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서울 정동은 태조의 두 번째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묘인 정릉이 있어 정릉동이라 불렸으며, 조선 중기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주로 피난 갔다가 서울로 돌아온 선조가 정동에 있는 월산대군의 집(경운궁, 현재의 덕수궁)을 행궁으로 삼아 머물면서 역사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덕수궁과 정동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조선 말 개화기 이후이다.
조선은 1876년 문호 개방에 대한 준비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과 불평등하게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고, 이를 계기로 강압적인 태도로 문호를 개방을 요구해오던 미국(1882년), 영국(1882년), 독일(1882년), 러시아(1884년), 이탈리아(1884년), 프랑스(1886년) 등 서양의 강대국들과 차례로 통상 조약을 맺었다. 갑작스레 문호가 개방되면서 급물살을 타며 거침없이 흘러들어온 서구의 문화와 문명은 500년 왕조 사회를 유지해온 조선 사회에 상당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아관파천(1896년) 이후 고종은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로 경운궁을 대한제국의 본궁으로 삼아 그 규모로 꾸준히 늘려나갔다. 고종이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을 택한 것은 이곳이 여러 열강의 공사관이 밀집한, 그리하여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조금쯤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곳이라 여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종은 헤이그밀사사건의 책임을 지고 일본에 강압에 의해 황제의 자리를 순종에게 물려준 뒤 경운궁에서 그대로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경운궁은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로 불리게 된 이유이다.
본격적인 개화의 급물살 속에 정동은 서구 열강이 세력을 다투는 각축장이 되기도 하였지만
외국 공관 이외에도 선교사 등이 들어와 종교 건축물 또는 공공시설, 상업 시설과 주택을 짓기 시작하였다. 당시 정동은 ‘서울 속의 이국(異國)’이 되었던 셈이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에도 근대적인 서양식의 건축물들이 속속 지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는 근대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훼손되고, 또 재개발로 많은 근대 건축물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근대 건축물이 가장 많이, 그리고 밀집되어 남아 있는 곳이 구한말 개화기 파란만장한 역사의 무대가 되었던 덕수궁과 정동 일대이다.
덕수궁 돌담길을 기점으로 정동길을 따라 걸어가며, 근현대 시기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근대의 건축물들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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