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르네상스

르네상스 1-1. 르네상스가 후대에 남긴 것들-나

草霧 2013. 5. 4. 09:12

 

 

 

 

르네상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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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혁신의 수레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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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르네상스(Renaissance)가 후대에 남긴 것들 -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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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르네상스 _ 변화의 시대를 맞이하는 이탈리아

 

 

 

 

B. 세계적인 양식과 인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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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예술의 지성 세계

 

 

1. 첸니노 첸니니 (Cennino d’Andrea Cennini, 1360 ~ 1440)_

 

일 리브로 델라르테(미술의 책), “미술가의 교육

 

그는 자신이 익힌 기술을 다른 미술가에게 전수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13년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한 그는 모든 미술의 기본은 드로잉이며, 도제 첫 일 년 동안 매일 종이나 패널에 펜·초크·목탄·붓으로 연습하라고 충고했다. 르네상스에 들어오면 화가의 훈련은 기술단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론과 지식, 과학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드로잉에 대한 강조는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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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초 첸니니의 제단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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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Leone Battista Alberti, 1404 ~ 1472)_

 

 근세 건축양식의 창시자

 

단테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마찬가지로 르네상스시대 다재다능한 예술가의 한사람으로 꼽힌다. 호장한 내부 구조로 교회당의 장엄한 효과를 높이고 있으며, 알베르티의 고전 건축의 이상, 특히 로마건축물의 전통이 훌륭하게 살려져 있다. 그 후부터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걸친 이탈리아 사원의 일반 형식이 되었다. 리미니의 성()프란체스코 성당(1450), 만토바의 성()세바스티아노 성당(1460),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1470), ()안드레아 교회(1472), 건축론(10, 1450)고대 건축의 연구와 예술가로서의 감각을 종합한 새 시대의 건축을 논하고 근세 건축양식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조각론(1464), 회화론(繪畵論)(1436) 비례에 의한 원근법적 구성의 기본개념을 밝힌 최초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회화의 시작을 나르시스로부터라고 언급하고 있다. 나르시스가 연못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잡으려고 한 행위를 회화적인 예술행위로 보고 있다. 그의 회화론은 미술은 단순한 기술의 수공업 아니라 수준 높은 학문이라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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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니의 성프란체스코 성당(1450)

이교회의 외곽디자인은 르네상스 교회의 정면디자인의 효시이다. 이후, 그의 설계는 바로크 건축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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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루카 파치올리 (Luca Pacioli, 1445 ~ 1510) _

 

산술, 기하, 비율 및 비례 총람, 근대회계학의 아버지

 

수사이자 수학자이자 교수였던 근대회계학의 아버지다. 1494년 그가 지은 '산술·기하·비율 및 비례 총람'은 유럽 전역에 복식부기를 확산시키며 주식회사 출범과 근대적 자본의 축적을 이끌었다. 피보나치의 주판서(珠板書)이래 가장 광범위한 수학서로 일컬어진다. 그는 원근법을 응용한 미술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어서 화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에게서 기하학을 배웠다. 그는 수학의 원리를 이용해 원근법을 최초로 개척한 예술가에게서 배운 이론을 다시 그보다 7살 어린 친구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전수했다. 1494산술집성(算術集成) Samma de arithmetica, geometria, proporcioni e proporcionalità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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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포 데 바르바리의 '루카 파치올리의 초상'(1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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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 ~ 1519) _

 

 

르네상스의아버지”, 르네상스인의 전형

 

르네상스적 인문주의,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로도비 코스포르자공'에게 보낸 36가지 안건

현대 과학의 일러스트, 특히 해부학, 예술가일 뿐 아니라 위대한 과학자, 발명가, 위대한 상상력, 과학적인 천재성, 과학론은 그의 실증적 경험주의와 냉철한 관찰적 사고법의 결정체로, 과학사에 있어서 그 선구적 의의가 큽니다. '全人(L'uomo universale)의 최고 전형

Sfumato(스푸마토-공기원근법)

Chiaroscuri(명암법)

Monochrome(단색화)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149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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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지오르지오 바자리 (Giorgio Vasari, 1511 ~ 1574) _

