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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역사탐방 30탄, 문화양념통 야합의 첫 단추 3당합당(1990년)

草霧 2012. 11. 8. 19:35

 

 

 

근현대사 역사탐방 30

 

문화양념통

 

야합의 첫 단추

 

 

 

 

3당합당 (1990)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288 박정희 사망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91 1212사태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294 3·15 부정선거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296 419혁명~516 쿠테타 1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297 419혁명~516 쿠테타 2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298 419혁명~516 쿠테타 3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299 419혁명~516 쿠테타 4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00 419혁명~516 쿠테타 5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04 10월 유신 1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05 10월 유신 2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081212사태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13517쿠데타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64전두환 백담사 운둔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52언론통폐합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19629선언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89 초원복집사건

 

 

5공화국 (1980~ 1888)

4·13호헌조치 [四一三護憲措置] (1987)

6월민주화운동 [六月民主化運動] (1887)

6·29 선언 (1987)

6공화국 (노태우정부, 1988~ 1993)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1988)

5.18청문회 (1989)

·노 두 전직 대통령 법적 심판 (1995)

5.18 특별법 제정 (1995)

 

 

 

대한민국 제13대 국회의원 선거(19884)

 

 

 

 

여소야대국회(1988)

 

13대 총선을 통하여 885월 여소야대로 출범했던 제13대 국회가 3당 합당에 따라 국민의 뜻과 상관없이 여대야소로 탈바꿈한 채 정기국회 폐회와 함께 막을 내렸다. 개원당시의 의석분포는 민정 125, 평민70, 통일민주 59, 공화 35, 한겨레민주당 1석에 무소속 9석 등 여야가 125174로 뒤바뀌는 의정사상 유례없는 구도를 나타냈다. 이에 따라 김재순 의장도 황금분할이라고 추켜세웠다. 또 평민당의 김대중,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공화당의 김종필 총재 등 야권지도자들은 민주화와 5공화국 비정청산을 위해 협력할 것을 다짐, 개원과 동시에 5공 비리, 광주민주화운동, 악법개폐, 양대 선거 부정조사 등 7개 특위를 구성해 5공청산과 민주화를 위한 제도개선작업을 서둘렀다. 13대 국회는 전직 대통령을 청문회 출석, 국정감사 부활, 지방자치제 부활을 하였다. 개원됐을 때만해도 여야간의 타협으로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겠다고 공언했던 여당은 3당 합당이라는 지각변동을 일으킨 뒤부터는 단독처리, 소수의 항변과 주장을 무시, 야당은 의원직사퇴 및 단식 등 극한투쟁에 의존하였다.

 

 

국정감사

 

5공 청산을 기치로 내걸고 5공 비리, 광주민주화운동, 언론통폐합 등 이른바 3대 청문회를 열어 장세동 전 안기부장 등 5공 실세의 증언대로 불러냄으로써 정치적 관심의 폭발이라고 할 정도로 국민들의 뜨거운 시선을 모았다. 이때 우리 사회의 성역이 무너지는 계기가 마련됐으며 삼청교육대의 인권탄압실상, 새세대육영회와 심장재단의 자금조성, 쇠고기매장사건, 언론통폐합과 공직자 해직, 골프장내인가 등 전두환 전 대통령일가와 관련된 부정비리, 군의 정치개입 등 5공 출범 과정상의 문제점, 수사정보공안기관의 인권유린, 정경유착으로 인한 권력형 비리, 방만한 국가예산집행과 공직자들의 부도덕한 행위, 들을 심층 추궁했다.

 

국회청문회 (5공화국 청문회 1988)

 

 

 

5공비리특별위원회의 5공 비리특위( 이기택)518광주특위(문동환) 및 문공위(정대철)는 각각 일해재단설립배경과 자금조성관련청문회,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청문회, 언론문제 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를 열어 이른바 청문회정국이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이들 위원회는 같은 해 11-12월 사이에 증인으로 김대중, 장세동, 허문도, 정호용, 정승화, 이희성, 신현확, 정주영, 그리고 언론 사주를 포함해 100여 명에 달했다.

