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미술 9
달력의 예술
8부 아메리카 미술 [ Americas Art ] - 2
본 연재 글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추후, 미국미술과 라틴아메리카 미술 편에서 보충됩니다.
아메리카(Americas)
개척 민족의 비율에 따라 북부 아메리카는 앵글로아메리카, 남부 아메리카는 라틴아메리카라고 불린다. 아메리카가 처음으로 대륙의 이름에 쓰인 것은 1507년이다. 독일인 지도 제작자 마르틴 발트제뮐러가 이탈리아인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서 지도를 만들면서 아메리카란 이름이 붙었다. 아메리카가 처음으로 대륙의 이름에 쓰인 것은 1507년이다.
독일인 지도 제작자 마르틴 발트제뮐러가 이탈리아인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서 지도를 만들면서 아메리카란 이름이 붙었다. 에스파냐의 지원을 받아 대륙을 탐험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506년 사망할 때까지 자신이 발견한 대륙이 인도의 일부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현재도 그 지역은 서인도 제도라 불린다.
에스파냐의 지원을 받아 대륙을 탐험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506년 사망할 때까지 자신이 발견한 대륙이 인도의 일부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현재도 그 지역은 서인도 제도라 불린다.
아메리카 토착민(Native American)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을 지칭한다. 흔히 ‘인디언’이라고도 하나 이는 영어의 ‘American Indian’에서 온 말로, 엄밀하게는 미국내 아메리카 원주민만을 지칭할 때도 있다.
언어권에 따라 앵글로 아메리카의 토착민은 인디언, 라틴 아메리카의 토착민은 인디오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는 Y염색체 유전자 분석 등을 통해 아메리카 원주민은 시베리아를 거쳐 베링 해협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 되었다.
인디언의 호칭은 원래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인도로, 토착민을 인도인으로 오인한 것으로부터 나온 말로, 때때로 경멸의 의미를 지니는 까닭에 영어권에서는 'Native American'이라 호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북극권의 이누이트를 포함하는 경우도 있으나, 인디언이라 호칭할 경우에는 보통 이누이트는 포함되지 않는다.
유럽인들의 쇄도와 식민화이후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서 학살과 노예화, 전염병 등에 의해 그 수가 급감하였고, 특히 유럽에서 몰고온 홍역과 천연두 등은 치명적이었는데, 본격적으로 유럽의 침략자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래하기 전에 천연두와 이에 더불어 유럽인들의 침입은 인디언들의 쇠퇴를 가속시켰다.
보호구역에 1830년 이후 강제이주
아메리카의 3대 고대 문명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래로 신대륙에 왔던 유럽인들은 마야, 잉카, 모체, 톨텍, 올멕, 카호키아, 아스테카, 이로쿼이 같은 고대 문명에 놀라기도 했다고 한다.
1. 마야 문명 (Maya)
중앙아메리카의 멕시코 남동부, 과테말라, 유카탄 반도 지역을 중심으로 번영하였던 문명이다. 마야족이 세운 고대 문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2천 년 전부터 생겼을 것이라 추측된다. 300년 ~ 900년까지가 문명의 황금기였으나, 고 마야 문명은 10세기에 멸망하였다. 이후, 일부 마야 유민들이 유카탄 반도로 이동하여 신 마야 문명을 세웠다.
표식유적은, 그라티마라, 페틴 저지에 위치한 티칼 북방의 와샥툰 유적이다. 마야는 신정정치로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유사한 모양의 거대 신전을 건축하고 태양신과 달의 신을 숭배했다. 천체 관측법과 역법이 매우 발달했고 특히 마야 숫자가 매우 유명하다. 마야 숫자는 0을 사용했으며 20진법을 사용했다.
마야의 기원에는 멕시코의 올멕 및 이자파문화의 영향이 컸다. 페텐지방 서부의 시에문화, 북부의 마몬문화, 기원전 5세기경으로 추정, 차카넬문화에 마야문화의 기본양식이 확립되었으며, 밀라프로레스기에는 그 뒤에 발달되는 신성문자의 원형이 나타났다.
형성기 후기(선고전기 후기)부터, 현 벨리즈의 라마나이(Lamanai), 과테말라의 페틴 저지에서 엘 미라도르(El Mirador), 나크베(Nakbe) 등의 대도시 유적이 건설되어, 번영하였다.
고전기(기원후 300년 ~ 900년)에는 티칼(Tikal), 칼라크물(Calakmul) 등의 대도시국가의 군주가 '우월한 왕'으로서 패권을 다투었다.
'우월한 왕'인 티칼과 카라크물의 왕은 군소도시국가 왕의 즉위를 후견하거나, 후계자 다툼에 개입하여 세력을 유지하였다. 각 도시에서는 거대한 계단식 제단을 갖춘 피라미드 신전이 세워지고, 왕조의 역사를 나타내는 석비가 화려하게 새겨졌다.
고전기 후기(기원후 600년 ~ 900년)이 끝날 즈음 화전농법과 건축물에 사용되는 회반죽을 만들기 위해 삼림 벌채로 땅의 힘이 감소하여 식량부족과 질병의 유행을 초래하여, 쇠퇴를 앞당겼다
고전기 후기로부터 유카탄 반도 북부 등을 포함한 '북부지역'에서 우슈말(Uxmal), 치첸이트사(Chichien Itza) 등에 푸크(Puuc)식 벽면 장식이 아름다운 건물이 많이 세워졌다.
마야 달력
마야인들이 사용하던 달력으로 2012년 12월 21일 혹은 2012년 12월 23일까지 만들어져 있다. 이로 인하여 2012년 종말론까지 생겨났으며 5128년을 주기로 삼아 계속 돌아간다.
즉 2012년에 종말한 후 지구는 7140년 12월 즈음에 다시 부활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특이하게도 태양도 계속 멸망과 부활을 번갈아 가는 데 2번째~4번째 태양에서 지구가 먼저 없어지고 5번째~6번째 태양에서 인류가 나중에 없어진다고 기록되어있어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추세다.
바로 11시 11분 23초 또는 8시 23분 11초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마야달력은 여전히 논란의 꼭짓점에 있다.최근 미국의 고대 학자들이 2012년에 멸망이 아닌 7000년 후에 멸망한다는 마야 달력이 발견 되면서 약간의 논란이 있다.
마야 문자
상형문자(표의+표음 혼합문자)의 일종으로, 마야 문명이 사용했던 문자체계이다. 유럽의 침략 이전의 원 아메리카 문명의 문자 중 유일하게 상당 부분 해독된 문자체계이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전 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16세기 스페인의 침략 때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마야 문자는 의미를 나타내는 문자와 음을 나타내는 문자가 함께 어울려 사용되었는데, 이 때문에 일본어의 경우와 같은 혼합문자체계와 비교하곤 한다.