 

미술가 열전(Le Vite de Piu Eccelenti Pittori. Scultori et Architeili Italiani), 르네상스라는 개념

 

 

치마부에로부터 자신에 이르는 약 300 년간의 미술가와 그 작품을 취급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미술 연구에 관한 중요 자료로 되어 있다. 르네상스"(프랑스어로 "재생")라는 용어는 15세기와 16세기 중의 이탈리아에서의 미술의 재생에 대해서 쓴 이탈리아의 미술사가인 지오르지오 바사리에 의해 도입되었다. 우리의 미술은 단지 모방일 뿐이다. 자연의 모방이 대부분이고, 그 다음으로 사람은 스스로 높이 오를 수 없기 때문에 그 자신보다 더 낫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이 제작한 작품을 모방하기도 한다. 이 말에 깔려 있는 바자리의 주장하는 바는 화가에게는 자연에 대한 묘사보다도 다른 화가의 작품을 연구하고 배워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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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르지오 바자<미술가 열전>(1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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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르지오 바자<정의>(1542)

 

6.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Baldassare Castiglione, 1478 ~ 1529) _

 

정신론(Il Cortegiano, 1528) 긍정인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우르비노 궁정을 본보기로 저술한 Il Cortegiano 정신론(1528)에서는 르네상스 궁정에 있어서의 완벽한 신사도의 이상을 논했고 스스로 그 모범을 보였다. 신플라톤주의 사상가로 라파엘과 그 밖의 미술가나 문학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외교관이자 르네상스 시대 궁정 예절에 관한 최고의 안내서 궁정인을 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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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초상 (Balthazar Castiglione)

라파엘 작, (초상화 1514~15), 16세기경 /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82 x 67 cm / 루브르 박물관 소장

 

"이상적인 궁정신하라면 고귀해야 하고, 무기에 정통하고, 음악과 회화에 조예가 깊어야 하고, 정치적 협상에 능하고, 언변이 좋아야 한다. 또한 모든 행동에 절제가 있어야 하고, 예의 바름과 품격과 우아함을 갖춰야 한다. 그리고 겉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과도한 허식을 멀리하고, 모든 것에 중용을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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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가 그린 최고의 남자 초상화는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 백작>일 것이다. 외교관이자 르네상스 시대 궁정 예절에 관한 최고의 안내서 궁정인을 쓴 저자는 내성적이지만 솔직하고 온화한 용모와 마음가짐을 지닌 귀족임을 보여준다. 라파엘로는 초상화를 너무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그의 5살 연상인 친구이자 현명하고 성실한 문학 조언자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감지할 수 있게 했다. 진동하는 빛 속에서 회색과 검정, 흰색이 매우 정교하게 미묘한 색조 차이를 보이도록 색채를 제한한 동시에 카스틸리오네의 푸른 눈이 그의 불그레한 얼굴에서 빛난다. 홀바인 식의 정밀한 세부묘사가 어떻게 짙고 윤택 없이 반짝이는 배색과 한 그림 안에 공존할 수 있는지는 라파엘로만의 비밀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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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틸리오네의 그림은 또한 라파엘로의 완숙한 초상화법이 갖는 특징을 증언한다. 그는 모델들의 외관뿐만 아니라 그가 그들과 누린 관계도 그렸다. 객관적인 관찰은 저마다 다른 사적인 관계와 결합한다. 그의 초상화는 대화다. 고로 지극히 암시적일 수밖에 없지만 매우 역설적이게도 거리감도 만들어낸다. “라파엘로의 초상화를 연구하면 할수록 그것이 우리를 위해 그려진 것이 아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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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군주들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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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와 문()의 울비노 (Urbino)

