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체험 이야기
2부에 이어집니다.
http://cafe.daum.net/cultureSp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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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선 안국역 → 윤보선가 →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
→ 화개길 벽화골목 → 세계장신구박물관 → 삼청동 전망대
→ 기기국 번사창 → 삼청공원→ 칠보사 → 삼청동 카페길
→ '팔판길 · 판서길’ → 감고당 길 → 안동별궁 터 · 담장길
기기국 번사창(한국금융연수원 내)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이다. 1982년 12월 17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되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28 한국금융연수원 내에 위치해 있으며, 소유자는 한국은행이다. 설계자 및 시공자는 중국인으로 추정된다. 기기국 소속 기기창에는 모래 뒤치는 곳, 나무 비계 만드는 곳, 금속 주형 제조소, 창고 등 여러 동(棟)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번사창은 그 건물들 중의 하나로 추정된다.
규모는 지상 1층, 대지면적은 5,710평, 전체 길이 33m, 폭 8.5m, 연면적 217.58㎡(66평)으로 단층 창고형 건물이다. 중국ㆍ서양 절충식의 양식으로 되어 있으며, 구조는 벽돌조로 되어 있고, 외장재는 진회색 벽돌과 일부 화강암으로 되어 있는 조적조 건물이다.장대석과 사괴석으로 토대를 쌓고, 그 위에 회색 벽돌로 벽체를 쌓고, 적벽돌로 견치형 띠를 둘렀다. 건물 벽면은 이중 벽돌쌓기로 지어졌으며, 벽돌 크기는 가로 25cm, 세로 5cm로 요즘 것들과는 다르다. 이 벽돌을 강회로 정교하게 쌓아 올렸다. 그 위에 왕대공 지붕틀을 일정 간격으로 세우고 맞배지붕을 이었다.
지붕에는 부분적으로 고측창을 두었는데, 이는 무기 제조시 발생하는 열과 오염된 공기를 배출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지붕 기와는 한식기와이다. 주 출입구는 화강석대 위에 화강석 기둥을 세우고 아치문을 내었으며, 부 출입구는 화강석대 위에 흑색 벽돌로 아치를 틀어 아치문을 설치하였다. 창문은 수평아치가 대부분이나 세그멘탈 아치를 일부 사용하였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말에 건립된 중국과 서양의 절충식 건물로서, 그 건축사적인 가치가 높다.
번사창의 건립 의도와 건축 연도는 1984년 해체 보수공사 때 발견된 이응익이 쓴 상량문에 의하여 밝혀졌다. “ 무기를 저장코자 터전을 반석(盤石) 위에 정하고 쇠를 부어 흙과 합쳐 건물을 지으니 이를 번사창(飜沙廠)이라 하였다. (중략) 칼ㆍ창 등 정예한 무기를 제조ㆍ수선ㆍ보관하는 건물은 기예의 으뜸가는 수준으로 지어져야 한다. ” 이응익, 번사창 상량문
상량문의 내용을 통하여 번사창의 기능은 무기의 제조ㆍ수선ㆍ저장고였음을 알 수 있었다. 또 번사창은 청나라의 건물을 모방하였으며, 북악 아래 삼청동 명당에 자리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번사창은 조선시대 말 근대식 무기를 제작하던 관아인 기기국 소속의 기기창 건물로서, 1883년 5월 착공하여 1884년 5월 16일 준공되었다. 이 때는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8년 후로 군대의 근대화를 위해 새 제도를 강구하고 근대식 군사훈련과 무기 제조에 힘쓰던 때였다.
1881년 7월 김윤식이 인솔하는 청년학도들이 청나라의 권고에 따라 천진에 영선사로 파견되었다. 이들의 주 임무는 신식 기기의 학습이었다. 유학생은 38명으로, 공학도 20명과 공장(工匠) 18명이었다. 그들은 청에서 건설되는 학당[1]과 공장[2]에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제도법과 화본에 의한 모형 제조법 등을 배웠다. 이들은 4인의 천진 공장(工匠)들과 함께, 과학서적, 기기의 형, 설계도, 기기 등을 가지고 귀국했다. 《윤치호일기(尹致昊日記)》에는 번사창의 건립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1883년 3월 종사관(從事官) 김명균(金明均)이 천진의 공장인 원영찬(袁榮燦) 등 4명을 고용으로 데리고 와서 5월 서울의 삼청동 북창(北倉)에 기기국을 설치하고 김윤식[3], 박정양(朴定陽)[4], 윤태준(尹泰駿), 이조연(李祖淵)[5]을 총판(總辨)에 (중략) 임명하여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8월에 김명균이 연대(烟臺)에 갔다가 상해(上海) 험취소(驗取所)까지 가서 기기를 구입하여 왔는데, 그때까지 창사(廠舍)가 준공되지 않았으므로 공도(工徒)들을 독려하여 벽돌과 돌을 쌓게 하였다. 세워진 창사에는 모래 뒤치는 곳, 쇠붙이 불리는 곳, 목양(木樣) 만드는 곳, 동모(銅冒) 만드는 곳, 그리고 고방(庫房)이 있다. 《윤치호일기(尹致昊日記)》조선시대에 병기ㆍ기치등을 만드는 관청인 군기감이 1884년에 새로 창설된 기기국과 합병됨에 따라 이 무기고를 건축하게 된 것이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51 호, 종로구 삼청동 28-1 (금융연수원 내) 강화도조약 체결 후 8년째 되던 해, 무기의 근대화를 위해 새로운 제도를 고민하면서 군사훈련과 무기 만들기에 힘쓰던 시기인 1884년에 건축되었다. 번사창은 최초의 신식무기를 만들던 공장이며, 우리나라와 서양의 건축양식이 어우러진 것으로 가치가 있다. 번사(飜莎)라는 말은 흙으로 만든 틀에 쇠를 녹여 용기를 만든 다음 화약을 넣은 것으로 폭발시킬 때 천하가 진동하는 소리가 나고 빛은 대낮처럼 밝다는 뜻이다.
