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라는 교통 수단은 근대화의 상징이다. 철도는 단순한 하나의 교통 수단이 아닌 근대를 경험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 역사가는 ‘철도의 도래는 그 자체가 혁명적인 상징이자 혁명적인 성취’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우리나라 철도의 시작을 근대 문명의 축복으로서 기억하기 보다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대륙 침략을 수단이자 도구로 기억하게 된다.
19세기 말 개항 직후 일제는 남몰래 밀정을 파견하여 서울과 부산 사이의 지형, 교통 따위를 샅샅히 조사했다. 그 목적이 대륙 침략의 전진 기지와 식민지 시장의 확보를 위한 전초 작업이었음은 물론이다.
1894년 경인선과 경부선의 철도 부설권을 따낸 일제는 1899년 노량진과 인천 사이에 경인선 철도를 놓았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놓인 철도이다. 1905년에는 서울과 부산 사이에 경부선 철도를 놓았는데, 경부선 개통 이후에는 12009-02-1806년 경의선을 완공하였다. 이로써 한반도의 남단 부산부터 만주에 이르는 간선을 완공한 셈이었다.
1910년 합방 이후로 일제는 조선총독부 아래 철도국을 설치하여 식민지 착취를 위한 철도망의 확장에 박차를 가했는데, 한일병합 이후 1914년 건설된 호남선(대전-목포)과 경원선(서울-원산), 함경선(원산-영흥) 등은 식량과 광물을 수탈하는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 됐다.
1945년 광복 당시 일제에 의해 건설된 철도의 총길이는 무려 6,342km에 달하였으며, 지금도 우리나라의 철도는 KTX와 지하철을 제외한 80%가 일제 강점기에 건설되었고, 북한의 경우는 99%가 일제 때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철도는 국민 생활 전반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한 예로 도시의 성쇠도 철도에 따랐다. 가령 경부선과 호남선 분기점에 자리 잡은 대전은 신흥도시로 급성장하였고, 충청권의 행정, 상업, 교통 중심지였던 공주는 철도 노선에서 멀어지면서 급격히 쇠락했다.
개화기부터 해방 전후까지 축조된 건물이나 시설물 가운데 보존할 가치를 인정받아 지정하고 있는 등록문화재 320개(2007년 현재) 가운데 철도와 관련된 것이 33개, 무려 10퍼센트가 넘는 것을 보아도 근대 교통의 대표격인 철도 역사와 문화가 우리나라 근대 역사와 문화에 걸친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철도가 육로상의 근대 교통을 대표하는 주자라면 해운상 근대 교통의 중심에 서 있었던 것은 기선이다. 해상 교통의 길잡이가 되었던 등대, 우리나라 등대의 역사 역시 철도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를 넘보았던 일제의 대륙 침략과 수탈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근대사의 산 증인이 되고 있는 근대 교통과 관련된 문화유산은 비록 시선을 확 잡아끄는 건축물이나 시설물은 아니지만, 100여 년이란 역사를 담고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 의미가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