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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朝鮮王陵,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STORY BOOK - 7

草霧 2013. 7. 24. 18:37

 

 

 

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STORY BOOK - 7

 

 

 

 

조선왕릉은 42(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40, 14, 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3, 4, 5)입니다

 

조선 건국 초기 국가 기반을 잡은 왕

태조(건원릉)-정종(후릉)-태종(헌릉)

 

조선의 문화를 꽃 피운 왕

세종(영릉)-문종(현릉)

 

죽음조차 알릴 수 없었던 비운의 왕

단종(장릉)-세조(광릉)-추존왕 덕종(경릉)-예종(창릉)

 

육신을 잃고 떠돌고 있는 넋

성종(선릉)-연산군(연산군묘)

 

당파 싸움에 시달린 왕

중종(정릉)-인종(효릉)-명종(강릉)

 

전란을 겪은 왕

선조(목릉)-광해군(광해군묘)-추존왕 원종(장릉)

 

청나라에 맞서 싸운 왕

인조(장릉)-효종(영릉)-현종(숭릉)

 

당쟁에 휩싸인 왕

숙종(명릉)-경종(의릉)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힘쓴 왕

영조(원릉)-추존왕 진종(영릉)-추존왕 장조(융릉)-정조(건릉)-순조(인릉)-추존왕 익종(수릉)

 

세도정치에 시달린 왕

헌종(경릉)-철종(예릉)

 

황제가 된 왕

고종황제(홍릉)-순종황제(유릉)

 

조선조(朝鮮朝) 왕릉(王陵)

    

왕릉 전관 조선조(朝鮮朝)의 역대 왕릉(王陵)에 대한 접근은 그 외형적 특징만으로도 당대(當代)의 역사적 사실들을 반증(反證)해 볼 수 있는 흥미로운 대상입니다. 조선조의 왕릉(王陵)27대 왕()과 왕비(王妃) 혹은 계비(繼妃), 그리고 추존(追尊)된 왕들을 포함해 전체 44기의 능()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 중 태조(太祖)의 비()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제릉(齊陵)과 정종(定宗)과 비() 정안왕후(定安王后)를 모신 후릉(厚陵)만 북한 지역[개성시]에 있어 우리가 아직 답사할 수 없는 지역에 있고, 거리상으로는 유일하게 강원도 영월에 조성된 단종(端宗)의 장릉(莊陵)을 제외하고는 모두 서울과 경기도에 산재(散在)해 있습니다.

 

특히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東九陵 : 건원릉(태조), 현릉(문종), 목릉(선조), 휘릉(인조 계비), 숭릉(현종), 혜릉(경종 비), 원릉(영조), 수릉(익종-추존), 경릉(헌종))이나 경기도 고양시의 서오릉(西五陵 : 경릉(덕종-추존), 창릉(예종), 명릉(숙종), 익릉(숙종 비), 홍릉(영조 비)), 서삼릉(西三陵 : 희릉(중종 계비), 효릉(인종), 예릉(철종)), 그리고 경기도 파주시의 파주삼릉(坡州三陵 : 공릉(예종 비), 순릉(성종 비), 영릉(추존 진종과 비))은 왕릉군(王陵群)을 이루고 있는 필수 답사(踏査) 지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연 생태박물관 수목원까지 남겨준 최고의 명당

 

 

 

 

光陵 (광릉)

    

 

 

 

광릉(光陵) · 의릉(懿陵)

 

 

조선세조 광릉

 

7대 세조(世祖) 광릉 두번째 작은이미지7대 세조(世祖) 광릉 세번째 작은이미지7대 세조(世祖) 광릉 첫번째 작은이미지

 

광릉(光陵)은 조선 제7대왕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尹氏)의 능이다. 사적 제197호로,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있다. 1468(세조 14)1483(성종 14)에 정하였다. 이 능은 세조가 석실의 유해무익함을 강조하고 석실과 병석(屛石)을 쓰지 말라고 한 유명(遺命)에 따라 병석을 없애고 석실은 회격(灰隔)으로 바꾸어 꾸몄으며, 십이지상을 난간동자석주(欄干童子石柱)에 옮겨 새겼다. 회격으로 바꿈으로써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했으며, 능 배치상에 있어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식이 여기서 비롯되었는데 이로써 국초 왕릉제의 일대개혁을 이루었다.

 

 

    (우472-864)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광릉수목원로 354. 구시외버스터미널(의정부동)에서 광릉내행 버스(21번) 이용하시면 오실 수 있습니다.

 

 

경기도 남양주 197

국립수목원, 1999년 이전에 광릉수목원이라 불렸고 현재까지도 흔히 그렇게 불리는 경우가 많다.

크낙새, 천연기념물 제 11

 

 

 

 

 

능 수호군’으로 이속된 광릉 인근 마을 주민

『예종실록』 1469년(예종 1) 8월 13일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일찍이 경기의 광주, 지평, 양근, 가평, 포천, 영평, 양주, 적성, 마전, 삭녕, 장단 등 여러 고을에서 유이(流移)한 백성들을 본 고을로 돌려보낸 뒤에 복호(復戶)하되, 포천현(抱川縣)의 백성은 광릉(光陵)의 수호군(守護軍)으로 이속시키고 경작하는 땅에 대한 공부(貢賦)를 감해 줄 것을 의논하여 아뢰라고 명하셨습니다.

 

청컨대, 제도 관찰사로 하여금 쇄환(刷還)하고 계문(啓聞)하게 한 뒤에 3년 동안 복호하고, 그 전지(田地)는 연한(年限)에 구애하지 말고 도로 주어서 생업에 안정되게 하소서. 포천 백성으로서 지금 광릉의 수호군으로 소속된 자 28인에게는, 청컨대 경작하는 땅의 공부(貢賦)를 감해 주소서. 양주 백성으로서 수호군으로 소속된 자 42인의 공부도 포천의 예(例)에 따라 견감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위의 기록처럼 조선시대 왕릉 인근 마을의 사람들에게는 왕릉을 관리하는 책무가 부여되었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왕릉의 수호군이 되어 매일 조를 짜서 왕릉 주위를 순찰하였다. 왕릉을 둘러싼 산림의 병충해 피해가 심각하면 인근 주민들이 능 부근의 20리 까지 직접 손으로 벌레를 잡아 없앴다. 이들을 총괄 감독하는 것은 종9품 관리인 능참봉이었다.

 

울창한 숲이 조성된 산자락에 위치한 광릉의 전경

 

 

광릉 숲 이야기

 

광릉 옆 수목원 이야기

조선 7대 임금 세조의 능인 광릉의 주위로는 다양한 생물들이 자생하고 있는 울창한 숲이 형성되어 있다. 이 숲은 산림청의 연구기관에서 꾸준히 관리하다가 1984년 광릉 수목원으로 조성되었으며, 1999년에는 국립 수목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운영하고 있다. 광릉뿐만 아니라 서울과 서울 근교의 조선 왕릉 부근에는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항상 푸른 숲이 조성되어 있어 도심 속의 쉼터로 기능하고 있다.

 

광릉의 숲은 세조의 유언대로 풀 한 포기 뽑지 못할 정도로 잘 보호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산으로 겹겹이 에워싸인 능지

왜 조선 왕릉 부근에는 이렇게 항상 숲이 있을까? 우선 왕릉의 입지를 선정할 때에는 항상 풍수지리상의 길지를 고려하였기 때문이다. 풍수지리적 길지의 요건으로서는 여러 기능을 하는 산자락이 능침의 후면은 물론이고 좌우를 감싸는 지세가 필요하다. 따라서 능역의 대부분이 자연 산림 공간으로 겹겹이 에워싸인 곳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에 더하여 능역에는 다양한 나무를 인공적으로 심어 조경을 하였다. 능침 공간과 제향 공간에는 잔디를 깔아 사초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동선을 따라 진달래 등의 꽃나무를 심고 연못 주변에는 버드나무를 심었다. 특히 봉분의 좌우 및 후면에는 소나무를 심고, 전면의 낮은 지대에는 오리나무를 심는 것이 능침 공간의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광릉 조영 당시 심은 진달래와 잣나무

광릉을 조영할 때, 능 조성의 전 과정에 대한 기록을 엮어 만든 『광릉지(光陵志)』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금천교를 지나 향로를 따라 좌우에 진달래를 수 백 그루 식재하고 재헌(재실) 북쪽 창문에까지 두견화를 수 백 그루 식재하였다. 또 서 동구 십리의 길에는 수많은 전나무와 측백나무 혹은 잣나무가 있으며 동 동구 5리 정도의 길에는 전나무, 잣나무와 더불어 진달래를 서로 맞대어 심어 놓았다. 또 서쪽 담장 밑에 화훼류를 심어 무성하게 하였다.

 

위의 기록은 조선 왕릉의 산림이 얼마나 철저히 조성 및 관리되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휘경원과 순강원

 

능, 원, 묘의 차이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園)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墓)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휘경원(徽慶園)

순조의 어머니 수빈 박씨가 잠든 휘경원의 전경.휘경원은 조선 22대 정조의 후궁 수빈(綬嬪) 박씨의 능이다. 1770년 좌찬성 준원의 딸로 태어난 수빈 박씨는 1787년(정조 11) 2월 18일 삼간택을 거쳐 빈으로 결정되었으며, 같은 해 2월 11일 수빈의 빈호를 하사받고 입궁하였다. 1790년에는 득남을 하였는데 그가 곧 조선 23대 임금인 순조가 된다. 평소 성품이 온화하고 예절이 바르며, 검소한 생활을 하여 현빈 (賢嬪)이라 일컬었다. 아들이 왕위에 오른 지 22년만인 1822년(순조 22) 12월 22일 세상을 떠나 지금의 이곳에 묻혔다. 그러나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1855년(철종 6)에 순조의 무덤인 인릉을 다른 자리로 옮기면서 휘경원을 순강원으로 옮겼다가 1863년(철종 14)에 순강원의 자리가 풍수지리학 상 좋지 못하다고 하여 지금의 자리로 또다시 옮겨졌다.

 

 

순강원(順康園)

순강원은 조선 14대 선조의 후궁 인빈(仁嬪) 김씨의 능이다. 인빈 김씨는 1555년 김한우의 딸로 태어나 14세에 선조의 후궁이 되었다. 선조가 무척 총애하였으며 정원군(원종)을 포함해 4남 5녀를 두었다. 1613년(광해군 5) 10월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쳐 이곳 순강원에 잠들었으며, 위패는 서울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 칠궁에 봉안되었다.

 

순강원은 봉분 주위로 곡담이 둘려있으며, 묘비석을 비롯하여 여러 석조물이 있다. 순강원 묘역 내에는 인빈 김씨의 넷째 아들 의창군(義昌君, 1589~1645)과 부인 허씨의 묘가 있다.