조선 말기 근대식 무기를 제작하던 기기창 건물로 강화도 조약이 이루어지고 8년 후인 고종 21년(1884)에 지어졌다. 당시는 무기의 근대화를 위해 새 제도를 마련하고 근대식 군사훈련과 무기제조에 힘쓰던 때이다. 건물의 이름인 ‘번사(飜沙)’라는 말의 뜻은 흙으로 만든 틀에 금속용액을 부어 만드는 것을 말한다.
검은 회색 벽돌로 벽을 쌓았으며 붉은 벽돌로 띠를 두른 후,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을 올렸다. 문은 무지개모양이며 정문은 화강암으로 만들고 옆문은 붉은색 벽돌로 띠를 넣어 장식하였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공원으로 고려 충신 정몽주와 그 어머니의 시조비가 있으며, 공원 복판에 약수터가 있다. 삼청동 계곡 일대가 공원이 되어야 한다는 논쟁이 1929년부터 시작되어 1934년 3월에 조선총독부로부터 경성부가 삼청동 안 임야 5만평을 빌려 공원의 면모를 갖추었다. 순환도로, 산책도로, 정자 벤치, 풀장 등의 시설을 설치하였는데 1940년 3월 12일에는 도시계획공원 제1호로 지정되었다. 광복 후에는 각종 군민회 향우회 등이 이곳에서 열렸다.
북악산 동남쪽의 깊은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다. 예로부터 삼청이라는 이름 그대로 물이 맑고 숲이 맑고 사람의 마음 역시 맑은 곳이었다. 공원주변에는 수백년 묵은 소나무가 울창했던 곳이다. 솔숲 위로는 산벚나무가, 아래로는 진달래와 철쭉이 많이 자라 봄이면 천상의 화원을 이루던 곳이다. 삼청터널의 등장으로 인해 삼청공원은 두 동강이가 나 휴식공간이 그만큼 줄어들었다.
삼청공원은 서울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공원으로 교통이 편리한데다 주변에 화랑가, 별미집들이 많아 시민들의 산책 코스로 사랑받고 있다. 호젓한 산책로에 주위 경치가 좋아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오가는 삼청공원에는 고려 충신 정몽주와 그 어머니의 시조비가 있으며, 공원 한복판에는 약수터가 있다. 가을이면 단풍이 아름답다.
삼청공원 – 공원산책로 – 말바위 탐방로 – 팥배나무 숲 – 소나무 숲 – 서울성곽 일대
수도권 전철 3호선 안국역 (2번출구) 삼청터널방향 도보로 35분
소탈한 한글 현판 돋보여
서울 삼청동 칠보사에는 여느 절집과 다른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오백 살 먹은 느티나무도 좋고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의 삼청 계곡으로 이어지는 산길도 정겹지만 더 멋진 것은 한글 글씨다. 대웅전 현판은 ‘큰 법당’, 여섯 기둥에 붙은 주련도 정겨운 우리 한글이다.현판과 주력은 모두 2004년 세인의 곁을 떠나신 석주 큰스님의 작품이다. 당시 현판과 주련을 한글로 쓴다는 것은 지극히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둥글고 가득찬 지혜의 해 / 캄캄한 번뇌 없애버리고 / 온갖 것 두루두루 비치며
/ 모든 중생들 안락케하는 / 여래의 한량없는 그 모습 / 어쩌다 이 세상 오시나니”
산 맑고 물 맑고 사람 맑은 곳에 자리 ‘도심 포교 도량’
삼청공원 입구 갈림길에서 삼청터널 방향으로 직진하자 바로 ‘칠보사’ 가는 푯말이 나왔다. 그 푯말을 따라 한옥이 오밀조밀하게 붙어 있는 동내를 지나 조금 올라서자 칠보사 대웅전 처마와 경내로 들어서는 문(門)이 보였다. 칠보사 경내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족히 수백 년 되어 보이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있었고, 그 옆으로 종각 하나와 대웅전 오른쪽으로 요사 2동이 앉아 있었다.
사실 삼청동은 옛 한양 도성 안에서 제일 경치 좋은 곳으로 꼽혔다. ‘삼청’이란 산 맑고(山淸) 물도 맑으며(水淸) 그래서 사람의 인심 또한 맑고 좋다(人淸)는 뜻이다. 그래서 시인과 묵객들은 ‘삼청’을 소재로 많은 서화(書畵)를 남겼다. 이재(李栽․1657~1730)는 ‘뛰어난 삼청 하늘 속 골짜기여(絶勝三淸洞裏天)’, 이달(李達․1539~1610)은 ‘삼청은 대궐 모습 그대로(三淸留寶殿)’, 이관명(李觀命․1661~1733)은 ‘푸른 산 벽은 천년을 지켜왔네(蒼壁護千年)’라고 했다.
‘1958년 청신녀 칠보화 보살이 800여만 원을 들여 부지와 건물을 매입해 수리한 후 대웅전 6칸, 염불당 3칸, 삼성각 3칸 규모의 ’칠보암‘을 개원하며 석주 스님에게 ’무주상보시‘했다는 기록이다. 이후 석주 스님은 ‘칠보사’로 개명해, 1968년 2월부터 1972년 4월까지 경내 전각을 헐고 대웅전을 15칸으로 다시 짓고, 부처님을 새롭게 개금(蓋金)하고 후불탱과 함께 봉안했다.
