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밥 먹고 도시여행

구한말 역사의 현장

草霧 2013. 4. 15. 12:56

 

 

 

 

 

 

 

 

 

 

 

 

 

 

 

 

 

 

 

구한말 역사의 현장

 

조선 초기 서울 정동은 태조의 두 번째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묘인 정릉이 있어 정릉동이라 불렸으며, 조선 중기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주로 피난 갔다가 서울로 돌아온 선조가 정동에 있는 월산대군의 집(경운궁, 현재의 덕수궁)을 행궁으로 삼아 머물면서 역사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덕수궁과 정동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조선 말 개화기 이후이다.


조선은 1876년 문호 개방에 대한 준비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과 불평등하게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고, 이를 계기로 강압적인 태도로 문호를 개방을 요구해오던 미국(1882년), 영국(1882년), 독일(1882년), 러시아(1884년), 이탈리아(1884년), 프랑스(1886년) 등 서양의 강대국들과 차례로 통상 조약을 맺었다. 갑작스레 문호가 개방되면서 급물살을 타며 거침없이 흘러들어온 서구의 문화와 문명은 500년 왕조 사회를 유지해온 조선 사회에 상당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덕수궁 정현관 | 구 대법원 청사 | 정동교회
개화기의 정동은 서구 세력들이 밀려와 자리 잡고, 이들을 통해 서구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그야말로, 다국적, 다민족이 모여 새로운 문물과 지식을 쏟아내는 신세계가 되었다. 당시 정동에는 러시아, 미국, 프랑스, 영국 등 여러 나라 공사관을 비롯하여, 근대화된 의료, 학교 종교 시설 등이 밀집해 있었다.

 
한편, 아관파천(1896년) 이후 고종은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로 경운궁을 대한제국의 본궁으로 삼아 그 규모로 꾸준히 늘려나갔다. 고종이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을 택한 것은 이곳이 여러 열강의 공사관이 밀집한, 그리하여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조금쯤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곳이라 여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종은 헤이그밀사사건의 책임을 지고 일본에 강압에 의해 황제의 자리를 순종에게 물려준 뒤 경운궁에서 그대로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경운궁은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로 불리게 된 이유이다.

 
본격적인 개화의 급물살 속에 정동은 서구 열강이 세력을 다투는 각축장이 되기도 하였지만
외국 공관 이외에도 선교사 등이 들어와 종교 건축물 또는 공공시설, 상업 시설과 주택을 짓기 시작하였다. 당시 정동은 ‘서울 속의 이국(異國)’이 되었던 셈이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에도 근대적인 서양식의 건축물들이 속속 지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는 근대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훼손되고, 또 재개발로 많은 근대 건축물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근대 건축물이 가장 많이, 그리고 밀집되어 남아 있는 곳이 구한말 개화기 파란만장한 역사의 무대가 되었던 덕수궁과 정동 일대이다.


덕수궁 돌담길을 기점으로 정동길을 따라 걸어가며, 근현대 시기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근대의 건축물들을 만나보자.

 

덕수궁 정관헌

목조와 붉은 벽돌을 사용하여 단층으로 지은 건축물인데, 서양식 건물이라고 하나 팔짝지붕 등 전통 목조 건축의 요소도 적지 않지 않고, 어딘지 중국풍이 느껴지기도 한다. 러시아 건축가인 사바틴이 절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초에는 화랑을 가진 건축물로 지어졌으나, 후세에 변형되었다.
탐방하기지역보기-(등록문화재 제82호) 서울 중구 정동 5-1
 
덕수궁 중명전

지하 1층, 지상 2층의 러시아식 벽돌 건물인 중명전은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의 설계로 1897년 건립되기 시작하여 1901년 완공되었다. 본래 대한제국의 황실도서관으로 지어졌으나, 1904년 덕수궁에 대화재가 발생한 뒤로는 고종황제의 편전이자 외국 사절의 알현실로 사용되었다.
탐방하기지역보기-(사적 제124호) 서울 중구 정동 5-1
 
성공회 성당

외벽의 기초부와 뒷면 일부에는 화강석을 쓰고, 나머지는 벽돌을 사용한 로마네스크(로마풍이라는 뜻의 건축 양식으로 8세기~13세기 초 유럽에서 발달한 건축 양식) 양식의 서양 건축인데, 지붕(기와)와 창문(격자 무늬)과 전통의 한옥 방식이 채용되어 동서 양식이 어울린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탐방하기지역보기-(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5호) 서울 중구 정동 3번지
 
구 대법원청사

조선말에는 이곳에 평리원(한성재판소)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인 1928년 그 건물을 헐어내고 새로 경성재판소를 지었다. 이 건물이 광복 후에 대법원으로 사용되었고, 대법원이 1995년 서울 서초동으로 이사가면서 대법원청사는 2002년 리모델링을 거쳐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재탄생하였다.
탐방하기지역보기-(등록문화재 제237호) 서울 중구 미술관길 30 (서소문동 37)
 
정동교회

정동교회가 세워진 것은 1897년 10월, 무려 그 역사가 100년을 훌쩍 넘는다. 지금은 붉은 벽돌을 쌓아올리고 곳곳에 아치 모양의 창을 낸 소박한 건물이지만, 건축 당시에는 무척이나 이국적이었을,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 교회당이다.
탐방하기지역보기-(사적 제256호) 서울 중구 정동 34-3
 
배재학당

배재학당 교사는 준공 당시 지상 1층, 반지하 1층의 구조를 가진 아담한 르네상스식 벽돌집이었는데, 1층에는 강당(예배당)과 도서실, 학장식과 4개의 교실이 들어섰고, 반지하에는 고학생들이 학비를 마련할 수 있도록 산업부를 배정하여 실업 교육을 실시 하였다.
탐방하기지역보기-(서울시 기념물 제16호) 서울 중구 정동
 
러시아공사관

러시아공사관은 준공 당시 석재와 벽돌을 혼용하여 지은 2층 벽돌 건물이었으나, 한국전쟁으로 건물이 심하게 파괴되어 탑과 지하2층만 남아 있던 것을 1973년 현재의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탐방하기지역보기-(사적 제253호) 서울 중구 정동 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