 

TV로 생중계된 이들 청문회는 88올림픽 시청률을 뛰어넘을 정도로 국민의 폭발적 인기를 불러일으켜 5공 청산의 국민적 공감대를 국민저변에 확산시키고 국민대중과 의회정치를 TV로 직접 연결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특히 일해청문회는 589억 원의 기금모금과정과 청와대의 개입을 밝혀냈으며, 언론청문회는 언론인 대량해직, 언론통제의 진상 등을 파헤쳤고, 광주청문회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조작여부, 517 계엄확대의 합법성과 공수부대의 지휘책임, 발포명령자와 정확한 사망자수 등을 집중 추궁했다. 청문회정국은 결국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증언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29082

http://www.study21.org/518/video/auditing88-12-06.htm

http://www.knowhow.or.kr/rmhno/rmh_president/history.php

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3/27/20120327028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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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legongbuwarac.edupia.com/xmlPrint.aspx?did=55929

 

3당합당 (1990)

 

 

1990122, 당시 집권여당 민주정의당(약칭 민정당)이 제2야당 통일민주당(약칭 민주당), 3야당 신민주공화당(약칭 공화당)과 합당해 통합 민주자유당을 출범시킨 것을 말한다. 3당 야합이라고도 한다. 여당인 민주정의당을 중심으로 3당 합당을 추진해 보수당(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을 창당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5공화국의 민정당이 민주진영인 야당의 분열로 정권을 잡았으나, 민주화요구와 군사정권 청산요구는 위협이 되고 있었다. 이러한 국민적 요구에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주정의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자, 노태우 정부은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이른바 '보수대연합'을 비밀리에 추진하여 1990내각제 개헌 밀약을 조건으로 '구국의 결단'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3당 합당을 이끌어내 거대여당을 탄생시켰다.

 

민주진영의 김영삼, 김대중 후보 단일화론이 좌절되었다. 민주자유당은 218석을 보유한 정당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행사했으나, 14대 총선에서는 계파 간의 갈등으로 인해 149석에 그치는 참패를 당한다. 그러나 14대 대선에서 영남민심이 결집되면서 노태우 탈당과 김영삼이 당선되고 이후 대거 영입하여 다시 국회 과반수의 거대 여당이 되었다. 이후 김영삼의 당권강화, 내각제 합의각서 파문과 내각제합의 결렬로 김종필이 탈당하여 15대 총선에서 자유민주연합(1995) 창당하게 된다. 3당합당 카르텔은 2당의 결집으로 축소되었다.

 

 

 

민주진영에서는 "민주진영 분열과 불신을 초래시켰다"라고 비판한다. 진보진영에게는 "기회주의적 거대보수연합"이라 비판받는다. 또한 이것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겨 지역주의 정치와 보스정치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있다. 군사정권과의 야합이라는 비판도 있다. 정당의 성립과 발전에 있어 국민적 의사를 무시한 채, 장기집권을 획책한 '정당쿠데타'라는 비판도 있다. 또한 "3당 합당으로 인하여 호남을 정치적으로 철저하게 고립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민주정의당

 

198813대 총선에서 5공 청산과 민정당에 대한 반감, 호남 지역의 전멸을 비롯해 125석에 그쳤고, 이 후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안 부결 및 국정감사 부활 등 야당에게 정국주도권을 빼앗겼다. 이에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제1 야당인 평민당과 합당하여 국회 과반수 의석 확보, 호남 지역에서 지지를 얻고 있던 김대중 평민당 총재를 우군으로 만듦으로써 호남 지역의 민심을 얻는 일석이조의 구상을 하였다. 이후 김원기 평민당 원내총무를 통해 5.18 문제 해결의 전권을 구실로 김대중 총재에게 합당 제의했으나, 무반응으로 타당에 합당제의를 하게 되었다.

