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미술 10
최초의 입체주의자들
9부 아프리카 미술 [ Africa Art ] - 1
본 연재 글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추후, 현대 아프리카 미술 편에서 보충됩니다.
산 자를 위해 존재하는 신
아프리카에서 이론적으로 신은 초월적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내재적이다. 신을 아프리카의 가족 관념에 적응시킨 논리적 귀결에 가깝다. 종족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의 종교적 언어가 있어 그들을 하나의 사유로 묶는다.
비록 ‘신’이라는 존재가 문자적 혹은 이론적으로 확립되어 있지는 않지만 아프리카에서 ‘산 자’를 위해 존재하는 신이란, 개인을 신의 이름 아래 긴밀히 연결시키는 매개체와 같다. 신은 사유체계이면서 동시에 삶 그 자체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미술은 인류학자의 연구대상이 되기까지는 외부세계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20세기 초, 유럽의 미술가들이 흑인예술, 그 중에서도 특히 조각의 특이한 조형에 주목하게 되면서 일반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선사시대의 미술작품은 굳은 재료를 사용한 것이 적었던 듯 그 유물은 매우 드물며, 사막지대의 암벽화와 수단 서부 및 삼림지대 왕국들의 미술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즉, 기원전의 것으로는 사하라·나이지리아 및 동·남아프리카에 분포하는 암면채화(岩面彩畵)나 각화(刻畵), 그리고 나이지리아 북부 노크 문화의 테라코타 소상(小像)이 있다.
기원후의 것으로는 차드호(湖) 기슭 사오 문화의 테라코타상, 나이지리아의 이페, 베냉의 청동조각 등이 있다. 과거의 미술양식이 후세까지 존속하고 있는 예도 간혹 있는데, 예를 들어 베냉의 청동조각이나 부조는 몇 세기 동안, 쿠바의 왕상(王像)은 3세기 이상에 걸쳐 같은 양식이 지켜졌고, 도곤의 조선상(祖先像)도 오랫동안 같은 양식이 계승되었다.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는 유럽과 멀리 떨어져 있으나, 외부세계로부터 시대변천을 반영한 갖가지 영향을 받아왔다.
이미 기원전에 페니키아 상인들은 북서 아프리카와 접촉하였으며, 7세기에는 이슬람교가 아랍 세력과 함께 수단에 들어왔다. 그리고 11세기에는 이슬람교가 서(西)수단 일대로 전파되었다. 한편 아프리카 동부해안은 예부터 인도양 교역(交易)의 일익을 맡았는데, 그와 같은 사실은 동아프리카 일대에서 방대한 양의 중국 도자기 파편이 출토되는 것으로도 증명된다.
유럽인들이 서아프리카 해안지역과 접촉한 것은 15세기이지만, 내륙부까지 진출하는 데는 그후 400년이 걸렸다. 아프리카 미술의 전통은 상인·군인·학자·선교사·정복자 등에 의해서도 파괴되지 않고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현대과학에 의한 새로운 기술이 도입됨으로써 그 전통적인 고립성(孤立性)은 상실되고, 전통적인 기술 또한 파괴되면서 오랜 미술 형식이 급속히 소멸되어 갔다.
생활의 연장선상으로 이루어진 아프리카미술
아프리카의 미술은 인류학자의 연구대상이 되기까지는 외부세계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20세기 초, 유럽의 미술가들이 흑인예술, 그 중에서도 특히 조각의 특이한 조형에 주목하게 되면서 일반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선사시대의 미술작품은 굳은 재료를 사용한 것이 적었던 듯 그 유물은 매우 드물며, 사막지대의 암벽화와 수단 서부 및 삼림지대 왕국들의 미술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즉, 기원전의 것으로는 사하라·나이지리아 및 동·남아프리카에 분포하는 암면채화(岩面彩畵)나 각화(刻畵), 그리고 나이지리아 북부 노크 문화의 테라코타 소상(小像)이 있다.
기원후의 것으로는 차드호(湖) 기슭 사오 문화의 테라코타상, 나이지리아의 이페, 베냉의 청동조각 등이 있다. 과거의 미술양식이 후세까지 존속하고 있는 예도 간혹 있는데, 예를 들어 베냉의 청동조각이나 부조는 몇 세기 동안, 쿠바의 왕상(王像)은 3세기 이상에 걸쳐 같은 양식이 지켜졌고, 도곤의 조선상(祖先像)도 오랫동안 같은 양식이 계승되었다.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는 유럽과 멀리 떨어져 있으나, 외부세계로부터 시대변천을 반영한 갖가지 영향을 받아왔다.
이미 기원전에 페니키아 상인들은 북서 아프리카와 접촉하였으며, 7세기에는 이슬람교가 아랍 세력과 함께 수단에 들어왔다. 그리고 11세기에는 이슬람교가 서(西)수단 일대로 전파되었다. 한편 아프리카 동부해안은 예부터 인도양 교역(交易)의 일익을 맡았는데, 그와 같은 사실은 동아프리카 일대에서 방대한 양의 중국 도자기 파편이 출토되는 것으로도 증명된다.