또 종각을 신축하고 새롭게 제작한 범종을 걸어, 지금의 사격을 이루었다. 칠보사 자리에는 원래 삼각사(三覺寺)가 있었는데, 만해 스님의 유일한 제자이신 춘성(1891∼1977) 스님이 1932년경 경기도 광주군 성부산에 있던 봉국사로 이전하며 ‘삼각사’를 폐했다고 한다. 또 칠보사 부처님에 대한 세간의 이야기도 있다. 칠보사 부처님은 1905년 경기도 광주군 청량산의 영창대군 묘 곁에 있었던 ‘법륜사(봉선사 말사․지금은 폐사)’에 봉안된 부처님을 이운한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http://www.foodncafe.com/com_html/season/season.php?sc=1
http://ecoinfo.seoul.go.kr/ecomap/ecoload.php
문화향기로 가득한 삼청동 문화거리 종로구 삼청동 일대에는 향기가 가득하다. 경복궁, 창덕궁 등 고궁에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 곳에는 호젓한 산책로와 화랑, 박물관, 골동품 가게가 골목 사이에 숨어 독특한 아취를 뿜어낸다. 화랑, 박물관, 북카페 삼청동 순례의 출발점은 청와대 후문에서 동십자각(유형문화재 13호)사이. 국제갤러리, 금산갤러리, 학고재, 금호미술관, 갤러리, 현대 등이 경복궁 맞은편에 몰려있다. 화랑가 동십자각 근처에는 외국인들을 위한 책, DVD카페인 서울셀력션, 청와대 후문 근처에는 북카페인 진선북카페가 거리의 멋을 북돋운다.
골목길 숨은 명소 삼청동 길에서 우측으로 국군지구병원을 따라 5분 정도 걸어 들어가면 특색있는 박물관 2곳이 나타난다. 정독도서관 옆 서울교육사료관 은 삼국시대부터 교육과 관련된 도서, 옷 등 수천여 점을 선보이고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사용하던 책상인 서안부터 개화기 이후 교과서까지 전시되어 있어 자녀들과 함께 둘러보면 좋다. 정독도서관 맞은 편 골목길로 들어서면 티베트박물관과 세계장신구 박물관이 나온다.
티벳박물관은 라마 승려의 의상과 복장, 사람 가죽과 두개골로 만든 북, 불교용품 등 티벳 민속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며, 세계장신구박물관엔 세계 곳곳의 장신구가 게시되어 있다.
여덟 판사의 동네이야기 '팔판길 · 판서길’ (팔판동)
팔판동의 동명은 조선시대에 이곳에 여덟명의 판서가 살았다는데서 유래되었다. 조선 순조년간(1801~1834)에 저술된 『한경지략(漢京識略)』권2 각동조(各洞條)에도 팔판동의 유래가 되었던 8명의 판서가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전하지 않고 있다. 단지 팔판동은 서울에서도 자연 지리적 조건이 좋기로 유명한 곳인 만큼 8명의 판서가 함께 살았다는 것이 그저 우연히 발생한 전설(傳說)에 그친 것이 아닐 것 같다. 이곳은 옛부터 「팔판서골」이라 하던 곳으로 아마도 주요 관아가 경복궁 남쪽에 위치해 있어 직주(職住)근거리의 편의성에 따라 경복궁 동북쪽에 인근하여 있는 이곳에 판서들이 주거지를 택하였을 가능성이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은 복개된 삼청동길이 삼청동 계곡에서부터 흘러내리는 개천이면서 경복궁의 바로 동쪽에 위치한 까닭에 조선시대에는 벼슬길에 오른 양반들의 집단거주지가 되기도 하였다. 북촌(北村) 양반골을 형성했던 이곳에 판서 8명이 살았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 맥락은 지금도 이어져 삼청동 총리공관이 팔판동의 북쪽 끝지역과 이어져 있고 팔판동의 서쪽길은 청와대 앞으로 통하는 길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삼청동 157번지와 팔판동 115번지가 서로 연이어 있기 때문에 이 일대에 조선시대 삼청전(三淸殿)이 있던 곳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현재의 팔판동은 종로구의 북부지역으로 경복궁 동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북쪽 및 북동쪽으로는 삼청동, 서쪽으로는 청운동과 세종로동과 인접해 있으며 남쪽으로 소격동, 남동쪽으로는 화동과 인접해 있다. 또한 동십자각에서 삼청공원을 거쳐 삼청터널에 이르는 삼청동길이 팔판동의 동남부를 지나고 있다. 이 길은 율곡로와 사직로에서 성북동길과 이어지는 서울의 남북길로서 옛부터 서울의 명소인 삼청동 계곡을 찾는 길이며, 숙청문을 지나 성북동으로 가는 길이었다.
팔판길은 삼청동에 자주 오는 사람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 삼청동의 뒷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많다보니 비교적 한산하고 복잡하지 않아 짧은 산책로로 적합하며, 삼청동으로 들어오거나 나갈 때 한번쯤 들러보면 좋은 곳입니다. 팔판길은 삼청동 총리공관 맞은편 스페인시장 엘까사 옆 골목으로 들어오면 바로 접할 수 있으며, 약 200m정도의 짧은 길을 지나면 경복궁 돌담길이 보이는 삼청동 입구쪽으로 나가게 됩니다.
서울의 팔판동(八判洞)은 당시 강릉김씨(江陵金氏)의 판서들이 집단적으로 이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생긴 이름으로 전해진다. 이중 유일하게 영의정에까지 오른 사람은 김상철(金尙喆)이다. 중기 이후엔 명종(明宗)~숙종(肅宗)대에 8명의 판서(선팔판(先八判)), 영조(英祖)~정조(正祖)대에 또 8명의 판서(후팔판(後八判))를 배출,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는다.
선팔판(先八判)은 김첨경(金添慶 형(刑)ㆍ예(禮)ㆍ이판(吏判)), 김홍주(金弘柱 병판(兵判)),김득원(金得元 병판(兵判)), 김홍권(金弘權 이판(吏判)), 김시환(金始煥 예(禮)ㆍ이판(吏判)) 김시현(金始鉉 이판(吏判)), 김시혁(金始火奕) 이판(吏判)), 김시경(金時烱 병판(兵判))
후팔판(後八判)은 김상익(金尙翼 예판(禮判)), 김상성(金尙星 예(禮)ㆍ호(戶)ㆍ이판(吏判)), 김상중(金尙重 형(刑)ㆍ공판(工判)), 김상집(金尙集 형(刑)ㆍ공(工)ㆍ호(戶)ㆍ병판(兵判)), 김상철(金尙喆 육판(육판)ㆍ영의정), 김노진(金魯鎭 예(禮)ㆍ형(刑)ㆍ이판(吏判)), 김화진(金華鎭 예(禮)ㆍ형(刑)ㆍ호(戶)ㆍ공판(工判)), 김계락(金啓洛 공(工)ㆍ형(刑)ㆍ예판(禮判))을 이르는데 이 시기에 강릉김씨(江陵金氏)는 절정을 이루었다.