15세기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으며 많은 예술가들과 학자들의 거주지로서 유럽 여러 지역에 문화적 영향을 끼침. 르네상스식 외관이 잘 보존되어 있음. 12세기 이래 몬테펠트로 가()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르네상스 시대의 용감하고 영리한 용병대장(傭兵隊長) 페데리코 · · 몬테펠트로공()의 치세 때에 수많은 예술가와 인문주의자를 모았으므로 문예의 중심지가 되었다. 1508년 델라 로베레 가(Della Rovere)의 지배에 들어가고 1626년 이후부터는 교황령이 되었다. 팔라초 두칼레는 페데리코의 명에 의하여 루치아노 라우라나가 완성(1468~72). 고딕 시대의 옛 성벽 위에 르네상스 양식의 명석한 공간을 가한 균형잡힌 걸작이다. 영내에 마르케 국립미술관(피에로 · 델라 · 프란체스카, 우첼로 등의 작품을 소장)이 있고 그 외에 라파엘의 생가 등이 있다. 마욜리카 도기의 생산지로서도 유명하고, 16세기 중경부터 17세기에 걸쳐 펠리파리오(Niccolò Pellipario, 활약기 1525~42), 폰타나(Orazio Fontana, 1510~71) 등 명공(名工)이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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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펠트로가 [Montefeltro family]

고대도시 몬스 페레트리(Mons Feretri)’에서 이름을 땄다. 1316세기에 훌륭한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를 배출하였다. 1234년까지 우르비노를 통치하였으며, 황제와 교황의 투쟁에서 황제편에서 싸웠다. 단테의 신곡<지옥편>에 나오는 구이도 다 몬테펠트로는 1295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게 복종하기까지 로마냐와 토스카나에서 교황에 반대하여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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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들 페데리고는 중부 이탈리아에서 황제파의 명맥을 유지하면서 1332년 반란으로 살해될 때까지 우르비노를 통치하였다. 그의 아들 놀포가 한때 우르비노를 회복하였으나, 결국 교황파에게 넘어갔다. 놀포의 손자 안토니오 때에 가문의 권세를 회복하고, 이웃 도시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고 교황과 화평을 유지, 교황 대리가 되었다. 이를 아들 구이단토니오에게 물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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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교황의 친척 콜론나 가문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동맹관계를 맺었으며, 교황의 지지로 말라테스타 가문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였다. 구이단토니오의 서자 페데리코(142282)는 훌륭한 군사 지도자로 말라테스타와의 항쟁에서 교황군을 지휘, 로렌초 데 메디치의 부하로 고용된 용병반란을 진압하였다. 그는 전쟁에서 모은 돈으로 기념건물 ·도서관 등을 짓고 미술품에 소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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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4년 교황 식스토 4세는 그에게 우르비노 공작 작위를 수여하였다. 그의 아들 구이도발도는 이 가문의 마지막 지배자로, 자식이 없어 조카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를 양자로 삼았다. 그뒤 우르비노 공작의 작위는 프란체스코가문으로 넘어갔다. B.카스틸리오네는 정신론(廷臣論)(1528)에서 문화의 중심지인 그의 궁전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페데리코 · · 몬테펠트로와 바티스타 스포르차

 Portraits of Federico da Montefeltro and Battista Sforza,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작 1465~66

패널에 템페라, 47×33,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명료한 풍경(이 작품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초상화에 풍경이 배경으로 등장하는 초기작의 하나이다)을 뒤로하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이 두 사람은 우르비노의 강력한 통치자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와 그의 아내 바티스타 스포르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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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두 개가 나란히 걸리도록 두폭의 화면으로 제작되었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1415-1492)는 이 그림의 뒤편에 상징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하여 이 두 사람이 각각 승리의 마차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렸다. 피에로가 그린 유일한 초상화로 알려져 있는 이 그림에서 주인공들은 당시 유행하던 르네상스 메달에서처럼 정확한 측면 모습으로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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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적이면서 동시에 이상적인 이 두 사람의 초상은 각각 완벽한 윤곽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페데리코는 밝은 붉은색 궁중 의상을 입고 군주의 지위를 나타내는 모자를 쓰고 있다. 여드름과 코에 마상시합 중 다친 상처가 있는 그의 얼굴이 있는 그대로 묘사되었다. 피에로는 페데리코를 옆모습으로 묘사하여 마상시합으로 심하게 다친 그의 오른쪽 얼굴을 교묘하게 감추었다. 매우 정교한 머리장식, 문직드레스, 반짝이는 진주 목걸이가 실제 같음에도 불구하고, 바티스타의 얼굴은 이 세상 사람의 얼굴 같지가 않다. 이는 화가가 젊은 나이에 사망한 그녀의 데스마스크를 보고 그렸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바티스타는 14세에 페데리코와 결혼했고 11년간 8명의 딸을 낳은 후에 자신의 생명을 아들과 바꾸게 된다. 1472년에 그렇게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났지만 그녀는 6개월 후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초상화의 연대에 대해서 미술사가들의 논쟁은 계속되고 있지만, 이 작품이 페데리코가 그의 아내를 추모하기 위해 주문한 그림임은 분명해 보인다.