유럽인들이 서아프리카 해안지역과 접촉한 것은 15세기이지만, 내륙부까지 진출하는 데는 그후 400년이 걸렸다. 아프리카 미술의 전통은 상인·군인·학자·선교사·정복자 등에 의해서도 파괴되지 않고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현대과학에 의한 새로운 기술이 도입됨으로써 그 전통적인 고립성(孤立性)은 상실되고, 전통적인 기술 또한 파괴되면서 오랜 미술 형식이 급속히 소멸되어 갔다
1부 미술의 탄생 참조하세요
진실된 인간미의 원형에 빠지다
아프리카는 다른 지역보다도 어찌 보면 더욱 열성적으로 미술 문화를 꽃피웠고 미술을 중시해왔다. 아프리카 미술은 그 고유한 매력과 특징 때문에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의 수집 대상이 됐고, 유럽의 ‘주류’ 미술에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끼쳤다. 피카소가 아프리카 가면의 조형성과 미학을 차용해 최초의 입체주의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린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아프리카의 왕실 미술 작품들은 왕권을 나타내는 중요한 매체 역할을 했으며, 미술작품은 지배자들의 정치적 권력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특징이다. 지은이는 아프리카의 왕들은 늘 시대 변화를 반영해 새로운 미술 스타일을 개발하는 책임감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다른 왕국의 미술품을 수집하면서 유럽과 이슬람 국가들의 스타일을 받아들이고 소화해 외부세력의 사상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끌어안았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이런 왕실 미술의 전통은 요즘 아프리카 각국의 지도자들에게까지 이어지면서 과거와 현대를 이어주는 역할을 계속하고 있고, 식민 수탈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정체성을 다시 찾으려는 아프리카인들을 묶는 주요한 문화 상징으로 다시 부각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
인류미술의 원형, 아프리카 바위미술
아프리카 바위미술은 아프리카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동시에 가장 덜 알려진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는 앞서 말했듯, 남겨진 바위미술 이외의 어떠한 형태의 기록물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인데요, 이는 곧 우리가 세계사 교과서를 통해 최초의 벽화가 라스코 동굴벽화라고 배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지구상 어느 곳과 비교해 보아도 아프리카 대륙만큼 풍부한 바위미술 자료가 있는 곳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기하학적인 무늬와 손자국, 사람과 동물의 생활상을 묘사한 형태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의 바위미술은 지금까지 그들의 생활양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인류학적 자료이며, 지역이나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 온 가치 있는 그들, 그리고 온 인류의 미술품임이 분명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최초의 바위미술에는 주로 사냥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멸종된 물소나 코끼리, 코뿔소, 하마, 기린, 아프리카 영양, 타조 등의 야생동물들이 나타나 있고 이후 양이나 소와 같은 정착생활에 필요한 동물들이 새겨진 것도 종종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미술양식이 변화되어 가는 후기 바위미술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바위에 그린 그림, 즉 색을 입힌 암면채화는 오랜 세월에 걸친 풍화작용에 의해 손상되지 않은 것들만 지금껏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돌 표면에 새긴 그림인 암각화보다는 좁은 지역 안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암면채화에서 볼 수 있는 가면그림은 현재 서부 아프리카의 가면들과 매우 유사한 형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에는 현재까지 약 30,000여 점이 넘는 바위그림이 세상에 알려져 있습니다. 그중 절반이 타실리(Tassili n’Ajjer-알제리 동부의 광대한 산맥으로, 많은 선사 암벽유적이 있습니다. 투아레그 어로 ‘물흐름이 많은 대지’의 뜻이지만, 현재는 완전히 건조해 버린 험난한 산맥)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2부 원시미술 참조하세요.
원시적 생명력과 신비
아프리카의 미술은 이미 오래 전부터 유럽에 알려졌다. 특히 19세기 이전의 많은 탐험가들이 아프리카로부터 귀국할 때 가지고 간 가면과 조령상은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을 넘어서고 있다. 심지어 그리스도교의 선교사들은 이것으로 아프리카 사람들을 개종시켰다는 증거로 삼기도 했다.
이들 아프리카 조각품은 19세기 후반에 들어 현지의 종교와 사회에 관한 과학 적인 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점점 관심이 커졌다. 그리고 20세기 초에는 몇몇 혁명적 미술가와 문학가가 아프리카 조각에 대단한 예술적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피카소, 마티스, 아폴리네르, 브류케 등이 아프리카 조각의 조형으로부터 얻은 영감에서 입체주의나 표현주의를 유도해낸 것은 모두가 공인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미술은 인류학자의 연구대상이 되기까지는 외부세계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20세기 초, 유럽의 미술가들이 흑인예술, 그 중에서도 특히 조각의 특이한 조형에 주목하게 되면서 일반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선사시대의 미술작품은 굳은 재료를 사용한 것이 적었던 듯 그 유물은 매우 드물며, 사막지대의 암벽화와 수단 서부 및 삼림지대 왕국들의 미술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즉, 기원전의 것으로는 사하라·나이지리아 및 동·남아프리카에 분포하는 암면채화(岩面彩畵)나 각화(刻畵), 그리고 나이지리아 북부 노크 문화의 테라코타 소상(小像)이 있다.
기원후의 것으로는 차드호(湖) 기슭 사오 문화의 테라코타상, 나이지리아의 이페, 베냉의 청동조각 등이 있다. 과거의 미술양식이 후세까지 존속하고 있는 예도 간혹 있는데, 예를 들어 베냉의 청동조각이나 부조는 몇 세기 동안, 쿠바의 왕상(王像)은 3세기 이상에 걸쳐 같은 양식이 지켜졌고, 도곤의 조선상(祖先像)도 오랫동안 같은 양식이 계승되었다.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는 유럽과 멀리 떨어져 있으나, 외부세계로부터 시대변천을 반영한 갖가지 영향을 받아왔다.
이미 기원전에 페니키아 상인들은 북서 아프리카와 접촉하였으며, 7세기에는 이슬람교가 아랍 세력과 함께 수단에 들어왔다. 그리고 11세기에는 이슬람교가 서(西)수단 일대로 전파되었다. 한편 아프리카 동부해안은 예부터 인도양 교역(交易)의 일익을 맡았는데, 그와 같은 사실은 동아프리카 일대에서 방대한 양의 중국 도자기 파편이 출토되는 것으로도 증명된다.
유럽인들이 서아프리카 해안지역과 접촉한 것은 15세기이지만, 내륙부까지 진출하는 데는 그후 400년이 걸렸다. 아프리카 미술의 전통은 상인·군인·학자·선교사·정복자 등에 의해서도 파괴되지 않고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현대과학에 의한 새로운 기술이 도입됨으로써 그 전통적인 고립성(孤立性)은 상실되고, 전통적인 기술 또한 파괴되면서 오랜 미술 형식이 급속히 소멸되어 갔다.
3부 메소포타미아 미술 참조하세요.
영혼을 불러낸다는 쇼나조각품
섬유화폐·문양·민예품·산족 판화
강렬한 분위기 현대회화도 주목
예술성 비해 싼값…마니아 형성
미술품은 애호와 구입이 일치하지 않는다. 작품이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주머니가 얇으면 살 수 없다. 미술품이 주요한 투자대상이 되면서 작품값이 훌쩍 뛰어올라 불일치의 골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이런 세태 속에 예외적인 동네가 있다. 아프리카 미술이다. 아프리카 미술품은 예술성이 높은 반면 값이 상대적으로 싸기 때문이다.
쇼나조각, 화폐섬유, 현대회화
국내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지고 가장 인기 높은 아프리카 미술품은 쇼나조각이다. 오랜 석조문명을 가진 짐바브웨의 쇼나족이 돌 안에 존재하는 영혼을 불러내는 행위로서 완성한 돌 조각품. 인위적인 조작을 최소화하고 원석의 자연미를 노출시키는 방식이다. 1950년 한 영국인 비평가의 지도를 받아 쇼나족의 재능이 현대적으로 발현되면서 70년대 이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아프리카의 원시적인 생명력과 피카소, 마티스, 미로 등의 자연주의가 결합해 작품 완성도가 높다. 버나드 타카위라, 파니자니 아쿠다, 콜린 마다몸베, 라멕 본지시, 에드론스 루콧지 등이 유명한 작가다.
