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미술Ⅲ, A.예루살렘을 사수하라 - 1부.십자군 전쟁(십자군 전쟁의 실패)

草霧 2013. 3. 26. 15:27

 

 

 

중세 미술 3

 

십자군 전쟁과 이슬람 부흥 그리고 문명충돌

 

. 인간의 야욕이 신을 닮았다.

 

A.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본 연재 글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미술, 1부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편에서는 3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십자군 전쟁 ”, “2부 이슬람의 부흥”, “3부 문명충돌 로 기독교의 광기와 무슬림의 충돌을 통하여, 문명충돌과 미술의 진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참고로, “2. 이슬람의 부흥편은 본 저의 서양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3 (오리엔탈리즘 편)을 참조하세요.

1. 십자군 전쟁

2. 이슬람의 부흥

3. 문명충돌

 

 

1. 십자군 전쟁 (CRUSADE, 1095-1270)

   

레콩키스타 (Reconquista, 718-1492)

 

클레르몽 교회회의 (Council of Clermont, 1095)

 

군중 십자군 (1096)

 

1차 십자군 원정 (1096-99)

니케아(1097) 도릴라이움(1097) 안티오키아(1097~1098) 마라트 안-누만(1098) 예루살렘(1099) 아스칼론(1099)

 

십자군 국가의 성립 (1098-1291)

아제르 상귀니스(1119) - 몽기사르(1177) - 이나브(1149) - 하틴(1187)

 

2차 십자군 원정 (1147-49)

리스본 공방전 (1147) - 다마스쿠스 공방전 (1148)

 

3차 십자군원정(1189-92)

예루살렘의 공방전 (1187) - 아크레 공방전 (1191)

 

북방 십자군 (발트 십자군, 1193-1236)

독일 십자군 (1096) - 웬드 십자군 (1147) - 리보니아 십자군(Livländischen Kreuzzug 1198~1290)

 

4차 십자군원정 (1202-4)

콘스탄티노플 약탈(1203-04) - 라틴 제국(1204)

 

알비 십자군 (Albigenses Crusades 알비파 십자군, 1209-29)

도미니코회와 종교재판 (1223 ~1255) - 퀘리부 함락과 종결 (1245)

 

소년십자군 [Children's Crusade] (1212)

 

5차 십자군원정(1217-21)

 

프러시아 십자군 원정 (1217-83)

1차 프러시아 십자군 (1217~1228) - 2차 프러시아 십자군 (1230~1283) - 프러시아의 정복 (1237~1241)

 

6차 십자군원정(1228-40)

예루살렘 탈환(1229)

 

발틱 북 십자군 전쟁 (1238-40)

 

7차 십자군원정(1248-52)

티발 1세 십자군(1239) - 예루살렘 포위 (1244) - 라 포르비에 전투 (Battle of La Forbie, 1244)

 

후기 십자군 (1268~1303)

프랑크 - 몽골 연합 (Franco - Mongol alliance1271) - 아크레 공방전 (Siege of Acre, 1291)

 

양치기들 십자군 (Shepherds Crusade, 1269)

 

8차 십자군 원정(1270)

 

9차 십자군 원정(1271-72)

 

아라고네스 십자군(1284-85, 일명 아라곤 십자군)

 

알렉산드리아 십자군(1365)

 

오스만-헝가리 전쟁(1526-52), 니코폴리스 십자군 (1396)

니코폴리스(1396, Bitka pri Nikopol) 바르나 코소보 베오그라드 바슬루이 브레드필드 오트란토 크르바바 평원 모하치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

 

타타르(Tatarlar) 십자군 전쟁 (1398-99)

레그니차 전투(Bitwa pod Legnicą, 1241)

 

후스파 십자군 (Hussite, 1420-34)

 

발칸 십자군 전쟁 (1444-56)

 

바르나 십자군 (Crusade of Varna,1444-48)

바르나 전투(1444) -2차 코소보 전투 (második rigómezei csata, 1448)

 

오트란토 십자군 (1480-81)

오트란토 전투(Battle of Otranto, 1480-81)

 

빈 십자군 (1529)

(Vienna) 공방전 (1529)

 

레판토 십자군 (Battle of Lepanto, 1571)

레판토 해전 (Proelium Lepanthinum, 1571)

 

오스만-합스부르크 십자군 (1663)

 

십자군 전쟁의 실패

    

십자군이라는 사건은 서구사(西歐史)의 내부에서 본다면, 가톨릭 '교권'의 신장과 그에 의거한 서구 세계의 중세적 '통일'에서 나타난 것이지만, 세계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슬람 세계에 대한 서구 세계의 '반격' 개시에 지나지 않는다. 이 때까지 이슬람 세계의 '진격'에 의하여 지리적으로는 자기의 일부에 속하는 스페인까지도 상실했던 서구 세계는 간신히 이 시점에서 내부적인 '통일'을 달성하여 '반격'으로 전화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성전(holy war)의 발전형

