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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역사탐방 31탄 , 문화양념통 첫 단추가 어색한 개혁 어리버리 문민정부 (1993년)

草霧 2012. 11. 10. 13:19

 

 

 

 

근현대사 역사탐방 31

 

 

문화양념통 

 

 

 

첫 단추가 어색한 개혁

 

 

 

 

 

어리버리   문민정부 (1993)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288 박정희 사망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91 1212사태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294 3·15 부정선거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296 419혁명~516 쿠테타 1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297 419혁명~516 쿠테타 2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298 419혁명~516 쿠테타 3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299 419혁명~516 쿠테타 4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00 419혁명~516 쿠테타 5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309 진보당 창당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04 10월 유신 1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05 10월 유신 2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081212사태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13517쿠데타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64전두환 백담사 운둔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52언론통폐합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19629선언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89 초원복집사건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23 3당합당

 

 

5공화국 (1980~ 1888)

4·13호헌조치 [四一三護憲措置] (1987)

6월민주화운동 [六月民主化運動] (1887)

6·29 선언 (1987)

6공화국 (노태우정부, 1988~ 1993)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1988)

5.18청문회 (1989)

·노 두 전직 대통령 법적 심판 (1995)

5.18 특별법 제정 (1995)

3당합당 (1990)

민주자유당(1990)

초원복집 사건 (1992)

 

6공화국(第六共和國, 1988~ 현재)

 

대한민국에서 1987년의 6월 항쟁의 결과로 19871029일 대통령 직선제를 핵심으로 한 개정된 민주적인 헌법에 의해 성립되어 현재까지 헌법 개정없이 지속되고 있는 공화국이다. 노태우 정부 이어서 문민정부의 김영삼은 비리 일신 정책과 지방 자치제를 펼쳤으나, 대북관계 냉각과 IMF 사태를 맞게 되었다. 그 후, 국민의 정부(김대중), 참여정부(노무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다.

 

 

6공화국, 노태우 정부 (1988~ 1993)

문민정부, 김영삼 정부 (1993~ 1998)

국민의 정부, 김대중 정부 (1998~ 2003)

참여정부, 노무현 정부 (2003~ 2008)

실용정부 또는 MB정부, 이명박 정부 (2008~ 2013)

 

대한민국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19923)

 

 

 

http://info.nec.go.kr/main/showDocument.xhtml?electionId=0000000000&topMenuId=BI&secondMenuId=BIGI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 (199212)

 

 

 

김영삼·김대중이 여야의 위치에서 경쟁하였다. 특히 1960년대 이후 여권의 축을 이루던 군 출신 후보가 사라지고 순수 민간인 후보끼리 벌인 대결이었다. 특히 제14대 대선은 여당과 제3야당이 통합한 새로운 여당과 제1 야당과의 대결이었다. 13대 총선 결과 국회는 ‘134당 체제 속에 여소야대상황에서 여당과 제2 야당의 김영삼을 대표하는 통일민주당과 제3 야당의 김종필을 대표하는 신민주공화당이 집권 민주정의당과 통합하여 민주자유당을 탄생한다. 그 밖에 정주영은 여당과 야당의 낙천자들을 대상으로 영입해 국민당을 만들어 14대 총선에서 31석을 획득, 3당으로 부상했다.

 

지역대결의 구도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13대 대통령 선거가 ‘13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 4분할된 구도였다면, 14대 대선은 크게 영남과 호남의 대결구도였다. 김영삼 후보는 부산·경남에서 대구·경북으로 연고범위가 넓어졌다. 김대중은 연고지역은 그대로이지만 야당세력을 넘겨 받는 입장이 되었다. 한편 정주영은 이 틈바구니에서 자신의 연고지인 강원도를 집중공략하여 새로운 지역주의를 개척하면서 무주공산의 충청도를 파고들었다.

 

 

 

선거는 한국 정치사에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데 김영삼의 당선으로 이른바 3김 가운데 1김은 대통령으로 공식적인 현역정치를 마감한다. 다른 두 김은 선거 후 다른 길을 들어섰다. 김대중은 이후에 야당 총재로 복귀하지만 정계은퇴 발표로 다시 국민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김종필은 김영삼 정부의 2인자 역할을 수행하다 출당되었고 이후 자력으로 자유민주연합을 결성하여 충청도를 발판으로 다시 3김에 진입하였다. 한편 김영삼은 김종필의 출당 이후 민주자유당을 자신의 체제로 재편한 뒤 신한국당으로 개명하였다.

 

민자당 대통령 경선 김영삼과 이종찬

민주당 대통령경선 김대중과 이기택

통일국민당 정주영

박찬종

백기완

김옥선

 

문민정부(1993~ 1998)

 

 

김영삼 정부(金泳三 政府, 1993~ 1998)는 대한민국의 제6공화국의 두 번째 정부이다. 문민정부(文民政府)는 김영삼 정부의 별칭이다. 1993225일 문민정부는 김영삼의 대통령 취임과 함께 출범했다. 민간인의 최초의 정부라는 의미로 문민정부로 불리게 되었다. 3당 합당의 결과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김영삼 대통령은 집권 초기 개혁과 공직자들의 재산 등록과 금융 실명제 등을 법제화하여 부패 일신 정책을 펼쳤고, 지방 자치제를 전면적 실시하였다.