감고당 길
감고당길은 인사동을 지나 풍문여고에서 정독도서관까지 이어지는 골목길을 말한다. 감고당은 민씨 집안의 두 왕비인 숙종의 비 인형황후와 고종의 비 명성황후가 머문 집이다. 명성황후는 왕비에 책봉된 후 인현황후를 떠올리며 감고당(感古堂)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때 예술 영화를 보기 위해 찾아다니는 이들과 여고생들의 맛집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레스토랑이나 갤러리가 늘어나 20~30대의 데이트 코스나 산책 코스로도 이용된다.
감고당은 조선 숙종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가 살던 친정집이다. 인현왕후는 14살에 왕비로 간택되었다가 장희빈의 모함으로 폐서인되어 6년간 감고당에 갇혀 살다가 환궁하였다. 지금은 도봉구 쌍문동 덕성여자대학교로 옮겨지고, 그 자리에 표석만 남아있다. (덕성여자고등학교 정문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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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ho2pus&logNo=90152301140
감고당은 조선 후기에 건축된 건물로, 조선 고종의 왕후 명성황후 민비의 생가이자 숙종비 인현왕후의 친정아버지 민유중의 묘소를 관리하면서 지키던 묘막이었다. 인현왕후가 친정을 배려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었다. 본래 한성부 안국방 37번지(서울시 종로구 안국동 37번지)에 인현왕후가 자신의 친정에 특별히 내려 준 건물과 1687년(숙종 13년)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산에 숙종의 장인이자 인현왕후의 친정아버지 민유중의 묘소를 지키기 위한 묘막이 각각 건립되었다. 그러나 안국동의 감고당은 후일 덕성여고가 설립되면서 현재의 여주 능현리로 일부 시설물이 옮겨졌고, 간판 역시 여주의 민유중 묘막에 옮겨졌다.
당시 건물로 현재 전하는 건물은 27평이며 나머지 건물은 해방 이후 복원되었다. 이후 민유중 가문의 종손들이 대대로 거주하면서 묘막을 지켰으며, 1851년 9월 25일 고종의 비 명성황후가 여기서 태어났다. 이후 민치록은 1858년에 사망했으나 민자영은 비로 간택되기 전까지 계모 한산이씨와 감고당에서 계속 거주하였다.
일제 강점기때 파괴되고 6.25 전쟁 때 다시 파괴되었으나 1976년 박정희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복원공사가 시작, 안채가 중수되었고 1995년에는 행랑채와 사랑채, 초당 등이 복원되었다.
명성황후민씨(明成太皇后閔氏, 1851년 9월 25일~1895년 8월 20일)
인현왕후민씨(仁顯王后, 1667년 4월 23일~1701년 8월 14일)
현재 여주 명성황후 생가 곁에 있는 감고당은 이 자리에 있던 가옥이 아니다. 원래 감고당은 서울 종로구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편에 있었다. 그 후 1966년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겨졌다가, 쌍문고등학교 신축계획에 따라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 마침 여주군은 명성황후 생가의 성역화 당시였기에 2006년 현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수차례 이전을 하면서 원래의 모습이 변하기는 했지만, 감고당은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건축구조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소중한 가옥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 감고당의 편액은 1761년 영조대왕이 효성이 지극한 인현황후를 기려 친필로 쓴 것을 하사하면서부터라고 한다. 감고당은 조선조에 두 명의 황후가 기거하던 집으로 유명하다. 숙종임금의 계비인 인현황후(1667~1701)가 장희빈과의 갈등으로 물러나면서, 복위가 될 때까지 5년간을 이곳 감고당에서 기거하였다. 또한 명성황후가 8세에 서울로 올라간 뒤 왕비로 책봉이 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이렇듯 감고당은 우리나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가옥으로 유명하다.
감고당을 들어가는 문 입구에는 영조의 친필인 감고당 편액이 걸려 있다. 솟을대문은 중앙과 우측에는 문을 내고,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 문이 있을 자리에는 방이 들어섰다. 누가 문이라도 열어달라고 하면 바로 나갈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들었다. 행랑채의 앞에는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는 남성들의 공간이다.
이곳은 손님을 맞이하기도 하고, 시를 쓰고 정치를 논하기도 하는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나랏일을 걱정하고는 했을 것이다. 감고당의 사랑채는 대청, 사랑방, 누마루로 구분이 되어 있다. 사대부가의 집이라고는 해도 정취가 있게 지어진 집이다 우측에 사랑채를 비켜서면 중문채가 있다. 중문채는 사랑채와 안채를 가르는 곳이다. 중문채의 입구에는 중문이라는 또 다른 문이 있다. 문 안편으로는 안을 직접 들여다 볼 수 없도록 칸막이를 하였다. 이 중문채에 달린 방에는 집안에서 일을 하는 청지기 등이 기거를 하는 곳이다. 또한 김칫독을 저장하는 저장소나 곳간 등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중문채를 들어서면 안채다. 안채는 여자들의 공간으로 사랑채와는 담을 사이에 둔다. 감고당의 안채는 집안에서 가장 안편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외부와는 차단되었다.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이곳 안채는 명성황후와 인현황후가 기거를 했던 곳이다.
인사동에서 한걸음만 더 내디디면 감고당길이다. 풍문여고 옆길로 덕성여중고를 따라 정독도서관 앞까지 이어지는 짧다면 짧은 길이다. 그 길에는 여학교가 셋이나 자리한다. 우연이라면 우연이고 또 필연이라면 필연이겠다. 감고당길이 유독 여성들과 인연이 깊은 까닭이다.
