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역사탐방 32탄
어리버리의 최후
경제 식민지 전락, IMF 외환위기 (1997년)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288 박정희 사망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91 1212사태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294 3·15 부정선거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296 419혁명~516 쿠테타 –1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297 419혁명~516 쿠테타 –2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298 419혁명~516 쿠테타 –3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299 419혁명~516 쿠테타 –4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00 419혁명~516 쿠테타 –5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309 진보당 창당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04 10월 유신 – 1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05 10월 유신 – 2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317 전태일 분신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081212사태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13517쿠데타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64전두환 백담사 운둔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52언론통폐합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19629선언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89 초원복집사건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23 3당합당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25 문민정부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60 IMF 구제금융 공식요청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1988년)
1990년대 들어 국제금융시장에서는 금융의 세계화가 빠른 속도로 진전됨에 따라 국가간 자본 유출입이 더욱 빈번해지고 그 규모도 급속히 증가하는 가운데 각국 금융시장간의 상호의존성이 심화되는 움직임을 보여왔다. 이러한 국제금융환경의 변화 속에서 개도국들은 대규모의 외자유입을 배경으로 한 투자의 확대 등에 힘입어 높은 경제성장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일부 동남아시아 개도국에서는 무분별한 투자 확대에 따라 경기가 과열되고 물가상승압력이 높아지는 가운데 경상수지가 큰 폭의 적자를 기록하는 등 거시경제의 불안정을 겪게 되었다. 아울러 금융기관의 방만한 대출로 인해 국내에 유입된 외자가 부동산 등 비생산적인 부분으로 유입됨으로써 경제의 버블화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대다수 아시아 국가에서 전면적이거나 부분적으로 발생한 금융위기 또는 외환위기는 선진국 및 여타개도국 경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세계경제의 성장 및 교역 확대에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세계적인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태국의 1996년 금융위기
투기성 헤지펀드
바트화의 방어
변동환율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인접국가에 곧바로 파급
「환율절하 → 금리인상 →주가하락)」의 악순환이 되풀이되면서 외국자본의 유출이 가속화
대만과 홍콩까지도 헤지펀드 등의 투기적 공격으로 금융시장 불안정
인도네시아 금융위기
한국의 금융위기
금융시장 혼란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대기업의 연쇄부도가 부채질했으며, 금융시장 혼란은 다시 대기업의 연쇄부도를 더욱 조장함으로써 금융시장 혼란과 연쇄도산의 악순환이 이어졌던 것이다.
1997년초에 터진 한보철강의 부도로 시작된 연쇄부도사태
‘대마불사(大馬不死)’ 가 실물경제에서는 허구
한보철강, 삼미그룹, 진로그룹, 대농, 한신공영, 기아그룹, 쌍방울그룹, 해태그룹, 고려증권과 한라그룹, 청구그룹, 대우
기아사태
계속된 경기침체와 금융시장의 혼란
IMF의 경제신탁통치
IMF, 세계은행(IBRD), 아시아개발은행(ADB)
IMF는 고금리, 저성장, 고실업, 긴축예산
금융권 대공황 야기
9개부실종금사가 영업정지처분
1997년 원화환율은 1,700원
고려증권, 영진약품, 한라그룹이 흑자도산
12월18일 실시된 대선에서 결국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헌정 사상 초유의 여야간 민주적 정권교체가 50여년만에 이뤄졌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비상경제대책위원회, 노사정 위원회와 정부조직개편심의위원회 발족과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 극복을 위한 기틀을 마련한 뒤 98년2월25일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역사적인 국민정부를 출범시켰다.
12월18일 실시된 선거결과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 후보가 당선됐다. 투표율은 광주시가 89.9%로 가장높았고, 충남이 77.0%로 가장 낮았다. 당시 투표율은 81. 9%. ‘동(東) 이회창, 서(西) 김대중’의 동서를 가르는 지역별 지지도 편차가 두드러졌고 특히 충청도표가 전통적인 여권으로부터 이탈해 김후보쪽으로 몰려감으로써 DJP연대의 위력을 실감케 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이후 반세기만에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여야 간 정권교체가 이뤄져 한국민주화의 대미(大尾)가 장식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71년 박정희 대통령을 상대로 한 첫 대권도전에 이어 87년, 92년 대선에서 잇따라 실패한 후 네번째 도전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金)후보가 성취해낸 여야간 정권교체는 수십년간 한국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기득권층의 완고한 저항을 극복하고 이뤄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예상됐던 중ㆍ대규모 집회대신 유권자대면접촉확대를 위해 거리집회를 중심으로 선거운동을 펼치는 등 과거보다는 개선된 면모를 보였다. 정당연설회 취소, 소규모 유세중심전략, ‘버스투어’ 내핍형 선거운동을 전개했다. 또 대선후보초청 TV토론회가 선거전 향방의 승부처가 되었다. 그러나 후보 간 인신공격과 흑색선전은 여전했다. 색깔론 재현은 물론이고 금품살포공방, 후보가계의혹, 건강문제, ‘청와대와 정당커넥션’, 한나라당 사채자금조달설 등 비방전과 함께 “이인제(李仁濟)를 찍으면 김대중(金大中)이 당선된다”는 식의 지역감정조장발언도 속출했다.
