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능 (陵) - 3
(1) 제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_ 연산군묘 燕山君墓
왕릉은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들의 무덤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왕릉은 42기 (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기,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園)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墓)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기(능40, 원14, 묘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능3, 원4, 묘5)입니다 .
사후에 왕(王)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기(基)
폐위(廢位)된 묘(墓) 2기(基)
황제릉(皇帝陵) 2기(基)
왕릉 35기
1. 추존이라는 미명으로, 역사세우기
추존(追尊)왕 ‘함길도 8릉’
2. 왕조, 문을 열다
제1대 태조 (太祖, 1335-1408) _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 정릉 貞陵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제2대 정종 (定宗, 1357-1419) _ 후릉 厚陵
제3대 태종 (太宗, 1367-1422) _ 헌릉 獻陵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제4대 세종 (世宗, 1397-1450) _ 영릉 英陵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제5대 문종 (文宗, 1414-1452) _ 현릉 顯陵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제6대 단종 (端宗, 1441-1457) _ 장릉莊陵, 사릉思陵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제7대 세조 (世祖, 1417-1468) _ 광릉 光陵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추존(追尊)왕 덕종 (德宗, 1438-1457) _ 경릉 敬陵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제8대 예종 (睿宗, 1450-1469) _ 창릉昌陵, 공릉恭陵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제9대 성종 (成宗, 1457-1494) _ 선릉宣陵, 순릉順陵, 회묘 懷墓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3. 왕조, 산을 넘다
제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_ 연산군묘 燕山君墓
제11대 중종(中宗, 1488-1544) _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 泰陵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제12대 인종 (仁宗, 1515-1545) _ 효릉 孝陵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제13대 명종(明宗, 1534-1567) _ 강릉 康陵, 순창원 順昌園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제14대 선조 (宣祖, 1552-1608) _ 목릉 穆陵, 성묘 成墓, 순강원 順康園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4. 조선, 또 다시 위기를 맞다
제15대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_ 광해군묘 光海君墓
추존(追尊)왕 원종 (元宗, 1580-1619) _ 장릉 章陵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5. 왕조, 반석을 다지다
제16대 인조 (仁祖, 1595-1649) _ 장릉 長陵, 휘릉 徽陵, 소경원 昭慶園, 영회원 永懷園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6. 조선, 당쟁에 휩싸이다
제17대 효종 (孝宗, 1619-1659) _ 영릉 寧陵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제18대 현종 (顯宗, 1641-1674) _ 숭릉 崇陵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7. 환국정치로 왕권을 다지다
제19대 숙종 (肅宗, 1661-1720) _ 명릉明陵, 익릉 翼陵, 대빈묘大嬪墓, 소령원昭寧園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제20대 경종 (景宗, 1688-1724) _ 의릉懿陵, 혜릉惠陵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8. 조선, 르네상스를 맞다
제21대 영조 (英祖, 1694-1776) _ 원릉元陵, 홍릉弘陵, 수경원綏慶園, 수길원 綏吉園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추존(追尊)왕 진종(眞宗) _ 영릉永陵
추존(追尊)왕 장조(사도세자 莊祖) _ 융릉隆陵, 의령원 懿寧園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제22대 정조(正祖, 1752-1800) _ 건릉健陵, 휘경원徽慶園, 효창원 孝昌園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9. 조선, 세도정치에 휘둘리다
제23대 순조 (純祖, 1790-1834) _ 인릉仁陵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추존(追尊)왕 익종 (翼宗, 문조 文祖) _ 수릉綏陵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제24대 헌종 (憲宗, 1827-1849) _ 경릉景陵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제25대 철종 (哲宗, 1831-1863) _ 예릉睿陵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10. 오백 년 왕조, 문을 닫다
제26대 고종황제 (高宗, 1852-1919) _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 흥원 興園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제27대 순종황제 (純宗, 1874-1926) _ 유릉裕陵, 영원英園, 숭인원 崇仁園, 회인원 懷仁園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3. 왕조, 산을 넘다
(1) 제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_ 연산군묘燕山君墓
(2) 제11대 중종(中宗, 1488-1544) _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泰陵
(3) 제12대 인종 (仁宗, 1515-1545) _ 효릉孝陵
(4) 제13대 명종(明宗, 1534-1567) _ 강릉康陵, 순창원 順昌園
(5) 제14대 선조 (宣祖, 1552-1608) _ 목릉穆陵, 성묘成墓, 순강원順康園
(1) 제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_ 연산군묘 燕山君墓
1. 계유정난은 어떻게 진행됐나 http://fivecard.joins.com/964
2. 폐비 윤씨는 정말 용안에 손톱자국을 냈을까? http://fivecard.joins.com/1003
3. 폐비 윤씨, 사약을 마시고 정말 피를 토했나? http://fivecard.joins.com/1004
4. 폐비 윤씨 사약이 남긴 공무원의 숙명 http://fivecard.joins.com/1007
5. 연산군, 정말 계산 없는 광인이었나? http://fivecard.joins.com/1012
6. 인수대비 사후, 연산군은 어떻게 몰락했나 http://fivecard.joins.com/1015
연산군, 거창군부인 신씨 (居昌郡 夫人 愼氏), 1506년, 서울 도봉구 362호
조선조(朝鮮朝) 최초의 폐왕(廢王)인 연산군(이융; 1476-1506, 재위12년)과 폐비(廢妃) 부인 거창군 신씨(愼氏; 1472-1537)의 연산군묘는 유배지 강화도 교동(喬桐)에서 31세의 나이로 사망한 연산군을 그곳에 매장했다가, 1512년(중종 7년)에 폐비 부인 신씨의 상언(上言)으로 양주군(楊州郡) 해촌(海村)-{현재의 위치}에 이장(移葬)하여 왕자군(王子君)의 예우로 개장(改葬)했습니다. 그 후 1537년(중종 32년)에 부인 신씨가 사망하자 쌍분(雙墳)의 형태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연산군 묘역의 문인석 왕자군의 예우로 조성되었기에 곡장(曲墻)과 상석(上石), 장명등(長明燈), 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 만으로 조촐하게 설치했지만, 그 보다는 폐위된 왕이었기에 봉분 앞의 비석 전면의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는 비명과 봉분을 호위하고 있는 문인석의 얼굴 모습에서 왠지 모르게 애처로움이 느껴집니다. 더욱이 길 건너편에 조성된 세종의 셋째 딸 정의공주묘역보다 더 협소한 크기를 보면 그 안타까움은 더 커집니다.
묘역의 아래에는 궁인인 의정궁주조씨(義貞宮主趙氏)의 묘와 연산군의 딸, 사위 구문경(具文景)의 묘가 함께 조성되어 있습니다.
왕 또는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고 하지만 연산군은 그 지위가 군(君)으로 강봉되었기 때문에 묘(墓)라 하였다. 그 후 중종 7년(1512) 12월 부인 신씨가 상소하여 묘를 강화에서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선영(先塋)이며 연산군의 사위와 딸의 무덤이 있는 양주군 해등면 원당리(현 도봉구 방학동)로 이장하기를 청하여, 이듬해(1513) 2월 왕자군(王子君)의 예(禮)로 이장하고 양주군의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묘의 시설은 대군(大君)의 예우로 장례하여 무덤, 곡장(曲墻), 묘비(墓碑) 1쌍, 혼유석(魂遊石) 1쌍, 망주석(望柱石) 1쌍, 장명등(長明燈) 1쌍, 향로석(香爐石) 1좌, 재실(齋室)은 갖추어져 있으나, 병풍석(屛風石), 석양(石羊), 석마(石馬), 사초지(莎草地), 문인석(文人石) 등은 세우지 아니하였다. 연산군의 묘비 앞면에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무덤이 만들어진 연월인 '정덕팔년이월이십일장(正德八年二月 二十日葬)'이라 새겨져 있다.
조선 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은 1494년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연산군은 초기 4년 정도는 성종조의 유풍이 남아 있어 문치(文治)를 비교적 잘 이루었으나 그 뒤로 무오사화, 갑자사화와 같은 큰 옥사를 일으켜 많은 선비들을 죽였으며 계속되는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을 탕진했다.
생모 윤씨의 폐출 경위를 알게 된 연산군은 패륜적인 행위를 일삼았다. 성종의 두 후궁과 그 아들들을 죽였으며, 병상에 누워 손자의 포악한 행위를 꾸짖는 할머니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돌아가시게 했다. 또한 생모 윤씨를 왕비로 추숭하여 회묘를 회릉(懷陵)이라 고친 뒤 성종 묘에 함께 제를 지냈다. 성균관을 주색장으로, 원각사를 기생들의 집합소로, 흥천사를 마구간으로 바꿔버리는 등 무수한 실정을 저질렀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 서북쪽에 있는 섬 교동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병사했다.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 신씨 사이에서 5남 1녀, 후궁 소생으로 2남 1녀가 있었으나 아들들은 태어나자마자 죽거나 모두 귀양지에서 죽었다. 연산군은 유배지인 교동도에 묻혔다가 연산군 부인 폐비 신씨가 중종에게 이장해줄 것을 상언하여 1513년 오늘날의 위치에 이장되었다.
이때 중종은 이장을 윤허하면서 왕자군의 예에 따라 개장할 것을 명했다. 따라서 연산군묘에는 곡장 3면과 상석 2개, 장명등석 2개, 망주석 1쌍, 문석인 2쌍과 향로석 등의 상설을 갖추고 있다.
연산군은 유배지인 교동도에 안장되었다가 연산군 부인 폐비 신씨가 중종에게 이장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여 1513년 오늘날의 도봉구 방학동에 이장되었다. 연산군묘는 그간 비공개로 운영되어 오다가 2006년 7월부터 일반인에게 무료로 공개되고 있다.