 

 

 

 

 

玄正陵 (현정릉)

 

    

 

현릉(玄陵), 정릉(正陵) (개풍군)

 

 

공민왕릉(恭愍王陵)은 개풍군 해선리에 있는 봉명산의 무선봉 중턱에 자리한 2기의 무덤으로, 서쪽 것이 고려 31대 공민왕의 무덤인 현릉(玄陵)이며, 동쪽 것이 왕비 노국공주의 무덤인 정릉(正陵)이다. 이 일대의 지형은 풍수설에 잘 어울리는데, 무덤구역은 3개의 층단과 맨 아래의 경단으로 이루어졌다. 공민왕은 1365년 왕비가 난산으로 죽자, 자신이 직접 주관하여 9년이란 오랜 기간에 걸쳐 이 방대한 무덤공사를 벌였는데, 이 능의 건축과 설계는 당시 고려의 수학, 천문지리, 석조건축물, 조형예술의 수준이 집대성되었다.고려시대에 궁전·무덤 등의 건축물을 웅장하게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 건축 구획을 여러 개의 층단으로 배치하던 수법을 도입하여, 제일 윗단에 봉분을 두고 그 아래로 여러 개의 층단을 구성하면서 조각과 시설을 적절히 배치함으로써 장엄한 분위기를 내고 있다.

 

 

 

 

 

 

추존왕릉

 

 

추존왕 이야기

 

장릉은 추존왕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능이다. 추존왕(追尊王)이란 실제로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죽은 뒤에 묘호가 내려진 왕을 말한다. 어떠한 인물들을 왕으로 추존하는 것일까? 조선의 추존왕은 모두 9명이다. 이들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세자의 신분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거나,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왕의 아버지, 그리고 태조 이성계의 4대 선조이다. 왕으로 추존된 이들은 종묘에 신위를 모셔서 왕위에 오른 왕과 똑같은 대우를 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세자나 대군묘의 예로 조영된 능을 왕릉의 상설에 맞게 규모를 키우거나 석물을 추가하여 능도 더욱 위엄을 갖추게 되었다. 태조 이성계의 4대 선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를 제외한 조선의 추존왕은 다음과 같다.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인조의 아버지 원종(元宗)

장릉에 잠들어 있는 추존왕 원종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1587년 정원군에 봉해졌으며,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세상을 떠난 지 4년 후, 아들인 능양군이 반정 세력의 추대를 받아 조선 16대 왕 인조로 즉위하자 정원대원군으로 추존되었으며, 9년 후 원종으로 추존되었다. 인조는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고 선왕인 광해군이 폐위된 터라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아버지를 왕으로 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삼촌의 왕위를 계승한 성종의 아버지 덕종(德宗)

덕종은 세조의 맏아들로 의경세자에 봉해졌다. 그러나 세자로 책봉된 지 얼마 되지 않아 20세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동생인 예종이 세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나 예종 역시 1년 남짓한 재위 기간을 채운 뒤 병사하였다. 의경세자에게는 월산대군과 잘산군 두 아들이 있었는데, 대비는 둘째 아들인 잘산군으로 하여금 예종의 뒤를 잇게 하였고, 그가 9대 왕인 성종이다. 성종이 왕위에 오른 뒤 의경세자는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동생의 아들로 인해 추존된 진종(眞宗)

진종은 영조의 맏아들로 1719년 태어나 1724년 경의군에 봉해졌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0세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효장세자로 봉해졌다. 후에 그의 이복동생인 사도세자가 왕세자가 되었으나 그마저 즉위하지 못하고 죽자, 사도세자의 아들이 22대 임금 정조로 즉위하였다. 정조는 영조의 유언에 따라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입적되고,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하였다. 1899년에는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진종소황제로 추존되었다.

 

비극적 죽음을 맞았던 정조의 친아버지 장조(莊祖)

장조는 형인 효장세자가 죽자 1736년 세자로 책봉된 후 대리청정을 하는 등 활발한 정치활동을 벌였으나, 당쟁의 희생양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176228세의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1776년 아들인 정조가 즉위한 후 그를 장헌세자로 추존하였으며, 1899년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장조의황제로 추존되었다.

 

헌종의 아버지 익종(翼宗)

익종은 순조의 아들로, 태어난 지 3년만인 1812(순조 12)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1827(순조 27)에는 순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였으나 아버지인 순조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 1830년 효명세자로 추존되였다. 1834년에는 아들인 헌종이 즉위하면서 익종으로 추존되었고, 1899년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었다.

 

 

 

 

 

내시 무덤

 

 

 

 

왕의 손발, 왕의 그림자, 내시 이야기

연산군에게 직언하다 처참하게 죽은 김처선을 빼고는 환관(宦官)과 궁녀 이야기는 별로 전해지지 않는다. 궁중에서 살지만 거세(去勢)된 남자로서 결혼하기도 어렵고 아기를 낳을 수도 없었던 환관, 오로지 남자라고는 임금 한 사람만 보고 살아야 했고, 한 번 들어가면 죽어야만 궁궐 나올 수 있다던 궁녀.

 

그들을 위해 오랫동안 위령제를 지내오던 곳이 있다. 바로 서울 노원구 월계동 초안산 자락의 사적 제440호 조선시대 분묘군(墳墓群)이 그것이다. 이 분묘군은 1,154기의 묘가 있는데 정밀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 가운데 1,000여 기가 환관이나 궁녀의 무덤이라고 한다. 특히 그 무덤들 가운데는 무연고 무덤이 많았는데 마을 사람들이 이 무연고 무덤에 오랫동안 위령제를 지내온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분묘군 근처에서는 북한산성을 쌓은 녹천 이유대감에게 제사를 지내는 녹천대감 치성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비손하는 안골치성제도 지내오고 있었다.

    

책표지를 클릭하시면 창을 닫습니다.거세된 남자, 내시

내시(환관)의 유래나 그들의 일생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는게 별로 없다. 양주군 장흥에 가면 낮은 산 밑 냇물이 흐르는 옆에 벌마을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을 속칭 내시마을(고자마을)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중기 무렵부터 벼슬에서 물러난 내시들이 이곳에 집단 부락을 이루며 살던 마을이어서 붙게 된 이름이다. 이곳 마을 가까운 산에는 200여 기를 헤아리는 큼직한 무덤들이 모여 있어,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며 세도를 누리던 내시들의 화려했던 지난날을 그려보게 한다.

 

내시제도는 원래 고대 중국의 왕실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때부터 환관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고, 고려 초기에는 궁중의 하급관리로서 힘없는 환관이 존재하였으나, 원나라의 침입을 받은 25대 충렬왕 때부터는 원나라와의 외교를 주로 환관이 맡게되었고, 이후 원나라의 세력을 등에 업은 이들 환관의 위세는 점차 커질대로 커졌다.  

 

조선조에 들어와 궐내에는 수백명의 궁녀들이 머무르고 있었는데, 이들 궁녀는 임금의 여인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이들을 온전히 보호하기 위해서는 내시가 더욱 필요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내시들의 권세가 더욱 커져, 지금의 장관급(판내시부사)에 속하는 직급에서부터 사령에 이르기까지의 수백명이, 임금의 음식관리와 어명의 전달 및 궁궐 내의 온갖 살림과 잡무를 맡아 수행하였다.

 

대궐에는 일정한 관직을 가진 자만이 출입할 수 있었으며, 특히 왕과 왕비가 머무르는 침전공간에는 임금의 호명을 받은 고위인사 만이 출입이 가능했으나, 이들 내시들은 언제나 통제없이 임금의 지근거리에 근접할 수 있었고, 이렇게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특권때문에 이들은 비록 낮은 관직에 있었으나, 정무에 깊이 끼여들 수 있었다.

 

당시 궁중에 항시 머무르는 장번내시를 제외한, 출퇴근을 하는 출입번내시들은 궁궐 바로 문 밖인 화자동(지금의 효자동)에 주로 모여 살았는데, 담장이 높은 솟을대문의 호화로운 고대광실을 지어 살았다. 내시의 생활은 일반 가정의 생활과 같이 장가가서 가정을 이루며 살았는데, 그들의 아내들은 가난한 집에서 팔려온 딸들이거나, 내시에게 빌붙어 권세를 잡으려는 자들의 딸들이었고, 이들 여인들 중 성의 욕망을 이기지 못하여 도망치려는 사태를 막기 위해 내시들은 높은 담장과 솟을대문이 필요했다.

 

구한말 1908년 내시제도가 없어지면서 이들 내시들은 도봉구 창동과 월계동, 그리고 양주군 장흥 일대에 흩어져 살다가 그곳에 무덤을 쓰기 시작하여,지금도 그곳에 그들 내시들의 무덤들이 모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자는 이제 성불구자로 바뀌어 불리고 있고, 그들의 무덤들만이 이렇게 모여 집단을 이루고 있다.

 

내시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내시는 숙명적으로 정해진 존재로 여겨져 왔다. 중국의 경우 이것을 하늘의 원리와 결부지어 설명했는데, '삼재도회'라는 책에 의하면 천계에는 황제의 별이 있고 그 측근에는 일반관료들과 함께 내시의 별이 있다고 적고 있다. 동양사회에서 황제는 하늘의 천명을 받은 신비한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에 신비한 존재인 천자와 일반사람들이 만나기 위해서는 중간에 매개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 인간이면서도 비인간적인 요소를 지닌 존재인 내시들은, 거세했기 때문에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을 극복한 것으로 받아들여 황제의 신성성을 높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처음 내시가 등장한 것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9세기 신라 흥덕왕때로, 우리 나라의 내시 역사도 천년이 훨씬 넘는 것이다.

 

내시가 되려면?

 

내시는 익히 알다시피 우선 고자여야만 했다. 이것은, 궁녀들과 항상 접촉하며 일하고 궁궐에서 숙식을 하기 때문에 여성과 문제를 일으킬 여지를 원천적으로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시 직에 필요한 수요는 어떻게 충당했을까? 중국과 같은 궁형의 형벌이 없는 우리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취했는데, 바로 양자제도를 이용한 것이다. 내시들로 하여금 고자인 어린이를 양자로 삼아 대를 잇게 함으로써 궁궐에서 필요한 내시를 구했던 것이다. 또한, 흔치는 않지만 내시들의 권세와 궁 생활을 동경해 가족에 의해 또는 스스로 거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며, 내시가 되기 위한 일종의 사설 양성소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내시도 출퇴근을 했다?

내시들이 궁궐에서 생활하다 궁에서 생을 마쳤다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는 달리 내시들도 일반 관료들과 마찬가지로 궁궐 밖에서 가정을 가지고 또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내시들의 근무형태는 크게 장번과 출입번으로 나뉘는데 번은 교대로 근무하는 것을 의미한다. 장번은 장기간 왕 가까이 모시는 자들로 왕과 세자궁에만 제한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다른 내시들에 비해 승진의 기회나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았으므로 장번 내시는 내시부의 핵심요직에 해당됐다. 그러나 '장번 내시' 역시 궁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교대기간이 길었던 것뿐 이들도 궁 밖에 집을 두고 있었다. 한편 이들은 처나 첩도 거느리고 가계 계승을 위해 양자를 들이기도 했다. 재산이나 권력에 비례해 4-5명 양자를 들이는 경우도 있었으며, 양녀도 들일 수 있었다. 결혼도 하고 양자도 들이고 양녀도 들여서 어엿한 일반가정과 똑같은 생활을 했던 것이다.

 

내시부의 임무 네 가지

경국대전은 내시부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는데, 내시부를 승정원이나 홍문관과 같이 하나의 관부로 인정해 그 조직과 임무를 상세히 적어놓고 있다. 첫 번째, 궁중내의 음식 전반에 대해 감독하는 대내감선. 두 번째, 왕명을 전달하는 왕명출납. 세 번째, 궁중의 문을 지키는 수문. 네 번째, 궁궐 내의 청소를 담당하는 소제. 그러나 이것은 포괄적인 규정일 뿐 실제로는 궁중의 제사는 물론 왕실의 재산 관리, 궁실의 각종 공사, 궁녀의 감독 등 궁중 내의 모든 대소사에 내시들이 관여했다.