 

2. 다양한 놀이 문화의 에스테 가(Este)의 페라라 (Ferrara)

13세기부터 에스테 가의 후원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르네상스 시대의 중요한 문화중심지의 하나로 크게 번창하였다. 또 이때 포 강 하류 삼각주가 매립되고, 계획적인 도시건설이 이루어져, 유럽 최초의 근대도시로 알려지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역사적인 건축물이 많으며, 도시 중심부의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물과 포 강 하류 삼각주는 유네스코(UNESCO)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특히 에스테 성과 대성당이 유명하다. 5세기에 건설되어, 13세기 에스테 가()의 지배 아래 들고 16세기 초 루크레치아 보르지아(Lucrezia Borgia) 시대에는 르네상스 미술 중심지의 하나로서 번영했다. 1135년 빌리제르모에 의해서 기공된 산 조르지크 대성당은 롬바르디아식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으로 되어 있으며, 정면에 있는 12세기의 조각은 비잔틴 양식의 영향이 있고(니콜로 작[]), 종탑은 아르베르티의 설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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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초상 (에스테 가문 공자의 초상)

코즈메 투라 Cosme Tura Cosme Tura (1430년경~1495), 1450 ~ 1452, 목판에 템페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에스테 가(Famiglia Este)

이탈리아의 명문, 르네상스기 펠라라의 통치자. 보르소 에르콜레 1(Borso Ercole I), 알폰소 1(Alfonso , 1486~1534), 에르콜레 2(1508~1559), 알폰소 2(1533~1594) 4대의 학예보호에 의해서 15~16세기의 훌륭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재색겸비한 만토바 후작비 이사벨라 데스데와 그 누이동생, 밀라노 후작비 베아트리체(Beatrice), 리보리의 벨리 데스테의 시주, 추기경 이폴리토(Ippolito)는 동가의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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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테 가문(Este)의 에르콜레 1세 데스테 [ Alfonso I d'Este, 1476. ~ 1534. ]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의 유력한 후원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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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만토바 [Mantova] - 곤자가 가 (Famiglia Gonzaga)

에트루스크 시대로부터 오랜 역사를 가지나 특히 15~16세기에 곤자가 가()의 지배 아래 있었고, 로도비코, 잔 프란체스코, 그의 아내 이사벨라 데스테 등 훌륭한 군주에 의해 풍성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14세기의 카스텔로 산 조르조(만테냐의 장식에 의한 결혼의 방이 유명)와 이사벨라의 서재가 있는 본관을 포함하는 팔라초 두칼레(내부장식 대부분은 16, 18세기), 알베르티가 설계한 산 탄드레아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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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초 두칼레의 천정화, 베로네제, 베니스, 1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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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자가 가 (Famiglia Gonzaga)

이탈리아의 명문으로 르네상스기에서 18세기 초까지의 만토바의 통치자다. 그 궁정은 우아한 습속(習俗)과 거동, 언어로 알려졌고 그 중에서도 프란체스코 곤자가(Francesco Gonzaga, 1460~1519)와 그 비() 이사벨라 데스테의 대에는 학예 보호에 힘써, 그 땅을 당시 가장 교양있고 세련된 곳으로 만들었다. 이사벨라는 또 훌륭한 수집가로서도 알려졌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스필자가가 몰락한 뒤 그곳을 찾아 그녀의 초상을 습작 소묘(1500, 루브르 미술관)하곤 했다. 또 로도비코(Lodovico )에게 초대되어 궁정화가가 된 만테냐는, 팔라초 두칼레의 카메라 델 스포치에 이 곤자가 일가의 생활을 주제로 한 벽화군(1474년 완성)을 남겼다. 