그 다음은 나무조각품들. 문자가 드물고 이동생활을 한 아프리카 부족에게 나무조각은 일종의 문화 대물림이었다. 그런 탓에 생활, 의례용품에는 그들의 신앙과 염원이 고도로 압축돼 있다. 비를 고대하는 파형무늬, 다산을 기원하는 여성상 등이 대표적인 사례. 짐바브웨, 잠비아, 탄자니아, 케냐, 말라위, 보츠와나 등 흑단나무가 자라는 동남부 나라의 것이 유명하다.
흑단 통나무에 여러 인체를 새겨 가족애를 상징한 탄자니아 마콘데족의 조각이 가장 알려진 편이다. 콩고민주공화국 바쿠바족이 신부 지참금으로 쓴다는 섬유화폐와 아플리케 제례용 치마, 피그미족의 추상화 ‘엠부티 드로잉’도 특별한 문양으로 눈길을 끈다.
전통적 작품 외에 70년대 이후에 등장한 현대회화도 주목받고 있다. 전래의 문화와 서양회화를 접목해 단순한 형태, 낙천적인 정서, 강렬한 색감이 특징이다. 민화풍의 탄자니아 팅가팅가 그림, 암각화에 색채를 입힌 듯한 산족(부시맨)의 판화가 유명하다. 집단 창작촌에서 엄격한 관리를 받으며 제작되는데, 수요가 늘면서 값이 많이 뛰어 짝퉁도 많은 편이다. 서양 미술의 세례를 받은 작가들도 많다.
이들의 작품은 유럽화상들에 의해 입도선매돼 주로 유럽에 유통된다. 가나의 글로버, 세네갈의 마마두와 두츠, 아마르, 콩고의 보템베, 무칼라이, 세르지 등이 알려져 있다. 2007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처음으로 별도의 아프리카관이 만들어졌으며 본 전시에도 아프리카 작가 7명이 초청될 만큼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아프리카 작품은 예술성에 비해 저렴한 게 특징. 국내 작품보다 훨씬 싸게 팔리고 있어 중산층이면 사서 즐길만한 수준이다.
원시사회와 미술, 프리미티브 아트(primitive art)
신석기 혁명이후 나일, 유프라테스, 그리고 갠지즈와 황하와 같은 비옥한 충적층을 기반으로 원시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규모의 국가 공동체사회가 등장하면서 인류 미술의 역사는 새로운 장을 맞게 됩니다. 기원전 수 천년 전에 등장하는 이러한 고대국가는 신권에 가까운 권력자와 성문화된 율법을 바탕으로 보다 조직된 사회체제입니다. 미술의 규모와 기능도 이러한 사회의 변화에 걸맞게 보다 기념비적인 규모로 추진되며 그 기법은 더욱 세련되고 정교해집니다.
그러나 한편 포스트 모던을 주장하는 21세기 현재의 지구촌 사회에도 문명을 받아들이기 이전의 원시부족사회의 미술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신앙과 전설을 바탕으로 한 종교적인 제의품이나 여러 공예적인 생활용품들, 장신구들을 대대로 전수되어온 솜씨로 만들어 냅니다. 그들이 생산한 민속미술, 혹은 장식품들은 관광객을 위한 상품으로 개발되기도 하고 도시의 미술관에 수집되어 전시되기도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최근에 문신이 유행하는 것처럼 원시미술은 이국적인 패션의 하나로 현재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역사이전의 선사시대 미술이나 부족의 미술을 일컬어 '원시미술', '프리미티브 아트'라고 부릅니다. 지역적으로는 크게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중앙 아메리카의 프리 콜롬비아 미술을 통칭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공예적인 생산품에 대해서 어떻게 미학적 가치를 매기고 미술의 역사에서 어떤 위상을 부여할 수 있을까요. 부족미술의 경우 그 양식이 수천년에 걸쳐서 크게 변화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동서양의 타 미술과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근래에 들어 이러한 지역의 미술에 대한 연구와 유적의 발굴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원시미술을 미술사에서 어떻게 위치 지울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서양미술사에서 모호한 영역으로 남아있는 원시미술의 문제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현대미술과 프리미티비즘: 모더니즘 속의 프리미티비즘
19세기 프랑스의 개성적인 후기 인상주의 화가 폴 고갱은 남태평양의 섬으로 떠나며 자신이 현대의 야만인임을 자랑스럽게 자처하였습니다. 그의 회화 <그리스도의 탄생>은 어두운 마스크를 쓴 인물, 장식적인 패턴의 문양이 새겨진 기둥 등 남태평양 부족미술의 신비한 색채와 도상으로 가득합니다. 서구의 전통적인 기독교 주제가 원시미술의 조형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하겠지요. 그가 즐겨 제작하였던 거친 목판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원시미술의 영향이 두드러집니다.
20세기 큐비즘으로 이행하는데 선구적인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는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은 그가 당시 민속박물관에서 보았던 아프리카의 조각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오랫동안 이 그림을 공개하지 않았던 피카소는 수 차례에 거쳐 화면의 구성과 여인들의 포즈를 변경하였는데 오른쪽 두 여자의 얼굴이 처음과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면 젊은 시절 피카소의 작업실에 다양한 아프리카 조각과 가면들이 수집되어 있었던 것이 보이지요? 이러한 예는 20세기 미술사에서 너무 쉽게 발견됩니다. 마티스나 드렝과 같은 야수파의 회화, 브랑쿠지와 자코메티의 조각에 이르기까지 현대미술의 선구자들은 원시미술의 단순함과 과감한 생략, 왜곡을 높이 찬양하고 그것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여인들> , 1907년캔바스에 유채, 244×234 cm 뉴욕 근대미술관
이러한 현대미술과 부족미술, 혹은 원시미술간의 유사성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1984년 뉴욕의 근대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에서 열린 대규모 전시 《20세기 미술 속의 원시주의: 부족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의 유사성 Primitivism in 20th Century Art: Affinity of the Tribal and the Modern》에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이 전시회의 성과물로 나온 도록의 표지입니다. 피카소의 여인의 두상과 아프리카 조각의 형태상의 유사성을 두드러지게 강조한 편집이 눈에 띄는군요. 이 도록에는 피카소 뿐 아니라 원시미술과 유사한 현대작가들의 예를 수없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 언급된 파울 클레의 회화와 뉴기니아 전사들의 나무 방패의 채색문양은 그 선의 패턴과 색채에 있어서 정말 흡사하지 않습니까?
