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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朝鮮王陵,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STORY BOOK - 6

草霧 2013. 7. 24. 16:52

 

 

 

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STORY BOOK - 6

 

 

조선왕릉은 42(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40, 14, 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3, 4, 5)입니다

 

조선 건국 초기 국가 기반을 잡은 왕

태조(건원릉)-정종(후릉)-태종(헌릉)

 

조선의 문화를 꽃 피운 왕

세종(영릉)-문종(현릉)

 

죽음조차 알릴 수 없었던 비운의 왕

단종(장릉)-세조(광릉)-추존왕 덕종(경릉)-예종(창릉)

 

육신을 잃고 떠돌고 있는 넋

성종(선릉)-연산군(연산군묘)

 

당파 싸움에 시달린 왕

중종(정릉)-인종(효릉)-명종(강릉)

 

전란을 겪은 왕

선조(목릉)-광해군(광해군묘)-추존왕 원종(장릉)

 

청나라에 맞서 싸운 왕

인조(장릉)-효종(영릉)-현종(숭릉)

 

당쟁에 휩싸인 왕

숙종(명릉)-경종(의릉)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힘쓴 왕

영조(원릉)-추존왕 진종(영릉)-추존왕 장조(융릉)-정조(건릉)-순조(인릉)-추존왕 익종(수릉)

 

세도정치에 시달린 왕

헌종(경릉)-철종(예릉)

 

황제가 된 왕

고종황제(홍릉)-순종황제(유릉)

 

조선조(朝鮮朝) 왕릉(王陵)

    

왕릉 전관 조선조(朝鮮朝)의 역대 왕릉(王陵)에 대한 접근은 그 외형적 특징만으로도 당대(當代)의 역사적 사실들을 반증(反證)해 볼 수 있는 흥미로운 대상입니다. 조선조의 왕릉(王陵)27대 왕()과 왕비(王妃) 혹은 계비(繼妃), 그리고 추존(追尊)된 왕들을 포함해 전체 44기의 능()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 중 태조(太祖)의 비()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제릉(齊陵)과 정종(定宗)과 비() 정안왕후(定安王后)를 모신 후릉(厚陵)만 북한 지역[개성시]에 있어 우리가 아직 답사할 수 없는 지역에 있고, 거리상으로는 유일하게 강원도 영월에 조성된 단종(端宗)의 장릉(莊陵)을 제외하고는 모두 서울과 경기도에 산재(散在)해 있습니다.

 

특히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東九陵 : 건원릉(태조), 현릉(문종), 목릉(선조), 휘릉(인조 계비), 숭릉(현종), 혜릉(경종 비), 원릉(영조), 수릉(익종-추존), 경릉(헌종))이나 경기도 고양시의 서오릉(西五陵 : 경릉(덕종-추존), 창릉(예종), 명릉(숙종), 익릉(숙종 비), 홍릉(영조 비)), 서삼릉(西三陵 : 희릉(중종 계비), 효릉(인종), 예릉(철종)), 그리고 경기도 파주시의 파주삼릉(坡州三陵 : 공릉(예종 비), 순릉(성종 비), 영릉(추존 진종과 비))은 왕릉군(王陵群)을 이루고 있는 필수 답사(踏査) 지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리를 가도 그만한 곳은 없고 천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곳

 

 

 

 

 

隆健陵(융건릉)

 

 

 

 

융릉(隆陵) 건릉(健陵) 장릉(章陵)

 

 

추존왕 장조(莊祖) 융릉 융건릉(隆健陵)은 사적 제206호로 지정된 문화재로 장조(사도세자)와 그의 비 헌경왕후(혜경궁 홍씨)를 합장한 융릉(隆陵)과 그의 아들 정조와 효의왕후를 합장한 건릉(健陵)을 합쳐 부르는 이름으로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다.

    

 

 

 

 

 

 

 

 

융릉

융릉(隆陵)은 조선 정조의 아버지이자 사도세자로 알려진 조선 장조(莊祖, 1735~1762)와 혜경궁 홍씨로 널리 알려진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 1735~1815)가 함께 모셔진 능이다. 본래 사도세자의 묘는 원래 경기도 양주시 배봉산(현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기슭에 수은묘(垂恩墓)로 있었으나 왕위에 오른 정조가 사도세자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숭하고 난 뒤, 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높였으나 묘지 이장을 준비하고 곧 그의 지시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이름붙였으며 효성이 지극한 정조는 죽은 후 그 곁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1899년 대한제국 고종은 왕계 혈통상 고조부인 장헌세자를 장조로 추숭하면서 현륭원이란 명칭도 융릉으로 격상시켰다.

 

건릉

건릉은 조선 제 22대 왕인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이다. 1800628일 정조가 49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유언대로 같은 해 116일 아버지의 능인 현륭원(훗날 융릉)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되었다. 21년 후 순조 21182139일 효의왕후가 승하하였다. 효의왕후를 건릉 부근에 안장하려다 김조순의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주장으로 길지를 찾아 순조 211821년 정조의 릉을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고 효의왕후와 합장해서 오늘날의 건릉이 되었다. 합장릉이지만 융릉과 같이 혼유석이 하나이다. 19세기 왕릉 석물 제도의 새로운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융릉과 건릉은 정조 때의 문운이 융성하던 기운과 양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융릉과 사람들

 

『시흥어행렬도』화성원행도방의 8폭 중 일부 그림이다.정조는 이러한 행차를 통해 백성과 소통하였다.왕실의 장례를 치르고 왕릉을 조영, 관리하는 일은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이었던 유교의 예법을 충실히 따르며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는 과정이었으므로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다. 따라서 능의 입지 선정, 조영된 능의 관리감독, 천장 등 왕릉과 관련된 사항에는 다양한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해를 같이 했다.

 

백성들과 소통하기 위한 왕의 능 행차

『정조실록』 1792년(정조 16) 윤 4월 7일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장용영(壯勇營)의 돈 4만 냥을 경기 감영에 꿔주어 현륭원(顯隆園) 화소(火巢) 안에 있는 백성들의 전답 값을 보상해주고 그 나머지로는 임금이 행차할 때 외탕고(外帑庫)의 경비 및 나무 심는 비용으로 쓰도록 하였다.

 

『정조실록』 1792년(정조 16) 1월 24일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왕이 현륭원(顯隆園)에 행차하는 도중 갈현(葛峴)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서 초상에 앉아 마을 노점의 노인들을 불러서 고통스러운 일을 물어보았다.

 

『정조실록』 1793년(정조 17) 1월 12일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왕이 현륭원을 뵈러 가는 길에 관왕묘(關王廟)에 들렀다. 과천(果川)에서 주정(晝停)하였다. 인덕원(仁德院) 들녘을 지나다 길가의 부로(父老)들을 불러서 위로하며 고통스러운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저녁에는 수원 행궁에 머물렀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수원 화성에 자주 행차했던 정조의 효성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조의 능행길은 단순한 참배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위의 기록이 말해주듯이 정조는 능행길에서 백성들과 소통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정조는 궐 밖 행차 중에 3,355건의 상언과 격쟁을 처리하였다. 한 번 행차마다 약 50건의 민원을 처리한 셈이다.

 

조선 후기의 많은 왕들이 이를 행했으나, 정조는 특히 상언과 격쟁을 처리하는데 적극적이었다. 이는 정조의 화성행차가 단순히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보여 주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행차가 지나가는 시흥, 과천, 화성 일대 주민들의 민정을 직접 시찰, 민원을 해결하는 기회로 활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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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화성 행차 이야기

 

한양에서 화성까지, 정조의 화성 행차

 

『화성성묘진배도』1795년 8일간의 화성행차의 과정을 그린 8폭 병풍 그림이다. 이 그림은 중화성에 도착하여 향교에서 성인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장명이다.<호암미술관 소장>비극을 딛고 일어선 위대한 임금

정조는 조선 22대 임금으로서 위대한 임금으로 칭송 받는 인물이다. 1752년(영조 28)에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태어나 국왕의 운명을 받았지만,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1776년(정조 1)에 영조가 서거함으로써 당쟁의 와중에서 어렵게 25세의 나이로 국왕에 즉위하여, 수많은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달래는 화성 행차

정조는 1789년(정조 13)에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산(花山)으로 이장한 후 묘를 현륭원(顯隆園)으로 승격시켰으며, 해마다 1월 혹은 2월에 아버지의 능을 참배하기 위해 화성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이때마다 화성에 머물며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고, 한 차례의 행차마다 수십 건의 민원을 처리하였다.

 

8일간의 화성 행차 기록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는 1795년(정조 19)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기 위해 8일간의 화성행차를 했던 기록을 담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정조는 1795년(정조 19) 윤2월 9일 아침 화성 행차에 나섰다. 1km에 달하는 현란한 깃발과 연주가 어우러진 국왕의 행렬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출발하여 보신각 앞길을 지나 숭례문을 통과한 뒤 노량진 배다리에 이르렀다. 배다리를 건너는 동안에 수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백성들은 국왕의 행렬을 축제 분위기 속에서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이 행차를 위해 6,000여 명의 사람과 788필의 말이 동원되었는데, 국왕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24개 처의 요지에 배치된 수천 명의 척후 복병까지 계산하면 1만여 명의 인원이 동원된 대규모 행사였다.

 

화성에서 치러진 화려한 회갑연

이 긴 행렬이 도착한 화성에서는 성대한 회갑연이 열렸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은 조선시대 왕실 행사 중 가장 크고 화려했던 행사로 궁중 문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회갑 잔치는 오전 9시 45분부터 화성 행궁의 주 건물인 봉수당에서 거행되었다. 혜경궁 홍씨의 내외친척들도 초대됐다.