마야 문자는 18,19세기의 유럽인 탐험가들에 의해 히에로글리프라고 불렸는데, 이는 이들이 이집트 문자와 연관지어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자기록 자체가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복잡하고 정교하며 장식적인 특징을 보이며, 세계 나머지 문자들과 외형상 유사점이 거의 없는 특이한 문자이다.
스페인의 란다 주교
란다는 마야인의 그림 문자를 로마자와 같은 알파벳이라 생각해서 그의 생각을 토대로 란다 알파벳로 부르는 최초의 연구
러시아의 언어학자 유리 크노로소프로, 그림 문자와 음성을 나타내는 음절 문자
치첸이트사(chichen itza)
1988년에 세계 유산으로 등록된 멕시코 고대 마야, 톨텍 문명의 유적이다. ‘후 고전기 마야’의 유적으로 5세기경에 성립된 후 7세기 ~ 8세기 사이에 쇠퇴했다. 그러나 10세기 전후로 재건되었다. 신치첸과 구치첸으로 나눌 수 있는데, 피라미드와 주변에 있는 구기장과 신전, 시장, 대신관의 묘와 수도원, 카라콜이라는 탑 등이 있다.
코판 (copan기원전 725년)
‘절벽의 창’으로 불리는 유적이다. 1936년 모타과 강의 흐름을 바꾸기 전까지는 저절로 무너져가는 지역이라서 원래 3기였던 피라미드 중 하나는 아주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티칼(tikal2세기)
과테말라에 있는 마야 문명의 유적이다. 최전성기에 수만의 인구를 자랑했으나 8세기가 되어 도시는 버려졌다. 기원전 600년경부터 취락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BC 300~AD 300년에 주요 신전과 피라미드가 건설되면서 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가장 오래된 석조물의 연대는 292년이며 가장 최근의 석조물의 연대는 889년이다. 이후 약 100여 년간 소집단들이 살았으나, 10세기에 완전히 소멸되었다
팔렌케 (Palenque 6세기')
서기 6세기 무렵에 세워진 마야족의 유적이다. 1949년, 멕시코 고고학자 루이리엘이 조사에 착수했다. 그는 피라미드를 조사하다가 피라미드 내부에서 해골, 무덤, 석관 등을 발견했다. “아프리카 피라미드는 무덤이고 아메리카 피라미드는 신전” 이라는 선입관이 있었다. 세공된 석회암을 사용한 마야인들의 건축과는 달리 매끄러운 끝마무리를 위해 회반죽을 사용했으며 내부벽에는 조각을 사용했다. 가장 훌륭한 보기는 벽에 부착된 평판들 위에 회반죽으로 새겨진 것들이다. 장식용 회반죽세공과 테라코타상(像)들도 발굴되었다. 대궁전으로 불리는 곳에는 2개의 회랑을 만드는 3개의 벽이 나란히 끝이 뾰족한 둥근 천장으로 덮여 있다.
가장 크고 가장 잘 보존된 건축물에 속하는 비문(碑文) 신전은 그 상형문자 비문들로 유명하다. 1952년에 그 신전 밑에서 한 지하실이 발견되었는데 그 속에는 8세기초 승려 통치자의 것으로 여겨지는 비취로 장식된 유골이 있었다. 작은 보 릴리프('아름다운 부조'라는 뜻) 신전은 왕위에 앉은 아름다운 모형의 인물을 얕은 양각으로 새긴 회반죽세공으로 유명하다.
2. 잉카 문명 (Tawantinsuyu)
1438년부터 1533년에 걸쳐 번성한 제국이며 현재 페루 영토에 주로 자리 잡고 있었다. 1533년 사파 잉카라 불리는 마지막 황제 아타왈파는 점령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명령에 의해 살해당하고 잉카 제국의 멸망과 동시에 에스파냐 지배가 시작되었다.
네개의 "수유" (suyu)로 나뉘어 각 수유의 모서리는 (잉카 신화에 의하면) "세계의 배꼽" (Qusqu)에 서로 맞닿아 이곳에 수도인 쿠스코가 설립되었다.
1438년 파타쿠텍 잉카가 최초로 쿠스코에서 벗어난 잉카 제국을 성립시켰으며 이후 투팍 아마루, 와이나 카팍 등의 잉카를 통해 번영하게 된다. 결국, 프란시스코 피사로를 위시한 에스파냐 정복자들에게 정복 당하게된다.
사파 잉카(Sapa Inca, 케추아어로 '유일한 왕'이라는 뜻)라는 칭호로 불렸다. 이는 보통 '황제'로 번역된다. 제국으로써 성립된 시기는 9대(제2왕조) 파차 쿠티크의 때이다. 13대(제2왕조) 아타 왈파의 대에서 제국은 멸망하나 이후 잔존 세력이 남아 스페인에 저항을 계속했다.
제1왕조, 망코 카파크 (Manqu Qhapaq, 재위 1200년 전후)
제2왕조, 잉카 로카 (Inka Ruq'a, 재위 1350년경∼1380년경)
1533년 이후, 투파크 왈파 (Tupaq Wallpa, 재위 1533년)
잉카 신화
잉카 제국
아타우알파
와스카르
투팍 아마루
잉카 제국 사람
티아우아나코(Tiwanaku)
볼리비아에 있는 콜럼버스 이전의 중요한 고고학적 유적이다.
안데스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은 티아우아나코가 약 500년 동안 관례적, 행정적 수도로서 번영한 잉카 제국의 가장 중요한 전조 가운데 하나임을 인정하였다.
고대 도시 국가의 페허는 티티카카 호의 남동쪽 해안 근처, 라파스에서 약 72킬로미터(44마일) 서쪽에 있다.
2000년에 유적의 중요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에 지정되었다.
마추 픽추(machu picchu)
페루에 있는 잉카 문명의 고대 도시이며,1911년 미국의 탐험가이자 역사학자인 히람 빙엄(1875년-1965년)이 우르밤바 계곡에서 발견하였다.
현지어로는 ‘오래된 봉우리’를 의미한다. 페루 우루밤바(Urubamba) 계곡에 연한 높은 산의 산턱(해발 약 2,057m)에 위치하여, 산자락에서는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
종종 ‘잉카의 잃어버린 도시’, ‘공중의 누각’으로 불린다. 그 유적은 3m씩 오르는 계단식 밭이 40단이 있어서, 3,000개의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유적의 면적은 약 13k㎡로, 돌로 지어진 건물의 총 갯수는 약 200호 정도 된다.