 

 

통일민주당

 

13대 총선에서 득표율 2(민주당 23.8%, 평민당 19.3%)를 기록하며, 59석에 그쳐 원내 3(평민당 70)으로 밀려난다. 김영삼는 평화민주당 (1987) 김대중 총재에 대해 경쟁심과 현재 구도대로 간다면 대통령이 되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 합당하여 차기 대권을 잡는다는 구상을 가졌다. 또한 서석재1989년 동해시 보궐선거 당시 부정선거 혐의로 검찰 구속되자 합당의 결심을 굳혔다. 그러나, 이기택, 김정길, 장성화, 김상현, 박찬종, 홍사덕, 이철, 노무현 등 8인이 3당 합당 거부하며 민주당(일명 꼬마민주당)(1990)을 결성하였다.

 

 

신민주공화당

 

13대 총선에서 35석을 얻으면서 교섭단체 확보에 성공했지만 충청도 지역에서는 15석을 획득하는 데 그친다. 또한 야당임에도 불구하고 민정당에 동조했고, 보궐선거의 전패와 당원들을 김종필 총재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는 상황이었다. 또한 본인도 이대로는 대권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고 판단하여 내각제 개헌에 대한 기대를 갖고 합당에 나서게 된다.

 

 

 

http://k.daum.net/qna/view.html?category_id=QFK&qid=0CK4p&q=3%EB%8B%B9%ED%95%A9%EB%8B%B9%EC%9D%98%20%EC%9D%98%EB%AF%B8&srchid=NKS0CK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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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32884

http://k.daum.net/qna/view.html?qid=00YPb

 

 

 

민주자유당(1990)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 약칭 민자당)1990년부터 1995년까지 존재하였던 대한민국의 정당이다. 집권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여 만들어졌다. 민정당 세력인 노태우 정부가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이른바 "보수대연합"이 비밀리에 추진하여, 199029일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대통령,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총재,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총재가 3당 합당을 선언하여 민주자유당이 새로운 거대 여당으로 탄생하였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며 재 집권하였으나, 1995년 김종필이 김영삼과 반목한 끝에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고, 627일 지방 선거에서 패배한 후, 11월과 12월 노태우, 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면서 신한국당으로 당 이름을 바꾸었다.

 

 

 

 

노태우, 김영삼 갈등

1992918일 노태우 대통령이 민자당을 탈당

 

지역감정 조장 논란

3당합당으로 비춰진 `영남패권주의 논란`이나 초원복집사건과 공천,유세등을 통해 지역감정을 조장한다

 

초원복집 사건

 

공화계 탈당

내각제 개헌 약속 위반과 지역감정 논란등으로 계파갈등, 자유민주연합 창당

 

호남 고립화 전략

자유민주연합(1995)

 

신한국당(1995)

 

 

 

3당합당 반대와 야권통합

 

여소야대를 뒤엎고 지역분열을 조장하는 19901월의 3당 합당에 반대하여 노무현은 당 잔류를 선언, 민주당 창당의 주역이 되었다. 이후 민주당 내에서 일관되게 신민당과의 야권통합운동을 전개, 마침내 두 당은 19919월 통합민주당을 출범시키게 되었고, 그는 첫 대변인으로 활약한다. 이후 낙선 등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903당 합당때 여당에 따라갔다면 국회의원이야 세 번, 네 번 하고, 장관도 일찍 하고 도지사 시장도 한번 지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떳떳하지 못할 것입니다. 적어도 잘못된 정치풍토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것이 저의 큰 자부심이고 행복입니다

 

 

3당 통합과 후유증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는 청와대에서 전격 회동, 3당 통합으로 신당창당을 추진키로 합의하고 헌정사상 초유로 계엄령 등 강제력에 의하지 않고 여야정당이 통합하는 정치혁명이 이뤄진 것이다. 공동선언을 통해 우리는 온건중도 민주세력의 대단합으로 큰 국민정당을 창당하여 정치적 안정위에서 새로운 정치질서를 확립해 나가기로 했다고 창당의 변을 밝혔다.