 

내빈이 13명이었고, 외빈이 69명이었다. 정조와 신하들은 차례로 혜경궁 홍씨에게 술잔을 올리며 천세를 불러 축하했고, 그 때마다 음악과 정재(呈才)가 공연됐다. 한양과 화성유수부 등에서 선발된 33명의 여령(女伶)들이 다양한 궁중무용을 추었다.

 

화성 행차를 통해 보인 개혁 의지

그런데 정조는 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도성이 아닌 화성에서 열려고 했을까? 그리고 군복 차림으로 말을 탄 채 행렬을 이끄는 정조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이날 정조의 화성 행차는 실로 대규모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행렬이었다. 행렬에 동원된 3,000여 명의 군사들은 정조가 직접 창설한 친위부대 장용영의 소속이었는데, 장용영의 외영은 바로 화성에 설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장용영과 화성은 군제개혁의 상징이었고, 국왕의 정치개혁을 뒷받침하는 군사력의 상징이었다. 정조는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장용영 군사를 지휘함으로써 강력한 왕권과 뚜렷한 개혁의지를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1800년(정조 24) 49세의 젊은 나이에 돌연 세상을 떠남으로써, 조선을 완전히 새로운 나라로 만들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미완의 개혁정치가’로 역사에 남았다.

 

 

 

 

화성 행궁 이야기

 

정조의 임시 처소로 건립된 행궁

화성 행궁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을 참배할 때에 머무는 임시 처소이자 수원 신읍치의 관아로서 건립되었다. 1789년(정조 13)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이장하고 그곳에 있던 수원부를 팔달산 아래로 이전함에 따라, 수원부의 관아를 옮겨짓고 행궁의 역할을 겸하게 하였다. 1793년(정조 17) 화성유수부로 승격시키면서 이를 화성 행궁이라 하였다.

 

대대적인 확장을 거듭한 화성 행궁

수원성 팔달문의 지붕 사진이다. 화성행궁을 감싸고 있는 수원성곽의 팔달문이다.화성 행궁은 1789년(정조 13) 장남헌(壯南軒 : 봉수당의 옛이름)을 중심으로 그 시설을 갖추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인 1790년(정조 14) 5월에 약 360여 칸의 건물들이 완성되었다. 1794년(정조 18)부터 화성 성역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화성 행궁의 대대적인 확장이 이루어졌는데, 특히 1795년(정조 19)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 맞추어 주요한 건물들이 건축되었고, 화성성역이 끝날 무렵에는 모두 620여 칸에 이르는 건물들이 조성되었다. 또한 화성 행궁정리수성향곡(華成行宮整理修成鄕穀)이라는 별도의 제도를 두어 관리, 운영하게 하였다.

 

 

 

화성에 대한 정조의 특별한 포부

화성 행궁은 여러 차례의 증축을 통해 경복궁 다음가는 궁이라 할 정도의 규모와 위엄을 갖추게 되었다. 그것은 현륭원 천봉 이후 11년 간 12차에 걸쳐 화성에 행차할 만큼 정조의 능행이 정례화 되었고 이때마다 화성 행궁에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화성이 정조의 특별한 포부를 담은 도시였다는 점에서도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강력한 왕권 구축과 개혁을 향한 의지

화성 신도시 건설의 직접적인 계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원래 수원부가 있던 화산으로 이전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화성 신도시 건설은 서울 남쪽의 교통 요지에 상업이 발달하고 경제적으로 부강한 도시를 새로 건설하여 왕권의 배후 도시로 삼고자 하는 정조의 정치적 목적에서 이루어진 사업으로 강력한 왕권 구축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었다. 아울러 정조는 세자가 15세가 되는 해에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이 되어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화성에 머물려고 하였다는 주장도 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들이 각종 문헌에 등장하기도 한다.

 

화성 행궁에 남겨진 미완의 계획들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화성과 행궁에 대한 정조의 계획들은 모두 미완의 상태로 끝나고 말았다. 1801년(순조 1) 행궁 옆에 정조의 영정을 모시는 화령전(華寧殿)이 건립되었고, 이후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현륭원과 정조의 능인 건릉(建陵)에 전배하고 화령전에 참배하는 원행(園行)을 계속하면서 화성 행궁은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행궁으로서의 기능을 이어가게 되었다.

 

 

(우편번호 445-380)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산 1-1. 1호선 병점역 하차, 34, 34-1, 35, 35-1, 44, 50, 50-1번 시내버스로 환승해서(15분 소요) 오실 수 있습니다.

 

 

경기도 수원시 206

사도세자 - 조선 22대 왕 정조의 부친

혜경궁 홍씨(獻敬王后 洪氏, 1735~ 1815) - 조선 22대 왕 정조의 모친

정조 - 조선 22대 왕

효의왕후 - 조선 22대 왕 정조의 정비(아내,)

한중록(閑中錄 또는 恨中錄)

화성 융릉 개비자나무 -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번잡한 도시의 삶 속에서 뜻밖에 만나는 울창한 습지

 

 

 

    

 

宣靖陵 (선정릉)

 

 

 

 

선릉(宣陵) 정릉(靖陵)

 

 

정현왕후릉 조선성종선릉 조선중종정릉의 위치가 있는 지도맵이미지 선정릉(宣靖陵, 사적 199)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조선 왕릉으로 세 개의 능이 있다고 하여 삼릉공원이라고도 불린다. 이 곳에는 조선 9대 임금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인 선릉[1], 11대 임금 중종의 무덤인 정릉이 있다.

    

 

 

 

 

 

 

 

서울특별시 강남구 199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합쳐 선정릉(宣靖陵)이라 하는데, 선릉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1495년에 성종의 능인 선릉을 세웠고, 그 뒤 1530년에 성종의 제2계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의 능을 선릉의 동쪽에 안장하였다. 이는 왕과 왕비의 능을 정자각 배후 좌우 두 언덕에 각각 한 봉분씩 조성한 경우로 동원(同原) 이강(異岡) 형식이라 한다. 그 후, 1544년에 만들어진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1562년에 문정왕후에 의해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원당리에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원당리의 풍수지리가 좋지 않아 옮긴 것인데, 이곳 또한 매년 여름이면 능이 침수되어 재실에 물이 들어가는 피해를 입었다. 결국, 중종과 함께 안장되기를 바랐던 문정왕후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현재 태릉(泰陵)에 홀로 안장되어 있다. 선정릉은 임진왜란 때 왜병(倭兵)에 의해 파헤쳐지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으나, 현재까지도 도심 한가운데에 남아 보존되고 있다. 사적 제199호이고, 2009630일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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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선정릉

(우편번호 135-090) 서울특별시 강남구 선릉로동 47길 5. 2호선 선릉역 8번출구로 나와서 도보로 5분거리에 있습니다.선릉과 정릉은 임진왜란 때 파헤쳐져 재궁이 전부 불타 버렸기 때문에, 선릉과 정릉의 세 능상 안에는 시신이 없다. 정릉의 경우는 좀 더 특수한데, 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침에서는 아예 잿더미들만 나왔지만 중종의 능침에서는 시신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시신이 중종의 것인지 아닌지를 가려내기 위해 원로대신에서부터 궁중의 나인들까지 동원되어 살펴보았지만 중종이 승하한 지 오래 되어 외모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몇 없었고 남은 사람들도 고령이라 확인이 힘들었다.

 

남아있던 기록과 시신의 모습이 달랐고 중종이 승하할 당시가 더운 여름이었는데 시신이 부패하지 않고 남아있다는 점 때문에 왜군이 왕릉을 욕보이기 위해 가져다 둔 시신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혹시나 중종의 시신일지도 모르기에 사람들은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선조는 이 시신을 다른 곳에 잘 묻어주라고 명령한다. 이후 전해져오는 야담에는 능에서 밤마다 비통한 울음소리가 들려와 사람들은 옥체를 능에 모시지 않은 탓이라고 했었다는데, 어쨌든 선정릉의 세 능상은 모두 비어있으며(정확히는 보수하면서 새로 만들어 올린 의복만 묻혀있다), 그 시신이 정말 중종의 시신이었는지 아닌지 확실하게 확인할 방법은 없다.

 

 

 

 

 

선릉과 사람들

 

왕실의 장례를 치르고 왕릉을 조영, 관리하는 일은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이었던 유교의 예법을 충실히 따르며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는 과정이었으므로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다. 따라서 능의 입지 선정, 조영된 능의 관리감독, 천장 등 왕릉과 관련된 일들의 귀추에 따라 다양한 세력이 부침을 겪기도 했다.

 

백운기를 벌하라는 상소가 기록된 『선조실록』사진, 1593년(선조 26년) 11월 2일자의 기사.

왜적과 결탁하여 왕릉을 훼손한 백운기

『선조실록』 1593년(선조 26년) 11월 2일자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실려 있다.

