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미술Ⅲ, A.예루살렘을 사수하라 - 1부.십자군 전쟁(6차십자군)

草霧 2013. 3. 21. 10:45

 

 

 

중세 미술 3

<!--[if !supportEmptyParas]--> <!--[endif]-->

십자군 전쟁과 이슬람의 부흥 그리고 문명충돌

<!--[if !supportEmptyParas]--> <!--[endif]-->

. 인간의 야욕이 신을 닮았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A.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if !supportEmptyParas]--> <!--[endif]-->

본 연재 글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중세미술, 1부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편에서는 3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십자군 전쟁 ”, “2부 이슬람의 부흥”, “3부 문명충돌 로 기독교의 광기와 무슬림의 충돌을 통하여, 문명충돌과 미술의 진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참고로, “2. 이슬람의 부흥편은 본 저의 서양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3 (오리엔탈리즘 편)을 참조하세요.

 

1. 십자군 전쟁

2. 이슬람의 부흥

3. 문명충돌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1. 십자군 전쟁 (CRUSADE)

 

  <!--[if !supportEmptyParas]--> <!--[endif]-->

 

십자군 전쟁 [crusade] (1095-1270)

<!--[if !supportEmptyParas]--> <!--[endif]-->

십자군 전쟁의 배경

<!--[if !supportEmptyParas]--> <!--[endif]-->

십자군 전쟁의 원인

<!--[if !supportEmptyParas]--> <!--[endif]-->

십자군전쟁의 시작

<!--[if !supportEmptyParas]--> <!--[endif]-->

십자군 전쟁의 전개

<!--[if !supportEmptyParas]--> <!--[endif]-->

클레르몽 교회회의 (Council of Clermont, 1095)

<!--[if !supportEmptyParas]--> <!--[endif]-->

레콩키스타 (Reconquista, 718-1492)

<!--[if !supportEmptyParas]--> <!--[endif]-->

군중 십자군 (1096)

<!--[if !supportEmptyParas]--> <!--[endif]-->

1차 십자군 원정 (1096-99)

<!--[if !supportEmptyParas]--> <!--[endif]-->

니케아(1097) 도릴라이움(1097) 안티오키아(1097~1098)

마라트 안-누만(1098) 예루살렘(1099) 아스칼론(1099)

<!--[if !supportEmptyParas]--> <!--[endif]-->

십자군 국가의 성립 (1098-1291)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예루살렘 왕국(Kingdom of Jerusalem)

<!--[if !supportEmptyParas]--> <!--[endif]-->

북쪽의 십자군 국가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아제르 상귀니스(1119) - 몽기사르(1177) - 이나브(1149) - 하틴(1187)

<!--[if !supportEmptyParas]--> <!--[endif]-->

2차 십자군 원정 (1147-49)

<!--[if !supportEmptyParas]--> <!--[endif]-->

리스본 공방전 (1147) - 다마스쿠스 공방전 (1148)

<!--[if !supportEmptyParas]--> <!--[endif]-->

3차 십자군원정(1189-92)

<!--[if !supportEmptyParas]--> <!--[endif]-->

4차 십자군원정(1202-4)

 

5차 십자군원정(1217-21)

<!--[if !supportEmptyParas]--> <!--[endif]-->

6차 십자군원정(1228-40)

 

7차 십자군원정(1248-52)

<!--[if !supportEmptyParas]--> <!--[endif]-->

8, 9차 십지군 원정(1252-91)

 

6차 십자군 원정 (Sixth Crusade, 1228-29)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로부터 십자군파병을 조건부로 황제에 임명된 프리드리히 2세는 십자군파병을 약속대로 이행하지 않음으로서 1215년에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받았던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1228년에 파문된 그 상태 그대로 있으면서 십자군을 일으켰던 것이다.

 

당시 술탄의 알 카밀은 내란을 겪고 있는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2세는 그 틈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피를 흘리지 않고 술탄의 알 카멜과 협약을 맺고 예루살렘 통치권을 이양 받는데 성공하였으며 1239년까지 휴전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1239년에 이슬람 맘루크 왕조가 예루살렘을 다시 장악했다. 1239-1240년에 프랑스 제후들이 예루살렘 원정에 출전 했지만 아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바투(1207 ~ 1255)의 유럽원정과 킵차크(jīnzhànghànguò, Golden Horde) 한국 건설(1243~1440)

 

 

 

1230년대에 몽골이 유럽뿐 아니라 이슬람세계를 휩쓸기 시작한다. 우선 1194년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이란을 탈취했던 코라즘이 1231년 몽골에 멸망하였다.