 

내시의 품계와 규모는?

내시의 관직은 종2품의 상선에서 종9품의 상원까지 두었다. 이 중 임금의 수랏상에 오르는 음식을 감독하는 상선이 내시부의 가장 높은 직위였다. 이밖에 상원, 상다, 상약, 상전 등 각 관직마다 상세한 임무를 규정하고 있다. 내시부의 정원은 140명으로, 일부 군부대를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인원이었다. 예를 들면, 병조나 이조와 같은 육부에서도 정규 관원이 10여명 내외였다. 그러므로 140명 정도의 관원이 소속되어 있던 내시부는 대단히 규모가 큰 관서였다고 볼 수 있다.

 

내시의 한계

선조 때의 김계한은 임진왜란 때 목숨을 걸고 임금의 안위를 지킨 내시였다. 왕이 그 공로를 인정해 공신에 봉하자 이를 취하하라는 양반들의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내시에게 그런 명예를 줄 수 없다는 이유로, 분명한 공을 세웠는데도 무시됐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정사에 나오는 내시 관련 기록을 보면 건방지다거나 비하하는 표현 혹은 분란을 일으킨 행적만이 기록돼 있는데, 이것은 한 인간의 능력보다는 유교적인 신분질서를 강조하는 조선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내시부와 내반원

조선시대의 거의 모든 관부는 궁 밖에다 청사를 두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내시부 역시 청사는 궁궐 밖의 한양 북부 준수방에 있었다. 준수방은 경복궁 바로 옆으로, 지금의 효자동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내시부와는 별도로 궁안에 내시들을 위한 공간이 바로 내반원이었다. 내반원은 왕이 업무를 보던 선정전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는 왕실의 수발을 좀 더 효과적하기 들기 위해서다. 궁궐 안에 있는 내반원은 내시부의 파견 처인 셈인데 내시들 중 가장 핵심인물들이 근무하던 곳이다.

 

내시가 가졌던 권력은?

고려 시대의 내시는 과거의 장원급제자 등 당대 최고의 엘리트들이었다. 환관이 발호했던 원나라의 영향으로 고려에서도 내시 직에 환관이 진출하기 시작했다. 별개의 존재였던 문관 내시의 기능을 환관들이 차지하면서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결국, 조선시대에는 내시가 환관으로 완전히 대체되었다. 내시들은 왕의 측근에서 근무하면서 왕명을 전달하기도 하고 궁중의 궁녀들을 관리하기도 했기 때문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정치가 어려운 때나 정치적 격변기에 이들이 영향력을 발휘했다. 궁궐의 정보를 독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혼란기에는 물론, 대외적인 상황에도 내시들이 깊이 관여했으며, 왕실의 재산관리, 궁중의 각종 공사, 지역의 실정파악 등을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내시들은 왕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허물없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궁중내의 모든 정보를 독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권력을 이용한 내시

내시의 역할인 왕명출납을 가장 악용한 대표적인 인물은 연산군 때의 김자원이었다. 김자원은 조선시대 내시로서의 모든 악행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을만한 인물이다. 그가 승정원에 출입할 때는 모든 승지가 머리를 숙여야 했고 관료들은 김자원을 통하지 않고는 왕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김자원이 이렇게 행세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절대 권력자였던 연산군 때문으로, 연산군은 수족처럼 따르는 김자원 같은 내시를 앞세워 자신의 부도덕함을 감추었고 김자원은 그것을 최대한 이용한 것이다.

 

천년이 넘는 내시의 역사.

그 속에는 절대 권력자의 수족으로 만족한 채 역사 속에 묻힌 수많은 내시들이 있다. 인간으로서, 거세된 남자로서, 자신의 욕망과 꿈을 모두 저버리고 화려한 궁궐의 뒤켠에서 오직 왕의 수족으로만 살다 간 내시들. 내시라는 특수한 신분제도는 1894년 갑오경장의 개혁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내시들에게는 공동묘지가 있다.

그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던 버려진 무덤 - 그것은 내시들의 공동 묘지였다. 후손들은 내시가 자신의 조상이라는 것을 숨기려고 했기 때문에 내시들의 무덤은 없어지거나 훼손된 것이 많았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왕을 모시며 궁궐에서 근무하는 벼슬 높은 관직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동네에서 가장 큰 어른으로 대접 받았다. 그러나 내시들은 왕조의 몰락과 함께 그 존재까지도 점점 잊혀져 갔다.

 

내시, 그들은 누구인가?

중국의 경우 내시에 대한 기록은 3천년을 거슬러 올라가지만 우리나라는 9세기 신라 흥덕왕 때 처음 등장한다. 당시 내시는 신성한 존재와 속세의 인간을 이어주는 중간자, 거세를 통하여 욕망을 극복한 자들로서 황제의 신성함을 높이기 위해 필요했다. 궁형이 없던 우리나라는 갖가지 방법으로 내시가 충원되었는데 개중에는 사설 양성소까지 있었다고 한다.

 

3의 권력 - 내시

왕과 가까이 있으면서 내시는 궁중 내의 많은 정보를 독점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정치적 혼란기에는 이들이 관여될 여지가 많았다. 특히 극비에 속하는 정책, 간첩, 국제첩보에 관한 사항에 내시들이 간여한 경우가 많았다. 또 부를 축적할 기회도 많았는데 이는 왕실의 재산관리, 각종 공사 등을 이들이 맡아서 했기 때문이다.

 

초안산조선시대분묘군(楚安山朝鮮時代墳墓群), 서울 초안산 분묘 ‘439

 

 

 

 

 

<초안산 내시묘역>초안산 조선시대 분묘군 서울 노원구 월계동440

조선시대 전()시기의 여러 계층의 분묘가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어 조선시대 장묘문화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특히 내시(內侍)의 분묘가 많을 뿐만 아니라 연대 (1694)가 명기된 내시 승극철 부부의 묘가 있어 내시생활사 연구의 기초자료가 되고 있다는 게 문화재 지정의 이유이다. 초안산에는 내시 무덤 외에도 15세기 이래 서민, 중인, 내관, 상궁,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무덤 700기 이상이 분포되어 있다. 또한 초안산의 무덤들에는 제사를 지낼 수 있게 직사각형의 돌로 만든 제상인 상석(床石)’, 무덤 앞에 향로를 올려놓는 네모반듯한 돌인 향로석(香爐石)’, 묘비의 받침대인 비대석(碑臺石)’, 무덤 앞의 좌우에 벌려 세우는 한 쌍의 8각 돌기둥인 망주석(望柱石)’, 능 앞에 문신(文臣) 형상으로 세워놓은 돌인 문인석(文人石)’ 등의 석물들이 많아 조선시대의 묘제와 석물 변천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초안산 조선시대 분묘군에는 내시 승극철(承克哲·?~1694) 부부묘와 신원을 명확히 알 수 없는 박()상궁 묘 외에도 40~50여기의 내시와 궁녀 무덤이 있는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이곳에는 사대부와 서민묘 등도 1,000여기 모여 있다. 서울 초안산 분묘군(楚安山 墳墓群)

 

이 지역을 조사한 문명대 동국대교수(미술사)성 밖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어야 묘를 쓸 수 있었기 때문에 궐을 나온 내시나 궁녀들이 이에 맞춰 명당으로 꼽힌 초안산에 묘를 많이 쓴 것 같다내시 김계한(金繼韓·?~1637) 등 묘비가 있던 8기의 내시 묘가 최근 초안산에서 다른 곳으로 이장됐을 정도로 초안산은 내시들의 묘가 밀집했던 지역이라고 밝혔다.

 

초안산문화제

 

 

북한산 둘레길 10구간 '내시묘역길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도 크며 보존상태가 양호한 내시들의 집단 묘역이라고 한다. 서울 은평구 진관내동 중골마을 백화사 뒤 산자락에 있다. 내시들의 종파 가운데 이사문(李似文)을 파조(派祖)로 하는 이사문공파의 분묘 45기가 모여 있다. 현재 이사문공파의 19대 후손 5가구가 서울에서 살고 있는데 후손이 소장한 가승(家乘)'(이사문의 증손자인 김충영의)묘가 중흥동 면암 동쪽 사패지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단다. 면암은 일명 '솜바위'로 백화사에 있다. 이곳에 이곳에 현재 남아 있는 묘 가운데 비석이나 상석에 관직이 기록된 이가 모두 14명이다. 이중 내시부 최고 관직인 종2품 상선(尙膳)에 오른 이가 박황(朴滉), 임성익(林成翼), 김성휘(金成輝), 박민채(朴敏采), 오준겸(吳浚謙) 5명에 달한다. 특히 비문의 박공(朴公) 양위지묘(兩位之墓)’배정경부인(配貞敬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 부좌(祔左)’의 기록에서 나타나듯 내시의 부인도 사대부의 부인과 같이 정·1품 품계에 오른 양반들의 부인이 받는 정경부인에 봉작됐음을 알 수 있어 주목된다.

 

박황의 비문에 나오는 유삼자(有三子) 왈김여일(曰金汝鎰) 왈임성익(曰林成翼) 왈김성휘(曰金成輝)’란 기록 등은 내시들이 자녀를 입양해 대를 이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현재 이곳에는 부인과 함께 묻힌 합장묘가 7, 나란히 묻힌 쌍분(雙墳)3기 남아 있다. 흔히 내시들은 결혼을 하지 않고 궁내에서만 살았던 것으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많으나 실제 내시들은 오늘날의 종로구 효자동 봉익동 운니동 일대와 은평구 신사동 응암동 일대, 그리고 서대문구 연희동 가좌동 일대 등 수도권 전역에 거주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들의 무덤도 수도권 여기저기에 산재할 것이나 별로 밝혀진 바가 없고 최근 발견된 이곳이 규모도 크고 후손들이 돌볼 뿐 아니라 비석들이 온존하여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내시는 궁녀와 함께 궐내에서 상주하던 집단이다. 세간에서는 이들을 내시라고도 하고 환관이고도 했는데, 정식 관직명은 내시고, 환관은 고려시대 이래 궁중에서 잡일을 담당하는, 생리적으로 고자인 자들을 통칭하던 말이다. 내시들이 담당하던 일은 음식물 감독, 궐문 수위, 청소, 잡 심부름 등으로, 업무 자체보다도 항상 궁궐에 거주하며 국왕 측근에서 일한다는 점에서 엄격한 자격이 요구되었다.

    

 

 

 

특수한 신분으로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야 했던 환관과 궁녀의 내밀한 역사

  

 

조선의 마지막 상궁, 마지막 궁중요리사, 환관 족보, 환관의 무덤

 

 

책표지를 클릭하시면 창을 닫습니다.<환관과 궁녀>에는 조선의 마지막 상궁 성옥염 씨를 비롯, 조선의 마지막 궁중요리사 조충희 씨, 환관 족보 <양세계보>, 서울 노원구 월계동에 버려져 있는 환관 무덤, 궁녀들이 사용한 남근목

 

역사에 거대한 발자국을 남긴 자들은 모두 왕들이었으나, 그 발자국 뒤에는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아야 했던 그림자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바로 궁궐의 제3의 세력 환관과 궁녀다. 씨 없는 수박인 환관을 부르는 명칭들로부터 거세전문가 엄공閹工의 환관 만들기, 궁형, 환관부부와 자식, 우리역사와 중국역사를 뒤흔든 환관들, 궁녀의 명칭, 궁녀의 선발과 교육, 왕의 어머니가 된 궁녀들, 그리고 드라마를 통해 잘 알려진 의녀의 탄생과 역할,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의녀들에 이르기까지 세상을 움직이고 역사를 바꾸었던 시대의 환관들과 궁녀들의 모든 것을 한 권에 담았다.

