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미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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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과 이슬람의 부흥 그리고 문명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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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인간의 야욕이 신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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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if !supportEmptyParas]--> <!--[endif]--> 본 연재 글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중세미술, 1부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편에서는 3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십자군 전쟁 ”, “2부 이슬람의 부흥”, “3부 문명충돌 ”로 기독교의 광기와 무슬림의 충돌을 통하여, 문명충돌과 미술의 진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참고로, “2부. 이슬람의 부흥” 편은 본 저의 서양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 3 (오리엔탈리즘 편)을 참조하세요.
1부. 십자군 전쟁 2부. 이슬람의 부흥 3부. 문명충돌 <!--[if !supportEmptyParas]--> <!--[endi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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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십자군 전쟁 (CRUS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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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 [crusade] (1095-1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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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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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의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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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전쟁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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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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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르몽 교회회의 (Council of Clermont, 1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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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콩키스타 (Reconquista, 718-1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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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 십자군 (1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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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십자군 원정 (109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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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1097) – 도릴라이움(1097) – 안티오키아(1097~1098) –
마라트 안-누만(1098) – 예루살렘(1099) – 아스칼론(1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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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국가의 성립 (1098-1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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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왕국(Kingdom of Jerusa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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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의 십자군 국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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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 상귀니스(1119) - 몽기사르(1177) - 이나브(1149) - 하틴(1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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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십자군 원정 (114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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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 공방전 (1147) - 다마스쿠스 공방전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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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십자군원정(118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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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십자군원정(1202-4)
5차 십자군원정(12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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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차 십자군원정(1228-40년)
7차 십자군원정(124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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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9차 십지군 원정(125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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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러시아 십자군 원정 (1217~ 83)
북방 십자군 (北方十字軍, 발트 십자군 1193 ~ 1236)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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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기 프러시아 십자군 (1217~1228)
지난 세기동안 폴란드 인들의 군사 활동 및 선교 사업은 포메라니아에서는 성공적이었지만 프러시아의 이교도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폴란드가 여러 소국들로 분열된 이후, 프러시아에 인접한 마소비아의 군주와 그의 후원을 받는 시토회 선교사들은 프루스 족의 반격으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프루스 족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하였다.
시토회 수도사에 의해 건립된 프러시아 교회는 교회의 수호 및 효과적인 십자군 활동을 위하여 도브진 기사단을 창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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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브진 기사단이 큰 손실을 당하고, 프루스 족의 대대적인 반격을 초래하여 마소비아 북부 영토가 황폐화 된다. 이 실패 이후 마소비아 공작은 전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튜턴 기사단을 초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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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기 프러시아 십자군 (1230~1283)
마소비아 공국은 프러시아 십자군의 실패로 곤경에 빠져있었다. 그리하여 마소비아 공작은 1225년,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 본부를 두고 있었던 튜턴 기사단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튜턴 기사단은 제 6차 십자군에 종군하고 있었으므로 바로 응답을 하지는 못했으나, 1230년 소수의 선발대가 파견되는 것을 시초로 본격적으로 이 지역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기사단은 1225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부터, 1234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로부터 십자군 활동에 대한 정식 칙령을 받았다. 이후 기사단의 이교도에 대한 군사 활동은 모두 십자군으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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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턴 기사단이 프러시아 전역을 장악하고 기사단 국가를 건립한다. 또한, 프러시아에 독일과 폴란드 계 이주민 유입으로 독일화가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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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러시아의 정복 직후 튜턴 기사단은 리투아니아의 이교도들과 새로운 십자군 활동에 돌입하였다. 기사단은 또한 세력확장을 위하여 내부의 교회 세력과 주변의 폴란드 왕국과의 큰 갈등을 빚었다. 프러시아는 완전히 독일화되어 훗날 브란덴부르크와 함께 프로이센 왕국을 형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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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러시아의 정복 (1237년~1241년)
원래 프러시아 지부의 튜턴 기사 전력 만으로는 이교도들에 대한 공세를 유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기사단 본부는 아직 중동 지방에 있었고, 1291년 라틴령 팔레스타인의 최후의 거점인 아크레(Acre)가 함락된 뒤에도 기사단이 프러시아로 완전히 옮겨온 것은 그로부터 18년이나 지난 1309년이었습니다.
부족한 병력자원을 수급하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하고 있긴 했으나, 아직 그들은 십자군 참여를 열망하는 기독교 세계 군주들의 지원에 매우 의존해야 했습니다.