마추 픽추에는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가 아직 많고, 열대 산악림대의 중앙에 위치하여 식물의 다양성이 풍부하다.
행정상으로는 쿠스코와 같은 지역에 속해 있다. 현재 페루에는 10개소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있는데, 마추 픽추는 그 중 최초로 쿠스코와 동시(1983년)에 지정되었다.
2007년 7월에는 《새로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비라코차
남아메리카 안데스 지역에 위치한 잉카 신화와 잉카 문명 전시대의 위대한 창조의 신이다.
전체 이름과 철자가 약간 다른 이름은 다음과 같다: Apu Qun Tiqsi Wiraqutra, Con-Tici Viracocha. 비라코차는 잉카 신들의 전당에서 중요한 위치의 신이었으며, 모든 것의 창조주 혹은 모든 것을 창조해 낸 신이면서 특별히 바다와 친한 신이었다고 한다.
우주, 태양, 달, 별, 그리고 시간(하늘위로 태양이 돌도록 명령하였다)을 만들어냈다고 전해진다.
또한 문명 그자체였다고도 한다. 비라코차는 태양과 폭풍의 신으로 숭배되었다.
비라코차는 왕관으로 태양을 썼으며, 번개가 그의 손이었으며,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비였다고 묘사된다.
아이유 (공동체, Ayllu)
안데스 산맥의 케추아족과 아이마라족에서 나타나는 전통적인 양식의 혈연중심적 공동체다. 잉카 문명 이전과 잉카 시대의 기본적인 정치ㆍ사회 단위다. 근본적으로는 대가족 형태이나, 자신들과 관계 없는 구성원들을, 각각의 가족들이 그들의 농사지을 영토의 안전 및 큰 변화를 주기 위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치차(chicha)
남아메리카에서 발효된 모든 종류의 음료수를 부르는 말이다. 대부분 옥수수와 연관된 반면, 이 단어는 안데스 지역에서 어떠한 종류이든 간에 집에서 발효시킨 술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며, 다양한 지역에서 역시 다른 종류의 다양한 곡물이나 과실을 이용해서 만든다.
쿠스코(Cusco)
페루 남동부 쿠스코 주에 있는 도시이다. 80 km 북서쪽으로 마추 픽추가 있으며, 안데스 산맥 사이의 해발 3600m에 있다. 케추아어로 "배꼽"을 의미하고 타완팅수우유(Tawantinsuyu, 잉카 제국의 정식 명칭)의 수도이며, 문화의 중심지였다. 1983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200년대부터 1532년까지 쿠스코는 잉카 제국의 수도였다. 쿠스코의 거리는 성스러운 동물인 퓨마를 본떠서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잉카의 통치 하에 우린(Urin)과 하난(Hanan)로 Chinchasuyu(북서), Antisuyu(북동) Qontisuyu(남서), Collasuyu(남동)였다. 잉카의 전설에 의하면, 쿠스코는 사파 잉카의 파차크티크에 의해 건설되었다.
그는 쿠스코 왕국을 활기없는 도시에서 거대한 타완팅스우유 제국으로 바꾸었다. 쿠스코의 도시 계획은 제국의 다른 도시로 만들어졌다. 1527년 와이나 카파크 사후, 쿠스코는 아타 후 알파의 지배 영역이 되었다.
1532년 4 월, 도시는 키파이판 전투에서 아타훌파에게 점령되었다. 쿠스코 전투를 거치며, 스페인 정복자에 침략당한다.
프란치스코 피차로가 1534년 3월 23일 도시를 공식적으로 발견하고 ‘매우 고상하고 위대한 도시 쿠스코’라는 이름을 붙였다. 식민 지배의 흔적은 도시의 건축물에 여전히 남아있다.
침략 이후, 스페인 식민지 사람은 수많은 잉카의 건축물, 사원, 궁전을 파괴했다. 그들은 파괴하고 남은 벽을, 신도시 건설의 기초로 사용했다.
그리고 잉카 전통 건축 방식에 스페인의 영향이 융합된 건물이었다. 키르케 구조에 타완팅스유(Tawantinsuyu)를 가미하여 쿠스코 건축물은 중후한 문화가 융합되었다.
스페인식 건축물은 잉카에 의해 만들어진 거대한 돌담 위에 만들어져 있다. 이 잉카 시대의 석조 건축물은 바위와 바위 사이에 “면도날 하나 허용하지 않는” 촘촘하고, 정교함이 있었다. 또한, 주위에는 사크사크와만 유적과 켄코 유적 등 많은 유적이 흩어져 있다.
키르케 문화
1200년대 잉카가 이주해 오기 전 900년부터 1200년까지 키르케인들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 후, 1200년대 이후 잉카 세력이 이곳을 점령했다. 사크사이우만 요새
3. 아스텍 문명(Azteca)
지금의 멕시코 지역에 존재하던 제국이다. 수도는 멕시코 중부의 텍스코코 호 중앙의 인공 섬에 있던 테노치티틀란이었다. 마야 문명의 영향을 받았다.
1519년 11월 8일, 에스파냐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가 수도 테노치티틀란에 들어갔다. 아스테카 제국의 통치자였던 몬테수마 2세는 백인인 코르테스와 그의 무리를 아스테카 문명의 전설에 나오는 깃털 달린 뱀 케찰코아틀로 여겨 환대했으나 내부의 정치적 위기를 이용한 코르테스의 계략으로 1521년, 코르테스의 군대에게 정복당했다.
아즈텍이란 이름은 나후아틀어의 아즈틀란(나우아틀어: Aztlān)에서 유래하였다. 아즈틀란은 아즈텍 신화에 등장하는 애초에 아즈텍인들이 살던 곳이다.
전해 오는 전설에 따르면, 아스텍 인은 신의 나무에서 과일을 따 먹는 바람에 신의 노여움을 샀다. 그 벌로 그들은 중앙아메리카를 방황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가 1300년대 초에 멕시코에서 비옥한 골짜기를 발견했는데, 그곳 원주민은 아스텍 인을 가리켜 '낯선 사람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스텍 인은 자신들을 멕시카(Mexica)라고 불렀다. 원래 멕시코 북부에 살다가 1200년대에 남쪽으로 거주지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의 정복 이후 이주민들이 자신들을 멕시코인이라 부르면서 이전의 선주민들을 아즈텍인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아즈텍이란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세기 이후의 일이다.
아스텍의 예술과 건축물은 신들의 힘과 아스텍 제국의 강함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졌다.