    

환관의 자식

환관들에게도 자식이 있었다. 물론 그들은 자식을 낳을 수 없었기에 대신 양자를 들였다. 중국의 환관들 중 권세를 얻은 자들은 한결같이 양자를 두었다. 굳이 그들이 양자를 두지 않으려 해도 그들의 권세를 필요로 하던 자들은 환관의 양자가 되지 못해 안달이었다. 중국 환관들의 양자는 환관으로서 환관의 양자가 되는 경우와 환관이 아닌 자가 양자가 되는 경우다. 환관이 아닌 양자는 일종의 협력관계라 볼 수 있다. 환관은 천출이기 때문에 마땅히 의존할 만한 곳이 없다. 그런 환관이 권좌에 오르면 지방의 유력가나 중앙의 정치가들이 손을 내밀게 마련이다. 그래서 서로 의견이 일치되면 손을 잡는데, 그 수단으로서 양자 관계를 맺는 것이다.

 

환관 만들기

중국은 환관이 넘쳐나던 곳인 만큼 거세법도 매우 정교했고, 거세 기술자인 엄공閹工의 숫자도 많았다. 명나라 희종 3년에 궁궐에서 부족한 환관 인력 3천 명을 모집했는데, 이때 몰려든 환관 지원자가 무려 2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또 당시 대궐에서 일하던 환관의 수가 10만 명이 넘었다고 하니, 그들을 생산한 엄공의 숫자도 전국적으로 수백 명은 족히 되었다.

 

조선의 환관

조선은 환관의 벼슬을 높여준 대신 역할은 궁궐의 잡일로 한정시켰다. 이는 고려 왕조가 환관에게 낮은 벼슬을 내리고도 정사에 관련된 업무를 맡긴 것과 대조적이다. 이는 환관들의 삶을 안정시키면서 환관의 폐해를 막는 이중 효과를 얻는 결과를 낳았다. 덕분에 조선에서는 중국 역사에서 골칫거리로 인식되던 환관의 권력남용이나 월권형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고려 의종 때나 원나라 복속기에 나타났던 환관의 정치도 없었다. 이는 조선의 환관 정책이 중국이나 고려에 비해 매우 탁월한 이상적인 형태였음을 말해준다.

 

조선 궁녀의 수

조선 영조 대의 학자 이익이 쓴 <성호사설>에 따르면, 조선의 궁녀 숫자는 600~700명 사이였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항상 이 정도는 아니었다.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궁녀 1000여 명이 뒤따랐다는 내용이 실려 있고, 연산군이 전국적으로 처녀들을 뽑아 궁녀로 삼은 예가 숱하기 때문이다. 또한 고종 말기에는 궁녀 수가 20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때는 외교권이 일본에게 박탈된 때라 원래 수의 3분의 1 정도로 줄여졌기 때문이다.

 

장희빈의 인현왕후 저주사건

숙종은 숙빈 최씨로부터 장희빈이 신당을 차려놓고 민씨를 저주하며 죽기를 기원하는 굿을 벌였다는 고변을 듣고 사실을 확인한 후 장희빈을 사사했고 관련된 궁녀와 무당들을 모두 죽였다. 궁녀들은 군기시 앞뜰에서 모두 참수되었다. 이 사건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한꺼번에 가장 많은 궁녀들이 죽은 사건이며, 궁녀들이 붕당의 세력 다툼으로 인해 희생된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다.

   

 

 

 

 

궁녀 무덤 

 

 

 

 

 

이름 없는 여인들, 여기 잠들다

 

가난한 공노비의 딸로 태어난 아이. 찢어지게 가난해 부모는 큰 결심을 하게 된다. 아직 엄마 품이 필요한 공노비의 딸. 앞으로 자신에게 주어질 삶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상궁인 친척이모를 따라가면 좋은 옷을 입고 배불리 먹을수 있다며 엄마는 애써 딸을 떼어놓으며 정을 끊는다. 없는 살림에 엄마가 챙겨준 요강, 수저, 무명이불이 된 보따리를 들고 상궁이모를 따라간 곳은 궁궐이였다.

 

궁녀가 되기위해 입궁을 하면 가장 먼저 치루게 되는 것이 앵무새 처녀 감별법이다. 의녀가 앵무새 피를 여자아이의 팔목에 묻혀 흘러내리지 않고 잘 묻으면 처녀라고 생각해 궁녀가 될수있었다. 하지만 잘 묻지 않고 흘러내리면 처녀가 아니라고 생각해 다시 본가로 돌려 보내졌다.

 

조선의 궁녀는 공노비에서 뽑는 것 이 원칙이였으나 간혹 일반 백성이나 사노비의 딸들도 입궁했다. 입궁 시기는 대체로 10살 전후였다. 고종 실록에 의하면 대전,중궁전,대비전에는 각각 100명 세자궁은 60명 세자빈궁은 40명 세손군 50명 세손빈궁 30명으로 궁녀의 수를 정해놓았다. 대략 500여명 정도의 궁녀가 궐에서 생활했으며 이 수는 왕의 가족이 많고 적음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또 궁녀는 자신이 처음 발을 들여놓은 처소를 상전으로 모시게된다. 대전의 궁녀는 죽을때까지 왕을 위해 살아야했으며 중궁전의 궁녀가 되면 왕비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했다. 제 아무리 임금이라도 다른 처소의 궁녀에 대해서는 관여 할 수 없었다. 조선 궁녀의 선발은 10년마다 한번씩 이루어졌다고는 하나 실제로 각 처소에서 필요한 인원을 그때그때 충원해 교육시켰다. 대부분 친척궁녀의 소개로 들어오기 때문에 소개한 친척들이 하는 일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어린 궁녀 즉 생각시들은 선배궁녀들이 하는 일을 옆에서 보고 어깨너머로 배우는 도제식 교육이나 현장실습을 하며 업무를 익혔다.

 

또 생각시 시절에는 업무 교육뿐만아니라 한글은 물론 소학 삼강 행실도 등 기본적인 학문도 익혀야했으며 규율이 엄격했다. 특히 왕과 왕비를 모시는 궁녀들은 생리적인 현상인 방귀도 마음대로 뀔 수 없었다. 교육을 받다가 방귀라도 껴 실수라도 하면 부모에게 연락해 음식을 해와 상전들을 대접하는 벌을 받아야했다.

 

섣달 그믐이 되면 처음으로 입궁한 생각시들에게 무시무시한 신고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횃불을 든 환관들이 어린 생각시들의 입을 지지는 시늉을 했던 것이다. 새로 입궁한 어린 궁녀들에게 말조심을 강조한 것 이였다. 동시에 궁녀들 사이에 숨어있을 지도 모르는 잡귀들을 몰아내고자 하는 주술적 행사였다. 조선의 어린 생각시는 입궁한지 10여년이 지나면 계례식을 통해 비로소 정식궁녀가 될 수 잇었다. 자신을 가르쳐준 상궁이 어머니가 되어 혼례를 올리듯 계례식을 치르고 드디어 비녀를 꽂게 된다. 생각시가 계례식을 끝내면 정식 궁녀라는 뜻으로 나인이라 불리게 되었다.

 

조선의 궁녀는 나인이 되면 방이 주어지는데 2~3명이 함께 사용했다. 이때 한방을 같이 쓰는 나인들은 상궁이 될 때까지 20년 이상을 방 동무로 지내야 했다. 나인이 되면 방청소와 심부름을 하는 하녀도 한명 배정되어 일상적인 일보다 주어진 업무에 전념 할 수 있게 했다. 조선궁녀들의 근무조건은 보통 8시간 일하고 다음날 하루를 쉬는 격일 근무제로 근무환경이 비교적 좋은 편이였다. 하지만 침실을 지키는 지밀나인들은 근무시간이 길어 통상 12시간 근무하며 3교대 근무를 했다. 숙직을 한 궁녀들은 날이 밝으면 주간 근무자와 업무교대를 하고 퇴근을 해 24시간 휴식을 취한 뒤 주간 근무를 하게 된다.

 

밤근무를 하는 지밀나인은 상전의 침실을 지켜야하는데 대전의 경우 평균적으로 8명의 지밀궁녀가 왕이 자고 있는 방 주변에서 뜬눈으로 침실을 지켰다. 지밀궁녀의 근무형태, 인원, 근무자등은 국가 최고 기밀사항이라 관료조차 알 수 없었으며 관심을 가져서도 안됐다. 궁궐에는 궁녀들을 위한 목욕공간이나 화장실 등 편의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목욕을 할때면 방에 세숫대야나 나무목욕 통을들여 놓고 물을 받아와서 씻었다. 용변도 요강을 이용했다. 격일근무 3교대 근무로 비교적 여가시간이 많은 궁녀들은 놀이나 바느질, 글씨연습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궁녀들이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광해군때 수입되었던 담배를 즐겨 피곤 했다. 하지만 담배를 피우고 싶다고 해서 너도나도 필수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정한 자격 시험을 통과해야 필수 있었다. 담배를 필수있는 자격시험은 선배 상궁 앞에서 담배를 피며 선배 상궁이 그만 할 때까지 지치도록 피워야 하는 것이다. 목이 아프거나 담배 연기에 질려 중간에 포기하면 낙방하여 다시는 담배를 필 수 없었다.

 

이 시험에 통과한 궁녀들에겐 선배 궁녀와 장죽을 문 맞담배질도 허용되었다. 조선궁녀들은 궐에서 먹고 입고 자는 것 이외에 월급을 받았다. 처음 나인이 되면 쌀 4말 콩15되 북어 13마리를 받았다. 월급은 노동강도에 따라 달랐는데 힘들일을 많이 하는 무수리들은 쌀을 6말 받아 신참 나인들보다 2말을 더 받았다.

 

또 품계가 높을 수록 월급은 많아져 정 3품 상궁이 되면 쌀 165되 콩 5되 북어 80마리를 받았다. 게다가 연말이나 명절에 받는 특별 상여금이 있어 높은 수입을 올린 고액 연봉자였다. 바로 이런 이유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배를 곯아야 하는 공노비나 백성들이 딸을 궁녀로 보내려고 했다. 조선궁녀들의 궐 밖 외출은 비교적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지만 월급을 타면 친정 나들이를 할수있는 기회가 생기기도 했다. 외출을 하려면 먼저 윗전상궁에게 허락을 받고 또 담당 환관에게 재차 승인을 받아 이라고 써진 패를 받아야만 궐 밖을 나갈수 있었다.