 

위관(委官) 유성룡이 아뢰기를,

「“백운기(白雲起)가 왜적과 서로 결탁하여 선릉(宣陵), 태릉(泰陵) 두 능을 파헤친 죄상을 이미 모두 승복했습니다. 큰 죄를 범한 사람이라서 잠시도 용납해 둘 수 없으니 결안 취초(決案取招)로 조율하여 시행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선릉과 정릉은 이와 같이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왕릉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태워지는 수모를 겪었다. 위의 기록은 백운기라는 자가 왜적의 앞잡이가 되어 능의 훼손에 일조를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에는 왕릉 능원 내의 나무 한 그루만 뽑아도 나라 밖으로 추방시키는 엄한 벌을 주었는데, 하물며 봉분과 재궁을 무참히 훼손하는데 가담하였으니, 백운기라는 자의 죄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선릉의 조영과 수난사

 

선릉 조영을 위한 민묘 이장

조선 왕릉의 입지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신중한 일이었다. 도성에서 10리 밖, 100리 안이라는 기준을 충족시키면서도 다양한 풍수지리상의 길지로서의 요건을 갖춘 곳이어야 했다. 만약 이렇게 어렵게 찾은 지역이 이미 민가의 묘 자리로 쓰이고 있는 경우에는, 왕릉을 조성하기 위해 이 민묘를 이장시키기도 하였다. 선릉을 조성하기 위해 물색한 지역에도 이미 민묘가 자리 잡고 있어 이를 이장토록 하였다. 이에 대한 기록은 『연산군일기』 1495년(연산군 1년) 1월 26일의 기사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산릉의 영역 안에 묘가 있어 옮겨야 한다. 이 때 이장해야 할 묘가 당상관(堂上官) 및 당상관의 부모, 처, 조부모의 것이면 쌀과 황두를 합하여 15석(碩)을, 그 나머지에는 쌀 2석과 황두 1석을 전례에 따라 보상해주었다. 임자 없는 묘는 경기 감사로 하여금 차사원(差使員)을 정해 군인을 주어 천장토록 하였다.

 

이러한 예는 이미 예종의 창릉을 조영할 때에도 나타났다. 민묘 이장을 위해서 같은 조건의 보상을 해준 것이다. 당시 하나의 왕릉을 조영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공을 들였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선릉의 임진왜란 수난사

이렇게 공들여 조영한 선릉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왜병에 의해 왕릉이 파헤쳐지고 재궁(梓宮 : 왕과 왕비의 관)이 불탄 것이다. 『선조실록』 1593년(선조 26) 4월 13일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경기좌도 관찰사 성영(成泳)이 치계하기를,

왜적이 선릉과 정릉을 파헤쳐 재앙이 재궁에까지 미쳤으니 신하로서 차마 말할 수 없이 애통합니다.”

하니, 상이 정원에 분부하기를,

 “이 서장을 보니, 몹시 망극하다. 속히 해조(該曹)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선조실록』 1593년(선조 26) 8월 9일의 기사에는 누구의 시체인지 모를 시신이 정릉 근처에 버려져 있어 이를 왕의 옥체라고 짐작하고 이 옥체를 봉안하는 공을 세우기 위해 몇몇 군사들이 경쟁하였다는 내용의 보고도 올라와 있다. 당시 선릉과 정릉의 훼손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평화로운 도심의 숲 선릉

근방의 민묘를 이장시키며 공들여 조영한 선릉은 현재 서울에서도 가장 복잡한 도심의 한복판인 강남구 삼성동에 자리 잡고 있다. 빌딩숲 사이로 우거진 소나무와 푸른 능선은 바쁜 도심의 사람들에게 여유로움과 평화로운 분위기를 제공해준다.

 

평화로운 선릉의 전경

 

봄가을의 소풍객, 마음의 여유를 위해 산책길에 오른 삼성동 일대의 회사원들, 답사객들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위와 같은 긴 세월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역사의 숲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성종과 소학이야기

 

'소학'과 '삼강행실도'

 

조선 전기 문물을 완성시킨 성종

선릉에 잠든 성종은 학문을 좋아하는 호학의 군주이자, 그의 묘호가 말해주듯이, 많은 업적을 남겨 치세를 이룬 훌륭한 군주였다. 『경국대전』,『국조오례의』등을 완성하고, 『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 『악학궤범』등을 편찬 간행하였다. 세종 때의 집현전에 해당하는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고, 세조 때 폐지된 호당(湖堂)제도를 부활하여 독서당을 따로 두고 문신 중에 뛰어난 사람을 골라 공무에 종사하는 대신 일정기간 학문연구에 전념하게 하는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를 다시 실시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조선 전기의 문물제도는 성종 때 거의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삼강행실도』에 실린 효자도 문충정성 그림, 효자 문충이 일을 마친 뒤 먼길을 걸어 어머니를 문안하러 온다는 이야기이다.『경국대전』의 완성

기존의 여러 법령과 교령을 종합하여 항구적인 법전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세조 때 모든 법전을 집대성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작업은 십 수 년간 이어져, 1485년(성종 16년)에 『경국대전』으로 편찬되었다. 이, 호, 예, 병, 형, 공의 6전으로 구성된 경국대전은 조선의 국가 조직과 정치, 사회, 경제 활동을 망라하는 기본 법전이 되었다. 그 후 시대가 흐름에 따라 부분적으로 수정 보완되기도 했지만 기본적인 뼈대는 바뀌지 않고 조선 왕조 500년여의 기본 법전으로서의 자리를 지켰다. 성종대에 완성된 『경국대전』으로 조선의 정치 제도의 정비 작업은 일단락되어, 조선은 명실상부한 유교적인 법치국가로서의 자리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삼강행실도』의 보급

『삼강행실도』는 유교의 윤리에서 기본이 되는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강조하여 백성들에게 널리 읽히고자 간행한 책이다. 세종 때인 1431년(세종 13년)에 처음으로 간행되었다.

 

『삼강행실도』에서는 삼강의 모범이 될 만한 충신, 효자, 열녀를 각각 35명씩 모두 105명을 뽑아 그 행적을 그림과 글로 칭송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서적이 한문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문을 모르는 백성들이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삼강행실도』를 한글로 번역하라는 성종의 어명에 따라 1481년(성종 12년) 한글판 『삼강행실도』가 완성, 보급되어 백성들에게 유교적 윤리를 효과적으로 전파할 수 있었다.

 

『소학』의 애독자 성종

성종은 『소학』을 매우 애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종 재위 당시 신진 사대부 층으로 떠오른 사림 세력은 『소학』을 성리학적 윤리의 교과서로서 매우 중요시하며 소학 보급운동을 펼쳤다. 사림은 향촌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세력으로, 소학을 향촌사회에 보급하여 백성들이 성리학적 질서를 따르도록 꾸준한 노력을 하였다. 성종이 『소학』을 중시한 것은 이러한 사림 세력에 대한 지지를 밝힌 것으로 해석된다. 한편 성종에게는 투기가 심하다는 이유로 왕비를 폐비한 개인사가 있었는데, 이 문제에 대한 윤리적 방패막이로 『소학』을 부각시켰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번잡한 도시의 삶 속에서 뜻밖에 만나는 울창한 습지

    

 

 

 

 

獻仁陵 (헌인릉)

    

 

 

헌릉(獻陵) 인릉(仁陵)

 

 

 

조선 3대 태종(太宗) 헌릉 헌인릉(獻仁陵, 사적 194)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조선조 왕릉이다. 이 곳에는 조선 3대 임금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능인 헌릉, 23대 임금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능인 인릉이 있다.

    

 

 

 

 

 

 

 

 

 

헌릉

헌릉(獻陵)은 태종과 원경왕후를 같은 언덕에 무덤을 달리하여 안장한 쌍릉으로 두 무덤 모두 아래 부분을 병풍석(屛風石)을 둘러 세웠으며, 그 밖으로 각 무덤에 12간의 난간석으로 서로 연결하였다. 양석(羊石)과 호석(虎石) 4, 상석(床石) 2, 망주석(望柱石) 1쌍을 3면의 곡장(曲墻)으로 감싸 안으며 무덤 위의 한 층이 이루어졌다. 그 아래로 한 단 낮추어 중간 층에는 문인석(文人石) 2, 마석(馬石) 2, 팔각형 명등석(明燈石) 2좌가 각 무덤에 설치되었고, 그 한 단 아래에 무인석(武人石), 마석 각 4좌가 아래 층을 이루고 있다. 웅장한 규모로 조선 왕릉중에 가장 크다고 전해진다. 특히 세종의 효심을 읽을 수 있는 배려가 곳곳에 숨어 있다. 승하후 세종의 묘역도 유언대로 한동안 이곳 지역에 조성되어 있었다.

    

 

 

 

 

 헌릉과 사람들

 

왕실의 장례를 치르고 왕릉을 조영, 관리하는 일은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이었던 유교의 예법을 충실히 따르며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는 과정이었으므로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다. 따라서 능의 입지 선정, 조영된 능의 관리감독, 천장 등 왕릉과 관련된 사항에는 다양한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해를 같이 했다.

 

헌릉의 지문을 지어 올린 변계량

『세종실록』 1420년(세종 2) 8월 24일자 기사에는 원경왕후 승하 시 변계량이 지어 올린 헌릉의 지문이 기록되어 있다.

 

“태후 민씨(閔氏)는 여흥(驪興)의 세가이시다. (중략) 태후가 어려서부터 맑고 아름다우시며, 총명하시고 인자하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출가할 나이에 배필을 고르시다가 우리 성덕 신공(盛德神功) 상왕의 빈(嬪)으로 들어오셨다. 상왕이 젊어서부터 세상을 경영할 뜻을 두시고 경사(經史)에만 마음을 쓰시고 집안 살림은 돌보지 아니하셨으나, 태후께서 살림하는 데 능숙하시고 주부로서 남편의 공을 이룩하도록 힘쓰셨고, 여러 아들을 가르쳐서 옳은 데로 따르게 하셨고, 시첩들을 예로 대하여 부인의 도리에 극진하셨다.

