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미술 1
성서의 가르침을 그림으로 읽는다.
Ⅰ. 서양에서 중세란 무엇인가?
1부 성서의 가르침을 그림으로 읽는다. - 2
본 연재 글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2부. 기독교와 예술
성서의 가르침을 그림으로 읽는다.
서양의 중세는 과학, 철학, 예술 등이 종교의 속박 아래 들어간 암흑시대였다. 중세의 종교는 그리스종교와 달리 인간 중심적인 신이 아니라 신 중심적인 인간을 만들려 하였으므로 인간본래의 특성은 위축되거나 왜곡되었다. 인간의 삶이 그 자체로 인정될 수 없는 곳에서 올바른 예술이 개화될 수는 없다.
유럽을 여행하는 사람은 어느 도시에 가든 관광대상으로 성당을 찾게 된다. 아시아를 여행하는 유럽인들이 절을 찾는 것처럼. 그리고 성당 안에서 예수나 마리아의 동상 혹은 그림을 보게 된다. 그러나 관찰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성공한 작품을 찾지 못할 것이다. 이들의 모습에는 신과 인간의 특징이 잘 배합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라이프치히 가까운 소도시 나움부르크 성당에 걸려있는 마리아의 그림이 가장 성공한 것 같다. 순박한 시골처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중세에서는 초상화가 발전할 수 없었다. 신의 모습은 그릴 수 없고 인간의 모습은 그려서 안 되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성당이나 교회 안에서는 인간의 모습이 사라지고 인간의 신비적인 상상력만이 암울하게 배회하고 있다. 신은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이 만들어 낸 산물이거나 이미 사망했기 때문이다.(서양 철학자 포이에르바하와 니체의 결론).
유명한 바티칸의 미술관에 가보면 그리스의 조각들이 진열되어 있는 야외 마당이 있다. 인간중심의 그리스 예술에서는 인간의 육체를 죄악과 결부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성기를 포함한 인간의 모습이 그대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바티칸의 진열된 작품들에는 훗날에 만든 낙엽들이 남자의 성기를 가리고 있다.
이렇게 하여 예술작품의 가치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는 플라톤의 관념론적 주장과 ‘육욕의 원죄’를 들먹이는 기독교 교리가 초라하게 승리를 외치고 있다. 그렇게 육체가 추하고 죄악과 연관된다면 수집은 왜 하였는가? 관람객들을 위한 세속적인 돈벌이 때문인가? 마치 신학적인 철학이 신학과 철학을 동시에 파괴하는 어중간한 잡종인 것처럼 종교적인 예술은 아름다운 현실을 왜곡하는 어중간한 불순물로 전락하고 만다.
예술과 종교
종교와 예술은 상징 언어를 통하여 전하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또한 종교와 예술은 비합리적 직관성, 역설성에서 서로 통하는 면을 지닌다. 그리고 종교와 예술은 삶의 놀이성, 축제성, 신명성을 공유하면서 상호보완적이다.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암시하는 것이다.
또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 상징주의는 직감적이고 화려하며 강렬한 색채와 장식을 강조하고 아주 풍부하게 과장하거나 조심스럽게 제한하는 성격을 갖는다. 종교적인 서양의 미술과 음악은 장식이나 아름다움을 창조하면서도 성스러움을 나타내는 의도를 갖고 있다.
서양 미술은 예수 그리스도 탄생 후 여러 세기 동안 헬레니즘 미술과 로마 미술, 오리엔트 왕국의 미술을 완전하게 밀어내고 기독교 미술로 자리 잡는다. 교회는 일상생활의 중심이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예술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예술의 도구적 가치에 철저히 봉사한다.
이 시대의 미술작품에서 발견되어지는 상징성은 인간의 예술이 목적 없이 표류하는 무상의 행위만은 아님을 보여주는 극단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의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의 예술은 진리나 신적인 가치를 전달하는 수단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때의 예술이란 종교를 위한 ‘도구’적 가치에 다름 아니었다. 한 사물이 도구적 가치를 갖는다 함은 그것이 자신 아닌 다른 어떤 목적에 봉사함으로써 갖는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예술과 신학
A. 성상(聖像,eikon)인가 우상(偶像,eidolon)인가
제1차 성상 파괴논쟁(iconoclasm)은 726년부터 843년까지 백여 년 간 거듭되는 폭력과 박해를 야기하여 비잔틴 교회를 위기로 몰고 간 사건이었다. 그러나 787년 제7차 공의회와 843년 그 결정적인 이콘 공경 회복 뒤, 이콘 반대파의 문서가 대규모로 소각되었기에 이 논쟁의 교리적 배경에 관한 지식은 불완전한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메이엔도르프에 의하면, 8-9세기의 황제들이 성상 파괴논쟁을 지지한 데는 처음부터 신학적 성격과 비신학적 성격이 얽혀 있었다고 말한다. 첫째, 종교문화의 문제이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그리스인들은 종교적 형상에 대한 취미를 물러 받았다. 그러나 초기 교회가 이를 우상으로 단죄하자 입체적인 것들은 사라졌지만, 평면적인 것들은 다시 나타났다. 둘째, 이슬람과의 대치이다. 비잔틴 제국과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던 이슬람은 비잔틴의 삼위일체 교의와 이콘 사용을 다신교이며 우상숭배라고 비난하였다.
셋째, 헬레니즘 영성의 유산이다. 이콘 반대파의 사상은 단성론(예수 그리스도에는 신성만이 존재한다는 그리스도론)과 직접 연결이 된다기보다는 나중에 오리게네스주의와 연결되었다. 오리게네스주의1는 신플라톤주의를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물질을 부정하는 그들은 이미지가 신의 원형에 접근하는 수단일 뿐 결코 자신의 주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서방에서 성상파괴에 관한 많은 연구가 나온 것은 16-17세기 종교개혁 당시이다.
1.트룰로 교회회의(퀴니젝스트 교회회의, 692년)
교회가 성 미술의 내용과 성격의 기본적인 원리를 처음으로 정식화한 것은 692년의 트룰로 교회회의에서 였다. 특히 교회 규율의 결정적인 결정인 카논 제82항은 교회가 성화상의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흥미롭고도 중요하다. 구약성서의 상징 안에 담겨 있던 이미지들은 그리스도의 육화(incamation)안에서 실재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상징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러 부정적이다. 직접적인 이미지의 사용을 규정한 카논 제82항은 그 교의적 근거를 정식화한다. 카논 제82항은 성상과 육화의 도그마를 최초로 연결한 교회회의의 규정이다.
카논 제82항의 마지막 부분은 성 미술의 상징주의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가리킨다. 즉 이미지의 주제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주제가 다루어진 방식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미술의 모든 조형적 가능성은 하나의 목적을 향하고 있다. 카논 제82항은 처음으로 ‘도상학적 규범’ 이라고 부르는 것을 표현하였다.