 

물론 나들이를 끝내고 돌아오면 이 패를 반납해야했다. 그리고 출입장부에 언제 나가고 언제 돌아왔는지 자세히 기록하여 궁녀들의 대궐 밖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조선 궁녀의 대식사건으로 대표적인 것은 세종의 아들 문종의 두번째 세자빈 폐인 봉씨 사건이다. 세자빈 봉씨는 자신이 부리던 궁녀 소쌍과 동침을 했다. 이사실이 발각되어 결국 소쌍은 참형을 당하고 세자빈 봉씨는 폐세자빈이 되었다.

 

이때 세자빈 봉씨는 궁녀 소쌍과 다른 궁녀가 서로 대식하는 장면을 목격해 흉내를 내본 것이라 변명을 했다. 조선 궁녀들 사이에서도 대식이 많았다. 조선 궁녀들 역시 그 죗값을 참혹하게 다스려도 목숨을 담보로 한 연애사건이 종종 있었다. 궁녀들의 연애상대는 주로 별감과 환관들이였다. 연애를 하다 궁녀가 임신이라도 하게 되면 아이를 낳고 100일 동안 젖을 물릴 수 있는 일반 여성 죄인과는 달리 출산과 동시에 사형에 처했다.

 

이런 연애사건은 궁녀들의 언행을 감시하는 감찰상궁이 궁녀 개개인의 뒷조사를 해 찾아내곤 했다. 조선에서는 궁녀가 왕의 낙점을 받아 잠자리를 하면 하루아침에 정 4품의 벼슬을 받으며 특별상궁, 또는 승은상궁이 되 초고속 승진을 하게된다. 특별상궁이 되면 내명부에 올라 왕과 잠자리를 갖고 후손을 낳는것 이외에는 그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 만약 후손을 낳으면 바로 후궁으로 승진해 노비에서 왕족으로 신분상승까지 이어졌다. 조선의 궐에는 중국에서 온 궁녀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굴씨다.

 

굴씨는 명나라 마지막 황후인 주황후의 궁녀였다. 명나라가 망하고 주황후가 죽자 청나라 예친왕은 굴씨의 미모에 반해 굴씨를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조선으로 보내버렸다. 언어가 통하지는 않았지만 궁녀라는 공통점으로 조선 궁녀들에게 중국말과 자수를 가르쳐준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 궁녀인 굴씨는 늘 고향을 그리워하다 조선에서 생을 마감했다. 한번 궁에 발을 들여놓으면 죽어서도 궁궐 귀신이 되어야한다는 궁녀들에게도 예외는 있었다.

 

조선에서는 나라에 가뭄이 들면 궁녀들을 출궁시켰다. 결혼하지 못한 여인들의 한이 하늘에 닿아 날이 가문다 믿었던 조선사람들은 이들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궁녀를 출궁시킨 것이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조선궁녀의 출궁은 숙종때와 영조때 두번 있었다. 승은을 입지 못하면 승진이라도 하는 조선 궁녀들. 입궁해 생각시로 10년을 일하면 나인이 되고 나인이 된 후 지밀의 경우는 25년 그 외는 35년이 지나야 상궁이 됬다. 하지만 근무 기간에 따른 승진은 숫자에 불과하며 남들보다 빠른 승진 기회를 잡기 위해 궁녀들도 권력 있는 환관이나 대신들과 결탁했다.

    

궁녀조직에서 최고 권력자는 제조상궁이다. 제조상궁은 정1품의 벼슬을 왕으로 부터 직접 하사받았다. 당상관 이상의 양반 이상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았고 심부름을 하는 하녀와 옷을 짓는 침모까지 배정되어 권력과 부를 손에 쥘 수 있게 됬다. 제조상궁은 그 자리가 비면 경합으로 선출되는데 선출방식이나 시험이 있는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조상궁이 되기 위해서는 온갖 권력이 동원된다.

 

조선의 궁녀들도 재산증식에 관심이 많았다. 주로 논과 밭 집 등의 부동산을 매입하는 형식 이였다. 인조 효종 현종 3대에 걸쳐 상궁으로 일했던 박씨는 자신의 명의로 부동산을 사고 국가에 공증까지 받았다. 그 재산이 최소 만평 이상이였으며 노비까지 부리는 지주가 되었다.

 

정조실록에는 궁녀들이 기생이나 별감들을 데리고 꽃놀이나 뱃놀이를 즐겼다는 기록도 있다. 아무리 힘이 생기고 권력을 잡아도 조선 궁녀들의 운명은 자신이 모시는 왕이나 왕비의 운명에 따라 달라졌다. 모시는 상전이 죽으면 3년 상을 치르고 출궁해 결혼도 하지 못하고 오직 상전에 명복을 빌며 외롭게 살아가야 했다. 왕과 왕의 가족들을 제외하고 그 어떤 누구도 궐에서 죽음을 맞을 수 없었던 조선. 철없던 어린 시절의 아무것도 모르고 궐로 들어와 한평생 왕과 왕비 왕의 가족을 위해 살던 조선의 궁녀들.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출궁을 해 비슷한 처지의 궁녀들과 의지하며 함께 살다 쓸쓸히 죽음을 맞이해야했다.

 

조선의 궁녀가 죽으면 함께 지내던 동료 궁녀들이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해 산야에 뿌리거나 절에 모셔졌다. 간혹 후손이 있는 궁녀들은 후손들이 묘를 써 관리하기도 했다. 보모상궁 김씨지묘 서울특별시 은평구 한 야산에 남아있는 김상궁의 묘 역시 후손들에 의해 만들어 졌지만 손길이 끊긴지 오래다. 500여년의 세월을 조선왕조와 함께 동고동락했던 조선의 궁녀들. 그녀들은 의복 음식등 다양한 궁중문화를 우리에게 남기고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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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원&묘

 

 

이말산의 궁녀 무덤과 비석

 

 

상궁옥구임씨묘

 

尙宮沃溝林氏之墓(상궁옥구임씨지묘)

 

“尙宮姓林籍沃溝(상궁성임적옥구) 父孝元同知中樞(부효원동지중추) 以輕財濟急(이경재제급) 稱於閭里(칭어여리) 祖檜通政(조회통정) 母海州吳錦金之女(모해주오금금지녀) 生於崇禎乙亥五月二十六日(생어숭정을해오월이십육일) 年十三(연십삼) 入掖庭(입액정) 屬元孫宮(속원손궁) 時顯廟新升元孫位(시현묘신승원손위) 供奉左右三十年(공봉좌우삼십년) 未嘗犯過(미상범과) 受女官階至尙宮(수여관계지상궁) 明聖太后薨(명성태후흉) 三年制畢(심년제필) 移屬莊烈太后殿(이속장렬태후전) 后薨(후흉) 上思亡妹明安公主(상사망매명안공주) 嘗林尙宮如姆(상임상궁여모) 命出居主第(명출거주제) 視供祭祀(시공제사) 以己丑正月十一日病沒(이기축정월십일일병몰) 年七十五(연칠십오) 上念其服勞多年(상념기복로다년) 小心畏愼(소심외신) 賜棺材布帛(사관재포백) 葬西郊神穴里(장서교신혈리) 辰向之原(진향지원) 從父母及祖兆也(종부모급조조야) 葬後四年癸巳五月立石(장후사년계사오월입석)”

 

 

“상궁의 성은 임씨이고 본관은 옥구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효원으로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는데 재산을 가벼이 여기고 (마을의)위급한 일을 구제해 동네에서 칭송이 있었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회이고 통정대부를 지냈으며, 어머니는 해주오씨로 금금의 딸이다. 숭정 을해년(인조 13년, 1635) 5월26일에 태어나 나이 13세에 (궁궐의)액정서(掖庭署·조선시대 내시부에 부설돼 왕명 전달 등을 맡은 관청)에 들어가 원손궁에 소속됐다. 이때가 현종(1641~1674)이 새로 원손의 자리(1649)에 올랐던 때이다. 이후 옆에서 30년간을 모셨는데, 일찍이 실수를 하는 일이 없었으며 여자관리로는 최고의 자리인 상궁에 이르렀다. 명성태후(1642~1683, 숙종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3년의 상제를 마치고 다시 장렬태후(1624~1688, 인조의 계비)전에 이속됐다. 장렬태후가 돌아가시자 임금(숙종)이 죽은 막내 여동생 명안공주(1664~1687)가 일찍이 임상궁을 이모처럼 여긴 것을 생각해 명안공주의 집에 나가살면서 집안일을 주재하고 제사를 받들게 했다. 기축년(1709) 1월11일 병으로 죽으니 나이가 75세였다. 임금이 여러 해 동안 수고하고 조신하게 처신한 공을 생각해 관재와 포백을 하사해 서교 신혈리 동남쪽 언덕에 장사지내니 부모와 조상의 선영(先瑩)이 있는 곳이다. 장사지낸 4년 후 숙종 39년(1713) 계사 5월 비석을 세우다.”

 

 

 

숙용청송심씨묘표 (문화재청/ 유리덮개를 씌우기 전)

 

성종 68권, 7년(1476 병신 / 명 성화(成化) 12년) 6월 17일(무자)

병조(兵曹)에서 겸사복(兼司僕) 심말동(沈末同)의 상언(上言)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대전(大典)》의 한품 서용조(限品敍用條)에 문무관(文武官)으로 2품 이상인 양첩(良妾)의 자손(子孫)은 정3품(正三品)에 한정시키고, 천첩(賤妾)의 자손은 정5품에 한정시키며, 6품 이상인 양첩의 자손은 정4품에 한정시키고, 천첩의 자손은 정6품에 한정시키며, 7품 이하 관직(官職)이 없는 양첩의 자손은 정5품에 한정시키고, 천첩의 자손과 천인으로 양인이 된 자는 정7품에 한정시킨다 하였습니다. 지금 심말동(沈末同)은 심정(沈泟)의 첩의 아들이고, 그 처(妻) 또한 이의륜(李義倫)이 스스로 버린 비첩(婢妾)의 손자이니, 심말동의 아들은 〈이의륜의〉 손자를 이어 단지 한낱 첩의 손자일 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대전》의 한품(限品)하는 법(法)에 위반되어 허통(許通)하게 하겠습니까? 청컨대 수리(受理)하지 마소서.”

하였다. 명하여 일찍이 정승(政丞)을 지낸 사람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는데, 의논이 일치하지 아니하니, 특별히 명하여 허통하게 하였다.

 

 * 허통(許通) : 벼슬길이 막힌 사람에게 벼슬길에 나오도록 허락하여 주던 일.

 

 

 

경천군 금표비

 

 

 

 

 내시의 무덤, 상처를 입으며 궁궐을 바라보다

 

 

 

우리 나라 유일의 중국 궁녀묘인 굴씨묘

 

-고양시 대자동에-

 

북벌 가는 길, 붉은 무덤 여인 명나라 궁녀 굴씨 (굴씨묘)

 

 

비파를 타는 여인 

고양에는 명나라 마지막 궁녀인 굴씨의 묘가 있다. 곁에 있는 최영 장군 묘처럼 마음의 한이 풀리지 않은 탓인지 풀이 자라지 않는 붉은 무덤이다. 이 여인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데리고 온 아홉 명의 명나라 사람 중 하나다. 소현세자는 북경에 머물면서 독일인 선교사 아담 샬과 친하게 지내면서 천주교를 접한다. 아담 샬은 세자가 귀국할 때 청나라 황실에 부탁하여 세례를 받은 환관과 궁녀를 딸려 보내도록 한다. 조선의 포교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때 온 사람이 환관 이방조, 장삼외, 유중림, 곡풍등, 두문방이었고 궁녀 굴저와 최회저, 유저, 긴저였다. 그중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이가 바로 굴저屈姐. 굴씨다.