 

(중략) 경자년 5월 25일에 태후가 병환이 드시었는데, 상왕은 매일 오셔서 보시었고, 주상은 곁에 모시고서 부채로 서늘하게 하며 침석을 보시고 친히 탕약(湯藥)을 받들어 무릇 구료하심이 지극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7월 10일에 수강궁 별전에서 훙(薨)하시니, 춘추가 56세이시다.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아래로 복예(僕隷)에 이르기까지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아아, 슬프도다. 상왕이 슬퍼하심을 이기지 못하시어 조금 평안치 못하시니, 주상이 대신을 보내어 육선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시고 흰옷과 소찬으로 30일을 지내셨으며, 주상은 애통함이 다할 데 없으시어 양암(樑闇) 에 거처하시니, 상왕이 장례 뒤에 복을 벗으라 허하셨다. (후략)” 고 하였고, 판돈녕부사 권홍(權弘)을 시켜 돌에 쓰게 하였다.

 

변계량(卞季良, 1369~1430)

1385년 문과에 급제하여, 진덕박사(進德博士)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조선 건국 초 전의감승 의학 교수관(敎授官)이 되었다. 사헌부시사를 거쳐, 예문관의 응교(應敎), 직제학 등을 지냈다. 1407년(태종 7) 문과중시에 급제했으며, 1417년 대제학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0여 년간 대제학을 지내는 동안, 외교문서를 거의 도맡아 지어 명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태조실록』편찬, 『고려사』 개수에 참여하였다. 시문에도 능하여 헌릉지문 외 다수를 지었다.

 

홍살문 쪽에서 바라본 헌릉의 전경이다.정자각 오른편으로 비각이 서 있다

 

 

헌릉 오리나무숲 이야기

 

작은 생태 파수꾼, 오리나무

 

헌릉의 오리나무숲에는 다양한 생물들이 서식하고 있다.이 꽃은 숲 주변에 무리를 지어 피는 고마리 꽃이다.생태경관 보전지역으로 지정된 오리나무숲

양재동 동쪽 대모산의 남쪽 기슭에 위치한 헌인릉은 조선 3대 태종과 원경왕후가 모셔진 헌릉, 조선 23대 순조와 순원왕후의 인릉이 합쳐진 이름이다. 능 아래쪽에는 17,000여 평에 오리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이 숲은 2005년에 서울시에서 생태경관 보전지역으로 지정하였다.

 

정성 들여 가꾼 능역의 전통 숲

조선 왕릉은 능 조영 당시 입지 선정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고, 풍수지리상의 길지를 엄선하여 결정하였으므로, 두말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입지를 지녔다. 이렇게 풍수지리에 근거한 자연경관에 입지하고 있어 특별한 관리나 계획이 필요치 않을 것처럼 보이지만, 일부 사료에 따르면 능역의 산림은 인공적으로 조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철저히 관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능을 조영할 당시에 새로 심었거나 관리된 나무의 종류는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 남아 있는 나무들과 1915년~1935년에 조선총독부에서 조사,발행한 『조선고적도보』에 의하면 능 조영 시 능의 좌우 및 후면에는 소나무를, 전면인 남쪽의 낮은 지대에는 오리나무를 심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오리나무는 우리나라에 집단적으로 자생하는 지역이 희귀함을 감안할 때 능의 전면에 인공적으로 심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오색딱따구리가 출현하는 왕릉의 숲

오리나무는 5리마다 한 그루씩 심어놓고 이정표로 썼다고 해서 이와같은 이름이 붙여질 만큼 예전엔 흔했던 나무이다. 그러나 산기슭, 밭둑길, 개울가와 같이 새로 개발하기 딱 좋은 곳에 살곤 해서인지 지금은 매우 보기 어려운 나무이다. 헌인릉 주변 오리나무숲 일대는 지하수가 풍부하고 토심이 깊어 서울에서는 둔촌동 생태경관보전지역과 더불어 오리나무 군집을 형성하고 있다. 또 곳곳에 물웅덩이와 소규모 수로가 있어 물봉선, 삿갓사초, 애기나리, 둥굴레, 붓꽃 등 다양한 습지성 식물이 자라고 오색딱따구리, 꾀꼬리, 박새 등도 출현하고 있다.

 

조선 왕릉이 후대에 물려준 선물

조선 왕릉을 조영할 당시 왕실에서 들였던 공은 현재 우리에게 당시 왕실 문화와 역사를 알 수 있게 하는 문화적 유산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21세기의 도심 속에서 한국 전통 숲의 맑은 공기와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쉼터를 안겨주었다. 조선 왕릉은 후대의 우리에게 맑은 역사의 숲을 산책할 수 있는 큰 선물인 셈이다.

 

 

 

 

비로 내리는 태종의 영혼, 태종우

 

조선 왕조의 기반을 닦은 태종

조선 3대 임금인 태종은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으며, 권력 획득을 위한 분란의 소용돌이가 거셌던 조선 초기에 그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를 차지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1400년 왕이 된 후 17년 10개월의 재위 기간 동안에는 중앙제도와 지방제도를 정비하여 왕조의 기반을 닦았으며, 많은 치적을 남겼다.

 

비로 내리는 태종의 영혼

이러한 그의 말년에 하나의 일화가 전해진다. 태종 말년에는 극심한 가뭄으로 온 나라가 바짝바짝 타들어갔다고 한다. 태종은 눈을 감으면서도 가뭄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이 염려가 되어 “내가 죽으면 마땅히 상제께서 비를 내리시도록 청하여 우리 백성들의 근심을 덜어주리라.”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러자 하늘에서 바로 비가 내려 오랜 가뭄이 풀렸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 뒤부터 태종이 승하한 날인 음력 5월 10일이 되면 항상 비가 내렸으므로 이 비를 ‘태종우(太宗雨)’라고 불렀다고 한다.

 

태종우와 관련된 일화는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5월조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태종이 임종을 맞이할 때 세종에게 "현재 가뭄이 심하니 내가 죽어 영혼이 있다면 이 날 비가 오게 하겠다."했는데, 그 뒤 기일마다 비가 왔고 이 비를 태종우(太宗雨)라 했다.

 

치세를 이끈 왕에 대한 기억

농촌에서는 태종우가 오는 해에는 풍년이 들 징조라고 하였다. 태종우는 200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해인 1591년(선조 24)부터 멈췄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태종의 전쟁에 대한 경고라고 전하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이러한 나름의 방식으로 조선 초기 왕조의 기틀을 닦은 왕을 기억해왔다.

치세를 이룬 태종의 헌릉에는 다른 왕릉의 두배나 되는 석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서울특별시 서초구 194

이렇듯이 헌릉의 석물은 고려시대 현릉·정릉(玄陵·正陵), 조선시대의 후릉(厚陵)과 같은 형태지만 망주석 이외는 각각 하나씩을 더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셋째 아들이었던 세종은 부친의 무덤에 각별한 정성을 보였으며 난간석을 만들만큼 부모님의 화해를 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죽어서도 부모곁에 묻히기를 바랄만큼 애틋한 사랑을 갖고 있었다. 승하하여 18년간 이곳 헌릉의 서쪽편에 모셨다가 예종(睿宗) 원년(1469)에 지금 경기도 여주의 영릉으로 모셨다. 헌릉에는 쌍봉으로 있는 무덤 언덕 아래에 정자각(丁字閣), 2기의 신도비가 있는 비각(碑閣), 그리고 입구에 홍살문(紅箭門)이 있다.

 

    

(우137-180) 서울시 서초구 헌인릉길 42. 3호선 양재역 7번출구,  2호선 강남역 6번출구로 나와 버스  140, 407, 408, 440, 462, 471 로 환승해서 헌인릉 버스정류장, 강남서초구예비군훈련장 (서울시립어린이병원 다음 정류장)에 하차하셔서 오실 수 있습니다. 

 

 

인릉

인릉은 순조와 순원왕후를 같은 언덕에 합장한 무덤으로서 무덤 아래에 병풍석은 없이 12간의 난간석을 둘렀으며, 그 주위로 양석과 마석 각 2, 상석 1, 망주석 1쌍을 3면의 곡장으로 에워쌌다. 한 단 아래에 문인석과 마석 1, 명등석 1좌를 설치하고, 그 아래에 무인석과 마석 각 1쌍을 배치하였다. 문인석과 무인석의 조각은 사실적으로 새겨져 섬세하고 아름답다. 무덤 언덕 아래에 정자각, 2기의 비석이 있는 비각, 그리고 입구에 홍살문이 있다. 홍살문 남쪽 도로변에 있는 재실은 당초에는 능역 안에 있었으나, 그 중간 부분이 6·25 이후 농지로 개간되어 서로 떨어져 위치하게 되었다.

 

 

 

 

 

 

빗나간 욕망이 휘둘린 왕과 왕비들의 능묘

 

 

 

 

 

 

泰康陵 (태강릉)

 

    

 

태릉(泰陵) 강릉(康陵) · 정릉(貞陵) · 연산군묘

 

 

조선 태조왕비 태릉 태릉(泰陵)과 강릉(康陵)은 대한민국 사적 제201호로, 태릉은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의 능이고 강릉은 명종과 그의 비 인순왕후 심씨의 능이다. 두 능을 아울러 태강릉(泰康陵)이라고도 한다.

    

 

 

 

 

 

 

 

 

 

서울특별시 노원구 201

두 능은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에 소재하고 있다. 근처에 태릉선수촌이 있다.

 

   (우139-240)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산223-19. 11호선(석계역), 6호선 (화랑대역), 7호선(태능입구역) 에서 버스로 환승로 하셔서 오실 수 있습니다. 

