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미술Ⅲ, A.예루살렘을 사수하라 - 1부.십자군 전쟁(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草霧 2013. 3. 28. 08:23

 

 

 

 

중세 미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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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과 이슬람 부흥 그리고 문명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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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야욕이 신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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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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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재 글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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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미술, 1부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편에서는 3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십자군 전쟁 ”, “2부 이슬람의 부흥”, “3부 문명충돌 로 기독교의 광기와 무슬림의 충돌을 통하여, 문명충돌과 미술의 진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참고로, “2. 이슬람의 부흥편은 본 저의 서양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3 (오리엔탈리즘 편)을 참조하세요.

 

1. 십자군 전쟁

2. 이슬람의 부흥

3. 문명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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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십자군 전쟁 (CRUSADE, 1095-1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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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콩키스타 (Reconquista, 718-1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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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르몽 교회회의 (Council of Clermont, 1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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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 십자군 (1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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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십자군 원정 (1096-99)

니케아(1097) 도릴라이움(1097) 안티오키아(1097~1098) 마라트 안-누만(1098) 예루살렘(1099) 아스칼론(1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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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국가의 성립 (1098-1291)

아제르 상귀니스(1119) - 몽기사르(1177) - 이나브(1149) - 하틴(1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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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십자군 원정 (1147-49)

리스본 공방전 (1147) - 다마스쿠스 공방전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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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십자군원정(1189-92)

예루살렘의 공방전 (1187) - 아크레 공방전 (1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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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 십자군 (발트 십자군, 1193-1236)

독일 십자군 (1096) - 웬드 십자군 (1147) - 리보니아 십자군(Livländischen Kreuzzug 1198~1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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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십자군원정 (1202-4)

콘스탄티노플 약탈(1203-04) - 라틴 제국(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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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비 십자군 (Albigenses Crusades 알비파 십자군, 1209-29)

도미니코회와 종교재판 (1223 ~1255) - 퀘리부 함락과 종결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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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십자군 [Children's Crusade]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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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차 십자군원정(12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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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러시아 십자군 원정 (1217-83)

1차 프러시아 십자군 (1217~1228) - 2차 프러시아 십자군 (1230~1283) - 프러시아의 정복 (1237~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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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차 십자군원정(1228-40)

예루살렘 탈환(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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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틱 북 십자군 전쟁 (123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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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차 십자군원정(1248-52)

티발 1세 십자군(1239) - 예루살렘 포위 (1244) - 라 포르비에 전투 (Battle of La Forbie,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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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십자군 (1268~1303)

프랑크 - 몽골 연합 (Franco - Mongol alliance1271) - 아크레 공방전 (Siege of Acre, 1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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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기들 십자군 (Shepherds Crusade, 1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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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차 십자군 원정(1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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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차 십자군 원정(127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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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고네스 십자군(1284-85, 일명 아라곤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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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 십자군(1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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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헝가리 전쟁(1526-52), 니코폴리스 십자군 (1396)

니코폴리스(1396, Bitka pri Nikopol) 바르나 코소보 베오그라드 바슬루이 브레드필드 오트란토 크르바바 평원 모하치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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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르(Tatarlar) 십자군 전쟁 (1398-99)

레그니차 전투(Bitwa pod Legnicą,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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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스파 십자군 (Hussite, 14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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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 십자군 전쟁 (144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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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나 십자군 (Crusade of Varna,1444-48)

바르나 전투(1444) -2차 코소보 전투 (második rigómezei csata,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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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란토 십자군 (1480-81)

오트란토 전투(Battle of Otranto, 148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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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십자군 (1529)

(Vienna) 공방전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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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판토 십자군 (Battle of Lepanto, 1571)

레판토 해전 (Proelium Lepanthinum, 1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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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합스부르크 십자군 (1663)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아랍 사람들은 십자군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프랑크인(les Francs)들의 전쟁 내지는 침략이라고 말한다. 겉으로는 아랍 세계가 눈부신 승리를 거둔 것으로 보였다. 서유럽인들이 연이은 침공으로 이슬람이 뻗어 나가는 것을 억제할 생각이었다면 그 결과는 완전히 반대로 나타났다.

 

무슬림들은 프랑크 국가들의 2세기에 걸친 동방 식민 지배를 완전히 뿌리뽑는 데 그치지 않고, 오스만 투르크의 깃발 아래 서유럽을 정복하러 다시 나설 만큼 세력을 회복한 것이다.