<20세기 미술 속의 프리미티비즘 > 뉴욕 근대미술관 1984년 전시 도록
파울 클레 <의도> 1938 캔바스에 채색과 신문 접착, 75×112 cm 베른 미술관
뉴기니아, 전사들의 방패, 목재에 채색
이 전시회를 기획하였던 미술관의 의도는 현대미술과의 형태적인 유사성을 통해 부족미술의 독특한 미학적인 특질을 드러내고 그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형태적인 측면만을 강조함으로써 원시미술의 제의적인 측면이나 서사적인 내용, 그리고 장소성 등은 배제될 수밖에 없었겠지요. 형식을 중시했던 현대미술의 이념에 부족미술의 본모습이 가려졌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20세기 초 원시주의는 서구미술에서 바라본 입장이 주가 되었던 것입니다.
19세기 유럽의 원시미술 수집 붐: 트로카데로 인류학박물관
원시미술에 대한 수집 붐은 19세기 프랑스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식민지에 대한 영토적, 학문적인 확장의 결과로 인류학, 인종학의 발달과 고고학적인 발굴이 진행되었으며, 이때 수집된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등지의 부족미술품은 박물관에 수집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만국박람회와 같은 전시를 통해 유럽인들에게 소개되었습니다.
1978년 만국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것인데 트로카데로 박물관이 눈에 띄는군요. 그 내부의 모습입니다. 현재 파리의 에펠탑을 마주보고 있는 트로카데로 인류학 박물관은 1887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서 건립된 볼거리의 하나였습니다.
원래 프리미티브 미술이란 유럽이외 지역의 미술이라는 말과 함께 단순하면서도 순수한 느낌을 주는 전성기 르네상스 이전의 15세기 이탈리아 미술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원시미술이라는 뜻은 공간적인 의미와 함께 시간적인 의미도 함께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주로 과거, 그러니까 미술이 진보하기 이전의 원형의 시기를 의미합니다. 영국의 19세기 중반 라파엘전파 미술가들은 회화에 있어서 순수함의 원형을 바로 15세기에서 찾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는 지리적인 의미가 더욱 강해집니다. 처음에는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브류타뉴나 퐁타벵과 같은 도시 밖의 미술을 지칭하는 데서 더 나아가 점차 유럽이외의 오지의 미술을 일컫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현대미술에서의 원시주의는 서구인들이 자신과는 다른 문명, 소외된 타자의 미술을 정의하는 식민주의적인 측면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19세기 일어난 원시적인 것에 대한 동경과 충동은 물론 근대화에 따른 자연에 대한 희구와 문명 밖으로의 도피심리의 결과이기도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부족미술이라 할 수 있는 원시미술로는 크게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콜럼부스의 아메리카 대륙발견 이전의 중남미 미술과 북미의 인디안 미술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원시미술 중 아프리카 부족미술과 중남미의 미술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합시다.
아프리카미술
현재 52개의 국가로 형성된 아프리카는 사실은 그 지형적 다양성 못지 않게 수 백 여 개의 다른 인종, 언어 문화적인 집단들로 이루어진 부족사회의 모습을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부족미술이 그렇듯이 아프리카 미술에는 고급미술과 응용, 혹은 공예와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최근에 이르기까지도 시각미술을 지칭하는 'art' 즉 '미술'이라는 개념을 대부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아프리카 미술은 사후세계에 대한 염원과 통치자에게 신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미술에서 기원한 문화적인 양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초기 아프리카 조각은 영원한 느낌을 주는 양식화된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수염을 기른 남자의 두상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굴된 조상과 그 인상이 흡사합니다.
<턱수염이 있는 남자> 기원전 500년경, 테라코타 20×14.5×8.5 cm, 튜니지아, 바르도 박물관
<여인상> 나이지리아, 노크문명 대략 기원전 500년-기원 400년, 테라코타 볼티모어 박물관
그러나 11-12세기, 나이지리아 서쪽지역인 이페(Ife)에서는 사실적인 표정과 모델링이 돋보이는 자연주의적인 양식이 등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이페에서 출토의 통치자상은 얼굴이 신체보다 커 비례상의 어색함은 남아 있으나 인물의 표정이 자연스럽게 묘사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례상 머리가 커진 것은 솜씨의 미숙함 때문이 아니라 머리를 지혜가 머무르는 곳으로 중시하는 토속신앙에 따라 통치자의 이상화시키는 한 방편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강렬한 눈빛까지도 포착한 청년의 두상은 그 다부진 표정에 있어서나 근육의 해부학적인 묘사에 있어서 뛰어난 자연주의 초상의 예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의 초상> 나이지리아 이페 출토 , 11-12세기 아연합금, 높이 약 183 cm 이페 박물관
<왕의 초상> 이페 출토, 황동, 13세기
제단, 나이지리아, 베닌 17-18세기, 청동, 높이 약 45 cm
여왕의 두상, 상아 나이지니아 베닌, 16세기 중반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한편 아프리카는 역사적으로 상아해안이라 알려진 서부의 해안을 따라 문명과 교류가 활발하였고, 13세기에서 18세기까지 이 곳에서는 베닌(Benin)이라는 도시국가가 번성하였습니다. 15세기 포르투칼과 무역을 하기도 하였던 이 도시국가는 신전에 앉은 통치자를 묘사한 개인용 제단이나 상아로 만든 인상적인 왕의 모후의 조각상에서 보듯 상당히 정교한 청동조각과 궁정미술을 남기고 있습니다.
유럽인들의 식민지가 된 이후의 아프리카의 미술
19세기까지 유럽과 관계가 활발하였던 서부해안 지역의 아프리카 많은 지역은 이슬람이나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면서 토착의 신앙과 문화에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에 의해 이교의 우상숭배의 증거로 혹은, 개인이나 상인들에 의해 민예품으로 아프리카의 많은 부족 미술품들이 유럽으로 유입되었고 많은 컬렉션들이 생겨났습니다. 이것들은 현재 아프리카 미술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고대 아메리카 미술 참조하세요.
콜럼부스 이전의 아메리카 미술
1492년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이전 중남미에서는 현재의 멕시코, 과테말라, 페루 등을 중심으로 기원전 2세기이후 부터 화려하고 강력한 문명이 꽃피었습니다. 수학과 천문학이 발달하여 정교한 달력을 만들 줄 알았으며 거대한 도시를 건설하였던 마야문명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토템신앙을 바탕으로 장식적인 문양이 두드러진 거석들이 고원도시의 광장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또한 최근의 고고학적인 발굴로 알려지기 시작한 서부 멕시코 일대의 기원 7세기 경의 테오티후아칸 유적에서는 건축물을 뒤덮은 다양한 타일장식에서 보듯 도자기 공예에 있어서 뛰어난 솜씨가 발휘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현재 페루에서 발견되는 사람의 얼굴모양을 한 부장용 용기역시 사실성과 높은 표현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콜럼부스의 상륙을 역사적인 기점으로 삼는 이유는 현재 신대륙의 문화를 이 지역의 토착문명과는 그 뿌리를 달리하는 유럽문명의 확장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중남미의 문명은 콜럼부스 이후 포르투칼과 스페인의 식민지정책에 의해 완전히 사라졌으며, 다만 그 미술이 토착민들에 의해 공예적인 방식으 로 전승되고 있을 뿐입니다.