대부분 독일에서 십자가를 달고 오는 서방의 군주들과 그들의 군대는 일시적으로 튜턴 기사들과 힘을 합쳐 이교도들과 한바탕 싸우고 난 뒤, 신께 자신의 신앙심과 용맹성을 증명했다는 뿌듯함을 안고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군사적인 참여뿐만이 아니라 그들은 기부금이나 땅을 기증하기도 했고 기사단이 프러시아에서 벌려놓고 있던 건축 공사판에 일손을 빌려주기도 했으며, 또는 유용한 전쟁도구를 선물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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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르켄베르크(=몽포르) 성 – 1271년 맘루크의 바이바르스에게 함락될 때까지 튜턴 기사단의 본부가 되었다.>
처음 발트 지역에 도착했을 때 아직 소수에 불과했던 튜턴 기사들은 군사적으로 그곳에 침입한 이교도들과 싸워 기반을 확보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자신들의 지위를 확고히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헝가리에서 겪었던 실수를 두 번 다시 반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이 언제든지 카톨릭 군주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지리적 범위 내에서 점령지를 조금씩 넓혀갔던 것은 이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직 발트지역에서 소수의 신참자에 불과했던 그들은 군사적 모험을 자제하면서, 배후에서 움직이며 서구세계의 공후들과의 관계를 통해 발트 지역에서 정치적 기반을 다지는 작업이 더 중요했습니다.
1236년까지 튜턴 기사단의 정복활동은 주로 비스툴라 강의 동안과 그 지류를 따라 이루어져 왔습니다. 비스툴라 강의 서안에는 아직 기사단에 우호적인 폴란드 공작들의 영토가 있었고 강 상류 쪽에는 역시 기독교 세력인 마소비아나 쿠야비아가 있었습니다. 기사단은 그 곳을 통해 서구 세계의 지원을 쉽게 받을 수 있었고 유사시에는 가까운 곳에서 피신처를 얻을 수 있었으므로 정복에 큰 어려움은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면서 1236년이 지나게 되자 프러시아에서 튜턴 기사단의 지위는 튼튼해졌고 더욱 과감한 정복을 꿈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사단은 1234년에 시르구네 강변에서 고전한 적이 있었는데, 이처럼 프러시아를 육로를 통해 가로질러 들어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기사단은 숲과 늪지대로 가득한 프러시아의 지형에 익숙하지 않아, 섣불리 들어가게 될 경우 길을 잃거나 매복에 노출될 위험이 매우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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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러시아로 접근하는 방법은 육로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프러시아 내부에는 여러 하천들이 얽혀 있었고, 이 하천들은 북쪽의 비스툴라 석호(Vistula Lagoon)라 불리는 거대한 자연 구조물로 흘러 들었습니다. 중세에는 이 석호를 둘러싼 비스툴라 곶(Vistula Spit) 중간에 항해가 가능한 부분이 있었으므로, 만일 수로를 항해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강과 바다가 얼어붙거나 유빙이 떠다니지 않는 한, 발트해로부터 비스툴라 석호로 들어와 각 하천들을 통해 프러시아 내륙으로 빠르게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프루스 인의 작은 배들이 돌아다니고 있었으므로 이 방법도 보통 수단으로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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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검은 십자가의 기사들이 성전을 수행하는 한, 그들은 언제나 서구 세계의 독실한 군주들로부터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1236년 튜턴 기사단의 캠패인을 도와주었던 마이센의 변경백 하인리히 3세는 1237년의 십자군에는 직접 참가하지 않았으나, 두 척의 큰 함선을 만들어 기사단에 기증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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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게림’(Pilgerim, =Pilgrim 순례자)와 ‘프리데란트’(Vridelant, = Friedeland 자유의 땅)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배들은 이교도들이 가진 어떤 배들보다도 컸을 뿐만 아니라 튜턴 기사들이 프러시아로 비교적 안전하고 신속하게 십자군 병력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수단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중요했습니다. 두 척의 함선은 그들이 해안을 장악하고 신속히 프러시아 내부로 침투할 수 있는 전술상의 이점을 제공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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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1237년 발트해의 얼음이 녹자, 기사단은 기증 받은 이 전함들을 이용하여 비스툴라 석호와 곶을 ‘정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전함을 타고 프루스 인들의 작은 배들을 격파하고 돌아다니면서 프러시아의 해안지대를 공격하였습니다. 그 해 튜턴 기사단은 프러시아 지부의 란트마이스터인 헤르만 폰 발크의 지휘 아래 엘빙(Elbing) 강 하구의 작은 섬에 상륙하였습니다. 그는 이 지역에 성채를 건설한 후 강 이름을 본 따 엘빙(Elbing)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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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빙의 창건자, 헤르만 폰 발크의 동상 <!--[end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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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8년이 되면서 프러시아 캠패인은 가속도가 붙게 되었습니다. 제해권을 가진 튜턴 기사단은 배를 이용하여 숲이 우거진 육로를 행군하는 위험부담 없이 비스툴라 석호를 건너 프러시아 동부 해안 지역에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다를 통해 서구 세계로부터 무기와 자재, 식량을 지속적으로 지원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다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가장 소중한 자원은 지평선 너머에서 배를 타고 건너오는 열광적인 십자군 전사들이었을 것입니다.
