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미술Ⅲ, A.예루살렘을 사수하라 - 1부.십자군 전쟁(ㄱ)

草霧 2013. 3. 11. 13:34

 

 

 

 

중세 미술 3

   

 

 

십자군 전쟁과 이슬람의 부흥 그리고 문명충돌

   

 

. 인간의 야욕이 신을 닮았다.

 

   

 

A.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본 연재 글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미술, 1부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편에서는 3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십자군 전쟁 ”, “2부 이슬람의 부흥”, “3부 문명충돌 로 기독교의 광기와 무슬림의 충돌을 통하여, 문명충돌과 미술의 진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참고로, “2. 이슬람의 부흥편은 본 저의 서양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3 (오리엔탈리즘 편)을 참조하세요.

1. 십자군 전쟁

2. 이슬람의 부흥

3. 문명충돌

 

  

1. 십자군 전쟁

 

 

    (ㄱ)

 

 

십자군 원정 [crusade] (1095~1270)

 

 

 

십자군 원정의 배경

 

    

 

1. 교회의 신장

 

서로마 제국의 멸망 후, 현재의 서유럽 지역은 이민족들에 의해 지배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서로마를 멸망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이 로마의 용병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이들은 상당히 많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기독교에 있어 서로마 제국의 멸망은 일종의 기회였다. 로마에서 기독교는 로마 황제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는 신정일치神政一致로 볼 수 있겠지만, 로마 황제가 종교 지도자적 성격보다는 세속 군주적 성격이 강하였음을 생각해보면, 기독교의 입장에서 로마 시기는 세속권에 의해 신성권이 장악당한 것과 같은 시기였다. 그러므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기독교는 오히려 더 크게 교세를 확장하기 시작한다.

 

다시말하면, 로마제국은 395년 동·서로마로 분할 통치된다. 이는 넓어진 제국의 영토를 더 이상 한 명의 황제가 다스리는 것이 힘들어진데 따른 조치였다. 이때 동쪽은 테오도시우스의 장남 아르카디우스가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여 다스렸으며, 서쪽은 차남인 호노리우스가 밀라노를 수도로 삼아 다스렸다.

 

서로마는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황제가 폐위됨으로서 멸망하였다. 7세기경부터 개종된 게르만이 다른 게르만을 개종시켰다. 이는 종교의 파급효과를 그대로 보여준다.

 

계속된 게르만족의 개종이 잇달았으며, 그에 따른 교회의 권위는 높아졌다. 10세기 들어서면 오토 대제의 지원 아래 교세를 확장하였으며, 특히 많은 군주와 영주들로부터 토지를 기증받아 종교적인 영향력 뿐 아니라 세속적인 권한까지 성장하였다. 특히, 로마교회는 피핀으로부터 막대한 토지를 기증받아 막강한 권력을 지니게 되었으며, 로마교회의 수장은 교황으로서 서유럽지역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1세기 말엽 교황에 그레고리 7세가 등위하면서 신성권은 더욱 강대해진다. 그레고리 7세는 클리뉘 출신답게 교회를 정화해 나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직서임권을 두고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 충돌하게 된다.

 

교황 그레고리 7세는 하인리히 4세에게 파문을 선언하였으며,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 7세에게 폐위를 선언함으로서 대응하였다. 하지만 하인리히 4세는 독일 제후들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하였다.

 

이에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에서 그레고리 7세에게 사죄한다(1077, 카노사의 굴욕). 이로서 교황권은 황제권에 완전한 승리를 한다.

 

이는 다시 말하면 신성권이 세속권을 장악하는 시기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이후 교황은 최고의 권력을 지니게 된다.

    

 

클뤼니 수도원은 성직자의 세속화 및 성직매매 등으로 교회가 타락하는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교회의 정화를 주장하였다. 클뤼니 수도권은 여타의 수도원들이 많은 토지와 농노를 소유하고, 도시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것과 달리, 수도사에게 금욕적 삶을 강조하였으며 스스로 노동하도록 하였다.

 

신성로마제국은 독일의 왕이 서로마 제국의 정통후계자임을 교황이 인정해준 이후 얻은 권위로서,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서로마 황제의 권한을 거의 그대로 이어 받았다. 그러므로 서로마 황제가 지녔던 성직서임권 역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이어졌다.

    

2. 이슬람과 동로마

로마의 동서 분열이후, 서로마는 5세기 말엽 멸망하였다. 하지만 동로마는 15세기 중엽까지 유지된다.

 

서로마가 멸망하면서 교회에 대한 권한이 교황에게 넘어간 것과 달리 동로마는 여전히 황제가 교회의 모든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사실상 교회가 동·서로 나뉘어졌음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동로마는 여전히 건재하였으며, 또한 강력하였다.

 

동로마는 서로마가 이민족에 의해 멸망하던 때에도 여전히 이민족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아냈으며, 문화의 중심지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동로마는 급진적으로 확장하는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유럽을 지키는 든든한 요새였다.

 

전통적인 강국이었던 동로마는 북쪽으로는 이민족과 그들이 세운 국가들과 싸워야했으며, 동쪽으로는 강력하게 도전해오는 이슬람 세력을 막아내야만 하였다. 하지만 이민족들이 세운 국가들은 아직은 동로마의 힘을 넘보기에는 세력이 모자랐다. 그러나 이슬람 세력은 강력한 아시아의 국가들을 제압하며 서진해오고 있었다. 이는 실질적인 위협이었다.

 

1071,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동로마는 이슬람의 셀주크 투르크에게 패배하였다. 이 패배는 단순한 전투에서의 패배가 아니었다. 동로마 황제가 생포당하는 굴욕적인 패배였다.

 

또한 기독교에 있어서 성지인 예루살렘이 점령당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였다. 게다가 1076년에는 크로아티아가 동로마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이는 동로마의 국력이 이전과 많이 달라진 증거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술래이만이 소아시아 전역을 포괄하는 술탄국을 세우고 니케아를 수도로 삼은 것은 동로마에게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소아시아는 동로마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으며, 중요한 병력 공급원이었다. 소아시아의 상실은 동로마의 국력 약화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셀주크 투르크로 대표되는 이슬람 세력 역시 분열의 조짐을 나타내고 있었다. 루움 총독 술레이만이 루움 셀주크를 창건하였다. 그럼에도 셀주크 투르크는 1084년 시리아·소아시아 정벌을 종결한다.

 

 

원래 이 지역은 동로마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1086년 루움 셀주크가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독립하였다. 또한 이집트 역시 셀주크 투르크와는 별개로서 존재하였다. 그럼에도 셀주크 투르크의 힘은 동로마를 위협하기에 충분하였으며, 예루살렘을 되찾기에는 동로마의 힘은 너무도 모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