 

이사벨라 데스테 [ Isabella d’Este ]

티치아노 Titian 베첼리오 티치아노 Vecellio Tiziano Vecellio Tiziano (1485/1488~1576), 1534 ~ 1536,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빈 미술사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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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의 외형뿐 아니라 그들의 성품과 사회적 위치를 전달하는 데에 탁월한 솜씨를 지녔던 티치아노 베첼리오는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을 이끈 수많은 군주와 귀족들이 가장 선호한 초상화가였다 그는 고대 조각들의 자세나 제스처를 연구하여 초상화를 그릴 때 참고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인물에게 고귀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부여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5세의 초상(Portrait of Charles )>(1533-34)이나 <페데리코 곤차가 2세의 초상(Portrait of Federico Gonzaga)>(1525) 같은 작품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베네치아 르네상스 미술 특유의 감각적인 색채와 생생한 붓 터치로 그려진 티치아노의 초상화 속 인물들은 마치 실물을 대하는 것과 같은 강렬한 인상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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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4-36년에 제작된 이 작품의 주인공은 이사벨라 데스테(Isabella d’Este, 1474-1539)이다. 만토바(Mantova) 후작부인이었던 이사벨라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문화적, 정치적 이해 관계를 선도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당대의 인문학자들과 활발히 교류할 정도의 상당한 지성을 갖추었다고 전해진다. 흥미로운 사실은 티치아노가 이 초상화를 그릴 무렵의 이사벨라는 이미 60대였지만, 완성된 작품에는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앳된 여성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사벨라는 1511년에 프란체스코 프란치아(Francesco Francia, 1450-1517년경)라는 화가에게 초상화를 주문한 적이 있는데, 그가 그려준 초상화를 다시 티치아노에게 보내 참고하도록 했다. 사실 티치아노도 처음에는 나이가 지긋한 모습의 후작부인을 그렸지만, 그녀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려 40세나 어린 모습으로 다시 그려야 했다고 한다. 물론 이사벨라는 실제보다 훨씬 젊고 아름답게 표현된 두 번째 그림 속 자신을 보고 매우 흡족해 했으며, 티치아노의 손에서 탄생한 초상화가 그 나이에 표현될 수 있는 최상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따라서 이 그림 속 여인은 실재하는 이사벨라의 모습보다는 그녀가 꿈꾸던 이상적인 여성 이미지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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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치아노는 르네상스 시대에 세련되고 영향력 있는 문화를 꽃피웠던 만토바 궁정의 안주인인 이사벨라의 높은 사회적 신분, 미모와 지성을 표현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그는 인물을 치장하고 있는 화려한 세부 요소들을 아름다운 색채와 생생한 질감으로 묘사하였고, 빛과 색채 사이의 미묘한 상호작용은 그러한 물질적 요소의 표현을 한층 고조시켰다. 이사벨라는 금사와 은사로 수 놓인 소매가 달린 호화로운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그 위에 값비싼 모피를 걸치고 있으며, 머리에는 이국적인 느낌의 터번을 쓰고 있다. 화면 상단에서 내려오는 빛을 통해 강조된 얼굴과 살짝 드러난 가슴은 관능미마저 느끼게 한다. 또한 대부분의 티치아노의 초상화 속 인물들은 시각적인 매력을 간직하는 동시에 매우 촉각적인데, <이사벨라 데스테>에서 손으로 만져질 듯한 감각 표현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endif]--> 

 

4. 밀라노 [Milano] - 로도비코 일 모로

예로부터 알프스 이북의 여러 지방과 교통의 요충으로 번창했고중세 말기부터 르네상스 기에는 베스콘티 가()스포르차가()가 지배하는 공국으로 큰 세력을 행사했다. 중세기 이래의 여러 가지 모뉴멘트가 많아 14세기 이후에 착공한 대성당은 이탈리아에서의 고딕 건축을 대표한다. 12세기 완성된 산 탄브로조 성당은 전형적인 롬바르디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브라만테가 개축한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체 성당의 구()수도원 식당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벽화가 현존. 레오나르도와 브라만테가 궁정 기사로 일했던 스포르차 성은밀라노에 있어서 세속건축의 대표이며 현재 그 일부가 미술관(스포르차 성 미술관)이 되었다. (사라 델레 앗세의 레오나르도 천정화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의 피에타등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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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대성당, 이탈리아 고딕의 대표적인 밀라노 대성당의 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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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르차가 [Sforza family]