1500년 무렵, 아스텍 인들은 테노치티틀란이 홍수로 무너져 다시 지었는데 이방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도시를 세웠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두 개의 주요 도로가 중앙에서 교차하는 테노치티틀란은 정확한 바둑판 형태였으며, 해의 움직임과 일치하도록 동쪽에서 서쪽으로 달리는 주요 도로가 있었다. 아스텍 인들은 그 도시를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었다.
초기 역사 (1200년~1345년)
중기 역사 (1345년~1517년)
테파넥 족의 지배와 삼각동맹의 등장 (1372년~1428년)
몬테수마 1세 (1440년~1468년)
악사야카틀과 티속 (1468년~1486년)
아우이소틀 (1486년~1502년)
몬테수마 2세 (1466년 또는 1480년 ~ 1520년 6월 29일)
아스텍 제국의 멸망 (1517년~1522년)
볼라도르 의식
틀라치틀리
파톨리(Patolli)
인생의 시
천지 창조 전설
코이올쇼키
치치메메
아스텍의 달력, 즉 52주기 끝나는 날은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신화에 따르면 그 날에는 태양 신이 활동을 시작해서 운명의 날을 생기게 한다고 믿었다.
피의 의식
종교 달력
에르난 코르테스 ( Fernando Cortés Monroy Pizarro Altamirano, 1484년 ~ 1547년 12월 2일)의 아스텍 문명 정복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
멕시코의 군주
몬테수마 2세
벨라스케스 틀라코친
아카마피츠틀리
익스틀리소치틀
쿠아우테목
쿠이틀라우악
아스텍 신화
몬테수마 2세 (Motecuhzoma Xocoyotzin, 1466 - 1520)는 아즈텍의 군주이다. 목테수마(Moctezma, Montezuma)
아카마피츠틀리(Acamapichtli, ? - 1395년)
익스틀리소치틀(Huitzilihuitl)
쿠이틀라우악 (Cuitlahuac, 1476년 ~ 1520년)
테키치포 (Tecuichpo)는 아즈텍의 황제 몬테수마 2세의 딸이자 황제 쿠아우테목의 황후였다
소치필리(Xochipilli)
아스텍 신화에 나오는 예술, 놀이, 아름다움, 춤, 꽃, 옥수수, 그리고 노래의 신이다. 그의 이름은 나우아틀어로 "꽃의 왕자"라는 뜻을 갖고 있다. 소치필리는 마쿠일소치틀(Macuilxochitl)이라고도 일컬어지는데, 이는 "다섯 송이의 꽃"이란 뜻을 갖고 있다. 소치필리의 아내는 인간 여성인 마야우엘(Mayahuel)이며, 그의 쌍둥이 자매는 소치케찰(Xochiquetzal)이다. 토지의 비옥함과 농업 생산을 책임지는 신으로서 소치필리는 비의 신 틀랄록(Tlaloc) 및 옥수수의 신 신테오틀(Cinteotl)과 관련돼 있다.
켓살코아틀(Quetzalcohuātl)
아스텍 신화에 나오는 날개달린 뱀의 형상을 한 신이다. 뱀은 땅의 권력을 뜻하고 날개는 하늘의 권위를 나타낸다고 한다. 아스텍 사람들은 켓살코아틀이 세상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술, 예를 들어 옥수수 키우는 법이나 베 짜는 법, 시간을 알아내는 법 등을 가르쳤다고 믿었다. 풍요와 평화의 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전쟁의 신의 음모로 인해 쫓겨났다. 하지만 그가 돌아온다는 전설이 있었고, 아즈텍인들은 켓살코아틀의 재래를 믿었다. 코르테스가 처음 아즈텍에 왔을 때 아즈텍인들은 그들을 켓살코아틀로 착각(우연히 십자가는 켓살코아틀의 상징이기도 했다)하였다. 마침 케찰코아틀이 돌아온다는 해였기에 그들은 코르테스 일행을 극진히 모셨으나, 결국 그들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여정의 두루마리(Tira de Peregrinación)
아스텍 문명의 고문서이다. 아스떼까 제국의 신화와 역사가 함께 살아있는 실려있는 서사시이다. 아스떼까 제국은 멕시코부터 벨리세, 과테말라 및 온두라스를 포함하는 메소아메리카(Mesoamerica)라고 불리는 고대 문명 지역에서 발전했던 원주민들의 마지막 나라였다. 아스떼까는 1521년 스페인에 의해 멸망당하기 전까지 번영했던, 현재의 멕시코시티에 있었던 원주민들의 유일한 제국이었다. 이 고문서는 1746년에 보투리니(Lorenzo Boturini Benaduchi)가 수집한 목록(Catálogo del Museo Indiano de Lorenzo Boturini Benaduchi)에서 처음으로 그 존재가 알려졌다. 현재는 멕시코 국립 박물관 도서관에 원본을 보관하고 아스떼까의 그림문자로 작성된 이 고문서는 스페인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 멕시코 원주민들의 그림언어의 진수를 볼 수 있는 자료일 뿐 아니라, 신화적이면서도 역사적인 기록을 읽으며 아스떼까 부족의 사고방식과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귀중한 문서다.
말린체(Malinche, 1496년 – 1529년)
또는 도냐 마리나(doña Marina)는 아즈텍 출신의 인디오였다. 라 말린체(La Malinche), 말린친(Malintzin) 등으로도 부른다. 노예생활을 전전하다 에르난 코르테스의 통역이 되었으며, 에스파냐 침략군의 통역 겸 길안내인을 자처하였으므로 멕시코 및 남아메리카에서는 배신자, 반역자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에르난 코르테스(Fernando Cortés Monroy Pizarro Altamirano, 1484년 ~ 1547년)
페르난도 코르테스 몬로이 피사로 알타미라노는 멕시코지역의 아즈텍 문명을 정복한 스페인의 정복자이다.
아스텍 문명 정복
벨라스케스 틀라코친(Velázquez Tlacotzin, ? - 1526년)
아즈텍 제국의 황족이자 스페인 식민지의 초대 통치자였다. 후안 벨라스케스 틀라코친(Juan Velázquez Tlacotzin) 혹은 디에고 벨라스케스 틀라코친(Diego Velázquez Tlacotzin)으로도 부른다. 1525년~1526년 아즈텍 총독을 지냈다.
쿠아우테목(Cuauhtémoc, 1502년 - 1525년)
또는 과티모신(Guatimozin)은 아스텍 제국의 제11대 황제로 마지막 황제이다. 쿠아우테목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독수리 같은 후손이라는 뜻의 나우아틀어로, 영어에서 추락하는 독수리(Falling Eagle)로 해석하는 것은 오류이다.