국민회의는 5월 김대중 총재, 자민련도 6월 김종필 총재, 신한국당은 7월 이회창 후보를 대통령후보로 선출
이인제 전경기지사가 신한국당 경선에 불복하고 국민신당을 창당해 출마
자민련 김종필 총재가 국민회의와의 후보단일화합의로 출마 포기
15대 대선은 사실상 김대중(金大中)ㆍ이회창(李會昌)ㆍ이인제(李仁濟) 후보의 3파전
김대중 후보는 ‘준비된 대통령’과 ‘경제대통령론’
이회창 후보는 ‘3김정치’ 청산
이인제 후보는 ‘세대교체론’
특히 92년 대선자금과 한보사태, 김대통령 차남 현철씨사건
‘오익제(吳益濟)씨 편지’의 ‘북풍바람’이라는 북풍조작파문
이회창 후보 두아들 병역시비,
국제통화기금(IMF)체제로 상징되는 국가부도사태를 놓고 책임론
‘2강1중’구도
여야 3당경선
국민회의
5월 전당대회에서 김대중(金大中) 총재, 정대철(鄭大哲) 부총재, 김상현(金相賢) 지도위원장
‘DJ불가론’
국회의장의 당적이탈, 국회에 대한 청와대의 불개입, 헌법상 총리권한의 보장, 국무회의 중심의 국정운영 등 내각제적 국정운영을 공약
‘DJP’단일화협상
11월3일 김대중(金大中)ㆍ김종필(金鍾泌)가 서명식
‘DJP단일화’
박태준(朴泰俊) 의원을 자민련에 입당시켜 정권 교체를 위한 연대의 폭을 ‘DJT연대’로 확대
‘DJ비자금계좌’ 폭로와 검찰이 DJ비자금 수사유보결정
신한국당
7월 집권여당 최초의 대통령후보 완전자유 경선
이회창(李會昌) 대 반이회창(反李會昌) 진영간 싸움양상으로 진행
이회창 대표체제, 이인제 경기지사, 이한동 후보, 김덕용 후보, 이수성 후보, 최병렬 후보가 경선
김윤환 고문, 이홍구 고문 경선불출마
박찬종 고문 전격사퇴
‘김심(金心)(김영삼(金泳三)대통령 의중)’ 공방의 대표적 프리미엄논란
범민주계 모임인 정발협의 행보와 ‘반(反)이회창’ 단일후보추대
경선증발론과 경선무용론
이인제 후보는 9월 한나라당탈당 및 대선독자출마를 선언
두 아들의 병역면제문제와 이인제 후보의 탈당 및 당내분란으로 지지도가 급락, 고전
신한국당과 민주당이 합당한 한나라당의 출범
당 총재직 조기이양과 전두환ㆍ 노태우 전대통령 조기사면, 역사바로세우기삭제 등 김영삼 대통령과의 차별화전략
검찰의 비자금수사 유보결정을 계기
10월22일 김영삼대통령 탈당,
92년 대선자금 수사 요구 등 김대통령과의 ‘절연’ 선언
청와대의 이인제 후보지원설 제기
민주당 조순 총재와의 ‘반 3김 후보 단일화’협상에 착수해 후보단일화
한나라당간판으로 ‘깨끗한 정치-튼튼한 경제’를 슬로건으로 이회창(李會昌)-조순(趙淳)연대와 YS차별화전략 선거운동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는 이만섭 의원을 총재로 추대하고 서석재ㆍ 김운환ㆍ 박범진 의원
11월4일 국민신당을 창당
청와대 국민신당지원설, 김영삼 대통령의 이후보지원설에 휘말리면서 타격을 입게 됐다.
당선된 후 취임하기까지 두달여동안 IMF(국제통화기금)체제 조기극복을 위한 기반다지기에 전력 투구했다. 노ㆍ사ㆍ정을 다독여 경제3주체간의 합의를 도출해내는 역량을 과시했다. 특히 국민과의 TV대화를 갖고 IMF체제극복을 위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는데도 각별한 공을 들였다.
97년12월19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총리에게 IMF극복을 위한 지원 요청
미셸 캉드쉬 IMF 총재, 제임스 울펜손 세계은행(IBRD) 총재, 사토 미 쓰오 아시아개발은행(ADB)총재, 다케시타 노보루 전 일본총리 금융지원을 호소
방한한 국제금융계인사들을 잇따라 만났다.
외국의 투자심리를 안정과 병행해 국내에서는 국제적 신인도를 제고시키기 위해 노ㆍ사ㆍ정의 개혁과 고통분담을 호소하고,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데 힘썼다.
한국노총 간담회(12월26일)
민주노총 간담회(12월27일)
삼성 이건희 회장 등 4대재벌그룹 총수(1월13일)와의 간담회
최종현 전경련회장 등 경제5단체장과의 간담회(12월24일)
시중은행장들과의 간담회(1월9일)
경제비상대책위
대통령직인수위
정부조직개편심의위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청와대 주례회동
3자회동
새정부의 국정운영 청사진인 100대 과제선정작업
정무분과위
경제1분과위
경제2분과위
사회문화분과위
‘대통령직인수위 설치법’
기업구조조정 추진방안
노사정위원회
비상경제대책위원회
비상경제대책위는 97년12월20일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당선자가 청와대 주례회동을 통해 외환위기 등 심각한 경제난국타개를 위해 새 정부출범 이전까지 활동하는 한시적 기구로 탄생됐다. 12인비상경제대책위, 8명의 실무기획단도 산하에 설치해 98년2월23일까지 공식 활동 했으며, 출범 전까지 IMF 긴급자금지원, IMF관리체제에 따른 고용 및 실업대책, 외환ㆍ증시 안정대책, 추가경정예산편성 및 새해예산 긴축운용방안, 금용실명제보완과 금융개혁 등 경제현안 전반을 집중조율하고 이에 대한 긴급대책을 추진했다. 100억달러 조기지원 결정, 외국투자자들의 투자분위기조성에 주력했다. 특히 외채협상단을 미국에 파견, 1월21일 뉴욕외채협상을 통해 우리나라 단기외채의 만기상환연장원칙을 관철시켜 급박한 외환위기를 넘기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1996년 경제성장률이 7.1%, 소비자물가도 4.9%, 경상수지가 237억달러 적자.