 

 

십자군 전쟁은 다음의 세 가지 요인들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요인은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여 소규모로 전개되었던 '성전(holy war)'의 발전이었다. 십자군은 1063년에 이슬람 세력에 의해 살해된 아라곤(Aragon) 왕 라미로 1(Ramiro)의 복수를 위해 소집된 알렉산더 2(Alexander II)의 군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알렉산더 2세는 전장에 나갈 때에 십자가의 이름을 앞세웠으며 이 전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국가의 의무를 면제시켜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레고리우스 7세 또한 스페인을 돕는 국제적인 연합군 창설을 후원하였으며, 기사(knight)들에게 자신이 정복한 땅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보장해 주었다. 다시 말해 십자군 운동은 교황령을 넓히려는 욕구와 연결되어 강력한 정치 · 경제적인 동기들을 유발시켰던 것이다.

프랑크족의 성지순례의식 전통 

 

 

둘째 요인은 800년경부터 시작된 프랑크족의 전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카롤링거 국왕들은 스스로 예루살렘 성지와 그곳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을 보호할 의무와 권리가 있음을 주장해 왔으며, 적어도 11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이슬람 칼리프들은 이를 인정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10세기 부터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자 클뤼니 수도원에서는 순례지 곳곳마다 순례자들을 접대할 수 있는 수도원들을 세워나갔으며, 무슬림들의 동의 아래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호위병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1064~1066년에 7천 명의 독일인들이 중무장을 한 상태에서 예루살렘을 여행하였다. 외형적으로 보면 십자군은 대규모의 순례단처럼 보여 그들 사이를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1세기 말에 이교도들의 땅을 정복하려는 스페인 사람들과 대규모로 무장한 순례자들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결합되면서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11세기 인구증가와 사회문제 대두 

 

 

서구의 지도자들이 십자군 전쟁을 감행하게 된 실제적인 동기는 11~12세기에 폭발적으로 늘어난 인구의 증가와 그에 따라 발생한 토지의 부족에 있었다. 이것이 십자군 전쟁을 발발하게 한 세 번째 요인이다. 시토 수도원이 국경지역에서 토지를 개척하려 했던 것도 토지가 부족해지면서 생긴 현상이며, 십자군 전쟁 역시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다.

 

12세기가 넘어가자 십자군의 인기는 급속도로 떨어졌다. 인구가 이전처럼 폭발적으로 증가하지도 않았고 인적 자원이 풍부하였던 프랑스마저도 십자군에 참여하기보다는 도시로 모여드는 경향을 보였다. 독일에서는 튜튼족 기사들이 프로이센과 폴란드까지 활동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유럽의 인구는 1310년 이후부터 감소하다가 14세기 중엽부터는 노동력이 극심하게 부족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인구가 부족해져서 십자군이 실패했다고 볼 수 만은 없다. 무엇보다 12세기 말부터 십자군 운동을 옹호하는 이론들이 힘을 잃기 시작했다.

 

빌레할름 Willehalm

 

파르시팔 Parsifal의 저자인 볼프라메 폰 에센바하(Wolframe von Eschenbach)1210년 경에 빌레할름 Willehalm에서 십자군 문제를 다루었는데, 이 저술은 12세기 중엽에 썼던 롤랑의 노래 Rolandslied와는 다른 논조를 보였다.

 

롤랑의 노래 Rolandslied

 

롤랑의 노래 Rolandslied에서는 십자군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짐승처럼 살해되는 이교도들을 보며 행복하게 노래하였던 것에 비해, 빌레할름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부인은 기독교로 개종한 사라센 여인으로,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이교도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주장을 서슴없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십자군의 쇠락

 

 

십자군이 12세기 이후로 세력을 확장하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난 이유도 십자군의 숫자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고 첫 10년 동안, 1095~1105년 사이에 약 10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성지(Holy Land)로 갔으나 그들은 자녀를 거의 낳지 않았다. 게다가 프랑크족들의 아이들은 오래 살지 못했고, 특히 남자들의 사망률이 높았다. 이때문에 동방지역에 정착했던 프랑크족의 이주민들은 한두 세대가 지나자 다 죽고 사라졌던 것 같다. 12세기에 제2, 3의 이주물결이 몰아닥쳤으나 이들 역시 10명에 1명 꼴로 죽었다. 기독교인들이 식민지 국가로 이주하여 이곳을 적극적으로 발달시키려 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큰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했던 운송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당시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던 교회가 이민자를 도울 수도 있었으나, 불행히도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