미술에서 '원시적인 것'에 대한 관심의 변모과정 역시 서구의 식민지 확장의 역사와 같이 하였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 현대미술의 형성기에 고갱, 마티스, 블라맹크, 드렝, 피카소에 이르는 여러 미술가들과 개인 콜렉터들에게 깊은 영향을 준 원시주의, 프리미티비즘은 부족의 실재 미술이기보다는 서구 모더니즘의 한 양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문명의 외곽에 있는 이러한 원시미술은 먼저 앞 시간에 보았던 선사시대의 미술이 그러하였던 것 같이, 사회 공동체 내에서의 시각이미지의 본래의 기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4부 이집트 미술 참조하세요.
피카소와 아프리카 미
피카소는 점차 회화 데생뿐만 아니라 조각 판화에서도 명성이 나기 시작했고 그 당시 인상주의나 사실주의에 염증을 내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원시적 생명의 충만함을 표현하려는 미술로 새 돌출구를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25세의 패기만만한 피카소는 인류사 박물관에서 흑인 미술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생명력에 매료된다. 그들의 역동성, 대지적 순결성, 춤이나 탈이나 조각 속의 원시적이고 원색적이고 직선적 표현 기법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조각가 헨리 무어도 "아프리카 미술의 공통적인 특징은 강력한 생명력이다. 아프리카 미술에 있어서는 강력한 신앙과 희망과 공포의 표현을 엿볼 수 있다." 라고 말한 바 있지만 피카소는 아예 이것을 그의 그림의 시발점으로 삼았던 것이다. 죽음을 너머 거대한 생명으로 향해 달려가는 듯한 아프리카의 춤, 노래, 미술, 조각들이 화가에게 주는 힘과 원천적 에너지는 무궁무진한 것이었다
현대 회화의 신화 [아비뇽의 창녀들]와 큐비즘
그는 계시처럼 다가오는 흑인 미술의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기하학적 순수 감각에 반했다. 빈 장방형 눈, 원주 코의 구멍 등 새로운 조형 세계에 몰입하였으며 그의 유명한 혁명 큐비즘 미술의 길을 트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시각 미술, 영화, 건축을 포함 모든 예술 장르에 큰 영향을 준 큐비즘의 선각자 피카소는 결국 이런 과정과 모험을 통해서 그에게 전설적 명성을 안겨 준 유명한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1907년)를 몇 달간 수백 장의 데생과 습작 끝에 그의 나이 26세 늦여름에 내놓게 된 것이다.
이는 실로 거대한 작품이었고 주변의 친구들 큰 기대감 속에서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이 그림의 반응은 그를 절대로 지지했던 친구들 사이에서도 "이게 그림인가?" 할 정도였다. 그들은 분노와 경악으로 말을 잃고 말았다. 마티스마저 격분했고 브라크도 이건 "우리에게 석유를 마시게 하고 밧줄을 밥으로 먹으라는 것과 같다" 라고 혹평을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그림이야말로 지금까지의 모든 지구상의 모든 회화 세계를 붕괴시킨 미술사의 대혁명이었다.
지금까지 등장한 우아하고 풍요로운 요정이나 비너스가 아니라 거리에서 몸 파는 천한 여인이 주인공이 되어서 문명화된 사람들을 향해 울부짖는 분노와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이 그림의 위대성은 바로 이런 20세기의 정신을 누구보다 앞서 그림을 통해서 보여 주었기 때문이리라. [아비뇽의 처녀들]이 주는 충격들은 바로 자연이 가지고 있는 3차원의 세계 즉 평면적 관점이 아닌 입체적 관점인 '원형, 원측, 원구'로 처리해내는 데 있다.
그는 세잔의 회화적 비전을 현실화했으며, 지극히 복잡한 다원적 공간을 아주 단순하고 축소된 기하학적인 그림으로 창출해 내어 그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원시 예술의 형태에서 강한 조형적인 힘과 마력을 표출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피카소의 그림은 , ‘고흐’와 ‘고갱’의 자유적인 표현 기법에 영향을 받아 그의 그림은 기하학적인 곡선과 사선의 표현으로 자신이 이해하고, 또 그렇게 생각하고, 또 그러한 사실을 초현실 기법으로 나타내고야 마는 ‘철저히 자신이 깨달’은 그리고 자신이 이해한것만 표현하는 방법을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프리카의 전통 가면이라고 한다. 피카소 그림의 얼굴들과 무척 닮았다.피카소의 대표작인 아비뇽의 여인들은 바르셀로나 매춘로의 매춘녀들을 그린 단색적인 그림이다. 굉장히 날카로운 외곽선에, 애매하고 평면적인, 깊지않은 공간감과 다시점 적인 표현이 특징이다.
뾰족하고 각진 형태와 사납게 앞을 응시하는 시선, 이는 공격적이고도 위협적인 여성성을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있다. 부드럽지 않고 하급적인 소재, 수동적이고 활기가 없는 이상화 되어있는 여성의 누드표현이 그를 알수 있게 한다.
이 작품은 큐비즘의 출발이라고도 하며 20세기 회화 작품들 중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꼽히기도 한다. 이 작품 이전의 회화는 2차원 적인 캔버스 위에 3차원적인 공간을 표현하는 데에 주력했다고 하면 피카소는 반대로 3차원 적인 공간을 의도적으로 2차원적 면으로 해체하여 표현하는 데에 주력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 회화의 권위와 가치에 관한 정면 도전이였다고 간주되었고, 피카소 역시 충격을 줄 의도로 이런 도전을 해왔다고한다.