1997년 경기의 회복 지연, 기업부도와 금융기관의 부실화가 심화, 동남아외환사태가 발생, 대외신뢰도가 저하, 외환시장의 불안정으로 인한 환율상승압력 증가 결국 단기유동성부족으로 외환위기에 직면
1997년 11월 21일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다.
12월 3일 IMF와 합의를 통해 IMF로부터 외화자금지원을 받는 대신 합의내용을 충실히 지키기로 하였다.
97년 1월 23일 한보철강 부도 제일은행의 위기고조
2월초에는 뉴욕타임스가 ‘한국의 경제위기감 고조’라는 기사, 경제팀이 부총리 강경식, 경제수석 김인호로 교체
3월 삼미특수강의 법정관리와 지방종금사의 외환위기 심화
4월 ‘부실징후기업의 정상화 촉진과 부실채권의 효율적 정리를 위한 협약’(부도방지협약) 체결, 진로그룹, 부실채권 정리기구를 설치
5월 삼립식품 및 계열사의 부도와 대농그룹의 부도방지협약 적용
5월 한신공영에 대한 법정관리
6월 기아그룹이 자구계획
6월 17일에는 재경원이 금융개혁법률안 제출, 총리직속의 금융감독원 신설과 한은의 기능과 권한 축소
7월 3일 태국이 변동환율제 도입 이는 인접국인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으로 확산
7월 15일 기아그룹의 18개사가 부도유예신청
8월 25일 1달러당 900원을 돌파
9월초 진로그룹이 화의를 신청
23일에는 기아그룹이 화의 신청
9월말에는 사실상 부도상태
10월초 미국은 한국의 자동차시장에 대해 슈퍼301조 발동 ‘우선협상국’ 지정
10월중순 쌍방울 화의 신청와 태일정밀이 부도유예신청
23일 홍콩 주가 폭락, 1달러당 950원 돌파
24일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한단계씩 떨어뜨렸다.
28일 경제3역 회동하여 외환위기문제 논의
31일 제일, 서울, 상업 및 외환은행에 대한 신용등급을 하향조정
11월 1일 해태그룹 화의신청
4일 뉴코아그룹이 화의신청
7일 경제 3역은 회동에서 구제금융의 신청 공감과 김영삼 대통령의 탈당
10일 1달러당 1,012원
17일 주가 500선 붕괴와 외환시장 마비와 대통령에게 구제 금융신청의 불가피성 보고
18일 1달러당 1,012.8원
19일 임창렬 부총리가 취임과 환율 변동폭 상하10% 확대
20일 일본과의 미협조와 환율 제한폭인 10% 급등
21일 IMF에 구제금융을 공식 요청
12월 3일 합의
차입의존의 방만한 기업경영
금융기관의 부실화
대외신뢰도의 하락
단기외화유동성 부족
경상수지적자확대
3고(고임금, 고지가, 고물류비용)
무역관련 외환규제 완화
국내금융기관의 국제영업활동 활발
동남아 및 저개발국을 중심으로 고위험ㆍ고수익의 증권투자규모를 확대
외화자금의 조달은 단기로 하지만 운용은 중장기로 하는 자산운용
중장기외화자산은 80% 이상, 중장기외화 부채는 30%대에 불과
IMF 합의 내용
정부는 97년 11월 21일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 12월 3일 IMF구제금융의 조건으로 이행각서 (Korea Memorandum on the Economic Program)를 제출하고 IMF가 제시한 대외개방 확대 및 강력한 구조조정요구를 수용하게 되었다. 총지원규모는 IMF, IBRD, ADB 등 국제기관이 350억달러, 미국, 일본등 선진국이 233억달러를 연차적으로 지원하기로 하였다.
1)IMF합의 지원조건으로 재정 및 금융의 긴축과 대외개방, 금융 및 기업의 구조조정 요구를 수용하기로 하였다. 거시경제목표에서 성장률을 3%내외 하향, 1999년에는 잠재성장률 수준 회복시키고, 소비자물가상승률을 5% 이내로 안정, 경상수지적자를 43억 달러 이내로 하도록 정하였다. 통화 및 환율정책에서는 통화정책을 즉시 긴축기조로 전환하기 위해 유동성을 환수와 시장금리 상승을 용인, 신축적인 환율정책을 유지, 시장개입은 급격한 변동 완화로 국한 또한 긴축재정 유지하도록 하였다.