테노치티틀란 (Tenochtitlan)
고대 아스텍 문명의 수도로, 현재의 멕시코시티이다. 코르테스의 침략때 철저히 약탈당했다. 12세기 중반 아스텍 민족이 멕시코 고원 중부로 진출해서 14세기 무렵 아마카피츄틀 왕의 주도로 현 멕시코시티에 테노치티틀란을 건설했다. 테노치티틀란은 15~30만 정도의 주민이 살던 멕시코 고원 최대 도시로 한껏 번영을 누렸다.
도시 이름의 뜻은 "선인장의 땅"으로, 독수리가 선인장 위에 앉아있는 땅에서 나라를 세울 것이라는 부족의 전설을 따른 것이다. 1519년 페르난도 코르테스와 그의 부하들이 마야를 정복하고 테노치티틀란으로 진격했다. 황제 몬테수마 2세는 코르테스에게 포로로 잡혀 가, 스페인 왕의 신하가 될 것을 요구받았다.
결국 아스텍 제국은 스페인 정복자들의 공격으로 무너지게 되었다. 호수 위에 떠 있는 둘레 10여km의 장방형 섬으로 건설되었으며 1978년 공사 도중 몇몇 유물이 발굴되었다. 그 뒤 멕시코 고고학 연구소 주도로 대규모 발굴 조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며 어느 정도 윤곽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4. 이로쿼이 연맹(Iroquois Confederacy)
다섯 오족 연합을 이루었던 북아메리카 뉴욕 북부의 오족 연합/아메리카 원주민의 그룹을 말한다.
모호크족: Kanienkehaka 카니엔케하카 (부싯돌의 사람들)
오네이다족: onayotekaono 오나요테카오노 (세워진 돌의 사람들)
오논다가족: onundagaono 오눈다가오노 (언덕의 사람들)
카유가족: Guyohkohnyo 구요코뇨 (큰 늪지의 사람들)
세네카족: onondowahgah 오논도와가 (언덕 위의 사람들)
6번째 그룹인 투스카로라족(Ska Ru ren, 대마를 채집하는 사람들)은 원래의 오족 연합이 구성된 뒤에 참가하였다. 이로쿼이, 이로쿼이족으로 자주 부르지만, 이 연합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하우데노사우니 (Haudenosaunee: 공동주택을 짓는 사람들)로 부른다.
투스카로라에서는 아쿠넨시엔니(Akunęhsyę̀niˀ), 모호크족은 로티논시온니(Rotinonsionni)라고 부른다. 또한, 이로쿼이 연맹은 오족 연합(Five Nations), 육족 연합(Six Nations), 공동주택(Longhouse) 민족 등으로도 불린다.
비버 전쟁, 프랑스와 이로쿼이족의 전쟁
5. 올메크(Olmec)
기원전 1200년경에서 기원 전후에 걸쳐 메소아메리카에서 번성했던 문화, 문명이다.
아메리카에서 가장 초기에 태어난 문명이며 이후 메소아메리카 문명의 모체가 된다
근대의 역사
신대륙의 발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92)
식민지 시대
아메리카의 유럽 식민지화 (European Colonization of the Americas)
초기 정복 및 영토 경쟁
초기 국가 지원 식민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존 캐벗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
아메리고 베스푸치
지오반니 데 베라사노
조앙 바스 코르테-헤알
사무엘 데 샴플레인(1567-1635)
1513년,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
쿠바
독립 전쟁, 미국 독립 전쟁
20세기 이후의 역사
중앙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전의 문명 [Pre-Columbian Civilizations]
구대륙의 고대 문명과 마찬가지로 고대 아메리카의 문명은 여러 왕국과 제국, 대형 기념물과 도시, 예술품, 야금술, 문헌들로 특징지어진다. 상형문자로 된 글과 역법(歷法) 제작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
안데스 문명에서는 고대 페루인들이 초기의 문명발전과 통치제도 및 제국 형성에 이바지했다.
중아아메리카 문명
중앙 아메리카 인디언
농업의 성공은 높은 수준의 건축·조각·시·미술 분야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정치적 통일체, 나아가 군소국가나 제국 형성의 기반이 되었다.
중앙 아메리카의 사고체계는 궁극적으로는 역법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이 역법에 따르면 260일을 주기로 하는 '의례적인 해'와 365일을 주기로 하는 '모호한 해'가 서로 맞물려 있으며 이 두 주기가 다시 52년을 주기로 순환한다. 그들의 고유한 종교적 생활은 이런 순환에 맞추어져 있다.
아메리카 문명은 농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기원은 후기 홍적세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BC 7000경)
BC 1500년 이후 정착농경
BC 1200~900년에 중앙집권적인 계급사회가 발전하기 시작
BC 500년경부터 마야·사포텍·토토낙·테오티우아칸 등 다른 문명이 등장
1428년 아스텍 문명 등장
1521년 에르난 코르테스에게 정복
안데스 문명
안데스 지역에서 농경부락의 정착은 BC 2500년경
BC 1800년경부터 초기 안데스 문명
BC 800년 통일 시기
BC 600년까지 지방화 시기
모치카, 초기 리마, 나스카, 레쿠아이, 초기 티아우아나코 등 수많은 거대왕국
1438년경 잉카 정복
1533년 프란시스코 피사로 정복
전고전기 문명 (BC 1150년 올멕 문명)
BC 300년경 절정, 중앙 아메리카 최초의 고등문화으로 BC 800년경 쇠퇴
현재의 멕시코 만 연안에 위치한 베라크루스 남부와 인근 타바스코 지역을 중심으로 예술양식은 BC 1150년경에 형성되어, BC 1100~800년에 오늘날의 멕시코 계곡(틀라틸코 문화)에서 산살바도르 공화국(찰추아파 암각화)에 이르는 지역에서 화려하게 꽃피었다.
중앙 아메리카의 토착 종교와 성상은 올멕에서 기원한다. 예술작품에 주로 표현된 주제는 재규어의 얼굴이나 인간의 형상을 한 재규어이다. 올멕 예술양식의 정교함과 힘에서만이 아니라 이러한 건축물과 기념물에서 고대 올멕 사회가 불평등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고전기 문명
A. 멕시코의 테오티우아칸 문명
도시적·팽창주의적, 이곳은 당시 수공업 중심지로 부자와 빈자들의 집에서 나타나는 차이를 통해 계급구분이 이루어졌음을 엿볼 수 있다.