1238년, 프러시아의 동부 해안지대에 상륙한 십자군의 작은 분견대 중 하나가 해안지대에 있는 바름 족의 요새를 공격했으나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튜턴 기사단은 곧바로 대규모의 군대를 거느리고 그 지역에 다시 상륙하여 요새를 포위하였습니다. 그들은 프루스 족 수비군의 내분을 틈타 그 요새를 간단히 함락시켰고, 주변지역의 프루스 인들이 반격에 나섰지만 실패로 끝났습니다.
튜턴 기사단은 점령된 이교도의 옛 요새를 발가(Balga)라고 명명하였습니다. 발가의 성채는 1239년에 재 건축되었으며 새로 거듭난 이 강력한 요새는 프러시아 동부의 바름 족(Warmians)과, 더 깊숙이 살고 있는 나탕 족(Natangians), 그리고 바르트 족(Bartians)을 정복하기 위한 대규모 군사거점이 되었습니다.
1239년, 튜턴 기사단의 4대 기사단장인 헤르만 폰 살차가 이탈리아의 살레르노에서 사망하였습니다. 당시 그는 기사단 본부의 형제 기사들에 의해 정치에서 손을 뗀 상태였습니다 같은 해, 6년 전 프루스 인들에게 납치되었던 프러시아 교회의 크리스티안 주교가 몸값을 내고 풀려났습니다. 초췌해진 주교가 교회로 돌아왔을 때, 그는 튜턴 기사단에 대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며 교황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냅니다. (헤르만 폰 살차와 그의 후계자들, 그리고 크리스티안 주교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다루겠습니다.)
1240년, 야심만만한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Braunschweig-Lüneburg)의 공작인 오토 1세(Otto I)세가 군대를 이끌고 발가에 도착했습니다. 엄숙한 튜턴 기사들과는 달리, 오토 1세는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사냥하는 세속적인 즐거움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활력이 넘치는 이 색다른 기사들은 동시에 훌륭한 전사들이기도 했으므로, 튜턴 기사단의 동 프러시아 캠패인에서 상당한 전력이 되어주었습니다.
오토 1세의 지원을 얻게 된 프러시아 십자군은 전격전을 방불케 할 만큼 빠른 속도로 프러시아 내륙 지방에 침투해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주로 하천과 수로를 통해 이동하여 바르미아, 나탕기아, 바르티아의 원주민들을 신속하게 공격하였으며, 1240년부터 1241년까지 불과 2년 사이에 하일스베르크(Heilsberg), 크로이츠부르크(Kreuzburg), 바르텐슈타인(Bartenstein), 뢰쎌(Rößel)과 같은 주요 성채와 그 밖에 크고 작은 거점들을 건설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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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1년이 되자 튜턴 기사단은 프러시아의 대부분을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포메사니아, 포게사니아, 바르미아, 나탕기아, 바르티아의 부족들은 튜턴 기사단에 복속하였습니다. 북쪽의 삼비아(Sambia, = 삼란트Samland)와 나드루비아(Nadruvia), 그리고 수도비아(Sudovia)의 이교도들은 아직 정복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튜턴 기사단의 다음 목표는 부유한 삼란트가 될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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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0년대는 신생 튜턴 기사단 국가의 고도 성장기였습니다. 그들의 영토는 불과 10년 사이에 쿨메를란트의 좁은 땅에서 프러시아의 2/3와 리보니아로 확장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급격히 늘어난 기사단령을 방어하고 통치한다는 것은, 정치적 군사적 수단으로 땅 따먹기를 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일단 방어의 문제는 보다 수월하였습니다. 튜턴 기사단이 벌인 건축 공사로 인해 발트 해안지대와 알레(Alle) 강을 따라서 많은 성채들이 줄줄이 늘어섰습니다. 그 성채들은 피정복민들을 통제할 수 있는 거점인 동시에, 북동부의 삼비아 인, 수도비아 인, 그리고 리투아니아 인들로부터 기사단령 프러시아를 지켜낼 수 있는 방어막으로서 활용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튜턴 기사들은 이 성채들로부터 출정하여 미래의 새로운 정복-선교 사업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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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튜턴 기사단은 기사단령 내부의 통치문제에도 직면해야 했고, 이것이 더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마조프세 공으로부터 넘겨받아 교황과 황제 ‘빽’을 써서 은근슬쩍 뿌리를 박아버린 쿨메를란트 지방은 튜턴 기사단 프러시아 지부의 힘의 중심지였습니다. 