 

 

1994년 남북 정상 회담을 위한 예비 접촉과 김일성의 사망으로 남북 정상 회담이 무산되고, 김일성 조문 문제(일명 "조문파동")로 남북 관계는 다시 냉각되었다. 임기 말, 아들 김현철 비리IMF 구제 금융 사건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결과,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이던 신한국당(현 새누리당)은 대선에서 패배하여 정권 교체가 되었다. 정부 5년간 대규모 인명 사고가 빈번해 정부의 위기관리 시스템에 대한 의구심도 일어났다.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물질적 보상을 일본측에 요구하지 않을 방침이다.

"일본측에서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며 물질적 보상문제는 필요하지 않다'

 

 

문민정부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

5.1812.12 군사반란 및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처벌문제에 대해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

 

1993

역사바로세우기 관련 특별담화 발표와 개혁과 부패 일신 "개혁의 칼

 

 

하나회 해산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명령" 을 통해, 금융실명제 도입

공직자윤리법 도입 "역사를 바꾸는 명예혁명"와 공직자 재산공개

육군 상록수 부대 (1993~2003)를 소말리아 평화유지군(PKO) 파견

전교조의 활동을 허용과 사면복직

“5·16 군사 정변은 쿠테타라는 발언와 교과서 수정

취임 직후부터 김영삼은 정통성확립에 중점을 기울였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임시정부에 있음을 명시하였고, 19938월부터 중화인민공화국에 있는 임정 요인들의 유해를 환국하는 사업을 지시, 추진했다. 85일 국립묘지에 임정요인 묘소를 신설하게 했고, 1993년 말부터는 문화관광부와 국립중앙박물관에 조선총독부 철거 지시를 내렸다.

지존파 사건

전남 목포 아시아나 항공 733편 추락사고

전북 부안군 서해페리호 침몰사고

구포역 무궁화호 열차 전복사건

청주시 우암상가 아파트 붕괴사건

북한이 핵 확산 금지 조약 탈퇴 선언

 

 

 

1994

김문수"혁명의 시대는 갔다", 이재오, 안상수 등 민주자유당에 입당

홍준표·오세훈 등용

박노해·김남주 등 석방

3대 정치개혁 법안(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정치자금법 개정안, 지방자치법 개정안)에 서명

정치개혁법을 공포

지방자치제에 관한 법률에 서명하여 1995년 지방선거가 실시

 

 

김일성 사망

성수대교 붕괴사건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사고

 

 

 

1995

5.17 쿠데타에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면서 `공소권 없음' 결정으로 외면

·노 두 전직 대통령 법적심판 (1995)

서석재가 비자금과 가명계좌를 보유 의혹 제기

통합민주당의 박계동 의원의 폭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비리 사건

19951212일 헌법재판소는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 가능하다'는 결정

5.18 민주화운동의 명예 회복을 위해 5.18 특별법을 제정

12, 12.12 5.18 사건 재수사와 19961월 전두환과 노태우등 관련자 구속

대구 상인동 지하철1호선 가스폭발사고

서울 서초구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여수시 시프린스호 침몰 사고

19958, 교육부는 국민학교을 초등학교로 변경

역사 바로세우기 차원에서 일제의 쇠말뚝 뽑기운동

8, 조선총독부 철거 실시(~199611월 완전 철거)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3/1755264_6127.htm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83005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899036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003688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6&aid=0000303304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046185

 

1996

민주자유당을 신한국당개명

연세대 한총련사태 (19968)

안기부법과 노동법 날치기통과

9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

김채곤(로버트 김) 사건

한총련 연세대 사태

명동성당 최초 경찰투입

199612OECD (경제 협력 개발 기구) 가입

 

 

 

1997

노동법파동와 노동법 개정반대 총파업

한보부도사태

한보철강 부도로 도산과 한보회장 정태수 구속

한보사태 수사 중 김영삼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가 한보비리에 연루 의혹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이 뇌물수수 및 권력남용 혐의로 체포

김영삼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

125일 대한민국이 외환위기와 국제통화기금에 자금지원 신청

신한국당(한나라당)은 대선 패배와 정권교체

12,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는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당선 저지하기 위해 정치 공작 자행하였는데, 1998년 조사에 따르면 권영해가 주도와 자해하는 소동, 19983월 취임한 이종찬 안기부장은 안기부에 대한 사정 작업과 정치 중립화 작업을 진행, 1999년 국가 정보원으로 명칭 변경하였다.

1218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

 

 

1220, 전두환과 노태우는 사면 복권과 종결

황장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노동당서기 대한민국 망명

KAL기 괌 추락참사

1121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요청

한보사태

의정부 법조비리사건(1997)

 

 

http://archives.kdemo.or.kr/PhotoView?pPhotoId=00755122

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tag/%EB%AC%B8%EB%AF%BC%EC%A0%95%EB%B6%80

http://contents.archives.go.kr/next/content/listSubjectDescription.do?id=002920

 

남북 관계 남북한통일방안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여파를 북한 지역에 확산시켜 개혁·개방화 체제로 유도 '공조·공영

'대북한 우위를 견지하는 흡수통일

1차 북핵 위기(1994)

1993년 북한이 핵확산방지조약(NPT) 탈퇴

미국이 핵시설에 대한 공습을 계획과 공습 반대 입장으로 저지

대북 특사 지미 카터와 김일성이 핵동결에 합의와 북미대화 재개

1993년 남북정상회담 준비와 무산

19947월에 김일성 사망

19956월 식량 지원(15만톤 규모)

1996년 여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에 의한 원자로 건설사업 추진

1996918, 북한 무장 간첩단이 강원도 강릉 침투 사건

19972, 황장엽 북한노동당 총비서 망명,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 살해 사건