연산군묘소와 역사를 같이한 은행나무
- 서울시 지정보호수 제1호로 높이 24m, 둘레 9.6m, 수령 800~1,000년이 되었으며 서울시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로 모습이 매우 고상하고 아름다워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신성시 하였고, 이 곳에 불이 날 때마다 나라에 큰 변이 생겼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연산군묘 재실 - 재실은 능 제사와 관련한 전반적인 준비를 하는 곳으로 묘를 관리하던 능참봉이 상주하였다.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의 묘가 연산군묘에 있는 까닭
의정궁주 조씨는 본관이 한양인 조뢰의 딸로 태어나 세종 4년(1422년)에 태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었지만 곧 태종이 승하하여 빈으로 책봉되지 못하고 궁주의 작호를 받았다. 의정궁주 조씨 묘가 연산군묘역에 있는 이유는 이 땅은 원래 세종의 아들 임영 대군의 땅이였으며 임영대군은 왕명으로 후사가 없던 의정궁주의 제사를 맡게 되어 현 위치에 의정궁주묘를 조성하였고 그 후 임영대군의 외손녀인 거창군부인 신씨의 요청에 의하여 의정궁주 묘 위 쪽에 연산군묘를 이장한 것이다.
준비되지 안은 군왕, 조선최초 폐위임금
폐주 연산군 (燕山君, 이융, 1476-1506, 재위12년)
성종(成宗)의 장남으로 태어나 1483[성종 14년]에 세자에 책봉되고 왕위까지 오르지만 재위 12년만에 성희안, 박원종 등에 의해 성종의 둘째 아들인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추대하고 연산군을 쫓아내는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되고 맙니다. 이러한 연산군에 대한 평가는 실록<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등에서 자세하게 서술되어 포악한 성격에 거듭된 실정(失政)과 폭정 등이 나열되지만 당대의 무오사화(戊午士禍)나 갑자사화(甲子士禍) 등에서 보이듯이 권력의 암투 속에서 괴로워했던 한 인간으로 본다면, 더욱이 자신의 어머니{성종비에서 폐위된 윤씨(尹氏}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당사자라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연산군에 대한 평가가 객관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은 당연합니다.
연산군이 시인이 된 까닭
연산군의 시 세계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연산군 덕분에 목숨을 구한 성종의 주치의 송흠과 김흥수
연산군 얼굴에 난 흉터
연산군의 효심
독재자의 길
연산군의 또 다른 취미 : 동물 수집
과부의 재가를 허락해야 한다
도둑을 없애라
선왕의 후궁들은 여생을 어떻게 보냈나?
세자 책봉을 출생과 동시에 하지 않고 7, 8세가 된 후에 한 까닭은?
사탕은 언제 들어왔나?
임금이 초대한 104세 어물이
조선의 기능고시 잡과
표류 외국인의 처리
조선조 비극의 하이라이트 연산군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1495 | 1년 | 4월, {성종실록(成宗實錄)} 수찬을 명함 | 1502 | 8년 | 9월, 원자(元子) '노'를 세자로 봉함 | |
1496 | 2년 | 6월, 폐비 윤씨(尹氏) 추숭(追崇)함 | 1504 | 10년 | 윤4월, 경연(經筵)을 폐함 | |
1498 | 4년 | 7월, 무오사화(戊午士禍) - 김종직(金宗直) 부관참시함 | 7월, 언문(彦文)의 교수.학습 금함 | |||
1499 | 5년 | 2월, 춘추관 {성종실록}을 찬진함 | 1506 | 12년 | 4월, 사간원(司諫院)을 폐함 | |
1500 | 6년 | 6월, 음난남녀처사(淫亂男女處死)의 법을 제정함 | 9월, 박원종(朴元宗) 등이 왕을 폐하고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옹립함{중종반정} | |||
11월, 과부(寡婦) 재가(再嫁) 금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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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燕山君)은 성종(成宗)과 폐비윤씨 사이에서 1476년(성종 7) 11월 7일 태어나, 1483년 2월 6일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1494년 12월 24일 성종이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다. 성종의 장례 절차가 진행 중이던 1495년 3월 16일 성종의 묘지문을 보고 자신의 생모가 사사(賜死)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자신의 생모가 정현왕후(貞顯王后, 중종의 생모)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폐비윤씨는 판봉상시사 윤기무(尹起畝)의 딸로 태어나 1474년 4월 15일에 승하한 성종의 정비 공혜왕후의 뒤를 이어 1476년 8월 9일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성종과 갈등을 빚다가 1479년 6월 2일에 폐출되어 사가에서 지내다가 1482년 8월 16일에 사사되었다. 당시에 성종은 폐출해야만 했던 이유로 “왕을 해치기 위한 목적으로 독약을 소지하고 있고, 사람을 해치는 법을 기록하여 소지하고 있으며, 후궁 권씨(權氏)가 자신을 해치려고 하는 것처럼 모의 내용을 적어 권씨 집에 투입하였고, 왕이 자신의 뺨을 때리자 왕자를 데리고 대궐에서 나가려 했고, 왕보다 늦게 일어나고, 대신들의 가정 일에 대해 흉을 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연산군은 폐비윤씨를 추숭하면서 임사홍(任士洪) 등을 통해 전해들은 내용을 토대로 많은 대신과 성종의 후궁 엄씨와 정씨를 타살하고, 그들의 아들 안양군(安陽君)과 봉안군(鳳安君) 유배하였다가 사사하였다. 날로 성품이 포악하고 주색(酒色)에 빠져 지내다가 지중추부사 박원종, 부사용 성희안(이조참판에서 갑자기 강등), 이조판서 유순정 등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중종반정으로 1506년 9월 2일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주동자들은 거사를 일으키면서 신수근(愼守勤)과 수영(守英) 형제 그리고 임사홍 등을 먼저 처치하였다. 신수근 형제는 연산군의 처남이며, 임사홍은 성종 때에 죄를 지어 폐기되었었는데, 그 아들 숭재(崇載)가 연산군 때에 성종의 사위가 되어 총애를 받자 그 연줄로 갑자기 높은 품계에 올랐던 인물이다. 갑자사화 이후에는 전에 자기를 비난한 자에게 일일이 앙갚음하였고, 이미 죽은 사람은 부관참시를 하니 비록 신수근 형제도 조심을 할 정도였다. 연산군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곧 임사홍을 시켜 처리를 하였으니 그 악명이 하늘을 찔렀다. 또한 임사홍은 아들 희재(熙載)가 피살되던 날에도 집에서 연회를 베풀고 고기를 먹으며 풍악을 울리니, 연산군이 더욱 신임을 하였다. 당시에 사람들 사이에 “작은 소인 숭재, 큰 소인 사홍이여! 천고에 으뜸가는 간흉이구나! 천도는 돌고 돌아 보복이 있으리니, 알리라, 네 뼈 또한 바람에 날려질 것을(小任崇載大任洪千古姦兇是最雄天道好還應有報從知汝骨亦飄風).”이라는 시가 나돌기도 할 정도였다. 주동자 박원종은 큰누이가 의경세자의 장남 월산대군(月山大君)의 부인이 되었는데, 연산군이 궁중에 머물게 하면서 간통을 하였다는 추한 소문이 나돌자 박원종이 누이에게 “왜 참고 사는가? 독약이라도 마시고 죽어라!”고 한 사람이다. 주동자들의 건의로 신수근과 성(姓)이 같은 4∼5촌과 성이 다른 친척 3∼4촌은 귀양을 보내고, 폐세자 이황과 창녕대군 이성, 양평군 이인 및 이돈수를 1506년 9월 24일에 사사하였다. 연산군은 생모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능호를 회릉(懷陵)으로 추숭을 하였으나, 결국은 중종반정으로 다시 강등되었을 뿐 아니라 자신과 가족까지 몰락하고 말았다.
1506년 11월 6일 연산군이 유배지에서 죽자 왕자군의 예로 강화도에 장사를 지냈다가 거창군부인의 요청으로 1513년 2월 20일에 양주군 해촌(현 서울 방학동)으로 이장을 하였다. 거창군부인은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의 딸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강등되었다가 1537년 4월 8일에 승하하여 그 해 6월 26일에 연산군 묘 왼쪽에 장사를 지냈다. 연산군 묘역에는 의정궁주(태종 후궁)와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 내외의 무덤이 같이 있다. 연산군은 왕을 지냈지만 폐위되었기 때문에 무덤이 능(陵)의 호칭을 갖지 못하였다. 그래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지 못한 채 현재도 연산군묘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장녹수와 연산군
장녹수. 희대의 폭군인 연산군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다루었다는 여자이다. 그녀가 인상을 찡그리고 있으면 연산군도 덩달아 인상을 찡그렸고, 그녀가 웃고 있으면 연산군도 따라서 웃으며 좋아했다고 기록할 정도다. 장녹수는 여러 번 시집을 간 이력에 걸맞게 연산군보다 무려 10살 이상이나 연상이었으나, 연산군은 정비인 신씨에게 느낄 수 없는 정감을 녹수에게 느꼈고, 녹수의 품을 친어머니와 같다고 표현을 할 정도로 좋아했다.
장녹수는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 1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문의 현령으로 지낸 장한필의 서녀였고, 어머니는 천인이었는데 대략 짐작을 해보면 장녹수의 어미는 장한필 집의 노비였던 것 같다. 당시 조선은 모계법을 따라 어머니가 천인이면 자녀도 따라서 천인의 신분을 가지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부모 중 어느 한 쪽이 천인이면 자녀도 따라서 천인이어야 했던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가 양반의 급증을 막기 위해 정해놓은 법령인데 그 때문에 서자녀들은 대체로 어미의 하던 일을 물려받는 때가 많았다. 예를 들어 그 어미가 기생 출신의 첩실이라면 딸도 어미를 따라서 기생이 되는 팔자였다. 어린 시절 장녹수는 매우 궁곤하게 지냈는데 가난에 벗어나려 여러 남자들에게 몸을 의탁했고, 여러 자식까지 두었다. 그러던 중 제안대군의 가노와 혼인을 하여 제안대군의 여종으로 살다가 제안대군이 녹수의 영리함을 알아보고 그녀에게 가무를 배우게 했다. 제안대군은 장안에도 이름이 난 풍류한량이었는데 조정에는 욕심이 없고, 오로지 기생들을 초대 해 자신의 집에서 가무를 즐기며 자신 역시도 기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자라 일설에는 제안대군이 개인적으로 기르는 기생들이 여럿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마도 녹수는 제안대군의 집에 소속된 기생으로 보인다. 기록에는 얼굴은 그리 수려하지 않지만 매우 동안이라 30살의 나이에도 16살 여자처럼 피부가 매끌매끌하고, 몸매는 탄력이 있었다고 기록한다. 성종이 1494년에 죽고, 성종의 뒤를 이어 장자인 연산군이 등극하니 희대의 폭군이라 기록하는 주나라 주왕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폭군이라 말하고 싶다. 알다시피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가 억울하게 사약을 받고 죽자 당시 세자였던 연산군은 이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잔병치레가 많았던 연산군은 월산대군 사저로 피접을 가는 날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총명하고, 명석하여 성종은 그런 세자를 사랑했고, 사람들 역시도 연산군이 훗날 임금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믿었다. 연산군이 생모 윤씨의 비참한 죽음을 알기 전에는 백성들을 위한 선정을 베풀기도 하는 등의 주군으로 손색이 없는 면모를 보였지만 연산군은 생모 윤씨의 억울한 죽음을 안 이후 미쳐 날뛰게 된 것이다. 하루는 연산군이 성종에게 궁 밖의 백성들의 생활을 살펴보고 싶다고 청했고, 성종은 세자에게 미복차림을 하고 미행을 하기를 허락했다. 미복차림을 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살피면서 재미있어 한 연산군이 어느 날 장터에서 어린 송아지와 그 어미 소를 발견하였다.
