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미술 7 <!--[if !supportEmptyParas]--> <!--[endif]--> 기독교의 팽창 <!--[if !supportEmptyParas]--> <!--[endif]--> 3. 로마네스크 미술 (Romanesque art) - 1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A. 기독교의 팽창과 건축술의 발전 (11~12C)
<!--[if !supportEmptyParas]--> <!--[endif]--> 기원1000년경부터 1200년 사이에 유럽 전역에 걸쳐 유행한 기독교 미술 양식 로마네스크라는 명칭은 로마네스크 건축이 로마 건축에서 파생한 것이라는 뜻에서 프랑스어로 ‘로망’이라는 어휘를 쓰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세습적인 귀족의 힘이 강력해지고 장원 경제가 구축되면서 안정된 전통주의가 200여년간 계속된 시기의 미술 양식이다.
이제까지의 카롤링 . 오토 왕조의 수도원 중심체제에서 순례 교회가 등장함으로써, 교회는 힘이 강대해져 십자군 운동을 벌이고 황제를 파문 시키면서 `전투적 . 권위주의적`으로 된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기독교적 환상세계
10세기 말에서 12세기(지역에 따라서는 13세기)에 걸쳐 고딕 예술에 앞서 중세 유럽 전역에 발달했던 미술양식이다. 로마네스크라는 명칭은 19세기에 처음 쓰여진 말로, 로마네스크 건축이 로마 건축에서 파생한 것이라는 뜻에서 프랑스어로 '로망(roman)'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는 당시의 예술 양식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서로마를 계승한 서유럽의 미술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로마네스크 미술은 형성되었다. 로마네스크 미술은 게르만 민족의 향토적 전통 위에 고대 로마 양식을 받아들여 이루어진 미술로 서로마를 중심으로 발달한 미술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로마네스크 미술을 형성 발전시킨 외적조건은 다음과 같다. 먼저 9-10세기에 서양기독교 세계를 침입한 이적(바이킹 내지는 노르만, 구교도, 마자르족 등)이 각각 그 예봉을 꺾이거나 후퇴하여 카페, 오토왕조가 안정되고 도시나 농촌이 재건설의 시기에 들어 갔던 것, 뛰어난 사교 혹은 수도사들의 지도에 의한 종교문화운동의 발전 특히 클뤼니회 및 시토회의 현저한 활동, 순례(특히 로마 및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에 의한 지역적 교류의 활발화와 기술적 분야에 있어서의 혁신(발의 견인규의 개량에 의한 운송력의 증대) 등 기타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 이시기의 미술품들은 위압적이면서 교화적인 내용이 주류를 이루는데 이는 문맹자들에게 성서 역할을 하며 신자들에 정신적 각성을 주기 위함 이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로마네스크라는 단어는 프랑스어 로망(roman)에서부터 왔습니다. 로망은 공상적, 정열적이라는 뜻이며, 로마네스크란 ‘로마식’이라는 의미로 로마 양식의 흐름을 이어 받았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원래 로마네스크라는 말은, 후에 나타나는 고딕양식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했던 건축용어였으나 점차 조각, 회화와 같은 미술에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로마네스크 미술은 이전의 미술양식과는 다르게 유럽 전 지역에 걸쳐 공통적으로 나타난 첫 번째 미술양식이기도 합니다. 로마네스크 시기에는 ‘성골숭배’라는 특별한 기독교 의식이 생겨났는데, 이는 성인의 유해나 쓰던 물건을 경배하는 의식입니다. 성인들의 유해를 금, 은, 보석 등으로 장식했으며, 이 성골이 기적을 행한다고 믿던 성직자나 시민들이 성골을 찾아 순례 여행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서유럽의 혼재된 로망(roman)
이 양식은 로마 양식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지만 초기에는 각 지방의 문화가 하나씩 혼합되면서 퍼지기 시작한 것이기 때문에 노르웨이의 바이킹, 초기 크리스트교 미술, 비잔틴, 카롤링거, 오토, 심지어는 이슬람 양식들까지 뒤섞이면서 이시기의 일반적인 양식이 된 것이다.
두터운 벽과 아아치형 천장, 작은 창문, 수평적 장중함을 가진 건축 양식이 대표적이며 프레스코 벽화형식의 회화가 그려졌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창은 좁고 벽은 넓어 프레스코 벽화가 발달
로마 건축양식을 본받아 삼각형의 지붕과 아치의 창이 유명하며, 건축양식은 로마 십자형으로 긴 복도가 중앙에 교차된다. 창이 좁고, 벽면은 두꺼워 프레스코화가 유명하며, 조각은 대부분 부조형식으로 나타났다.
광대한 프랑스제국이 분열되고, 노르만인, 사라센인 등의 거듭되는 침입으로 서유럽에 혼란과 공백(空白)이 계속되는 사이에 각지의 봉건제후(封建諸侯)는 세력을 넓혔고, 중앙집권제는 붕괴되었다. 미술활동도 궁정 중심의 전유럽적인 것을 상실하고, 각지에서 부흥한 수도원을 단위로 해서 창조되는 것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따라서 저마다 지방양식이 로마네스크 미술의 특질의 하나가 되게 되었다.