 

 

 

한미 관계

빌 클린턴 대통령이 김영삼을 "자유민주주의의 투사

북한과 미국이 남한을 배제와 직접 핵 협상

대북 포용정책의 클린턴 행정부와 김영삼 정부의 대북 강경론이 충돌

19941021일 남한을 제외한 북·미 간에 제네바 합의(1994)

북한이 합의를 위반하지 않으면 경수로 사업을 끝까지 보장한다

1994년 미국의 영변 폭격 계획과 제네바 합의 체결로 한미간 갈등

199610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광수 생포)

김채곤(로버트 김) 사건 (1996)

이 때문에 임기 말 외환위기 때 미국의 신속한 도움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http://news.naver.com/main/hotissue/read.nhn?mid=hot&sid1=100&gid=523808&cid=307136&iid=10953208&oid=052&aid=0000373123&ptype=011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09,1,list1,18.html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3/09/25/200309250500041/200309250500041_1.html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3/04/28/200304280500001/200304280500001_1.htm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5&aid=000022394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5&aid=0000224483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31009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0706689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2537519

 

 

대한민국의 대형사고 목록

 

 

한미관계 갈등역사

 

 

1995년 에토 다카미는 "일본은 식민지 시절에도 한국에 좋은 일을 많이 했다

1996하시모토 류타로 "독도는 일본영토

1997IMF사태가 터지자 한국은 일본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19939월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과 한-불 정상 회담

외규장각 도서를 한국에 반환 합의와 휘경원원소도감의궤1

외규장각 도서 환수 문제 (1993)

프랑스의 고속철도 핵심기술 이전 및 개발

 

 

http://ko.wikipedia.org/wiki/%EC%99%B8%EA%B7%9C%EC%9E%A5%EA%B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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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91500329106005&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3-09-15&officeId=00032&pageNo=6&printNo=14864&publishType=00010

http://www2.mhj21.com/sub_read.html?uid=25631§ion=section2

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315975

http://www2.mhj21.com/sub_read.html?uid=23452§ion=section2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3132389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79&aid=000213352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11151521201&code=910302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5010512

http://news.naver.com/main/hotissue/read.nhn?mid=hot&sid1=103&cid=462374&iid=18337088&oid=001&aid=0005145492&ptype=011

 

 

세계화

'신경제 100일 계획경기 활성화에 역점을 둔 신경제 계획은 금리 인하, 재정 조기 집행, 기업 투자 유인

신경제 5개년계획로 중소기업에 대한 일방적인 경쟁체제 도입으로 양극화 현상이 발생

1993812금융실명제(金融實名制)’

1993111일 금리의 제2단계 자유화 조치

199312 우루과이 라운드 협정 타결

시장개방정책 강화

19951세계화추진위원회출범

1996912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대한민국의 IMF 구제금융 요청 (1997)

 

IMF의 지원조건은 저성장과 고실업이었고 이를 시행하라며 한국정부를 압박했다. IMF협약을 반드시 준수하라고 한국정부를 협박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국제통화기금에서 요구하는 조건들을 수행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회사들의 부도 및 경영 위기를 초래 하였고 대량 해고와 장기적인 경기 악화로 인해 온 국민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여당이던 신한국당은 대선에서 패배하여 정권교체가 된다.

 

 

19971월부터 한보 철강 부도 사태 발생

19977, 기아자동차 부도위기

10월 아시아의 연쇄적인 금융위기로 종합주가지수는 500포인트 밑으로 추락

11월 달러당 1000원선을 훨씬 뛰어넘어 거래 중단 사태

1119, 강경식 경제부총리를 경질하고 임창열을 임명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환율 제한폭을 사실상 철폐와 IMF구제금융에 대한 가능성은 사실상 부인

1120, 달러 100원 이상 폭등 사태

1121,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와 임창열 총리와 스탠리피셔 IMF부총재

정부는 IMF200억 달러의 차관 요청

1129, 종합주가지수는 400포인트 이하로 추락

1130, 정부는 IMF와 협상

123, IMF를 받아들였다.

125일 국제통화기금에 자금지원을 신청

1211, 1700원대까지 폭등

1212, 증권업계 4위인 동서증권이 부도처리

1223, 환율은 2000원대까지 폭등과 외채 16백억달러

   

 

http://ko.wikipedia.org/wiki/2007%EB%85%84_%EC%84%9C%ED%95%B4%EC%95%88_%EC%9B%90%EC%9C%A0_%EC%9C%A0%EC%B6%9C_%EC%82%AC%EA%B3%A0

http://www.kfem.or.kr/kbbs/bbs/board.php?bo_table=envinfo&wr_id=4631

http://glaw.scourt.go.kr/jbsonw/jbsonc08r01.do?docID=35128147ECD8C0FCE0438C013982C0FC&courtName=&caseNum=961231&page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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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5100033/2005/04/005100033200504282252282.html

http://contents.archives.go.kr/next/content/listSubjectDescription.do;jsessionid=kMzKJ2vQpvpyHGtvkYyrVNJPy3Hyp1bSHSygYL7T2pTm2KvT2hmY!-369304174?id=001925&pageFl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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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북핵 위기(1994)

 

북한은 영변 원자로에서 나온 폐연료봉을 한 차례만 재처리해 핵무기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을 80g 추출했다고 국제 사회에 신고했었다. 그러나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사찰 과정에서 채취한 영변 흙을 분석한 결과, 세 차례에 걸친 재처리로 킬로그램 단위의 플루토늄을 확보한 사실을 적발했다.