어미 소의 젖을 맛나게 빠는 어린 송아지를 보자 연산군이 갑자기 시무룩해지면서 “미물도 저렇게 키워주는 어미가 있는데 어째서 나에게는 나를 키워준 어머니가 안 계신단 말이냐?” 하고 통탄했다. 이 사실을 옆에서 수행하던 내관이 성종에게 고해바치니 성종은 아주 고민을 하면서 결국 사가로 내?긴 윤씨를 다시 궁으로 불러들이려 했지만 인수대비와 귀인 정씨, 엄씨 때문에 억울하게 사약이 내려져 두 번 다시 궁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정현왕후 윤씨가 실질적으로 연산군을 보살피는 어미였지만 연산군은 그녀에게 어머니다운 정을 느낄 수 없었고, 정현왕후 역시도 자신이 낳은 진성대군만을 은근히 챙기니 연산군은 늘 어머니의 빈자리가 그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화에 연산군과 진성대군이 함께 놀다가 둘 다 바닥에 넘어졌는데 정현왕후는 깜짝 놀라 자신의 아들 진성대군만 일으켜 세워주었다. 그 일로 연산군은 정현왕후를 어머니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것이다.) 어미가 없다는 사실이 그를 삐뚤어진 아이로 자라나게 했다. 하루는 부왕인 성종이 기르던 사슴이 연산군의 옷을 물고 장난을 치자 참지 못한 연산군이 부왕이 기르는 사슴을 발로 차버렸다.
그러자 화가 난 성종이 “힘없는 미물을 이렇게 함부로 다루는데 어찌 만백성을 다스리는 제왕으로 자라날 수 있겠느냐?” 라고 화를 내며 나무라자 연산군은 이 일을 가슴 속에 새기며 성종이 죽은 후 연산군은 성종의 애완동물인 사슴을 활로 쏴 죽여 버렸다. 연산군은 자주 미복차림을 하고 밖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즐겼는데 녹수가 총애를 받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하루는 연산군이 숙부인 제안대군의 집으로 행차해 술을 마시던 도중 제안대군이 자신이 기르는 아이 중에서 아주 괜찮은 아이가 있다며 녹수를 친히 불러 가무를 하도록 했다.
그러자 연산군이 한 눈에 반하여 녹수를 친히 데리고 하룻밤을 보내고 싶다고 했고, 제안대군 역시도 그것을 흔쾌히 승낙했다. 제안대군은 오로지 풍류만을 즐기는 사람이라 여색과 권력욕이 없었는데 그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제안대군이 사내구실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녹수와 하룻밤을 보내고, 연산군은 그녀를 잊지 못해 친히 궁궐로 불러들였다. 세상 사람들은 천기를 궁궐로 불러들여 후궁을 삼았다고 비난했고, 왕실에서도 이 문제를 거론하며 연산군에게 장녹수는 천기이며 이미 시집을 여러 번 가 가정이 있는 여자라고 후궁 삼는 것을 반대했지만 연산군은 대신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녹수를 종4품 숙원의 지위를 내렸다. 녹수는 유일 무일하게 연산군을 잘 다룰 줄 아는 여자였다. 천하의 요부라도 그런 요부가 다 없을 지경이다.
연산군의 아명이 ‘백돌’인데 녹수는 연산군을 ‘전하’라고 부르는 대신 ‘백돌아’ 라고 부르고 다녔으며 연산군은 후궁이 함부로 자신의 아명을 부르는 것도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연산군은 녹수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고 싶어 했다. 그래서인지 녹수의 집안에는 선물을 갖다 바치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그녀의 곳간은 곡식으로 가득 차 그녀는 전혀 부족함이 없는 여자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연산군에게는 녹수 전에 승은을 입은 궁녀가 두 명이 있었는데 바로 희대의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될 최전향과 수근비이다.
최전향은 궁녀출신으로 연산군에게 승은을 입은 궁녀였고, 수근비는 원래 관노였다가 자색이 곱다는 이유만으로 연산군의 눈에 들어 연산군이 옥금이라는 여자를 대신 관노로 내리고 수근비를 궁궐로 불러들여 승은을 입혔다. 당시 녹수는 이 두 여자를 질투하고 있었는데 질투하기로는 이 두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희대의 사건이 터져버린다. 연산군과 녹수의 처소에 저주물이 발견되어 궁에서는 수사를 하던 중 전향과 수근비가 그런 짓임이 드러나자 연산군의 노기가 하늘에 뻗어 6월 19일 두 여자에게 장 100대를 치고, 사지를 찢어 죽인 다음, 머리를 저자거리에 걸어 놓게 하는 등의 참형을 내렸다.
그 배후에는 장녹수가 있었는데 녹수는 철저하게 연산군이 다른 여자들은 손도 대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녹수의 기세가 승승장구하게 뻗어가는 도중 예종과 안순왕후의 딸인 현숙공주가 녹수에게 찾아왔다. 두 사람은 평소에도 친분을 자랑하면서 현숙공주가 녹수에게 자주 찾아왔는데 현숙공주는 1465년 세조 11년에 알성문과에 급제를 한 임사홍의 며느리였다. 임사홍은 당시 두 명의 공주의 시아버지였는데 예종의 딸 현숙공주는 임사홍의 둘째아들인 임광재의 부인이고, 성종의 딸 휘숙옹주는 셋째 아들인 임숭재의 부인이었다. 녹수는 공주들의 시아버지인 임사홍과 친밀하게 지냈는데 아마도 그의 며느리 둘도 그런 연유로 녹수와 친밀하게 지내지 않았나 싶다. 현숙공주가 녹수를 찾아온 연유는 폐비윤씨에 관한 일 때문인데 당시 현숙공주의 집에는 폐비의 생모인 신씨가 기거하고 있었고, 이 사실을 전해들은 녹수는 연산군에게 외할머니가 임사홍의 집에 기거하면서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말을 전하자 연산군은 그 길로 당장 외할머니 신씨를 찾아가 어머니 윤씨의 죽음을 알게 된다.
신씨는 윤씨가 사약을 받을 때 피를 토한 금삼을 가지고 있다며 그것을 내보였고, 연산군은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를 죽게 한 위인들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며 그 유명한 갑자사화가 1504년에 일어나고 말았다. 연산군은 생모를 제헌왕후로 봉호하자 각지의 선비들이 부당함을 상소하고, 연산군은 부당함을 상소한 선비들을 하옥하였다. 성종이 윤씨를 폐출하고자 할 때 이에 찬성한 윤필상, 이극균, 성준, 이세좌, 권주, 김굉필, 이주 등을 사형에 처하고, 이미 고인이 된 한치형 ·한명회, 정창손, 어세겸, 심회,·이파, 정여창, 남효온 등의 명신거유 등을 부관참시(죽은 자의 무덤을 파 목을 잘라 두 번 죽게 하는 일)을 하였으며, 그들의 가족과 제자들까지도 처벌하였다.
이는 연산군이 생모를 위한 복수를 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위세가 높아진 선비들을 대거 기를 꺾자는 속셈이다. 또한 부왕인 후궁인 귀인 정씨와 엄씨를 처벌하기도 했는데 그 처벌법이 참으로 잔인했다. 성종은 두 후궁을 묶어놓고 스스로 장 80대를 친 다음 귀인 정씨의 소생인 안양군과 봉안군으로 하여금 각각 두 후궁을 치라 명했다. 두 왕자는 처음에 그것들이 귀인 정씨와 엄씨라는 사실을 몰랐지만 두 후궁의 몸을 쌌던 포대를 풀어보니 기겁하게도 왕자들의 어머니와 귀인 엄씨라는 사실을 알고 눈물을 흘렸다. 두 후궁이 죽자 연산군은 안양군과 봉안군을 참형시켰고, 귀인 정씨의 소생인 정혜옹주와 엄씨 소생인 공신옹주를 옹주의 작위를 박탈하고 관노로 삼아버렸다.
게다가 그는 당시 폐비와 친밀한 관계가 있던 명빈 김씨와 숙의 하씨가 폐비와 친밀했으면서 말리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이려 했는데 명빈 김씨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고, 숙의 하씨는 연산군이 갑자사화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고 아들인 계성군에게 유언을 남기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연산군은 이 일로 명빈김씨의 무덤을 파 부관참시를 했다.) 손자가 엇나간 길로 들어서자 참지 못한 인수대비가 그에게 훈계를 하다가 분노한 연산군이 이마로 할머니에게 박치기를 해 인수대비를 죽였다고 한다, 세상에 그 누가 연산군을 거역 하리오? 연산군의 폐악은 절정에 달해있었다. 연산군은 흥청이라는 제도를 마련하고 민가에서 처녀든, 유부녀든 가리지 않고 얼굴이 좀 반반한 여자들을 잡아와 강제로 수청을 들라 명했고, 수청을 들지 않으면 죽여 없앴다.