2. 다마스쿠스의 요한
726년 황제 레오 3세는 성상 공경에 적대적이던 소아시아 주교들의 영향을 받아 공공연히 성상 공경을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성상 파괴주의에 반대하여 요한은 즉시 성상을 옹호하는 세편의 논문을 썼다. 이는 단지 성상 파괴주의에 대한 반박일 뿐 아니라 성상에 관한 교회의 정통적인 가르침을 완벽하고도 체계적으로 해명한 것이었다.
3. 성상 파괴주의자 교회회의(754년)
콘스탄티노스 5세는 아버지 레오 3세보다 더 광적인 파괴주의자였다. 그의 주장과 754년에 열린 성상 파괴주의자 교회회의의 결정은 모두 불에 타 없어졌다. 교회회의는 성상 공경을 우상숭배로 몰아 금지하였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주교 게르마노스와 게오르규, 그리고 다마스쿠스의 요한을 이단으로 몰아 파문하였다. 성상파괴주의자는 화가들에게 그리스도를 재현하는 것은 이중의 모독을 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성상이 그리스도의 두 본성 사이의 관계를 표현할 수 없다고 믿었다.
4. 제2 니카이아 공의회(제7차 공의회, 787년)
황후 이레네에 의해 제7차 공의회가 니카이아에서 열렸다. 공의회는 성상 공경에 관한 가르침을 정립하였다. 공의회는 전승(Tradition)과 전통들(traditions)이라는 말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복수형은 인간의 자연적 기능에 속하는 언어, 이미지, 운동, 관습 등을 가리키며, 단수형은 은총과 성화에 의한 비가시적인 교훈 즉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에게 은총의 빛 안에서 배우고 보고 이해하는 능력을 주는 교회 안에 계신 성령의 생명이다. 이 전승은 다양한 형태의 전통들로서 살아가고 전달된다. 그 중의 하나가 도상(iconography)인 것이다. 교회의 전승을 언급함으로써 공의회는 성상 존재의 근거가 성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전(聖傳)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성서는 바로 성전에 따라 쓰인 것이다. 초기 교회는 몇 십 년간 성서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성전에 따라 살고 있었다. 예수께서 행하신 많은 것들이 다 성서에 기록된 것은 아니다. 또 사도들은 기록된 것 말고도 많은 것을 입으로 전수하였다. 도상은 성전을 표현하기 위하여 즉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시작부터 있었던 수단이다. 성상 피괴주의자는 바로 이 교회의 전승을 파괴한 것이다.
교회의 눈으로 보면, 성상은 성서를 도해하는 미술이 아니다. 그것은 성서에 대응하는 언어이며, 성서의 글자나 성서 그 책 그 자체가 아니라 성서의 의미와 내용, 복음 선포 그 자체에 상응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상이 교회에서 성서와 같은 역할을 하는 이유이다.
5. 프랑크푸르트 교회회의(794년)
제7차 공의회 문헌이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결정적인 실수가 있었다. 성상 공경이 성상 흠숭(欽崇:흠모하고 공경함)으로 번역된 것이다. 카알 대제는 분노하였다. 그는 동방교회가 성상을 성체와 같은 수준으로 만들어버렸다고 여겼다. 더 큰 문제는 비잔틴 신학자들과 프랑크 신학자들 사이에 성상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점이었다.
성화상은 예술가의 상상력의 소산일 뿐이라는 것이다. 성상은 파괴 되어서도 안되고 공경되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성상 파괴논쟁의 대가는 무서웠다. 파괴될 수 있는 것은 다 파괴 되었다. 그러나 이 파괴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상의 풍요로움과 깊이에 대한 가르침도 탄생하였다.
플로로브스키(G.Florovsky)의 말처럼 위태로웠던 것은 성상의 교훈적 장식적 기능이 아니라 육화의 교의에 따른 진정한 신앙고백 즉 그리스도교적 인간학이었다.
육화의 도그마(dogma)는 두 본질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인간 체험이자 인간의 하느님 체험이다. 예술작품을 포함하여 교회의 모든 삶은 이 목적에 수렴한다. 성상파괴주의는 이론적으로 육화의 교의를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느님의 인간적인 이미지를 부정함으로써 물질의 성화를 즉 인간의 신화를 거부하였다. 그 결과 구원의 경륜이 손상된 것이다. 이미지를 부정하면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추상적 이론이 되어버린다. 그것이 예전의 도체티즘(Docetism, 그리스도 가현설(假現說))2이었다.
다른 한편 성상 파괴주의는 세속화와 연결되어 있었다. 세속적 이미지, 세속적 음악과 시가 교회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예술의 운명만이 위태로워진 것이 아니라 정작 정교회 그 자체가 위태로워진 것이다.” 플로로브스키가 찾은 성상 파괴논쟁의 깊은 뿌리는 놀랍게도 구약성서의 금지나 셈족의 정신이나 동방의 이미지에 대한 마술적 개념이 아니라 헬레니즘이었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교 이전의 헬레니즘에로의 복귀였다. 성상 파괴주의자는 미술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술을 진작시켰다. 그들이 박해한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와 성모, 성인들의 재현이었다. 성상 파괴주의자가 교회의 벽을 프로테스탄트들처럼 텅 빈 채로 그냥 놔둔 것이 아니라, 그들은 교회의 벽을 세속적인 주제들, 풍경들, 동물들의 묘사 등으로 장식하였다.
성상 파괴논쟁은 그리스도론 논쟁기의 위대한 이단들의 종말이었다. 그러므로 성상 공경의 회복은 단순한 하나의 승리가 아니라 ‘정교 그 자체의 승리’였다.
B. 이콘(Icon)
이콘이란 종교 ·신화 및 그 밖의 관념체계상 어떤 특정한 의의를 지니고 제작된 미술품에 나타난 인물 또는 형상이다. 성화상(聖畵像)이라고도 번역되며 그리스어의 이콘이라는 말은 '이미지(image)'룰 의미한다.
성화상의 목적은 예배드릴 때 경건성을 자아내게 하며 문맹자들을 교화하고 예배드리는 이들과 하느님 사이의 실질적 연결 역할을 하는데 있다.
예술작품으로서의 성상화(Icon)는 영원성에 뿌리를 둔 것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영원성의 창문'이라고 불리워지며, 가시적인 형태로 구체화된 '하늘과 땅사이의 끈'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이콘(Icon)은 예술작품으로서만 아닌 그 시대의 종교성과 직결되어 감각에 호소하는 그림이라는 것과 동시에 직관적이고 거룩한 '신적인 것에의 동화(同化)'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영원성을 추구하는 종교적 진실이 형상, 색채, 빛이라는 물질적 매개를 통해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콘은 '인간성과 신성' '자연성과 초자연성'사이의 중세적 대조 속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며 불가시적인 영원한 진리의 빛을 가시적인 형상으로 찬미한 예술로 이해해야 한다.