 

 

 

1993312팀 스피리트 훈련IAEA의 특별사찰 강행을 구실로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한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 "범세계적인 핵비확산체제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며 남북기본합의서, 비핵화공동선언 및 부속합의서 등 모든 남북합의사항의 신뢰성을 상실시키는 중대한 행위로 간주한다" 1994년 미국의 빌 클린턴 행정부는 5월 영변핵시설의 공습을 검토했으며 이를 위해 모의 컴퓨터 실험까지 했었다. 그리고, 미국은 한국내 자국민 소환 계획 소문이 퍼지면서 한국에서는 전쟁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잠시 쌀·라면 사재기가 벌어지기도 했다. 김영삼 정부도 공습에 대한 강경한 반대입장을 펴서 이를 저지하였다. 대신 대북 압력용으로 미군 1만명을 한국 증파키로 한다.

 

614, 북은 IAEA를 탈퇴하여 한반도는 전쟁 직전의 상황에 갔었고 미국의 전 대통령 지미 카터가 특사 자격으로 615일부터 618일까지 사태의 해결을 위해 평양 방문과 김일성과 담판을 벌였다. 이후, 대화로 전환된다. 616일과 17, 1,2차 연쇄회담으로 미국은 대북제재를 중단하였다. 또한, 핵동결에 합의했음을 증파 계획은 취소되었고 한반도 전쟁위기를 모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네바 합의(199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국이 19941021일에 한 외교적 합의이다. 이 합의는 2003년 전격적으로 파기되었다. '북한과 미국간에 핵무기 개발에 관한 특별계약', 영어 정식 명칭은 'Agreed Framework betwee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이다. 북한의 핵개발 포기, 북미수교, 북한에 대한 에너지 공급을 주 내용으로 한다.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면서 북미간 군사적 충돌 위기가 고조되었다. 지미 카터 미국 전대통령이 개인자격으로 방북해 북미간 제네바기본합의서가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제네바합의이후 NPT에 복귀하고 핵시설을 동결하였으며 대신 미국으로부터 매년 중유 50t을 공급받았다. 또한 한··일이 참여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설립해 경수로 원자로를 짓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2002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원심분리 방식의 핵무기 개발사실을 시인하면서 2차 핵위기가 발생해 경수로건설은 중단되고 미국의 중유지원도 중단되었다. 이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NPT를 탈퇴하고 핵시설을 가동하기 시작해 제네바합의는 파기되었다.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 (1996)

 

1996년 강릉시에 북한 특수부대가 상어급 잠수함로 침투한 사건이다. 이들은 한국군에 의해서 생포 내지 사살로 소탕되었지만, 북한 민중들의 식량난 해소를 위한 식량지원으로 화해분위기가 조성되던 남북한관계가 외교관계가 침체되었다.

 

 

침투, 그리고 탐지

무장공비 소탕작전

이광수(1965~) 생포

 

김채곤(로버트 김) 사건 (1996)

 

김채곤(金采坤, 영어명 로버트 김(Robert C. Kim), 1940121, 전남 여수 ~ 현재 )은 미국의 전직 해군정보국 직원이다. 미 해군정보국 컴퓨터분석관으로 근무하던 중 1996년 주미 한국 대사관 무관인 백동일 대령에게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 관련 군사 기밀을 유출한 혐의로 구속돼 미 연방교도소에 9년간 수감 생활을 하였다. 1995, 미 해군은 C4I 관련장비를 한국에 팔기 위해 노력중이었다. 로버트김은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 해군 무관 백동일(전 해군대령)를 만나 이 시스템이 한국 실정에 잘 맞지 않으니 심사숙고할 것을 조언했다. 로버트 김은 그 이후에도 백동일에게 계속해서 총 39건의 정보를 우편으로 보냈다.

 

 

19969FBI에 스파이 혐의로 체포, 백동일은 강제 추방되었다.

19977월 연방법원에서 간첩음모죄9년형 징역

2005103일부로 보호관찰 종료

"나는 스파이가 아니었다"

"조국의 통일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겠다는 생각에 아무런 대가없이 백 대령에게 정보를 전달했을 뿐

 

외규장각 도서 환수 문제 (1993)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1993TGV의 대한민국 고속철도 수주를 위해 방한하면서, 휘경원원소도감의궤1권을 반환하며 프랑스 외규장각 도서의 전체 반환을 약속했지만, 양국이 합의점을 찾지 못했었다. 대한민국 정부와 민간 단체에서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프랑스 정부에 계속해서 외규장각 도서의 환수를 요구해왔으며, 대한민국의 시민단체인 문화연대 주도로,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여 패소하기도 하였다. 이후 201011, 대한민국의 서울에서 열린 서울 G20 정상회담에서 프랑스와의 정상 회담 이후 외규장각을 5년마다 갱신 대여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또한 프랑스 르 몽드는 대한민국이 이전까지 영구 대여를 요구했으나, 이명박 대통령이 제한된 기간만 갱신 대여하는 쪽으로 양보했다고 보도하기도 하였다. 2011414, 1차분으로 75권이 환수되었으나, 대한민국 정부의 환수 정책에 대해 비판이 일기도 하였다. 20115월 환수가 완료되어, 7월부터 그 중 일부를 국립중앙박물관을 통해 공개하였다.