금융부문
자본 시장
기업지배구조 및 기업구조
2)12월 24일, IMF 및 주요선진국자금 조기지원 관련 IMF와의 추가 합의사항
합의이행 추진과정
물가도 9% 수준 수정합의
긴축 추가경정예산을 편성
무제한 환율의 변동폭과 이자제한 폭
한국은행법 및 금융감독기구 설립 등 금융개혁법안
10개의 종금사와 2개 증권사 파산
2개 은행이 감자조치
금융기관 부실채권정리
예금자보호 정리기금을 확충
기업의 구조조정
결합재무제표를 조기 도입
30대 계열기업 상호보증의 점진적 축소
과다차입금에 대한 손비부인 강화
기업의 인수ㆍ합병 활성화
수입선다변화 품목을 25개 폐지
외국인 주식투자한도 대폭 확대
국내 회사채시장 개방
단기금융시장도 개방
어음에 대한 외국인 매입 우선 허용
노사정위원회를 구성
정리해고제 조기도입과 근로자파견제 등의 합의
고용안정기금의 확충
직업훈련기능 확대
외채협상타결
‘금모으기운동’
1월말 채권은행단과의 단기외채연장 협상을 조기에 타결
IMF 프로그램에 따라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은 구조개혁이며 이를 위하여 4대개혁이 추진되고 있다.
정부개혁
금융개혁
기업구조개혁
노동개혁
자본시장의 개방확대 및 조기개방
I. 거시정책
1. 거시경제 목표
2. 통화 및 환율정책
Ⅱ. 금융부문 구조조정
1. 금융개혁법안
2. 구조조정 및 개혁조치
Ⅲ. 기타 구조개혁
1. 무역 자유화
2. 자본자유화
3. 기업지배구조 및 기업구조
4. 노동시장 개혁
5. 정보공개
출처 : 연합뉴스
대한민국의 IMF 구제금융 요청은 1997년 12월 3일 대한민국이 외환위기(국가부도위기)를 겪으며 국제통화기금에 자금지원 양해각서를 체결한 사건이다. IMF 경제 위기, IMF 외환위기, IMF 환란, IMF 관리체제, IMF 시대, IMF 사태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IMF라는 명칭 자체가 외환위기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잘못된 표현이지만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는 상징성으로 인해 내용이 압축된 단어로 대한민국 언론 등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다.
당시 대한민국의 대통령인 김영삼은 11월 10일 홍재형 당시 부총리와의 통화 이전까지 외환위기의 심각성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의 경제가 큰 위기를 겪게 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국제통화기금에서 요구하는 조건들을 수행해야 했으며 이 시기에 신자유주의 논리가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회사들의 부도 및 경영 위기를 초래, 대량 해고와 경기 악화로 인해 대한민국의 온 국민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이던 신한국당(현 새누리당)은 대선에서 패배하여 정권 교체가 되었다.
1997년
한보철강 (현 현대제철) 부도
삼미그룹 부도
한보건설 법정관리 신청
한보 청문회(4/7 ~ 4/25)
진로그룹 부도유예협약와 부도
대농그룹 부도유예협약
한신공영그룹 부도
타이 밧 화 폭락
기아그룹 부도,
인도네시아 루피아 화 폭락
외환시장 개장 40분만에 대미달러 환율이 1일 변동폭 상한선인 964원까지 상승, 사실상 거래 중단
쌍방울그룹 부도
태일정밀 부도
대만 외환방어 포기
외자유입 관련 자유화 조치
근로자주식저축
홍콩 증시 폭락
모건스탠리, '아시아를 떠나라'
외환시장 개장 8분만에 대미달러 환율이 1일 변동폭 상한선까지 또다시 폭등, 사실상 거래 중단, 주유소 북새통
해태그룹 부도
뉴코아 부도
불름버그, "한국 가용 외환 보유고 20억달러" 보도.
원화환율, 달러당 1,000원 돌파
강경식 부총리, 김인호 수석 경질, 임창렬 재경부 장관에게 신임 부총리 임명
환율은 다시 확대된 변동폭 상한선까지 폭등, 사실상 거래 중단됨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공식 신청 발표
일본, 야마이치증권 파산
미쓰즈카 대장상과 원조회담에서 "IMF로 가지 않으면 지원은 없다“
9개 종금사 영업정지 법령
공식적인 구제금융 합의서에 서명, 대기성 차관 제공에 관한 양해각서 체결.
대기성차관협약 IMF 이사회 승인 총 210억달러 승인
고려증권 부도
한라그룹 부도, IMF 1차 지원금 56억 달러 제공.
대우자동차와 쌍용자동차 인수 최종 확정.
환율이 3일 연속 1일 변동폭 상한선까지 폭등하여 외환시장 개장 40분만에 거래중단, 금융시장 전반이 마비됨
5개 종금사 추가 업무정지(대한∙나라∙신한∙중앙∙한화종금),
동서증권 영업정지 처분
정부 환율변도 제한폭 폐지
제15대 대통령 선거, 김대중 후보 당선, IMF 2차 인출 이사회 승인
외채만기 연장을 위한 정부지급보증 국회 동의
IMF 및 주요 선진국 자금 조기지원 발표
IMF 20억달러 조기 지원(3차 지원)
가교종금사(한아름종금)설립 완료
1998년
노사정위원회 발족
IMF, 한국정부 3차 의향서 승인(20억 달러 인출승인)
재계 4대그룹 총수와 만나 재벌개혁 5개향 합의.