이콘이 종교미술에서 연구대상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묻혀 있다가 오히려 현대에 와서 더 깊은 관심을 모으며 감명을 주고 있을 뿐 아니라 서구 유럽에서는 절대적인 각광을 받고 있다. 물론 현대에는 다양한 종교와 이즘(主義: ism)이 범람 하지만 역사를 통해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유사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을 수도로 건설하면서 출발한 비잔틴 제국의 실질상 영토는 희랍과 소아시아였고, 언어는 희랍어를 사용하였으며 종교는 정교( Orthodox)였다. 이콘은 비잔틴 미술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양식으로 그 기원은 고대이며 로마(Romme)의 초상이나 모자익(mosaic)초상에서 혹은 메달그림(medallion)에서 유래되었다.
그리스도가 사망한 후 처음 1세기동안 기독교인들은 유대전통에 따라 종교적 상(像)을 사용하지 않았으나(헤브라이즘), 기독교가 지중해연안에 확고히 자리잡기 시작한 3세기에 와서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성상이나 성화를 신앙의 수단으로 삼는데 익숙해 있었다.
그리스 문화(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이교도들과의 과거 전례에서 유래된 종교적 형상을 발전시켜 나가기 시작하였는데, 초기 성화 양식을 외형적인 면에서만 고찰하면서 고대 로마시대의 조형미술의 연속으로 초기 성상화는 그려졌고 그것은 거칠고 다소 원시적인 양식으로 표현되었으며 작품의 인물은 정면을 향해 그려져 있고 무엇을 응시하는 커다란 눈과 육중한 이목구비를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초기 이콘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심오한 영적인 감각이 내재되어 있는 한편 근대 작가 루오(Rouault)의 작품과도 비교가 된다.
동전에도 양면이 존재하고,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듯 사람들 내부에 존재하는 지옥에 대한 공포를 자극하면서 경각시킬만한 이콘들이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요한 계시록에 나타나 있는 멸망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지옥의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신자들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경배심을 드높게 하였다. 도3
당시 널리 펴져있던 고대의 사고방식과 미신들은 후에 마녀사냥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일으키게 되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람들을 괴롭혔다. 처참한 지옥의 모습은 화가들의 붓에 탄생된 아름다운 천국으로 가기 위한 신앙심을 더욱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그리스도교의 도상이 정점에 이른 것은 로마네스크 및 고딕 시대(특히 12∼13세기)로, 신이 지배하는 초자연 및 자연의 모든 질서가 도상화되었다. 그것은 신의 보좌인 천계로부터 인간 및 동물이 사는 지계에 이르는 공간의 질서뿐만 아니라 천지창조가 비롯되는 구약시대로부터 신약시대, 이에 이어지는 성인시대, 나아가 미래의 ‘최후의 심판’에 이르는 장대한 역사의 질서가 표현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콘을 통해 예술성과 종교성을 재조명하였고, 이콘이 전성기를 이루었던 중세 말부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지옥도>의 주제와 변천과정에 대하여 지오토(Giotto)와 단테의 『神曲』,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의 시스티니성당 천정화를 들 수 있다.
1. 지오토(Giotto)의 <지옥도>
중세의 예술은 교회의 시녀였다. 그런 예술의 타율성에 반하여 지오토는 독창적인 개성을 표현한 자율적인 최초의 화가이다. 그는 중세의 종교적이며, 상징적, 추상적인 미술에서 탈피하여 인간적이며 현실적, 구체적인 회화공간을 창조하였다. 중세에 있어서 신앙의 중심이 된 생활관은 인간성을 종교의 속성으로 간주하였고 작품이나 작가라는 용어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현상은 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인식되는 생의 가치관이 집단성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뜻한다.
13C 말기의 미술은 하나의 통일된 양식으로 접근하게 되며, 지오토는 그의 회화에서 중세의 미술 경향을 벗어나서 최초의 새로운 양식을 창조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르네상스 정신이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데 즉 (1)사회적인 변화가 예술의 의미와 환경에 영향을 미친 점, (2) 신앙과 사상의 변화가 예술작품의 내용과 목적에 영향을 미친 점, (3) 전통적인 표현양식으로부터의 탈피가 예술의 표현양식에 변화를 가져온 점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요인들은 지오토 회화공간의 성립에 있어서 시간과 공간의 역사적인 의미와 그 범위의 변화를 말해 주며, 지오토의 조형적인 정신과 결합된다.
지오토 회화공간의 조형적 의의는 중세의 조형 규범의 개혁, 고대의 전통을 이어 받은 예술상의 제문제, 인간의 인식과 감정, 심리적인 요인을 결합하여 입체적이고 시각적인 통일체로서의 회화공간을 이룩했다는 데 있다. 지오토의 회화공간에 대한 변화는 그를 우리가 르네상스의 시발로 보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2.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Sistina) 성당의 천정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는 이탈리아 성기(盛期)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작가이면서도 反르세상스적이며 反고전주의적인 작품을 남긴 작가이다. 신앙심이 매우 깊었던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가와의 짧은 만남의 기간 동안에 절대적인 신성과 결합하며 이상적인 미를 추구하는 新플라톤 주의와 함께, 이러한 이상미에서 생겨나는, 자연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사상에 영향을 받아 르네상스적인 질서나 원근법에서의 탈피와 통일성의 제원리를 무시한 독특한 인체비례를 추구한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에 나타나는 인물상들의 이상적인 미는, 이 작품의 구상이 극히 심오한 신학을 근거로 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이교도적인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말년에 가서 어느 정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되는데, 신교도의 신앙을 가진 여류시인 비토리아 콜로나(Vittoria Colorna)와의 만남이 그것이다. 비토리아 콜로나와의 만남으로 미켈란젤로는 新플라톤 주의에 입각한 크리스트관에 신교도의 신앙심이 순화되어 신 앞에서의 인간의 나약함과 겸허함을 인식하게 된다.
이 천장화는 모순되는 시점의 방향에 의해 수백 명의 인체가 자율적으로 조화를 이루면서 미켈란젤로의 생애 자체가 모순으로 입각한 예술가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을 제작함에 있어서 그는 200에서 300점에 달하는 뎃생을 하고 그것이 끝났을 때에 그것을 기초로 거대한 밑그림에 착수했다. 디자인의 대부분과 밑그림의 전부는 소멸되었지만 상당수의 훌륭한 습작이 남아있어 제작의 모든 세부묘사의 흔적을 볼 수 있다.
C. 이콘의 미학과 현대미학
1. 이콘의 미학
787년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에서 이콘의 사용이 공식으로 인정되었지만, 신을 그린다는 문제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이콘에 대한 신학과 이론이 정립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에 맞는 가시적인 ‘형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미메시스(mimesis)4적인 고대의 작품을 전형으로 삼을 수도 없고, 그리스도를 일반 초상화와 같은 형식으로 그릴 수도 없는 법이다.5 이콘이 우상숭배의 혐의는 벗었다고 하나, 그 문제는 수면 속으로 잠긴 것일 뿐 결코 공의회의 선포만으로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실제로 ‘이미지’나 ‘형상’이 지닌 상징의 신비 때문이다.