 

16442월에 소현세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 인조는 세자인 맏아들을 의심하고 있었다. 청나라와 짜고 자신을 몰아내려한다는 불안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청나라에서는 소현세자를 소군少君이라 부르며 친밀하게 대했다. 볼모로 잡혀간 두 아들은 인조 앞에서 청나라에 관해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봉림대군은 청 세조를 멸시하면서 잡혀간 조선인을 함께 데리고 왔다고 말한 반면, 소현세자는 청 세조가 도량이 넓다고 하면서 황제가 아끼던 벼루를 얻어왔다고 말한다. 이에 인조는 벼루를 세자의 얼굴에 집어던졌다.

 

소현세자는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의문사한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장자인 세손을 폐하고 봉림대군효종을 세자로 책봉한다.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도 죄를 씌워 죽이고, 세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를 보냈다. 셋 중 둘을 효종 때 죽였다. 효종은 셋째아들은 석방하자고 건의하는 황해감사 김홍욱을 장살했다.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난 뒤 청나라에서 함께 왔던 아홉 명에게 환국령이 내려지지만 굴씨는 떠나지 않았다. 굴씨는 조선에 온 뒤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를 모시다가 세자를 여읜 뒤 여승이 되어 자수원慈壽院에서 지냈다. 이후 소현세자의 손자 임창군을 보살피다가 일흔 살에 죽었다.

 

그녀는 늘 중국 쪽을 바라보며 황후의 은덕에 감사했고, 청나라와 여진족을 얘기할 때마다 분노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소현세자 쪽을 모셨지만 성정은 봉림대군 쪽과 더 잘 맞았던 모양이다. 죽어서라도 효종의 북벌北伐 군대를 보고 싶다면서 서울의 서쪽 교외 중국으로 가는 길가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한다.

 

 

굴씨는 원래 소주蘇州의 양인 출신이었는데, 명나라 말기 관리들이 여성들을 잡아들이는 것을 피하려 한 어머니의 손에 죽임을 당할 뻔하였다. 한 관리가 굴씨를 발견해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의 주황후를 모시게 한다. 이때 나이가 일곱 살이었는데, 빼어난 용모와 품행으로 사랑을 독차지했다. 농민반란군 이자성이 자금성을 점령하자 명나라의 황제와 황후는 자결한다. 그녀 또한 함께 죽으려 했지만 황후가 말려 궁궐에서 도망쳐 민간에 숨어 지냈다. 이후 청나라 군사에게 붙잡혀 청나라 예친왕에게 보내졌다. 그녀는 예친왕이 둥근 모자에 짧은 상의를 입고 얼굴에 면사面紗를 드리우고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는 남자도 면사를 하는 걸 보니 참으로 오랑캐로구나하였다. 예친왕은 어린 굴씨의 이런 말에 껄껄 웃었다고 한다. 이후 그녀를 소현세자에게 보낸다.

 

조선에 온 굴씨는 비파를 잘 타서 스스로 고향을 생각하는 노래를 지어 연주했다. 새와 짐승을 길들이는 재주굴계라는 결발법結髮法도 있어 조선에 보급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어떻게 금수를 다스릴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사랑하면 알게 된다고 답했다 한다. 그녀는 이 비법을 진춘進春이란 제자에게 가르쳤다. 굴씨는 글자를 몰랐는데 자신의 이름을 물으면 머리 부분이 자 척과 같았고 발음은 라 하였다고 말해, 사람들은 한때 그를 규씨로 잘못 알았다 한다. 나중에 중국 역관에게 물어보고서야 굴씨임을 알게 되었다.

 

굴씨는 북학파들에게도 영감을 준 여인이다.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자 당대의 빼어난 시인인 신위가 장악원掌樂院의 비파 연주를 듣고는 매료되어 누구에게 배운 것이냐고 물었다. 그들은 굴씨로부터 이어져온 것이라고 대답했다. 신위는 우연히 굴씨의 비파를 지니고 있는 강이오姜彛五. 강세황의 손자라는 사람을 알게 되어 숭정궁인 굴씨 비파가崇禎宮人屈氏琵琶歌라는 시를 쓴다. 그 서문에 이렇게 썼다. 굴씨가 신위의 관심을 끈 데는 비파라는 악기 자체의 매력도 있었겠지만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의 황후를 모셨던 궁녀가 지니는 상징성도 작용했을 것이다.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은 명나라에 대한 짙은 향수와 신흥 청나라에 대한 깊은 경멸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굴씨는 그런 기분을 돋우는 호재로 선비들의 관심을 끌었을 것이다.

    

 

훗날에는 김구라는 이가 이곳을 지나며 굴씨과묘시屈氏過墓詩를 지었다. 고양시 덕양구 대자2동 간촌마을 장령산 기슭, 최영 장군 묘의 맞은편에 있는 붉은 묘가 굴씨묘다. 부근엔 소현세자의 셋째아들 경안군 이회와 증손자 밀풍군의 묘가 있다.

 

굴씨의 묘가 이곳에 있는 까닭은 오랑캐는 나의 원수요. 내 생전에 오랑캐의 결말을 보지 못하고 죽게 되었지만 행여라도 북벌하러 가는 군대가 있다면 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니 내가 죽거든 서쪽 교외 길가에 묻어주오라고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간촌마을에 원래 굴씨의 묘비가 있었으나 소현세자의 증손자인 밀풍군이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면서 묘비도 사라졌다고 한다. 오랜 세월 방치되었다가 20014월 소현세자 종중에서 묘역을 정비하고 비석을 다시 세웠다

 

 

 

 

 

 

조선시대 내시들의 공동묘지, 초안산 분묘군 답사기

 

김나은

햇볕은 따사롭지만 바람은 몹시 불던 날, 서둘러 나갈 채비를 하여 초안산으로 향하였다. 답사지는 멀지 않은 곳으로 하겠다는 명료하고도 단순한 이유로 선정한 이곳은 ‘조선시대 공동묘지’라고 할 수 있다. 묘지의 주인은 양반과 서민, 내시와 궁녀 등 다양하나 특히나, 조선시대 궁중의 여러 업무를 담당하던 내시부의 관원인 내시의 분묘가 모여 있어 ‘내시네 산’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내시나 궁녀 등의 계층이 역사적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가치가 없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사료가 없어서라고 생각된다. 실제로 현대에는 중심부에 위치한 인물이 아닌 주변부 인물의 삶에 대한 관심이 드라마나 영화, 축제 등의 콘텐츠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면에서 내가 다녀온 초안산 분묘군은 매우 흥미로운 답사지라 할 수 있겠다.

 

 

초안산 분묘지는 사실 발견되고 문화재로 지정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99년 6월 7일 9시 뉴스에서 노원구 월계동 초안산에 천여기가 넘는 내시와 궁녀의 무덤이 훼손되고 있다는 취재보도가 나왔고, 그 즉시 서울시는 즉시 전문가의 예비조사를 거쳐 2000년 4월부터 본격적인 정밀지표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2002년 3월에 초안산의 집단묘역은 사적 440호로 지정되었다. 실제로 초안산을 오른 결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고는 하나 아직까지도 복원은 물론 제대로 보존조차 되지 못한 모습을 여실히 볼 수 있었다. 초안산은 주민들이 가볍게 운동을 하기 위해 오르내리는 산이었는데, 길 바로 옆에 봉분이 솟아있거나 무덤 앞에 세우는 문인석은 머리가 잘려나가거나 묘비가 누워있거나 묘비문에는 묘가 많이 모인 곳에 소나무숲이 들어서 있는 등 심각할 정도로 훼손되어있었다. 그러나 개중에는 묘비문이 비교적 제대로 남아 있어 흥미로운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 제대로 남아 있는 상궁 박씨묘와 내시 승극철묘의 비문을 알아보고자 한다.

 

 

 

 

사진1) 묘지석물과 묘비가 훼손되고 아무렇게나 나뒹굴어다니며 묘 자체가 주민들의 등산로 바로 옆에 방치되어 있는 모습

 

내시 승극철 부부묘비

 

일반적으로 내시는 거세되어 궁중에서 벼슬을 하는 남자를 뜻하며 시인(寺人)·엄관(企官:奄人)·정신(淨身)·내수(內竪)·중관(中官)·혼시(汚寺)·환시(宦寺)·환자(宦者)·황문(黃門) 등의 이름도 있다. 고려와는 달리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는 없었으며, 또한 자질 향상을 위하여 ‘소학’, 삼강행실‘ 등의 교육을 받고 매월 시험을 치루기도 했다. 일종의 전문직 종사자였던 것이다. 특히나 거세라는 신체적 한계는 현재의 우리에게 너무도 당연한 듯이 편견을 갖게 했는데, 그 중 하나는 바로 결혼이다. 그러나 초안산에서 발견된 내시 승극철의 묘비에 의하면 내시 또한 결혼을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비문>

 

「通訓大夫行內侍府尙洗承公克哲兩位之墓」

 

통훈대부행내시부상세승공극철양위지묘

 

 

 

 통훈대부(通訓大夫)란 조선시대 문산계의 하나로 당하관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로 종3품이 한

 

계였다. ‘행’(行)이라는 글자는 그 뒤에 나오는 ‘내시부 상세’(內侍府尙洗)라는 직책과 관련이 있다. 조선

 

시대의 내시들은 품계와 직책을 가진 당당한 궁중의 전문직이었다. 종9품 상원에서부터 동2품 상선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직제에는 상세한 직무가 정해져 있었다. ‘상세’(尙洗)란 내시부에서 정6품의 품계를

 

갖는 대전의 그릇등을 담당하는 직책이었다. 종3품의 품계를 가진 이가 정6품의 하급관직을 지냈으니

 

 ‘행’(行)이라는 글자를 쓴 것이다. 품계가 낮은 자가 상급의 관직을 갖게 되면 ‘수’가 붙는다. 풀어보면

 

 내시부의 상세를 지낸 승극철의 묘라는 얘기인데 그 바로 앞에 있는 ‘양위’(兩位)라는 글자가 바로 이

 

 묘를 그토록 유명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양위’(兩位)란 두 분을 모신다는 뜻이고 ‘양친 부모’등에서 보

 

는 바와 같이 ‘부부’를 얘기하는 것이다. 이로써 조선시대의 내시가 결혼을 한 것과 죽은 뒤 무덤까지 같

 

이 조성했다는 놀라운 사실이 증명된다.