나산그룹 부도
현대그룹 구조조정
극동건설 부도
단기외채 만기 연장을 위한 뉴욕협상 발표
종금사 1차 폐쇄 대상 10개사 명단 발표(한화, 쌍용, 경남, 고려, 삼삼, 항도, 청솔, 신세계, 경일, 신한종금),
감사원 외환위기 특별감사 착수
노사정 공동협약 체결
신정부「100대 국정과제」발표
10개 종금사 인가취소(첫 금융기관 퇴출)
한국정부 4차 의향서 승인(20억 달러 인출승인
김영삼 대통령 퇴임
제15대 김대중 대통령 취임
뉴욕 단기채권 외채가 만기 연장을 위한 외채의 협상 타결 설명회 개최
1차 경제대책 조정회의(IMF체제 극복의 목표와 과제)
단기외채 2백 18억달러 만기 연장
IMF 서울사무소 설치
세계은행 1차 국조 조정차관 20억달러 승인
금융감독위원회 공식 출범
외평채 40억달러 발행
외환 특감결과 발표 및 수사의뢰
김영삼 전대통령 서면답변서 제출, IMF 6차의향서 합의
강씨 체포동의요구서 임시국회 제출
거평그룹 부도
외국인 주식투자한도 폐지
검찰, 강경식 김인호씨 직무유기및 직권남용 협의 구속
64조원 규모의 금융 구조조정 재원(1차 공적자금) 조달 방안 마련
강경식 김인호씨 구속기소 및 환란 수사결과 발표
5대그룹간 빅딜 추진, 한국전력공사 등 9개 공기업 조기 민영화 확정,
엔화환율 8년 만에 최고치경신(1달러=146.85엔)
금감위, 퇴출 대상 55개 기업 발표(5대 그룹 20개사, 6∼64대 그룹의 32개사, 비재벌 계열 3개사)
금융기관 구조개혁 조처(동화, 동남, 대동, 경기, 충청 등 5개 시중은행 폐쇄 발표)
공기업 1차 민영화방안 발표,
한일그룹 부도
외환매입제한 폐지
개정 예금자보호법 시행
상업은행,한일은행 합병 발표
IMF 7차의향서 합의
공기업 2차 민영화방안 발표
4개 보험사 영업정지
하나, 보람은행 합병 발표
국민, 장기신용은행 합병 발표
강원은행, 조흥은행 현대종합금융 합병 발표
장은, 동방페레그린 증권 퇴출
기아자동차, 현대에 낙찰
은행권, 117개 기업 워크아웃 대상 선정
정부·재계, 5대 재벌 구조조정안 합의
IMF자금 18억달러 첫 상환
IMF 긴급보완금융(SRF) 18억불 상환
IMF 긴급보완금융(SRF) 10억불 상환
제일은행, 뉴브리지 캐피탈에 매각합의
1999년
제일은행, 뉴브리지 캐피탈에 매각(지분 51%)하기로 합의
금융감독원, 퇴출 및 여신중단 대상 80개 기업 중 25개사 정리
제1단계 외환거래자유화
김대중 대통령, "구조조정 약속 안지키면 5대 그룹도 워크아웃"
대우그룹 구조조정 계획 발표(대우중공업 조선 부문(현 대우조선해양) 매각
부실 5개 생보사(동아(현 금호생명), 태평양(현 동양생명), 한덕, 조선, 두원) 공개 매각 절차 개시
현대그룹 구조조정 계획 발표
종합주가지수 800 돌파
현대전자에 LG반도체를 인수- 빅딜
삼성자동차 (현 르노삼성자동차) 법정관리 신청으로 삼성자동차·대우전자 (현 대우일렉트로닉스) 빅딜 무산
긴급자원지급 40억달러 조기상환키로 IMF와 합의, 대우그룹의 워크아웃
강봉균 재정경제부 장관, "김우중회장이 내놓은 담보는 처분대상" 발언.
대우그룹·GM 자동차 부문 전략적 제휴 양해각서 체결
(주)대우 등 12개 계열사 워크아웃)돌입
현대전자 주가조작
제일은행, 뉴브리지캐피털과 매각을 위한 투자약정서
보완준비금융 135억달러 9개월 앞당겨 조기상환 완료
대기성차관 잔액 15억달러 추가인출 중단
2000년
기아자동차 법전관리 신청 졸업, 및 파업
'왕자의 난' 발생, 현대그룹 경영권쟁탈전.
투자신탁 회사 구조조정 공적자금 투입 결정
IMF 협의단 채결
투자신탁에서 투자신탁증권 체제로 전환
최종 정책협의 종료
정부개혁추진위원회를 발족
정부, 공적자금 40조원 추자조성 결정
IMF 대기성차관 60억달러 조기상환 방침 발표
현대건설 1차부도
2차 29개 퇴출 대상 기업 발표, 삼성 자동차, 삼성쌍용차, 진로종합식품, 진로종합유통, 우성건설 등
대우자동차 부도
동아건설 부도
대기성차관협약 및 프로그램 종료
김대중 대통령은 "국제통화기금의 모든 차관를 상환, 우리나라가 IMF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공식 발표.