그 신비는 이미지가 다의적이라는 것이다.6 이미지가 아무리 원형의 상징을 드러낸다고 해도 그것은 보고 느끼는 사람에 의해 전혀 다른 해석들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소중히 여기고 바늘로 찌르거나 칼로 자르거나 불태우는 일을 마음의 동요 없이 해낼 자가 있을까? 우리를 주저하게 만드는 그 무엇, 바로 그것이 이미지가 지닌 신비이다. 그 신비는 이미지를 통한 어떤 대상의 자기표현과 연관된다. 그래서 우리는 사진과 대상간의 연관성을 상정한다. 그 사진을 통해 대상의 현전을 목격하든, 아니면 사진을 통해 그 대상을 지향하든 간에 우리는 레지스 드브레(Debray, Regis:1940~)의 말처럼 이미지 앞에서 결코 불가지론자가 될 수 없다.
이미지가 지니는 이러한 신비 때문에 이미지에는 늘 우상숭배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동방정교회의 이콘도 예외일 수 없었다. 이콘의 탄생 자체가 이콘의 이론적, 형식적 성립에 있어서 헤브라이즘(Hebraism)과 헬레니즘(Hellenism)의 문화적 분위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8 이콘의 형식은 결코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그레코-로만 양식의 이상주의적 사실주의 기법을 그대로 수용할 수도 없었다. 우상숭배의 위험 때문이다. 이러한 헬레니즘의 미는 스토아 철학에 기초하는데, 스토아(stoa) 철학에서는 비례와 조화를 강조하며 미를 정신의 합리적 질서와 등식화한다. 이러한 조화에서 정신의 합리적 고양인 ‘쾌(快,chara)'가 발생한다고 한다. 이러한 미의 체험은 대상의 객관적인 미와 관찰자의 주관적 미의 조화에 기인한다. 그래서 그레코 -로만 예술은 대상을 이상주의적 사실주의로 표현하려했다.
그렇다고 이콘은 성육신의 교리 때문에 헤브라이즘의 비구상적인 형식을 따를 수도 없었다. 동방정교회 이콘은 결국 이 두 양식의 절충 속에서 합의점을 찾아야 했다. 이콘은 현세적인 세상에서 느낄 수 없는 천상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러한 이미지는 현세적 세계와는 다른 어떤 것이어야 했다. 왜냐하면 이콘은 성육신의 표현으로 성육신이 지니는 미적 가치, 즉 내재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의 결합에서 발생하는 ‘美’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절충된 형식이 바로 ‘상징적 사실주의’9양식이다. 동방정교회, 즉 비잔틴 교회는 그레코-로만의 미적 조화와 균형의 형식미를 버리는 대신 그것이 지닌 미의 이성적 측면을 이콘에 수용해야 했다. 그것은 미의 판단이 이성적 측면과 연계되어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한 조화에서 오는 쾌로 말미암아 인간의 정신이 영원한 곳으로 고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적 예지와 예지적 우주의 미가 관조에 의해 현현될 수가 있다.”는 플로티노스(Plotinos:204~269)의 영향10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콘의 미학은 일반적인 작품에서 찾는 고전주의적이고 자연주의적인 ‘미’와 다른 ‘초월의 미’이다. 고전주의적이고 자연주의적인 ‘미’는 헬레니즘이나 르네상스의 미로서, 비례와 조화를 강조하며 미를 정신의 합리적 질서와 등식화한다. 이러한 조화에서 ‘쾌(chara)'가 발생한다. 그러나 이콘의 미학은 아름다움의 현현이 이콘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러한 신적 아름다움은 빛으로 상징된다. 이 아름다움은 실제 세계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성화(聖化)의 단계를 거쳐 궁극적으로 획득하게 될 신화(神話:theosis/the doctrine of deification)된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미이다. 이콘은 그러한 신화된 인간의 모습을 상징한다. 그렇다고 우리 인간이 신화를 통해 신적 본질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단지 신적 에네르기아(energia: 러시아어, '에너지'를 의미)에 참여할 뿐이다. 초월적 미는 이러한 에네르기아의 발현이다. 인간이 이콘을 통해 체험하는 아름다움은 바로 이러한 신적 에네르기아이다. 그것은 빛으로 표현되는 아름다움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움‘, ’에네르기아‘, ’빛‘, ’인간의 신화‘는 모두 이콘 미학에서 상호연관성을 갖는 말이 된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드러난 사건이 바로 ’성육신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신학이 초월적 미의 이콘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이 이콘의 미학이며, 이콘의 미학적 신학이다. 이콘의 미학적 요소들로 그리스도의 성육신 신학이 설명 가능하다. 이것이 비잔틴 미술이 정교하게 가공된 테세라(tessera)11 조각들로 모자이크 벽화를 제작한 이유이다. 테세라 조각들에서 반사된 찬란한 색과 빛은 바로 초월적 빛, 초월적 아름다움을 재현하려한 것이다
이콘의 초월적인 빛에 대한 미학적 신학은 플로티노스의 미학에 근원을 둔다. ‘일자(一者, the one, to hen)로부터 마지막 단계인 질료까지 이 빛은 유출되며, 일자로 멀어질수록 밝음이 약해진다.12 그러나 빛의 근원인 일자는 최상층으로서 빛으로 가득 찬 세계이다. 그곳은 너무나 밝은 빛으로 인해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는 ’초이성‘이 지배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으로 우리가 초월적인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으며 또한 인간의 제한된 언어는 이러한 절대자를 표현하기에 부적절하다. 이것이 동방정교회의 부정신학(apophaticism)13이다. 이콘의 미학은 부정신학의 토대위에 형성된 것이다.
2.이콘의 현상학적 방법론
현대미학으로 이러한 초월적 미를 규정할 수 있을까? 현상학에서 후설(Husserl, Edmund:1859~1938)의 ‘지향적 대상’과 하이데거(Heidegger, Martin:1889~1976)의 ‘존재의 비은폐’, ‘진리의 자기현시’라는 말에 주목하자. 또한 현대미학에서 언급되고 있는 ‘숭고(崇高,sublime)’와 ‘시뮬라크르’에 주목하고자 한다.
후설은 그 동안의 철학이 중점적으로 다룬 이성과 관련된 모든 것을 ‘괄호’속에 넣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인식이 시작되기 이전의 근원적 차원에 집중한다.14 이성을 통한 인식이 일어나기 이전, 퐁티(Merleau-Ponty, Maurice:1908~1961)의 표현대로 그것은 ‘원초적 지각’이 일어나는 곳이다.15 ‘지향적 대상’은 그 지시적 성격으로 인해 지시 대상이나 지향적 대상의 실재 여부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대상에 대한 이성적 판단 이전에 발생하는 현상적 경험을 기술한다.
후설의 ‘괄호 넣기’와 ‘지향적 대상’은 이콘에서도 적용되는데 ‘괄호 넣기’는 이콘의 부정신학과 맥을 같이한다. 또한 이콘의 ‘지향적 대상’은 이콘과 관련된 신앙적, 미적 체험들에서 경험되는 우리 인식이 지향하는 대상이다. 이콘에 그려진 초상은 결코 이 세계의 실재적 대상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화된 인간’의 모습을 지향한다. 이콘은 이콘에 그려진 대상으로 우리의 인식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직관을 통해 우리의 인식을 또 다른 이콘 이면의 세계를 지향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콘의 지향적 대상은 그리스도의 원형이다.