15세기 중엽~16세기 초 이탈리아의 밀라노를 지배한 귀족. 프란체스코는 용병대장으로서는 전형적인 인물이었고, 한편 문예를 보호 장려하여 밀라노를 북이탈리아 문화의 중심지로 육성하였다. 프란체스코 마리아 때 재차 밀라노공으로 봉해졌으나 독일 황제 카를 5세에게 소유영토가 넘어가게 됨으로써 최후의 밀라노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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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초 아텐돌로(1369~1424)가 그 시조이다. 그는 평민 출신으로 유력한 용병대장이 되었고 나폴리 여왕과 로마교황을 위해 싸워 무공을 세우고 스포르차)의 칭호를 얻었다. 그의 아들 프란체스코(1401~1466)도 용병대장이 되어 무훈을 세웠고 밀라노공 비스콘티의 딸과 결혼하여 밀라노공이 되었으며, 롬바르디아와 북이탈리아를 지배하였다. 프란체스코는 용병대장으로서는 전형적인 인물이었고, 한편 문예를 보호 장려하여 밀라노를 북이탈리아 문화의 중심지로 육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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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들 갈레아초 마리아(1444~1476)는 잔인하고 방탕하여 백성들의 원한을 사 암살되었으며, 그의 아들 잔갈레아초(1469~1494) 때 숙부인 로도비코 일 모로(1451~1508)에게 정권을 빼앗겼다. 로도비코는 처음 조카의 섭정으로 있었으나 그의 지위를 빼앗아 밀라노공이 되었다가 프랑스와 싸워 패배한 뒤 스위스로 도망쳤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로도비코의 아들 막시밀리안(1491~1530)은 밀라노공의 지위를 이어받았으나 프랑스에게 패한 뒤 밀라노를 할양하였다. 그의 아우 프란체스코 마리아(1492~1535) 때 재차 밀라노공으로 봉해졌으나 독일 황제 카를 5세에게 소유영토가 넘어가게 됨으로써 최후의 밀라노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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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암브로조 데 프레디스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베아트리체 데스테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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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도비코 일 모로(Ludovico Maria Sforza, 1452 ~ 1508)

로도비코 스포르짜는 이 시대의 가장 완벽한 군주 유형이었다. 그는 무조건적으로 도덕적인 판단만 들이밀 수는 없는 천연산물처럼 보인다. 그가 취한 수단들의 깊은 부도덕성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것을 사용한 것은 지극히 천진하게 보인다. 누군가가 그에게 목적뿐 아니라 수단에도 도덕적 책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법이라고 설명해주려 한다면 그는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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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암브로조 데 프레디스가 그린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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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모로, 검은 '무어인' 이라는 별명을 가진 로도비코 스포르차는 그 자신의 매력 그리고 그의 음모와 정략이 가득한 생애가 모두 하나의 멋진 이야깃거리이다. 그의 치밀한 정략들과 그의 성공을 보노라면 마치 한편의 잘 짜여진 궁정소설을 읽는 듯하지만, 매력적이면서도 얄밉고 그러면서도 천진한 모습을 보이는 그의 캐릭터가 그가 부정한 방법으로 획득한 권력이 자신을 결박하게되는 그의 말로에 이르면 어느덧 한편의 잘 다듬어진 우화를 읽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 (The Lady with the Ermine)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 패널에 유채, 53.4 x 39.3 cm, 1489~1490, 차르토리스키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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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Lady with an Ermine)은 밀라노의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Ludovico Sforza)의 연인이었던 체칠리아 갈레라니(Cecilia Gallerani)의 초상화로 알려져 있다. 이 그림이 제작된 1490년경은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의 궁정화가로 일하면서 자신의 대표작인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을 제작하고 초상화가로서의 명성도 얻었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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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모델인 체칠리아 갈레라니는 화면 안에서 흰 담비를 품에 안고 있다. 담비는 전통적으로 순수함과 청빈함의 상징이었는데, 이는 레오나르도의 1490년경의 흰 담비의 우의화라는 드로잉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담비가 진창에 자신의 흰 털을 더럽히기보다 차라리 잡혀서 죽는 것을 선택한다는 사람들의 믿음 때문이었다. 갈레라니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담비를 의미하는 갈레를 연상시키는데, 결국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에서 담비는 체칠리아의 분신이며, 그녀의 순결성을 드러내고 역할을 한다. 한편, 흰 담비는 체칠리아의 연인이자 이 그림을 주문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를 의미하기도 한다. 루도비코가 1488년 나폴리의 국왕으로부터 수여 받은 기사 작위의 상징이 흰 담비였기 때문이다. 루도비코의 상징인 담비를 쓰다듬고 있는 체칠리아의 모습이 담긴 이 그림은 두 사람의 연인 관계를 기념하는 공식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E. 문학과 학문의 르네상스