예금보험공사, 5개 부실은행에 공정자금 투입 결정
2001년
대기성차관 조기상환 개시
정부가 IMF, 조기 상환
IMF 관리 체제 종료(IMF 구제금융 195억달러 전액 상환)
원인
지급준비정책의 변화
1996년 이후 금융기관의 대외경쟁력 제고와 공정경쟁을 위해 9%를 상회했던 지급준비율을 1~5%수준까지 대폭 인하
외환 보유고 관리의 실패
태국, 홍콩, 말레이시아, 필리핀, 인도네시아등 동남아시아의 연쇄적 외환위기
정부의 외환관리정책의 미숙과 실패
정상적 경제활동을 위한 국가의 외환보유고를 유지 관리하고 책임을 지는 행정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외환지급불능사태의 위기 초래
정경유착으로 인한 부정대출
한보와 기아자동차에 불법적인 은행대출로 부실채권
환율 운용 정책 실패
1997년 9월 이후 인위적인 환율 방어를 시작
금융기관의 부실
1996년까지 24개의 투자금융회사가 종합금융회사로 전환 이후 30개
1998년 6월 대동, 동남, 동화, 경기, 충청은행 5개 퇴출 은행를 발표, 국민, 주택, 신한, 한미 ,하나은행으로
관치 금융의 그늘아래에서 부실한 경영
1998년 8월 고려, 국제, 태양, BYC 등 부실 4개사가 영업정지, 각각 알리안츠생명, 삼성생명, 대한생명, 교보생명으로
허술한 관치금융체제
무능한 정부의 예산 낭비
대기업들의 분식회계와 과도한 차입 부실 경영
사회전체에 만연된 경제적 무능력과 부패
책임의식 실종
대외 금융세력의 공격
규모가 큰 금융세력들이 약속한 듯이 빠져나가 동아시아 전반에 외환보유량을 부도내려는 의도와 부실기업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기업까지 무너뜨려 인수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IMF 경제위기 극복
외국인 투자 자율화 정책, 대기업을 각 기업으로 독립시키는 구조조정을 단행, IT 육성정책, 신용카드 정책, 정리해고제를 도입했다. IMF 2년을 겪으면서 성장·물가·경상수지 등에서 전반적으로 외환위기 이전 수준을 거의 회복했다. 이처럼 한국 경제는 IMF 위기 2년 만에 '고성장-저물가-경상수지 흑자'라는 세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능력을 발휘했다. 또한 1997년 IMF 구제금융 요청 당시 대한민국의 외채를 갚기 위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이 소유하던 금을 기부해 전국 누계 약 350만 명이 참여한 이 운동으로 약 227톤의 금이 모아져 세계적 이슈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금모으기 운동(1997년)은 한국경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긍정적 평가를 이끌어 내는데 일조했다. 외채규모 축소로 최초로 순채권국으로 탈바꿈했다. 투자부적격 국가신용 등급도 국제 신용평가 기관들에 의해 투자적격 등급으로 상향조정됐다.
국제통화기금(IMF)과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성장률 8~9%,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 이내, 경상수지 흑자는 GDP의 6% 내외(약 250억 달러)에 이른다는 거시지표 전망에 합의했다. 또 2000년에는 경제성장률 5~6%, 물가 3%, 경상수지 흑자 100~150억 달러 등의 전망치에 의견일치를 이뤘다. 이와함께 내년에도 저금리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는 기존 원칙을 재확인하고 경기회복에 따라 재정적자폭을 줄여나가되 2004년에는 균형재정을 달성하기로 했다.
1997년 5.0%, 1998년 1분기 마이너스, 2분기 –7.2%, 1998년 4분기 반전시도, 99년 1분기 4.6%, 2분기 9.8%대로 뛰어 올라 경기과열 논쟁마저 불러 일으켰다.
2000년 12월 4일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IMF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내수 진작을 위한 무분별한 신용카드정책, IT 거품, 비정규직 문제 등이 대두되며 IMF의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무역수지 흑자가 1998년 390억 달러, 1999년 239억 달러, 2000년 117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도 1999년 약 8,400여 달러, 2000년의 11,292달러로 회복
실업률은 1998년 9%, 1999년 1.4%, 2000년 11%
소비자물가는 1998년 7.5%에서 1% 이하, 2000년에도 3%대의 안정세
외환보유고는 1997년 12월 18일 바닥(39억 달러), 2000년 760억 달러
종합주가지수는 1998년 280선, 1999년 1000포인트를 돌파
특히 반도체·정보통신·조선·자동차는 1990년대 초에 이어 호황기를 맞은 상태였다.
소비지출감소
대형 국책사업의 축소 혹은 부분적 연기
장치산업의 설비확장
설비투자를 주도했던 반도체, 철강, 석유화학, 자동차산업
합리화나 R&D 투자 등 기업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투자에 집중
1998년 130만 명 이상의 본격적인 고실업 시대
남성실직에 따른 여성들의 경제활동참가 증가 경향이 당분간 지속될 조짐
기존의 외형성장 위주에서 내실위주 경영기조로 전환
임시직 또는 계약직 비중을 확대 등 비정규직 근로자가 급등
파견근로자를 적극 활용
1997년 6%, 1997년 4.3%(평균임금상승률은 9.3%), 명목임금상승률은 1998년 1.5%, 1999년 이후로 임금상승 압력 상승
고용불안에 따른 근로자들의 임금인상 욕구 자제
수익성 하락에 따른 기업의 지불능력 저하 등으로 임금동결 내지 감축 분위기가 확산
부동산경기 10년주기설
구제금융협약에 BIS 자기자본비율이 8% 이하인 은행에 대해 폐쇄조치
금리는 1997년 29%, 1999년 9%
빅딜
기업교환으로 업종전문화를 꾀하는 한 기업이 주력 업종을 다른 기업과 교환하는 것, 경영용어로는 사업교환이라고 표현한다. A와 B라는 업종을 함께 소유하고 있는 두 회사가 상대방에게 경쟁력이 약한 업종을 인계하고, 다른 업종을 인수받는 형식으로 진행
IMF의 주요 영향
정권 교체
IMF 사태는 최초로 여야 정권교체를 가져올 정도로 매우 심각한 위기 상황이었고, 기존의 사회 관념들이 한꺼번에 바뀌게 되었다. IMF 구제금융 사태를 불러일으킨 책임으로 사임했던 임창렬 재정경제부 장관은 '환란 사건'의 직무유기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았지만, 무죄판결을 받았다. 집권 여당이었던 신한국당(現 새누리당)의 후보 이회창은 야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대통령 후보에게 패배했다.