감고당은 원래 숙종이 인현왕후의 친정을 위해 지어준 집이다. 대대로 민씨 집안이 살았으며 폐위된 인현왕후가 거처했던 장소다. 그 후손이 명성황후다. 명성황후는 감고당에서 8년을 살았고 왕비에 책봉됐다. 감고당(感古堂)이라는 이름은 명성황후가 친척 할머니뻘 되는 인현왕후를 떠올려 지은 이름이다. 먼 훗날의 일을 미리 예견이라도 했던 것일까. 하지만 지금 감고당길에 감고당은 없다. 덕성여고에 있던 것을 쌍문동 덕성여대를 거쳐 여주군의 명성황후 생가 옆으로 이전했다. 그래도 그 이름은 오랜 세월이 지나 길 위에 남았다.
감고당길은 두 가지 색깔을 가진다. 길의 중간까지는 풍문여고와 덕성여중고의 돌담길을 따라 걷는 고즈넉한 길이다. 깔끔하게 단장한 돌담길 아래 드문드문 벤치들이 자리한다. 돌담길이 끝날 때부터는 카페와 레스토랑, 갤러리들이 자리한 제법 북적거리는 길이 된다. 그 중간 지대에 종종 수제 액세서리를 파는 좌판이 늘어서서 완충 지대 역할을 한다.
과거에는 풍문여고나 덕성여중고 학생들이 그 경계를 넘나들었다. 요조숙녀들은 아트선재센터나 정독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분식집에서 옹기종기 모여 수다를 떨었다. 지금도 인근에는 떡볶이나 라면 등을 파는 유명한 분식집이 많다. 감고당길에서 길게 늘어선 줄은 '먹쉬돈나'의 떡볶이를 먹기 위한 행렬일 확률이 높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아트선재센터에 예술 영화를 보기 위채 찾아드는 이들이 많았다. 근래에는 갤러리들이 늘어나면서 감고당길을 찾는 연령층도 조금 높아졌다. 북촌 일대와 이어지는 길이라 북촌이 관심을 받으면서 감고당길도 자연스레 유명세를 탄 것이다. 하지만 전통과 역사 못지않게 그 위에 쌓인 현대적 문화 예술의 색깔도 짙다. 역사의 흔적을 따라 숨어들어 예술의 창고로 나오는 길인 셈이다. 20대 초반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나 산책길로 자주 이용되는 것도 그런 이유다.
1. 덕성여고 감고당 터
덕성여중고는 1920년 근화여학교로 설립돼 1945년 덕성여중으로 이름을 변경했다.1951년에는 덕성여중과 덕성여고의 병립 인가를 얻었다. 풍문여고 지나 감고당길의 중간쯤에 위치한다. 학교 정문에는 감고당 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감고당은 덕성여고 본관 서쪽의 테니스장 자리에 있었다. 감고당길을 자주 오가던 이도 정확한 그 기원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한번쯤 과거로 스며들어 조선왕조 두 황후의 비극적 삶을 통해 우리의 현재를 돌이켜 생각해볼 일이다.
천안 아라리오의 서울 진출
풍문여고에서 정독도서관 사이 오래된 목욕탕이 갤러리로 변신했다. 누군가 갤러리로 쓰려고 개조해둔 것을 한 번 더 리모델링해 완성한 아담한 건물로 아라리오 서울이 이곳의 주인이다. 80평 규모의 2층 건물로 꾸며진 아라리오 서울은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모체는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다. 한국 미술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천안 아리리오의 서울 진출이란 점에서 오픈 당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세계 미술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한 첫 번째 교두보를 천안 아라리오를 통해 구축했다면 이를 더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역할을 아라리오 서울에서 담당하기 때문이다.
천안 아라리오는 유명 대가의 작품을 오랜 기간 전시하고 전속작가를 육성, 세계 진출에 주력해 왔다. 반면 아라리오 서울은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더불어 자기 세계가 뚜렷한 중진 작가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하고 있다. 중국,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작가들도 소개하고 있다.
젊은 작가들을 위한 전시공간
전통 가옥과 현대 건축의 어울림
아트선재센터가 위치한 소격동은 고대 박물관에서 현대 미술 현장으로 가는 중간 지역이다. 옛 서울 주거 환경과 생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독특한 지역이다. 아트선재센터는 고즈넉한 서울의 고도에 가장 현대적인 문화 예술을 불러들여 새로운 문화 중심지로 탄생시키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고유한 지역 색채를 지키면서도 지적 활기와 국제적 시각을 불어넣고 있는 것.
1995년 설립 당시에는 한옥을 개조하여 개관했으나 전시 공간 확충과 관람 편의를 위하여 1998년 현대식 미술관을 새로 지어 이전했다. 아트선재 본관 옆에 위치한 한옥은 원래 미술관 자리에 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으로, 현재 아트선재의 프로젝트와 교육 프로그램을 위해 활용되고 있다. 아담한 대나무숲에 에워싸인 경치가 아트선재센터의 방문자들을 맞이한다.
견고하고 기하학적 건물은 전통 스타일에 현대성을 가미했다. 총 6층 건물에 전시장, 로비, 소극장 등을 갖추고 있다. 전시장은 자유롭게 변화시킬 수 있도록 단일 공간으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전시장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투명 유리로 처리해 자연 채광을 만끽할 수 있는데, 덕분에 자칫 폐쇄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미술관 내부가 한층 밝아 보인다. 전시장에서 내려다보면 아래로 펼쳐진 삼청동 일대의 한옥과 도시 풍경을 감상할 수도 있다.
전시 공간 외에도 1층에는 레스토랑과 카페, 아트숍이 있어 관람객들의 발길을 끈다. 뿐만 아니라 아트선재센터 지하 1층에 위치한 씨네코드는 250석 규모의 아트홀로 영화 관람 및 음악 공연, 심포지엄 등의 행사가 열린다.