 

 

태릉

조선 왕조 제11대 임금인 중종(中宗)의 왕비(3)인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 (15011565)의 능으로, 1565년에 조성되었다. 태릉은 왕비의 봉분(封墳) 1기만을 조성한 단릉(單陵)이다. 왕후는 중종의 제2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와 동원(同原)에 있던 중종의 정릉(靖陵)을 봉은사(奉恩寺) 곁으로 천장(遷葬)하고 자신도 그 옆에 묻히기를 원하였지만, 정릉(靖陵) 주위의 지대가 낮아 장마철에 물이 들어 자주 침수되자,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이 곳 태릉에 안장되었다.

    

 

 

 

강릉

문정황후 윤씨의 아들이자 조선 왕조 제13대 임금인 명종(明宗, 15451567년 재위), 그의 비()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沈氏, 15321575)의 능이다. 강릉은 한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封墳)을 나란히 마련한 동원(同原) 쌍봉릉(雙封陵)이며, 난간으로 연결되어 있다. 강릉은 현재 원형 보존을 위해서 일반인에게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태릉관리소-태릉 관리소 홈페이지를 찾아주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왕의 잦은 능행에 따르는 백성들의 고달픔

『광해군일기』 1611년(광해군 3) 8월 29일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올해의 풍(風), 수(水), 황(蝗) 세 가지 재해는 근고에 없던 바이므로, 비록 진대(賑貸)하고 무휼(撫恤)하더라도 민생을 보전하기 어려울까 걱정스러운 판국인데, 이미 성릉(成陵)의 행행을 겪은 데다 또 계속해서 건원릉(建元陵)의 친제가 있습니다.

 

『광해군일기』 1611년(광해군 3) 8월 29일 조왕이 여러 능에 행차하는 것을 중지해달라는 사간원의 청이 기록되어 있다.

아무리 성상께서 돌아가신 선왕을 그리는 지극한 정에서 나온 일이기는 해도 바야흐로 수확하는 때에 기전의 민정(民丁)이 응역(應役)에 분주하고 각도의 인부와 말이 오랫동안 기다리고 서 있게 되면 원망하고 고달파하는 정상을 이루 형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강릉(康陵), 태릉(泰陵)에 친제를 하시겠다는 명이 또 오늘 내렸습니다. 백성들의 고달픔에 대해서는 고려할 것이 없다손치더라도, 옥체가 친히 안개와 이슬을 범하면서 한 달 사이에 세 번을 행행하는 것은 몹시 미안한 일입니다. 강릉, 태릉의 친제는 정지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능에 배알하는 일은 근대의 능침을 불가불 서둘러 전알(展謁)해야 되는 데다 도로 또한 멀지 않으니, 어찌 후일을 기다리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위의 기록에서 보는 바와 같이 왕릉의 조성, 관리, 왕의 능행에는 대대적인 인력이 동원되었다. 능 주변의 8km 둘레로는 능 바깥의 불길이 능으로 번지지 못하도록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게 하는 화소 구역을 만들었으며, 왕릉 인근 마을에 사는 사람들에게 부역의 의무를 지어 능 수호군의 역할을 하도록 했다. 대부분 이들에게는 보상이 따랐으나, 잦은 임금의 능행이나 막중한 능역 공사는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기도 하였다.

 

 

 

 

문정왕후와 보우 이야기

 

봉은사 이야기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다?

『명종실록』에는 함흥에서, 경기도 안성에서, 경상도 의성에서, 여러 지방에서 “암탉이 수탉으로 변한다.”는 보고를 받은 내용이 여러 차례 올라와 있다. 이러한 재미있는 기록이 나타나는 시기는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통해 정권을 잡은 시기와 일치한다. 문정왕후 승하에 관한 『명종실록』의 기사에 사신은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서경(書經)』 목서(牧誓)에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이 다함이다.”하였으니, 윤씨(尹氏 : 문정왕후)를 이르는 말이라 하겠다.

 

불교 중흥 정책을 편 문정왕후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물린 이후에도 명종의 뒤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조선의 측천무후, 철의 여인 등 현세에 와서 수많은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정계와 학계에서는 위 사신의 기록과 같이 문정왕후가 여인으로서 이렇게 조정을 쥐락펴락하며 권력을 휘두른 것에 대해 매우 불편한 심사를 드러냈다. 그들의 불만의 일부는 숭유억불의 시대에 그녀가 펼친 불교중흥정책을 향하고 있기도 하다.

 

문정왕후가 잠든 태릉의 무석인 사진, 큰 귀와 도톰한 입술이 부처님을 연상케 한다.

 

보우와 부활하는 불교

문정왕후는 독실한 불교신자로 도첩제를 실시하여 승려를 뽑고 전국 300여 개의 절을 공인하는 등 당시의 유교지향정책을 무시하고 불교 중흥을 도모하였다. 양주 회암사에 있던 승려 보우를 맞아들여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임명하고 훗날 중종과 함께 묻힐 요량으로 봉은사 근처(정릉)에 중종의 능을 천장하기도 하였다. 폐지되었던 승과를 부활시켰으며, 이러한 노력으로 불교 교단은 활기를 띠고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산 속으로 숨어버린 조선의 불교

유생들은 문정왕후의 불교 중흥 노력에 심한 반발을 시작했다. 각지에서 보우를 타도하라는 상소와 종단 및 승과 폐지의 상소가 빗발쳤다. 요승 보우를 죽여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다 못해 성균관 유생들이 성균관을 비우는 집단 시위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문정왕후는 불교 중흥 정책을 그만두지 않았으며, 그녀의 지원을 받은 보우는 도대선사가 되었다. 그러나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성난 유생들은 회암사로 몰려가 불상의 목을 자르고 절을 불질러 버렸다. 명종 역시 문정왕후의 불교를 중흥하라는 유언을 무시하고 깊은 산 절로 도망친 보우를 체포하였다. 전국에서 보우를 처형하라는 여론이 빗발치기 시작하였고, 율곡 이이 등이 이를 만류하였으나, 명종은 보우를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보우는 이곳에서 험악한 여론을 살피던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결국 살해당했다.

 

 

 

봉은사 이야기

 

봉은사 이야기

 

봉은사 대웅전의 전경도심 속에 연등을 밝히는 봉은사

매년 음력 4월 8일, 도심 한복판인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에는 형형색색의 연등이 내걸려 장관을 연출한다. 이는 삼성동에 위치한 사찰 봉은사에서 석가탄신일을 축하하기 위해 성대하게 여는 연등 축제의 한 장면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옛 사찰들은 모두 백두대간에서 뻗어나간 깊은 산줄기에 위치한다. 게다가 조선 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 근처에는 남아있는 사찰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런데 봉은사는 어떻게 이렇게 도성 가까이에서 여전히 번창하고 있는 것일까?

 

신라 왕실의 원찰이었던 봉은사

봉은사는 794년(신라 원성왕 10) 연회국사가 왕실의 원찰로 창건하였으며 원래의 이름은 견성사(見性寺)라고 하였다. 『삼국사기』권38 「잡지」의 기록에 의하면 이곳은 사천왕사, 봉선사, 감은사 등과 더불어 성전사원에 해당하는 일곱 사찰 가운데 하나였다. 성전사원이란 왕실에서 건립한 사찰의 조성과 운영을 위해 설치한 일종의 관부를 포함하는 사찰을 뜻하는 것으로, 당시 신라 사회에서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조선 성종 선릉의 원찰이 된 봉은사

오랜 역사를 지닌 왕실의 원찰 견성사는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봉은사로 개칭하게 되었다. 1498년(연산군 4)에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가 성종이 잠들어 있는 선릉을 위하여 사찰을 중창하고 봉은사라 이름 붙인 것이다. 그 후 1562년(명종 17)에는 그 위치를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게 되었다.

 

문정왕후와 보우

조선 13대 왕인 명종의 재위 시, 스스로를 조선의 여주(女主)로 칭할 만큼 대단한 권력을 행사했던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에 의해 봉은사는 더욱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문정왕후는 조선왕실의 숭유억불 정책을 따르지 않고, 불교의 중흥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승려 보우(普愚)를 만나 봉은사의 주지로 임명하고, 봉은사를 조선 불교 중흥의 장으로 삼았다. 폐지되었던 승과시(僧科試 : 승려들에게 실시하는 과거시험)가 부활하여 이곳 봉은사에서 치러졌으며,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바로 이곳에서 등과하였다.

 

꾸준히 이어온 봉은사의 명맥

봉은사를 중심으로 한 문정왕후와 보우의 불교 중흥책에는 조정과 유생의 반발이 컸다.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유생들의 빗발치는 항의에 의해 봉은사 주지인 보우는 제주도로 유배당하여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고, 문정왕후의 불교를 중흥하라는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봉은사는 병자호란 때 불탔으나 숙종 때에 중건하고 1825년(순조 25)에 다시 중수하여 여전히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태릉봉향회

태릉봉향회(泰陵奉香會)()전주이씨대동종약원 산하기관으로 제11대 중종의 제3비인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의 제향을 주관하는 공식 단체이다. 태릉 제향은 처음 정릉왕자파 동종회(靖陵王子派 同宗會)에서 1965년부터 2001516일까지 제향을 봉행오다가 2002516일부터 전주이씨 덕흥대원군파 대종회(全州李氏德興大院君派大宗會)로 이관되어 봉행하고 있다. 2002516일 능하에서 많은 종친이 참석한 가운데 태릉봉향회 창립 총회가 개최되고, 이날 총회에서 초대 회장으로 덕흥대원군 12대손 이재원(李載元)이 선임되면서 봉향회가 새롭게 출발하였다. 20053102대 회장으로 대원군 16대손 이우영(李愚英)이 취임하고, 20073103대 회장에 이재구(李載九)가 취임하였다. 현재 제향에는 많은 종친과 파평윤씨 문중, 일반인들이 참반한 가운데 기신일 516일에 제향을 받들고 있다. 조선왕릉 40기가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게 하는 큰 역할이 바로 이러한 전통 왕릉제향이 계속 이어져 오는 점들을 들어 세계문화유산에 지정하였다고 한다.