독점재벌의 해체
1996년, 우성과 건영이 도산하였다. 그러나 1997년과 1998년에는 한보철강 (現 현대제철), 삼미그룹, 진로그룹, 대농그룹, 삼립식품, 한신공영, 기아그룹, 쌍방울그룹, 태일정밀, 해태그룹, 뉴코아, 수산중공업, 한라그룹, 고려증권, 청구그룹, 극동건설, 나산그룹, 거평그룹, 한일그룹, 쌍용그룹, 동아그룹, 고합그룹, 아남그룹, 신호그룹, 우방그룹, 새한그룹, 강원산업, 큐닉스컴퓨터, 청보그룹, 신원그룹, 미주그룹등 도산되었다. 특히 1998년 6월 18일에는 이헌재 금융감독위원회장은 이찬우 상업은행장이 참석한 가운데 기자회견을 가져 55개 기업 청산, 매각 방침을 발표하였다. 1999년 대우그룹은 과도한 인수 금융을 이용한 기업 확장이 원인이 되어 부채가 65조로 엄청나게 불어나 IMF 구제금융 사건 이후 정부의 엄청난 국고 지출에도 불구하고 해체되었다. 2000년에는 현대그룹의 ‘왕자의 난’과 유동성 위기로 현대자동차, 현대백화점, 현대중공업, 현대해상, 현대산업개발, 현대건설, 현대전자(現 하이닉스반도체) 등으로 계열분리를 하였다. 은행들은 대규모 인수 합병이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도중 많은 기업들이 외국 기업에 헐값에 매각되는 등 국부의 유출이 심각하였다.
1998년 7월 1일, 정부가 공기업 민영화 방안을 발표, 남해화학, 대한교과서(現 미래엔), 종합기술금융(現 KTB네트워크), 대한송유관공사, 포항제철(現 포스코), 한국종합화학(現 케이씨), 한국중공업(現 두산중공업), 한국통신(現 KT), 한국담배인삼공사(現 KT&G) 총 9개 공기업이 민영화가 되었다.
해고규제 완화
IMF의 원조 조건에 따라 고용시장에 자유경쟁체제가 도입되어, 평생고용제와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없어지고 대신 평생직업이란 개념이 생겨났다. 급여에서도 호봉 개념 연공서열 대신 연봉제로 바뀌었고, 또한 정리해고가 자유로워져 정규직 근로자의 비율이 줄어들고 비정규직 근로자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정부의 기업정책 변화
경기 부양을 위해 건설 지원과 카드 사용 대금의 연말정산 환급 등의 소비 촉진 정책을 실시하여 경기 부양에 성공하고 2001년 8월 23일, 한국은행의 차입금으로, 한국은 IMF의 구제금융의 관리체제에서 일찍 벗어났다. 하지만 이 소비 촉진 정책은 카드빚에 의한 신용불량자 수를 증가시켰고 이는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이어진 내수부진의 원인이 되었다. 일부 대기업들의 시장 독점 때문이라는 분석에 따라 공정거래위원회와 금융감독위원회가 출범하는 등 재벌 개혁이 시작되었으며, 대신 벤처기업과 중소기업 육성정책을 시작하여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많은 벤처기업들이 전성기를 누렸다.
국민의식 변화
전국민이 금모으기 운동
과거의 무사안일주의가 타파
시대적으로 희망의 갈망이 넘쳐 있던 시기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8/18/2008081800051.html
http://n.ccdailynews.com/sub_read.html?uid=267223§ion=sc9
http://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20726141526§ion=02
http://hypervandervilt.tistory.com/197?top3
http://k.daum.net/qna/view.html?qid=4QUKT
http://k.daum.net/qna/view.html?qid=4QUKT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ong8706&logNo=40168427594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ong8706&logNo=40168427594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652853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onggum1013&logNo=143291552
http://k.daum.net/qna/view.html?qid=2dqFG
http://k.daum.net/qna/view.html?qid=4t8jf
http://blog.daum.net/jsj4791/962064
1997년 IMF 구제금융 요청 당시 대한민국의 외채를 갚기 위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이 소유하던 금을 나라에 기부했던 운동이다. 그 당시 대한민국은 외환 부채가 약 304억 달러에 이르렀다. 전국 누계 약 350만 명이 참여한 이 운동으로 약 227톤의 금이 모였다. 역사적으로는, 국채보상운동 일제시대에 조선 정부가 진 빚을 금모으기 운동으로 갚은 사례이다. 금모으기 운동은 성공했다.
http://legacy.h21.hani.co.kr/h21/data/L980511/1p5s5b01.html
IMF 구제금융 요청 사태가 발생한 이듬해인 1998년 등장한 대한민국 국민들이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자고 만든 운동으로 '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고'의 준말이다. 우리나라가 IMF때 돈이 없으니까 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고, 해서 우리가 돈을 아끼는 것이다.