아울러 이콘의 체험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하이데거가 말한 ‘진리의 비은폐’사건이다. 이콘은 그리스 신전이 그러하듯 또 다른 ‘세계의 건립’과 ‘대지(大地)를 생산’한다. 이콘을 통해 이콘이 상정하는 ‘초월적 세계’가 드러나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와 이성으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가 가시적인 이콘을 통해 현현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한 아름다움이 발생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미의 발생을 하이데거는 ‘진리의 자기 현시’라고 말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반 고흐의 그림은 바로 구두를 통해 그러한 세계가 개시됨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고흐의 구두 그림을 통해 구두라는 존재자의 진리가 정립되고 이러한 진리의 일어남이 ‘미’리고 부른다. 작품속에서 진리가 빛나는 것, 그것이 바로 아름다움이다.17 하이데거에 있어서 예술은 진리의 일어남의 좋은 증거이다. 현대 철학이 이성에 대한 의심을 시작하기 오래전에 이미 동방정교회는 부정신학을 통해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인정했다.
이와 달리 데카르트는 미를 대상과 이성의 일치에 두고 있다. 이성에 의해 대상이 이해될 때 아름답다고 느낀다. 동방정교회인들은 관조를 통해 이콘에서 드러나는 진리의 자기현시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미술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동일하다. 현대미술은 더 이상 이성과 대상에 의존한 미를 추구하지 않는다. 이콘이 그레코로-만 미술의 이상주의적 사실주의를 포기한 것과 같이 현대미술도 대상과 이성에 의존하는 고전적인 미를 버린 지 오래이다. 현대미학은 이러한 미를 미가 아닌 ‘숭고’라고 이름한다. 그것은 낭만수 있다는 입장이라면 후자는 초월적인 것을 우리 인간의 언어와 개념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주의에서 그 전조가 보였던 것이다. 물론 하이데거의 미학에는 아방가르드 예술에 대한 배려가 생략되어있다. 그러나 아방가르드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현대미술은 끊임없이 ‘진리’자체를 부정해 왔다. 헤겔(Hegel, Georg Wilhelm Friedrich:1770~1831)이 예술의 종말을 고했다.
‘이콘의 파괴논쟁’도 결국 이콘이 지닌 존재론적 문제에 기인한다고 보면 이러한 유사성에서 이콘을 현대적으로 이해할 근거를 하이데거에서 찾고 있다.
3.이콘과 숭고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의 ‘비은폐’를 통해 드러나는 ‘진리의 자기 현시’는 ‘숭고’를 현시한다. 현대미술은 비례와 균형을 파괴하고 대상의 사라짐을 통해 일반적인 미가 아닌 ‘숭고’를 표현한다. 즉 인간의 합리적인 인식의 한계를 넘어선 것을 체험하는 불편한 쾌감과 관련한다.18 이콘은 자연적 대상을 연상할 수 없게 표현함으로 일반적인 미를 찾을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현대미술이 고전적, 자연주의적 미를 파괴함으로 얻게 된 미도 결코 아름답지 않다. 그런데 이콘이나 현대미술은 우리에게 묘한 감흥을 일으킨다. 이러한 미적 판단의 불가능은 긴장과 불쾌를 만들어내고 그러한 감정의 해소를 통해 우리는 일종의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느끼게 된다. 이것이 현대적 의미의 숭고이다.
동방정교회 신전에 들어가 본 사람들은 그 압도적인 이콘이 만들어내는 ‘아우라(aura)'에 놀랄 것이다. 로버트 스미드슨(Robert Smithson)의 '나선형 둑(Spiral Jetty)'에서 숭고를 경험한다. 현대미술은 때로는 ’아우라‘를 통해 때로는 ’아우라‘를 파괴하면서 관람객들을 놀라게 만든다. 이콘 앞에서 우리는 유사한 충격에 휩싸인다.
18세기 낭만주의에서 주목 받던 숭고가 오늘날 다시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은 흥미롭다. 현대 서구문화의 흐름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미학과 숭고의 전성시대’로 요약될 수 있다고 한다.19 늘 변방의 자리에 있던 미학과 숭고가 현대 사회의 관심의 중심으로 들어온 것은 포스트모던 문화 자체가 문화적 변혁의 기획으로 그러한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오랜 동안 서구 문화사를 관통해 왔던 로고스중심주의가 배제하거나 은폐해 온 것들, ‘타자’ 또는 ‘객체’, 그리고 ‘직관’이나 ‘감성’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지배적 담론에 대한 반성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합리주의와 고전주의적 미의 개념으로는 아방가르드이래로 현재까지 진행된 예술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이러한 현대미술의 경향을 미학에서는 “미의 미학에서 숭고의 미학에로의 이행”이라 설명하고 있다. 숭고는 시간예술인 문학과 음악의 ‘예술 체험’에 그 원천을 두고 있다. 숭고의 체험에서 인간은 공포와 전율, 기쁨과 환희를 동시에 체험한다.
리오타르(Lyotard, Jean-Francois:1924~)의 숭고는 칸트가 말하는 크기와 비례에 발생하는 ‘수학적 숭고’나 대자연의 웅대한 ‘힘’과 관련된 ‘역학적 숭고’와 다르다. 또한 칸트이전의 위(僞) 롱기누스(Longinus:A.D.1세기경)에서 보여지는 연설문의 장엄한 형식에서 오는 숭고와도 다르다.20 아방가르드 이전의 숭고가 ‘자연미’와 관련한 것과 비교해서 리오타르의 숭고는 예술 속으로 옮겨진다. 즉 인간의 합리적 인식의 한계를 넘어선 것을 체험하는 불편한 쾌감과 관련한다. 현실의 부정인 불쾌와 초월적 긍정인 쾌가 교차하는 순간, 그 순간에 아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긴장의 순간, 그것은 고통의 순간이다. 이러한 파괴의 고통에 의해 감성이 극도로 예민하게 되고 초월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이 순간에야말로 우리의 삶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이 극도로 긴장된 순간이 지니는 폭발력에서 리오타르는 숭고의 미학적 의미를 찾고 있는 것이다.