그 당시 이 흥청이라는 제도 때문에 가정이 몰락한 집이 한 두 곳이 아니었다. 장녹수는 임신을 해 옹주를 생산하자 숙원에서 종3품인 숙용의 지위에 올랐으며 외할머니 신씨는 엄청난 호사를 누리기도 하였다.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의 무덤을 어느 왕후의 무덤보다 더욱 근사하게 지어주었고, 이복동생인 휘숙옹주와 결탁하여 민가의 재물을 약탈하였으며(조선시대에는 아무리 남매 지간이지만 서로 자주 왕래를 하고 이야기만 해도 근친상간으로 받아들였다.) 민가 100채를 하루아침에 허물어 사냥터로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이렇듯 정사는 뒷전에도 늘 장녹수와 흥청망청 놀고 있으니 보다 못한 내관 김처선이 연산군에게 “조정이 이렇게 어지러운데 어찌 주색을 탐하옵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주색을 탐하는 일을 그만 하옵소서.” 라고 주청을 하니 화가 난 연산군이 그를 감옥에 가두고 장 100대를 때렸다. 그래도 김처선이 바른 말 하는 것을 멈추지 않자 이번에는 그의 두 다리를 칼로 자르고 자신에게 걸어오라 말하니 김처선이 비웃으며 “전하 같으면 두 다리가 잘렸음에도 걸어 다닐 수 있겠소이까?”라고 말하니 화가 단단히 난 연산군이 김처선의 두 팔을 자르고 목을 잘라 저자거리에 걸어놓고 만인이 보게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김처선의 본관인 전의 김씨를 없애버리고, 김처선의 7촌 이하는 모조리 잡아 죽였으며 김처선과 조금이라도 안면이 있는 자들을 죽여 없애거나 하옥시켜 곤장을 때리는 등 김처선에 대한 분노를 삭힐 수 없었다. 여름 절기 중 하나인 처서를 조서로 바꾸었고, 대신 중 한 명이 상소문을 낼 때 김처선의 ‘처’자가 들어간다 하여 상소문을 쓴 대신을 파직시키는 등의 김처선에 대한 연산군의 분노가 어디까지였는지 짐작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폭군 연산군의 말로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연산군은 자신의 큰어머니인 월산대군 부인 박씨에게 남다른 정을 느꼈는데 그 이유는 월산대군 박씨가 연산군이 어린 시절 스스로 자처하여 어린 연산군을 길렀기 때문이다.
내심 어머니의 정이 그리운 연산군이 월산대군 부인 박씨를 강간했다는 추악한 소문이 돌자 박씨는 스스로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인수대비의 명령으로 자결을 했고, 이 때문에 그녀의 동생 박원종이 연산군에 대해서 내심 반감을 가지고 있다가 1506년, 정현왕후의 소생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는 난을 일으켰다. 연산군은 진성대군이 자신의 왕위를 노린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들자 그를 죽일 뻔도 하였는데 그 때마다 위기를 무사히 넘긴 진성대군이 박원종, 홍경주 등과 같이 난을 일으킨 것이다. 하루아침에 폐주로 연산군이 전락해버리자 임사홍 등과 같은 권신들은 그들에게 죽음을 당했고, 휘숙옹주 역시도 죽음을 면치 못했으며 외할머니 신씨도 죽음을 면치 못했다.
장녹수 역시도 운명을 피해 갈 수 없었고, 그녀는 저자거리에서 포박 당한 채 사형장으로 가다가 그 곳 사람들이던지 무수히 많은 돌에 거리에서 비명횡사를 한 것이다. 연산군의 비인 신씨는 중종이 즉위한 후 자정궁에서 유폐되어 지내다가 대신들의 주청 때문에 광평대군의 집으로 옮겨 안치가 되었다. 그러나 연산군의 아들들의 말로는 죽음이었다. 폐세자 황과 창녕대군 양평군 이인, 이돈수는 사사 되었고, 폐비 신씨의 오라비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라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반정의 도당이 되기를 거부하다가 반정공신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강화 교동으로 유배를 간 연산군은 31살의 나이로 전염병으로 죽었다고 기록이 되었다. 연산군은 장녹수 말고도 여러 후궁들이 더 있었는데 그들이 낳은 자녀들이 전부 죽거나 작호를 박탈당해 관노의 신세가 된다.
폐비 신씨가 낳은 폐세자 황은 앞서 이야기 하다시피 이복형제들과 생을 함께 했으며 신씨가 낳은 두 명의 대군은 어려서 병으로 죽고, 휘신공주 억수는 공주의 작호를 박탈당해 관노의 신세가 되었고, 장녹수가 낳은 옹주는 작호가 박탈당한 채 비명횡사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494년 12월 왕위를 이어받은 연산군은 적어도 무오사화를 겪기 전까지는 폭군의 모습이 아니었다. 즉위 초에는 그래도 성종조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졌고, 인재가 많았던 덕분으로 민간은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연산군의 이 4년 동안의 치세는 오히려 성종 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퇴폐풍조와 부패상을 일소하는 기간이었다.
그래서 등극 6개월 후에는 전국 모든 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간의 동정을 살피고 관료의 기강을 바로잡았다. 또한 인재를 확충하기 위해 별시문과를 실시하여 33인을 급제시키고, 변경 지방에 여진족의 침입이 계속되자 귀화한 여진인으로 하여금 그들을 회유케 하여 변방 지역의 안정을 꾀하기도 했다. 문화 정책에서도 문신의 사가독서(유능한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를 다시 실시하여 학 문의 질을 높이고 조정의 학문 풍토를 새롭게 했으며, 세조 이래 3조의 '국조보감'을 편찬해 후대 왕들의 제왕 수업에 귀감이 되도록 했다.
또한 여자를 좋아한 덕분에 여인들에게 관대한 성품이었는데 어느 날 궁궐에서 방출된 궁녀 한 명이 공조좌랑인 한순의 첩실이 되었는데 당시 영광군수 유집이 익명서를 제출하여 한순을 고발하였다. 그러자 연산군은 유집이 선비로써 당당하지 못하다하여 유집이 넣은 상소문을 읽지 않았는데 조정에서는 마땅히 한순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연산군은 이미 방출된 궁녀는 궁녀가 아닌데 남의 첩실이 되 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냐며 대신들의 주청을 거부했지만 대신들의 주청이 워낙 거세다보니 결국 그는 눈감아 아옹하는 식으로 한순을 파직하고, 방출궁녀와 한순을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 한순은 예종의 비 안순왕후의 동생이자 종실인 구성군 이준의 처남이었던 것이다.
궁궐에서는 가뭄이 들면 세상의 음기가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궁녀들을 방출하여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게 만든 것인데 이는 정말로 부적절한 조선의 풍습이다. 시집을 가라고 방출이 되었는데 오히려 궁녀였다는 이유만으로 시집을 가는 것을 허락되지 않아 방출된 궁녀들이 남의 첩실이 되는 일이 잦았다. 사람들은 연산군이 희대의 폭군이라 하여 그가 세상에 태어난 것을 부인하려 하지만 요즘은 어미에 대한 애정결핍을 안고 태어난 연산군을 동정의 시각으로 바라봐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어머니 사건만 아니라면 좋은 군주가 되었을 인물이다. 역시 그도 왕이지만 부모를 잘 못 만난 운 때문에 폐주(廢主)로 죽어야 했던 것인지 모른다. 아마도 천비인 녹수와 어미 없이 불운하게 자란 연산군은 동시대를 살면서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졌을 것이다.
출처http://cafe.daum.net/poi2009asd/M3dl/25?docid
장녹수 [1472 ~ 1506 : 연산군]
연산군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폐비 윤씨, 성종, 인수대비 등 다양한 인물이 떠오르겠지만 그 중에서도 장녹수를 빼놓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장녹수의 출생년도는 알 수 없지만 연산군이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 당할 때 장녹수도 같이 처형되었는데 군기시 앞에서 참수형을 당했다고 한다.
연산군이 일으킨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는 조선이 생긴 1392년 이래 백년이 지나고 1498년과 1504년에 일어나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왕조가 왕권 중심에서 신권 중심으로 나아가는 발판을 주게 된다. 이로 인해 왕권은 약해 질대로 약해지고 신권이 왕권을 위협하며 심지어 독살 당했다는 설이 나도는 왕만 해도 인종, 효종, 현종, 경종, 정조, 고종까지 끊임없는 독살설이 끊이지 않았고 소현세자와 장헌세자도 이런 당파 싸움에 의한 희생양이 아니던가!
장녹수는 연산군 8년 3월이던 1502년에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연산군은 승지에게 그녀의 부친 장한필의 내력을 조사시켰다는 기록인데, 아마 이 전후로 연산군이 장녹수와 만난 것으로 사료된다. 처음에는 숙원으로 책봉되었다가 나중에는 정 3품 소용이 된다.
연산군은 왕세자로 있을 때부터 어머니 폐비 윤씨가 죽고 난 뒤에도 아버지 성종과 계모인 정현왕후, 친할머니 인수대비 등으로부터 사람다운 사랑을 받지 못했고, 갑작스런 자기 어머니의 죽음과 맞물리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등 여러 가지로 심적 변화가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왕비 신씨하고는 사이가 무척 좋았고, 성종, 정현왕후, 인수대비에게 못했던 사람의 정을 왕비 신씨에게서는 많이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연산군이 다른 누구에게는 함부로 해도 왕비 신씨에게 만큼은 궁합이 잘 맞았다고 한다.
그런 연산군이 또다른 여인, 장녹수에게 연민을 느끼게 된다. 장녹수는 슬하에 옹주 하나를 두었다. 어머니는 장한필의 첩이었고 신분도 천인이었음이 분명하다.
조선시대에는 부모 중 어느 한 쪽이 천인이면 자녀도 자동적으로 천인이 되었는데 그 자녀의 소유권은 모계를 따라 가도록 되어 있었다. 장녹수가 처음에는 제안대군의 종과 결혼하고 아들 하나가 있었지만 힘들어서 바깥세상으로 나왔다. 얼굴에 비해 어려보였던 장녹수는 영리함이 뛰어나 남자의 뜻을 잘 맞추고 분위기를 잘 이끌어나가는 능력은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다고 한다. 연산군이 국왕이 아닌 세속적인 인간으로 돌아가 장녹수의 아내가 되어 주었다. 사적인 청탁과 인정을 배제하기는 불가능한 사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장녹수가 인사나 이권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개입한 것 같지는 않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위에서 하던 부정들은 과거부터 종친과 훈구세력들이 늘 해오던 일들이다. 수령이나 하급관직은
몰라도 녹수의 청탁으로 고위직에 올랐다는 사람도 다 종친이나 관료들이었다. 그녀의 친척 중에서 제일 출세한 사람이라면 형부 김효손인데, 연산군
10년 이전에는 겨우 7품 무관직인 사정(司正)을 받았을 뿐이다.