김대중 (金大中, 약칭 DJ, 1924년 ~ 2009년 8월 18일)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1998년부터 2003년까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을 지냈으며 2000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다. 김대중은 추운 겨울에도 온갖 풍상을 참고 이겨내는 야생화 "인동초"(忍冬草)에 비유되며 그렇게 불렸다. 연설에 능하였으며 대한민국 국회에서 가장 오래 연설한 기록으로 기네스 증서를 받았다.
김종필 (金鍾泌, 약칭 JP, 1926년 1월 7일 ~ )
대한민국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군인 출신 정치인이다. 박정희가 5·16 군사 정변을 일으킬 당시 중령으로 정변에 참여했다. 박정희의 질녀와 결혼했으며 서른 다섯 살에 육군 준장으로 진급 후 예편했다. 이후 9선 국회의원(제6 ~ 10, 13 ~ 16대)과 제11대, 제31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삼김’(三金)이라 불리며 대한민국의 정치를 이끌었으며, 민주공화당(공화당), 신민주공화당, 민주자유당(민자당),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총재·대표를 지냈다.
박태준(朴泰俊, 1927년 ~ 2011년 12월 13일)
대한민국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군인 출신 정치인이다. 박정희가 5·16 군사 정변을 일으킬 당시 중령으로 정변에 참여했다. 박정희의 질녀와 결혼했으며 서른 다섯 살에 육군 준장으로 진급 후 예편했다. 이후 9선 국회의원(제6 ~ 10, 13 ~ 16대)과 제11대, 제31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삼김’(三金)이라 불리며 대한민국의 정치를 이끌었으며, 민주공화당(공화당), 신민주공화당, 민주자유당(민자당),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총재·대표를 지냈다.
대한민국의 법관 출신 법조인, 교육인, 정치인, 법학자이다. 황해도 서흥군에서 태어났고, 부친과 선대의 고향인 본적지는 충청남도 예산이다. 1960년 서울지방법원의 법관으로 임용되어 1993년 대한민국 대법원 대법관으로 퇴직하였다. 법관 초기 조용수 오판 사건의 판사 가운데 한명으로 참여하였으나,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에서는 정권의 요청을 거절하는 등 기피인물로 선정되어 1986년 4월 대법관직에서 퇴임하였다. 군사정권의 청탁과 압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껏 판결을 내려 '대쪽', '대쪽판사'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1988년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 복귀하였으나 노태우 정부의 선거개입과 부정선거를 질타하고 법관직을 사퇴하였다. 1993년 2월 25일부터 1993년 12월 16일까지 제15대 감사원장, 1993년 12월 17일부터 1994년 4월 21일까지 제26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한나라당 소속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2번 출마하여 2번 낙선하였고, 2007년 11월 7일에 한나라당을 탈당한 후 무소속 후보로 제17대 대선에 출마 의사를 발표하며 정계에 복귀하였다. 2008년 보수정당인 자유선진당을 창당하여 당 총재를 역임했다.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판사 출신으로, 1988년 13대 총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 공천을 받아 경기도 안양시에서 국회의원에 당선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1990년 3당 합당한 민주자유당에 합류해 1993년 김영삼 정부의 첫 노동부 장관(최연소), 1995년 민선 1기 경기도지사를 지냈다. 1997년 신한국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회창 후보에게 패한 뒤 탈당해 국민신당을 창당해 대선에 출마했다.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새정치국민회의로 당적을 변경했다. 새천년민주당에서 2002년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해 노무현 후보에게 패하자 다시 탈당했다. 대전·충청지역 기반의 자유민주연합과 국민중심당을 거친 뒤, 2007년 대선에서 새천년민주당으로 돌아와 경선에 출마해 3번째 대선에 출마했다. 그는 2008년 민주당과 대통합민주신당이 합당한 통합민주당에 합류하나 공천에서 탈락하자 다시 탈당해 무소속으로 18대 총선에서 당선됐다. 2011년 자유선진당에 입당하여, 2012년 19대 총선에서 6선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당 대표로 선출되면서 자유선진당을 선진통일당으로 개명했다. 2012년 10월 25일 선진통일당이 새누리당과 합당을 선언하면서 신한국당을 탈당한지 15년만에 자신의 정치적 고향에 돌아왔다.
대한민국의 경제 관료이다. 서울대학교 법학과 출신으로 이명박 정부의 초대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재직했다. 현재 산은금융그룹 회장 겸 산업은행 행장으로 재임중이다.
대한민국의 경제학자·교수·정치인·외교관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처조카 사위이기도 하다. 2001년 제56차 유엔 총회에서 의장을 맡았고, 2008년에 대한민국의 국무총리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노무현(盧武鉉, 1946년 ~ 2009년 5월 23일)
김영삼 (金泳三, 약칭 YS, 1927년 12월 20일 ~ )
1.
김영삼 사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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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대중 생가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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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대중 평화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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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구, 삼청동
교육행정연수원
(현, 지방행정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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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으로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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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울교육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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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경제 관련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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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cultureSpice/LhPO/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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