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미술 3
십자군 전쟁과 이슬람의 부흥 그리고 문명충돌
Ⅲ. 인간의 야욕이 신을 닮았다.
A.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본 연재 글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미술, 1부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편에서는 3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십자군 전쟁 ”, “2부 이슬람의 부흥”, “3부 문명충돌 ”로 기독교의 광기와 무슬림의 충돌을 통하여, 문명충돌과 미술의 진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참고로, “2부. 이슬람의 부흥” 편은 본 저의 서양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 3 (오리엔탈리즘 편)을 참조하세요.
1부. 십자군 전쟁 2부. 이슬람의 부흥 3부. 문명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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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십자군 전쟁
( 서론 )
십자군 원정 [crusade] (1095~1270)
대부분의 경우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감행된 중세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 국가들이 중동의 이슬람 국가에 대항하여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을 목적으로 행해진 대규모의 군사 원정을 가리킨다. 넓은 의미로는 직접적으로 성지와는 관계없는 레콩키스타나 동유럽에 파견된 동방십자군, 발트해 연안의 여러 나라에 원정을 감행한 북방십자군, 이단에 대한 알비 십자군 등이 포함되었다.
8차례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더 많았는데 목적은 예루살렘과 그리스도의 성묘(聖墓)를 이슬람교도의 지배로부터 탈환하는 것이었다. 11세기에 봉건 유럽에서는 상업과 종교가 광범위하게 부흥했고 예루살렘과 동방의 성지 순례가 점차 유행하게 되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비잔틴 제국은 강대해지는 셀주크 투르크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 취지와는 다르게 십자군측이 예루살렘을 확보한 기간은 1099년 ~ 1187년 및 1229년 ~ 1244년뿐이었다. 이후 20세기까지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게 된다.
로베르 드 부기뇽의 주재 하에
열린 성전기사단 총회,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총회에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교황 유게니우스 3세가 참석했다.
(1147. 4. 22)
십자군 원정 동안에 기사단에게
종교적 군사 명령이 내려졌다.
당시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 국가들의 입장에서 성전이 되지만, 실제로는 이슬람 세계와 동방정교회의 나라들까지 공격해 들어간 침략군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200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과거 십자군에 의한 침략과 학살, 약탈행위 등에 대해서 정식으로 사과했다.
교황은 교황권 강화를, 영주들은 영토 확장을 목적으로 하는 등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성향이 반영된 전쟁이었다. 사자심왕 리처드 등 서유럽의 대표적인 세 나라의 군주들이 함께 참가한 제3차 십자군이 가장 유명하고, 그 절정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켜 같은 기독교 국가인 동로마 제국을 몰아내고 라틴 제국을 세운 제4차 십자군이었다. 이 전쟁에서 약탈되어 온 유물, 서적들은 당시 암흑시대를 지내고 있던 중세에 큰 영향을 끼쳐 훗날 르네상스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군중 – 제1차 – 제2차 – 제3차 – 리보니아 – 독일 – 제4차 – 알비주아 –
소년들 – 제5차 – 프러시아 – 제6차 – 제7차 – 양치기들 – 제8차 –
제9차 – 아라고네스 – 알렉산드리아 – 니코폴리스 – 북방 – 후스파 –
바르나 – 오트란토 – 오스만-합스부르크 – 레판토 – 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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