최초의 입체주의자들
미술에서 '원시적인 것'에 대한 관심의 변모과정 역시 서구의 식민지 확장의 역사와 같이 하였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 현대미술의 형성기에 고갱, 마티스, 블라맹크, 드렝, 피카소에 이르는 여러 미술가들과 개인 콜렉터들에게 깊은 영향을 준 원시주의, 프리미티비즘은 부족의 실재 미술이기보다는 서구 모더니즘의 한 양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문명의 외곽에 있는 이러한 원시미술은 먼저 앞 시간에 보았던 선사시대의 미술이 그러하였던 것 같이, 사회 공동체 내에서의 시각이미지의 본래의 기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고대 이집트(지도)와 메소포타미아(지도) 시대에 이르면 과거의 수렵이나 작은 촌락을 이루면서 살던 시대와는 판이한 미술이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신과도 같은 왕을 중심으로 강력한 신권사회를 이루는 것이 고대 국가의 특징이지요. 기원전 3000여년 경에 세워진 이집트는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을 거치면서 이후 300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나일강 유역의 도시국가를 통합하여 고왕국을 시작하였던 통치자, 나르메르의 승전을 기념하는 그림이 새겨진 판입니다. 그 앞면을 보면 나르메르 왕이 적을 물리치는 장면이 알기 쉬운 이야기 그림처럼 전개되어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런데 왕은 크고 포로는 작습니다. 패널의 뒤쪽 상단을 보아도 깃발을 들고 왕의 앞 뒤를 호위하는 신하들은 왕의 1/3크기에도 못 미칩니다. 이 패널을 제작한 사람들에겐 사물의 실제 크기나 비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겠지요. 다만 왕은 더 위대한 사람이고 그가 적을 포로로 잡았다는 사실 만을 명료하게 나타내는 것이 중요했고, 이집트의 미술가들은 그러한 목적을 분명하게 달성한 것입니다. 이집트의 이 기념판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에서 같은 목적으로 제작된 <나람신 승전비>와 그 모습이 흡사합니다. 왕과 쓰러진 적의 모습을 묘사하는 정해진 방식이 있었으며 이러한 묘사방식은 이집트에서 생겨나 근동의 고대국가에서 두루 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미술에서 '원시적인 것'에 대한 관심의 변모과정 역시 서구의 식민지 확장의 역사와 같이 하였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 현대미술의 형성기에 고갱, 마티스, 블라맹크, 드렝, 피카소에 이르는 여러 미술가들과 개인 콜렉터들에게 깊은 영향을 준 원시주의, 프리미티비즘은 부족의 실재 미술이기보다는 서구 모더니즘의 한 양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문명의 외곽에 있는 이러한 원시미술은 먼저 앞 시간에 보았던 선사시대의 미술이 그러하였던 것 같이, 사회 공동체 내에서의 시각이미지의 본래의 기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시대에 이르면 과거의 수렵이나 작은 촌락을 이루면서 살던 시대와는 판이한 미술이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신과도 같은 왕을 중심으로 강력한 신권사회를 이루는 것이 고대 국가의 특징이지요. 기원전 3000여년 경에 세워진 이집트는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을 거치면서 이후 300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나일강 유역의 도시국가를 통합하여 고왕국을 시작하였던 통치자, 나르메르의 승전을 기념하는 그림이 새겨진 판입니다. 그 앞면을 보면 나르메르 왕이 적을 물리치는 장면이 알기 쉬운 이야기 그림처럼 전개되어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런데 왕은 크고 포로는 작습니다. 패널의 뒤쪽 상단을 보아도 깃발을 들고 왕의 앞 뒤를 호위하는 신하들은 왕의 1/3크기에도 못 미칩니다. 이 패널을 제작한 사람들에겐 사물의 실제 크기나 비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겠지요. 다만 왕은 더 위대한 사람이고 그가 적을 포로로 잡았다는 사실 만을 명료하게 나타내는 것이 중요했고, 이집트의 미술가들은 그러한 목적을 분명하게 달성한 것입니다. 이집트의 이 기념판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에서 같은 목적으로 제작된 <나람신 승전비>(도2)와 그 모습이 흡사합니다. 왕과 쓰러진 적의 모습을 묘사하는 정해진 방식이 있었으며 이러한 묘사방식은 이집트에서 생겨나 근동의 고대국가에서 두루 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미술에서 '원시적인 것'에 대한 관심의 변모과정 역시 서구의 식민지 확장의 역사와 같이 하였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 현대미술의 형성기에 고갱, 마티스, 블라맹크, 드렝, 피카소에 이르는 여러 미술가들과 개인 콜렉터들에게 깊은 영향을 준 원시주의, 프리미티비즘은 부족의 실재 미술이기보다는 서구 모더니즘의 한 양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문명의 외곽에 있는 이러한 원시미술은 먼저 앞 시간에 보았던 선사시대의 미술이 그러하였던 것 같이, 사회 공동체 내에서의 시각이미지의 본래의 기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고대 이집트(지도)와 메소포타미아(지도) 시대에 이르면 과거의 수렵이나 작은 촌락을 이루면서 살던 시대와는 판이한 미술이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신과도 같은 왕을 중심으로 강력한 신권사회를 이루는 것이 고대 국가의 특징이지요. 기원전 3000여년 경에 세워진 이집트는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을 거치면서 이후 300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도1은 나일강 유역의 도시국가를 통합하여 고왕국을 시작하였던 통치자, 나르메르의 승전을 기념하는 그림이 새겨진 판입니다.
그 앞면을 보면 나르메르 왕이 적을 물리치는 장면이 알기 쉬운 이야기 그림처럼 전개되어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런데 왕은 크고 포로는 작습니다. 패널의 뒤쪽 상단을 보아도 깃발을 들고 왕의 앞 뒤를 호위하는 신하들은 왕의 1/3크기에도 못 미칩니다. 이 패널을 제작한 사람들에겐 사물의 실제 크기나 비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겠지요.
다만 왕은 더 위대한 사람이고 그가 적을 포로로 잡았다는 사실 만을 명료하게 나타내는 것이 중요했고, 이집트의 미술가들은 그러한 목적을 분명하게 달성한 것입니다. 이집트의 이 기념판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에서 같은 목적으로 제작된 <나람신 승전비>와 그 모습이 흡사합니다. 왕과 쓰러진 적의 모습을 묘사하는 정해진 방식이 있었으며 이러한 묘사방식은 이집트에서 생겨나 근동의 고대국가에서 두루 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장 유명한 기자의 세 피라미드는 고 왕국 시대의 왕 맨카우레, 카프레, 쿠푸왕의 무덤입니다. 무덤의 긴 연도 앞 입구에는 스핑크스가 무덤을 지키고 있지요.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쿠푸왕의 피라미드를 건립하기 위하여 10만 명이 3개월 씩 동원되어 기초공사에만 10년, 그리고 본 공사는 20년이 걸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십 킬로 밖에서 채석된 돌을 다듬고 뗏목으로 옮겨와 이곳에 쌓은 과정을 상상하면 이러한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이 얼마나 강하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지금은 수렵인들의 동굴벽화나 조각을 '미술'이라는 용어로 부르지만 당시에는 원시집단의 제의(祭儀)적인 측면이 무엇보다 강했습니다. 그런점에서 선사시대 '작품'을 동굴에 남겼던 최초의 미술가들의 위치는 어떠했을까요.