 

 

 1236년에는 몽골이 동유럽 원정에 나서서 1237년 모스크바, 1240년 키예프를 점령하였다. 또한 1241년에는 헝가리를 침입하고, 쉴레지엔을 침공하였으며, 핀란드까지 침공한다. 그 중 쉴레지엔 침공할 당시 리게닛츠 · 발시타트 전투(1241)에서 유럽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훌라구(1218 1265)의 중동원정과 일한국(Ilkhanate) 건설 (1256~1335)

1242년에는 쿠자다그에서 루움 셀주크를 격파하였다. 압바스 왕조 멸망(1258), 루움 셀주크는 1078년에 루움 총독인 술레이만이 창건하여 1086년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독립하였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1225년 프리드리히 2세는 이사벨라(Isabella)로도 알려진 예루살렘의 욜란데(Yolande of Jerusalem)와 결혼하였는데, 그녀는 예루살렘 왕국의 지배자 브리엔의 존(John of Brienne)과 몽페라의 마리아(Maria of Montferrat)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다.

 

 

예루살렘 왕국의 사위가 된 프리드리히 2세는 왕국 영토 수복의 명분이 생겼다. 1227년 그레고리우스 9(Gregory IX)가 교황이 되자 프리드리히 2세는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브린디시(Brindisi)를 출항해 당시 예루살렘 왕국의 수도였던 아크레(Acre)로 향했지만 역병이 돌아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교황의 프리드리히 2세 파문

 

 

 

그레고리우스 9세는 십자군의 맹약을 어겼다는 이유로 프리드리히 2세를 파문하였는데, 사실 진정한 이유는 프리드리히 2세가 교황권을 무시하고 이탈리아 내에서 지배권을 강화하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을 달래보고자 애썼지만 여의치 않자 그를 무시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그는 파문에도 개의치 않고 1228년 예루살렘 재점령을 위하여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제6차 십자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1229년 평화 협정과 예루살렘 탈환

그는 이슬람 세계와 접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전투를 하지 않고 상대방의 대립을 이용하여 1229년 평화 협정으로 예루살렘을 획득했다. 이집트의 아이유브조가 타미에타를 상실함으로서 예루살렘 방어에 적극적일 수 없었다는 점, 십자군과 8년간 휴전을 하고 있었다는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또한, 전략적 요충지인 타미에타를 십자군에 상실했으며, 카이로는 불태워지기 했으니, 이집트 방어가 급했다. 그러나 술탄과의 조약은 1239년에 종료되었고, 1244년 예루살렘은 콰레즈미아 투르크(Khwarezmian Turks)이집트군에 의해서 다시 점령되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프리드리히 2세 귀국과 롬바드(황제파) 전쟁 (1228 1243) 패배

 

 

프리드리히 2세는 예루살렘 점령 이후 1229년 예루살렘왕에 등극한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 내에 반황제파가 대두되자 신성로마제국으로 돌아갔다. 일단 교황 그레고리우스 9 세가 반 황제 세력과 결탁해 이탈리아 내 황제의 근거지를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귀국을 서두를 필요가 생겼다. 이 때 황제의 패배로 끝난거나 다름 없었다.

 

아그리디 전투 (Battle of Agridi, 1232)

 

프리드리히 2세와 제국의 분열

북 이탈리아의 롬바르디 (Lombardy) 도시 동맹의 반란

아들 독일왕 하인리히의 반란과 1235년 죽음

 

6차 십자군 원정은 좋은 본보기가 된 덕분에 이후 교황 개입 없이 독자적으로 원정을 결정하게 되는 사례가 생겨나게 되었다. 7 및 제 8 십자군 원정을 일으킨 프랑스 국왕 루이 9(Louis IX of France), 9차 십자군을 일으킨 영국 국왕 에드워드 1(Edward I of England)가 그의 전례를 따랐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9(Gregorius PP. IX, 1227 - 1241)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2(1194 ~ 1250, 세계의 경이(Stupor Mundi))

아이유브 왕조 술탄 알카밀 (1180 ~ 1238, al-Malik al-Kamel Naser al-Din Abu al-Ma'ali Muhamm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