 

 

상궁 개성 박씨묘비

 

 

 

 

<비양(碑陽 : 전면>

 

 

朝鮮國尙宮開城朴氏墓

 

 

조선국상궁개성박씨묘

 

 

 

 

<비음(碑陰 : 후면)>

 

尙宮朴氏考諱秀蔓 妣淸州金氏學生○○女 祖通德郞諱世傑 曾祖學生諱根厚 生於丙戌十一月初六日 丙午

 

選入大內 庚申春拜尙宮 癸未正月三十日卒 壽五十八 二月初六日葬于楊州南面海東村角心寺巽坐之原 從

 

先塋也 性素端慧忠 上慈下 累世瑩墓立石 宗族鄕黨咸得其心焉

 

 

상궁박씨(尙宮朴氏)의 아버지는 이름이 수만(秀蔓)이요, 어머니는 청주김씨(淸州金氏)이니, 학생(學生)

 

아무개의 따님이다. 할아버님은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휘 세걸(世傑)이요, 증조부는 학생 휘 근후(根

 

厚)이다. 병술년(숙종 32, 1706) 11월 6일에 태어났다. 병오년(영조 2년, 1726)에 궁녀로 선발되어 대궐

 

에 들어갔고, 경신년(영조 16, 1740) 봄에는 상궁(尙宮)에 제수되었다. 계미년(영조 39, 1763) 1월 30일

 

에 죽으니 수가 58세이다. 2월 6일에 양주(楊州) 남면(南面) 해동촌(海東村) 각심사(角心寺) 손좌(巽坐 :

 

남동방)의 언덕에 장사지내니 선영(先塋)을 따른 것이다. 성품이 단정하고 지혜로웠으며, 충심(忠心)으

 

로 윗 전을 받들었고, 사랑으로써 아랫사람을 대하였다. 여러 대에 걸친 선영(先塋)의 무덤에 비석을 세

 

우니, 종족(宗族 : 친척)과 향당(鄕黨 : 주민)에서 모두 칭찬을 받았다.

 

 

 

 

 

<비 좌측면>

 

嘉義大夫 前縣監 金國杓 撰書

 

崇禎紀元後 三癸未三月 日立

 

 

가의대부 전현감 김국표 짓고 쓰다.

 

숭정기원후 三癸未(영조 39년, 1763) 3월 立

 

 

 

 

 

박상궁 묘비는 현재 은평구 진관동 이말산의 상궁옥구임씨(尙宮沃溝林氏) 묘표(숙종 39년, 1713), 경기

 

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상궁안동김씨(尙宮安東金氏) 묘표(영조 16년, 1740년)와 함께 비문이 남아있

 

는 단 3기의 궁녀 묘비로써 조선후기 궁녀사 연구에 보조 자료로서 뿐 아니라 문화재로서 가치가 매우

 

높다.

 

 

 

 

 

나오며

답사를 통하여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음에 배움의 기쁨을 느끼는 동시에 문화재로 지정해 놓고도 제대로 관리를 하지 못하는 모습에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크게 느꼈다. 누구의 묘인지도 모르는 그 많은 묘를 다시 묘지로써 복원하길 원하는 것이 아니다. 주민들의 가벼운 산책이나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는 현재, 길 바로 옆에 무덤이 함께 있고 묘지 석물이 훼손되고 묘비들이 발로 차이듯 나뒹굴어 다니는 모습이 그리 보기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그것은 과거와의 ‘공존’이 아니라 ‘방치’이다. 물론 흩어져 있는 묘지의 석물들을 어느 정도 갈무리해 공원 내에 전시해 놓는 ‘작은 성의’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적지로써 찾아다니기에 접근성도 좋지 않고, 그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한계를 추가하여 생각해 본다면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이 명확하다고 생각된다.

 

 

참고자료

이원영 「노원구 초안산 분묘군에 대한 재고찰’ - 초안산 일대 내시 · 궁녀묘를 중심으로」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45755

- '초안산 내시 승극철의 묘에 제사지내다' (ohmynews)

http://m.inews.seoul.go.kr/hsn/program/article/articleDetail.jsp?menuID=&boardID=151413&category1=27&category2=27

- 하이서울뉴스 ‘내시들은 왜 그곳에 묻혔을까?-사적 440호 초안산조선시대분묘군’

사진자료 http://blog.naver.com/nykim9?Redirect=Log&logNo=20134532433

초안산 조선시대 분묘군 안내판

 

 

첨부파일 [답사보고서] 민속학과 20080578 김나은 .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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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 517, 1392 - 1910 ]

     

    () 13()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익종(翼宗) 수릉(綏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융릉(隆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영릉(永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장릉(章陵 : 사적 제202)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경릉(敬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 2()

    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

    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유릉(裕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홍릉(洪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

    왕릉 35

    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예릉(睿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경릉(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인릉(仁陵 : 사적 제194)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건릉(健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홍릉(弘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원릉(元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혜릉(惠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의릉(懿陵 : 사적 제204)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익릉(翼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명릉(明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숭릉(崇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영릉(寧陵 : 사적 제195)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휘릉(徽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장릉(長陵 : 사적 제203)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성묘(成墓 : 사적 제365)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목릉(穆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강릉(康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효릉(孝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희릉(禧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온릉(溫陵 : 사적 제210)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정릉(靖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9대 성종(第九代 成宗) 회묘(懷墓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순릉(順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선릉(宣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

    8대 예종(第八代 睿宗) 공릉(恭陵 : 사적 제205)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8대 예종(第八代 睿宗) 창릉(昌陵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7대 세조(第七代 世祖) 광릉(光陵 : 사적 제197)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사릉(思陵 : 사적 제209)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장릉(莊陵 : 사적 제196)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5대 문종(第五代 文宗) 현릉(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4대 세종(第四代 世宗)

    3대 태종(第三代 太宗)

    2대 정종(第二代 定宗)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정릉(貞陵 : 사적 제208) : 서울 성북구 정릉2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1대 태조(第一代 太祖)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 : 경기 구리시 인창동

    비공개 지역(12)

    파주

    양주

    구리

    남양주

    사적제203호 장릉

    사적제359호 수길원

    사적제358호 소령원

     

    사적제210호 온릉

     

    사적제364호 명빈묘

     

    사적제360호 휘경원

    사적제209호 사릉

    사적제363호 광해군묘

    사적제366호 안빈묘

    사적제367호 영빈묘

    사적제356호 순강원

    사적제365호 성묘

     

    ()의 위치(位置)

     

    왕릉

    담당지

    왕릉

    명칭

    왕릉

    왕명

    건립

    시기

    사적

    유무

    주소

     

    홈페이지

     

    동구릉

     

    건원릉

    태조

    1408

    (태종8)

    193

    구리시 인창동

    http://donggu.cha.go.kr/n_donggu/index.html

    현릉

    문종

    1452

    (단종 1)

    http://donggu.cha.go.kr/n_donggu/index.html

    목릉

    선조

    1600

    (선조33)

    http://donggu.cha.go.kr/n_donggu/index.html

    휘릉

    인조왕비

    (장렬왕후)

    1688

    (숙종14)

    http://donggu.cha.go.kr/n_donggu/index.html

    숭릉

    현종

    1674

    (숙종즉위)

    http://donggu.cha.go.kr/n_donggu/index.html

    혜릉

    경종왕비

    (단의왕후)

    1718

    (숙종44)

    http://donggu.cha.go.kr/n_donggu/index.html

    원릉

    영조

    1776

    (정조즉위)

    http://donggu.cha.go.kr/n_donggu/index.html

    수릉

    문조

    (추존)

    1890

    (고종27)

    http://donggu.cha.go.kr/n_donggu/index.html

    경릉

    헌종

    1849

    (철종즉위)

    http://donggu.cha.go.kr/n_donggu/index.html

    명빈묘

     

    1479

    (성종10)

    http://donggu.cha.go.kr/n_donggu/index.html

    홍유릉

     

    흥릉

    고종황제

    1919

    207

    남양주 금곡동

     

    http://geumgok.cha.go.kr/

     

    유릉

    순종황제

    1926

     

    http://geumgok.cha.go.kr/

     

    선정릉

    선릉

    성종

    1495

    (연산군1)

    199

    강남구 삼성동

     

    http://seonjeong.cha.go.kr/

     

    정릉

    중종

    1562

    (명종17)

    http://seonjeong.cha.go.kr/

    헌인릉

     

    헌릉

    태종

    1420

    (세종2)

    194

    서초구 헌인릉

    http://heonin.cha.go.kr/

    인릉

    순조

    1856

    (철종7)

    서초구 내곡동

    http://heonin.cha.go.kr/

    융건릉

     

    융릉

    장조

    (사도세사)

    1789

    (정조13)

    206

    화성시 안녕동

    http://hwaseong.cha.go.kr/

    건릉

    정조

    1800

    (순조1)

    http://hwaseong.cha.go.kr/

     

     

    사릉

     

     

     

    사릉

    단종왕비

    (정순왕후)

    1521

    (중종16)

    209

     

    남양주 진건읍 사능리

    http://sareung.cha.go.kr/

    광해군묘

     

    1641

    (인조19)

    363

    http://sareung.cha.go.kr/

    안빈묘

     

    1693

    (숙종19)

    http://sareung.cha.go.kr/

    성묘

     

    1577

    (선조10)

    http://sareung.cha.go.kr/

    광릉

    광릉

    세조

    1468

    (예종1)

    197

    남양주 진전읍 부평리

    http://gwang.cha.go.kr/

    온릉

    온릉

    중종왕비

    (단경왕후)

    1557

    (명종12)

    210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http://goyang.cha.go.kr/

    태강릉

    태릉

    중종왕비

    (문정왕후)

    1565

    (명종20)

    201

    노원구 공릉동

    http://taegang.cha.go.kr/

    강릉

    명종

    1567

    (선조1)

    http://taegang.cha.go.kr/

    의릉

    의릉

    경종

    1724

    (영조1)

    204

    성북구 석관동

    http://eureung.cha.go.kr/

    영휘원

     

    1911

    361

    동대문구 홍릉길

    http://eureung.cha.go.kr/

    숭인원

     

    1922

    http://eureung.cha.go.kr/

    정릉

    정릉

    태조왕비

    (신덕왕후)

    1409

    (태종 9)

    208

    성북구 정능동 산87

    http://seoul.cha.go.kr/

    삼릉

    공릉

    예종왕비

    (장순왕후)

    1461

    (세조 7)

     

     

    205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http://paju.cha.go.kr/

    순릉

    성종왕비

    (공혜왕후)

    1474

    (성종 5)

    http://paju.cha.go.kr/

    영릉

    진종

    (추존)

    1729

    (영조 5)

    http://paju.cha.go.kr/

    장릉

    (파주)

    장릉

    인조

    1731

    (영조 7)

    203

    파주시 탄현면

    http://paju.cha.go.kr/

    장릉

    (김포)

    장릉

    원종

    (추존)

    1627

    (인조 5)

    202

    김포시 김포읍 풍무리

    http://jangneung.cha.go.kr/

    서오릉 

     

    경릉

    덕종

    (추존)

    1457

    (세조 3)

    198

    고양시 용두동

    http://goyang.cha.go.kr/

    창릉

    예종

    1469

    (예종 2)

    http://goyang.cha.go.kr/

    익릉

    숙종왕비

    (인경왕후)

    1680

    (숙종 6)

    http://goyang.cha.go.kr/

    명릉

    숙종

    1701

    (숙종27)

    http://goyang.cha.go.kr/

    흥릉

    영조왕비

    (정성왕후)

    1757

    (영조33)

    http://goyang.cha.go.kr/

    순창원

     

    1563

    (명종18)

    http://goyang.cha.go.kr/

    수경원

     

    1764

    (영조 40)

    http://goyang.cha.go.kr/

    대빈묘

     

    1701

    (숙종 27)

    http://goyang.cha.go.kr/

    광명

    영희원

     

    1718

    (숙종44)

    357

    광명시 노온사동

    http://goyang.cha.go.kr/

    서삼릉

      

    희릉

    중종왕비

    (장경왕후)

    1537

    (중종 32)