그러나 다양한 지방양식에도 불구하고 일괄된 공통성을 부여해 주고 있는 것은 서유럽에 착실하게 뿌리를 박아가는 기독교 신앙이다. 권위의 상징이었던 종교미술은 수도승의 손으로 구현되어 점차 그림을 통한 교의 해설, 즉 '그림으로 보는 성서'로서의 성격을 나타내게 된다. 그것은 신앙의 대중화(大衆化)로의 과정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각지의 작은 마을에서는 성상(聖像)으로 꾸미고 가꾼 교회가 세워졌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카롤링거 왕조 밑에서는 아헨 성당과 같은 예를 제외한다면 건물의 지붕은 박공 형태의 목조였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은 주요 부분(네이브와 제실)에 석조의 아치 구조를 쓰고 있는 점에서, 종래에 없던 진보의 흔적을 찾을 수가 있다. 이것은 네이브의 양쪽 벽체(壁體) 위에, 부채꼴의 석재를 석회칠로 쌓아올려서 반원형의 통 모양으로 쌓아올린 것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 통 모양의 아치는 천장을 높게 하고 내부 공간을 확대시킬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무거운 돌지붕을 떠받치기 위해서 벽체는 두껍고, 곳곳에 바깥쪽으로부터의 버트리스를 필요로 하였다. 벽체로부터 직각으로 나와 있는 버트리스는 건물의 겉모양에 아름다운 실루엣을 던져주고 있다. 하중(荷重)에 대하여 벽의 강도(强度)를 유지하기 위하여 커다란 창을 만들기는 어려웠고, 따라서 내부 공간은 채광 부족을 면치 못하였다. 이러한 어둠도 당내의 종교적인 통일감을 이루는 데는 유효하였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안팎이 모두 묵직하고 장식이 적은 것이 특색이다. 이 경향은 12세기 이전의 북이탈리아 남프랑스, 카탈로니아 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독일에서는 이러한 영향을 받으면서도 카롤링거왕조의 전통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키고, 탑·세례당(洗禮堂) 등을 종합한 설계의 대형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마인츠, 아우크스부르크 등의 본사원과 마리아 라하 수도원 등이 그 좋은 예이다. 로마네스크 건축은 12세기에 들어와 부르고뉴 지방에서 그 정수를 찾을 수 있다. 오턴, 베즐레의 두 사원은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채광량을 늘리고 내부 공간을 확대하기 위해, 네이브를 높게 하고 아일(側廊)도 아치로 하였다. 여기에서 고안된 교차아치는 후일 고딕건축을 출현시킨 모체가 되었다. 내부는 네이브 측벽을 복층(複層)으로 하고, 그 상부에 높은 창을 가진 형식이 채택되고 있다.
기둥은 굵은 문설주에 주두(住頭)를 붙여 아케이드를 떠받치게 한다. 기둥의 형식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장식주(裝飾柱)가 부가되거나 홈이 파진다. 외관도, 파사드에 장식조각이 새겨지고, 또는 북방에서 발달해 온 탑(塔)이 부착되기도 하여 신의 집 입구에 어울리게 모양을 갖추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로마네스크 복고 고딕 복고 건축이 유행했을때인 19세기 동안 건물들은 때때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디자인되었다. 다수의 로마네스크 복고 양식의 교회들이 존재하며, 1830년대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로마네스크 양식의 육중하고 "거친" 특질이 인식되고 벽돌로 디자인되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다른 한편으로 1879년 알프레드 워터하우스가 설계한 런던 자연사 박물관은 로마네스크 아케이드와 건축적 조각의 장식적인 잠재력을 충분히 사용한 로마네스크 복고 건축물이다. 전체 양식이 건물의 기능과 알맞게 자유롭게 적용되어 로마네스크 외관이 효과를 발휘했다.
예를 들어 현관의 기둥들은 거기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디자인이 더햄 대성당의 디자인과 닮아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여기 새겨진 패턴들의 출처는 종려나무와 소철나무, 열대 양치류 나무의 줄기이다. 많이 찾아볼 수 있는 동물의 모티프는 희귀하거나 멸종된 종들도 포함한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로마네스크 양식이 가장 많이 적용된 근대 건물은 창고인데, 큰 창문들이 적은 것과 강한 힘과 안정성이 느껴지는 외관은 매력적인 특징이다. 보통 벽돌로 된 이건물들은 이탈리아 로마네스크 형식 다음에 자주 더 높은 고도에서 넓은 아치로 올라가는 평평한 버팀벽을 갖는다.
아치사이의 공간을 큰 창문으로 염으로써 상업 건물에 이 양식은 사용된다. 그리하여 본질적으로 근대적인 철제 프레임 구조인 벽돌 벽은 껍질이 되고, 이 양식은 건축가 헨리 홉슨 리처드슨이 자신의 이름을 따, "리처드슨 로마네스크"라고 부른다.
이 양식의 좋은 예는 1885년 H.H.리처드슨이 설계한 시카고에 있는 마셜 필드 스토어와 1887년 윌리엄 프레스턴이 설계한 미국 보스턴에 있는 채드윅 납 공장이다. 이 양식은 천 공장, 제강소, 발전소 등에도 역시 사용된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슈파이어 대성당의 로마네스크 복고적 입면, 건축가- Heinrich Hübsch, 1854–1858.
|
'맑음의 정신병자 > 중세미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세 미술 7 - 3. 로마네스크 미술 (Romanesque art) - 3 (0) | 2013.04.19 |
---|---|
중세 미술 7 - 3. 로마네스크 미술 (Romanesque art) - 2 (0) | 2013.04.18 |
중세 미술 6 - 2. 비잔틴 미술 - 7 (0) | 2013.04.12 |
중세 미술 6 - 2. 비잔틴 미술 - 6 (0) | 2013.04.11 |
중세 미술 6 - 2. 비잔틴 미술 - 5 (0) | 2013.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