6품과 7품은 질적 차이가 있어서 7품 이하는 정치적 비중이 거의 없는
단순 행정 또는 실무직에 해당하며, 서리 출신들도 여기까지는 많이 진출했다. 그러나 연산군 10년에서 12년 사이에 김효손은 벼락승진을
해서 정3품 당상관까지 올라갔다. 아마도 이 조치에 대해 많은 관료들이 상당히 분노했을 것이다. 그러나 장녹수의 일가로서 출세한
사람은 그 하나뿐이었다는 점은 고려해 줄 만하다.
녹수의 집을 건축할 때 대간을 보내 감독을 시킨 것이나 내시와 승지 등에게 그녀의
가마를 뒤따르게 한 것 등도 그녀의 청탁이 아니라 연산이 항상 궁리했던 '관료 길들이기'의 일환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관료들은
종친과 고급관료가 천인 출신의 계집에게 굽실거리고, 사족의 집과 땅이 그녀의 손아귀로 들어가며, 그녀의 종들이 자신들의 종을 우습게 보고,
상권, 노비, 토지 등의 이권다툼에서 자신들을 이기고, 자신들의 이권을 앞서서 채가는 현상을 참을 수 없었다. 이것은 사회의 기강을
무너뜨리는 행위였고, 왕이나 세상 사람들이 기억해서는 안되는 전례였다. 그녀의 최후는 비참하였다.
장녹수는 전비와 함께 1506년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당하면서 군기시 앞에서 처형 하기에 이르는데, 사람들이 장녹수와 전비가 비난과 처형의 대상이 된 것은 그녀들의 재산이 많았던 탓도 있지만(그 중 상당수는 연산이 공신, 관료들로부터 뺏앗은 것들이다), 그녀들의 출신이 미약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녀들의 진정한 죄는 자신들의 주제로서는 참여해서는 안되는 특권에 참여한 죄였을 것이다.
장녹수는 미인도 아니면서,또는 미천한 출생인 집안였기에 남달이 신분에대한 애착이 강했을 것이다. 또한 연산군은 어릴때 자신의 어머니가
비참하게 죽은것과 할머니를 비롯한 주위에 대한 냉대를 가슴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이들이 서로서로간에 깊은 관계를 맺을수 있었던것은 바로 이런점
때문일것이다.
아무튼 연산군은 희대의 폭군이었다. 하지만 녹수는 희대의 악녀도 아니었고,가슴깊이 원한 맺을 정도로 사무친 그
무엇도 없다. 다만 천박한 그자체가 오히려 연산이 바라보는 미 였는지도 모른다. 그시대는 그시대 나름대로 특징이 있듯이 연산의
시대의 인물로서 손색함이 없었던 여인이 바로 장녹수가 아닌가 추측한다.
출처 http://cafe.daum.net/kbshistory/2M0/24?docid
제 10대 연산군 | 정비 폐비 신씨 | 1남 - 원자(조기사망) |
2녀 - (폐)휘순공주 | ||
3남 - (폐)왕세자 | ||
4남 - 대군(조기사망) | ||
5남 - 대군(조기사망) | ||
6남 - (폐)창녕대군 | ||
후궁 숙의 이씨 | 1남 - (폐)양평군 | |
2남 - 왕자 돈수 | ||
3녀 - 옹주 | ||
후궁 숙의 윤씨 | 소생없음 | |
후궁 숙의 곽씨 | 소생없음 | |
후궁 숙의 권씨 | 소생없음 | |
후궁 숙의 민씨 | 소생없음 | |
후궁 숙용 장씨(장녹수) | 1녀 - 옹주 영수 | |
후궁 숙용 전씨 | 소생없음 | |
후궁 숙원 최씨 | 소생없음 | |
후궁 숙원 김씨 | 소생없음 | |
후궁 숙원 이씨 | 소생없음 | |
후궁 숙원 장씨 | 소생없음 | |
후궁 숙원 장씨 | 소생없음 | |
후궁 정금 | 1녀 - 함금 |
연산군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폭군이다. 연산군은 태어날 때부터 축복받지 못한 사람이었고, 성장 과정도 불행하기 짝이 없었다. 어머니의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했던 그의 유년시절은 황량하고 불안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계모였던 정현왕후 윤씨는 연산군에게 어진 어머니가 되어주지 못했고, 연산군의 교육을 담당했던 할머니 인수대비 한씨는 매번 엄격함으로 그를 다뤘다. 사랑도, 애정도, 인간에 대한 신뢰도 없었던 그의 성정은 세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만 가득찼다. 친모였던 윤비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면 커질수록 윤비를 버렸던 아버지 성종과 윤비를 제거했던 할머니 인수대비에 대한 원망은 날로 커져만 갔다. 연산군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는 순간 윤비의 사사사건은 언젠가 한 번은 열려야 하는 '판도라의 상자' 였던 것이다. 윤비 사사사건에 대한 끝없는 집착 속에서 사림과 훈구가 동시에 화를 당한 갑자사화가 일어났고, 인수대비가 손자의 행패에 가슴팍을 맞고 쓰러져 화병으로 숨을 거뒀다.
갑자사화 이후에 연산군의 성정은 나날이 거칠어져 갔다. 연산군의 곁을 지키고 있었던 것은 요부 장녹수 뿐이었다. 연산군은 장녹수와 술과 가무로 하루를 보내기 일쑤였다. 그러나 조정은 침묵했다. 무오사화, 갑자사화로 자신의 반대파를 대부분 제거한 연산군은 짧은 시간이지만 대적할 수 없는 '절대왕권' 을 자랑했다. 사관의 입을 막아버리고, 간언하는 자를 무참히 살육했다. 연산군에게 바른 말을 올리는 것은 곧 죽음의 길임을 알고 있는 조정 대신들은 누구하나 옳은 말을 하지 못했다. 그들의 침묵이 오죽 답답했으면 연산군의 지척에 있던 내관 김처선이 간언하다 팔과 다리가 잘리는 수모를 겪었을까. 그렇게 포악했던 연산군의 정치는 세종-성종으로 이어지던 태평성대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연산군의 치세가 10여년 이상 지속되면서 조선 왕조의 불안 요소들이 봇물이 터지 듯 곪아 터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치와 향락에 빠진 임금과 그것을 묵인했던 신하들이 만들어 낸 합작품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종지부를 찍을 일대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정현왕후의 아드님이었던 진성대군을 위시한 중종 반정세력이 고개를 들었던 것이다. 자신의 절대 왕권을 너무 믿었던 탓일까. 연산군은 궁궐을 에워 싼 중종 반정 세력에 뒤통수를 맞고 권좌에서 내려오게 되는 수모를 겪는다. 반정 세력에 대한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한채 유흥에 취한 연산군의 치세는 그렇게 허무한 막을 내린다. 연산군과 그의 가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귀양길에 올랐고 그의 총비였던 장녹수는 사람들의 돌멩이 세례에 목숨을 거뒀다. 할머니, 사림, 훈구 등 닥치는대로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했던 임금의 말로치고는 너무 비참했다. 1506년 9월의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비극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일 뿐이었다. 중종 반정세력은 전(前) 왕이었던, 그것도 패주인 연산군 일가를 살려둘 수는 없었다. 연산군의 제거는 중종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최초의 포석 작업이었다. 허나 한 때 10년 넘게 임금의 자리를 지켰던 인물을 사사할 수는 없었다. 우선 희생양으로 삼은 것은 연산군 일가였다. 1506년 9월 24일 연산군의 아들인 폐세자와 창녕대군, 양평군이 먼저 사사된다. 후일 만약 일어날 일을 우선적으로 제거하기 위해서 연산군의 핏줄들을 모두 저세상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강화도에 위리안치 되어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연산군에게 있어 아들들의 죽음은 자신의 죽음만큼 처절한 것이었다. 이 때부터 반정세력의 '연산군 제거 작전' 은 보다 치밀하고 섬세하게 진행된다.
연산군 일가가 일시에 사약을 마시고 죽은지 2개월이 지난 11월 8일에 연산군 역시 병사(病死)했다는 소식이 중종에게 전달된다. 사인은 '학질', 즉 말라리아였다. 연산군이 병에 걸려 눈도 뜨지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하다가 폐위된지 2개월만에 갑자기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소 건강은 그리 나쁘지 않았던 연산이 위리안치 2개월만에 병사했다는 사실은 어딘가 석연치 않다. 강화도에 갇혀 지옥과 같은 위리안치 생활을 지속했다고 하더라도 2개월만에 말라리아로 숨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중종과 반정세력은 연산의 죽음을 그대로 수용했다. 서둘러 왕자의 예로 연산의 장례를 치뤘고, 그를 역사 속의 한 페이지로 묻어버렸다. 그렇다. 패주 연산의 급작스러운 죽음에는 이복동생 중종의 방관과 반정세력의 독살 시나리오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산이 숨을 거둔 계절은 11월에서 12월. 매서운 강추위가 세상을 휩쓸때다. 그런데 그의 사인은 '말라리아' 다. 여름 7~8월에나 등장하는 학질모기가 뜬금없이 겨울에 등장해 그를 죽음으로 몰고갔다는 것이다. 게다가 학질의 잠복기간이 짧아도 2~3주는 된다는 것을 볼 때 갑자기 급사한 연산의 죽음은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이러한 아이러니를 모를 조정 대신들과 중종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침묵했다. 연산군이 죽어야만, 연산군을 제거해야만 자신들의 정권에 명분을 실을 수 있었던 그들은 연산군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것을 통해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인받았다. 사실 연산군은 말라리아에 걸려 죽은 것이 아니라 반정세력의 '독살' 에 의해 제 명을 살지 못하고 사실상 사사 당한 것이다. 그렇게 가시덩굴로 휩싸여 있던 강화도 어느 곳에서, 역사 속에서 잊혀져야 했던 임금의 시대는 처참한 종말을 고했다.