이 곳은 카톨릭 군주들의 영토에 둘러싸여 있었고 독일계 이주민들의 정착이 활발하였습니다. 따라서 프루스 족의 습격을 제외한다면 이 곳에 대한 통치는 수월한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러시아에서는 여러 해 동안의 무자비한 전쟁 끝에도 여전히 많은 수의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고, 여러모로 서구 인들과는 많이 다른 그 사람들을 다스려야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튜턴 기사단은 원주민 귀족들을 회유하고, 그들의 사회에 서구식 제도를 도입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프루스 족 부족장과 귀족들은, 비록 기독교로의 개종과 튜턴 기사단에 대한 복종이라는 강력한 전제조건이 붙긴 했지만,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땅과 부족민에 대한 권리를 유지했습니다. 그들은 부족민에 대한 봉건 영주로서 그에 걸 맞는 특권을 문서로 보장 받을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전쟁터에서 원주민 보조병의 지휘관으로 참여해야 하는 의무가 부과되었습니다. 프루스 인 지도자들을 끌어들임으로써 튜턴 기사단은 그들을 통해 나머지 신민들도 통제할 수 있기를 기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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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더불어 정복된 각 부락에는 독일에서 온 중재자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프루스 족과 함께 살면서 원주민 보조병을 훈련시키고 각종 재판을 주관하였습니다. 많은 경우, 이 독일인들은 프루스 인 귀족들과 친분관계를 도모하기 위해 가능한 같이 어울리고자 노력 하였으며 가끔 부락의 귀족들을 튜턴 기사들이 살고 있는 성채의 연회에 초대하곤 하였습니다.
많은 성직자들도 원주민에 대한 개종사업을 위해 부락에 들어와 거주하였습니다. 그들은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는 이교 풍습을 박멸하기 위해 힘썼으며, 프루스 인들에게 세례를 주고 개종한 프루스 인들의 예배를 주도하였습니다.이와 함께 프루스 인 사회를 서구식 장원제도로 개편하는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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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외딴 농가에서 살면서 자신의 땅을 일구고 있던 프루스 족 자유민들을 마을로 집단 이주시켜 마을 공동의 농경지에서 노동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프루스 족 농민들은 이동의 자유가 없어졌으며, 결혼 상대자도 앞으로는 마을 내부에서만 구해야 했습니다. 생산성 향상과 더 많은 수익을 위해 삼포제가 소개되고 서구식 제분소와 시장이 들어왔습니다. 튜턴 기사단으로부터 허가를 얻은 독일 상인과 제분업자들이 프루스 인들의 작물 제분과 상업 거래를 독점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프러시아로 모여들고 있던 기독교 세계 출신의 정착민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주민들은 이 제도에 잘 적응할 수 있었고, 기사단에 더 많은 세금을 납부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프루스 인 사회에서도 잘 정착된다면 프러시아는 풍요로워 질 것이며 귀족들은 많은 재산을 획득할 수 있었을 것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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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러시아에는 새로운 시대의 막이 열리는 듯 했습니다. 서로를 약탈하고 우상을 믿고 형수와 결혼하고 순장(殉葬)을 위해 재물과 동물과 사람을 불태우는 야만스러운 구 세대의 관습이 차츰 물러가면서, 더욱 문명화된 제도와 법도가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1240년의 발트해,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오토 1세는 당당하게 고국으로 귀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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