 

59일 첫 전당대회를 소집, 총재엔 노태우 대통령, 대표최고위원에 김영삼, 최고위원에 김종필, 박태준를 각각 선출하여 단일성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했다. 그러나, 당시 박철언 장관과 김영삼의 정치자금으로 충돌하였고, 청와대 4자회동으로 수습됐다. 차기대권을 겨냥한 각계파간 갈등양상을 띤 민자당의 내분은 10월말 내각제각서의 유출파문으로 당이 최악의 분열위기에 직면하기까지 했다. 김영삼은 1025일 자필 서명한 내각제합의각서가 언론에 공개되자 공작정치를 비난한 뒤 낙향했으나, 117일 청와대에서 단독회동에서 8개항에 합의해 내분사태를 수습했다.

 

3당 통합과 대결구도

 

901월 민정민주공화당이 구국의 결단으로 민자당으로 합당을 선언하면서 여소야대 구도는 민자당 217, 평민당 70, 민주당(통일민주당 의원 중 합당 불참파) 7, 무소속 3석의 거여야소 구도로 바뀌었고 한때 황금분할이라고까지 지칭되던 국회는 날치기와 농성, 공전의 파행을 거듭했다. 91년 상공위뇌물외유사건, 수서비리사건 등에 13명의 현역의원이 구속, 의원 윤리강령 및 실천규범을 제정하고 윤리위원회를 구성한다.

 

날치기법안처리파문

 

평민당의 원내 강경투쟁으로 돌아섰고 특히 618일 임시국회는 방송관련법처리문제를 둘러싸고 여야가 문공위 격돌, 의원폭력시비를 불러 일으켰다. 713일 민주당의 김정길이철노무현과 평민당 이해찬 의원은 국군조직법, 방송관계법 등 각종 악법을 강행통과 시키고 있는 민자당 정권의 횡포에 항거코자 한다며 의원직사퇴 선언, 714일 방송관계법 등 26개안건을 기습상정, 날치기통과, 평민당 의원 63명은 총사퇴 결정하고 장외대결태세로 치달았다. 720일 김대중 평민당 총재, 이기택 민주당 총재, 김관석 통추회의 상임대표는 범민주세력통합수권정당결성 합의 그러나 결국 실패한다. 108일 김대중는 내각제포기선언, 지자제전면실시, 민생문제해결, 군의 정치개입중지 등 4개항을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 돌입, 동조단식투쟁에 가담했다. 단식은 13일 동안 계속했으나, 평민당은 지자제 합의와 119일 영광함평보궐선거 승리로 원내 복귀를 결정했다.

 

신민민주 양당통합

 

지방의회선거는 야당의 참패, 야권통합논의가 급진전돼 9월 신민당의 김대중, 민주당의 이기택 총재가 신민주연합당(약칭 신민당 1991) 합당을 한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1/1852015_6097.html

http://blog.daum.net/cowboy007/15712760

http://blog.daum.net/cyg020557/15867520

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mtt_id=33779

 

민주당 (1990)

 

평화민주당(1987)

 

신민주연합당(약칭 신민당 1991)

 

민주당 (1991)

 

통일국민당(1992)

 

 

 

문민정부(1993~ 1998)

 

김영삼 정부(金泳三 政府, 1993~ 1998)는 대한민국의 제6공화국의 두 번째 정부이다. 문민정부(文民政府)는 김영삼 정부의 별칭이다. 3당 합당의 결과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김영삼 대통령은 집권 초기 개혁과 공직자들의 재산 등록과 금융 실명제 등을 법제화하여 부패 일신 정책을 펼쳤고, 지방 자치제를 전면적 실시하였다. 1994년 남북 정상 회담을 위한 예비 접촉과 김일성의 사망으로 남북 정상 회담이 무산되고, 김일성 조문 문제(일명 "조문파동")로 남북 관계는 다시 냉각되었다. 임기 말, 아들 김현철 비리IMF 구제 금융 사건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결과,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이던 신한국당(현 새누리당)은 대선에서 패배하여 정권 교체가 되었다.