연산군은 "입은 화를 불러오는 문이요, 혀는 목을 베는 칼이다.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 몸은 어느 곳에서나 편안하다." 라는 말을 했다. 그의 말처럼 중종과 반정공신들은 그의 죽음에 관해 입을 다고 혀를 깊이 감췄다.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편하지 못한 삶을 살아야 하는 연산군의 비극은 끝끝내 역사의 뒷페이지 속으로 사라졌다. 그 이후 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연산군의 죽음은 비밀에 부쳐졌다. 하늘과 땅만이 아는, 그 누구도 모르는 비밀말이다. 어쩌면 연산군은 지금까지도 무덤 속에서 쓸쓸한 눈물을 흘리고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일까. 누구보다 절대적인 왕권을 자랑했지만 그 왕권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그의 운명은 처음부터 축복 받지 못한 황폐하고 황량한 인생이었을 뿐이란 생각이 든다.
갑자년의 사화
갑자년 봄에 임금은 그 어머니가 비명에 죽은 것을 분하게 여겨 그 당시 논의에 참여하고 명을 수행한 신하를 모두 대역죄로 추죄(追罪)하여 팔촌까지 연좌시켰으니, 그때 사약을 가져갔던 승지 이세좌(李世佐)의 친족도 연좌되어 화를 입었다. 《국조기사》
윤필상(尹弼商)ㆍ한치형(韓致亨)ㆍ한명회(韓明澮)ㆍ정창손(鄭昌孫)ㆍ어세겸(魚世謙)ㆍ심회(沈澮)ㆍ이파(李坡)ㆍ김승경(金升卿)ㆍ이세좌(李世佐)ㆍ권주(權柱)ㆍ이극균(李克均)ㆍ성준(成俊)을 십이간(十二奸)이라 하여 어머니를 폐한 사건에 좌죄(坐罪)시켜 모두 극형에 처하였다.윤필상ㆍ이극균ㆍ이세좌ㆍ권주ㆍ성준은 죽음을 당하고 그 나머지는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고 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려 보냈으며, 심하게는 시체를 강물에 던지고 그 자제들을 모두 죽이고 부인은 종으로 삼았으며 사위는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 연좌되어 사형에 처할 대상자 중에 미리 죽은 자는 모두 송장의 목을 베도록 하고 동성의 삼종(三從)까지 장형(杖刑)을 집행하고 여러 곳으로 나누어 귀양보내고, 《미수기언》에는, “한치형ㆍ윤필상ㆍ이극균ㆍ이파ㆍ성준ㆍ이세좌는 모두 그 가족을 멸망시켰다.” 하였다. 또 그들의 집을 헐어 못을 만들고 비(碑)를 세워 그 죄명을 기록하였다. 《미수기언》ㆍ《풍암집화》
옥당의 여러 신하 즉 권달수(權達手)ㆍ박은(朴誾) 등도 모두 참혹한 형벌을 받았으니 예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국조기사》
폐주의 음란한 행실과 잔학한 행위가 한창일 때 어떤 사람이 언문(한글)으로 폐주의 악행을 기록하여 거리에 붙였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고하자 임금은 “이것은 그 당시 죄를 입은 사람의 친족들이 한 짓이다.” 하고 귀양간 사람을 다 잡아다 곤장을 치고 참혹하게 고문하였다. 또 온 나라에 언문을 익히지 못하게 하였다. 《동각잡기》
이때 신수영(愼守英)이 임금에게 총애를 받아 권세를 부렸는데, “익명서(匿名書)로 조정을 비방한 것은 죄를 지은 자들이 마음에 불평을 품고 원망한 것입니다.” 하여 드디어 갑자년에 사화가 있게 되었다. 《미수기언》
봄에 응교 권달수와 이행(李荇) 등을 옥에 가두었는데, 권달수는 사형에 처하고 이행은 곤장을 쳐서 충주(忠州)로 귀양보냈다. 《용재집(容齋集)》 위의 윤비 복위(尹妃復位) 조에 상세하다.
4월에 박은을 동래로 귀양보냈다가 6월에 서울 옥으로 옮겨 가두어 혹독한 고문을 하고 마침내 사형에 처하였다. 이행은 박은의 일에 연좌되어 다시 곤장을 치고 유배지로 돌려 보냈다. 《용재집》
엄숙의(嚴淑儀)와 정숙의(鄭淑儀)를 안뜰에서 함부로 마구 때려서 죽이고, 즉시 그 흔적을 없애 버렸다. 그의 아들 안양군(安陽君) 항(?)과 봉안군(鳳安君) 봉(?)도 섬에 귀양보냈다가 조금 후에 죽였다. 인하여 말하기를, “행과 봉은 이미 그 아내와 인연을 끊었으니 그 아내는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라.” 하였다. 《연산사적록(燕山事蹟錄)》
이때 임금이 성을 내어 엄숙의와 정숙의를 때려 죽이니, 소혜왕후(昭惠王后)는 병들어 자리에 누웠다가 갑자기 일어나 바로 앉으면서, “이 사람들이 모두 부왕의 후궁인데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하니, 폐주가 자신의 머리로 몸을 들이 받았다. 이에 왕후는 “흉악하구나.” 하며 자리에 눕고 말하지 아니하였다. 《소문쇄록》
이보다 앞서 임사홍(任士洪)과 박효원(朴孝元) 등은 서로 결탁하여 간악한 짓을 하므로 성종(成宗)은 그들이 정치를 어지럽게 할 사람인 줄 알고 쓰지 아니하였다. 임사홍의 아들 광재(光載)는 예종(睿宗)의 딸에게 장가를 들고 숭재(崇載)는 성종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숭재는 성질이 음흉하고 간사하기가 그 아버지의 배나 더하였다.남의 첩을 빼앗아 임금에게 바치니 임금이 그를 매우 총애하여 그의 집에 자주 행차하였다. 이에 사홍은 임금을 뵈옵고 울면서, “폐비(연산군의 어머니) 는 엄숙의ㆍ정숙의 두 사람의 참소로 사약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은 드디어 두 사람을 죽이고 무도한 짓을 마음대로 행하여 조정에 있는 신하 백여 명을 죽였으니,지위가 높고 행동이 점잖은 사람과 명분과 절의를 지키는 선비 중에 죽음을 면한 이가 드물었다. 이 일은 모두 임사홍이 사적인 감정을 품고 임금을 유도한 것이다. 《국조기사》
우리 조정(이조(李朝))에서 많은 인재를 배양한 것으로 치자면 성종만한 임금이 없었으나, 다만 임사홍의 간사함을 알지 못하여 채수(蔡壽) 등이 사홍을 논박할 때 그들을 함께 물리침으로 해서 임사홍의 간사함을 천천히 길러 연산군의 음란하고 포악한 행실을 돕게 하여 종사(宗社)가 거의 위태할 뻔 했으니 애석한 일이다. <축수편>
공신옹주(恭愼翁主) 엄씨(嚴氏)가 낳았다. 는 한경침(韓景琛)에게 시집가서 일찍이 혼자 되었는데, 이 때에 아산(牙山)으로 귀양가면서 신주를 안고 가서 아침 저녁으로 반드시 울고 전(奠)을 드렸다. 중종(中宗) 2년에 정문(旌門)을 세웠다. 《여지승람(輿地勝覽)》
9월 29일에 전교하기를, “무오년 사초 사건으로 그 무리들을 지방으로 귀양보냈는데, 그 당시에 간사하고 음흉한 무리들이 사사로운 정리로 죽일 자를 살리고 살릴 자를 도리어 죽였으니 이 무리들을 두었다가 어디 쓸 것인가. 모두 잡아 오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무오년의 무리들은 재주를 믿고 서로 결탁하여 조정의 일을 비난했으니, 난신을 처단하는 전례대로 모두 죄를 더 주라.” 하였다. 《국조기사》
10월에 남효온(南孝溫)을 추형(追刑)하여 관을 쪼개고 시체의 목을 베었다. 그 아들 충세(忠世)도 죽였다.
성종 신묘년에 남효온이 소를 올려 소릉(昭陵)을 회복하자고 청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이때에 와서 역적으로 지목되고 죄 없는 사람도 얽어서 죄를 만들어 모두 죽였다. 갑자년의 사화는 무오년보다도 더 심하였다. 《국조기사》
참찬 홍귀달(洪貴達)ㆍ응교 권달수(權達手)ㆍ주계군(朱溪君) 심원(深源)ㆍ이조 정랑 이유녕(李幼寧)ㆍ정자(正字) 변형량(卞亨良)ㆍ전한(典翰) 이수공(李守恭)ㆍ사간 곽종번(郭宗藩)ㆍ헌납 박한주(朴漢柱)ㆍ사간 강백진(康伯珍)ㆍ응교 최부(崔溥)ㆍ홍문 박사(弘文博士) 성중엄(成重淹)ㆍ좌랑 이원(李?)ㆍ김굉필(金宏弼)ㆍ신징(申澄)ㆍ직제학 심순문(沈順門)ㆍ대사간 강형(姜?)ㆍ직제학 김천령(金千齡)ㆍ부제학 정인인(鄭麟仁)ㆍ정언 이주(李?)ㆍ보덕 조지서(趙之瑞)ㆍ승지 정성근(鄭誠謹)ㆍ현감 정여창(鄭汝昌)ㆍ정랑 성경온(成景溫)ㆍ교리 박은(朴誾)ㆍ참판 조위(曹偉)ㆍ감사 권주(權柱)ㆍ정랑 강겸(姜謙)ㆍ승지 홍식(洪湜)ㆍ환관 김처선(金處善)은 혹은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라는 이유로 혹은 바른 말로 간했다는 이유로 모두 참혹한 화를 당하였고, 이미 죽은 사람은 모두 시체를 욕보였다.