 

르네상스 문학은 중세를 통하여 동로마 제국과 접촉을 가졌던 이탈리아에서 우선 일어나, 전 유럽에 파급되었다. 중세는 그리스·로마 문학에 대하여 그다지 무지하였던 것은 아니고, 특히 13세기에는 고대를 알고자 하는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교를 통하여 본 고대였고, 인간의 육체나 감각을 멸시해온 중세는 고대의 예술미를 인식하는 안목은 지니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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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동무역을 통하여 부를 축적한 북이탈리아 여러 도시의 번영과 더불어 고대예술에 대한 안목이 트이고, 그것을 본보기로 하여 창조하려는 의욕이 강해진 것은 14세기 중반부터였다.이탈리아 인문주의의 세 거장에는 단테, 보카치오, 페트라르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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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는 그 관념에서는 오히려 중세적이며 그리스도교적이었으나, 교회 공용어인 라틴어 아닌 고국의 언어 토스카나어로써 예술적으로 뛰어난 시문을 창조하려 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의 교육과정에 핵심적 요인 세가지는 도미니코회의 위대한 선생이자 작가인 아퀴나스가 죽은 후 그의 연구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단테는 아퀴나스를 수용하고 기독교화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철학에 전념할 수 있었다. 단테의 스승이자 고전학자인 라티니와 그의 스승인 카발칸티의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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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를 이어 나타난 인문학자들은 고대문학에서 문학의 규범을 만들었다.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에서 육욕을 가진,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긍정하고 색정으로부터의 해탈을 주장하는 성직자를 마음껏 비웃었다. 그리고 고대문헌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교도신들의 계보학에서 아교도신들에 대한 상세한 저술은 교회와 충돌하였고, 그는 이교도를 숭배하는 사람들은 단지 재주가 특출한 사람이고, 위업이 반복적으로 이야기 되면서 영원성을 띠기 때문에 위협이 될 만하지 않다고 반박하였다. 그와 시대를 같이하여 나타난 페트라르카는 고대 그리스의 시인 핀다로스의 시풍을 모방하여 이탈리아어로 우수한 서정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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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르네상스을 대표하는 세 가문은 메디치가, 비스콘티가, 스포르차가가 있다. 메디치가는 고전고대의 복구, 교회중축하는 공공사업을 벌였고, 뛰어난 거장을 모두 후원하였다. 비스콘티가는 밀라노를 중심으로 잔인한 정치를 행했으나, 문예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스포르차가는 레오다르도다빈치와 같은 인물을 후원하였다. 인물로는 카스틸리오네와 마키아벨리가 있는데, 카스틸리오네가 르네상스시대의 궁정의 화려하고 우아한 면을 묘사한 반면, 그의 동시대인이던 마키아벨리는 어둡고 좀더 현실적인 그림을 완성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카스틸리오네와는 달리 이상보다는 거칠고 무자비한 세상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에 더 관심이 많았다. 카스틸리오네는 유화적으로, 그리고 마키아밸리는 충격을 주는 방식으로 유용한 정보를 담은 일종의 자기 지침서를 제공하였다. 하였지만 16세기 말이 되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유럽의 패권이 이미 에스파냐로 옮겨짐에 따라 급속히 빛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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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냐 문학의 융성기는 대략 15401680년으로, 이 시기는 르네상스라고 하지 않고 황금세기라고 한다. 7~15세기에 남쪽에서 침입해온 아랍민족과 싸워야 했던 에스파냐는, 국왕이 농민의 힘을 빌려 영주를 억압, 일찍부터 절대주의를 확립하고 있었으며, 이 싸움의 목표였던 그리스도교에 의심을 품는 사람도 없었으므로, 이 시대의 에스파냐 문학 속에는 중세문학의 기사도적 관념과 서민적 사실주의가 뒤섞여 있다. 이 시대의 에스파냐 문학 최대의 걸작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라 할 수 있다. 연극의 베가, 바르카의 이름도 빼놓을 수 없으며, 근대소설 발생에 공이 큰 피카레스크 소설도 이때에 에스파냐에서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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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르네상스는 찬란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문화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프랑스에서의 르네상스문학예술은 물론 종교와 정치를 개혁하는 범사회적의식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탈리아에 갔던 인문학자들이 이탈리아 문학을 들여오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라틴어로 글을 썼지만 라블레가 나타나 프랑스어로 팡타그뤼엘을 써서, 교회와 소르본(파리대학 신학부)의 교조주의 및 위선을 민망할 정도로 조소하였다. 이어 1549년경부터 롱사르를 맹주로 하는 플레이아드 시파가 페트라르카풍의 서정시를 창작하는 운동을 일으켰다. 종교전쟁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문학은 기울기 시작하였으나, 이 어려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서 몽테뉴는 고대의 영지를 밑거름으로 하여 3권의 수상록을 집필, 인간성의 본질을 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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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르네상스는 프랑스와는 달리 이탈리아와의 간접적인 관계라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지리적으로 격리되어 있어 이탈리아 문화를 직접 접할 수 없었다. 네덜란드의 우신예찬의 저자인 에라스무스에 비교되는 인문학자 토마스모어의 유토피아를 탄생시켰으며 엘리자베스 여왕시대에는 연극이 개화, 셰익스피어는 극문학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 벤 존슨은 고대 문호들의 모방원리에 보다 충실한 작품을 쓴 작가이며 대표작으로 햄릿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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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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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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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연대기 (14 ~ 16C)

