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미술Ⅲ, A.예루살렘을 사수하라 - 1부.십자군 전쟁(ㄴ)

草霧 2013. 3. 11. 13:57

 

 

 

 

 

 

 

 

 

중세 미술 3

 

 

 

십자군 전쟁과 이슬람의 부흥 그리고 문명충돌

 

. 인간의 야욕이 신을 닮았다.

 

 

A.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본 연재 글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미술, 1부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편에서는 3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십자군 전쟁 ”, “2부 이슬람의 부흥”, “3부 문명충돌 로 기독교의 광기와 무슬림의 충돌을 통하여, 문명충돌과 미술의 진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참고로, “2. 이슬람의 부흥편은 본 저의 서양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3 (오리엔탈리즘 편)을 참조하세요.

1. 십자군 전쟁

2. 이슬람의 부흥

3. 문명충돌

 

 

 

1. 십자군 전쟁

 

 

 

    (ㄴ)

 

 

십자군 원정 [crusade] (1095~1270)

 

 

 

십자군 원정의 배경

 

 

십자군 원정의 원인

 

 

 

서유럽은 5세기 이후 게르만의 침입으로 서로마가 망하면서 성립한 중세는, 9세기 이후 남으로는 이슬람 제국의 침입으로 지중해와 남부 유럽을 잃었고, 북으로는 노르만족(바이킹)의 침입으로 홍역을 치루었으며, 동으로는 마자르족과 흉노족 등 아시아계 민족의 준동으로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거기에 중심을 잡아야 할 프랑크 왕국은 분열되었고, 서유럽의 왕들은 교황권보다도 약한 처지로 전락한다.

 

 

그러나 10세기가 되면 신성로마제국이 유럽의 중심에서 보편적 황제권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11세기에는 교회의 지원을 받은 각 유럽의 소국들이 남부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면서 유럽인의 자신감을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유럽이 남부 이슬람을 몰아낼 때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세력은 클뤼니 수도원과 교황으로 대표되는 크리스트교 옹호 세력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럽을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프랑스의 귀족들이었습니다. 실제, 교황권이 황제권을 능가하여 황제들을 조종할 수 있다고 시작되는 시점에서 십자군은 시작된다.

 

 

9세기 마자르, 노르만, 이슬람 등의 세력의 침입이 끝난 뒤 평화의 시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유럽은 바퀴달린 중량쟁기를 사용하여 <심경>이라는 농사법을 시작하였고, 장원에서 삼포제를 이용한 지력강화, 철제 농기구의 보급, 수력을 이용한 물레방아 등 여러 농사기술을 통해 새로운 발전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농법은 곧 유럽 내의 개척사업과 개간사업을 활발하게 진행시켰고, 유럽인들은 서유럽과 동유럽의 경계라고 생각한 <엘베강>을 넘어 동쪽으로 계속 식민사업과 개간사업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그 결과 동유럽에서는 <프로이센>이라고 하는 새로운 소국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제 유럽은 이슬람 수준의 충분한 생산력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였다.

 

 

이 무렵, 교황권과 황제권의 투쟁에서 승리하여 신성로마제국보다 우위를 점한 교황 우르반 1세는 황제권과 대립하였던 이탈리아 토스카나 가문 등 이탈리아 공국들의 지지를 얻어 본격적인 십자군 원정을 계획하였다.

 

셀주크 투르크는 이슬람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크리스트교 계 성지순례자들을 박해하였습니다.

 

 

 

 

, 비잔틴 제국을 위협하여, 비잔틴의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플을 이슬람권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보이기도 합니다. 비잔틴의 교황 알렉시우스 1세는 서유럽의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다.

 

당시 서유럽의 교황 우르반 2세는 <클레르몽 공의회>를 열고 이전부터 계획했던 십자군 원정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였다.

 

교황은 평민들에게는 성지수복이 천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며, 구원의 확실한 계시라고 말하였습니다. , 이와 더불어 십자군의 승리가 평민들에게 신분의 자유와 부채의 탕감까지 보장할 것이라고 하였다.

 

베네치아 등 반 황제파의 도시 무역 국가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실제 11세기 이후 남부 유럽에서 이슬람을 몰아내면서 지중해 무역은 다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상업 국가에게로 주도권이 넘어왔습니다.

 

 

 

 

 

 

 

만약 십자군 원정이 성공한다면, 그리고 실패한다고 해도 동방으로 진출할 수 있는 활로만 열린다면 지중해 도시국가 상인들에게는 커다란 이윤이 보장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십자군 원정에 대한 대규모의 경제적 지원이 보장되는 것을 뜻한다.

 

 

 

 

, 십자군 원정에 대하여 봉건 영주들은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승리가 새로운 영지와 조세원을 보장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새로운 정복지는 봉건제도로 구성되어 자신들에게 영지가 분봉될 것이라는 확답까지 얻어내고 참전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