 

199312우루과이 라운드협정 타결

 

이전까지 세계 무역 질서를 이끌어 온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체제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이 체제를 다자간 무역기구로 발전시키려는 국가간 협상이다. 19869월 우루과이의 푼타 델 에스테에서 협상이 시작되었으며(그러한 연유로 이름이 우루과이 라운드이다), 몬트리올, 제네바, 브뤼셀, 워싱턴, 도쿄에서의 협상에 이어, 마침내 19944월 모로코의 마라케시에서 세계무역기구 설립, 정부조달협정 등을 포함한 마라케시 합의문을 채택하기에 이른다.

 

 

협상으로 수입이 제한되고 있는 품목 대부분이 199771일로 자유화하기로 합의되었다. 유제품 등 일부품목 (보리 ··옥수수 등)을 제외 또한 국내 농업에 대한 보조를 허용 대상 보조와 감축 대상 보조로 나누어 금지하고 있다. 제조업의 경우 우루과이 라운드의 혜택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한국이 제조업 제품의 수출확대를 통한 경제발전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무역저해요인의 철폐는 일단 제조업 제품 수출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전반적인 관세 인하는 물론, 기술 장벽, 반덤핑, 선적 전 검사, 원산지 규정, 수입 허가 절차, 긴급 수입 제한 등 무역규범과 관련된 협상 결과도 전반적으로 수출산업에 긍정적인 효과를 끼치게 되었다. 바로 이 점이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이 한국경제에 긍정적이라고 평가되는 일반적 근거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산업은 보조금과 수입규제에 대한 정부의 정책이 사라짐으로써, 수출도 하지 못하는 형편에 외국 산업의 상품이 수입됨에 따라 경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공직자 재산공개(1992)

 

헌정사상 유례없는 공직자재산공개는 실명제실시와 함께 문민정부 개혁원년을 대표하는 사건이었다. 재산공개는 부패척결과 공직기강확립을 통한 문민정부의 집권기반을 구축한다는 측면에서 국민들의 절대적인 공감속에 이루어졌다.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은 227일 공개하고 고위공직자들도 자진해서 재산을 공개토록 촉구했다. 이에따라 3월중 국무위원들과 청와대수석비서진, 민자당의원 및 차관급공직자들이 재산을 공개한데 이어 4월초 민주당 등 야당의원들도 이에 참여, 정국은 일거에 재산공개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이어 520일 공직자윤리법이 개정발효됨에 따라 3급이상 공직자들이 재산을 등록했다. 특히 1차로 이루어진 고위공직자자진공계과정에서 특히 정치권은 박준규 국회의장과 김재순 전국회의장등 입법부수장출신 2명을 포함, 유학성, 김문기, 이원조 의원 등 민자당의원 5명이 의원직을 사퇴하는 등 수난을 겪었다. 또 임춘원, 정동호의원이 도덕성에 치명타를 맞고 민자당을 탈당했다.

 

공직자윤리법에 따라 이루어진 9월의 의무공개에서는 김덕주 대법원장이 석연치않은 축재과정에 대한 의혹을 받아 법복을 벗는 등 전 공직사회에 걸쳐 파문을 몰고 왔다. 정치권에서도 민자당의 박규식, 이학원 의원이 축재의혹 및 도덕성시비에 휘말려 당지도부로부터 탈당을 강요받고 민자당을 떠났다. 또 박종철 검찰총장, 김유후 서울고검장등 검찰수뇌부와 사법부고위인사, 김효은 경찰청장등 상당수공직자가 물러났다.

 

이처럼 공직자재산공개는 공직사회의 부패구조를 척결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크게 부각시켰고 공직자의 도덕성과 몸가짐이 어떠해야 하느냐를 웅변으로 보여주면서 공직자는 물론 국민들의 공직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하는 계기가 되었다. 문민정부가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하고 있는 깨끗한 정치실현을 위한 기반을 구축하는데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금융실명제(1993)

 

금융 기관에서 금융 거래를 할 때에 가명 혹은 무기명에 의한 거래를 금지하고 실명임을 확인한 후에만 금융거래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제도이다. 1960년대부터 저축의 장려를 위해 예금주의 비밀보장, 가명, 차명 혹은 무기명에 의한 금융 거래를 허용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자 각종 금융 비리 사건과 부정부패사건의 해결을 위해 금융 실명제를 도입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특히 1982년 이철희·장영자 사건, 19827월 금융실명제실시를 발표와 유명무실한 법이 되어버렸다. 1988년부터 금융실명제준비단을 설치하여 연구한다.

 

 

긴급 재정 경제 명령 제 16

1993812, 당시 대통령 김영삼은 대통령긴급명령인 긴급 재정 경제 명령 제 16호를 발동하여 당일 오후 8시를 기해 금융실명제 및 비밀보장을 위한 법률을 전격적으로 실시하였다. 이 명령은 대한민국 헌법 73조에 제1항에 의거하여 내릴 수 있다. 1993819일 국회는 본회의를 개최하여 대통령이 승인을 요청한 긴급 재정 경제 명령안을 통과시켰다.

 

각종 범죄의 온상이 되는 지하경제를 부추기고 투기성 자금, 부정 부패자금 등의 활동 통로가 되어 실물경제의 발달을 저해하나,이러한 자금의 흐름을 막고, 추적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종합소득세제의 실시를 가능하게되어, 국가 재정 확보가 쉬워진다. 궁극적으로는 과세의 불공평성을 없애 빈부의 격차를 줄이고, 건전한 경제 활동을 보장하여 사회적 안정을 이룰 수 있다.