9월에 지난 날 폐비의 휘호를 반대하던 것을 다시 추론(追論)하여 이행(李荇)을 옥에 가두고 고문하니 거의 죽을 뻔하였고, 12월에 사형을 감면하여 곤장을 치고 함안(咸安)에 소속된 관노로 삼았다. 《용재집》
당양군(唐陽君) 홍상(洪常)은 함평(咸平)으로 귀양갔다가 얼마 뒤에 안성(安城)으로 옮겼다. 또 거제(巨濟)로 귀양갔다가 제주(濟州)로 옮겼다.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불러 돌아왔다. 《용재집》
을축년 가을 8월에는 또 익명서(匿名書)로 인하여 이행을 잡아 가두고 고문하였고 병인년 1월에 거제(巨濟)로 귀양보냈다가 가을에 다시 잡아 가두고 죽도록 곤장을 치게 하였는데, 유배지로 떠나려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 마침내 면하였다. <용재행장>
출처http://cafe.daum.net/mmteawoo/9MZ9/86?docid1
연산군을 녹인 장녹수의 매력
전체적으로 복스럽다거나 부잣집 맏며느릿감이라는 말이 덕담이었으나 어느 덧 욕이 되고 말았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말라깽이가 되고 싶은 것이다. 연산군은 성종과 폐비 윤씨 사이의 맏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지 않아서 수업을 자주 빠지기도 했다. 본래 조선조 궁궐에는 ‘양기’라고 하는 기생들이 있었다. 연회 때마다 춤과 노래를 도맡아 하던 전문 예술인들로 3년에 한 번씩 선발됐다. 그러나 연산군의 여성편력은 대단해 조선팔도에서 ‘채홍사’나 ‘채청사’라는 벼슬을 만들어 기생 2000명을 뽑아 흥청, 운평, 지과, 계평 등 135가지 칭호로 분류했다. 특히 이들 중에서 특별히 궁궐로 들어가는 흥청으로 뽑힐 만한 여자아이들은 연산군이 속궁합이 맞는지 손수 잠자리를 해보고 나서 속궁합도 좋고, 테크닉도 좋은 여자들은 천과흥청(天科興靑)으로 특별 관리하고 나머지들은 지과흥청(地科興靑)으로 분류했다. ‘조선은 왕의 나라이므로 백성이든 풀 한 포기든 모든 것은 왕의 것이라’는 군주론을 펼치며 엄청난 수의 미인들을 관리하느라 창덕궁 안에 7원 3각을 지었으며, 흥청들이 쓸 그릇이 모자란다고 상점을 강탈하기까지 했다. 자신이 총애한 흥청에게 막대한 재물을 하사했다. 여기서 마음껏 떠들고 논다는 뜻인 ‘흥청거리다’는 말이 생겨났다. ‘흥청망청’이라는 이동식 러브 가마까지 고안해 봄이면 뚝섬에 행차해 수백 마리의 암말과 수말들의 교합을 지켜보다 곁에 늘어선 기생들을 희롱하기도 하고 기녀들을 발가벗겨 놓고 음주가무는 물론 콩알 줍기(?) 게임까지 즐겼다. 이런 변태적 유희와 가학적인 성행위는 바로 생모인 윤씨의 비극적 죽음이 자학적으로 나타난 행위였다. 게다가 연산군은 나이 들고 뚱뚱한 여자를 즐겼다. “임금님! 어쩌다 살찐 여인들을 좋아하게 됐어요?” “응, 허구한 날 흥청망청 파릇파릇한 궁녀들만 상대하다보니 하나같이 나한테 승은을 입으려고 안달들이야. 그런데 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취할 수 있으니까 흥미가 없어지고 식상하더라구. 왜 그런 거 있잖아. 사람은 내 손에 쉽게 닿지 않는 것을 갈구하게 되는 거. 그런데다 난 엄마의 따스한 정을 못 느끼고 살아서 그런지 바짝 마르고 나이 어린 여자들보다는 퉁퉁하고 나이든 여인들이 좋더라구. 푸근하잖아. 새어머니 정현왕후도 자기가 낳은 진성대군만 이뻐했거든. 그래서 나는 왕이 된 다음에 궁궐 잔치에 대신들의 부인을 불러들여 마음에 드는 여인들과 동침을 했지. 연회가 열리는 날이면 장녹수 누님이 내가 좋아하는 타입의 부인들을 은밀히 불러줬거든. 머리 모양이 잘못되었다든지, 옷매무새를 고쳐야 한다면서 궁궐 안의 외진 별궁으로 유인해 줬거든. 아예 내 맘에 드는 아낙들의 신상명세서를 확보해 놓았어. 좌의정 박승질의 처, 남천군 이쟁의 처, 봉사 변성의 처, 총곡수의 처, 참의 권인손의 처, 승지 윤순의 처, 생원 권필의 처, 중추 홍백경의 처…. 수도 없지 뭐.” 엄마를 그리워하는 연산군이 어느 날 장터에서 어미 소의 젖을 맛나게 빠는 어린 송아지를 보자 갑자기 시무룩해지면서 “미물도 저렇게 키워주는 어미가 있는데 어째서 나에게는 나를 키워준 어머니가 안 계신단 말이냐”하고 통탄했다. 그리고 연산군과 진성대군이 함께 놀다가 둘 다 바닥에 넘어졌는데 정현왕후는 깜짝 놀라 자신의 아들 진성대군만 일으켜 줘 그 일로 연산군은 정현왕후를 어머니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됐다고 한다. 그랬다. 연산군은 풍만하고 살집이 있고 엄마 같은 여자들을 주로 간통했던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장녹수만 봐도 알 수 있다. 희대의 바람둥이를 매혹시킨 장녹수의 매력은 어떤 것이었을까. 장녹수는 매우 가난해 몸을 팔아서 생활을 했고, 여러 번 시집을 갔다가 제안대군 가노(家奴)의 아내가 돼 아들을 낳은 뒤 노래와 춤을 배워서 창기가 됐는데, 남모르는 교사(巧詐)와 요사스러운 아양은 견줄 사람이 없었다. 의외로 그녀는 탁월한 미인은 아니고 그냥 중간 수준의 얼굴에 나이도 연상이었으나 30대에도 16세의 앳된 소녀처럼 보일 만큼 동안이었던 데다 영리해서 남자의 뜻에 잘 맞추고, 아양 떨고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능력은 견줄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연산군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다루었다는 여자, 녹수는 유일 무일하게 연산군을 잘 다룰 줄 아는 여자였다. 연산군의 아명이 ‘백돌’인데 녹수는 연산군을 ‘백돌아’라고 불렀으며 연산군은 후궁이 함부로 자신의 아명을 부르는 것도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때로 장녹수는 연산을 어린아이같이 조롱하고 연산을 학대하며 욕을 하기도 했다. 연산군은 정비인 신씨에게 느낄 수 없는 정감을 녹수에게 느꼈고, 녹수의 품을 친어머니와 같다고 표현을 할 정도로 좋아했다. 눈과 입을 가진 이들은 혀를 찼지만, 연산은 인간 본연의 감정에 충실하고 싶었고, 그런 세계를 맛보고 싶었던 것이다. 연산의 왕비 신씨는 신숭선의 셋째 딸이었다. 연산과 신비의 사이는 좋았다. 연산은 신비를 현모양처요 훌륭한 국모로 인정하고 존중했다. 그러나 그것은 국왕과 왕비의 사이였다. 연산이 국왕이 아닌 세속적 인간으로 돌아올 때는 장녹수를 아내처럼 대우했고, 장녹수는 그의 아내가 됐다. 서로 아픔이 있는 사람들끼리 상처를 핥아주며 보듬었을 것이다. 정말 살다보니 별 소리를 다 듣는다. S라인이니 44사이즈니 날씬 한 것만 고집하는 시대에 이 땅의 약간 통통한(?) 여인들의 귀가 뻥 뚫릴 얘기가 아닌가! 나라님의 취향이 그렇다니 그 당시에는 깡마른 사람이 찬 밥 신세였단 말이다. 그래서 사람은 시를 잘 타고 나야한단 말이다. 우리도 ‘잘살아보세’ 이전 시대까지는 둥글둥글하면서 통통한 얼굴이 미인형으로 어느 정도 몸집도 있어야 했다. 전체적으로 복스럽다거나 부잣집 맏며느릿감이라는 말이 덕담이었으나 어느 덧 욕이 되고 말았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말라깽이가 되고 싶은 것이다. 아줌마들이 애들스럽게 옷을 입고 나와서는 너무 유치하다고 한 소리 들을까 봐 딸내미 옷 입고 나왔다고 둘러대는데 그것조차 모두들 부러워한다. 아줌마가 훌러덩 벗고 브래지어와 팬티바람에 TV에 나와 알통자랑하며 운동하는 게 영웅처럼 비춰진다. 55사이즈 옷을 조금 작게 만들어 44 표시를 붙여놨더니 매출이 수직 상승했다는 업계의 성공 사례가 떠돌아다닌다. 사실 55만 해도 ‘착한’ 사이즈다. 그 사이즈를 유지하려면 타고나기를 착한 몸매로 났든지, 아니면 철저한 자기 관리가 있어야 하는 드림 사이즈다. 연산군 같은 왕이 다시 한 번 부활하든지,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가든지…. 아! 살아 살들아! 장녹수의 실제 얼굴은 그림으로 남겨지지 않아서 정확히는 알수 없습니다. 하지만 [실록]에 의하면 장녹수의 외모는 의외로 탁월한 미인은 아니었다고 해요. 실록에서는 장녹수가 그냥 중간 수준의 얼굴이라고 표현했어요. 외모는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16살의 앳된 소녀처럼 보일 만큰 동안이었던데다. 영리해서 남자의 뜻을 잘 맞추고, 아양 떨고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이와 견줄 사람이 없다도 기록되어 있어요.
조선 시대의 궁녀들 중에서 명성을 떨친 궁녀들이 몇 있어요 숙종의 궁녀로 들어가 경종을 낳고 왕비의 자리까지 올랐다가 쫒겨난 장희빈!!! 숙종의 무수리로 들어갔다가 훗날의 영조를 출산한 최숙빈!!! 고종의 궁녀로 들어가 영친왕을 출사하고 황귀비까지 오른 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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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cafe.daum.net/Stown/8qrM/483?docid
마더 콤플렉스가 빚은 비극의 역사,
한 아버지를 둔 두 형제의 서로 다른 인생행로
선정릉
역사는 냉혹하여 승리자의 편에서 기록되어진다. 같은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지만 두 왕자의 인생 역정은 너무도 달랐다. 한 사람은 사랑하는 어머니를 그 아버지로부터 죽임을 당해 훗날의 피맺힌 절규와 함께 자신과 아내와 4 남 2 녀의 자녀들까지 사약으로 인생을 마감한 불운한 왕으로 우린 그를 [연산군]으로 부른다.
