의 권력싸움이 조정을 어지럽게 하였다.

        

     

    이 가운데 1544(중종 39) 1115일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여 대윤이 득세하는 걸로 당쟁이 일단락되는 듯 싶었으나, 인종이 재위 8개월만에 승하하자 정권은 경원대군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에게로 넘어왔다. 1545년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문정왕후는 8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면서 모든 권력을 손에 쥐었다. 문정왕후의 오빠인 윤원형을 포함한 소윤 일파는 대윤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을사사화를 일으켰으며, 그 후 다시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권세를 누리던 문정왕후는 1565(명종 20) 47일 창덕궁 소덕당에서 춘추 65세로 승하하였다.

     

    1547(명종 2) 경기도 광주 양재역에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이 권세를 휘둘러 나라가 망하려 하는데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는 벽보가 붙게 되었다. 여기서 여왕은 명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게 된 문정왕후를 일컬은 것이다. 이 벽보를 계기로 당시 학계와 정계에는 을사사화에 이은 큰 피바람이 몰아닥쳤다.

     

    이와 같이 문정왕후와 문정왕후의 형제들인 윤원형, 윤원로는 집권 초기 자신의 반대파를 유배 보내거나 죽이는 등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하였다. 문정왕후 집권 시의 정치가 선비들에게 어떻게 비춰졌는지는 당시의 대 유학자 조식이 그에게 내려진 벼슬을 사양하면서 올린 상소에 잘 드러나 있다.

     

    "자전(慈殿·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백 가지의 재앙과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이러한 직설적인 상소에도 조식은 무사하였다. 그러나 당대 문정왕후에 대한 위험한 언급이 금기가 될 정도로 커다란 권력을 거머쥐고 있었다.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 517, 1392 - 1910 ]

     

     

     

     

     

     

     

     

     

    () 13()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익종(翼宗) 수릉(綏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융릉(隆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영릉(永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장릉(章陵 : 사적 제202)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경릉(敬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 2()

    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

    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유릉(裕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홍릉(洪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

    왕릉 35

    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예릉(睿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경릉(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인릉(仁陵 : 사적 제194)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건릉(健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홍릉(弘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원릉(元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혜릉(惠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의릉(懿陵 : 사적 제204)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익릉(翼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명릉(明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숭릉(崇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영릉(寧陵 : 사적 제195)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휘릉(徽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장릉(長陵 : 사적 제203)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성묘(成墓 : 사적 제365)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목릉(穆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강릉(康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효릉(孝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희릉(禧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온릉(溫陵 : 사적 제210)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정릉(靖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9대 성종(第九代 成宗) 회묘(懷墓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순릉(順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선릉(宣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

    8대 예종(第八代 睿宗) 공릉(恭陵 : 사적 제205)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8대 예종(第八代 睿宗) 창릉(昌陵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7대 세조(第七代 世祖) 광릉(光陵 : 사적 제197)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사릉(思陵 : 사적 제209)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장릉(莊陵 : 사적 제196)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5대 문종(第五代 文宗) 현릉(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4대 세종(第四代 世宗)

    3대 태종(第三代 太宗)

    2대 정종(第二代 定宗)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정릉(貞陵 : 사적 제208) : 서울 성북구 정릉2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1대 태조(第一代 太祖)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목조-덕릉 효공왕후 이씨-안릉

    익조-지릉 정숙왕후 최씨-숙릉 , 손씨

    도조-의릉 경순왕후 박씨-순릉, 조씨

    환조-정릉 의혜왕후 최씨-화릉, 이씨, 정빈 김씨

    태조-건원릉 신의왕후 한씨-제릉 신덕왕후 강씨-정릉

    정종-후릉 정안왕후 김씨-후릉

    태종-헌릉 원경왕후 민씨-헌릉

    세종-영릉 소헌왕후 심씨-영릉

    문종-현릉 현덕왕후 권씨-현릉

    단종-장릉 정순왕후 송씨-사릉

    세조-광릉 정희왕후 윤씨-광릉

    예종-창릉 장순왕후 한씨-공릉 안순왕후 한씨-창릉

    성종-선릉 공혜왕후 한씨-순릉 폐비 윤씨-회묘 정현왕후 윤씨-선릉

    연산군-연산군묘 폐비 신씨-연산군묘

    중종-정릉 단경왕후 신씨-온릉 장경왕후 윤씨-희릉 문정왕후 윤씨-태릉

    인종-효릉 인성왕후 박씨-효릉

    명종-강릉 인순왕후 심씨-강릉

    선조-목릉 의인왕후 박씨-목릉 인목왕후 김씨-목릉

    광해군-광해군묘 폐비유씨-광해군묘

    인조-장릉 인렬왕후 한씨-장릉 장렬왕후 조씨-휘릉

    효종-영릉 인선왕후 장씨-영릉

    현종-숭릉 명성왕후 김씨-숭릉

    숙종-명릉 인경왕후 김씨-익릉 인현왕후 민씨-명릉 인원왕후 김씨-명릉

    경종-의릉 단의왕후 심씨-혜릉 선의왕후 어씨-의릉

    영조-원릉 정성왕후 서씨-홍릉 정순왕후 김씨-원릉

    정조-건릉 효의왕후 김씨-건릉

    순조-인릉 순원왕후 김씨-인릉

    헌종-경릉 효현왕후 김씨-경릉 효정왕후 홍씨-경릉

    철종-예릉 철인왕후 김씨-예릉

    고종-홍릉 명성황후 민씨-홍릉

    순종-유릉 순명효황후 민씨-유릉 순정효황후 윤씨-유릉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