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미술Ⅲ, A.예루살렘을 사수하라 - 1부.십자군 전쟁(ㄷ)

草霧 2013. 3. 12. 00:00

 

 

 

 

 

 

중세 미술 3

 

 

십자군 전쟁과 이슬람의 부흥 그리고 문명충돌

 

 

. 인간의 야욕이 신을 닮았다.

 

 

A.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본 연재 글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미술, 1부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편에서는 3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십자군 전쟁 ”, “2부 이슬람의 부흥”, “3부 문명충돌 로 기독교의 광기와 무슬림의 충돌을 통하여, 문명충돌과 미술의 진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참고로, “2. 이슬람의 부흥편은 본 저의 서양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3 (오리엔탈리즘 편)을 참조하세요.

1. 십자군 전쟁

2. 이슬람의 부흥

3. 문명충돌

 

 

 

1. 십자군 전쟁

 

 

 

십자군 원정 [crusade] (1095~1270)

    

 

 

십자군 원정의 배경

    

 

십자군 원정의 원인

 

 

십자군전쟁의 시작

 

 

셀주크 투르크에게 콘스탄티노플이 위협받자, 동로마 황제 알렉시우스 콤네누스는 10953월에 로마 교황에게 사절을 파견하여 지원을 요청한다. 당시 교황은 그레고리 7세로부터 막강한 교황권을 이어받은 우르바노 2세였다.

 

이에 아미앵의 피에르가 십자군을 권유하였으며, 우르바노 2세는 11월 열린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 운동을 호소하였다. 이에 제1차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서로마의 멸망으로 서로마 황제가 가지고 있던 교회에 대한 권한은 상당 부분 교황에게 넘겨졌으며, 성직서임권 다툼의 결과 교황권은 사실상 최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반쪽의 권한에 지나지 않았다. 아직 동로마는 건재하였으며, 동로마 교회의 권한은 여전히 동로마 황제에게 있었다.

 

 

우르바노 2세는 온전한 교회의 최고의 지위를 원하였으며, 이는 동로마 황제의 교회에 대한 권한을 차지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때문에 우르바노 2세는 동로마를 지원하여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길 원하였다.  

 

하지만 동로마의 지원 요청은 단순한 콘스탄티노플의 방어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콘스탄티노플은 1453, 오스만 투르크에 함락되기까지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단 한 차례도 함락되지 않은 당대 최고의 요새였다.

 

그러므로 아무리 셀주크 투르크의 힘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동로마가 콘스탄티노플이 함락 당할지 모른다는 위협을 느꼈을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셀주크 투르크에 대한 공격의 의미로서 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동로마의 의도는 소아시아의 회복에 있었다.

 

그러나, 의도와 다르게 한 차례 함락되는데, 이는 제4차 십자군 때의 일이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였으며, 시민들에게 황제가 살해당한 콘스탄티노플은 십자군에게 함락된다.

 

 

로마 교황과 동로마 황제의 의도는 각기 달랐을지라도, 이슬람을 공격한다는 목적에는 일치하였다.

 

 

때문에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성전을 소리 높여 외쳤고, 서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충만한 신앙심으로 이에 열광적으로 대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