B. 과테말라 저지대의 마야 문명
BC 300년 페텐-유카탄 반도의 마야문명은 마야적 특성을 지닌 도기들 외 건축은 마야 특유의 형식을 갖추면서 상당 수준 발전해 있었다. 또한, 비팽창주의적·도시적 성향도 덜했다. AD 250년 차콜 문화와 AD 600년경에 시작되어 900년경에 사라진 테페우 문화로 발전했다. 600~900년의 마야의 도시형태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주요유적은 보통 여러 가지 형태의 석조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보통 벽 내부를 잡석으로 바른 뒤 그 위를 석회석 벽돌이나 얇은 석회판으로 붙인 형태이다. 밑에서부터 여러 번 단을 쌓아 올린 신전 피라미드의 꼭대기가 숲 위로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궁전 유적들도 높이가 더 낮고, 거대한 방이 많이 갖추어졌다는 점을 제외하면 피라미드와 비슷하다. 궁전과 신전 피라미드는 보통 중앙 광장을 따라 늘어서 있다. 오랜 시기에 걸쳐 마야 문명의 심장부 역할을 담당해온 페텐 북부를 비롯한 중앙 하부지역에 중요한 마야 유적이 몰려 있다.
가장 크고 유명한 고전기 유적지인 티칼은 6개의 위풍당당한 피라미드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하나는 높이가 69m로서 일찍이 중앙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세운 건조물 가운데 가장 높다. 주변 여러 도시들의 신전들은 마야 군주의 돋을새김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1946년 밀림의 전투, 죄수 심문, 승리의식 등을 생생한 색채로 담은 극히 사실적인 모자이크 벽화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900년경 톨텍의 대규모 공격이 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페텐 북부에 있는 리오벡 지대는 독특한 구조의 신전 피라미드와 궁전으로 유명하다. 이 신전과 피라미드의 측면에는 탑 형태의 구조물들이 늘어서 있다. 이들 구조물은 정면에 계단이 설치되어 꼭대기의 입구를 거쳐 방으로 연결된 형태를 하고 있지만 방이나 계단 등은 모두 모양만 갖추었을 뿐 진짜는 아니다.
리오벡의 건축물에는 환상적인 뱀 문양이 깊숙이 양각되어 있는데 이 양각은 북서쪽의 케네스 지방으로 갈수록 더욱 현저해진다. 마야의 건축가들은 케네스에 하늘뱀 모양을 건물 정면에 새기고 건물 전체를 기이한 괴물이나 나선무늬들로 조각했다.
캄페체 서부에서 유카탄 주로 이어지는 일련의 낮은 구릉지대로 가면, 정교한 건물장식이 훨씬 절제되고 질서정연해진다. 지형적 특성을 따라 푸크 양식이라고 불리는 이 문화양식은 페텐 유적이 하부지역 중앙에 존재하는 데 비해 주로 하부지역 북부에서 발견된다.
푸크 유적지는 마야의 예술적·지적 문화의 중심을 이루었던 것이 분명하다. 푸크 양식에서는 돌조각을 붙인 뒤에 얇은 장방형의 석회판으로 표면을 장식하고 장화 모양의 아치형 돌을 사용했다. 낭하의 기둥둘레는 처마돌림띠로 장식되어 있다. 붙박이형 또는 반원주형의 기둥이 여러 개의 긴 열을 이루며 잇달아 늘어서 있다.
그리고 상층 전면에는 석재 모자이크로 만자(卍字)무늬 및 격자무늬와 긴 두건 모양의 코를 가진 하늘뱀의 얼굴이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푸크 유적은 대(大)페텐, 곧 중앙 하부지역의 중심부들이 쇠퇴하기 시작하거나 이미 붕괴된 9, 10세기에 절정에 이르렀다는 의미에서 저지대 마야의 '신제국'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1000년경 유카탄 북부지역에서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는데, 바로 푸크 양식의 대건축물이 곳곳에 자리잡은 치첸이차에 수많은 톨텍 양식의 신전과 궁전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이런 양식은 약 1250년까지 치첸이차를 중심으로 해서 유카탄 북부지역을 지배했다.
마야 문명 전성기의 마야 예술은 중앙 아메리카의 다른 예술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다른 지역의 엄숙한 양식들과 달리 마야 예술이 고도로 설화적·장식적인 데다가 때로는 극히 산만했기 때문이다.
마야 예술은 본질적으로 조소적이라기보다는 회화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석조 부조에서조차 화가들이 초벌그림을 그렸던 흔적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특성을 보여주는 예술품들은 주로 나무·깃털·나무껍질과 같은 없어지기 쉬운 재료를 썼기 때문에 대부분 소실되었다. 마야족이 다른 인디언들보다 문화적으로 우월할 수 있었던 것은 지적인 생활 때문이었다.
그러한 지적 성취 대부분은 역사적·천문학적 정보를 기록할 수 있는 수단인 역법체계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마야의 상형문자는 200년부터 스페인 정복기까지 계속 발견된다. 언어와 기록체계 자체는 엄청난 발전을 겪었다. 고전기 마야 상형문자는 기호(logogram)였는데, 대체로 하나의 그림이 단어나 개념을 나타내는 표의문자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단어나 문장이 기술될 수 있는 방식은 매우 유연했던 것 같다.
900년경 이것은 음절문자표가 기호를 보완하거나 대치되는 훨씬 더 고정된 체계로 편성되었다. 마야 수학은 2가지의 큰 성과를 이루었다. 자릿수 기수법(記數法)과 영(零) 개념의 사용이라는 고대 마야 천문학은 금성의 상합과 일식의 예견뿐만 아니라 태양력의 지속시간을 아주 정확하게 산정해냈다.
스페인 정복 이전의 상형문자를 기록한 드레스덴 사본에 이런 내용과 그밖에 마야족에게 뛰어난 천문학자의 명성을 가져다준 기타 정확한 천문학적 계산 결과들이 실려 있다.
깃털 달린 뱀의 형상을 한 쿠쿨칸(톨텍족이나 아스텍족은 케찰코아트라고 불렀음)이라는 이름의 뱀신도 많이 숭배되었다. 희생제의은 마야인은 신의 후손으로서 그 신성한 본질을 물려받은 인간이라고 여겨졌던 죽은 황제들에게 엄청난 관심을 기울였다.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서 기도를 올리고 제물을 바쳤으며 사제들은 집을 짓거나 사냥을 하기에 좋은 날을 택일했다 그러나, 100년경 이후 인간희생제의로 변했다. 마법에 대한 믿음은 오늘날의 마야족 사이에서도 널리 퍼져 있는데 대부분 스페인 정복 이전의 신앙에 뿌리를 둔 것으로 보인다.