   

 

 

   

화려해서 더욱 서글픈 두 황제의 능

 

 

 

 

    

洪裕陵홍유릉

    

 

 

 

홍릉(洪陵) 유릉(裕陵) 사릉(思陵) 광해군묘

 

 

26대 고종(高宗) 홍릉 홍릉(洪陵)과 유릉(裕陵)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능으로 합쳐서 홍유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적 제207호이다. 홍릉은 조선 제26대이자 대한제국의 고종황제와 그의 비 명성 태황후 민씨의 능이며, 유릉은 조선 제27대 왕 순종과 그의 비 순명효황후 민씨와 계비 순정효황후 윤씨의 능이다. 조선 왕릉의 정자각(丁字閣) 대신 정면 5, 측면 4칸의 침전을 세웠으며, 양쪽으로 문무석을 세워 홍살문까지 기린·코끼리·해태·사자 등의 석수를 세웠는데 중국 명나라 황제능의 제도를 따라 조선의 왕릉 중 홍릉과 유릉만이 황제릉으로 규모도 일반 왕릉에 비하여 크다.

 

 

 

 

경기도 남양주 198

강제 병합 후 일본이 정한 왕공가궤범200조에는 왕·공족의 분영은 묘로 한다라고 되어 있다.[1] 왕의 무덤인 능도 세자의 무덤인 원()도 아닌 일반인의 무덤인 묘()로 격하시키겠다는 뜻이었다. 왕공가궤범을 따르자면 고종과 순종의 무덤은 왕릉이 될 수 없었는데, 이때 왕실에서 생각해낸 것이 고종의 비 명성황후의 홍릉과 순종의 비 순명효황후의 유릉이었다. 고종의 장례 때는 명성황후의 재궁을 원 홍릉(청량리)에서 현 홍릉(남양주시)으로 옮겨와 합장하였고, 순종의 장례 때에도 구 유릉(서울 능동 어린이대공원)에서 순명효황후의 재궁을 모셔와 합봉(남양주시)하였다. 새로운 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능의 칭호를 가져다 쓰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제로서는 이것을 막을 법적인 근거가 없었으며, 능의 이장 문제 또한 이왕직이나 총독부가 관여할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왕실 내의 문제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 문제는 별 탈 없이 처리되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272그러나 본래 왕릉 장법에서는 왕비의 능에 왕을 합장할 경우엔 새로운 능호를 쓰게 되어 있다. 중종이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 옆에 같이(이때의 경우 한 구역 안 두개의 능침이라 하여 동원 이강이라 한다. 봉분은 따로 떨어져 두개이지만 제사는 한 정자각에서 받는다)안장되었을 때 희릉의 능호를 같이 쓸 수 없다 해서 정릉으로 능호를 새로 올렸던 전례가 있고, 숙종은 인현왕후의 능에 묻을 것을 미리 지시했기 때문에 인현왕후의 능호인 명릉을 그대로 사용하였다(이 경우는 봉분이 붙어있어서 쌍릉이라고 한다). 원래 왕릉 장법에 따르면 새로운 능호를 써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고종과 순종의 경우는 일제의 간섭으로 인하여 그렇지 못하게 된 것이다.(조선 왕실에도 이런 경우가 있는데 바로 헌종의 경릉이다)

 

 

 

 

 

순종의 장례를 주관한 이왕직 장관 민영기

 

『순종실록부록』 1926년 5월 5일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본직(本職)장관(長官) 남작(男爵) 민영기(閔泳綺)가 오늘 인산 및 천릉(遷陵)할 때에 각 항의 길일을 회의하여 택일하였는데, 유릉(裕陵)에 풀을 베고 흙을 파헤치는 일을 처음 시작할 날을 5월 7일 오후 2시로 하고, 개금정(開金井)은 5월 18일 오전 10시로 하고, 발인(發靷)은 6월 10일 오전 8시로, 임금의 하현궁(下玄宮)은 6월 11일 오후 10시로, 천릉하였다고 구릉(舊陵)에 계(啓)를 올리는 것은 5월 21일 오전 8시로, 발인은 6월 4일 오전 6시로, 하현궁은 6월 5일 오전 6시로 한다고 입계(入啓)하였다.

 

순종의 옥체를 모시고 궁을 떠나 능으로 가는 행렬이다. 일본군이 호위하고 있다. (사진제공:국립고궁박물관 자문위원 이혜원)

 

선왕이 승하하면 국장 절차 중 하나로 세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즉위식이 치러지며, 새로운 왕은 선왕의 장례 일체에 관한 사항을 지시하고 결정한다. 그러나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승하하자, 조선 왕실 관련 업무를 맡기기 위해 개설한 관청 이왕직의 장관 민영기가 순종의 장례를 주관하였다.

 

민영기(閔泳綺, 1858~1927)

한말의 척신이다. 1879년(고종 16) 무과에 급제, 1883년 운봉현감을 거쳐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892년 충주목사, 이듬해 상주목사를 지내고, 갑오개혁 뒤 일본에 신사유람단 일원으로 파견되었다. 1898년 군부대신에 올라 수구파(守舊派)의 거물로서 황국협회를 조직, 보부상을 동원하여 독립협회를 탄압하였다. 1899년 농상공부대신이 되고, 안경수사건(安?壽事件)으로 고군산(古群山)에 유배되었다. 1902년 특별 방면 되고, 1905년(광무 9) 탁지부대신으로 을사조약에 반대하였다. 국권피탈 뒤 일본 정부의 남작(男爵)이 되고, 동양척식회사 부총재, 이왕직장관을 지냈다.

 

 

 

 

 

왕릉과 황제릉의 차이

 

조선 왕릉의 변천사

조선 왕릉 석물의 배치와 구조는 기본적으로 큰 변화 없이 오랜 기간 반복되었지만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나 당대 왕의 의지에 따라 약간씩의 변화가 있어 왔다. 제1기는 태조의 건원릉(1408)에서부터 문종 현릉(1452)으로 조선 왕릉의 기본형식을 갖춘 시기이다. 제2기는 세조의 광릉(1468)에서부터 숙종 익릉(1681)까지로 석물의 전반적인 배치나 표현상에서 조선 왕릉 특유의 조각 양식이 확립된 시기이다. 제3기는 인조의 장릉(1731)에서부터 철종의 예릉(1864)까지이며 병풍석이나 장명등의 형태에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고 조각의 비례가 바뀐다. 제4기는 황제릉이 조성된 시기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라 칭하면서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이 황제릉의 형식을 취하였다. 이에 더하여 유릉의 석물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왕릉과 황제릉의 차이

홍릉과 유릉은 조선의 국명을 대한제국으로 바꾸면서 황제라 칭한 고종과 순종의 능이다. 황제릉으로 조선 왕릉과 몇 가지 차이가 있다. 첫째는 신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어도가 설치되어 참도가 3개의 단으로 되어있는 것이다. 둘째는 조선 왕릉의 정자각에서 월대로 올라가는 계단이 정자각의 좌우에 설치되어 있는 것과 달리 정자각을 대신하는 침전(寢殿)의 정면에 설치되어 있어 홍살문과 직선축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능상구역의 봉분 앞에 위치하던 석물이 참도에서 침전 사이로 배치되어 있으며 이것은 중국 황제릉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넷째는 말기에 보인 비각의 위치인데, 홍릉 역시 비각이 정자각과 수평을 이루고 있다.

 

정자각이 침전으로

홍릉과 유릉에서는 정자각이 ‘정(丁)’자의 평면 형태에서 ‘일(一)’자형으로 변화되었고, 그 이름 또한 ‘침전’으로 변경되었다. 침전이라는 용어는 궁궐건축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임금의 숙소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지붕형식 또한 맞배지붕에서 팔작지붕으로 변경되었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건설되었다. 월대의 형태는 건물의 영향을 받아 ‘凸’자형에서 ‘口’자형으로 바뀌었고, 화강석의 장대석으로 기단이 축조되었다. 바닥의 마감도 전돌로 되어 있고, 월대의 계단위치 및 개수가 이전의 정자각과 다르게 침전의 좌우로 각각 2개, 전면으로 3개가 배치되었다. 또한 전면의 계단이 생김으로 해서 침전에서 홍살문까지 참도가 직선으로 설치되었다.

 

양과 호랑이 대신 들어선 기린과 코끼리

흥릉의 참도 왼쪽으로 석물들이 줄지어 서있다. 코끼리, 해태등 다른 조선 왕릉에서 보지 못한 생소한 동물들이다.

 

황제릉인 홍릉과 유릉의 또 하나의 큰 특징은 석물이 능하 구역으로 내려온 점이다. 능원의 기본 석물인 문무석인과 동물상이 침전 앞 신도로 내려오면서 석호와 석양이 사라졌고 대신에 중국 명나라 황제릉에 보이는 다양한 동물상이 등장한다. 우선 문석인과 무석인이 차례로 마주보고 서고, 그 뒤로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이 순서대로 신도의 양쪽으로 정렬하고 있다. 이러한 상설이 유릉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데, 단 유릉의 경우는 서양식 조각수법이 더욱 많이 반영되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 이야기

 

대한제국의 탄생

1863년(철종 14) 12월 조선 25대 왕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가 바로 고종이다.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고종은 대비의 수렴청정과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지휘 아래 10년의 세월을 보냈다. 1873년(고종 10)에는 마침내 친정을 선포하지만, 아버지와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외척인 민씨 일가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하여 고종의 입지는 굳건하지 못하였다.