과감하고 실험적인 복합 예술 공간
아트선재센터는 젊고 실험적인 현대 미술을 전시하는 사립 미술관이다. 국제 수준의 기획전과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어 일찍부터 미술계와 일반 대중의 주목을 받아왔다. 매해 독창적인 전시 기획력과 부대 공간을 활용하는 아이디어를 통해 지속적으로 변모를 거듭하고 있는 점이 아트선재센터의 강점.
역사 깊은 학교 건물을 조한 도서관의 매력
쾌적한 환경 속에 공부도 하고 데이트나 휴식을 즐기고 싶다면 삼청동 근처 북촌길에 있는 정독도서관을 찾아가 보자. 오랜 역사를 가진 경기고등학교 건물을 1977년 개조해 만든 정독도서관은 대지 3만6406제곱미터(약 1만1032평), 건물 1만3000제곱미터(약 3939평)에 달하는 넓은 규모를 자랑한다. 세월의 흔적을 말하듯 건물은 낡았지만 학교 건물이었기 때문인지 정겨운 느낌이다.
정원과 이어진 아치형 입구도 고풍스러운 건축미를 느끼게 한다. 정독도서관 내부는 옛날 학교 복도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어 어린 시절 친구들과 복도를 뛰어다니던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깔끔하게 정돈된 도서관 안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독서 공간인 어린이실과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 각종 어학 자료와 문학 자료를 총망라한 어문학실로 나뉘어 있다. 회랑을 따라 이어진 다른 건물에는 온라인 정보를 제공하는 디지털 자료실과 논문, 족보, 인문사회 자연과학 서적 등으로 나뉜 열람실이 있다. 마지막 회랑을 따라 나가면 2900여 좌석을 갖춘 엄숙한 분위기의 공부 열람실이 나타난다.
이밖에도 다양한 전시회를 열고 있는 정독갤러리와 시청각실, 문화교실도 갖추고 있어 정독도서관의 방대한 규모에 다시 놀라게 된다. 또 이런 공간의 장점을 활용하여 시민들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특별 활동과 문화교실 프로그램, 1일 독서교실, 전통천자문교실, 영화 상영 등을 진행하고 있는 점도 정독도서관의 매력이다.
벚꽃길과 풍요로운 정원에서 휴식을 맛보다
안동별궁 터 · 담장길 (풍문여고 내)
종로경찰서에서 율곡로 건너 맞은편 골목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길을 따라가면 가회동과 감고당길로 이어진다. 그리 길지 않은 길이지만 그 안에 무수한 역사의 표정과 흔적이 들고난다. 가회동 못지않은 한옥의 정취도 간직하고 있다. 도심에서 멀지 않아 한적한 산책로를 찾을 때 안성맞춤이다. 종로경찰서에서 율곡로 건너 맞은편 골목으로 이어지는 길로 가회동 못지않은 한옥의 정취가 가득하다
예스런 풍모를 간직하다
종로경찰서 앞에서 율곡로를 건너면 별궁길로 접어든다. 대로와 바로 접하는데도 그리 심하게 개발의 손길이 뻗치지 않아 한적하다. 그 이름처럼 별궁에 들어온 듯하다. 서울시와 종로구가 걷고 싶은 거리로 조성한 이유를 알겠다.
별궁길은 그 이름 그대로 별궁이 있었던 자리다. 지금의 별궁길은 아니고 현재의 풍문여고 자리에 해당한다. 고종 18년(1881)에 안국방의 소안동에 지은 별궁이라 해 안동별궁이라 불렀다. 세종 20년부터 왕가의 저택이 들고났던 자리다. 고종 때는 왕세자로 책봉된 순종의 혼례를 안동별궁에서 치렀다. 역대 궁중의 혼례 가운데 가장 성대했다고 전한다. 후에는 김옥균 등이 갑신정변을 일으키며 거사의 신호로 안동별궁 방화를 계획했으나 실패했다.
지금도 별궁길은 예스런 풍모를 간직하고 있다. 초입에 자리한 골동품점이나 고미술점이 그 출발점이다. 곧 좌우로 숨어드는 골목이 나타나고 그 안으로 깊숙이 스며들면 뜻밖의 풍경들을 만난다. '로마네 꽁띠' 안국점 같은 한옥 와인 레스토랑도 그 가운데 하나다. 옛 한옥의 정취는 가회동이나 계동 등 북촌의 깊숙한 곳에 있다고만 생각하기 쉬운데 별궁길은 가장 가까이에서 만나는 한옥 마을이기도 하다.
근대사의 역사를 간직한 고택들도 자리한다. 대표적인 예가 윤보선 전 대통령의 고택이다. 19세기 말에는 민씨 가문이 살았으며 무려 99채에 이르는 대가였다. 갑신정변 주요 인물인 부마도위 박영효가 살기도 했다. 1910년부터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친이 살았으며 지금까지 그 일가들이 4대째 기거하고 있다.
맞은편에는 100년 역사의 안동교회도 있다. 평신도들이 세운 최초의 교회로 잘 알려져 있다. 한옥 별채 소허당도 눈여겨볼 만하다. 곁에 있는 출판사 명문당 건물도 특이하다. 폐허인 듯 보이는 5층 건물은 여전히 출판사 역할을 하고 있다. 그곳까지 걸어가고 나면 불과 100~200미터 전에 지나온 율곡로의 숨 가쁜 행렬이 아주 오래전 기억인 듯하다. 별궁길이 간직한 마법 같은 시공의 힘이다.
1. 윤보선 고택
별궁길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이다. 안동교회 맞은편에서 길을 따라 10~20미터 가까이 돌담이 이어진다. 지난 2002년에 사적 제438호로 지정됐을 만큼 유서 깊은 고택이다. 다만 비개방 가옥이라 출입이 불가능하다. 그저 담장 너머나 열쇠 구멍 사이로 대문 너머의 풍경을 살필 뿐이다. 하지만 길 따라 이어진 예스런 돌담과 담장 너머로 삐죽 고개를 내민 능소화의 주황빛 꽃봉오리만으로도 별궁길의 운치를 더하는 건물이다.