9세기경 마야 문명은 하부지역 중앙의 서쪽 경계에서부터 쇠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인구팽창과 토지의 심각한 남용이 이런 비극을 낳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야족 신화 (→ 우주론)
사제직
후고전기 문명
A. 중앙 아메리카에서 최초로 거대 제국, 톨텍문명
900년경부터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어 1519년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의 도착 또는 1521년 그가 아스텍족을 정복한 때까지 지속되었다. 10세기는 마야 문명의 대대적인 붕괴시기이다.
900~1200년의 것으로 보이는 멕시코 중부의 유적이 푸에블라의 촐룰라, 모렐로스의 호치칼코, 이달고의 툴라 등 3곳에 남아 있다.
B. 아스텍 문명
1519년 스페인의 정복기에 중앙 아메리카를 지배한 것은 아스텍족이었다. 중앙 아메리카의 사회정치 조직체들의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위계 수준에 따른 구별이었다.
아스텍의 종교는 초자연적인 것에 이르기 위한 필수적 전제요건으로서 희생물과 고행을 강조했다. 성직자들은 큰 존경을 받지만 단조로운 생활을 해야 했으며, 참회의 의미에서 일부러 피를 흘리는 등 자기희생을 하기도 했다(→ 희생제의).
각 신전과 신은 부수적인 사제의 질서를 가지고 있었고 각 사제는 일정한 의무를 지녔다. 아스텍족은 현재의 세계 이전에 4개의 세계가 있었다고 믿었다(→ 창조신화).
4개의 태양으로 불리는 이 세계들은 그때 살던 인간과 함께 전부 대변동에 의해 파괴되었다. 새로운 5번째 세계의 사람들인 아스텍족은 태양이 하늘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태양에 '풍요'를 선사하기 위해 전쟁을 치를 신성한 의무가 있다고 여겼다. 이러한 생각은 우주의 안녕과 생존이 태양에 대한 피와 심장의 공양에 달려 있다는 관념으로 연결되었으며, 한편 태양에 한정되었던 공양은 그들이 섬기던 모든 신에게 확대되었다(→ 우주론).
안데스 문명
1532년 스페인이 페루를 침입하기 전 수천 년 동안 남아메리카의 서부 고산지대와 해안사막 여러 곳에 왕국이 발달했다.
BC 1800~AD 800년 통합
AD 600년 우아리 제국
13세기 중, 잉카문명 생성
15세기초 비라코차 잉카
1450년 후 파차쿠티 잉카 유판키 (→ 비라코차).
1471년경 토파 잉카 유판키
1572년 멸망
퀴푸
희생제의
앵글로아메리카 (Anglo-America)
기본적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지역·국가 중 영어를 주요 언어로 사용하거나, 역사적·문화적으로 영국의 영향을 깊게 받은 곳이다. 가장 일반적으로는 미국과 영어권 캐나다를 의미한다.
캐나다 퀘벡 주를 위시한 프랑스어권 캐나다는 앵글로아메리카의 범위에서 일반적으로 제외하나, 라틴아메리카 이북을 의미하는 지리적 개념으로 쓰일 때는 포함되기도 한다.
좁은 의미의 앵글로아메리카에 해당되는 미국과 캐나다의 두 나라는 아메리카 대륙의 선진국으로 개발도상국인 나머지 아메리카 대륙 국가들과 경제·사회적으로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이 있다.
넓은 범위로는 영국의 지배를 받았고, 현재도 공용어로 영어를 쓰는 카리브 제도의 일부 나라와 벨리즈, 버뮤다, 가이아나 등이 포함된다.
북아메리카( North America)
라틴 아메리카(Latin America)
라틴어에 뿌리를 둔 로망스어군의 언어가 쓰이는 지역을 말한다. 리오그란데 강 이북의 앵글로아메리카가 게르만어파에 속하는 영어를 쓰는 것에 대비해서 사용하는 단어이다.
지정학적으로 중남미(中南美)라고도 부른다. 사회정치학적으로는 미국 이남의 독립국 -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 서인도 제도, 남아메리카의 나라로 에스파냐어나 포르투갈어, 프랑스어나 이에 기반한 크레올어를 쓰는 나라를 말한다.
이들은 대부분, 메스티소, 물라토 등의 혼혈 인종이 많이 분포하고 있으며, 아시아인 계통의 원주민은 소수에 불과하다. 지배 계층은 거의 백인이 차지하고 있으나, 명목상 원주민을 우대한다는 차원으로 혼혈 인종을 대거 기용하는 듯한 양상을 보이고는 있다.
본래, 유럽인들의 자본 착취 대항해시대에 이들을 모두 식민지에 거머쥔 세력이 스페인의 콜럼부스를 비롯한 라틴 계통의 인종들이었기 때문에 라틴 아메리카라는 명칭이 붙어 있다.
중앙아메리카
카리브 제도(Caribbean)
남아메리카
사포텍 문명(Zapotec civilization)
중앙 아메리카 남부에 위치한 오악사카 계곡에서 번영했던 원주민 문명이다. 인류학적 근거에 따르면 이들의 문화는 최소 2,500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고대 도시인 몬테 알반에 라틴 아메리카 공놀이장이나, 각종 귀중품이 함께 매장된 웅장한 무덤과 같은 건축 유물을 남겼다. 몬테 알반은 라틴 아메리카 최초의 거대 도시로, 현 오악사카 주의 대부분을 지배했었던 사포텍 문명 영역의 중앙부에 위치해 있다.
노르테 치코 문명(Norte Chico, 또는 카랄/카랄-수페 문명)
페루 북중부 해안 노르테 치코 지방에 있던 30여개 도시로 이루어진 콜롬부스 이전 고대 문명이다. 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세계사에서 각자 고대 문명을 일으킨 곳 가운데 하나이다.
노르테 치코 문명은 기원전 30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번성했다. 다른 이름인 '카랄-수페'(Caral-Supe)는 노르테 치코 문명 유적지 가운데 대규모로 연구가 잘 이루어진 카랄 협곡에 있는 거룩한 도시 카랄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다른 문명과 시대 차를 비교해보자면, 노르테 치코 문명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문명보다 천 년 후에 발생했으며, 이집트 피라미드가 건설된 때와 같은 시기이며, 메소아메리카의 올멕 문명보다 2,000여년 가까이 앞선다.
콜롬부스 이전 고졸기 말기의 도기 사용 이전 문화로서, 도기를 아예 쓰지 않았고 예술이랄 것도 없었던 것 같다. 노르테 치코 문명의 중요성을 밝히고 폭넓은 관심을 끌어모았다
콘키스타도르(conquistador, 스페인 정복자)
특히 15세기부터 17세기에 걸쳐 아메리카 대륙에 침입한 스페인인들을 이르는 말이다. 페루의 잉카 제국과 아스텍 왕국을 침략한 것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은 황금을 약탈하고 원주민들을 대량 학살하기도 하면서, 잉카 문명과 아스텍 문명 등 아메리카 대륙의 고유 문명들을 파괴했다.