 

1453, 콘스탄티노플이 그들의 손에 떨어진다. 1529년에는 오스만 투르크 기병들이 베네치아 코앞까지 몰려왔다. 십자군 전쟁 동안 에스파냐에서 이라크에 이르는 아랍 세계는 아직은 지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가장 앞선 문명의 보고였다. 그러나 나중에 세계의 중심은 결정적으로 서쪽으로 옮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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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에 들어서면서 예언자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할 권한을 잃었다. 실제로 그들을 통치했던 지배자들은 하나같이 이방인들이었다. 앞장서서 프랑크인들과 싸웠던 실권자들-장기, 누르 알 딘, 쿠투즈, 바이바르스, 칼라운-은 투르크족이었다. 알 아흐달은 아르메니아 출신이었고, 시르쿠, 살라딘, 알 아딜, 알 카밀은 쿠르드족이었다. 물론 이들이 문화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아랍에 동화된 인물들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1134년에 술탄 마수드가 칼리프 알 무스타르시드와 회담할 때 통역관을 대동해야 했다는 점을 상기해 보자.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그 일족이 80여 년이나 다스렸지만 셀주크 왕은 아랍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몰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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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인들은 7세기에 벌써 꽃피기 시작한 그들의 문화적 부흥을 계속 이어갈 수 없었다. 프랑크인들이 들어올 즈음에 그들은 이미 과거에 얻은 것에 만족하며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었다. 비록 이 새로운 침입자들에 비한다면 그들은 거의 전 영역에서 앞서 가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쇠락은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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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인들의 두 번째 '결함'은 확실한 제도를 구축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동방으로 들어오던 무렵 프랑크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국가의 틀을 갖추고 있었다. 예루살렘만 보아도 권력의 계승이 대체로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왕국의 평의회가 단일 군주의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성직자의 역활도 인정받고 있었다. 무슬림의 나라에서는 그러한 장치가 없었다. 군주가 죽으면 항시 그 권력이 위협당했으며, 무슬림 국가치고 계승 전쟁에 휘말리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재물의 약탈과 권력이 중심

십자군전쟁이라면 서양중세에 벌인고결한 성지회복운둥으로 생각한다. 기독교인들의 성스러운 전쟁...중세기 교황의 권력과 서방제후들이 권력을 과시하기위한 노력의 일환이 십자군 전쟁으로 나타난 것이다.

 

성지회복이란 본래의 목적이 제대로 달성된 건 1차원정뿐이다.제 4차 십자군들이 베네치아상인들의 꼬임에 빠져 동로마제국을 공격하고 라틴 제국을 세운 일은 역사에서도 어처구니없는 일로 평한다.

 

그들은 기사도자체의 성지회복보다 재물의 약탈과 권력이 중심이었다.

 

 

 

사자왕 리처드

탐욕,허세,잔인무도함

대상을 약탈한 일도 그렇지만 전리품의 분배를 놓고 프랑스왕과 다툰 일도 우습다. 십자군들이 유대인과 이슬람인들을 잔인무도하게 학살한 일도 기사동와는 거리가 멀다. 잔인함에 이슬람못지않앗다.투석기에 돌대신 유대인과 이슬람인들의 머리를 베어쓴 것을 보면,더 웃기는 건 수도사-종군신부들이 이런 야만적행위를 신의 이름으로 찬미한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이교도라고 경멸하던 이슬람인들이 더 관용적이고 기사도정신이 있었다. 성지를 차지하고도 순례자를 받아들인 것이나 학살이나 약탈을 자제한 것은 흔히 반월도를 휘두르며 닥치느 대로 베고 지나는 유목민-이슬람인들의 이미지와는 상반대다.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

살라디니 왜 아랍세계에 자주 동명이인으로 나오는 지 알겠다. 본디 기사도란 약자를 보호하는 정신인데 아랍에서 유래되어 전파되었다고 한다. 서양사중심의 사관이 십자군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그들의 위선을 덮었는지 생각해 볼 문제다.

 

 

단순히 유럽문명과 아랍 문명의 충돌도 아니고, 성전(聖戰)으로 치부해 버리지도 않고 그 내면에 깔린 보다 복잡다단한 이유들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였다. 9.11 사태 이후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이제 이라크 전쟁 이후 파병 문제를 비롯하여 매일 매일의 뉴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아랍세계.

 

이슬람과 십자군전쟁 

십자군전쟁의 당사자인 아랍계 이슬람인과 과거에는 이슬람은 아니었으나,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이었다가 점차 서진하여 유럽/이슬람 역사에 등장하게 된 투르크인 입니다.