별궁길의 대표 공간, 안동교회
종로경찰서 앞 율곡로 건너편의 골목은 별궁길이다. 한적한 한옥촌으로 근대사를 대표하는 두 건물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안동교회와 윤보선 고가다. 윤보선 고가는 한때 박영효가 살던 집으로 민가 최대라는 99칸을 자랑했다. 사적 제438호지만 비개방 가옥이라 들어가볼 수가 없는 게 아쉽다.
맞은편 안동교회는 1909년에 세운 교회로 2009년에 창립 100주년을 맞았다. 양반들이 모여 만든 교회로 평신도들이 세운 첫 교회이며, 윤보선 대통령이 적을 두기도 했다. 안동교회는 바깥으로 난 쉼터가 말해주듯 열려 있는 교회다. 또한 교회 본당 옆에는 소허당(笑虛堂)이라는 한옥 별채가 있는데 크기는 아담하지만 그 풍경이 참으로 소담스럽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자그마한 중정이 있고, 바깥으로 툇마루를 낸 한옥이 기단 위에 옹골차게 자리 잡고 있다. 작지만 꽉 들어찬 느낌이다.
별궁길에서는 드물게 소허당은 그 공간을 시민들에게 활짝 열어두고 있다. 평일에는 무료 문화 강좌를 마련하는데 매주 화요일에는 단전호흡 강좌를, 목요일에는 퀼트 강좌를 연다. 한옥에 단전호흡은 어울린다지만 교회에서 하는 단전호흡 강좌라니 조금 이색적이다.
토요일은 무료 찻집을 운영한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누구나 들러서 차 한잔 나누고 갈 수 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약속장소로 사용하라고 권하기도 한다.
'소허당(笑虛堂)' 이라는 현판 역시 시선을 잡아끈다. 안동교회에서 교인들에게 공모해 정한 이름으로 추사 김정희의 글씨체를 집자해 만들었다. 소허당이란 ‘허심한 마음으로 웃는 집’이라는 뜻이다. 누구나 마음을 열고 그 마음을 나누며 함께 웃는다. 예수의 삶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안동교회 소허당은 한적하고 여유로운 별궁길의 운치를 꼭 닮았다. 정갈한 한옥에서 즐기는 따뜻한 차 한잔이 언 마음을 녹인다.
소박한 외관 속 알찬 전시
한국 작가의 해외 진출과 세계적인 해외 작가의 국내 홍보에 주력해온 박경미 대표가 2001년 자신의 영문 이니셜을 딴 PKM 갤러리를 화동에 개관했다. 고즈넉한 주택가와 사이좋게 공간을 나누고 있어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만큼 주변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2층집을 개조한 갤러리는 100평 정도의 규모로 지하 1층과 지상 2층의 구조다. 갤러리 2층은 창을 통해 은은한 햇빛과 주변 한옥의 풍경을 볼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PKM 갤러리는 일 년에 4~6개의 전시를 통해 회화, 조각, 퍼포먼스, 건축과 디자인, 사진, 설치, 비디오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소개한다. 대표작가로는 이불, 함진, 김지원, 이상남, 스티븐 프리나, 호르헤 파르도, 브루스 나우먼 등이 있다. 유명 한국작가와 해외작가 등의 작품 전시와 더불어 역량 있는 신인 작가 발굴에도 힘을 쏟고 있다.
가회헌이 자리한 가회동은 가장 한국적인 곳이다. 삼각산 자락과 종로통을 낀 북촌 한옥마을과 전통이 숨쉬는 문화 유산이 곳곳에 있기 때문. 재동초등학교 사거리를 중심으로 갤러리와 레스토랑이 속속 문을 열면서 가회동은 그 자체로 복합 문화 공간이 되고 있다. 고전 속에 현대의 조화를 꿈꾸는 이곳에 동 이름을 그대로 딴 가회헌이 있다. 재동초등학교 사거리에서 경북궁 쪽으로 좌회전하자마자 오른편에 자리한다.
광화문의 ‘나무와 벽돌’이 본점인 가회헌은 이탈리안 식당과 와인바, 베이커리를 갖춘 복합 레스토랑이다. 본점과 같이 나무, 벽돌 등 자연을 소재로 한 편안한 인테리와 다양한 회화 작품으로 공간에 문화의 향기를 불어넣었다. 가회헌의 주인은 윤영주 씨다. 가회헌을 오픈하기 전에는 빵집을 운영하다가 빵과 과자에 문화를 불어넣고 싶다는 열정으로 레스토랑 경영을 시작했다.
그런 바람은 가회헌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건축가 황두진의 작품으로 탄생한 가회헌은 유럽 스타일의 본체 건물과 한옥 별채가 있다. 별채인 한옥은 낡은 한옥을 고쳐 더욱 한옥답게 만든 가회헌의 자랑거리다. 14명이 들어갈 수 있는 별채는 가족 단위나 외국인 단체 관광객들을 위해 특별히 신경을 쓴 장소다. 실내 벽을 장식한 국내 중견 작가의 그림과 30년 지기인 화가 김점선 씨의 작품이 실려 있는 메뉴판도 가회헌만의 자랑거리다.
안동별궁은 세종 31년 영응대군의 집으로 처음 지어졌다. 병이 생긴 세종이 이곳으로 옮긴지 10일 만에 돌아가시자 그대로 빈소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성종은 자신의 형인 월산대군에게 이 집을 주었고 월산대군이 죽은 후 빈집으로 남기도 하였다. 그 후 인조가 인목대비가 낳은 정명옹주에게 주면서 인조 3년에 크게 다시 지었다. 숙종 34년에는 이곳을 왕자인 언령군의 집으로 선택했고, 철종 때는 은신군의 아들(전계대원군) 묘가 이곳에 만들어 졌다가 고종 때 묘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그 자리에 별궁을 짓게 되었다.