 

유연한 통화 공급으로 우려되었던 유동성 과다 현상은 발생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가명, 무기명 자산들이 실명화되어 지하경제의 규모를 억제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또한 정경유착등 각종 부정 부패 사건의 자금 추적에 큰 도움이 되었다. 금융 실명제의 후속조치로서 금융소득종합과세 부과가 실시되었다.

 

생산성 저하

주가 폭락

자본의 해외 유출

부동산 가격 급등

사금융 시장 위축

중소기업의 부도 증가

 

전교조 복직 (1993)

 

전국교직원노동조합(全國敎職員勞動組合, 약칭 전교조)1989528일 창립된 유치, 초등, 중등 교원을 구성원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노동조합이다. 1987년 출범한 전국교사협의회를 모체로 오종렬, 윤영규, 이부영, 이수호 등의 주도로 창립되었다. 창립 당시 불법단체임을 선언 뒤, 교육공무원과 사립교원의 노동조합 결성을 불법으로 보고 가입 조합원을 해직하였다. 그러나 1993년 많은 수의 해직 교사들이 복직되었고, 199916일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합법화되었다.

 

 

교사 노조 결성 움직임

교육민주화운동

교원의 노동권

참교육 실천 사업

단체교섭

참교육상

연대

2002NEIS 반대 운동

2009년 압수수색 논란와 시국선언

2010년 명단 공개 논란

일부 교사 민주노동당 가입 논란

학교폭력, 성폭력 학생을 학생부 기재 반대

스스로 친북임을 인정한 위원장의 교육감 선거 출마

정부와의 갈등

 

김일성 사망 (1994)

 

 

미국은 북미 협상을 진행하던 로버트 갈루치를 제네바의 북한 대표부에 보내 조문했다.

김일성 사망 이후 전군 비상경계령, 공식 조문 거부로 관계악화

국내의 김일성 참배여론을 원천봉쇄

김일성 빈소 조문 사건 (전남대학교)

 

지방자치제 (1995)

 

자치 단체는 행정 조직에서 지방 분권적 조직에 속한다. 국가의 행정은 국가 기관 그 자체에 의하여 처리되는 것도 있고 독립된 지방 자치 단체를 만들어 지방 자치 단체로 하여금 그것을 처리하게 하는 것도 있다. 따라서 국가 기관 그 자체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행정을 관치행정’(官治行政)이라 하고, 지방 자치 단체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행정을 지방 자치라고 한다. 헌법 제8장에서 지방 자치를 보장하고 있고, 이를 위해 지방 자치법을 제정하였다. 헌법 제117, 118조으로 보장, 유권자는 용지상 기표할 곳이 모두 6곳에 이른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지방 자치 단체에 대한 국가적 감독·통제로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지방 자치의 제도적 보장

정치적 의미의 자치와 법률적 의미의 자치

광역지방자치단체장(특별시장, 광역시장, 도지사)

광역지방자치단체의원(광역시의회의원, 도의회의원)

기초지방자치단체장 (,,구 청장)

기초지방자치단체의원 (,,구 의원)

1949년 지방 자치법 제정

1952년 최초의 지방의회 구성

19601961년 지방 자치법을 개정

1961년 지방의회를 해산와 지방 자치법의 효력 정지 (임시조치법)

1972년 유신헌법은 유명무실

1980년 헌법 개정과 순차적 실시 (유예규정)

1987년 헌법개정과 유예 규정 철폐

1988년 지방 자치법 전면 개정

1991년 상반기에 지방의회 구성

1992630일까지로 법정화와 무기한 연기

1994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의 제정

1995627일에 실시

1998년 임기 만료

 

대한민국 제1회 지방 선거 (19956)

 

 

김현철 비리(1997)

 

 

1997년 상반기 청문회와 비리정국을 몰고 오며 국정공백 상태까지 야기했던 김현철(金賢哲)씨 비리사건은 1997321일 공식 수사착수, 97517일 구속수감에 이어 9765일 검찰의 기소로 일단락됐다. 현철씨의 구속수감과 기소는 역사적사법적정치사회적 측면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현직 대통령의 아들이 처음으로 비리사건에 연루돼 사법처리됐다는 점 자체가 우리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다.

 

현철(賢哲)씨 사건의 전과정을 통해 법조계는 현직 대통령의 아들이 저지른 권력형 비리를 대통령이 재임하던 기간중 법의 심판대에 세웠다는 점에서 사법권 및 국가형벌권 행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사법사적 의의를 갖는다고 평가했으며 이로 인해 개혁을 기치로 내걸었던 문민정부의 도덕성에는 치명적 상처를 남겼다.

 

특히 56공의 만연한 정경유착 비리로 두 전직대통령에게 실형이 내려진 상황에서 현직 대통령 아들의 사법처리가 이뤄짐으로써 사실상 문민정권에 대한 전 국민적 심핀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평가됐다. 대통령의 총애와 신임을 배경삼아 권력실세로 행세하며 혹은 측근들까지 권력주변에 기생하게 하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각종 이권개입으로 국정을 농단한 권력형 비리의 전형으로 요약될 수 있다.