 

김영삼 (金泳三, 약칭 YS, 19271220~ )

 

 

 

대한민국의 정치가·서예가·종교인으로 제14대 대통령을 지낸 정치인이다. 195426세에 3대 국회 민의원에 당선되어 대한민국 역사상 최연소 국회의원이라는 기록을 가지게 되었다. 9선 국회의원을 지내며 유신정권의 야당 지도자로서 민주당 원내총무, 민정당 대변인, 신민당 원내총무·당수로 활동하며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김영삼 초산 테러 사건, 197910YH 무역 여공 농성 사건 이후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에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 주장과 김영삼 의원제명 파동을 일으켜 부마항쟁을 촉발했다. 1983년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일을 기해 23일간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6월 항쟁 이후에는 통일민주당 총재로 민주화추진협의회을 구성해 민주진영을 구축했으나, 19903당 합당에 참여하여 재야 인사들의 비판을 받았다. 1993, 대한민국의 문민정부 제14대 대통령(19932~ 19982)에 취임하여 32년만의 민간인 정권을 수립하였다.

 

예술인과 작가들의 반정부와 사회비판을 전면 허용, 박노해, 김남주 등의 시인 석방, 마광수 등의 예술인들을 석방하여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재임 기간 중 금융실명제 도입, 차명 부정 계좌 단속 및 처벌,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통 명문화 등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 등 비롯해 조선총독부 철거를 추진하였고, 신군부, 하나회와 관련단체 해체, 대한민국 국군 내 사조직을 해산하고 정치군인들을 처벌했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수사와 처벌, 군사반란과 5.17 쿠데타 및 518 민주화운동 진압의 책임을 물어 군사 정권 관계자들을 사법처리하였다. 임기말 IMF 구제금융 요청으로 비판을 받았다.

 

김대중 (金大中, 약칭 DJ, 1924~ 2009818)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1998년부터 2003년까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을 지냈으며 2000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다.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에서 태어나 제5대 민의원과 제6·7·8·13·14대 국회의원(5)을 지냈으며 군사 정권의 위협으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김영삼과 함께 국내외에서 오랫동안 민주진영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군사 정권에 항거했다.

 

김대중은 군사 정권으로부터 납치, 가택연금, 투옥, 망명 등 탄압을 받았다. 19876월 민주 항쟁 이후에는 통일민주당 고문으로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구성해 이른바 민주 진영을 구축했다. 대내외적으로는 민주화와 의회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아시아의 넬슨 만델라"로 불리기도 했다. 인권 향상과 남북관계의 진전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5대 대선을 위해 박태준, 김종필 등과 단일화한 것, 13대 대선을 위해 통일민주당을 탈당하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한 것, 15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을 탈당한 의원들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 것 등으로 민주 세력 간의 분당과 갈등, 선거 패배 등을 빚은 것으로 재야 인사들의 비판을 받았다. 추운 겨울에도 온갖 풍상을 참고 이겨내는 야생화 "인동초"(忍冬草)에 비유되며 그렇게 불렸다. 대한민국 국회에서 가장 오래 연설한 기록으로 기네스 증서를 받았다.

 

김종필 (金鍾泌, 약칭 JP, 192617~ )

 

 

대한민국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군인 출신 정치인이다. 박정희가 5·16 군사 정변을 일으킬 당시 중령으로 정변에 참여했다. 박정희의 질녀와 결혼했으며 서른 다섯 살에 육군 준장으로 진급 후 예편했다. 이후 9선 국회의원(6 ~ 10, 13 ~ 16)과 제11, 31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삼김’(三金)이라 불리며 대한민국의 정치를 이끌었으며, 민주공화당(공화당), 신민주공화당, 민주자유당(민자당),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총재·대표를 지냈다.