또 한 사람은 자신의 형이자 왕이었던 연산군을 쿠데타로 밀어낸 후에 개인적 삶은 일생 불운했던 동생인 중종이다.이 두 형제는 죽어서도 마주 보며 묻혔으니 형인 연산군은 지금의 도봉구 방학동에, 또 한사람인 동생 중종은 지금의 강남구 삼성동에 묻혀 있으니 그 거리는 직선거리로 40 여리, 약 16 ㎞정도,
생전의 형제간의 떨어진 거리만큼의 그 거리로 떨어져 묻혀 있으니,참으로 허무한 것이 인생이라 할 것이다. 2 호선 지하철을 타고 강남을 가다보면 [선릉]이라는 역이 있다. 선릉역에 왕릉이 있다는 사실과 그 왕릉이 누구의 릉 인지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곳의 이름은 원래 [선정릉] 으로서 중종의 묘인 정릉과 그의 아버지 성종과 어머니 정현왕후의 묘인 선릉이 같이 있는 곳이다.
성종의 첫번째 왕비인 한명회의 딸 공혜왕후가 일찍 죽자 2 번째 계비인 숙의 윤씨를 왕비로 맞아 낳은 아들이 연산군이고 윤씨가 사약을 받아 죽고 나서 3 번째 계비를 얻으니 이가 중종의 생모인 정현왕후이다.
따라서 연산군과 중종은 배다른 이복형제인 셈이다. 이 두 왕자는 훗날 전혀 다른 인생의 역정을 걸어 가게된다. 왕자의 아버지 성종도 어릴 때 아버지(예종)를 잃어 할아버지인 세조의 손에서 크는데 40 세도 못되어 죽음으로서 같은 상항을 고스란히 아들 연산군과 중종에게 유산으로 남기고 죽는다.
이러한 상황설정이 훗날 한 사람은 천하의 폭군으로 자리매김되고 또 한사람은 가정적으로는 아주 불우한 삶을 사는 왕으로 기억되게 된다. 왕과 왕비의 묘를 릉(陵)이라 하고 왕자와 공주의 묘를 원(園)이라 하며 그 이하는 묘(墓)라 하는데 연산군은 뒷날 강등되는 바람에 지금도 광해군과 더불어 연산군묘라 칭하고 있으며 중종의 묘는 정릉이라 불리 우고 있다.
TV 나 영화도 많이 알려진 연산군 이야기의 주제는 폭정의 난폭한 왕이다. 어머니 콤플렉스를 이기지 못하고 공과사의 구분을 하지 못한 채 방황과 주색 가무만으로 묘사되는 못 된 왕의 대표로 묘사된다.
그러나 연산은 그렇게 일방적으로 난도 당해야만 하는 왕이 아니다. 조선 초기의 정치 상황이나 권력의 구조 속에서 살펴보면 연산군은 절대적인 피해자로서 현실적인 치적에 대한 냉정한 자리매김을 다시 해야 하는 부분도 적지 않다.
어찌되었든지 이 두 형제는 죽어서도 차별(?)을 받았으니 한 사람은 인적 드문 곳에 유리 되듯 누워 있고 한 사람은 황금의 땅 강남 한복판에 부모와 같이 누워 있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 인생사이다.
연산군묘(燕山君墓)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 77 번지 호젓한 인적 드문 곳에 무덤이 있는데 강남의 선능에 있는 중종의 형인 연산군의 무덤이다. 이곳에 조선 제10 대 왕이었던 연산군(1476 ~ 1506)과 거창군 부인 신씨(? ~1537)의 무덤이 같이 있다.
연산군은 성종과 폐비 윤씨 사이에서 성종 7 년(1476)에 원자로 태어나 1483 년에 왕세자로 책봉, 성종이 1494 년에 승하하자 그 해에 12 월 29 일에 즉위 하였다. 연산군은 실정이 극심하여 재위 12 년(1506)에 폐위, 연산군으로 강봉되고 같은 해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었다. 그 해에 유배지에서 세상을 뜨니 향년 31 세였다. 조정에서는 강화도에 장사지내었으나 중종 7 년(1512) 폐비인 부인 신씨의 상소로 그 다음해 이곳에 왕자군의 예로서 묘를 옮겼다.
연산군 부인 폐비 신씨는 중종 원년(1506)에 연산군과 함께 폐출, 거창군 부인으로 강봉되어 정청궁에서 거처하다가 중종 32 년(1537)에 별세하였다. 역사란 비정하다. 승자의 입장에서 기록되는 모든 정사(正史)에 의하면 연산군은 폭군이요, 실정의 주체이다. 사실 그러하겠지만 뒤를 이은 정권의 정당성은 앞의 정권을 부정 하여야하는 이율배반에 기초하므로 실제 그가 그렇게 폭군이고 또 실정의 주체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강남에 있는 중종의 묘인 [선정능]과 이곳을 비교하면 역사의 비정함과 무망함을 동시에 느낄 수 밖에 없다.
폐비(廢妃) 거창군부인 신씨 (夫人 愼氏, 1472-1537)
부인 신씨는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의해 연산군과 함께 폐위되었고 자신의 두 아들 또한 유배지에서 사사(賜死)되는 불우한 일생을 마감한 비운의 여인이라 할 것입니다. 사후 연산군 묘 옆에 배장되었고, 무덤 앞에 서있는 비석명은 '거창신씨지묘(居昌愼氏之墓)'이다. 연산군과의 사이에서는 4남 3녀를 낳았으나 두 아들과 공주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요절하였고, 그나마 두 아들은 연산군이 폐위된 후 사사되었다.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대, 517년, 1392 - 1910 ]
원(園) 13기(基)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호)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호)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호)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王)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기(基)
익종(翼宗) 一 수릉(綏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一 융릉(隆陵 : 사적 제206호)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一 영릉(永陵 : 사적 제205호)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一 장릉(章陵 : 사적 제202호)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一 경릉(敬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墓) 2기(基)
제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一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호)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제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一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호)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기(基)
제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一 유릉(裕陵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제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一 홍릉(洪陵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시
왕릉 35기
제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一 예릉(睿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一 경릉(景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제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一 인릉(仁陵 : 사적 제194호)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제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一 건릉(健陵 : 사적 제206호)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제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二 홍릉(弘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一 원릉(元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二 혜릉(惠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一 의릉(懿陵 : 사적 제204호)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三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二 익릉(翼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一 명릉(明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제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一 숭릉(崇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一 영릉(寧陵 : 사적 제195호)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제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二 휘릉(徽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一 장릉(長陵 : 사적 제203호)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제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二 성묘(成墓 : 사적 제365호)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제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一 목릉(穆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一 강릉(康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一 효릉(孝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洞)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四 태릉(泰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四 태릉(泰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三 희릉(禧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二 온릉(溫陵 : 사적 제210호)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一 정릉(靖陵 :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三 회묘(懷墓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二 순릉(順陵 : 사적 제205호)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一 선릉(宣陵 :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路)
제8대 예종(第八代 睿宗) 二 공릉(恭陵 : 사적 제205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제8대 예종(第八代 睿宗) 一 창릉(昌陵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7대 세조(第七代 世祖) 一 광릉(光陵 : 사적 제197호)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제6대 단종(第六代 端宗) 二 사릉(思陵 : 사적 제209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제6대 단종(第六代 端宗) 一 장릉(莊陵 : 사적 제196호)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제5대 문종(第五代 文宗) 一 현릉(顯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4대 세종(第四代 世宗)
제3대 태종(第三代 太宗)
제2대 정종(第二代 定宗)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三 정릉(貞陵 : 사적 제208호) : 서울 성북구 정릉2동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二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一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호)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목조-덕릉 효공왕후 이씨-안릉 익조-지릉 정숙왕후 최씨-숙릉 , 손씨 도조-의릉 경순왕후 박씨-순릉, 조씨 환조-정릉 의혜왕후 최씨-화릉, 이씨, 정빈 김씨 태조-건원릉 신의왕후 한씨-제릉 신덕왕후 강씨-정릉 정종-후릉 정안왕후 김씨-후릉 태종-헌릉 원경왕후 민씨-헌릉 세종-영릉 소헌왕후 심씨-영릉 문종-현릉 현덕왕후 권씨-현릉 단종-장릉 정순왕후 송씨-사릉 세조-광릉 정희왕후 윤씨-광릉 예종-창릉 장순왕후 한씨-공릉 안순왕후 한씨-창릉 성종-선릉 공혜왕후 한씨-순릉 폐비 윤씨-회묘 정현왕후 윤씨-선릉 연산군-연산군묘 폐비 신씨-연산군묘 중종-정릉 단경왕후 신씨-온릉 장경왕후 윤씨-희릉 문정왕후 윤씨-태릉 인종-효릉 인성왕후 박씨-효릉 명종-강릉 인순왕후 심씨-강릉 선조-목릉 의인왕후 박씨-목릉 인목왕후 김씨-목릉 광해군-광해군묘 폐비유씨-광해군묘 인조-장릉 인렬왕후 한씨-장릉 장렬왕후 조씨-휘릉 효종-영릉 인선왕후 장씨-영릉 현종-숭릉 명성왕후 김씨-숭릉 숙종-명릉 인경왕후 김씨-익릉 인현왕후 민씨-명릉 인원왕후 김씨-명릉 경종-의릉 단의왕후 심씨-혜릉 선의왕후 어씨-의릉 영조-원릉 정성왕후 서씨-홍릉 정순왕후 김씨-원릉 정조-건릉 효의왕후 김씨-건릉 순조-인릉 순원왕후 김씨-인릉 헌종-경릉 효현왕후 김씨-경릉 효정왕후 홍씨-경릉 철종-예릉 철인왕후 김씨-예릉 고종-홍릉 명성황후 민씨-홍릉 순종-유릉 순명효황후 민씨-유릉 순정효황후 윤씨-유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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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 > 밥 먹고 도시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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