리오타르는 이콘의 종교성과 신비성을 부인할 것이 분명한데, 현대미술이 숭고로 해석이 가능하다면 이콘 또한 가능하지 않을까? 물론 ‘초월적인 미’를 상정하는 이콘은 현대미술과는 다르다. 그러나 이것을 직관적으로 느끼는 인간의 숭고의 느낌은 유사하지 않을까? 현대의 숭고 개념을 초월적인 이콘의 미학으로 대체할 수 있는 이론적 적립의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4.이콘과 시뮬라크르
현대미술에 이와 같은 숭고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숭고는 실재의 파괴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시뮬라크르(simulacre)에 의해서도 나타난다. 시뮬라크르는 숭고를 파괴함으로 숭고를 발생시킨다. 어떤 사람이 현대미술을 보면서 충격과 놀람에 휩싸였다고 하자 그 사람은 그 충격에서 회복되면서 묘한 ‘희열’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불쾌’ 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그가 그에게 충격을 준 그 작품이 결국 실재보다 더 실재같은 시뮬라크르라는 사실을 만약 발견한다면 그는 또 한 번 불쾌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결국 숭고가 사라짐으로 또 다른 숭고를 접하게 되는 것이다. 미는 오래전에 파괴되고, 실재도 사라졌다. 미가 사라진 자리를 숭고가 대신한다. 그러나 믿었던 숭고 또한 숭고를 부정 함으로 숭고가 된다. 우리가 믿었던 작품은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그것은 실재를 가장한다. 실재가 있던 자리에 시뮬라크르가 있다. 모든 의미들은 극에 달해 결국 내파(implosion)된다. 예술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모든 것들이 예술이 된다. 모든 것이 예술임으로 예술 자체도 사라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의 세계는 무엇인가? 시뮬라시옹의 세계이다.21 시뮬라크르의 공모, 즉 “예술의 공모(complot de 1` art)"는 너무나 치밀하여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세계를 바꾸어 놓는 것이다. 더 이상 예술은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다.
보드리야르(Baudrillard, Jean:1929~2007)는 오늘날의 시뮬라시옹에 대해 “원본도 사실성도 없는 실재, 즉 파생실재를 모델들로 가지고 산출하는 작업이다.” 그렇게 함으로 결국 원본과 대상 간의 차이를 사라지게 함으로 결국 <다름>이 사라져버리게 된다. 재현적 이미지의 상상의 세계는 이 시뮬라시옹 속에서 사라진다. 사라져버린 것은 모든 형이상학이다. 그러므로 실재를 상정하는 거울도 사라지고, 실재는 무한정 재생산될 수 있다. 어떠한 상상 세계도 더 이상 실재를 포괄하지 않는다. 이러한 시뮬라시옹의 세계에서는 ‘지시대상’22은 소멸되고 결국 이콘의 지향적 대상의 사라짐이다.
기표가 더 이상 전달할 기의가 없다면 이콘은 과연 무엇이 될까? 마치 ‘예술계’가 ‘예술의 공모’를 통해 무의미한 것들을 예술로 둔갑시키듯이, 기독교도 의미 없는 이콘에 초월적 가치를 상정하고 그것을 통해 미치 신적 권위가 이콘에 임한 듯이 교회에 임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교회의 권위를 세우려고 한 것은 아닌가? 이콘파괴론자(iconoclast,eichonomachos)들은 기독교의 이러한 공모를 간파하고 이미지가 실재의 없음을 더욱 가시화한다는 사실에서 이미지를 파괴하려 한 것은 아닐까? 이콘파괴론자들은 그러한 공모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가장하려 했다면, 이콘옹호론자들은 이미지를 통해 그러한 공모를 너무 무리하게 가시화했는지 모른다.
인류의 시작과 같이 했다고도 할 수 있는 예술과 종교와의 만남, 예술의 기원에서부터 고대, 중세,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예술과 종교가 가장 밀접한 관계가 형성되었던 비잔틴 미술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양식인 이콘을 조명하여 성상 파괴논쟁의 원인 규명을 교회의 공식입장인 공의회와 교회회의의 문헌에 따라 검토해 보고 또한 이콘의 미학적 의미와 목적, 이콘의 대표적 작품을 알아보고 이콘의 미학 중 현대미학적 관점에서 재해석에 접근해 보고자 하였다. 여기서 예술과 신학의 다양한 관점과 연관성에 대한 연구와 예술과 신학의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현재의 예술과 신학의 현주소 등의 연구의 아쉬운 부분을 밝혀둔다.
성상 파괴논쟁의 결과여부에 관계를 떠나 이콘은 비잔틴 미술에서의 발전과 더불어 훌륭한 작가와 수많은 작품을 남긴 동시에 전통적인 표현양식으로부터의 탈피가 예술의 표현양식에 변화를 가져와 르네상스 정신이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콘의 미학에서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신학이 초월적 미의 이콘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것이 이콘의 미학이며, 이콘의 미학적 신학이다. 현대미술의 경향을 미학에서는 “미의 미학에서 숭고의 미학에로의 이행”이라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의 세계는 무엇인가? 시뮬라시옹의 세계이다.
기독교와 현대미술
1. 기독교에서의 이미지 담론
기독교에서의 미술 (시각예술)에 관한 담론은 구약 십계명 율법으로 인해 금기시 되어오다가, 본격적인 담론은 726년 레오 3세에 의해 주도된 성 화상에 관한 논쟁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 중에서도 신에 대한 이미지 제작은 금지되었지만 성인이나 성서내용을 주제로 한 이미지들은 주로 수도원을 통해 제작되고 교회와 일부 부유층에 보급되었다. 특히 성인들의 이미지에 기적사화까지 부가하여 보급한 이미지들은 숭배받기까지 이르렀고 이러한 이미지들의 경제적인 부가가치 때문에 이를 제작한 수도원들이 부요해지자, 수도원을 장악하기 위한 수도원(원장)과 교회(교황), 수도원과 왕(황제, 군주), 교회와 왕 사이의 권력싸움은 끝이지 않았다.
성 화상에 관한 신학적 논쟁은 크게 두 주장이 대립하였다
. 결국 이미지라는 물질과 물성 자체에까지 숭배할 수밖에 없다는 우상타파적인 주장과, 이것은 물질에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통해 성인들의 발자취를 환유함으로써 이를 바라보는 신자들의 신앙과 교육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성 화상 논쟁은 그리스도론 논쟁으로 이어졌는데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하나님의 살아있는 성화상이라는 성 화상 지지자들의 주장이었다.
결국 이 논쟁은 11세기까지 이어지면서 동방교회에서는 이미지 자체에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성인들의 영성과 예수의 말씀 같은 성서내용을 신앙적으로 환유하는 매체로 수용하였다. 이것을 통해 신앙을 고양시키며 성인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는 이유로 교회내부에 성인들의 도상과 성서내용을 주제로 한 성화를 설치 할 수 있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전히 교회 안에 입체적인 조형물 설치는 금지하고 있다. 서방 가톨릭교회는 동방교회와 같은 이미지 논쟁을 거치지 않으면서도 교회의 필요에 따라 종교화나 조형물을 신앙을 고양시키는 교육과 장식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종교화는 물론 예수 십자가상을 비롯하여 피에타를 위시한 성모 입체조형물 설치도 허용하고 있다.
개신교회는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 말씀 중심의 교리를 이유로 이미지를 우상숭배이며 말씀을 흩뜨리는 반기독교적인 매체로 규정짓고 교회 안에서의 사용을 전면적으로 금지하였다. 그러나 정작 루터는 자신의 종교개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크라나흐를 통해 자신의 초상화를 유포시켰으며 시각예술에 대해 어느 정도 우호적이었으나 칼뱅은 교회 안에서 이미지 사용을 금지하였고 급진주의자였던 칼 쉬타트는 교회 안에 있던 모든 이미지를 파괴하기까지 하였다.