 

마지막 황실의 일원들.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 순명황태후, 덕혜옹주

 

이러한 와중에 나라는 안팎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나라의 곤궁과 개방의 압력 속에 지배층은 개화파와 수구파로 나뉘었고,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혁명 등이 잇따라 일어났다. 조선의 왕실은 이에 속수무책이었으며, 사건들을 수습하기 위해서 일본, 러시아, 청나라 등의 열강의 힘을 빌어야 했다. 고종은 쇄신의 의미에서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위에 올랐으며, 연호를 광무라고 하였다.

 

현대사를 함께한 마지막 황실의 일원들

한일합병조약의 체결 후 순종은 황제위에서 이왕(李王)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거처하다가 1926년 승하하였다. 홀로 남겨진 순종의 부인 순정효황후는 창덕궁 낙선재에서 일제 강점기과 1945년의 광복, 다시 5년 후의 6.25 전쟁 등 한국 현대사의 슬픈 나날을 지켜보다가 1966년 7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자 순종의 이복동생인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일제 강점기 당시의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하여 11세 때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인 마사코(이방자)와 결혼하였고, 1970년에 세상을 떠났다. 영친왕과 마사코 사이에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는 생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고 둘째 아들 이구는 멸망한 황실의 마지막 황세손으로서 극적인 삶을 살다가 2005년 74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창덕궁 낙선재에 빈청을 마련하였으며, 영친왕이 잠들어있는 영원에 안장되었다.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 517, 1392 - 1910 ]

 

() 13()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익종(翼宗) 수릉(綏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융릉(隆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영릉(永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장릉(章陵 : 사적 제202)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경릉(敬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 2()

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

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유릉(裕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홍릉(洪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

왕릉 35

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예릉(睿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경릉(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인릉(仁陵 : 사적 제194)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건릉(健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홍릉(弘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원릉(元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혜릉(惠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의릉(懿陵 : 사적 제204)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익릉(翼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명릉(明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숭릉(崇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영릉(寧陵 : 사적 제195)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휘릉(徽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장릉(長陵 : 사적 제203)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성묘(成墓 : 사적 제365)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목릉(穆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강릉(康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효릉(孝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희릉(禧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온릉(溫陵 : 사적 제210)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정릉(靖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9대 성종(第九代 成宗) 회묘(懷墓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순릉(順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선릉(宣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

8대 예종(第八代 睿宗) 공릉(恭陵 : 사적 제205)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8대 예종(第八代 睿宗) 창릉(昌陵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7대 세조(第七代 世祖) 광릉(光陵 : 사적 제197)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사릉(思陵 : 사적 제209)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장릉(莊陵 : 사적 제196)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5대 문종(第五代 文宗) 현릉(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4대 세종(第四代 世宗)

3대 태종(第三代 太宗)

2대 정종(第二代 定宗)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정릉(貞陵 : 사적 제208) : 서울 성북구 정릉2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1대 태조(第一代 太祖)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 : 경기 구리시 인창동

비공개 지역(12)

파주

양주

구리

남양주

사적제203호 장릉

사적제359호 수길원

사적제358호 소령원

 

사적제210호 온릉

 

사적제364호 명빈묘

 

사적제360호 휘경원

사적제209호 사릉

사적제363호 광해군묘

사적제366호 안빈묘

사적제367호 영빈묘

사적제356호 순강원

사적제365호 성묘

 

()의 위치(位置)

 

왕릉

담당지

왕릉

명칭

왕릉

왕명

건립

시기

사적

유무

주소

 

홈페이지

 

동구릉

 

건원릉

태조

1408

(태종8)

193

구리시 인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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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릉

문종

1452

(단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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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릉

선조

1600

(선조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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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릉

인조왕비

(장렬왕후)

1688

(숙종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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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릉

현종

1674

(숙종즉위)

http://donggu.cha.go.kr/n_donggu/index.html

혜릉

경종왕비

(단의왕후)

1718

(숙종44)

http://donggu.cha.go.kr/n_donggu/index.html

원릉

영조

1776

(정조즉위)

http://donggu.cha.go.kr/n_donggu/index.html

수릉

문조

(추존)

1890

(고종27)

http://donggu.cha.go.kr/n_donggu/index.html

경릉

헌종

1849

(철종즉위)

http://donggu.cha.go.kr/n_donggu/index.html

명빈묘

 

1479

(성종10)

http://donggu.cha.go.kr/n_donggu/index.html

홍유릉

 

흥릉

고종황제

1919

207

남양주 금곡동

 

http://geumgok.cha.go.kr/

 

유릉

순종황제

1926

 

http://geumgok.cha.go.kr/

 

선정릉

선릉

성종

1495

(연산군1)

199

강남구 삼성동

 

http://seonjeong.cha.go.kr/

 

정릉

중종

1562

(명종17)

http://seonjeong.cha.go.kr/

헌인릉

 

헌릉

태종

1420

(세종2)

194

서초구 헌인릉

http://heonin.cha.go.kr/

인릉

순조

1856

(철종7)

서초구 내곡동

http://heonin.cha.go.kr/

융건릉

 

융릉

장조

(사도세사)

1789

(정조13)

206

화성시 안녕동

http://hwaseong.cha.go.kr/

건릉

정조

1800

(순조1)

http://hwaseong.cha.go.kr/

 

 

사릉

 

 

 

사릉

단종왕비

(정순왕후)

1521

(중종16)

209

 

남양주 진건읍 사능리

http://sareung.cha.go.kr/

광해군묘

 

1641

(인조19)

363

http://sareung.cha.go.kr/

안빈묘

 

1693

(숙종19)

http://sareung.cha.go.kr/

성묘

 

1577

(선조10)

http://sareung.cha.go.kr/

광릉

광릉

세조

1468

(예종1)

197

남양주 진전읍 부평리

http://gwang.cha.go.kr/

온릉

온릉

중종왕비

(단경왕후)

1557

(명종12)

210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http://goyang.cha.go.kr/

태강릉

태릉

중종왕비

(문정왕후)

1565

(명종20)

201

노원구 공릉동

http://taegang.cha.go.kr/

강릉

명종

1567

(선조1)

http://taegang.cha.go.kr/

의릉

의릉

경종

1724

(영조1)

204

성북구 석관동

http://eureung.cha.go.kr/

영휘원

 

1911

361

동대문구 홍릉길

http://eureung.cha.go.kr/

숭인원

 

1922

http://eureung.cha.go.kr/

정릉

정릉

태조왕비

(신덕왕후)

1409

(태종 9)

208

성북구 정능동 산87

http://seoul.cha.go.kr/

삼릉

공릉

예종왕비

(장순왕후)

1461

(세조 7)

 

 

205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http://paju.cha.go.kr/

순릉

성종왕비

(공혜왕후)

1474

(성종 5)

http://paju.cha.go.kr/

영릉

진종

(추존)

1729

(영조 5)

http://paju.cha.go.kr/

장릉

(파주)

장릉

인조

1731

(영조 7)

203

파주시 탄현면

http://paju.cha.go.kr/

장릉

(김포)

장릉

원종

(추존)

1627

(인조 5)

202

김포시 김포읍 풍무리

http://jangneung.cha.go.kr/

서오릉 

 

경릉

덕종

(추존)

1457

(세조 3)

198

고양시 용두동

http://goyang.cha.go.kr/

창릉

예종

1469

(예종 2)

http://goyang.cha.go.kr/

익릉

숙종왕비

(인경왕후)

1680

(숙종 6)

http://goyang.cha.go.kr/

명릉

숙종

1701

(숙종27)

http://goyang.cha.go.kr/

흥릉

영조왕비

(정성왕후)

1757

(영조33)

http://goyang.cha.go.kr/

순창원

 

1563

(명종18)

http://goyang.cha.go.kr/

수경원

 

1764

(영조 40)

http://goyang.cha.go.kr/

대빈묘

 

1701

(숙종 27)

http://goyang.cha.go.kr/

광명

영희원

 

1718

(숙종44)

357

광명시 노온사동

http://goyang.cha.go.kr/

서삼릉

  

희릉

중종왕비

(장경왕후)

1537

(중종 32)

200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http://goyang.cha.go.kr/

효릉

인종

1545

(인종1)

http://goyang.cha.go.kr/

예릉

철종

1863

(철종 14)

http://goyang.cha.go.kr/

소경원

 

1645

(인조 24)

http://goyang.cha.go.kr/

 

의령원

 

1752

(영조 28)

http://goyang.cha.go.kr/

효창원

 

1786

(정조 10)

http://goyang.cha.go.kr/

희묘

 

1482

(성종 13)

http://goyang.cha.go.kr/

영릉 

영릉

세종대왕

1469

(예종 1)

195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http://sejong.cha.go.kr/

영릉

효종

1673

(현종 14)

http://sejong.cha.go.kr/

장릉

(영월)

장릉

단종

1581

(선조 14)

196

 

 

제릉

제릉

태조왕비

(신의왕후)

1391

(공양왕)

미지정

개성시 판문군

 

후릉

후릉

정종

1412

(태종12)

미지정

 

연산군묘

연산군묘

연산군

1506

(중종 1)

362

도봉구 방학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목조 안사(덕릉)+효공왕후(안릉)

 

익조 행리(지릉)+정숙왕후

 

도조 춘(의릉)+경순왕후(순릉)

 

환조 자춘(정릉)+의혜왕후

 