십자군 전쟁이 발생하게 된 먼 원인으로 중앙아시아(돌궐의 후예) 유목민족이 민족대이동을 하게 되면서 (부수적인 현상으로 전통 이슬람 칼리프 지도자시대에서 슐탄의 세속지도자 시대로 변하고) 이 투르크인이 워낙 용맹하여 셀주크 투르크가 이슬람 세계를 통일한 것을 넘어서 비잔틴 제국을 압박하여 과거 칼리프시대에 비잔틴 제국이 상실한 북아프리카,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를 넘어서 비잔틴제국의 중심지였던 아나톨리아(소아시아) 반도가 북서부 일부를 제외하고 투르크의 땅이 됩니다(아나톨리아 나머지지역과 발칸반도는 나중에 오스만투르크에게 점령되지요). 비잔틴 제국의 쇠락이 분명한 현실이 된 것이고 이후 비잔틴 제국은 멸망의 길을 가게 됩니다. 이 셀주크투르크 전성기에는 투르크족이 워낙 용맹하여 아무리 무식하고 싸움 잘하는 것으로 유명한 서유럽인(게르만 프랑크족 ** 역주 : 이슬람인은 십자군전쟁 이라고 하지 않고 프랑크전쟁이라고 부릅니다.)들도 숨죽이고 가만히 있을수 밖에 없었는데, 이 셀주크 투르크가 분열되기 시작합니다.

 

 

 

실제 십자군 기사 1명은 아랍인 10과 싸워서 이길수 있는 전사들입니다. 아나톨리아 반도를 어렵게 통과한 다음 파죽지세로 시리아 지역을 점령하다가 시리아 한도시 마라에서 격렬한 저항을 만나게 됩니다. 여러달 간의 격전 끝에 도시의 비축물자가 바닥날 때 점령되는데 십자군 역시 여러달 동안 이곳의 전투에 발이 묶여서 약탈행위도 못하였으니 십자군의 식량도 다 떨어졌습니다. 이 십자군들이 거의 모든 도시사람을 잡아서 다 식용으로 합니다.

 

현재에도 전하여 오는 이기록에는 “사람은 물론 개마저 잡아 먹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이전투 다음에 예루살렘까지 점령합니다.

당시 서유럽은 이탈리아를 빼고는 게르만족이 지배계층이라서 야만인들 수준이고, 중동은 비잔틴 제국시절을 거치고 또 이스람지역이라서 중국과 쌍벽을 이루는 문명지역입니다. 이집트 수학/과학, 그리이스 철학, 인도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남아서 발전한 지역입니다.

이슬람의사가 초청 받아 왕진을 하였는데 프랑크기사가 발에 종기가 심하여 고약을 바르고 치료를 하고 나오는데, 마침 프랑크 의사가 도착하여 진찰하고 한 말이 “한발만 가지고 살고 싶으냐, 아니면 두발을 가지고 죽고 싶으냐, 결정을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사가 한발만으로도 살고 싶다고 하니, 옆에 있던 다른기사에게 도끼를 가져와서 다리를 짜르게 합니다. 그런데 불행히 한번에 완전히 짤라지지 않자 그 위를 더 힘껏 내리처서 한번에 짜르라고 지시합니다. 그런데 2번째는 완전히 짤라지긴 하였는데 출혈이 너무 심하여 기사가 죽고 말았는데, 그 이슬람의사의 말이 “저렇게 무식한 것들이 전쟁터에서는 어떻게 그리 용맹하여 싸움을 잘하여 이슬람 전사 여러명이 프랑크 기사 1명 상대하는 것이 힘드니.......”

두 번째 기록은 십자군 기사들은 그야말로 흉악 무도해서 사람 죽이는 것을 파리 죽이듯이 하는데 십자군의 장기적인 통치하에 이슬람인들이 그들 밑에서 경작을 하고 세금을 내면서 약탈 위험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많은 이슬람 사람들은 서유럽인의 계약과 계약사항을 존중하는 시스템을 알게 됩니다.


후세의 많은 이슬람 역사가 들이 서유럽이 프랑크 전쟁에서 약탈하여간 기술, 학문, 과학을 발전시키고 이를 토대로 엄청난 발전을 할 수 있었던 기초적인 사회시스템에 대하여는 야만인들이지만 이슬람보다 우월했다고 합니다.