 

청동기 시대

(3650-1100 BC)

에게 미술

중세 미술

(500 ~ 1500)

중세 초기(Early Middle Ages, 476-1000)

중세 중기(High Middle Ages, 1000-1300)

중세 후기(Late Middle Ages, 1300-1453)

중세의 몰락(1453)

콘스탄티노플의 함락(1453)

인쇄기의 발명(1456)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1492)

종교 개혁(1517)

르네상스

고대 그리스

(1100-146 BC)

고대 그리스 미술 1

고대 그리스 미술 2

고대 로마

(753~476 BC)

로마 황제 연대표

고대 로마 미술 1

고대 로마 미술 - 2

 

비잔틴 제국

(476BC-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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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황제 연대표

십자군 연대표

동방 정교회

라틴제국

비잔틴 미술 - 1

비잔틴 미술 - 2

성서의 가르침을 그림으로 읽는다. - 1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 1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 1

기독교 만 존재한다. - 1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신 보다, 인간의 호기심은 강하다

신이여! 구원하소서!

새로운 세기는 우연히 왔다.

중세 초기 미술

비잔틴미술

로마네스크 미술

고딕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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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문명

(300~1533)

고대 아메리카 미술-1

고대 아메리카 미술-2

고대 아메리카 미술-3

아프리카 미술

(BC 3300~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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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탄생

원시미술 -2

메소포타미아 미술

이집트미술

아프리카 미술-1

아프리카 미술-2

르네상스 (14 ~ 16C)

1. 르네상스(Renaissance)와 종교개혁이 후대에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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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세적 사고가 무너지기 시작하다편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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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