2. 기독교미술과 교회미술
넓게 정의한다면 교회에서 사용하지 않더라도 기독교를 내용으로 담은 미술을 기독교 미술이라고 할 수 있으며, 교회에서 사용하는 미술 즉, 색유리, 제단화, 십사처, 십자가, 성모상 등과 같이 전례와 교육을 위한 것을 교회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교회미술은 기독교 미술 안에 포함 될 수 있다.
초기 기독교박해시대에는 기독교를 상징하는 여러 기호들이 들장하기 시작했는데 이 기호들에 의미 층이 두터워지면서 상징을 부여한 도상이 되기도 했다. 기독교를 상징하는 물고기 형태나 마리아를 상징하는 백합, 영혼불멸을 상징하는 공작새 등과 같은 다양한 이미지에 이와 같은 기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제작하여 이것을 기호 혹은 상징화하여 예배와 교육을 위한 매체나 장식이나 표지로 사용하여왔다.
가톨릭이나 개신교에 관계없이 현대교회들은 전통적으로 내려오고 있는 이러한 상징적 도상들을 큰 교리적 검열 없이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도상학자들에 의해 이미 밝혀진 이미지들 이외에 현대에 와서 새롭게 창작하여 사용하는 상징 도상은 없다. 이러한 도상들을 원형으로 한 다양한 형태로 디자인하여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새로운 기독교 도상을 창조한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뒤따른다. 우선 누군가에 의해 새롭게 창작된 도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통해 상징적인 공감대를 창출하여 권위를 부여할 것인지는 쉽지 않다.
새롭게 창출된 도상을 많은 교회와 신자들의 일정기간 연속적인 사용의 결과로써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독교 안에서 자연스럽게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그것은 가까스로 유사한 도상으로 자리하게 된다. 이것도 일정기간 사용이 단절되면 이러한 도상은 사멸되기 쉽다. 최근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에 힘입어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국가에서 체 게바라 이미지와 유사한 혁명가 청년 예수 이미지들이 창작되어 교회운동권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후대에서도 도상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인지는 미지수이다. 유럽 중세기에 교회에서 사용하던 여러 가지 상징과 기호들은 그 당대 사람들에게는 일상 언어와 같았으나, 종교개혁 이후 그 의미전승이 단절되면서 현대인들은 중세의 기호와 도상을 그 당대 사람들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도상은 그 사회의 상황에 따라 한시적인 도상으로 사용되다가 사멸한 것도 있고, 오늘 까지 전해 내려오는 도상도 있다. 전통적인 도상일지라도 시대에 적절하게 새롭게 디자인될 수 있다. 도상의 재창조는 지속되어야하며 이러한 작업은 그 시대의 작가와 신학자들의 몫일 수 있다.
3. 문자(말씀)와 시각이미지
이미지도 소통하는 언어들 중의 하나이며, 시각 이미지는 문자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거나 상상력과 감성을 문자보다 한층 더 환기시킬 수 있는 매체일 수 있다. 말씀 중심이란 문자 언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각 이미지가 우상이라고 한다면, 문자도 우상일 수 있다. 무한한 하나님을 한정적인 언어에 가두거나 무한함을 문자매체만으로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찬양과 경배를 위해 문자와 음악을 활용하면서도 시각 이미지에 인색한 기독교는 처음부터 문맹이 많았던 시대에 읽고 듣는 것보다 본다는 것에 더 민감했다고 할 수 있다.
현상학자 메를로 퐁티는 사유(지각)는 보는 것에서 부터 출발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또 시각이 청각보다 더 자극적이며 즉각적이라는 설도 타당하지 않다. 상황에 따라 청각이 한층 더 섬세하며 자극적일 수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중세의 시각문화(성당 정문 위에 최후의 심판이 부조된 팀파눔, 종교화)가 상상력을 고양시켜 천국에 대한 환상과 지옥에 대한 공포가 귀를 통한 말씀보다 더욱 심하게 각인시키는 것을 우려하여 모든 시각이미지를 우상으로 치부하고 교조적이며 직설적인 말씀중심으로 강하게 전향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중세교회는 이러한 이미지들을 이용하여 다수가 문맹이었던 신자들을 신앙적으로 양육하는 반면에, 상황에 따라 이미지를 통해 공포심도 유발시켜 구속하고 감시했다. 시각 이미지는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상상력을 고양시키는 힘이 있지만, 눈으로 본 것 이상의 상상력을 유발시키는 힘은 부족하다. 그러나 문자를 통한 상상력의 범주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무한할 수 있다.
특히 소설이나 시, 음악은 그림이나 영화와 같은 시각이미지 보다 더 큰 상상력을 유발하기도 한다. 플라톤은 예술가 중에서도 특히 시인들이 아테네의 젊은 청년들에게 상상력을 불어넣어 이들을 나약하게 만든다고 비난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의 말씀은 소설이나 시와는 성질이 다르게 가능한 상상력을 배제시킨 규범적이며 직설적인 절제된 웅변 같은 설교를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강하게 관철하고자 했다.
루터는 예배에서 제단화 같은 시각예술을 허용하고 교육적으로 활용하고 시각예술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는 표현이며 동시에 말씀의 연장으로 간주하였다. 같은 종교개혁자라고 할지라도 특히 칼쉬타트는 1521-22 사이에 비텐베르크를 중심으로 성 화상을 파괴하였는데 교회 안에 성상을 비치하는 것은 십계명의 제 1계명을 위배하는 것이며 제단에 새겨진 우상들도 유해하고 사악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파괴하는 것은 선하며 합당하고 찬양받을 일이라고 하였다.
루터의 육화교리는 영성이란 물질과 분리할 수 없으며 은총의 수단으로써 시각예술은 복음을 실어 나르는 도구였다. 즉, 그림과 말씀을 상호 보완함으로써 더 효과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고자 하였다. 결국 종교개혁자들이 성 화상의 효용성에 관해 주창한 것은 중세 말기 성 화상에 매달리며 기적과 은총, 기적을 바라던 개인적인 기복신앙을 타파하고 말씀 중심으로 온전히 서기 위함 이었다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시기에는 이미지에 대한 담론은 신학적이기 보다는 중세말엽에 극심했던 성인숭배와 유골숭배, 성 화상숭배를 비롯한 성지순례까지 미신적이며 기복적으로 왜곡시킨 가톨릭교회에 대한 비판과 믿음을 바로 세우고자했던 저항으로서 성 화상이 수난을 당했다고 할 수 있다. 이미지에 관한 종교개혁자들의 말씀중심의 신학은 오늘날까지 개신교회가 시각 이미지들에 관해 신학적으로 불편한 전통을 갖고 있는 것이다.