 

특히 기업체로부터 받은 거액의 비자금이 계기가 돼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처벌한 문민정권하에서 대통령 직계가족이 은밀하게 120억원대의 엄청난 비자금을 운용했다는 비도덕성을 극명하게 드러냈으며 현철(賢哲)씨의 자금 관리방식도 2-3명의 측근들을 이용한 용의주도함에다 금융실명제하의 전형적인 검은 돈관리수법인가차명계좌 분산 은닉, 헌수표 유통, 자금추적 회피목적의 돈세탁 등 치밀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더구나 19938월 금융실명제가 전격 실시될 것임을 사전 인지 의혹 제기, 1993년 중반부터 1995년말까지 문민정권 출범전후 비리 관련자를 엄단하던 시기와 맞물려 있는 점에서 아이러니를 던져주기도 했다. 수사팀의 자세가 검찰권 독립차원에서 상당한 평가를 받긴 했지만 검찰 내부적으로나 법조계에서는 표적여론수사라고 자인하는 소리가 나왔고 악화된 국민감정에 밀려 검찰이 털어내기식으로 수사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당시에 국민적 성원과 수사팀의 확고한 의지가 없었다면 사법처리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란 사후의 평가도 나오고 있다.

 

특히 974월 청문회 직후 안기부장과 현씨측과의 극비회동을 통한 수사대책 논의, 집요한 맞불작전속에서도 검찰이 수사의 강도를 늦추지 않은 것은 검찰권 독립이나 형벌권 확립 등 여러 측면에서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검찰이 별다른 수사의지를 보이지 않았고 대선자금 잔여금에 대한 의혹이 증폭되는데도 수사본류가 아니라며 본격조사를 기피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수사의 단서였던 한보 특혜대출과의 연결고리가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순전히 개인비리 구속하는 것 자체가 여론수사의 전형을 보여주는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법조계에서는 검찰의 소임이 범죄가 될 만한 것은 모조리 수사해 소추한다는 점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중시, 국가형벌권 확립차원에서 사법처리는 당연하긴 하지만 상당한 성과라는 평가를 주축을 이뤘다.

 

김영삼 (金泳三, 약칭 YS, 19271220~ )

 

 

 

대한민국의 정치가·서예가·종교인으로 제14대 대통령을 지낸 정치인이다. 195426세에 3대 국회 민의원에 당선되어 대한민국 역사상 최연소 국회의원이라는 기록을 가지게 되었다. 9선 국회의원을 지내며 유신정권의 야당 지도자로서 민주당 원내총무, 민정당 대변인, 신민당 원내총무·당수로 활동하며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박정희정권 시절 김영삼 초산 테러 사건 등의 탄압을 받았다. 197910월에는 YH 무역 여공 농성 사건 이후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에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충격을 주기도 했다. 유신정권은 이 발언을 문제삼아 김영삼 의원제명 파동을 일으켜 부마항쟁을 촉발했다. 1983년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일을 기해 23일간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6월 항쟁 이후에는 통일민주당 총재로 민주화추진협의회을 구성해 민주진영을 구축했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서 타협없는 투쟁으로 인망을 얻었으나 19903당 합당에 참여하여 재야 인사들의 비판을 받았다. 1993, 대한민국의 문민정부 제14대 대통령(19932~ 19982)에 취임하여 32년만의 민간인 정권을 수립하였다.

 

 

예술인과 작가들의 반정부와 사회비판을 전면 허용하였고, 군사 독재 정권에 의해 수감된 박노해, 김남주 등의 시인들을 석방하였으며, 군부 정권에 의해 기소된 마광수 등의 예술인들을 석방하여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재임 기간 중 금융실명제 도입, 차명 부정 계좌 단속 및 처벌,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통 명문화 등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 등 비롯해 조선총독부 철거를 추진하였고, 신군부, 하나회와 관련단체 해체, 대한민국 국군 내 사조직을 해산하고 정치군인들을 처벌했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수사와 처벌, 군사반란과 5.17 쿠데타 및 518 민주화운동 진압의 책임을 물어 군사 정권 관계자들을 사법처리하였다. 임기말 IMF 구제금융 요청으로 비판을 받았다.

 

 

유신 시대 당시 그는 "민주 제단에 피를 뿌리고, 아무리 닭의 목을 비틀지라도 새벽이 온다는 사실은 자명합니다."라고 발언하였다. 이 발언이 유행하여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이 회자화 되었다. 그는 25세의 나이에 국회의원에 당선된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고 일생을 민주화운동의 헌신한 인물로 유신정권에 의해 국회의원직을 제명당한 최의 국회의원이었으며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명언을 남겼다. 그의 의원직 제명과 신민당총재직 가처분 조치는 부마민주항쟁을 일으킨 기폭제로 작용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흉탄에 서거하는 유신의 종막을 고하게 한 인물이다. 일생을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최고 지도자였고 거목이다.

 

 

그는 박정희, 전두환 집권기에 강경파 노선을 걷기도 했다. 1962년 윤보선 정권 퇴진 이후 31년 만의 민간인 대통령으로 문민정권을 수립했다는 점과 민주적 선거를 통해 정권교체를 이룩했고 군사정권을 종식시켰다는 것에 의의를 둔다. 5·16 군사 정변 이후 32년만의 문민정부였다. 집권기간 중 1994년에는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등 정치군인 집단을 숙청, 제거하였다. 또한 당내 군사정권 세력을 정리하기도 했다. 1994년부터는 박노해, 김남주 등 군사 정권에서 구속, 투옥된 인사들을 석방하고, 마광수 등의 활동 제한을 해제하여 대대적으로 환영을 받기도 했다.