    200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http://goyang.cha.go.kr/

    효릉

    인종

    1545

    (인종1)

    http://goyang.cha.go.kr/

    예릉

    철종

    1863

    (철종 14)

    http://goyang.cha.go.kr/

    소경원

     

    1645

    (인조 24)

    http://goyang.cha.go.kr/

     

    의령원

     

    1752

    (영조 28)

    http://goyang.cha.go.kr/

    효창원

     

    1786

    (정조 10)

    http://goyang.cha.go.kr/

    희묘

     

    1482

    (성종 13)

    http://goyang.cha.go.kr/

    영릉 

    영릉

    세종대왕

    1469

    (예종 1)

    195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http://sejong.cha.go.kr/

    영릉

    효종

    1673

    (현종 14)

    http://sejong.cha.go.kr/

    장릉

    (영월)

    장릉

    단종

    1581

    (선조 14)

    196

     

     

    제릉

    제릉

    태조왕비

    (신의왕후)

    1391

    (공양왕)

    미지정

    개성시 판문군

     

    후릉

    후릉

    정종

    1412

    (태종12)

    미지정

     

    연산군묘

    연산군묘

    연산군

    1506

    (중종 1)

    362

    도봉구 방학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목조 안사(덕릉)+효공왕후(안릉)

     

    익조 행리(지릉)+정숙왕후

     

    도조 춘(의릉)+경순왕후(순릉)

     

    환조 자춘(정릉)+의혜왕후

     

    1 태조(건원릉)+신의고황후(제릉), 신덕고황후(정릉)

    1335~1408 5762개월 항조(이자춘) 의혜왕후최씨,

    1392년 조선왕조 건국

    태조고황제 성계(건원릉 - 구리시 동구릉)

     

    2 정종 방과(후릉)+정안왕후

    1357~1419 4122개월 태조의 적자,

    1王子의 난으로 방석을 살해하고 등극

    (후릉 - 개성시 령정리)

     

    3 태종 방원(헌릉)+ 원경왕후-4대 세종 도(영릉)+소헌왕후

    1367~1422 341710개월 태조의 5적자,

    2王子의 난으로 정종의 선양 유발 형제세습

    (헌릉 - 강남구 내곡동)

     

    4 세종

    1397~1450 22316개월 태종의 3적자, 세자(양녕대군)을 폐하고 등극함

    (- 여주군 왕대리)

     

    5 문종 향(현릉)+현덕왕후

    1414~1452 3723개월 세종의 적장자

    (현릉 - 동구릉)

     

    6 단종 홍위(장릉)+정순왕후(사릉)

    1441~1457 1232개월 문종의 적장자(독자), 숙부에게 위 피탈

    (- 영월읍 영흥리)

     

    7 세조 유(광릉)+정희왕후-덕종(추존) (경릉)+소혜왕후

    1417`1468 39133개월 세종의 적차자, 왕위찬탈(단종의 숙부)

    (광릉 - 남양주군 부평리)

     

    8 예종 황(창릉)+장순왕후(공릉), 안순왕후

    1450~1469 1912개월 세조의 적차자,() 의경세자의요절로 등극함

    (창릉 - 고양시 서오릉)

     

    9 성종 혈(선릉)+공혜왕후(순릉), 폐비, 정현왕후

    1457~1494 13252개월 세조의 손자이며 의경세자의 적차자

    (선릉 - 강남구 삼성동)

     

    10 연산군(폐위)

    1476~1506 19119개월 성종의 적장자, 중종반정으로 폐위됨

    (연산군묘 - 도봉구 방학동)

     

    11 중종 역(정릉)+단경왕후(온릉), 장경왕후(희릉), 문정왕후(태릉)

    1488~1544 19382개월 성종의 차적자(이복형()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옹립)

    (정릉 - 강남구 삼성동)

     

    12 인종 호(효릉)+인성왕후

    1515~1545 309개월 중종의 적장자

    (효릉 - 고양시 서삼릉)

     

    13 명종 환(강릉)+인순왕후-순회세자 부

    1534~1567 1222년 중종의 적차자(() 인종으로부터 세습

    (강릉 - 노원구 공릉동)

     

    14 선조 균(목릉)+의인왕후, 인목왕후

    1522~1608 16407개월 중종의 7서자(덕흥군)3,

    명종의 유지로 등극

    (목릉 - 동구릉)

    덕흥대원군

     

    15 광해군 (폐위)

    1575~1641 34151개월 선조의 차서자, 이조반정으로 폐위

    (광해군묘 - 남양주군 송승리)

     

    16 인조 종(장릉)+인렬왕후, 장렬왕후(휘릉)

    1595~1649 29262개월 정원군(선조의 5서자)의 적정자,

    직접군사를 지휘하여 반정에 성공, 등극(- 파주군 갈현리)

    원종(추존) (장릉)+인헌왕후-16대 인조

     

    17 효종 호(영릉)+인선왕후

    1619~1659 31105개월 인조의 차적자,

    ()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적통을 제치고 계승

    조선조 유일하게 청나라 심양에서출생(- 여주군 왕대리)

    소현세자

     

    18 현종 연(숭릉)+명성왕후

    1641~1674 19153개월 효종의 적장자 (독자)

    (숭릉- 동구릉)

     

    19 숙종 순(명릉)+인경왕후(익릉), 인현왕후, 인원왕후

    1661~1720 144510개월 현종의 적장자 (독자)

    (명릉 - 서오릉)

     

    20 경종 균(의릉)+단의왕후, 선의왕후

    1688~1724 3342개월 숙종의 서 長子, 는 장희빈

    (의릉 - 성북구 석관동)

     

    21 영조 금(원릉)+정성왕후(홍릉), 정순왕후

    1694~1776 31517개월 숙종의 서 次子 異腹兄

    경종으로부터 왕위 세습.

    조선의 역대 왕중 最長壽王.(원릉 -동구릉)

     

    22 정조 산(건릉)+효의선황후

    1752~1800 25243개월 영조의 次子인 사도세자의 적 장자.

    (건릉-화성군 안령리)

    진종소황제(추존) (영릉)+효순소황후

    장조의황제(추존) (융릉)+헌경의황후

    의소세손

    정조선황제 산(건릉)+효의선황후

     

    23 순조 공(인릉)+순원숙황후

    1790~1834 11344개월 정조의 서차자인 문효세자의 요절로 등극.

    영조의 계비 정 순왕후 김씨가 20세까지 섭정. 안동김씨 세도정치 시작.

    (인릉 - 강남구 내곡동)

    문효세자

     

    24 헌종 환(경릉)+효현성황후

    1827~1849 7147개월 순조의 적장자(효명세자)의 독자.

    순조비 순원왕후 김씨가 2년간 섭정.(경릉 - 공구릉)

    문조익황제 영(수릉)+신정익황후-24대 헌종성황제 환(경릉)+효현성황후

     

    25 철종 변(예릉)+철인장황후

    1831~1869 19146개월 정조의 서(은언군)의 적손.

    헌종의 절손으로 신정왕후(조 대비)가 지명.

    학문을 연마한 적이 없어 순원왕후 김씨가 2년간 섭정.

    (예릉 - 서삼릉)

    장조의황제 서자 은언군-전계대원군 광- 25대 철종장황제 변(예릉)+철인장황후

     

    26 고종 형(홍릉)+명성태황후

    1852~1919 11439개월 인조의 3자 인평대군 계열.

    흥선대원군의 3적자, 철종의 절손으로 신정왕후 조씨한테 입적시키고 지명.

    대원군 이 20세까지 섭정.

    (홍릉 - 미금시 미금동)

    장조의황제 서자 은신군-남연군 구(인조 3남 인평대군 6대손 남연군에게 양자)

    흥선대원군 하응-26대 고종태황제 형(홍릉)+명성태황후

    황후 : 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 閔氏, 1851~1895)

    후비 : 순헌황귀비 엄씨 (純獻皇貴妃 嚴氏)(1854~1911)

    후궁 : 영보당귀인 이씨(永寶堂貴人 李氏):이순아(李順娥;1843~1928)

    후궁 : 귀인 장씨(貴人 張氏)

    후궁 : 광화당귀인 이씨(光華堂貴人 李氏)

    후궁 : 보현당귀인 정씨(寶賢堂貴人 鄭氏)(1882~1943)

    후궁 : 복녕당귀인 양씨(福寧堂貴人 梁氏)(1882~1929)

    후궁 : 내안당귀인 이씨(內安堂貴人 李氏)(1847~1914)

    후궁 : 삼축당상궁 김씨(尚宮 三祝堂尚宮 金氏):김옥기(金玉基;1890~1972)

    후궁 : 정화당상궁 김씨(貞和堂尚宮 金氏)

    후궁 : 궁인 서씨(宮人 徐氏)

    후궁 : 궁인 김씨(宮人 金氏)

    후궁 : 궁인 장씨(宮人 張氏)

     

    27 순종 척(유릉)+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

    1874~1926 3331개월 고종의 적장자. 조선의 멸망과 함께 폐위.

    (유릉 - 미금시 금곡동)

    순종효황제 척(유릉)+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

     

     

    목조-덕릉 효공왕후 이씨-안릉

    익조-지릉 정숙왕후 최씨-숙릉 , 손씨

    도조-의릉 경순왕후 박씨-순릉, 조씨

    환조-정릉 의혜왕후 최씨-화릉, 이씨, 정빈 김씨

    태조-건원릉 신의왕후 한씨-제릉 신덕왕후 강씨-정릉

    정종-후릉 정안왕후 김씨-후릉

    태종-헌릉 원경왕후 민씨-헌릉

    세종-영릉 소헌왕후 심씨-영릉

    문종-현릉 현덕왕후 권씨-현릉

    단종-장릉 정순왕후 송씨-사릉

    세조-광릉 정희왕후 윤씨-광릉

    예종-창릉 장순왕후 한씨-공릉 안순왕후 한씨-창릉

    성종-선릉 공혜왕후 한씨-순릉 폐비 윤씨-회묘 정현왕후 윤씨-선릉

    연산군-연산군묘 폐비 신씨-연산군묘

    중종-정릉 단경왕후 신씨-온릉 장경왕후 윤씨-희릉 문정왕후 윤씨-태릉

    인종-효릉 인성왕후 박씨-효릉

    명종-강릉 인순왕후 심씨-강릉

    선조-목릉 의인왕후 박씨-목릉 인목왕후 김씨-목릉

    광해군-광해군묘 폐비유씨-광해군묘

    인조-장릉 인렬왕후 한씨-장릉 장렬왕후 조씨-휘릉

    효종-영릉 인선왕후 장씨-영릉

    현종-숭릉 명성왕후 김씨-숭릉

    숙종-명릉 인경왕후 김씨-익릉 인현왕후 민씨-명릉 인원왕후 김씨-명릉

    경종-의릉 단의왕후 심씨-혜릉 선의왕후 어씨-의릉

    영조-원릉 정성왕후 서씨-홍릉 정순왕후 김씨-원릉

    정조-건릉 효의왕후 김씨-건릉

    순조-인릉 순원왕후 김씨-인릉

    헌종-경릉 효현왕후 김씨-경릉 효정왕후 홍씨-경릉

    철종-예릉 철인왕후 김씨-예릉

    고종-홍릉 명성황후 민씨-홍릉

    순종-유릉 순명효황후 민씨-유릉 순정효황후 윤씨-유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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