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천도교]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인내천[人乃天]을 내세운 근대 민족종교였다. 동학은 농민들을 각성시켜 양반 지배층에 대하여 평등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농민들의 요구는 드디어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으로 나타났다.
동학농민운동은 전봉준 등의 주도로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되어 삽시간에 전국으로 확산되었는데, 특히 전라도 일대에서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비록 동학농민운동은 보수적인 양반층과 일본에 의해 실패하였지만, 그들의 정신은 의병활동.독립운동으로 이어져 대한민국 건국의 밑거름이 되었다.
고부 군수 조병갑은 만석보를 새로 지어 수세라는 명목으로 농민들을 착취하였다. 이에 전봉준이 이끄는 고부 군민들이 1894년 음력 1월 10일 관아를 점령하였다. 그런데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내려온 안핵사 이용태가 주동자들을 체포하자, 농민들이 다시 봉기하였다.
동학농민운동은 전봉준 등의 주도로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되어 삽시간에 전국으로 확산되었는데, 특히 전라도 일대에서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비록 동학농민운동은 보수적인 양반층과 일본에 의해 실패하였지만, 그들의 정신은 의병활동.독립운동으로 이어져 대한민국 건국의 밑거름이 되었다.
고부 군수 조병갑은 만석보를 새로 지어 수세라는 명목으로 농민들을 착취하였다. 이에 전봉준이 이끄는 고부 군민들이 1894년 음력 1월 10일 관아를 점령하였다. 그런데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내려온 안핵사 이용태가 주동자들을 체포하자, 농민들이 다시 봉기하였다.
1894년 4월 6일에는 백산에 모인 동학농민군이 황토현에서 전라감영군 격파하였고, 1894년 4월 7일은 정읍 및 인근 고을을 점령하였다. 1894년 4월 16일은 함평을 점령하였으며, 1894년 4월 22일은 전봉준의 주력부대는 장성으로 진군하여 전주에 주둔하였던 홍계훈의 경군을 유인하여 그 예봉을 꺾고 전주 점령계획을 세웠는데 그 최적장소로 장성황룡을 택하였다.
1894년 4월 23일은 황룡전적지를 중심으로 인근의 삼봉산과 황룡장터 등에서 이학승의 선봉대와 결전하여 관군(경군)을 참패(선봉장 이학승 사망, 대포 2문과 양총 100여점 탈취), 대나무를 원통형으로 엮어 만든 "장태"라는 신무기를 굴려 총알을 막으면서 관군에 육박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관군의 수는 300여명, 동학농민군은 6-7천명이었으며, 관군(경군)이 패주한 이후 동학농민군은 경군보다 먼저 전주로 들어가 전주를 점령하여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이 휴전을 성립시키고 각 고을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농민통치를 하기로 합의하여 역사상 유래가 없는 집강소에 의한 농민통치의 기반을 마련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894년 9월,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과 경제적 약탈을 규탄하며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재봉기를 했다. 서울로 진격하던 농민군은 오금치에서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군과 맞섰다. 일단 우금치를 장악하면 중부지역의 거점인 공주 점령의 기선을 잡을 수 있는 중요한 곳이었다.
공주를 중심으로 향후 전쟁을 이끌어 나가려던 동학농민군은 죽검으로 총에 맞서 싸우다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거의 전멸하게 되었다. 우금치 싸움 후, 재기를 노리던 전봉준이 체포되어 이듬해 3월 처형됨으로써 1년 동안 전개된 동학농민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