수렵인들의 정신세계에 관여하는 마법사나 영매자의 역할을 했을 지도 모르며, 어쩌면 사냥의 대열에서 제외되어 그림 그리는 일에만 전념하였을 지 모릅니다. 그들의 작업이 '창조력의 발산과 승화'라는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미술의 기능과는 동떨어져 있을지 모르나 오히려 집단의 생존과 신앙과 관련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겠습니다.
신비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구석기시대 시각적인 생산물에 대한 다른 견해와 논쟁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선사인들에게 있어서의 마술로서 기능하였던 '미술'은 미술관이나 예술의 이름으로 박제된 현재의 미술보다 더욱 인간의 삶에 깊숙하게 침투하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은 수렵인들의 동굴벽화나 조각을 '미술'이라는 용어로 부르지만 당시에는 원시집단의 제의(祭儀)적인 측면이 무엇보다 강했습니다. 그런점에서 선사시대 '작품'을 동굴에 남겼던 최초의 미술가들의 위치는 어떠했을까요.
수렵인들의 정신세계에 관여하는 마법사나 영매자의 역할을 했을 지도 모르며, 어쩌면 사냥의 대열에서 제외되어 그림 그리는 일에만 전념하였을 지 모릅니다. 그들의 작업이 '창조력의 발산과 승화'라는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미술의 기능과는 동떨어져 있을지 모르나 오히려 집단의 생존과 신앙과 관련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겠습니다.
신비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구석기시대 시각적인 생산물에 대한 다른 견해와 논쟁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선사인들에게 있어서의 마술로서 기능하였던 '미술'은 미술관이나 예술의 이름으로 박제된 현재의 미술보다 더욱 인간의 삶에 깊숙하게 침투하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미완의 미학
Possibility : 끝이 아닌 다른 하나의 시작-Identity
1 생명: 시간의 길이를 뛰어넘게 하는
2 경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3 신화: 인간의 존재의미를 알게 하는
4 인간: 그 어느 것으로도 끝낼 수 없는
5 지향: 희망으로 삶의 의미를 확대하는
Community : 조화로운 관계를 지속시키는 힘-Tolerance
1 혼인: 삶이 지니는 신비로운 사슬
2 부부: 인륜학습의 첫 번째 무대
3 우리: 모두 함께 하나 되는 그물망
4 병: 사회적 약자를 희생시키는 데서 시작되는
5 시간: 영원히 연속되는 '0'시
Opportunity: 관계 속에서 변화하는 세계-Intention
1 베개: 잠든 순간에도 기도는 계속되고
2 지팡이: 삶의 지표와도 같은
3 의자: 존재의 다른 의미를 모색하는
4 잔: 다른 마음을 하나로 묶게 하는
5 성찬: 관계는 함께 먹는데서 이루어진다는
6 빗: 비를 내리게 하는 신성도구와도 같은
7 장신구: 정신의 안정을 받쳐주는
8 춤: 정체성을 표출하는 행위
9 소리: 진동이 아닌 마음의 영역
"아프리카의 색은 참으로 밝다. 붉은색도 밝고 검은색도 밝게 보인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신을 현실세계로 끌어내리거나 끌어올리는 행위에 있어서 그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는 그런 곳이다. 그래서 소망한다. 그런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화가와 시인이 늘어가기를.."
근래 한국에는 아프리카와 관련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작가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아프리카 미술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아프리카의 삶과 의식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에 가깝다. 이들은 피카소나 마티스가 그랬던 것처럼 아프리카 미술에서 새로운 미학적 견지(intellectual force) 혹은 주제에 대한 아이디어만을 채취한 채 아프리카를 문화의 하위개념으로 보는 이른바 원시주의(Primitivism)라는 시각을 되풀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프리카 미술에 담겨진 이미지나 메시지를 찾아내는 것은 아주 간단할 수도 있다. 키워드는 바로 인간이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이데아를 이해하고 우리의 삶과 의식에 적용하는 것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아프리카 미술에 잠재되어 있는 개념적인 성격(identity)이나 서사적인 내용(tolerance) 그리고 상징적인 의미(intention)를 간파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스스로가 인간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면 문제는 더욱 더 복잡해진다.
아프리카에는 성전(聖殿)이 없다. 성전(聖典)도 없다. 사하라사막의 이남이 그렇다는 말이다. 물론 조상신을 섬기는 조그마한 제단은 있지만 현실을 고통으로 선택하게 하는 피라미드와 같은 거대한 성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신을 믿지만 신을 묘사하지 않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인간의 심성에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 인간의 형상을 한 조각이 많은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가 않다.
아프리카의 색은 참으로 밝다. 붉은색도 밝고 검은색도 밝게 보인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신을 현실세계로 끌어내리거나 끌어올리는 행위에 있어서 그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는 그런 곳이다. 그래서 소망한다. 그런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화가와 시인이 늘어가기를... 이는 어쩌면 피카소나 마티스가 풀어내지 못한 아프리카 미술의 존재의미, 미완(未完)의 미학이 어디를 어떻게 항해하고 있는지를 알게 할 수도 있다.
신보다는 신앙을 이데올로기보다는 이데아를 마음으로 느끼고 받아들일 줄 아는 힘, 그런 존재이유가 많이 그리운 세상이다. 그런 사람이 참으로 많이 보고 싶은 때이다. -철학박사, 갤러리 아프리카로 대표 정해광
카메룬 바문(Bamun)족의 잔 조각에는 진화의 역사가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꼬리를 기점으로 인간의 유전자와 20%가 같은 10억 년 전의 선충에서부터 40%가 같은 5억 년 전의 곤충 그리고 2억 년 전의 파충류가 조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몸이 수많은 다른 종의 생명체를 흡수하면서 여기까지 온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유기체적 세계관의 이데아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하나의 종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면서 계통을 분류하는 것, 그 자체는 무의미한 일이 될 수도 있다. -p. 13
인간을 만든 것이 신이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피조물의 한계를 절감해야 했던 인간, 그런 인간이 자신과 같은 생명을 잉태한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이다. 둘이면서 하나의 몸을 이루었던 신화의 땅, 쟈마니(zamani)에서의 시간이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드러났다는 것은 잃어버린 본성을 회복할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아프리카 사람들은 생명의 잉태를 단순한 사건으로 보지 않고 메시지로 받아들인다. 살아있는 사람들 즉 부모나 친 척뿐만 아니라 과거의 먼 조상신까지도 연결시켜주는 접점이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생명의 잉태를 묘사한 조각은 현재는 물론 이 세상 이전부터 이 세상 이후까지 지속되는 연속성의 과정을 인간이라는 이데아로 표현한 것이다.