4. 기독교와 현대미술
감각적인 것을 그다지 바람직하게 여기지 않았던 기독교의 사상적 전통에서 볼 때 시각 이미지(예술)는 종교를 세속화하고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이며, 우상숭배와 기복주의로 흐르게 한 주범으로 간주되었다. 무한한 하나님에게 어떻게 명사를 붙일 수 있는지에 대한 보편논쟁은 아름다움(예술)과 성스러움(종교)을 분리시켰다.
예술이란 매체로는 하나님의 인성 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대에 와서 하나님은 자유나 존재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서유럽에서는 아이콘을 제외한 그 밖의 제단화와 성당을 장식하는 종교화와 같은 기독교 내용을 담은 회화와 조각상들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시기를 지나면서 점차 시들해졌다.
현대에 이르러 종교화 제작만을 고집하는 특별한 작가들을 제외하면, 고갱과 고호, 루오, 피카소같은 작가들의 종교적인 주제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세속적인 화가와 종교적인 화가의 구분은 사라졌다. 말레비치 같은 러시아 아이콘 전통을 기반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도 있지만 현대미술에 와서는 기독교 도상적인 영향은 약화되었지만 기독교를 내용으로 한 종교화는 꾸준히 제작되고 있다.
현대예술은 세기 초의 다다이즘, 추상미술, 개념미술, 팝아트, 비디오 아트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인간이 예술에 관해 경험하고 구현해온 모든 것의 요약 판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신의 죽음과 세속화 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 최근에는 포스트모던 신학, 탈식민주의 신학까지 경험하고 있다. 이 많은 경험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기독교 신학은 이미지에 관한 신학적인 정리를 하지 못하고 있으며 십계명이 사멸하지 않고 문자주의에 매어있는 교단일수록 시각이미지에 관해 아주 쉽게 정리를 하고 부동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듯하다.
5. 키 치
감각적인 내용이 지배적인 형태와 색을 갖는 미술로 종교적 영성을 표현하기란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교회는 사실화 보다는 덜 형태적인 추상화는 거의 요구하지 않는다. 색유리조차도 형태가 분명하기를 원한다. 가장 흔하게 공급되어 많은 교회와 신자들의 집에 한 점씩 있는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 그림이 그 대표적이다.
이것을 주제로 한 그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대부분 사실주의적 표현이며 그 배경과 예수 이미지, 작품의 색감이나 질감이 키치를 벗어나지 않는다. 종교화를 통해 영적인 감흥을 받기 보다는 그 안에 그려진 내용을 더 중시한다. 특히 한국 개신교회와 신자들이 이러한 종류의 그림들을 선호하는 것인지 추정하기란 어렵지 않다. 우선 현대인으로서 습득하게 되는 교양으로서의 미술에 관한 이해와 지식수준이 현저히 낮다는 것이다.
지식수준이 높다는 사람도 이런 부류의 그림에 쉽게 감동받기 일 수다. 또 소수의 신자들만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찾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상은 경제수준과 비례할 수도 있겠지만, 경제가 나아졌다고 해도 미술관을 가기보다는 영화관을 가거나 여행하기를 더 선호한다. 미술에 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미술은 난해한 것이라는 편견이 강하고 또 어려우니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며, 미술관은 이와 관련된 작가와 평론가, 수집가와 투기하는 사람들이 다니는 특별한 장소로 오해한다. 여기에는 국내의 입시위주의 초중고 교과와 교육방법에 문제가 있다. 교육수준이 높아졌을지라도 이 영향이 종교미술을 감상하는 것 까지 미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작가들도 신자들이 선호하는 성질의 그림을 잘 알고 있으며, 이에 걸 맞는 수준의 작품제작을 의뢰받게 되면 수입문제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는 작가들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교회달력그림이다. 해마다 발행되는 다양한 달력그림들의 질이 향상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키치수준이다. 종교자체가 키치는 아닐지라도 전례를 포함하여 기복적이며 미신적인 종교행위는 상황적 키치일 수 있다. 여기에 키치적인 종교미술은 이러한 종교행위를 더 키치화 할 뿐이다. 교회는 이러한 키치 이미지를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끝없이 이용하여왔다.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 스페인, 이탈리아에서 직수입해 온 키치 성물들이 오늘 한국 교회와 신자들의 집안을 장식하고 있다. 성물의 미적 가치여부를 넘어서서 교회 제단이나 구내에 안치된 성물과, 사제로 부터 축성 받은 성물은 거의 미신에 가까우리만큼 신자들에게 우상으로 작용을 한다.
이러한 성물을 통해 신자들은 양육되고 있다. 오랜 기간 눈으로 체험한 것이 아닌 다른 작품이 그 자리를 대신할 때 그 물건은 작품이 아니라 이교도가 교회에 침투한 것처럼 여긴다. 교회에 한층 고양된 좋은 성물과 종교화를 안치하기 위해서는 많은 설득과 교회법에 가까운 복잡한 관습적인 과정이 필요하다. 교회미술을 포함한 기독교 미술의 향상을 위해서 교회가 먼저 질적인 향상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에 가장 영향력이 있는 성직자와 교회임직(위원, 장로 집사)들의 종교 이미지에 대한 바른 이해와 미적 안목을 고취시킬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
최근 현대미술관회를 비롯하여 다수의 사설 갤러리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미술에 관한 교육과정이 설치되어있다. 이러한 기관을 활용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며, 교회가 자기증식을 위한 부흥회보다는 이러한 교양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도 한 방안이다. 기업이 작가를 후원하는 메세나 운동같이 교회 기관이 작가를 후원할 수도 있으며, 소장가나 작가들이 교회에 작품을 기증할 때는 이 작품이 교회에 적절한지에 대한 검열은 물론, 기증받은 작품이 교회에서 더 이상 불필요할 경우 교회에서 철거할 수 있다는 조건이 있어야한다.
한편 민중미술이 판화와 같은 매체를 활용하여 작품을 대중화하 하고 누구나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운동을 펼쳤듯이 교회도 종교화를 대중화하고 신자들이 체험하고 느낀 것을 쉽게 표현할 수 있는 운동을 펼쳐나가면 좋을 것이다.
1970년대 풍미했던 민중신학과 견줄 수 있는 민중미술, 그리고 남미의 해방신학과 멕시코 벽화운동이 그 선례가 되듯이 교회와 신학은 시대정신을 담보해야한다. 서양 문학계에서는 ‘심미적 이성’이라는 모순된 용어를 사용한 적 있다. 중세 스콜라신학은 신앙과 이성의 간극을 좁히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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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08m0941a 문화접변
2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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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미술 연대기 (500 ~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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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시대 (3650-1100 BC) | 중세 미술 (500 ~ 1500) | 중세 초기(Early Middle Ages, 476-1000) 중세 중기(High Middle Ages, 1000-1300) 중세 후기(Late Middle Ages, 1300-1453) 중세의 몰락(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1453년) 인쇄기의 발명(1456년)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1492년) 마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 개혁(1517년)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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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753~476 BC) | |||
비잔틴 제국 (476BC-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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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미술 (BC 3300~18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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