1 태조(건원릉)+신의고황후(제릉), 신덕고황후(정릉)

1335~1408 5762개월 항조(이자춘) 의혜왕후최씨,

1392년 조선왕조 건국

태조고황제 성계(건원릉 - 구리시 동구릉)

 

2 정종 방과(후릉)+정안왕후

1357~1419 4122개월 태조의 적자,

1王子의 난으로 방석을 살해하고 등극

(후릉 - 개성시 령정리)

 

3 태종 방원(헌릉)+ 원경왕후-4대 세종 도(영릉)+소헌왕후

1367~1422 341710개월 태조의 5적자,

2王子의 난으로 정종의 선양 유발 형제세습

(헌릉 - 강남구 내곡동)

 

4 세종

1397~1450 22316개월 태종의 3적자, 세자(양녕대군)을 폐하고 등극함

(- 여주군 왕대리)

 

5 문종 향(현릉)+현덕왕후

1414~1452 3723개월 세종의 적장자

(현릉 - 동구릉)

 

6 단종 홍위(장릉)+정순왕후(사릉)

1441~1457 1232개월 문종의 적장자(독자), 숙부에게 위 피탈

(- 영월읍 영흥리)

 

7 세조 유(광릉)+정희왕후-덕종(추존) (경릉)+소혜왕후

1417`1468 39133개월 세종의 적차자, 왕위찬탈(단종의 숙부)

(광릉 - 남양주군 부평리)

 

8 예종 황(창릉)+장순왕후(공릉), 안순왕후

1450~1469 1912개월 세조의 적차자,() 의경세자의요절로 등극함

(창릉 - 고양시 서오릉)

 

9 성종 혈(선릉)+공혜왕후(순릉), 폐비, 정현왕후

1457~1494 13252개월 세조의 손자이며 의경세자의 적차자

(선릉 - 강남구 삼성동)

 

10 연산군(폐위)

1476~1506 19119개월 성종의 적장자, 중종반정으로 폐위됨

(연산군묘 - 도봉구 방학동)

 

11 중종 역(정릉)+단경왕후(온릉), 장경왕후(희릉), 문정왕후(태릉)

1488~1544 19382개월 성종의 차적자(이복형()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옹립)

(정릉 - 강남구 삼성동)

 

12 인종 호(효릉)+인성왕후

1515~1545 309개월 중종의 적장자

(효릉 - 고양시 서삼릉)

 

13 명종 환(강릉)+인순왕후-순회세자 부

1534~1567 1222년 중종의 적차자(() 인종으로부터 세습

(강릉 - 노원구 공릉동)

 

14 선조 균(목릉)+의인왕후, 인목왕후

1522~1608 16407개월 중종의 7서자(덕흥군)3,

명종의 유지로 등극

(목릉 - 동구릉)

덕흥대원군

 

15 광해군 (폐위)

1575~1641 34151개월 선조의 차서자, 이조반정으로 폐위

(광해군묘 - 남양주군 송승리)

 

16 인조 종(장릉)+인렬왕후, 장렬왕후(휘릉)

1595~1649 29262개월 정원군(선조의 5서자)의 적정자,

직접군사를 지휘하여 반정에 성공, 등극(- 파주군 갈현리)

원종(추존) (장릉)+인헌왕후-16대 인조

 

17 효종 호(영릉)+인선왕후

1619~1659 31105개월 인조의 차적자,

()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적통을 제치고 계승

조선조 유일하게 청나라 심양에서출생(- 여주군 왕대리)

소현세자

 

18 현종 연(숭릉)+명성왕후

1641~1674 19153개월 효종의 적장자 (독자)

(숭릉- 동구릉)

 

19 숙종 순(명릉)+인경왕후(익릉), 인현왕후, 인원왕후

1661~1720 144510개월 현종의 적장자 (독자)

(명릉 - 서오릉)

 

20 경종 균(의릉)+단의왕후, 선의왕후

1688~1724 3342개월 숙종의 서 長子, 는 장희빈

(의릉 - 성북구 석관동)

 

21 영조 금(원릉)+정성왕후(홍릉), 정순왕후

1694~1776 31517개월 숙종의 서 次子 異腹兄

경종으로부터 왕위 세습.

조선의 역대 왕중 最長壽王.(원릉 -동구릉)

 

22 정조 산(건릉)+효의선황후

1752~1800 25243개월 영조의 次子인 사도세자의 적 장자.

(건릉-화성군 안령리)

진종소황제(추존) (영릉)+효순소황후

장조의황제(추존) (융릉)+헌경의황후

의소세손

정조선황제 산(건릉)+효의선황후

 

23 순조 공(인릉)+순원숙황후

1790~1834 11344개월 정조의 서차자인 문효세자의 요절로 등극.

영조의 계비 정 순왕후 김씨가 20세까지 섭정. 안동김씨 세도정치 시작.

(인릉 - 강남구 내곡동)

문효세자

 

24 헌종 환(경릉)+효현성황후

1827~1849 7147개월 순조의 적장자(효명세자)의 독자.

순조비 순원왕후 김씨가 2년간 섭정.(경릉 - 공구릉)

문조익황제 영(수릉)+신정익황후-24대 헌종성황제 환(경릉)+효현성황후

 

25 철종 변(예릉)+철인장황후

1831~1869 19146개월 정조의 서(은언군)의 적손.

헌종의 절손으로 신정왕후(조 대비)가 지명.

학문을 연마한 적이 없어 순원왕후 김씨가 2년간 섭정.

(예릉 - 서삼릉)

장조의황제 서자 은언군-전계대원군 광- 25대 철종장황제 변(예릉)+철인장황후

 

26 고종 형(홍릉)+명성태황후

1852~1919 11439개월 인조의 3자 인평대군 계열.

흥선대원군의 3적자, 철종의 절손으로 신정왕후 조씨한테 입적시키고 지명.

대원군 이 20세까지 섭정.

(홍릉 - 미금시 미금동)

장조의황제 서자 은신군-남연군 구(인조 3남 인평대군 6대손 남연군에게 양자)

흥선대원군 하응-26대 고종태황제 형(홍릉)+명성태황후

황후 : 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 閔氏, 1851~1895)

후비 : 순헌황귀비 엄씨 (純獻皇貴妃 嚴氏)(1854~1911)

후궁 : 영보당귀인 이씨(永寶堂貴人 李氏):이순아(李順娥;1843~1928)

후궁 : 귀인 장씨(貴人 張氏)

후궁 : 광화당귀인 이씨(光華堂貴人 李氏)

후궁 : 보현당귀인 정씨(寶賢堂貴人 鄭氏)(1882~1943)

후궁 : 복녕당귀인 양씨(福寧堂貴人 梁氏)(1882~1929)

후궁 : 내안당귀인 이씨(內安堂貴人 李氏)(1847~1914)

후궁 : 삼축당상궁 김씨(尚宮 三祝堂尚宮 金氏):김옥기(金玉基;1890~1972)

후궁 : 정화당상궁 김씨(貞和堂尚宮 金氏)

후궁 : 궁인 서씨(宮人 徐氏)

후궁 : 궁인 김씨(宮人 金氏)

후궁 : 궁인 장씨(宮人 張氏)

 

27 순종 척(유릉)+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

1874~1926 3331개월 고종의 적장자. 조선의 멸망과 함께 폐위.

(유릉 - 미금시 금곡동)

순종효황제 척(유릉)+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

 

 

목조-덕릉 효공왕후 이씨-안릉

익조-지릉 정숙왕후 최씨-숙릉 , 손씨

도조-의릉 경순왕후 박씨-순릉, 조씨

환조-정릉 의혜왕후 최씨-화릉, 이씨, 정빈 김씨

태조-건원릉 신의왕후 한씨-제릉 신덕왕후 강씨-정릉

정종-후릉 정안왕후 김씨-후릉

태종-헌릉 원경왕후 민씨-헌릉

세종-영릉 소헌왕후 심씨-영릉

문종-현릉 현덕왕후 권씨-현릉

단종-장릉 정순왕후 송씨-사릉

세조-광릉 정희왕후 윤씨-광릉

예종-창릉 장순왕후 한씨-공릉 안순왕후 한씨-창릉

성종-선릉 공혜왕후 한씨-순릉 폐비 윤씨-회묘 정현왕후 윤씨-선릉

연산군-연산군묘 폐비 신씨-연산군묘

중종-정릉 단경왕후 신씨-온릉 장경왕후 윤씨-희릉 문정왕후 윤씨-태릉

인종-효릉 인성왕후 박씨-효릉

명종-강릉 인순왕후 심씨-강릉

선조-목릉 의인왕후 박씨-목릉 인목왕후 김씨-목릉

광해군-광해군묘 폐비유씨-광해군묘

인조-장릉 인렬왕후 한씨-장릉 장렬왕후 조씨-휘릉

효종-영릉 인선왕후 장씨-영릉

현종-숭릉 명성왕후 김씨-숭릉

숙종-명릉 인경왕후 김씨-익릉 인현왕후 민씨-명릉 인원왕후 김씨-명릉

경종-의릉 단의왕후 심씨-혜릉 선의왕후 어씨-의릉

영조-원릉 정성왕후 서씨-홍릉 정순왕후 김씨-원릉

정조-건릉 효의왕후 김씨-건릉

순조-인릉 순원왕후 김씨-인릉

헌종-경릉 효현왕후 김씨-경릉 효정왕후 홍씨-경릉

철종-예릉 철인왕후 김씨-예릉

고종-홍릉 명성황후 민씨-홍릉

순종-유릉 순명효황후 민씨-유릉 순정효황후 윤씨-유릉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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