 

김영삼은 문민정부의 성격을 "1993년 광주민중항쟁을 계승한 정부"로 규정하고 광주민주화운동 등을 민주화 운동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하였으며 신군부 세력에게는 광주항쟁 유혈진압의 죄도 함께 물었다는 점이 있다. 또 집권 초 검은돈 거래를 차단하기 위해 1993812일 모든 금융은 실명으로 거래하는 금융실명제를 도입하여 거래의 투명성을 가져왔다는 점도 높이 평가된다. 1995년부터는 일제 침략의 상징인 옛 조선총독부 청사를 폭파 철거하고 독도접안시설을 건설하였으며 일본의 역사 왜곡에 당당히 대항 못된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겠다고 호언하는 등 일본의 야욕에 당당한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국민학교 -> 초등학교 개칭 및 역사바로세우기 작업으로 쇠말뚝뽑기로 민족의 기틀을 세웠다. 1980년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국제연감 1979년의 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다.

 

 

3당 합당을 통한 정권 획득에 대한 비판과 재임기간 IMF 구제금융사건으로 인한 경제위기를 일으킨 점은 부정적으로 평가된다. 재임 말년에 발생한 차남 김현철 등과 홍인길 등 측근들이 연루되 권력형 비리사건, IMF 구제금융사건 초래 등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경수로 건설비용 46억달러 가운데 70%에 해당하는 36억달러를 부담했다. 비용만 부담한 들러리라는 비난을 받았다. 군사정권 관계자 처벌과 관련, 지나치게 여론재판에 의존함으로써 기득권 내부의 저항을 야기시켰고, 형평성을 잃는다. 한편 군사정권 출신과 보수 세력은 그가 좌파의 숙주가 되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989월에 체결한 신한일어업협정에서 독도를 중간수역으로 내준 것에 대한 비판이 있다. 일본측이 일방적으로 어업협정을 파기하게 만든것도 독도영유권 훼손이라고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안기부 내에 도청을 전담하는 조직을 운영한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2004년에 드러난 강삼재, 김기섭 등이 안기부 자금을 횡령해 95년 지방선거와 96년 총선에 전용했다는 안풍 사건에 대해, 대법원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불법 정치자금일 가능성이 크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김영삼의 정치적 노선이 계승된 정당으로는 민주당 구파통일민주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이 있다. 그의 정치적 노선의 뿌리로는 자유당과 민주당 구파를 거쳐 한국민주당에 정치적 기반을 둔다. 이후 구파 내부의 다른 경쟁자인 이철승과 신파의 새로운 주자로 떠오른 김대중 등과 정치적 경쟁관계에 놓이기도 하였다. 이후 김영삼은 901월에 3당합당으로 노태우, 김종필과 함께 민자당을 창당하였다. 진보 진영에서는 김영삼의 3당 합당을 군사정권과의 추악한 야합이라며 비판했다. 국회의 정쟁과 파쟁을 김영삼, 김대중의 대리전 내지는 유산으로 보는 비판도 있다.

 

 

6.25 전쟁과 국회부의장 비서관

3선개헌 반대와 자유당 탈당

야당 정치인 생활

2공화국 시절 야당 대변인

3공화국의 야당지도자

40대 기수론

김영삼 초산테러 사건

신민당 당권 경쟁

진산파동

대권 경쟁과 백의종군

유신 기간중 야당지도자

김옥선 제명파동 당시

신민당 총재 복귀와 탄압

김영삼 의원제명 파동 사태

유신체제 붕괴 전후 민주당 구파 지도자

5공 초기 가택연금

민주산악회

5공화국 기간 중 야당 지도자

김영삼 단식농성 사건

민주화추진협의회 조직

통일민주당 창당

후보단일화 결렬과 대선 낙선

6공화국 기간 중 야당 지도자

19903당 합당

민주자유당 대표

내각제 개헌안 반대

14대 대통령 당선

숨겨둔 딸 공개 사건

김영삼 정부

군사 정책과 정치군인 숙정

취임과 사정 작업

지방자치제 확대 시행

군정 부정과 정통성 확립

조선총독부 해체

남북정상회담과 김일성 사망

상도동 자택에 김영삼 민주센터가 건립

인재 발굴

1968년 서석재, 1970년 김덕룡, 1971년 김동영, 최형우 '좌동영 우형우', 1986년 노무현, 1993년 이재오, 김문수, 제정구, 손학규, 김무성, 홍사덕 등을 영입하였다.

대도무문(大道無門)

여성 편력 의혹

사생아 의혹

지역감정 조장

현대그룹 표적수사 의혹

92년 대선자금과 노태우의 3천억 의혹

 

 

김대중 (金大中, 약칭 DJ, 1924년 ~ 2009년 8월 18일)

김종필 (金鍾泌, 약칭 JP, 1926년 1월 7일 ~ )

정주영 (鄭周永, 1915년 11월 ~2001년 3월 21일)

노무현(盧武鉉, 1946년 ~ 2009년 5월 23일)

김현철 (金賢哲, 1959년 3월 8일 ~ )

 

 

 

 

1.

 

김영삼 대통령

사저

 

 

 

 

 

헌정기념관

청와대

김영삼민주센터

 

 

2.

 

김영삼 대통령

기록 전시관

 

 

 

김영삼 생가 기념관

 

3.

 

김대중 대통령

평화센터

 

 

 

 

 

김대중 도서관

김대중 생가 기념관

5·18사적지 순례

국립518민주묘지

국립 서울현충원

한국프레스센터

 

4.

 

봉하마을

 

 

 

 

서울 역사박물관

마석모란공원 묘지

노무현 전대통령묘역

문화양념통

 

 

 

5.

 

경복궁

 

 

 

천안 독립기념관 조선총독부철거부재전시공원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프랑스 대사관

미국대사관

일본대사관