 

1947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부 2년을 수료하고 1948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615·16 군사 정변의 중심 인물로 초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해 활약했으며, 공화당의 내분으로 정계를 은퇴했다. 1971년 공화당 부총재직을 맡고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며, 같은 해 6월 국무총리에 취임함으로써 정계에 복귀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사망 이후 공화당 총재를 맡았으나 신군부의 압력으로 정계 은퇴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7년 정계 복귀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19903당합당에 참여해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95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고 총재가 됐다. 200418대 총선거 낙선이후 정계에서 은퇴했다.

 

3공화국과 제4공화국 당시 제2인자였으며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과 함께 박정희의 후계자 또는 잠재적 대안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197164일부터 19751218일까지 대한민국의 제11대 국무총리를 역임했고, 199833일부터 1998817일까지 국무총리 서리를, 1998818일부터 2000112일까지 제31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초원복집 사건 (1992)

 

 

 

1992년 정부 기관장들이 부산의 초원복집이라는 음식점에 모여 14대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지역 감정을 부추기자고 모의한 것이 도청에 의해 드러나 문제가 된 사건이다.

 

1992년 대선을 앞둔 1211일 오전 7시 부산 초원복집에서 김기춘 법무부 장관과 김영환 부산직할시장, 박일용 부산지방경찰청장, 이규삼 국가안전기획부 부산지부장, 우명수 부산직할시 교육감, 정경식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 박남수 부산상공회의소장 등이 모여서 민주자유당 후보였던 김영삼을 당선시키기 위해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정주영, 김대중 등 야당 후보들을 비방하는 내용을 유포시키자는 등 관권 선거와 관련된 대화를 나눴는데, 이 내용이 정주영을 후보로 낸 통일국민당 관계자들에 의해 도청되어 언론에 폭로되었다. "우리가 남이가, 이번에 안 되면 영도다리에 빠져 죽자",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부추겨야 돼."와 같은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발언이 나왔다. 아파트 값을 반으로 내리겠다는 공약 등으로 보수층을 잠식하던 정주영 후보측이 민자당의 치부를 폭로하기 위해 전직 안기부 직원등과 공모하여 도청 장치를 몰래 숨겨서 녹음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김영삼 후보측은 이 사건을 음모라고 규정했으며, 주류 언론은 관권선거의 부도덕성보다 주거침입에 의한 도청의 비열함을 더 부각시켰다. 이 때문에 통일국민당이 오히려 여론의 역풍을 맞았고, 김영삼 후보에 대한 영남 지지층이 결집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여세를 몰아 김영삼이 1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71608&PAGE_CD=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0067968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8&aid=0000263558

 

노태우 (盧泰愚, 1932124~ )

 

정주영 (鄭周永, 191511~2001321)

 

노무현(盧武鉉, 1946~ 2009523)

 

 

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tag/3%EB%8B%B9%ED%95%A9%EB%8B%B9%EC%9D%98%20%EB%B0%B0%ED%9B%84

http://ask.nate.com/qna/view.html?n=8339673

http://cafe.daum.net/whokwang/NVe/273?docid=b6WnNVe27320101208004918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74989

http://blog.daum.net/jhkim50/15976261

http://www.poli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8878

http://www.poli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5662

 

 

1.

 

김영삼 사저

 

 

전두환 사저

노태우 사저

헌정기념관

청와대

김영삼대통령기록전시관

김영삼민주센터

김영삼 생가 기념관

 

2.

 

김대중 평화센터

 

 

 

김대중 도서관

김대중 생가 기념관

5·18사적지 순례

국립518민주묘지

국립 서울현충원

한국프레스센터

3.

 

봉하마을

 

 

 

서울 역사박물관

신문 박물관

한국잡지박물관

kbs 방송박물관

마석모란공원 묘지

 

 

 

4.

 

노무현 재단

 

 

 

문화양념통

 

5.

 

노무현

 

전대통령묘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