정복 초기에는 스페인왕이나 신성 로마 황제가 활동 자금을 대고, 수탈 수익의 일부를 나라에 납부하는 형태였지만, 후에는 정복자들 스스로가 활동 자금을 마련하고, 스페인왕 등은 형식적으로 정복을 허가해주는 형태로 바뀌었다. 그 때문에 약탈과 동업자 사이에 경쟁이 심화되었다.
정복자들은 더 이상 수탈할 물자가 없어지면, 원주민을 징용하여 농장이나 광산을 운영하여 부를 얻으려고 하였다. 16세기 후반 스페인 왕은, 정복자들이 세습 영주가 되는 것을 경계하여 부왕을 임명하는 등 직접 통치를 하려고 했다. 이 때문에, 정복자와 그 후계자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오파츠 ( out-of-place artifacts, OOPARTS)
미국의 자연주의자이자, 미확인동물학자인 이반 T. 샌더슨이 처음 사용한 용어로, 정확히는 겉보기에 매우 특이하거나 불가능한 시대에 발굴된 고고학적, 역사학적 시대와 대치되는 유물을 뜻한다.
그레이트 서펜트 마운드 (great serpent mound, 기원전 6세기 ~ 기원전 1세기)
아메리카 원주민의 선조인 아데나족이 만든 거대한 무덤으로, 뱀이 몸부림치는 형상이다
올메까(Olmeca) 문명은 실존하는가?
o 올메까는 "고무지역 사람들"이라는 뜻-멕시코 고고학자가 발굴
o 위치: 멕시코 동부 해안 지역
o 의미: 메소아메리카 문명의 기원-이로 인해 멕시코 문명의 역사도 B.C. 1,0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감
o 주요 유적: 거대 두상(13개 발견, 18톤 3미터, 요약된 사실주의), 진흙 조각상, 흙 피라미드
떼오띠우아깐(Teotiuacan)은 왜 신이 거주하는 도시라 불렸는가?
o 위치: 현 멕시코 시티 북동쪽 1시간 거리에 위치, Texcoco 호수 주변.
o 역사: B.C. 200년경에 시작해서 A.D. 200년에서 A.D. 600년까지 가장 번성함
- 인구수는 약 12만에서 20만으로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인 당나라의 수도 장안 다음으로 많은 인구, 당시의 로마와 비슷한 규모.
o 의미: 이름에 맞게 당시 메소아메리카 문명의 주요 신들이 대부분 Teotiuacan에서 기원됨
-주요신: Tlaloc(뜰락록: 비의 신), Quetzalcoatl(케살코아틀: 날개 달린 뱀의 신, 창조의 신이자 문명의 신, 아메리카 지역의 주신, 지역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짐-과테말라에서는 쿠크마츠, 유카탄에서는 쿠쿨칸, 잉카에서는 비라코차)
o 석조건축(피라미드), 조각, 미술(벽화), 도예(그릇 등)에서 우수한 자질을 보임.
똘떼까(Tolteca) 족은 야만인인가?
o 8세기경 멕시코 시 북서쪽 뚤라(Tula)에서 번성하기 시작.
o 멕시코 북동쪽에서 온 문화 수준이 훨씬 낮고 호전적인 치치메까족의 일부: 주요 유물인 거인(gigante) 석상은 전사를 상징-똘떼까 족의 호전성을 보여줌
o 뚤라에 자리 잡은 후 떼오띠우아깐 문명에 동화됨.
o 껟살꼬아뜰 재림신화 탄생
메소아메리카 最高 수준의 문명인 마야의 문화적 유산은?
o 떼오띠우깐이 그 규모와 그의 신들로 유명하다면 마야 문명은 가장 발달한 문명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o 역사: 1차 마야-과테말라의 띠깔(Tical), 멕시코 남부지역의 빨렌께(Palenque)
2차 마야-유카탄의 칟첸잇사(Chitchen Itza)와 욱시말(Uxmal)
o 문화적 유산:
i) 상형문자-수 천 권의 책
ii) 천문학의 발달
iii) 수학의 발달-0의 개념 파악
iv) 우수한 돌 가공 기술
o 오늘날의 마야인: 6백만의 마야 후손(과테말라에만 4백 5십만-전체 인구의 60%)-절대적 빈곤과 차별에 시달림- 최근 마야 원주민 후손들의 정치적 부상: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운동, 과테말라 마야 원주민 리고베르타 멘추(Rigoberta Menchu) 노벨 평화상 수상
아스떼까인(Azteca)들은 왜 인간을 제물로 바쳤는가?
o 아스텍의 역사는 아주 오랜 고대의 역사가 아니다. 불과 500년 전의 역사.
o 의미: 스페인 정복 시 존재했던 문명-오늘날 멕시코인들의 직계조상
o 역사: -Aztlan Chicomostoc에서의 탈출
-Huizilopoztli의 계시
-Tenochititlan에의 정착
-Ahuizotl의 제국 건설(1486)
o 그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 정치사회조직: 뚜렷한 계급사회
- 결혼풍속
- 경제 및 농업: chinampas, 약탈경제
o 인간제물의식과 식인 습관:
-이유: 문화적 해석(제 5태양의 신화), 경제사회적 해석
잉카 이전에는 안데스 지역에 문명이 존재하지 않았나?
o 나스카 문명의 신비
o 황금제국 모체
o 아직도 베일에 싸인 Tiahuanaco
잉카인들은 어떻게 로마제국 보다 더 크고 게다가 험악한 지형의 잉카제국을 다스렸는가?
o 역사: -9세기경 티티카카호수에서 기원
-13세기 잉카의 수도인 쿠스코에 정착
-15세기 중반 북쪽의 치무제국 정벌하고 잉카제국 건설
o 제국통치 방법:
- 행정적 분리
- 통치방식
- 사회의 조직화
- 도로의 발달
o 문화적 유산: 놀라운 석조건축술(마추피추, 삭사우아만 등), 목욕탕, 뇌수술 시행, 두개골 변형(장두족), 키푸라는 일종의 결승문자 사용
o 종교: 비라코차(태양의 신이자 창조의 신), Pacha Mama(태양신의 아내, 지모신), 인간제물의식
아메리카 미술 2부 끝. 3부에서 계속
본 연재 글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추후, 미국미술과 라틴아메리카 미술 편에서 보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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