1910년 이후 대전 안에 살던 내인들이 사용하다가 총독부 재산으로 된 이후 1937년에 경성휘문 소학교가 들어섰고 1945년에는 안동별궁 자리의 일부가 현재 풍문여고의 자리에 들어가 있다. 한편 안동별궁은 갑신정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이기도 하다. 개화파 홍영식, 김옥균, 박영효는 우정총국 파티장에서 갑신정변의 신호탄으로 안동별궁 방화가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대신 민가에 불을 지르라고 지시하여 불길이 치솟자 파티자은 아수라장이 되면서 갑신정변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안동별궁(安洞別宮)은 현재 안국동 풍문여고 경내에 위치하였다. 안동별궁이 있던 자리는 전부터 역대 왕실의 저택이 있던 곳이다. 고종 18년(1881)에 지은 별궁으로서 그 소재지가 북부 안국방(安國坊)의 소안동(小安洞)에 있다고 하여 안동별궁으로 호칭하게 된 것이다. 일부 문헌에는 안국방 별궁으로 말하기도 하였다.
안동별궁의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1882년 2월에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가례가 이루어진 곳이라는 것이다.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에 이어 좌찬성 민태호 집안의 민씨가 간택이 되어 별궁으로 향한다. 가례 당일, 면복을 갖춰 입은 세자는 스스로 가서 안사람을 맞이하여 종묘를 이으라는 부왕의 명을 받아 별궁으로 간다. 왕세자가 위에 나아가 전안하고, 빈은 부모에 인도되어 나온다. 가례의식이 끝나면 빈과 왕세자는 연을 타고 이극문으로 궁에 돌아오게 된다. 1899년부터는 미국독립사·파란말년전사·법국혁신전사등 신간서의 판매처 역할도 하였다. 그리고 그 부지가 개인에게 판매되면서 학교와 주택등이 들어서게 되었다.
안동별궁은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의 가례처로 건립된 별궁이었다. 안동별궁이라는 이름은 이 별궁이 안국방 소안동에 자리잡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그러던 것이 당시 세자였던 순종의 가례를 위한 별궁으로 거듭났던 것이다. 이것이 1880년의 일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1882년 순종은 여흥인 민태호의 여식(순명효황후 민씨)과 가례를 올렸다. 순종의 두 번째 가례가 있었던 1906년에도 역시 가례도감이 설치된 곳은 이곳 안동별궁이었다. 두 번째 가례의 주인공은 해평 윤씨인 윤택영의 여식으로, 순정효황후가 그 분이다. 이렇듯 안동별궁은 순종의 가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교정 뒤쪽 은행나무 아래의 비석에 새겨진 현모양처의 요람이라는 말이 더 실감나게 느껴진다.
이러한 안동별궁이 개항기 혼란한 정국 속에서 개화파의 거사와 관련된 곳으로서, 우리 근대사에 그 이름을 올린 현장이다. 말하자면 갑신정변 방화사건의 현장이다.
1884년 12월 4일 저녁 7시, 우정국 개국 축하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개국축하연을 김옥균 등 개화당 세력은 정변의 기화로 삼고자 하였다. 1880년대 초반 개화당세력은 여타 정치세력과 치열한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자신들과는 다른 방식의 개화를 추구하고 있던 동도서기파들은 여러 모로 개화당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였으며, 게다가 그들은 정치적으로 중용되고 있었다.
더욱이 당시 민씨척족의 촉망받는 기대주였던 민영익(그는 명성왕후 민씨의 조카로 왕후의 후원에 힘입어 개화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은, 조미수호조규 체결 이후 보빙사로 미국과 유럽을 돌아보고 와서는 전과 달리 보수적인 행보를 보여 개화당 세력의 눈엣가시가 되어버렸다. 정세를 관망하던 개화당 세력은 거사를 단행하여 일거에 판도를 뒤엎으려 하였다. 그 거사가 바로 갑신정변이었다.
개화당들의 계획은 대략 이러하였다. 먼저 우정국 근처에 있는 안동별궁에 불을 질러 거사의 신호로 삼고, 이에 따라 미리 준비한 대로 반대파들을 처단한다. 반대파를 처단한 후 김옥균 등이 입궐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변란이 일어났으니, 속히 다른 궁으로 이거할 것을 권한다. 이 과정에 재빨리 정국을 장악한다.
별궁에 불을 지르고자 한 것은 주변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별궁이 불타기 시작하면 자연히 주변이 소란스러워질 것이고, 그러한 혼란은 반대파를 처단하는 데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화재의 연기를 고종도 볼 것이니(당시 고종은 창덕궁에 머물고 있었다) 변란이 일어났다는 것의 증거로 내세울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한편 고종에게 이거를 권한 것은 고종을 친위세력으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이러한 계획은 대체로 맞아떨어졌다. 다만 안동별궁 방화계획은 실패하여 인근 민가에 불을 질러 거사의 신호로 삼았다고 한다. 우정국에서 가장 먼저 해를 당한 사람은 민영익이었으며(그러나 그는 알렌의 도움으로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고종은 김옥균의 권유로 경우궁으로 처소를 옮겼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이 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났다.
김옥균 등 개화당 세력은 불을 지를 곳으로 왜 안동별궁을 지목했을까? 흥미로운 것은 당시 갑신정변 주역 중의 하나였던 서광범의 집이 안동별궁에 바로 인접한 덕성여고 자리였다는 점이다. 은행나무 아래 서있는 비석에는 이곳이 1910년 이후 상궁의 거처로 쓰였고 1937년에는 안유풍 여사가 휘문소학교를 세운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1945년에 풍문여고를 설립했으며 1966년에야 건물을 해축하여 서삼릉과 우이동으로 옮겼다고 되어있다. 학교설립자인 안유풍 여사의 부군은 휘문학원 설립자인 민영휘이다. 개항기 민씨척족 유력자 가운데 민영준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민영휘인 것이다.
3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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