 

십자군 전쟁은 1096년 부터 약 200년 동안 모두 10차례의 원정전쟁

1차 1096~99, 2차 1147~49, 3차 1189~92, 4차 1202~04, 5차 1217~21 6차 1228~29, 7차 1248~54, 8차 1270 9차 1271~72, 10차1272~91

중세시대 전쟁의 양상은 평지 전투보다는 성을 의존해 싸우는 형태였다.성과 더불어 중세전쟁에 큰 영향을 준 다른 요인은 교회였다.교회는 기사들이 신사도에 입각하여 싸우도록 함으로써 전쟁의 성격을 제한전쟁화 했으며, 교황의 허락을 얻어서 이른바 '정의의전쟁'을 해야만 많은 사람들로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강력한 교권하에 십자군원정의 빌미가 된 것은 1071년 비잔틴 군대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과격한 이슬람교도의  셀주크 투르크족(터키)들이 크리스트교도들의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금지시킨 것이다. 예루살렘은 유태교,크리스트교,이슬람교도들에게 공통의 성지가 있어 이교도들이 성지순례를 하면서 충돌이 벌어지기 쉬운곳이었다.

비잔틴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1세는 교황 우르반2세에게 지원요청을 했으나, 교황은 자기를 지지하는 군대가 게르만 제국 군대와 격돌 하고 있어서 지원을 하지못하다가,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를 개최하고 성지탈환을 위한 십자군 파병을 제창했다. 서유럽은 내란을 겪고있는 독일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국가가 원정군 편성에 가담했다.


그렇게 큰 호응을 한데는 종교 외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서유럽은 100년이상 인구가 급팽창했으며, 그에 반해 농업생산은 제자리 걸음이였고, 특히 1094년 흉년이후 기근 현상은 심각해졌다. 농부들은 농노의 신분을  벗어나기 위해 군인이 되고, 베네치아와 제노바 상인들은 비잔틴 제국의 붕괴나 십자군 원정을 돈벌이의 호기로 여겼다.

마침내 1097년 봄 3만명의 십자군 전사들은 보스포루스해협을 건넜다. 사라센 인들은 각 세력이 서로 불신하고 단합을 이루지 못한 상태였기에 1차원정은 성공적이었다. 십자군 전사들은 보급문제로 고생했지만, 투르크 군대를 무찌르고 안티오크,예루살렘,자파등 주요 도시들을 잇달아 함락시켰다. 전쟁에 승리한 십자군은 성지와 점령지를 방어해야했고, 방어할 군사들만 남겨 놓고 대부분의 원정군은 고국으로 돌아갔다.

십자군 원정은 2차 때부터는 실패로 돌아갔다. 1차때와 같은 정열이 식고 각국 전사들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가운데 계속적으로 분열되었다. 한편 이슬람 측은 살라딘과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일하고 조직적인 군사세력을 구축했으며, 지하드, 즉 크리스트 교와의 성전을 보다 철저히 준비했다.

십자군의 중추인 기사들은 점차 점령지 인근 지역의 용병들로 보충되었고 그들의 무장은 보다 복잡하고 무거워 졌다. 쇠미늘 갑옷은 무릎까지 내려오고, 다리와 양손은 별도의 사슬 갑옷으로 보호하고 장방형의 방패를 휴대했으며, 투구는 정수리부분이 편평한 철제 원통형으로 머리 전체를 덮고 안면 쪽에 내다보고 숨쉴 수 있는 구멍만 열어 놓았다. 말은 특별히 양육된 것으로 쇠미늘 갑옷으로 보호 되었다고, 주무기인 창은 보다 길어졌다. 이와같이 중무장한 중기병은 집단전투보다 각개전투로 공격이 이루어졌고, 보병은 보조역할을 했고, 보병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궁수와 석궁수였다.

사라센 군대의 주력은 경기병으로서 십자군 기병보다 가볍게 무장하고, 말은 더 빠르고 몰기가 쉬웠으며, 주무기로 활을 사용하고 그밖에 작고 둥근 방패와 창과 칼을 소지했다.

사라센 군은 우수한 기동성을 활용하여 행군 중의 십자군에 대하여 끊임없이 기습 공격을 펼쳤다. 십자군의 중기병과는 격돌을 기피하면서 치고 빠지는 전술을 활용해 적을 괴롭혔다.

십자군은 적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상태에서 방어에 치중 했으며, 성에서 멀리 떨어진 야전의 위험을 피하는 전략으로 사라센 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후에도 십자군 원정은 계속되고, 어느때는 예루살렘을 재 탈환하기도 했지만, 이미 십자군 원정의 황금기는 지나고, 원정의 목적을 망각한 채 콘스탄티노플에 군대를 끌고 가서 황제의 자리를 빼앗는 등 정상에서 벗어난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약 200년에 걸친 원정전쟁은 결국 실패로 끝이 났다.


십자군 원정은 경제 및 문화적으로는 유럽 인들이 새로운 세계에 대해 눈을 뜨게 하는데 기여했으나, 교황권력이 약화 되면서 자연히 왕권이 강화 되었다.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의 영원한 대립으로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