가봉 팡족 68Cm
가봉의 부비(Vuvi)족 여자들은 마을의 축제가 있을 때 자신의 집에서 사용하던 종자함에 땅콩이나 과일들을 넣어 간다. 종자함은 대게 종자를 담는 통과 뚜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통에는 아이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뚜껑 역시 단순한 덮개가 아닌 인간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이것을 가지고간 여자는 간식을 먹으면서 남자들의 춤을 구경하고 또 나름대로 평가를 하기도 한다. 남자 역시 춤을 추면서 여자들의 반응을 유심히 살피다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어떤 형태로든 신호를 보낸다. 그러다가 축제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남자는 그 여자 앞에 가서 역동적인 춤을 보여주며 선택을 유도한다. 종자함은 곡물의 씨를 보관하는 도구이자 축제에서 만난 두 사람을 특별한 관계, 즉 혼인에 이르게 하는 교량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어린아이의 모습이 새겨진 종자함은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는 자궁과도 같다.
부르기나파소 보보족
담뱃대가 혼담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또 다른 이유는 담배를 피우기 위하여 숨을 들이마시고 내뿜는 행위 그리고 내뿜어진 연기를 함께 마시는 행위는 생명의 숨결을 함께 호흡하여 모두 하나가 되자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향을 피우는 행위와도 같은 것으로 살아있는 사람은 물론 서로 다른 조상신들을 하나로 묶는 의식(儀式)의 예비과정과도 같다.
그런 점에서 담뱃대에 새겨진 인간의 얼굴은 새로운 생명의 잉태를 바라는 부모의 희망일 수도 있고, 그런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어 하는 조상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 부르키나파소 보보족의 신랑신부 조각이 종족의 기원과 관련된 미어캣(meerkat)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유도 혼인이 살아있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이미 죽은 조상신과도 연결되는 접점이 되기 때문이다.
가나 아샨티족 32Cm
가나 아샨티족의 빗 조각에 새겨진 일부다처의 모습은 남아있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와도 같다. 남편이 떠난 후 남겨진 부인들은 한 남자의 아내이자 서로의 친구로, 또 남겨진 아이들은 한 아버지의 자식이자 서로의 친구로 기다림과 그리움 혹은 외로움을 함께 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말리 도곤족 60Cm
아프리카에서의 친족체계는 살아있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들에게까지 수직적으로 확대된다. 그런 점에서 말리 도곤(Dogon)족의 문(門)에 조각되어 있는 인물들과 동물들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문 조각에는 신화적인 인간 혹은 국가적인 영웅이나 동물들을 새겨 넣음으로써 구성원들로 하여금 깊은 자긍심을 갖게 한다. 일상적으로 열고 닫는 문을 통하여 무의식적으로 역사적인 소속감을 학습하고 뿌리 의식을 통해 과거(zamani)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문 조각은 마치 족보(族譜)와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해 문은 오늘이라는 샤샤(sasa)의 시간 안에 있는 사람들과 존재의 뿌리가 되는 조상신을 연결시키는 거룩한 수단인 것이다.
화폭에 자유가 흐른다
선과 색과 리듬이 하나되다
거대한 산마저도 삶의 언덕이 되는 땅
원시와 야생이 어울린 끝없는 초록 세상
마사이 족에게 내일은 없다
자유, 순수, 희열이 숨 쉬는 동화 같은 그림
어머니 젖내음 닮은 바닷바람
쇼나 조각의 조형 세계, 그림으로 꽃피우다
원색의 절묘한 배합…삶이 곧 예술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아프리카 미술의 용광로
화폭 위에 넘실대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적막한 사막의 한가운데, 평화를 만나다
슬픈 역사를 예술로 치유하다
진흙으로 빚은 도시에는 불타는 생명력이
"모든 것의 근본은 하나"
미술, 그 이상의 힘을 보다
아프리카인의 자유롭고 긍정적인 감성을 만난다
최근 세계 미술 시장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중국, 인도 미술에 이어 아프리카 미술이다. 이미 오래전에 많이 소개되고 알려진 아프리카의 전통적인 목조각 외에도 서양 미술과는 다른 개성을 보이는 회화 작품들이 미술계에서는 블루칩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각가 자코메티, 화가 마티스와 피카소 등이 아프리카 미술에 영감과 영향을 받았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원시적이고 미개하다’는 서구 중심적인 왜곡된 시각을 벗고 대하면 인간 본연의 욕망과 희망을 자유롭고 긍정적으로 표현한 아프리카 미술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고 말하는 편완식 문화 전문 기자가 현대 미술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른 오늘의 아프리카 미술을 직접 보기 위해 아프리카 현지에서 화가와 작품, 아프리카 사람들을 만났다.
케냐, 탄자니아, 짐바브웨, 남아프리카공화국, 말리, 가나, 콩고민주공화국 등으로 이어진 이 여정은 이미 세계의 미술관과 컬렉터 등이 주목하고 있는 아프리카 미술의 진면모를 생생하게 알 수 있는 특별한 기행이 되었다. 이를 통해 포스트 피카소를 꿈꾸는, 아니 그를 넘어 개성과 정신을 보여주는 아프리카 예술가들의 열정과 재능이 문화 식민지에서 강국으로 변모한 아프리카의 저력을 만들어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자연, 현실과 상상, 야성과 자유가 숨 쉬는 풍경을 그려낸
다양한 상상력과 고유한 상상력의 힘
현재 세계 미술 시장에서 주목 받고 있는 아프리카 현대 미술의 면면을 살펴보고 작품을 감상할 기회를 제공한다. 가나를 대표하는 화가 글로버의 경우, 팔레프 나이프를 사용하여 힘 있는 터치와 아프리카 특유의 체취를 물씬 풍기는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부르키나파소의 화가 크리스토프는 프랑스와 벨기에, 네덜란드 등에서 전시회를 가진 바 있는데, 어머니의 푸근한 품을 상징하는 노란색을 즐겨 사용한다. 그의 작품은 에곤 실레를, 한편으로는 르누아르를 떠올리게 한다는 평을 듣고 있다. ‘포스트 피카소’ ‘아프리카의 피카소’로 유럽과 미국 시장에 널리 알려져 있는 콩고민주공화국의 화가 보템베 작품들도 인상적이다.
아프리카 미술 1부 끝. 2부에서 계속
본 연재 글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추후, 현대 아프리카 미술 편에서 보충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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